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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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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admin | 수, 2020/12/30- 20:29

[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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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2심 판결이 있었다.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주문 내용은 간결했고 연구소는 승소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재판부는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가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린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모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모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모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하며 방모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모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데 방모씨 측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청량리 사무실에 침입해 출입문과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달아난 60대 김모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담은 사과문을 12월 20일 연구소로 보내왔다.

08작년 4월 새벽 1시쯤 연구소가 위치한 동대문구 사무실을 찾아온 김모씨는 연구소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출입문에 엑스(X)자 모양의 낙서를 한 후 도주했다. 스프레이 테러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를 토대로 수사에 들어간 동대문경찰서는 11월에 김모씨를 붙잡아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형사조정에 참석한 김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뉴스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연구소도 김모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래의 사과문은 김모씨가 형사조정의 결정에 따라 작성하여 연구소로 보내온 것이다.

 

사 과 문

상기 본인은 사건 당일 집회를 마치고 저녁식사 겸 회식자리에서 탄핵 반대 등 시국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중 잘못된 교육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라는 잘못된 소신과 판단으로 만취상태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황당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이 문제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차후 두 번 다시 이런 사태를 재발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017. 12. 20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8/0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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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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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경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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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15년전쟁’(1931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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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시장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피해’와 ‘가해’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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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교 문집과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처럼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헌법의 숲’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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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사노보효’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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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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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70년만의 귀향’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월, 2017/08/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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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지난겨울 촛불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개탄하였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에서 정권에 비판적이라 지목된 연예인들의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했다고 하니 정말 이러한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추석 연휴 기간 중 많은 언론들이 적폐청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흔히 보수 언론과 논객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를 대비하자고 강조한다. 또한 당장 안보, 경제 등 긴급한 현안들이 있는데 과거사 청산 같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매번 지겹도록 듣는 식상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와 미래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보는 것으로, 역사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도 큰 문제를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위해 자신이 이미 지출한 내역을 가계부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자신의 소비생활을 성찰한다. 그러나 가계부를 아무리 잘 써도 이미 지출한 돈은 단 한 푼도 회수되지 않는다. 이미 지출해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실용주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가계부보다는 미래의 지출 계획서를 작성하여 미리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는 다양한 변수와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나마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대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꼼꼼한 정리와 깊이 있는 성찰이다. 과거에 대한 충분한 정리와 성찰 없이 그냥 막연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시간 낭비이다. 그러하기에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위해 지출 계획서를 미리 작성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가계부를 주로 작성해왔던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니 접어두고 긴급한 현안과 미래에 대비하자는 이야기는 사실상 미래를 중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그러하기에 다양한 변화가능성이 없는 미래를 희망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논리를 묘하게 미래 지향성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여 성찰하지 못하면 불행이 반복된다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쉽게 자주 놓쳐 버리는 역사의 진리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 등 최씨 가문과의 관계는 1970년대 말 유신체제하에 전개되었던 새마음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음운동은 ‘충’과 ‘효’를 강조하는 일종의 관제 대중운동이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유신체제기 중요한 관제 대중운동의 하나인 새마음운동의 주도자였다는 것이 정말 더 큰 문제였다. 새마음운동에 대해서는 2007년 이명박과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불충분하게 다루어졌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드러나고 시정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은 커다란 혼란과 고통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것이다.
또한 과거사 청산이 쟁점이 될 때마다 나오는 소리 중에 하나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는 인적 청산보다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마치 이를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잘못한 사람들을 밝혀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제도와 관행을 청산하기 위해 유보하거나 부차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범죄자를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려내어 처벌하지 않고,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만 개선하면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형식적으로 좋은 제도를 구상하여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사람들의 사고와 행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할 리도 없다. 따라서 인적 청산이 없거나 유보되는 제도적 청산은 무의미하고, 역시 공허하다.
요점은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단기적인 인적 청산에 머물지 말고 문제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으로 연결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적인 범법행위, 비리행위만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지 못했던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나 국정교과서 문제의 경우 이를 주도한 사람들도 밝혀내야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조직 내부의 사람들이 그것이 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음에도, 왜 여기에 침묵하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이는 결국 내부의 비판자, 고발자를 소외시키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발단은 문체부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인사 조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풀리는 문제이다. 또한 국정원 댓글 공작에서 나타나듯 국가기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감시 및 통제 장치를 만드는 것도 시급해 보인다. 이러한 일들, 특히 제도 개선과 관련된 부분들은 단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능동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적폐청산을 통해 여러 폐해들을 해결할 때 그 혜택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다.

목, 2017/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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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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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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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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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광주지부장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헤엄치지 말고
걸어서 가자
배 타지 말고
버스로 가자
비행기 타지 말고
기차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 또 가고

 

모레도 못 가면
글피에 또 가고

올해안에 못 가면
내년에 또 가고
내년에도 못 가면
그 내년에 또 가고

서둘지 말고 가자
싸목싸목 가자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화, 2018/03/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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