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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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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admin | 금, 2021/04/16- 23:09

[손호철의 발자국] 18. 경북 구미 : 누가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구미 박정희 생가 옆에 위치한 새마을공원 박정희 동상 앞에 서자 귀에 익은 새마을 노래가 들려왔다. 갑자기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으스스한 기분에 겁이 덜컥 나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 경찰이 없나 둘러보게 됐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2018년 지방선거가 생각이 났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여파 속에 치러진 선거인만큼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싹쓸이를 했지만, 영남, 특히 보수의 텃밭인 경북은 예외였다. 헌데 경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가 당선된 곳이 있었다. 의외지만, 구미였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 세력이 신봉하는 박정희의 출생지인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미가 박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3년 구미에 공단을 지었고, 전두환이 1983년 제2공단을, 노태우가 제3공단을 지었다. 박정희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른 지역을 제치고 공단을 집중적으로 지으면서, 구미에는 외부 인구들이 대폭 유입됐다. 구미는 경북에서 외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경북의 보수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경북 중 구미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여러 공장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구미는 여전히 대표적인 공단도시다. 그 덕으로 외지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구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의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그가 친필로 쓴 낡은 ‘수출산업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도시 곳곳에서 박정희기념관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박정희로’라는 길도 있다. 박정희 생가와 기념시설들 앞의 큰 길이 박정희로다.

▲ 구미 시내에 우뚝 서 있는 ‘수출산업의 탑’. 하단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글씨가 있다.(좌) 구미 시내의 박정희로. ‘박정희대통령생가’라는 도로판이 사방에 눈에 띈다(우) ⓒ손호철

박정희 생가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큰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단체 참관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5인 이상 집합 금지 이전이었다). 역시 이 지역의 박정희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생가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새마을복을 입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농민들의 조각이다.

생가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고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실물 크기의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전신상이 세워져있어 이들이 살아 우리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두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추모관이 있고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옆에 선 앳된 박근혜의 사진을 보자,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고 능력 밖의 대통령 직을 맡아 결국 감옥을 가야했던 그의 삶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박정희 기념 장소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커다란 박정희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뒤에 박정희 동상, 그 뒤로 박정희의 연보와 새마을 악보 등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생가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손호철
▲ 박정희 부부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 박정희 생가 ⓒ손호철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함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태극기부대 등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진보주의자’ 등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된 민족반역자이며 경제 발전이란 이름 하에 유신 등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독재자’로 혐오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평가인가?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에 달려있다. 첫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인가? 둘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 즉 ‘개발독재’는 올바른 것이었나?

첫 번째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냐는 가치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보수적인 박정희 지지자들은 둘 다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진보적인 비판자들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에는 ‘그렇다’이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라는 입장,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지만 그 공보다 과가 더 크다는 입장도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진행될 사안이다. 1990년대 말 생겨난 박정희 향수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진보적 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한 학자는 “박정희 신화는 정치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지도자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비판했다. 박정희 신화는 극우 정부와 보수 언론 등에 의해 세뇌당한 ‘무지한 대중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박정희 현상은 단순히 대중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보릿고개에서 탈피해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보릿고개를 벗어난 주된 원인이 박정희는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대에 보릿고개를 벗어났으니 박정희 시대와 보릿고개 탈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지만, 박정희 때문에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인과관계)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의 체험을 논리로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가짜뉴스’ 등 자신들이 믿는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하는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위의 두 질문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중 ‘해방 70년과 박정희 신화’ 참조).

주목할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4인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특히 그의 개발 독재 때문이라면, 이들 나라들은 박정희도 없는데, 특히 홍콩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영국 지배 하의 ‘민주체제’였는데,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4인방의 공통점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남미 등과 다르게 산업화를 가로막는 지주 계급이 도시국가(싱가포르, 홍콩)라 원래 없거나, 분단에 따른 체제 경쟁(한국 대 북한, 대만 대 북한)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개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선진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싼 공산품을 수입하기를 원한 지주들은 산업화의 장애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기와 박정희 시기를 비교하면 이승만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다른 제3세계에 비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소련 동구가 망해서요.” IMF 경제 위기 당시인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의 의뢰를 받아 한국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만나 한국에 경제위기가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하게 국내 학계에선 거론도 안 된 ‘탈냉전’을 들고 나왔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내부 요인도 있지만 냉전 때문이에요. 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남미들과 달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허용한 것이지요. 헌데 소련 동구가 망하니 한국 등 아시아를 더 봐줄 필요가 없어 손 본 것이에요.” 다시 말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한 것은 박정희나 장제스, 리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이들 나라들을 미국이 봐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이 ‘한강의 기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를 대전제로 하여, 스탈린의 강압적인 산업화가 소련을 빠른 시간동안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들어줬듯이 노동자 등 민중들을 짓밟은 민중 억압적인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경제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파괴, 노동 탄압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경제적 성과를 이유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스탈린이 이 같은 강압적 산업화의 덕으로 히틀러의 공격을 격파해 세계를 구하고 유럽의 낙후국인 소련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든 ‘공’에 비하면, 박정희의 공은 ‘하찮다’고 하겠다. 특히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 중 주목할 것은 결과 제일주의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 제일주의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불행한 박정희의 유산이다.

결론적으로, 산업화의 장애인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성장이냐는 것인데, 나는 박정희 체제보다 조금 덜 빠르게 성장을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덜 억압적이고 ‘민중친화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정세의 효과에 따라 좌우로 진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죽은 박정희를 살린 것은 운동권에서 극우로 변신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뉴라이트’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흔히들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세력’,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진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지 민주노총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progressive)’는 아니므로 ‘개혁’ 내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 이 같은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희 향수는 박정희에 대한 학술적,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고,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좋은 연구가 없어서도 아니라, ‘개혁 정부’ 하에서 대중이 직접 체험한 ‘객관적 현실’의 결과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입증해준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결했던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친 10년 뒤에 치려진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서민층들은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박정희를 이어받은 냉전적 보수 정당에 압승을 선사했다.

이 같은 박정희 향수에 찬물을 뿌린 것도 진보사학자가 고대한 박정희의 잘못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박근혜의 실정이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자, 박정희 향수도 주춤해진 것이다.

▲ 박정희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 사진.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 있는 박근혜의 앳띤 모습

안타깝게도 박정희 향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조국 사태, 안희정‧박원순‧오거돈의 성추문, LH 사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여권 핵심의 전세값 인상 파동 등 연이은 측근들의 도덕적 실추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정희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평가와 박정희 향수는 ‘정세의 효과’이며 ‘현재의 정치에 대한 성적표’, 특히 ‘개혁 정부’에 대한 성적표이다. 박정희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면, 개혁 정부들이 죽을 쑤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박정희 향수가 조용하다면, 이는 개혁 정부들이 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치다.

박정희 생가를 떠나 이제는 새 청사로 이전을 하고 문을 닫은 구미경찰서로 향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등에 저항해 대구시민들이 일어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퇴각하다가 사살된 곳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조). 구미경찰서 앞에 서자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박정희의 ‘짧은 외도’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박정희의 형이 공격했던 구미경찰서. 그는 이후 도주하다 사살당했다. ⓒ손호철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일본군-인용자)에 채용해주실 수 없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일보>에 보도된 박정희의 혈서다.

박정희는 일제 말 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계에 어려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 육사에 입학해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에 근무했다. 그의 친일은 생계 때문에 불가피했던 ‘생계형 친일’과는 전혀 질이 다른 ‘출세형 친일’, ‘악질 친일’이다.

▲ 박정희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사본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한국군에 입대한 뒤 남로당(남조선로동당)에 가입해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여순 사건 후 있었던 군내 좌익 숙청 작업에 체포됐다(‘손호철의 발자국’ 14. 전남 여수순천,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참고). 하지만 동료들을 다 일러바쳐 목숨을 구했고 한국전쟁 덕으로 군에 복귀해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 후에도 미국이 급진적인 경제개발 계획에 반발하자 이를 주도한 영관급 주모자들을 쫓아내고 자신은 살아남았다(‘손호철의 발자국’ 29. 울산, <한국일보> 2021년 2월22일자 참고).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 밀고자를 거쳐 반공주의자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한 것이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변신도 서슴지 않았던, 동지도 부하도 언제든지 버렸던, ‘생존주의자’, ‘생존지상주의자’였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두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5‧16 쿠데타가 나자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 후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그를 버린 여인’이란 소설에서 여순 사건 때 박정희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를 이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생존주의자’로 민족, 민주주의, 친구, 동지, 국민을 모두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부인을 총격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딸마저도 결국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숭배와 증오의 주인공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다.

▲ 박정희 생가 뒷편 새마을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박정희의 동상 ⓒ손호철

<2021-04-16> 프레시안

☞ 기사원문: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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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도를 쥐고 있는 박정희 사진을 “박원순이 만든 빨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작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으로 선동질을 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보수단체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자경 씨가 법정 구속됐다.

10월 12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성호)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하고 방 씨를 법정 구속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일본의 누리꾼이 조작한 것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단체가 아닐뿐더러 “사진이 합성된 가짜”라고 감정한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이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민족문제연구소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의 원심 확정으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데 이어 형사소송 1심에서 방 씨의 유죄를 인정받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2016년 서울북부지검이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2017년 서울고검이 항고를 기각했는데 서울고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재판이 진행됐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건전한 비판과 학술적 토론은 언제든 수용하겠지만 무분별한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서석구 변호사가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방 씨의 변호를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단독] 일본 누리꾼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사진’ 법정까지 간 사연 (2017.1.13)

☞경향신문: [단독]검찰 불기소 처분한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법원 “공소 제기하라” (2017.5.24)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소송, 2심 승소와 스프레이 테러 형사조정
(2018.1.25)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4.20)

금, 2018/10/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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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 자료집]

 

이준 열사 순국일에 집터 표석 제막식 거행

 

▲ (좌) 이준 집터’ 표석 (시안), (우) 이준 열사의 집터이자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안국동 152번지 구역의 현재 모습

헤이그특사사건 110주년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될 당시에 거주했던 곳에 그를 기리는 집터 표석이 설치된다. 그간 이준 열사가 생전에 안국동에 살았던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주소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가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해 최초로 지번(안국동 152번지)을 확인한 결과,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될 당시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임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표석 설치를 신청하였고,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이번에 집터 표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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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도면 위에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를 표시한 자료이다. (『경성부일필매 지형명세도』,1929)

표석 문안에는 이곳이 1907년 당시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점 이외에 1905년 이준의 부인 이일정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사실도 함께 명기하였다.

표석 제막식은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가 되는 7월 14일 오후 1시부터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덕성학원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리며, 제막행사는 1시 40분에 해영회관 1층(하나은행 안국동지점) 전면에서 거행된다. 이번 제막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준 열사 유족대표로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명예회장이 내빈으로 참석한다.

이에 앞서 낮 12시 30분부터 식전행사로 이준 열사의 생애와 이준 집터에 관한 사료 소개와 전시해설이 있을 예정이다.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사장 이양재)에서 제공하는 전시유물에는 이준 열사의 유묵(遺墨) 2점과 관련 자료 4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목, 2017/07/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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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0313-10

▲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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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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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2017/08/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2017/08/01)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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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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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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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1005-13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05-14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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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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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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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목, 2017/10/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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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판사가 역사에 무식..즉각 항소할 것”

 

정미홍 전 아나운서. 2017.3.8/뉴스1 © News1 문요한 기자

(서울=뉴스1) 이유지 기자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血書)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58)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김종복 판사는 31일 한국 근현대사 비영리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아나운서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는 “트위터로 글을 단순히 리트윗한 것이라 해도 타인의 글이 명예훼손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단체를 표방하는 바, 증거도 없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을 내세우기 전 과거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삼았지만 만주일보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기에 박정희 혈서설은 조작됐다는 취지”라고 밝히고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선고 중 판사를 향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설)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며 “위증죄로 증인을 고소한 건이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어갔고 판사에게도 증거로 제출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는 선고 후 기자와 만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자 만주신문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라’라는 혈서를 썼다고 2009년 밝혔다.

정 전 아나운서는 2013년 2월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글은 ‘지난 5년간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일보는 1908년 폐간된 신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7월 강용석 변호사와 정 전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각각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 변호사가 500만원, 정 전 아나운서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원심을 확정했다.

 

<2017-08-31> 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 1심서 벌금 3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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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씨, 1심서 벌금 30만원

목, 2017/08/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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