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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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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admin | 목, 2021/08/19- 22:50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 면해”… 아버지 최영섭은 “강제로 빼앗겨 알거지”

▲ 국민의힘 대권 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여옥사 8호실을 둘러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처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오마이뉴스>가 공개를 요구한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1987년작)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개한 건 원문 내용이 아니라 표지뿐이었다.

김종혁 본부장은 “유교집안에서 자란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사상적 편력을 말하면서 동시에 일제시대 자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이 있다”면서 “왜 나(최병규)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 갖게 됐는가. 최승현(최재형 증조부)이 장독대에 숨겨놓은 대한신문, 독립신문을 어떻게 읽게 됐는가. 왜 내가 동맹휴학을 하게 됐는가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라고 책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최재형 캠프는 <사려와 조화>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문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표지만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최재형 후보 일가를 향한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마이뉴스>가 조부 회고록의 공개를 요구한 핵심 이유는 최재형 증조부와 조부의 친일 행적을 밝혀보자는 게 아니다. 1938년 이후의 만주 행적을 조부 최병규가 어떻게 기록해놨는지 직접 확인해 이를 독립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가로 부를 수 있는지 검증해보자는 취지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는 최병규가 만주로 이주한 뒤의 행적에 대해선 이번에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후보 캠프는 현재 ‘최재형 후보가 직접 조부를 독립유공자라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가 운영하는 유튜브에 ‘최병규는 독립운동가’로 설명하는 영상이 링크돼 있었다는 점(17일 현재 해당 영상은 최재형TV 채널에 보이지 않는다),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이 최병규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면서 지지 입장을 밝혔다는 점 등은 여전히 유권자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은 여전히 필요하다.

[검증대상 ①]
최재형 캠프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당하지 않았다”
최재형 아버지 “전답·임야를 공산당에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

▲ 최재형 대선예비후보 캠프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이 지난 13일 최재형 캠프 사무실에서 “최재형 예비후보 일가 친일 주장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최재형 캠프 제공

김종혁 본부장은 13일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 최승현과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 이력과 월남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주계급이었음에도 (북한 공산당에게) 그동안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토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체포를 하려고 하니까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강원도 평강으로 돌아온 과정과 해방 이후 월남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해명이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180도 다른 설명이 담겼다.

필자(최영섭)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임야가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땀 흘려 모은 부동산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임야를 포함해서 약 200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낙엽송 약 40만 주를 심어 놓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손손 땀 흘려 일군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재형 캠프는 ‘북한 공산당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토지몰수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최재형 후보의 부친은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고 기록했다.

최재형 캠프가 만주로 함께 이주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설명한 증조부 최승현은 만주 여행 사실은 있을지언정 만주로 함께 이주한 사실은 없다. 만주로 이주한 이는 1938년에 만주로 먼저 간 조부 최병규와 1940년 뒤따라 만주로 간 최병규의 부인 그리고 최영섭·최응섭·최호섭 삼형제 등이다. 이들이 평강으로 돌아온 시점은 1944년 12월이었다.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최영섭의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설명이 다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는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되기 8개월 전에 왜 먼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그 이유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최병규가 반탁운동을 벌이다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 역시 부친 최영섭의 기록으로 반박 가능하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의 월남은 1947년 2월 일이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졌던 때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였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이 북한에서 은밀하게 반탁활동을 지속하다가 발각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인 최영섭의 회고록엔 그와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 이유도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행패와 압력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북한에 계속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병규 독립유공자 표창’ 등 <바다를 품은 백두산> 속 최영섭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쓰여진 점을 고려했을 때, 최영섭의 증언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병규 회고록엔 왜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 전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반탁운동으로 인한 체포 위협 때문에 월남했는지’ 기술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해명을 후보자 캠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증대상 ②] 딱 최병규만 꼬집어 주거제한형?… 강경애-서정주 사례는 달랐다

▲ 왼쪽부터 소설가 강경애, 시인 서정주. ⓒ 위키공용/김종훈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1926년 춘천고보 순종 서거 상장달기 운동’과 ‘자격미달 교무주임 배척 맹휴 조직으로 인한 퇴학’에 대한 최재형 캠프의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활동이)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라고 밝혀 <오마이뉴스>의 보도와 궤를 함께했다. 이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역언론에서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라는 주장(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런 해명을 내놨다.

최병규는 퇴학당한 후 고향에서 3년 동안 일본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총을 들고 만주에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독립운동이다 아니다를 평가하나.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3년 주거제한형이나 금족령은 일본 당국이나 일본경찰이 취한 판결이나 조치일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난 6일 “고문하라는 법이 없으니 고문이 자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요주의 인물에 대한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맞다. 고문하라는 법이 없어도 고문을 했던 게 사실이고,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도 있었다.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영섭 대령이 쓴 ‘3년 거주제한’이나 ‘금족령’이란 표현은 매우 그럴듯 하지만 실제 일제의 사찰·감시 양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독립유공으로 표창받은 일이 없음에도 표창 날짜까지 박아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기술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미심쩍은 대목이다.

일제는 1920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마리아와 1927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박헌영 같은 요주의 인물을 사찰하거나 감시하긴 했지만, 구속 경력이 없는 인사에 대해 3년이라는 기간을 미리 정해 행동반경을 고향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감시나 사찰은 없었다.

훗날 <인간문제> <소금> 등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물로 평가되는 강경애는 1923년 학교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무려 한 달 간 맹휴를 조직하다 학교 당국에 의해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럼에도 이후 서울 동덕여학교로 편입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시인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서울 중앙고보에서 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것은 물론 구속까지 됐음에도, 1931년 전북 고창고보에 편입해 등교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유독 최병규에게만 일본당국이 3년간의 주거제한형이나 연금령 조치를 내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최영섭 회고록에 등장하는 조치는 일본당국이 내린 조치라기보다 증조부 최승현이 조부 최병규에 내린 ‘근신조치’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지적을 했다.

최재형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 여부와 전혀 관계 없는 지역언론 보도를 독립운동 이력의 근거로 제시한 것도 모자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무슨 자격으로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도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역사연구기관·역사학자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관·집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증대상 ③] 만주에서의 활동은?… “윽박이냐” 반문 말고는 정확한 설명이 없다

▲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 매일신보

최재형 캠프는 13일 기자회견에서 조부 최병규의 1938년 이후 만주에서의 행적에 대해선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 <만선일보> 기사를 찾아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최병규 만주 행적 추가공개를 ‘의미 없는 내용’이라고 반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최재형 후보의 조부가 해림가에서 조선인 거류민 대표자격으로 부촌장 맡은 건 친일파라서가 아니고 평균적으로 볼 때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어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면 만주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 부촌장 등은 모두 친일파인가. 그렇게 몰아가도 되나.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밝혀야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오마이뉴스>의 지적에 대해선 “일제에 저항해 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자랑스러워 한 누군가에게 독립운동 한 증거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1926년의 맹휴에 대해 백번 양보해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병규가 ‘독립운동가’로 불리기 위한 독립운동의 전문성·지속성이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1938년 이후 만주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된다면, 심지어 1930년대의 국방헌금이나 면협의원 재임, 도회의원 출마 등의 친일 의혹마저 독립운동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최병규에겐 숨기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게 된다. ‘국방헌금 강요 등 일제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아름다운 스토리(미담)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양념을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재형 캠프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대상황과 다른 기록을 남겼다는 점도 새삼 주목된다. 최영섭은 “만주 목단강에 위치한 해림에는 조선 땅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은 이미 일제가 군대를 동원해 장악한 지 오래여서 어린 최영섭의 눈에도 쉽게 보일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비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이곳은 독립운동가들로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거나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밀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지역이었다.

조부 최병규가 회고록 <사려와 조화>에서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그곳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해놨을지에 대한 확인 없이 검증을 멈출 순 없는 노릇이다.

김학규 기자

<2021-08-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검증]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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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입장문] 국민의 힘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조부의 일제강점기 행적 논란에 대해

☞한겨레: 친일이냐 항일이냐…최재형 조상의 100년 전까지 검증한 이유

☞국민뉴스: ‘애국가를 4절까지 천만번 부른들’..격노한 독립유공자 후손들 ‘애국자 가문 사칭 최재형 강력 규탄’

☞뉴스파고: 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설은 ‘설’일 뿐…오히려 부일협력의 혐의 짙어

☞JTBC: [단독]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증조부 조선총독부 표창 받았다”

☞머니투데이: 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가문, 독립운동가 아닌 부역자”

☞헤럴드경제: ‘조상 독립운동했다’던 최재형 후보, 친일파 가문 논란 ‘일파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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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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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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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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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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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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