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마이뉴스]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지역

[오마이뉴스]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admin | 수, 2020/11/25- 08:10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장 ‘긴급’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이유

제 고향은 대전입니다. 가끔 내려가서 야구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빵집을 갑니다. 11년간 했던 일이죠. 그러나 이번에 내려간 고향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입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대전 학살의 현장에 간 이유는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 때문입니다. 15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상임대표 박규용)는 긴급 공지를 통해 “공동조사단에서 긴급히 일손을 찾고 있다”고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긴급’과 ‘호소’라는 단어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관련 기사] “16일 대전 유해 발굴 현장보존 자원봉사자 찾아요” http://omn.kr/1qir2)

아버지의 금니

▲ 유족 박귀덕 할머니 ⓒ 홍승주

16일 낮 12시,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을 가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단풍이 물든 평범하고 낮은 산입니다. 내리자마자 새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 한 분이 사탕을 주며 꼭 안아줬습니다.

“아따, 고맙소잉. 돈 있으면 맛난 거 사주고 싶소잉. 젊은이들이 참 순해서 좋소. 내년에도 보소. 오메~ 참말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대전에서 들은 광주 사투리였습니다. 박귀덕 할머니의 아버지는 민간인 학살 당시 광주에서 대전까지 끌려와 희생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광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자주 대전에 방문해 위령패 옆 꽃을 바꿔놓습니다.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박귀덕 할머니의 손에는 ‘치아 유골’이 있었습니다. 치아의 금니를 만지며 ‘자신의 아버지도 금니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말에 제가 어디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니가 달린 치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유골을 말리고 있습니다. ⓒ 홍승주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자원봉사에 오신 분들에게는 현장 설명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현장 설명보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뼈더미를 보면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직면하죠.” (공동조사단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팀장)

도착하자마자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지에서 나온 유골들은 세척 작업 후 아세톤이 가득 든 통에 담가둡니다.

저는 유골들을 아세톤 통에서 꺼내 건조 쟁반에 놓아두는 일을 했습니다. 길고 속이 빈 다리뼈를 통에서 들어 올리니 찬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세톤 냄새도 훅 덮쳐왔습니다. 쟁반이 부족할 정도로 유골이 많았습니다. 거리를 약간만 떼어 두고 번호가 붙여진 쟁반에 최대한 많은 유골을 배치했습니다.

쟁반이 다 차면 햇볕 좋은 곳으로 옮깁니다. 70년 만에 햇빛을 보는 희생자의 유골은 정말 많았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려 모아 놓은 장작 나무 같던 다리뼈, 두개골 뼈, 잘 부서지는 잔뼈, 그리고 단추, 신발 밑창, 옥색의 탄피, 탄피들.

▲ 건조 중인 뼈들 ⓒ 홍승주

함께 작업하던 박정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국장이 말합니다.

“제가 간호학과를 나왔는데, 그곳에서 보던 것보다 이곳에서 훨씬 많은 뼈를 봤어요.”

임마누엘 교회에 딸린 화장실을 쓰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교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보게 된 광경입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임마누엘 교회 안 뼈 사진 ⓒ 홍승주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개미들

“성미산학교, 지역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단체 등 많은 분이 자원봉사로 다녀갔어요. 발굴장에 사오십 명이 바글바글할 때도 있죠. 공동 발굴단은 멤버가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하루를 와서 조사해도 공동 조사단의 일원입니다.” (공동조사단 총괄 담당 안경호 4.9 평화재단 사무국장)

저는 올해 발굴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골령골로 갔습니다. 유해 발굴은 겨울 동안 잠시 멈췄다가 2021년에 다시 시작합니다. 봉사자들은 내년에 있을 추가 유해발굴을 위해 파헤친 구덩이를 보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뼈가 있는 부분은 천으로 단단히 감쌌습니다. 큰 비닐 포장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붙잡고 구덩이 바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비닐 포장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포장 이것 저곳에 올려놓았습니다.

▲ 구덩이 보존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 홍승주

서울에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제가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모래주머니를 날랐습니다. 집에 와서야 중노동의 현장이었다는 걸 쑤신 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우’ 소리 한마디가 사치스러운 곳이었지요.

공동 발굴단은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나르는 개미처럼 힘을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발굴단을 이끄는 안경호 사무국장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파스를 붙이는 사람이 많아요.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야 하니깐요. 흙벽을 깎고 나르는 일이 상당히 고됩니다.”

저는 사람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발굴 현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임재근 팀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생된 분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이 큽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공동조사단 모두는 자신의 가족 유골을 추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산속이라 오후 4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많기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걱정도 미뤘나 봅니다. 유골을 꺼낼 때 마다 묻혀있던 아픔이 고스란히 제 마음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죽은 이로부터 배우는 인권

▲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 홍승주

해가 완전히 졌음에도, 조사단은 작은 불빛에 의지해 세척, 분류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발굴 현장 한구석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감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유가족을 찾아주는 게 문제 해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유골이 집단으로 섞였기 때문에 디엔에이 검사할 필요도 없고 나오지도 않아요. 유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검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각기 다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던 남북한이 한국전쟁을 하며 발생했죠. (…) 유해발굴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인권을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일

1950년 골령골에서 특별경비대원으로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아무개씨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나와 당시 지휘관이었던 심용현 중위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심 중위의 명령에 따라 경찰과 헌병이 각각 10명씩 조를 짜서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 헌병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

▲ 1950년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현장입니다. 미국 장교 애버트 소령이 찍고, NARA가 발굴했습니다. ⓒ 미국립문서보관소

오후 7시. 공동조사단 숙소로 돌아가는 조사 단원 한 명과 함께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갈 기회다 싶었죠.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주용성 사진기자에게 조사단 전원의 넘치는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 번 오면 계속 오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몸 힘든 것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2021년에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한 번 더 오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달리는 택시 창문으로 보이는 산속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로등 천국 서울에 사는 저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 전, 오늘 제가 만진 유골의 주인들도 이런 어둠 속에 있었겠지요. 구덩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공포와 억울함, 그리고 한. 지난 70년이 흐르는 동안 골령골의 어둠 속에는 영혼의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를 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남한 정부는 보도연맹을 적으로 판단합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한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했습니다.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단일지역 민간인 피해 최대 규모입니다. 그들은 무참히 학살되어 암매장되었습니다.

학살 후에도 남겨진 가족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연좌제 때문입니다. 유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죽인 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50여 년 간 이 사실을 덮었고, 진실은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희생자들은 어두운 땅속에 묻혀 있다가, 70년 만에 유해발굴을 통해 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8일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이뤄진 대전 골령골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처음으로 발굴됐습니다.

올해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은 마무리되었고 2021년에 추가 유해발굴이 진행됩니다. 2022년부터 이곳 산내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평화역사공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공동발굴단이 될 기회는 1년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그때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 번 더 알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사단원 선배들이 남긴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 순간에 함께 한 증인으로서 앞으로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하겠습니다.” – 성미산 학교 학생들

▲ 성미산 학교 학생들의 편지 ⓒ 홍승주

홍승주(hongsam3503)

<2020-11-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1029-13

▲ 【천안】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28일 더불어민주당 이규희(왼쪽 첫번째) 의원과 준비위원회 관계자 등이 현장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8.10.29. (사진=뉴시스 독자 제공) [email protected]

【천안·아산=뉴시스】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천안시의 발굴 동참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등으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는 지난 28일 오전 매장지로 추정되는 직산 관아 일원에서 위령제를 진행했다.

이날 위령제 앞서 준비위원회 관계자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규희 국회의원(천안갑)과 육종영 천안시의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추정 장소에 대한 사전답사를 진행하며 유해 발굴에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길 준비위원회장은 29일 “11월 초 아산지역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충북대 발굴단의 현장답사 진행에 이어 천안시의회에 가칭 ‘천안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서 준비위원회는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 천안시 직산읍 인근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200여 구에 달하는 매장 추정지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안지역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중 보도연맹사건으로 신청된 사건은 없고, 부역 혐의 희생 사건으로 신청된 사건 7건이 있다.

이 중 당시 직산면사무소(직산관아)와 관련해 지서장의 지시로 “200여 명의 부역 혐의자들을 금광구덩이에 죽이고 묻고 했다는 참고인의 증언이 있다”는 것이 준비위의 설명이다.

▲ 【천안=뉴시스】이종익 기자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가 23일 오전 천안시청 브리핑실에서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현황 전수조사와 발굴조사 시행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3. [email protected]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의 조례가 제정될 경우 보수와 진보 측의 찬반 의견 대립으로 난항도 우려된다.

경기 고양시의 경우 금정굴 사건과 관련해 전국에서 처음 조례안이 만들어져 2011년부터 6차례나 시의회에서 발의됐지만, 보수 단체와 정당 반발로 맞서다가 7년이 지난 올 9월 제정됐다.

육종영 시의원은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해 평화와 인권 회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만간 관련자료를 정리해 조례안 초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안시 관계자는 “시의회가 관련 조례를 제정한다면 조례 절차에 따라 후속조치를 이어가겠다. 하지만 현재 일부 단체에서 반대 여론이 감지되고 있어 민감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천안과 인접한 아산지역에서는 지난 3월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어린이 80여 구를 포함해 208명의 유해가 수습됐다.

[email protected]

<2018-10-29> 뉴시스

☞기사원문: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매장 추정지 발굴에 천안시 참여 여부에 ‘관심’

월, 2018/10/29- 18:46
24
0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우발적 광기가 아닌 이승만의 조직적 대량학살”

1109-1

▲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인권평화연구소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 있는 고봉로에서 가장 높은 곳인 개미고개엔 야트막한 황룡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자주 오르는 산책 코스다. 험하지 않은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깊이가 18m가량 되는 수직굴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시대 금을 캐기 위해 만들어진 금광이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곳이다. 원래 깊이는 50m가량이었지만 무너지면서 얕아졌다. 이곳을 사람들은 황금을 뜻하는 금(金)과 우물을 뜻하는 정(井)을 써서 ‘금정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곳 ‘금정굴’에선 지난 1995년 9월 집단으로 파묻힌 유골이 다리뼈와 머리뼈 등이 마구 뒤엉킨 모습으로 발굴됐다. 유골 주변에선 시체들을 묶은 통신선과 탄피도 쏟아져 나왔다. 발굴된 유해는 153구였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후퇴했던 이승만 정권이 그해 9월 서울과 고양 일대를 수복했다. 국민을 버린 채 자신만 피난에 나섰던 이승만 정권은 경찰과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인민군부역자를 처단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부역자로 몰아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고양 일대의 수많은 민간인, 나이 어린 중학생은 물론, 항일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부역자 혹은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뒤 금정굴에 암매장됐다. 유가족들은 자신들도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학살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왔다. 그러다 용기를 내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45년간 잠들어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

집단 학살의 현장이 드러난 뒤에도 유족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지난한 투쟁은 계속됐다. 모두가 외면하고, 모두가 침묵하며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가족들과 함께 묵묵히 싸워온 이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 지역의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과 나아가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이다. 신 소장은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금정굴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고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의 시간을 기록한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를 출간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뤘다.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 소장은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에서 금정굴 학살에 대해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이라고 강조했다.

1109-2

▲ 1995년 10월 금정굴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인권평화연구소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했다”

이 책 1부 학살에선 해방과 식민 과거 청산의 실패, 분단과 독재 체제의 고착, 전쟁 그리고 금정굴 학살을 통해 고양지역에서 살아가던 민중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개하고 있다. 1950년 고양경찰서가 수복되고 치안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연행됐다. 끌려간 사람 대부분은 부역 의심을 받는 사람들의 가족이었다. 이후 20일 동안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 태극단원 등 60여 명이 번갈아 가며 학살을 저질렀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마지막 날인 10월 25일 20명이 학살당하는 현장에는 고양경찰서장까지 직접 가담했다. 금정굴은 고양경찰서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야산에 위치에 있었으므로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가장 빠른 길인 일산시장 관통로를 지나갔는데,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많아지자 그다음부터는 목격자가 적은 철길로 우회했다. 나중에는 트럭을 이용하여 금정굴 현장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총살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는 경찰관은 이무영 서장을 비롯해 12명이며, 의용경찰대원은 이진 등 26명, 태극단은 단장 이장복 등 20여 명이었다. 학살당한 이들의 구체적인 사례와 국가 기관의 개입과 활동은 이 학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국가는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진실을 은폐했다. 학살이 일어난 1950년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돼 관련한 재판이 있었다. 의용경찰대원 25명, 시국대책위원 2명, 경찰관 여러 명이 조사를 받았고 11월8일에는 금정굴 현장검증까지 이루어졌다. 이중 25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며 11월 20일 8명에 대해서만 공판청구서를 작성하고 나머지 17명을 석방했다. 이들 8명에 대한 재판은 12월 22일 열렸다. 재판 결과 사형 2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0년 1명, 형 면제 3명이었다. 이 재판을 통해 금정굴 학살은 은폐되고 전쟁범죄자였던 이승만 정부는 법의 수호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1109-3

▲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이런 과정은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게 하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 기록을 통해 그동안 규명되지 않았던 금정굴 학살의 진실, 즉 국가 권력이 어떻게 이를 저질렀고, 왜곡, 은폐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부 진실에선 무려 43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진실 규명 활동과 유해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삭살 사실을 부인하는 국가와 지역 사회의 거짓 그리고 이에 대한 끝없는 투쟁의 과정을 소개했으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진실규명 활동과 중단, 그리고 후속조치 등 남은 과제를 위한 현재의 투쟁을 정리해 담고 있다. 금정굴 사건에 대한 은폐 시도와 학살에 가담한 태극단 활동에 대한 미화 조작은 전두환의 집권 이후 강화됐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태극단의 활동이 반공 교재의 소재가 되어 경기도 내 각 학생들에게 보급됐고, 태극단원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1983년 ‘태극단 투쟁사’를 발간했다. 1984년에는 국방부 영화제작소에서 ‘태극단’ 활동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전쟁기념관 2층에는 수복 전후 태극단원들이 활동한 흔적들이 전시돼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각종 활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금정굴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사업에 맞서 아직도 “학살이 아닌 처형”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등 학살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학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1109-4

▲ 고양지역 보훈단체 회원들은 지난 8월 고양시의회 의원 사무실 복도에서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였다. 보훈단체의 반대에도 8월31일 고양시 의회 본회의에선 조례안이 시 의원 33명 가운데 찬성 24명, 반대 8명, 기권 1명으로 통과됐다. 조례안이 만들어진지 8년 만이었다.ⓒ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신 소장은 말한다. “금정굴 사건은 부역혐의 사건이 개인들 사이의 감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체계적인 공격 때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금정굴 사건의 진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좌우 대립, 또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남과 북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대립의 진짜 원인은 우리 사회 안의 거짓, 즉 국가범죄의 진실을 숨기는 것에 있었다.”

이 책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산 자들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부모라는 이유로, 형이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했을까?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여야 했을까? 이 ‘평범한 악(evil)’을 숨겨 온 대한민국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찾아 떠난 28년의 여정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여러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신 소장은 진실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018-11-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새책]“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 관련기사

☞경향신문: 올해 ‘임종국상’ 수상자에 원희복·신기철씨

☞통일뉴스: 9일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신기철.원희복 수상

☞연합뉴스: 제12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신기철·원희복씨

☞프레시안: 제12회 임종국상에 신기철 소장·원희복 기자

금, 2018/11/09- 16:29
24
0
0208-9

▲ 한국사연구회, 역사문제 연구소 등 14개 학술단체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가담한 정부기관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가담한 정부기관과 정부출연기관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8일 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역사문제연구소 등 14개 역사 관련 학회와 연구소 회원들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구서를 제출했다. 학술단체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촛불 민심이 선정한 적폐 가운데 하나”라며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의 불법과 비리를 밝히고 책임자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체들은 또 “감사 청구 대상인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연구재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권의 충견(忠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사회정의를 유린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특정 인물과 기관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거나 우수한 평가를 받던 연구사업을 좌초시켰다”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에는 학자와 일반 시민 494명이 참여했다.

김유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08> 경향신문

☞기사원문: 14개 학술단체,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관련기사

스1: 역사단체 “국정교과서 가담 정부기관 비리의혹 감사해야”

연합뉴스: 5개 역사학회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목, 2018/02/08- 18:07
23
0

[기고] ‘촛불’ 2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전쟁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이것이 나라냐?”고 분노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벌써 2년이 됐다. 그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고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전망도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촛불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국가재조’라는 혁명적 과제는 현실정치와 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자숙하는 시늉을 하던 수구세력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촛불항쟁의 정신을 외면하고 거침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분단 70년이 넘어 찾아온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호의 기회를 한갓 정치적 득실을 따져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숱한 개혁 입법도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두 차례 보수정권에서 고질화한 관료사회의 퇴행도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이제 일각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현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통설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더 늦기 전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은 촛불민심의 선택과 위임을 받아 출범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고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함께 외쳤던 주장이 무엇이었던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거창한 명제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하야–퇴진–탄핵-구속 촉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를 관통하는 구호는 ‘기본권의 보장’에 다름 아니었다. 각계의 각양각색의 슬로건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자연스레 수렴되었다. 즉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준수하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 2015.10.24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 부근에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국정교과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많은 이들은 자유 평등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헌법정신이 서구사회로부터 이식된 개념으로 이해한다. 법제 과정이나 문언으로만 볼 때는 얼핏 그런 해석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 전반을 조망해 보면 우리 민족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보편적 가치가 우리 스스로 수난 속에 스스로 체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학의 평등사상과 반봉건반외세운동, 3·1항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반제국주의와 민주공화운동, 사월혁명 5·18민주항쟁 6·10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반독재민주화운동 등 면면히 이어지는 저항정신의 요체가 바로 헌법정신으로 현현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부할 만한 전통으로 긍지를 가지기에 모자람이 없다.

촛불항쟁의 저변에는 이러한 역사의식의 계승이 작동하고 있었다.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물론 ‘최순실게이트’였다. 그러나 이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을 뿐 그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데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기간 가장 두드러졌던 폐해는 지배층의 무분별한 사익집단화 현상이었다. 청와대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에서부터 재벌 관료 정치인 언론인 학자, 심지어 사법부조차도 철저하게 결탁하여 특권을 향유하며 불법과 부정을 서슴지 않았다. 갑질이 난무하고 부패가 만연했으며, 비판세력에 대한 사찰 음해 탄압이 공권력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독재정권의 완벽한 부활이자 교활하고 세련된 파시즘의 대두였다.

다른 한편 역사와 교육에 대한 권력의 개입과 이를 전유하겠다는 망상은 왕조시대에도 지탄받았을 대표적인 폐정의 하나였다.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의식세계마저 지배하려 했다. 역사와 교육을 도구삼아 미래세대까지 세뇌하려 기도한 것이다. 이명박은 과거사위원회 폐지를 첫 번째 국정과제로 공언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공공연하게 뉴라이트세력을 지원해 식민지미화론 이승만국부론 박정희신격화를 전파시켜나갔다. 여기에 다수의 언론과 학자들이 부역자 역할을 자임했다.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같은 도발은 ‘역사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사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라는 연대기구를 조직하고 역사변조에 정면으로 맞서나갔다. 시민사회와 학계가 힘을 합쳐 뉴라이트의 교학사 고교한국사를 원천 봉쇄하자, 박근혜는 한 술 더 떠 아예 국정 한국사교과서 편찬이라는 강수로 맞불을 놓았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다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를 구성해 전 국민을 상대로 전국적인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박근혜의 오만과 무지는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결과는 놀랄 정도였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교육부와 교육청 수구언론과 극우단체를 총동원하고 전력을 기울여 역공작까지 벌였음에도,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며, 결국 폐기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박근혜가 국가기구를 동원해 총력을 기울인 역사쿠데타가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 교육계는 물론 국민적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시대착오적인 한국사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의 빗나간 효도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그를 권좌에서 쫓겨나게 하는 한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구국의 지도자 박정희’라는 우상화의 허구를 드러내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했다.

친일세력 대 항일세력, 독재세력 대 민주세력, 냉전세력 대 평화세력. 어떤 이들은 이분법적인 역사해석을 경계한다. 그러나 견고하게 뿌리박은 수구세력은 결코 자발적으로 특권을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작업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과 관용을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엄혹한 것이다.

내년은 3·1독립운동 100주년이다.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려 백여 년 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공화주의가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설 기회를 맞았다. 이를 위해서는 사익집단의 재생산 구조를 타파하고 민주시민을 양성하여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그 지름길은 역사인식의 정립과 민주주의 교육, 그리고 생활 속의 실천이다. 그래서 단언컨대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18-10-29> 프레시안

☞기사원문: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월, 2018/10/29- 18:37
23
0

[다운로드] [보도자료]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소송 판결의 압류결정에 대한
소송대리인·지원단 공식 입장

1. 신일철주금이 2018년 10월 30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위 판결의 원고들(피해자들) 대리인은 2018년 12월 31일 신일철주금이 소유한 주식회사 피엔알 주식에 대한 압류 신청을 하였다.

2.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2019년 1월 3일 주식회사 피엔알 주식 81,075주(피해자 2명의 손해배상금 및 지연손해금 상당)에 대한 압류를 결정하였고, 법원 압류명령결정의 주식회사 피엔알에 대한 송달절차가 현재 진행중이다.

3. 압류명령결정은 주식회사 피엔알에 송달된 이후에 압류의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압류가 효력을 발생하면 신일철주금은 신일철주금이 소유한 주식회사 피엔알 주식 중 81,075주에 대한 매매, 양도, 기타 일체의 처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기업 운영에 장애가 발생하였거나 현실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4. 지난 압류신청서 제출 때에도 강조한 바 있지만, 피해자들은 통상적으로 압류명령 신청과 함께 이루어지는 매각명령 신청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즉, 압류를 통한 자산보전은 이루어졌으나, 현금화 절차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일철주금과 협의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서였다.

5. 그러나 신일철주금이 계속 피해자 측과 협의하지 않고 있어, 피해자들의 대리인은 압류된 주식에 대한 매각명령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의 대리인은 신일철주금에게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하여 신속히 협의에 나설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2019년 1월 8일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 김세은,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
동 지원단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화, 2019/01/08- 18:24
2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