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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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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명의 시작

admin | 토, 2021/07/17- 21:25

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이 앞서 내가 논의했던 경제적 불평등과 무력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성과 성장에 대해서도 악영향을 낳는 각 경제부문의 선진적인 프린지들로 제한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 해답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적인 형태로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시작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관행(공장제 대량생산, 때로는 포드주의 대량생산)과 경제 전체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비교하면서 고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관행을 반숙련 노동과 고도로 전문화되고 계층적인 업무관계를 바탕으로 경직된 기계와 생산공정에 의한 규격화된 재화와 서비스의 대규모 생산으로 기술할 수 있다. 이러한 포드주의 생산방식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보호 아래 대규모 생산단위들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집결시켰다. 포드주의 관행은 노동자들에게 함께 작업하는 경직된 기계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반복적인 동작을 요구했다. 포드주의 관행은 작업장에서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생산계획들의 집행적 역할과 집행적 집행적 역할들 간의 뚜렷한 구분을 인정하였다.

대량생산은 예컨대 증기기관 또는 연소기관, 기계절삭용 선반, 금속제조변환기와 같은 기계발명, 대량생산이 등장한 역사적 시점에서 군사조직을 모형삼아 조직한 기술적 노동분업의 방식, 나아가 재산의 이름으로 노동력에 대하여 경영자들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법적 구조와 같은 일련의 기술적, 조직적, 제도적, 개념적 혁신에 의해 가능했다. 혁신은 생산의 일상 과정들에 대해서 외부적이었던 기술적 발명과 과학적 발견, 법률과 정치, 심지어 금융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촉발된 일회성 삽화로서 이해되고 조직되었다. 혁신들은 생산성을 높이겠다고 약속했고 기존의 사업수행 방식을 와해시킬 우려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혁신들은 손익을 노동력의 다른 부문과 다른 자산 소유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둘러싸고 갈등을 유발했다.

대량생산은 처음부터 나아가 역사 전반에 걸쳐 주로 경제의 한 분야인 제조업과 연관되어 왔다. 게다가 대량생산은 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에서 번창했다. 대량생산은 이러한 부국으로부터 경제성장의 변방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개발도상국들로 퍼져나갔다. 제조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은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모형이 되었다. 중심적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제조업에서 다른 분야로, 이러한 두 가지 팽창 양상은 처음에는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대량생산은 지리적 전파를 유발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부문들을 넘어 확산되기 쉬웠다.

대량생산은 공식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대량생산은 제품의 반복과 규격화뿐만 아니라 공정, 즉 작업 방식과 심지어 사고방식의 반복과 규격화에 입각해서 번창한다. 대량생산은 혁신이나 와해를 외부의 권위 혹은 어쨌든 상부의 권위(소유자가 국가인 경우에도 소유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관리자)에 유보한다. 대량생산을 확립하고 작동시키는 요구사항들은 까다로운 것이지만 또한 제한적이다. 대량생산은 그 방법과 마찬가지로 판에 박힌 특성을 띤다.

일반근로자를 위한 대량생산의 교육적 요구사항은 최소한에 그친다. 즉 근로자에게 할당된 특정한 업무가 상정하는 신체적 역량과 결합된 명령에 복종하고 구두지시나 서면지시를 해득하려는 의향에 그친다. 경직된 전용기계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기능별 기계별 활용기술은 대량생산 시대의 직업훈련에서 전통적인 관심사였다. 그러한 활용기술들은 고차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거나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의 기술과 기계적인 품목들은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연장통을 닮았다. 대량생산의 적절한 운영요건이 일단 충족되는 경우에는 아주 먼 장소에서도 동일한 결과의 발생을 안심하고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핵심적인 권고, 즉 사람과 자원을 다른 모든 경제부분(특히 농업)에서 대량생산 제조업으로 이동시키라는 권고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생산성의 증가와 성장에 대한 추진력은 통상적으로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발전경제학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는 결론은 심지어 나머지 경제 부분을 타격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력, 자원, 정치적 지원의 더 많은 부분을 제조업에 제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유념한다면 고도의 생산성과 성장의 “무조건적 수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내가 차차 논의하게 될 이유에서 보자면 이러한 결론은 이제 더는 신뢰할 수 없다). 고도성장 수렴론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국가와 여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라고 간주되었다. 발전경제학의 정통에 따르면 이러한 수렴은 오직 교육과 제도의 궁극적인 제약조건들에 의해서만 제한되었다. 대량생산이 번창하기 위해 교육에 대한 요구조건들이 매우 적었다는 점과 사유재산에서의 안정성, 정부에게 발전경제학자들의 조언을 수용하고 따르도록 허용했던 계획, 규제적 권력 및 간부를 가진 국가 등과 같은 제도적 요구사항들이 매우 빈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쨌든 이러한 제약조건들조차도 그저 그렇고 탄력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량생산의 판에 박힌 특성은 마찬가지로 심지어 경제 분야들 간의 구분들이 오늘날보다 더 큰 힘을 유지했던 경제사의 시대에도 대량생산의 모형이 제조업과는 동떨어진 경제부문에서의 방향 전환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유용하다.

서비스업에서의 대량생산 모형은 서비스공급이 규격화되고 대규모로 이행되는 때 막스 베버가 개념화한 “관료제적 합리화”로 항상 흡수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민간 서비스경제보다 공공 서비스에서 더 자주 충족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공공 서비스의 지배적인 모형은 행정적 포드주의, 즉 국가의 관료기구에 의한 규격화된 저품질 서비스의 제공이었다.

저품질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유사한 서비스보다 품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정적 포드주의의 유일한 대안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그러한 서비스를 배정하는 민영화였다.

국가와 동반자가 될 역량을 갖춘 독립적인 시민사회에 의한 공공 서비스의 협력적, 비영리적, 실험적 제공과 같은 가장 유망한 대안이 없다는 사정으로 인해 행정적 포드주의는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해왔다. 국가는 만인(바닥)에게 보편적인 최소한을 보장하고 행정관행의 전선에서 가장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복잡한 서비스(천장)의 개발을 추진할 수도 있다. 바닥과 천장 사이의 넓은 중간 지대에서 국가는 민간협회나 전문가의 협력체를 통해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하여금 사람들을 조직하는 과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그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조정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과업이 공공 서비스가 수행하는 일이다. 이러한 대안은 행정적 포드주의와 달리 지식경제의 행정적 부응 형태를 대표할 수도 있다. 이러한 대안은 지식경제와 마찬가지로 생산과 교환의 안배들에서보다는 국가의 조직과 아울러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관계의 조직에서 제도적 혁신을 요구할 수도 모른다.

농업에서의 대량생산은 다수의 기업적 영농에서 보듯이 규모가 제품 및 공정의 규격화와 결합되었을 때 다시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자본, 재량권, 규모의 부족으로 인해 농민들이 대량생산의 영농형태를 포용하지 못하던 때, 농작물을 팔 경우 농민들과 거래한 회사들이 그들에게 대량생산의 영농형태를 어쨌든 자주 부과하였다. 나아가 가격 변동성과 기후 변동성, 금융위험 및 물리적 위험의 중첩으로 인한 농업에 독특한 위험은 농민들에게 그들의 보험사뿐만 아니라 구매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관행을 채택하도록 강요하였다.

미국인들이 19세기 전반기에 성취한 것(농민들 간의 협력적 경제 및 농민들과 지역정부나 주정부 간의 분권적 협력관계에 기초한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영농의 수립)을 21세기 초반에 지속시키고 재발명하는 것은 일련의 다른 제도들을 요구할 수도 있다. 21세기에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생산방식은 그러한 기반 위에서 대규모 영농 기업가들과 그들의 상업 및 금융 지원자들의 프린지에 한정된 정밀공학적이고 과학적인 영농으로서 출현하였다.

대량생산과 마찬가지로 지식경제도 외견상 두드러지지 않지만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에서 확산되지 못했다. 그 두 가지 이유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가 공식과 같은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량생산이 쉽게 운송할 수 있는 일련의 기계나 절차,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일련의 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지식경제는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특징에서부터 더 심층적인 속성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쉽게 환원될 수 없다. 지식경제는 일상적 규칙과 반복의 와해 위에서 번창하고 규칙적인 생산방식과 안배들 속에 혁신을 도입한다. 두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이 이 책의 다음 몇 개의 장에서 논의하게 될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대량생산과 달리 지식경제는 내용상 판에 박힌 것이 아니고 요구사항에서 최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행복한 역사적 우연들은 때때로 이러한 요건들의 충족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한 우연들은 특정 지역과 그 안에서 발전한 사회문화적 네트워크를 오늘날의 고립적 전위주의의 발전에 우호적으로 만들수도 있다. 예컨대, 맞춤제작형 장인노동, 견습직, 지역공동체의 촘촘한 유대의 전통들을 가진 포드주의 이전 단계의 장인적 생산이 포드주의 이후 지식경제의 발전에 우호적인 구조를 발생시키는 점, 즉 포드주의 이전 단계가 포드주의 이후 단계를 촉진한다는 점이 종종 목격되어 왔다. 나아가 실제로 지식경제의 국한적인 형태가 특히 중견기업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많은 지역들, 특히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스페인의 카탈로니아는 장인적 생산의 유서 깊은 과거를 가진 지역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쇄가 지식경제의 미실현된 잠재력의 비전에 고무된 더욱 광범위한 구조변화를 대신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내가 고립적 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제한된 방식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수행자들과 수혜자들은 그러한 관행을 일천하고 부수적인 형태라고 착각하고 그 발전을 가로막는 데에 여전히 가담할 것이다.

기계화된 제조업이나 대량생산과는 달리, 지금까지 지식경제가 생산체제 전체에 그 징표를 남기지 못한 이유(가장 가난하고 가장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상품을 판매하는 유사전위주의를 제외하고)를 해명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경제의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은 서로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지식경제는 어떤 공식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까다로운 전제조건들을 가진다. 지식경제는 그러한 전제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공식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지식경제가 더욱 발전되고 보급될수록(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은 같은 변화의 두 가지 측면이다) 지식경제는 그러한 조건들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그 조건의 충족을 통해 더 발전하고 더 확산되게 된다.

다음 몇 개의 장에서는 지식경제의 보급에 필요한 세 가지 요건, 즉 교육적-인지적 요건, 사회적-도덕적 요건, 법적-제도적 요건을 논의하겠다.

세 번째 요건은 가장 친숙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요건은 매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다음 나는 이러한 요건들의 충족을 우대하는 민주사회의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와 의식에서의 변화들을 탐구한다. 그 요건들 및 그 충족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 대한 주장에서 포용적인 전위주의의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요가 나타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청사진이나 체계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 이 프로그램은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의 정신에서 이해하고 착수해야 할 하나의 방향이다. 우리는 상황이 허락함에 따라 이러한 전선들의 어디에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전진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전선들에서 전진하는 경우에만 돌파할 수 있는 한계점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방향에 대한 이해를 다듬고 수정한다. 그러한 궤도상의 각각의 계기들은 변혁적 행동의 놀라움만이 드러낼 수 있을 법한 모호성들, 호기들, 장애물들을 폭로할 것이다.

프로그램적 논의에서 항상 그렇듯이, 구조변화(어떻게 구조적 변화는 발생하는가 혹은 발생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해는 제안들을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종합적인 사회경제적 이론의 담론에서 이러한 이해를 대변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없고 통상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편적이고 맥락구속적인 사고로 전진하는 것을 더욱 자주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이론화보다 프로그램적인 사고를 선호한다는 사정이 구조변화에 대한 명확성의 요구에서 우리를 면책시키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선택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초기 단계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제안들은 현실적이기는 하되 시시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대신에 우리가 앞으로 몇 발짝 앞서가는 단계들을 상상한다면, 우리의 제안들은 유토피아적이라는 댓가를 치르는 경우에만 흥미와 영감을 유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현재 여론의 풍토에서 제안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시시한 것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일 공산이 높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안들이 온건한가 또는 극단적인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제안들이 현재의 안배들과 가까운 것이든 먼 것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제안들이 그리고 있는 궤적이다.

변혁적 정치의 언어는 종종 가장 이른 단계들과 가장 멀리 있는 단계들의 결합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 언어는 실용적인 동시에 예언적이다. 변혁적 정치는 이상들과 이익들을 구체적인 실례들과 결합하는 가운데 동력을 이끌어내면서 변혁적 정치가 추구하는 방향전환을 위해 인접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착수금을 제시하거나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한다.

어쨌든 나는 개념적 작업에서는 가장 근접한 단계들과 가장 먼 단계들 사이의 중간 범위에서 방향을 정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가장 유용할지 모른다. 정치가와 예언가는 이곳(here)에서 우리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그곳들(theres)의 범위를 초월하는 (과도하게 초월하지는 않을지라도) 기획들의 서술을 회피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기획들은 열광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기성현실에 너무 가깝고 하지만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이기에는 너무 동떨어져 있을 공산이 크다. 어쨌든 그러한 기획들도 하나의 이점을 갖고 있다. 그러한 기획들은 초기 단계들이나 먼 단계들보다 그 방향의 성격과 난점들을 해명할 더 나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단계의 기획들은 사람들을 덜 매혹하지만 더 명료하게 해줄지 모른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전개함에 있어서 나는 이제 바로 이러한 중간 범위에 주로 초점을 맞추겠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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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우리는 고립적인 지식경제를 내가 유사전위주의(quasi-vangaurdism)라고 부르는 것과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영 또는 생산 공학의 수준에서 내가 서술했던 지식경제의 피상적인 특성들이나 지식경제가 발전되거나 전파됨에 따라 지식경제가 드러내는 더욱 심층적인 특성들이든지 간에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숙달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이 부상하는 전위 부문, 특히 정보통신 공학과 매우 자주 연결되는 기술을 이용하는 광범위한 기업들의 모습이 바로 유사전위주의이다.

유사전위주의의 가장 흔한 형태는 복잡한 정보(예컨대 월마트와 같은 거대소매기업이 취급해야만 하는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디지털기술의 채택이었다. 그러한 기업들은 정보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재고의 “적시” 보충과 같은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관행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업의 대규모성은 기업에게 필요한 기술적 장비의 고정비용을 처리하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장비사용은 결국 기업이 자신의 시장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더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중 어느 것도 그러한 거대기업들을 지식경제의 대표자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보다 더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진정한 지식경제는 여전히 좁은 서클 안에 갇혀 있다. 이윤을 쌓고 시장지배력을 축적하기 위한 인센티브는 이러한 협애성을 강화한다. 지식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들은 생산과정에서 규칙화되거나 심지어 상품화될 수 있는 부분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낸다. 그들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전통적인 대량생산 방법을 사용하면서 주로 미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업들에게 이러한 규칙화된 부분들을 할당한다. 어떤 선진기업들은 심지어 “팹리스”기업으로서 큰 생산단위들(공장들)의 소유권과 아울러 그러한 단위들이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안정적 노동력에 대한 고용부담을 가능한 최대로 떨쳐버린다.

진정한 전위주의는 대량생산의 사회적 복잡성에서 벗어난 자본과 지식의 엘리트로서 기업가, 관리자, 기술자의 작은 내부 집단에 한정된다. 상이한 규칙 아래서 다른 국가의 다른 기업과의 하도급계약 또는 더 일반적으로 분산된 계약 네트워크는 종종 본국의 노동력을 지식경제의 업무로 통합하는 것을 대체한다. 그 수익의 알짜배기는 고립된 지식경제의 정점에서 활약하는 기업의 주주들에게 시세차익으로 돌아간다. 또한 그 알짜배기는 스톡옵션과 같은 임금에 준하는 혜택의 형태로 최고로 숙련된
노동자와 경영자 엘리트에게도 돌아간다.

유사전위주의에 의한 선진관행의 허위적 확산에 상응하는 현상이 진정한 전위주의의 초고립성(hyperinsularity)이다. 선진기업은 자신이 판매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온갖 물적 재화를 제조하는 회사들과 사무적인 계약관계로 후퇴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계획 중 규칙화된 부분들을 중국에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조정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진정한 형태이지만 축소된 형태이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허위적인 긴 그림자일 뿐이다.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공존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을 내포하는 두 가지 동향을 야기한다. 첫 번째 동향은 글로벌 과점기업들이 획득한 결정적인 지위다. 두 번째 동향은 개발도상국들뿐만 아니라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노동력을 점증적으로 불안정고용에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동향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점진적 후퇴국면에서 수행되는 노동과 초고립적 전위주의를 통제하는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들의 노동을 제외하고는 국민소득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노동보다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유사전위주의(월마트와 같은 기업들)와 초고립적 전위주의(알파벳과 퀄컴과 같은 기업들)는 모두 엄청난 규모성과 불완전경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사례에서 거대기업은 가장 선진적인 설비에 대한 고정된 투자비용을 영리적으로 감당하는 능력에서 더 작은 경쟁업체보다 이점을 누린다. 게다가 지식경제의 전위 부문의 진정한 구현체인 초고립적 선진기업들은 효과적인 경쟁을 피하는 데에 세 가지 추가적인 이점을 갖는다. 그러한 이점들은 지식경제를 차이 나게 해주는 것(물리적인 기반시설에 의해 지원되고 물리적 장치에 의해 접근되기는 하지만 무형적인 아이디어, 능력, 네트워크의 작업에서의 우위성) 의 제한적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이다.

확장과 과점의 첫 번째 이점은 초고립적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과 같은 사업체들이 갖는 플랫폼효과에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다수의 상품과 서비스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제품을 플랫폼이나 생태계의 일부로서만 판매하게 된다. 플랫폼이 클수록 그리고 사용자의 수가 많을수록,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옵션들이 더 다양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고객에 대한 매력은 더 강력하게 된다.

두 번째 이점은 진정한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기술적 인재를 유인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이다. 막대한 유동자본을 보유한 거대한 사업을 위한 활동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편익에다 기술적 진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업을 위해 활동한다는 매력이 추가된다. 그러한 기업들은 성공하려면 실험실을 닮아야 한다. 젊은 기술자나 기술적인 기업가,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인 작업과 접촉을 유지하는 팀의 일원이 되고싶어 한다.

세 번째 이점은 바로 다음의 소비자를 위한 재생산의 한계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제품과 서비스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이점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선 따분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즉각적이고 무비용에 가까운 조작은 소비자를 플랫폼으로 초대하고 플랫폼의 많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거대기업에게 추가비용을 부과시키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고 사용자 모집단의 크기를 증가시킴으로써 향후 다른 사용자에게 플랫폼을 그만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할수도 있다. 겉보기에 사소한 특성들은 원래 의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식 및 이러한 지식을 통해 가능하게 된 사용자 커뮤니티들이 물질적인 제품과 프로세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모든 프로세스와 제품들은 성질상 보편적인 비용, 소모, 퇴화의 대상이다. 이 모든 현상은 한계수확 체감의 제약이 계속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 속하는 사항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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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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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지식경제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국한성의 극복은 가속적인 성장을 재점화하고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 속에서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초기형태들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할 최상의 전망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경제 각 분야의 프린지들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국한되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기술적 성취들이 이미 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의 단계,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안배들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접근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계를 대다수 노동자와 기업들에게 부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모방과 변화를 고취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열차의 기관실과 나머지 차량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지식경제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선진관행이 어떤 특정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고 비록 늘 프린지에 국한되지만 실제로 많은 부문들에서 발판을 확보해왔다면 이와 같은 실패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더 경악하게 하고 맥 빠지게 한다.

지식경제의 국한성이 경제침체를 유도하는 가장 의미심장하지만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는 이러한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생산체계와 노동력의 분야들에서조차 이러한 국한성이 전위 부문 자체에 대해 미치는 결과이다. 만일 어떤 생산방식이 폭넓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방식의 고립적 형태는 그러한 생산방식의 수행자나 수혜자에 의해서도 오해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처음 출현하였던 첨단기술 산업과 분야를 특징지었던 특성들과 같은 가장 피상적인 혹은 우연한 특징들로 쉽게 오인될 것이다. 이전의 대량생산과는 달리 이러한 생산방식은 관행자체에 표준적인 형식과 널리 인정된 중요성을 부여해주는 공인된 이론이나 교리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당대를 풍미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것으로 머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결과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경제의 고립성과 그 일자리들의 상대적 빈곤성은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를 심화시킨다. 부의 증가부분은 노동력의 감소부분에 의해 생산된다. 내가 초고립성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킨다. 대량생산 산업과 연관된 일자리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구조는 두 부분으로 해체된다.

더 큰 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수행되는 서비스업과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에서 저임금 일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자리들은 낮은 노동수익과 낮은 세수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생존할 수 있는, 쇠락하는 대량생산의 잔여물에서 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또는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생산과정의 일부를 규칙화하고 사업의 상품화된 부분을 흔히 매우 먼 나라에 있는 종속기업들에게 할당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해온 표준화된 제조업의 변형 안에서 그러한 일자리들은 입지를 창출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큰 부분은 특권적인 일자리들, 즉 진정하고 배타적인 지식경제의 후미진 곳에서 구축된 비교적 소수의 일자리들이다. 대량생산이 지속적으로 쇠락하며 잔여물이나 보조적 지위로 위축되는 결과,이른바 “일자리 구조에서 중간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급부권은 시장경제의 기성제도들에 의해 생성된 불평등이 극단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명료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문턱을 넘어가면 구조적 현실은 시정조치로 감당하기 어렵다. 예산의 증수(增收)측면(누진세)이나 지출측면(재분배적 사회적 권리와 이전)에서 시정적 재분배는 생산의 전위들과 후위들 간의 격차에 의해 야기되는 엄청난 불평등을 보상할만큼 규모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정적 재분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기존의 경제적 제도들이나 유인책들과 충돌을 야기하고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될 수 있는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면서 인간화하는 역할에서 누진세가 시장에서 결정된 결과를 뒤집고 경제를 해체하는 쪽으로 아주 멀리 나가는 경우에만 누진세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수 있다. 누진세가 그렇게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진세는 거기에 이르기 한참 전에 중단된다.

더 유망한 경로는 일차적으로 더 작은 불평등 나아가 지분, 도구, 능력, 기회의 더 확산된 분배를 창출하는 다른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질서의 재구축이 요구하는 국가, 생산의 물리적 기반시설 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역량에 투자하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급진적인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이를 위해 신규 또는 기존 사기업의 장래에 대한 지분을 매개로 그들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에게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서 높은 세수가 필요할 것이다.

유사한 추론이 시정적 재분배의 이면인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생산 체제의 전위 부분들과 후위 부분들 간의 차이에 착근한 극명한 불평등을 보상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의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사용법은 성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혁된 경제의 행위자가 될 만큼 대담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사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역설적으로 역진적이고 간접적인 소비세로 조달되는 사람과 그 역량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다른 형태로 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가장 큰 한계들(시장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는 것을 포기한 점,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결여한 점,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배분을 규정하는 안배들에 대한 변화보다는 시정적 재분배에 집착한 점,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 공유된 역량 강화의 이상을 전반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경제체제를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굴복시킨 점)을 극복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경제성장의 논리와 기회, 능력, 이익의 원대한 평등과 포용을 향한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후적인 교정책, 즉 새로운 상상과 쇄신을 이미 포기한 경제질서의 불평등결과를 완화시키려는 기획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기성의 경제질서를 다시 상상하고 쇄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짜놓은 상상적인 대안으로 기성의 경제체제를 환상적으로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대신에 부분별로, 단계별로 수행되는 누적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기획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현재적 국한성이 야기하는 불평등-심화적인 결과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

아래 세 가지 명제들을 통해 나는 불평등과 관련하여 오늘날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비교할 만한 재정적 경험을 요약하고 해명해 보겠다. 이러한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장기적이고 밀도 있는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만, 오늘날 북대서양 국가들의 통치 엘리트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획인 사민주의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의 담론과는 대체로 이질적이다.

첫 번째 명제는 경제적, 교육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조직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의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책들이 불평등의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하다는 명제이다. 제도적 안배를 바꾸는 시책들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권리와 이전지출에 의한 사후적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오늘날 경제적 안배들 속에 불평등의 정착에 관한 논쟁의 주요 거점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 즉 그러한 생산방식이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영역으로서 고립적 전위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경제 전체에 징표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지금까지 가장 예찬받는 경제사회적 조직형태는 북구 사민주의였다. 만약 세계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세계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제안에 투표할 것이다. 그 경우 스웨덴은 현실적 스웨덴이 아니라 상상적 스웨덴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상적 재분배를 통한 시장질서의 인간화와 상상적 스웨덴을 연결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를 통한 이와 같은 인간화에 앞서서 유산계급들과 국가권력의 이익들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계급적, 이념적 전투가 펼쳐졌다는 점은 망각한다. 이 갈등은 국가의 왕조적 부호통치와 사민주의 인본주의자들의 규제적 재분배적 공약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마감되었다. 세계는 선행하는 서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결말만 듣고 싶어 한다. 나아가 세계는 간신히 조정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기성 조직형태의 한계 안에서 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결정적인 야망으로 삼은 의제[제3의 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민주의] 프로그램은 고립적인 지식경제, 구제불능의 대량생산 제조업,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체제의 분업에 착근한 불평등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 인종적, 문화적 이질성이 결여된 사회적 시멘트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조직된 이전지출의 허약성이 폭로된 이래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응집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위기를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 삼지 않는 민주적인 정치생활을 창조할 수 없다.

불평등과 관련하여 현대 금융경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명제는 세금과 사회지출이 중요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과세 및 지출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세의 누진적 성격이 아니다. 관건은 총세입 규모와 이러한 재정수입의 지출방향에 있다.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진보적 재분배로 상실한 부분을 우리는 지출 측면에서 배로 만회할 수도 있다.

많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률종합부가가치세와 같은 역진적 간접소비세는 높은 세수(稅收)를 달성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이러한 세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들을 재정적으로 밑받침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진적인 간접소비세가 전통적인 진보적 담론에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역설적이다. 부가가치세는 정의상 상대가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립적인 세금이다. 부가가치세의 중립성을 침해하는 예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한에서 부가가치세는 정부를 대신하여 모든 투입과 산출 간의 일정한 전환가치율을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경제적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세수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세수의 많은 부분은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평등지향적인 재분배로 포기한 부분을 보상하는 정도를 넘어서 재분배적 사회투자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자칭 진보파들은 매우 자주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월하다는 점을 놓친다. 진보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세와 이전지출의 영역에서조차 대체로 변혁적 결과보다는 진보적 경건성을 우선시한다.

세 번째 명제는 우리가 재분배적 결과들과 조세 수단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조세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구조변화에 보조적인 재분배적 결과(첫 번째 명제)와 역진세에 의존하더라도 높은 세수의 유지(두 번째 명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누진세의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상은 각 개인이 사회의 자원들을 꺼내서 자신에게 소비한 소득과 부로 인해 발생한 생활수준의 서열이다. 이러한 과녁을 맞추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세 수단은 개인적인 소비에 대한 세금이다.

케인스의 제자 니컬러스 칼도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때로는 칼도어세로 불리는 이러한 세금은 각 개인의 총소득(자본수익을 포함)과 자기 자신에게 지출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가파른 누진율로 부과될 수 있다. 전통적인 소득세가 안고 있는 난점 이외에 누진소비세의 시행에서 특별한 기술적인 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진소비세는 개인소득세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소득세는 두루뭉수리하고 혼성적인수단이라면 누진소비세는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게다가 누진소비세는 정치적 의지와 권력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최고 한계세율을 허용한다. 누진소비세의 상한선은 100퍼센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적 지출의 일정 수준 아래에서 개인은 세금을 납부하기 보다는 환급받을 수도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개인은 누진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호화생활을 넘어서면 그는 자신에게 쓰는 1달러당 몇 달러씩을 국가에 납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진보파들이 과세의 재분배적 이용에 대한 헌신에서 명철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누진소비세는 선호할 만한 조세이다. 진보파들은 첫째로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선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보상적 재분배와 관련하여 세수의 총계규모와 세금의 지출방향이 조세체계의 누진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불평등의 재조정에 관한 세 번째 사고단계에서 이러한 누진적 소비세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진세의 이차적인 대상은 부의 축적과 사망에 의한 부의 세습이나 생전 증여로 획득한 경제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 목표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세를 통해 달성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이차적이다. 부에 대한 세금이 자산의 현재 분배상태에서 중요한 변화를 희망할 수 있기도 전에 이러한 세금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주요한 경제적 와해를 초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누진세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현실적인 또는 예상된 상속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생활수준의 서열보다 경제력의 행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회와 역량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안배들의 제도적 혁신은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우리가 사후적으로 성취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한 혁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수단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금과 사회지출을 통한 진보적 재분배는 구조변화의 대체물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구조변화는 필경 하나의 불가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불가분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러한 대체는 (대위기라는 비상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책에서 써먹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대체의 기회가 열려 있다면 대체는 심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구조변화의 개념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우리를 국한된 지식경제에서 벗어나 포용적 지식경제로 이끌게 할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급진적인 혁신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탐구는 이 책 나머지 부분의 주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다.

고립적인 전위 부분들에만 존재하는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같은 침체와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전위 부문들과 나머지 부문들 간에 발생하는 격차의 원인들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에게 초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 침체의 비용과 경제적 불이익의 불공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더 작고 더 빈곤하고 더욱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핵심은 상상력과 협력 사이에서 지식경제가 추구하고 수립해야만 하는 연결(우리의 협력적 관행들을 생산활동에서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협력을 상상력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기존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형태에서는 간신히 알아챌 뿐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전파할 수 없다면 그러한 관행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이미 참여자들에게 일련의 물질적 혜택뿐만 아니라 도덕적 혜택, 즉 창조적 충동에 더 넓은 여지를 제공하는 과업에 대한 경험의 참맛을 쏟아 부어준다. 지식경제는 따분한 생산 현실 속에 공식이나 모듈 같은 기계로서의 정신보다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립되어온 국한된 전위주의가 함축하는 모욕들 중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회에서조차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구사항들, 즉 공인된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에서는 변증법적이고 사회적 환경에서는 협력적인 교육의 중시, 더 높은 신뢰와 더 큰 재량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생산기풍의 쇄신, 나아가 시장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법적 체제의 쇄신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보급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서 생산방식을 심화하려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또한 우리의 경험을 범위, 능력, 맹렬성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그러한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사회 세계의 불운한 꼭두각시 노릇을 중단하고 대신에 이 세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우리는 얻게 된다.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왜소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립적 전위주의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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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1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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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또 다른 심층적인 특징은 지식경제가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과 정신이 관념을 발전시키고 발견을 성취하는 방식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수립해준다는 데에 있다. 생산이란 우리의 힘을 향상시키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연을 변형하고 자연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지식성장이 경제활동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신규제품이나 신규자산, 이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은 우리의 추측과 실험을 상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경제의 이와 같은 성격규정에서 경제생활에 중요한 어떤 것들, 예컨대 생산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 즉 협력체제나 기술적 노동분업 나아가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안배들은 배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식경제의 중요한 충동을 급진화함에 따라 실천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은 상상력의 표현이 된다. 이 방향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수준에서, 즉 현장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경제와 정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여 이러한 안배들이 시장과 국가에 관한 확립된 가정과 안배들을 당연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이를 초극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정신활동의 두 측면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상상력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무엇이 관건적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측면에서 정신은 구닥다리 기계, 즉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에서 중요했던 기계의 일종과 같다. 이러한 정신은 모듈과 같아서 (뇌가소성에서 한계가 존재하는 한) 뇌의 구분된 영역들과 연결된 다양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공식과 같아서 판에 박힌 공식, 규칙 또는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신의 행동 또한 반복적이다.

다른 측면에서 정신은 모듈이나 공식과 다르다. 이러한 정신은 뇌가 소성을 이용하여 뇌의 물리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부분들에 유사한 역량을 부여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여타 모든 것과 재조합할 수 있다. 이는 수학에서 회귀적 무한(recursive infinity)이라고 부르는 역량이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의 정립된 관행이나 방법을 기각하고 자신의 확립된 전제들에 도전하고 계속해서 발견을 이루거나 정신이 회고적으로 명료화하는 통찰들, 적절한 관행들, 방법들, 전제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는 시인이 부정적 능력이라고 불렀던 권능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이다. 상상력은 기계로서의 정신과 대조적인 반(反)기계로서의 정신이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정신은 두 가지 구성적 작동방식을 가진다. 첫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강조했던 것으로서 거리두기이다. 그 이미지는 인식의 기억이다. 두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간과한 것으로서 변형적인 변주이다. 우리는 어떤 자연적이거나 계획적인 개입에 반응하여 현상의 변화를 기획하거나 자극함으로써 현상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 현상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현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지와 같은 인접한 가능성들의 범위에 현상을 포섭함으로써 그 현상을 이해한다. 생산과 상상력의 근접성은 지식경제의 심장이며, 지식경제가 확산되고 심화될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산과 상상력의 유사성을 탐구할 수 있다. 하나는 작업을 조직하는 방법이나 노동의 기술적 분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계로서의 정신과 반기계로서의 정신(상상력)의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뇌의 물리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생산의 제도와 관행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조직에 의해 형태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정치가 인간관계의 형태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한다면) 정치의 역사는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지식경제 하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는 방식(기술적 노동분업)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의 작동방식과 닮기 시작하고, 그 각각의 특징들, 한편으로는 정신의 비모듈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더욱 완전하게 발현됨에 따라 그 회귀적 무한의 역량과 부정적 능력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 생산은 이러한 특성들과 능력들 덕분에 인접한 가능성의 잠재영역에서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 간의 차이나 결과적으로 전문화된 집행적 역할들 간의 차이가 완화될수록, 생산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현할 기회는 더 나아진다.

생산계획은 집행과정에서 작업반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결과적으로 작업반 내에서 전문화된 역할들은 더 이상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역할들 간의 구분의 고착성은 개념 정립과 집행 간의 차이의 명료성의 이면일 뿐이다.

기술적 노동분업이 어떻게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경제에 적용되는 경우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더 익숙한 군사적인 응용사례를 가지고 있다. 재래식 정규군으로 조직된 보병여단은 지휘관과 병사의 엄격한 구분과 야전에서 고정된 역할들을 가진 지휘통제구조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보병여단은 자체적으로 구비한 군사기술의 잠재력, 즉 화력기술 및 통신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매우 제한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보병여단은 기습전에 대응하여 전장에서 재편성하고 변통하는 능력에서도 제한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기술을 습득하고 장비를 갖춘 비정규군은 전투의 계획과 실행 사이에 그와 같은 뚜렷한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군대는 엄격한 지휘통제구조를 피할 것이며, 긴급한 장애와 기회에 비추어 계획을 조정할 더 큰 재량을 하급 장교와 하급 부대에 배정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군대는 스페셜리스트에게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부대가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면 부대는 뛰어난 작전능력을 구비할 것이고 전통적인 정규군보다 화력과 통신장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대는 야전에서 흩어지고 다시 집결하고, 일관성과 추진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기습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진화의 노선은 정규군이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확장하고 중앙의 (그러나 느슨하고 유연한) 통제를 수용하고 야전에서 일관성과 추진력을 보존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비정규군의 일부 특성들을 외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경제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에서 진보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협력방법은 더욱 완전하게 상상력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이제 상상력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기술적 노동분업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기계화된 제조업과 그 후속형태인 공장제 대량생산) 아래에서 노동자는 마치 자신이 기계의 일부인 것처럼 일했다. 애덤 스미스의 핀공장이나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그의 동작은 기계들의 동작을 연상시켰다. 노동자와 기계의 유사성은 은유나 먼 비유 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유사성은 프레더릭 테일러와 같은 산업조직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전화되어 경영자와 작업반장에게 실제적인 지침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하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관행의 가장 신중한 표현형태에서도 기계로서의 정신을 본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교육을 경제성장의 기본요소 중 하나로 떠받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 시대의 노동자에게 교육을 통해 요구되는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사정은 당연하다. 이러한 노동자가 필요로 했던 것은 복종심,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리력, 손재주, 특히 손과 눈의 협응력이었다.

지식경제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상상력의 모형에 따른 생산의 쇄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이러한 변화를 지도하는 원칙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기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관으로 제시한다.

아주 최근까지 기계의 요체는 우리가 반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계들을 공식과 같은 것이라고 부르자. 기계가 틀에 박힌 공식과 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기계의 가장 큰 가치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공식과 같지 않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사용자는 반복하고 기계 장치로 코드화하는 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활동들에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자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자원(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와 사용자의 이와 같은 관계는 생산방식의 역사에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생산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례가 보여주듯이, 노동자는 더욱 빈번히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모방하거나 다양하지만 비교적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기계를 보완함으로써 마치 그가 자신의 기계 중 하나인 것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교적 단순하고 경직된 기계일지라도 사용자들로 하여금 기계를 모방하는 대신에 기계를 최선으로 이용하도록 허용하는 기술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술의 잠재력은 주류 경제사의 주변으로 내몰리게 된 공예적이거나 장인적인 생산형태로 달성되었다.

생산방식의 역사와 이러한 생산방식을 배태한 경제, 정치, 문화의 역사는 기계의 진화를 위축시키고 또한 기술적 노동분업을 형성해왔다. 기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기계가 아닌 것, 반(反)기계, 또는 비공식적이거나 비알고리즘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순전히 사변적인 가능성에 그쳤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현재의 고립적이고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형태에서도 기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이용방식을 거부하는 기계들의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특히 현재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으로 알려진 기술혁신의 가장 혁명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초기 역사에서 지금까지 발전된 기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두가지 기본적인 방식이 있다.

우선, 지식경제의 기계들은 공식에 따르는 좀 더 고차원적인 장치들일 뿐이다. 우리는 특정한 용도에 한정하여 일련의 제한된 조작들의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그러한 장치에 코드화하는 것 그 이상을 수행한다. 우리는 그러한 장치가 사례와 경험에서 새로운 동작을 추론하고 그에 따라 1차적인 알고리즘과 공식을 변경하도록 허용하는 메타적인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혹은 2차적인 추론규칙들을 그러한 장치들에 부여한다. 우리는 기계들이 자신의 절차들을 조정할 때 반응하는 경험과 사례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심지어 이러한 기계들에 무작위성의 요소까지 장착할 수 있다.

또 다른 이해에 따르면 이 기계들이 수행하기 시작한 활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계들은 일반적인 추론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우리는 공식에 따르지 않은 기계기능을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과 같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차량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과 같은 더욱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적응적인 조작능력의 획득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들은 과업들의 물리적 수행의 맥락에서 발전한다.

가장 발전한 기계들에 대한 두 번째 이해에 따르면 우리가 고차적인 추론규칙으로 파악한 것은 그러한 추론규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적응적인 진화적 상승에 대한 회고적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한 능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은 피아제의 인지심리학에서 연구된 발달과정과 유사하다. 즉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다음에 나타나고 개념적인 것은 조작적인것 다음에 나타난다. 공식적인 환원이나 표현에 반발하는 실용적인 여분은 존재한다

기계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 즉 지식경제에서 시작하고 지금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단계에 관한 메타-공식적이고 조작적인 이해들은 부상하는 새로움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해명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해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적어도 아직까지는 확보하고 있지 않다. 기계 역량들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이 두 가지 설명들을 등가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더 이상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지점까지 진보하는 때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술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지 상관없이 사람과 기계의 관계에서 어떤 근본적인 사항은 이미 변하였다. 비록 그러한 접근 방식이 심지어 비교적 원시적인 초기 기술의 모든 잠재력을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기계의 친구로서 배역을 주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현재 고립적이고 단절된 형태에서도 지식경제의 노동자를 기계의 그림자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기계들은 어떤 일에서는 인간 노동자가 일찍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계도 가질 수 없는 것, 즉 상상력을 보유한다.

공식적인 것에서 메타-공식적이거나 포스트-공식적인 것으로의 운동은 내가 앞에서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마음의 두 번째 측면을 기계(원칙적으로는 모든 기계)가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 아니다. 상상력의 특징은 부정적 능력이다. 즉 상상력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사태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이윽고 변형적 변주들의 범위 안에 그러한 현상이나 사태를 포섭하는 정신의 능력이며, 정신이 아직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더 잘보기 위하여 정신의 확립된 방법들을 버리고 정신의 현재적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의 능력이고, 나아가 이전에는 생성될 수 없었던 통찰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반성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전제들을 공식화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역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전에 관한 것이다.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이 이탈적이고 예지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즉 인간 실존의 온갖 유한한 결정 요소들에 대한 인간의 초월성,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 유폐될 수 없는 우리의 역량에 뿌리박고 있는 힘이다.

이러한 기계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은 마치 자신이 기계인 것처럼 작업하거나 사고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한 기계사용이다. 기계와 반기계(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결합은 노동자나 기계가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는 기계에게 부여하였던 저차원의 규칙과 고차원의 규칙 이외에 이러한 규칙에 저항하는 능력과 이러한 저항으로 성취한 발견들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능력까지 기계에게 장착함으로써 기계를 상상력의 거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인간과 기계의 격차를 줄이고 심지어 연산능력에서는 인간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까지 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보다 앞서 간다. 거북이, 즉 우리가 손수 만든 거북이[기계]와의 가장 중요한 경쟁에서 아킬레스처럼 기계는 결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도덕적 이익에도 응답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의 더 많은 부분을 기계가 수행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와 기계가 분열하는 세계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라는 유령을 불러왔다. 나는 나중에 급진화되고 경제 전반에 확산된 지식경제 아래서 노동의 성격은 변할 것이지만 노동의 총량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기술혁신에 대한 반론으로서 노동총량불변이론에 대한 정통경제학의 거부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진정한 위험은 그 반대다. 노동자층의 압도적인 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기계가 할 수도 있는 일을 수행하도록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의 능력에 대한 존중을 통해 발전하는 경제라면 어느 누구도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경제의 제도적 안배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러한 잠재력은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논의하게 될 특정한 방향의 시장질서의 제도적 개편은 지식경제의 심화와 보급을 위한 주요한 요건 중 하나이다. 그러한 변화의 한 요소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 일찌감치 언급할 만하다. 계약형태로 매매하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한, 지식경제가 선호하고 요구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는 억압되거나 통제되기 쉬울 것이다. 재산권의 이름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사람들이 경영 재량권의 극대화에 대해 갖는 이익은 이러한 잠재력의 달성을 억제한다. 이들의 권력적 이익은 엘리트 노동자와 기술자의 작고 고립된 세상 바깥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를 반대한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의 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대로 임노동이 점차 고차적인 자유노동으로서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19세기 이상이 21세기의 현실과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경우 그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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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0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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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특징은 지식경제가 생산의 도덕적 문화를 변화시키고, 생산작업에서 요구되고 허용된 신뢰와 재량의 수준을 향상시키며, 협력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고양시켜 모든 사회생활에 고질적인 협력과 혁신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경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이러한 생산방식이 번창하도록 하였던 시장질서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정도의 신뢰만을 요구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사회이론가들(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은 그 시대의 “자본주의” 경제의 도덕적 전제들을 강조했었다. 사회경제생활의 초기 형식들에서 전형적이었던 차이, 즉 국외자들에게 보인 불신과 혈연이나 문화로 엮인 내부자들이 공유하는 고도의 상호신뢰 간의 예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이러한 전제들에서 관건적이었다. 불필요하고 신뢰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한, 이방인들 간의 협력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이방인들 사이에 일반화된 적당한 정도의 신뢰(낮은 신뢰)에 의존한다.

즉성(卽成)의 쌍무적 이행약속[쌍무계약]을 중시하고 지속적인 관계들을 계약법의 주변부로 격하시킨 19세기 고전적인 계약법은 이러한 비전을 법적 규칙과 교리로 발전시켰다. 19세기의 발명품인 통일된 재산권은 마치 자연적으로 한통속이기나 한 것처럼, 사물의 관계에서 일련의 권력을 결합하고 그러한 권력을 동일한 권리보유자, 즉 소유권자에게 부여하면서 계약법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통일된 재산권은 많은 권리들 중 그저 하나의 권리로 그치지 않았다. 통일된 재산권은 모든 권리의 범례적인 형태로 봉사하였다.

소유자는 자신의 권리의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가능한 한 최소로 고려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재산비축은 연대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되었다. 그러한 재산비축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낮은 신뢰를 보편화하는 데에 몰두하였던 사회에 적합한 물권법이었다.

대량생산은 재산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계층적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대량생산의 전 단계인 기계화된 제조업처럼 자본의 대표자들로서 생산과정을 감독하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재량을 유보하였다. 대량생산은 개별노동자 또는 작업반에 허용된 재량영역을 최소화함으로써 임노동자에 대한 신뢰나 근로자 간의 신뢰에 의존할 필요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세계에서 협력의 요구와 혁신의 요구 간의 긴장은 첨예화되었다. 모든 혁신은 혁신을 집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협력하도록 요구한다. 기술적이든, 조직적이든, 제도적이든 혹은 개념적이든 모든 혁신은 기성의 협력체제를 동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모든 혁신은 이러한 모든 협력체제에 착근한 권리와 기대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혁신은 혁신이 자신의 상대적 위치에 미칠 영향을 놓고 관련된 집단들 사이에 투쟁을 촉발한다.

우리는 협력의 필요와 혁신의 필요 사이의 긴장을 줄이는 활동을 통해 협력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 각자에게 경제적 불안에 맞서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일련의 안전장치들과 역량을 향상시키는 경제적, 교육적 재원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생산기술뿐만 아니라 생산 제도에서도 혁신의 기회를 동시에 증가시키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순전히 일회적인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 위에서 번창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생산방식은 일반화된 낮은 신뢰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감독 역할과 집행 역할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의 전복과 엄격한 전문화에 대한 선진적 생산방식의 양가성은 상사와 감독관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더 넓은 재량과 더 큰 신뢰를 요구한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협력과 경쟁을 각기 특징적인 활동영역으로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기업 내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들 사이에서도 협력적 경쟁(협력과 경쟁의 유동적인 혼합)을 신뢰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사회자본(연결의 밀도)을 축적하는 것과 협력의 경향과 혁신의 필요성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지식경제의 기초라는 점을 시사한다. 나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시장경제의 제도적 개편(경제적 분산의 제도들)이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을 위한 주요한 조건이라고 주장 할 것이다. 또 다른 요구사항은 교육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심화하고 확산시키는 데에서나 교육과 제도가 전부일 수는 없다.

협력의 능력은 주요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상대적 강점을 불변적인 소여로 수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일부 국가들은 경제의 제도적인 구조틀을 다수 시험하였으나 모조리 실패하였다. 다른 국가들은 제도적 실험에 대한 약속에 의해서든 국가적 비상사태로 인해서든 자신의 경제적 제도들을 변화시키면서 높은 수준의 협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국민적 정치문화에서 신성불가침적인 것으로 간주된 다수의 경제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배제하고 이러한 문화에서 질색하던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인종적 선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계급적 선을 넘어서는 협력적 성향은 남아 있었다. 그 실제적인 결과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감한 제도적 혁신과 물리적, 재정적, 인적 자원의 대규모 동원의 결합은 국내총생산을 4년 만에 두 배로 증가시켰으며, 이러한 결과는 미국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평화시처럼 전시에서도 사회자본의 수준과 협력의 성향과 역량은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세속적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미국인들은 실상과 달리 자신들이 무계급 사회에서 살고 있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협력적 관행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저해하는 고착된 불평등을 공격하는 일에서 오랜 기간 억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미국인들의 자기기만은 그들이 보고 싶지 않거나 볼 수도 없었던 계급적 선을 넘어협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단기적으로 그들에게 잘 봉사했던 것 같다.

지식경제에 대한 도덕적 배경은 그저 존재하거나 혹은 부재하는 어떤 상황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든지 의도적인 행동과 프로그램적인 의도의 파급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러한 배경이 결여된 곳이라면 집단행동이 이러한 배경을 창출할 수 있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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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1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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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포용적 전위주의는 급진화된 전위주의이다. 포용적 전위주의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그리고 이 모든 부문의 각 부분에서, 광범위하고 다양한 여건들을 가로질러 확산됨에 따라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은 그 가장 심층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발전시킨다. 그러한 생산방식이 협력적 활동과 상상력 나아가 영구혁신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산방식의 참여자들에게 대량생산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청년기뿐만 아니라 일생에 결쳐 특정한 종류의 교육을 또한 요구한다.

이러한 교육양식은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의 구분을 가로지르며, 두 가지 교육을 모두 다음에 서술할 방향으로 개혁함으로써 두 교육을 연속과정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교육양식의 특성들에 대한 후속적인 설명을 일반교육뿐만 아니라 직업 훈련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기술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세계가 독일로부터 배웠던 기술훈련 모형(대량생산 시대의 경직된 기계도구들을 운영하고 엄격하게 구별된 직종과 전문직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직업별 및 기계별 기술을 강조하는 모델)을 거부해야 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독일식 기술훈련 모형을 일반적이고 유연한 고차원의 능력을 중시하는 모형으로 대체해야 한다.

수리적으로 제어되는 기계(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로봇 또는 3차원 프린터)는 특정한 생산라인과 확정된 전문직종 또는 노동력의 특정 분야에 연결된 협소하고 전속적인 용도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기계를 발명하는 것과 이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의 구분과 그러한 기계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과 이를 사용하는 것의 구분은 모두 완화되어 왔다. 기계의 조작자들은 기계의 발명가의 권능과 태도를 일정 부분 보유해야만 한다. 인공지능을 완전하게 활용하는 능력은 같은 방향에서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요구하는 노동자상은 공식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과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공식에 따르는 업무에서는 기계가 자신을 앞지를 수 있게 하는 법을 아는 노동자이다.

지식경제의 국한된 형태 아래에서도 기술적 노동분업은 계획과 집행의 차이뿐만 아니라 모든 전문적 업무 역할들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더욱 발전된 형태에서 지식경제는 모든 참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신뢰와 재량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지식경제는 이러한 재량을 행사하고 이러한 신뢰를 누리도록 교육받은 수행자들을 필요로 한다. 지식경제의 수행자들은 생산과정의 외부에서 지시되고 일회적이 아닌, 생산 과정에 내부적이고 영구적으로 이루어지는 혁신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포용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주창자들의 교육은 네 가지 기본적 특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일반교육, 기술교육, 청년교육 나아가 평생교육에도 해당된다. 그 특성들은 지식경제의 발전에 중요하고 심지어 사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의 가치는 지식집약적 생산방식 자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편익을 초월하고 민주사회에서 삶과 의식의 모든 측면에 관여한다.

첫 번째 특성은 교육의 방법이 분석적 능력과 종합적 능력, 더 일반적으로는 정보의 숙달보다는 상상력(반기계적인 것으로서 정신)과 관련된 권능에 우선권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의 진공상태에서는 아무도 이러한 능력을 습득할 수 없다. 그러나 콘텐츠는 주로 역량의 향상을 위한 여건으로서 중요하다. 따라서 두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콘텐츠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적 피상성보다 선별적 심오함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필수적인 능력과 정보의 활용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주제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백과사전의 온갖 개요를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세 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사회적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교실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와 개인주의의 혼합보다 교육과 학습에서의 협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간에도 학생 팀과 교사팀은 가르침과 배움의 주요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협력적 관행에 있어서 학생들 간의 상호교육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상력과 협력의 만남은 지식경제의 어떠한 급진적인 형태에서도 중요하다. 지식경제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에 의해 지식경제가 예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수법과 학습방식의 네 번째 특성은 그러한 교육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주제와 방법은 적어도 두 개의 대조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백과사전적 콘텐츠라는 목표를 버리고 범위보다 깊이를 선호하고 사실의 암송과 암기보다 분석적-종합적 능력을 선호하게 된다면,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이와 같은 변증법적 접근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대학문화의 정통 이론들은 청년들에게 지배적인 관념들을 사물 자체로 오인하도록 유도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방법과 주제의 결합을 자자연화(自然化)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경제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19세기말 한계주의 경제학자들이 개척한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른 방법에 의해 수행된 어떠한 경제연구도 경제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생산 및 교환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에 한계주의 방법을 적용한 연구는 마치 경제학이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마찬가지로 불변적인 규칙성보다 시간적 변화의 우월성을 함축하는 역사적 연구는 자연사와 생명과학에 적합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우주의 역사성에 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기초물리학에서 추방된다.

국정 교과과정들은 방법과 주체의 결합을 부당하게 자연화한 학술적 정통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정통이론들을 청년의 교육에 투영한다. 교과과정들은 결과적으로 학생을 정신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를 지적으로 예속적인 삶을 위해 준비된 고등교육 단계로 넘겨준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이러한 위험 앞에서 청년을 면역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대학문화가 피상적인 경우에 변증법적 접근은 깊이와 개방성을 제안한다. 변증법적 접근은 규율과 방법의 체계가 서로 분리해놓은 것을 뒤섞어놓는다. 변증법적인 방법의 목표는 다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철저한 의심과 지적 실험을 천재의 전유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이를 공유재산으로 전환하는 정신이다.

급진화된 지식경제는 제품과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에서 일회적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사회의 구조를 초극할 수 있어야 하고 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위기(파국이나 전쟁의 형태)가 없어도 구조변화를 생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민주정치와 지식집약적 생산이 모두 의지할 만한 정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교육의 더 큰 비전은 이러한 의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사회와 문화의 기존 질서 안에서 운동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고 이를 초월하고 수정하는 도구들을 장착시켜 주어야만 한다. 학교는 모든 사람 안에 혀가 묶인 예언자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육은 스스로 가족이나 국가의 도구로 타락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가족은 학생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한다. 국가는 학생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학교는 이러한 메시지들을 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며 미래의 목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떻게 낼 수 있으며, 누가 그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현재 사회의 어떤 권력들도 학교를 자신의 봉사기구로 위축시킬수 없도록 교육이 조직되어야만 한다. 교사와 학생은 국가와 가족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나아가 학생과 교사가 민주주의하의 교육에서 중요한 긴장(현재의 제도와 가정들에 기초하여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그러한 가정과 제도들에 도전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정치적, 법적, 재정적 수단을 갖추어야만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 비타협적인 추상관념들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적 신념의 고백들은 딴 세상의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급진화되고 보급된 형태의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제에 가장 우호적인 정치체제(나는 이를 고에너지 민주주의9 2라고 부를 것이다)에서도 중요한 교육적 자극을 우리의 교육관에 불어넣는다. 우리의 상상적 활동의 모형에 따라 협력적 관행을 혁신하고 이러한 혁신을 일회적인 것보다는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감으로써 지식경제는 참여자들이 일을 수행하는 것[맥락보존적 활동]과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배경을 이루는 제도들과 가정들의 틀을 바꾸는 것[맥락변경적 활동]의 차이에 점차적으로 구애받지 않는 정신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폐허나 전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정치생활의 형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한 체제하에서 사회생활의 전체 질서는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에서도 경쟁과 실험의 대상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교육을 변화시킬 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교육적 전위(그러한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가동시키는 일에 투신한 수천명의 교사들과 교육운동가들)의 부재인 것 같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작은 범위의 예언가, 정치인, 공무원의 정신에서만 존재한다면 프로그램은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구조상 거대하고 불평등하고 연방적인 (또는 단일 국가와 중요한 권한 이양을 결합한) 나라에서는 개혁과 개혁자는 투자와 품질에 관한 국가적 표준과 지역적인 학교운영을 조화시키는 제도적 틀에 의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켜야 할 핵심 원칙은 청년이 받는 교육의 품질이 그가 어디에서 혹은 누구한테서 태어났는가와 같은 우연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의 수행성과를 평가하고 무엇이 최상으로 작동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한 국가적 시스템, 학교가 지역 재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더 부유한 곳에서 더 가난한 곳으로 자원과 인력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 나아가 시정적 개입의 절차 등 세 가지 수단들이 필요하다. 지역적인 학교 시스템이 수용가능한 성과의 최저 기준에 지속적으로 미달하는 경우에는 중앙 및 지역 정부(또는 연방 정부 하에서 세 가지 수준의 정부들)는 지역의 미달 학교를 감독하고 독립적인 행정가와 전문가들에게 학교의 운영을 위탁하고, 학교를 교정하고, 교정을 거쳐 반환하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러한 절차가 없다면 교육 기회가 출생의 우연성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무시되고 만다.

나는 앞서 뇌의 물리적 구조에서 어떤 것도 정신의 두 측면(알고리즘과 공식들로 회고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굴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의 측면과 공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방법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립된 전제들을 초월하는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의 상대적 힘을 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뇌가소성은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상상력의 작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정신적 경험의 두 측면 사이에서 상대적 우월성을 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와 문화의 조직이다. 정치의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정치사와 정신사의 부분은 지식경제의 잠재력이다. 나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경제 전반에 걸친 지식경제의 보급이 같은 현상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주장해왔다. 만약 유사전위주의라고 불러온 형태의 엄호 아래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지식경제가 급진화 없이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새로운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경우 그 제품들, 즉 장치들과 서비스들만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확장 과정에서 획득한 능력과 태도는 구매한 제품의 제한된 사용에 필요한 능력과 태도일 뿐이다.

급진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우리의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에서도 변화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포용적 전위주의 아래서 기계로서의 정신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에 영토를 양도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제적 제도와 생산방식에서의 변화만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 변화는 또한 교육의 성격, 개념, 방법의 쇄신을 요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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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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