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를 ‘자발적 계약 매춘부’라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국제학술지 논문이 국내외에서 파문을 일으킨 지 두 달여가 지났다.
많은 연구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심각한 연구윤리 위반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며 논문 철회를 요구했지만, 출판사 측은 논문 출간 방침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학문적 진실성 측면에서뿐 아니라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KBS는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역사부정주의자들의 논법과 주장이 어떻게 하버드대와 국제학술지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집중 추적하는 기사를 4월 12일부터사흘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램지어 교수 뒤에 숨어 있는 한미일 역사부정·혐오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 램지어의 역사부정주의적 시각, 어디서 왔나?
‘태평양 전쟁에서 성을 위한 계약’. 지난해 12월 1일 ‘국제 법경제학 리뷰’ 온라인판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논문 제목이다.
논문의 2개 키워드인 ‘매춘’ ‘노역 계약’이 분명히 가리키듯 램지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노역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는 주장에 논의를 집중한다. 자발적 계약에 따라 성매매 여성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강제 동원은 없었고 성노예도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KBS는 이 같은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램지어 교수 논문을 일본과 한국의 대표적 우파 학자의 저서와 비교해 보았다. 비교 대상은 일본 역사부정주의 대부라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대학 교수의 1999년 학술서 ‘위안부와 전장의 성’, 그리고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2019년 저서 ‘반일 종족주의’이다.
특히 하타 교수의 저서는 우파 위안부론의 대표적인 참고문헌으로, 한일 우파 논객들이 즐겨 읽고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
램지어 교수는 위안소를 “해외 군사용 성매매 업소”로 설명한다. 이 점에 대해선 하타 교수가 이미 “종군 위안부 시스템은 전쟁 전 일본 공창제의 전쟁지역 버전”이라고 규정했고, 이영훈 교수도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세 사람 모두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이었다, 당시 공창제는 합법이었다, 따라서 위안부제 또한 합법이었다”라는 억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2. “자유의사에 따른 합법적 계약”
“‘신뢰가능한 약속’에 따라 여성과 성매매 업소가 노역 계약을 체결했다”는 램지어 교수 논문의 핵심 주장은 “고용주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이라는 하타 교수, “주선업자들이 취업승낙서를 받아 딸을 데려갔다”는 이영훈 교수 주장과 맞닿아 있다.
3. “민간업자가 모집…일본군 책임 없어”
위안부 모집에 대해 램지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강제로 성매매시키지 않았다”면서 “모집업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다”는 말로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다.
하타 교수의 “업자의 악덕함이 심했다”는 주장, 이영훈 교수의 “(주선업자에 의해) 좋은 곳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의 속임수가 동원”되었다는 표현과 겹친다.
세 사람 모두 일본군의 역할은 업주의 착취와 성병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이른바 ‘좋은 관여’였다고 강조한다.
4. “위안부는 고수익 업종”
“전시에 위안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3국 학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5. “자유 폐업·귀향 가능”
세 교수는 성매매는 자유 계약이었기에 여성들이 선불금을 갚으면 자유롭게 폐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도 주장한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의 저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역사부정주의자들이 계약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계약을 강조하면, 문제가 생기더라도 실제 계약 당사자인 업자와 군 위안부로 동원되는 여성의 호주 사이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지시하고 심지어 돈까지 댄 일본군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업자의 착취를 막기 위해 관여한 좋은 일본군으로 남게 되는 효과까지 생긴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램지어 교수는 이미 1991년 논문 ‘제국 일본의 계약 매춘: 상업적 성 산업에서 신뢰가능한 책임’에서 20세기 초 매춘을 자율 계약으로 파악했다. 전쟁 전 성매매 여성의 자율 계약 개념을 전시 위안부와 연결시킨 건 하타 이쿠히코였고, 램지어 교수가 다시 이를 받아 위안부는 공창제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한미일 역사부정 네트워크를 분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램지어 교수가 논문마다 감사를 표하는 인물, 제이슨 모건 레이타쿠 대학 교수다.
미국인인 그는 일본 우파 싱크탱크인 일본전략연구포럼의 지원을 받아 2018년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을 영어로 번역했다.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이기도 한 모건 교수는 수시로 램지어 교수와 교류하며, 경제법학자인 램지어가 역사와 위안부 관련 논문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日 역사부정 실체’ 기획 보도 협업 참여진 –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창록: 경북대 로스쿨 교수, 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학술이사 –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김창호: 일본 변호사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일본에선 역사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제는 주 전쟁터 미국, 그리고 한국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발언이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선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처음 언급한 고노 담화, 종전 50주년을 즈음해 일어났던 성찰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현 스가 요시히데 내각 역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일본-미국-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어떻게 협력할까?
■ 日-韓 ‘역사 교과서 흔들기’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에도 꿈틀거리지 않던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역사 교과서가 발단됐다.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출범한다. 의회에도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설립됐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새역모>가 만든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 또는 ‘자위전쟁’으로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게 될 역사교과서 12종 중 ‘위안부 강제성’을 언급한 책은 단 1종뿐이다.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자신감이 헛된 과장이 아니다.
‘교과서 흔들기’는 8년 뒤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교수 등이 2005년 1월 참여한 ‘교과서 포럼’을 잇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2013년에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국사편찬위원회(유영익 위원장) 검정을 통과하며 절정에 달한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한국과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삼은 목표는 반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으로 ‘종북’에 더해 ‘반일’, 그것도 ‘우리 안의 반일’을 종족주의라고 비난한다.
강 교수는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으로 여론을 만드는, 무기화된 그들의 거짓말은 탈진실(post truth)”이라고 평가했다.
■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 ‘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을 평정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몰려간 곳은 주 전쟁터 미국이다. 소녀상 철거 운동을 본격화했고, UN 등 국제무대로 전쟁터를 확장했다.
<위안부의 진실 국민운동(2013년)>, 미국에서 출범한 <역사의 진실을 묻는 세계연합회(GAHT, 2014년)>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부회장 야마모토 유미코가 주도한 <나데시코 액션(2011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에서 소녀상 철거 소송을 벌이고, UN에서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미국 유력인사들에게 영어 번역판 역사수정주의 책을 발송하는 것도 주요 활동이다.
2019년 <반일 종족주의>가 출판되면서 한국 단체들과 협력도 활발하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2019년 7월 2일 UN 인권이사회에서 ‘일제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이 자리를 주선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한 인물이 역사 부정론자 미국인 유튜버 ‘텍사스 대디’의 <일본 사무국> 국장 후지키 슌이치다.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에서 출판돼 40만 권 넘게 팔렸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수정주의 책도 한국에서 출판됐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비판한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니시오카 쓰토무, 2020)>라는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우연이다. 그리고 책을 낸 출판사는 우파 미디어를 표방하는 ‘미디어 워치’ 계열 ‘미디어 실크’다. 이 책 광고는 지금도 ‘미디어 워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 책도 한국의 연구자, 기자 등에게 사유 없이 대량 발송됐다고 한다.
■ 日-韓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램지어’ 구하기
램지어 논문이 알려지자 일본에서 첫 지지 성명을 낸 사람이 이 책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다. 논문 출간에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니시오카 성명이 나오고 사흘 뒤인 2월 9일, 이영훈, 류석춘, 이우연 등 한국 측 인사들도 공동 성명을 낸다. 램지어 논문이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주장이었다. 국제학계, 특히 일본사 연구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본격적인 램지어 구하기에 나선다.
이우연은 일본 산케이 신문사 계열 <재팬 포워드>에 램지어 논문 옹호 글을 기고한다.
<이승만 TV>의 주익종은 유튜브에 ‘고명하신 미국 교수님들의 램지어 비판을 살펴보니’ 등의 강의 영상을 올린다. 공교롭게도 이 유튜브 영상은 일본어 자막을 단 것이 한국어 영상보다 최고 4배 정도 조회 수가 많다. 아시다시피 조회 수는 유튜버 수익과 비례한다.
■ 역사수정주의 이념적 동일성….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
‘자학사관’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단체 <새역모>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7종 모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것을 비난하면서 만든 개념이다. 아베는 근현대 교육에서 일본인은 자자손손 사죄하는 것이 운명이 된 죄인처럼 다루어진다고 비판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정통한 일본 전문가인 일본계 호주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저서 <바다를 건너간 위안부>에서 일본의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행해온 여러 악행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답하면서도 “그 악행을 은폐하고, 풍화시키고, 날조하는 과정에 관여하거나 혹은 그 과정을 묵인한다면 거기에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이것을 ‘연루(連累, impl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본 극우가 쓰는 용어인 ‘자학사관’은 한국에서도 등장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부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2004년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자학사관’과 전쟁을 선포한다며 실체를 드러냈다.
강성현 교수는 “韓日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각각 근현대사에서 극우/파시즘/독재정치로 인한 잘못을 반성하는 역사인식을 ‘자학사관’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또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이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는 혐한, 혐북, 혐중 감정이 공통으로 깊이 배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역사수정주의 핵심 단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인 미국인 제이슨 모건 교수(레이타쿠 대학)는 미국 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있다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정의의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역사부정은 한국, 미국으로 확산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복사해 붙인 것처럼 똑같다.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위안소는 공창제라는 매춘 역사의 일부다” “위안부는 높은 수익을 올렸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언을 “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풀어갈 때는 증언을 ‘대목, 대목’ 잘라 인용한다. 증언의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절취다.
일본, 한국,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왜곡하는 대표적 증언이 고 문옥주 할머니 이야기다. 일본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장의 성, 1999년>을 시작으로, 한국 이영훈 전 교수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미국 램지어의 이번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2021년>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할머니 증언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그리고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 “문옥주는 자유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는 문옥주와 3년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발간됐다. 16살이던 1940년, 문옥주는 귀가 중 헌병대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끌려간다. 중국과 미얀마에서 성 노예 생활을 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1946년 귀환했다. 그녀의 귀환을 두고 하타 이쿠히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얀마의 문옥주도 동료와 귀향하기 위해 사이공까지 갔다가, 항해가 위험한 것 같다고 판단, 중지하고 돌아갔다는 것에서 전쟁 중에 일을 그만두고 고국에 돌아간 위안부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위안부와 전장의 성, 395쪽, 1999년)
이영훈은 여기에 더해 문옥주가 성 노예는 커녕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와 위안부 일동은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받은 제국의 위안부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반일 종족주의 326쪽, 2019)
두 사람은 문옥주가 증언한 미얀마 탈출기, 그리고 군사 법정 진술을 가져와 마치 위안부가 언제든 귀환할 수 있었던 자유인, 또 위안부를 신성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는 돈을 많이 벌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빼놓지 않는 주장 중의 하나가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던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이다.
하타 이쿠히코는 위안부가 일본 공창 수입의 5배 이상, 평양 유곽 여성보다 10배 이상 많은 돈을 벌었다며 그 사례로 문옥주 증언을 든다.
“문옥주의 경우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3년이 안 되어 2만 5천 엔을 저금하고, 그 가운데 5천 엔을 가족에게 송금했다. 지금이라면 1억 엔 전후의 큰돈이다.” (위안부와 전장의 성, 392쪽)
램지어도 “계좌를 둔 한국인 위안부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게 잘했던 이는 문옥주 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문옥주 원본 증언집이 아닌 역사수정주의적 글만 게재하는 익명의 일베 같은 블로그에서 선별적으로 짜깁기되고 왜곡된 문옥주 증언을 든다.
“어머니에게 안락한 삶을 살게 해드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고 뿌듯했다. 저금통장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6쪽, 2021년)
일본군 위안부 故 문옥주 할머니
■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먼저 문옥주가 미얀마 위안소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손님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귀국하기 위한 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손에 넣을 수 없을까요?”라고, 그러자 그 군의관은 “내가 폐병이 났다는 진단서를 써주겠다. 건강해 보이면 거짓 진단서가 들통 나서 내 목이 날아가니 꼭 병자처럼 행동해요.”라고 당부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폐병에 걸려 군인들에게 병이나 옮기는 쓸모없는 몸을 만들지 않고서는 문옥주는 위안부 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이것이 문옥주가 전하는 진심 아닐까?
그럼 문옥주는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이런 말은 군사 법정에서 또 왜 했을까? 문옥주는 위안소에서 칼을 빼 들고 행패를 부린 군인과 승강이를 벌이다 살해한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 군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문옥주가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발언했다고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또 위안부 수입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하면서 ‘거액’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위안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재론의 여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KBS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 점령지에서 급격하게 치솟은 전시 초인플레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부 조서
강 교수는 “1944년 4월과 5월 문옥주 저금액 20,560엔을 당시 도쿄의 엔화 가치로 환산해 보면 도쿄 물가지수는 152, 양곤은 30,629이어서, 문옥주 저금액이 도쿄에서는 102엔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오늘날의 가치’라는 분석 자체가 의미 없는 숫자 놀음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옥주는 이 돈마저 돌려받지 못했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이야말로 1944-45년에 업자들이 아닌 일본군 ‘위안부’가 한 강제저축을 돌려받거나 집(조선)으로 송금했던 돈을 본가에서 인출한 사례를, 그것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할 만큼 ‘거액’의 사례를 근거로 들어 입증해야 한다.”고 강 교수는 반론했다.
■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일상이 전장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문옥주 할머니 회고록 작가 모리카와는 1982년 8월 문옥주가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하였다고 했다. 모리카와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당신 개인의 수치도, 당신 집안의 수치도, 동네의 수치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였습니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문옥주 할머니는 1996년 10월 26일 생을 달리했다. 영면에 든 할머니는 본인의 증언이 ‘대목, 대목’ 잘려 찬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E H 카의 유명한 역사론이다. 역사를 과거 ‘사실’의 누적으로만 보는 실증주의와 ‘사실’을 무시하고 현재의 시각만 강조하는 사관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말로 유명하다. 코로나19 때문에 외국을 가지 못하는 김에 한국현대사 답사를 하면서 이 말에 대해, 특히 ‘역사 기억하기’, 아니 ‘역사 만들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난’으로 취급받던 동학을 ‘혁명’으로 복권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다.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던 그는 집권초기 동학혁명기념탑을 건립했고 5·16이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유신 다음해에는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우금치에 위령탑을 세워주고 친필로 글씨까지 써줬다. 하지만 설립문에 유신이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써, 민주화 이후 민주인사들이 그 글씨를 파버렸다. 전두환도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농민군의 첫 승리지인 정읍 황토현에 전봉준 동상 등 동학혁명기념시설을 만들었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학을 이용한 것이다.
여권의 오만과 위선이 가져온 사필귀정의 참사 등 여러 현안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역사 만들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주가 4·19혁명 61주기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4·19를 짓밟은 5·16쿠데타세력이 만든 ‘거짓 4·19 기념사업’을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아래 생략).” 나 자신 대학시절 감옥도 가고 제적도 당한 학생운동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민주묘지는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묘역을 꼼꼼히 살피지는 않았다. 현대사 답사 때문에 꼼꼼히 살펴보다가 4·19기념탑 앞조각 뒤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묘지가 쿠데타 직후 군부가,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으로 극찬하고 4·19를 짓밟은 5·16쿠데타에 자금지원을 하고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무리 자신들과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이승만 유세를 다녔으며 이승만의 3·15부정선거 항의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어 터져 나온 4·11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치매가 아니라면, 자신이 ‘이적행위’라고 비판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어떻게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라는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놀라서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기념탑을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세우려는 것을 5·16 후 시위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로 ‘유배’를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친일·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4·19민주묘지는 이후 김영삼 정부가 민주성지로 재정비했지만, 이처럼 기본틀은 군사독재가 엉뚱한 곳에 친독재 문인과 친일·친독재 조각가를 동원해 만든 ‘가짜’다.
여러 논쟁 속에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파헤쳐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 묘역은 어쩔 수 없더라도, 기념탑은 수유리의 가짜 대신에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제대로 된 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헌법 전문에 나오는 역사적 항쟁의 기념탑을 중심가 현장이 아니라 엉뚱한 외곽에 세우는 나라는 없다. 아니면 광화문에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촛불항쟁을 포괄적으로 기념하는 ‘민주항쟁탑’을 만들어야 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름 없는 민초들의 민주항쟁도 중요하다. 새로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도 국민의힘의 ‘수구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라도 이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
특집 :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
○ (좌담) 지역연구자의 삶과 꼬뮨 만들기 /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강화정
○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날들 / 작자미생
○ 굿바이 루카치 – 어느 연구자의 일상 / 허민
○ 2020년, 역사학과 여성사, 이 기울어진 세계의 이야기 / 한봉석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유럽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안종철 이동원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일본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니시무라 나오토 김영진
○ 역사교육, 역사를 매개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히기 / 우현주
○ (인터뷰) 푸른역사의 산증인 박혜숙 대표를 만나다 / 박혜숙 김헌주
○ (좌담) 피해자의 삶이 역사가 되었듯이 활동가의 삶이 역사가 되다-역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의 이야기 / 강경란 김명준 김진영 김해슬 이하나 야지마 츠카사 정은주 최상구 김영환
기획 :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2)
○ 난을 피하는 여러 가지 방법 : 한국전쟁기 피난 이야기 / 김수향
○ 오음리에서 사이공까지 : 구술을 통해 본 ‘파월전사’의 참전 과정과 현지 경험 / 류기현
연재 :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2)
○ 한국전쟁 전후 북한 영화 관련 온라인 자료 소개 / 한상언
○ 8월 14일 기림의 날 개관한 아카이브814 –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 보기 / 강윤희
인물로 보는 역사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④ 김단야 박헌영 김재봉 / 임경석
리뷰
○ 긴축 정책과 빈부 격차 그리고 차별 : 단지 영국 중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
– 브래디 미카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다다서재, 2020 / 백은진
<책소개>
역사하는 ‘우리’를 이야기하며 다시 내일을 꿈꾸다
언젠가는 역사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를 이렇게 봐야 한다’, ‘역사적 진실은 이런 것이다’ 등등 역사 이해의 결과물에 대해서 주목할 뿐, 그 말을 만들고 옮기고 말이 현실이 되게끔 노력해온 사람들의 삶과 의식세계를 소홀히 여겨온 것은 아닌가. 역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들이 발 딛고 있는 환경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람들이 하는 그 일에 대한 의미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나만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기획은 시작되었다.
역사가 하나의 서사 형태를 갖추게 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파되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는 데 얼마나 많은 과정이 존재할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개입할까. 사람마다 각각 자신의 경험이 다르고 역사와 대면하게 되는 계기도 다양하기 때문에, 역사의 생산과 전파 및 실천적 개입 등을 하나의 ‘타임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시간대들이 중첩되어 있는 실제 상황을 잠시 접어두고 이러한 국면에 참여하는 집단들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면, 역사 연구자, 역사교사, 종이·음성·시각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기획자, 피해자의 구제와 역사적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역사단체 활동가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이들은 항상 동일한 목표와 균등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들이 아니다. 근대 이후 정부는 통치권력으로 기능하며, 역사하는 사람들의 행로를 결정하는 ‘슈퍼 갑’이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힘이 상수로 존재하는 가운데, 때로는 연구하고 쓰는 사람들이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규정했다. 또한 역사대중화라고 포장한 채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대중의 역사의식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선동가’가 역사하는 사람들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즉 역사하는 여러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얽혀있는 관계는 반드시 역사관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되짚어보려면, 이들 모든 영역들이 어우러져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업적 관계 구축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게 이 기획의 첫 번째 의도라면, 두 번째 목표는 각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2021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생존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점검해보는 데 있다. 말로는 평화 공영을 내세우며 누군가의 희생 덕에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적 소속감의 형성에 역사교육을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의 전파자는 역사를 어떠한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다루고 있는가. 역사 활동가들은 역사의 정치화와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리 가볍지 않으며, 그 무게를 견뎌내기 위한 첫 걸음을 떼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내일을 여는 역사> 통권 80호 <특집> 제목을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로 정했다. 지난 2020년 11월 무렵부터 편집위원회를 통해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시작했는데, 업무보고서·연차보고서 한 편도 제대로 완성하기 힘든 마당에 생태보고서를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참신한 제안들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례도 여럿이다. 본문에서 밝히듯이 여성사 연구자들의 좌담을 통해 한국근현대사학계의 연구환경과 연구경향을 말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기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교육연구소에서 펴낸 ‘역사의식조사’처럼 연구자들이 느끼는 현실을 데이터화 하는 설문 작업도 구체화시켜보고자 했으나 편집위원회가 단기간에 감당할 수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결국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가급적 많은 말을 담기로 했다. 또한 말을 모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2020년 12월 개편 호 발행 당시 원고 투고 방식에 한정되지 않은 열린 시도를 하자고 다짐했던 터라, 편집위원이 직접 발로 뛰는 노동집약적 기획이 가능했다. 좌담, 대담, 인터뷰, 기고 청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23명이 참여하여 역사하는 동네의 현상, 이면과 측면을 담은 생태보고서를 만들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편집위원회에 제일 많다는 핑계로, 이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았다. 일단 지역과 해외라는 공간으로 사람들을 찾아갔다. 지역 연구자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묵직했다. 강화정 편집위원이 중심을 잡고 이끌어간 좌담에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세 명의 부산경남지역 역사학/인문학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2021년 대입 입시에서 드러난 지방대학 ‘붕괴’에 대한 단상을 시작으로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연구에 미치는 영향, 지역이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촘촘한 그물망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곳이라는 점, 수도권 집중화로 식어버린 대지일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활동장이라는 점 등을 말한다. 한 참가자의 지적처럼 지역은 언제나 전체 기획의 맨 끝에서 구색 맞추기처럼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생태계의 불균등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맨 먼저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코로나 유행 상황이 발달시킨 비대면 화상회의 방법으로 두 명의 해외 연구자와 대담을 추진했다. 이동원 편집위원은 이탈리아에서 활동중인 안종철 교수와, 김영진 편집위원은 일본의 신진연구자인 니시무라 나오토 조수와 대담을 나눴다. 한국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연구환경과 연구주제를 상대화·객관화하기 위한 시도이자, 우리가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 역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한국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고민에 따라 추진되었다.
이 대담을 통해 안종철은 유럽의 고등교육제도와 한국학의 궤적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유럽과의 교류 범위를 넓혀갈 것을 제안한다. 특히 유럽에서 한국사/한국학은 여전히 인정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 해외 연구자의 실존과 관련해서 짙게 여운을 남긴다. 한편 니시무라 나오토는 대학원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일본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제반 여건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풀어놓은 경험담은 ‘생각보다’ 특수하지 않았다. 일본이니까, 일본인이니까, 뭔가 자극적이고 특별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기대한 내 편견이 컸던 탓이다. 그는 한국의 누구나 그렇듯이 역사에 관심 없는 대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힘든,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연구자이다. 두 곳의 문화와 시스템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편집위원회는 연구자의 신분과 지위에 주목했다. 역사학의 영역에서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는 데 10년은 훌쩍 넘게 걸린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대학원생노동조합,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등이 만들어지면서, 연구자로 완성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으로만 오랫동안 간주되던 비인권적 처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졌으나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태계가 안정되려면,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아닌 공생과 상호부조의 관점이 폭넓게 수용될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단체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소속 연구자들이 작자미생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역사학대회 때 발표했던 원고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했다. 타교 출신 대학원생에 대한 차별, 학회와 연구소 업무의 전가, 지도교수의 일방적 관계 설정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허민은 어느 비정규직 연구자의 일상을, 학술대회 발표문 마감일 1주일 전부터 학술대회 당일에 이르는 긴장을 바탕으로 촘촘하게 르포 형태로 풀어냈다. 이들의 글이 피해자성을 전시하고 사적 개인을 고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이해하는 이야기로서, 학문 연구의 영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숙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지역, 해외, 대학원생, 비정규직 연구자처럼 공간과 지위에 따라서 연구 생태계를 살펴보았다면, 한봉석은 여성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지형, 출판 경향을 분석하면서 여성사 연구가 시대가 요청하는 바인 다양한 관계와 개인의 정동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담았다. 그는 페미니즘 전성시대에 역사학계가 함께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여성사 연구자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지 못한 환경과 칭찬의 부재로부터 찾는다. 그가 내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재기 넘치고 열성적인 여성 연구자들을 불안과 위기로 내몬 우리 생태계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 연구자에 대한 지지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연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 전공자는 5,6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교사모임 관계자의 전언을 통해 추정해볼 때, 역사교사도 대략 8,000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역사교사 역시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하는 사람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원만이 아니라 실제 수행하는 역할에 있어서도 그렇다. 살아가는 동안 얻게 되는 많은 역사지식이 역사교사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최근에는 미디어의 역사 상품화로 학교 역사교육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23년차 역사교사 우현주는 역사 공부의 기본 목적이 역사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한다. 독서 수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고, 느리더라도 오래가는 공부를 강조한다. 또한 역사가 ‘지금 이 순간’의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관점에서 역사수업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한다. 현장의 고민을 담은 역사교사의 생존기를,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읽어주셨으면 한다.
역사대중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역시 역사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이다. 연구자와 교육자, 활동가 등이 모두 개입하는 분야이자 상업적 이윤 창출과 맞물려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역사 출판과 방송 출연 등은 연구자들의 사회적 기여의 한 방편으로 생각되었지만, ‘설민석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미디어는 전문연구자를 소외시키며 흥미 위주로 구미에 맞는 ‘국뽕’ 류의 단선적인 역사담론을 재창출하기도 한다.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는 20년 넘게 이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이자 목격자이다. 김헌주 편집위원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박혜숙은 푸른역사의 역사대중화 시도, 전문 역사 연구와 역사 출판의 긴장, 역사 출판계를 둘러싼 최근 동향, 출판과 영상매체와의 관계 등 자신의 경험을 솔직담백하게 선보였다. 향후 역사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설지, 특히 출판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프로젝트의 발굴을 위해서도 참고해야 할 자료가 될 것이다.
<특집>의 마지막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할애했다. 김영환 편집위원이 주선해서 강경란·김명준·김진영·김해슬·이하나·야지마 츠카사·정은주·최상구 등 여덟 명의 대일과거사 활동가가 참가한 좌담은, 활동가들을 조직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출발점이 제각기 다른 ‘고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활동가가 된 개인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을 하게 된 동기에서 엿보이듯이 대일과거사는 집단의 이야기면서 수많은 개인의 삶이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좌담은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겪는 공감대를 기초로 진행되었다. 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일정서가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지지기반이 된다는 점, 또한 일본사회의 변화로부터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경화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할지 고민이라는 점 등은 대일과거사 활동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주로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와 연대하면서 과거사청산운동을 전개한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네가 유족이냐’는 물음은 다반사로 경험했을 터. 현재 나눔의집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야지마 츠카사의 ‘나눔의집이 할머니의 역사를 팔아왔다’는 비판과, 나눔의집 정상화 이후 일본사회와 연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다는 다짐이 큰 울림을 준다.
이상과 같이 이번 호 <특집>에는 전체 아홉 개의 기획을 담았다. 역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이야기를 수집했으나, 돌이켜보면 각 분야 사이의 관계성을 점검하는 데, 그를 통해 역사가 순환되는 전체 생태계를 살펴보는 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부족한 능력으로 제한된 시간에,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다만 여기 흩뿌려놓은 단서들이 핏빛으로 변할지, 장밋빛으로 피어날지 그건 아직 미지수이다. 기왕 사람들에 주목했으니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전망도 역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찰하고 바꿔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한편 <특집> 외에도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읽을거리를 준비했다. <기획>에서는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을 두 번째로 실었다. 김수향과 류기현이 한국전쟁기 피난과 파월전사에 각각 주목했다. <연재>도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로 찾아왔다. 한상언은 북한 영화/문화 연구를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온라인 자료 접근 방법을 소개했다. 강윤희는 일본군‘위안부’연구소의 아카이브를 상세히 해설했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는 임경석의 ‘이탈리아판 코민테른 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에 대한 소개 마지막회를 실었다. 끝으로 <리뷰>에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영국 중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다룬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 대한 백은진의 서평을 담았다.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이 함께 어우러진 글들을 <특집>과 함께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구미 박정희 생가 옆에 위치한 새마을공원 박정희 동상 앞에 서자 귀에 익은 새마을 노래가 들려왔다. 갑자기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으스스한 기분에 겁이 덜컥 나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 경찰이 없나 둘러보게 됐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2018년 지방선거가 생각이 났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여파 속에 치러진 선거인만큼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싹쓸이를 했지만, 영남, 특히 보수의 텃밭인 경북은 예외였다. 헌데 경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가 당선된 곳이 있었다. 의외지만, 구미였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 세력이 신봉하는 박정희의 출생지인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미가 박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3년 구미에 공단을 지었고, 전두환이 1983년 제2공단을, 노태우가 제3공단을 지었다. 박정희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른 지역을 제치고 공단을 집중적으로 지으면서, 구미에는 외부 인구들이 대폭 유입됐다. 구미는 경북에서 외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경북의 보수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경북 중 구미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여러 공장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구미는 여전히 대표적인 공단도시다. 그 덕으로 외지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구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의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그가 친필로 쓴 낡은 ‘수출산업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도시 곳곳에서 박정희기념관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박정희로’라는 길도 있다. 박정희 생가와 기념시설들 앞의 큰 길이 박정희로다.
▲ 구미 시내에 우뚝 서 있는 ‘수출산업의 탑’. 하단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글씨가 있다.(좌) 구미 시내의 박정희로. ‘박정희대통령생가’라는 도로판이 사방에 눈에 띈다(우) ⓒ손호철
박정희 생가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큰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단체 참관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5인 이상 집합 금지 이전이었다). 역시 이 지역의 박정희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생가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새마을복을 입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농민들의 조각이다.
생가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고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실물 크기의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전신상이 세워져있어 이들이 살아 우리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두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추모관이 있고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옆에 선 앳된 박근혜의 사진을 보자,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고 능력 밖의 대통령 직을 맡아 결국 감옥을 가야했던 그의 삶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박정희 기념 장소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커다란 박정희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뒤에 박정희 동상, 그 뒤로 박정희의 연보와 새마을 악보 등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생가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손호철▲ 박정희 부부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 박정희 생가 ⓒ손호철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함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태극기부대 등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진보주의자’ 등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된 민족반역자이며 경제 발전이란 이름 하에 유신 등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독재자’로 혐오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평가인가?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에 달려있다. 첫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인가? 둘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 즉 ‘개발독재’는 올바른 것이었나?
첫 번째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냐는 가치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보수적인 박정희 지지자들은 둘 다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진보적인 비판자들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에는 ‘그렇다’이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라는 입장,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지만 그 공보다 과가 더 크다는 입장도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진행될 사안이다. 1990년대 말 생겨난 박정희 향수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진보적 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한 학자는 “박정희 신화는 정치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지도자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비판했다. 박정희 신화는 극우 정부와 보수 언론 등에 의해 세뇌당한 ‘무지한 대중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박정희 현상은 단순히 대중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보릿고개에서 탈피해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보릿고개를 벗어난 주된 원인이 박정희는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대에 보릿고개를 벗어났으니 박정희 시대와 보릿고개 탈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지만, 박정희 때문에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인과관계)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의 체험을 논리로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가짜뉴스’ 등 자신들이 믿는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하는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위의 두 질문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중 ‘해방 70년과 박정희 신화’ 참조).
주목할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4인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특히 그의 개발 독재 때문이라면, 이들 나라들은 박정희도 없는데, 특히 홍콩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영국 지배 하의 ‘민주체제’였는데,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4인방의 공통점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남미 등과 다르게 산업화를 가로막는 지주 계급이 도시국가(싱가포르, 홍콩)라 원래 없거나, 분단에 따른 체제 경쟁(한국 대 북한, 대만 대 북한)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개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선진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싼 공산품을 수입하기를 원한 지주들은 산업화의 장애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기와 박정희 시기를 비교하면 이승만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다른 제3세계에 비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소련 동구가 망해서요.” IMF 경제 위기 당시인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의 의뢰를 받아 한국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만나 한국에 경제위기가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하게 국내 학계에선 거론도 안 된 ‘탈냉전’을 들고 나왔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내부 요인도 있지만 냉전 때문이에요. 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남미들과 달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허용한 것이지요. 헌데 소련 동구가 망하니 한국 등 아시아를 더 봐줄 필요가 없어 손 본 것이에요.” 다시 말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한 것은 박정희나 장제스, 리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이들 나라들을 미국이 봐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이 ‘한강의 기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를 대전제로 하여, 스탈린의 강압적인 산업화가 소련을 빠른 시간동안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들어줬듯이 노동자 등 민중들을 짓밟은 민중 억압적인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경제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파괴, 노동 탄압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경제적 성과를 이유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스탈린이 이 같은 강압적 산업화의 덕으로 히틀러의 공격을 격파해 세계를 구하고 유럽의 낙후국인 소련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든 ‘공’에 비하면, 박정희의 공은 ‘하찮다’고 하겠다. 특히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 중 주목할 것은 결과 제일주의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 제일주의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불행한 박정희의 유산이다.
결론적으로, 산업화의 장애인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성장이냐는 것인데, 나는 박정희 체제보다 조금 덜 빠르게 성장을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덜 억압적이고 ‘민중친화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정세의 효과에 따라 좌우로 진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죽은 박정희를 살린 것은 운동권에서 극우로 변신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뉴라이트’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흔히들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세력’,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진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지 민주노총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progressive)’는 아니므로 ‘개혁’ 내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 이 같은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희 향수는 박정희에 대한 학술적,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고,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좋은 연구가 없어서도 아니라, ‘개혁 정부’ 하에서 대중이 직접 체험한 ‘객관적 현실’의 결과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입증해준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결했던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친 10년 뒤에 치려진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서민층들은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박정희를 이어받은 냉전적 보수 정당에 압승을 선사했다.
이 같은 박정희 향수에 찬물을 뿌린 것도 진보사학자가 고대한 박정희의 잘못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박근혜의 실정이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자, 박정희 향수도 주춤해진 것이다.
▲ 박정희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 사진.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 있는 박근혜의 앳띤 모습
안타깝게도 박정희 향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조국 사태, 안희정‧박원순‧오거돈의 성추문, LH 사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여권 핵심의 전세값 인상 파동 등 연이은 측근들의 도덕적 실추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정희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평가와 박정희 향수는 ‘정세의 효과’이며 ‘현재의 정치에 대한 성적표’, 특히 ‘개혁 정부’에 대한 성적표이다. 박정희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면, 개혁 정부들이 죽을 쑤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박정희 향수가 조용하다면, 이는 개혁 정부들이 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치다.
박정희 생가를 떠나 이제는 새 청사로 이전을 하고 문을 닫은 구미경찰서로 향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등에 저항해 대구시민들이 일어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퇴각하다가 사살된 곳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조). 구미경찰서 앞에 서자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박정희의 ‘짧은 외도’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박정희의 형이 공격했던 구미경찰서. 그는 이후 도주하다 사살당했다. ⓒ손호철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일본군-인용자)에 채용해주실 수 없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일보>에 보도된 박정희의 혈서다.
박정희는 일제 말 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계에 어려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 육사에 입학해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에 근무했다. 그의 친일은 생계 때문에 불가피했던 ‘생계형 친일’과는 전혀 질이 다른 ‘출세형 친일’, ‘악질 친일’이다.
▲ 박정희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사본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 밀고자를 거쳐 반공주의자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한 것이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변신도 서슴지 않았던, 동지도 부하도 언제든지 버렸던, ‘생존주의자’, ‘생존지상주의자’였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두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5‧16 쿠데타가 나자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 후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그를 버린 여인’이란 소설에서 여순 사건 때 박정희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를 이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생존주의자’로 민족, 민주주의, 친구, 동지, 국민을 모두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부인을 총격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딸마저도 결국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숭배와 증오의 주인공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다.
친일조각가가 제작한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물. 정읍시 제공
친일 작가 작품이란 지적을 받아온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
정읍시는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에 따른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이 완료됐다고 20일 밝혔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10월에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동상은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다. 이 동상 및 배경 부조 시설물은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짙은 청동색으로 높이 6.4m, 좌대 3.7m, 형상 3.7m 규모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대표적 친일인물로 나와 그동안 동학관련 단체 등은 철거를 요구해왔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김경승은 1942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해, 해방 이후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특히 몸체는 격문을 든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머리는 죄수처럼 맨상투로 돼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한 동상 뒤의 부조에도 죽창·농기구를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농민군의 표정 등이 보이지 않아 역사적·예술적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는 시민과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동상 철거를 결정했고, 철거된 동상은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시는 예산 12억원을 확보했다. 다음달 공모를 거쳐 내년 5월 완성을 목표로 추진할 방침이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오는 7월 동상 철거 이후 새롭게 제작할 동상은 각계 전문가 자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사상과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읍 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로, 1981년 12월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다. 정부는 황토현전승일을 기리기 위해 오랜 논란 끝에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2018년에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이상호 작가가 출품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 작품에 담긴 박정희 전 대통령.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박정희재단)이 제13회 광주비엔날레(4월1일∼5월9일)에 출품된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친일인사 비판 작품의 전시 중단을 요구해, “예술과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21일 “박정희재단이 지난 14일 우편 공문을 보내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일제를 빛낸 사람들’ 작품은 악의적 정치 선전물이다. 전시를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박정희재단이 문제삼은 ‘일제를 빛낸 사람들’(417㎝×245㎝)은 1987년 미술인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이상호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와 협업해 그린 그림으로, 박 전 대통령과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인사 92명을 그렸다.
박정희재단은 이상호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들 때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참고한 점을 문제 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지만,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는 이름이 빠졌다.
박정희재단은 “작품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들을 왜곡, 폄훼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정치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을 저버리고 끝까지 작품을 전시한다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사자는 박정희재단의 요구를 일축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박정희재단은 예술과 정치,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역사적 판단이 끝난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시 논하는 것은 단체 이름을 알리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홍성담 화백 등 예술인 258명도 성명에서 “이 작품은 친일인사 후손들은 호화롭게 살고 독립군 후손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박정희재단은 예술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고 밝혔다. 이상호 작가와 광주비엔날레재단은 대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한겨레>는 박정희재단 쪽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했으나 담당자가 없다는 이유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
‘판문점 선언 3주년’을 맞아 부산역에서 임진각까지 ‘남북철도 잇기 한반도 평화 대행진’이 벌어진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사)평화철도,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96개 단체들이 ‘남북철도 잇기 한반도 평화 대행진 추진위원회(아래 추진위)’를 구성했다.
추진위는 오는 27일 오전 부산역 광장에서 “남북철도 잇기 상징 조형물 제막과 남북철도 잇기 기원 전통춤 공연”을 한 뒤 임진각으로 출발한다.
추진위는 “남북철도 연결은 남북 정상이 판문점·평양 선언에서 약속한, 남북 경제협력을 위한 최고의 역점 사업이다”며 “판문점·평양 선언의 한 가운데에 끊어진 민족의 혈맥, 남북철도를 하나로 잇자는 민족의 염원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판문점·평양 선언이 사장되고 남북철도 잇기가 무산될 위기를 맞고 있다”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제재와 압박에 치이고 문재인 정부의 무소신과 무능에 밀려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제재를 해제할 것을, 문재인 정부가 남북철도 잇기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남북철도 잇기 평화 대행진’에 나서고자 한다”며 “분단의 최대 희생자인 (철도)노동자가 앞장서고 농민, 여성, 종교인, 지식인, 청년학생 등이 함께한다”고 했다.
추진위는 27일 부산역을 출발해 휴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까지 남북철도가 끊긴 곳인 임진각까지 장장 90일 동안 550km에 걸쳐 남북철도 잇기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끌고 밀며 대행진에 나선다.
부산역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김영훈 전 전국철도노동조합 위원장, 변희영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장운 평화의길 이사,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이영훈 신부, 부산평통사 김가영 회원, 김영자 한국무용가 등이 참여한다.
‘상징조형물’은 평통사가 구상하고 이구영 작가가 제작했으며, ‘남북철도 잇기와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을 형상화한 것이다.
추진위는 전국 곳곳을 순례한 뒤, 7월 27일 임진각에서 “7·27 휴전 68년, 남북철도 잇기 한반도 평화 대행진” 마무리 행사를 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위안부 피해자 2차 소송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2차 소송’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2021.4.27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일본 정부를 한국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취지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각하한 법원 판결에 시민사회단체가 “반인권·반평화·반역사적인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정의기억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28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의 투쟁은 판결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처럼 밝혔다. 기자회견엔 총 40개 단체가 연명했다.
위안부 ‘2차 소송’에서 피해자(원고) 측 대리인이었던 김예지 변호사는 “이 사건 소는 피해자들이 2015년 위안부 합의 이후 더이상 외교적 해결 방법은 없다는 판단하에 법원에 마지막 구제를 구하는 것이었다”며 “재판부는 소송의 의미를 완전히 간과한 채 헌법 질서에 반하는 국가면제를 적용함으로써 일본이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기회를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국가면제(주권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으로, 2차 소송 재판부는 이 원칙을 적용해 소를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김 변호사는 “물론 국가면제라는 관습법이 있기 때문에 소송 요건이 갖춰졌는지 다퉈야 할 것이 예상됐으나 이 사건처럼 다른 구제 수단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예외적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봐서 소 제기가 이뤄졌던 것”이라며 “법원이 국가면제를 적용한 건 국제인권법 질서에서 보장되는 사법접근권, 자국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영구히 배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비판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최근 판결이 2015년 12월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하는 한일 위안부 합의와 화해치유재단을 복권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재판부는 이 소송을 촉발한 박근혜 정권의 2015 한일 정부 간 합의가 엄연한 국가 간 합의로서 지금도 유효하고 피해자들의 권리구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며 “항소해 일본 정부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고 밝혔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5월 말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안보문제, 백신문제 등을 구실로 미국 압력에서 섣불리 타협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 할머니가 지난 2일 오후 10시쯤 별세했다고 3일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모 할머니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사진=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정의연에 따르면 1929년 충청북도에서 태어난 윤 할머니는 13세가 되던 1941년 일본 군인들이 할아버지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가 트럭에 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윤 할머니는 일본 시모노세키 방적 회사에서 3년 정도 일하다가 히로시마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로 온갖 수난을 겪었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한 윤 할머니는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정의연은 “윤모 할머니는 해외 증언, 수요시위 참가 등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셨다”며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할머니와 유족 뜻에 따라 장례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날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윤 할머니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정 장관은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떠나보내게 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생존 피해자 분들께서 건강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15명에서 14명으로 줄었다.
한편 지난 4월21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생 소송(2차 소송)에서 각하 판결로 사실상 패소했다.
이에 정의기억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총 40개의 시민단체는 항소를 추진하고 나섰다.
단체 관계자들은 지난 4월28일 서울시 중구 정동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외면하고 국가면제(주권면제)를 이유로 일본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참담하다”며 2차 소송 각하를 규탄, 항소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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