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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 뭔가 하도록 만드는 ‘빅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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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 뭔가 하도록 만드는 ‘빅 아이디어’

admin | 목, 2020/12/03- 00:53

이 책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씌었다. 희망이란 말은 ‘위기, 희망,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부제에도 들어있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그 와중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더욱 심해지는 불평등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쳐선 안 된다. 그리고 그런 희망의 총합이 바로 ‘생태문명’이다.

17명의 공동저자들은 현재 산업문명의 문제를 진단하고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구 전체로 시야를 넓히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자고 촉구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문명들은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문명의 붕괴에 따른 위험성은 낮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다. 이 단일 문명이 과거 다른 문명들처럼 붕괴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앤드류 슈왈츠,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지구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산업문명은 지구의 자원이 무한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만약 지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물종도 멸종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것도 멸종한 생물종을 다시 복원시킬 수 없다.”(이재돈, 천주교 신부))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현재 궤도대로 살면서 소수 사람들이 일시적 과소비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생태문명이라는 비전을 수용해서 모든 인간이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 제도, 사회 인프라의 전환을 이루자는 공동의 목적에 동참할 수도 있다.”(데이비드 코튼, 경제학자)

그런데 이런 궤도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는 한 걸까. 생태문명 진영에서는 정책적∙기술적 해법과 함께, 근본적인 개념의 수정을 제시한다. 자연고갈, 멸종, 기후위기에 이른 현대 산업문명의 기초에 놓인 생각의 뿌리를 파고들어가 어떤 생각들이 현재의 문명을 만들었는지 밝힘으로써 궤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이제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 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필립 클레이튼,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생태문명에 대한 대표적 오해는 첨단 과학기술을 거부한 채 과거 농경사회로 ‘퇴행’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필립 클레이튼) 이 책에는 과학지식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요청하는 사회적 변화는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최근 생물학과 임상의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믹스(omics, ‘체학’이라 번역되며 생명과학에서 분자나 세포 등의 집합체 전체를 뜻함)라는 분야가 등장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전체학, 단백질체학, 후성유전학, 대사체학, 연결체학 등이 그 세부 학문분야들인데 단백질, 신경세포 등 몸속의 여러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대한 패턴을 분석하여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접근법이다. … 이미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 전체적 관점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구현하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가고 있다.”(김홍기, 서울대 교수)

문제는 생태과학, 생물학 등에서 두드러지는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사회제도와 시스템에는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관계적 사고의 부재로 인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부분들이 심층에서 충돌하거나 모순된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시스템 붕괴를 향해가는데, 대표적으로 경제와 교육이 그렇다.

“우리는 유한한 생태계에 속해 있고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지구 자원의 소비가 변곡점에 이르면 지구 시스템의 회복력이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을 맞이한다. 특히 사회경제 시스템이 사용하는 자원흐름의 규모가 커지고 독성이 강해질수록 자연 생태계의 부담과 피해는 커진다. 그럼에도 경제학은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언젠가 우리의 미래세대는 생태와 경제가 하나의 동일한 과정임에도 당시 세대가 왜 그렇게 생태와 경제의 연관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놀라움과 의문을 가질 것이다.”(정건화, 한신대 교수)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에 그렇다. 대학이 세계의 공동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의 모든 서식자들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이 중에서도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기 어렵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마커스 포드, 철학자)

따라서 현재 문명에서 가장 필요한 가치는 서로 연결되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 세계, 우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통합적으로 사유해온 인문학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는 인문학의 협소화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인문학의 목표인 ‘인간다움’이 갖는 의미는 인간과 다른 존재의 연관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좁은 정의를 벗어나 상호 연결된 존재로서의 진정한 인간다움을 탐구해야 한다. 환경인문학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인문학의 응답으로, 2000년대 이후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 문화∙생물 인류학, 문화지리학, 정치생태학,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연구, 젠더연구, 종교학 등 다양한 인문학과들 사이의 연결을 추구하는 지적 프레임워크로서 등장했다. 환경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점차 고조되는 생태위기와 생태적 인식의 중요성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위기라는 두 가지 문제는 과학기술이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려우며, 인문학이 환경문제에 개입하고 대중의 의식을 바꿔놓을 수 있다.”(한윤정, 문화연구자)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재설정된 세계,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생태문명이라는 대의에 맞춰 스스로의 존재가치와 목적을 조정하고 변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탄생하는 세계를 저자들은 ‘아름다운 공동체’ 혹은 ‘커먼즈’(공유)라고 부른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구성하는, 폭넓은 감정들로 이뤄진다.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on),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제이 맥다니엘, 철학자)

“커먼즈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Ubuntu)의 사상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 이를 초기 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소 연구원)

『생태문명 선언』은 미국 생태문명연구소와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목적으로 주최한 컨퍼런스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마커스 포드의 경계한 바, 각자 다른 전제를 가진 분과학문의 대표들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기존 학계의 컨퍼런스와는 다르다. 대부분 발표자는 서로의 삶과 생각을 잘 알고 이해한다. 그래서 생태문명이라는 희망을 공유하고, 그것이 성립하기 위한 기본조건인 관계성과 연결성을 의식하면서 각자의 분야와 관심사 속에서 사려 깊게 펼쳐놓는 대안들이 조각보처럼 모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태문명’이란 “환경운동단체, 시위, 행동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모두에 깊이 의존하면서도 ‘큰 그림’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를 보완하는, 장기적으로 확장된 현실주의”이며 “뭔가 하도록 만드는 빅 아이디어”(필립 클레이튼)이다. 문명적 변화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이런 공부와 실천의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독자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한윤정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 디렉터∙다른백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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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전염병 경보단계 중 최고 위험 등급에 해당하는 ‘팬데믹’을 선언했다. 현대 문명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위기감이 만연했고, 자멸로 치닫는 인류의 비극적 서사가 매체를 점령했다. 과연 대안적 미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근대문명과 첨단기술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요청을 다시 소환하며 생태문명이란 무엇인지, 생태적 원리로 우리 삶을 재구성할 필요성과 생태학에서 배우는 상호의존성의 철학과 역학은 무엇인지, 나아가 왜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명주의가 중요한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또 하나의 지구는 없기 때문이며, 우리 곁에 바싹 다가온 대안적 미래는 생태문명에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 디렉터이자 문화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한윤정 박사가 엮고 옮긴 『생태문명 선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포괄적인 답을 제공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2017년 11월 미국 클레어몬트에서 열린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 2018년 10월 경기 파주에서 열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생태적 전환 컨퍼런스’ 그리고 2019년 10월 서울에서 개최한 ‘생태문명을 향한 전환: 철학부터 정책까지’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내용들을 선별해 재구성한 것이다. 세 번의 컨퍼런스는 과정사상연구소, 생태문명연구소, 중국후현대발전연구원, 지구와사람, 서울대-한신대 포스트휴먼연구단 등이 공동 주최했다.

 

저자소개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생태문명연구소 공동창립자이자 부대표, 과정사상연구소 사무국장. 종교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생태문명을 향한 연대활동을 조직한다.

이재돈-천주교 신부, 가톨릭대 겸임교수. 종교계 환경운동을 이끌면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장,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장을 지냈고 한국토마스베리협회를 창립했다.

데이비드 코튼(David Korten)-리빙이코노미즈포럼 대표, 로마클럽 회원,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동남아국가들의 경제개발을 지원했으나 그 허상을 깨닫고 지역사회와 살아 있는 지구를 위한 경제를 주창했다.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교수. 과학도로 출발해 종교학, 윤리학으로 영역을 넓혔다. 생태문명연구소 창립자이자 대표로 지속 가능한 문명을 위한 사회적 변화를 모색한다.

왕쩌허(王治河)-철학자, 중국후현대발전연구원 대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중국에 소개했으며 중국과 미국의 학술교류를 통해 중국 지방정부와 학계의 생태문명 정책과 연구를 지원한다.

존 B. 캅 주니어(John B. Cobb Jr.)-철학자, 신학자, 환경사상가.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으며 과정사상연구소를 세웠다. 화이트헤드 철학을 신학, 생물학, 경제학, 윤리학, 생태학에 적용했다.

마커스 포드(Marcus Ford)-노던 애리조나 대학에서 환경인문학을 가르쳤으며 현대 대학의 문제와 생태문명을 향한 교육개혁 방안을 제시하는 연구, 집필을 해왔다. 플래그스태프에서 대안대학을 운영한다.

김홍기-서울대 치의학대학원 치과경영정보학교실 주임교수. 인공지능과 인지과학 전문가로 의생명지식공 학연구실(BIKE)을 운영하며 데이터 중심의 새로운 융합과학 패러다임을 연구한다.

정민걸-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 생태유전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유전학회, 한국생태학회, 한국환경철학회, 대한하천학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환경과학과 환경철학을 접목하는 연구를 해왔다.

한윤정-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 디렉터, 문화저널리스트, 전환연구자.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으며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과 생태문명을 주제로 컨퍼런스 조직, 정책 연구를 하고 있다.

제이 맥다니엘(Jay McDaniel)-철학자, 헨드릭스대 종교학자 교수. 웹사이트 ‘오픈 호라이즌즈 운영자’. 생태문명의 문화적 측면을 제시하며 지속 가능한 공동체, 종교간 협력을 위한 활동을 펼쳐왔다.

샌드라 B. 루바스키(Sandra B. Lubarsky)-노던 애리조나 대학과 애팔래치안 주립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를 지냈다. 아름다움과 지속가능성, 공적 가치로서 아름다움의 부활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집필한다.

정건화-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노동경제학에서 시작해 사회적 경제, 생태경제학으로 관심을 넓혀왔으며 지역순환경제가 주요 연구분야이다. 희망제작소 부소장, 서울연구원 이사를 지냈다.

잭 월시(Zack Walsh)-생태문명연구소 및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소. 과정철학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주체성, 생태문명의 토대로서 커먼즈, 마음챙김과 명상영화 연구를 해왔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로컬퓨처스, 국제지역화연합의 창립자이자 대표. 글로벌 경제와 국제개발이 지역사회와 경제,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지역화, 행복의 경제학을 전파한다.

김지석-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 전 주한영국대사관 선임기후변화에너지담당관. 경제와 환경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며 친환경자동차, 태양광발전 등 기후대응 방안을 제시해왔다.

황윤-<잡식가족의 딜레마> 영화감독.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왔으며 동물권리보장,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 채식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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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화석연료 중심의 성장과 소비 경제모델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증가에 대한 반응은 미디어의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보도 차단과 교육과 정책토론에서의 심각성 경시풍조로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사회는 물론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헌신적인 기후 운동가들, 심지어 구속되거나 신체 부상을 입을 각오가 되어 있는 기후환경운동가들조차도 여전히 석탄이나 천연가스로 가열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디젤 동력 화물선과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트럭으로 배달되어 석유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야채를 먹습니다.

시위를 조직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사용되는 컴퓨터와 전화기같은 부품들도 석탄 및 다른 유독물질을 사용하는 인도, 중국, 태국의 공장에서 제작됩니다. 함께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연결시켜주는 인터넷을 작동시키는 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퇴직기금은 화석연료 수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회사의 주식에 묶여 있습니다. (관련성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음)

화석연료산업을 비난하는 시위표지를 작성하기 위해 석탄으로 가동되는 말레이시아 공장의 펜 부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과 석유연료를 사용하는 트럭과 비행기로 운송된 일회용 펠트펜을 사용한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환경시위는 숨겨진 진실에 대해 주목하지만 행진이 끝나면 우리는 화석연료를 피할 수 없는 악몽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육식을 선택 또는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와 성장의 파산 개념과 일치하는 산업경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화석연료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요건이 주어진다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시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화석연료와 전혀 연관되지 않은, 또는 관련한 산업으로 발생한 돈과 관련 없는 경제 체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것부터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것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도덕적 시민들의 시위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추출적이고 약탈적인 경제 질서의 중간에 있는 약간의 환경보호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대안 경제의 문을 열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시위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는 세계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화석연료를 100% 사용하지 않는(FFF) 지역사회 형성이어야만 합니다. 초기단계에서 100명 또는 500명만 지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성단위를 만든다면 대중에게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는 화석연료 사용금지에 기여하고자 하는 투철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언행을 일치 시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단지 슈퍼마켓의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플라스틱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써 말입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단계는 즉시 실행 가능합니다. 냉소적인 정치가들이 20년 30년 걸려 실행할 탄소중립 경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FFF 커뮤니티 창조

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은 초반에 상당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며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제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임계질량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FFF 커뮤니티가 음식, 에너지, 협동조합의 재정, 또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은행들에 대해 100% 독립적일수는 없기에, FFF 커뮤니티는 오늘날의 단체들이 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껏내며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설립 초기 단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는 전 세계의 다른 지역사회에 모델이 될 것이며, 화석연료와 관련된 자금 의존으로 인하여 실행단계에 옮길 수 없었던 저널리즘과 교육시스템을 생산할 것입니다.

소규모 FFF 커뮤니티가 다국적 투자은행 및 석유회사를 인수 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및 정치 플레이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수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화석연료 문제에 맞서는 데 있어 모호하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은 대안이 아닌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화석연료 사용 종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자료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에 제시된 2050년 탄소 중립 경제 창출은 터무니없이 늦은 시기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홍수와 폭풍, 해수면 상승, 사막 확산, 기아, 견딜 수 없는 폭염, 지구에 남아있는 부족한 자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인해 수십억의 인간(및 다른 종)이 죽는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몇 년 또는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주류 미디어는 기후 비상사태에 대한 시위와 정부의 선언문을 다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지붕 위에 태양 전지판이 설치되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식품을 현지에서 유기농으로 생산하고 태양열 및 풍력을 이용하여 모든 건물을 완벽하게 단열시키며, 100 %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중교통의 동력을 공급하게 하는 법률은 (시행은 고사하고)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와 서로를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FFF 제품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약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100% FFF 수송체계가 설립될 때까지). 만약 체포될 위험까지 감수하는 열렬한 환경운동가들이 있다면, 그 중 FFF 공동체에 기꺼이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멤버와 공동체간의 협약은 진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 구성원들과 커뮤니티 간에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효한 계약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FFF 공동체는 애초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피상적인 소비문화, 분열, 단편적 사고와 같은 문화에 일치하여 운영될 수 없습니다.

신규회원은 평생동안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공동체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FFF 커뮤니티에 자산을 위탁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형태의 깊은 사회적, 윤리적 약속 또한 가능합니다.

 

자본주의와 글로벌 농업: 포드(Ford)부터 몬산토(Monsanto)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화석연료해방 공동체(FFF)는 초반에는 작은 범위로 시작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지속 가능한 접근법을 채택했을때 어떠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해당 모델이 거의 없고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FFF 커뮤니티 경제의 핵심은 100% 유기농 식품을 생산해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수송하는 유기농 농장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지역사회의 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다양성이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화석연료 자유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음식들은 집, 옥상, 인근 빈 공간에서 재배되거나 지역 농장에서 들여올 것입니다.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서부터 해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웃과 함께 협력하는 행위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권력가나 재력가들을 로비하거나 환경 NGO 단체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화석연료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플라스틱,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생산된 제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운송 된 제품이 없는 상태)은 FFF관련자들에게 결정적인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래가 아닌) 농부와 시민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공동 시장에서 식품을 판매(또는 물물 교환을 통해 교환)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장은 화석연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교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기 농업 공동체는 전혀 급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기후를 파괴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계나 인공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공동체를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지만, 그들을 제외한 미국의 지역들이 세계무역과 연관된 산업화된 비정상적인 농업 생산 시스템을 수용하는동안 이 공동체들은 지속적인 경제를 추구해오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유기농업 방식은 농업과 유통에서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일자리를 제공 할 것입니다. 지구의 파괴에 기여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아 그 노력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행동입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음식 및 기타 물품에 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FFF) 운송수단의 창출입니다. 초기에 제공된 FFF 운송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심하게 제한적이더라도 시민들은 그것을 불쾌한 불편으로 간주하지 않고 도덕적인 용기의 서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정치인들은 천연가스, 전기 및 심지어 원자력이 당연히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FF커뮤니티의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제조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제조업에 관하여 완전히 다시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삶에 필요한 물품의 생산 및 사용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어떻게 물품들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하여 반드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박스럽고 사치품과 같은 제품들의 마케팅과 소비를 완전하게 종료해야 합니다.

FFF공동체의 제조업은 100% 현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지역 및 세계적으로 공동체를 연결 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100% 쓰지 않는 운송체계를 갖추기 전까지).

화석연료를 제거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물품을 사용을 줄여야 하며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있는 품목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0-50년 이상 지속될 책상과 의자, 책장과 도마, 셔츠와 스웨터, 컵과 냄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경제의 이러한 변화는 상업적인 소비 중심 문화의 종식과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제작된 제품에 중점을 두며, 이미지가 아니라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FFF 커뮤니티에서 이케아(IKEA)나 갭(GAP)과 같은 관련 상품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00% 화석연료 비사용 제품의 생산과 유통은 우리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에게 장기적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제조는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내구성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우리 환경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쟁, 자유 무역 및 산업화의 위험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장에 관한 잘못된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개념, 태도의 변화

FFF 지역사회는 화석연료에 관한 선전과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충실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기업의 사상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기술과 거버넌스의 진보적 혁신이 아니라 태도의 혁명에서 시작됩니다. FFF 공동체는 자동차를 홍보하고 분별없는 음식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가 없는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은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있어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위협임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짚 깔기, 유리 재활용, 금속 해체, 비료사용을 위한 인분 수집, 카트를 통한 식품 수송, 또는 (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자전거를 통한 전기 생산 활동이 엄연히 도덕적인 것이며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인식이 잡혀있는 문화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상업 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만족감과 즉각적 만족에 대한 숭배는 도덕적 철학, 절제, 겸손 및 정직한 선행으로써의 사회적 참여에 기초한 문화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하게 “진보적인”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겸허, 절제, 지적 및 영적 참여의 중요성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와 결부됩니다. 이러한 커뮤니티가 커질수록 전 세계를 지배하는 상업 문화에 대한 대안이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전기, 소비, 재산의 막대한 증가, 도시화 및 개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에 의해 인간의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현대의 관념에서 비롯된 잘못된 추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 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시스템 생성에 도전하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친환경화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에 입각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생산과 유통에 뿌리를 둔 경제의 겉치레적인 변화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화와(그리고 영화 전후에 나오는 광고들) 뉴스 보도에서 강조하는 현대화의 신화 뒤에 감추어진 체계를 반드시 가시화해야 합니다. 사회의 전반에 깔려있는 생각은 아이폰을 사용하고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비싼 자동차나 전용 비행기로 전 세계의 수도에서 수도를 누비는 사람들,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나르고, 공공장소를 청소하고, 우리의 식량을 재배하며 요리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무래도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되는 자원낭비, 화석연료로 인한 환경오염,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된 부는 상업적 미디어에서 마치 선량한 도덕적 행동처럼 보여집니다.

FFF 공동체는 부동산, 개인 재산, 소유권에 관한 오해 소지가 많은 개념에 대해 완전히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언론에 의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계약법과 기업 법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돕거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커뮤니티 회원 간 구속력 있는 계약이 없습니다. FFF 커뮤니티는 이러한 계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FFF 공동체에 가입하여 화석연료의 사용을 끊고자 하는 충성 서약이 회원자격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동산과 소수의 사람에 자본이 집중되기 전에 유럽, 아시아, 미주 지역의 농업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마을 계약과 동등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을 계약은 상징적이라기보다는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각 개인이 식품, 도구, 가구, 운송 및 거버넌스의 생산에 기여해야하는 책임과 구성원들에게 평생동안 커뮤니티를 갖추어준다는 공동체의 책무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거버넌스 중심 환경과 인간 정착의 관계를 형상하는 이로쿼이 부족 (Iroquois Nation)의 헌법 부활은 금융, 재산권 및 부동산에 중점을 둔 법적 왜곡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됨.

현재 혁신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항의에 참여하는 동시에 화석 연료와 관련된 수익을 올리는 회사에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없애고 모든 투자가 지역사회 활동과 관련이 있고 FFF 경제 창출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해야합니다.

FFF공동체 회원가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어야 하며 자산, 교육 수준, 문화 감수성 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Teslas를 구입하거나 태양 전지판 패널을 구입할 수 있는 상류・중산층 사람들에게 포커스된 녹색 경제가 인류를 구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과 주변 매체를 통하여 기후위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빈곤층과 노동 계급에게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응답에 참여한 대가로 양질의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 디너, 억만장자의 기부 및 기타 활동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연설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만의 FFF 화폐를 만드는 것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화폐는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나타내며 지역 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및 기타 제조 제품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사용에 극히 제한적일 지라도 이 통화가치는 화석연료와 연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즉, FFF 화폐는 지역경제 전반에 걸쳐 사용이 확대되고 결국 세계경제로 확장됨에 따라 화석연료와 연결되지 않고 유사한 독립적 인 금융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세계무역과 기후변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침묵입니다. 투자은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구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탄소배출과 공장지대 설립을 위한 산림 및 정글파괴, 자연을 희생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공장의 설립으로 인해 엄청난 환경의 파괴를 가져다줍니다. 세계 무역에서 추진되는 식량(특히 육류)의 비생산적인 대량 생산은 토양, 산림 및 강과 바다에 장기적인 피해를 줍니다. 또한 식품 및 제품의 생산 및 유통에 대한 산업적 접근 방식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전례 없는 부의 집중을 조장하였습니다. FFF공동체는 시민들에게 이 파괴적인 악몽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최초로 제공합니다.

 

결론

우리는 미디어와 토론회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관행을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배출량은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탄소 발자국이 적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쟁을 목격하곤 합니다.

개인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데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경제의 깊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매일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특정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세계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문화는 즉, 최선의 길은 두 가지 전략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선택을 지역 사회의 선택으로 만들고 그 지역사회를 대체 경제의 기초가 될 경제 단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화, 2020/03/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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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컨이 양제츠를 바라보며 전세계에 선언했다. “차이나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이야.” 그런 속보이는 연기가 아니라, 진솔하게 덩치 큰 오랜 이웃에게 묻고 싶다. 새로운 ‘중화문명’은 어떻게 홍콩과 신장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가 ? 한·중 양국 간에 중화주의를 넘어선 공정한 관계 맺기가 가능할까?

방법으로서의 자기 – 샹뱌오와의 대화

한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학자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공공지식인’이라 불리던 일군의 학자들이 중국에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하방을 경험한 ‘지식청년세대’로 불린다. 시진핑도 이들 세대에 속한다. 대표격인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汪暉는 “중국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를 한국의 창비에서 중국보다 2년 먼저 발표했다. 굴기한 대국의 자의식이 커지는만큼 옛 친구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탓인지, 아니면 자국내 검열의 강화탓인지, 지식인들의 왕래가 드물어졌다. 우선 중국내 목소리가 작아진 것을 보면 후자의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이제 대화의 상대가 사라진 것일까?

중국의 스타문화인 쉬즐유엔이 후지식청년세대를 대표할 새로운 공공지식인으로 샹뱌오를 불러냈다. 2019년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뷰 프로그램 ‘13야오十三邀’에 초청한 것이 우선 세간의 화제가 됐다. 동시에 기획된 대담집이 작년에 출간된 <방법으로서의 자기>이다.

“13야오 샹뱌오 인터뷰 동영상”

https://v.qq.com/x/cover/mzc00200c5sxk4p/o3026pze76s.html

제목으로부터 아시아의 근대성을 선구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던 일본의 루쉰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시작하는 일련의 책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책은 매우 평이한 언어로 기술돼 있다. 학부 2학년부터 6년간 작성한 민족지를 기초로한 석사논문 <경계를 넘나드는 커뮤니티 – 베이징‘저쟝촌’의 생활사>가 단박에 중국인문학의 고전이 돼, 베이징 대학의 천재로 불리던 현 옥스포드대학 인류학과 교수 샹뱌오는 대중과 소통할 때 난해한 현대 서구이론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향신鄉紳‘의 관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교조적 논리가 아니라 자기의 부근에 존재하는 문제에 개입해, 생활의 맛이 우러나는 언어로 독립적인 서사를 만든다. 그로부터 출발해 세계에 대한 비젼을 그려낸다. 글로 쓰는 대신 대담 방식을 사용한 것도, 이렇게 명료해진 개념만이 자신의 목소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샹뱌오의 석사논문이 유명해진 것은 관점의 전환때문만은 아니다. 샹뱌오가 6년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개입하며, 세심히 기록하고 분석한 것은, 철옹성처럼 보이는 중국의 국가 시스템의 구멍을 비집고, 중국의 유동하는 ‘민간’이 만들어낸 역동성있는 소사회였기 때문이다. ‘민간의 자치와 결집‘이라는 근사한 명제만으로는 담기 부족한 날것의 생명력이 느껴지는데다, 전통적 인간관계에서 진화한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몇년전 출간된 개정증보판에 추가된 서문에는 중국 사회의 규범화, 제도화가 이미 근대적 위생의 관념으로 이 미생물적 사회를 정리해버렸다는 암울한 보고가 추가돼 있다. 이것은 국가와 자본의 동학의 결과이지만,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근대화의 귀결로 보는 것이 더 공정할듯 하다. 전가의 보도처럼 신자유주의나 전체주의의 유령을 소환할 때마다, 모든 서사의 디테일이 사라지고, 비극적 허무주의 아니면 공허한 혁명의 구호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 어찌보면 산만해 보이는데다 구멍이 뻥뚫려 있다. 80년대 중국 전역은 개혁개방의 ‘문화열’로 온 나라가 들떠있었다. 80년대 후반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술회하는 그의 대학생활은 92년 시작되는 캠퍼스 생활에 앞선 일년간의 병영 군사훈련으로 이어지는데, 중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홍콩문제도 입질이 오기에 낚싯대를 당기니 빈바늘만 딸려온다. 책에 인용된 과거의 글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고 나서야 무릎을 쳤다. ‘Occupy Central 센트럴 점령’당시 홍콩을 근거리에서 관찰하던 그는 중국내의 음모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천안문사태의 후과가 홍콩사태의 한 원인이 됐음을 밝히는 동시에, 두 체제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중층적 역사를 근거로, 홍콩시민들의 급진적 요구도 자제를 당부한다.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비록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연구대상인 동시에 스스로 유동하는 경계인인 그의 자리가 지금은 꽉 막혀버린 중국의 안팎을 연결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둔다. 정치경제학과 문사철에 기반한 하나의 대서사에 익숙하던 선배들과 달리, 인류학자인 그는 생활속의 수많은 작은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묘사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을 제안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탈출구 없는 초경쟁사회가 된 중국에서, 그는 개인과 국가만 존재하는 가운데 중간이 되는 사회 ‘부근’이 사라진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풀자면 곁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공동체이고,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향신은 마을의 어른이다. 동아시아 인류학자들의 관점이 모이는 지점에서 다시 대화가 재개될 것이다.

 

*이 글의 축약본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얻어, 다른백년에도 옮깁니다.

 

김유익

목, 2021/07/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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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국인들이 지난 세기 동안 중국공산당 CPC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고, 7월1일 목요일을 가하여 새로이 영광스러운 백년의 세기를 기대하면서, 공산당의 본래 임무에 대한 성찰까지도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로 변하여 중국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적 열망에 충실하고 우리의 사명을 굳건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는 글귀는 1921년 당의 여정으로 시작된 상하이의 CPC 제1차 전국대표대회 현장 및 전국의 모든 박물관과 유적지, 중앙과 지방정부의 축하모임 연회장소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디에서나 방문객이 줄을 서서 열광하며 제창하는 숭고한 격언입니다.

상기의 격언은 아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1) 왜 중국인들은 출발부터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었을까?

2) 공산당은 어떻게 역사의 온갖 시험을 이겨내고 중화민족을 위대한 부흥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시진핑(習近平) 중앙당 총서기는 2017년 19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보고서를 발표할 때, 상기의 격언을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중국공산당 본래의 열망과 사명은 중국인민의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민에 기반한 정당성 

중국이나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서사는 통상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를 통치하는 당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제기해 왔습니다. 서방식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서구의’민주주의’ 기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고 따라서 중국의 정치체제가 국민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서양식 1인1표 선거와 다당제도 없이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중국은 오래 전에 거의 모든 종류의 서구 정치체제를 연구하고 시도했습니다. 청나라 말기(1644-1911), 외세와 식민주의의 침략에 맞서 끝없는 국내혼란과 굴욕적인 실패로부터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 엘리트와 혁명의 선구자들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아나키즘, 파시즘을 포함한 많은 서구 정치사상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이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에 도입되었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인 Zhang Weiwei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외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며 “입헌군주제에서 다당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이들 중 어느 것도 중국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고 혼란을 끝내는 데 효과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 중 어느 것도 대다수 중국인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결국 최종선택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을 당시는 겨우 50명 내외의 당원과 대의원 1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즉, 중국적 특성과 융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는 한가지 매우 독특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인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오 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1세대 지도부의 창의적인 탐색과 혁신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주도세력에 농민을 포함시켰습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약 80-90%가 농민이었습니다. 또한 불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도시화는 도시지역에서도 엄청난 수의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기근에 더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혁명이론에 대한 마오의 혁신적인 공헌은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맑스주의를 현지화하거나 “중국화”한 것이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련이 지지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의 정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정통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도시노동계급이 주도해야만 합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CPC는 마오 쩌둥의 지도력을 승인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중국화하기로 결정했고, CPC의 용감한 시도는 결국 당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던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대변하는 대표자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역사상 농민 봉기세력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 아니었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해외교육의 배경을 가진, 상하이와 베이징을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역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국방대학 Jin Yinan 교수는 최근 연설에서 “CPC는 가장 발전된 도시에서 가장 진보된 사고를 견지하였으며, 가장 발전된 지역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선진사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전사들을 무장시키면서, 중국역사의 농민봉기와 같은 개별집단의 이기적인 이익보다,는 중국인민 모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현대적인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자력갱생의 역량

혁명시대뿐만 아니라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시대에도 중국공산당의 자력갱생 역량으로 여러 면에서 동유럽국가들의 공산당과 다른 경로를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CPC는 격랑의 역사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후 산업과 경제의 세계화라는 기회를 포착했으며,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자기혁신(교정)의 실현을 통하여, 대다수의 인민이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중화민족의 위대한 잠재력을 활성화했습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CPC는 중화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이며, 이것이 바로 1949년 이전에 중국을 통치하고 태생적으로 자본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 봉건주의자들의 중국인민에 대한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관료의 이익에만 봉사했던 이전의 정치집단과 분명하게 다른 이유입니다.

“중국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구호 – 이것이 당 본연의 염원이며 국내외에 산적한 적들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투쟁에서 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구자들이 견지해온 신앙의 힘입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에서 유래하고 인민과 공생하는 인민의 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CPC의 특성입니다. Zhang 교수는 CPC가 서구 정당과 완전히 다르며, 이들은 단지 국가내부의 일부집단 또는 특정계급, 민족단위 또는 부문의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취약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회를 마비시키고 양극화시키는 반면에 CPC는 중국의 모든 인민들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이런 특징이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억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1인1표로 선출된 1인1표 정부와 다당제, 이른바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서방은 왜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을까요? 왜 많은 서구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출한 정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온라인에서 반지성적 음모론을 퍼트리고 있을까요?

중국공산당은 초기부터 경제성장보다 인민의 생명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중국이 팬데믹에서 다른 국가보다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중국인들 모두가 정부를 신뢰하고 과학적 지침과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공산당의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사명

국가는 주어진 의무를 완수하려는 열망을 입증해야 합니다.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달하지 못하면 원래의 포부와 약속은 무의미한 슬로건에 불과합니다.

사회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서 선택하였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결국 자국의 국민에 의해 버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단계에 따라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완고하게 인쇄된 책의 교조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과거에 혁명을 이끈 올바른 이론을 버리고 현명하지 못한 서구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CPC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상기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혹은 실수를 범하였어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 동안 CPC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동맹을 격퇴하고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침략의 위험”을 해결했습니다. 중국이 서구의 따돌림과 굴욕을 효과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독립자치국가가 된 것은 청나라 말기 이후 처음입니다. 세계 최강국이 쏘아 올린 미사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침략이라도 자기 영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CPC는 새로운 임무가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2세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핵심인 덩 샤오핑은 ‘현명하지 못한’ 일방적 서구화를 추진하지 않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재차 용감하고 자신있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이론을 혁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CPC는 경제의 세계화를 수용하고 현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화민족과 인민에게 경제적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CPC의 영도 하에 14억 인구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며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수억에 달하는 인민들의 빈곤을 퇴치하였으며 외부의 도발로부터 주권을 수호할 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유일 패권 초강대국의 위협에서 지역의 평화를 효과적으로 수호하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고속철도 네트워크와 가장 발전된 5G 서비스를 구축하고, 우주정거장을 운영 및 건설하고, 화성 탐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CPC는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도 전세계의 많은 저변국가들, 특히 서구중심의 세계화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통해 중국개발의 경험과 이점을 공유하고, COVID-19 대유행 및 지구온난화와 같은 글로벌 과제에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인류의 미래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동아시아의 병자”로 묘사되었던 가난하고 늙고 약한 나라가 불현듯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낙관적인 예측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만에 많은 분야에서 서구와 어깨를 겨누며 일부 분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이룩한 모든 성과를 통하여, 본래의 사명을 지키고 성취하며 염원을 견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제 인민과 함께 가장 근본적이며 미래의 사명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중화민족은 수많은 재앙 및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지만, 중국에는 “고난이 많으면 민족이 부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은 후 민족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희생이 무의미할 것이기에 부흥은 중국인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꿈입니다.

100년 전의 굴욕적인 역사는 중국이 통일, 주권, 영토보전 없이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평화로운 발전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유혈의 고통스런 교훈을 통하여 반복하면서 중국인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전히 ​​중국의 발전권을 빼앗고자 하지만, 100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는 중국이 아니라 서구열강 자신들이 불안을 앉고 있는 형세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고 배우기를 거부한 많은 서방국가들은 국가부흥이 중국에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국인민에게 주권과 국가통합 그리고 영토보전이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正道”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방국가들이 중국인들이 간직한 국가부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대한 국가로서의 중국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중국인을 올바르게 대하고 중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중화민족이 100년 전에 잃었던 지위와 존엄과 영광을 되찾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적 여정을 시작한 핵심의 이유이자 미래여정의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민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반드시 달성할 것입니다.

 

출처 : 환구시보 on 2021-06-30.

Yang Sheng

환구시보의 논설위원

월, 2021/07/0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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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야 우리는 국회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국회’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누구든지 목소리를 높여 맹비난한다. 모든 사람들이 국회를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긴급하게 개혁할 대상 1호로 지목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모두의 ‘사고뭉치 국회’를 과연 어떻게 개혁해나갈 것인가의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정작 명쾌한 방안이 없이 수십 년 째 “그 밥에 그 나물”, 도돌이표 레토릭일 뿐이다.

국회 개혁, 이제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며 환원론적 논리는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야 한다. 국회 개혁의 진실을 분석하고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

학생의 본업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수업, 즉 학습이다. 그런데 만약 학생이 수업을 하지 않고 대리 수업을 한다든지 대리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학생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학습과 수업을 하지 않고서 나가서 연애나 하고 패싸움하고 게임하고 놀 수밖에 없다. 패싸움 금지규정을 만들어본들 막을 수 없다. 수업을 하지 않고 시간이 남고 남아돌아서 날이면 날마다 패싸움하고 연애하고 게임하는데, 예를 들어, 패싸움금지법, 연애금지법, 게임금지법 등등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본들 그것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학생을 선발해본들 학생이 수업을 하지 않는 그 본질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발된 그 좋은 학생들도 수업을 안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교사를 초빙한다고 해도, 수업을 하지 않는 그 자체를 고치지 않고서 왜곡된 이 상황을 결코 바꿀 수 없다.

동일한 논리로 나는 오늘 국회 문제의 핵심이 바로 국회가 국회의 본분, 즉 입법을 국회의원들 스스로 하지 않고 ‘방기’ 혹은 ‘피동적으로 배제’된 데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국회처럼 이렇게 입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또는 ‘소외된’ 의회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법이야말로 의회의 본령이고, 이 본령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회가 아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해내지 않고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의욕에 넘치는 국회의원을 선출해본들 모든 국민들이 바라마지 않는 ‘좋은 국회’, ‘신뢰받는 국회’로 발전할 수 없다. 그렇게 ‘입법’을 방기하는 객관적 조건을 바꿔내지 않는 한, 그 어떠한 좋은 선거법에 의해 좋은 인물을 선출해도 ‘좋은 국회’, ‘좋은 국회의원’이 나올 수 없다.

지금 ‘국회 문제’를 말하면, 모두 입을 모아 “지긋지긋한 정쟁(政爭)의 종식”을 말하지만, 의원들이 자신들의 본업인 ‘입법’에 몰두한다면 솔직히 ‘정쟁’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국회 문제의 ‘진실’이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 숨겨진 진실

얼마 전 국회의 한 의원실에서 ‘검토보고서’가 처음엔 찬성 취지였다가 중간에 부정 취지로 바뀌는 바람에 법안 통과가 무산되자 의원이 수석전문위원을 의원실로 불러 문제를 제기하던 중 보좌관과 입법조사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져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의 영향으로 “국회의원의 갑질 사건”으로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사실이 있다.

해당 사건에서 수석 전문위원은 항의하는 보좌관의 태도를 문제 삼아 “건방지다”라고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은 그야말로 “갑중의 갑”으로 통하는 위상이다. 그런 ‘높으신’ 국회의원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보좌관에게 “건방지다”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듯,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수석전문위원의 힘이 얼마나 센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검토보고서’가 바뀌는 바람에 결국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하고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국회의원과 전문위원 중 과연 누가 입법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국회의원은 국민이 선출하여 입법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것이 곧 대의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국민이 입법권을 부여하지 않은 국회 전문위원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국회의원보다 더 큰” 입법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전 시기에 기업들은 재경부(지금의 기획재정부, 기재부)에 로비를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에 로비를 한다. 기재부 관료에게 해봤자 다시 국회의 문턱에서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반전이 존재한다. 바로 국회에 대한 로비에서 그 로비의 대상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바로 ‘국회 전문위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국회 전문위원은 각종 법안만이 아니라 예산 심의에 대한 검토보고 권한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회 공무원인 예산결산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에게는 장관들이 머리를 숙이고 부탁한다. 나아가 국정감사 때 피감기관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가히 무소불위 ‘권력의 핵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회 주변에서는 “(국회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이 초선 의원 5,6명을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었다.

“일하지 않는 국회”,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금 우리 국회는 국민들의 불신 대상 1위다. 하지만 국민들은 비록 그렇게 불신을 받는 국회지만 입법이라는 본연의 업무는 미흡하지만 그럭저럭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입법이라는 의회의 본연의 직무 수행에 있어 우리 국회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왜곡과 비정상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나마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싫어할 경우 투표로써 심판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 뒤에 가려져 국민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권력 ‘국회 전문위원’은 알려지지 않은 숨은 권력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본업인 입법에서 분리된 국회의원

오늘의 우리 국회를 명실상부 국민 의사를 대표하는 기구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아마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회는 정확하게 민의를 반영하여 올바르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러나 한마디로 유권자의 민심은 국회 의석수에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과반이 넘는 표가 사표(死票)로 되고 있고, 18세 청년들의 투표권은 계속 거부당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정당 득표율에 따라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철저히 저지된 채 거대 정당들의 독과점 체제만이 군림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국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그야말로 첩첩산중 쌓여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어떠한 문제부터 풀어야 이 국회를 바꿔낼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 것인가?

시민운동은 이제까지 국회의원에 대한 평가에서 입법건수 발의를 기준으로 삼아왔다. 이는 한 마디로 방향 착오다.

흔히 법률안에 대한 ‘검토보고’라고 하면 당연히 국회의원이 그 책임 주체가 되어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에 소속된 공무원들이 검토보고의 ‘준비’와 그 ‘발언’까지 모두 담당한다.

우리 국회법은 제58조에 “위원회는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검토보고’란 국회의원이 제출하는 법률안에 대해 국회 공무권이 ‘검토’하는 것으로서 예·결산에 대한 검토도 모두 그들의 몫이고 권한이다.

사실 국회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된 현실에서도 국민을 위해 진정성 있게 열과 성을 다하려는 국회의원이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국회 입법과정에서 의원 개인이 높은 의욕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해보려 해봐도 그 역할은 대부분 입법발의의 단계에서 끝나게 된다. 결국 현 국회는 근본적으로 의원의 의욕과 능력이 발휘될 수 없는 구조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열의에 불타는 사람이라도 사실상 할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어느 누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예외 없이 모두 아무 탈 없이 임기를 무사히 채울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한 지인은 초등학생을 국회에 갖다놔도 충분히 국회의원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유치원3법’이나 ‘김용균법’ 등을 둘러싸고 의원들이 갑론을박, 거칠게 논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의원들이 입법을 주도한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빙산의 일각’처럼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로 부각된 극히 일부 법안에만 해당될 뿐이다. 왜냐하면 현재 국회 입법은 법안 발의 그 단계에서 의원들의 개입은 사실상 종결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법안들은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법안 검토부터 모두 철저히 입법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가 처리된다.

그리하여 결국 국회개혁의 핵심은 바로 국회의원들과 ‘분리’된 국회의 본업, 즉 입법 활동을 다시 ‘복원’하여 결합시키는 것에 있다. 즉, 입법의 전 과정을 국회의원이 그 ‘검토’부터 모두 ‘직접’ 수행하는 것이다.

화, 2020/01/14-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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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11월 23일에 있었던 홍콩지방의회 선거는 반중파(민주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방 언론은 마치 민주주의의 승리인양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홍콩인들은 이미 어느 국가의 누구보다도 자유와 자치분권을 누리고 있었다. 과연 이번 선거 결과가 홍콩의 잃어버린 영화를 다시 가져다 줄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일국양제 하에 있는 홍콩이 임의로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본토의 지원과 협력이 없는 홍콩의 미래가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잔꾀가 많은 영국정치와 막가파식 미국의 패권에 희생당할 소지가 높아 보인다. 현재 독일의 자유도시에서 법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국 젊은이의 색다른 견해를 아래에 소개한다.


소위 아시아 시위대는 자국인 홍콩 거리에서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약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 모자를 쓰고 성조기를 흔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지닌 미국인들이 이런 기괴한 광경을 보면 한편 즐겁지만 괴로운 메스꺼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시아 시위대는 공론을 통해 ‘민주 투사’ 또는 ‘인권 수호자’로 불려지곤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의미가 약해서 특이한 차림을 한 사람들의 진정한 정신을 잘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왜곡된 언론은 정신 이상의 의미가 잘 담기거나 또는 누군가 마침내 깨닫고 “시위대 옷차림은 딱 극우주의자 같아” 라고 말할 때까지 여러 차례 시위대를 무고한 천사로 그려낸다.

그렇다. 이러한 유사함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계속 심각하게 오래 지속되어 온 홍콩 위기 뒤의 추악한 진실을 밝힌다. 그리고 주류적 이야기인 경제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분명히 홍콩 부동산 재벌을 보면 독과점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세계 경제 침체, 미-중 무역 전쟁과 부인할 수 없는 외세 개입, 식민주의 잔존의 적폐 문제가 존재한다. 홍콩 거주민들이 중국 본토인들보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교육 부족’이 발생했고, 통합을 위한 노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홍콩과 중국 본토 통합에 실패했다는 타당성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홍콩 위기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이지만 평이한 답에만 안주하다 보면 결정적 원인과 관련성을 놓치게 된다.

시위대 구호인 ‘홍콩을 해방하라. 우리 시대의 혁명으로’는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필자는 현재 홍콩이 직면한 위기는 근본적으로 정치 관련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사회 계층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며 이익과 의무가 일괄적으로 표출된 형태로 나타난다. 거리의 홍콩 젊은 층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아이덴티타리언 (identitarian)과 동일하게 ‘잠재적 정체성의 도둑질 potential identity theft’에 분노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2017년 백인 우월주의자 집회가 일어났던 곳)과 홍콩은 공히 세계적으로 우익의 세력이 막강한 지역이다. 홍콩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 유권자 대부분과 동일하게 ‘야심찬 후임자’가 지역 내‘ 교체를 주장하는’ 엘리트주의자와 협력을 통해 급상승하여 지위를 잃을까 봐 깊게 두려워하는 편집증과 음모론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과 마찬가지로, 반전통적인 현재 홍콩 내 소란은 기존 지배집단들이 외부인에게 끊임없이 확실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이다.

‘홍콩인들이 서양과 중국 본토에서 누리는 모든 특권에서 반드시 다른 중국인들을 앞서야 한다’는희망을 담은 홍콩 시위는 서구를 향한 웅얼거림이자 베이징을 향한 외침일 뿐이다.

중국 본토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마치 나치 독일의 유대인, 유럽의 이슬람교도, 미국의 멕시코인처럼 홍콩인들의 우월하다는 정체성 구조 아래 “다른 민족”으로 희생양이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홍콩이 성공적으로 통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홍콩 ‘분리주의자’ 일부 세력이 더 초조해 할 것이다. 또한 베이징이 더 개방적이고 세계화를 향한 입장을 취하면 취할 수록, 홍콩인 일부 중 더 심한 외국인 혐오와 폐쇄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다. 중앙 정부가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수록, 홍콩 시위대는 더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본토 경제가 번영할수록 홍콩인 일부는 더 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폭력적인 홍콩 시위대가 주장하는 경찰의 강경 진압 이야기가 왜 쉽게 빠르게 신뢰성을 잃고 본토인들에게 거의 동정을 받지 못했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시위대 구호 속 중국어 단어 ‘광푸 (guangfu)’는 일부 홍콩인들이 한때 홍콩 황금기였다고 여겨지는 1980년대를 추억하는 깊은 향수를 미묘하게 암시한다. 홍콩 황금기 시절 홍콩인들은 자랑스럽게도 ‘선진적’이고 부유한 서양 스타일과 상업 문명을 대표했고, 홍콩과 본토 사이 경제 격차는 엄청났다. 이런 식으로 홍콩 정체성에는 중독적인 우월함도 내재되었다.

하지만 그 격차는 빠르게 좁혀져 왔다. 중국 본토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세계화와 다극화를 통해 계속해서 세계 권력 균형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홍콩인들은 직접 차이와 변화를 실감하면서 변화한 현실에 대해 더 큰 타격을 받아 왔다. 상실감과 고통을 느낀 시민사회 단체들은 소위 옛 시절의 지위 계층을 재정립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는 급진적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더 끌어올렸다.

자기 비하는 자존감(상실)에서 오는 죄악이다.

“물길이 되어라, 홍콩의 친구들이여.” 육지의 돌사자 동상에서 출발하여 광활하게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연안을 통과하여 전진해 나가는 뱃머리(중국)에 매달려 그저 뱃전에 문구만을 새기려 하지 말고, 더불어 함께 물길이 되어 시대에 확고한 불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킬 자유와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중국어 구절 ‘ke zhou qiu jian’ 刻舟求劍에서).

 

루 양(Lu Yang)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Uni Freiburg)에서 법학 이론과 정치 이론 전공을 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이자 독립연구자이다

수, 2019/11/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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