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서울에는 다양하고 독특한 명소, 그리고 장인(匠人)들이 있다. 일요서울은 드넓은 도심 이면에 숨겨진 곳곳의 공간들과 오랜 세월 역사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빼앗으려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겠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역사, 인권을 유린당한 역사, 친일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음을 새깁니다.”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부근 길목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한데 담긴 곳이다. 박물관 방문객들은 방명록에 이 같은 문구를 적어 놨다. 강제동원, 위안부, 독도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한일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정확하게 배워 이성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반민특위 터 묘석 [사진=김혜진 기자]
박물관 입구에 다다르자 ‘반민특위 터’ 묘석이 보였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들의 민족 반역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 국회에 설치됐던 특별 기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의 좌절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1999년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서울시 중구 국민은행 본점 자리인 옛 반민특위 터에 세워졌지만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2018년 10월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친일인명사전 관련 섹션 [사진=김혜진 기자]식민지역사박물관 내부 [사진=김혜진 기자]
지난 2018년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와 독립운동계, 학계가 중심이 돼 건립한 이 박물관에서는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지의 상흔과 항일 투쟁의 역사 등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라는 호칭답게 상설전시관에는 1876년 조선 침략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에 걸친 식민지배, 강제동원의 실상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민낯, 항일 투쟁의 역사 등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또 분단과 식민잔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산 운동의 과정까지 담겨 있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야스쿠니 신사 회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동학 의병 관련 문서 등 생생한 사료들도 꼼꼼하게 나열돼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내 체험 공간 [사진=김혜진 기자]‘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 [사진=김혜진 기자]
기획전시실에는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식민지배에 눈 감는 부역 언론의 역할을 해 왔다는 게 골자다. 당시 조선·동아일보에서 보도됐던 신문 지면이 전시돼 있다.
최우현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 주임연구원은 “박물관이 생긴 첫해에 일본에 홍보가 많이 돼 일제 역사에 뜻이 있는 일본인 방문객이 많았다”며 “코로나19로 인해 외국인 방문객이 줄었고 국내 방문객들에게는 박물관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관람객 장한님 씨는 “사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박물관이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꼭 와 보고 싶었다”며 “박물관이 크진 않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들이 잘 구성돼 있는 듯 하다. 현재 한국어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 전시실에 1920년대 조선어 교육을 했던 책들이 소개돼 있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 [70년 만의 귀향] 안장되는 유골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 봉환단이 2015년 9월 20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에서 115위 유골을 안장하고 있다. 2015.9.20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실태를 짚고 봉환 등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국제심포지엄이 6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에서 열린다.
재단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러한 내용의 심포지엄을 연다고 1일 밝혔다.
심포지엄에는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홋카이도, 오키나와, 야마구치, 오사카, 이와테 지역 시민단체 등에서 조선인 유골 실태조사와 봉환을 위해 노력하는 인사들이 참석한다.
재단은 “일본에서 조선인 유골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지역 거의 모든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이기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1부 개회식에 이은 2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의 역사적 경위와 현황’을 살펴보는 자리다.
▲ 대구 사단설치 청원서 두 번째 장. 일본인들의 연명 뒤로 오른쪽부터 정재학, 서병조, 이일우, 이병학의 이름이 보인다. ⓒ 신상미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일본군 사단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거물 친일파들의 연명 청원서가 발굴됐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파가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전투기 등을 헌납하거나, 징병·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기고문 등이 발굴된 사례가 다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줄 것을 청원하는 친일 기록물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당시에 이런 청원이 많이 있었는데, 최근 연구를 통해 일반에 알려진 것은 처음”이라면서 “개인의 친일행위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조사하지 못한 상황에서 1910년대의 청원서라는 데 의미가 크다”라고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해당 문건은 친일 문제에 관심 있는 한 인사가 제공한 것으로 대구·경북 지역의 친일파 4명이 데라우치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사단 설치 청원서다. 한일강제병합 5년 후인 1915년 6월 11일에 작성됐다.
정재학, 서병조, 이일우, 이병학이 당시 대구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부호들과 나란히 연명하고 날인했다. 정재학, 서병조, 이병학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다. 이일우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민족시인 이상화의 큰아버지인데, 친일 행위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번 청원서가 그의 친일 행적에 또 하나의 근거로 작용될 것으로 보인다.
“병영설치 은택 입으면 부지기부, 편의도모”… 적극적 유치 의사
청원서에는 “대구는 남선(조선의 남쪽)의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이고, 지금 사령부와 연대본부가 설치돼 있습니다”라며 “대구의 물자 조달이 자유롭고 날씨도 비교적 좋은 데다 상수도도 완성돼 5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오니, 대구에 병영을 설치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어 “다행히 우리 대구가 병영 설치의 은택을 입게 되면 부지 전부를 기부해드리는 것은 물론 부민은 전적으로 모든 편의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병영만 설치되면 토지와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적극적인 유치 의사를 밝힌 것이다.
당시 대구에는 이미 임시 조선파견대사령부가 설치돼 제2연대 본부와 제3연대 2대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경찰력과 헌병대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 친일파는 일본인들과 결탁해 부대 증설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데라우치 총독 앞으로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병영 유치 운동’은 대구뿐 아니라 전국에서 다양하게 확인된다. 충남 대전 사단설치 청원운동, 전북 전주 여단설치 청원서(국가기록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기록물), 황해도 사리원 사단설치 청원운동(<동아일보> 기사 1933년 7월 28일자) 등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어 지역별로 ‘유치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단 설치 갈망” 이름 올린 친일파는 이일우, 정재학, 서병조, 이병학
▲ 대구에 여단 설치를 건의하는 청원서. 일본인의 이름 사이에 부회장 이일우의 이름이 적혀 있다. ⓒ 신상미
유력자들의 청원 덕분인지 다음해(1916년) 5월 대구 대봉동에 20사단 제80연대가 설치됐다. 해방 후 이 자리엔 미군부대 캠프 헨리가 들어왔다. 사단은 19, 20사단이 각각 함북 나남과 경성 용산에 설치됐다. 대전에도 청원 뒤인 1916년 4월, 80연대의 제3대대가 설치됐다. 대전에선 사단이 설치되지 않은 것에 항의하는 친일파 주도 시위까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대구의 대표적인 토호였던 이일우는 ‘사단’ 설치가 어려우면 ‘여단’이라도 설치해달라는 청원서에 다시 서명했다(아래 문서 이미지 참고). 해당 청원서는 ‘대구 여단설치 기성회’가 작성·제출한 것으로, 한국인은 부회장 이일우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전원 일본인이다.
이일우는 3.1 만세운동 후 친일파 박중양이 조직한 ‘대구자제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자제단은 3.1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전향시키는 단체로, 전국 각지에서 조직됐다. 자제단은 전향에 실패하거나 수상한 거동이 발견되면 일제 관헌에 고발했다. 이일우는 67인의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자제단 경비까지 댔다. 하지만 이일우기념사업회는 친일 행적 의혹이 일 때마다 ‘사실이 아니며 오해에 불과하다’는 반론을 펴왔다. 기념사업회는 ‘이일우 선생은 근대산업화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입장이다.
청원서에 함께 이름을 올린 정재학은 1913년 대구은행을 설립한 금융가로,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서병조는 국채보상운동을 했던 유학자 서상돈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9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일제와 결탁해 일찌감치 친일로 돌아섰다. 1924년에 중추원 참의로 임명됐고,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도 수록돼 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됐다.
이병학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대구은행 이사,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기업인·금융가로,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연호)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대구자제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경비를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일우를 제외하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권 확대 위해 일본군 끌어들이는 행위… 민족관념 없다”
▲ 소남 이일우를 기리는 조형물. ⓒ 계대욱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친일파 연명 청원서를 ‘경제적 결탁’과 ‘생명·재산 보호’의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했다.
김민철 교수는 “친일 토호세력이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대구에 진출한 일본인들과 결탁하고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행위다. 민족이라는 관념이 그들에겐 없다”라면서 “친일파들이 거의 무상으로 토지를 불하받고 개발권을 취득하도록 조선총독부가 이권을 주는 예가 많았다. 일제권력과 결탁해 재산을 증식하려고 한 전형적인 친일행위이자 경제적 결탁”이라고 분석했다.
또 김 교수는 “1915년 즈음이면 의열 활동이 줄어드는 시기다. 다시 1920년대에 활발해진다. 의병 세력이 ‘삼남 대토벌 작전’으로 위축됐고, 국외로 빠져나갔다. 1913년까지 의병활동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습격당할까봐 불안할 수 있다”라면서 “그걸 명분으로 사단급 규모의 증설을 요구하는 것은 잘 안 맞지만, 그만큼 불안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친일파들의 기업활동을 연구해온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도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 내내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일본인들과 협력했다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의 자본가가 민족보다 계급을 중요시 했고, 따라서 민족을 넘어 계급적 이익을 공유했다고 본 것이다.
에커트 교수는 <제국의 후예>(1991)에서 “계급적 이익에 기초를 둔 일본인과 한국인의 협력은 이중으로 유용했다”라면서 “토착인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제국의 목표에 부합하는 경제를 건설할 수 있었다. 또 조선사회 내의 계급 분화와 계급 갈등을 조장해 가공할 민족운동(3.1운동)의 단결을 깨뜨릴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아래는 청원서 한글 해석 전문이다.
[사단 설치 청원서]
삼가 일서를 써서 대구부민을 대표해 각하께 청원드립니다.
오랫동안 의회의 중심 문제가 된 제국민 다수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선 2개 사단 증설의 논의가 점차 이번 임시의회의 협찬을 거쳐서 장차 설치에 착수될 것이라는 기운을 맞아 우리나라를 위하여 경하를 드릴 일입니다.
유래 우리 대구 지역은 남선 중투의 요지로 현재 임시 조선파견대 사령부가 있고 연대본부도 있어 교통이 편리해 물자의 공급이 지극히 자유롭습니다.
기후가 비교적 순조롭고 그러므로 위생지역이라는 점에 더해 대정3년(1914년)부터 계획된 대구 수도(상수도)는 대정6년(1917년)에 완성이 되면 그 배수량은 가히 5만 명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됩니다. 다행히 우리 대구가 병영 설치의 은택을 입게 되면 지정에 따라 부지 전부를 기부해 드리는 것은 물론 부민은 전적으로 모든 편의를 도모해 드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열성적인 부민의 간절함을 헤아려 병영설치 사항을 허용해 주실 것을 돈수재배 삼가 청원드립니다.
대정 4년(1915년) 6월 11일
[여단 설치 청원서]
구장(이장) 등 내선인 공직자 전부 망라하여 단 그외 같은 지역의 유력자, 자산가 대부분을 포용하는 것으로 해서 그에 중하는 이름은 왼쪽과 같습니다.
여단 설치 기성회 임원 회장 중강오랑평 부회장 계 만차랑, 이일우 간사 내지인 이등길태랑, 백판압길, 소야원태, 목촌죽태랑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이기도 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싶어하는 슬픈역사, 아픈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 미래세대의 삶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방한
“남북 분단 연원은 일본 식민지배…남북 평화 무드 지지”
▲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시절 북한의 피해자들에게도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에서 모은 성금 1억여 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고자 7일 방한했다. 야노 국장이 성금 모금을 위해 만든 팸플릿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8.6.9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배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9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일본의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에도 위안부 할머니, 강제동원 피해자 등이 많이 계시는 만큼 일본 정부가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팸플릿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제공=연합뉴스]
야노 국장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에서 모은 성금 1억여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고자 7일 방한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통해 탄생한 4·27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다며 종전선언 이후의 남북과 일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야노 국장은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후 한국 전쟁도 있었지만, 결국 한반도 분단의 연원은 일본 식민지배에 있다”며 “하지만 그 사실을 일본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일본은 자민·사회당이 북한 노동당과 양국 관계 정상화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현재 아베 정권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아베 정권은 대북 압력만 넣고 있는데 이는 북미정상회담 등 화해 과정을 방해하는 길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아베 정권의 이런 방해 공작을 막는 것이 일본 시민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야노 국장은 또 “많은 일본인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만 생각하면서 일본을 피해국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일본 때문에 피해를 본 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 관계가 더욱 개선되고 종전선언이 나오더라도 향후 북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은 쉽게 진행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야노 국장은 “현재 한일 간에도 위안부 문제나 군인·군속의 강제동원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현재 한일 양국의 상황을 극복해서 향후 북한에 대해서는 더 발전된 해결책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공원으로 뒤바뀐 효창공원과 김구기념관, 대공분실을 참관하는 등 식민지배와 강제병합, 한국 현대사 등을 배운 뒤 10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야노 국장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내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열 계획”이라며 “일제강점기 시절 자행된 인권 유린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과 학습이 가장 중요한 만큼 앞으로 과거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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