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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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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admin | 수, 2020/11/25- 08:10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장 ‘긴급’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이유

제 고향은 대전입니다. 가끔 내려가서 야구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빵집을 갑니다. 11년간 했던 일이죠. 그러나 이번에 내려간 고향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입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대전 학살의 현장에 간 이유는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 때문입니다. 15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상임대표 박규용)는 긴급 공지를 통해 “공동조사단에서 긴급히 일손을 찾고 있다”고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긴급’과 ‘호소’라는 단어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관련 기사] “16일 대전 유해 발굴 현장보존 자원봉사자 찾아요” http://omn.kr/1qir2)

아버지의 금니

▲ 유족 박귀덕 할머니 ⓒ 홍승주

16일 낮 12시,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을 가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단풍이 물든 평범하고 낮은 산입니다. 내리자마자 새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 한 분이 사탕을 주며 꼭 안아줬습니다.

“아따, 고맙소잉. 돈 있으면 맛난 거 사주고 싶소잉. 젊은이들이 참 순해서 좋소. 내년에도 보소. 오메~ 참말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대전에서 들은 광주 사투리였습니다. 박귀덕 할머니의 아버지는 민간인 학살 당시 광주에서 대전까지 끌려와 희생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광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자주 대전에 방문해 위령패 옆 꽃을 바꿔놓습니다.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박귀덕 할머니의 손에는 ‘치아 유골’이 있었습니다. 치아의 금니를 만지며 ‘자신의 아버지도 금니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말에 제가 어디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니가 달린 치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유골을 말리고 있습니다. ⓒ 홍승주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자원봉사에 오신 분들에게는 현장 설명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현장 설명보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뼈더미를 보면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직면하죠.” (공동조사단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팀장)

도착하자마자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지에서 나온 유골들은 세척 작업 후 아세톤이 가득 든 통에 담가둡니다.

저는 유골들을 아세톤 통에서 꺼내 건조 쟁반에 놓아두는 일을 했습니다. 길고 속이 빈 다리뼈를 통에서 들어 올리니 찬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세톤 냄새도 훅 덮쳐왔습니다. 쟁반이 부족할 정도로 유골이 많았습니다. 거리를 약간만 떼어 두고 번호가 붙여진 쟁반에 최대한 많은 유골을 배치했습니다.

쟁반이 다 차면 햇볕 좋은 곳으로 옮깁니다. 70년 만에 햇빛을 보는 희생자의 유골은 정말 많았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려 모아 놓은 장작 나무 같던 다리뼈, 두개골 뼈, 잘 부서지는 잔뼈, 그리고 단추, 신발 밑창, 옥색의 탄피, 탄피들.

▲ 건조 중인 뼈들 ⓒ 홍승주

함께 작업하던 박정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국장이 말합니다.

“제가 간호학과를 나왔는데, 그곳에서 보던 것보다 이곳에서 훨씬 많은 뼈를 봤어요.”

임마누엘 교회에 딸린 화장실을 쓰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교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보게 된 광경입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임마누엘 교회 안 뼈 사진 ⓒ 홍승주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개미들

“성미산학교, 지역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단체 등 많은 분이 자원봉사로 다녀갔어요. 발굴장에 사오십 명이 바글바글할 때도 있죠. 공동 발굴단은 멤버가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하루를 와서 조사해도 공동 조사단의 일원입니다.” (공동조사단 총괄 담당 안경호 4.9 평화재단 사무국장)

저는 올해 발굴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골령골로 갔습니다. 유해 발굴은 겨울 동안 잠시 멈췄다가 2021년에 다시 시작합니다. 봉사자들은 내년에 있을 추가 유해발굴을 위해 파헤친 구덩이를 보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뼈가 있는 부분은 천으로 단단히 감쌌습니다. 큰 비닐 포장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붙잡고 구덩이 바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비닐 포장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포장 이것 저곳에 올려놓았습니다.

▲ 구덩이 보존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 홍승주

서울에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제가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모래주머니를 날랐습니다. 집에 와서야 중노동의 현장이었다는 걸 쑤신 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우’ 소리 한마디가 사치스러운 곳이었지요.

공동 발굴단은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나르는 개미처럼 힘을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발굴단을 이끄는 안경호 사무국장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파스를 붙이는 사람이 많아요.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야 하니깐요. 흙벽을 깎고 나르는 일이 상당히 고됩니다.”

저는 사람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발굴 현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임재근 팀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생된 분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이 큽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공동조사단 모두는 자신의 가족 유골을 추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산속이라 오후 4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많기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걱정도 미뤘나 봅니다. 유골을 꺼낼 때 마다 묻혀있던 아픔이 고스란히 제 마음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죽은 이로부터 배우는 인권

▲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 홍승주

해가 완전히 졌음에도, 조사단은 작은 불빛에 의지해 세척, 분류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발굴 현장 한구석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감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유가족을 찾아주는 게 문제 해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유골이 집단으로 섞였기 때문에 디엔에이 검사할 필요도 없고 나오지도 않아요. 유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검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각기 다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던 남북한이 한국전쟁을 하며 발생했죠. (…) 유해발굴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인권을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일

1950년 골령골에서 특별경비대원으로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아무개씨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나와 당시 지휘관이었던 심용현 중위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심 중위의 명령에 따라 경찰과 헌병이 각각 10명씩 조를 짜서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 헌병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

▲ 1950년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현장입니다. 미국 장교 애버트 소령이 찍고, NARA가 발굴했습니다. ⓒ 미국립문서보관소

오후 7시. 공동조사단 숙소로 돌아가는 조사 단원 한 명과 함께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갈 기회다 싶었죠.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주용성 사진기자에게 조사단 전원의 넘치는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 번 오면 계속 오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몸 힘든 것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2021년에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한 번 더 오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달리는 택시 창문으로 보이는 산속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로등 천국 서울에 사는 저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 전, 오늘 제가 만진 유골의 주인들도 이런 어둠 속에 있었겠지요. 구덩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공포와 억울함, 그리고 한. 지난 70년이 흐르는 동안 골령골의 어둠 속에는 영혼의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를 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남한 정부는 보도연맹을 적으로 판단합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한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했습니다.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단일지역 민간인 피해 최대 규모입니다. 그들은 무참히 학살되어 암매장되었습니다.

학살 후에도 남겨진 가족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연좌제 때문입니다. 유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죽인 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50여 년 간 이 사실을 덮었고, 진실은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희생자들은 어두운 땅속에 묻혀 있다가, 70년 만에 유해발굴을 통해 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8일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이뤄진 대전 골령골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처음으로 발굴됐습니다.

올해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은 마무리되었고 2021년에 추가 유해발굴이 진행됩니다. 2022년부터 이곳 산내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평화역사공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공동발굴단이 될 기회는 1년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그때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 번 더 알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사단원 선배들이 남긴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 순간에 함께 한 증인으로서 앞으로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하겠습니다.” – 성미산 학교 학생들

▲ 성미산 학교 학생들의 편지 ⓒ 홍승주

홍승주(hongsam3503)

<2020-11-23>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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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기념치유센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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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가 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 박해전

“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2018-06-26> 신문고 뉴스

☞기사원문: “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금, 2018/06/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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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부근까지 400여명 촛불 행진
“반일 일본인 일본에서 나가라” 우익들 방해도
토론회에서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빛만 강조해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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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이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전쟁 반대. (야스쿠니 신사) 합사 반대”

11일 저녁 한·일 시민 400여명이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부터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근처까지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펼침막을 들고 촛불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촛불을 상징하는 형광 띠를 손목에 두르고 “아베 (신조) 총리는 그만둬라” “야스쿠니 반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아베 정부는 군국주의적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강한 비판 목소리도 나왔다.

이날 평화 행진은 태평양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신사 위헌소송 모임 등 한일 시민단체와 활동가 등이 참가한 촛불행동실행위원회가 주최했으며, 2006년부터 열리고 있다. 행진 마지막에 우치다 마사토시 촛불행동실행위원회 공동 대표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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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손팻말을 들었다. 일장기와 욱일승천기 모습도 보인다.

우익들의 평화 행진 방해는 올해도 계속됐다. 우익 세력으로 추정되는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반일 일본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같은 구호를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 “일본을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는 용서할 수 없다” 같은 펼침막을 욱일승천기와 일장기 함께 흔들었다. 행진 장소 중 한 곳이었던 진보초 사거리에서는 태극기를 찢는 이도 있었고 평화 행진 참가자를 향해서 돌진하려다가 경찰에 제지당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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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극좌 촛불 데모 용서할 수 없다”고 쓴 펼침막을 들고 있다.

평화 행진에 앞서 이날 도쿄 재일한국와엠시에서는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는 “올해는 메이지유신 발생 150년이 되는 해다. (아베 정부는) 메이지유신의 강점만을 강조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메이지의 빛만을 강조하고 어둠을 외면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메이지유신의 강점은 옛 일본군의 군사력과 천황 중심 문화인 것 같다. 그런 역사관이라면 나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군 병사-아시아·태평양전쟁의 현실>이라는 책을 쓴 요시다 유타카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숨진 이가 310만명이었는데, 이중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쇠약해져 숨진) 병사가 전체의 60% 정도였다, 근대 군대사 관점에서 볼 때 퇴행적 현상이 벌어졌다”며 “야스쿠니신사가 전몰자를 영웅시하는 것과는 달리 병사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처럼 가혹하고 무참했다”고 지적했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소송은 각하 또는 기각하고 강제징용피해자 소송은 지연하라는 내부지침을 내린 게 드러났다. 이는 한일관계에서 한국의 우파 정권이 무엇을 지향하려 하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두려워한 것은 ‘안보를 위해서 역사를 죽인’ 65년체제(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만들어진 한일 관계)의 균열을 우려한 것이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박근혜 정권은 65년 체제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65년 체제의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고 (2016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등으로) 이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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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심포지엄 뒤에는 야스쿠니신사에 아버지가 합사된 유족 이명구씨가 단상에 올랐다. 이씨의 아버지는 1943년 군속으로 강제동원돼 1945년 4월 팔라우섬에서 숨졌다. 이씨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끌려가신 3년 뒤인) 1946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9살 그리고 동생이 5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사상에 놓인 과일을 보고 먹고 싶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은 굶주림 끝에 쇠약해져서 숨졌다. 일본 때문에 나는 고아가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죽게 한 것도 억울한데 왜 일본 정부는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합사를 했는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은 야스쿠니신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 protected].k

<2018-08-12> 한겨레 

☞기사원문: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도쿄에 퍼진 한·일 시민의 목소리

※관련기사 

☞연합뉴스TV: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우익 방해 여전

☞경향신문: 도쿄에서 13년째 “야스쿠니·전쟁 반대”…우익들 “매국노, 철퇴를” 방해

☞경인일보: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 “가해, 피해 관계의 청산 이뤄지지 않아”

☞경인일보: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 “가해, 피해 관계의 청산 이뤄지지 않아”

☞헤럴드경제: 광복절 앞둔 日야스쿠니…촛불집회와 혐한시위 신경전

토, 2018/08/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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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하기]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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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기타

아버지는 목선과 함께 강제동원돼 어업통제회사 선원으로 근무하다 희생됐다. 누군가의 아버지는 포로감시원으로 타이에 배속되었다가 희생됐다. 어느 시아버지는 사할린으로 징용되었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오빠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뉴기니에서 전사했다. 한 아버지는 군속으로 일본 현지에서 동원돼 북태평양에서 전사했다. 그렇게 일본 기업과 정부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이들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강제동원피해자 유족증언집’을 출간했다.이 책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 되어 희생당한 피해자의 유족 23인의 삶과 사연이 담겨있다.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증언집, 구술집, 회고록 등은 다수 있었지만 유족들의 이야기를 직접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책에서 주인공들은 아버지, 남편, 오빠가 강제동원 된 후 가족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시작된 고달픈 삶, 여성이기 때문에, 며느리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로부터 외면당하면서도 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온 유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일본정부와 일본기업에 있지만 한국정부 또한 2차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며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 유족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외면 받고 있고 유족들의 삶을 또 다른 독립적인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정부가 가족의 피해를 외면하는 동안 유족들은 모두가 잊어버린 한 마디 소식을 듣기 위해, 그저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 모를 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연락 한 번 없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아버지의 이름을 빼내기 위해, 십 수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23명의 주인공들은 이 책을 통해 ‘아버지를 빼앗긴’ 이후 겪어야 했던 유족들의 힘겨운 삶을 기록하고 돌아오지 않는 가족의 ‘흔적’을 찾아온 긴 여정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교과서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다루지 않는 스물세가지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오랫동안 문제를 외면해온 한국사회를 향해 유족들이 풀어놓는 첫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 보고를 통해서 우리는 일제가 남긴 식민지배의 유산과 상처가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한일관계의 원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2017-07-1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의 목소리, 책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관련기사

☞한국일보: [단독] “日에 가족 빼앗긴 아픔, 역사로 새겨야”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간

월, 2017/07/1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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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28일 더불어민주당 이규희(왼쪽 첫번째) 의원과 준비위원회 관계자 등이 현장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8.10.29. (사진=뉴시스 독자 제공) [email protected]

【천안·아산=뉴시스】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천안시의 발굴 동참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등으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는 지난 28일 오전 매장지로 추정되는 직산 관아 일원에서 위령제를 진행했다.

이날 위령제 앞서 준비위원회 관계자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규희 국회의원(천안갑)과 육종영 천안시의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추정 장소에 대한 사전답사를 진행하며 유해 발굴에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길 준비위원회장은 29일 “11월 초 아산지역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충북대 발굴단의 현장답사 진행에 이어 천안시의회에 가칭 ‘천안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서 준비위원회는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 천안시 직산읍 인근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200여 구에 달하는 매장 추정지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안지역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중 보도연맹사건으로 신청된 사건은 없고, 부역 혐의 희생 사건으로 신청된 사건 7건이 있다.

이 중 당시 직산면사무소(직산관아)와 관련해 지서장의 지시로 “200여 명의 부역 혐의자들을 금광구덩이에 죽이고 묻고 했다는 참고인의 증언이 있다”는 것이 준비위의 설명이다.

▲ 【천안=뉴시스】이종익 기자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가 23일 오전 천안시청 브리핑실에서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현황 전수조사와 발굴조사 시행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3. [email protected]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의 조례가 제정될 경우 보수와 진보 측의 찬반 의견 대립으로 난항도 우려된다.

경기 고양시의 경우 금정굴 사건과 관련해 전국에서 처음 조례안이 만들어져 2011년부터 6차례나 시의회에서 발의됐지만, 보수 단체와 정당 반발로 맞서다가 7년이 지난 올 9월 제정됐다.

육종영 시의원은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해 평화와 인권 회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만간 관련자료를 정리해 조례안 초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안시 관계자는 “시의회가 관련 조례를 제정한다면 조례 절차에 따라 후속조치를 이어가겠다. 하지만 현재 일부 단체에서 반대 여론이 감지되고 있어 민감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천안과 인접한 아산지역에서는 지난 3월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어린이 80여 구를 포함해 208명의 유해가 수습됐다.

[email protected]

<2018-10-29> 뉴시스

☞기사원문: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매장 추정지 발굴에 천안시 참여 여부에 ‘관심’

월, 2018/10/2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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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우발적 광기가 아닌 이승만의 조직적 대량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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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인권평화연구소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 있는 고봉로에서 가장 높은 곳인 개미고개엔 야트막한 황룡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자주 오르는 산책 코스다. 험하지 않은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깊이가 18m가량 되는 수직굴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시대 금을 캐기 위해 만들어진 금광이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곳이다. 원래 깊이는 50m가량이었지만 무너지면서 얕아졌다. 이곳을 사람들은 황금을 뜻하는 금(金)과 우물을 뜻하는 정(井)을 써서 ‘금정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곳 ‘금정굴’에선 지난 1995년 9월 집단으로 파묻힌 유골이 다리뼈와 머리뼈 등이 마구 뒤엉킨 모습으로 발굴됐다. 유골 주변에선 시체들을 묶은 통신선과 탄피도 쏟아져 나왔다. 발굴된 유해는 153구였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후퇴했던 이승만 정권이 그해 9월 서울과 고양 일대를 수복했다. 국민을 버린 채 자신만 피난에 나섰던 이승만 정권은 경찰과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인민군부역자를 처단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부역자로 몰아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고양 일대의 수많은 민간인, 나이 어린 중학생은 물론, 항일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부역자 혹은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뒤 금정굴에 암매장됐다. 유가족들은 자신들도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학살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왔다. 그러다 용기를 내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45년간 잠들어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

집단 학살의 현장이 드러난 뒤에도 유족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지난한 투쟁은 계속됐다. 모두가 외면하고, 모두가 침묵하며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가족들과 함께 묵묵히 싸워온 이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 지역의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과 나아가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이다. 신 소장은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금정굴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고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의 시간을 기록한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를 출간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뤘다.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 소장은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에서 금정굴 학살에 대해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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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0월 금정굴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인권평화연구소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했다”

이 책 1부 학살에선 해방과 식민 과거 청산의 실패, 분단과 독재 체제의 고착, 전쟁 그리고 금정굴 학살을 통해 고양지역에서 살아가던 민중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개하고 있다. 1950년 고양경찰서가 수복되고 치안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연행됐다. 끌려간 사람 대부분은 부역 의심을 받는 사람들의 가족이었다. 이후 20일 동안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 태극단원 등 60여 명이 번갈아 가며 학살을 저질렀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마지막 날인 10월 25일 20명이 학살당하는 현장에는 고양경찰서장까지 직접 가담했다. 금정굴은 고양경찰서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야산에 위치에 있었으므로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가장 빠른 길인 일산시장 관통로를 지나갔는데,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많아지자 그다음부터는 목격자가 적은 철길로 우회했다. 나중에는 트럭을 이용하여 금정굴 현장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총살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는 경찰관은 이무영 서장을 비롯해 12명이며, 의용경찰대원은 이진 등 26명, 태극단은 단장 이장복 등 20여 명이었다. 학살당한 이들의 구체적인 사례와 국가 기관의 개입과 활동은 이 학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국가는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진실을 은폐했다. 학살이 일어난 1950년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돼 관련한 재판이 있었다. 의용경찰대원 25명, 시국대책위원 2명, 경찰관 여러 명이 조사를 받았고 11월8일에는 금정굴 현장검증까지 이루어졌다. 이중 25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며 11월 20일 8명에 대해서만 공판청구서를 작성하고 나머지 17명을 석방했다. 이들 8명에 대한 재판은 12월 22일 열렸다. 재판 결과 사형 2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0년 1명, 형 면제 3명이었다. 이 재판을 통해 금정굴 학살은 은폐되고 전쟁범죄자였던 이승만 정부는 법의 수호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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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이런 과정은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게 하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 기록을 통해 그동안 규명되지 않았던 금정굴 학살의 진실, 즉 국가 권력이 어떻게 이를 저질렀고, 왜곡, 은폐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부 진실에선 무려 43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진실 규명 활동과 유해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삭살 사실을 부인하는 국가와 지역 사회의 거짓 그리고 이에 대한 끝없는 투쟁의 과정을 소개했으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진실규명 활동과 중단, 그리고 후속조치 등 남은 과제를 위한 현재의 투쟁을 정리해 담고 있다. 금정굴 사건에 대한 은폐 시도와 학살에 가담한 태극단 활동에 대한 미화 조작은 전두환의 집권 이후 강화됐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태극단의 활동이 반공 교재의 소재가 되어 경기도 내 각 학생들에게 보급됐고, 태극단원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1983년 ‘태극단 투쟁사’를 발간했다. 1984년에는 국방부 영화제작소에서 ‘태극단’ 활동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전쟁기념관 2층에는 수복 전후 태극단원들이 활동한 흔적들이 전시돼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각종 활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금정굴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사업에 맞서 아직도 “학살이 아닌 처형”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등 학살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학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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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지역 보훈단체 회원들은 지난 8월 고양시의회 의원 사무실 복도에서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였다. 보훈단체의 반대에도 8월31일 고양시 의회 본회의에선 조례안이 시 의원 33명 가운데 찬성 24명, 반대 8명, 기권 1명으로 통과됐다. 조례안이 만들어진지 8년 만이었다.ⓒ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신 소장은 말한다. “금정굴 사건은 부역혐의 사건이 개인들 사이의 감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체계적인 공격 때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금정굴 사건의 진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좌우 대립, 또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남과 북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대립의 진짜 원인은 우리 사회 안의 거짓, 즉 국가범죄의 진실을 숨기는 것에 있었다.”

이 책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산 자들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부모라는 이유로, 형이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했을까?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여야 했을까? 이 ‘평범한 악(evil)’을 숨겨 온 대한민국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찾아 떠난 28년의 여정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여러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신 소장은 진실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018-11-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새책]“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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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9일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신기철.원희복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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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제12회 임종국상에 신기철 소장·원희복 기자

금, 2018/11/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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