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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드러난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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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드러난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

admin | 목, 2020/12/03- 20:20

코로나 3차 유행을 예감하면서, 한국 역시 서구와 유사한 상황에 돌입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반면에 서구 사회는 점점 더 명료하게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는 모습이다. 코로나 1차 유행 시에 서구의 ‘기본권’ 개념은 명료했고, 아시아의 ‘파시즘’적이거나 ‘독재’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데에 거리낌 없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제 구미에서 극우세력과 코로나 부정 세력 간에 연대가 커지면서, ‘기본권’ 개념은 점점 더 극우적으로 옹호되는 ‘묻지 마 자유’의 방향으로 오용되고 있다.

이에 <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최근 유럽 언론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단지 코로나19 상황이라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에 그러한 화해가 급조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기에는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대립이 매우 완강했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구별되지 않는 경향 역시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한병철이 새롭게 주장하듯이 공동체 정신이 자유주의의 전제라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굳이 공동체주의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자유주의를 옹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정의로운 분배의 절차를 제도화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 존 롤스였다.

따라서 코로나19로 구미에서 ‘기본권’이나 ‘자유’와 같은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과도 같은 개념들이 ‘이기주의’나 ‘경제적 생존’과 동일시된다고 해서, 공동체주의자가 갑자기 자유주의를 옹호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수렴이 아니라, 오히려 그도 저도 아닌 제3의 다른 원칙이 필요해진 것은 아닌가? 공동체주의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사회적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추상적 절차에 기초하여 개인들의 권리와 연대를 조절하려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아무리 가는 길이 급해도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최근 한 학술지에 투고했다가 수정 재심 요청을 받아 투고를 철회한 논문에서, 필자는 ‘공동체’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의존성’의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함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분화해서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가치 갈등’ 및 ‘가치 지배’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반면에 ‘상호의존성’은 가치와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 조건, 즉 서로 돌봄이 필요한 개인들의 취약성이라는 조건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어떤 가치로 어떤 형태의 공동체를 정당화하는가의 경험적 사실과 무관하게, 사회는 모종의 ‘연대’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원칙이다. ‘공동체’는 ‘상호의존성’의 조건에서 출현하지만, 그러한 조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상호의존성’ 관계에 대한 특정 해석방식, 즉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특정 가치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서로 돌보는 연대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아닌 ‘상호의존성’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수렴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상호의존성’ 개념과 관련된다. 즉 자유주의에서는 사회적 연대를 ‘상호의존성’의 결과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들의 자발적 협동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공동체적 상호 돌봄’을 전제로 삼을 수 없으며, ‘합리적인 협동의 형태에 대한 자율적 합의’를 추구한다. 즉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가장 먼저 자유주의의 인간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상호의존성 속에서 사는 개인’으로 개인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가치의 공유’까지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런 행보는 ‘가치 지배’라는 새로운 위계와 불평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공동체’로 한 발 더 내딛는 행보를 생략하고,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코로나19의 n차 유행을 통해 점점 더 명료해지는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개인을 집합체나 타인과 분리해서 보는 ‘개인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리를 ‘완전한 자율과 독립’으로 고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히려 ‘분리’는 순간순간의 ‘사건’들에 불과할 터인데, 그것을 영구적인 개인의 실체적 속성으로 정의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책임’은 정언명령을 따르는 실천 이성 또는 개인의 합리적 성찰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들이 더 이상 정언명령을 따르거나 합리적일 수 없을 때, 자유주의 사회에서 책임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현재 구미에서 ‘자유’의 개념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극우적으로 오용된다. ‘경제적 생존’ 문제가 실천 이성의 정언명령이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에, 책임 없는 자유가 ‘기본권’의 개념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실천 이성을 장착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앞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시장 논리는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서구 자유주의에 거울이 되어주고 또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 개념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서구 사회를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한다는 절충론적인 접근은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는 ‘가치 동일적 사회=공동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서구 사회는 ‘자유주의적 개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상호의존성’이라는 인간 조건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를 기획하는 것이 두 사회 모두에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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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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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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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걸음을 들이는 순간부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간의 비참하고 값비싼 불행은 미국의 국내용 선거정치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제 탈레반이 미국을 몰아냈기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의 셈법이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국가가 직면한 실제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신들의 이득여부를 타산해야 할 것입니다.

Austin, Texas – 이제 주요 언론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슬픈 비극을 너무 많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그저 한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에 관한 것이었으며 대상 지역은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정치를 위한 단막의 쇼(side-show)에 불과했습니다. 공식보도에 따르면 2001년 9월 11일 플로리다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영토에서 테러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이들 대부분은 사우디인들이었습니다. 9/11 사태 이후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은 수단을 떠난 후 아프가니스탄에 잠시 거주하였습니다만, 곧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아프칸의 탈레반 통치자들은 9/11 공격에 직접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01년의 침공은 빠르고 확고하게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상원에 대한 공화당의 우위를 희생시킨 (버몬트의 제포드에 의한) 탈당으로 지위가 흔들리고 있던 조지 W. 부시는 아프칸의 침공결정으로 위기의 대통령직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가 90%까지 치솟았으며 이후 다시 꾸준히 하락하다가 다시 2003 년 3월 이라크 침공과 12월 사담 후세인의 사살로 두 번의 반등기회를 가져다 주면서, 결국 그는 2004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합니다.

빠르고 쉬우며 값싼 승리라는 보상은 미국 유권자들만이 선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세계 저편 먼 곳의 산속에서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들은 특히 죽은 사람, 부상당한 사람, 외상을 입은 사람, 우울한 사람들의 이미지와 해설을 싫어합니다.정치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시민들은 전쟁의 희생자 숫자가 줄어 들면서 이를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투의 횟수가 잦아들고 사상자가 줄면서 미군 개개인의 생명이 미국 시민들에게 더욱 귀중하게 다가오고 병사 한사람 한사람의 사망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2009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아프간 전쟁을 물려받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전쟁의 지속을 지지했습니다. 오바마는 2011년 5월 빈 라덴을 사살했지만 이로부터 정치적인 이득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그의 지지율의 반등은 단지 한달 정도 지속되었고, 그의 정치적 기량은 아프칸의 상황이 뉴스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곳 즉 리비아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화려한 승리(칼라-혁명)를 기대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어느 것도 기대만큼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바마에 이어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려하게 조작된 상기의 작은 전쟁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우울한 분위기를 즉각 포착했습니다. 사실, 이슬람국가 IS는 트럼프의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쉽게 노출된 목표물인 도시전체(모술과 락까)를 파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IS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전쟁은 트럼프에게 정치적으로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으며 트럼프 자신이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아프칸에서 미군의 철수를 협상하였고 이의 실행을 그의 두 번째 임기, 실제로는 후임자의 임기로 일정을 연기하였습니다. 바이든 신임 대통령은 여러 대안들을 면밀히 검토하였겠지만, 결국 타격과 손실을 줄이기로 신속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만 간에 밝혀지겠지만, 바이든의 결정은 아마도 국내의 정치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국내의 정치적 계산으로 선택하는 일이 올바르기도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베트남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 미국이라는 제국은 1960년대 초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패배하고 교착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부 정치그룹을 위해서는 미국 유권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9/11 테러공격보다 훨씬 파괴적인 도발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이를 가정하고 희망하면서), 개입주의를 부추긴 (치어리더 칼럼니스트 Thomas Friedman과 David Brooks, 정책입안자 Samantha Power와 Victoria Nuland 등) 인사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제국(전쟁)국가를 부추기는 또 하나 치어리더인 Michael Rubin은 아프칸의 함락이 NATO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종당에는 그가 미국이 이제 러시아에 연접한 리투아니아를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할까요? 루빈에게는 아마도 이 것(전쟁을 한다는 것)이 옳고,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 ​연합의 회원국들인 발트해 연안국가들은 러시아와 실질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지도 않으며 NATO가 없어도 무탈하게 잘 지낼 것입니다.

비슷한 정치적 계산이 미국이, 공식적으로 군사적 약속을 하지 않은, 대만과 그리고 정전중인 한국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두 지역의 지도자들이 이제 정치적 계산을 조정하면서, 양안관계의 장기적인 안정화(대만)와 분단된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바라던 해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멕시코는 외부의 제재가 없고 불간섭의 원칙을 기반으로 구축된 지역연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 스스로 방대하고 값비싼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목적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이제 드디어 해외의 주둔병력을 철수시키고, 오래된 함선을 퇴역시키고, 전투기와 폭격기의 제작 계약을 취소하고, 핵탄두와 운반 시스템을 해체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예산과 자원을 국가가 직면한 실제적 위협에 대응하는데 투입해야 합니다: 즉, 열악한 공중보건, 낙후된 사회기반시설, 증가하는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정, 에너지와 교통 등 지속적인 환경을 위한 전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기후재앙의 대응 등.

2018 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당시, 두마(러시아 연방의회)의 높은 공직자가 내게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의 복구를 위한 결정은 1992년 군사지출의 75%을 삭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궁극적으로 국내사업의 재건을 분명히 하고 심지어는 러시아의 현대적 안보요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군대를 창건하였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순간에 미국이 서 있습니다. 현재 미국을 감돌고 있는 분위기 즉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솔직함과,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기민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출처: Project Syndicate on 2021-08-20.

JAMES K. GALBRAITH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의 교수로 공공정책 연구소의 책임을 맡고 있으며, 클린턴 시절 정책자문 위원회 의장과 이후 중국정부 경제자문역을 역임한 바 있다


<보충자료>

9/11 이후 미국은 군사주의에 21조 달러를 지출했습니다

“군사주의를 위하여 투자한 21조 달러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훨씬 많은 대가를 의미합니다.”

9.11 테러 이후 20 동안 미국정부는 국내와 해외를 포함하여 대규모 감시시설의 설치와 열악한 감호소 운용 그리고 이민자 공동체와의 대립하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예멘, 리비아, 소말리아 및 기타 지역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20년간의 파괴적인 전쟁과 점령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한 후 발표된 새로운 보고서는 탈레반의 급속한 아프칸 장악이 “지금까지 우리의 군사 투자에 대해 깊은 의문을 제기한다”고 주장합니다.

20년 전에 “실현되지 않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비전을 약속할 때는 단지 600억 달러의 군사비용이 들 것이다”고 당시의 부시행정부는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돌입하고 테러에 대한 국내안보에 다시 초점을 맞추면서 군대, 퇴역군인, 이민 또는 국내법 집행 기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책연구 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이니셔티브인 NPP(National Priorities Project)는 2001년 9월 11일의 여파로 “대외 및 국내 군사화”에 미국이 투자한 직간접 총비용 21조 달러(브라운 대학 연구보고는 직접비용을 8억 달러로 추정) 중 16조 달러가 군대에, $3조 달러가 재향군인 프로그램에, 미국 국토안보부DHS에 9,490억 달러, 연방법 집행에 7,320억 달러가 지출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새로운 보고서는, 해외에서의 죽음과 파괴를 부채질한 것 외에도, 해외전쟁에 대한 지출이 국내에서도 군사화를 강화하여 국내에서 안보를 위한다는 구실로 경찰의 단속을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었다고 강조합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장비가 경찰에 이전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군이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2010년에 경찰로 이전된 금액은 총 3천만 달러였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미국은 이라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경찰로 군사장비의 이전이 급증하여 2014년에 3억 8천 6백만 달러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오늘 시점에서 이전비용은 테러와의 전쟁초기보다 훨씬 높아져서 2020년에는 총 1억 5200만 달러, 2021년 상반기에만 1억 1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NPP의 프로그램 책임자이자 새 보고서를 주도한 Lindsay Koshgarian은 수요일 성명에서 “군사주의를 위하여 투자된 21조 달러는, 단순히 달러라는 수치보다 훨씬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Koshgarian은 “전쟁을 통해 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명이 희생당했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민정책, 치안 유지, 대규모의 감금시스템으로 인해 불필요한 희생과 생명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군사주의로 인하여 9/11의 희생자 수치보다 많은 생명이 매일같이 희생당하고, 전염병과 엄청난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과 불안정 또는 기후 변화로 인해 허리케인과 산불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기후행동 및 주요한 글로벌 및 국내 현안의 우선순위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지난 20동안 군사와 안보의 명목으로 지출한 21조 달러보다 훨씬 적은 액수입니다. 상세한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4조 5천억 달러로 미국전력의 공급망을 100% 탈탄소화 할 수 있습니다.

2조 3000억 달러로 시간당 15 달러의 일자리 500만 개를 만들 수 있으며, 개선된 사회복지의 혜택을 10년 동안 제공할 수 있습니다.

1조 7000억 달러로 대학 학자금의 빚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4,490억 달러로 아동지원의 세금공제를 10년 동안 계속할 수 있습니다.

2,000억 달러로 10년 동안 모든 3세 및 4세 어린이에게 무료유치원을 보장하고 교사급여를 인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50억 달러로 저소득 국가들에게 코로나 백신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NPP 보고서는 ‘브라운 대학의 전쟁비용 프로젝트(Cost of War Project)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및 기타 지역에서 미국이 주도한 9/11 전쟁 이후 최소 929,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는 연구보고서가 나온 날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엄청난 과소계산 – 실제 8조 달러 이상의 비용이 추가로 들었습니다.”

Koshgarian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은 우리에게 진정하게 필요한 곳에 재투자할 기회를 제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20년 후에 우리가 우선순위를 기꺼이 조정한다면 기반시설, 일자리 창출, 가족지원, 공중보건 및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투자로 미국을 더욱 안전한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출처 : CommomDreams.Org  2021-09-01.

월, 2021/09/0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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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탈레반의 집권에서 도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비행기에 매달리는 비디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IS-K의 자살폭탄 테러로 인하여 미군 13명을 포함하여 최소 170명이 사망한 사건에 또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엔 산하기구들이 아프칸 국민들이 겪을 인도주의적 위기를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재무부는 아프칸 중앙은행의 94억 달러 외화보유 예치금을 모두 동결하여 향후 몇 달 동안 아프칸 국민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기본적인 서비스의 기회를 탈레반의 새정부에게서 박탈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은 탈레반과 아프칸 국민들을 2차적인 경제전쟁으로 위협함으로써 전쟁의 패배에 대하여 보복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압력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 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보낼 예정인 4억5000만 달러의 자금까지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함께 서방 국가들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8월 24일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G7정상회의를 주재한 후, 새정부에 대한 원조와 승인을 보류한 것이 탈레반에 대하여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서방 정치인들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들과 동맹국들이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과 이해를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레버리지의 수단으로 달러, 파운드 및 유로라는 화폐를 이용하고 있지만, 이는 아프칸 사람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서구 분석가의 말을 읽거나 들으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20년의 전쟁을 통하여 아프칸이라는 국가를 현대화하고 역내의 여성을 해방하며 의료, 교육 및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온건하고 유익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으나, 이러한 상황들이 이제 잔인한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모두 휩쓸려갔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미국은 아프칸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2조 2600억 달러를 지출 했습니다. 이런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우,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약 1조 5000억 달러(75% 수준)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오로지 미군의 점령을 유지하면서 아프칸에 8만개 이상의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하고 민간계약자들에게 비용을 지불하며, 군대, 무기 및 군사장비를 밤낮없이 수송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군사용 지출에 사용되었습니다.

미국이 국가채무의 비용으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자지급에만 5,00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프칸에서 부상당한 미군의 의료 및 장애의 비용은 이미 1,750억 달러 이상이 지출되었고 이들 부상군인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이라크와 아프칸에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대가의 의료 및 장애 비용은 결국 1조 달러를 넘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엄청난 비용을 치른 “아프칸의 재건”은 제대로 이루졌을까요? 의회는 2001년 이후 아프칸의 재건을 위해 1,440억 달러를 책정했지만 그 중 880억 달러는 아프간 “정부군”을 모집, 무장, 훈련 및 급여를 지불하는 것에 사용되었는데, 결국 이들 정부군들은 모두 해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오히려 텔레반 진영에 가담하였습니다. 2008년에서 2017년 사이에 지출된 별도의 155억 달러는 아프칸의 재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 특별감찰관들이 “낭비, 사기 및 남용”한 것으로 문서화되었습니다.

아프칸에 대한 미국 총지출액의 2% 미만인 남은 부스러기는 약 400억 달러 정도로, 그나마 경제개발, 의료, 교육, 기반시설 및 인도적 지원에 지출되면서 아프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혜택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아프칸에서 미국이 지원하여 수립된 정부는 부패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부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공고해지고 조직화되었습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미국이 점령한 아프칸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정부의 하나로 일관되게 선정 발표했습니다.

서방의 독자들은 이러한 부패가 미국점령에 따른 특정한 특징과는 무관하게 별개로 아프칸의 오랜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투명성기구는 “2001년 이후 아프칸 정부의 부패규모가 이전수준에 비해 매우 증가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의 2009년 보고서도 “부패가 이전의 행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치솟았다”고 경고했습니다.

2001년 미국침공으로 권력에서 물러난 탈레반 정부와 1980년대에 미국이 지원한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선구자들에 의해 전복된 소련과 연합사회주의 정부도 부패한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 소련의 연합정부가 붕괴하면서 그들이 이루어 놓은 교육, 의료 및 여성의 권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레이건 정부에서 국방부 관리를 지낸 Anthony H. Cordesman이 출간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타락시켰는가”라는 제목의 2010년 보고서는 사실상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아프칸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미국정부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2013년에 “정기적으로 CIA는 달러를 담은 가방과 배낭 그리고 플라스틱 가방을 뇌물로 아프칸 대통령에 전달하면서 군벌과 정치인들을 매수하도록 지원한 사실”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또한 부패는 서구 정치인들이 현재 아프칸 점령의 구실로 주장하는 교육 및 의료와 같은 분야, 바로 그런 영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교육 시스템은 종이로만 존재하는 학교, 교사,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아프칸의 약국에는 가짜이거나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품질낮은 의약품들이 가득했으며, 대부분이 이웃 파키스탄에서 공급된 밀수품이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부패는 외국의 NGO 및 계약업체에서 일하는 운좋은 아프칸인 급여의 10분 의 1에 불과한 교사들과 공무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부패를 근절하고 아프간인의 삶을 개선하는 일은, 탈레반과 싸우고 꼭두각시 정부의 통제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미국의 주요 목표에 비하여, 항상 부차적인 주제이었습니다. 투명성기구가 보도한 바와 같이, “미국은 협력 또는 정보를 보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밀리에 다양한 무장단체들과 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했으며, 부패에 찌들은 주지사들과도 협력했습니다. 부패라는 고리를 통하여 아프칸 정부는 점차 무기력해지고 미국의 임무는 시험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정부에 제공한 물적 자원은 반군들에게 흘러들어 갔습니다.

미군의 점령지역에서 발생하는 끝없는 폭력과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의 부패는 특히 아프간 인구 4분의 3이 살고 있는 농촌지역에서 탈레반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강화했습니다. 미군이 점령한 지역에 해결할 수 없는 빈곤도 탈레반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미국과 서방동맹국과 같은 부유한 국가의 점령이 자신들을 그토록 비참한 빈곤에 빠뜨릴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위기가 있기 훨씬 전부터 빈곤선의 소득으로 생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프칸인의 수가 2008년 60%에서 2018년 90%로 증가했습니다. 2018년 Gallup이 자체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칸의 “복지” 수준이 전세계에서 가장 낮았습니다. Gallup의 조사내용은 아프간인들에 대하여 기록적인 수준의 비참함을 보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지닌 미래에 대한 전례없는 절망감을 담고 있었습니다.

소녀들을 위한 교육에서 약간의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의 3분의 1만이 초등학교에 다녔고, 십대 소녀들의 37%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프칸에서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가 적은 이유 중 하나는 6세에서 14세 사이 2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빈곤에 시달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프칸 국민들을 빈곤에 빠뜨린 자신들의 역할을 속죄하는 대신, 서방지도자들은 이제 아프칸 공공부문 지원금의 4분의 3을 차지하며 GDP의 40%를 구성하는 필수적이며 절절한 경제 및 인도주의적 지원을 중단시키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과 동맹국은 전쟁에서 패하자 탈레반과 아프칸 국민을 “2차적-경제전쟁”으로 위협함으로써 자신들의 패배에 대하여 보복하고 있습니다.  아프간의 탈레반 새정부가 그들의 “지렛대”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자신이 벌린 경제전쟁의 희생자들을 핑계로 이란과 쿠바의 정부를 악마화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서방 지도자들은 아프칸의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뒤이은 기근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탓하며 탈레반의 정부를 비난할 것입니다.

아프칸의 끝없는 전쟁에 수조 달러를 쏟아 부은 뒤, 미국의 진정한 임무는 이제 그들이 가한 전쟁으로 끔찍한 상처와 외상을 당한 4천만의 (조국을 버리지 않은) 아프칸 인들의 치유와 더불어 가뭄으로 올해 곡물생산량의 40%나 격감하고 코로나-19의 세번 쨰 타격에서 벗어나도록 신속한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미국은 미국은행들에 예치되어 있는 아프칸의 자금인 94억 달러의 동결을 즉시 해제해야 합니다.현재는 해체되었지만, 아프칸 정부군을 지원하고자 할당되었던 60억 달러의 군사지원금을 이제는 인도적 지원금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각종 지원금을 보류시킨 유럽과 IMF를 독려하여 UN 2021 조항에 따라 준비되었던 인도적 긴급지원금 13억 달러(아프칸에 40%를 할당했던)를 곧바로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 미합중국은 영국과 소련의 동맹국들과 힘을 합쳐 독일과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과 패전국 공히 건강하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국가로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식민시대의 인종차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반인도적 범죄(핵무기 투하), 가난한 나라들과 신식민지 관계수립 등 미국의 심각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세계 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미국을 본받고 따르고자 하는 번영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미국이 결국 아프칸에서 보여준 것이 전쟁과 부패 그리고 빈곤뿐이라면, 세계는 이제 미국의 이러한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서구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성찰, 국가주권과 국제법에 대한 새로운 강조,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물리적 군사력을 대체하는 대안,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및 기후재앙와 같은 글로벌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구적 협력을 조직하는 보다 공정한 국제기구 등.

미국은 군국주의와 강압으로 세계를 통제하려는 무익한 시도에 걸려 여전히 허우적대거나, 아니면 이번을 계기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재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세계패권국가의 사라져가는 역할에 종지부를 찍을(페이지를 넘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다시 세계를 군사력으로 지배하려는 야심을 대신하여, 지구촌 미래의 의미있는 새로운 건설에 협력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출처 : WorldBeyondWar(전쟁없는 세상) on 2021-08-30.

벤자민

미국 반전평화운동의 상징적 여성운동가로 Global Exchange 와 CODEPINK: Women for Peace를 공동설립하였으며 “Inside Iran: The Real History and Politic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을 저술함

데이비스

독립적인 언론인으로서 CODEPINK의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으며 “Bloods on our hands: The Americans invasion and destruction of Iraq”의 저자

목, 2021/09/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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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연구소, 15 - 20년 5년간 신종감염병 관련 예산 전체 분석

 

신종감염병 관련 예산이 지난 15년 메르스 사태 이후 크게 급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나라살림연구소가 2월 4일 발간한 '나라살림브리핑 제20호'에 따르면, 15년 신종감염병 직접 관련 지출액 규모가 700억원에서 올해 20년에는 2천억원으로 증가하여 5년간 약 1200% 급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총지출 규모가 36%, 그리고 보건분야 지출이 30% 증가한 것과 대비된다. 

2003년 사스 때, 국가 방역시스템이 잘 작동했다기 보다는 우연한 행운을 통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2015년 메르스사태 때, 큰 피해를 입고 반성한 결과로 해석된다. 2016년 부터 신종감염병 관련된 예산이 급증하고 이러한 추세가 20년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첫째, R&D 사업관련 지출이 총 800억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둘째, 비축물자 구매사업(신종감염병 대응대책 사업)이 약 400억원, 셋째, 신종감염병 문지기 역할인 검역 및 감염관리 사업이 약 180억원, 넷째, 격리시설 및 권역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및 운영으로 60억원, 다섯째, 종합 컨트롤타워 운영으로 약 50억원, 이외에 국제 협력예산, 거점 진단 예산 등이 뒤를 잇는다.

자난 박근혜 정부에서는 주로 시설 및 하드웨어 설치 위주의 사업이 많았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R&D 위주의 내용적 측면의 사업이 큰 폭으로 증액되었다. 전 정부가 갑자기 크게 증액한 사업은 정부가 바뀌면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다. 반면, 신종감염병 관련 예산은 지난 정부가 마련한 하드웨어를 이번 정부가 잘 관리하면서 소프트웨어를 잘 마련하고 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2월 4일 현재까지는 우한 등 외국에서 감염 된 사람과 이를 직접적으로 접촉한 지인 및 가족 등만 감염이 되었고 감염경로가 파악되지 않은 지역사회 감염은 아직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진단이 가능한 방식이 개발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이는 안정적으로 증가되고 관리되는 예산시스템의 성과로도 볼 수 있다. 나라살림연구소 이상민 수석연구위원은 이를 '소잃고(메르스) 잘 고친 외양간'으로 표현한다.

다만, 일반회계와 국민건강진흥기금 및 응급의료기금이 유기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보건복지부 및 질병관리본부에서 비슷한 사업을 중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감염병 괸리기술개발연구(R&D)’ 사업과 ‘감염병 위기대대응기술개발(R&D)’ 사업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다. 또한, ‘감염병 예방관리’ 사업과 ‘감염병예방관리 및 지원’ 사업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으며, ‘감염병 예방 및 관리 종합정보지원시스템 구축 운영’도 신종감염병 관련 정보데이터를 구축한 컨트롤 타워 예산인 ‘신종감염병 위기상황 종합관리’사업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중복 사업을 효과적으로 통폐합 할 필요가 있다고 나라살림연구소는 언급하였다. 

특히, 지난 메르스 사태 때, 의료와 방제는 다르다는 교훈을 얻었다. 즉, 삼성 의료원 등 최고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기관도 방제에는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부가 재정지원을 통해 방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다.

그런데 방제 시스템을 구축할 때, 민간 의료기관을 이용하고 협력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과제지만 최소한의 공공의료기관을 통한 지역별 방제 컨트롤타워도 필요하다고 나라살림연구소는 주장했다.

 

 

나라살림브리핑 제20호 신종감염병 예산 분석 원문 보기

https://docs.google.com/document/d/1Tq4eSkm6iuB8JAk0T746dQNqR2DAER2dQocxgsYPAck/edit?usp=sharing

 

나라살림브리핑제20호_신종감염병예산 분석

제20호 2020. 2. 4(화) 신종감염병 예산, 소잃고(메르스) 잘 고친 외양간 신종감염병 직접관련 지출액 15년 700억원, 20년 2천억원 5년간 1200% 증가 R&D 사업이 가장 큰 규모, 비축물자 구매, 검역관리, 격리시설, 컨트롤 타워 순서 메르스 이후, 이전 정부가 마련한 하드웨어, R&D 등 소프트웨어 마련한 문 정부 작성 : 이상민 수석연구위원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정창수 경희대후마니칼리지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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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2/0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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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코로나19 이후를 이야기하다’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을 대응하고 있는 지방정부의 소식을 비롯해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코로나19와 정책문제에 관한 기고를 전합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잠깐 겪고 넘어가는 감기와 같은, 단순한 ‘교란’ 차원의 위기가 아니다. 자본주의 전체가 이전에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게 되는 변곡점이며,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코로나’의 세상은 이전의 ‘하던 대로(business as usual)’의 세상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회경제 정책의 전환을 준비해야 할까? 이 글은 국가와 조세의 역할 변화, 기본소득의 중요성, 고용 보장제의 검토 등을 제안하고자 한다.

‘불확실성’: 30년대 대공황과의 비교

많은 이들이 현재의 상태를 1930년대의 대공황과 비교하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불확실성uncertainty’이다. 역사적 통계적 데이터와 수리 모델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또한 확률적인 위험 감안의 가치까지 (‘VaR’) 계산이 가능한 위험을 우리는 보통 ‘리스크’라고 부른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기에 데이터도 찾을 수가 없고 또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전제가 성립할지조차 불확실하여 모델 구성도 불가능한 상태, 즉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한마디로 말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미래’라고 표현했던 상태를 우리는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코로나19 사태의 가장 중요한 특징 또한 이 ‘불확실성’에 있다. 감염성은 대단히 높지만 치사율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으며 게다가 노인과 젊은이를 차별하는 경향까지 보이는 이 괴생명체의 출현이 경제와 사회와 세계에 어떤 충격을 가져올 것인가. 예측하고 준비하는 데에 지침이 될 데이터를 찾을 수 없다.

또 이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시스템 중 어떤 것을 어떻게 건드릴지를 알 수 없으므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사람들이 지금 1930년대 대공황을 떠올리는 가장 중요한 유사점이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30년대 대공황과의 단순한 비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을 못 보게 만들 위험이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모델로 하여 정형화된 현재의 위기 대응 매뉴얼이라는 것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30년대의 대공황이 어떤 양태로 벌어졌던가를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자산 시장에서 거품이 터진다. 이것이 신용경색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의 마비 심지어 붕괴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투자가 위축되면서 불황이 시작되고 이것이 다시 실업과 과잉 생산설비로 이어진다.

만성적인 대량 실업으로 인해 사회가 붕괴하고, 이것이 다시 정치적 위기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 시스템이 붕괴하는 나라들이 속출한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세계 질서도 ‘현상타파’ 세력의 대두로 인해 위기에 처하고 급기야 세계대전으로 비화된다.1)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선적인 인과관계’의 위기 대응 모델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자산 시장에서 생겨난 불씨가 진화되지 못하고 금융 시스템, 산업, 노동시장, 사회, 정치, 국제관계 등의 장으로 확산되면서 전체 시스템을 화마에 휩싸이게 만드는 단선적인 인과율의 연쇄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대응 매뉴얼이 생겨나게 된다.

위기가 발생하면 즉시 중앙은행과 국가 재정을 동원하여 무제한의 유동성을 금융 시스템에 제공 혹은 약속할 것이며, 주요한 기업들에 대해서도 자금을 지원하고 악성 부채를 떠안아 준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의 진원지는 ‘거의 항상’ 자산 및 금융 시장이며, 이것이 산업과 사회와 정치로 확산되는 것이 위기의 양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책 또한 그 ‘중심부’인 자산시장과 금융 및 주요 기업들에 돈을 풀어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는 다르다. 불씨는 자산시장에서 시작되어 그러한 한 줄기의 인과율을 따라 차례로 퍼져나가고 있는 게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괴생명체는 2020년 3월 자산 시장, 금융 시스템, 생산 기업, 노동 시장, 사회 영역, 정치 영역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주식시장은 최근 들어 안정세 심지어 예전 수준으로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을 위시한 주요 산업국가에서 노동 시장은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적 위기와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태이다.

지금 상황은 30년대 대공황 이후로 정형화된 위기 대응 매뉴얼로 맞설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유동성을 넉넉히 공급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 시장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별개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쉽게 정치적 위기 나아가 지정학적 위기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미국을 필두로 주요 산업국의 노동 시장은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빈곤율과 자살률이 치솟는 등 각종 사회적 위기가 나타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기초했던 지난 40년간의 세계 질서는 두 나라의 적대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밑둥부터 흔들리고 있다.

국가의 새로운 역할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갖춘 국가가 나타나게 될 개연성을 얻게 된다. 따지고 보면 불확실성이란 인류가 특히 대규모 농경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매년 항상 겪어온 기본적인 존재 조건이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발명한 최초의 장치가 바로 흉년이나 홍수 가뭄을 대비하여 다량의 곡물을 저장해 둔 신전과 거기에서 발전한 초기 국가였다.

모든 기존의 규범이 혼란에 빠지고 아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엄습하는 순간 사람들이 사회의 안녕을 보장하고 사태를 헤쳐나가기 위해 사용하는 제도는 언제가 국가였다. 이번 사태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금융 시장이든 노동 시장이든 그 자체의 자기조정 메커니즘으로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동성과 구매력의 배분에 있어서나 구직자들의 안녕을 지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능력에 있어서나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리쇼어링’을 통한 산업 재배치와 기존 도시 계획의 변화 등과 같은 부분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언제 다시 새로운 물결의 감염과 맞닥뜨릴지 모르는 방역의 과제 또한 전국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에서의 유기적인 보건 시스템을 국민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설할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 당시 영국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머빈 킹의 명언처럼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 뿐’이다. 한 가지 더 확실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국가 역할의 확대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이는 세수와 지출의 운용을 둘러싼 기존의 규범에도 분명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뉴노멀’의 출현도 가능하게 할 수가 있다. 지난 40년간 경제학에서 세금은 ‘경제의 실체’라 할 시장의 생명력을 ‘흡혈귀’에(제임스 갤브레이스) 해당하는 국가가 빨아먹는 ‘필요악’과 같은 것이므로 줄이면 줄일 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이 지배해왔다.

그 이전 보조금으로 주어지던 인센티브는 그래서 이제는 세금 감면으로 대체되는 일이 벌어져왔다. 지금 대한민국의 세금제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세제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각종의 세금 감면 조치로 덕지덕지 기워져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앞으로도 용납될까? ‘조세 국가’를(슘페터) ‘흡혈귀’로 보고 여기에 균형 재정의 원칙을 더하여 지출 최소화를 지향하는 ‘작은 국가’가 앞으로도 받아들여질까? 이 ‘작은 국가’라는 원칙이 무너지면 균형 재정의 원칙도 또 조세 국가는 ‘흡혈귀’라는 원칙도 연쇄적으로 흔들릴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의 입장에서는 세금이란 지출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적 행동을 장려하고 그렇지 못한 행동을 억누른다는 원칙으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균형 재정이라는 신화를 벗어던지고 사회적 필요가 있다면 과감하게 지출을 늘리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후생을 증대시켜서 중장기적으로 재정의 균형을 맞추는 관점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세입에 세출을 맞추는’ 기존의 재정 정책fiscal policy의 관점을 벗어나서 사회적 필요가 있다면 과감하게 지출하고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고 ‘융통’하는 고전적인 공공 재정public finance의 관점을 회복하도록 촉구하고 있다.2)

다시 말하지만, 지금 전 세계 자본주의 문명은 지구적 거시적 규모에서나 지역적 미시적 규모에서나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서 가장 해로운 것은 어제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던 상식들 – 균형재정, 규제완화, 최소국가, (금융)시장의 완전성 등등 – 에 머리와 손발이 묶이는 것이다. 지금은 과감한 상상력과 대담한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각급 정부를 이끄는 ‘국가 지도자들statesman’은 바로 그러한 상상력과 행동의 과감성과 대담성을 보여줄 위치에 있는 이들이며 또 그러한 의무가 있는 이들이다.

이 글에서 설명한 것 이외에도 ‘지역에서의 보건 커먼스commons’의 조직이나 마을 단위에서의 생산 활동 커먼스 – 도시 농업, 메이커 스페이스 등등 – 의 조직 등 여러 다른 제안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눈과 귀를 넓게 열고 활발히 의견을 나누며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각급 정부의 수장들이 떠맡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글: 홍기빈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 각주

1)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참조.
2) <균형재정은 틀렸다: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 랜덜 레이 저, 홍기빈 옮김, 책담 출판사 참조.

목, 2020/06/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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