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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해리스 팀의 진보성 여부는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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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해리스 팀의 진보성 여부는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admin | 월, 2020/08/31- 20:25

최근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자인 조 바이든이 후보경선과정에서 경쟁자이었던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그의 런닝-메이트로 공식화하였는데, 사실 놀라운 사실은 오랜 시간을 지연시켜 뒤늦게 이를 공식화했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부통령 지명후보자의 1번 순위로 진즉 내정되어 있었지만, 바이든 선거캠프는 이를 수개월간 지체시키면서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여러 인사들을 미디어에 노출시키며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왔다.

되돌아 살펴보면, 지명을 지체한 배경에는, 바이든의 노련한 정치경력 과정에서 보듯이, 완벽을 기하려는 예의 조심성 같은 것이었다. 그는 조심운전을 하는 대선후보이며, 트럼프를 몰아낼 수 있는 평범하지만 확실한 안전장치 같은 인물이다. 불행하게도 트럼피즘으로 불리는 선거몰이의 흥행 따위를 바이든의 정치적 비전에서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트럼프를 쫓아내는 일이라는 그의 입장은 여전히 올바르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주장은 유권자들에게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듯, 전통적인 대선의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이 트럼프를 큰 격차로 따돌리고 있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상기 전략에 부응하여 도움이 되는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지명된 (기름부음을 받은) 셈이다. 그녀는 미국 전역에 이미 잘 알려진 인사로 오랜 공직에 몸을 담아 왔기에, 경험이 없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고, 이 점이 지속적으로 신뢰를 쌓아가려는 바이든 식의 선거 캠페인이기도 하다.

해리스는 자메이카 흑인과 인도의 혈통을 이어받은 첫 번째 흑인 여성으로 유색인종의 지지와 더불어 바이든이 경선과정에 가장 취약함을 들어낸 젊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흡인하는 자산이다.

민주당 내의 소위 좌파진영으로 불리는 진보그룹에게는, 바이든이라는 후보가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tough pill to swallow)이다. 이들에게는, 급속히 확산하는 팬데믹과 경제가 붕괴되는 와중에 구조적인 인종차별저항의 폭동까지 겹쳐지는 환경 속에서, 버니 샌더스 또는 엘리자베스 워런같이 도전적인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후보들이 훨씬 더 선호하고 싶은 인물이 아니던가?

지금도 실업률이 하늘로 치솟고 수백만 명이 거리에서 흑인생명운동(BLM)과 경찰예산삭감 그리고 집세폐지를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은1994년 섬뜻한 범죄법안을 주도했던 바이든과 범죄문제를 강경하게 대처했던 검찰출신의 해리스를 선택의 대안이 없이 반드시 지지해야 곤혹 속에 빠져 있는 셈이다.

해리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여론에 후보 군에 올랐던 미시간 주지사인 Gretchen Whitmer와 오바마 시절 백악관 안보보좌관 출신으로 전쟁을 부추긴 susan Rice 등 보수적인  인사을 대신하여 그녀가 지명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이에 더하여 해리스는 종종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진보적인 풍향계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합리적(중도적)인 검찰인물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면,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2016년 이후에는 진보적인 투표의 성향을 보여 주었는데, 예를 들어 보면, 116차 상원의 회기 중에, 그녀는 샌더스와 92% 같은 성향으로 투표를 던졌고, ‘모두를 위한 건강보험Medicare for All’안에 지지서명을 하였다 (비록 경선 과정에서는 수위를 낮추었지만).

최근에는 민주당 민주사회모임 일원인 Rasida Tlaib 하원의원이 발의한 팬데믹-구제지원법(매달 2000불 지급)안을 지지하였으며, 일년간-집세유예법안(일년 동안 집세가 밀려도 쫓겨나지 않는)을 그녀 스스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리스 성향의 진보적 이동에 대하여, 그녀가 검찰책임자로 근무하던 시절 가장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샌프란시스코 법대교수인 Lara Bazelon이 이제는 격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Bazelon 교수는 최근 NPR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해리스의 변신을 치켜 세웠다 “그녀의 행위에는 일관성이 있으며, 아주 훌륭합니다. 해리스가 지금처럼 앞으로도 줄곧 옳은 일을 추구해가길 우선적으로 희망해봅니다. 더구나 그녀가 추구하는 방식이 매우 실용적으로 미국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진보적인 시민단체들인 RootsAction과 ProgressiveDemocrats 등은 해리스의 지명에 대하여 약간 비판적이자만 솔직합니다 “그 동안 기업들의 정치헌금에 비위를 맞추어 온 것이 그녀의 성향인 점을 감안하면 과연 해리스가 진보적인 원칙들에 헌신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만, 정치적인 풍향에 자신의 입장을 조정해온 과정을 눈여겨보면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트럼프를 축출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우선순위이며, 이에 더하여 대선과정의 제도정치 밖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보진영이 해야 할 몫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정의를 위하여 노동운동을 고양하고 보편적인 공공의료를 요구하고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거리시위를 조직하며, 기업의 파워에 도전하여 노동계급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후보들을 선출하는 것 – 정치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진보적인 아젠더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정치풍향계(해리스)는 우리가 만들어낸 바람에 따를 것이다.

 

출처: Common Dreams

Natalie Shure

TruTv의 여성운동 프로그램(Adam ruins Everything) 편집을 책임자고 있으며, 역사와 정치 그리고 공공의료 분야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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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동 부지에 서울시 공공재활병원을 추진하여 시민들에게 양질의 재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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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요 위협국가(중국과 이란)들이 새로운 실크로드라는 명분으로 점차 가까워지면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21세기형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배후세력(deep state)들은 이를 못마땅히 바라보고 있다.

이란 외무부의 대변인 Mousavi는 이란과 중국간의 포괄적 (전략)파트너십을 진행하는 공개적인 로드맵에 대해서 비난을 일삼은 각종의 거짓말(루머)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곧바로 이란 외무부의 공식 입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인 Mahmoud Vezi가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었다.

“이란이 주변국가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공공연한 거짓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추가하였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단위에서 관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이번의 로드맵에 곧 서명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란은 더욱 많은 국가들과 관계를 넓혀갈 것이다.”

대략적으로 상기의 발언들은 이미 잘 알려진 이란과 중국의 포괄적 파트너십에 대한 항간의 기사들을 확인한 것이지만, 이것을 군사적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예단하는 염려에 미리 일침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2016년 시진핑 주석이 테헤란을 방문한 당시에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으로 20개 사항에 달하는 많은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 다음의 두 가지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7항은 유라시아를 통합하는 새로운 실크로드에 대한 파트너십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란 측은 중국이 주도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양실크로드를 환영한다. 이러한 방향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흥하는 것과 산업 및 광업의 역량을 강화하는 투자의 건에 대한 양해각서와 관련 문건들에 서명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된 역량과 혜택 그리고 기회를 기대하면서, 양국은 수송과 철도, 항만과 에너지, 상업과 서비스 분야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하여 상호 간의 협력과 투자를 확대해 나간다.

제10항은 AIIB에 이란이 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것에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은 이란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발기회원국가로 참여하는 것에 감사(평가)한다. 양국은 이를 통하여 아시아의 진보와 번영을 향한 다양한 분야에 협력을 강화하고 함께 노력할 것이다.”

상기의 양해각서가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상기의 양자간 포괄적 파트너십의 핵심은, 이미 지난 해까지 잘 알려진 대로, 중국이 이란의 에너지와 사회간접시설에 향후 25년간 4000억불의 투자계획이다. 이중에는 중국의 첨예한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란에서 중국으로) 석유와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과정에 위험이 잠재된 말레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시장평균가격에서 18% 인하된 가격으로, 달러가 아닌 중국 위안화 또는 여러 통화(basket)를 혼용하여 지급하는 조건을 담고 있다.

북경당국은 주로 AIIB를 통하여 2280억불을 이란의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할 것이며, 대부분의 투자가 2025년까지 이루어질 것이다. 이중에는 에너지산업의 혁신에 긴급히 필요한 생산시설의 건설과 Tehran과 Mashhad를 연결하는 전철화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Tehran-Qom-Isfahan을 고속철도로 연결하며 이를 추후 Tabriz까지 연장할 계획인데, Tabriz는 석유와 가스 및 석유화학공업의 거점지역이자 Tabriz-Ankara 간의 가스공급 라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이는 유라시아의 핵심통로인 셈이다. 이란을 관통하는 고속철도는 중국신장의 Urumqi에서 출발하여 4개의 칸국들 (Kazakhstan, Kyrgyzstan, Uzbekistan and Turkmenistan)을 통과하며, 곧 이어서 서아시아 지역인 이라크와 터키를 유럽으로 연결한다. 이는 역사적인 과거의 실크로드를 현대적 기술로 재현하는 것이며, 동쪽과 서쪽의 심장을 연결하던 당시의 무역용어인 ‘페르시아’를 상기시킨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 간의 공해(空海)군사적 협력에 관한 사항은 상기의 요인들이 밝힌 것처럼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Moosavi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서 이란이 중국에게 섬을 양도한다거나 군인들이 이란에 상주한다는 것에 합의한 바는 없다고 확인하면서 이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이란 내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둔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였다는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확인하였다.

지난 주말, 외무부 장관인 Zarif는 이란과 중국은 ‘신의와 확신’으로 협상을 진행하여 왔으며, 합의의 내용에는 아무런 비밀사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는 유라시아 통합의 주요한 삼국거점으로 유라시아 안보에 대한 군사적 협력에 대하여 다음 달부터 시작할 것이며 이의 결정에 따른 긴밀한 상호협력은 11월까지 이루어지도록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정학/지경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열쇠는 미국의 무자비한 대이란 제재이며 더구나 이를 무기로 삼아 이란과 중국 간의 협상에 대한 광범한 개입여부이다. 이미 미국이 개입한 여러 내용들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들이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아직 중국이 추구하는 예외주의라는 명목으로 취소가 가능한 도상그림 수준이며,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다양한 범위에서 서로 윈-윈을 추구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희망을 결집시킨 기획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정부의 요인이자 외교부장인 Wang Yi가 키진저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미중 싱크탱크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

“최근 몇 년간 형성된 흐름 중에 한가지 잘못된 견해는 중국굴기의 경로가 서구의 체제와 경로에 대한 타격과 위협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고 우리는 이에 동의할 수도 없다. 침략과 협박은 중국 5천년 역사의 유전인자(gene)에는 없다. 중국은 타국의 방식을 따라 하지도 않지만 역으로 중국의 방식을 타국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을 모방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2500년 전(공자의 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도 화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으며,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양립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을 추구해 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관련기사 <한겨레 : 7월 13일자 보도 – 중국과 이란, 포괄적 동반자 협정 준비 중 >

Pepe Escobar is a frequent contributor to Global Research.

중국과 이란이 기간산업에 대한 막대한 자금 투자를 대가로 값싸게 원유를 공급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포괄적 협력에 관한 협정을 곧 체결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핵 개발을 이유로 이란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보여, 미-중 갈등이 더욱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은 향후 25년 동안 이란의 금융, 통신, 항만, 철도를 비롯한 각 분야에 걸쳐 4천억달러(480조원)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중국 쪽은 대폭 할인된 값에 안정적으로 이란 원유를 공급받게 된다. 신문은 “이런 내용을 담은 18쪽 분량의 ‘중국-이란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 초안이 이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며 “조만간 이란 의회에 제출돼 비준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협정문 초안에 언급된 약 100건에 이르는 중국-이란 합작사업 대부분이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에 포함된 것”이라며 공항·고속철도·지하철 등 교통분야 투자와 함께 이란 서북부 마쿠, 걸프 연안 아바단 지역과 케슘 등지에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고, 이란의 5세대(5G) 이동통신 사업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중국이 맡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테러전과 마약거래·인신매매 등 다국적 범죄에 대한 대처를 명분으로 군사·안보 분야 협력도 대폭 강화된다. 또 양국군 합동군사훈련과 무기류 공동 연구·개발, 정보 공유 등도 추진된다. 일부에선 중국이 투자시설 보호를 명분으로 전략적 요충인 이란에 자국군을 주둔시킬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강대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원칙으로 삼아온 이란이 중국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과 봉쇄로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탓으로 보인다. 특히 이란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원유산업은 미국의 제재로 수출길이 막힌데다, 시설 낙후로 개·보수가 절실한 상황이다. 실제 이란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포함한 원유산업 기반시설 현대화에만 최대 1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중국 쪽도 이란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파키스탄-이란’으로 이어지는 3각 체제를 형성해 미국-인도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다. 이란이 시아파 종주국이란 점에서 ‘이란-이라크-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통해 중동 일대에서 미국과 맞서는 구도를 이룰 수도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 중동의 전략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따 “이란과 중국의 이번 협정은 단순히 상호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게 아니라, 미국과 맞서는 데도 필요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협정이 체결되면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로선 두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미-중 갈등의 추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 쪽은 <뉴욕 타임스>에 “중국 업체가 이란과 제재 가능한 거래를 지속하도록 허용·지원함으로써 중국 정부는 스스로 주장해온 안정과 평화 촉진이란 국가적 목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며 “세계 최대 테러지원국인 이란을 지원하는 중국 업체에 지속적으로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Asia Times via Global Research on 2020-07-12.

Pepe Escobar

브라질 출신 언론인으로 아시아 타임즈와 Sputnik에 기고하며 러시아의 RT 그리고 이란의 국영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고 있다

수, 2020/07/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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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나는 미국의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으면 한다” 미국 전 FBI 수장이었던 제임스 코미가 NYT에 보낸 칼럼의 구절이다. 그는 트럼프로부터 대통령직을 보호해 달라는 간접적이고 부당한 압력을 거부한 대가로 모욕적으로 트윗터로 해임당한 트럼프 정권내 첫 번째 최고위직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트럼프의 자질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진실이 밝혀지고 법치가 투명하고 흔들림 없이 공정하게 작동하길 희망하면서 담담하고 적어 내려가고 있다. 조폭 수준의 수많은 사건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국이 여전히 위대한 국가인 것은 바로 뮬러와 코미 같은 강직한 공직자들이 미국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미의 3월 21일자 뉴욕타임즈 기고문 :

미국은 지금 로버트 뮬러 특검의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보고서에서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탄핵당해 마땅한 범죄자라는 결과 혹은 그에게 기본적으로 죄도 없다는 결과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가 보고서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와야 “맞는지”는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미국 대통령직을 맡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뮬러 특검이 트럼프를 범죄자라고 발표하는 것을 지지하진 않는다. 나는 또한 뮬러 특검이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지지하지 않지만, 특검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있게, 그리하여 기소할 일은 기소하고 그가 조사한 내용을 보고서에 그대로 적을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연방수사국과 법무부는 지난 2년간 대통령이 특검에 개입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사법부에 불을 지르는 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이러한 행태는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뮬러 특검의 수사를 막기 위해 그의 권력을 사용하진 않았다(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다른 차원의 비상사태였을 것이다. 수사의 신뢰도를 무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수사자체를 막는 시도일 테니).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특정한 답이 나오길 희망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법치주의는 편파적이지 않고 완전한 수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법집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사가 관련된 모든 의혹을 제대로 밝히고 사건의 진상에 가장 근접하는 것만이 사법정의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러시아인들과 고의적으로 공모하여2016년 대선에 개입하였는지, 혹은 그가 충분히 부패한 의도를 가지고 재판을 방해하려 하였는지에 대해 특검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지 못하며, 그러한 결과에 대한 관심 또한 없다. 나는 오직 수사가 제대로,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정리의 승리가 될 것이며, 국가의 지도부가 진실과 법치에 대한 책무를 저버린 이 시점에도 가장 중요한 미국적 가치들이 보호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전세계에,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과 의문고리의 권력들에게, 미국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사법체계가 있으며, 이는 사법체계를 믿고 개인적 당파적 이익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들 덕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체계가 도달하는 결론을 사람들이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정치와 무관한 법집행은 이 나라에 있어 맥동하는 심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특검이 하는 수사에 대해 최대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일이다. 나는 수사의 종결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또 언제 이야기를 꺼낼 지에 대한 고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언제나 공익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하며,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종결된 수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공공이 필요로 할 때 제공해야 한다.

나 스스로도 희망 하나를 품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트럼프씨가 탄핵을 당해 임기전에 집무실에서 물러나야 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의회에서 보기에 입증가능한 사실들이 있다고 할 때 의회가 헌법에 명시된 탄핵절차를 진행해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럴만한 일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만약 의회에 의해 트럼프씨가 집무실을 나가야 한다면, 트럼프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쿠데타로 볼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미국적 삶의 보편적인 가치에서 멀어지고, 결국 국가를 분열시키고 말 것이다.

트럼프씨를 비판하는 이들은 왜곡하기 어려운 무언가, 혹은 불만을 해소할 무언가가 나오길 바랄 것이다, 적어도 탄핵보단 나은 결과여야 한다. 2020년 대선은 완전하게 치러져야 한다. 비록 주요한 정책문제 – 이민, 총기, 임신중절, 규제, 기후변화, 세금과 같은- 에서는 이견을 보일지라도, 국민들이 잠시 시간을 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통합을 이뤘음을 보여줘야 한다. 더 큰 무엇은 미국의 대통령이 거짓말을 일삼고 법치주의를 연신 공격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정책에 대한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

 

James Comey

미국 전 FBI 국장

월, 2019/03/2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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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 광저우시 변두리의 한 마을에 거주하는 ‘문화교류 활동가’이다. 5년전 중국에 건너 올 때는 하자센터에서 배운 마을생태주의, 여성주의, 스스로 공부한 탈서구중심주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교육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야심’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당연히 만만치 않아, 모두 ‘장기과제’로 돌려버리고, 지금은 한가하게 중국책이나 인터넷글들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다. 일년전 대학에서 교원으로 일하는 중국인 아내와 결혼도 했고, 주변엔 모두 중국인 친구들뿐이다. 코비드 때문에 국경넘어 왕래를 못하니 오로지 인터넷을 통해 ‘외부세계’를 만난다. 아주 오래전엔 십년 넘게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며,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의 소속감에 기대 ‘명예백인’노릇도 하고, 반대로 회사안의 백인중심주의에 분노하며 이에 대항하는 범아시아주의를 상상하기도 했다. 중국대신 태국으로 갈까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현지인들과 ‘깊은 문화적 이해’에 기반한 ‘평등한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그래도 중국에 건너올 때 우리의 앞선 시민의식을 “널리 알려 교화하자”는 숨은 의도도 있었으니, 여전히 “아시아의 유일한 근대국가 한국민”이라는 우월감은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도모하던 자잘한 프로젝트들이 하나둘 실패하면서 서서히 키워오던 감각이 있다. 작년 봄, 코비드 락다운은 그 감각을 온전히 의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층을 나눠 살며 함께 너른 마당을 가진 주택을 공유하는 중국인 중산층 가족과 석달간 집과 마을에 갇혀 있었다. 가족과 국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고, 그들의 관점을 내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다케우치 요시미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중국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국을 내안으로 품어 되감는 것도 소통이 전제가 돼야 한다.

때문에, 나는 작년부터 한국내에 고조되기 시작한 반중정서를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역으로, 중국에는 딱히 반한이라 할만한 대중적 정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긴장했다. 일반적인 중국인들은 한국내의 반중정서를 알지 못한다. 언론이 콕집어서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중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고, 아마도 자기편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중국 정부가 역풍을 우려해 언론을 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주류언론은 조선구마사 논란에 대해서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한국에 대한 보도가, 이를테면 N번방사건 같은 대개 부정적인 뉴스 일변도인 것도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즉, 어느 정도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중국 언론인들의 한국에 대한 불만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나는 추측했다. 이 와중에 잠시 중국 언론의 입질에도 오른 김치, 한복 논쟁은 오히려 해프닝에 가까왔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한중 ‘배틀’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고, 나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이 전투에 참전하는 중국인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직접 검색을 해보았다. 감정섞인 선동이나 일부 사실의 과장과 왜곡 등을 걷어내고 보면, 그 요체는 “한국인들이 많은 중국전통문화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포함한 주위 친구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이런 생각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막연하게나마 오랜 기간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절이고, 공자가 실은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식의 상고사와 관련한 ‘족보논쟁’들도 있었다.

와중에 조선구마사 사건에 반응하는 한국주류 미디어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그동안 코비드 중국책임론에 휘말리지 않고 중국에 대한 감정적 비난을 자제해오던 개혁과 중도 성향의 일부 매체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특히 문제라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애국주의 네티즌을 비판하던 논리의 거울이미지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국 자본의 부당한 내용 간섭도 아닌데, 중국 브랜드 음식이 PPL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됐다는 몇몇 드라마의 사례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 중국의 네티즌이 한국 식품회사가 냉동만두를 코리안푸드라며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중국문화 강탈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어이없다고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보도와 페이스북 여론을 살피며 무슨무슨 공정이라는 일련의 신조어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한국인들의 큰 불만이 동북공정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중국인들이 민관합심하여 한국의 역사를 중국내 소수민족 역사로 치부하거나, 나중에는 한국을 예전의 속국처럼 부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음도 깨달았다.

이런 한국인들의 두려움과 불만은 한한령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기때문에 지난 5년간 더 많이 누적되어 왔다. 시진핑 집권 이후 강화된 중국의 내부 독재와 외부에 대한 강경노선은 중국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전문가들에게조차 비판과 우려의 대상이다. 중국 정부의 “조종을 받는 샤오펀홍 현상”은 한국 사회과학계의 분석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발 팬데믹 상황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고 최근 몇년간 미국이 앞장서고 서구사회가 거드는 형태로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홍콩, 신장 등의 문제도 새로운 미움의 이유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국인들이 막연히 품게된 반중 감정이 왜 과도하다고 생각하는지 하나씩 설명해보려한다.

한국인은 중국인이 세상 모든 문화가 중국에서 비롯했다는 ‘만물중국기원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자가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농담같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딱 댓구를 이루는 ‘한국의 중국전통문화강탈설’처럼 과장돼 있다. 신장지역 주식인 낭이 피자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할지 몰라도, 정색하고 그런 주장을 할 중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김치에 대한 도발은 아마 가장 한국인을 자극하는 소재일 것이다.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존재 때문에, ‘챠오시엔파오차이’라는 표현을 할 수는 있어도, 영어명 차이니즈 캐비지인 배추가 중국에서 건너갔으니, 중국 음식이라 생떼쓰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그들도 중국에서 김치를 맛보려면, 한식당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안다. 중국에는 지역마다 사천식 파오차이같은 다양한 절임음식, 발효음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 김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오해에서 비롯한 불만 때문에 몽니를 부리는 일부 네티즌들이 있을뿐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강릉단오절과 남방 중국인들의 국민명절중 하나인 단오절은 기원만 같을뿐 별 관계가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대다수 중국인들을 흥분하게 하는 쟁점과 대다수 한국인들을 화나게 하는 이슈는 같은 것이 아니다. 중국인의 것은 중국인에게 한국인의 것은 한국인에게 돌리면 될 일이다.

동북공정의 실상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돼 있다. 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참고하려고 아내도 예전에 한부를 사 둔 중국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탄치샹의 <중국역사지리집>(1981)은 현재 국제표준으로 인정되는 지도집이다. 이에 따르면, 한4군 멸망 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 역대왕조의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만주지역에 대해 우리 사학계와 이견이 있다지만, 공개된 학술적 논쟁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탄치샹의 직계 제자이고 중국 교육부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인 거졘슝 푸단대학 교수도 그의 대표작 <통일과 분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반도)과 월남의 문화와 제도는 중국 내륙이나 변경의 소수민족보다 훨씬 더 중국에 가까왔다. 하지만, 두 나라는 독립왕조 성립후, 중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다.” 역시 푸단대학의 저명한 중국문화사 전문가 거자오광 교수는 <이 중국에 거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대중국의 영토기준으로, 역사상의 중국을 설정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관할하던 지방정권이 아니다. 토번(티벳)도 당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혹시해서, 20년 넘게 진행중인 한중일 청소년 역사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했다가 친구가 된, 상하이 민항중학교 역사교사 판선생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봤다. “동북공정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요.” “그게 뭐죠, 동북지역 개발 프로젝트인가요 ? 역사선생인 제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죠” 헛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중국 학교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역대 지방정권이라고 가르치는 경우는 없다는 거죠 ?” “당연히 아니죠. 중국 역사에서 가르칠 내용만 해도 너무 많아서 바빠 죽을 지경이예요” 그는 인터넷으로 동북공정을 검색해 본 후,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 동북공정이란 이름을 들어 본 중국인은 10만명도 안될 거예요.” 빠링80허우인 둥베이 출신의 ‘절친’ 아무에게 물어봤을 때도, 황당하다는 표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 걸 대체 누가 신경쓴데요?”

한한령때문에 대중국 문화콘텐츠 수출이 차질을 빚은 것은 사실이다. 아마 한류의 영향을 받는 화장품 같은 소비재 수출도 타격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국 수출총액은 꾸준한 편이고, 한국이 G8에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국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중국내 샤이한류팬들은 꾸준히 인터넷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류를 소비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할만한 소재의 드라마가 한국에서 시즌을 시작하면,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중국의 일류매체에 앞다퉈 공들인 평이 실린다. 한국 매체들이 평을 내기도 전이다. 최근엔 ‘자산어보’와 ‘무브투헤븐’에 대한 평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과 같은 압도적 한류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한한령보다는 지난 5년간 중국의 자체 콘텐츠 생산능력이 크게 향상됐기 때문이다. 중국 콘텐츠 소비자 시장은 일본, 홍콩, 타이완, 영미, 심지어 타이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까지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전 세계 콘텐츠의 춘추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력이 풍부해 어떤 나라의 문화를 대상으로 하든 언어능력을 갖춘 ‘덕후’들이 신속하게 자막을 제공한다. 콘텐츠 구매여력이 높은 대도시의 밀레니얼 세대 힙스터들은 일본문화를 선호한다. 중산층이 늘면서 오래된 선진국의 삶을 동경하고, 경쟁에 지친 마음을 달래는데 ‘소확행’ 원조 국가인 일본콘텐츠가 제격이다. 물론 Z세대는 한류를 더 선호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두고 볼일이다.

현재 중국산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핵심인력들인 빠링허우 세대는 망가와 아니메를 보고 자랐다. 72년 중일 수교후, 홍콩과 타이완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가 일찌감치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화적 감수성을 의미하는 소위 ‘2차원(평면)’문화가 있다. 중국판 유튜브라 할 수 있는 삐리삐리에 지난 10년간 온갖 하위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업로드하던 이들이, 이제 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미 5억명의 독자를 확보하는 규모로 성장한 웹소설 시장이 드라마와 영화의 풍부한 자양분이 되고 있으며, 무협물 등의 전통적 강점을 살려 해외에도 진출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끈 무협판타지드라마 샨허링의 원작은 BL웹소설이다. ‘과환세계’라는 전문잡지 40년 역사를 가진 SF는 휴고상을 수상한 ‘삼체’의 소설가 류츠신이 있다. 2019년 개봉한 중국 최초의 본격 SF영화 ‘유랑지구’가ᅠ역시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미중간의 우주개발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AI를 비롯한 각종 첨단 IT 기술이 새로운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컬SF문화가 성숙해 나간다. 2020년 중국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드라마, ‘침묵의 진상’과 ‘은밀한 구석’의 원작자 즈진쳔은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로 불리는 추리소설 작가이다. 중국 콘텐츠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검열로 한쪽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인터넷모바일 문화와 궁합이 잘맞는 장르물들이 매우 발달돼 있고, 검열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현실풍자나 이상적 세계에 대한 희망을 표현할 수 있는 가상역사극, 역사판타지물 혹은 촨유에穿越라 불리는 역사타임슬립물들이 인기가 있다. 한국드라마 ‘철인왕후’의 원작이 이런 장르의 중국 웹소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얼마전부터 한국드라마 중국시장외 판권의 구매를 재개한 중국의 3대OTT 아이여우텅愛優騰은 모두 인터내셔널 버젼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중국 콘텐츠들이 동남아 시장을 개척하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아직도ᅠ중국이 유일하게 한국 콘텐츠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부문은 예능일 것이다. 광고주의 심한 압력때문에 창작대신 손쉽게 베끼는 관행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는 소위 중국판 예능2.0으로 불리는 창작물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올해 초에 인기를 끈 ‘희극신생활’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복-한푸 논쟁을 불러왔던 중국 청년들의 자국 전통문화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자. 이들의 전통문화 애착은 샤오펀홍들의 맹목적인 선호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생활수준의 향상에 의한 다양한 문화소비 혹은 학습열로 보는 것이 옳다. 지금 중국 청년들에게 타임슬립을 해서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송宋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송대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해 매우 부유했고, 그 결과 한족 문화가 최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하지만 문약하여, 요, 서하같은 북방 민족국가들과 대등한 국가간 협정을 맺으며 중화-오랑캐라는 유아독존적 천하관을 최초로 탈피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10여년전까지만 해도 팽창주의에 기대 한당漢唐 시기를 그리워하던 분위기속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상황이라고 송대 전문가 베이징대 자오둥메이 교수는 설명한다. 삐리삐리의 콰녠완후이는 12월31일밤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며 인터넷상에서 일체감을 느끼는 버라이어티쇼이다. 국풍이라 불리는 전통문화관련 콘텐츠도 인기가 많지만, 한쪽에선 코스프레차림의 사용자가 일본어로 아니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고, 해리포터나 왕좌의 게임부터 톰과 제리에 이르는 서구의 인기 콘텐츠를 가공해서(이 과정은 畜生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껑'(밈의 중국어 표현)으로 즐기기도 하는 혼종적 문화를 선보인다. 중국 청년들의 전통문화 사랑을 단순하게 애국주의로 등치시킬 수 없는 증거이다. 중국 청년들의 이런 자국 문화 사랑을 보면서, 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열기라든가, 최근 K-방역이나 BTS 등을 자랑스러워 하는 한국 청년들을 떠올린다. 2017년 발표된 런민대학 류하이롱 교수의 “국가가 아이돌이 될 때: 신매체와 팬덤 민족주의의 탄생”이라는 논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샤오펀홍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공동체적 행태와 문화는 그들이 관용, 개방, 강대, 독립과 같이 긍정적 가치를 투사해서 환상으로 빚은 국가라는 아이돌을 숭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아이돌을 BTS로 치환시켜보면, 아미의 그것과도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샤오펀홍이 한국 네티즌들과 다투며 이런 인터넷 공동체 문화를 배웠다는 분석 기사도 봤다. 자기애적ᅠ국뽕과 적으로 간주되는 타자에 대한 공격성은 문제가 되지만, 크게 보면 오랜 기간 가져왔던 서구와 선진국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치유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콰녠완후이의 톰과제리 畜生: 고전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 화면에 중국 전통악기인 나발 등을 배경음악으로 연주한다. <출처: https://liii.ink/O8tdVHTclF5M_f>그렇다고 세대를 초월하여 중화주의로도 표현되는 이들의 공격성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다. 나는 15년전쯤, 베이징에서 만난 한 중국인에게 겪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 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유학생출신 이민자였는데, 다국적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에 출장을 와있던 차에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초면인 나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 사람들은 왜 한자를 버리는 등 ‘취한화去漢化'(중국 문화 배척)를 하는 거죠 ?” 당시, 한글전용론과 한자병기론이 오랜 기간 사회적 논쟁이 돼오기도 했었고, 나는 한자병기론쪽에 살짝 기울어 있던 터였지만, 우리 민족과 국가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 간섭하려는 그의 무례한 문화패권주의에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최근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중국인들에게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즉, 왜 한한령限韓令따위를 만들어 세계가 인정하는 우월한 한류 콘텐츠를 받아들이지 않냐고 중국인들을 원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계가 항상 한류 콘텐츠를 카피한다고 심하게 조롱한다. 따지고 보면, 근년들어 급증한 중국인들의 과도한 전통문화 ‘저작권 집착’은 한국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현대의 대중문화 선진국”인 한국과 “전통문명 강국”인 중국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셈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인데, 한중양국은 오랜 기간 이웃으로 지낸 탓에 마음속 깊은 곳에 서로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이 쌓여있다. 한중일 삼국간에 교차되는 이런 복잡한 감정은 깊이를 알 수없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예절범절은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아픈 곳은 될수록 돌려서 지적하는 습관을 유지해왔다.

서구사회의 인정을 갈구하며, 명예백인의 관점으로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는 관행은 일본이나 한국만의 전매특허도 아니다. 중국인들 자신이 여전히 스스로를 그렇게 검열하고 규정한다. 신발도 태우고, 외국인이 중국여자를 약탈해간다는 인터넷상의 쇼비니즘적 애국주의 선동이 난무하지만 미국인이나 백인들이 중국에서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반대로, 미국에서 특히 약자인 아시아 여성과 노인들에 대한 물리적 가해가 빈번해진다. 일년전 친한 중국 청년이 내가 중국인 아내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돼 덕담을 건네면서, 한편으로 노골적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흑인과 라틴아메리칸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실제 미국에서 아시안을 폭행하는 것은 흑인과 라티노가 많다고 한다. 중국의 대학교수들이 점수를 따기 위한 두가지 기준은 연구결과가 링따오 (당 지도자)의 칭찬을 받거나, SCI에 등재된 저널에 실려 서구학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정신분열적으로 들리는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물리적, 담론적 권력이 여전히 하나의 촘촘하고 완고한 위계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신장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2009년 광둥에서 일하던 위구르족 청년이 한족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유언비어때문에, 한족 남성노동자들이 위구르족 노동자들을 집단구타하면서 촉발됐다. 오늘날 중국에서 주류 한족이 비한화된 소수민족들을 구조적 혹은 비구조적으로 차별하는 모습은 미국내의 인종차별과 평행세계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차별은 눈에 들어오지만, 나의 부조리는 애써 들추고 싶지 않다. 일대일로상에 놓인 저개발국가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한족 중국인들에게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다. 내가 사는 광저우는 당나라 시기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십만명 넘게 거주하던 천년역사의 무역항이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온 보따리장사들이 워낙 많아 ‘초콜릿도시’라 불린다. 지독하게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호칭이 시사하듯, 매년 불법체류 단속활동속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인권침해가 벌어진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같아 나는 차마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못하겠다.

“가족의 구성원리가 국가로 확장되고, 국가의 통치가 가족의 윤리로 내면화된 유교적 가국家國시스템이 중국에선 이천년간 단절없이 이어져왔다”. 신천하주의로 유명한 화둥사범대학교의 중국역사문화연구자 쉬지린 교수의 설명이다. 많은 보통 중국인들은 국가의 사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염려와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보건데, 국가의 인권침해나 언론과 학문의 자유훼손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공산주의 보다는 이러한 전통관념때문이다. ”중국역사에서도 왕위를 찬탈하거나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빈번했지만, 상징적 아버지를 살해하는 시부弒父 설화는 나타의 이야기처럼 극히 예외적으로만 존재한다. 각색된 현대판 애니메이션 ‘나타지마동강세’에는 이 이야기조차 아버지의 사랑에 감화돼 자신을 희생하는 유교적 서사로 완전히 뒤집혀서 표현된다.” 주위의 독립예술가들과 젊은 라깡연구자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것을 단순히 ‘전근대‘라는 한마디로 딱지붙이는 순간, 이들의 내적합리성을 이해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민주공화국 대통령 문재인을 “유교적 군자의 윤리를 현현한 현군”으로 간주하며 칭송하거나, 으뜸가는 그의 지지자이자 ”인류의 모든 문명은 남성이 여성을 매료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킹왕짱마초‘ 김어준이 ’리버럴‘ 민주당의 매일 아침대변인 노릇을 하는 모습은 어떤가? 임명직 공무원인 검찰의 수장 윤석열이 선거대신 유사과거제라 할 수 있는 고시를 통해 무소불위의 상징권력을 획득한 덕에 자의적 법실천을 남용해도 여론에 힘입어 유력한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설명할 방법도 함께 사라진다.

중국 애니메이션 나타지마동강세: 고대설화를 편집하여 만든, 명나라때의 6대기서중 하나인 봉신연의에 나타哪吒의 이야기가 있다. 나타는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나중에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에게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출처: http://kr.people.com.cn/n3/2019/0730/c310297-9601643-7.html>

중국의 문제는 실재하지만, 서구의 문제제기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독립된 관점과 관찰을 통해 묻고 따져야 현실의 울퉁불퉁한 디테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의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언론자유침해라는 미국 의회의 주장은 얼마나 진실에 가깝나? 이것은 주권국가에 대한 내정간섭인가 아닌가 ?

끝으로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비대칭의 문제가 있다. 그들과 우리의 의식속 가장 오래되고 깊은 곳의 중화주의가 발현할 때마다 아픔이 되살아난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후지이 다케시는 얼마전 그의 페이스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이 자리와 위치의 효과이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간생략)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이지만…” 이를 한중관계에 적용해 보자면, 중국이 중화주의의 가해자로서 특별히 구체적 잘못을 범하지 않아도 한국은 항상 피해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중국이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자리와 위치’를 마음쓸 정도의 ‘문명국’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나는 잘모르겠다. 인류의 역사속에 그게 가능했다면, 서구인들이 지금처럼 비서구인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중국의 지성에게 완전히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새로운 세대의 중국 공공지식인으로 불리는 옥스포드의 인류학자 샹뱌오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특별한 자랑거리가 아닌 그저 운명일뿐이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고, 철저히 씹어 삼켜야 한다.“

이 그림은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출처: https://theycantalk.com/image/641238503847559168>

같은 이치로 우리도 스스로 주체성을 강화해 피해의식을 탈피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강대국 중국의 위협을 거론하지만 한국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감히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기술이든 제도이든 문화든 중국이 양뿐 아니라 질까지 수월성을 확보해 한국을 추월하는 미래상인 것 같다. 근대이전처럼 중국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국격의 재역전 상황을 상상하기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왜 우리가 굳이 비교의 대상이 되기 힘들 정도로 큰 스케일을 가진 이웃 나라와 무의미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제넘은 의견이지만,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 ”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제대로 묻고 따지는 우리 자신의 생각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유사역사학과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고대 만주벌판과 북중국의 유령을 찾아헤매며 우리가 폐위된 적장자임을 호소하는 것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국한할 때나 아름답다. 이를 현실역사로 끌어들여, 물리적 영토 욕심으로 발전시키면, 중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뿐이다. 중국과학원 고인류연구소가 한국인 연구자도 참여하고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협력하여 2020년 네이쳐 커뮤니케이션과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 2020년 중국내 10대 과학기술업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만주의 홍산문화유적 유골에서 추출한 DNA를 현대 북중국 한족, 일본민족, 한민족과 비교한 유전자 비교 검사 결과를 보면, 누가 더 멀고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중화민족, 그중에서도 한족은 중국 인류학의 비조 페이샤오퉁이 제시했듯 다원일체성으로 표현되는 매우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의 너다섯배 이상 깊고 넓은 족보를 정리하기 위해 스스로 이미 머리가 터지는데 우리가 성급히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바심하지 말고, 지금 우리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내 아내는 한국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빠링허우 세대이고, 조경디자이너인 자신의 일이 ‘생활미학’과 관련이 있다보니 일본문화에 훨씬 더 호감이 많다. 그가 나와 결혼한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어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미안해서인지 그는 짬날 때마다 한국어 단어를 외우려고 노력한다. 나는 일에 쫓겨 늘 바쁜 그가 한국어 공부에도 매달리는 것이 안쓰러워 나중에 같이 한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나는 한중의 시민들이 이웃 나라에 대해 추상적이고 막연한 감정을 갖는 것이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떤 계기로 상대방의 구체적인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든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됐을 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서로 무관심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 이글의 요약판이 시사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시사인의 동의하에 축약되지 않은 원문을 다른백년에도 전재합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778

목, 2021/07/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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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글을 시작으로 2주에 1번씩 함께살기의 복지국가 5.0 기획칼럼을 게재합니다. 필진은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재생, 도시계획, 주거환경, 현실정치, 공론장, 지방분권, 주거/문화정책, 노인복지, 사회사상, 복지국가이론, 사회보장정책, 건강정책, 영유아 돌봄, 청년정책, 세대갈등, 고용정책, 기후변화, 환경/에너지 정책, 행정개혁, 성평등 등 여러분야에 대해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초반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복지국가의 강화를 주창하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일부는 진보진영이 때가 되면 떠들어대는 지겨운 레퍼토리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현재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는 기본소득제 논의도 복지국가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깊이 있는 분석과 사유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 철의 유행으로 다뤄버리는 현실이기에 씁쓸하다. 정말로 복지국가는 무용해졌을까? 현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유럽에서도 복지국가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무용론이 적용될 만큼 복지국가였던 적은 있었던가?

 

통치패러다임으로서의 복지국가

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였던 적이 없다. 복지국가는 단순히 제도나 정책의 묶음이 아니라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논리와 가치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조직∙운영했던 적이 없다.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아니면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성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그때그때 이용될 뿐이었다.

패러다임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다. 현대에 와서는,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문제해결 방법 등의 총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후[1], 패러다임은 세계관, 사회관, 인간관, 믿음체계, 가치체계 등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이들에 기반해 형성되는 문제의식, 문제해결의 방식과 도구, 제도와 정책 등의 요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즉 하나의 영역이나 분야에 이러한 요소들이 지배적인 모습을 보일 때 패러다임이라 부르고 있다.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치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통치패러다임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기준들에 대한 종합적인 틀이기에, 당연히 전 방위에 걸쳐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복지국가가 ‘복지’와 ‘국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이기에,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국가’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통치패러다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이해는 매우 단편적이며 표면적인 잘못된 이해이다. 복지국가는 통치패러다임에 의거해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경제정책, 문화정책 등을 자율적이면서 체계적인 논리와 기준들에 따라 수립하고 수행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기존의 다른 유형의 국가, 예를 들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구성원이 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는, 특히 경제활동에 개입하지도 않고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는 ‘야경국가 패러다임’을 교체하면서 대두되었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국민의 경제활동에도 개입하고 취약계층을 지원도 하며, 더 나아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즉 복지국가는 국가의 한 유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재정 전 영역에서 동일한 기준과 방식으로 국가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틀, 즉 통치패러다임을 구축한 국가이다. 이러한 통치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은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반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사회보장은 인간은 생존유지, 인간적인 삶 그리고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본래적으로 갖고 있으며 이 욕구를 사회적 연대의 방식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 자체로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외부의 원인들로 인해 사회보장의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존재이유가 침해되는 순간 인간의 삶은 불충분하게 되어 고통이 발생한다. 사회적 위험이란 바로 앞서 말한 근원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이 발생한 상황을 말한다. 아파서, 마음 놓고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역량 함양을 위한 교육이 너무 비싸거나 교육기관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명확하다. 고통의 해소를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노력하는 방법도 있고,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쳐 공동으로 해소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후자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공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응하여 위험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회보장이란 바로 이 공동의 대응방식을 포함한다.

하지만 단순히 제도와 실천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위험에 자신들도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잠재적 보편성에 기반한다. 즉 제도와 실천 이전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나는 욕구와 그것의 미충족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특정의 대응방식 등은 모두가 제도 이전에 인간을 구속하는 것들이다. 오히려 심층적인 요인들이 작동해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제도와 실천이 만들어진다. 사회보장이란 이처럼 보다 심층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제도와 실천들 모두를 아우른다.

다만 인간이 사회보장을 실현함에 있어서 외부 환경이 이를 도와주거나 방해한다. 예를 들어, 경제체계는 이 외부환경에 속하면서 사회보장의 실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세기의 극단적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사회적 위험을 발생시키고 이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회연대적 대응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외부요인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회보장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내적으로 그 존재의 이유와 발생의 원인을 갖고 있기에 독립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외부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율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의 실현을 제1의 목표로 삼는 국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개인이나 1차 집단이 주로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는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 충족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인데, 이러한 욕구 충족과 충족의 방식에 대해 국가가 전면적으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보장,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을 관할하는 최종심급이 국가가 된 것이며, 경제 영역에까지 사회보장의 논리를 적용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용인이 있어야 가능하게 되었다.

 

적응의 원리와 복지국가의 업그레이드

복지국가는 내∙외적 환경변화에의 적응(adaptation)을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삼고 있으며, 이 원리에 의거해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태동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사회보장의 실현은 결국에는 주어진 현실의 환경 속에서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 자율성의 성격에 따라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적응은 바로 이 영향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적응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근원적 욕구의 사회연대적 충족’이라는 목적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당하다는 점이 재천명된다. 그리고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선택한 기존의 방법과 도구들, 즉 제도, 관행, 실천 등이 목적 실현에 적절한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다른 방법과 도구들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그 결과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새롭게 선택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방법과 도구들이 누수 없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가, 즉 최대의 결과물들을 낳고 있는지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을 통해, 관료주의가 개선되고 제도의 최종 성과물과 애초에 상정한 목표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효율성을 갖추게 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의 1.0 버전부터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향의 확대에 적응한 4.0 버전까지 단계적으로 변화해 왔다. 19세기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던 노동자들의 요구로 노동보호와 관련된 입법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이뤄졌고, 1880년대부터 사회보험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자선적 의미의 보호가 19세기 말부터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위생, 전연병, 공중보건 등도 국가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복지국가 1.0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탄생했다.

태동기의 흐름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에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경험하며 복지국가 2.0이 만들어졌다. 독점자본주의 폐해의 확대 및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내∙외적 환경변화의 대표적 요소들이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은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적용대상자의 범위 또한 넓혔다.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여 가족정책과 주거정책 등에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시장에서도 노사협의의 관행을 만들어냈다. 프랑스는 1930년대 인민전선이 집권을 함으로써 사회보장 제도들이 확대되었으며 미국에서조차 뉴딜정책과 사회보장법이 도입∙집행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위 ‘영광의 30년’을 보낸 복지국가 3.0이 형성됐다. 전쟁의 경험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대한 사회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전에 준비된 내용들은 입법의 과정을 거쳐 제도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복지국가는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격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복지국가 3.0은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명실상부하게 통치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모델인 ‘다품종 소량생산’이 널리 퍼지고 경제 자유화 및 금융 자유화가 일어나 자원의 국제적 이동이 커지게 되었으며 해외직접투자도 점차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위험의 내용도 달라졌다. 불안정고용의 증가, 장기실업의 등장 및 대규모화, 근로빈곤의 발생, 한부모 가구의 증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각종 차별의 사회문제화, 도시환경의 낙후(도시재생 및 구역개발의 필요성 대두) 등, 소위 ‘신사회적 위험’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각 나라가 구축한 복지국가 3.0의 문제해결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복지국가는 앞 서 2번의 적응능력을 보여주었듯 이번에도 적응에 들어갔다. 인적 역량의 강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투자, 소득보장에 있어서의 최저소득보장체계의 강화, 중산층을 위한 복지의 상대적 축소 및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강화, 사회서비스의 민간제공주체로의 확대(즉 복지혼합), 사회보장의 지방분권 강화 등이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적응은 결국 복지국가 4.0 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버전은 다시 새로운 환경변화에 직면하여 또 다른 적응의 압력에 노출되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압력을 가중∙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서의 복지국가의 위상

1980년대의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축적된 사회보장에 관한 자료들은 복지국가의 ‘후퇴’보다는 ‘안정적 지속’을 보여준다. 일련의 변화는 있었지만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변화들은 GDP 대비 공적 사회지출이 대략 5% 정도 축소하는 결과를 나았다. 즉 복지국가의 합리화가 5%의 축소에 한정해 이뤄진 것이다. 특히 경제체계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2]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실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복지국가의 수준이 높을수록 팬데믹에 대한 대응 또한 잘 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즉 2020년의 경제성장률은 그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이 국내외의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췄는지를 판단하는 종합지표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복지국가가 가장 잘 발달되었다는 북유럽 국가들 증 덴마크가 0.7% 증가하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0.89% 하락했다. 이러한 수치는 다른 선진국들의 보인 2~5% 대의 하락과 비교한다면 매우 도드라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도 이와 유사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0~3%대의 하락을 보인 반면, 다른 선진국들은 3~9%대의 하락율을 보였다. 결국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보다 공고히 자리잡은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다.

국제통화기금(IMF)는 각 국가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실시한 예산사업, 재난지원금 등의 현금 지원, 세액감면 등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추가지출 및 기존 세액감면(Additional spending or foregone revenues)’ 항목으로 집계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이 자료 또한 복지국가패러다임 구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북유럽 나라들의 직접지원은 GDP 대비 1~4%인 반면, 미국, 영국 등의 영미형 국가들은 14~16%,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대륙형 복지국가들은 7~11%였다.

결국, 북구형 복지국가들은 팬데믹이라는 응급상황에서 다른 유형의 국가들보다 국가의 지원이 매우 낮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더 좋았다. 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의거한 제도들이 촘촘히 구축되어 있어서 내∙외적 위기에 보다 더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평상 시에도 국민의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위기 시에도 별도의 추가비용 없이 국민의 일상적 삶을 보호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증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가의 통치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보여준다.

 

복지국가 5.0의 전면화 가능성 상승

서구 유럽에서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위기대응 능력에 대한 인정을 넘어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대한 여러 징후들을 낳고 있다. 복지국가의 후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인 영국에서조차 ‘복지국가의 복귀’가 언론상에 등장하고 있다.[4]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특히 중산층에게까지 여러 지원을 했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올라가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과거 황금기의 복지국가가 새롭게 재구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복지국가 5.0 버전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복지국가 5.0의 등장은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복지국가 4.0이 해소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여성의 경제참여 확대, 성평등의 제도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 및 정보에 대한 사회화, 지방 자치 및 분권의 공고화, 이민자의 사회통합 강화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보장의 원리와 원칙이 경제영역에서 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 동안 미뤄두었던 생산수단의 사회화, 기술 및 지식의 사회화, 생산과정에서의 경제적 민주주의 강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조직의 역할 증대, 더 나아가 사적 재산권에 대한 제한, 금융의 사회화, 화폐민주주의의 강화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으로 복지국가 5.0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사회에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표면화 시켰다. 사회보장의 기존 제도, 관행, 실천의 한계와 결함을 드러냈고, 지방자치단체의 역량 부족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도 IMF가 집계하는 직접지원이 GDP 대비 3.4%라는 점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소득보장이 부실함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어 위기상황에도 직접지원이 덜 필요한 반면, 우리나라는 그러한 기반이 없음에도 직접지원은 그들과 유사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불가피한 소득결핍의 문제를 사회적 연대 방식이 아닌 개인과 가족의 자구방식, 특히 가계부채에 맡겼다. 이는 우리나라의 통치패러다임은 야경국가패러다임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위기는 기회이다’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유럽연합과 개별 회원국에서 나타나듯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발상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3개의 상이한 압력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 복지국가 3.0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이를 보완해야 한다. 복지국가 4.0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아직 맛보기 수준이다. 거기에다 다가오는 복지국가 5.0이 해소해야 할 것으로 상정되는 문제들은 아직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복지국가의 구축은 매우 방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통치패러다임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서구복지선진국이 1945~1975년 사이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패러다임의 지배적 위치에 최종적으로 올려 놓은 그 작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서구유럽의 경우 복지국가패러다임이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이 되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논의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간 길들을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저력을 보여왔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도 그러한 저력이 펼쳐져야 할 장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때이다.

 

[1] .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2] . Paul Pierson, The Welfare State Over the Very Long Run, Zes-Working Paper No. 02/2011, 2011.

[3] . IMF, Fiscal Monitor Database of Country Fiscal measures in Response to the COVID-19 Pandemic, 2021/02/03 참고.

[4] . The Economist, “Covid-19 has transformed the welfare state. Which changes will endure? The pandemic may mark a new chapter in the nature of social safety-nets”, 『Briefing』, 2021/03/06.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8/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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