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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 생태조사와 한반도 평화 (1)

지역

한강하구 생태조사와 한반도 평화 (1)

admin | 목, 2020/11/19- 19:18

. 문제 제기접경지역의 생태계적 상호협력의 역동성

경계라는 말의 사전적 뜻풀이에 따르면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다. 접경지역이란 말 그대로 그 경계와 경계가 접하는 지역이다. 서로 다른 성격(체제와 국가)의 공간이 만나는 지역이다. 이 이질적인 경계 사이에는 통제가 존재하며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넘나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단절적인가 서로 협력적인가는 이 경계를 넘어 어떤 교류가 존재하는가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작용할 경우 접경지역은 경계를 넘어선 역동성으로 상호침투와 융합이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분단으로 민족과 조국이 양분돼 있는 남북의 경계는 분단의 결과이자 분단을 재생산하는 핵심 공간이지만, 그러기에 경계가 만나는 접경지역에서의 상호협력과 소통은 분단을 넘어서는 바로미터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미 접경지역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남북연결 도로와 철도 개설 등으로 평화 정착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었다. 잠시 멈춰섰던 걸음을 이제 다시 내디뎌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공단 금강산 등과 같은 접경지역에서의 협력은 남북당국간 정치적 협상과 회담의 결과이지만 그 과정은 남북 주민이 공동체적 질서를 구축해 삶의 과정에서 마음으로 좀 더 가까워지는 신뢰구축 작업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야 할 것이다.

특히 임동근은 “접경지역을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정치적 역동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각 부문을 연결하는 다기능(multi-function)을 수행하는 행위 주체의 등장과, 이들 간의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만드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개성공단의 경우 남한의 기계와 북한의 노동력이라는 단순한 구도였지, 평양-개성-서울을 오고가는 네트워크의 진화는 고려하지 않았었다”고 비판했다. “에너지, 물자, 사람, 정보 등 생태계를 구성하는 흐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무엇’이 접경지역을 오고가며 기존에 불가능했던 역동성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대상’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1】

 

. 남북 협력과 평화의 시발점으로서의 한강 하구

▣ ‘한강 하구’의 특수성- 경계의 소멸로서의 중립수역

○ 지리적 역사적 그리고 정치 군사적 의미의 한강하구

‘한강하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리적 풍경적인 개념으로 임진강 한강 예성강이 만나는 조강(祖江, 염하를 포함)과 서해가 만나는 수역을 말한다. 그러나 흔히 이 지역을 한강하구로 부르는 것은 꼭 들어맞지가 않는다. 정왕룡 김포시 의원 같은 이들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 맞는 조강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한강하구라는 보통명사적 용어 대신에 조강이라는 원명칭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강 예성강 등이 합쳐졌기에 더 이상 한강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며, 그 범위도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는 지점부터 서해로 흘러나가는 유도까지, 혹은 넓게 보자면 예성강 부근까지 한강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였다는 것이다.【2】 게다가 남북분단으로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잊혀진 이름이 되었으니 그 명칭의 복원은 분단을 넘어서려는 것이기도 하다. 조강은 글자 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강(祖江)이란 뜻으로, 흔히 총길이 514km에 달하는 한강이 조강에 이르러 그 수명을 다했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한강 하구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정치 군사적인 개념으로 정전협정상에 명시된 지역으로서의 의미다. 여기서 한강하구는 군사적으로 남쪽과 북쪽이 대치하는 적대적인 군사지역 가운데 정전협정 5항에 의해 규정된 수역이 된다. 정전협정은 이 수역을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흘러들어 만나는 수역으로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부터 서해 강화군 서도면 말도까지 67㎞로 구체적으로 명시해두고 있다.

정전 협정상에 규정된 이 ‘한강하구’(Han River Estuary)는 특별하다. 비무장지대(DMZ)의 다른 접경지역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반도 유일의 중립수역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제1조 5항은 다음과 같이 한강하구를 ‘군사분계선이 없는 자유항행 지대’로 규정하고 있다.

“한강하구의 수역으로 한쪽 강안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다른 한쪽 강안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 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행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

이 규정에 따르면 남북한의 민간선박은 한강하구를 자유 항행할 수 있고, 남이든 북이든 출항한 쪽이면 어디든 자유로이 입항할 수 있으며, 이는 정전협정에 규정된 육상의 비무장지대(DMZ)와 달리 한강하구가 중립지대(수역)라는 특수한 지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한강하구는 ‘한반도 남북 접경지대에서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지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위 지도에서 보듯이 많은 지도들과 그래픽이 이곳에도 군사분계선을 그어놓고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강하구 지역은 군사분계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항행을 보장하는 중립수역이다. 그런 점에서 보통 DMZ 바깥쪽에 설정되는 민통선도 한강하구에서는 법적 존재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 유엔사 관할권의 차등적 구조와 한강하구에 대한 법적 통제

정태욱 인하대 교수(법학)는 정전협정을 보면 유엔사의 이른바 군사통제에 근거한 관할권이 적용되는 비무장지대 및 접경지역의 범위는 이처럼 각 지역에서의 ‘군사적 필요’의 정도에 따라 차등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접경지역, 즉 육상의 비무장지대, 한강하구, 서해5도 수역들에 대한 정전협정의 규정과 유엔사의 관할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우선 비무장지대의 경우에는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정전협정 제1조 제1항)하기 위하여 민간인 출입과 왕래 자체를 금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강 수역(한강하구)의 경우에는 ‘쌍방의 민용 선박의 항행에 개방’하고, 다만, 그 ‘항행규칙을 규정하는’ 차원에서만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정전협정 제1조 제5항), 또 서해 5도 수역에서는 바다 자체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관할권을 정하지 않고, 다만, 섬들에 대한 군사통제만을 획정하고(정전협정 제2조 제13항 ㄴ목), 인접 해면을 존중하고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하게(정전협정 제2조 제15항) 하는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관할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다르다. 한강하구도 여전히 군사통제구역으로 존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정태욱 교수는 “군사적 통제구역이 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유엔사 관할권 행사의 결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적인 통제 상태와 법적인 통제구역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강하구가 법적으로 통제구역으로 돼 있는 것은, 정전 협정상의 통제가 아니라 남한의 국내법적 통제인데, ‘군사기지 및 시설 보호법’(군사시설 보호법은 폐지) 상의 민통선, 그리고 해양수산부가 제정한 선박조업 안전규칙 등에 의한 어로한계선이 그것이다. 이는 남한 당국이 육상의 비무장지대와 동일한 원칙을 한강하구에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러한 국내법적 통제는 정전협정이나 유엔사의 관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우리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해제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3】

물론 한강하구가 정전에 관한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한강하구가 정전협정의 적용 대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남북관계에서 한강하구는 무력 충돌의 위험 뿐만 아니라 70년대까지만 해도 적대행위가 빈발했다는 점에서 정전협정에서 한강 하구를 민간에 개방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그 구역에서 유엔사의 관할권 자체를 배제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한강하구가 유엔사의 관할 구역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허가권(관할권 행사)을 비무장지대에서의 그것과 같이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태욱 교수는 이를 “민간의 평화적 이용권을 확인하는 협력적 확인행위”로 표현했다. 유엔사가 부속협의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도 한 한강하구의 항행에 관한 정전협정 상의 민간선박 등록절차 등을 보건데 ‘금지를 해제하는’ 허가가 아니라, 단지 “자유의 행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휴전체제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 주는 절차라고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4】

 

▣ ‘한강 하구’의 미래- 남북협력을 통한 ‘한강의 기적’

○ 한강하구의 특수한 지위와 남북 협력의 가능성

한강하구는 특별한 지위에 있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군사적 통제 아래 있는 육상에서의 비무장지대와 서해(동해) 수역에서의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남북간의 군사적 갈등과 비교해 본다면 접경지역에서의 남북 협력을 추진하는데 가장 적합한 독특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국제법적으로 이러한 한강하구의 특수한 지위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선행적 실험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군사적 대결의 정전협정 체체를 넘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뤄가기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미국(유엔사) 중국 등의 관할에서 남북의 관할과 합의로 바뀌어야 하며, 그런 합의 절차(평화협정 체결)가 요구된다. 예컨대 기존 정전협정상의 군사분계선(MDL)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남북 불가침 경계선’으로, 군사정전위원회는 기본합의서의 ‘남북군사공동위원회’로 바뀌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한반도 평화관리 국제위원회’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정전협정 상의 한강하구는 이미 경계가 없는 중립수역이라는 지위에 있기에 그런 합의 이전에도 현재의 정전협정에 의거해 남북이 공동관리하는 데 합의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정전협정 상의 이러한 특수한 지위는 한강하구 사업이 남북관계의 부침이나 안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중립수역일 뿐만 아니라 북방한계선(NLL) 등 서해 동해에서의 경계 논란과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되고 있는 항행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따라 강의 본래 기능을 되찾는 남북 공유하천으로 만들어간다는 방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해 서해 동해 등의 해역에서는 중립수역임에도 이른바 유엔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정한 북방한계선이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로 남쪽이 북의 남하를 막는 군사적 남방한계선으로 고착화했으며, 이 북방한계선이 정전협정의 어디에도 근거가 없고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이 ‘불법적인 선’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군사적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남쪽이 이 북방한계선을 실효 지배의 경계선으로 고수한다면 노무현 정부에서의 서해평화협력지대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서해 해상에서의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 북이 동의할 수 있는 수역을 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방한계선은 이처럼 서해에서의 평화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딜레마가 되고 있다.

한강하구에서의 협력에 관한한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접경지역 협력에서 남쪽이 중요시한 철도 도로 연결에 대해 북은 상대적으로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륙으로 가는 육로나 철도 연결은 남이 단절돼 있던 것이지 북은 늘 연결돼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임진강 예성강 등을 통한 서해로의 자유로운 진출, 해주 등 서해에서의 항행 자유 등은 북 또한 매우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강하구의 이러한 정전협정 상의 특수한 지위 등 법적 지리적인 여건에 입각해 볼 때 한강하구야 말로 남북간에 가장 유망한 접경지역 협력 지대로 만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한강하구는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인 요충이자 물류의 중심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세력다툼의 전장이었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의 물자를 실어나르는 주요교통로였다. 병인, 신미양요 때는 프랑스, 미국 군함이 오르내렸고 분단이전 까지만 해도 임진강 예성강 한강은 살아 쉼쉬며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주요한 물길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전협정에서 한강하구 중립수역의 자유항행을 보장하고 있고, 한강(임진 예성강)이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요 뱃길의 하나였다는 관점에서 이곳의 포구를 복원해 뱃길을 여는 사업은 본래의 강을 되찾아가는 일이자 분단을 넘어서는 본래 하나였던 삶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으로서 최우선적 과제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5】

 

○ 생물 다양성의 기수역(汽水域)이자 남쪽의 마지막 자연하구

생태 환경적으로 본다면 한강하구는 남쪽에서는 이제 마지막 남은 자연하구다. 특히 바닷물과 강물이 하루에 두번씩 교차하며 뒤섞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이 지역은 기수역(汽水域)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공존하는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습지와 뻘 등이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 경로의 주요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북의 황해 연안 지대와 함께 이곳은 연중 일부를 한반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여타 대양주 아시아 지역에서 보내고 여름 번식기를 위해 시베리아 알래스카로 날아가는 세계적인 철새 이동경로의 하나다.

한강하구에는 예로부터 황복, 웅어, 농어, 새우, 뱀장어, 숭어 등이 풍부했으며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노랑부리 백로 등이 서식한다. 특히 황복과 웅어는 예로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올려 보내는 귀한 물고기였다. 갈대밭에 서식하는 웅어는 환경파괴 등으로 많이 사라져버렸으나, 바다에서 잡히는 일반 복들과 달리, 강에서 잡히는 유일한 민물복어인 황복은 고가의 ‘황금물고기’로 지금도 임진강의 명물이 되고 있다. 특히 장어는 현재 한강하구 어민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 흔히 풍천(風川) 장어라고 하면 풍천이라는 지명의 장어로 혼동하는데 본래 풍천이라고 하는 지역 또는 마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짠물)이 하루에 두번씩 밀물로 들어올 때 바람이 함께 들어와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을 풍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곳(짠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는 곳)에서 생산되는 장어를 바람이 함께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풍천 장어’라고 하는 것이다.

남북이 이 지역의 생태 서식 실태를 파악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환경 생태적인 차원에서도 공동 관리와 보호를 위한 긴밀한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자연적으로 방치된 상태가 아닌 강의 수자원 기능과 수로 항행 기능이 보장되고 인간으로부터 차단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생태적 가치를 유지하도록 관리하고 보호하는 적극적 환경보호와 평화적 이용의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강하구 뱃길 및 주운 활성화, 포구의 복원, 한강과 서해의 연결, 홍수 방지와 같은 핵심적 사업은 생태환경 가치의 보존과 함께 병행될 필요가 있다.

 

○ 다시 시작하는 한반도 평화

한강하구의 평화는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돼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이후에 가능한 사업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상호 호혜와 신뢰의 구축을 통해 협력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업이다. 즉 평화를 유지하고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사업으로서 의미가 있으며. 우선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민간 선박의 자유항행(뱃길 열기)을 그 맨 앞에 두려는 것은 앞서 살펴봤듯이 정전협정에서 이미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강 하구 중립 수역에 대한 뱃길 수로 및 생태 환경 조사는 이 자유 항행을 위한 선결 조건인 셈이다. 아울러 이 생태 환경 수로조사는 자체로 이 지역의 자유항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길을 열어가는 일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인 셈이다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안전 조처 등 항로 개설에 필요한 절차와 관행을 확립해 정전협정이 보장한 민간선박이 오가게 된다면, 문재인 정부가 판문점 정상회담 이래 내건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구호에 걸맞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유엔제재 아래서도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수도권 장기발전 구상과 서해 해상 평화 벨트와의 연계

이러한 한강하구의 복원 및 남북의 평화적 활용은 남북간 긴장 완화 및 접경지역 남북교류협력 활성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남쪽 내부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강하구 주변 지역 사회들의 발전을 이끌어 나가는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북은 북대로 임진강, 예성강, 사천강을 통해 개성 등 황해도 내륙지역의 서해로의 출구를 확보하면서, 서해 NLL을 둘러싼 영해 논란을 우회해서 한강하구를 통한 자유항행으로 서해에서의 통항의 자유를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서해 5도와 인접한 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강령 녹색시범구, 해주항 개발 등 황해도의 개발과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과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기조에서 볼 때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수도권의 과밀과 서울 집중을 완화하는 균형발전의 광역 수도권(메가 폴리스) 전략을 결합시켜 추진하는 비전이 될 수고 있을 것이다.【6】 지난 30년간 시행된 수도권 종합개발계획 및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정책과 규제의 성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대체적인 평가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인구와 산업의 분산이라는 정책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수도권과 지방이 모두 만족하지 못해서 국토 균형발전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남한 유일의 자연하구인 한강의 옛 뱃길을 복원하여 분단된 한강(조강)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길은 넓고 길게 본다면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자, 반쪽이 아닌 남북을 아우르는 온전한 의미에서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1】 임동근 한국 교원대(국토지리학), 접경지역시군구협의회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공동주최, ‘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접경지역 협력’ 1세션(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계를 넘어선 협력의 모색) 토론문. 2018년 6월 27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2】 정왕룡 김포시 의원, 신년특집 김포 통일시대를 꿈꾸다 <김포저널> 2015년 1월8일.

【3】 정태욱 인하대 교수(법학) ‘한강하구에 관한 유엔사의 관할권’, ‘7.27 한강하구 평화 배 띄우기 조직위원회’ 주최의 “한강하구의 평화정착과 생태‧평화적 발전전략” 토론회 발표문 2007년 6월20일.

【4】 한강 하구의 항행규칙은 제8차 정전협정 후속 합의서인 <한강 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1953.10.3.)> 제6항 (민간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사용하여 온 한강 하구 수역 내에 성문화되지 않은 항행규칙과 습관은 정전협정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쌍방 선박이 이를 존중한다)에 규정돼 있다. 이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에서 정했으며, 다른 비무장지대의 경우 민간인의 출입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면, 한강하구는 규정에 근거해 등록된 민간선박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불허할 뿐 원칙적으로 항행을 허용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5】 생태 교란, 선박의 항행의 안전등 논란이 되고 있는 신곡수중보 철거여부 문제도 생태적 관점만이 아니라 닫혀 있는 한강을 열어 온전히 복원하는 자유로운 항행의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처럼 한강 및 수도권과 관련한 많은 사업계획 및 환경 생태관련 사업은 남북의 한강하구 공동관리의 관점에서 재검토되고 그런 방향에서의 장기 전망 아래 추진돼야 할 것임. 일단 당면 과제는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을 통한 한강 뱃길의 복원이라는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음.

【6】 김동성 외(2017). 『한강하구 평화적 활용을 위한 경기도 주요과제 연구』, 경기연구원, p. 174.

 

2020-06-05.

강태호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장, 전 한겨레 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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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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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브레튼-우드 회의에서 케인즈는 Bancor라는 초국적의 화폐를 사용하는 국제관리기구(int’l clearing house)를 설립을 제안하였는데, Bancor라는 화폐개념은 연구동료인 슈마허 교수와 함께 1940-1952년간에 국제무역과 금융결제의 수단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가 대표로 참석한 영국의 제안은 미국의 거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Greenback”은 미국달러 지폐에 대한 별칭이다

이는 미국이 강력한 대국으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선진국가들의 경제력 절반을 차지하는 제1의 채권국가이면서 무역흑자를 가장 크게 내는 나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미국이 제안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설립과 페그PEGG(주요 통화들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평균치를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한 고정환율제도가 도입되었다.

IMF는 국제간 거래를 관리하는 기구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미국은 17%(현재까지도)이상의 지분을 지닌 대주주국가가 되었다.

국가 간의 환율은 금과 연동된 달러에 기반하면서 이는 명시적으로 미국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Greenback은 금과 동일하다’는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로써 모든 국가들은 미국달러(The Greenback)를 무역거래와 부채상환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상품을 선적하고 관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의 효율은 제고되었고 경제성장의 촉진을 가져 왔다. 국제기축통화로서 달러를 보유한 미국은 국제적 강대국으로 지급 불이행의 염려가 없이 국제자본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정부의 채권은 국제금융자산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는데, 이는 액면가치와 이자율을 미국달러로 상환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달러는 지구에서 가장 안전환 통화로 간주되었다(현재까지도).

만약 중국이 소유하고 있는 1조 달러어치 미국채권을 매각하고자 하면, 미국이 할 일은 채권을 구매하는 나라들에게 지급할 달러를 인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이자율이 오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는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재앙이 되겠지만, 어찌하든 미국은 채무에서 해방되어 있는 국가인 셈이다. 반면에 중국은 평가절하된 Greenback을 손에 쥐게 되거나, 미국에 대한 채무부담을 효과적으로 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에 일본의 엔화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에 미국은 플라자합의라는 명분으로 일본 엔화를 절상시키도록 강압하여 달러로 이루어진 직접투자가치의 33%를 축소시켰다. 미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역시 같은 비율로 줄어들었고, 일본은 그만큼 가난해진 셈이다.

미국은 모든 정권을 통하여 제재대상 국가들에게 기축통화라는 수단을 특권으로 악용하여 왔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은 자신이 제제의 대상으로 삼은 이란과 거래를 지속하는 유럽의 기업들에게 SWIFT(국제결제창구)와 같은 달러기반의 결제 플랫홈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러한 협박은 궁지에 몰린 이슬람공화국(이란)의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유럽 국가들의 사업기회를 잠식하였다.

최근 사례로는 중국인민은행과 홍콩자치행정부에 대한 제재를 둘 수 있다. 홍콩에 대한 중국본토의 국가안전법 확대적용에 대하여 홍콩자치행정부가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사용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축통화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의 달러를 기반으로 설립된 국제기구들(IMF와 세계은행 등)과 금융제도들을 통제하고 국제간의 금융거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더욱이 채무국가들에게 워싱턴 컨센서스(1989년에 영국경제학자인 J. Williamson이 명명했다)의 채무제공조건으로 경제불황에도 재정긴축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자유무역을 강요하며, 공공자산의 민영화를 강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남아메리카 그라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채무국가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빌린 채무부담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채무국가들은 경제회복을 위하여 재정적자의 운용 또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금지하면서 취약한 경제는 승수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재정수입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현재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 더 많은 채무를 빌려야 하는 “채무의 함정” 순환에 손쉽게 빠져들게 된다 (편집자: 이에 더하여 채무상황은 반드시 평가절상된 달러로 해야만 하는 이중의 불평등이 작동한다).

이렇게 미국이 경제와 금융의 권력과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악용하는 것에 대하여 중국의 전직 인민은행장(Zhou Xiaochuan)이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 대신에 IMF의 특별인출권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Zhou은행장의 제안은 미국이 개발국가들의 독자적인 경제개발과 외교정책의 권리에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횡포를 방지하자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17% 이상 소유하면서, 현재의 정책 방향을 수정하는데 필요한 특별조항인 85% 이상의 결의조건을 요구하는데, 이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인출권이 새로운 기축통화의 후보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주요 경제권은 함께 협력하여 달러와 미국의 영향아래 있는 IMF 및 세계은행과는 독립된 별도의 새로운 국제통화방식을 설정해야 한다. 새로운 통화의 가치는 협력하는 회원국가들의 가중치평균(페그방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회원국가들은 경제의 규모에 따라 무역과 금융의 결제를 위한 신용한도의 할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느 회원국가의 상황이 신용한도를 넘어서는 자금지원이 필요한 경우에,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부채의 함정’을 방지하는 선에서 추가적인 채무제공이 가능해야 한다.

미국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이로써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제적 경제질서와 금융시스템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출처: Asia Times on 2020-07-10.

Ken Moak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의 여러 유수대학에서 경제이론과 국제정치에 관련하여 화제의 저명한 강연을 진행하였고, 현재 Asia Times의 편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 ‘중국경제의 굴기와 국제사회의 충격’을 출간하였다

월, 2020/08/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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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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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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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가 되자 일반 가정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전화회선으로 거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한정된 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슈퍼에서 사온 딱딱한 두부를 요리해서 둘이서 먹었다. 독일인 지인은 “두부는 인터넷 같다.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고 먹어 볼 기회도 없었는데 지금은 없는 곳이 없어 모두가 두부를 먹는다” 며 인터넷과 두부가 사회에 침투하는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의 보급도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정보화 사회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편리함의 중독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물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의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나도 아무런 악의 없이 단지 흥미위주로 성범죄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던 중에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사에 ‘범인은 재일교포’ ‘한국과 북한은 성범죄대국’이라는 문자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가벼운 생각과 무지가 얼마만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괴롭히고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유럽 등 서양을 동경했고 실제로 프랑스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 지인도 생기고 가끔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젊었을 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향되고 무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는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한국인은 일본인을 아주 오픈 마인드로 대해주고 일본인이 한반도를 통치했던 역사에 대해서도 이를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일본의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한일 간의 여러 가지 문제가 실은 전쟁 비즈니스를 획책하는 일본 정부가 이를 선동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가와나카 씨도 조선학교에 가보세요”라는 한국에 사는 페스트리치 씨에게 권유를 받았을 때, “네”라고 짧게 대답은 했으나 전혀 모르는 타인인 내가 조선학교를 찾아가면 과연 학교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의 목적이 인터뷰로 정해졌을 때 지금까지 품어왔던 거리감 같은 것이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일본인이 갖고 있는 차별적 사고를 조금은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던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나라와 지자체로부터 차별을 받아 가나가와현 내의 외국인학교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업료 무상화제도를 적용받지 못하고, 현은 이 학교를 포함해 다섯 개 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에 대한 학비보조를 2016년 이후 정지했다. 이에 대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은 요코하마 시내의 모처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라와 자치단체에서 솔선해서 차별을 하고, 국민의 차별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관제 헤이트다.”라며 이를 비판했다.

내가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를 방문했을 때 김찬욱(金燦旭)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넓은 교내를 구경시켜주며 wifi 배선 등도 졸업생과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자신들이 직접 깔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높고도 넓은 천정에 저렇게 긴 배선을 깔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릴텐데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것을 직접 해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에서는 특히 어학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조선어, 일본어, 영어의 세 언어를 철저히 배운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 언어의 검정시험의 자격보유를 목표로 하여 어려운 공부를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한다. 일본 학교가 도입하기도 전에 정보교육을 실시하고, 정보리터러시 등을 배워 스스로 정보를 발신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라고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그것은 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 일부인데, 무엇보다도 이 학교의 교육방침의 기본 베이스는 서로 돕는, 무언가를 잘하는 학생은 그렇지 못한 학생을 돕는, 상조(相助)의 정신을 기조로 한, 조선민족으로서의 마음과 자부심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과의 잡담에서, “장래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물으니 어떤 학생이 “이 조선학교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수줍어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김찬욱 교장선생님에게 들려주자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학교 걱정을 하다니, 이런 건 원래 안 해도 되는 건데요…”라고 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많은 학부형과 졸업생들의 도움에 의해 운영되기도 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봤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의식하고 있는 걸까.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학생들의 의견은 김찬욱 교장선생님을 위시로 한 이 학교 선생님들의 교육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조선민족의 상조 정신이 계승되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교내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로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 전철 안에서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는 이곳에서는 털끝만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수업을 견학해보니 학생들은 지진재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자든지, 인사는 중요함으로 특히 손윗사람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든지 하는 주제를 자신들이 직접 정해 발표를 하고, 음악수업에서는 아카페라로 합창을 하며 서로 웃거나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학교와는 조금 다르게 느낀 점은 발표 전에는 학생들이 다소 떠들거나 장난을 치더라도 선생님은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같이 웃으며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느꼈다.

내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도 감정적인 발언이 아닌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결코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태도는 김찬욱 교장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볼 수가 있어서 조금 놀랐다.

예를 들면 많은 일본인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라든지, 징용공의 문제라든지, 전쟁책임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왠지 우리들을 일방적으로 힐문(詰問)한다고 느끼는 건지, 이미 해결이 다 끝난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 문제시 삼는 조선민족은 질이 좋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인 의견이 많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속해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든지, 필요악이었다는 등의 실언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도 “한국 측 태도가 나쁘니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 학생이 “우리들은 사상이랄까,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제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갖고 서로 이야기를 한다면 편향된 정보에 현혹됨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우리들 일본인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무지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무지 –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만연케 하고 있는지. 예전의 나는 단순히 인터넷에 실려 있던 정보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편향된 사고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안다’는 것의 중요함조차 ‘몰랐던’ 것이다.

10대 때도 병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내 가족이 내밀어준 손도 보지 못하고 가족에 대해 못된 짓을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야말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이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채 못된 짓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와 겹쳐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배려와 공정한 시선이라는 것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완고해져버린 사람의 마음은 실패를 실패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찬욱 교장선생님과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의 학생들은 차별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본인과 평소와 같이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 ‘학교를 열린 장으로 해서 많은 일본인이 찾아와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안심하려 드는 사람들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자기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다면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이 차별하는 상대인 재일조선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들은 차별을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냉정하고 공정하게 대해줄 터이니.

학교를 떠날 때 “언제든지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준 김창욱 교장선생님과 밖에서 놀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또 인사를 해준 학생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마음을 그들이 ‘조선민족의 자부심’으로써 교육에 도입하여 끊임없이 계승하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그들을 만나보면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의 중단과 무상화제도에서 제외한 정부와 자치단체의 모든 대응이 잘 짜여진 비지네스와 같은 차별의 실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가와나카 요

아시아인스티튜트 연구원

수, 2019/03/2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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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NYT에 실린 내용으로 기고자는 현재의 위기에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구제지원을 선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생산적인 논쟁을 위하여 게재를 결정했다.

우리는 지난 IMF 시기와는 달리하여 은행과 거대 기업에 지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대신, 수요자인 시민들과 중소기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무제한적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거래은행은 해당산업의 지원과 존폐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이번 위기를 미래의 일상적 혁신을 위해 대규모 산업구조조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기업과 은행의 파산에 대응하면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이들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되 경제가 정상화된 이후, 시장에 재매각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실직을 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연방의회는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려고 이미 3조 달러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추가의 금액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에 신속하고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대하여 다른 정치적인 견해들이 분노와 함께 돌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그리고 일반시민 사이에 잠재적인 불황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여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좌파적 정치인들은 거대기업들이 연방정부의 지원혜택을 받거나 연방준비제도가 공급하는 초저금리의 신용공여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에 속하는 측은 연방행정부가 주정부나 지방정부를 지원하거나,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여론매체들은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이나 사설학원같이 자격미달인 조직들에게 지원금이 투입되는 것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엔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제로-섬 게임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곤궁에 빠진 개인과 기업 그리고 공조직에 대한 연방정부의 대응수단을 제한하고 지원을 중단시킬 잠재성을 지닌다.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친구들은 주정부나 지방도시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재 해밀톤 전략연구소의 파트너를 일하고 있는 Tony Fratto는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간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들 각자의 견해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고통의 결과물들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금융위기와 후유증을 겪은 지금은 물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급한 사항이다.

지난 위기 과정에, 보수주의자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담보조건으로 융자해준 사실을 비난한다. 당시의 은행들은 거대한 ‘모랄-해저드’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금융조직들이 부동산 저당의 거품에 자금을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결과에 대해 전액의 구제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Covid-19에 대하여 같은 내용으로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주택버블과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금융회사들이 구제지원을 받은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번의 사태는 경우가 다르다”고 자유 루스벨트 재단의 연구원인 Mike Konczal은 주장한다.

금융위기 상황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기업들이 코로나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분야와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이를 묵살하고 있는데 이들은 과거에 구제를 받았던 기업들이, 지난 수 년간 바이-백을 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높이는 행동을 보여 왔다며, 이제 다시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터트린다.

이런 비판에 앞장서온 Oaktree Capital의 Howard Marks는 최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비도덕인 행위를 한 기업을 정부가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이는 분명히 ‘모랄-해저드’에 해당한다. 이들 조직과 관련 투자자들은 고통에서 보호를 받겠지만 이는 아주 나쁜 사례를 남기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 특히 부채가 많아 충격에 취약한 조직들이 우선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겠지만, 동시에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충격에는 어떤 기업조직도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연방준비제도가 기업채권에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많은 기업조직들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간의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서 파산에 이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파산은 부실기업을 주주로부터 분리시켜 신용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대해 정부가 온전히 방관으로 일관하면 파산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결과적으로 일하는 미국시민들과 경제전반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경제가 좋은 호시절에도 파산의 정리과정에서 신용제공자(채권은행)와 노동조합 또는 노동계약자들 간에 협상을 통하여 퇴직보상이 없는 정리해고를 자주 허용하기도 한다. 여러 산업분야를 관통하며 수 천개의 기업들이 상법 제11조의 파산신청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이로 인해 파산법정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고, 구조조정의 기간 동안 조업을 지속하도록 하는 부채정리의 과정이 지연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우량기업들이 살아남기 보다는 청산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이은 파산사태는 부채에 시달려온 투자자들이 헐값에 가치있는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며, 산업이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잘못된 경제관계를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경제상황에서는 파산이 창조적인 파괴의 선순환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파괴가 거대한 조업중단과 폐업을 야기할 것이다”라고 경제혁신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John Lettieri는 이야기한다.

비슷한 논리가 연방정부 구제지원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다.

상원의 주류인 공화당 총무인 Mitch McConnell은 지난 4월의 한 인터뷰에서 현금유동성이 부족한 주정부들을 파산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중에 그런 입장에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와 공화당 동료들은 민주당 소속의 주정부들이, 한편에서는 대규모 공공실업연금의 의무를 시행하면서, 연방정부의 구제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주정부들이, 위기 이전에는 건전한 재무상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세수가 격감하면서 향후 수년간 재정지출을 심각하게 축소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민간분야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경제가 정상화되는 것이 지연될 수 있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대상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도,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중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지불보호정책을 서명하는 주정부들의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우선적으로 3,500억불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연방의회의 결정여부에 있으며, 문제는 상기 금액으로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지불을 충당하는데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자금의 집행으로는 부족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규모의 스테이크 체인사업체들뿐만 아니라, 벤처지원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원할 가치가 있는 조직들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 만개의 기업들 중에 섞여 일부 불량기업이 구제지원 자금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사람들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다는 식으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접근하는 것이라고 Lettieri는 말한다.

팬데믹에는 도덕적 기준이 없다. 경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공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고 분노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2020-05-04.

Neil Irwin

뉴욕타임즈 경제칼럼 기고가

수, 2020/05/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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