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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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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admin | 수, 2021/07/28- 01:29

[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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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2심 판결이 있었다.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주문 내용은 간결했고 연구소는 승소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재판부는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가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린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모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모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모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하며 방모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모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데 방모씨 측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청량리 사무실에 침입해 출입문과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달아난 60대 김모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담은 사과문을 12월 20일 연구소로 보내왔다.

08작년 4월 새벽 1시쯤 연구소가 위치한 동대문구 사무실을 찾아온 김모씨는 연구소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출입문에 엑스(X)자 모양의 낙서를 한 후 도주했다. 스프레이 테러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를 토대로 수사에 들어간 동대문경찰서는 11월에 김모씨를 붙잡아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형사조정에 참석한 김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뉴스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연구소도 김모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래의 사과문은 김모씨가 형사조정의 결정에 따라 작성하여 연구소로 보내온 것이다.

 

사 과 문

상기 본인은 사건 당일 집회를 마치고 저녁식사 겸 회식자리에서 탄핵 반대 등 시국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중 잘못된 교육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라는 잘못된 소신과 판단으로 만취상태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황당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이 문제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차후 두 번 다시 이런 사태를 재발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017. 12. 20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8/0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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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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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경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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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15년전쟁’(1931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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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시장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피해’와 ‘가해’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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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교 문집과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처럼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헌법의 숲’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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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사노보효’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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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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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70년만의 귀향’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월, 2017/08/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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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지난겨울 촛불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개탄하였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에서 정권에 비판적이라 지목된 연예인들의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했다고 하니 정말 이러한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추석 연휴 기간 중 많은 언론들이 적폐청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흔히 보수 언론과 논객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를 대비하자고 강조한다. 또한 당장 안보, 경제 등 긴급한 현안들이 있는데 과거사 청산 같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매번 지겹도록 듣는 식상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와 미래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보는 것으로, 역사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도 큰 문제를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위해 자신이 이미 지출한 내역을 가계부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자신의 소비생활을 성찰한다. 그러나 가계부를 아무리 잘 써도 이미 지출한 돈은 단 한 푼도 회수되지 않는다. 이미 지출해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실용주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가계부보다는 미래의 지출 계획서를 작성하여 미리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는 다양한 변수와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나마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대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꼼꼼한 정리와 깊이 있는 성찰이다. 과거에 대한 충분한 정리와 성찰 없이 그냥 막연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시간 낭비이다. 그러하기에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위해 지출 계획서를 미리 작성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가계부를 주로 작성해왔던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니 접어두고 긴급한 현안과 미래에 대비하자는 이야기는 사실상 미래를 중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그러하기에 다양한 변화가능성이 없는 미래를 희망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논리를 묘하게 미래 지향성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여 성찰하지 못하면 불행이 반복된다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쉽게 자주 놓쳐 버리는 역사의 진리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 등 최씨 가문과의 관계는 1970년대 말 유신체제하에 전개되었던 새마음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음운동은 ‘충’과 ‘효’를 강조하는 일종의 관제 대중운동이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유신체제기 중요한 관제 대중운동의 하나인 새마음운동의 주도자였다는 것이 정말 더 큰 문제였다. 새마음운동에 대해서는 2007년 이명박과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불충분하게 다루어졌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드러나고 시정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은 커다란 혼란과 고통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것이다.
또한 과거사 청산이 쟁점이 될 때마다 나오는 소리 중에 하나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는 인적 청산보다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마치 이를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잘못한 사람들을 밝혀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제도와 관행을 청산하기 위해 유보하거나 부차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범죄자를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려내어 처벌하지 않고,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만 개선하면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형식적으로 좋은 제도를 구상하여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사람들의 사고와 행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할 리도 없다. 따라서 인적 청산이 없거나 유보되는 제도적 청산은 무의미하고, 역시 공허하다.
요점은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단기적인 인적 청산에 머물지 말고 문제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으로 연결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적인 범법행위, 비리행위만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지 못했던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나 국정교과서 문제의 경우 이를 주도한 사람들도 밝혀내야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조직 내부의 사람들이 그것이 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음에도, 왜 여기에 침묵하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이는 결국 내부의 비판자, 고발자를 소외시키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발단은 문체부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인사 조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풀리는 문제이다. 또한 국정원 댓글 공작에서 나타나듯 국가기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감시 및 통제 장치를 만드는 것도 시급해 보인다. 이러한 일들, 특히 제도 개선과 관련된 부분들은 단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능동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적폐청산을 통해 여러 폐해들을 해결할 때 그 혜택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다.

목, 2017/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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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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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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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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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광주지부장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헤엄치지 말고
걸어서 가자
배 타지 말고
버스로 가자
비행기 타지 말고
기차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 또 가고

 

모레도 못 가면
글피에 또 가고

올해안에 못 가면
내년에 또 가고
내년에도 못 가면
그 내년에 또 가고

서둘지 말고 가자
싸목싸목 가자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화, 2018/03/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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