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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를 들어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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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를 들어다 보기

admin | 금, 2020/09/25- 19:12

백악관의 수석전략가 출신인 스티브 배넌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을 분쇄시키자며 ‘전쟁-위원회’를 함께 구성하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때마침, 지난 6월말부터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직설적인 공격발언을 이어왔다. 안보보좌관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FBI 국장인 크리스토퍼 워레이, 법무장관 윌리엄 바 그리고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까지 가세하여 공산당을 전복시키라는 트럼프의 지시에 따라 “최악의 4인방” 발언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미국 행정부는 중국과 양자관계를 단절하고자 구체적인 공세를 개시하면서, 휴스턴에 있는 중국 영사관을 폐쇄시켰고, 보건부 장관인 알렉스 아자르가 대만을 공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중국의 온라인 매체인 Tiktok과 Wechat의 미국 내 운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미국에 대한 일대일 대응전략(tit for tat)과 보복전략인 이랑전사(wolf-warrior)방식 대신에, 중국의 실제반응은 놀랍게도 타협적이고 차분하였다.

지난 8월5일 신화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외교부장인 왕이는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어떤 수준이든 언제 어디서라도 대화를 통해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자는 제안을 역으로 제시하였다.

이틀 뒤에는 중국공산당 최고위직으로 외교관계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양제츠 상무위원은 기고를 통하여 “역사를 회상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미중의 우호적 관계를 확고히 지키고 안정시키자”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양 상무위원은 닉슨 행정부에서 시작된 미국의 중국 포용정책이라는 전례의 신화를 치세우면서 모든 방면에서 양국의 호혜적 협력을 촉구하였다.

문제는 중국의 우의적 외교정책이 너무나 늦게 내용도 없이 제기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누구도 이러한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북경당국의 대화제안은 ‘소귀에 경읽기’ 식으로 워싱턴은 어떠한 대화도 중국측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외교정책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다음의 3가지 사항을 전달하고자 의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첫 째는, 중국은 미국과 냉전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과거의 소련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며 패권국가인 미국을 대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혔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희망을 담은 생각으로 양국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다. 중국은 과거 미국과 소련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갔던 냉전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미국에게 조언하고 있다.

왕이 부장과 양제츠 상무위원은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하였던 과거의 호시절을 다시 조명하면서, 양국의 이념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협력하며 공존한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는 미국의 ‘4인방’이 던진 펀치를 태극권 방식으로 가볍게 피해가려는 대응이다.

두 번째의 메시지는 미국 독자적으로 냉전을 치를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5-eyes 국가들 즉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과 캐나다 등에게 중국은 미국과 새로운 냉전을 시작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린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타협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미국이 반-중국 동맹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무마하려고 한다. 중국의 냉전거부 노력은 왕이 부장이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순방에 나선 것으로도 확인된다.

미국의 동맹을 자처하는 국가들은 ‘4인방’이 제시한대로 냉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인지, 반대로 ‘4 인방’의 제안이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단기간의 대결을 통해서 장기판 방식의 승부(장군!)를 거는 반면에, 중국의 지도자는 바둑 방식의 셈법에 따라 향후 자신들의 위상에 유리한 경로를 찾아가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단기간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당장의 커다란 위험을 회피하는 개임을 추구한다.

마지막 세 번째의 메시지는 미중 간의 잠재적인 대결이 가져다 주는 위험에 대하여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근 미국대선을 앞둔 시기에 아시아-태평양에서 물리적 충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략적인 오판 혹은 군사적인 실수로 인하여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또는 대만해협 등에서 열전 또는 핵대결이라는 잠재적 위협이 존재한다.

중국 최고위직 외교관들은 중국이 가지는 인내의 한계선은 공산당의 규칙준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보사부장관인 아지르가 대만을 공식 방문하면서, 중국은 대만해협을 둘러싼 대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하거나,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타격하는 미사일 시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편집자 주, 최근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유교적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기준(명분)을 상실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팬데믹이 창궐하는 가운데, 국제적인 긴밀한 협력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중국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자중지란에 빠져있다.

과연 중국이 상기 메시지들로써 미국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을까? 중국이 자신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부드러운(점잖은) 방식으로 상황을 대응할 수 있을까? 오는 11월 미국 대선이 미중 관계의 향후 진행에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자칫 우발적 사고를 통해서 전쟁사태에 돌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 동아시아포럼EAF in ANU on 2020-09-01.

Kai He

호주 Griffith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이며, 당 대학의 아시아 센터 및 공공정책 연구소의 책임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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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지지’? 잘못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 땅 고위 관료의 희화화된 자화상

관료의 대표자 격인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은 지난달 ‘지지지지’ 발언을 해 ‘지지지지’란 말이 한동안 회자된 바 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담백하게 나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연하고 담백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부터 늘 가슴에 지지지지(知止止止)의 심정을 담고 하루 하루 뚜벅뚜벅 걸어왔고 또 걸어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기재부 직원들의 뛰어난 역량과 고귀한 열정, 그리고 책임감있는 사명감과 사투의지를 믿고 응원합니다.” – 2월 2일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 페이스북 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잘못된 말’이다.

이 ‘지지지지’란 말은 유명한 국문학자 정민 교수가 조선일보에 쓴 기고문이 그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앞의 ‘지지(知止)’는 알려진 대로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뒤의 ‘지지(止止)’에 대해 정민 교수는 그 기고문에서 “고려 때 이규보는 자신의 당호를 지지헌(止止軒)으로 지었다. 지지(止止)는 ‘주역’ 간괘(艮卦) 초일(初一)에서 “그칠 곳에 그치니 안이 밝아 허물이 없다(止于止, 內明無咎)”고 한 데서 나왔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오류다. <주역>이 아니고 <주역>을 모방한 <태현경>이라는 일종의 궤변서로서 쉽게 말하면 ‘짝퉁 주역’이며, 그 책에 나오는 止于止라는 어귀에서 止止를 끌어내 앞의 지지(知止)에 자의적으로 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언어유희에 불과한 ‘억지 말’이요 ‘엉터리 말’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자’를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서 오히려 그로써 ‘헛된’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지지지지’, 이 땅 고위 관료들의 희화화된 자화상이다.

 

고위 공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시켜야

말단 직급에서 차관이나 장관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 인물’이 미담으로 소개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공직 사회의 후진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공직에서 국장급 이상의 직위는 우리처럼 기본적으로 관료 출신이 자동 승진하여 당연히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 정무직(政務職)으로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공무원들은 대부분 국장급 아래의 직위에서 멈춘다.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정부가 바뀌면 정부 국장급까지 정무직(political appointees)으로서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최고위층 공무원은 EL-Ⅰ에서 EL-Ⅴ까지 5등급으로 분류된다(EL= Executive Level).

EL-Ⅰ: Secretary(장관)

EL-Ⅱ: Deputy Secretary(부장관)

EL-Ⅲ: Under Secretary(차관)

EL-Ⅳ: Assistant Secretary(차관보)

EL-Ⅴ: Deputy Assistant Secretary(국장급)

프랑스 역시 중앙부처의 국장, 임명직 도지사, 교육감, 대사 등 500여 개의 직위가 정치적 임명직(자유재량 임명직)으로서 국무회의 심의 심사를 거쳐 특별 채용하는 등 대통령은 총 7만 여 개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대통령의 정무직 공무원 임명권을 제한하는 것은 통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인 기존 경력직 공무원의 강력하고 뿌리 깊은 관료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차제에 우리나라도 (탁월한 역량을 보유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국장급 이상의 고위직군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으로 구성하는 방안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직업 공무원들이 독점하는 고위공무원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하여 3급 이상 고위 관료군의 문호를 모든 국민에게 개방해야 한다. 이는 유능한 인재 채용의 길이며, 동시에 ‘영혼 없는 관료 현상’의 방지를 위한 실질적 방안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영토, 그들만의 금자탑

관료 조직은 외부에서의 진입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지금은 5급 공채로 그 이름만 바꾼 고시 출신의 성골을 비롯하여 진골 그리고 육두품 등등의 차별과 장벽의 철옹성으로 둘러쳐진 이너서클의 조직이다. 온전히 그들만의 영토이고 그 영토 안에서 승진을 매개로 하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vertical) 문화와 관행으로만 ‘잘 훈육된’ 구성원이 존재하며, 그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금자탑이다. 그들이 곧 규칙과 룰(rule)의 제정자다.

무엇보다도 민간전문가를 포함하는 일반 국민들의 공무원으로의 진입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공무담임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비단 국가시스템 운용의 합리성 제고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국민주권 강화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 제도의 폐쇄적이며 경직된 구조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외부 개방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정신에도 부합된다. 이는 격변하는 현대의 지식 정보 사회에서 각 분야에 있는 우수 인력에게 국가 관리의 기회를 제공하며, 특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박탈’된 많은 우수 인력들에게 일종의 ‘패자 부활전’의 장(場)을 열어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무원이란 영어로 ‘public servant’로서 문자 그대로 국민을 위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며, 한자어로는 ‘국민의 종’이라는 뜻의 ‘공복(公僕)’이다. 우리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정년 보장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정파를 초월하여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라는 의미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과연 공무원에 대한 이러한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공무원의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헌법이 규정한 바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게 만드는 제도적 온상이 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LH 사태, 빙산의 일각일 뿐

최근 우연히 드러난 LH 투기꾼 공사직원들 사태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땅의 관료집단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과 발 맞춰 성장해왔다. 그들은 겉으로만 봐서는 정치 권력의 하수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 세력들이 정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관료들이 챙겨주는 ‘떡고물’과 낙하산 자리 손에 넣을 때, 그 나머지 대부분의 실속은 관료들의 차지다. 그들은 그렇게 정치 권력에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한편 아래로는 시민 세력을 완강하게 억압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높다란 장벽을 치고 감시와 견제의 철저한 부재, 혹은 그 유명무실 속에서 전현직 모두 어울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정치 권력은 원래부터 관료개혁에 의지도 없지만, 더구나 관료들의 도움 없이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언제나 관료를 우군으로 여긴다. 그렇게 관료공화국의 철옹성은 더욱 강고해진다.

정치 권력은 여전히 관료개혁에 대해 아무런 의지도 없고 시민 세력 역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지 않는 한, 이 땅의 관료공화국은 반근착절(盤根錯節), 계속 번성할 것이다.

 

소준섭

화, 2021/03/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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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파트 값 폭등은 민주당의 지지율을 곤두박치게 만들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신도시 건설 등을 대책으로 세웠으나 이 과정에서 LH공사의 일부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신도시 건설 예정 지구에 땅을 사전 구입하여 투기를 하였다는게 드러나고 이 사건은 모든 공무원들과 선출직, 임명직 공직자들의 땅 투기와 농지보유 실태 조사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방치되거나 외면되어 왔던 농지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헌법 제 121조 1항은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되어 있다.

농지는 농사짓는 사람이 소유하고 농지를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제도는 금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헌법은 이렇게 농지의 소유와 이용을 농업 생산에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비농민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위법에 틈새를 만들어 놓았으며 또 실제로 농사를 짓지 않으나 농사를 짓는 것처럼 위장하여 농지를 소유하는 불법 소유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전체 농지의 절반이 비농민 소유로 되어 있다. 남의 이름을 빌려서 소유하는 명의 신탁 농지까지 포함하면 전체 농지의 70% 이상이 농민이 아닌 사람에게 넘어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이렇게 까지 훼손되면서 비농민이 농지를 취득하는 이유가 뭘까?

이 답은 이번 LH공사의 직원들이 불·탈법적으로 농지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투자 불문율은 ‘돈을 땅에다 묻어 놓으면 손해보는 법은 없다’이다. 생산의 삼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농업이외의 산업도 땅이 있어야 하고 주거나 사무실 기타 인간의 산업 활동에는 땅이 필요하다. 도시가 확대되어 새로운 주거단지나 산업단지를 조성하려면 땅이 있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땅은 산이나 농지를 전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동안 농지를 전용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보상비가 지급되거나 지가의 상승으로 엄청난 차액을 실현하면서 ‘부동산공화국’이라는 오명도 생기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아파트나 땅을 사 놨다가 졸부가 되는 사람을 보면서 박탈감과 열패감을 가지고 사회를 원망하게 된다.

이렇게 농지(토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투자금액의 몇 배가 되는 보상으로 응답할 것이라는 비정상적인 상식이 농민이 아닌 사람을 농지 구매자로 만들고 있다.

땅을 통한 손쉬운 불로소득이 있으니 농지는 농사를 짓는 땅이 아니라 투자 대상, 언젠가 개발이 되면 큰 돈을 벌어줄 ‘황금알을 낳을 거위’가 되는 것이다.

이런 불로소득, 왕창 떼돈의 사례가 이번 LH공사 직원들의 내부 정보를 이용해 농지를 매입한 일이다. 이 일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심각한 불신을 만들기는 했지만 기실 농지를 갖고 싶고 부동산을 통한 일확천금은 할 수가 없어서 못하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서울의 아파트 부족 문제, 농지의 비농민 소유와 훼손의 문제는 지금 사회적 이슈로 올라와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다. 언론과 연구자, 부동산 운동가들은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농지의 불·탈법 투기와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한 칼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수도권 집중화 특히 서울 시민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경제의 서울 집중을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풀기 어려운 일이다.

농지 문제 해결은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지금은 농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만들까를 준비해야 한다.

헌법의 경자유전의 원칙은 이미 사문화 되어 있으니 앞으로 개헌을 할 때 이 조항을 없애자는 주장들이 꽤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사문화되었다는 이 조항을 아예 헌법에서 제외하면 어떻게 될까? 이건 가까운 대만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대만이 헌법에서 경자유전의 원칙을 없애자 바로 농지값이 일곱배 정도 뛰었고 이제 농지는 거의 다 비농민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농민은 언제 농토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시설투자를 할 수도 없다.

대만 사례를 보면 헌법 조항은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비농민들이 더 이상 농지 소유를 유지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고 제도를 고쳐서 농지를 농민들이 소유하거나 공적 소유로 바꿔야 한다.

상속이나 이농으로 영농을 하지 않는 농지 소유자에게는 처분의무를 부과하고 주말체험 목적의 농지도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지방정부가 이를 사들여 텃밭 농사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임대하여야 한다. 또 차명 소유 농지는 기한을 정해서 그 기간 안에 처분하지 않으면 등기권자의 권리를 인정하게 한다. 이미 농지 가격은 농사를 지어서 매입자금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서 법과 제도를 고친다 하더라도 농민들 특히 신규 창업농들이 농지를 구입하기는 쉽지 않다. 비농민 소유 농지를 농민들이 매입하기 어렵다면 지방 정부와 한국농어촌공사의 농지은행이 이를 매입하고 농민들에게 장기임대를 하여 안정적인 영농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농민들 중 자식에게 농업을 승계하는 농가는 5%도 채 안된다. 그 5%의 승계농들도 대부분 한우나 젖소, 돼지, 닭 등 대규모 축산농가이거나 수 만평 이상 쌀농사를 짓는 농가들이다. 그 외의 품목이나 농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규농에게 맡겨야 하는데 농촌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에는 이들이 감당해야할 부담과 몫이 적지 않다. 주거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농사를 지어서 바로 수익이 나지 않으니 1~2년은 먹고 살 생활비가 있어야 한다.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40% 대 초반인 식량자급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비어가는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농지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힘이 떨어져 가는 지금 정부에서 강력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기 어렵다면 다음 정부 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이재욱

화, 2021/03/2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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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적이란 무엇인가

‘압축적’이라는 말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0년대 독일 사회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비동시성의 동시성’―비동시적인 현상들의 동시적 공존을 말한다―을 짧게 줄인 관형어로서, 한국 사회학에서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성수대교가 붕괴하고 삼풍백화점이 내려앉는 등 도시형 대형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했는데, 그것들이 개발국가에 의해 권위적으로 추진된 ‘선진국 따라잡기’의 결과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블로흐가 말한 ‘비동시성의 동시성’ 역시 계몽군주에 의해 추진된 후발 산업화의 사회적 결과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었다.

선진 산업사회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자생적으로 진행된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속에서 계급 대립이 발생했으며, 사회문화 역시 부르주아적인 방식으로 근대화 또는 합리화했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구시대의 지배적 신분 집단에 의해 고학력 엘리트―소위 ‘교양시민’―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의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신분제적 질서 속에 (교양)시민적 질서가 포섭되는 특이한 근대화의 역사가 진행된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명명된 이러한 사회 특성은 결국 나치의 지배라는 근대성의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압축적’이라는 표현에는 이처럼 ‘파국을 부를 수 있을 왜곡’에 대한 불안의 정조 역시 함축되어 있다. 1990년대 한국에서 ‘왜곡된 합리성’은 연고주의와 부정부패로 대표되는 ‘불완전한 사회적 합리화’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후발 산업국인 독일과 후-후발 산업국인 한국에서 나타난 ‘압축적’ 근대화의 공통점은 신분제로부터의 해방―자유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2차 대전 패전이라는 파국을 통해서 연합국들로부터 자유주의 질서를 이식받아 서구화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연합국의 개입이 전부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 독일이 뒤늦게 통일된 국가였던 탓에, 몇몇 도시들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중세 자유도시의 전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자유도시의 경험은 없으나, 조선의 유교화를 통해 왕의 스승임을 자임하는 학자들의 왕권 견제 장치가 있었다. 독일 교양시민 계급의 이중성은 한편으로는 서구 자유주의 문화에 호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과 학문의 기술자로서 권위주의적 산업화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자유주의를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가 아니라 ‘관념’ 속에서 체화했다. 반면 한국 유교 지식계급의 이중성은 학문을 발판으로 권력을 획득―‘출세’―하려는 도구적 학문관을 갖는 동시에, 백성의 선출되지 않은 대변인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유교적 지식계급은 산업화에 동원되는 기술·관료적 지식계급과 민의 대변을 자처하는 민주화 지식계급으로 양분 또는 이중화했다.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 또는 근대화는 이 두 범주의 지식계급 사이의 세력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 성공이 정치 민주화로 연결되는 교과서적인 역사를 이루었지만, 동시에 전근대적 관계성의 고질적인 연고주의와 부정부패의 ‘적폐’가 각종 대형사고를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전근대적인 유교적 관계성 또는 신분의식은 시장 기제나 관료주의라는 근대적 제도 속에 스며든 비합리성으로 작동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1】 민주화 성공 이후 새로운 소위 ‘개인주의 세대’와의 대립을 통해서, 민주화 지식계급―소위 ‘386세대’―의 민의 대변 역할이 ‘위임’이 아닌 ‘자임’이라는 ‘관념적 형태’임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386―또는 586―세대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꼰대’는 이들의 ‘스승’ 정체성을 드러낸다. 조선 시대 유교 지식인이 왕의 스승을 자처했다면, 지금은 시민의 스승을 자처한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압축적 산업화’ 개념은 1990년대의 도시형 대형사고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반면 ‘압축적 근대화’ 개념은 더 이후의 상황들, 즉 2000년대 이후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한국의 근대화는 ‘전근대적, 근대적 시간의 동시성’뿐만 아니라 탈근대적 시간까지 동시적으로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압축적’이라고 설명되었다. 반면에 필자는 ‘탈근대성’을 특정 시간 또는 시대를 가리키는 어휘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산업사회 합리성 속에서의 어떤 ‘전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을 울리히 벡의 ‘탈바꿈’ 개념에 기대어 설명할 수 있다.

 

탈바꿈이란 무엇인가

벡은 『위험사회』 서문에서, ‘탈근대성’, ‘탈산업사회’, ‘탈포드주의’ 등 여러 어휘에서 ‘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집필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벡이 그 책을 통해 설명한 내용은, 각종 ‘탈-’의 어휘들은 결국 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을 제각각의 측면에서 일면적으로 표현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구별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19세기 당시 너무나 해체적이고 또 새로운 현상이라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던 근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사회학은 근대 사회 출현 이전의 사회적 특징들을 ‘전근대성’이라는 말로 통칭함으로써 ‘근대성’의 특징을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탈근대성’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관점’의 종말 또는 무용성을 주장하는 ‘비판적’ 개념이다. 즉 그것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근대성 이후에 오는 새로운 사회의 특성을 통칭하는 어휘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 없는 ‘새로운 불확실성’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지칭한다.

그러한 불확실성과 무지가 생겨나는 가장 중심적 이유는, 근대성의 관점 자체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 자본주의 산업사회 식의 경제 합리성 원리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사회 자체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의미가 변화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비판적으로 또는 ‘위험하게’ 보게 된 것이다. 즉 산업사회 합리성의 개념이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결과가 변화했다.

따라서 ‘탈-’은 ‘이후’라는 시간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가 아님’을 지칭하는 부정적 접두어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관점 및 개념이 갖는 타당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탈근대성’은 새로운 시대의 ‘정상성’으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업사회 합리성에 대한 ‘불안’과 ‘의심’, ‘위험에 대한 직감’으로 온다. 합리성을 지금과는 다르게 보고 또 설명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탈근대성’을 관점이 아니라 시대로 인지할 경우, ‘뭐든 다 된다(Anything goes).’라는 허무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탈근대주의’가 종종 ‘가치 상대주의’와 동일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사회를 아노미로 단정하여 과거의 아름다운 가치를 되찾자거나 아니면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쿨’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벡은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산업사회 합리성의 관점이 도전받는 이유를, 그것이 부정하고자 하나 오히려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는 그 ‘이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산업사회는 ‘생산’과 ‘성장’에 도취하여 근대성을 더 많은 진보로 설정했고, 복지국가 체제에 따라 성장의 결과를 보다 공평하게 배분함으로써 그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진보의 과정은 곧 ‘배제’의 과정이었다.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시민’의 범위에서 배제하여 타자화하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착취하고 조작하여 위험을 생산하면서도 그렇게 생산된 위험을 범주적으로 무시한다. 따라서 산업사회의 이면에서는 타자성과 이질성, 그리고 생태위험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이 배제된 ‘이면’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행위 패턴을 바꾸고 정치 의제 역시 변하는 과정을 벡은 ‘위험사회로의 탈바꿈’―특히 세계화 속에서 ‘세계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이라고 설명했다. 즉 탈바꿈은 명확한 문제 인식과 이념에 기초하여 목적의식하에 조직적으로 발생하는 기존의 사회·정치적 저항과는 다르다. 오히려 탈바꿈은 산업사회 이면에서 생산된 부작용의 드러남이고, 사람들의 행위변화와 정치 의제의 변화는 그런 부작용에 대한 일종의 반사(reflex)처럼 진행된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인지한 결과이고,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불안과 위협이 이끄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치처럼 불안으로 더 큰 위험을 만드는 ‘야만화’의 방향이 아니라, 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은 산업사회 근대성에 대한 반성―또는 앞서 말한 의미의 ‘비판으로서의 탈근대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성찰적’―또는 ‘제2의 근대화’―이라고 벡은 정의했다. 야만화나 전통화의 방향이 아니라 새로운 근대성의 방향으로 인식전환이 되어야만 사회가 지속 가능할 것임을, 점점 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적 탈바꿈과 아노미

한국에서 1987년의 새로운 헌법 체제는 정치 민주화를 표현하고, 1989년의 가족법 개정은 유교 가부장제 탈피의 신호탄이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효’의 개념을 중심으로 근대적 공/사 영역이 뒤섞인 유교적 ‘공(公)’ 개념이 서구적 공/사 영역 분리의 개념으로 바뀌는 규범 변동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2030 청년층은 이러한 규범 변동을 상당한 정도로 체화한 세대이다.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된 세대 담론―X세대에서 개인주의 세대까지―들을 볼 때, 새로운 법 체제를 출현시킴으로써 산업사회로의 압축적 근대화를 완성한 50대 이상의 ‘유교 문화 세대’에게 자신들이 개정한 법의 사회적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50대 이상에서는 청년층의 문화를 ‘공동체 미덕의 상실’로 여겨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주된 흐름이다.

19세기 유럽에서 개인숭배의 문화가 확산하고 과거의 공동체 도덕이 붕괴하는 아노미 속에서, 사회학자들은 ‘사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결속 또는 유대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2차 대전 이후 복지국가의 완성과 더불어 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이 진행되면서, 서구에서는 개인화의 추세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타자 범주와 노동자 계급으로까지 확산했다. 개인화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생애위험의 확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 주체에게 집단적 동질성보다 개인 간 이질성―또는 ‘차이’―이 강조되는 현상 역시 개인화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더 이상 절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공론장에 소수자의 목소리가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모든 개인의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재정의되었다.【2】

산업사회에서 전통으로 자리 잡은 핵가족 및 계급조직 등의 유대관계들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아노미적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성찰적’ 현상에 주목할 경우, 개인화를 단순한 신자유주의적 고립이나 원자화가 아닌 새로운 유대 형태 발현의 조건으로 볼 수 있다. 즉 19세기 개인주의의 확산 속에서 이후 ‘유기적 연대’라고 불릴 기능주의적 결속 형태가 창발했듯이, 신자유주의적 고립과 원자화로 보이는 해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유대 형태의 창발을 예상 또는 (한층 적극적으로) 촉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벡은 서구의 경우 이미 인권을 당연시하는 개인주의 문화가 제도화했기 때문에, 현대의 또 다른 개인화 물결이 규범적 아노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서구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현재 상황은 다시 한번 ‘압축적’이다. ‘유교 문화 세대’와 ‘개인주의 세대’ 간의 갈등이 보여주듯 문화적 단절과 변동이 진행되고 있으나, 마치 19세기 유럽 상황처럼 한국의 주류사회에서 ‘개인주의’는 규범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고 도덕의 붕괴로만 인지되는 형편이다. 거기다가 서구의 개인주의는 남성들의 ‘친부살해 욕망’으로 표현되는 가부장제에 대한 반기로부터 시작했으나, 한국의 개인주의 세대에서 ‘꼰대’에 대한 남성들의 반란은 다소 양면적이다. 오히려 여성들이 ‘가부장제 전복’을 주도한다. 이러한 세세한 차이들은 한국에서 개인주의로의 변동이 서구의 경우와 동일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현재의 21세기 상황 속에서, 위험―광우병 위험에서 세월호, 메르스, 코로나19에 이르는―에 의해 정치변화가 주도되는 방식으로 이미 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재 진행되는 한국의 개인화는 ‘압축적 개인화’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압축적인 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형) 위험사회로의 탈바꿈이 진행되므로, 또 그것을 ‘압축적 탈바꿈’이라고 할 것이다.

‘압축적’이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현재 우리는 또 다른 ‘비동시적 시대들의 공존’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마치 1930년대 독일 사회가 영국과 프랑스라는 모범적 사례를 통해 설명될 수 없었듯이, 현재의 한국 사회 역시 기성 사회학 이론들로는 설명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렇게 미증유의 현실을 살고 있음을 인지해야만,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아름다운 유교적 공동체 감수성을 잃지 말자거나 또는 완전한 서구화의 길로 가야 한다는 이분법적 선택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이 무질서와 갈등이 새로운 지속가능한 유대 형태의 창발로 연결될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 이런 ‘압축적’ 상황에 한층 걸맞은 태도일 것이다. 또 한국에서 가부장제 전복의 움직임이 근대 초 서구처럼 아버지의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남성이 아니라, 남성의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의 주도 아래 일어난다는 사실 역시 곱씹어 생각할 문제이다. 50대 이상의 ‘꼰대’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정서가 얼마나 성착취적 태도의 ‘정상성’과 결합하고 있는지를 인지해야 한다.

 

【1】 사회학자 이철승은 386 지식인의 권력을 ‘네트워크 권력’이라고 칭하는데, 필자는 산업화 세력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네트워크 역시 유교적 관계 개념에 기초한다고 본다(이철승, 2019,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참조). 이철승 등의 ‘세대론’과 달리 필자는 기성 지배 엘리트의 문제가 ‘산업화 세대’와 ‘386세대’ 간의 문제, 즉 세대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압축적 산업화’라는 공통의 시대를 살았고, 386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오히려 그와 같은 근대화 따라잡기의 과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개념, 즉 문화적 측면에서 이들은 모두 유교적 관계론을 공유한다. 이철승을 비롯한 많은 남성 주류사회학자들은 386세대가 자유주의 세대라고 평가하지만, 386 역시 유교의 ‘공(公)’ 개념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자유주의와 유교의 ‘공(公)’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2030 청년세대의 경우 서구 자유주의에 가까운 ‘공/사’ 구분의 개념을 가져서 ‘개인주의 세대’로 지칭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변동과 유관한 세대 간 경계는 유교적 ‘공(公)’ 개념을 공유하는 50대 이상의 세대와 그 이하 (특히 2030) 세대 간에 그어져야 한다. 이런 차이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유교적 ‘공(公)’ 개념과 서구 자유주의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졸고 홍찬숙, “2016-17년의 광화문 광장: 유교 공론장에서 시민 공론장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18(2) 참조.

【2】 하버마스의 담화적 ‘정의’ 개념이나 페미니즘에서 ‘차이의 정치’나 ‘정체성 정치’, 그리고 라투르의 ‘사물의 의회’ 등이 이런 흐름을 대변한다. 위 흐름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범주 내부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라투르의 경우에는 비인간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발화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성립한다고 본다.

화, 2020/08/0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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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 북 붕괴론은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많은 진원지들이 있겠지만, 그 1차적 진원지는 아무래도 체제이탈자(본 글에서는 탈북자 대신, 체제이탈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유는 이 용어가 보다 개념설명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집단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체제이탈을 합리화해야 하니, 북 비난에 대한 욕망을 쉽게 뿌리칠 수 없다. 2020년 현재 약 3만 명 정도의 체제이탈자들이 국내에 거주하면서 생기는 곱잖은 부작용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정말 심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 붕괴론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016년 8월 22일 당시 박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엘리트층조차 무너지고 있고, 주요 인사들까지 탈북과 외국으로의 망명이 이어지는 등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는 등 체제 동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망명을 계기로 내부 균열을 언급한 것이다. 그 이전(2011년 6월)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한밤중에 그렇게 올 수 있다”고도 했다.

2차 진원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의 농락 때문이다. 미국의 딥스테이트 세력 및 국내의 보수·수구세력들의 정치적 집합체들이라 할 수 있는 미래통합당 등 정당 및 보수·수구계열의 국민운동체와 같은 부류의 시민사회가 한 통속이 되어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생산해낸 부작용이다.

한 예로 1996년 게리 럭(Garry Ruck)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미하원 안전보장위원회 세출위원회에서 북의 봉괴에 대해 “붕괴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인가라는 시기의 문제이다”라고 진술했다. 1년뒤 2010년에는 커트 캠벨(Kurt Campbell) 당시 국방부 부차관보는 미국을 방문한 일본 의원단에게 “북은 6~7개월 버틸까 말까 하는 상황”이라고 장담했다.

3차 진원지는 조·중·동으로 대표되어지는 보수·수구 언론매체 및 그들에 기생해 있는 보수·수구계열의 전문가(학자, 지식인 등)집단들이고, 여기에 ‘국방의 의무’보다 직업 군인화된 군인집단도 예외이지 않다.

아래와 같은 상황을 상정해 그 대응책으로 한·미 당국이 수립한 ‘작전계획 5029’ 의 일부내용을 보면 ‘①식량난으로 굶주린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다수가 국경을 넘는다. ②민심을 의식한 지도층 다수가 불만을 표출하며 북한을 탈출한다. ③급기야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군부가 호응해 정변을 일으킨다. ④김정은을 제거하고 정권을 교체 내지 전복시킨다.’ 등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함의해주는 바를 잘 생각해볼 일이다.

‘3-3-3 붕괴설’은 그 정점이다. 전형적인 묻지마식 붕괴설이었고, 그 시작은 19994년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자 빠르면 3일 혹은 3개월, 그것도 아니라면 3년 내에는 반드시 붕괴할 것이라는 뉴스와 확증편향이 우리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게 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김정일 체제로의 안착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심심찮게 정체불명의 북 붕괴설은 계속 터져 나온다. 고난의 행군시기(94-97)에도, 김정일 서거 이후에도, 장성택 숙청을 전후한 시기에도, 그리고 가장 최근은 김정은 건강 위중설과 맞물려 또 터져 나왔다. 이 결과 역시 모두가 없었던 일로 되었다.

그런데도 왜 이 ‘양치기 소년’현상은 없어지지 않을까?

참으로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거짓말이 그렇게 지속되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주장이 용납되지 않거나, 설 땅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됀 판인지 계속하여 어떤 필요에 따라 부활하고 있으니 이 어찌 이상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중심에 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이‘북은 반드시 붕괴되어져야 할’그들의 맹신적 사유체계가 조·중·동이라는 매체를 타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일 께다.

결과, 우리 국민들은 단 한 번도 북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직면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북 지도자가 죽으면, 내분이 일어나 자멸하는 북 시나리오만 정답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는 그렇게‘붕괴 확증편향’으로 그들의 공범이 되었고, 그 공범의식은 또다시 그들에게 정치적 사냥감으로 작용하여 북 붕괴를 거의 맹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작용하게 했다.

그렇게‘양치기 소년’현상이 왜 발생하지 않은지는 설명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껏 우리 모두가 이렇게 목도한 이 모든 확증편향이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고, 향후에도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해서 이 글은 바로 그런 실체도 없는 북 붕괴설, 어떻게 하면 허위가 밝혀지고,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북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까를 고민한 끝에 앞선 글들과 마찬가지로 대신해 묻고, 대신해 그들에게 답 준다.

 

1. 과연 그들은 북 붕괴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있는가?

 알다시피 북 붕괴론이 대한민국과 서구사회에 하나의 인식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초까지 봇물처럼 터진 현실사회주의권 몰락 및 붕괴가 그 직접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거도 충분하다. “오늘날 제아무리 북한이 부인하더라도 전 세계 사람들은 공산주의 진영 대부분이 붕괴된 것처럼 결국에는 북한도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북한의 협상전략>, 366쪽 참조.)

다시 말하면 후쿠야마(Francis Hukuyama)의 역사인식, 즉 그가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역사는 이미 끝났다’는 그 우월적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 지독한 열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악성종양으로 남아 우리를 내내-분단극복과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괴롭히는 주범노릇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작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반전이다. 후쿠야마는 이후 그 정의적 명제가 틀렸음을 뒤늦게 인정하고, 트럼프의 정치행태를 보며 “민주국가도 퇴행(현지시각, 2017.2.9.)”가능하다는 수정인식을 선보인다. 해서 사회주의체제만 몰락(혹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도 충분히 몰락할 수 있다는 그 상상력이 필요한데, 그런데도 우린 여전히 몰락한 사회주의체제만 눈에 들어오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이념으로 인해 엉망진창 되어버린 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몰락은 못 보고 있다.

더해서 우리가 북 붕괴론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북 붕괴론의 실체가 불명확하거나 없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북 붕괴론이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으니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겠다.

복잡하지도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몰락)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구권에서와 같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전환된다는 의미에서의 체제전환을 뜻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의 지배 체제(좁히면 김정은 체제)가 쿠데타나 시민봉기 등에 의해 붕괴되어 권력층의 교체가 일어난다는 의미에서의 지배체제 변동을 의미하는지… 그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들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 자신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과 필요에 따라 북 붕괴론을 남발시킬 수밖에 없고, 진작 북 붕괴론 실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며 주구장창 그냥 북 붕괴설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 자신도 북 붕괴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냥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내뱉는 술수언어일 뿐이고, 비례적으로 우리 국민 모두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북 붕괴론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정말 북 붕괴론을 그들이 현실 가능한 상황으로 믿고 있다면, 그들의 섭리 상 아주 철저하게 붕괴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립해 효과적으로 대국민 설득과 홍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 붕괴론의 실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마치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했듯이 북 급변사태도 시도 때도 없이 필요에 따라 온 대한민국을 휘젓게 한다. 혹세무민(惑世誣民)도 이런 혹세무민이 없다.

 

2. 북 붕괴론은 현실화될 수 있는가?

백번 양보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선의적으로 해석해줘 만약 북 붕괴론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래 3가지로 요약정리 가능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그 3가지에 대해 그 불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댄다면, 그들이 얼마나 허왕된 꿈을 꾸고 있으며, 국민들을 혹세무민시키려 하는지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과연 국가 자체가 소멸할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 천재지변 등에 의한 자연적 소멸의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전혀 억지라고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과 이 글에서 논하려는 논지의 핵심으로서의 국가 자체의 소멸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에 열거된 2가지 가능성 다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국가가 외세의 국가에 병합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 내에서 쿠데타나 국가적 변란 등이 일어나 다른 국가에게 자신들의 국가를 헌납하는 방식이다.

반론 첫째, 북은 스스로 자주국방의 기치하에 핵무력을 완성한 명실상부한 전략국가이다. 그런 국가를 상대로 그 어떤 국가가 공멸을 자초할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반론 둘째, 쿠데타나 국가적 변란 등에 의한 타국에 헌납하는 방식도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상상력의 범위이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원천적으로 쿠데타나 국가적 변란 등이 불가능하다. 수령중심의 유일체제 특성이 반체제 단체나 개인을 허용할리 만무하며, 연동해 시민봉기나 시위가 불가능하다. 실제도 이제까지 반체제 시위나 데모가 있었다고 보도된 적이 없다. 고로 역시 불가능한 기대이다.

 

② 레짐 체인지는 일어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이 또한 불가능하다. 근거는 만약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고자 했다면 이는 80년대 말 동구권이 체제전환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을 때 그때 일어난 것이 이치적으로 맞아서 그렇다. 하지만, 그때 북은 동구권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어떻게? 그건 <통일뉴스>에 실린 “북은 집단지도체제가 과연 가능한가?”(5.15) 중 ‘4. 현실사회주의 몰락에서 찾아낸 그들의 교훈’에서 확인받듯이 오히려 수령중심의 사회주의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 항로를 잡았다.

이 외에도 2011년 아랍권의 오렌지 혁명이라 불린 ‘중동의 봄’이라는 민주화 물결 때도 북은 많은 사람들(혹은, 많은 국가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즉 그 영향을 미쳐 북이 곧 체제전환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며 국제사회가 주목한 적이 있었지만, 북은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북 스스로는 동구권의 체제전환에서 얻은 반면교사를 더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가운영원리를 확정했다. 불가능한 상상력이다.

 

③ 그럼 지배체제의 변동은 수반될 수 있는가?

기억을 되살려 보자. 위키리크스(Wikileaks)는 2010년 2월 17일 당시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천영우 당시 외교부 2차관의 오찬 때 천영우는 중국이 김정일 사망 뒤 북 정권의 붕괴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고, 더 나아가서 “북한은 경제적으로 이미 무너졌고, 김정일 사망 뒤 ‘2~3년 안에’ 정치적으로도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천영우가 무슨 근거와 정보로 그런 인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필요충분조건이 성립해야 함은 분명하다. 이름하여 북 체제를 지탱하는 내구력에 어떤 변화가 수반되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흐름을 타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검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국가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이 부정되고 있는지, 둘째는, 그 주체사상에서 출발한 유일사상체계에 어떤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지, 셋째는, 역사적 정통성-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김일성민족의 시원이 부정당하고 있는지, 넷째는 당과 인민의 관계에서 믿음과 신뢰적 관계보다는 그 반대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지, 다섯째는, 수령과 당의 군대로 되어 있는 군대가 어떤 변화가 있는지 등은 반드시 확인되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그 어떤 변화가 없다는 이는 분명 허구이다.

그래놓고 또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그 허구를 증명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시각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북처럼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 정보가 통제되고 자유가 제한되어 불만 표출이 어렵고, 데모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과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것이기 때문에’와 같이 그런 인식을 갖는 진보적 자유주의 시각이다.

왜 이 시각이 북을 들여다보는데 있어 문제가 심각하게 되는 것 인가하면 북에 대한 인식 그 대전제가 북을 ‘폐쇄적인 독재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지금 당장은 폐쇄적 독재가 인민의 저항을 다소 늦출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아랍의 봄’이나 우리 대한민국의 경험처럼 독재체제는 반드시 민중의 저항을 받게 되어 붕괴될 것이라는 실체적 경험이 반영하게 되어 ‘그렇다면 북도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자신의 인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북 체제변동은 잠시 유보될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변동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렇듯 북 체제를 수령중심 인민대중 사회주의체제로 인식하지 않고, 위와 같은-보수·수구세력들이 인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 자유주의시각의 ‘폐쇄적 독재체제’로의 인식은 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이 언제나 북 붕괴론에 시달리게 된다.

예하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를 포함하는 기층민중, 유학생 및 작가나 교원 등 지식층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나 당 비서를 포함한 지배층의 망명까지 다양한 계급·계층에서 체제이탈자가 발생하면 이를 인식함에 있어 ‘기층 민중들의 체제염증’, ‘지식층의 이반’, ‘지배층의 동요’로 확대해석해내 정권이나 체제에 불만을 품고 북을 탈출한다고 연계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들이-진보적 자유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한 치명적 약점 둘이 있다.

하나는 체제이탈자 들 중에는 상당수가 자신들의 잘못에 따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혹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소외감으로 탈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절대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제이탈자 수가 곧 체제붕괴와의 상관관계로 넘어가는 그 직접성이 매우 적다는 측면에서의 간과이다. 황장엽, 태영호 등 고위층의 체제이탈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은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로 정리해낼 수 있는 충분한 체제 내구성이 있고, 또 북 체제이탈자 수보다 약 66배가 더 많은 쿠바도 체제 붕괴설에 시달리지 않음은 그 함의를 잘 생각해내어야만 한다.

해서 결론은 북 체제는 항시 체제 붕괴라는 위험을 갖고는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라는 인식보다는, 오히려 북 체제의 특성상 ‘체제 붕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보다 더 본질적임을 선행해 인식해야 한다.

 

3. ‘북 붕괴론이 붕괴되어져야 북이 보인다

북 붕괴론은 실체가 없다. 굳이 있다면 ‘북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 국민들이 믿어줬으면 하는 그들의 사유체계만 있을 뿐이다. 결과, 그들은 북이 왜 핵을 개발하려 하는지, 또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대책 없이 ‘비핵화’만 외치고, 나아간다면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 제시하나 없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도둑 찾아오듯 ‘통일은 대박’이라며 속 빈 구호를 내건다.

그래놓고 다시 그들의 북 인식 사유체계를 한번 들여다보자.

‘최고지도자 사망 → 권력투쟁 → 급변사태 → 체제붕괴 → 흡수통일’이 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최고의 프레임이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때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때,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의 식량난 소동 때, 그리고 작금의 김정은 건강 위중설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이 인식방법을 변경시킨 적 없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정치적)목적 달성을 위해 남북관계나 북 상황에 대해서는 최대한 본질을 숨기고, 반면 드러난 상황에 대해서는 최대한 부풀려 곧 북 체제에 균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소문을 적극 퍼트린다. ‘악마국가 북한’과 마침내 ‘승리하게 될 대한민국’이 그렇게 대비된다. 아주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이고, 프레임 씌우기이다. 최고 꼭지점은 ‘이대로만 간다면 북은 멸망할 것’이라는 국가적 최면도 마다하지 않는다. 북 붕괴론이 그렇게 계속 영속되길 바라며 비례해 계속 웃길 바란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먼저는 당신들이 그렇게 기대하는 북의 ‘위기’ ‘급변사태’, 혹은 ‘붕괴’가 온다하더라도 이를 당신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원하는 ‘흡수통일’과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하면 당신네들의 생각, 혹은 셈법에는 ‘북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급변사태로 이어지고, 급변사태는 붕괴로 이어지고, 붕괴는 통일로 이어진다’는 연관성을 가져가고는 싶겠으나, 실제로는 그 논법이 단언컨대 1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유는 북이 실제적 붕괴를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그 국면하에서는 국제법상 정전협정 당사자국들이 제 1순위의 해결권을 가지고, 다음이 UN이 개입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미국·중국 등 강대국을 제치고 한국이 끼어들 틈은 단 1도°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는 위기에 빠진 북을 결코 한·미·일 세력에 포섭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며, 미국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북을 온전히 집어삼키려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한다면 현상유지적 안정만을 꾀하는 국제사회의 특성상 남북통일을 도와줄 이유도 전혀 없다.

다음으로는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하면 당신네들의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북한붕괴론이 북한보다 먼저 붕괴할 것”이라고. 대입하면 ‘북 붕괴론을 철석같이 믿는 당신네들의 사유체계가 북 붕괴보다 먼저 붕괴될 것이다’이다.

이는 북이 당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것과는 달리, 위 ‘2와 3’에서와 같이 지금의 북 정권은 폭압정권도 아니며 북의 인민들이 북 정권을 반대하지도 않으며, 또 북에는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의 그 어떤 제재에도 충분히 견뎌낼 만한 힘이 있음이다. 때문에 북 붕괴보다 당신들의 그 믿음적 사유체계가 먼저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거도 확실하다.

첫째, 그들은(북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제를 반대하면서 형성된 항일무장투쟁경험과 이를 ‘자주’로 국채화한 국가정통성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즉, 그 어떤 외세의 부당한 간섭과 제재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둘째, 비록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점은 분명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분명한 것은 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주택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체제가 갖는 장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셋째, 수령중심의 유일사상체계가 갖는 체제의 힘을 결코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 표징에는 권력투쟁이 일반화되어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최고 국가수반을 3년간이나 비워놓고도 ‘유훈통치’가 가능한 국가를 이 지구상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면 이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체제가 갖는 견고성, 내구력은 대단하다는 것이 인정되어져야만 한다.

넷째, 군과 조선로동당이 갖는 힘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제2차 고난의 행군 시기는 선군의 힘으로, 공개처형(장성택의 예) 등에서 확인받듯이 부정부패와 특권에는 한 치의 타협 없는 일벌백계의 기풍이 당을 특권집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에 복무하는 최전선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결과, 가장 많은 사망자 집단이 우리 대한민국과 서방세계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당원, 당 간부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섯째, 국가와 인민이 하나의 사상체계, 즉 주체사상으로 대변되어지는 지도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도 절대 간과되어져서는 안 된다. 상징으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 중에 북 인민들은 고집이 세고, 줏대가 높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이 표현을 철학적으로 표현해내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자 모든 것을 결정 한다’가 된다. 이렇게 인민 한 사람 한 사람모두가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수령-당-대중이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국가적으로는 ’대가정‘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북은 국가-인민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명확해진다. 당신네들이 꿈꾸는 북 붕괴도, 그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도 모두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 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다름아닌, 북이 붕괴된다는 것도, 북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도 비현실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다른데 있지 않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페리의 보고서를 주목하면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세계를 이해하는 길은 그 세계의 밖에 놓여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명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맞는 말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북을 이해하는 길은 북 밖에 있으며’로의 적용은 틀려서 그렇다.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가 북을 북의 시각에서 제대로 바라보고자한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그들의 시각으로 봤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체제이탈자(탈북자)의 시각만으로 그들 내부를 들여다본 것뿐이다.

첫 출발부터 잘못되어졌음은 그렇게 생겼고, 또 공화당 출신의 페리가 어떻게 그런 ‘페리보고서’를 써낼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했을 때 대한민국의 보수도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북 보고서’를 써낼 수 있을 만큼의 너무나도 긴 ‘잘못된’ 북 시간여행이 있었음을 고백하자.

그러면 보수와 민족은 다시 제자리를 찾고, 한반도는 통일조국의 청사진이 그려진다.

 

통일뉴스, 2020년 5월 29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화, 2020/06/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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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임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속셈을 드러내고 말았다. 미국을 또 다시 세계경제의 강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세계경제는 서로 물고 물리는 의존관계망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다극화 체제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4월 12일 미 대통령 관저에서 매우 특별한 회의가 열렸다. 설리번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 위원장이 주재한 회의에 19개 글로벌 기업 CEO들이 참여하였는데 여기에 바이든 대통령과 지나 리만도 상무장관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은 이헐게 선언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세계를 이끌어 가려고 한다. 우리는 21세기에 다시 한번 세계를 이끌어갈 것이다.”(We’re going to lead the world again. We’re going to lead it again in the 21st century.)

<표 1> 미 백악관 반도체 대책회의 참석 기업 및 업종

이 회의는 표면적으로 미 연방정부가 미국내 컴퓨터 칩 산업을 살리기 위해 소집한 것이나 사실은 바이든 대통령이 미 정부의 현안인 일자리 창출과 이를 위한 투자 유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바이든은 자신이 제시하는 계획이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을 재건하며 우리의 공급망을 보호하고 미국 제조업을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런 이유와 사정 하나 때문이었을까?

 

반도체를 안보사안으로 다루는 바이든

이날 19개사 대표들은 화상회의를 통해 자사 입장을 전달했다. 한국 기업으로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장 최시영 사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주최한 회의에 한국 기업이 불려간 이유는 한국이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막강한 힘, 시장점유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 소재한 기업은 하나도 초대받지 못한 데 비해 대만의 반도체 기업이 참여한 것 역시 바로 대만도 반도체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 참석자와 내용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겠다는 점과 함께 21세기에 “다시 한번” 더 하겠다는 데 있다. 즉 바이든은 미국을 세계 지도국가로 다시 한번 더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문정인 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계에 대해 다섯 가지 미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팍스 아메리카나 II였다. 즉 미국을 통한 세계평화인데 이게 곧 미중 신냉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미국 중심의 패권을 통한 세계 평화의 재현을 뜻한다(문정인 2021 문정인의 미래시나리오 : 코로나 19, 미중 신냉전, 한국의 선택 청림출판. 129쪽). 이 ‘자유주의적 패권의 부활’은 ‘자애로운 패권국’, 다자주의를 내세워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을 고립시켜 나가는 길을 선호한다.

둘째, 바이든은 반도체를 안보 사안으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바이든은 8밀리미터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반도체는 사회기반시설이라고 지적했다. 디지털 전환시대를 이끄는 핵심부품이 아니라 공항이나 항구와 같은 핵심 기반구조라면서 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룬 것이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 안보보좌관이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회의를 주재한 것이다. 바이든에게 미국은 군사강국미면서 경제강국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 사안도 언제든지 안보사안으로 취급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 1>  바이든 대통령 2021. 4. 13. 한국방송 글로벌 뉴스사진

셋째, 반도체 수급 불일치에 대비함으로써 자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자구책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해 세계를 덮친 돌림병(COVID-19) 위기는 세계적 차원의 경기 불황을 불러왔지만 빠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반도체 경기의 초호황이라는 슈퍼 사이클에 진입하자 반도체 수요-공급 차질이 완제품 생산 정체 현상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차량용 반도체가 부족하여 완성차 공장들이 가동 중단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현대차와 GM차 공장이 움직이지 않았다. 돌림병 때문도 아니고 노사갈등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이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반도체 회사에 불이나고 지진이 덮치면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불확실성이 커져갔다. 반도체 부품 대란은 공급망 대란, 반도체 전쟁으로 격화되어 갔다.

지난해 12월 4일 마이크론 대만 팹에서 정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결과 D램 현물가격이 상승했다. 그리고 대만 북동부 이란현 부근 해역에서 지난 해 12월 10일 저녁 9시에 6.7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바로 이 지진 발생 지역에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마이크론 공장이 있는 신주현, 타이중 등이 포함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발생 시 세계 전장반도체 3위 기업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사의 공장은 지진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일본 완성차기업이 공장가동을 중단한 적이 있다. 당시 도요타는 일본 내 전체 공장 가동을 중지했으며 재개까지 약 1개월 정도 걸렸다. 이 르네사스는 2021년 2월 13일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발생한 규모 7.3의 강진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자동차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이바라키현 나카시 공장의 운영을 중단했다. 보통 진도 3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반도체 공장은 일단 공정 자체를 중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1일 대만 북부 신주(新竹) 과학단지내 TSMC 12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정전사태로 이어져 공장이 멈췄다. 대만 TSMC 공장이 멈추게 되었다는 뉴스가 알려지자마자 세계 전자업체들이 긴장했다. 큰 화재가 아니라 오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4월 12일 인텔의 새로운 CEO인 팻 겔싱어(Pat Gelsinger)는 말했다 : “우리는 6~

9개월 내에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위해 차량용 반도체 설계업체와 논의하고 있다. 우리는 핵심 공급업체들과 전환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이 차량용 반도체를 만들어 GM과 포드에 주겠다.”

그리고 이미 인텔사는 200억 달러를 투입하여 미국 애리조나 주 두 곳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넷째, 미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반도체 대책회의는 단순히 반도체 공급망 조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날 회의에 전자제품, 인터넷 검색, 이동통신, 자동차 완성차제조, 의료기기뿐만 아니라 B2 스텔스 폭격기를 제조하는 군수기업 대표까지 참여함으로써 반도체산업이라는 일개 부품만이 사안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을 미국이 주도하면서 예상되고 있는 ‘지각변동“을 보면 첫쩨, 바이든 취임이후 미국 인프라스트럭처 투자 계획에 반도체와 배터리를 포함하여 미화 500억 달러, 한화 56조원 상당 거액을 쏟아 넣고, 둘째, 이미 바이든은 반도체 공급망을 살피라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셋째, 미국 반도체 공급망 확충 법안 발의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 패권국 부상을 꺾겠다는 바이든의 불가능한 꿈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점은 바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제압하고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패권을 되찾겠다는 바이든의 야심이나 그 꿈은 실현가능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는 국력을 바탕으로 반도체 최강국이 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서슴치 않고 있다.

미국측은 이번 회의에서 삼성에 신규 투자 또는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는 반도체 공장 증설 속도를 더욱 가속화해 달라는 주문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삼성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중 DRAM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2017년 3분기 기준 44.5%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27.9%로 2위를 차지한 SK하이닉스까지 합하면, 한국 기업의 DRAM 시장점유율은 72.3%로 압도적이다.[이승관 2017년 12월 7일). “반도체 코리아, 메모리 ‘절대강자’ 재확인…D램 점유율 72%”. 《연합뉴스》]. 특히 삼성전자는 2017년 2분기 영업이익 14조원을 벌어 지난 8년동안 영업이익 1위를 고수하전 애플을 제치고 영업이익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경쟁사인 애플로 삼성전자의 반도체를 공급받아 완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여 현지 판매를 하고 있다.(<표 2> 참조)

<표 2> 삼성전자 반도체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4%B1%EC%A0%84%EC%9E%90#cite_note-42

<표 3> 삼성전자의 해외 반도체 공장, 자료: 삼성전자

반도체 투자액에 대한 국가별 세금 감면 비율을 보면 미국은 10~15%이나 일본은 최대 15%, 한국과 대만은 25~30%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반도체 투자액에 대하여 무려 30~40%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있다(자료 SK증권). 그래서 바이든이 직접 나서서 미국 반도체 패권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반도체 육성정책을 보면 첫째, 2024년까지 투자 대비 40%가량을 세금 공제하고, 둘째, 16조 6천억원 규모의 연방기금을 조성하여 미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공장 건설을 지원하고, 셋째, 연구개발을 확대하는데 8천억원을 지원하고, 넷째, 주정부는 삼성전자와 대만반도체(TSMC) 등 해외 기업 파운드리 공장을 유치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인공지능위원회는 미 연방의회에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과 격차를 확대하기 위해 일본과 네델란드 정부 등과 협력해 EUV와 ArF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서는 전자공학과 광학 함께 정밀화학 및 정밀기계산업 등이 다같이 발전해야 하며 매우 고가의 조립장치 등을 완비해야 한다. 일본과 네델란드는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이들 두 나라에 관련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도록 그 뜻을 관철할 수 있다면 바이든의 꿈은 실현가능성이 높아지나 그럴게 되기엔 아직 이르다고 평가할 수 있다. EUV는 극자외선 방사(extreme ultraviolet radiation)의 약자로써 네델란드 AMSL사 리쏘그라피(lithography) 장비는 반도체생산의 필수 장비이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가 미 정부의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글로벌 회사들이 포진해 있는 미국에서 반도체 사업을 키우는 제2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적극적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이미 삼성은 미국에 20조원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잘 알다시피 현재 삼성기업집단의 최고 총수는 기업집단 경영권 승계를 위해 전임 대통령의 개인 측근 딸에게 경주용 말을 사 주는 뇌물을 주었다가 적발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오너 리스크’에 빠져 있다. 혹여 한국 재벌 특유의 ‘오너 리스크’ 상태라고 하더라도 삼성기업집단은 ‘관리의 삼성’, ‘시스템의 삼성’이라는 말이 나도는 것처럼 비교적 위기관리나 성과관리에 능하기 때문에 큼 문제없는 의사결정과 기업집단운영을 해 나갈 것이다. 이씨재벌은 1990년대 자동차업계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 일렉트로닉스를 강조하며 무리하게 자동차산업에 진출하였다(허상수 1994 삼성과 자동차산업 도서출판 새날 161쪽).

삼성기업집단은 반도체에 관한 한 미국 시장 못지않게 중국시장도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합당한 생산과 판매전략을 구사해 나갈 것이다. 일방적으로 어느 나라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포드자동차는 1908년 9월 30일부터 ‘T형 포드(T카)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자동차의 대중화시대를 개척하면서 미국인에게 국민기업으로 인정받았다. 고된 일을 하고나서 T카를 몰고 귀하가여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들으며 맥주를 홀짝였던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사회를 만들었다. 삼성기업집단 역시 이얼 만큼의 국민기업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산업통상자원부 소재융합산업정책관의 주요업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섬유, 탄소, 나노, 철강, 세라믹 등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육성 및 진흥을 위한 정책을 수립·시행하는 데 있다. 그 산하 반도체디스플레이과의 주요업무는 반도체 산업, 디스플레이 산업, 영상표시장치 산업, 전자부품 산업 및 인쇄전자 산업의 육성 및 진흥을 위한 정책의 수립ㆍ시행과 반도체 산업, 디스플레이 산업, 영상표시장치 산업, 전자부품 산업 및 인쇄전자 산업에 대한 외국인투자 유치, 해외투자 지원, 통상 현안 대응 등 대외 협력에 관한 사항, 내장형 소프트웨어 산업의 기술개발 지원 및 육성 정책의 수립ㆍ시행 등이다. 기업인들이 사활을 걸고 현장을 뛰고 있을 때 장관 등 이들 공직자들 역시 최선을 다해 모든 행정력을 투입하여 기업을 지원해야 마땅할 것이다.

 

반도체 전쟁과 한국

반도체는 과학기술혁명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전자공학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미중 신냉전은 미국의 패권 회복과 중국의 패권국 진입을 둘러싼 극한 경합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기술패권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최근의 혼란상은 이 기술패권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반도체는 2021년 한중외무장관 회담에 의제가 될 만큼 중요한 외교안보사안이며 중요한 경제재이다.

한국은 미국 대통령의 한국 기업 초청과 거액의 투자요청 사실을 직시하고 그에 걸맞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이미 한국은 2020년 1인당 GDP3만1천497달러로 이탈리아(3만1천288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그리고 브라질과 러시아를 체치고 세계 경제 10위의 중견강국 지위에 진입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에 걸맞는 외교안보역량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 특히 한미동맹을 들먹거리며 미국에게만 쫄리는 듯한 졸속외교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한미 군사동맹에 중독되었던 구냉전시대의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바이든이 벌이는 세계패권국가로의 복귀라는 불가능한 꿈에 헛발질하지 않는 한국인의 슬기로운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야만 한다.

 

허상수

목, 2021/04/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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