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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내각의 개편은 포용정책과 비핵화 계기를 제공뿐, 대통령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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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내각의 개편은 포용정책과 비핵화 계기를 제공뿐, 대통령이 문제이다

admin | 금, 2020/07/17- 00:54

서훈 전 국정원장을 안보실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이제 4년 차를 맞이하는 현재의 정부에게 긍정적인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서 실장은 문대통령 앞에 놓인 복잡한 과제상황을 수행하는 핵심요직 인사로서 훌륭한 배경과 성실함을 겸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해결해야 할 과제상황은 우선 한미동맹을 양국의 전략적 이해에 맞도록 조정하고, 현재의 한중관계의 한계를 솔직이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생산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며, 한일양국 간의 현안이 상호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협력을 유도하면서, 무엇보다도 남북 간의 포용정책을 상기 현안들에 앞서 최우선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박지원 전의원이 국정원을 이끌도록 지명함으로써, 문재인 대통령은 정보조직(NIS)이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요청하는 신중함을 선택하였다. 국정원은 과거 몇몇 대통령의 부패로 인하여 형편없이 파괴적이었지만, 여전히 정황(情況)에 대한 최고의 분석가와 기획자들을 지니고 있는 조직이다. 박원장의 개인적 대북이력 즉 세대를 걸쳐 북한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하고 남북협력의 속사정에 매우 밝은 경험이 매우 소중한 시기이다. 또한 박원장이 한때 뉴욕시민으로 사업가이자 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후원하면서 당시의 권위적 체제와 싸웠다는 사실도 커다란 장점이다. 그는 워싱턴과 서울의 우익인사들이 남북간의 화해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시끄럽게 높이더라도 이를 능히 감당할 폭넓은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인영 의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됨으로써, 해당 부처는 엄중한 상황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역동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남북 간의 평화와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북한의 핵능력과 ICBM 역량을 동결시키고 점차 축소시켜나가야 하는 일이 남한의 중대하고 핵심적 사안이며, 실천적인 남한정부의 중심적 내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반대로 이명박 시절 상기의 아젠다를 폐기시키려던 시도는 한국 내 반민주적 인사들의 과거퇴행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상기에 언급한 주요 보직의 인사개편은 대통령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한, 소용이 없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동맹과 현안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문대통령이 선출되는 즉시 예상된 것이었다. 많은 인사들이 지적하였듯이,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미국의 외교정책이 엉망이 되기 이전부터 워싱턴 내의 남북한 정책은 십 수년간 잘못 설정되어 있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트럼프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비밀이 아니었다. 그가 지명한 참모진들, 존 볼턴과 스티브 비건이 트럼프의 결점을 보상할 수는 없었다. 서울당국이 역할을 해야 했다. 처음부터 한국정부가 북한을 생산적인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다자적 노력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한반도상황에 대한 청와대의 분석에는 문제가 있었다. 문대통령은 자신이 김대중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부터 그는 북한을 비핵화 협상에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유엔을 통한 강력한 제제가 필요하다고 확신해 왔다. 황당하게도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회담하는 중에 미국이 제안한 북한의 에너지 금수조치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푸틴은 그러한 정책의 비현실성을 점잖게 지적했다.

그 동안 다행히 한국의 국가안보, 남북 관계 그리고 한미동맹은 해당 부처 장관들의 노력 덕분에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다. 반면에 세 분의 지명 모두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이번 새로운 인사가 교착에 빠진 상황을 해결하거나 개선시킬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새로운 접근은 문대통령이 이를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유엔제재는 긴급히 완화(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제제 자체가 지난 20년 동안 줄곧 실패한 한미의 공동 이해와 목표이었기 때문이다 (실패를 지속해서는 안된다). 김위원장에게 보내는 선물로서 제재를 완화하는 조치가 워싱턴과 서울당국이 원하는 새로운 경로를 열어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울당국이, 미국이 무언가를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당사자로서 일차적인 책임을 느끼며 상황과 현안에 주도권을 쥐고 행동을 취할 때에 한미동맹은 활력을 되찾고 소생할 것이다. 이제 미국은 뒤로 물러서서 하노이의 협상에 대해 재평가(반성)해야 할 때이다.

앞으로 북미의 협상은 유엔과 아시아의 인접국가들 EU 그리고 호주 등의 통로를 활용해야 한다. 새로 개편된 진용으로 문대통령은 이제 복잡한 외교경로를 대응할 수 있는 팀을 제대로 갖춘 셈이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제공할 많은 인사들이 배후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문대통령 자신이 역할을 제대로 맡아야 하며, 미국의 무능(용)함에 핑계를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Korea Times on 2020-07-09.

Stephen Costello

워싱턴 평화재단의 부이사장 출신으로 미국 내의 햇볕정책 전도사라는 별칭과 함께 다양한 매체에 한반도 관련기고를 하고 있으며, 현재 조지 워싱턴 대학의 한국연구센타 초빙연구원으로 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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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주요 성과로 평가되는 한-아세안 협력여부는 세계최대 규모의 무역협정으로 평가되는 RCEP의 실현 여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 안보전략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RCEP의 체결을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인 스틸웰의 임무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경제협력이 절실하며, 중국을 경계해야 하는 인도가 일단 RCEP에서 한발을 빼자, 일본 역시 이를 무력화하는데 앞장서는 양상이다.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는 아베 정권은 경제보다 안보를 우선하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히데키 마키하라 일본 경제산업성 부대신(차관)은 지난 11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인도가 참여하지 않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서명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해당 언급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되는 무역 협정의 운명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이번 달 초,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가장 취약한 시민 계층에게 미칠 수 있는 협상의 잠재적 위험성을 언급하며 인도는 협상에 불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도가 협상에서 빠지게 되면, 일본 또한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김으로써 협정 추진을 위해 노력하는 기타국가들이 또 한번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저우융성(周永生) 중국 외교학원 국제관계연구원 교수는 이번 일본의 결정 뒤에는 안보에 대한우려의 우세가 있던 것 같다고 전하며 “일본은 아직도 미국의 무역 관세 압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RCEP를 타결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단독으로는 지역 내에서 중국의 권력과 균형을 잡을 수 없기에 인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덧붙였다.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인도가 RCEP에 참여하도록 설득해 왔다. 일본은 인도가 협정에서 이탈한 이후 인도가 다시 협정에 참여해야만 협상에 서명하겠다고 밝히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본과 인도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의 RCEP 이탈 가능성이 불거졌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일본과 인도의 외교·국방장관(2+2) 회의는 토요일에 시작했고, 양국은 안보 및 국방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조만간에 아베 일본 총리의 인도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중국과 아세안 국가의 관계가 완화하고 일본과 한국(ROK) 관계가 악화하는 현 시점에는, 아시아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간의 협력은 특히 전략적으로 필수적이다. 일본도 RCEP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내비치는 표현은 더욱 여세를 몰아서 인도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저우교수는 일본-인도 협력은 전략적, 지정학적 합의를 통해 소위 ‘중국 위협론’을 억제하기 위해함께 노력하겠다는 점에 항상 중점을 두었다고 가리켰다. 양국은 이미 2011년에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양국간 무역관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대일 인도 수출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대일 인도 무역적자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과장된 위협 담론 아래에서 상호 안보 이익을 이유로 양국이 동맹을 맺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진정으로 이번 협상에서 빠지기로 결정한다면, 경제 전망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일본이 상황을 살피면서 다른 국가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인하기 위한 잠정적인 움직임으로 보인다.

해당 발언은 향후 일본이 RCEP 협상 테이블에 다시 합류하도록 할 수 있는 부대신으로부터 나왔다. 일본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2%를 기록하며 지난 2분기 성장률 1.8%에 견줘도 대폭 하락한 점은 아베 총리의 내각이 경제 촉진 부양책을 대폭 강화할 필요성에 대해 갖는 상당한 중압감을 의미한다.

RCEP 협정문은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맞서 동아시아 무역을 활성화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WTO 개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되면서 RCEP 체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욱 통합된 동아시아를 이룩하기 위해 중요한 첫 관문이다. 이미 중-미 무역 전쟁이 세계 수요에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수출 주도의 일본경제는 RCEP와 같은 협약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일본이 협약에서 빠지는 쪽으로 결정한다면 거짓된 담론을 통해 안보 우려를 경제적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저우 교수는 “심화된 지역경제는 제지할 수 없는 추세이며 단일 국가나 지도자에 의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다른 RCEP 국가는 일부 국가의 계획적인 결정 때문에 핵심 지역의 이해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목, 2019/12/2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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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전체의 소멸은 보기 드문 사건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된다. 그야말로 국가가 소멸하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참패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소멸보다는 새롭게 부상하는 주도 집단이 기존의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명령을 새로운 체제로 이행시키는 경우가 훨씬 보편적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신속하고 격렬하게 일어나거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건설적이거나 또는 파괴적인 과정이 얽혀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지니며 세계 제1의 압도적 군대 강국이자 여전히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위와 같이 전면적인 파멸을 당하는 일은 실제로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현재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관리하는 소수의 특정 이익집단이 완전히 상이한 유형의 주도 집단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주도 집단은 미국인 전체에 최선인 이익을 더 잘 반영하고 전 세계 국가들과 대립하기보다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협력과 지속이 가능하게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진행 중이다.

 

America’s Prevailing Order is Fading

미국 지배 체제가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주도하는 현 상황의 특정 이익집단은 월가와 워싱턴 위주로 활동하고 있고, 전통적인 은행, 에너지, 제조 독점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점 비현실적이고 지속 불가능하며 구태의연한 네트워크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대중 매체, 대규모 로비 활동, 해외 정치적 전복, 국내 정치적 분쟁 등 기존의 특정 이익 집단은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수많은 수단을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전 세계 국가가 점점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효과적인 대응책 개발을 시작함에 따라 이들 수단의 효과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특수 이익집단은 ‘러시아’나 ‘중국’의 ‘선전(propaganda)’에 대항하기 위해 일단 겉보기에 엄청난 시간을 쏟지만, 실제 월가와 워싱턴이 행사한 부당한 영향력을 폭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적국들이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 내부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대안 매체들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있다.

미국 사회의 기존 엘리트 계층과 네트워크가 약해짐에 따라 이를 대체할 대안의 집단과 수단들이 계속해서 강력해지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해외 군사 작전과 동일선상에 결부되어 지속 불가능한 사회경제 및 정치 모델은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와 언론 방식과 더불어서 평범한 관찰자에게도 현재 미국 내 지배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여진다.

 

America’s Elite Face Challenges from Within as Well as From Abroad

미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국내와 해외로부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오랫동안 자리한 미국의 독점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중국 기업에 대한 내용은 세계 언론에서 점차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무의미한 미중(美中) 무역 전쟁을 촉발한 것은 사실 이런 상황의 변화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미국 내 기성 엘리트 계층의 쇠퇴만 부각시킬 뿐 그들이 지닌 본질적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화웨이와 같은 기업은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제재와 노력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화웨이는 견실한 기반을 갖춘 사업과 경제 기초여건을 토대로 갖추고 있었고, 미국 기업들은 경쟁 부재라는 초기 이점을 가졌지만 기초여건 구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기성 엘리트는 중국 기업 외의 여러 도전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파괴적 기술을 보유한 몇 회사는 미국 내에서 성장하면서 대외 경쟁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 기반을 둔 견고한 독점 체계도 도전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제조사 테슬라(Tesla)가 완벽한 예시이다. 테슬라의 놀라운 혁신 속도, 세간의 이목을 끄는 성공,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다른 무엇보다 미국 자동차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또한 한 세기에 걸쳐 미국이 도입하고 전 세계를 장악해온 석유 중심의 에너지 모델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진정한 소비자 가치와 혁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의도된 관행과 구식의 마케팅 술수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자했다. 이들 산업은 단순히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고 매해 이윤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동차제조’는 단지 돈과 구매 영향력을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다.

반면에 수 년간 테슬라는 사업과 사회정치적 영향 측면에서 모두 성장해왔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테슬라의 표면적인 매력을 흉내 내려고 시도했지만, 신설 회사의 성공을 주도한 본질을 이해하거나 복사하는데 실패했다.

미국 엘리트 계층이 해외의 화웨이와 같은 경쟁사를 상대할 때 직접적인 경쟁보다 ‘더러운 술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전략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유사한 발식으로 ‘미국 내의 테슬라와 같이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한 회사에게 ‘더러운 술책’을 사용했다. 가짜 노조가 테슬라의 미국 공장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던 사건이 한 예시이다.

미국의 신생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 X’는 오랜 기간 자리한 미국독점업체에 직접적으로 도전한 (그리고 위협하는) 미국계 경쟁사의 또 다른 예시이다. 이 경우, ‘스페이스 X’는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보잉(Boeing), 노스럽 그루먼(Northrop Grumman)과 같은 우주 독점업체와 맞섰다.

‘스페이스 X’는 놀라운 속도로 우주 항공혁신을 이끌면서, 동시에 우주 여행의 전반적인 비용을 절감시키고 있다. ‘스페이스 X’의 인상적인 비용 절감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로비 네트워크를 형성한 록히드, 보잉, 노스럽과 같은 기존의 항공 독점업체는 ‘스페이스 X’ 고객들의 (미국 정부를 포함) 로켓 여행 탑승 구매를 저지시키지 못했다.

로비와 정치 게임을 통한 이윤 유지에 지나치게 의존 해온 거만한 독점업체는 실제 경쟁이 도래하여 경쟁업체와 직면했을 때 거대한 조직을 재정비할 대책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책을 이끄는 지배적인 체제는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추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경쟁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현존의 지배 체제를 대체하는 세력은 미국 기존의 권력과 영향력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미래로 향하는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갖는다. 또한, 미래로 나아가면서 미국과 미국민 및 미국과 교류하는 세계 국가 모두에게 근본적인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America’s New Order May Seek Genuine Competition and Collaboration

미국의 새로운 질서는 진정한 경쟁과 협력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테슬라와 ‘스페이스 X’는 중요한 예시지만, 미국 내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진행중인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는 결코 아니다. 현재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는 새로운 혁신과 기업들이 등장하고 하여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뿌리 깊은 기업언론을 겨냥한 대안 매체들부터 미국의 대규모 농산물 독점업체들을 위협하는 지역 유기농 농부들의 고조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이미 실질적인 전환 사례가 많이 발생해 왔다.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국제적 수준에서 투자하거나 기여할 수 있다.

새로운 미국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신호로는 테슬라와 같이 기존 체제를 파괴한 기업이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꺼려하지 않고 독점을 위해 세계적 규모의 네트워크 망을 구성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업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한 예로 테슬라의 대규모 기가팩토리는 미국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 공장을 설립한 이유는 미국이 오로지 정치적이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이 미국 국내에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도록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 및 중국과 같은 국가 사이에는 명백하게 적대감이 존재하지만, 미국인들의 일반여론에 따르면 현존 질서의 표적이 된 모든 국가들과도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적대감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국가 혹은 국민으로서의 일반적인 미국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 미국 사이의 협력 및 건설적인 경쟁을 저해하는 특정 이익집단에 의한 것이다.

머지 않은 중간 미래까지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지속되면서 미국의 특정 이익집단이 권력을 손에 넣어 유지하려 하고, 불가피한 쇠퇴 및 변동과 맞서 싸우며, 외부 세계와 미국 내부의 경쟁자와 싸우려고 애쓸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기보다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경쟁하면서 자신을 다극화 세계의 건설적인 일원으로 여기는 희망적인 미래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민족은 미국과 불필요하고 광범위한 적대행위를 삼가고, 대신에 현재 월가와 워싱턴에서 행해지는 활동을 끈기 있게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폭력적인 관행에 근거하여 진행 중인 쇠퇴에 책임이 있는 미국 내 깊게 자리한 이익집단과 진정한 경쟁과 타협을 추구하는 한편, 미국의 미래를 대표하는 미국 새로운 주도집단을 구분하여 후자의 이익집단과 유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편,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심지어 많은 신흥 및 개발도상국의 대외정책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거나 유화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여러 국가들의 중심역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 일어나는 변화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미국 제국의 몰락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미국 기존의 권력 지렛대를 활용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대체 세력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울슨 군나르(Ulson Gunnar)

뉴욕 거주 지정학 분석가이자 온라인 잡지 ‘뉴이스턴아웃룩’ 의 기자

출처 : Global Research, December 10, 2019

목, 2020/01/0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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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월, 2020/01/0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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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파리에서 행해진 기후 변화 협약이 이번에는 12월 1일부터 2주간 마드리드에서 이루어 졌다 (불행하게도 모임은 회기를 연장하면서 강제성 있는 합의를 도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심각성의 문제만 제기한 채, 내년에 있을 영국의 글래스고우 모임으로 강제성이라는 임무를 순연시켰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세계는 비극적인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이 부족하다. 유엔 사무총장은 산업화 이전 평균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보다 낮게 유지하고 이상적으로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2015 파리협약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이 “전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스페인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 협상을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5)에 앞서 지구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점 (환경 복원이 불가능한 시점- tipping point)”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화석 연료 보조금을 지속하고 탄소세 부과를 거부하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아마도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지구 온난화 상태가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기후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태인지 추측하는 연구 결과를 읽었을 것이다. 기후 ‘티핑포인트’ 9 종류의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현재 ‘행성 비상사태’에 처해 있고, 아마도 온실지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으로 빙하 격감과 같은 일부 기후 위험은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5도 상승할 경우 발생한다고 예측되어 왔지만, 이후 모델을 통해 해당 기온의 폭을 1도에서 2도 사이로 낮췄다. 심각하게도, 연구진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티핑 포인트가 상호작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연쇄 피해를 일으킬 조짐을 보인다고 경고한다.

독일 및 덴마크 학자들과 협업한 티모시 렌턴(Timothy Lenton) 영국 엑시터 대학 지구시스템 연구소 소장은 “악영향을 끼치는 급변 연쇄 작용을 막을 수 없다면 이는 문명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연구진은 위기 관리 측면에서 평균 기온 상승폭을 섭씨 1.5도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경제적 행동을 촉구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IPCC)에서는 지구 기후 시스템의 ‘대규모 불연속’을 티핑 포인트로 정의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에는 북극해 빙하와 아마존 열대 우림과 같이 익숙한 상징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는 열대 지방의 따뜻한 한 물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심해의 차가운 물을 남쪽으로 가져오는 대서양 자오선 역전순환류인 ‘컨베이어 벨트’와 북위도를 감싸며 때로는 영구 동토층 위에 자리해 광활한 탄소 저장소 역할을 하는 상록수 숲인 타이가가 있다.

실제로 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로도 되돌릴 수 없는 급격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임계점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세계 기후의 일부 요소는 기타 요소보다 임계점에 더 가까이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린란드 빙하는 임계점에 거의 도달했을지도 모르며 빙하는 티핑 포인트가 지나면 가차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북극해 빙하 감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다. 빙하는 심해보다 빛을 더 많이 반사하므로, 빙하가 녹으면 열 흡수율이 증가함에 따라 온난화가 가속된다.

두 현상 모두 북대서양에 더 많은 담수를 유입시키고 컨베이어 벨트를 늦춤으로써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속도가 늦어진 순환이 서아프리카의 몬순을 흩뜨려서 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가뭄을 촉발할 수 있다. 이후의 도미노 효과로는 남극 대륙의 빙하 손실을 가속화하는 남극해의 기온 상승이 있다. 기후 도미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위험성은 두 배로 증가한다. 지속적인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지구는 이미 지하에 저장된 탄소를 배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구 동토층으로 부터의 배출을 통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100기가톤(1Gt = 10억톤)을 채울 수 있다. 이는 3년 동안의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양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3.1Gt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종말론적 분석을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피어스 포스터(Piers Forster)리즈 대학 기후변화학 교수이자 IPCC 저자는 “1.5C의 온난화에서 그린란드의 빙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녹아내리더라도 수 세기가 걸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핑 포인트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포스터 교수는 탈탄소를 위한 행동의 지연은 “우리 자신을 비극적인 미래로 몰고 나갈 것” 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세계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위험성에 대처하고 온난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절하게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 이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네트 제로(net zero)로 만들기 위해 사회 내 재력과 능력을 활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앙이 닫쳐 오더라도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접근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안자나 야후자(Anjana Ahuja)

 FT 과학 평론가

목, 2020/01/0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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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흔히 맥이 빠지는 기사 헤드라인 너머의 현실에서는 다행히 각국 정부들과 기업들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 기구의 기능 마비와 같은 부정적인 현안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지난 2년간의 발전이 이루어진 실제 분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나서서 주도하는 한, 노력을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게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WTO 회원국 다수는 21세기에 무역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전자 상거래 협상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국가가 전자 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고, 2019년 12월 10일에는 WTO 회원국들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원칙(moratorium)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회원국들은 ‘규율화 된’ 수산업과 농업 보조금과 같이 전통적으로 다루기 힘든 쟁점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합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국내 및 국경을 넘어 투자와 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며 중소기업이 시장에 더 잘 진입하여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력이 변화하고, 기후위기의 난제에 대처해야 하며, 기술 발전이 상업에 지장을 주고, 시민들이 점점 더 포괄적인 형태로 모두를 위할 수 있는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핵심 중 일부가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무역은 사람과 지구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를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현재 무역 분쟁이 ‘법의 지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소 기구의 위기에서 야기한 시급한 과제를 넘어, 현재 정치의 역동성은 무역 시스템을 극적으로 개선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WTO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WTO 조직 구조와 책임 체제를 강화하여 시스템 내 신뢰를 구축하기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및 사업 단체의 참여 증진, WTO 과정 및 협상의 투명성 증대, ‘특별하지만 차등을 두는 방안’을 위한 증거 기반의 기준 확립은 시스템 신뢰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정부는 현 시점에 기존의 WTO 규정들을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990년대 초에 제정된 무역 규범은 갈수록 더 서비스 및 데이터의 흐름으로 특징되며 디지털 기술 및 글로벌 가치사슬로 가능해진 21세기 무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부단위에서 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불평등과 같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을 다룰 권한을 WTO에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독창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WTO가 세계화뿐 아니라 불만의 원인을 다루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큼 WTO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특히 아시아 태평양의 몇 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WTO의 세 기능(감시, 분쟁 해결, 협상)을 개혁하고 현대화하자고 제의했는데, 이는 정확히 국제상공회의소(International of Chamber of Commerce)가 요구해온 바이다. 호주의 복수국간 WTO 전자상거래 협상 촉진은 21세기 무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규범 제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WTO 상소 기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핵심적인 중재 역할은 공로와 공감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0일, WTO의 60 회원국이 규범에 근거한 다자간 무역 시스템에서 WTO의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재차 시인한 점은 고무적이다.

명백하게 정부 단위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초소형 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들은 지난 25년 동안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누려왔다. 세계 무역 시스템의 주요 사용자이자 수혜자인 기업은 WTO의 지지자가 되어 개혁 과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리더십은 무역이 일자리, 환경,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정당하게 불평하는 일이 보호무역주의와 후퇴를 요구하며 역효과를 낳는 방향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대신에 정부, 기업, 시민 사회는 무역 시스템이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 작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WTO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시기가 도래했다.

 

John WH Denton AO

파리에서 국제 상공 회의소 (ICC)의 사무처장

Damien Bruckard

ICC의 (무역 및 투자 분야)부회장

금, 2020/01/1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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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다른백년은 그 동안 워싱턴 프레임이라는 관점에서 홍콩사태를 보도해온 국내 언론의 한계를 벗어나, 독일에서 연구중인 중국본토의 젊은 학자의 시각과 미국 내 진보적인 지식의 견해를 소개한 데 이어서, 마지막으로 제3세계 정치경제 분석의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호주 국립대 (ANU)의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진의 입장을 번역하여 독자분들께 알리고자 한다.


중국과의 범죄인 인도 법안이 제의된 후 홍콩에서 평화적으로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이 넘었다. 이후 전개된 폭력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

그 동안 시위자들과 당국의 격렬한 대응에 의해 홍콩 도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비되었다. 폭력, 죽음, 대규모 체포와 잘못된 정보가 잇달았다. 경기 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해지면서, 호텔의 반 이상이 텅텅 비었고, 대학이 포위되었으며 소매업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고 일상적으로 교통이 마비되면서 경제가 위축하고 있다. 그러나 범민주 진영이 11월 말 지역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시위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부각시켰다.

시위운동에는 지휘하는 중심적 지도자가 없고, 다만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하라는 초기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구속된 시위대의 사면과 보통선거권을 포함한 나머지 네 가지 요구 사항은 행정부와 절충하기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보통선거권 개혁 과정에는 어려운 난관이 있으며, 실은 2014년에 이미 당시 야당 의원들이 변화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EAF 칼럼리스트 케리 브라운(Kerry Brown)은 ‘홍콩의 주민 대부분은 안전에 필요한 비용과 행정부의 대책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상황임에도 시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홍콩의 상황을 요약했다. 시위 및 당국의 대응이 격화하면서 ‘때론 베이징 정치 지도자들조차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중국은 상당한 국제적인 비난과 반발을 야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을 기피해왔다. 중국이 시위대에게 물러설 일은 없겠지만, 시위에 개입하게 되면 홍콩 내 혼란과 국제적으로 엄청난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국경 너머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도 사태를 지켜 보아야만 했다.

취약한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브라운이 설명하듯이, ‘2019년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2020년으로 사안들을 연기했을 뿐이다. 위기가 더 오래 이어질수록 홍콩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홍콩 주민의 복지와 동아시아 번영 및 안보에 있어 홍콩 도시가 지니는 중요성이 위기에 봉착했다. 잘 알려진 제도를 갖추고 있는 홍콩은 서쪽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며 특별하고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게 있어서 홍콩은 주권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서구 사회에 대한) 전방의 위치에서 기능적으로 제도 및 재정 기법을 배우면서 본토 경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경험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중국과 세계 다른 국가가 홍콩을 특별하게 여기는 요소가 줄어든다.

미국 의회가 11월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중국과 미국 간의 진행되는 심각한 패권과 전략적 경쟁이 더욱 복잡해졌다. 2019년 한해 전세계적으로 대규모 시위운동과 대응으로 많은 도시들이 마비되었지만 그 어떤 사건도 홍콩처럼 두 초강대국의 전략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배후에서 홍콩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그렇지만 다른 국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여자 모두가 패배하는 (lose-lose) 위기 상황에 자칫 연루되면 잃을 것이 많다. 지난 10월 팀 서머스(Tim Summers)는 다른 국가들이 워싱턴, 런던, 캔버라 라는 배후 도시의 시각이 아니라 홍콩 사회 전반의 내적 견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홍콩 정부를 지지하고 홍콩과 베이징의 이해 관계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폭력사태는 반드시 멈춰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홍콩 사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시위와 혼란이 멈추기를 바라며 시위대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기를 원한다. 양측이 체면을 세우면서도 홍콩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타협안이 필요할 것이다.

홍콩과 중국은 홍콩 헌법에 명시된 영국과의 50년 합의가 만료되는 2047년까지 ‘한 국가-두 체제’로 운영된다. 2047년 이후에 벌어질 일은 명확하지 않고, 그 동안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 지 22년이 지난 현재, 특히 중국에는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2047년에 다른 국가가 되어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번영 및 고소득의 꿈을 이뤄낼지 성공의 여부는 아마도 경제와 정치 제도 개혁의 가능성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국이 상기 개혁이 성공하면 본토와의 관계에 대한 홍콩 국민들의 사고방식 역시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위원회

호주국립대학교(ANU)

월, 2020/01/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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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류 문명을 개조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도래할 수도 있다. 기존 과학기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중심적 환경주의 운동과 교육은 임시방편적이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인간과 생태계와의 화합을 주창하는 탈인간중심적 종교와 신비주의 철학은 현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과학기술의 견고함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 현 인류에 닥친 지구 생태계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곳에는 생태철학의 담론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토대가 된 근대적 세계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새로운 생태문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생태교육이 학교교육 현장에 커리큘럼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과학적 자연관과 인본주의적 능력배양 중심의 근대 교육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구의 문화는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현재의 환원론적이며 기계론적 과학기술에 대한 탁월한 대안으로서 생태과학의 패러다임이 과학계에서도 인정받아야 한다.

생태철학의 담론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하였고 현재에도 유효하지만 생태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구체적이며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생태교육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철학과 과학연구의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한계

17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면서 시작된 근대에는 인간, 신, 자연 간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었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는 교권과 스콜라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인격체로서의 개인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가능해졌다. 자연사물과 정신의 공통된 존재론적 기원으로서 그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었던 신의 위상은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껏해야 과학적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과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지표로 전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복음주의 신학은 각 개인이 신과의 접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구원의 체계를 교리화한 것이다.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베이컨의 우상론은 자연세계의 진리에 접근하고 개인의 지적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혁명이란 이름 하에 자연세계의 여러 단면들을 탐구하는 여러 개별 과학분야가 이 시기에 태동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자연현상은 관찰할 수 있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제한됐으며, 수학적 언어만이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편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 복지, 자본, 부의 개념이 근대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자원의 의미로 전락하였다.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이란 인류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지구자원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근대의 사유체계가 지식확장의 주체인 인간과 탐구의 대상인 자연세계가 철저히 분리된 이원론적 실체론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기계론적 인과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더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연세계를 더 작은 단위의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게 되었다. 예컨대 복잡한 생명현상은 더 작은 단위의 분자수준에서 설명하고, 이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화학과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생명현상, 기후변화, 국제정치상황 등은 단순히 환원적이고 기계론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인류문명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기이한 부작용들을 현재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생태철학의 역사

지구환경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생태적 패러다임은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인가? 제도화된 종교에 예속된 중세의 세계관과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중심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은 인류의 전 문명에서 볼 때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종류의 세계관이 이미 동서양에 더 넓고 깊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오래 전 동양의 도가사상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도, 자연세계를 개별화된 개체와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각 개체들의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연 개체들의 내재가치가 존재함을 믿었다. 생태학(ec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s’(eco)는 가족, 집,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 사회를 이루는 작은 단위 공동체를 의미한다. 자연은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지어가는 가정과 같은 것이고 생태지혜(ecosophy)는 노자가 말한 ‘유무상생(有無相生,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남)’, 즉 타자를 향한 관계적 진상을 깨닫는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불교의 근본인 연기사상과 생명존중 사상에 따르면 법계와 생태계는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세계라는 점에서 같고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가치가 바로 불성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죄로 분리된 관계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고, 사랑으로 연합되는 전 우주적인 공동체가 교회라고 여겼다. 도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심층생태학을 주창한 아른 네스는 자연보존운동을 지향하는 표층생태주의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아(self)에 국한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지구 안의 모든 것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심층생태학은 생물권 전체와의 일체 의식을 경험하면서 최대의 대아(Self)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철저히 분리된 물질의 개념을 공고하게 만들었지만 정신과 육체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그의 기계론적 설명은 모순이 많았다. 또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자연은 인류의 발전과 진보의 수단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스피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윤리학)』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거부하면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개체들은 시공간 안에서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 혹은 변형태라고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자연관에 따르면 신은 자연에 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신과 분리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전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건, 경험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체계적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란 무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변화 생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태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자연전체와 자연법칙을 통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니체도 초인의 정신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 삶을 누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생태적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이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절대 시공간 속에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갖지 않고 동일하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파악되는 ‘실체’라는 개념의 과학적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 여겨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에 의해 구성되어 이름 붙여진 것이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과거의 세계 전체인) 경험의 계기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현실적 존재가 자기를 구성하는 생성의 과정을 파악(prehension)이라고 명명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도 인간이 가지는 경험의 정도는 아니라 해도 파악의 과정과 경험을 가지며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공간적으로 상호 연결된 자연 내의 모든 유기체들은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생태계 내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간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자기(Self)의 존재를 세계와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생태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생태과학의 등장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자연의 복잡한 현상을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생물학과 임상의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믹스(omics, ‘체학’이라 번역되며 생명과학에서 분자들이나 세포 등의 집합체 전체를 뜻함)라는 분야가 등장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전체학(Genomics), 단백질체학(Proteomics), 후성유전학(Epigenomics), 대사체학(Metabolomics), 연결체학(Connectomics) 등이 그 예인데 단백질, 신경세포 등 몸 속의 여러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대한 패턴을 분석하여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세부 학문분야들이다. 기존의 기계론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는 복잡한 생명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를 넘어선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방법론이 복잡한 인과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이버네틱스란 분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밝혀 시스템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를 조직하고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개념화하였다. 오늘날 정보기술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 기술도 정보와 데이터들의 연결을 통해 엄청난 양과 종류의 정보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초연결사회를 만들어가는 4차 산업혁명의 개념 역시 사람, 기계, 데이터,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미 과학기술의 페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 전체적 관점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구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에도 이런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의 교수학습 원리

화이트헤드는 생태적 교육에 있어서 생태적 자기(Ecological Self)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즉 생태교육은 한 개인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도와주는 도덕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적 요소라고 하였다. ‘생태적 자기’는 개인을 넘어 이웃, 사회, 인류, 생태계, 우주와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기본 개념이며 자기 초월성과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학습자는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상호 의존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이 관계성을 통해 생명이 유기적으로 끝없이 탄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서의 개별 학습자는 고립된 에고(ego)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통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자기(Self)의 존재를 경험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과 연결된 다른 존재들의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공감이라 하며, 생태적 교육은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주장하였듯이 교육은 교실 내에서 생기 없는 관념(inert ideas)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창조성을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을 학습자와 교사가 함께 가꾸어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도덕과 교수학습의 네 가지 방법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1) 상호성의 원리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관점에 기초한다. 교사와 학생은 양방향으로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상호 파악(prehension)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파악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교육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세계에 대해 배우고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2) 관계성의 원리는 도덕이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에서 관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발생하는 도적적 개념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도덕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즉, 교육은 ‘관계적 자아’에 바탕을 두고 생태환경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책임감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덕교육은 다양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통해 관계적 자아와 가치관계를 확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3) 리듬의 원리는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리듬적 특성을 고려한 교수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로서, 인간의 삶과 교육이 주기적으로 순환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듬의 원리는 그의 합생의 원리(다자가 모여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원리)와 일맥상통하는데 교육은 지속적인 파악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인 것이다.

(4) 조화의 원리는 추상적 사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강조한다. 교양교육은 조화의 원리를 토대로 추상적 이론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조화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자율과 훈육을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특성과 전체 학습의 과정을 고려하여 학습 단계별로 조화롭게 커리큘럼에 적용함으로써 지혜롭고 창의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생태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태교육은 근대의 기계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생태적 내용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과학주의를 넘어 관계, 과정, 연결이라는 사고가 교육의 핵심원리가 될 때 진정한 생태적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 생태철학과 생태과학에서 도입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태교육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교수학습의 방법론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의 전환과 생태적 자기의 형성이 이뤄져야 한다.

아직 제도권 교육에는 도입되고 있지 않으나 여러 대안학교들과 지역공동체들에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다양한 생태교육 커리큘럼과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높이고, 타인 및 자연과의 유대감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자아 발달에 도움을 주려는 노력들이다.

생태교육은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시도이다. 진화는 한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환경을 구성하고 관계의 연결망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에 대해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지구 환경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스스로 적응하고 자기조직화 하는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다. 생태교육은 인류가 지구와 함께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는 실천적 발걸음이다.

 

김홍기

서울대 치의과대학 교수, 의료정보학

월, 2020/01/1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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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제안되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 극단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무한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이며, 다른 한 극단은 지구, 정확히 말해 인류를 위기에 봉착하게 할 경제 성장을 중단하고 지구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준 내로 경제규모를 한정함으로써 인류도 지속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현실에서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지점으로 각자 이해할 것이다.

무한 경제 성장의 욕구를 담보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수식어가 제안되었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언급될 때 대부분의 경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해석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논의에서 추구하는 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생태’가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는 교육이다. 이러한 목적의 교육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큰 줄기인 생태 개념을 시민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하지만 생태교육의 개념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생태교육의 정의

생태(ecology)의 뜻은 학문으로서 생태학(ecology)의 정의가 생태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것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나 그 속성을 전제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 환경의 상태를 전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인간 개입이 없는 자연이 순수하고 안전하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간이 철저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후자에서 인간의 개입은 전자의 순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훼손 행위를 방지하는 개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개조하는 개입일 수도 있다.

자연 개조를 옹호하는 관점에서의 생태 용어 사용은 생태농법에 대한 인식에서 볼 수 있다. 생태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이 인간 건강에 좋다는 관념은 인간을 위한 식량생산의 도구로 자연을 이용하면서 인간 건강에 좋도록 자연을 개조하는 개입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태교육에서 말하는 생태는 순수 자연을 전제하며 무한의 물질순환을 통한 생태계의 지속성 개념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태계는 개별 구성원인 종보다는 구성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계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생태교육에서 생태계는 인위적인 개입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물질의 순환계로 여겨진다. 에너지는 생태계 외부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태계 내 생물구성원의 연결망(관계)을 통해 전달되다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방향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물질은 생물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에서 생물공동체 내로 들어와 생물 구성원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다가 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으로 되돌아가며 생태계 내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생태교육에서 생태는 인위적인 개입, 즉 에너지의 투입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상태나 속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개념에 기초한 생태도시는 환경에 위해가 발생하지 않는 자연 순환의 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태도시에서는 생태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도시 문명이 지속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물상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으로 전제된다.

이처럼 생태교육에서 생태란 인간 문명 내에서 무한의 순환에 저해가 되지 않도록 인간 이외의 생물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의 정의에 기초한 생태교육은 순수 자연이 무한의 순환을 하듯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생태주의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교육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이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다.

요컨대 생태교육은 일차적으로 현대 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민의 생태소양을 높여 생태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생태교육의 목적은 생태시민이 인간 이외의 생물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현대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며 인류공동체 구성원들도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생태교육

20세기 후반부터 융‧복합적 또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시되고 통합적 접근의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통과학이나 공통사회 교과목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었고, 생태교육에서도 통합적 교육의 요구가 높아졌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관 변화와 사회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생태시민의 개별 행동과 사회행동이 교정되도록 하는 데 기반이 되는 생태교육은 통합과학이나 통합사회를 넘어 전 분야가 통합하는 접근이 더욱 절실하다.

‘통합’은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를 참조하면 ‘둘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일’로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습결과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접근’은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치관과 태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통일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는 접근’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접근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조정 변경되고, 조정된 가치관과 태도에 따라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즉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형식적인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대학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통합교육이 시도되고 있지만, 실제 교육내용이나 방법은 단순한 메들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교과목이라는 명목 하에 한 교과목에 다양한 분야를 넣어놓고 한 교사가 가르치거나 다양한 전공 교사들이 연이어 가르친다고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며 형성된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교육이 진정한 통합적 교육이다. 각 분야를 폭넓고 심도 있게 가르침으로써 배양된 학습자의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한층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며 통합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된 결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충을 종합적인 틀에서 포괄하여 차이를 줄이고 조화로운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생태교육은 이러한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다. 환경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단순한 해석들이 서로 상충되더라도 개인 또는 사회는 하나의 실천적 결론을 강제적으로라도 내려야 하며, 그러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교육이 생태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친환경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연비가 개선된 차를 소유하게 된 개인은 친환경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보다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되어 운행 시간과 거리를 늘리기 때문에 연료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실제 배출되는 공해기체도 늘어날 수 있다. 낮은 연비 때문에 자동차 소유를 꺼렸던 사람도 자동차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됨에 따라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행에 합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공해기체의 배출총량이 친환경기술 개발 이전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늘어난 차량을 소화하기 위해 도로 수요까지 늘어 자연이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실제 역사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해왔다.

이와 같이 환경부담 감소라는 개별 기술의 분석이나 해석이 기술수요 증가라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이나 해석과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해결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게 하는 제도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단순한 접근으로 자동차 운행수요를 줄이는 방법은 연료가격을 올려 연비개선에 따른 운행의 경제효율을 이전과 같게 되돌리거나 오히려 개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행이 유지되거나 감소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대응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술자나 회사는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을 더는 개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된 환경문제나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 중심 혹은 과제 중심의 생태교육은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의 난제가 있다. 과학, 기술, 사회, 인문 분야의 지식을 모두 갖춘 교사가 통합적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각 분야의 지식이 부족한 교사라도 통합적 접근의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속 가능성의 생태학적 이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중심이 되는 생태교육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원리를 자연 스스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태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 방식이 더는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제안된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간에게 경제 성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도록 경고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키우려는 욕구를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친환경 또는 생태 기술을 개발하여 지구 자원(물질과 에너지)의 소비가 계속 늘어나도록 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상을 변환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의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지구의 무질서도(엔트로피)를 높이며 최소한 인류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엄연한 우주법칙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 문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안을 생태계의 원리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생태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계이기 때문에 생태위기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질 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경제 성장 방안을 제공할 수 없다.

성장의 욕구를 채우려는 지속 가능성 요구와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생태계의 본질은 서로 모순된다. 진정한 생태교육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지속 가능성에 부응하는 인류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모든 생태학 교과서는 생태계 내의 무한한 물질 순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내에서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는 물질은 전체 물질 중 극미량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물질은 저장고에 머물러 있다. 극미량의 물질이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간접적인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막대하다.

광합성을 통해 생물공동체가 직접 사용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지구에 유입되는 양의 0.023%에 불과한데 비해 지구 밖으로 반사되어 나가는 34%를 제외한 66%의 태양에너지는 극미량의 물질이 순환하는 생물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구의 무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생물공동체가 직접 이용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물공동체 밖에 머물기 때문에 지구는 생물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반증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물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생물권 2’(생물권 1은 지구이므로) 실험이다. 1991년 미국 아리조나 주 남부 오라클의 사막지대에 1만2000㎡의 거대한 유리온실을 지구의 축소판인 바다, 습지, 열대우림, 사막, 초원 등과 3800여 종의 각종 동식물, 자원참가자 8명이 2년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제한된 밀폐 공간에서 생물공동체의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한 무생물 공간이 없던 생물권 2는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물질 순환은 생태계 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생물공동체가 이용하는 생태계 내 에너지도 극소 분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구 내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늘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때만 인류 문명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팽창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질적 향상,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과정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한정된 수준 내의 물질적 풍요를 수용하고 만족하는 정신적 행복의 향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교육의 이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지속적으로 팽창하려는 무한 탐욕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생태교육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물질과 소비를 한정된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인간 사회로 확장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1)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생태철학적 반성

많은 생물학과 인문사회학 책들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생태계의 존속 방식인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를 초토화하고 박멸하여 강자가 취할 수 있는 약자가 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자로 비유되는 포식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포식활동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포식자는 약자로 비유되는 피식자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으며, 피식자도 그렇게 무심한 포식자에게 도피활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무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는 한 생태공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필자는 이러한 공존을 ‘모자람의 지혜(frugal wisdom)’를 바탕으로 하는 ‘무심의 공존(disinterested coexistence)’이라 명명하였다. (『이해하는 생태학: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찾아서』, 공주대 출판부, 2005)

이와 반대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철저한 약자의 멸살로 공존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침의 무지(indulgent ignorance)’라 명명하였고, 그 결과는 인류 미래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사회의 구현: 4대강 사업의 이기적 탐욕과 생명경시 극복’, 『생명연구』45호, 2017)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공존하지도 못하고 인류공동체가 갈등 없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물론, 인류공동체의 갈등 없는 공존을 위해서 인류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모자람의 지혜’를 탐욕을 억제하는 자기 절제의 지혜로 깨닫고, 생태계가 보여주는 ‘무심의 공존’을 타자의 생존과 권리를 존중하는 타자 배려의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문명은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토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태 평등(ecological equality, 정민걸, 위의 논문, 2017)을 인간 사회의 공동체에서도 구현하는 지혜로운 문명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2)함께하는 생태시민의 자아실현

생태계가 지속되는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과도한 에너지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동하는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이다. 이 생태계 지속성의 원리는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무한한 팽창을 희구하는 인간의 무한 탐욕과 기술능력 과신으로 공존을 무너뜨리는 지나침의 무지와 대조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무한소비 탐욕의 발로인 지나침의 무지를 생태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소비를 생태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절제하는 ‘모자람의 지혜’가 시민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비가 절제된 이러한 시민이 생태시민이다.

생태교육은 생태계의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지향하며, 학습자가 이런 이념을 체득함으로써 생태시민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자연과 인간, 인류공동체의 생태 평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생태교육은 학습자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인간의 탐욕에 비추어 그릇되게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태계는 ‘모자람의 지혜’로 ‘무심의 공존’을 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능력이 모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관조하며 공존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생태교육이 학습자에게 생태계 지속성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깨닫게 하고 자연에 대해 인간의 능력을 절제하고 생태계의 존재를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무한 탐욕에 빠져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인류공동체는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로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생태교육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 평등도 구현하는 교육이다.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

월, 2020/01/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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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파업 참가자들이 도보 행진을 하고 보수 정당들이 퇴조하고 있는 가운데 진정한 시스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손에 얻었다.

미국의 패권적 강짜, 브렉시트라는 암초, 이민자의 강제수용소, 환경 파괴와 같이 매일 계속되는 악재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위기와 뿌리가 같은 또 다른 조짐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기실 유럽과 미국 활동가들은 인간과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로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라는 총체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성 경제학자는 이러한 요구 사항을 거부하며 기존의 부당한 이해에만 힘을 실었다. 과거 불황의 모든 심각한 징후가 오늘날 다시 나타나고 있지만, 오래된 해결책은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진행되는 위기에 처방전은 이미 약효가 다한 항생제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뻔히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다그칠 때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되는 반면에, 여유 자본이 인간의 건강 및 주거 환경을 위한 투자가 이렇듯 비참하게 실패한 적도 없었다. 그린 뉴딜은 오래 전에 시행되었어야 한다.

지난 2008년 평론가들은 금융에서 촉발된 자본주의의 종말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앨런 그린스펀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금융시장 자율화에 대한 자신의 과신을 사과하기 위해 의회에서 변론했다. 운동가들은 오클랜드에서 마드리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광장을 점령했고 심지어 골드만 삭스 CEO도 “후회 할 이유”가 있음을 인정했다. 당시에는 급진적인 변화가 코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러나 변화는 오지 않았다. 골드만 삭스와 같은 은행이 무너지기는커녕 기록적인 수익을 기록하고 염치없이 엄청난 상여금을 지급하며 대침체를 촉발했던 위험한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월가 붕괴의 원인인 모기지 부채는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시기보다 높은 수준이다. 2008년 이후 유럽과 미국의 BBB-급 채권 주식이 4배 증가하고, 공채가 급등해왔다. 그리고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대출채권담보부 증권(collateralised loan obligations, CLO)이 3조 달러 이상으로 급증하며 ‘자산담보부 증권의 급부상을 암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재발한 것일까? 금융업자들은 어떻게 파산 직전에 부를 강탈하는데 성공했을까? 한 세기 동안 가장 심각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붕괴된 금융질서가 여전히 되살아나 건재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은행산업의)지원과 (인민대중의)처벌이라는 조합의 속임수로 가능했다.

지원과 처벌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은행들은 각자 지원을 받았다. 미국과 유럽연합 정부는 파산한 사채업자들을 구제하여 부채 대부분을 공공 대차대조표로 전환했다.

반면에 대중들은 손해를 얻게 된 것이다. 정부는 금융위기 관련 무책임한 담당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연금 수급자, 빈곤 계층과 이들에게 지불될 지원금에 도입된 역누진적 삭감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선 모든 이들을 처벌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경기 부양책 대한 재정수요를 막기 위해 은밀한 계책을 진행해온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왑 거래, 교환, 특별 수단(special vehicles purposes)과 같은 많은 정책 중에서 양적완화가 가장 뚜렷했고, 유해했다.

양적완화를 이해하려면 은행이 이자을 받지 못하는 장부 자산을 은행강도보다도 싫어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2008년 실패 이후 투자가 물거품이 되면서 중앙은행은 투자 촉진을 위해 금리를 거의 제로 또는 때론 제로 아래로 내몰았다. 그러나 은행가는 대출자산에 이자를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때 난관에 처했다.

중앙은행은 은행가들을 돕기 위해 막주조된 현금을 활용하여 은행으로부터 엄청난 자산을 매수했다. 혹자는 영란은행이 맥도날드(McDonald)가 발행한 차용증(IOU)을 구입하면서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속임수가 통했다. 중앙은행의 자금 유입으로 불경기를 종결했고 실업률을 낮췄으며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마저 2008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은행은 평상시와 같은 영업을 통해 다시 우위를 찾았고, 신뢰도 되찾았다.

그러나 내막적으로는 위기가 악화되고 있었다. 임금 상승과 신규 창업 장려는커녕 양적완화와 금리 인하에 의해 생겨난 대출이 용이한 환경은 기업들이 자사주를 매입하고, 기업의 부유한 주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넘겨주는 과정 속에서 기업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했다. 2018년에는 자사주매입액이 전년대비 55% 증가하여 사상 최고치인 806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영란은행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양적완화의 전반적인 효과는 영국 내 하위 10%의 개별적 부를 겨우 약 3,000 파운드 정도 상승시킨데 반하여, 상위 10%의 개별적 부를 35만 파운드 증가시켰다.

한편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는 급감해왔다. 미국 내 공공투자는 75년 만에 최저 수준인 GDP의 1.4%로 떨어졌다. 유로존에서는 남부 유럽 국가 내 인프라 투자가 위기 이전보다 30% 이상 낮은 수준으로 행해지면서 공공 부문 순투자가 거의 10년 동안 제로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런 현상과는 별개로 지구가 따뜻해지고, 환경이 붕괴되며 생물종들이 멸종해갔다.

오늘날 우리는 불경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속임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금리가 인하되고, 유동성이 증가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 상태이다. 매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중앙은행들이 단지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뉴딜 제안이 2008년에 처음 제의된 점으로 보아 이제 2020년은 그린 뉴딜을 활용할 시기이다. 즉 오래된 전략의 담당자들의 주머니가 비어서 더 이상 제안을 변호할 수 없을 시기라는 것이다. 드라기 전(前)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의견이 만장일치였다”면서” 재정정책이 주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번 속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잘못이다. 과거의 위기를 허비했던 우리는 인류 멸종에 맞서 드라기가 뒷받침한 완화된 케인스 자극에 다시 속을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다가오는 불경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대응책인 그린 뉴딜에 결집해야 한다.

현재 상황을 하나의 교차로처럼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린 뉴딜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면 잘못된 에코파시즘으로 빠져들 것이다. 지난 경기 침체의 여파는 우리가 공유된 수요(그린 뉴딜)로 과감하게 전환하지 못하면 단지 현 상황과 다를 것 없는 허망한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주변 지역은 약간 녹색화가 되겠지만 권력 및 자원의 분포는 대략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계획을 이미 진행 중인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현재 그린 뉴딜 의제에서 바뀐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과거형의 ‘그린 딜’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 파업 참가자들이 도보 행진을 하고 보수 정당들이 퇴진하는 가운데 진정한 시스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손에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부에게 과감한 그린 뉴딜 없이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확실히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Yanis Varoufakis

2015년 7월 6일 그리스의 급진좌파가 이끄는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사임한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세계의 미노타우로스(The Global Minotaur)’의 저자이자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의 방문 교수이다.

 

David Adler

데이비드 애들러는 국제 경영대학원 (EUI)의 정책 선임연구원이자 유럽 민주주의 운동(DiEM25)의 정책 코디네이터이다.

출처: 가디언즈

화, 2020/01/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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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로 한-일-중 협력체제가 출범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일상적 하루였던 1999년 11월 아침, 마닐라에서 열린 10+3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조찬 회동이 열렸고, 한중일 정상들이 모여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유구한 역사를 공유한 동아시아 이웃 국가 간에 3국 협력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지난 20년간 이루어진 3국 협력은 무역, 경제, 문화, 교육, 기술, 혁신, 높은 수준의 교류에서 생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정상회의를 중심으로 장관급 회의 21차례, 실무 메커니즘 50회 이상을 진행하면서 모든 분야의 협력체제를 구축하여 30개 이상의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 및 무역 협력

지난 해 한중일 3국간 교역액이 7200억 미국 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GDP를 합산한 수치가 20조 1980억 미국 달러에 육박함으로써 세계 GDP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3국은 3국 투자협정을 체결해왔고 현재까지 자유무역협정(FTA)을 16차례 진행하면서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촉진하기 위해 공조하고 있다.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얻으면서 3국이 참여한 거대 무역 협정인 역내포괄적 경제협약(RCEP)을 향한 긍정적인 진전을 이루어냈다.

“향후 협력의 추세는 ‘한국-중국-일본+X’가 되어 말하자면 3국이 4·5차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3국은 일대일로 (육상, 해상 실크로드) 연결을 촉진하기 위해 각국의 장점과 자원을 이용할 것입니다”라고 장루핑(Jiang Ruiping) 중국 외교 학원 전 부총장이 말했다.

 

사회적 및 문화적 교류

2007년 중국 난퉁에서 열린 첫 번째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3국은 문화장관 간의 정기적인 대화 메커니즘을 마련하여 3국 문화교류 및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지난 해 국가간 방문이 3100만건을 기록하면서 3국은 문화 및 예술 교류 증대 및 증진, 유형 및 무형 문화재 보전 추진, 창조산업 교류 활성화, 청소년 교육 교류 심화 등과 같은 주요 협력 분야에 합의했다.

한국과 일본은 정보, 빅데이터 및 기타 첨단 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강점을 보인다.

한편 중국은 5G와 인터넷 분야에서 거대한 시장과 후발주자의 우위를 지닌다. 뤄 자오후이(Luo Zhaohui)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중국은 한국, 일본과 시장 및 개발 기회를 공유할 용의가 있습니다”고 말했다.

국가 간에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뤄 부부장은 3국 또한 당연히 역사와 영해를 놓고 분쟁을 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3국 모두가 이러한 차이점을 적절하게 다루고 협력 부분을 증대하여 외부 요인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8차 한중일 정상회담은 지난 12월 24일 중국 서남부 청두에서 열렸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3국간 정치적 상호 신뢰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 및 무역 협력 수준을 높이며 상호 호혜적 협력의 전폭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합의를 이루었다.

2018년 5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차 한중일 정상 회담 이후 기자 회견에 참석한 리커창(Li Keqiang)(왼쪽) 중국 총리, 아베 신조(Shinzo Abe)(중앙) 일본 총리, 문재인(Moon Jae-in) 한국 대통령(오른쪽)/사진 <출처: 중국 정부 웹사이트>

세계 경제에 대한 하향 압박과 무역 보호주의 및 일방주의의 배경에는 한국, 일본, 중국이 아시아 주요국 및 동아시아 3대 경제국으로서 지역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세계 발전과 번성을 도모하는 중요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지 윈린(Ji Yunlin)

CGTN 해설가

 

 

한-중-일, ‘동북아시아 파라독스’ 타파할 수 있을까?

제8차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12월 22일, 베이징에서 제12차 한중일 3국 경제통상장관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상호무역 및 투자 개선, 역내포괄적 경제협약(RCEP)의 조속한 타결 추진, 한중일 자유무역협정은 물론 무역 보호 및 다국간 무역 시스템 추진과 같은 경제 및 무역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경제적 이해 관계가 한국, 일본, 중국 3국 관계의 초석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한중일 3국 협력은 지역 경제 성장을 분명 촉진할 것이다. 냉전 이후, 한국과 일본은 중국 내 투자를 계속 확대해오면서 3국 사이의 경제적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지난 1999년, 주룽지(Zhu Rongji) 중국 총리, 오부치 게이조(Obuchi Keizo) 일본 총리, 김대중(KIM Dae-jung) 한국 대통령은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삼국 협력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3국은 서울에 3국의 협력사무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2018년에 중국은 일본과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으며 일본과 한국은 각각 중국의 투자처 1위국 및 2위국이 되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 경제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집착과 같은 비관적인 요인으로 인해 다시금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이 지역 투자, 수출, 소비 신뢰도를 증진하고 ‘트럼프 쇼크’를 방어하기 위해 더 심화된 협력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게끔 한다.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활동적인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지역 협력은 RCEP와 같은 지역 구성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지역 국가는 취약한 산업 보호와 지역 영향력과 각국의 상대적 혜택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RCEP 협상 중단이 야기되었다.

때로는 3국 간에 팽팽한 논쟁과 대립이 전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농업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한국은 새로운 3국 자유무역협정인 한중 자유무역협정에서 비교 우위를 잃을까 우려한다. 동아시아 지역 협력은 복잡하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

3국 장관 회담 또한 지역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냉전 자산을 지닌 유일한 지역이다. 일부 국제 연구자는 안보 대립과 모순된 경제적 상호의존 구조가 구축된 것을 보고 ‘동북아시아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동맹을 유지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 사이에 ‘분할 및 통치’를 진행하며 동북아시아를 위한 조세 우대 균형 전략을 지속하고 있다.

2018년 이례로 중국에 ‘최대 압력’을 가하기 위해 미국은 중국이 ‘전략적 경쟁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과의 관계를 아직 정상화하지 못했고, 핵 위기가 초래했다. 반면에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기 거부했고, 먼저 ‘수출 우대국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하여 ‘강제 노역’ 및 ‘위안부’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질책했다.

중국은 한국, 일본과 협력하여 지역 평화를 지키고 번영하는 동북아시아 건설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중국은 더 많은 양자간, 지역간, 세계적인 협력을 수용할 것이다. 한중일 3국 협력은 무역 및 물류에 관한 실용적인 협력을 증진하고, 상호 이해 및 친선 관계를 넓히며, 일본이 역사적인 범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며, 공공의 이익에 기반한 적대적인 지역 주체를 연결하기 위한 성공적인 사례를 마련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왔다. 한중일 3국 협력은 이른바 동북아시아 파라독스라고 불리는 장애를 타파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첸 샹양(Chen Xiangyang)

중국 동북아시아학 기관 연구 부교수

금, 2020/01/3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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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

월, 2020/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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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어떤 경험의 계기에서 주체성이 갖는 조화의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힘은 두 가지 요소, 즉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러한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강도를 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강도란 여전히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기여하는 것이다. – 존 캅, 화이트헤드의 가치론(https://www.openhorizons.org/whiteheads-theory-of-value.html)

어니스트 캘런벡의 1975년 소설 <에코토피아>의 영화 이미지컷.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배경으로 에코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생활을 그렸다.

 

개요와 소개

“아름다움”은 생태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1)일상의 직접성에서 감정적으로 느낀 경험의 조화와 강도, (2)그러한 느낌을 환기시키는 경험의 객체, 즉 타인, 다른 형태의 생명, 인간 관계, 자연 세계를 뜻한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예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삶의 예술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은 삶 자체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활력이자 번영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는 다른 동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삶을 “삶”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폭넓은 감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ng),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그리고 신비에 대한 감각 등이다. (번역자주: 필자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감정의 요소가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나열했다.)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다섯 가지 형식은 생태문명에서 특히 중요하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과 강, 나무와 별),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예술, 음악, 그림과 음악의 풍경), (3)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 그리고 인간세계를 넘어선 사회로부터 얻는 관계의 느낌),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친절, 정의), (5)전인적 아름다움 (깊이와 넓이를 동반하는 ‘폭넓은’ 영혼의 성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의 생태학’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하게 만드는 벽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

이런 공동체가 “아름다운” 이유는 창조적이고 연민적이고 참여적이고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동물에게 자비롭고 지구에 좋고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우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공동체를 상상하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생태문명이라는 “전공”의 목적이다. 이 전공의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더욱 심화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1)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아름다운 공동체, (3)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4) 아름다움의 생태학.

 

1. 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수 년 전에 맥신 홍 킹스톤(湯婷婷)이 우리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논픽션 저자이기도 하다.

킹스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에 강연을 했는데, 그녀는 킹의 연민적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참조틀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킹은 연민적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로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그러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문구였다. 사랑의 공동체는 연민적인 공동체이며 애정 어린 공동체이다.

킹스톤은 킹의 문구에 기대어 예술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배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킹의 문구를 인용할 때마다 실수로 “사랑의 공동체” 대신 “아름다운 공동체”(beautiful community)라고 말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녀와 청중들은 매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지점에서 킹스톤은 결국 고쳐 말하기를 그만두고 강연 내내 예술과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에 익숙해졌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킹스톤에게 사랑의 공동체는 사실상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시적인 언어 말이다. 이 점은 뛰어난 과정철학자인 샌드라 루버스키가 쓴 「아름다움을 말하라(Speak the Name of Beauty)」라는 짧지만 우아한 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결을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자연의 질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삶을 격상시키는 만드는 관계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삶을 격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킹스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요? 그들은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킹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의 그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수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가 될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학생들이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전공” 혹은 전문분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2. 아름다운 공동체

세계 어딘가의 대학에 생태문명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아가 그 전공이 캠퍼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상상해보라. 학생들은 그 전공이 실천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전일적이면서 창조적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생태문명 전공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삶을 격상시키는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킹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공동체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아홉 가지 중요한 특성 혹은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창조적이다.

(2)연민적이다.

(3)참여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한다.)

(4)다양하다. (공동체가 종교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환영한다.)

(5)경제적으로 포용적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며 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다.)

(6)동물에게 자비롭다.

(7)지구에 좋다. (오염을 수용하고 자원을 공급하는 한계 내에서 살며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를 남겨둔다.)

(8)정신적으로 만족스럽다.

(9)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공동체의 “영성”은 감성적 지성과 일상에서 구현된 지혜가 조합된 것으로, 종교를 갖고 자신의 종교로부터 “영성”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에는 관심이 있으나 특정 종교에 연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영성은 인간성의 영적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관련된 형식의 마음과 정신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함한다: 주목(attention), 연민(compassion), 연결(connections),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상상(imagination), 재미(playfulness), 호기심(wonder), 침묵(silence), 정의(justice), 숭배(reverence),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번역자주: 여기서도 다시 알파벳 순으로 단어를 나열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내가 “전인적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부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바람직한 이상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동체도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가지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현존하는 공동체들은 사실상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구축하는 벽돌들이다. 생태문명 전공은 학생들이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는 긍정심리학, 도시계획, 유기농업, 사회정의, 영성, 종교 간 대화, 교육, 건강 관리, 환경경제학, 진화생물학, 생태학 실습 등의 과목이 포함된다. 생태문명 전공은 또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함으로써 생태문명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배움의 요소가 요구된다.

 

3. 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생태문명 전공을 위한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라 부른다.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생태문명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전반적인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이상인 “아름다움의 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가르친다.

처음에 학생들은 교과목의 제목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별적인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편협한 척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적인 감각, 개인의 취향 혹은 예술에만 한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공공의 선도 아니며 “실제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 과목에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공공의 선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예쁨도 아니며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는 성질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화이트헤드가 “아름다움의 힘”을 통해 말하고자 한 어떤 것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강도의 조합이며 경험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활력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것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력과 살아있음(강도)의 감각을 조합한다.

교수들이 강조하듯 아름다움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를 이끄는 이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서 생태문명과 그것의 출현을 위한 일차적인 가치가 된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생태문명이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나 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생태문명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등장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보다 좀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감각 말이다. 아름다움은 희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몇몇 화이트헤드의 관념을 배우며 그 관념들을 통해 교수들이 “아름다움의 우주론”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은 생명의 그물의 일부다: 인간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일부이지 그 바깥에 있지 않다는 관념.

(2)모든 것은 상호 생성의 과정에 있다: 전체로서의 그물, 그리고 그물의 각 매듭은 언제나 과정 혹은 되어감에 있다는 관념.

(3)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권리로서 가치를 지니며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관념.

(4)모든 곳에 살아있음의 활력과 같은 것이 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생명” 혹은 “살아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

(5)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서 내면적인 활력을 얻는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 안에 만족 혹은 삶의 충족을 향한 에로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의 풍부함 혹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관념.

(6)전체로서의 우주 또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우주 자체가 어떤 종류의 생명이며 우주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는 관념.

이러한 관념들은 학생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또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의 생태학을 위한 우주론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다른 철학적, 문화적 전통, 아마도 특히 동아시아 전통들에서 유사한 관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전통으로부터 비슷한 관념을 찾고 공유하도록 권장된다.

 

4. 아름다움의 생태학

이렇게 학생들은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입문한다. 생태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자연적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관계적 아름다움, 도덕적 아름다움, 전인적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생태문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생태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 강, 나무, 별, 동물, 식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서로 연결돼 존재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에서 외경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샌드라 루버스키의 말의 떠올려라: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인간이 설계한 다양한 형식의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도구와 가구, 건물과 도시경관 같은 유형의 생산물을 포함하며 상징과 로고스, 이야기와 시, 춤과 음악 또한 포함한다.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참여하거나 그것과 협동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과 함께하는 공동창조의 행위이다.

(3)관계적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이 우정과 가정생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 이런 아름다움은 예를 들어 유교경전, 성경, 코란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연결의 영성에도 내포돼 있다.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봉사,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 수필가 이푸 투안은 이를 이렇게서술했다: “사심 없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관용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이다. 진실된 겸손도 이타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몇몇 사람이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몇몇 사람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고무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등장하고 번창한다.”

(5)전인적 아름다움: “통합적인 되어감”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연민, 창조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혹은 되고자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노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름다움은 멋진 사랑스러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다 통합적인 것, 실체가 있는 되어감, 원만함의 출현, 은혜로움과 우아함의 위대한 감각, 깊이에 대한 깊은 감각, 그리고 만개하는 삶에 대한 풍성한 기억으로의 돌아감에 관한 것이다.”

예비과정의 끝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이처럼 생태적인 문맥에서 이해될 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태문명을 실현시키고자 활기차게 노력하기 위한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지구에 기반을 둔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아름다움이 갖는 매력은 삶의 활력과 격상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맥신 홍 킹스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 웹사이트 오픈 호라이즌즈 운영자

월, 2020/02/1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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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난 1월 3일 바그다드 국제공항 외곽에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IRGC) 사령관을 드론 공격으로 살해하여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나흘 뒤, 이란은 이라크 미군 주둔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보복했다.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이며 이제 미국이 국제법상 이러한 암살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는지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2단계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솔레이마니 살해를 변호하는 미국의 논거는 무엇인가?

둘째, 미국의 주장은 국제법상 타당한가?

미국 정부는 살해 행위를 방어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내세운다.

첫째, IRGC는 미국이 지정한‘대외 테러조직’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거셈 솔레이마니는 ‘테러 주모자’가 된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더 나아가 솔레이마니를 ‘세계 제1의 테러리스트’라고 일컬었기에 “테러로 지배했던 그의 시대가 종결했음을 알기에 안도할 수 있습니다”고 밝혔다.

둘째, 트럼프에 따르면 솔레이마니는 “미국 외교관과 군 인력을 향한 임박하고 사악한 공격을 꾸미고 있었으나 미국은 그를 현장에서 폭살하여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얼핏 보기에 미국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국제법 아래에서 신중하게 평가해보면 정반대의 답변이 나올 수도 있다.

먼저 IRGC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일방적으로 미국에 의해 테러조직으로 규정되었다는 점, 다시 말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테러조직으로 설계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국제법상 테러나 테러집단을 정의하는 보편적인 합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두 원칙에 주목해야 한다.

(1) 국제법상 특정 국가는 테러조직을 규정할 수 있는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

(2) 일반적으로 국가 기관은 테러 조직 명단에 포함되어선 안 된다.

이 두 원칙으로 미루어 볼 때 IRGC가 테러조직이라고 선언하는 미국의 입장은 좀처럼 성립하지않는다. IRGC 자산이 동결되었다가 2016년에 해제되었음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따르면 IRGC는 전혀 테러조직이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IRGC는 이란 군대의 한 부서로서 이란 정부에 소속된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미국의 첫 번째 주장은 사실 무근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두 번째 주장은 국제법상 정당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솔레이마니가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미국이 이번 ‘일촉즉발’ 공격을 서둘렀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은 이번 공습이 어느 정도 예상된 정당방위 차원에서 행해졌다고 주장해온 셈이다. 그러나 솔레이마니 살해는 국제법상 합법적인 정당 방위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국제법은 지속되는 무장 충돌 외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는 유엔헌장강행 규범에 명시되어 있다. 유일하게 자위권만 이 규정에서 예외로 적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의 경우 역시 제한적이다.

일부 규제는 유엔헌장 51조에 명시되어 있고 기타 규제는 국제법 일반원칙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제법상 ‘임박한 공격’을 포함하여 향후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임박한 공격’은 유엔헌장 51조에 나와있지 않다. 유엔헌장에는 정확히 “무장 공격이 발생한 (완료형) 경우”로 명시되어 있다.

임박한 공격이 무력 사용을 위한 명분이 될 수있다 해도 미국은 주장을 뒷받침해줄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1월 9일,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미국 국무장관이 폭스뉴스(Fox News)에 출연하여 “거셈 솔레이마니가 모의하던 일련의 임박한 공격이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그 공격이 언제, 어디에서 행해졌을지는 우리도 정확히 모르지만 임박한 공격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분명 공습에 대한 미국의 논지가 예견된 자위 행위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욱이 필자는 미국이 미국 영토 내에서가 아닌 이라크에서 솔레이마니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이는 독자적인 주권 국가인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이다. 현대 국제법의 초석인 주권평등 원칙에 의거하여 국가는 다른 국가의 영토에서 해당 국가의 동의 없이 군사력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국내법을 집행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미리 이라크 정부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면 바그다드 공습으로 인한 솔레이마니 살해는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이다. 아델압둘-마흐디(Adel Abdul-Mahdi) 이라크 총리가 공습으로 인해 이라크 관료 또한 사망했다고 분노를 나타냄에 따라 미국이 이라크로부터 사전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게다가 1월 5일, 이라크 의회는 주권의 침해로 인해 정부에게 외국 군대를 철수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요악하면, 법률 전문가들은 솔레이마니 살해가 미국 국내법에 의해 합법적인지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나타낸다. 그러나 필자는 국제법상 이번 사건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훠 정신 (HuoZhengxin)

중국내 법정 대학의 교수

금, 2020/02/2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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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 관계는 핵전쟁 위기, 올림픽을 통한 관계 개선, 일련의 정상회담 및 협상 결렬 등 급속한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기회가 소멸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2017년,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강화하고 트럼프와 김정은(Kim Jong-un)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설전이 ‘늙다리’ 대 ‘짧고 뚱뚱한’ ‘로켓맨’으로 악화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2017년 8월, 트럼프가 ‘지금까지 세계가 목격하지 못한 화염과 분노’를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북한을 위협해 파멸의 날을 앞당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일으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른바 ‘코피 전략’을 고려하면서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놀라운 외교적 반전이 있었다. 문재인(Moon Jae-in) 대한민국 대통령은 주도권을 쥔 채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Kim Yo-jong)과 올림픽과 별개로 회동했고 정의용(Chung Eui-yong) 국가안보실장과 서훈(Suh Hoon) 국가정보원장을 평양으로 보내 김정은을 만나게끔 했다. 정 실장과 서 원장이 2018년 3월 트럼프의 견해를 듣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했을 때, 트럼프는 북한 위원장을 만나는 첫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될 것을 즉석에서 합의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트럼프의 즉흥적 판단으로 지난 해부터 자신이 일으켰던 긴박한 사태들이 진정되었다.

이어 정상외교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외국 지도자와 회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3월 이후 시진핑(Xi Jinping) 중국 국가주석과 5번, 문재인 한국 대통령과 4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3번, 블라디미르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과 1번 회동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는 비핵화 및 평화로 나아가는 긴 여정에 긍정적인 첫 걸음을 내딛었으며, 해당 과정의 전제 조건으로 신뢰 구축을 내세웠다.

그런데 2019년부터 국면이 또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반나절 일찍 종결했다. 김 위원장은 2018년 4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완료되어 모든 자원을 경제 발전에 투입하라고 지시를 발표한 이후, 유엔 및 미국의 제재에 대한 조속한 해제조치가 행해지길 바랬다. 그는 ‘민간 경제를 저해하는’ 2016년 및 201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해제한다면 먼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탄핵여부를 결정할 뮐러(Mueller investigation) 특검조사팀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신속히 외교 정책 승리에 열중한 트럼프는 즉각적인 비핵화라는 담판의 기회를 강조했다.

그 이후로 상황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오늘날, 북한은 비핵화의 결정 이후 리비아에 일어난 것과 같은 정권 교체를 두려워한다. 미국은 제재를 너무 일찍 완화하여 안 좋은 상황이 도래할까 망설이고 있다. 이러한 신뢰 결핍은 단계적 비핵화 협상과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대신할 평화 협정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계속해서 방해한다.

2019년 4월, 김 위원장은 미국에게 연말까지 대북 ‘적대 정책’을 철회하는 ‘용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리태성 북한 외무성 부국장은 시한이 다가오자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엇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미국에게 달려있다는 아리송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러나 시한이 지나도 핵 또는 장거리 미사일 시험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고, 미국과 북한 간의 협상의 여지가 사라졌다.

에반스 리비어(Evans Revere) ANU교수가 한반도 관련 특징 3가지 중 하나로 설명했듯이, 평양 내 분위기가 매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김 위원장은 2019년 12월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설을 통해 더욱 발전된 ‘전략적 무기’와 핵 및 장거리 미사일 시험, 실효없는 비핵화의 협상중단, 미국과의 ‘장기적인 대결구도’를 약속하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이 한반도 내 또 다른 특징으로 비평한 것과 같이 북한의 ‘새로운 계획’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희망’이 거의 사라진 셈이다.

리비어 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트럼프 행정부에게 ‘무시무시하고 어려운’ 정책적 선택 사항을 넘겨주었다고 말한다. 2017년의 ‘화염과 분노’로 회귀한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 ‘한반도 파괴’, ‘북한이 일본 그리고 심지어 미국 공격’까지 초래하는 끔찍한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북핵 문제를 묵인하는 대신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해 견제하고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북한은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영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리비어 교수는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면 “북한이 핵무기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정권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다”면서 이로써 보다 설득력 있는 협상 기반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나타내는 전통적인 리더십의 부재, 다자주의 및 연합 형성에 대한 혐오, 중국의 봉쇄, 미국 동맹 붕괴, 미국의 도덕적 권위 상실 등은 미국이 해당 노선을 추구할 능력이 부재함을 시사한다. 암스트롱은 “트럼프가 당분간은 탄핵 심의(이는 지난 2월초에 부결되었다)와 11월까지 재선 캠페인에 주력할 것이다”고 말하며 “ 그 동안 북한과 접촉하는 행위는 재선 전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낙관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안한 대한민국 경제와 4월 총선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의 ‘새로운 계획’에서 암시할 수 있듯이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3국 협력이 재개해야 한다. 아오키 나오코(Naoko Aoki) 비영리 단체 랜드(RAND Corporation)의 연구학자는 여러 기사를 통해 해당 국가간의 관계에 여러 긴장감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은 ‘쓰라린 경제적, 역사적 분쟁을 이겨낼 방안을 아직 찾지 못했다.’

반면에 트럼프는 미군 주둔 비용에 대해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약화시킬 작심을 하고 있다. 아오키는 “한국과 미국은 주한 미군에게 한국이 비용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미 간 합의의 내용은 ‘2021년 3월 효력이 끝나는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SMA)에 앞서 주일미군에 대한 주둔국 지원’ 관련 협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 한반도개발기구(KEDO, 1995~2006년), 6자회담(2003~2009년)과 마찬가지로 현재 과정의 결렬은 평화를 위한 기회를 날리는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다. 현재 상황의 전개는 한반도에서 끊이지 않는 냉전을 정착시킬 위험성이 있다.

협상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지만 다시금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 이때 1) 6자회담 국가 간의 협력을 조율하여 북한에게 국제 사회는 핵무기를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고, 2) 북미 간에 신뢰 구축을 재활성화하며 3) 동시에 연계된 단계별 비핵화 및 평화협정 협상을 위한 지침을 타결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워싱턴 내 회의론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상기 세 방면 모두에서 진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한국이 지속적으로 북한을 포용하는 정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호주국립대학교(ANU)내 동아시아 포럼(EAF)의 편집진

월, 2020/02/2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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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스위스 알프스에서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가장 놀라운 소식은 무엇인가? 억만장자들의 세계적인 연례 축제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을 맞이하는 따뜻하고 친근한 반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세계 재력가들은 미국 대통령과 식사를 하면서 그의 농담에 반응하고 그의 자존감을 아낌없이 높여주었다.

패트리스 모체페(Patrice Motsepe)라는 남아프리카 광산업의 억만장자 거물은 대통령에게 “아프리카는 대통령을 사랑합니다”고 말했다.

트럼프 또한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재력가들을 치켜 세웠다. 트럼프는 당시 주변에 모인 일류 기업 CEO들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업가’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취임 후 다보스포럼에 첫 방문을 했던 때와는 꽤 다른 분위기이었다. 2018년, 트럼프는 분명히 불안해 하는 부유층 집단과 마주했다. 이렇게 ‘미국을 우선시하는’ 대통령은 국제 무역 전쟁을 일으킬까? 대통령이 그들의 엘리트 지위를 파괴할까? 대통령은 엘리트 계층이 해온 사안을 엉망으로 만들까? 등 2년 전,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기업 운영진과 정계 실세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2년이 지난 오늘, 불편함은 사라졌다. ‘다보스 맨’은 도널드 트럼프의 성과를 선호한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제50회 연차총회를 맞이하면서 대통령과 함께 무대에 올라 그에 대한 선호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슈밥은 세계 정치 및 경제담론에 ‘긍정의 힘을 불어 넣은’ 트럼프를 극찬했다.

다보스포럼 원로는 “세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고 말하며 “하지만 우리에게는 꿈이 필요합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은 30분간 이어진 다보스포럼 기조연설에서 자신은 꿈을 꾸기보다 더 많은 함성을 지를 것이라고 전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용솟음치는 기회의 분출’을 창출해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전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자랑한 트럼프는 심지어 불평등을 넘어선 승리를 공표했다.

트럼프는 “우리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더 이상 소수의 손에 부를 집중시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고 발표하며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포용하는 경제를 창출하여 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팩트 체커’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대통령의 다양한 주장이 전혀 옳지 않음을 파헤치기 시작하겠지만, 다보스포럼 집단은 오보를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트럼프가 자신들에게 이로운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안 브레머(Ian Bremmer) 경영 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의 실력자는 “자신의 취향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주역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신의 선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세금과 규제를 줄이고 이미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신이 내린 선물, 그리고 무역 전쟁에 관한 비열함?’ 이라는 제목으로 This Week의 제프 스프로스(Jeff Spross) 기자는 ‘자유 무역’에 대한 트럼프의 공세는 “근본적으로 쇼맨의 레슬링 시합처럼 정책적 실체가 결여된 논쟁으로 귀결되어 자금 흐름과 권력 규모를 재조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망을 보이기에는 너무 피상적입니다”고 비판했다.

1만 달러 호텔방과 43달러 핫도그를 제공하는 다보스포럼의 연례 총회는 항상 전세계 최고 부유층과 권력층으로부터 나머지 계층을 차단하는 방호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올해 모임에서는 해당 암시를 더욱 강하게 되살리는 것 같다.

다보스포럼은 ‘용솟음치는 기회의 분출’을 기리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 및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용솟음치는 기회의 분출’의 영향력을 체감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 명이나 될까? 세계적인 조사기관 에델만 인텔리전스(Edelman Intelligence)는 올해 다보스 기념 행사 시작 직전에 한 가지 해답을 이끌어냈다.

지난 가을, 에델만은 전세계 응답자 34,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커져가는 불공평 의식’을 조사했다. 새로운 에델만 보고서 세부 사항에 따르면 선진국의 개별 가정(family) 중 3분의 1 이하에서 현재보다 5년 후의 자신들의 모습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응답자 중 4분의 3 이상은 ‘서민들이 힘들게 세금을 납부할 때 엘리트 계층은 더욱 부유해진다’고 생각했다.

매년 전용기로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슈퍼-리치와 나머지 인류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상이한 경계의 두 영역에 살고 있다. 슈퍼-리치는 부유의 세계에, 나머지 인류는 노동의 세계에 자리한다. 노동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노력과 기능에 의존하여 식비를 벌고 집을 구한다. 그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 잘 살기 위해서는 추가 연장근무를 하거나 또 다른 이중직업을 가져야 한다.

부유의 세계에 사는 부자들은 자신의 순자산을 급증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자산이 자신들을 위해 탐욕스럽게 일을 하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주식, 채권, 부동산 사업과 같은 자산을 거느리면서 배당금, 이자, 임대료수익 등을 얻는다. 또한 이러한 자산을 매각하면 양도 소득이 따라온다.

‘정말로 꿀같이 달콤한 이야기이다’라고 씨그램의 상속인인 에드거 브론프먼(Edgar Bronfman)이 부유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이들의 거래행위는 영구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기계와 같다.

브론프먼은 “100달러를 110달러로 불리는 것은 어렵습니다”고 하면서 “1억 달러를 1억 1천만 달러로 불리는 것은 가능합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수가 규제없이 부를 원활하게 축척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는 수백 만의 희생이 불가피해진다. 정부는, 부유층에게는 그들이 약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만 세금을 부과하는 반면에, 서민들에게는 그들이 정당하게 노동하여 축적한 부를 집단적으로 쥐어짜는 온갖 방안을 항상 실행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러한 류의 거래를 수많이 경험해왔고, 해당 과정 속에서 다보스포럼 참가자들에게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세계적인 거물급 재벌은 한때 트럼프를 ‘위대한 재앙’이라고 여겼으나, 현재는 스탠포드 대학의 보수성향 후버연구소 소속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말처럼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부유해졌습니다”. 퍼거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보스 2020의 알려지지 않은 불명예로운 비밀은 그들은 모두 그가 재선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부자들이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포럼 진행된 주의 수요일, 미국에 기반을 둔 평등주의적 사상을 지닌 한 집단은 다보스포럼에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해당 단체는 ‘피치포크에 대항하는 백만장자’라는 제목의 공개 질의서에서 세계 최고 부자들의 탈세의 ‘유행’을 비난하며 극도의 부를 ‘실패하는 경제 체제의 징후’라고 지적했다.

자애(자기도취)적인 백만장자 단체의 다보스포럼 2020 참석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질의서에는 “그러한 이유로, 너무 늦기 전에 당신 국가 내의 백만장자 및 억만장자들에게 더 높고 공정한 세금을 부과하기를 촉구합니다”고 적혀있었다.

아비게일 디즈니(Abigail Disney) 전 유니레버 CEO이자 디즈니 상속인을 포함하여 해당 질의서에 서명한 121인 집단은 “우리는 지구 상에서 가장 특권을 누리는 인간 계층의 일원으로서 요구합니다”고 덧붙였다.

 

샘 피지개티(Sam Pizzigati)

Inequality.org의 공동편집자이자 최근 저서인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저자

목, 2020/02/2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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