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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구적 재앙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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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구적 재앙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admin | 목, 2021/08/19- 19:20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 농업생산성 저하 및 미래의 전염병과 같은 잠재적인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황이 느리게 악화된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위협에 함께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CAMBRIDGE – 자신의 애상적(경고적) 회고록인 ‘어제의 세계’에서 나치로부터 망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심각한 변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관찰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오랫동안 서서히 악화되면서 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에 쉽게 반응하지 않습니다만, 곧바로 재앙이 닥치면 행동하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시대에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에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천천히 끓는 개구리처럼 우리 대부분이 변화를 점진적으로 인식하면서, 시급하게 조정되고 결정적인 조치를 충분하게 취하기 어렵게 합니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는 전제에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재앙들을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은 한 가지 분명한 유형의 재앙입니다. 이것들은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면적을 확대하고, 결국 거주가 가능한 지역의 인구밀도를 높여갈 것이며 이를 피하기 위한 대규모 인구이동을 방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 대부분은 기후피해자들이 일단 자신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문명권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작은 투발루 섬이 종종 최초의 희생지역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최근 기상이변으로 플로리다 , 중국 황하계곡 의 도시, 시애틀 및 뉴델리와 같이 전세계적으로 문화의 중심지에 가까운 지역에서 홍수를 일으키거나 인간이 살기에 너무 뜨거워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각국정부와 국제기구는 수백만 명의 미래기후난민의 전망에 대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유엔에 따르면 2019년 말 전세계적으로 7,950만 명의 실향이주민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기후조건으로 인한 역사상 가장 많은 이주민의 수치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규모 강제이주가 일어난 이후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치입니다. 계속되는 지구온난화는 상기의 수치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생물다양성의 손실 및 토양황폐화 와 결합된 기후이변이 농업생산성의 하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가 79억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한 녹색혁명 의 많은 이점을 감퇴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농지개혁, 식단변경,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포괄하는 작물의 유전자변형을 넘어 새로운 녹색혁명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집약적이고 산업화된 농업관행을 신속하고 대규모로 바꾸지 못하면 농작물의 실패와 굶주림이 증가할 것입니다. 영국과 같은 순수 식품 수입국의 경우, 전후에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풍요로움이 과거의 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슈퍼마켓 진열대가 여전히 가득 차 있을 때, 사람들은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거대한 침입과 관련된 또다른 유형의 재난은 동물숙주에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인수공통 전염병의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최근 COVID-19 대유행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심각하게 알렸습니다. 에볼라, SARS 및 MERS는 사전적인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보건건강의 위기가 자주 반복될 것입니다. 전염병이 제대로 통제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인류역사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유사하게, 항균제 내성의 확산은 일부 오래된 감염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훨씬 더 치명적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과연 인류는 지난 18개월 동안 우리 모두가 경험한 것과 같은 또다른 격변에 대비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종류의 사건은 민주주의든 권위주의적 정권이든 기존 정치시스템에 엄청난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오늘날, 팡글로스주의적(지극히 낙관적인) 관찰자만이 20세기후반을 특징짓는 자유민주주의 경향으로의 손쉬운 복귀를 예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더욱 많은 비상사태에 대처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하여 서구사회를 더욱 권위주의적(국가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협력적 다자주의에서 지정학적 충돌로 후퇴가 가속화되면서 글로벌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이러한 우울한 생각은 단순히 여름휴가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언급한 작가 츠바이크의 경고를 염두에 두고 ‘만약에’ 를 고려하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 입니다. 지금 당장 사소한 행동이 아닌 거대한 변화의 행동이 필요한 때라면?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9월의 유엔 식품시스템 정상회담과 11월 글래스고의 유엔기후회의(COP26)는 점진적 개혁에서 상당한 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분명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인 재앙을 모두 피하려면 시스템의 변경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잠재적 재앙들은 명백한 이유로 ” 사악한(심각한) 문제 “로 알려진 것 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황이 느리게 악화된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위협에 함께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도전과제의 대응은 실제로 리더십의 주요사항입니다. 글로벌 정치지도자들은 모두의 공통 이익을 위해 이러한 사악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학과 연구기관은 협소함과 지신들만의 점진적 발견을 보상하는 학문적 사일로와 경력구조를 해체해야 합니다. 기후과학자는 자신의 작업을 정치학자의 작업과 통합해야 하며, 전염병학자는 경제학자와 동일한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재앙의 위험을 제대로 분석하면 지금 바로 행동해야 할 소명을 느낄 것입니다.

 

출처 : Project Syndicate on 2021-08-05 .

DIANE COYLE

캠브리지 대학교의 공공정책 분야 교수이며 최근에 출간된 ‘Markets, State, and People: Economics for Public Policy’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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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국인들이 지난 세기 동안 중국공산당 CPC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고, 7월1일 목요일을 가하여 새로이 영광스러운 백년의 세기를 기대하면서, 공산당의 본래 임무에 대한 성찰까지도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로 변하여 중국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적 열망에 충실하고 우리의 사명을 굳건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는 글귀는 1921년 당의 여정으로 시작된 상하이의 CPC 제1차 전국대표대회 현장 및 전국의 모든 박물관과 유적지, 중앙과 지방정부의 축하모임 연회장소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디에서나 방문객이 줄을 서서 열광하며 제창하는 숭고한 격언입니다.

상기의 격언은 아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1) 왜 중국인들은 출발부터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었을까?

2) 공산당은 어떻게 역사의 온갖 시험을 이겨내고 중화민족을 위대한 부흥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시진핑(習近平) 중앙당 총서기는 2017년 19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보고서를 발표할 때, 상기의 격언을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중국공산당 본래의 열망과 사명은 중국인민의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민에 기반한 정당성 

중국이나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서사는 통상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를 통치하는 당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제기해 왔습니다. 서방식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서구의’민주주의’ 기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고 따라서 중국의 정치체제가 국민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서양식 1인1표 선거와 다당제도 없이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중국은 오래 전에 거의 모든 종류의 서구 정치체제를 연구하고 시도했습니다. 청나라 말기(1644-1911), 외세와 식민주의의 침략에 맞서 끝없는 국내혼란과 굴욕적인 실패로부터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 엘리트와 혁명의 선구자들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아나키즘, 파시즘을 포함한 많은 서구 정치사상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이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에 도입되었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인 Zhang Weiwei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외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며 “입헌군주제에서 다당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이들 중 어느 것도 중국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고 혼란을 끝내는 데 효과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 중 어느 것도 대다수 중국인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결국 최종선택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을 당시는 겨우 50명 내외의 당원과 대의원 1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즉, 중국적 특성과 융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는 한가지 매우 독특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인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오 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1세대 지도부의 창의적인 탐색과 혁신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주도세력에 농민을 포함시켰습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약 80-90%가 농민이었습니다. 또한 불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도시화는 도시지역에서도 엄청난 수의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기근에 더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혁명이론에 대한 마오의 혁신적인 공헌은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맑스주의를 현지화하거나 “중국화”한 것이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련이 지지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의 정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정통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도시노동계급이 주도해야만 합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CPC는 마오 쩌둥의 지도력을 승인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중국화하기로 결정했고, CPC의 용감한 시도는 결국 당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던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대변하는 대표자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역사상 농민 봉기세력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 아니었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해외교육의 배경을 가진, 상하이와 베이징을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역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국방대학 Jin Yinan 교수는 최근 연설에서 “CPC는 가장 발전된 도시에서 가장 진보된 사고를 견지하였으며, 가장 발전된 지역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선진사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전사들을 무장시키면서, 중국역사의 농민봉기와 같은 개별집단의 이기적인 이익보다,는 중국인민 모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현대적인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자력갱생의 역량

혁명시대뿐만 아니라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시대에도 중국공산당의 자력갱생 역량으로 여러 면에서 동유럽국가들의 공산당과 다른 경로를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CPC는 격랑의 역사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후 산업과 경제의 세계화라는 기회를 포착했으며,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자기혁신(교정)의 실현을 통하여, 대다수의 인민이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중화민족의 위대한 잠재력을 활성화했습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CPC는 중화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이며, 이것이 바로 1949년 이전에 중국을 통치하고 태생적으로 자본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 봉건주의자들의 중국인민에 대한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관료의 이익에만 봉사했던 이전의 정치집단과 분명하게 다른 이유입니다.

“중국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구호 – 이것이 당 본연의 염원이며 국내외에 산적한 적들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투쟁에서 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구자들이 견지해온 신앙의 힘입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에서 유래하고 인민과 공생하는 인민의 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CPC의 특성입니다. Zhang 교수는 CPC가 서구 정당과 완전히 다르며, 이들은 단지 국가내부의 일부집단 또는 특정계급, 민족단위 또는 부문의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취약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회를 마비시키고 양극화시키는 반면에 CPC는 중국의 모든 인민들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이런 특징이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억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1인1표로 선출된 1인1표 정부와 다당제, 이른바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서방은 왜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을까요? 왜 많은 서구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출한 정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온라인에서 반지성적 음모론을 퍼트리고 있을까요?

중국공산당은 초기부터 경제성장보다 인민의 생명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중국이 팬데믹에서 다른 국가보다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중국인들 모두가 정부를 신뢰하고 과학적 지침과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공산당의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사명

국가는 주어진 의무를 완수하려는 열망을 입증해야 합니다.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달하지 못하면 원래의 포부와 약속은 무의미한 슬로건에 불과합니다.

사회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서 선택하였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결국 자국의 국민에 의해 버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단계에 따라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완고하게 인쇄된 책의 교조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과거에 혁명을 이끈 올바른 이론을 버리고 현명하지 못한 서구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CPC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상기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혹은 실수를 범하였어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 동안 CPC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동맹을 격퇴하고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침략의 위험”을 해결했습니다. 중국이 서구의 따돌림과 굴욕을 효과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독립자치국가가 된 것은 청나라 말기 이후 처음입니다. 세계 최강국이 쏘아 올린 미사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침략이라도 자기 영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CPC는 새로운 임무가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2세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핵심인 덩 샤오핑은 ‘현명하지 못한’ 일방적 서구화를 추진하지 않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재차 용감하고 자신있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이론을 혁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CPC는 경제의 세계화를 수용하고 현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화민족과 인민에게 경제적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CPC의 영도 하에 14억 인구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며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수억에 달하는 인민들의 빈곤을 퇴치하였으며 외부의 도발로부터 주권을 수호할 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유일 패권 초강대국의 위협에서 지역의 평화를 효과적으로 수호하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고속철도 네트워크와 가장 발전된 5G 서비스를 구축하고, 우주정거장을 운영 및 건설하고, 화성 탐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CPC는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도 전세계의 많은 저변국가들, 특히 서구중심의 세계화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통해 중국개발의 경험과 이점을 공유하고, COVID-19 대유행 및 지구온난화와 같은 글로벌 과제에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인류의 미래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동아시아의 병자”로 묘사되었던 가난하고 늙고 약한 나라가 불현듯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낙관적인 예측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만에 많은 분야에서 서구와 어깨를 겨누며 일부 분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이룩한 모든 성과를 통하여, 본래의 사명을 지키고 성취하며 염원을 견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제 인민과 함께 가장 근본적이며 미래의 사명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중화민족은 수많은 재앙 및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지만, 중국에는 “고난이 많으면 민족이 부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은 후 민족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희생이 무의미할 것이기에 부흥은 중국인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꿈입니다.

100년 전의 굴욕적인 역사는 중국이 통일, 주권, 영토보전 없이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평화로운 발전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유혈의 고통스런 교훈을 통하여 반복하면서 중국인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전히 ​​중국의 발전권을 빼앗고자 하지만, 100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는 중국이 아니라 서구열강 자신들이 불안을 앉고 있는 형세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고 배우기를 거부한 많은 서방국가들은 국가부흥이 중국에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국인민에게 주권과 국가통합 그리고 영토보전이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正道”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방국가들이 중국인들이 간직한 국가부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대한 국가로서의 중국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중국인을 올바르게 대하고 중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중화민족이 100년 전에 잃었던 지위와 존엄과 영광을 되찾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적 여정을 시작한 핵심의 이유이자 미래여정의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민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반드시 달성할 것입니다.

 

출처 : 환구시보 on 2021-06-30.

Yang Sheng

환구시보의 논설위원

월, 2021/07/0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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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문명을 탐구한 뛰어난 학자인데, 그는 주류 제도들이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지 설명한다.

내 가정은 서구 현대성의 핵심이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다. 처음에 도덕적 질서는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의 정신에 있는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형성하며 사회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능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서구 근대성을 특징짓는 사회적 형식을 발전시켰다. 시장경제, 공공영역, 자율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테일러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명백한 특성을 강조한다. 1)우리는 상호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경제로서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 2)우리는 낯선 사람끼리 상호관심사를 숙고하고 토론하는 은유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우리는 초월적 원리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에 “기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이런 실천과 가치는 현대인에게 너무 자명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그럴까? 현대성의 개념적 토대를 생각해보자. 이른바 현대사상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를 의미와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전환을 감행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단지 기계로, 자연을 정신과 사고의 모험을 위한 배경으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사고하는 존재”와 “확장된 존재”둘로 나눴다.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아”를 생각하는 주체로 특권화하는 개인주의와 쌍을 이뤘다.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지배의 모델로 흘러갔다. 1649년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조건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며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은 “추잡하고 짐승 같고 단순하다”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자연으로 해석됐다. 이런 지배의 태도가 인간 존재와 사고의 전 영역에 만연하면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대국과 소국, 과학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 부자와 빈자의 위계를 가져왔다. 물론 다양한 형식의 협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게 성공을 위한 더 근본적 전략이라는 공생(symbiosis)의 아이디어는 대개 배척당했다.

현대문명에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유사하게 국가는 시민을 위해 배타적으로(“아메리카 퍼스트”) 존재한다.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제2논고에서 국가는 재산권을 가진 (남성)시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국가의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런 현대적 이상의 대변인이 됐다. 밀은 이 전통을 확장시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울 때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의 행동은 살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끼쳐 국가가 규제해야 할 때까지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인 공동체주의는 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마침내 현대성은 스스로의 옹호자가 됐다. 이전 단계의 역사는 모두 “전(前)과학적’이며 과학시대에 비해 열등한 것이 됐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낡은 정치체제와 철학, 사회적· 정치적 조직의 형식들이 대체됐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진보는 현대성의 원리 덕분이며, 사회는 점점 좋아진다는 신념인 사회개량론이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다

당연히 현대문명은 유일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등장은 농업 발전과 연결돼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최초의 문명은 농업이 인간에게 잉여의 음식과 안전을 보장했을 때 등장했다. 식량안전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기본적 생존을 넘어 예술이나 여가 활동 같은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은 인구의 집적, 문어(文語), 기념비적 건축물, 고유한 예술양식, 통치체제, 복잡한 분업, 그리고 사회적 계급으로 특징지어진다. 문명들은 농업과 더불어 등장하며 무역, 전쟁, 탐험 등으로 확대된다. 대부분 문명은 다른 확장되는 문명에 합병되거나 붕괴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사라진다.

과거 문명의 범위는 산과 대양과 원거리로 인해 제한됐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명은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초로 하나의 글로벌 문명 안에서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명들을 갈라놓았던 지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스마트폰, 할리우드 영화, 인터넷은 군대와 전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냄으로써 공유된 가치, 국가 간의 균형(혹은 불균형),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를 창조했다.

현대인과 현대국가는 이전에 없었던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함께 묶여있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술에 매혹됨으로써 소비자들은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욕망과 열망 앞에 도열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은 점점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군대와 예술작품, 문화적 성취도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소비주의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글로벌 시민으로 묶어냈다. 물질적 성취에의 매혹은 거대한 자석이 돼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글로벌 소비자를 “예스맨”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은 전세계의 필수품목 가운데 하나다.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는 유혹적이다. 의약품은 질병을 물리치고 사망률은 떨어졌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소비자들을 위해 준비한 안락과 효율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더 큰 번영과 즐거움으로의 전진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삶은 점점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성공 덕분에 더 많은 부가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계속 개선될 것이다.

이런 현대성의 마술은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해졌다. 전례 없이 에너지가 풍부해졌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엄청난 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구의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인 모두가 이런 문명의 변화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갈망하도록 했다. 인디아의 소농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가졌다. 아주 외딴 마을의 주민도 서구식 티셔츠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지구에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지구가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지구 스스로 현대문명을 끝장낼 것이다. 현대의 막바지인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지난 몇 세기를 돌아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문명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문명에 대한 짧은 학습의 결론은 분명하다. 앞선 모든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끝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 분명하다. 이는 다음의 핵심적 질문을 불러온다. 현대성 뒤에 진정으로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명이 올까? 인간은 현재의 문명이 막다른 지점에 이른 뒤 땅,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급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적 붕괴를 막고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 상호의존성을 배워야 한다

지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생태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봤다. 이제 생태적이라는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의 사실과 더불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자연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지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크다. 따라서 생태계와 관련된 사실은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홈즈 롤스턴에 따르면, “어원상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하며, 이는 똑같이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우리가 사는 세계)란 어원을 가진 ‘보편적(ecumenical)’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생태학은 탹월한 상호의존성의 과학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서 모든 과학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이용해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태과학 역시 다른 과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는 과학적 성공이 생태계에서 유기체로, 유전자로, 다시 생화학, 화학, 마지막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으로 이루어진 환원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일대 삼림과학대학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특정 숲에서 전체 나뭇잎의 표면적을 계산한 뒤 나뭇잎들의 생화학적 처리능력의 총량을 이용해 그 숲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태계 연구는 이런 식으로 환원적이지 않다.

생태계는 부분의 합보다 크고 복잡한 창발적 실재이며, 그런 복잡하고 통합적인 전체의 견지에서 개별적 유기체가 이해돼야 한다. 높은 수준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환원주의적인 설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종의 번성은 다른 종들의 번식률과 영양 수요에 달려있으며, 식물과 동물 간의 균형은 양쪽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매우 큰 유기체와 아주 작은 유기체가 상호의존의 복잡한 춤에 참여한다. 정교하게 조정된 그들의 공생적 관계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협동의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다윈 식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연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들이 경쟁자를 압도하고 더 많은 수의 자손들을 생식가능연령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 간의 협력이 그들의 생존과 생태계, 그리고 생태계를 이룬 다른 유기체들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외향적인 영향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향적으로도 상대를 변형시킨다. 포유류나 썩은 나무의 배출물이 다른 종들의 먹이가 된다. 생태계 내부의 이런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생태문명은 생태과학의 이런 통찰에 따라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것은 경제와 정치, 생산, 소비, 농업 등의 사회 시스템이 지구적 한계 안에서 재설계되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대의 확장, 정복, 소비 정신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계약, 협력, 육성 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살아있는 지구와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한다.

 

생태문명은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문명이 기존 다른 문명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이다. 다른 문명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을 위한 자연의 조작인 것과 달리, 생태문명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의 웰빙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고 공생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는 원초적인 자연의 순수성으로의 회귀와 같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며, 어쨌든 문명의 한 형식이다. 생태문명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끼리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까지 포함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에 그 위험성은 낮았다. 오늘날 지구는 최초로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 다른 문명들이 그랬듯이 이 단일 문명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미국정부는 몇몇 은행이 “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 글로벌 문명이 휘청거릴 경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50번째 혹은 100번째로 다시 한번 문명변화의 율동적인 순환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지금 들린다.

다음문명, 즉 사회조직의 다음 패턴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생태문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유토피아적 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최소 한도로 우리의 현재 문명 뒤에 올 어떤 것을 뜻할 뿐이다. 어쩌면 다른 문명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살거나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문명이 돼야 한다. 즉 현대문명이 지금 초래하는 종류의 파괴적 손상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 만큼 환경과 충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제레미 렌트에 따르면, “생태문명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고기를 덜 먹고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지구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내재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현대성이 (아마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그 계승자가 등장할 때, 과연 어떤 종류의 문명-어떤 종류의 세계관과 생명관–이 부상할 지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과학은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문명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 고통스러운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일으키고, 과소비 및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초래하고, 공공선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구조를 형성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하도록 만든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의 생태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번역: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

미 생태문명연구소 부대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월, 2019/11/1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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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 제기접경지역의 생태계적 상호협력의 역동성

경계라는 말의 사전적 뜻풀이에 따르면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다. 접경지역이란 말 그대로 그 경계와 경계가 접하는 지역이다. 서로 다른 성격(체제와 국가)의 공간이 만나는 지역이다. 이 이질적인 경계 사이에는 통제가 존재하며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넘나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단절적인가 서로 협력적인가는 이 경계를 넘어 어떤 교류가 존재하는가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작용할 경우 접경지역은 경계를 넘어선 역동성으로 상호침투와 융합이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분단으로 민족과 조국이 양분돼 있는 남북의 경계는 분단의 결과이자 분단을 재생산하는 핵심 공간이지만, 그러기에 경계가 만나는 접경지역에서의 상호협력과 소통은 분단을 넘어서는 바로미터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미 접경지역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남북연결 도로와 철도 개설 등으로 평화 정착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었다. 잠시 멈춰섰던 걸음을 이제 다시 내디뎌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공단 금강산 등과 같은 접경지역에서의 협력은 남북당국간 정치적 협상과 회담의 결과이지만 그 과정은 남북 주민이 공동체적 질서를 구축해 삶의 과정에서 마음으로 좀 더 가까워지는 신뢰구축 작업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야 할 것이다.

특히 임동근은 “접경지역을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정치적 역동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각 부문을 연결하는 다기능(multi-function)을 수행하는 행위 주체의 등장과, 이들 간의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만드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개성공단의 경우 남한의 기계와 북한의 노동력이라는 단순한 구도였지, 평양-개성-서울을 오고가는 네트워크의 진화는 고려하지 않았었다”고 비판했다. “에너지, 물자, 사람, 정보 등 생태계를 구성하는 흐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무엇’이 접경지역을 오고가며 기존에 불가능했던 역동성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대상’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1】

 

. 남북 협력과 평화의 시발점으로서의 한강 하구

▣ ‘한강 하구’의 특수성- 경계의 소멸로서의 중립수역

○ 지리적 역사적 그리고 정치 군사적 의미의 한강하구

‘한강하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리적 풍경적인 개념으로 임진강 한강 예성강이 만나는 조강(祖江, 염하를 포함)과 서해가 만나는 수역을 말한다. 그러나 흔히 이 지역을 한강하구로 부르는 것은 꼭 들어맞지가 않는다. 정왕룡 김포시 의원 같은 이들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 맞는 조강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한강하구라는 보통명사적 용어 대신에 조강이라는 원명칭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강 예성강 등이 합쳐졌기에 더 이상 한강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며, 그 범위도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지점부터 서해로 흘러나가는 유도까지, 혹은 넓게 보자면 예성강 부근까지 한강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였다는 것이다.【2】 게다가 남북분단으로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잊혀진 이름이 되었으니 그 명칭의 복원은 분단을 넘어서려는 것이기도 하다. 조강은 글자 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강(祖江)이란 뜻으로, 흔히 총길이 514km에 달하는 한강이 조강에 이르러 그 수명을 다했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한강 하구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정치 군사적인 개념으로 정전협정상에 명시된 지역으로서의 의미다. 여기서 한강하구는 군사적으로 남쪽과 북쪽이 대치하는 적대적인 군사지역 가운데 정전협정 5항에 의해 규정된 수역이 된다. 정전협정은 이 수역을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흘러들어 만나는 수역으로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부터 서해 강화군 서도면 말도까지 67㎞로 구체적으로 명시해두고 있다.

정전 협정상에 규정된 이 ‘한강하구’(Han River Estuary)는 특별하다. 비무장지대(DMZ)의 다른 접경지역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반도 유일의 중립수역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제1조 5항은 다음과 같이 한강하구를 ‘군사분계선이 없는 자유항행 지대’로 규정하고 있다.

“한강하구의 수역으로 한쪽 강안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다른 한쪽 강안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 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행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

이 규정에 따르면 남북한의 민간선박은 한강하구를 자유 항행할 수 있고, 남이든 북이든 출항한 쪽이면 어디든 자유로이 입항할 수 있으며, 이는 정전협정에 규정된 육상의 비무장지대(DMZ)와 달리 한강하구가 중립지대(수역)라는 특수한 지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한강하구는 ‘한반도 남북 접경지대에서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지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위 지도에서 보듯이 많은 지도들과 그래픽이 이곳에도 군사분계선을 그어놓고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강하구 지역은 군사분계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항행을 보장하는 중립수역이다. 그런 점에서 보통 DMZ 바깥쪽에 설정되는 민통선도 한강하구에서는 법적 존재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 유엔사 관할권의 차등적 구조와 한강하구에 대한 법적 통제

정태욱 인하대 교수(법학)는 정전협정을 보면 유엔사의 이른바 군사통제에 근거한 관할권이 적용되는 비무장지대 및 접경지역의 범위는 이처럼 각 지역에서의 ‘군사적 필요’의 정도에 따라 차등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접경지역, 즉 육상의 비무장지대, 한강하구, 서해5도 수역들에 대한 정전협정의 규정과 유엔사의 관할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우선 비무장지대의 경우에는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정전협정 제1조 제1항)하기 위하여 민간인 출입과 왕래 자체를 금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강 수역(한강하구)의 경우에는 ‘쌍방의 민용 선박의 항행에 개방’하고, 다만, 그 ‘항행규칙을 규정하는’ 차원에서만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정전협정 제1조 제5항), 또 서해 5도 수역에서는 바다 자체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관할권을 정하지 않고, 다만, 섬들에 대한 군사통제만을 획정하고(정전협정 제2조 제13항 ㄴ목), 인접 해면을 존중하고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하게(정전협정 제2조 제15항) 하는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관할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다르다. 한강하구도 여전히 군사통제구역으로 존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정태욱 교수는 “군사적 통제구역이 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유엔사 관할권 행사의 결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적인 통제 상태와 법적인 통제구역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강하구가 법적으로 통제구역으로 돼 있는 것은, 정전 협정상의 통제가 아니라 남한의 국내법적 통제인데, ‘군사기지 및 시설 보호법’(군사시설 보호법은 폐지) 상의 민통선, 그리고 해양수산부가 제정한 선박조업 안전규칙 등에 의한 어로한계선이 그것이다. 이는 남한 당국이 육상의 비무장지대와 동일한 원칙을 한강하구에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러한 국내법적 통제는 정전협정이나 유엔사의 관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우리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해제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3】

물론 한강하구가 정전에 관한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한강하구가 정전협정의 적용 대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남북관계에서 한강하구는 무력 충돌의 위험 뿐만 아니라 70년대까지만 해도 적대행위가 빈발했다는 점에서 정전협정에서 한강 하구를 민간에 개방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그 구역에서 유엔사의 관할권 자체를 배제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한강하구가 유엔사의 관할 구역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허가권(관할권 행사)을 비무장지대에서의 그것과 같이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태욱 교수는 이를 “민간의 평화적 이용권을 확인하는 협력적 확인행위”로 표현했다. 유엔사가 부속협의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도 한 한강하구의 항행에 관한 정전협정 상의 민간선박 등록절차 등을 보건데 ‘금지를 해제하는’ 허가가 아니라, 단지 “자유의 행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휴전체제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 주는 절차라고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4】

 

▣ ‘한강 하구’의 미래- 남북협력을 통한 ‘한강의 기적’

○ 한강하구의 특수한 지위와 남북 협력의 가능성

한강하구는 특별한 지위에 있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군사적 통제 아래 있는 육상에서의 비무장지대와 서해(동해) 수역에서의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남북간의 군사적 갈등과 비교해 본다면 접경지역에서의 남북 협력을 추진하는데 가장 적합한 독특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국제법적으로 이러한 한강하구의 특수한 지위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선행적 실험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군사적 대결의 정전협정 체체를 넘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뤄가기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미국(유엔사) 중국 등의 관할에서 남북의 관할과 합의로 바뀌어야 하며, 그런 합의 절차(평화협정 체결)가 요구된다. 예컨대 기존 정전협정상의 군사분계선(MDL)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남북 불가침 경계선’으로, 군사정전위원회는 기본합의서의 ‘남북군사공동위원회’로 바뀌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한반도 평화관리 국제위원회’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정전협정 상의 한강하구는 이미 경계가 없는 중립수역이라는 지위에 있기에 그런 합의 이전에도 현재의 정전협정에 의거해 남북이 공동관리하는 데 합의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정전협정 상의 이러한 특수한 지위는 한강하구 사업이 남북관계의 부침이나 안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중립수역일 뿐만 아니라 북방한계선(NLL) 등 서해 동해에서의 경계 논란과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되고 있는 항행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따라 강의 본래 기능을 되찾는 남북 공유하천으로 만들어간다는 방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해 서해 동해 등의 해역에서는 중립수역임에도 이른바 유엔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정한 북방한계선이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로 남쪽이 북의 남하를 막는 군사적 남방한계선으로 고착화했으며, 이 북방한계선이 정전협정의 어디에도 근거가 없고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이 ‘불법적인 선’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군사적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남쪽이 이 북방한계선을 실효 지배의 경계선으로 고수한다면 노무현 정부에서의 서해평화협력지대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서해 해상에서의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 북이 동의할 수 있는 수역을 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방한계선은 이처럼 서해에서의 평화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딜레마가 되고 있다.

한강하구에서의 협력에 관한한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접경지역 협력에서 남쪽이 중요시한 철도 도로 연결에 대해 북은 상대적으로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륙으로 가는 육로나 철도 연결은 남이 단절돼 있던 것이지 북은 늘 연결돼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임진강 예성강 등을 통한 서해로의 자유로운 진출, 해주 등 서해에서의 항행 자유 등은 북 또한 매우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강하구의 이러한 정전협정 상의 특수한 지위 등 법적 지리적인 여건에 입각해 볼 때 한강하구야 말로 남북간에 가장 유망한 접경지역 협력 지대로 만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한강하구는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인 요충이자 물류의 중심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세력다툼의 전장이었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의 물자를 실어나르는 주요교통로였다. 병인, 신미양요 때는 프랑스, 미국 군함이 오르내렸고 분단이전 까지만 해도 임진강 예성강 한강은 살아 쉼쉬며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주요한 물길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전협정에서 한강하구 중립수역의 자유항행을 보장하고 있고, 한강(임진 예성강)이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요 뱃길의 하나였다는 관점에서 이곳의 포구를 복원해 뱃길을 여는 사업은 본래의 강을 되찾아가는 일이자 분단을 넘어서는 본래 하나였던 삶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으로서 최우선적 과제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5】

 

○ 생물 다양성의 기수역(汽水域)이자 남쪽의 마지막 자연하구

생태 환경적으로 본다면 한강하구는 남쪽에서는 이제 마지막 남은 자연하구다. 특히 바닷물과 강물이 하루에 두번씩 교차하며 뒤섞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이 지역은 기수역(汽水域)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공존하는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습지와 뻘 등이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 경로의 주요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북의 황해 연안 지대와 함께 이곳은 연중 일부를 한반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여타 대양주 아시아 지역에서 보내고 여름 번식기를 위해 시베리아 알래스카로 날아가는 세계적인 철새 이동경로의 하나다.

한강하구에는 예로부터 황복, 웅어, 농어, 새우, 뱀장어, 숭어 등이 풍부했으며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노랑부리 백로 등이 서식한다. 특히 황복과 웅어는 예로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올려 보내는 귀한 물고기였다. 갈대밭에 서식하는 웅어는 환경파괴 등으로 많이 사라져버렸으나, 바다에서 잡히는 일반 복들과 달리, 강에서 잡히는 유일한 민물복어인 황복은 고가의 ‘황금물고기’로 지금도 임진강의 명물이 되고 있다. 특히 장어는 현재 한강하구 어민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 흔히 풍천(風川) 장어라고 하면 풍천이라는 지명의 장어로 혼동하는데 본래 풍천이라고 하는 지역 또는 마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짠물)이 하루에 두번씩 밀물로 들어올 때 바람이 함께 들어와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을 풍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곳(짠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는 곳)에서 생산되는 장어를 바람이 함께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풍천 장어’라고 하는 것이다.

남북이 이 지역의 생태 서식 실태를 파악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환경 생태적인 차원에서도 공동 관리와 보호를 위한 긴밀한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자연적으로 방치된 상태가 아닌 강의 수자원 기능과 수로 항행 기능이 보장되고 인간으로부터 차단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생태적 가치를 유지하도록 관리하고 보호하는 적극적 환경보호와 평화적 이용의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강하구 뱃길 및 주운 활성화, 포구의 복원, 한강과 서해의 연결, 홍수 방지와 같은 핵심적 사업은 생태환경 가치의 보존과 함께 병행될 필요가 있다.

 

○ 다시 시작하는 한반도 평화

한강하구의 평화는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돼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이후에 가능한 사업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상호 호혜와 신뢰의 구축을 통해 협력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업이다. 즉 평화를 유지하고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사업으로서 의미가 있으며. 우선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민간 선박의 자유항행(뱃길 열기)을 그 맨 앞에 두려는 것은 앞서 살펴봤듯이 정전협정에서 이미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강 하구 중립 수역에 대한 뱃길 수로 및 생태 환경 조사는 이 자유 항행을 위한 선결 조건인 셈이다. 아울러 이 생태 환경 수로조사는 자체로 이 지역의 자유항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길을 열어가는 일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인 셈이다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안전 조처 등 항로 개설에 필요한 절차와 관행을 확립해 정전협정이 보장한 민간선박이 오가게 된다면, 문재인 정부가 판문점 정상회담 이래 내건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구호에 걸맞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유엔제재 아래서도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수도권 장기발전 구상과 서해 해상 평화 벨트와의 연계

이러한 한강하구의 복원 및 남북의 평화적 활용은 남북간 긴장 완화 및 접경지역 남북교류협력 활성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남쪽 내부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강하구 주변 지역 사회들의 발전을 이끌어 나가는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북은 북대로 임진강, 예성강, 사천강을 통해 개성 등 황해도 내륙지역의 서해로의 출구를 확보하면서, 서해 NLL을 둘러싼 영해 논란을 우회해서 한강하구를 통한 자유항행으로 서해에서의 통항의 자유를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서해 5도와 인접한 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강령 녹색시범구, 해주항 개발 등 황해도의 개발과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과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기조에서 볼 때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수도권의 과밀과 서울 집중을 완화하는 균형발전의 광역 수도권(메가 폴리스) 전략을 결합시켜 추진하는 비전이 될 수고 있을 것이다.【6】 지난 30년간 시행된 수도권 종합개발계획 및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정책과 규제의 성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대체적인 평가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인구와 산업의 분산이라는 정책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수도권과 지방이 모두 만족하지 못해서 국토 균형발전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남한 유일의 자연하구인 한강의 옛 뱃길을 복원하여 분단된 한강(조강)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길은 넓고 길게 본다면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자, 반쪽이 아닌 남북을 아우르는 온전한 의미에서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1】 임동근 한국 교원대(국토지리학), 접경지역시군구협의회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공동주최, ‘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접경지역 협력’ 1세션(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계를 넘어선 협력의 모색) 토론문. 2018년 6월 27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2】 정왕룡 김포시 의원, 신년특집 김포 통일시대를 꿈꾸다 <김포저널> 2015년 1월8일.

【3】 정태욱 인하대 교수(법학) ‘한강하구에 관한 유엔사의 관할권’, ‘7.27 한강하구 평화 배 띄우기 조직위원회’ 주최의 “한강하구의 평화정착과 생태‧평화적 발전전략” 토론회 발표문 2007년 6월20일.

【4】 한강 하구의 항행규칙은 제8차 정전협정 후속 합의서인 <한강 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1953.10.3.)> 제6항 (민간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사용하여 온 한강 하구 수역 내에 성문화되지 않은 항행규칙과 습관은 정전협정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쌍방 선박이 이를 존중한다)에 규정돼 있다. 이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에서 정했으며, 다른 비무장지대의 경우 민간인의 출입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면, 한강하구는 규정에 근거해 등록된 민간선박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불허할 뿐 원칙적으로 항행을 허용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5】 생태 교란, 선박의 항행의 안전등 논란이 되고 있는 신곡수중보 철거여부 문제도 생태적 관점만이 아니라 닫혀 있는 한강을 열어 온전히 복원하는 자유로운 항행의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처럼 한강 및 수도권과 관련한 많은 사업계획 및 환경 생태관련 사업은 남북의 한강하구 공동관리의 관점에서 재검토되고 그런 방향에서의 장기 전망 아래 추진돼야 할 것임. 일단 당면 과제는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을 통한 한강 뱃길의 복원이라는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음.

【6】 김동성 외(2017). 『한강하구 평화적 활용을 위한 경기도 주요과제 연구』, 경기연구원, p. 174.

 

2020-06-05.

강태호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장, 전 한겨레 평화연구소장

목, 2020/11/1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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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진리라 함은 주체의 인식과 인식 대상이 일치할 때 그 인식 내용을 일컫는다는 근대철학의 진리개념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여 근대철학은 신이 예정해준 진리를 벗어나서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를 인식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만 당시 접근방식의 차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른 대륙의 합리론과 베이커가 이끌은 영국의 경험론으로 나누게 됩니다.

이후 진리의 획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칸트가 나타나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여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진리를 주관화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획득하였다며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이루었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한계를 상호 보완하는 측면에서 종합을 시도하였을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의 인식방법론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진리는 인식론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으로 승격되면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기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근대의 인식론은 더 이상 존립할 토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양자역학을 통하여 인식주체와 무관한 객관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주체와 대상 또한 양자얽힘에 의해 상호 내재적으로 생성관계에 있어 인식주체를 배제한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기술을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과학철학의 발달에 힘입어 실재론이 힘을 잃고 토마스 쿤이 주도하는 비샐재론, 즉 존재에 대한 진리의 기술은 단지 잠정적인 담론에 불과하다는 패러다임이론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절대적인 진리를 인식하거나 또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라는 이론은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관찰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보는데 이 이론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이 정통해석으로 받아들여진 오늘날 대상에 대한 관찰, 즉 인식작용은 단지 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파악이론(특히 개념적)이나 지각이론의 상징적 연관개념을 통해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흡수하여 버리게 되면서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불가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이 또한 그가 아인쉬타인과 교류할 정도로 현대 물리학에 대한 소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진리에 대한 개념을 폐기해야할지 아니면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할 지를 고민할 시점이 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즉, 근대의 진리개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타당한지 아니면 진리마저 폐기해버리면 무정부적인 세기말적 상황에서 인간은 중심가치가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리개념을 새롭게 정리하는게 타당한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근∙현대의 철학적 존재론을 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대 파르메니데스부터 근대 인식론까지 서구를 지배해온 존재론은 실체론인데 그 특징은 모든 존재는 실체(실체의 의미는 플라톤은 제1원인자, 자기원인자인 이데아라고 해석하였으나 근대철학자들은 타자와 내재적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존재)이기때문에 고정불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이러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예를 들면 신의 계시) 존재론은 겨우 유명론 논쟁 외에는 터부시되어왔으며 오로지 주체가 실체인 대상을 있는 실상 그대로 파악하기 위한 인식론만 발달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시조이자 실체론의 파괴를 시도했던 니이체와 하이데거를 거쳐 화이트헤드에 걸쳐 실체론은 폐기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은 반실체론인 생성론(이는 달리 합생이론, 사건론, 관계론, 과정론이라고도 불립니다)이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생성론의 입장에서는 존재라 함은 사건들의 연속적인 인과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상의 사건들의 인과적 흐름을 존재라 부르기에 여느 존대도 다른 존재와 내재적 생성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가 없기에 우주는 하나라고 보게 됩니다.

하여 실체론에 기초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버리고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생성론의 존재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끝없이 상호작용하며 생성해가는 연속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파악은 주체나 객체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주체의 인식이 객체의 생성과정에 내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기에 근대의 실체의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속성 을 파악하려는 진리를 찾아내고자했던 인식론은 이제는 심리학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실상에 대한 앎으로서의 진리는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진리의 개념을 바꾸어 진리를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체론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이나 속성을 알아내는 의미에서의 진리추구는 무의미해졌지만 즉, 성론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절대적 앎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읍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생성의 작용원리와 생성의 목적은 인간사회의 가치규범의 근거로서 반드시 밝혀내야할 과제로 다시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되었기에 이러한 작용인과 목적인을 진리로 삼아 보편적인 지혜, 즉 직관지로 받아들여야만 뭇 존재의 질서와 평화가 가능해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적인에 대해서는 오늘날 천체물리학과 복잡계이론의 성과를 반영하여 우주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자기 조직화를 목적인으로 받아들여 이를 인간사회에 부합되게 새롭게 재해석하여 우주 자체를 인간사회의 질서와 평화와 생명의 창조자로 받아들여야만할 것이며 나아가 작용인에 대해서는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불교사상과 복잡계이론에서 존재의 작용인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가 있는데 예를 들면 생성론의 연기법은 상호생성의 작용인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예시가 된다할 것입니다.

특히, 현대과학은 자연의 존재법칙과 인간사회의 당위규범이 서로 전혀 별개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예를들면 오늘날 인지과학에 의하면 생명의 중요한 요소인 마음을 단지 정보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복잡계이론의 자기조직화 기능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산소원자와 수소원자와 합해서 반드시 물분자만을 만드는 것도 자기 조직화 작용이 있다고 볼 수 있기에 산소와 수소도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사회와 다른 생명체의 집단간에는 변용modification이 필요한 양적인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자기조직화와 창발작용을 하면서 복잡계를 유지하기에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기에 우주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사회규범 간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기에 자연법칙으로부터 인문학적 존재론을 찾아내어 뭇 존재의 작용인과 목적인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여 종교와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21세기의 철학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목, 2019/11/2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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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화석연료 중심의 성장과 소비 경제모델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증가에 대한 반응은 미디어의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보도 차단과 교육과 정책토론에서의 심각성 경시풍조로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사회는 물론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헌신적인 기후 운동가들, 심지어 구속되거나 신체 부상을 입을 각오가 되어 있는 기후환경운동가들조차도 여전히 석탄이나 천연가스로 가열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디젤 동력 화물선과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트럭으로 배달되어 석유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야채를 먹습니다.

시위를 조직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사용되는 컴퓨터와 전화기같은 부품들도 석탄 및 다른 유독물질을 사용하는 인도, 중국, 태국의 공장에서 제작됩니다. 함께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연결시켜주는 인터넷을 작동시키는 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퇴직기금은 화석연료 수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회사의 주식에 묶여 있습니다. (관련성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음)

화석연료산업을 비난하는 시위표지를 작성하기 위해 석탄으로 가동되는 말레이시아 공장의 펜 부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과 석유연료를 사용하는 트럭과 비행기로 운송된 일회용 펠트펜을 사용한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환경시위는 숨겨진 진실에 대해 주목하지만 행진이 끝나면 우리는 화석연료를 피할 수 없는 악몽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육식을 선택 또는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와 성장의 파산 개념과 일치하는 산업경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화석연료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요건이 주어진다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시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화석연료와 전혀 연관되지 않은, 또는 관련한 산업으로 발생한 돈과 관련 없는 경제 체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것부터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것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도덕적 시민들의 시위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추출적이고 약탈적인 경제 질서의 중간에 있는 약간의 환경보호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대안 경제의 문을 열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시위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는 세계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화석연료를 100% 사용하지 않는(FFF) 지역사회 형성이어야만 합니다. 초기단계에서 100명 또는 500명만 지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성단위를 만든다면 대중에게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는 화석연료 사용금지에 기여하고자 하는 투철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언행을 일치 시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단지 슈퍼마켓의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플라스틱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써 말입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단계는 즉시 실행 가능합니다. 냉소적인 정치가들이 20년 30년 걸려 실행할 탄소중립 경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FFF 커뮤니티 창조

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은 초반에 상당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며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제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임계질량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FFF 커뮤니티가 음식, 에너지, 협동조합의 재정, 또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은행들에 대해 100% 독립적일수는 없기에, FFF 커뮤니티는 오늘날의 단체들이 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껏내며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설립 초기 단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는 전 세계의 다른 지역사회에 모델이 될 것이며, 화석연료와 관련된 자금 의존으로 인하여 실행단계에 옮길 수 없었던 저널리즘과 교육시스템을 생산할 것입니다.

소규모 FFF 커뮤니티가 다국적 투자은행 및 석유회사를 인수 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및 정치 플레이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수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화석연료 문제에 맞서는 데 있어 모호하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은 대안이 아닌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화석연료 사용 종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자료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에 제시된 2050년 탄소 중립 경제 창출은 터무니없이 늦은 시기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홍수와 폭풍, 해수면 상승, 사막 확산, 기아, 견딜 수 없는 폭염, 지구에 남아있는 부족한 자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인해 수십억의 인간(및 다른 종)이 죽는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몇 년 또는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주류 미디어는 기후 비상사태에 대한 시위와 정부의 선언문을 다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지붕 위에 태양 전지판이 설치되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식품을 현지에서 유기농으로 생산하고 태양열 및 풍력을 이용하여 모든 건물을 완벽하게 단열시키며, 100 %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중교통의 동력을 공급하게 하는 법률은 (시행은 고사하고)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와 서로를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FFF 제품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약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100% FFF 수송체계가 설립될 때까지). 만약 체포될 위험까지 감수하는 열렬한 환경운동가들이 있다면, 그 중 FFF 공동체에 기꺼이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멤버와 공동체간의 협약은 진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 구성원들과 커뮤니티 간에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효한 계약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FFF 공동체는 애초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피상적인 소비문화, 분열, 단편적 사고와 같은 문화에 일치하여 운영될 수 없습니다.

신규회원은 평생동안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공동체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FFF 커뮤니티에 자산을 위탁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형태의 깊은 사회적, 윤리적 약속 또한 가능합니다.

 

자본주의와 글로벌 농업: 포드(Ford)부터 몬산토(Monsanto)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화석연료해방 공동체(FFF)는 초반에는 작은 범위로 시작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지속 가능한 접근법을 채택했을때 어떠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해당 모델이 거의 없고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FFF 커뮤니티 경제의 핵심은 100% 유기농 식품을 생산해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수송하는 유기농 농장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지역사회의 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다양성이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화석연료 자유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음식들은 집, 옥상, 인근 빈 공간에서 재배되거나 지역 농장에서 들여올 것입니다.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서부터 해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웃과 함께 협력하는 행위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권력가나 재력가들을 로비하거나 환경 NGO 단체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화석연료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플라스틱,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생산된 제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운송 된 제품이 없는 상태)은 FFF관련자들에게 결정적인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래가 아닌) 농부와 시민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공동 시장에서 식품을 판매(또는 물물 교환을 통해 교환)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장은 화석연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교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기 농업 공동체는 전혀 급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기후를 파괴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계나 인공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공동체를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지만, 그들을 제외한 미국의 지역들이 세계무역과 연관된 산업화된 비정상적인 농업 생산 시스템을 수용하는동안 이 공동체들은 지속적인 경제를 추구해오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유기농업 방식은 농업과 유통에서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일자리를 제공 할 것입니다. 지구의 파괴에 기여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아 그 노력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행동입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음식 및 기타 물품에 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FFF) 운송수단의 창출입니다. 초기에 제공된 FFF 운송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심하게 제한적이더라도 시민들은 그것을 불쾌한 불편으로 간주하지 않고 도덕적인 용기의 서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정치인들은 천연가스, 전기 및 심지어 원자력이 당연히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FF커뮤니티의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제조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제조업에 관하여 완전히 다시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삶에 필요한 물품의 생산 및 사용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어떻게 물품들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하여 반드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박스럽고 사치품과 같은 제품들의 마케팅과 소비를 완전하게 종료해야 합니다.

FFF공동체의 제조업은 100% 현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지역 및 세계적으로 공동체를 연결 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100% 쓰지 않는 운송체계를 갖추기 전까지).

화석연료를 제거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물품을 사용을 줄여야 하며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있는 품목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0-50년 이상 지속될 책상과 의자, 책장과 도마, 셔츠와 스웨터, 컵과 냄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경제의 이러한 변화는 상업적인 소비 중심 문화의 종식과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제작된 제품에 중점을 두며, 이미지가 아니라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FFF 커뮤니티에서 이케아(IKEA)나 갭(GAP)과 같은 관련 상품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00% 화석연료 비사용 제품의 생산과 유통은 우리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에게 장기적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제조는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내구성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우리 환경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쟁, 자유 무역 및 산업화의 위험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장에 관한 잘못된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개념, 태도의 변화

FFF 지역사회는 화석연료에 관한 선전과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충실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기업의 사상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기술과 거버넌스의 진보적 혁신이 아니라 태도의 혁명에서 시작됩니다. FFF 공동체는 자동차를 홍보하고 분별없는 음식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가 없는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은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있어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위협임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짚 깔기, 유리 재활용, 금속 해체, 비료사용을 위한 인분 수집, 카트를 통한 식품 수송, 또는 (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자전거를 통한 전기 생산 활동이 엄연히 도덕적인 것이며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인식이 잡혀있는 문화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상업 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만족감과 즉각적 만족에 대한 숭배는 도덕적 철학, 절제, 겸손 및 정직한 선행으로써의 사회적 참여에 기초한 문화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하게 “진보적인”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겸허, 절제, 지적 및 영적 참여의 중요성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와 결부됩니다. 이러한 커뮤니티가 커질수록 전 세계를 지배하는 상업 문화에 대한 대안이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전기, 소비, 재산의 막대한 증가, 도시화 및 개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에 의해 인간의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현대의 관념에서 비롯된 잘못된 추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 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시스템 생성에 도전하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친환경화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에 입각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생산과 유통에 뿌리를 둔 경제의 겉치레적인 변화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화와(그리고 영화 전후에 나오는 광고들) 뉴스 보도에서 강조하는 현대화의 신화 뒤에 감추어진 체계를 반드시 가시화해야 합니다. 사회의 전반에 깔려있는 생각은 아이폰을 사용하고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비싼 자동차나 전용 비행기로 전 세계의 수도에서 수도를 누비는 사람들,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나르고, 공공장소를 청소하고, 우리의 식량을 재배하며 요리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무래도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되는 자원낭비, 화석연료로 인한 환경오염,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된 부는 상업적 미디어에서 마치 선량한 도덕적 행동처럼 보여집니다.

FFF 공동체는 부동산, 개인 재산, 소유권에 관한 오해 소지가 많은 개념에 대해 완전히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언론에 의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계약법과 기업 법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돕거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커뮤니티 회원 간 구속력 있는 계약이 없습니다. FFF 커뮤니티는 이러한 계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FFF 공동체에 가입하여 화석연료의 사용을 끊고자 하는 충성 서약이 회원자격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동산과 소수의 사람에 자본이 집중되기 전에 유럽, 아시아, 미주 지역의 농업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마을 계약과 동등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을 계약은 상징적이라기보다는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각 개인이 식품, 도구, 가구, 운송 및 거버넌스의 생산에 기여해야하는 책임과 구성원들에게 평생동안 커뮤니티를 갖추어준다는 공동체의 책무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거버넌스 중심 환경과 인간 정착의 관계를 형상하는 이로쿼이 부족 (Iroquois Nation)의 헌법 부활은 금융, 재산권 및 부동산에 중점을 둔 법적 왜곡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됨.

현재 혁신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항의에 참여하는 동시에 화석 연료와 관련된 수익을 올리는 회사에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없애고 모든 투자가 지역사회 활동과 관련이 있고 FFF 경제 창출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해야합니다.

FFF공동체 회원가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어야 하며 자산, 교육 수준, 문화 감수성 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Teslas를 구입하거나 태양 전지판 패널을 구입할 수 있는 상류・중산층 사람들에게 포커스된 녹색 경제가 인류를 구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과 주변 매체를 통하여 기후위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빈곤층과 노동 계급에게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응답에 참여한 대가로 양질의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 디너, 억만장자의 기부 및 기타 활동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연설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만의 FFF 화폐를 만드는 것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화폐는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나타내며 지역 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및 기타 제조 제품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사용에 극히 제한적일 지라도 이 통화가치는 화석연료와 연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즉, FFF 화폐는 지역경제 전반에 걸쳐 사용이 확대되고 결국 세계경제로 확장됨에 따라 화석연료와 연결되지 않고 유사한 독립적 인 금융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세계무역과 기후변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침묵입니다. 투자은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구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탄소배출과 공장지대 설립을 위한 산림 및 정글파괴, 자연을 희생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공장의 설립으로 인해 엄청난 환경의 파괴를 가져다줍니다. 세계 무역에서 추진되는 식량(특히 육류)의 비생산적인 대량 생산은 토양, 산림 및 강과 바다에 장기적인 피해를 줍니다. 또한 식품 및 제품의 생산 및 유통에 대한 산업적 접근 방식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전례 없는 부의 집중을 조장하였습니다. FFF공동체는 시민들에게 이 파괴적인 악몽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최초로 제공합니다.

 

결론

우리는 미디어와 토론회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관행을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배출량은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탄소 발자국이 적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쟁을 목격하곤 합니다.

개인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데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경제의 깊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매일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특정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세계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문화는 즉, 최선의 길은 두 가지 전략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선택을 지역 사회의 선택으로 만들고 그 지역사회를 대체 경제의 기초가 될 경제 단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화, 2020/03/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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