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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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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admin | 목, 2021/03/25- 20:23

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인터뷰 : 이지훈
광주지부 사무국장

전남 영암 출신인 이상호 화백은 조선대학교 서양학과 4학년이던 1987년, 조선대학교 미술패 후배들과의 공동 작품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해 미술인 최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악명 높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이상호 화백은 불교를 주제로 한 그림에 몰입하면서도 동학혁명, 4·19, 5·18, 통일 등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당초 작년에 개최 예정이던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4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이상호 화백은 친일파를 주제로 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대작을 출품해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연구소와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시민들의 후원으로 완성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상호 화백과의 인터뷰를 광주지부에 부탁하였다. 인터뷰를 기꺼이 맡아준 이지훈 사무국장과 인터뷰에 응한 이상호 화백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이상호 화백

이지훈 광주지부 사무국장

 

●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 잘못된 역사가 시작된 곳이 궁금했어요. 부정한 권력 앞에 왜 다수의 민중들이 희생되는 시대가 계속되는지. 저는 그 잘못된 역사의 뿌리에는 ‘친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친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굴절된 역사가 이어온 것입니다. 저는 이 잘못된 역사가 후세까지는 연결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 그림 그리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나요?
● 작품에 대한 구상은 2019년도에 처음 했구요. 본격적으로 붓을 든 것은 2020년 1월부터였습니다.

● 혼자서 작업하셨나요?
● 아닙니다. 자료를 모을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많이 도와줬습니다. 민족미술인협회 가족들도 많이 도와주고 주변 예술인들도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광주지부 김홍길 회원님이 만든 영상을 보니 미리 소식을 들은 많은 시민들이 응원해 주셨더라구요. 시민들의 응원 소리를 들으면 힘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죠.

● 인물 선정 작업이 꽤 어려웠을 텐데요.
● 맞습니다. 개인, 가문, 단체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참 민감했어요. 더군다나 친일전력을 가진 인물들의 후손들이 대부분 현재까지도 권력의 일선에 계신 분들이거든요. 그래서 공정성,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수록된 인물들, 그리고 각종 역사 서적에 올라있는 친일인물들 중 친일 전력이 뚜렷한 인물들만 골라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 빠진 인물들도 언젠가 제가 그림으로 소환할 예정입니다.

● 그리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 친일파들 얼굴을 1년 내내 들여다보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엔 정이 들더군요.(웃음) 얼굴을 그리고 옷을 입히고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우는 동안 제 마음 한켠에선 묘한 연민 같은 게 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처음에 태어났을 땐 부모님께 사랑받는 총명한 아이였을 테고 배울 만큼 배운 수재였을텐데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해서 후세에게 영원히 지탄받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동정심이 일었어요. 실제로 그림을 보면 느끼시겠지만 하나하나 다 말끔한 용모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후세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남겨진단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측은지심이 들지만 그들이 지은 죄는 역사적 단죄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1995)

 

이상호 제1회 개인전-역사의 길목에 서서 2015.9.10~16

 

● ‘일제를 빛낸 사람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네, 총 92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 그림 속에 들어있습니다. 가운데에 위치한 크게 그려진 인물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반민족 행적이 이어지는 적극 친일파 19명입니다. 그리고 이들 주위를 73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에 경중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친일의 뿌리이자 주축 역할을 한 인물들을 중앙에 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분야별, 시대별로 인물들을 모아놨습니다.
참고로 분야별 인물은 관료 22명, 경제·언론 14명, 군인·경찰 16명, 교육·예술 27명, 친일단체·종교·밀정 13명입니다. 시대별은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을사오적을 시작으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흘러갑니다. 을사오적을 중심으로는 대부분 왕족, 관료 출신 매국노들입니다. 을사오적 밑으로는 이용구 송병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은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보다 더한 조건을 일왕에게 내걸었던 일급 매국노입니다. 한때 동학농민혁명에도 참가했던 이용구 또한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습니다. 정미칠적, 경술국적 밑으로는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았던 매국노들과 경제·금융계에서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던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친일파들은 혈연적으로 많이 엮여 있었는데요.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사위)지만 친일로 돌아서 부를 축적한 친일파의 표본인 자입니다. 우리 지역 화순의 농선이라는 기생과의 일화도 있죠. 박기순 박영철 부자는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의 대지주 출신으로 일제에 적극 부역해 부를 축적합니다. 깡말라가는 농민들과는 대조적으로 비만한 체격으로 유명합니다.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속칭 우봉 이씨은행으로 불렸던 한성은행 전무로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북촌에 가면 백인제 가옥이라는 고택이 있는데 그 집의 원래 주인이 한상룡입니다. 그 옆 민영휘는 친일전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친일전력이 많이 드러나 있는 인물입니다. 나라를 팔아 재산을 늘렸던 친일파들은 나중에 반민특위 1호 검거자인 박흥식이 있습니다. 그 외에 실업계 김성수,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김용주, 대지주로는 박기순, 박영철 등 친일 경제인들입니다. 김성수 김연수는 형제지간이고, 현준호와 김용주는 사돈지간이며, 박기순 박영철은 부자지간입니다. 태창직물로 당대 재벌인 백낙승은 일제강점기 때 아들(백남준)을 차에 태워 등교를 시킬 정도로 재산이 많았는데요 당시 차를 총 7대나 가진 거부였습니다. 막대한 재산은 사실 방직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고혈을 뽑아 만든 재산입니다.

이상호 전정호 공동전시회-응답하라 1987, 2017.4.25~7.30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부터는 3·1만세의거 이후 다른 형태의 친일파들이 등장하는데 주로 교육 언론 문화계 출신,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친일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특히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 교육계가 대표적이었는데요. 그 인물들을 이곳에 모아 그렸습니다. 김활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여성계의 대표적 지도인사로 자리 잡지만 나중엔 제자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등 자진해서 일제에 적극 협력합니다. 나중엔 이승만 독재에 부역하고 박정희 독재에도 부역하면서 권력의 해바라기를 자처했습니다. 아직도 이화여대엔 김활란 동상이 서있어요. 다른 여성 친일파들(황신덕, 박인덕, 노천명, 모윤숙 등)도 사학재단의 설립자로, 대표적인 여류 문인으로 아직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언론계의 대표적 친일파는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가 대표적입니다. 친일 사설로 일제에 아첨했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어린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프랑스는 해방 후 나치에 부역하지 않았던 신문이라도 나치 치하에서 15일 이상 간행했던 신문사라면 모조리 폐간시켰습니다. 국민의 여론과 사상을 바르게 이끌고 나가야 할 언론이 나치 치하 식민지 상황인데도 정상적으로 발행됐다는 것 자체가 반민족행위라는 뜻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언론·문화계 인사들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에 비해 대한민국 두 신문사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사들입니다. 너무도 상반된 현실입니다. 우리 문학계를 대표했던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등등은 정말 글 잘 쓰는 천재들입니다만 그 좋은 머리를 일왕의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썼습니다. 2·8 독립선언문을 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써 한민족을 비하했고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대표적 어용 문인이 됩니다. 더욱 슬픈 일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들이 독립운동가인 줄 알고 배워왔으며 이들의 작품을 줄줄 외워야만 진학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들 이후로 문학계에는 수많은 친일파가 양산되는데 김억, 김동환, 주요한, 이무영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술계 또한 대단한 친일파들이 많습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일본 국적을 원했으니 그의 바람대로 ‘에키타이 안’으로 불러야 맞습니다. 유럽 체류 당시에는 친나치 부역 혐의까지 있는 그가 1942년 만주국의 건국 10주년을 축하하여 만든 연주곡이 바로 <만주환상곡>입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만주환상곡>은 <한국환상곡>으로 이름을 바꿔 우리 애국가의 모태가 됩니다.
일본군 찬양 노래인 <선구자>를 독립군 찬양 노래로 둔갑시킨 조두남. <혈서지원> 등 수많은 징병 권유 노래로 수많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몬 박시춘, 남인수. 희망의 나라의 실체가 의문인 <희망의 나라>를 만든 현제명. 친일파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부를 축적한 조선 마지막 어용화사 김은호. 매년 전시체제 영화를 보급하며 나운규의 <아리랑>에 먹칠한 영화인 최인규.

 

이상호 제2회 개인전 – 연필로 그린 부처님(2018.5.2~31)에 출품한 녹원전법

 

일제강점 말기가 되어갈수록 신성해야 될 종교계 또한 친일파들이 장악합니다.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일본신도 침례의식과 궁성요배를 강요했던 불교계 이종욱, 권상로. 개신교의 정춘수, 백낙준, 전필순 그리고 대동아성전을 부르짖은 천주교의 장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휘말리면서 많은 청년들이 출세를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혈서지원을 쓰고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제 황군이 되는 것이었죠. 바로 친일군인들의 등장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멸사봉공’ ‘견마지로’의 혈서를 쓰고 만주군 장교가 되었던 박정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만주군벌들이 박정희의
지원 전후로 군국주의 전사가 되기 위해 일제 황군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하기까진 일본 육사 출신 이응준과 김석원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응준(일본육사 26기. 장인 이갑 독립지사 / 사위 이형근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은 일본육사 시절 독립군이 되기 위해 탈출한 지청천과 동기였으나 빼앗긴 조선을 되찾는 독립군보다 일본군이 되기로 작정하고 일본군 대좌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보다 더 일본군 같은 맹렬함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인물입니다. 역시 대좌까지 진급했어요. 이응준과 김석원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전력을 가진 군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

 

두 일본 육사 군벌 외에 1940년을 전후해 만주군벌들의 전성시대가 열립니다. 김백일, 백선엽등 대표적인 친일군인 외에도 화폭이 모자랄 정도로 많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독립군에게 총칼을 들이대던 자들이었습니다. 친일군인들은 박정희 독재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이들이 독립지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이 참 슬픈 현실입니다.
군인 못지않게 경찰 중에도 무수한 친일 악질 경찰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로는 노덕술과 하판락이 있습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친일행적으로 굳이 따로 해설이 필요 없는 인물들입니다. 다음 작품이 그려진다면 친일경찰을 더 많이 그려넣을 작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해설하고픈 인물은 바로 우봉 이씨로서 제2공화국 때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이병도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그는 일제 사학자들 밑에서 식민사관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청구학회, 진단학회 등 학술단체에 관여하면서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자가 해방 이후에도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서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하였고 사학계의 식민유제를 잔존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도를 그릴 때 너무도 분했고 한편으론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자가 사학계 거두로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에…

● 이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 불의는 언젠간 벌을 받게 되어있으며 정의는 언젠가 다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청산되지 않은 불의의 역사라 할지라도 끝내는 바르게 고쳐지는 것이 인간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입니다. 불의는 정의에 의해 반드시 청산된다는 것을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어요.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 많은 시민들이 응원해주셨습니다. 힘들 때마다 제겐 큰 힘이 되었구요. 제 그림을 위해 열심히 응원해주신 시민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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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이번 달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부산에 있는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졸업앨범이다. 표지에는 ‘추상(追想), 2604’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숫자는 ‘황기2604년(皇紀;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을 일컫는 것으로 서기로 바꾸면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 해당한다.

003

이 학교는 원래 1927년 4월에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부산여고보’로 줄임)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으나, 1938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에 따라 고등여학교로 편제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느냐 아니냐의 구분에 따라 조선인은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여자고등보통학교(5년 또는 4년)에 다녔으나, 제3차 교육령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구분 없이 일본인 학교처럼 모두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꿔달도록 했다.
따라서 이름을 고등여학교로 바꾸자니 이미 부산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부산고등여학교가 있었으므로 이를 피하다보니 ‘부산항고등여학교’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가령 서울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성제일중학교가 아닌 ‘경기중학교’로,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복중학교’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경성고등여학교가 아닌 ‘경기고등여학교’로 각각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004

 

표지를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첫머리에 봉안전(奉安殿)과 대마전(大麻殿, 대마봉사전)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봉안전은 교육칙어나 ‘천황’의 ‘어진영(御眞影, 사진)’을 받들어 모시도록 했던 공간이며, 대마전은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발급하는 부적인 대마를 보관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라면 대개 이런 시설물을 갖춰놓고 학생들에게 일상적인 참배를 강요하곤 했다. 사진 아래에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새긴 비석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것은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강원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에 참가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다시 두 어장을 넘기면 일본인 교장의 집무실 풍경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건전한 국민의 양성은 전적으로 사표(師表)가 되는 자의 덕화(德化)에 따른 것이니 …… 운운” 하는 ‘소화천황의 교육자에 관한 칙어’를 적은 액자와 함께 일본 도쿄 황궁 앞 이중교(二重橋, 니쥬바시) 사진이 벽면에 나란히 걸린 모습이 보인다. 특히, 천황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중교 사진 액자는 대개 각 교실마다 칠판 위쪽에 걸려 있어서 일본인 교사들이 걸핏하면 “천황 폐하께서 우리를 굽어보신다”고 하면서 학습을 독려하거나 학생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005

 

다시 몇 장을 더 넘기면 10여 명씩 짝을 이룬 졸업생들의 기념촬영사진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학생복이긴 한데 한결같이 치마가 아닌 이른바 ‘ 몸빼’ 차림인 것이 이색적이다.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활동성을 높이고 물자를 절약하는 방편으로 남자들에게는 국민복에 각반(脚絆)을 착용토록 했고, 일반여성은 물론이고 여학생들에게도 ‘몸빼’ 제복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행군연습을 나가거나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활동에 동원되는 경우에도 몸빼 차림을 한 학생들 모습이 사진첩 곳곳에 드러나 있다. 금속물공출(金屬物供出) 장면이나 용두산신사봉찬체육대회(龍頭山神社奉讚體育大會) 사진도 전시체제기를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눈 여겨볼 만하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이색적인 풍경을 하나 더 소개하면 바로 체력장검정(體力章檢定)이다. 일제는 1939년 4월 장차 강제 징병으로 국방의 제일선에 서게 될 청년남녀에 대한 체력관리를 목적으로 체력법(體力法)을 제정하고 조선 전역에 체력장 검정을 실시했는 데 체력검사 결과에 따라 등급별로 체력장(體力章)을 수여했다. 여학생들에게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하였는데, 여기에는 1천 미터 달리기, 줄넘기, 무거운 짐 들고 나르기(20킬로그램 무게를 들고 50미터를 20초에 달리면 ‘중급’으로 간주), 단봉(短棒)던지기 등의 종목이 포함되었다.

 

006

 

이 사진첩 말미에는 여느 졸업앨범과 마찬가지로 졸업생 명부와 출신지를 적은 향관록(鄕關錄)이 첨부되어 있다. 이 당시 졸업생은 4의 1조, 2조(‘반’이 아니라 ‘조’라고 부름)를 합쳐 99명이었는데, 창씨개명(創氏改名) 탓인지 조선식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학생은 거의 드물었다. 대신 졸업생 이름 끝자가 영자, 인자, 경자, 희자, 정자, 숙자, 광자, 애자처럼 자(子)로 끝나는 경우가 3분의 2나 되는 65명이나 되니 ‘자’자 돌림 여자 이름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 졸업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곧 아흔줄에 들어서는 연세가 된다. 졸업하자마자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 이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때가 하필이면 청춘기와 겹치다보니, 대부분 격동의 시대에 고통과 역경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학창시절의 푸른 꿈은 다들 얼마만큼이나 성취하였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광포한 군국주의에 짓눌린 세상에서 제대로 미래에 대한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한 권의 졸업앨범이지만 시대 변천과 라이프 히스토리가 무궁무진하게 담긴 생생한 역사자료로 평가된다. 우리 연구소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 70년대까지 졸업앨범이 적지 않게 수집되어 있다. 혹여 책장 귀퉁이나 집안 다락에 의미없이 꽂혀 있는 옛 졸업기념 사진첩이 있다면 개인의 소중한 추억거리이고 기념물이긴 하지만, 이를 기증해 훌륭한 역사연구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면 더욱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이런 자료를 취합하는 과정이 축적되면 될수록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일상을 구체화하고 이를 재현하는 일이 한결 더 풍성하고 용이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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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002

 

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녹천정에서
三載星霜夢裡經 삼년 세월을 꿈속에 지냈네.
心緖人間隨境變 마음이란 곳에 따라 변하는 것이
別時閑看岫雲靑 때로는 한가롭게 구름도 쳐다보네.
(己酉 七月 十有四日 將辭京城 援筆自題 春畝山人 ; 기유년 7월 14일에 장차 경성을 떠나려 하매 붓을 잡고 스스로 짓다. 춘묘산인)

 

녹천정(綠泉亭)은 본래 철종대에 건립된 정자로 주초만 남아 있었으나, 근처에 통감관저가 들어서면서 이토가 신축하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위의 자작시는 커다란 편액으로 꾸며져 총독관저에 걸려 있었으며, 특히 데라우치 총독은 스스로 이토의 위업을 허물없이 계승하였노라고 하면서 그 유래를 적은 글을 남긴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토의 칠언절구는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한시가 되었고,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신 다츠마(進辰馬)라는 일본인의 헌납으로 경성신사(京城神社)의 구내에 시비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그는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와 가메야(龜屋)라는 제법 유명한 수입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큰 재력을 쌓은 거류민 유지의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토 칠언절구 탁본자료는 바로 이 경성신사에 세워놓았던 시비에서 떠낸 것이다. 이 녹천정의 자작시를 보면 이토가 겉으로는 한가한 나날이 이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꿈처럼 보낸 3년 세월이란 것은 곧 한국병합으로 귀결되는 국권침탈의 치밀한 행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토는 불과 석 달 후에 안중근 의사의 손으로 처단되어 운명을 달리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죄상과 업보는 여전히 무겁고 또 준엄하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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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희귀자료를 중심으로 해설을 실어 회원들이 근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도록 하고 더불어 시민역사관 건립과 자료기증의 필요성을 널리 알려나가는 데 있다.

– 엮은이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교두보

첫번째로 소개하는 자료는 <사단대항연습기념사진첩>(1930)에 들어있는 ‘경성 및 용산 전경’이라는 제목의 항공사진이다. 최근 연구소로 용산에 관련된 자료 문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반환에 따른 공원화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이 지역의 공간 변천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자료는 2013년 서울시에서 개최한 ‘용산공원’ 사진전에 출품되었고, 이어 올해 전쟁기념관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등 여러 기관에서 대여요청이 이어질 만큼 주목을 받고있는 자료의 하나이다.

001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처음으로 전병력을 총동원하여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을 말한다.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이 사단대항연습에는 제19사단과 제20사단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전차대와 전신대 등을 더하여 3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였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여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사단대항기념사진첩>은 이때의 군사훈련상황을 생생히 남겨두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수록된 용산일대 전경사진에는 주요 군사시설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피하여 지휘부가 포진한 구역은 의도적으로 촬영각도에서 제외한 흔적이 보인다. 실제로 용산총독관저, 조선군사령부, 조선군사령관관저, 사단사령부 등은 사진앵글 밖에 살짝 벗어나 있거나 테두리에 반쯤 걸쳐 있는 듯이 담겨져 있다.
아무튼 이 항공사진은 지도상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던 일본군영지 일대의 공간배치와 지형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사진의 위쪽으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자리한 경복궁 일대를 포함하여 서울 도성 안쪽의 중심가가 한꺼번에 포착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애오개 너머 경성감옥(마포형무소)이 있는 곳까지 두루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려보면, 사진의 왼쪽 중간에 효창원과 선린상업학교가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남산 자락의 조선신궁과 그 남쪽으로 이어진 후암동 일대에 조선은행 사택지와 용산중학교 주변의 지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사진의 한 가운데에는 경성역 구역이 보이며 아래쪽으로 용산역까지 철길이 이어진 모습이 나타나 있다.
철길의 서편으로는 1920년 무렵 수색역 방향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철도 직통선로 개설공사 때 물길이 완전히 바뀐 만초천(蔓草川)이 이미 직선화한 상태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철길의 동편에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이 용산 일대의 신병영지로 연결하기 위해 개설한 신작로인 한강로가 죽 이어진 것이 보이는데, 그 중간쯤에 길이 크게 꺾어지는 지점에 형성된 세모꼴 자투리 공간이 곧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이다.
그런데 세밀히 살펴보면 이 항공자료에 나타난 도로구조와 공간배치는, 고층건물과 같은 구조물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백년을 훨씬 넘는 과거 시점에 일본군대가 그들의 편의대로 군영지로 조성하고 이에 곁들여 공간구획을 해놓은 틀 위에 지금의 용산시가지가 터를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잊고 지내지만 식민지배의 상흔은 주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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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 (1)
대일본제국과 천황에 대한 충성 확인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근대 일본의 훈장(勳章)·포장(襃章)·기장(記章) 등 각종 서훈(敍勳)과 영전(榮典) 제도는 1871년부터 시작되었다. 서훈과 영전 제도는 ‘천황대권’의 하나로 근대 일본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산물이며 근대 천황제의 근간을 이루어 온 장치이다. 또한 일제가 대외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남발한 각종 서훈과 영전은 ‘신민’의 충성심을 동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민족 지배의 통합장치로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리나 친일파들이 주로 받은 훈장은 욱일장(旭日章)과 서보장(瑞寶章) 이었다. 일제의 대외침략과 관련해서는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 관련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친일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대량으로 수여한 훈장은 이른바 ‘병합의 공로’로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이었다. 한편 만주국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의 경우 주국장(柱國章) 또는 경운장(景雲章)을 많이 받았다.
특급 친일파들의 경우 대한제국 황족이 아님에도 최고위의 훈장인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이완용), 십 수개 이상의 훈장을 줄줄이 받은 인물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고희경 : 서보장, 욱일중광장, 한국병합기념장, 대례기념장, 욱일대수장 등 15개
민병석 : 한국병합기념장, 유공장(有功章),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등 18개
이범익 : 한국병합기념장, 훈4등서보장, 대례기념장, 훈2등서보장, 만주국황제방일기념장, 만주국 국경사변 종군기장 등 14개

 

일제의 서훈과 영전 제도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잠시 폐지되었다가 천황의 이름으로 부활해 다시 시행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강점기의 다양한 종류의 훈장·기장·포장과 단체 휘장 그리고 각종 관련 증서 등을 소장하고 있다. ‘제국에 충성하라! 그려면 보답해 줄 것이다!’ 라는 충성 확인증인 훈장과 기장 등을 2회에 걸쳐 그 일부를 공개한다.

 

훈장-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 공로를 세워라!
일제의 훈장은 크게 국화장, 금치훈장, 욱일장, 보관장, 서보장, 문화훈장 등으로 나뉜다.

 

032

상) 훈장일람표. 하좌)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 하우) 금치훈장

 

국화장(菊花章)은 일본 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서 대훈위국화장경식(大勳位菊花章頸飾, 1888년 제정)과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 1876년 제정)이 있다. 대훈위국화장경식은 황족 또는 공적이 있는 총리대신, 그리고 1945년 이전에는 군인에게도 수여되었다. 대훈위국화대수장은 경식 다음의 고위 훈장으로 황족, 총리대신 가운데 수상자가 많으나 친왕(親王)에게는 무조건 수여되었다.

 

033

1 욱일장. 2 욱일장-훈7등청색동엽장과 훈장첩. 3 욱일장-훈8등 백색동엽장과 훈장첩. 4 보관장

금치훈장(金鴙勳章, 1890년 제정, 1947년 폐지)은 전공이 있는 군인·군속에게 지급되었다. 현재는 폐지되었고 패전 전에 수상한 사람도 지금은 군대가 없으므로 장착할 수 없다.
공일급(功一給)부터 공7급으로 나뉘며 장관(將官, 장성)은 공1급부터 공3급, 좌관(佐官,영관)은 공2급부터 공4급, 위관과 견습사관, 해군소위후보생 등은 공3급부터 공5급, 준사관과 하사관은 공5급부터 공7급, 병졸은 공6급부터 공7급을 받았다.
욱일장(旭日章)에는 최고위인 훈일등 동화대수장(勳一等旭日桐花大綬章, 1888년 제정)이 있다. 그 아래 훈일등 욱일대수장, 훈2등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 훈3등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 훈4등 욱일소수장(旭日小綬章), 훈5등 쌍광욱일장(雙光旭日章),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 훈7등 청색동엽장(靑色桐葉章), 훈8등 백색동엽장(白色桐葉章)이 있다. 국가에 공적이 있는 남자에게 수여되며, 보관장과 동격이다.
보관장(寶冠章)은 공적이 있는 여자, 특히 황족 여성이나 황실 며느리 등에게 수여되었다. 욱일장과 동격으로 천연진주를 많이 사용해 만들었다. 훈1등부터 훈8등(훈1등부터 훈5등은 1888년, 훈6등부터 훈8등은 1896년 제정)까지 있다.
서보장(瑞寶章)은 1888년 제정에 제정되었다. 연공에 따라 처음에는 남자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19년부터 여자에게도 수여되었다. 훈1등부터 훈8등까지 있다.

 

034

좌) 서보장. 우) 서보장-훈8등 서보장과 훈장첩

문화훈장(1937년 제정)은 ‘문화발전에 훈적이 탁월한 자’에게 수여되었다. 서열로는 훈1 등 서보장의 다음에 위치한다. 예술분야에는 서훈된 예가 없고, 과학과 학술 부문에서 발견·발명에 대한 서훈이 있었다.

대외침략을 기념하는 종군기장들
기장(旗章)에는 종군기장(從軍旗章), 기념장(記念章), 포장(襃章), 그 외 기장 등이 있다. 종군기장은 1875년 ‘대만출병(臺灣出兵)’을 계기로 만들어진 ‘명치7년 종군기장’이 시초이다. 그 뒤 일본의 대외 전쟁이 늘어나면서 많은 종군기장이 제정되었다. 종군기장을 받은 이들은 명예로 생각하고 패용했지만, 뒤집어서보면 일본의 대외침략의 역사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셈이었다. 종군기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035

각종종군기장. 명치7년종군기장, 명치28년종군기장, 명치33년종군기장, 명치37~8년종군기장, 대정3년내지9년종군기장, 소화6년 내지9년종군기장(오른쪽부터)

 

명치7년 종군기장(종군패從軍牌) : 1874년 표류한 류큐(오키나와) 주민을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대만 출병 종군기장. 최초의 종군기장. 1875년 수여.
명치27,8년 종군기장 :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 종군기장. 1895년 수여.
명치33년 종군기장 : 1900년 북청사변(청국사변, 의화단사건) 당시 중국 출병 종군기장. 1902년 수여.
명치37, 8년 종군기장 : 러일전쟁 종군기장. 1906년 수여.
대정(大正)3,4년(전역戰役)종군기장 : 제1차 세계대전 종군기장. 1915년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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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치38년 종군기장(러일전쟁)과 기장첩. 2 소화6년내지9년 종군기장. 3 지나사변 종군기장과 기장첩

 

대정(大正) 3년내지9년 종군기장 : 1차 세계대전 때 산동반도의 독일조차지 및 청도(靑島) 공략과 시베리아 출병 종군기장. 1920년 수여.
전첩기장(戰捷記章) : 제1차 세계대전 동맹 및 연합군 승리 기념 기장(自大正三年 至大正九年 文明擁護之大戰 日米英佛伊 其他 同盟及聯合國), 1920년 수여
소화6년내지9년 사변종군기장 : 만주사변과 제1차 상해사변 종군기장. 1934년 수여.
지나사변 종군기장 : 중일전쟁에 종군했던 자 중 중요임무에 관계된 자에게 수여. 1939년 수여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목, 2018/07/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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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식민지 순사들
자료실 소장 식민지 경찰관련 자료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헌병경찰, 그 공포와 폭력상이 담긴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식민지 공포정치는 헌병경찰제와 함께 시작됐다. 병합 전에 이미 일제는 조선주차군헌병사령관이 경찰의 총수인 경무총감을, 지방 각 도의 헌병대장이 각 도의 경무부장과 경찰서장을 겸하도록 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정식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악명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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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37X25. 2, 1910. 8. 29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통감부 시기에는 헌병대장, 총독부 시기에는 초대조선군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아카시는 1907년 10월 조선에서 헌병대장으로 이토 통감을 도와 전국에 끓어오르는 항일의병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 의병 1만 7779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 학살을 아카시 등은 조선 병합의 ‘공로’로서 당당하게 포장해 1910년 8월 29일자로 기념화보집을 발행했다. 이름하여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이다.

식민지 일상의 감시와 탄압을 보여주는 자료들

식민지 병탄 후 일제는 불과 1년 동안 헌병과 경찰 인원을 2배 이상 증원해 총 1만 4천여명에 이르렀다. 헌병경찰의 권한은 ‘급속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할 수 있는 사법권에까지 미쳤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을 할 경우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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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 초대 경무국장 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 2 경성헌병대본부와 경기도 경무부원. 3 경무총감부 모습. 4 변복한 일본인·조선인 순사가 강화도에서 활약한 항일의병장 이용권을 체포한 뒤 기념으로 찍은 사진. 5 황해도 경찰부가 조직한 이른바 ‘폭도토벌대’(이상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에서 뽑음)

 

1920년대 이른바 보통경찰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식민지 조선의 경찰은 본래의 임무인 치안유지 이외에 검사권, 민사 조정권, 행정사무에 대한 원조, 즉결처분권, 제한된 입법권 등을 가졌다. 권력의 자의적 행사가 제도적으로 가능한 식민지 국가권력의 한 특징인 ‘경찰국가’가 조선총독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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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즉결례, 16.7X24, 1910(왼쪽) 1910년 12월 제령(制令) 10호. 구류, 태형 또는 과료(科料)에 해당하는 죄,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하는 도박범과 상해죄, 행정법규 위반자들을 재판에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주차헌병대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직원록>, 15X21, 1916년 10월 1일 헌병과 경찰의 직원 명단이 통합되어서 나오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발행한 경찰직원록은 국내에 5, 6년도분 정도만 남아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광화문 근처에 있던 경찰관강습소는 강습과와 교습과 2과를 두고 소장·교수·조교수·서기 등의 직원을 두었다. 강습과는 현직 경찰관을, 교습과는 신규채용한 일본인 순사를 대상으로 경찰에 관한 학술과 운용, 실무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027

<조선총독부경찰관강습소 교습과 제78기생 졸업기념>, 23.4X 16.3, 1940.5. 1 조선경찰관강습소 입소장면. 2 조선총독부 경찰관강습소 경비근무 교대와 교련수업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유독 식민지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총독부 경찰들은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민중들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에비! 순사 온다!” 본래 울거나 떼를 쓰는 아이들을 달래던 말은 “호랑이 온다”였다. 좀 형편이 나은 집은 “곶감 줄게, 우지 마라”였다. 우는 아이도 달래던 호랑이와 곶감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어느덧 “순사 온다”라는 말로 바뀌었다. 식민지에서 피억압 민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역설적으로 일제 경찰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028

조선총독부 도순사 김재천에게 군산경찰서 근무를 명령하는 통지서(1923년 7월 31일, 왼쪽) 과거 통감부 순사·순사보 직의 경우 총독부 순사·순사보로 임명하였다. 또 헌병보조원 직에 있는 자는 순사보로 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경찰신문 朝鮮警察新聞> 제19호, 18×26.6, 1940.3.1 조선경찰신문사에서 매월 2회(2일, 15일) 발행. 1939년부터 발간하였으며 주로 경찰의 역할과 당면문제, 전시생활과 인사발령 등에 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029

상) <경비의 모습 警備の姿>, 황해도 경찰부, 27.3X18.5, 1937.8 [황해 경우] 제100호 발행을 기념해 발행한 사진첩. 식민지 경찰들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생검사, 방역, 지문 채취, 불심검문 장면

하) <종로경찰서 사진첩>, 25.8X18.9, 1926 이른바 조선 치안의 제일선을 담당하였던 종로경찰서 간부들의 모습. 고등계 주임으로 ‘염라대왕’이라 불리었던 미와 경부(오른쪽 아래)는 훈장을 요란스레 매단 채 사진을 찍었다.

 

되살아 난 친일파
해방이 되자 친일경찰들은 처벌 대신 이승만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이들은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요인들을 살해하려고 했으며, 반민특위 와해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독재자의 충견이 되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몽둥이가 되어서 활개를 쳤다. 공안통치가 판치던 수십 년간 경찰은 일제강점기 때와 마찬가지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공안 탄압의 주역으로서 오명을 이어갔다. 반민특위 와해와 이들의 부활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료를 두 점 공개한다.

030

반민특위 특별재판정에 끌려가는 친일 거두(왼쪽) 차례로 친일 경찰 노덕술, 경성방직 대표 김연수,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이다(주간서울, 1949.4.4., 제33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진상> 1957년 12월호)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김상돈의 반민특위 피습 사건 증언록

 

친일 경찰 김판산과 윤기병 자료
김판산은 1933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순사로 임명되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53년 12월 그는 6·25전쟁 국난극복의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을 수여한 사람은 윤기병이었다. 윤기병은 친일 경찰로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으로서 반민특위본부 습격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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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산의 경기도 순사 임명통지서(1933.8.5)(왼쪽) 서울시 경찰국장 윤기병이 김판산 서울시 경무과 경감에게‘전시 하에 복잡다단한 난관과 애로를 극복타개한 공로’로 표창한다는 내용(1953년 12월 21일자)

목, 2018/07/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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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3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2)
침략과 식민지배의 이력서인 각종 기념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기념장(記念章)
국가적 행사 참가자나 관계자를 대상으로 상훈국이 발행하며, 중요한 것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1) 제국헌법발포기념장(帝國憲法發布記念章) : 1889년 8월 3일자 칙령에 의해 일본제국헌법 발
포식에 관련된 친왕(親王) 이하 주임관(奏任官) 이상에게 수여했다.
2) 대혼25년축전지장(大婚25年祝典之章) : 1894년 3월 6일자 칙령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메이
지(明治) 천황과 쇼켄(昭憲) 황태후의 대혼 25년 축전에 초대되어 입궐한 자에게 수여했다.
3) 황태자도한기념장(皇太子渡韓記念章) : 1907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요시히토(嘉仁:
뒷날의 다이쇼大正) 황태자 대한제국 방문 기념. 1909년 3월 29일자 칙령에 의해 이와 관련된
한일 양국의 황족 및 주임관 이상에게 수여했다.
4)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 1912년 3월 29일 칙령에 의해 8월 1일 한국을 병탄한 후
1912년 8월 1일 한국 병합 사업에 직접 및 수반한 중요 업무에 관여한 자(제3조 1호), 병합 당
시 조선에서 근무하던 관리 및 관리 대우자 및 한국 정부의 관리 및 관리 대우자(2호), 종전
한일 관계에 공적이 있는 자(3호)에게 수여했다.
5) 대정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 : 대정4년(1915)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6)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 : 소화3년(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7) 제1회국세조사기념장(第一回國勢調査記念章) : 1920년 일제가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 등
지에 최초로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계자들에게 수여했다.
8) 제도부흥기념장(帝都復興記念章) :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난 후 진
재 복구를 위해 제도부흥심의회, 부흥원 등을 설치해 진재복구를 하면서 1930년 8월 13일자
칙령에 따라 관계자에게 기념장을 수여했다.

9) 대정14년 조선국세조사기념장 : 192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게자들에게 수여했다.
10) 소화5년 조선국세조사기념장 :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계자들에게 수여했다.
11) 기원2600년축전기념장(紀元2600年祝典記念章) : 일본의 전설상의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한 해(기원전 660년)로부터 2600년이 된다는 1940년에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수여한 기념장

047

1 을사오적 중 하나인 권중현에게 수여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과 증서 51X40.5 1912.8.1

048

2 한국병합기념메달 메이지43년(明治43年, 1910년) 8월 29일 : 앞면과 뒷면
3 권중현에게 수여된 대정(大正) 대례기념장증서 41.5X32.5 1915.11,10
4 소화대례기념장

 

금, 2018/07/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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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

물망국치(勿忘國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인정받은 일제는 이후 무력을 앞세워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등을 체결하며 단계적으로 식민지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이미 러시아와 영국, 미국 등 서구열강으로부터 조선 병합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받고 있던 일제는 1909년 7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對韓施設大綱)’을 결정해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맞춰 친일단체 일진회는 이른바 ‘합방촉진성명’을 발표하면서 여론을 조작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의 구실을 마련해주고자 했다. 일제 또한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의병항쟁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저항의 불씨마저 없애고자 했다.
1910년 6월 일제는 내각회의를 통해 ‘병합 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병합을 위한 막바지 준비를 끝냈다.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국민에게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제는 강제병합을 전후해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다양한 기념엽서와 홍보자료들을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대개 그 내용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병합 요청에 따라 일본 ‘천황’이 조선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이를 허락했으며, 이 조치에 대해 조선인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는 황당한 내용들이었다.
곳곳에서 해방 70년이라고 경축하지만, 박근령과 같은 역사의 정신질환자마저 퍼져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8월 15일 광복절보다 8월 29일 국치일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뼈저린 반성과 친일 잔재 척결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며, 물망국치(勿忘國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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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칙유(勅諭)> 61 x 42.6 1910.8.29 황제로서 부덕함을 토로하고 백성을 곤궁함에서 구하기 위해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이다.

 

038

<데라우치 마사다케 통감의 유고(諭告)> 42.6X228.3. 1910.8.29 3대 통감 데라우치가 순종의 칙유에 맞추어 자신이 이제 ‘천황’의 대명(大命)을 받들어 “전(前) 한국 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통치권의 양여를 수락”하며, 한국 병탄에 공이 있는 친일파들에게 훈포상과 등용을 약속하는 한편 통치를 어지럽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징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039

<‘일한병합’기념엽서>14.1 X 9.1 역대 통감과 통감부 청사가 오얏꽃과 일본 벚꽃의 줄기가 얽힌 채색도안을 배경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다.(왼쪽)
 <‘일한병합’기념엽서>14.1 X 9.1 순종황제와 메이지천황.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040

<일한병합기념엽서> 14.1 X 9.1 대한제국 황태자(영친왕)와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후의 다이쇼大正천황) 사진 아래 이른바 일한병합조약 정문(正文)을 실었다.(왼쪽)
<한일합방조서> 14.1 X 9.1 일본 메이지천황의 명의로 발표된 「한일합방조서」

 

041

 

042

<매일전보(每日電報)-‘일한병합조약’정문> 40.5 X 18.5, 1910.8.29. 마이니치신문이 발행한 한국 ‘병합’ 관련 호외 제1호.

 

043

<한국병합기념장과 증서> 14.1 X 9.1 을사오적 중 하나인 권중현이 받은 병합기념장과 증서.

 

044

<‘일한합방’ 축하 제등행렬 엽서> 14.1 X 9.1, 1910.8 이른바 ‘일한병합’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 등불 행진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

 

046

<한국병합기념화보(韓國倂合記念畵報)> 78 X 53, 1910. 오사카매일신보사가 한국‘병합’을 기념해 제작한 특별화보. 한일 양국의 황제와 주요 인물들의 사진, 한일관계사 연표, 한반도 각 지역의 지하자원 등을 설명하고 있다.

 

045

<일출신문조선쌍육(日出新聞朝鮮雙六)> 78 X 53, 1911.1.1
일본 교토의 히노데신문(日出新聞)이 1911년 1월 1일 신년 특별 부록으로 발행한 주사위 놀이판. 신라의 ‘조공’, 조선통신사의 ‘내조(來朝)’,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침략 선봉이 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부산 상륙과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호랑이 사냥,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소재) 등이 상단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에 나오고, 가운데에는 이른바 ‘삼한 정벌’을 했다는 일본의 고대 진구황후(神功皇后),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수양딸인 배정자, 그리고 맨 위에 ‘병합조칙’을 읽고 있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이 등장하고 있다. 한반도는 과거 일본의 영향력 또는 조공 지역으로서 대한제국 ‘병합’은 잃었던 옛 땅을 되찾은 것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주사위 놀이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주입하는 내용이다.

금, 2018/07/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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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4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매년 10월 1일이면 이른바 시정기념엽서(始政記念葉書, 1920년부터는 5주년 단위)를 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출범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를 처음 펼친 날이 바로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려는 목적이었다.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디자인이 어우러진 이 고급 엽서들은 조선의 문화 유산이나 자연풍광을 비롯해 조선 각 지방의 산업 발달 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등을 디자인 소재로 삼았다.
‘시정기념’이란 말에 걸맞게 이 엽서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넘어 총독부의 선정(善政)에 의해 미개한 조선이 비약적으로 문명개화했다고 내외에 선전하는 홍보수단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실제 매년 발행된 기념엽서는 대부분 조선 전 분야가 일제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처럼 묘사 하거나, 낙후된 과거 모습과 일제에 의해 ‘근대화된’ 모습의 사진을 나란히 배열하여 한눈에 비교하기 쉽게 디자인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한국인들이 기뻐하고 환영한 것처럼 디자인한 후안무치한 엽서들도 있다. 의도적인 상징 조작과 합성을 통해 그들은 조선인의 실상과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낙토(樂土) 식민지’를 이미지로 창출한 것이다.
통신우편수단으로 각광을 받던 이 엽서를 상용하면서 조선인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정기념엽서는 통신수단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는 제국의 홍보수단이자 민족적 자각과 저항을 잠재우려는 ‘움직이는 마취제’로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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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삼한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신공황후 그림

2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일장기를 든 소녀를 둘러싸고 일본인과 조선인 아이들이 손을 잡고 노는 장면. 뒤쪽에 일본과 한국의 상징인 벚나무와 오얏나무가 함께 그려져 있다.

 

054

3 시정1주년기념 : 배경에 인삼이 개화한 모양 도안. 백운동 식림 1년과 4년 비교 사진 배치

4 시정1주년기념 : 한강 철교, 죽도 등대, 광량만 염전, 인천 수도 수원지 사진 삽입

5 시정2주년기념 : 구식 서당과 신식 학교 비교 사진. 일본 다이쇼천황 상중이라는 이유로 검은색 바탕 사용

6 시정3주년기념 : 부산 제1잔교와 연락선, 부산우편국, 부산정거장 사진 삽입

7 시정4주년기념 : 일본인 농업이민 주택과 근대식 논농사 사진과 조선인의 재래식 관개 및 제초 방식 그림 대비

8 시정4주년기념 : 조선호텔과 진남포 축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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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정5주년기념 : 경성우편국 신축청사 전경

10 시정5주년기념 : 군산항에 쌓인 쌀가마니와 목포항의 면화 집
하 장면 사진과 관련 통계

11 시정6주년기념 : 전북 임익수리조합과 평북 태천관개 사업 관련 사진 배치, 여백에는 수차와 흰닭을 그림

12 시정6주년기념 : 동아연초공장과 조선피혁공장 사진, 배경에 담배꽃, 담뱃대 등을 그림

13 시정7주년기념 : 하세가와 총독의 초상을 도라지꽃으로 감싸고, 그 아래 용산총독관저는 국화, 월계수와 총독부 상징인 오동나무꽃으로 꾸밈

14 시정8주년기념 : 황해도 겸이포 미쓰비시제철소 전경과 용광로 등의 사진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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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시정8주년기념 : 대정수리조합 취수구과 수로 사진. 해당지역 지도를 바탕으로 구성

16 시정9주년기념 : 동해 횡단항로를 사용하는 선박 다테가미마루(立神丸), 청진항에서 일본으로 보내지는 콩과 성진항에서 일본으로 실려가는 소 사진 실림. 배경은 동해 횡단항로도

17 시정9주년기념 : 은사수산경성제사장(恩賜授産京城製絲場)과 총독부제생원 맹아교육 장면. 뽕잎, 누에, 국화와 오동나무꽃을 배경으로 그림

18 시정10주년기념 : 평북 신의주 조선제지회사와 평남 승호리 오노다세멘트제조주식회사 평양지사 공장 전경

19 시정10주년기념 : 한강 인도교를 배경으로 사이토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의 초상 배치

20 시정15주년기념 : 이왕가 수견식(收繭式)과 누에고치 모양의 테두리 안에 경성제사장 사진 삽입

월, 2018/07/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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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양대 거인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세를 무기로 한 무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고, 유럽중앙은행이 연말을 목표로 양적완화의 종결을 선언하는 등의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펼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단은 금물이지만 자칫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힘을 모아 추진했던 유동성 공급을 통한 경기부양책이 마침내 종언을 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수출의존도가 매우 큰 대한민국에 글로벌 경제환경의 악화는 나쁜 뉴스(bad news)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미중 간의 무역전쟁이나 미 연준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유동성 회수기조 등을 대한민국이 통제할 길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이전 보다 한결 악화될 가능성이 높은 글로벌 경제환경을 전제로 두고 경제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 셈이다. 수출이 과거 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내수를 활성화시키는 길 뿐이다.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는 부동산공화국 해체와 가처분 소득 증가 효과를 단기간 내에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아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가 바로 내수 활성화의 최적해가 아닌가 싶다.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의 얼개는 기존의 재산세는 그대로 둔 채 종합부동산세를 대체하는 국토보유세를 신설하고, 토지에만 과세하는 국토보유세를 재원으로 하여 전 국민에게 토지기본소득을 지급하는데, 토지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식은 현금이 아니라 지역상품권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전강수와 강남훈의 연구결과(2018)에 따르면 참여정부 당시의 부동산 과세체계를 크게 흔들지 않고 국토보유세를 신설하는 경우 순증분이 15조 5천억이 된다. 이 재원을 전 국민에게 토지기본소득으로 나눠 줄 경우 1인당 30만원을 받게 된다.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의 예상효과는 획기적이다. 이 모델을 실질적으로 적용하면 토지불로소득이 대거 환수되며, 자산불평등도가 완화될 것이다. 또한 부동산 경기 변동의 진폭이 줄어들고 부동산 가격이 안정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지대추구 경향과 작별할 계기가 마련됨과 동시에 부동산 때문에 위축된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크게 증가될 것이다.

 

더구나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은 토지를 지닌 모든 가구가 국토보유세를 내는 대신 전 국민이 토지기본소득을 받게 됨에 따라 조세저항이 현저히 줄게 된다. 전강수와 강남훈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 가구의 94%가 내는 세금(국토보유세) 보다 받는 급부(토지기본소득)가 더 큰 순수혜 가구로 분류된다.

 

지역상품권의 존재는 지역 내 영세소상공인들에게 복음 역할을 할 것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에 따르면 토지기본소득은 현금이 아닌 지역상품권으로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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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상품권은 지역 내의 영세소상공인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쉽게 말해 15조 5천억원에 달하는 재원이 지역 시장에 풀리는 셈이니, 사면초가 상태인 지역 상공인들에겐 복음이나 다름없다. 문재인 정부가 야심차게 표방한 소득주도성장전략의 실행방법에 불과한 최저임금제가 약자(영세자영업자)와 최약자(저임근로자 및 알바생)간의 전쟁으로 변질된 지금,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의 도입을 문재인 정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옳다.

 

정리하자. 미중간의 무역전쟁, 각국 중앙은행들의 유동성 회수 기조 등은 대한민국 수출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내수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는데 부동산공화국을 끝장 내고,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며, 한계상황으로 내몰린 영세자영업자들을 살릴 해법이 바로‘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이다. ‘국토보유세+토지기본소득+지역상품권’패키지 모델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할 것이다.

금, 2018/07/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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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aign서명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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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7/2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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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회원확대 캠페인 감사 copy

회비인상을 해 주신 회원님께 두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전화가 닿지 못한 회원분들을 위해 아래에 설문지는 열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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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정의 문자를 못 받고 계시는 분은 휴대전화 번호가 등록되어 있지 않은 회원
또는 번호가 변경된 회원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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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락하기 : 02-743-3877

월, 2018/07/2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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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은

사법부의 재판거래와 청와대, 외교부의 재판 개입을 강력히 규탄한다.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당시 작성된 법원행정처 문건들과 현직 판사의 양심선언을 통하여, 사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대법원 2013다61381, 2013다67587)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지난 5월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은, 청와대(이병기 비서실장)가 사법부에 한일 우호관계 복원을 위해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해서 청구기각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부적절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최근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외교부는 ‘일본 공사(公使)가 강제동원 손해배상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다’는 것을 법원행정처에 전달하면서 재판에 개입했고,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해외 파견 및 해외 방문 시 편의를 제공받기 위한 대가로 판결의 확정을 미루는 방안을 검토했음이 확인된다. 법원행정처는 “(일본 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을 통해 외교부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하게 한다”, “변호인 선임신고서 접수 직후 외교부와 상의한다”, “국외송달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긴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며 꼼꼼하게 ‘기획’했다.

이는 단지 법원행정처의 기획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로 법원행정처 임종헌 전 차장은 2015년 6월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 의견서 제출을 협의하며 그 대가로 대사관 내 법관파견을 청탁했다. 김앤장은 2016년 10월 외교부와 법무부에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였고, 그 다음 달인 11월 외교부는 “손해배상시 한국이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재상고심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종판결은 나오지 않았고, 해당 사건의 원고들과 동일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제기한 후속 소송도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판결 결과를 기다리며 심리가 중지되어 있다. 대법원이 기존의 자신의 판결에 따라 판단한 파기환송심의 판결에 관하여 5년 동안이나 검토를 한다며 계류시켜 놓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또한 관련 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재판지연사유’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대법원이 쟁점에 관한 법리적 판단을 확정하여 하급심에서 판단할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관련 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 없이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안과 같이 후속 소송이 계속 제기될 가능성이 높고,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결 결과를 기다리느라 절차 진행을 중단하고 있는 경우에는 대법원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 통일적이고 모순 없는 사건 처리에 효율적이다.

어느 곳에서도 권리를 구제받지 못하고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대한민국 사법부가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줄 것을 기다리던 원고들은 결론을 보지 못한 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삶의 끝자락에서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며 간절히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고령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었다.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서 누구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법부가, 위헌적인 상고법원 추진과 알량한 일부법관의 편의를 위해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며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자국민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재판에 개입했다. 사법부, 청와대, 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다.

우리 모임은 양승태 대법원장 당시 사법부와 청와대, 외교부의 이러한 만행을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 모임은 사법부에게 관련 문건의 원본을 모두 공개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새로운 재판부를 구성하여 신속하고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우리 모임은 정부와 국회에게 관련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엄중하게 처벌하고, 재판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2018. 7. 27.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직인 생략]

 

[민변 과거사청산위][성명]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은 사법부의 재판거래와 청와대`외교부의 재판 개입을 강력히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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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7/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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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추모할 권리마저 모독하는 사람이 인권위원이라니!
무자격 김민호 인권위원 후보자는 즉각 사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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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기획 사외이사가 인권위원을 겸직하는 것은 위법의 소지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와 관련한 투쟁을 屍身시위로 폄훼
복면시위금지법 도입 주장,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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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7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후보자인 김민호 성균관대 교수(이하 ‘김 후보자’) 선출안이 가결되었다.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김 후보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이명박 정부)을 지낸 인물로서 정보인권 법제도와 관련한 연구이력을 가지고 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법적 구제활동을 하여 왔으며 …정보인권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등 인권분야의 이론과 실무를 모두 갖춘 전문가”라는 국회 추천이유서의 기재처럼 김 후보자는 인권위원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이하 ‘인권위 공동행동’)은 김 후보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인권위원으로서의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법함을 지적하고 김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한다. 먼저, 김 후보자는 제일기획의 사외이사이다. 제일기획의 분기보고서를 보면 김 후보자는 사외이사로 기재되어 있다. 위 분기보고서의 발행 시기(2018. 6.15.자)와 자유한국당의 김 후보자 내정시점으로 알려진 시기(2018. 5. 말)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김 후보자는 사외이사 직을 유지한 상태로 자유한국당 내의 추천에 응모한 것으로 보이고 현재도 그 직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으며 향후 인권위원을 수행하는 기간 중에도 제일기획의 사외이사 직을 겸직할것으로 예상된다.

기업의 사외이사 겸직이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적으로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의 겸직금지에 관한 규칙(이하 ‘겸직금지규칙’)>은 기업의 사외이사 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기업의 사외이사직을 인권위원직과 겸임하는 것은 사적 영역에서의 차별과 성희롱을 판단하는 인권위원회의 기능을 침해할 여지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이 침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제일기획의 사외이사 선임시부터 김 후보자는 ‘삼성 방패막이’ 역할을 할 만한 인사로 시민사회로부터 지목 된 적이 있는 바,1)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김 후보자의 재벌 계열사의 사외이사의 겸직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겸직금지규칙 제2조 제2항 제2호를 위반하고 있다.

나아가 김 후보자의 겸직은 부패방지권익위법도 위반할 소지가 있다. 국회에 제출된 이력서를 보면 김 후보자는 현직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이다. 그런데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부패방지권익위법’)>은 행정기관의 임·직원을 겸직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제17조 제2호).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기관에 해당하므로(헌법재판소 2010.10.28. 선고 2009헌라6 결정), 만약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을 사임하지 않고 국가인권위원 직을 개시하는 것은 곧바로 부패방지권익위법 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김 후보자가 인권위원으로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김후보자가 시장중심의 우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바른사회시민회의>의 사무총장을 맡았다는 사실은 그의 가치관을 능히 짐작케 하는 대목이지만 이 만으로는 김 후보자의 결격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소신에 따른 이 사회의 진단 그리고 연구자로서의 이론과 입장에 따른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는 등 박근혜정부의 정책에 코드를 맞추어온 바 있으나 이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별 인권 사안을 폄훼하고 나아가 인권적 가치를 후퇴시키는 주장들은 김 후보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으로서 아무런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와 관련한 투쟁을 ‘人間 존엄성까지 모독하는 屍身시위’라고 비방하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그 위법성을 의견으로 개진한 바 있었던 ‘복면시위금지법’의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학생인권조례를 “아무런 실익이 없고 무익한 분열만을 조장하는 것”으로 평가했던 그의 언행에서 볼 때, 김 후보자는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국제인권규범이 요청하는인권위원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김 후보자는 조속히 사퇴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김 후보자의 문제점에 대해서 국회에서 전혀 논의가 이루어지 않았다는 지금의 상황은 현행 인권위원 추천 및 결정 시스템이 무자격 인권위원을 검증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국회에서는 조속히 인권위원 후보추천기구를 구성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인물이 선출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인권위가 국가인권위원회 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을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현실에서 김후보자 같은 무자격자를 추천한 자유한국당에 분노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유한국당이 추천 했다할지라도 자격이 없는 김후보자를 추인한 국회도 실망스럽다. 이제라도 김 후보자가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인권위 혁신에 기여하는 것이다.

 

2018년 7월 27일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

 

 

 

1) 경제개혁연대, “삼성그룹 사외이사 선임 기준은 ‘삼성 방패막이’?”, 2016. 2. 24.

도입 필요성 커진 ‘복면시위 금지법’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112001073911000005
‘혐오 발언 제재’ 野 발상, 부적절하다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62301033111000004
소수자 우대, 시장엔 독이다 – 김민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42919821
법조 상식 저버린 불법시위 無罪판결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101401073137191004
人間 존엄성까지 모독하는 屍身시위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204010731371910040
不法파업 근로자의 편법 복직 안된다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41301033937191002
서울광장은 政治집회장 아니다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121201033137191001
민주노총의 심각한 ‘도덕 불감증’ – 김민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52501033137191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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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7/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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