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노신 추도문

지역

노신 추도문

admin | 수, 2021/07/28- 01:29

[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18 상반기 시민강좌 ‘한 시대, 다른 삶’ 개강

08

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과 연계하여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 이래 70년간의 일제 침략,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 35년은 우리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를 맞은 그때, 어떤 이들은 목숨과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으나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 제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번 강좌는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일제강점기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다양한 인물들을 대비하여 조명한다.
강좌는 총 7강으로 6월 12일(화)부터 28일(목)까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며, 30일(토) 오전 10시 특별강좌와 전시 관람으로 마무리한다. 근현대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성인 40명을 모집하며 수강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가능하고 무료로 진행한다. 이번 강좌는 수강을 원하는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8년 6월에 새로 개관한 삼각산 시민청에서 이루어진다. 작년 9월에 개통한 우이신설경전철을 타고 솔밭공원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의실까지 올 수 있다. 1강부터 6강까지 삼각산 시민청 강의실에서 진행되며, 7강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 후 전시를 관람한다.

제1강은 신효승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3대에 걸친 석주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설명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의의를 살펴보았다. 2강에서 권시용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문인으로 명성을 떨친 심천풍(우섭)과 심훈(대섭) 형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상세히 다루고 심훈의 일기 등 사료를 통해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설명하였다. 3강은 홍명희 3대의 친일과 항일을 주제로 김덕영 연구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민교 연구원(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조선인(4강)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다루며, 이명숙 연구원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왕, 광산왕, 기부왕(5강)이라는 소재로 조선인 거부(巨富)들의 이면을 파헤친다.
제6강은 임헌영 소장이 강사로 나서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로 꼽힌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과 해방 후 반민특위특별재판에 회부된 상황까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7강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의 전시 주제를 아우르는 박수현 연구실장의 강의 후 전시 관람으로 전체 강좌를 마친다.

•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월, 2018/07/02- 16:24
15
0

[초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마무리

07

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 86-1번지 설화산 일대에서 진행한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동조사단은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4월 12일부터 23일까지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에 대해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 감식을 진행하였으며,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안치식을 치른 후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관’에 봉안되었다. 조사단은 이 지역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와 551점 이상이 유품이 발굴하였는데,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 당시에 희생된 부녀자와 어린이들로 밝혀졌다. 유해감식 결과 최소 208명 가운데 어른이 150명, 미성년의 어린이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유품으로는 M1과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단추류, 버클, 고무신,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 등과 함께 여성용 비녀가 최소 89점 발견되어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산시의 예산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연구소 아산지회 회원들의 물심양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아산시청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조사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유해발굴 및 감식결과 보고를 통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7/02- 16:21
4
0

[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06

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8
0

27

28

29

30

31

32

33

34

 

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월, 2018/07/02- 17:29
28
0

[초점]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18일 금요일 오후 6시 숙명여대 100주년기념관 7층 한상은라운지에서 각계인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최덕수 고려대 교수,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축사, 수령자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05

이번 심사대상은 2016년 8월과 2017년 2월에 수여된 17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논문으로 2월 20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9일 심사위원회에서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미래인재양성사업단 연구교수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지수걸 공주대 교수, 최기영 서강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조재곤 동국대 교수, 장영숙 상명대 교수, 한모니까 카톨릭대 교수, 김태우 외국어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자인 유바다 박사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는 그간의 국제법적 연구와 만국공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의 연구로서 한국사와 국제법 연구자들에게 주목받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국내외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그동안 등한시해 온 당대 유럽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까지 확보하여 분석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앞으로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법적인 지위에 관한 활발한 연구와 논쟁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혜영 연구원

월, 2018/07/02- 16:17
26
0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01

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02

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03

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04

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28
0

•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18

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19

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20

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70
0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13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21
0

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0607

 

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25
0

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94
0

심정섭 지도위원 제6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85점 보내와
6월 1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7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보성문화>, <새전남>, <월간호남> 등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잡지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기금전달식 후 자료 기증 잇달아
▪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7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기금전달식에서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6월 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역사사진첩>(1914), <황족화보>(1930)등 총 5점이다.

15

 

후루카와 마사키(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씨가 2003년 재한군인군속 추가 제소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2009년 군군재판 도쿄고등법원 판결 후 지원하는 모임이 받은 플래카드 2점을 기증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계간전쟁책임연구>, 군인군속재판관련자료등책자와문서, 현수막을기증했다.

야스다 치세 씨가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소송>(1992)을기증했다.

평화교육연구위원회에서 <新潟県内における韓國·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2010), <平和教育委員會資料シリーズ 第2集 新聞などに見る新潟県内韓國朝鮮人の足跡>(2006) 도서 3권을 기증했다.

야노 히데키(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활동했던 자료 모음인 플로피디스크, 카드, 명함 파일 등 다량의 자료와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등을 기증했다.

히구치 유이치(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씨가 6월 18일 「용산시가도」(1929)를 기증했다. 이 지도는 용산 일본군기지와 용산역 및 주변의 철도기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다.

 

16
나카가와 도시코 씨가 2014년 6월 27일 기증에 이어 <일본의 전사>등 강제동원관련도서31권과 ‘일본정부와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라’에서 찍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1962년 발행한 『동경재판』(전3권)을 기증했다. ‘동경재판’은 극동군사재판소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였던 재판으로 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이 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조일신문법정기자단에서 작성했다. 동경재판 당시 법정사진과 함께 재판의 모든 과정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17
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지난해에 이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제13회숙명여자대학교졸업앨범>(1964)등 도서 3권이다.

▪ 6월 14일 호시카와 가즈에(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씨가 아베 반대 표찰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수, 2018/08/01- 17:02
38
0

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14

 

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33
0

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11

12

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29
0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09

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10
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15
0

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08

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1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