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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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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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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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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4강 –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민주화 이후 한국언론, 다시 개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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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8/25-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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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화, 2020/08/2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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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전시연계특강]‘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5강.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왜 언론은 갈등과 불신을 만드는가? – “기레기”의 탄생과 “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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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8/2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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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
오는 8월 29일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경술국치 110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독립운동 명문가인 경주 최부자집에서 민간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한일병합조약 등사본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다량 발견됐습니다.

한기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END▶

◀VCR▶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명문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1910년 경술국치 당시
한일병합조약을 등사한 서류입니다.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제1조부터
총 8개조에 이르는 치욕스러운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고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실려 있지만,
민간에서 등사본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INT▶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일제가) 강제 병합이기는 하지만 병합에 대해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주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보낸 게 아닌가 그렇게 추정이 되거든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이 발각돼 옥고를 치르던 최부자집
후손 최준에게 당시 유림들이 보낸 위로 서찰도 발견됐습니다.

수인번호 404가 표시돼 있고, 유림 218명의 이름 아래 각각 도장이 찍혀 있어,
최부자의 독립운동 정신이 유림계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열사가 최부자에게 보낸 서찰도 나왔습니다.

◀INT▶ 최창호 이사/ 경주 최부자 민족정신 고양회
“집안의 (어른이) 독립운동하시다가 구전으로 내려오던 게 사실 사류로 나오니까 재확인이 되고,
선조분들깨서 얼마나 독립을 위해 활동하셨나 이런 것도 보이고..”

이 자료들은 지난달 이곳 최부자집 안채에서 2만여 점의 고문서와 함께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는 2년 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자료도 나오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고문서들을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MBC NEWS 한기민입니다.

<2020-08-25> MBC 

☞기사원문: 경주 최부자집에서 쏟아진 독립운동 자료

수, 2020/08/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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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요.

광복 80주년까지 4년 남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생존 애국지사의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철희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영관 애국지사.

어느덧 올해 98살이지만 또렷한 말투에선 자긍심이 넘칩니다.

1944년, 만 20살에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가까스로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를 마중을 왔더라고요.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하염없이 그냥 눈물 흘리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 태극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목숨 걸고 왔구나.’]

그로부터 2년 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여생은 후대에 올곧은 저항 정신을 남기는 데 쏟자고 다짐하고 기념사업회를 세워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독립의 정신이 흐려지는 사회가 안타깝습니다.

지사로서의 삶 역시 쓸쓸히 잊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또 역사적 사실, 역사적 팩트를 잊어버리면, 외면하면 똑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이런 엄혹한 현실을 잊지 말고….]

김 지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애국지사의 두상과 손발의 형상을 남기는 겁니다.

[김서경 / 작가 : 기록물을 모은다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언제 어떻게 발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계신 분들을, 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가 기록하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아서….]

첫 번째 주인공은 김영관 지사.

단순히 외관뿐 아니라 일생의 이야기와 품고 있는 생각들까지 모두 사료에 담을 계획입니다.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온 한 사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운성 / 작가 : 모든 애환과 아픔과 가족 간의 갈등, 고통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것들을 같이 한번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광복 80주년까지 4년도 남지 않은 지금.

작가들은 그사이 지사 한 분이라도 더 만나 한 마디라도 더 생생하게 남기겠다는 목표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YTN 김철희입니다.

YTN 김철희 ([email protected])

<2021-09-22> YTN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생존 독립운동가 손발까지 영원히 남긴다

수, 2021/09/2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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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100년 기획전시 연계특강]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6강.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
‘적폐언론과의 싸움을 선언하다’

※관련영상 

☞Youtube: [안진걸 레알 분노현장]조선일보 고발현장 깽판친 조선기자/왜 우리고발?헐!!! 

Youtube: 6.18 [단독 공개] 조선일보 기자들의 생사람잡는 취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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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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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0/08/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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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씨, 친일단체 ‘수양단’ 발행 단보 9호 공개
거물급 친일파 대거 포진…민족정신 말살 등 자행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친일단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해 태평양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친일단체 ‘수양단’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방조약이 공포된 국치일(8월 29일)을 사흘 앞둔 27일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한애(汗愛)’라는 제목의 이 단보는 1924년 1월 조직된 수양단 광주지부가 매월 발행한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단보는 조직이 결성된 그해 9월 26일 인쇄됐다. 가로 18㎝·세로 26.2㎝ 크기이며, 4쪽 분량이다.

단보는 수양단의 2대 강령인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로 시작한다.

이는 ‘땀 흘려 단련하고, 동포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 동포는 일제와 조선인을 모두 아우른다. 이어 조선인이 ‘황국신민’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글이 수록돼 있다.

수양단 광주지부는 1922년 8월 발족된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의 지역 기구격이다.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는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를 2대 기치로 내걸고 중견 청년 육성 및 사회 정화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고, 그 중심에는 거물급 친일파들이 다수 포진됐다.

실제 이 조직의 고문으로 조선총독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역임한 박영효가 이름을 올렸고, 경술국적 윤덕영,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민병석 등 친일파들이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주민을 비롯해 농고생, 사범생 등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신사를 참배하고 강습회를 개최해 천황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또 대규모 시가행진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전개했다.

수양단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8년 5월 29일 전북 이리에서 수양단 호남대회를 개최한 이후 1939년 3월 19일 서울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수양단 총동원대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선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을 주축으로 힘을 모아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게 요지이다.

즉, 수양단은 조선인도 천황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강요·주입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한 뒤 태평양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역할을 주도했던 것이다.

심정섭씨는 “수양단의 단보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일제가 주도면밀하게 황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황국 신민화 정신을 주입시키고 시가행진 등을 통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결국 태평양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송대웅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27> 광남일보 

☞기사원문: [국치일 기획]”조선인 황국 신민화 주도…태평양 전쟁 내몰아”

월, 2020/08/3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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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의회, 여론조사 통해 결정키로
지역단체 “친일작품 당장 교체해야”

춘향영정을 그린 민족화가 강주수 작품(왼쪽)과 친일화가 김은호 작품(오른쪽).

친일화가 작품 논란으로 교체를 추진했던 전북 남원 광한루원 춘향영정이 시의회의 결정으로 유보되자, 지역에서 교체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 등은 남원시의회가 지난 25일 열린 총회에서 의원들의 반대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의 교체를 취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오는 9월10~13일 개최할 예정인 제90회 춘향제는 친일작가 김은호 춘향영정으로 하고, 앞으로 여론조사를 통해 교체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의원들은 “지금까지 김은호 작품으로 지속했는 데 이제 와서 왜 바꾸느냐”, “아예 영정을 철수하고 안내문을 설치하자”, “지역작가들의 검증된 새 작품을 활용하자”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체를 찬성하는 염봉섭 의원은 “친일은 역사적 사실이어서 재판과도 같은 성격이다. 여론조사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아직 영정 교체를 취소한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보 결정이 나오자 남원지역 단체들의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가 8월26일, 시민주권남원행동이 8월28일, 남원산성민요연구회가 8월29일 친일화가의 춘향영정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남원정신연구회는 “1931년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3·1운동 정신과 민족혼으로 춘향사당을 건립했다. 새롭게 내걸리게 될 민족화가 강주수는 조선춘향영정을 유관순같은 독립투사 모델로 해 옷을 태극의 색으로 했다. 비열한 친일작품인 일본춘향 ‘하루카’를 지금 당장 민족화가 춘향영정으로 교체하라”고 밝혔다. 강경식 춘향영정교체위원장은 “치욕스런 일본춘향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니 참으로 원통하다.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춘향영정에 대한 비교표. 남원정신연구회 제공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춘향영정을 8월 안으로 강주수 화백의 작품을 복제해 교체할 계획이었다. 이 영정의 교체는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 화가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 화가의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교체할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이 영정은 김 화가가 1961년에 그린 것을 복제한 것이다. 최초의 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다. 1961년 다시 김은호 그림이 기증돼 복제품이 걸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31>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화가 작품 논란 ‘광한루 춘향영정’, 교체 유보되자 지역서 반발

화, 2020/09/0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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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3.1혁명을 학살로 억압한 일제, 1923 간토대진재 시 학살재현

▲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추도식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비대면 온라인 추도식 ⓒ 김종수
▲ 간토학살피해자제97주기추도식배너 민중화가 신학철화백의 허락을 받아 디자인한 배너 ⓒ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가 공동주최한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이 한국 천안시 병천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지난 1일 열렸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간토학살사건 관련단체인,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평화협동조합, 1923인문학연구소, 기장 1923진상규명위원회의 임원들과, 연대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민족문화연구회 대표자,그리고 씨알재단에서도 참여하였다.

임광순 사협 기억과평화 이사의 사회로 오후 2시에 개회하여 헌화를 시작으로 제97회 메시지, 추도사, 연대사, 추도노래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주최주관한 1923한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는 간토학살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일본 내각과 군대, 경찰, 민간자경단을 향한 분노가 일었지만, 10년 넘게 진실규명과 추도활동을 해오면서 점점 분노의 대상이 한국 정부로 바뀌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수 대표는 한국 언론이 코이케유리코의 추도사를 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추도사 한 번, 추도식 한 번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론에서조차 이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되는 2023년을 맞을 때에 간토피학살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민관협력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 100년을 맞기 전까지 남과 북이 함께 간토학살조사에 나서자.
– 100년을 맞기 전까지 1923역사관의 학살지역별 전시를 위해 함께 협력하자
– 간토학살백서제작을 위한 남북한일재일 공동기구를 제안하자.
–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시민, 의원이 함께 협력해 가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 제97주기 추도식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김종수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마사타카 교수(일본 센슈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참가하지 못한 채 보내 온 추도사에서 “도쿄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이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추도사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조선인 학살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 속에 조선인 희생자가 들어있는 거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 적혀 있는 것입니까? 학살의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는 추도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일본 사회는 희생자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하고 일본 정부와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가해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촉구해 나갈 것과,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해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쓸 것을 희생자 여러분께 다짐한다”고 전해 왔다.

한편 1923인문학연구소를 이끌고 갈 김광열 교수는 100년이 되기 전에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재일코리안에 대한 헤이트스피치와 혐한문화를 중단해야 하라고 촉구했다.

특별히 천안역사문화연구소의 이용길 대표는 오충공 감독의 인터뷰 속에서 강덕상교수의 ‘일본 제국의 학살의 근원과 뿌리가 동학농민혁명가들을 학살한 일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3.1만세혁명 시기의 일본 총독부의 학살로 이어졌고, 그 학살자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시에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영상을 보고 전율이 흘렀다’고 말하며, 이제 97년을 맞는 우리들은 왜 일본 정부가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하고 일갈하였다.

또 한국에서 추도행사를 위해 천안으로 오는 동안 일본에서 진행되는 일본시민단체들의 추도식과 재일동포들이 진행한 추도식을 인터넷 중계를 보면서 내려 왔다고 하며 “지금 이 시각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추도집회를 일본 우익들의 헤이트스피치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서약서를 쓰도록 하는 등(물론 서약하지 않았고 추도식을 강행)의 각종 억압을 가하는 한 편, 현재 코로나 사태 속에서 일본정부가 각종 지원에서 재일코리안을 배제하는 일들이 일으너는 등 간토학살에서 나타난 폭력과 억압과 배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스스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민주사회 속에서 당연히 없어져야할 차별과 배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조차 일부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문제이지 않은가? 코로나바이러스는 ‘우한 폐렴’이라고 하거나, 대한의사협회 파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역의료인들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코로나 마스크 배급에 외국인들을 배제하는 일 등 우리 안에도 배외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00년을 3년 앞두고 있는데, 이제 이곳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며, 강제동원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과 식민지역사박물도 여러분과 함께 평화인권 발걸음에 함께할 것을 약속 드린다”고 연대의 의지를 밝혔다.

▲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채.. 기억과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추도행사참가자 ⓒ 김종수

고난의 현장에서 촛불과 피켓을 들고 예언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최헌국 목사는 간토학살을 내용으로 한 추도시를 낭독하였고,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내용으로 한 노래와 곡을 쓰고 노래해 온 윤광호 목사의 추모가가 이어졌다.

지난 5월부터 리모델링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올 해 이상기후로 인한 긴 장마로 인해 공사가 3주 이상 중단되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의 개관식과 ‘1923인문학연구소’의 개소식, 그리고 학술토론회은 10월 12일(월) 오후 2시로 연기하기로 했다.

토론주제는 1923역사관에 대한 전시구성과 민간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박물관 건립의 사례를 주제로 박물관 학예사인 1923인문학연구소의 성주현교수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김승은 학예실장의 발표를 통해 2023년까지 1923역사관의 전시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펼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1923한일시민연대 상임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의 내부 인터넷신문 미디어기평에도 실립니다.

<2020-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 혁명과 학살의 상징 아우내에서 열려

목, 2020/09/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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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산학협력단, 학내 일제 잔재 연구 중간보고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에 국화·향나무도 버젓이

제주 초등학교 4곳의 교표에 도안된 (왼쪽부터) 일본 가문의 욱광문, 일본 왕실의 국화문과 일장기, 욱일기.(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욱일기 문양의 교표,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등 제주 학교 곳곳에 여전히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청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제주도교육청에 따르면 ‘제주도교육청 일제강점기 식민잔재 청산 연구용역’을 수행 중인 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최근 도내 학교 내 유·무형 일제 잔재에 대한 1차조사를 마쳤다.

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도내 4개 초등학교는 옛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바탕으로 도안된 교표를 사용하고 있다.

교표 한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원이 있고, 그 원에서 빛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형상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나 과거 일제강점기 군 관련 배지에서 자주 사용된 월계수 등과 함께 결합돼 있다.

또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식민통치를 알리며 우리나라에 심었던 가이스카 향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35곳(초 18·중 11·고 6)에 달했다.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나 일제강점기 일본이 들여온 영산홍을 교화로 지정한 학교 역시 각각 8곳(초등), 13곳(초 10·중 2·고 1)으로 파악됐다.

제주의 한 초등학교에 일재 잔재로 꼽히는 가이스카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제공)© News1

이 뿐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작사가 김기진·이원수, 작곡가 이홍렬이 만든 교가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 학교도 3곳(초 2·고 1)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현황’ 등에 이름을 올린 도내 교장도 현재까지 3명으로 집계됐다.

제주대 산학협력단은 10월까지 현장조사와 공청회, 자문회의 등을 마치고 11월 초 최종보고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연구용역이 마무리되는 대로 관련 지침을 도내 각급 학교에 권고할 예정”이라며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작업은 학내 공론화를 거쳐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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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9> 머니투데이

☞기사원문:‘교표에 욱일기라니’…제주 학교에 여전한 일제 잔재

수, 2020/09/0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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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 독립운동가 넣자
전국 최초 개념 지자체 되기 어렵지 않다

“독립운동을 한 나라의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다.”

지난 8월 경남도의회에서 ‘경상남도 대일항쟁기 일제 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가 열렸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 발제를 맡았고, 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신사임당이 5만 원권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이 씨 남자들만 오직 화폐에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고액권 화폐 논의가 진행됐고 5만 원권 초상 인물은 신사임당, 10만 원권에는 김구 선생이 선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바뀌고 정치권에서 김구 선생 초상에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10만 원권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친일청산 반대 논리로 등장한 색깔론에 법적으로 처벌받은 친일파가 한 명도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해방 후 1950년대 발행된 우리나라 화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 등이 새겨졌다. 1972년 이후부터 지금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며 퇴계 이황(1000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1만 원권), 신사임당(5만 원권)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07년 5만 원·10만 원권을 발행하기 앞서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초상 인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김구·김정희·신사임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이상 가나다순) 등 10명으로 압축됐다. 당시 보도자료에는 “2차 후보군 가운데는 독립운동가(김구·안창호·유관순·한용운)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여성인물이 선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유관순 열사의 등장은 후보 간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달굴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국민의 염원은 어디서부터 막혔던 걸까.

김영진 도의원은 지난 6월 도정질문을 통해 “도내 독립운동가 관련 시설물 49곳을 직접 돌아보니, 경남도는 도내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의원은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는 1039명인데, 경남도로부터 받은 서면 자료엔 486명밖에 안 되는 점도 지적했다. 왜 지금껏 우리나라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는지 설명되는 대목이다.

방학진 실장은 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새길 것을 제안했다. 방 실장은 “지자체마다 지역 화폐가 있고, 지역마다 독립운동가도 있지 않으냐. 자치단체장의 뜻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를 책으로 배울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울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지자체에서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도내에는 경남·창원·남해·하동·합천 등 지자체마다 종이권으로 지역 화폐를 발행하고 있고, 전통적인 꽃문양이나 명소 사진이 새겨져 있다. 지역 특성과도 무관한 꽃문양 대신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지역 화폐에 새긴다면? 요샛말로 ‘개념 지자체’, ‘전국 최초’가 된다. 어느 지자체에서 먼저 나서 볼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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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자치행정1부 차장 ([email protected])

<2020-09-09>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알리기, 지역 화폐로

수, 2020/09/0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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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기증한 마스크를 들고 기뻐하는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와 김순흥 지부장 일행. 사진=고려인마을 제공]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최근 광주고려인마을을 방문해 코로나19 재 확산 방지를 위한 이웃사랑 마스크 500장을 기탁했다.

고려인마을 방문에는 김순흥 지부장과 이지훈 국장, 김홍길 국장, 정영해 전 동신대 교수 등이 함께 했다.

김순흥 지부장은 “최근 잠잠했던 코로나19가 재 확산됨에 따라 또 다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다 함께 극복하자는 마음을 담아 마스크를 준비했다”며 “광주고려인마을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광주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후손이기에 눈물어린 애정이 가슴에 남아있다”며 “앞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고려인선조들의 잊혀진 항일 역사를 복원, 고려인동포들이 한민족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런 긍지를 갖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마스크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며 “기탁하신 마스크는 마을거주 고려인동포를 대상으로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순천 회원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마마나스)이 광주이주 독립투사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안정된 정착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위해 면마스크를 기증했다고 전했다.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email protected]

<2020-09-09> 한국타임즈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고려인마을에 마스크 후원

목, 2020/09/10-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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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5주기 추모식

ⓒ 김경준

9일 오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의 75주기 추모식이 서울 효창공원(효창원)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열렸다.

ⓒ 김경준

차리석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 27년의 전 여정을 함께 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다.

ⓒ 김경준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독립운동가 수당 정정화는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음에도 임정의 살림에 보태라며 푼돈을 내주었을 정도로 그 자신에게는 인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김경준

“나처럼 임정 살림 뒤치다꺼리를 맡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지출금액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임정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특히나 돈을 받아쓰는 사람의 마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푼전을 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으리라. 동암(차리석)과 우천(조완구)은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만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 정정화, <장강일기> 中

ⓒ 김경준
ⓒ 김경준

그러면서도 결코 사무에는 소홀하지 않았으니 1948년에 열린 선생의 장례 당시 “탁월한 사무 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추모사에서 그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 김경준

그러나 선생은 해방을 맞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945년 9월 9일, 과로로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환국한 김구 선생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했고, 1948년 선생 역시 지금의 자리에 안장됐다.

오늘 추모식은 코로나 19로 인해 최소한의 추모객만 참석한 채 소규모로 열렸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돋보였다.

LAC그라피티 스튜디오의 레오다브 작가(본명 최성욱)가 직접 그린 차리석 선생의 그라피티 초상화가 놓인 가운데, 최근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를 출간한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는 자신의 책을 선생의 영전에 헌정하기도 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커피·원두 판매사인 ㈜카페리즈와 합작하여 출시한 ‘효창독립커피’ 차리석 블랜드도 헌정됐다.

행사의 사회를 맡은 방학진 민문연 기획실장은 “차리석 선생은 숭실대학교 전신인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인데 현재 숭실대에는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 흉상은 고사하고 이름을 딴 강의실 하나조차 없는 형국”이라며 “친일파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 기념관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반드시 숭실대 캠퍼스 내에 차리석 기념물을 조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역설했다.

후손 대표로 답사를 한 차영조 선생(차리석 선생 아들)은 “젊은 청년동지들이 선친을 기억하고 알리고자 애써주는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고 답례했다.

한편 차리석 선생은 한국광복군 군수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오는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20-09-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안익태 기념관도 있는데 차리석은 강의실 하나 없다”

목, 2020/09/1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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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러가기]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화, 2020/09/15-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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