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프레시안]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지역

[프레시안]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admin | 월, 2021/07/19- 21:38

[손호철의 발자국] 57. 서울 4‧19 묘지 : 4‧19탑은 왜 수유리 골짜기에 있는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진보진영의 민중사관에 맞선 한국현대사 재평가 움직임과 그 일환인 ‘이승만 복권운동’이었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인 이승만 복권운동을 왜 이처럼 뒤늦게 벌이기 시작했는가? 그 답은 수유리에 있다.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부정선거 다시 실시하라!” 1960년 4월 19일 오후,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근 10만 명에 달하기 시작했다. 전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회 연좌농성을 마치고 귀가하던 고대생들을 이승만 정권이 사주하는 정치 깡패들이 쇠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공격한 데에 분노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4.19 혁명 관련 사진들. 초등학생들까지 참가한 것이 이색적이다.

‘탕탕탕!’ 갑자기 경무대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의 총구가 불을 토했다. ‘피의 화요일’과 함께 4.19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수유리 4‧19 묘역에 가면 4‧19 민주혁명기념탑 뒤로 줄지은 묘비들이 늘어서 있다. 18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에 의존하고 경찰을 우대해온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눈에 보이는 차를 징발해 시내를 누비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과 계엄군에 쫓겨 저항본부인 고려대학교로 후퇴했다. 고려대학교가 ‘4‧19의 전남도청’이었던 셈이다. 5‧18의 전남도청 학살과 같은 참극이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전두환과 달리 당시의 지휘관이 두 명의 부관을 데리고 직접 학교 강당으로 찾아가 태극기로 덮은 시신들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고, 이를 본 시위대가 군을 믿고 무장을 해제했다.

▲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시위와 관련해 고려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4.19혁명 기념 조각 ⓒ손호철
▲ 마산 3.15 기념관에는 학생 등 시민들에게 발포한 경찰에 대해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라고 한 이기붕 부통령의 망언이 쓰여 있다.

진정되어 가는 것 같던 정국은 학생들에 이어 교수들이 나서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미국까지 이승만의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 하야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러자 이승만도 마지못해 하야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이후에도 갑자기 자신이 사임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최후까지 비겁한 지도자의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다가 주변의 압력으로 결국 서명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을 180여 명이나 빼앗고 쫓겨난 지도자이다. 즉 그는 박근혜에 앞서 국민의 손에 쫓겨난 최초의 지도자였다(최소한 박근혜는 이승만처럼 근 200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죽이고 물러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승만보다는 덜 나쁜 지도자였다.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시위대에 발포를 해 이처럼 많은 국민들을 공개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그를 복권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 4.19 혁명 후 하야 압박에 굴복,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의 사진이 화진포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기념관인 만큼 설명이 이승만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4‧19의 원인은 사건사적 원인과 보다 구조적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장기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시위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 유기 사건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1회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와 12회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도시’ <프레시안> 4월 2일자 참조).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정권이 4월 18일 깡패들을 동원해 고대생을 습격한 것이 4‧19를 촉발했다.

구조적으로는, 이승만 장기집권과 심각한 실업 등 경제 위기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대학졸업생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등 청년실업이 심각해 청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0년대 우리는 미국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방적, 제분, 설탕이라는 ‘3백산업’)이 중심이었는데 1950년대 말이 되며 이 같은 원조가공 산업화가 소진된 데다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바뀌면서 원조를 크게 줄이자 경제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에 미‧일‧한국으로 이어지는 안보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압박했지만, 이승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를 교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우선 ‘4‧19 혁명’이라는 명칭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성공 후 4‧19의 명칭을 ‘4‧19 의거’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4‧19는 정말 혁명인가? 혁명이라면 왜 혁명인가?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승만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라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항쟁’일 뿐이다. 사회구조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에 시작해 2017년 초까지 계속된 촛불항쟁이 박근혜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촛불혁명’은 아니다. 나는 촛불 당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그것이 촛불항쟁 속에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내자는 것을 넘어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촛불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즉 촛불혁명이 아니라 ‘촛불항쟁'(내지 ‘실패한 촛불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면 4‧19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4‧19 항쟁’인가? 나는 4‧19를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4‧19는 혁명이되,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승만 하야 이후다. 4‧19는 이승만 하야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하야로 그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적 요구들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보도연맹, 거창 민간인학살 등 수많은 학살의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유가족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특히 거창의 유가족들은 학살에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이장에게 사과를 요구하다 거부하자 산채로 불을 질러 버렸다. 어용노조에 대항하여 교원노조와 같은 자주적인 노조가 생겨났고, 사회대중당,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이 나타나 국회에 진출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극우 분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남북한영세중립화를 통한 통일운동이 나타났고, 혁신정당들과 조직들이 자주·평화·민주 3대 원칙 하에 남북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결성했다. 1961년 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남북학생들의 평화교류를 추진했다. 이는 극우 분단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5‧16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잘못된 경향이다. 물론 4‧19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 하층민들이다. 이는 4‧19 희생자들의 분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86명의 희생자 중 학생은 22명에 불과하고 하층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등 도시 하층이 절반에 달한다. 따라서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것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외면하는 일면적인 인식이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 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 ⓒ손호철

나 자신이 ‘운동권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 묘역은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4‧19 혁명기념탑 앞조각 뒤편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 묘역이 5‧16 쿠데타 직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이를 다시 ‘민주 성역화’ 한 것은 김영삼 정부다). 그것만이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이라고 극찬했고,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발견했다.

아무리 5‧16 세력이 그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지원유세를 다녔으며 김주열 시신 인양과 함께 터져 나온 4‧11 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특히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혁명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몇 년 전 자신이 성웅이라고 칭송한 이승만을 무너뜨린 4‧19, 자신이 ‘북괴를 도와주는 이적 행위’라고 힐난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탑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은상의 탑문은 현 4‧19묘역이 비극을 넘어 희극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 5.16 쿠데타 세력은 4.19 혁명을 기념한다며 이승만을 성군이라고 찬양하던 어용 문인 이은상에게 4.19 기념글을 짓게하여 써 놓았다. ⓒ손호철

놀라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4‧19기념탑을 광화문에 세우려 했으나 데모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 골짜기로 귀양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전두환이 1987년 황토현 동학전적지에 세운 전봉준 동상도 세웠는데 정읍시는 최근 이를 철거하고 동학의 정신에 맞는 동상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 넓은 공간이 필요한 묘역은 몰라도 기념탑은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이나 청와대 앞에 세워야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수유리에 세웠는가?

수유리 4‧19묘역을 떠나려는데, 한 자료에서 읽은 최석태 서울민족미술협회대표의 주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16세력이 4‧19를 짓밟지 않았나? 그것을 가리려고 성역화한 것 아닌가? 4‧19탑에는 정신이 송두리째 빠져있다. (…) 4.19탑은 철거돼야 한다. 아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한다. 친일작가들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증거로, 친일유물로.” 맞다. 새로운 4‧19탑을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세워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7-19> 프레시안

☞ 기사원문: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4강 –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민주화 이후 한국언론, 다시 개혁을 말한다’

총 6강으로 훌륭한 강사님들이 많이 나오십니다.

전체 강의 보러가기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시청자 여러분들께 앞으로도 좋은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후원과 관심 부탁드려요~!!
구독과 좋아요~댓글도 많이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화, 2020/08/25- 05:32
0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화, 2020/08/25- 22:37
0
0

[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5강.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왜 언론은 갈등과 불신을 만드는가? – “기레기”의 탄생과 “가짜뉴스”’

총 6강으로 훌륭한 강사님들이 많이 나오십니다.

전체 강의 보러가기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시청자 여러분들께 앞으로도 좋은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후원과 관심 부탁드려요~!!
구독과 좋아요~댓글도 많이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수, 2020/08/26- 03:56
0
0

◀ANC▶
오는 8월 29일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경술국치 110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독립운동 명문가인 경주 최부자집에서 민간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한일병합조약 등사본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다량 발견됐습니다.

한기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END▶

◀VCR▶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명문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1910년 경술국치 당시
한일병합조약을 등사한 서류입니다.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제1조부터
총 8개조에 이르는 치욕스러운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고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실려 있지만,
민간에서 등사본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INT▶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일제가) 강제 병합이기는 하지만 병합에 대해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주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보낸 게 아닌가 그렇게 추정이 되거든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이 발각돼 옥고를 치르던 최부자집
후손 최준에게 당시 유림들이 보낸 위로 서찰도 발견됐습니다.

수인번호 404가 표시돼 있고, 유림 218명의 이름 아래 각각 도장이 찍혀 있어,
최부자의 독립운동 정신이 유림계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열사가 최부자에게 보낸 서찰도 나왔습니다.

◀INT▶ 최창호 이사/ 경주 최부자 민족정신 고양회
“집안의 (어른이) 독립운동하시다가 구전으로 내려오던 게 사실 사류로 나오니까 재확인이 되고,
선조분들깨서 얼마나 독립을 위해 활동하셨나 이런 것도 보이고..”

이 자료들은 지난달 이곳 최부자집 안채에서 2만여 점의 고문서와 함께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는 2년 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자료도 나오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고문서들을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MBC NEWS 한기민입니다.

<2020-08-25> MBC 

☞기사원문: 경주 최부자집에서 쏟아진 독립운동 자료

수, 2020/08/26- 13:47
0
0

[앵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요.

광복 80주년까지 4년 남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생존 애국지사의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철희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영관 애국지사.

어느덧 올해 98살이지만 또렷한 말투에선 자긍심이 넘칩니다.

1944년, 만 20살에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가까스로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를 마중을 왔더라고요.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하염없이 그냥 눈물 흘리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 태극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목숨 걸고 왔구나.’]

그로부터 2년 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여생은 후대에 올곧은 저항 정신을 남기는 데 쏟자고 다짐하고 기념사업회를 세워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독립의 정신이 흐려지는 사회가 안타깝습니다.

지사로서의 삶 역시 쓸쓸히 잊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또 역사적 사실, 역사적 팩트를 잊어버리면, 외면하면 똑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이런 엄혹한 현실을 잊지 말고….]

김 지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애국지사의 두상과 손발의 형상을 남기는 겁니다.

[김서경 / 작가 : 기록물을 모은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언제 어떻게 발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계신 분들을, 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가 기록하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아서….]

첫 번째 주인공은 김영관 지사.

단순히 외관뿐 아니라 일생의 이야기와 품고 있는 생각들까지 모두 사료에 담을 계획입니다.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온 한 사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운성 / 작가 : 모든 애환과 아픔과 가족 간의 갈등, 고통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것들을 같이 한번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광복 80주년까지 4년도 남지 않은 지금.

작가들은 그사이 지사 한 분이라도 더 만나 한 마디라도 더 생생하게 남기겠다는 목표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YTN 김철희입니다.

YTN 김철희 ([email protected])

<2021-09-22> YTN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생존 독립운동가 손발까지 영원히 남긴다

수, 2021/09/22- 22:43
3
0

[조선·동아 100년 기획전시 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6강.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
‘적폐언론과의 싸움을 선언하다’

※관련영상 

☞Youtube: [안진걸 레알 분노현장]조선일보 고발현장 깽판친 조선기자/왜 우리고발?헐!!! 

Youtube: 6.18 [단독 공개] 조선일보 기자들의 생사람잡는 취재법

총 6강으로 훌륭한 강사님들이 많이 나오십니다.

전체 강의 보러가기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시청자 여러분들께 앞으로도 좋은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후원과 관심 부탁드려요~!!
구독과 좋아요~댓글도 많이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금, 2020/08/28- 11:29
0
0

심정섭씨, 친일단체 ‘수양단’ 발행 단보 9호 공개
거물급 친일파 대거 포진…민족정신 말살 등 자행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친일단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해 태평양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친일단체 ‘수양단’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방조약이 공포된 국치일(8월 29일)을 사흘 앞둔 27일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한애(汗愛)’라는 제목의 이 단보는 1924년 1월 조직된 수양단 광주지부가 매월 발행한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단보는 조직이 결성된 그해 9월 26일 인쇄됐다. 가로 18㎝·세로 26.2㎝ 크기이며, 4쪽 분량이다.

단보는 수양단의 2대 강령인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로 시작한다.

이는 ‘땀 흘려 단련하고, 동포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 동포는 일제와 조선인을 모두 아우른다. 이어 조선인이 ‘황국신민’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글이 수록돼 있다.

수양단 광주지부는 1922년 8월 발족된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의 지역 기구격이다.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는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를 2대 기치로 내걸고 중견 청년 육성 및 사회 정화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고, 그 중심에는 거물급 친일파들이 다수 포진됐다.

실제 이 조직의 고문으로 조선총독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역임한 박영효가 이름을 올렸고, 경술국적 윤덕영,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민병석 등 친일파들이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주민을 비롯해 농고생, 사범생 등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신사를 참배하고 강습회를 개최해 천황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또 대규모 시가행진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전개했다.

수양단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8년 5월 29일 전북 이리에서 수양단 호남대회를 개최한 이후 1939년 3월 19일 서울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수양단 총동원대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선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을 주축으로 힘을 모아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게 요지이다.

즉, 수양단은 조선인도 천황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강요·주입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한 뒤 태평양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역할을 주도했던 것이다.

심정섭씨는 “수양단의 단보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일제가 주도면밀하게 황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황국 신민화 정신을 주입시키고 시가행진 등을 통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결국 태평양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송대웅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27> 광남일보 

☞기사원문: [국치일 기획]”조선인 황국 신민화 주도…태평양 전쟁 내몰아”

월, 2020/08/31- 08:03
1
0

남원시의회, 여론조사 통해 결정키로
지역단체 “친일작품 당장 교체해야”

춘향영정을 그린 민족화가 강주수 작품(왼쪽)과 친일화가 김은호 작품(오른쪽).

친일화가 작품 논란으로 교체를 추진했던 전북 남원 광한루원 춘향영정이 시의회의 결정으로 유보되자, 지역에서 교체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 등은 남원시의회가 지난 25일 열린 총회에서 의원들의 반대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의 교체를 취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오는 9월10~13일 개최할 예정인 제90회 춘향제는 친일작가 김은호 춘향영정으로 하고, 앞으로 여론조사를 통해 교체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의원들은 “지금까지 김은호 작품으로 지속했는 데 이제 와서 왜 바꾸느냐”, “아예 영정을 철수하고 안내문을 설치하자”, “지역작가들의 검증된 새 작품을 활용하자”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체를 찬성하는 염봉섭 의원은 “친일은 역사적 사실이어서 재판과도 같은 성격이다. 여론조사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아직 영정 교체를 취소한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보 결정이 나오자 남원지역 단체들의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가 8월26일, 시민주권남원행동이 8월28일, 남원산성민요연구회가 8월29일 친일화가의 춘향영정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남원정신연구회는 “1931년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3·1운동 정신과 민족혼으로 춘향사당을 건립했다. 새롭게 내걸리게 될 민족화가 강주수는 조선춘향영정을 유관순같은 독립투사 모델로 해 옷을 태극의 색으로 했다. 비열한 친일작품인 일본춘향 ‘하루카’를 지금 당장 민족화가 춘향영정으로 교체하라”고 밝혔다. 강경식 춘향영정교체위원장은 “치욕스런 일본춘향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니 참으로 원통하다.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춘향영정에 대한 비교표. 남원정신연구회 제공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춘향영정을 8월 안으로 강주수 화백의 작품을 복제해 교체할 계획이었다. 이 영정의 교체는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 화가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 화가의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교체할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이 영정은 김 화가가 1961년에 그린 것을 복제한 것이다. 최초의 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다. 1961년 다시 김은호 그림이 기증돼 복제품이 걸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31>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화가 작품 논란 ‘광한루 춘향영정’, 교체 유보되자 지역서 반발

화, 2020/09/01- 21:17
0
0

동학혁명, 3.1혁명을 학살로 억압한 일제, 1923 간토대진재 시 학살재현

▲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추도식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비대면 온라인 추도식 ⓒ 김종수
▲ 간토학살피해자제97주기추도식배너 민중화가 신학철화백의 허락을 받아 디자인한 배너 ⓒ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가 공동주최한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이 한국 천안시 병천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지난 1일 열렸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간토학살사건 관련단체인,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평화협동조합, 1923인문학연구소, 기장 1923진상규명위원회의 임원들과, 연대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민족문화연구회 대표자,그리고 씨알재단에서도 참여하였다.

임광순 사협 기억과평화 이사의 사회로 오후 2시에 개회하여 헌화를 시작으로 제97회 메시지, 추도사, 연대사, 추도노래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주최주관한 1923한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는 간토학살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일본 내각과 군대, 경찰, 민간자경단을 향한 분노가 일었지만, 10년 넘게 진실규명과 추도활동을 해오면서 점점 분노의 대상이 한국 정부로 바뀌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수 대표는 한국 언론이 코이케유리코의 추도사를 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추도사 한 번, 추도식 한 번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론에서조차 이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되는 2023년을 맞을 때에 간토피학살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민관협력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 100년을 맞기 전까지 남과 북이 함께 간토학살조사에 나서자.
– 100년을 맞기 전까지 1923역사관의 학살지역별 전시를 위해 함께 협력하자
– 간토학살백서제작을 위한 남북한일재일 공동기구를 제안하자.
–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시민, 의원이 함께 협력해 가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 제97주기 추도식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김종수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마사타카 교수(일본 센슈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참가하지 못한 채 보내 온 추도사에서 “도쿄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이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추도사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조선인 학살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 속에 조선인 희생자가 들어있는 거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 적혀 있는 것입니까? 학살의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는 추도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일본 사회는 희생자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하고 일본 정부와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가해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촉구해 나갈 것과,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해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쓸 것을 희생자 여러분께 다짐한다”고 전해 왔다.

한편 1923인문학연구소를 이끌고 갈 김광열 교수는 100년이 되기 전에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재일코리안에 대한 헤이트스피치와 혐한문화를 중단해야 하라고 촉구했다.

특별히 천안역사문화연구소의 이용길 대표는 오충공 감독의 인터뷰 속에서 강덕상교수의 ‘일본 제국의 학살의 근원과 뿌리가 동학농민혁명가들을 학살한 일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3.1만세혁명 시기의 일본 총독부의 학살로 이어졌고, 그 학살자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시에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영상을 보고 전율이 흘렀다’고 말하며, 이제 97년을 맞는 우리들은 왜 일본 정부가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하고 일갈하였다.

또 한국에서 추도행사를 위해 천안으로 오는 동안 일본에서 진행되는 일본시민단체들의 추도식과 재일동포들이 진행한 추도식을 인터넷 중계를 보면서 내려 왔다고 하며 “지금 이 시각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추도집회를 일본 우익들의 헤이트스피치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서약서를 쓰도록 하는 등(물론 서약하지 않았고 추도식을 강행)의 각종 억압을 가하는 한 편, 현재 코로나 사태 속에서 일본정부가 각종 지원에서 재일코리안을 배제하는 일들이 일으너는 등 간토학살에서 나타난 폭력과 억압과 배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스스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민주사회 속에서 당연히 없어져야할 차별과 배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조차 일부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문제이지 않은가? 코로나바이러스는 ‘우한 폐렴’이라고 하거나, 대한의사협회 파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역의료인들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코로나 마스크 배급에 외국인들을 배제하는 일 등 우리 안에도 배외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00년을 3년 앞두고 있는데, 이제 이곳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며, 강제동원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과 식민지역사박물도 여러분과 함께 평화인권 발걸음에 함께할 것을 약속 드린다”고 연대의 의지를 밝혔다.

▲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채.. 기억과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추도행사참가자 ⓒ 김종수

고난의 현장에서 촛불과 피켓을 들고 예언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최헌국 목사는 간토학살을 내용으로 한 추도시를 낭독하였고,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내용으로 한 노래와 곡을 쓰고 노래해 온 윤광호 목사의 추모가가 이어졌다.

지난 5월부터 리모델링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올 해 이상기후로 인한 긴 장마로 인해 공사가 3주 이상 중단되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의 개관식과 ‘1923인문학연구소’의 개소식, 그리고 학술토론회은 10월 12일(월) 오후 2시로 연기하기로 했다.

토론주제는 1923역사관에 대한 전시구성과 민간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박물관 건립의 사례를 주제로 박물관 학예사인 1923인문학연구소의 성주현교수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김승은 학예실장의 발표를 통해 2023년까지 1923역사관의 전시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펼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1923한일시민연대 상임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의 내부 인터넷신문 미디어기평에도 실립니다.

<2020-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 혁명과 학살의 상징 아우내에서 열려

목, 2020/09/03- 20:03
0
0

제주대 산학협력단, 학내 일제 잔재 연구 중간보고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에 국화·향나무도 버젓이

제주 초등학교 4곳의 교표에 도안된 (왼쪽부터) 일본 가문의 욱광문, 일본 왕실의 국화문과 일장기, 욱일기.(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욱일기 문양의 교표,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등 제주 학교 곳곳에 여전히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청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제주도교육청에 따르면 ‘제주도교육청 일제강점기 식민잔재 청산 연구용역’을 수행 중인 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최근 도내 학교 내 유·무형 일제 잔재에 대한 1차조사를 마쳤다.

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도내 4개 초등학교는 옛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바탕으로 도안된 교표를 사용하고 있다.

교표 한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원이 있고, 그 원에서 빛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형상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나 과거 일제강점기 군 관련 배지에서 자주 사용된 월계수 등과 함께 결합돼 있다.

또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식민통치를 알리며 우리나라에 심었던 가이스카 향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35곳(초 18·중 11·고 6)에 달했다.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나 일제강점기 일본이 들여온 영산홍을 교화로 지정한 학교 역시 각각 8곳(초등), 13곳(초 10·중 2·고 1)으로 파악됐다.

제주의 한 초등학교에 일재 잔재로 꼽히는 가이스카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이 뿐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작사가 김기진·이원수, 작곡가 이홍렬이 만든 교가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 학교도 3곳(초 2·고 1)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현황’ 등에 이름을 올린 도내 교장도 현재까지 3명으로 집계됐다.

제주대 산학협력단은 10월까지 현장조사와 공청회, 자문회의 등을 마치고 11월 초 최종보고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연구용역이 마무리되는 대로 관련 지침을 도내 각급 학교에 권고할 예정”이라며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작업은 학내 공론화를 거쳐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0-09-09> 머니투데이

☞기사원문:‘교표에 욱일기라니’…제주 학교에 여전한 일제 잔재

수, 2020/09/09- 19:09
0
0

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 독립운동가 넣자
전국 최초 개념 지자체 되기 어렵지 않다

“독립운동을 한 나라의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다.”

지난 8월 경남도의회에서 ‘경상남도 대일항쟁기 일제 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가 열렸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 발제를 맡았고, 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신사임당이 5만 원권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이 씨 남자들만 오직 화폐에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고액권 화폐 논의가 진행됐고 5만 원권 초상 인물은 신사임당, 10만 원권에는 김구 선생이 선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바뀌고 정치권에서 김구 선생 초상에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10만 원권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친일청산 반대 논리로 등장한 색깔론에 법적으로 처벌받은 친일파가 한 명도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해방 후 1950년대 발행된 우리나라 화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 등이 새겨졌다. 1972년 이후부터 지금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며 퇴계 이황(1000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1만 원권), 신사임당(5만 원권)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07년 5만 원·10만 원권을 발행하기 앞서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초상 인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김구·김정희·신사임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이상 가나다순) 등 10명으로 압축됐다. 당시 보도자료에는 “2차 후보군 가운데는 독립운동가(김구·안창호·유관순·한용운)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여성인물이 선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유관순 열사의 등장은 후보 간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달굴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국민의 염원은 어디서부터 막혔던 걸까.

김영진 도의원은 지난 6월 도정질문을 통해 “도내 독립운동가 관련 시설물 49곳을 직접 돌아보니, 경남도는 도내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의원은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는 1039명인데, 경남도로부터 받은 서면 자료엔 486명밖에 안 되는 점도 지적했다. 왜 지금껏 우리나라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는지 설명되는 대목이다.

방학진 실장은 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새길 것을 제안했다. 방 실장은 “지자체마다 지역 화폐가 있고, 지역마다 독립운동가도 있지 않으냐. 자치단체장의 뜻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를 책으로 배울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울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지자체에서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도내에는 경남·창원·남해·하동·합천 등 지자체마다 종이권으로 지역 화폐를 발행하고 있고, 전통적인 꽃문양이나 명소 사진이 새겨져 있다. 지역 특성과도 무관한 꽃문양 대신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지역 화폐에 새긴다면? 요샛말로 ‘개념 지자체’, ‘전국 최초’가 된다. 어느 지자체에서 먼저 나서 볼 텐가.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혜영 자치행정1부 차장 ([email protected])

<2020-09-09>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알리기, 지역 화폐로

수, 2020/09/09- 22:16
0
0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기증한 마스크를 들고 기뻐하는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와 김순흥 지부장 일행. 사진=고려인마을 제공]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최근 광주고려인마을을 방문해 코로나19 재 확산 방지를 위한 이웃사랑 마스크 500장을 기탁했다.

고려인마을 방문에는 김순흥 지부장과 이지훈 국장, 김홍길 국장, 정영해 전 동신대 교수 등이 함께 했다.

김순흥 지부장은 “최근 잠잠했던 코로나19가 재 확산됨에 따라 또 다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다 함께 극복하자는 마음을 담아 마스크를 준비했다”며 “광주고려인마을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광주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후손이기에 눈물어린 애정이 가슴에 남아있다”며 “앞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고려인선조들의 잊혀진 항일 역사를 복원, 고려인동포들이 한민족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런 긍지를 갖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마스크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며 “기탁하신 마스크는 마을거주 고려인동포를 대상으로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순천 회원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마마나스)이 광주이주 독립투사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안정된 정착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위해 면마스크를 기증했다고 전했다.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email protected]

<2020-09-09> 한국타임즈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고려인마을에 마스크 후원

목, 2020/09/10- 06:43
4
0

[현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5주기 추모식

ⓒ 김경준

9일 오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의 75주기 추모식이 서울 효창공원(효창원)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열렸다.

ⓒ 김경준

차리석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 27년의 전 여정을 함께 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다.

ⓒ 김경준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독립운동가 수당 정정화는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음에도 임정의 살림에 보태라며 푼돈을 내주었을 정도로 그 자신에게는 인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김경준

“나처럼 임정 살림 뒤치다꺼리를 맡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지출금액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임정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특히나 돈을 받아쓰는 사람의 마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푼전을 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으리라. 동암(차리석)과 우천(조완구)은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만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 정정화, <장강일기> 中

ⓒ 김경준
ⓒ 김경준

그러면서도 결코 사무에는 소홀하지 않았으니 1948년에 열린 선생의 장례 당시 “탁월한 사무 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추모사에서 그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 김경준

그러나 선생은 해방을 맞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945년 9월 9일, 과로로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환국한 김구 선생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했고, 1948년 선생 역시 지금의 자리에 안장됐다.

오늘 추모식은 코로나 19로 인해 최소한의 추모객만 참석한 채 소규모로 열렸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돋보였다.

LAC그라피티 스튜디오의 레오다브 작가(본명 최성욱)가 직접 그린 차리석 선생의 그라피티 초상화가 놓인 가운데, 최근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를 출간한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는 자신의 책을 선생의 영전에 헌정하기도 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커피·원두 판매사인 ㈜카페리즈와 합작하여 출시한 ‘효창독립커피’ 차리석 블랜드도 헌정됐다.

행사의 사회를 맡은 방학진 민문연 기획실장은 “차리석 선생은 숭실대학교 전신인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인데 현재 숭실대에는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 흉상은 고사하고 이름을 딴 강의실 하나조차 없는 형국”이라며 “친일파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 기념관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반드시 숭실대 캠퍼스 내에 차리석 기념물을 조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역설했다.

후손 대표로 답사를 한 차영조 선생(차리석 선생 아들)은 “젊은 청년동지들이 선친을 기억하고 알리고자 애써주는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고 답례했다.

한편 차리석 선생은 한국광복군 군수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오는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20-09-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은 강의실 하나 없다”

목, 2020/09/10- 07:48
1
0

[전체보러가기]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화, 2020/09/15- 01:56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