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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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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admin | 목, 2021/07/29- 11:18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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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4강 –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민주화 이후 한국언론, 다시 개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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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8/25-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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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8/2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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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5강.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왜 언론은 갈등과 불신을 만드는가? – “기레기”의 탄생과 “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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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8/2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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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
오는 8월 29일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경술국치 110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독립운동 명문가인 경주 최부자집에서 민간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한일병합조약 등사본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다량 발견됐습니다.

한기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END▶

◀VCR▶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명문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1910년 경술국치 당시
한일병합조약을 등사한 서류입니다.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제1조부터
총 8개조에 이르는 치욕스러운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고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실려 있지만,
민간에서 등사본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INT▶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일제가) 강제 병합이기는 하지만 병합에 대해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주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보낸 게 아닌가 그렇게 추정이 되거든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이 발각돼 옥고를 치르던 최부자집
후손 최준에게 당시 유림들이 보낸 위로 서찰도 발견됐습니다.

수인번호 404가 표시돼 있고, 유림 218명의 이름 아래 각각 도장이 찍혀 있어,
최부자의 독립운동 정신이 유림계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열사가 최부자에게 보낸 서찰도 나왔습니다.

◀INT▶ 최창호 이사/ 경주 최부자 민족정신 고양회
“집안의 (어른이) 독립운동하시다가 구전으로 내려오던 게 사실 사류로 나오니까 재확인이 되고,
선조분들깨서 얼마나 독립을 위해 활동하셨나 이런 것도 보이고..”

이 자료들은 지난달 이곳 최부자집 안채에서 2만여 점의 고문서와 함께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는 2년 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자료도 나오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고문서들을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MBC NEWS 한기민입니다.

<2020-08-25> MBC 

☞기사원문: 경주 최부자집에서 쏟아진 독립운동 자료

수, 2020/08/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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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요.

광복 80주년까지 4년 남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생존 애국지사의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철희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영관 애국지사.

어느덧 올해 98살이지만 또렷한 말투에선 자긍심이 넘칩니다.

1944년, 만 20살에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가까스로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를 마중을 왔더라고요.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하염없이 그냥 눈물 흘리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 태극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목숨 걸고 왔구나.’]

그로부터 2년 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여생은 후대에 올곧은 저항 정신을 남기는 데 쏟자고 다짐하고 기념사업회를 세워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독립의 정신이 흐려지는 사회가 안타깝습니다.

지사로서의 삶 역시 쓸쓸히 잊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또 역사적 사실, 역사적 팩트를 잊어버리면, 외면하면 똑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이런 엄혹한 현실을 잊지 말고….]

김 지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애국지사의 두상과 손발의 형상을 남기는 겁니다.

[김서경 / 작가 : 기록물을 모은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언제 어떻게 발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계신 분들을, 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가 기록하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아서….]

첫 번째 주인공은 김영관 지사.

단순히 외관뿐 아니라 일생의 이야기와 품고 있는 생각들까지 모두 사료에 담을 계획입니다.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온 한 사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운성 / 작가 : 모든 애환과 아픔과 가족 간의 갈등, 고통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것들을 같이 한번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광복 80주년까지 4년도 남지 않은 지금.

작가들은 그사이 지사 한 분이라도 더 만나 한 마디라도 더 생생하게 남기겠다는 목표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YTN 김철희입니다.

YTN 김철희 ([email protected])

<2021-09-22> YTN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생존 독립운동가 손발까지 영원히 남긴다

수, 2021/09/2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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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시 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6강.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
‘적폐언론과의 싸움을 선언하다’

※관련영상 

☞Youtube: [안진걸 레알 분노현장]조선일보 고발현장 깽판친 조선기자/왜 우리고발?헐!!! 

Youtube: 6.18 [단독 공개] 조선일보 기자들의 생사람잡는 취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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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0/08/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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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씨, 친일단체 ‘수양단’ 발행 단보 9호 공개
거물급 친일파 대거 포진…민족정신 말살 등 자행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친일단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해 태평양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친일단체 ‘수양단’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방조약이 공포된 국치일(8월 29일)을 사흘 앞둔 27일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한애(汗愛)’라는 제목의 이 단보는 1924년 1월 조직된 수양단 광주지부가 매월 발행한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단보는 조직이 결성된 그해 9월 26일 인쇄됐다. 가로 18㎝·세로 26.2㎝ 크기이며, 4쪽 분량이다.

단보는 수양단의 2대 강령인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로 시작한다.

이는 ‘땀 흘려 단련하고, 동포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 동포는 일제와 조선인을 모두 아우른다. 이어 조선인이 ‘황국신민’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글이 수록돼 있다.

수양단 광주지부는 1922년 8월 발족된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의 지역 기구격이다.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는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를 2대 기치로 내걸고 중견 청년 육성 및 사회 정화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고, 그 중심에는 거물급 친일파들이 다수 포진됐다.

실제 이 조직의 고문으로 조선총독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역임한 박영효가 이름을 올렸고, 경술국적 윤덕영,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민병석 등 친일파들이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주민을 비롯해 농고생, 사범생 등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신사를 참배하고 강습회를 개최해 천황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또 대규모 시가행진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전개했다.

수양단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8년 5월 29일 전북 이리에서 수양단 호남대회를 개최한 이후 1939년 3월 19일 서울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수양단 총동원대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선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을 주축으로 힘을 모아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게 요지이다.

즉, 수양단은 조선인도 천황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강요·주입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한 뒤 태평양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역할을 주도했던 것이다.

심정섭씨는 “수양단의 단보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일제가 주도면밀하게 황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황국 신민화 정신을 주입시키고 시가행진 등을 통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결국 태평양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송대웅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27> 광남일보 

☞기사원문: [국치일 기획]”조선인 황국 신민화 주도…태평양 전쟁 내몰아”

월, 2020/08/3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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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의회, 여론조사 통해 결정키로
지역단체 “친일작품 당장 교체해야”

춘향영정을 그린 민족화가 강주수 작품(왼쪽)과 친일화가 김은호 작품(오른쪽).

친일화가 작품 논란으로 교체를 추진했던 전북 남원 광한루원 춘향영정이 시의회의 결정으로 유보되자, 지역에서 교체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 등은 남원시의회가 지난 25일 열린 총회에서 의원들의 반대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의 교체를 취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오는 9월10~13일 개최할 예정인 제90회 춘향제는 친일작가 김은호 춘향영정으로 하고, 앞으로 여론조사를 통해 교체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의원들은 “지금까지 김은호 작품으로 지속했는 데 이제 와서 왜 바꾸느냐”, “아예 영정을 철수하고 안내문을 설치하자”, “지역작가들의 검증된 새 작품을 활용하자”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체를 찬성하는 염봉섭 의원은 “친일은 역사적 사실이어서 재판과도 같은 성격이다. 여론조사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아직 영정 교체를 취소한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보 결정이 나오자 남원지역 단체들의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가 8월26일, 시민주권남원행동이 8월28일, 남원산성민요연구회가 8월29일 친일화가의 춘향영정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남원정신연구회는 “1931년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3·1운동 정신과 민족혼으로 춘향사당을 건립했다. 새롭게 내걸리게 될 민족화가 강주수는 조선춘향영정을 유관순같은 독립투사 모델로 해 옷을 태극의 색으로 했다. 비열한 친일작품인 일본춘향 ‘하루카’를 지금 당장 민족화가 춘향영정으로 교체하라”고 밝혔다. 강경식 춘향영정교체위원장은 “치욕스런 일본춘향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니 참으로 원통하다.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춘향영정에 대한 비교표. 남원정신연구회 제공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춘향영정을 8월 안으로 강주수 화백의 작품을 복제해 교체할 계획이었다. 이 영정의 교체는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 화가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 화가의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교체할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이 영정은 김 화가가 1961년에 그린 것을 복제한 것이다. 최초의 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다. 1961년 다시 김은호 그림이 기증돼 복제품이 걸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31>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화가 작품 논란 ‘광한루 춘향영정’, 교체 유보되자 지역서 반발

화, 2020/09/0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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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1혁명을 학살로 억압한 일제, 1923 간토대진재 시 학살재현

▲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추도식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비대면 온라인 추도식 ⓒ 김종수
▲ 간토학살피해자제97주기추도식배너 민중화가 신학철화백의 허락을 받아 디자인한 배너 ⓒ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가 공동주최한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이 한국 천안시 병천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지난 1일 열렸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간토학살사건 관련단체인,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평화협동조합, 1923인문학연구소, 기장 1923진상규명위원회의 임원들과, 연대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민족문화연구회 대표자,그리고 씨알재단에서도 참여하였다.

임광순 사협 기억과평화 이사의 사회로 오후 2시에 개회하여 헌화를 시작으로 제97회 메시지, 추도사, 연대사, 추도노래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주최주관한 1923한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는 간토학살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일본 내각과 군대, 경찰, 민간자경단을 향한 분노가 일었지만, 10년 넘게 진실규명과 추도활동을 해오면서 점점 분노의 대상이 한국 정부로 바뀌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수 대표는 한국 언론이 코이케유리코의 추도사를 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추도사 한 번, 추도식 한 번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론에서조차 이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되는 2023년을 맞을 때에 간토피학살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민관협력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 100년을 맞기 전까지 남과 북이 함께 간토학살조사에 나서자.
– 100년을 맞기 전까지 1923역사관의 학살지역별 전시를 위해 함께 협력하자
– 간토학살백서제작을 위한 남북한일재일 공동기구를 제안하자.
–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시민, 의원이 함께 협력해 가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 제97주기 추도식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김종수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마사타카 교수(일본 센슈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참가하지 못한 채 보내 온 추도사에서 “도쿄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이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추도사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조선인 학살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 속에 조선인 희생자가 들어있는 거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 적혀 있는 것입니까? 학살의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는 추도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일본 사회는 희생자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하고 일본 정부와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가해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촉구해 나갈 것과,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해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쓸 것을 희생자 여러분께 다짐한다”고 전해 왔다.

한편 1923인문학연구소를 이끌고 갈 김광열 교수는 100년이 되기 전에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재일코리안에 대한 헤이트스피치와 혐한문화를 중단해야 하라고 촉구했다.

특별히 천안역사문화연구소의 이용길 대표는 오충공 감독의 인터뷰 속에서 강덕상교수의 ‘일본 제국의 학살의 근원과 뿌리가 동학농민혁명가들을 학살한 일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3.1만세혁명 시기의 일본 총독부의 학살로 이어졌고, 그 학살자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시에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영상을 보고 전율이 흘렀다’고 말하며, 이제 97년을 맞는 우리들은 왜 일본 정부가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하고 일갈하였다.

또 한국에서 추도행사를 위해 천안으로 오는 동안 일본에서 진행되는 일본시민단체들의 추도식과 재일동포들이 진행한 추도식을 인터넷 중계를 보면서 내려 왔다고 하며 “지금 이 시각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추도집회를 일본 우익들의 헤이트스피치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서약서를 쓰도록 하는 등(물론 서약하지 않았고 추도식을 강행)의 각종 억압을 가하는 한 편, 현재 코로나 사태 속에서 일본정부가 각종 지원에서 재일코리안을 배제하는 일들이 일으너는 등 간토학살에서 나타난 폭력과 억압과 배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스스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민주사회 속에서 당연히 없어져야할 차별과 배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조차 일부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문제이지 않은가? 코로나바이러스는 ‘우한 폐렴’이라고 하거나, 대한의사협회 파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역의료인들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코로나 마스크 배급에 외국인들을 배제하는 일 등 우리 안에도 배외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00년을 3년 앞두고 있는데, 이제 이곳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며, 강제동원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과 식민지역사박물도 여러분과 함께 평화인권 발걸음에 함께할 것을 약속 드린다”고 연대의 의지를 밝혔다.

▲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채.. 기억과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추도행사참가자 ⓒ 김종수

고난의 현장에서 촛불과 피켓을 들고 예언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최헌국 목사는 간토학살을 내용으로 한 추도시를 낭독하였고,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내용으로 한 노래와 곡을 쓰고 노래해 온 윤광호 목사의 추모가가 이어졌다.

지난 5월부터 리모델링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올 해 이상기후로 인한 긴 장마로 인해 공사가 3주 이상 중단되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의 개관식과 ‘1923인문학연구소’의 개소식, 그리고 학술토론회은 10월 12일(월) 오후 2시로 연기하기로 했다.

토론주제는 1923역사관에 대한 전시구성과 민간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박물관 건립의 사례를 주제로 박물관 학예사인 1923인문학연구소의 성주현교수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김승은 학예실장의 발표를 통해 2023년까지 1923역사관의 전시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펼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1923한일시민연대 상임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의 내부 인터넷신문 미디어기평에도 실립니다.

<2020-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 혁명과 학살의 상징 아우내에서 열려

목, 2020/09/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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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산학협력단, 학내 일제 잔재 연구 중간보고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에 국화·향나무도 버젓이

제주 초등학교 4곳의 교표에 도안된 (왼쪽부터) 일본 가문의 욱광문, 일본 왕실의 국화문과 일장기, 욱일기.(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욱일기 문양의 교표,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등 제주 학교 곳곳에 여전히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청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제주도교육청에 따르면 ‘제주도교육청 일제강점기 식민잔재 청산 연구용역’을 수행 중인 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최근 도내 학교 내 유·무형 일제 잔재에 대한 1차조사를 마쳤다.

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도내 4개 초등학교는 옛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바탕으로 도안된 교표를 사용하고 있다.

교표 한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원이 있고, 그 원에서 빛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형상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나 과거 일제강점기 군 관련 배지에서 자주 사용된 월계수 등과 함께 결합돼 있다.

또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식민통치를 알리며 우리나라에 심었던 가이스카 향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35곳(초 18·중 11·고 6)에 달했다.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나 일제강점기 일본이 들여온 영산홍을 교화로 지정한 학교 역시 각각 8곳(초등), 13곳(초 10·중 2·고 1)으로 파악됐다.

제주의 한 초등학교에 일재 잔재로 꼽히는 가이스카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이 뿐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작사가 김기진·이원수, 작곡가 이홍렬이 만든 교가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 학교도 3곳(초 2·고 1)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현황’ 등에 이름을 올린 도내 교장도 현재까지 3명으로 집계됐다.

제주대 산학협력단은 10월까지 현장조사와 공청회, 자문회의 등을 마치고 11월 초 최종보고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연구용역이 마무리되는 대로 관련 지침을 도내 각급 학교에 권고할 예정”이라며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작업은 학내 공론화를 거쳐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0-09-09> 머니투데이

☞기사원문:‘교표에 욱일기라니’…제주 학교에 여전한 일제 잔재

수, 2020/09/0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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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 독립운동가 넣자
전국 최초 개념 지자체 되기 어렵지 않다

“독립운동을 한 나라의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다.”

지난 8월 경남도의회에서 ‘경상남도 대일항쟁기 일제 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가 열렸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 발제를 맡았고, 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신사임당이 5만 원권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이 씨 남자들만 오직 화폐에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고액권 화폐 논의가 진행됐고 5만 원권 초상 인물은 신사임당, 10만 원권에는 김구 선생이 선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바뀌고 정치권에서 김구 선생 초상에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10만 원권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친일청산 반대 논리로 등장한 색깔론에 법적으로 처벌받은 친일파가 한 명도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해방 후 1950년대 발행된 우리나라 화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 등이 새겨졌다. 1972년 이후부터 지금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며 퇴계 이황(1000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1만 원권), 신사임당(5만 원권)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07년 5만 원·10만 원권을 발행하기 앞서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초상 인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김구·김정희·신사임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이상 가나다순) 등 10명으로 압축됐다. 당시 보도자료에는 “2차 후보군 가운데는 독립운동가(김구·안창호·유관순·한용운)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여성인물이 선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유관순 열사의 등장은 후보 간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달굴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국민의 염원은 어디서부터 막혔던 걸까.

김영진 도의원은 지난 6월 도정질문을 통해 “도내 독립운동가 관련 시설물 49곳을 직접 돌아보니, 경남도는 도내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의원은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는 1039명인데, 경남도로부터 받은 서면 자료엔 486명밖에 안 되는 점도 지적했다. 왜 지금껏 우리나라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는지 설명되는 대목이다.

방학진 실장은 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새길 것을 제안했다. 방 실장은 “지자체마다 지역 화폐가 있고, 지역마다 독립운동가도 있지 않으냐. 자치단체장의 뜻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를 책으로 배울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울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지자체에서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도내에는 경남·창원·남해·하동·합천 등 지자체마다 종이권으로 지역 화폐를 발행하고 있고, 전통적인 꽃문양이나 명소 사진이 새겨져 있다. 지역 특성과도 무관한 꽃문양 대신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지역 화폐에 새긴다면? 요샛말로 ‘개념 지자체’, ‘전국 최초’가 된다. 어느 지자체에서 먼저 나서 볼 텐가.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혜영 자치행정1부 차장 ([email protected])

<2020-09-09>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알리기, 지역 화폐로

수, 2020/09/0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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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기증한 마스크를 들고 기뻐하는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와 김순흥 지부장 일행. 사진=고려인마을 제공]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최근 광주고려인마을을 방문해 코로나19 재 확산 방지를 위한 이웃사랑 마스크 500장을 기탁했다.

고려인마을 방문에는 김순흥 지부장과 이지훈 국장, 김홍길 국장, 정영해 전 동신대 교수 등이 함께 했다.

김순흥 지부장은 “최근 잠잠했던 코로나19가 재 확산됨에 따라 또 다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다 함께 극복하자는 마음을 담아 마스크를 준비했다”며 “광주고려인마을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광주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후손이기에 눈물어린 애정이 가슴에 남아있다”며 “앞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고려인선조들의 잊혀진 항일 역사를 복원, 고려인동포들이 한민족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런 긍지를 갖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마스크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며 “기탁하신 마스크는 마을거주 고려인동포를 대상으로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순천 회원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마마나스)이 광주이주 독립투사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안정된 정착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위해 면마스크를 기증했다고 전했다.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email protected]

<2020-09-09> 한국타임즈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고려인마을에 마스크 후원

목, 2020/09/10-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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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5주기 추모식

ⓒ 김경준

9일 오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의 75주기 추모식이 서울 효창공원(효창원)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열렸다.

ⓒ 김경준

차리석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 27년의 전 여정을 함께 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다.

ⓒ 김경준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독립운동가 수당 정정화는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음에도 임정의 살림에 보태라며 푼돈을 내주었을 정도로 그 자신에게는 인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김경준

“나처럼 임정 살림 뒤치다꺼리를 맡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지출금액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임정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특히나 돈을 받아쓰는 사람의 마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푼전을 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으리라. 동암(차리석)과 우천(조완구)은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만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 정정화, <장강일기> 中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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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결코 사무에는 소홀하지 않았으니 1948년에 열린 선생의 장례 당시 “탁월한 사무 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추모사에서 그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 김경준

그러나 선생은 해방을 맞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945년 9월 9일, 과로로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환국한 김구 선생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했고, 1948년 선생 역시 지금의 자리에 안장됐다.

오늘 추모식은 코로나 19로 인해 최소한의 추모객만 참석한 채 소규모로 열렸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돋보였다.

LAC그라피티 스튜디오의 레오다브 작가(본명 최성욱)가 직접 그린 차리석 선생의 그라피티 초상화가 놓인 가운데, 최근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를 출간한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는 자신의 책을 선생의 영전에 헌정하기도 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커피·원두 판매사인 ㈜카페리즈와 합작하여 출시한 ‘효창독립커피’ 차리석 블랜드도 헌정됐다.

행사의 사회를 맡은 방학진 민문연 기획실장은 “차리석 선생은 숭실대학교 전신인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인데 현재 숭실대에는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 흉상은 고사하고 이름을 딴 강의실 하나조차 없는 형국”이라며 “친일파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 기념관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반드시 숭실대 캠퍼스 내에 차리석 기념물을 조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역설했다.

후손 대표로 답사를 한 차영조 선생(차리석 선생 아들)은 “젊은 청년동지들이 선친을 기억하고 알리고자 애써주는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고 답례했다.

한편 차리석 선생은 한국광복군 군수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오는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20-09-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은 강의실 하나 없다”

목, 2020/09/1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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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러가기]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화, 2020/09/15-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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