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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뭉우리돌의 바다 / 김동우 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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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뭉우리돌의 바다 / 김동우 글·사진

admin | 수, 2021/08/04- 23:13

김동우 글·사진 | 수오서재 펴냄 | 2021. 07. 29. | 값 20,000원 | 440쪽 | 150*216(신국판변형(양장) | ISBN 979-11-90382-43-4 (03910) | 담당자 : 최민화 | 070-7713-0145 | 010-9803-1339

■ 책 소개

이 책의 표지 사진은 새벽 다섯 시경 애니깽 농장의 모습이다. 1905년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한인들이 매일 마주했을 풍경….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불과 5개월 전 ‘묵서가국’이라 불리던 멕시코로 떠난 조선인들이 있었다. 망조에 기운 나라를 떠나 살길을 도모했던 사람들은 애니깽 농장으로 가축처럼 팔려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산다. 작렬하는 유카탄 반도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농부들은 새벽 네다섯 시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동을 시작했다. 하루 일해 겨우 하루 먹고살던 지독히도 고된 삶.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사력을 다했을 줄은.

인도에 간 한국광복군, 애니깽 농부들, 체 게바라의 동지,
한인 최초 백만장자, 우리 공군이 시작된 땅…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바다 건너 독립운동 이야기

《뭉우리돌의 바다》는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작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인도 델리 레드 포트에서 우연히 그 장소가 한국광복군의 훈련지였음을 알게 된다. “인도라니, 그것도 우리 독립운동사라니!”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아홉 명의 한국광복군이 인도에서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접한 이야기에 작가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신내림 같았다는 그날 이후 홀린 듯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그들의 흔적을 좇기 시작한다.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녔다. 2017년부터 카메라와 배낭을 메고 수차례 비행기에 올라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겼다. 인도에서 시작된 우연이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등 10개국에 운명처럼 이르렀다. 이 책은 그중 바다를 건너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으로 간 한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다.

바다를 건너간 한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멕시코와 쿠바의 애니깽 농부들, 하와이 사탕수수 농부들, 프랑스에서 전쟁 시체를 치우던 노동자들 등 고달픈 이민자의 삶 속에서도 한 푼 두 푼 피와 땀의 결정체를 모아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김구는 《백범일지》 하권의 시작을 미주 한인 동포들의 눈물 나는 지원을 염두에 두고 썼다라고 밝히기도 한다.

이들은 어느 땅에 자리를 잡든 학교를 세워 우리말과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숭무학교 등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독립전쟁 일어나는 날, 도쿄의 하늘로 날아가리라” 각오로 공군을 양성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비행사양성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이곳을 지원한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는 한 달에 비행기 한 대 값 이상을 운영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대한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친 ‘뭉우리돌’이었다.

‘뭉우리돌’ 그들은 누구인가
찬란하고 강인한 뭉우리돌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누가 남았을까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말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독립운동 정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는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그를 협박했다. 그러나 김구는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김익주, 이근영, 이종오, 김세원, 임천택, 호근덕, 이윤상, 배경진, 김종림, 김형순, 장인환, 전명운, 황기환, 이우석…. 이 책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은 생소하다. 배우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교과서 밖에서 마주한 뭉우리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김없이 골라내려고 했던 뭉우리돌은 비단 상해와 만주,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의 독립을 일궈냈다.

찬란하고 강인했던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 때로는 남은 기록이 이름 석 자뿐일 때도 있었다. 김동우 작가는 대사관, 한인회 등을 수소문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는다. 불쑥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그들은 떠듬떠듬 부모로부터 배운 몇 마디 한국어를 건네며 따뜻한 한국식 밥상을 내왔다. 대한 황실의 후손 율리세스는 큰 반찬통에 담긴 김치를 꺼내와 작가의 입에 넣어주었고, 쿠바의 한인 모임에는 비빔밥이 차려졌다. “손님이 찾아오면 따뜻한 밥상으로 대접하라”는 부모로부터 배운 한국식 손님맞이를 기억하고 지키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호근덕의 후손 빅토르의 민박집에 묵었을 때 그의 아들은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애환, 고되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 독립 정신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가족에게 남긴 게 도대체 뭐냐고요.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란 자부심 하나로 살았어요. 그런데 점점 그게 아닌가 봐요.”_청산리 대첩 마지막 생존자 이우석의 후손 이춘덕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한국인으로서 그 시대 사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명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죠. 하지만 난 자라면서 내 가족이 아버지에 대해 불평, 불만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 모두 독립운동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거죠.”_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

친일은 꽃길, 독립은 가시밭길. 작가는 오늘날에게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이 수식을 지적한다. 한국과 교류가 적은 쿠바에는 아직까지 독립운동 서훈을 전달하지 못한 사례가 15건에 달한다. 2015년 한국일보 통계자료를 보면 국가의 지원을 제대로 받고 있는 후손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75.2%에 달하는 후손이 월 개인소득 200만 원 미만이며, 70%는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작가는 후손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찍는다. 불과 백 년이라는 시간 만에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독립운동을 표현한 방법이다. 카메라 셔터 속도를 길게 설정하고, 셔터가 떨어지기 전에 후손을 파인더 밖으로 나오게 한다.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독립운동의 역사, 그 현장에서 만난 후손들의 이야기는 짙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독립운동사의 빈칸, 시간에 파묻힌 영웅들을 찾아
국외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한 최초의 기록물

이 책은 부실했던 국외독립운동 자료를 수집, 축적했다는 점에서 사료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크다.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점인 ‘살리나크루스 해변’, 안창호가 멕시코 순방 당시 머물렀던 ‘프란세스 호텔’, 한인들이 일했던 애니깽 농장들, 독립운동가들의 묘소, 쿠바 대한인국민회 회관으로 쓰였던 건물, 친일파 미국인을 처단한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3·1혁명 2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뉴욕의 ‘타운 홀’ 등 주요 역사 현장을 직접 답사해 현재의 모습을 온전히 담았다.

국외독립운동사의 현장을 집요하게 추적한 취재기는 연신 놀라움과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이에 더해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작가가 가졌던 깊은 고민과 애정이 담긴 110컷의 사진이 책에 실려 있다. 단순히 취재기만 나열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스스로 독립운동사에 무지했음을 고백하며, 현장의 깊고 내밀한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파고든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자 질문이 산더미처럼 늘었다. 모든 단발성으로 끝나는 법 없이 여기저기 가지를 뻗어 나가며 입체적으로 이어졌다. 인물사 또한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으로 끝낼 게 아니었다. 거기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 상황이 한데 물려 있었고, 심지어 세계사까지 연결됐다.”

수많은 논문과 단행본, 국내외 기사를 망라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에 이르는 독립운동사를 꿰뚫었다. 오늘의 모습과 과거 역사적 사실이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져 이제껏 우리가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대한의 독립운동사가 새롭게 펼쳐진다.

“역사는 기억 투쟁이다”_큰별쌤 최태성 추천사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현장에서 작가가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빈 터’였다. 독립의 정신이 흐르지만 아무것도 남이 있지 않은 현장 앞에서 작가는 때론 울분을 토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사적지 현황과 변변찮은 보훈 정책을 지적하며 기록하고 기억할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가의 말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독립운동사가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까.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독립운동가 약 15만 명. 그들은 단지 ‘나라’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자유와 평화,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기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각별하다.

이들의 생은 오늘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들이 기필코 남기고 싶었던 고귀한 가치들이 다시금 대물림된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이제 기억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다.

“우린 모두 실패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조상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렸던 역사를 톺아보고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21세기 독립운동’이자 ‘대한이 사는 길’이다.”_본문 중에서

■ 작가 소개

김동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한다. 그러다 행복이 직장에 없음을 깨닫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한동안 여행자의 삶을 살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목덜미를 타고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2017년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 10개국의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살고 있는 후손들을 취재했고 국내에서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중 바다를 건너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으로 간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다룬다. 앞으로 유라시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계속 정리해나갈 예정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기념관, 갤러리 류가헌 등 전국 각지에서 〈뭉우리돌을 찾아서〉 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 《뭉우리돌을 찾아서(사진집)》, 《세계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현장》,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걷다 보니 남미였어》 등이 있다. 국가보훈처 보훈문화상, 다큐멘터리 온빛사진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메일 [email protected], 페이스북 facebook.com/dw1513, 
인스타그램 instagram.com/road_dongwoo

■ 추천의 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삶의 자취는 온전히 남는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화, 인권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각별하다. 그 안에 우리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실상과 미래의 지향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에네켄 농장에서 어린 후손을 만났을 때 느낀 슬픔과 격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척박한 삶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었다. 김동우 작가의 글을 읽는 동안 그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게 되었다. 산 자의 따뜻한 애정과 정성스런 발길로 죽은 이들의 숨결과 자취를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양하고 생생하게 기록해놓은 이 책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철호(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역사는 기억 투쟁이다.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기억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김동우 작가. 그는 이미 사라진, 그래서 더는 역사가 아닌 그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신념으로 누른다. 손끝을 통해 렌즈로 옮겨진 텅 빈 그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역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지금의 나와 우리를 있게 해준 역사.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예의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역사의 쓸모》 작가)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우리가 소중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 작가의 오랜 고민과 열정이 사진 한 장 한 장, 글의 한 문단 한 문단에서 느껴진다. 그의 정성스러움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그의 힘든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애달프고 뜨거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책에 나온 곳을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이름 모를 그의 묘지를 찾아 여기, 당신을 잊지 않고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시들어가는 꽃 옆에 생기 가득한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채워 드리고 싶다.
-유준상(배우, MBC 〈같이 펀딩〉 태극기함 프로젝트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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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이범석 vs. 박마리아

해방 직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했지만 그 뒤 상당히 많이 잊힌 인물이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때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범석(李範奭, 1900~1972년)이 바로 그다. 참고로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 산 묘소 폭발 참사로 희생된 외무부 장관 이범석(李範錫)은 다른 사람이다.

대한제국 종결 10년 전에 태어난 이범석은 지난 8월 15일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사후에나마 ‘장군의 귀환’을 이룬 독립투사 홍범도(1868~1943년)의 동지였다.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홍범도가 참여한 또 다른 대첩인 청산리대첩 때 이범석도 함께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가 백두산 인근의 만주 땅에서 거둔 청산리대첩 당시, 만 20세의 이범석은 이 대첩의 일부인 천보산 전투를 이끌었다. 이범석의 활약상에 관해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은 이렇게 기술한다.

홍범도 부대원의 일부와 이범석이 이끄는 1개 중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그리고 25일 새벽 한 차례 천보산 서남쪽을 지나다가 은동광(銀銅鑛)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 가운데 24일의 전투는 이범석 등 군정서 부대가 수행한 전투였다. 그리고 25일 새벽의 전투는 식량을 구하러 간 소수의 홍범도 부대원들이 적을 습격하여 벌어진 전투였다.

이범석은 김원봉(1898~1958)과도 인연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하에서 김원봉은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고 이범석은 제2지대장이었다. 이범석은 김원봉이 주목한 인물 중 하나였다. 김원봉은 이범석이 미국전략정보국(OSS) 등의 지원을 받아 해방 뒤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가 쓴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은 “당시 미군 측 정보 자료에는 김원봉이 ‘일제 패망 후 OSS가 한국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범석을 전후(戰後) 한국인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했다”라고 서술한다.

거물이 됐지만

▲ 이범석 장군 ⓒ 국가보훈처

김원봉의 예견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45세에 해방을 맞이한 이범석은 승승장구하면서 대통령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좌절했다. 이승만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로 막강해졌던 그는 그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전두환 정권 때의 이범석과 그를 구분할 수 있는 한국인들도 지금은 많지 않다.

이범석은 독립운동가 출신치고는 비교적 이례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의 호응을 받았다. 이들이 그를 필요로 한 이유는 군대를 통솔한 경력이 있다는 점 외에도 더 있었다.

김원봉과 달리 우파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1946년 10월 결성한 민족청년단(족청)이 100만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직을 결성하고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 등이 이범석의 강점이었다. 정부수립에 앞서 1948년 8월 4일 구성된 초대 내각에서 그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된 데는 그런 요인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김원봉의 예견대로 이범석은 거물이 됐지만, 이범석은 얼마 뒤 한계에 봉착했다. 이범석을 도운 요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도리어 족쇄가 된 것이다. 미국은 불가피하게 그를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도로 경계했다. 일반적인 보수가 아니라 극우 성향까지 띤 그가 자신이 보유한 군사 역량을 위험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 이범석을 경계했다. 자신을 도와 극우 청년조직을 육성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승만은 이범석이 그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까지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2003년에 <역사와 사회> 제31집에 수록된 정치학자 박영실의 논문 ‘해방 이후 이범석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이다. 실제적인 대통령은 이범석이다”이라는 풍문이 한국전쟁 이전에 존재했다고 소개한다. 이랬으니 이승만은 한편으론 이용하면서 한편으론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1952년 발췌 개헌 때, 이승만은 불법적인 이 개헌을 관철할 목적으로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범석이 경찰력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를 토사구팽했다. ‘사냥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경계했던 것이다.

이범석은 그해 8월 5일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놓고도 이승만의 버림을 받아 낙선했다. 이승만과 경찰의 지원을 받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 후보 이범석이 아니라 무소속 함태영이었다. 자신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심리를 이범석이 절감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련기사]”이름도 모르던 자”가 최고 득표… 이상한 대통령 선거

그 뒤 이범석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는 더 거세지고, 이범석은 자유당에서 밀려 나갔다. 이범석을 따랐던 족청계(민족청년단계) 역시 정치적으로 무력해져 갔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족청과 이범석은 더 이상 빛을 보기 힘들게 됐다.

박마리아·이기붕 부부의 집요한 공격

▲ 경무대에 모인 이승만-이기붕 가족. 왼쪽부터 이기붕 민의원의장 장남 이강석,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이기붕 의장, 이 의장 아내 박마리아, 이 의장의 차남 이강욱. 이강석은 이 대통령의 83세 생일에 맞춰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됐다. 1957. 5 ⓒ 국가기록원

미국과 이승만이 이범석의 힘을 뺄 때 앞장섰던 이들이 있다. 그중의 대표는 이승만 최측근 그룹의 이기붕이었다.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경쟁심은 이범석이 1956년 대선을 앞둔 1955년 11월 17일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을 만나고 돌아간 뒤에 이기붕 측근들이 보인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이범석의 경무대 방문이 이승만과의 재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설왕설래가 오가는 상황에서, 자신있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내놓은 이들이 바로 이기붕 측근들이었다. 1955년 11월 21일 자 <조선일보> 1면은 “자유당 주류파와 이기붕 씨 측근들은 이범석 씨의 정계 재등장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 있는 어조로 일소에 부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견제는 ‘부부 동반’의 양태를 띠었다. 이범석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903~1970)와 이기붕의 부인인 친일파 박마리아(1906~1960)도 관련돼 있었다. 이 중에서 박마리아는 김마리아와 대립할 뿐 아니라 김마리아의 남편과도 직접 충돌했다. 이범석을 자유당에서 밀어내기 위해 남편 이기붕 못지않게 앞장을 섰던 것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박마리아는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수준)와 이화여자전문학교(고교 수준)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사 원용덕(1908~1968)과의 연인관계를 청산한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난 이기붕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1941년 12월 19일 자 <매일신보>에 ‘내가 본 미국 여성’이란 글을 실어, “충군애국이란 그들에게는 이해키 어려운 문구”이며 “어느 날인가 그들의 빳빳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존심은 머리를 굽힐 날이 단연코 있을 줄 압니다”며 미국의 몰락을 예언했다. 그는 일왕(천황)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징병에 응하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미국 유학 경력을 이용해 ‘반미투사’로 활약했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동일한 경력을 이용해 친미파로 변신했다. 남편이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한 적이 있다는 점, 미국에서 영어 실력을 쌓았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이승만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와 친분을 쌓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힘을 축적해갔다. 의사에서 만주국 군의관을 거쳐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한 친일파 원용덕과의 옛정을 발판으로 군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박마리아는 이범석과는 정치적 공존이 힘들었다. 이범석은 독자적 기반과 실력이 있었던 반면, 박마리아는 이승만 부부와의 친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박마리아 같은 가신그룹은 이범석 같은 테크노크라트 그룹과 거리를 둬야 했지만, 권력욕이 강한 박마리아는 가신그룹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이범석이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이 둘의 공존은 힘들었다.

박마리아는 남편을 돕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이범석 밀어내기에 앞장섰다. 민족청년단(족청) 충북지부 부단장을 지낸 신형식은 1983년 4월 15일 자 <중앙일보> ‘자유당과 내각 (34)’과의 인터뷰에서, 족청에 대한 탄압 양상을 “자유당 내 비족청계와 야당뿐 아니라 백성욱·윤치영·박마리아 등 이 박사 측근들도 가세해 있었다”고 설명한 뒤, 박마리아가 신형식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신형식은 “뒤에 들으니, 나와 대립해 있던 충북 출신의 이충○ 의원이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에게 ‘신(형식)은 빨갱이’라고 얘기했고, 그 말이 프란체스카 여사한테도 전달되었다는 얘기들도 나돌았다”고 말한다.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를 이용해 이승만과 이범석 그룹의 사이에 이간을 붙인 것이다.

박마리아의 대단함은 다른 데도 있었다. 그의 탐욕은 권력뿐 아니라 재물까지도 지향했다. 남편과 함께 정치활동에 여념이 없었을 그 시기에 재산 불리기에도 치중했다.

1962년 5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 ‘이기붕 씨 일가의 최후’는 박마리아 집에 들어온 뇌물이나 선물과 관련해 “박마리아 씨는 성격이 세밀하고 꼼꼼해서 이러한 물건을 간수하는 데 빈틈없는 배려를 했다”며 이 집안 창고에 관해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만든 그의 창고는 4월혁명 때 털렸다. 시위대는 이 집에서 은그릇·구슬방석·금십자가·목걸이·녹용 등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재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 ‘이승만·이기붕 재산 대체로 판명’에 따르면, 그는 이기붕과 별도로 차명 부동산까지 갖고 있었다. 일례로,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김영운 명의의 대지 및 건물이 있었다.

미국과 이승만뿐 아니라, 이처럼 권력욕과 재산욕이 많은 박마리아와 그의 남편 이기붕도 이범석의 몰락을 부추겼다. 이범석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공격을 받고 서서히 몰락해가던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1960년에 부활 조짐을 보였다. 4·19 직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재기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5월 16일 선글라스 낀 친일 장군의 출현과 함께 그는 다시 움츠려들었다. 1963년에 국민의당을 창당하는 등의 안간힘을 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때 홍범도의 동지였던 이범석은 여느 독립투사들과 달리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그것은 그가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투사 출신이라는 점, 극우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조직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는 점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의 견제를 받더니 급기야 박마리아·이기붕 커플의 집요한 공격까지 받아 자유당 정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김종성(qqqkim2000)

<2021-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

화, 2021/09/0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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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연대를위한함안시민모임 지적 … 경남 함안군 “친일 몰랐다. 문협 추천받아”

▲ 경남 함안군 가야읍 산책로 ‘아라길’에 세워진 조연현 시판. ⓒ 윤성효

경남 함안군이 ‘친일’ 행적이 뚜렷한 조연현(趙演鉉, 1920~1981)의 시를 새긴 ‘시판’을 설치해, 시민단체로부터 철거 요구를 받고 있다.

함안군은 지난 7월 가야읍 산책로 ‘아라길’에 지역 출신 문인들의 시판을 설치하면서, 조연현이 쓴 시 <진달래>를 새겨 놓았다.

참여와연대를위한함안시민모임(대표 조현기, 아래 시민모임)는 8일 “함안군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며 “함안군은 당장 아라길 조연현 시판을 철거하라. 조평래 함안문인협회장은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함안 출신으로 문학평론을 했던 조연현은 동국대 교수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문화포상”(1963), “문교부 문예상 문학부분상”(1965), “예술원상”(1966), “국민훈장 동백장”(1970), “3·1문화상”(1972)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하고 일제를 위한 글을 썼다. 그는 <동양지광>에 1942년 5월 “동양에의 향수”, 1942년 6월 “아세아부흥론서설”, 1943년 1월 “문학자의 입장”이란 글을 썼고, 1943년 8월 <국민문학>에 “자기의 문제로부터”, 1943년 12월 <신시대>에 “평단의 일년”을 발표했다.

<동양지광>과 <국민문학>, <신시대>는 친일문학잡지로 분류된다. 조연현이 이들 잡지에 쓴 6편 글은 ‘친일’ 관련 글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아세아부흥서설”에서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대동아 공영권이라고 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일 밖에 없다”, “전국의 청년학도 제군! 자각과 복수의 마음으로 불타며 아시아 공영권의 건설에 매진하자”라고 했다.

친일행적을 거론한 시민모임은 “한마디로 당시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전국의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선동한 것”이라며 “이것이 친일이 아니고 무엇이 친일인가?”라고 했다.

이들은 “조연현에게 누가 총칼이라도 들이대고 이런 글을 쓰라고 했나? 조연현 본인이 자발적으로 여러 차례 쓴 글이다”며 “독립운동가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조연현은 우리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해 싸움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친일이 아니고 무엇이 친일인가?”라고 했다.

조연현의 친일행적은 여러차례 지적을 받아왔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실천문학, 민족정기를세우는국회의원모임, 나라와문화를생각하는국회의원모임이 2002년, 광복 57주년을 맞아 “친일문학인 42인”을 선정했을 때 서정주, 노천명, 이광수 등과 함께 조연현도 들어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언급한 시민모임은 “당시 42인 선정 기준은 적극적인 친일 글이었다”며 “창씨개명이나 친일단체 참여 여부, 어쩌다 글 한 편 정도는 기준에 넣지 않았다. 조연현을 비롯한 이들 42인은 ‘어쩔 수 없는 친일’, ‘살아남기 위한 친일’이 아니라 스스로 상습적으로 친일을 주장했던 것이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해방 후 얼굴을 바꾸고 언제 그랬냐라는 듯이 기자로, 교수로, 유명 문학인으로 요직으로 차지하고 행세를 해왔던 것이다. 2000년대 친일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말이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조연현이 수록되어 있다.

친일 문인들의 시비가 세워졌다가 없어진 사례가 있다. 시민모임은 “2019년 5월 3일 강원도 춘천시는 춘천문학공원에 있던 서정주, 최남선, 조연현 3인의 시비를 철거해 땅에 묻었다”며 “춘천문인협회와 춘천시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친일문학인 42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들 3인의 비를 철거한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단체는 “2019년 경기도 부천시도 문학비 전수조사를 벌여 친일문학인 42인에 포함된 서정주, 노천명, 주요한 등의 시비를 없앴다”며 “당시 부천에는 조연현의 비석이 없었기 때문에 철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만약 조연현 시비가 있었다면 당연히 함께 철거됐을 것”이라고 했다.

시민모임은 “이제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라며 “함안군은 더 이상 함안문인협회 뒤에 숨지 말고 당장 아라길에 설치한 조연현의 ‘진달래’ 시판을 뽑아내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시민모임은 조평래 함안문인협회 회장이 쓴 글도 언급했다. 조 회장은 최근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20대 청년의 글이 얼마만큼 일제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쳤었을까? 5인 가족이 공출로 바친 관솔 기름 한 말 보다 더 큰 도움을 주었을까?”라고 했다.

이에 대해, 시민모임은 “궤변이다. 스스로 문인임을 자임하는 사람이 글의 무게를, 그것도 대중매체에 실려 활자화된 글의 힘을 부정하다니”라며 “글은 물리적으로는 부지깽이 하나도 움직일 수 없지만 다수 대중,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글’이 그렇게 관솔 한 말보다도 영향력이 없다고 믿는다면, 그럼 도대체 글은 왜 쓰고, 문학은 왜 하시나?”라고 덧붙였다.

함안군청 공원사업관리소 담당자는 “산책길에 주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해, 함안문협의 추천을 받아 시판 31개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조연현의 친일행적에 대해, 그는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함안문협에서 문학적 가치를 판단해 추천을 받았다”며 “철거 요구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윤성효(cjnews)

<2021-09-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수, 2021/09/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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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강제동원 피해자 정아무개씨의 자녀들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마친 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왼쪽)과 전범진 변호사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또다시 패소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하급심 판단이 엇갈리는 가운데 또다시 패소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8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정아무개씨의 자녀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피해자 유족들은 아버지인 정씨가 1938년 일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강제동원돼 1940∼1942년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서 일했다고 주장하며 2019년 4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앞서 지난달 박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마테리아루(옛 미쓰비시광업)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민법상 소멸시효(3년)가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바 있다.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점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있던 2012년으로 본 것이다. 반면 2018년 12월 광주고법 민사2부(재판장 최인규)는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은 환송 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즉시 확정되지 않았다. 대법원이 2018년 10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확정했다”며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로 판결이 확정된 시점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판단했다.

피해자 유족들을 대리한 전범진 변호사는 1심 선고 뒤 기자들을 만나 “지난달 소멸시효 경과를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재판부와 같은 재판부인 만큼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라고 예상된다. 광주고법 판례의 경우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시점을 소멸시효 기산점이라고 판단했고, 파기환송 판결은 잠정적인 판결이어서 항소심에서 충분히 다퉈볼 만하다고 생각된다”며 항소를 시사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도 “대법원 확정판결 뒤에도 일본 전범기업들이 대화에 응하지 않아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확정판결 취지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윤영 기자 [email protected]

<2021-09-08> 한겨레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서 또 패소

※관련기사

☞뉴시스: “시효 지났다” 선고한 판사, 日징용소송 또 패소 판결(종합)

수, 2021/09/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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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편에선 친일 청산의 일환으로 친일 재산을 환수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취재결과, 최근 법원이 친일파 이규원의 후손의 땅을 “국가에 돌려주라”고 결정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 환수된 친일 재산인데, 갈 길은 멉니다. 오늘(8일) 추적보도 훅은 친일 재산을 환수하는 게 어려운 이유를 파헤쳐봤습니다.

박지영 기자입니다.

[기자]

친일파 이규원은 1929년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일본 천황이 직접 작위를 준 것인데, 이규원은 그중에 자작을 습작한… 또 친일 단체에 핵심 상층으로 참여한 행위도 있고…]

그 후손이 넘겨 받은 땅을 찾아가봤습니다.

이곳이 이규원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땅입니다.

정부가 최근 소송을 내 광복 76년 만에 국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지난 2월, 법무부는 이 씨의 후손을 상대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지난 4월, 법원은 “땅이 국가의 것이 맞다”는 취지로 화해권고결정을 했습니다.

이씨 후손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소유권 이전이 확정됐습니다.

938㎡, 공시지가로 약 5300만 원 상당입니다.

정부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총 17건의 소송에서 이겨 친일파 땅 6425㎡, 300억 원가량을 환수했습니다.

현재 친일파 후손과 벌이고 있는 소송은 5건입니다.

광복회가 “가장 많은 친일재산을 소유했다”고 지목한 이해승의 후손에게 제기한 것도 있습니다.

이해승은 1910년 일본에게 귀족 작위를 받았고,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일제로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해승의 후손이 소유한 땅입니다.

법무부와 후손은 지난 2월부터 이 땅에 대해 법적 다툼을 해왔습니다.

14년에 걸친 이해승 후손과의 소송전을 추적해봤습니다.

정부는 2007년, 당시 공시지가로 300억원이 넘는 이해승 후손의 땅을 환수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0년 국가에 “돌려줄 필요가 없다”며 후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04년 만들어진 ‘반민족규명법’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사람”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씨의 경우 “조선왕실의 친척이라서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겁니다.

비판이 제기되면서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부분이 법에서 빠졌습니다.

[김의래/법무부 국가송무심의관 : 법 자체가 종전의 법에 대한 반성적 의미에서의 개정이고, 법원이 현명하게 판단해줄 수 있도록…]

전문가들은 해방 이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 말합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해방 당시 법에 의하면) 중요한 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을 전부 또는 일부 또는 1/2을 몰수하도록 돼 있습니다. 근데 실제 거의 그걸 못 했죠.]

프랑스의 경우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협력행위 처벌에 관한 명령’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에게 대해 재산몰수를 명령했습니다.

오스트리아도 1945년 ‘전범처리법’을 만들었습니다.

나치에 가입했거나 부역행위를 한 사람은 전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광복한지 60년인 2005년이 되어서야 정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2006년부터 친일파의 재산을 쫓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도 4년만에 활동을 마쳤습니다.

이제 당사자들의 신고나 공익 고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최근 광복회는 이해승의 후손이 갖고 있는 스위스그랜드호텔 부지 일부도 친일재산임을 확인하고 국가에 귀속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공시가격으로만 263억 원어치입니다.

(화면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영상취재 : 방극철 박대권 / 영상디자인 : 이정회)

<2021-09-08> JTBC

☞기사원문: JTBC뉴스[단독] “친일파 후손 땅, 국가의 것”…아직도 갈 길 먼 이유

목, 2021/09/0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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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 “국정원 서버에 불법 사항 다 있다, 폐기 전 확보해야”

▲ 국정원 불법공작 대응 네트워크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규탄, 박지원 국정원장 면담 요구 시민사회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있을 수 없는 매국행위이자 반역행위다. 국정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재발방지 대책이 요구된다.”

9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규탄, 박지원 국정원장 면담 요구 시민사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최근 일본 극우단체 지원 등의 의혹을 받는 국가정보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진보연대를 비롯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으로 구성된 ‘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는 “국정원 사찰 해외 공작 의혹에 대해 명백히 밝히고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정부와 국정원에 엄중히 요구한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6월 1일과 8월 10일 MBC 은 ‘국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정의연 등 지원단체를 비난하고 최재익 독도수호연대 활동가를 위협하는 일본 극우단체를 지원하고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일본 공안 기관에 정보를 주고 일본 공안은 이 정보를 일본 내 극우세력에게 전달했다는 것. 이로 인해 최재익 독도수호연대 대표의장과 윤미향 당시 정의기억연대 대표가 일본을 찾을 때마다 일본 극우세력 수십여 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폭언과 망동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 대표가 타고 있던 차량은 일장기로 뒤덮이는 조롱을 당했고, 윤미향 의원도 일본 공항에서 속옷까지 검사당하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은 해당 방송에서 국정원이 ▲일본 자민당의 극우정책을 뒷받침하는 극우단체인 ‘국가기본문제연구소’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 ▲일본 내 혐한여론 조성 ▲일본 극우인사 국내초청 및 접대, 북한 관련 정보 브리핑 ▲2015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관여했다는 등의 내용을 보도했다.

▲ 국정원 불법공작 대응 네트워크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규탄, 박지원 국정원장 면담 요구 시민사회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 국정원 불법공작 대응 네트워크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규탄, 박지원 국정원장 면담 요구 시민사회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이날 회견에서 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는 “일본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한 굴욕스러운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왜 국정원이 나섰는지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며 “국정원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또 “박지원 국정원장은 일본 극우단체 지원 등 일본에서의 불법 공작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었다”라면서 “공작 의혹과 위안부 합의 의혹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지난 8월 27일 박지원 국정원장은 국정원 개혁위와 적폐청산 TF 조사를 거쳐 검찰 수사 및 법원 판결로 확정된 잘못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난 7월 24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가정보기관의 불법 사찰성 정보 공개 및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 결의안’ 합의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단체의 지적대로 이날 사과에서 박 원장은 국정원의 불법 해외공작 의혹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날 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는 ‘일본 극우인사들을 초청, 접대하고 북한정보를 브리핑했다는 의혹의 진상은 무엇인가’,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국정원 내 TF의 역할과 주요 업무는 무엇이고, 합의 과정에서 개입 경위와 내용은 무엇인가’ 등의 내용이 담긴 공개 질의서를 국정원에 전달했다.

기자회견에 함께한 강성국 국정원감시네트워크 활동가도 “국회가 국정원의 불법사찰 진상규명에 의지가 있다면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치와 사찰피해자에게 사찰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국정원의 불법사찰과 해외공작에 대한 내용은 국정원 서버에 다 들어있다. 국정원의 자료가 어떻게 폐기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특별법 제정이 지금 당장 요구된다”라고 강조했다.

글: 김종훈(moviekjh) 사진: 이희훈(lhh)

<2021-09-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매국이자 반역행위… 책임자 처벌해야”

※관련기사

☞뉴스핌: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진상규명하라”…시민단체, 박지원에 면담 요청

금, 2021/09/1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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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7) ‘내역사’ 시즌 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1부”

☞ (8.11) ‘내역사’ 시즌 6: 12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_만화 친일파 열전_박시백 화백과 함께”

☞ (8.11)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2부”

☞ (8.10)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1부”

☞ (7.06) ‘내역사’ 시즌 6: 10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대전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6.29) ‘내역사’ 시즌 6: 9화: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 (6.22)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2)

☞ (6.15)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1)

☞ (6.14) ‘내역사’ 시즌 6: 7화: 긴급편성 “역사부정주의 논리를 담고 있는 6월 7일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말하다

☞ (6.08) ‘내역사’ 시즌 6: 6화: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의 저자 김형민피디와 함께

☞ (6.01) ‘내역사’ 시즌 6: 5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광주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5.25) ‘내역사’ 시즌 6: 4화: “91년 5월투쟁 30주년 특집_기억을 넘어 실천으로”

☞ (5.18) ‘내역사’ 시즌 6: 3화: “5.18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 영화 김군의 강상우 감독과 함께

☞ (5.11) ‘내역사’ 시즌 6: 2화: “미얀마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다”

☞ (5.04) ‘내역사’ 시즌 6: 1화: 새로운 시즌을 시작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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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9/1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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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 마지막 격전지였던 오키나와에서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인들도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죠.

일본 정부가 뒤늦게 유족들에게 유골을 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한국인 희생자들은 신청조차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도쿄에서 고현승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치열한 전투가 몇 달간 이어졌고, 군인과 민간인 등 20만 명 넘게 숨졌습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도 1만 명 넘게 포함돼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70년 넘도록 사망·실종자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엔 유골이 방치돼있습니다.

정부 대신 유골을 찾아나선 건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1970년대 초부터 발굴 작업을 벌여 수백 명의 유골을 찾아냈습니다.

[구시켄 타카마쓰/시민단체 ‘가마후야’ 대표]
“처음에는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유골을) 보내주자 해서 지금껏 해왔습니다.”

뒤늦게 일본 정부는 5년 전부터 유골과 유족들의 DNA 대조 신청을 받았는데, 신청 대상에서 한국인은 쏙 빠져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타이완의 유족들도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함께 진행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이런 사실조차 몰랐던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은 지난 6월에서야 DNA 감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협의회 대표]
“(일본 정부는)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 내 유골을 수습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낼까 고민하고, 이 희생자들이 어떤 분들이었나 (생각해 주십시오.)”

신청자는 이제까지 11명, 남아있는 유족들 대부분이 고령이라 시간이 많지 않은데, 일본 정부는 절차를 따지며 검토하겠단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미군 비행장 이전에 필요한 토사를 유골이 많이 묻혀 있는 지역의 흙을 활용하기로 해 유골 훼손도 우려됩니다.

[일본 방위성 관계자]
“토사 조달에 대해 확실하게 검토하겠습니다. (검토만 할 게 아닙니다. 더 늦추면 안 됩니다.)”

가족이 강제로 끌려가 숨진 것도 억울한데 76년이 지나 유골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지..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에 유족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고현승입니다.

영상취재: 김진호(도쿄) / 영상편집: 민경태 / 자료: 가마후야· 민족문제연구소

<2021-09-14> MBC

☞기사원문: 한국인 희생자 1만 명 ‘억울한 죽음’‥日, 유골도 차별

수, 2021/09/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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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신흥무관학교 제2편 : 망명로드

☞ 신흥무관학교 제1편 : 신민회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수, 2021/09/1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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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부질문-정치] 독립유공자 후손 논란 관련 질의로 풀이… 전해철 “친일 문제에 상당히 기여”

▲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오후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를 문제 삼았다. 사진은 조 의원(신임 국회 교육위원장)이 8월 31일 본회의에서 당선인사를 하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오후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를 문제 삼았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적 권위’를 정부에서 만들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경선 후보의 증조부·조부의 독립유공자 논란 때 “최 후보 조부와 증조부의 행적은 독립운동가의 삶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최 후보 측은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100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건가”라고 반박했다. 참고로, 조 의원은 최재형 캠프의 기획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이날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기관인가, 정부가 친일문제에 대해 유권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전 장관은 “(국가기관이) 아닌 걸로 안다. (유권해석 권한을) 정부가 부여한 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로 안다”고 답했다.

그러나 조 의원은 재차 “국가기관도 아니고, 유권해석 권한을 부여받은 적도 없는데 정부 기관들이 친일파 판정 관련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판단을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나”며 “왜 정부가 민족문제연구소를 국가가 공인한 ‘친일감별사’처럼 대하나”라고 물었다.

“정부 기관이 연구소 판단 받들어”… “친일 문제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사실”

이에 전 장관은 “(조 의원이) 어떤 사안으로 질문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문제에 대해 상당한 사회적 합의 내지, 사회적 공신력까진 안 가더라도 (친일 문제에 대해) 상당한 근거를 제시했던 것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답했다.

조 의원은 곧장 “(민족문제연구소가)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는 걸 문제제기한 것 아니다. 국가보훈처나 행정안전부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친일 전력) 조회를 요청하고 회신과 답변을 들어서 그대로 결정하지 않냐”며 “정부가 미필적 고의로 민족문제연구소에 공적 권위를 부여해서 국민들이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기관인 줄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 장관은 다시 “어떤 사안에서 우리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용역이나 의견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친일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가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라서 그런 의견 제시를 듣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닌 다른) 민간연구소라도 저희(정부)들이 의견을 듣고 있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조 의원은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말하기로 하자”면서 해당 질문을 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선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사회주의 계열로 공산국가 건설을 추구하려던 항일운동가들을 인정해줘야 하는지 묻고 싶다. 만약 남한마저 그런 시도가 성공했다면 한민족은 ‘폭망’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장관은 이에 대해 “구체적 사안이 아니어서 일반론적으로 말하긴 어렵다”면서 “(해당 대상자들에 대한) 보훈 및 훈장과 관련해 사회적 여론을 잘 모아보겠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이경태(sneercool)

<2021-09-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최재형 캠프’ 조해진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 공인 ‘친일감별사’냐”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입장문] : 국민의 힘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조부의 일제강점기 행적 논란에 대해

수, 2021/09/1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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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4) ‘내역사’ 시즌 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2부”

☞ (9.07) ‘내역사’ 시즌 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1부”

☞ (8.11) ‘내역사’ 시즌 6: 12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_만화 친일파 열전_박시백 화백과 함께”

☞ (8.11)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2부”

☞ (8.10)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1부”

☞ (7.06) ‘내역사’ 시즌 6: 10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대전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6.29) ‘내역사’ 시즌 6: 9화: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 (6.22)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2)

☞ (6.15)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1)

☞ (6.14) ‘내역사’ 시즌 6: 7화: 긴급편성 “역사부정주의 논리를 담고 있는 6월 7일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말하다

☞ (6.08) ‘내역사’ 시즌 6: 6화: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의 저자 김형민피디와 함께

☞ (6.01) ‘내역사’ 시즌 6: 5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광주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5.25) ‘내역사’ 시즌 6: 4화: “91년 5월투쟁 30주년 특집_기억을 넘어 실천으로”

☞ (5.18) ‘내역사’ 시즌 6: 3화: “5.18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 영화 김군의 강상우 감독과 함께

☞ (5.11) ‘내역사’ 시즌 6: 2화: “미얀마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다”

☞ (5.04) ‘내역사’ 시즌 6: 1화: 새로운 시즌을 시작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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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21/09/1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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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 건립기념글 그대로 있어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조각 김경승 민복진 / 1969년 8월 23일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세움’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뒤쪽에 붙은 머릿돌 내용 중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이 조각했다고 새겨졌다. 그리고 백범 동상 우측 하단부에는 김경승과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립기념글도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건립기념글에는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라는 글과 함께 “서울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혔다.

잘 알려졌듯 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1운동 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무엇보다 1940년 오늘(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실제로 1940년 9월 15일 백범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선언문에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적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행사가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다.

남산 백범 동상 뒤쪽 우측에 새겨진 백범 김구 선생 약전에도 “1940년에 임시정부를 중경(충칭)으로 옮기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다”라고 강조됐다.

한 마디로 백범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는 뜻. 그러나 해방 후 백범이 1949년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뒤 백범을 둘러싼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된다.

백범은 1962년 우리 정부로부터 1급 훈장은 대한민국장을 받았지만 7년 뒤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한 백범 동상을 현재의 자리인 남산 자락에 세운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범동상 아래쪽에 직접 건립기념글을 썼다.

이후 90년대 문민정부를 거치며 남산에 위치한 백범 동상을 포함해 친일민족 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작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백범 동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다.

한국광복군 창립일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광복회는 성명을 통해 “친일작가 김경승이 만든 남산 백범동상을 철거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작품을 제작 설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김경승, 어떤 길 걸었나?

▲ 일제강점기 도쿄미술대학교를 재학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씨. ⓒ <친일인명사전>

김경승, 1915년에 태어나 1992년 사망했다.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 조각가다. 해방 후 친일행위가 문제돼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후 경성사범학교, 경성정신여학교, 풍문여자중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시 문화위원회 및 국전 창설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이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9년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김경승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인물이다. 일본 유학 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후원한 ‘결전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또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일미술단체에 소속돼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이어가면서 전시회로 벌어들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일제강점기 후반부 작가로서 협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미는 김경승이 1942년에 만든 ‘여명’이라는 작품. 1942년 제21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젊은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현장에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으로 김경승은 그해 총독상을 수상한다. 1942년 6월 3일 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김경승은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려 했다. 나는 이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답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경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미전 마지막 대회에 <제4반>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다시 한번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으로 표현돼 당시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여성 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거되는 김경승 작품… 서울시 “철거 관련법 없다”

▲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이런 가운데 지난 13일 정북 정읍시는 김경승이 1987년에 제작한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김경승의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정읍시는 국가지정문화재 구역에 있는 전봉준 동상을 지난 4월 문화재청의 현상변경허가 승인을 받아 철거를 결정했다. 그 자리에는 동학농민군 행렬을 형상화한 작품이 들어선다.

앞서 김경승이 1959년 제작해 남산 일대에 세워졌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지난 201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새로이 건립되면서 새 작품으로 교체됐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 있던 김경승 제작 이순신 장군 동상 역시 김경승의 친일행적 등을 이유로 지난 2015년 교체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관련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결과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은 현재 서울 남산 백범 김구 동상을 비롯해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위치한 안창호 선생 동상, 서울 종묘광장 이상재 선생 동상,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 자리한 4.19혁명기념탑,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세종대왕상, 서울 양화대교 정몽주 동상, 경남 통영 남망산 정상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 그리고 서울 남산 백범 동상 아래쪽에 위치한 김유신 동상 등이 있다. 다수 작품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김경승 손으로 제작됐다.

<2021-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관련기사

☞KBS: [전북의 창] 친일 작가 전봉준 동상 철거..역사 속으로

☞광주일보: ‘친일작가 제작’ 정읍 황토현 전봉준 동상 철거

☞더팩트: 정읍 친일 작가 논란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 ‘역사 속으로’

※관련영상

월, 2021/09/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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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요.

광복 80주년까지 4년 남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생존 애국지사의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철희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영관 애국지사.

어느덧 올해 98살이지만 또렷한 말투에선 자긍심이 넘칩니다.

1944년, 만 20살에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가까스로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를 마중을 왔더라고요.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하염없이 그냥 눈물 흘리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 태극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목숨 걸고 왔구나.’]

그로부터 2년 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여생은 후대에 올곧은 저항 정신을 남기는 데 쏟자고 다짐하고 기념사업회를 세워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독립의 정신이 흐려지는 사회가 안타깝습니다.

지사로서의 삶 역시 쓸쓸히 잊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또 역사적 사실, 역사적 팩트를 잊어버리면, 외면하면 똑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이런 엄혹한 현실을 잊지 말고….]

김 지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애국지사의 두상과 손발의 형상을 남기는 겁니다.

[김서경 / 작가 : 기록물을 모은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언제 어떻게 발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계신 분들을, 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가 기록하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아서….]

첫 번째 주인공은 김영관 지사.

단순히 외관뿐 아니라 일생의 이야기와 품고 있는 생각들까지 모두 사료에 담을 계획입니다.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온 한 사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운성 / 작가 : 모든 애환과 아픔과 가족 간의 갈등, 고통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것들을 같이 한번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광복 80주년까지 4년도 남지 않은 지금.

작가들은 그사이 지사 한 분이라도 더 만나 한 마디라도 더 생생하게 남기겠다는 목표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YTN 김철희입니다.

YTN 김철희 ([email protected])

<2021-09-22> YTN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생존 독립운동가 손발까지 영원히 남긴다

수, 2021/09/2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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