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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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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admin | 수, 2020/12/30- 20:29

[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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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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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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