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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 접근하고 있는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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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 접근하고 있는 기후위기

admin | 목, 2020/01/09- 20:04

4년 전 파리에서 행해진 기후 변화 협약이 이번에는 12월 1일부터 2주간 마드리드에서 이루어 졌다 (불행하게도 모임은 회기를 연장하면서 강제성 있는 합의를 도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심각성의 문제만 제기한 채, 내년에 있을 영국의 글래스고우 모임으로 강제성이라는 임무를 순연시켰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세계는 비극적인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이 부족하다. 유엔 사무총장은 산업화 이전 평균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보다 낮게 유지하고 이상적으로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2015 파리협약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이 “전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스페인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 협상을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5)에 앞서 지구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점 (환경 복원이 불가능한 시점- tipping point)”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화석 연료 보조금을 지속하고 탄소세 부과를 거부하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아마도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지구 온난화 상태가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기후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태인지 추측하는 연구 결과를 읽었을 것이다. 기후 ‘티핑포인트’ 9 종류의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현재 ‘행성 비상사태’에 처해 있고, 아마도 온실지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으로 빙하 격감과 같은 일부 기후 위험은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5도 상승할 경우 발생한다고 예측되어 왔지만, 이후 모델을 통해 해당 기온의 폭을 1도에서 2도 사이로 낮췄다. 심각하게도, 연구진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티핑 포인트가 상호작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연쇄 피해를 일으킬 조짐을 보인다고 경고한다.

독일 및 덴마크 학자들과 협업한 티모시 렌턴(Timothy Lenton) 영국 엑시터 대학 지구시스템 연구소 소장은 “악영향을 끼치는 급변 연쇄 작용을 막을 수 없다면 이는 문명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연구진은 위기 관리 측면에서 평균 기온 상승폭을 섭씨 1.5도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경제적 행동을 촉구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IPCC)에서는 지구 기후 시스템의 ‘대규모 불연속’을 티핑 포인트로 정의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에는 북극해 빙하와 아마존 열대 우림과 같이 익숙한 상징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는 열대 지방의 따뜻한 한 물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심해의 차가운 물을 남쪽으로 가져오는 대서양 자오선 역전순환류인 ‘컨베이어 벨트’와 북위도를 감싸며 때로는 영구 동토층 위에 자리해 광활한 탄소 저장소 역할을 하는 상록수 숲인 타이가가 있다.

실제로 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로도 되돌릴 수 없는 급격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임계점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세계 기후의 일부 요소는 기타 요소보다 임계점에 더 가까이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린란드 빙하는 임계점에 거의 도달했을지도 모르며 빙하는 티핑 포인트가 지나면 가차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북극해 빙하 감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다. 빙하는 심해보다 빛을 더 많이 반사하므로, 빙하가 녹으면 열 흡수율이 증가함에 따라 온난화가 가속된다.

두 현상 모두 북대서양에 더 많은 담수를 유입시키고 컨베이어 벨트를 늦춤으로써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속도가 늦어진 순환이 서아프리카의 몬순을 흩뜨려서 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가뭄을 촉발할 수 있다. 이후의 도미노 효과로는 남극 대륙의 빙하 손실을 가속화하는 남극해의 기온 상승이 있다. 기후 도미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위험성은 두 배로 증가한다. 지속적인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지구는 이미 지하에 저장된 탄소를 배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구 동토층으로 부터의 배출을 통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100기가톤(1Gt = 10억톤)을 채울 수 있다. 이는 3년 동안의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양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3.1Gt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종말론적 분석을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피어스 포스터(Piers Forster)리즈 대학 기후변화학 교수이자 IPCC 저자는 “1.5C의 온난화에서 그린란드의 빙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녹아내리더라도 수 세기가 걸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핑 포인트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포스터 교수는 탈탄소를 위한 행동의 지연은 “우리 자신을 비극적인 미래로 몰고 나갈 것” 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세계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위험성에 대처하고 온난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절하게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 이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네트 제로(net zero)로 만들기 위해 사회 내 재력과 능력을 활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앙이 닫쳐 오더라도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접근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안자나 야후자(Anjana Ahuja)

 FT 과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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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한 친구에게 도덕과 외교 정책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고 전하자, 그녀는 “아주 짧은 소개서 이겠구나”라고 빈정거렸다. 이러한 회의론은 일반적이다. 놀랍게도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미국 대통령의 도덕적 견해가 그들의 외교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참고할 만한 서적은 거의 없다.

저명한 정치 이론가인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1945년 이후 미국의 국제 관계론 대학원 교육과정에서 “도덕적인 논쟁은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외교적 예의 규칙과 어긋난다”고 서술했다.

회의적인 근거는 명백해 보인다. 역사가들이 미국적인 예외주의와 도덕주의에 대해 기술했을 때, 냉전시대 미국 ‘봉쇄’ 정책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F. 케넌(George F. Kennan)과 같은 현실주의 외교관들에 의해 오랫동안 미국의 도덕주의-법률주의 전통이 추락된 것을 경고해 왔다.

국제 관계는 무정부 상태의 영역이다. 질서를 규정하는 세계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각자의 이해를 방어해야 하고, 생존이 위태로울 때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가치를 지닌 선택이 없는 곳에는 윤리가 있을 수 없다. 철학자들이 “당위는 가능을 예시한다”고 말하듯이 불가능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타인을 나무랄 수는 없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윤리와 외교정책을 결합하는 것은 칼을 선택할 때 잘 드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좋은 것을 고르거나, 빗자루를 사면서 잘 쓸리는 것보다 비싼 것을 묻는 것과 같은 멍청한 실책이며, 따라서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판단할 때는 단순히 외교정책이 도덕적인지 묻기보단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는 일부 장점이 있는 반면 어려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회피하기도 한다. 세계 정부가 부재한다고 해서 모든 국제질서도 부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부 외교 정책 사안은 국가의 생존과 관련이 있지만 대부분 사안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여러 차례 전쟁에 참전했지만 미국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인권, 기후 변화, 인터넷 사용의 자유에 대하여 다양하고 중요한 외교 정책을 선택하는 과정에는 전혀 전쟁이 수반되지 않는다.

실제로, 외교 정책 사안 대부분은 엄격한 국가 이성(raison d’état)이라는 공식의 적용이 아니라 선택을 요구하는 조건에서 가치와 균형을 맞추는 과정을 포함한다. 어떤 냉소적인 프랑스 관료는 언젠가 필자에게 “저는 프랑스 이익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도덕은 무관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발언 자체가 도덕적인 판단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만일 그가 “모든 국가가 각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려고 한다”고 말하려 했다면 상식적인 논리 또는 싱거운 언급을 중복한 셈이다.

개별적이고 상이한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고 추구할 지 선택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이다.

더욱이 우리가 좋든 싫든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대통령과 외교 정책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부당한 요청을 했다는 전화 통화가 익히 알려지기 이전부터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행실은 뉴스 톱기사에 오르면서 이론적인 질문으로부터 도덕성 및 외교 정책에 대해 회의를 일으켜 왔다.

예를 들어 2018년 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 사우디 반체제 기자가 이스탄불 영사관에서 살해된 뒤, 트럼프는 사우디 왕세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잔혹한 범죄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를 무시했다고 비난받았다.

진보 성향의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는 카슈끄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비양심적인 거래이고 사실 관계를 무시한 것”이라고 기술했고, 보수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나 린든 존슨(Lyndon Johnson)처럼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간주되는 대통령을 포함해 역대 어느 대통령도 공개적인 성명에서 가치와 원칙을 준수하는 미국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사설에서 전했다.

석유, 무기 판매, 지역 안정 모두 국익과 관련된다. 다른 한편 많은 사안과 관련하여 우호적인 가치 및 원칙 또한 국익에 중요하다. 어떻게 그것들을 조합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윤리와 관련하여 현재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다양한 판단은 무계획적이고 사고 수준이 형편없으며 현재 논쟁의 다수가 트럼프의 성향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필자가 새로 집필한 저서 «도덕은 중요한가?»에서는 트럼프의 일부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이 보인 전례가 있는 행동임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판단을 바로잡고자 했다.

어떤 통찰력 있는 기자는 필자에게 “트럼프는 특별하지 않지만 극단적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미국인들에게 때론 외교 정책을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같은 대통령을 도덕적으로 명료한 진술을 했다며 칭송한다.

마치 잘 표현된 선한 언급이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데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과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수단을 선택하지 않은 선한 의도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이유 조약이나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결과를 통해 대통령을 판단한다.

몇몇은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리처드 닉슨을 칭찬하지만, 그는 미국인 21,000명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체면치레를 위해 ‘그럴듯한 휴전’을 이끌었다. 이는 패배의 길에서 덧없는 휴전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훌륭한 도덕적 추론은 의도, 결과, 수단을 저울질하고 균형을 맞추면서 입체적인 성향을 지녀야 한다. 외교정책은 이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또한, 도덕적인 외교 정책은 타국에서 핍박을 받거나 반체제 성향을 지닌 집단을 돕는 것과 같은 특별하게 뉴스 가치가 있는 행위 외에 도덕적 이익을 조장하는 제도적 질서를 유지하도록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헤리 S. 트루먼(Harry S. Truman)대통령이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권고를 따르기 보다 교착 상태와 국내 정치적 불이익을 수용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와 같은 도덕적인 결단을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

셜록 홈즈(Sherlock Homes)가 말한 유명한 발언처럼 짖지 않는 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올해에도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외교정책 논쟁에서 윤리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외교 정책을 판단하기 위해 항상 도덕적인 추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며, 해당 과정을 더 잘 해내기 위해 꾸준히 학습할 필요가 있다.

 

Joseph S. Nye (조지프 S. 나이)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소프트 파워”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 “도덕은 중요한가? 루스벨트에서 트럼프까지 대통령과 외교 정책”라는 신작 출간예정

출처: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2020

화, 2020/01/2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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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경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것은 정보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다.” 오래 전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다. 작가는 문학작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경, 생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와 문화적 인식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미국 예일대의 문화인지 프로젝트) 결과에 따르면 새로운 정보가 자신의 신념체계를 흔들어놓을 우려가 있을 때 인간의 두뇌는 불청객을 격퇴하기 위해 ‘지적인 항체’를 생산한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경험할 때 현실을 부정하는 편향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왜 생태위기 징후에 대해 이런 ‘지적인 항체’를 갖게 되었을까?

뉴욕 타임즈가 레이첼 칼슨의 『침묵의 봄』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관련 저작으로 꼽은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변화는 자본주의와 지구와의 전쟁”이고 자본주의가 언제나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전쟁은 벌써부터 진행되어 왔고, (…) 매번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내세워 기후행동을 미루고 이미 합의한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깨뜨리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위험성 높은 석유와 가스 채취 산업에 아름다운 바다를 내주는 것만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 베이징에서 숨이 차 쌕쌕거리는 어린 자녀에게 귀여운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방진 마스크를 씌워 학교에 보내는 수고쯤은 당연히 감수해야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어차피 우리 앞에는 채취냐 내핍이냐, 오염이냐 가난이냐 하는 암울한 대안만 남아 있다고 자포자기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이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오미 클라인,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16: 45-46)

여기에는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연과 세상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에 기반한 삶의 태도와 생활방식도 포함된다. 현재의 글로벌 세계경제질서가 기후변화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아니다. 이미 인류는 1700년대 말부터 석탄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도 생태계 파괴를 자행했다.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권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관념의 모험』에서 지적한 대로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곤 하는 관념이 있어왔다. 그 관념은 그로 인한 피해자들조차도 그러한 관념을 공유할 위험이 있다.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인식되는 관념뿐 아니라 인식되지 못하는 관념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적 서사가 달라져야 하기에 문명적 수준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적 위기의 근원 역시 “자연은 무한하고 통제와 지배가 가능한 대상이고 인류는 자연을 지배할 권리와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우리들의 관념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이 기존 사회, 경제 모델의 기저를 이루는 논리적 가정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내재한 가치 체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에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문명적 수준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는 자연관과 세계관을 넘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시스템에 대한 상상과 전망이 필요하다.

 

자연의 경제와 인간의 경제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라 부르는 개념은 지질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면서 언급한 “상호 연관된 종들의 얽힌 복합체”에서 유래한다. 다윈은 동물과 식물을 “복합적 관계의 그물에 의해 함께 묶여진 존재”로 규정했고, 에른스트 해켈은 훗날 다윈이 생존경쟁의 조건(들)이라 부른 동식물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들에 대한 연구”를 생태학이라 이름 붙였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의 영어 표기와 발음은 서로 닮았다. 실제로 다윈은 생명체의 생존과 생활을 위한 활동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경제”라는 표현을 『종의 기원』 여러 곳에서 직접 사용한다. 그는 “자연의 경제”를 생물학적 개인, 종과 환경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썼고, 이를 반영해서 해켈 역시 생태학을 “자연의 경제에 관한 지식의 본질”이라 정의했다. 다윈이 자연을 “경제”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은 아닐 수 있지만 자연과 경제 사이의 연관과 유사성을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Hardy-Vallée, Benoit, “The Economy of Nature: A Brief Introduction”, y, http://naturalrationality.blogspot.com/search?q=Darwin, 2007)

지구가 제공하는 자연의 경제 내에 인간의 경제가 하위체계로 존재하고 있음은 불변의 사실이다. 생산, 분배와 소비 등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은 변환된 에너지를 이용해서 물질이나 비물질적 재화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경제 시스템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유입되어 경제활동에 사용되고 이후 폐기물 형태로 자연 생태계로 배출되는 것을 자원흐름(through-put)이라 한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이 같은 자원흐름의 과정을 매개로 자연 생태계 안에 배태되어 있다. (조영탁,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 생태경제학의 기획』, 2013)

그러므로 생태와 경제는 시스템으로나 순환으로나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의 순환은 생태계의 순환체계 안에 포함되어 진행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구 생물권의 존재에 무관심하며 생태계의 순환에 무지하고 경제순환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한다. 생태와 경제의 다양한 연관 속 상호작용과 그 효과를 외부성이라는 개념 안에 집어넣은 다음 경제분석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예외적인 경우 아주 제한된 방식으로 그 효과를 고려할 뿐이다. 더욱이 토양이나 기후, 생물다양성 등 지구 생물권의 대치할 수 없는 역할은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로 인류가 먹는 농작물의 70%는 식물이 열매를 맺도록 꽃가루 운반자 역할을 하는 꿀벌의 도움으로만 경작이 가능하지만 경제학자들 중 다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 생각, 2014)

스웨덴의 환경학자 요한 록스트롬이 제시한 후 UN 리우환경회의 등을 통해 수용된 행성한계는 1)기후변화, 2)해양의 산성화, 3)오존 고갈, 4)질소 순환, 5)물 사용, 6)토지 이용 변화, 7)생물다양성 손실, 8)에어로졸 증가, 9)물질 오염 등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Rockström et al., 『Bankrupting Nature: Denying Our Planetary Boundaries』, Kindle Edition, 2013) 행성한계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유한한 생태계에 속해 있고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 자원의 소비가 생물계의 수용 능력, 즉 지구의 생태용량 한계를 넘어 변곡점에 이르면 지구 시스템의 회복력이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경제 시스템이 사용하는 “자원흐름의 규모”가 커지고 “자원흐름의 독성”이 강할수록 자연 생태계의 부담과 피해는 커진다. 지금은 자원흐름의 규모가 자연 생태계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려는 상황이고 자원흐름에서의 “감량화”와 “탈독성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조영탁, 위의 책, 2013: 349)

그럼에도 경제학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아마도 언젠가 우리의 미래세대는 생태와 경제가 하나의 동일한 과정임에도 당시 세대가 왜 그렇게 생태와 경제의 연관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놀라움과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간극을 연결하고 단절을 메우는 새로운 경제학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이 “유한의 세계에서 기하급수적인 경제성장이 끝없이 계속될 것으로 믿는 자는 미치광이이거나 또는 경제학자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거의 주목 받지 않았다. 생태학에서 다루는 에너지 흐름과 물질순환을 경제학에서의 경제순환에 명시적으로 도입하고 연결하려는 시도가 생태경제학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학의 가장 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Costanza Robert, Herman Daly, Richard Norgaard et. al., 『An Introduction to Ecological Economics』, St. Lucie Press, 1997)

생태학과 경제학의 통합, 생태와 경제의 통합은 당위적 차원의 필요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현상유지는 더 이상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닌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턴 보고서(『Stern Review: The Economics of Climate Change』, 2006.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영국의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이 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로, 기후변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환경과 경제가 상충하는 의제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았다)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경제, 사회적 행태가 지속되면 20세기 전반기 공황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규모의 파괴적 영향이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른 온갖 위험과 효과를 전부 고려하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비용으로 매년 인류 전체 GDP의 5~20%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또한 앞으로 10~20년의 시기가 이후 21세기 후반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고, 지금 행동에 나선다면 최악의 효과를 피하기 위한 비용은 매년 전체 GDP의 1% 정도이므로 비용 대비 편익이라는 경제적 고려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피크오일, 즉 화석에너지 시대의 임박한 종언 또한 현상 유지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님을 말해준다.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탄소배출의 한계점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만, 그러한 한계가 없다면 우리는 원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비록 전환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지닌 성찰과 적응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Mary Berry, 『A Conversation Between Wendell Berry and Wes Jackson』, Kindle Edition, 2017)

제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고 “노동의 종말”과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화되는 상황도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프란츠 알트가 강조한 대로 고용 없는 성장과 생태 위기는 우리가 조망할 수 있는 시간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이자 동시 해결이 모색돼야 할 문제이다. 알트는 재생에너지로 전환함으로써 생겨나는 일자리는 낡은 에너지원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없어지는 일자리의 5배에 달하며, 앞으로 에너지 전환만큼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박진희 옮김, 양문, 2004: 15, 82)

 

생태적 전환과 사회적 경제

생태적 전환을 위한 대안적 경제의 단위 요소들은 당위와 윤리의 차원에서 이미 실행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현실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실험의 사례들과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에서 협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경제가 주목 받고 성장하는 동시에,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대규모 자원의 집중과 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와는 다른 대안경제를 시도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성장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대표적 사례인 독일의 경우, 체르노빌원전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은 독일 남서부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 650명이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민간기업에 대항해서 1986년 시작한 재생에너지 사용 캠페인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로부터 25년후 독일에서는 지역사회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에너지 협동조합이 활발하게 결성되어 2011년말 현재 439개가 되었다. (Osha Gray Davidson, 『Clean Break: The Story of Germany’s Energy Transformation and What Americans Can Learn from It』, Kindle Edition, 2012) 에너지 협동조합 설립 성과로 독일에서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의 47%가 시민들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태양열, 풍력, 바이오매스 등으로 구성되는 재생전기의 65%가 개인이나 협동조합, 지역공동체 소유로 운영된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깨끗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아니라 기업이 지배하는 집중된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소규모의 분산적이고 분권화된 사회로의 사회경제적 전환이다. (Arne Jungiohann, Craig Morris, “Germany Shows It Is Worth Fighting for Energy Democracy”, Resilience.org, June 22, 2017)

제레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 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제4차 산업혁명’ 논의와는 달리, 경제산업구조 재편과 고용전략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에너지 분산과 사회권력의 분산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파워 투 더 피플(시민에게 권력을 넘기는)” 기획임을 강조한다. 지역과 공동체가 기반이 될 때 보다 수평적이고 분권화된 정치시스템과 보다 분산된 공동체, 협동조합 등의 사회적 경제를 지탱하는 에너지 시스템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스 잭슨 또한 로컬을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라 말하며, 로컬푸드 운동 역시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시스템에 필요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Wes Jackson, “Toward an Ignorance-based Worldview”, Bill Vitek and Wes Jackson, 『The Virtues of Ignorance: Complexity, Sustainability, and the Limits of Knowledge』, Kindle Edition, 2018)

제레미 리프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에너지 체계의 결합을 통해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고 선언한다. 그는 『한계비용 제로 사회』(안진환 옮김, 민음사, 2014)에서 공유경제 확산과 확대의 기술적, 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성과로 만들어진 커뮤니케이션, 에너지, 물류인터넷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신경네트워크는 거의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의 한계비용을 거의 0으로 수렴되게 함으로써 자유재와 풍요로운 자원(제한된 자원이 아닌!)을 보편적인 상황으로 만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배분에서의 시장 영역과 이윤 창출 영역을 축소시키고 글로벌 공유자원의 영역을 급격히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협력적 공유사회”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 경제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대안적 경제의 다른 이름이다. 주거, 돌봄, 재생에너지, 도시농업과 도농교류, 보육, 의료, 온라인 오픈 플랫폼과 쉐어웨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출현하고 성장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유경제, 공동부엌, 지역재단, 전환마을 등이 그 형태들이다. 여기에 사회적 금융, 크라우드 펀딩, 지역화폐, 대안화폐, P2P 대출, 타임 뱅크, 크레딧 유니온, 윤리적인 은행 등 새로운 금융 거래 형태들이 협력적 공유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이 같은 사회적 경제의 구성요소들을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와 구별되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핵심 경제단위로 제시하고 있으며, ILO(국제노동기구)는 이미 10여년전 “생태적, 사회적, 공동체적 목표가 하나로 수렴되는, 지속 가능한 사회발전 모델”로서 사회적 경제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

인간은 자신이 빅뱅으로 창조된 우주의 일부로서 최소한 두 번 초신성을 통해 재활용된 우주먼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우주적 기원에 대한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주와 우리의 관계이며,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이 청지기 역할이라 표현했던(Mary Berry, 위의 책, 2017), 지구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인 인간의 책임 있는 역할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제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구원할 위치에 있다. (찰스 버치∙존 캅, 『생명의 해방: 세포부터 공동체까지』, 양재섭∙구미정 옮김, 2010:132)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너무 늦지만 않다면 그것은 인류 출현 이래 인류가 행한 가장 위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사물과 세상, 자연을 인식해온 방법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무한성장” 이란 관념이 갖는 반생태적, 반우주론적 함의를 돌아보고, “생태적 인간(Homo Eologicus)”을 향한 문화적 진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생태위기는 우리가 익숙한 사회, 우리가 익숙한 문명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산업사회, 산업문명의 전환은 실로 지난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명칭이 무엇이든 핵심은 생태문명, 생태친화적 문명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는 지구의 수용능력 안에서 운용되는 생태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무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의 대신 경제생활의 목적과 가치가 반영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과 경제조직, 새로운 경제주체를 만들어내고 경제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와 유∙무형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재생에너지와 농업, 교통과 휴먼서비스를 중심으로 분권화된 지역들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 생태계의 구축이 될 것이다.

 

정건화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월, 2020/01/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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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에 설립된 영국은행에서 빌린 1.2백만 파운드를 갚지 않았다. 그 대신 대부자(영국은행)에게 대출금의 반대급부로 독점적인 화폐발행권을 부여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 세계의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기본구조가 되었다. 현재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를 맞이하여 정책당국자들은 경제를 부양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조처를 약속했고, 중앙은행들은 정부의 재정지출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위급 상황, 특히 전쟁 기간에는 왕왕 중앙은행들은 해당정부에게 신규의 은행권화폐를 제공하곤 하였다. 결과로 나타나는 인플레에 대한 대처는 위급상황의 종결 이후로 미루어져 왔다. 팬데믹 상황임에도, 현재 세계는 아직 전쟁에 준하는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인플레를 책임져야 하는 중앙은행의 원칙을 완화시킬 필요까지는 없다. 그럼에도 급하게 필요하다면, 화폐재정에 대한 융통성이 정책책임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무제한으로 통화량을 풀어 정부의 재정필요를 지원하면 초인플레(hyper-inflation)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도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지난 십 수년간 인플레의 예측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적완화의 정책은 중앙은행의 목표인 2.0% 이내에서 이루어졌다. 활성화된 경제로 흘러 들어간 돈은 그만큼 확대된 수요(아마도 위험관리형 예치)에 의해 흡수되었다.

양적완화와 통화재정 정책 간에 분명한 경계선은 없다.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로 구입한 금융자산은 일시적이며, 새로이 발행된 화폐량는 경제활동 과정에서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라나 이후 후임자들이 이를 지속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단속할 수단은 없다. 한편에서는 정부가 돈을 빌리는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는 반면에, 국가채권은 민간투자자들이 사들일 때만이 신규발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은 점차 영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앙은행들은 재정위기와 현재의 현금수요 간에 통화정책을 충분히 토론해서 정상화시킬 처지가 아니다. 이들이 언제라도 충분히 토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집행된 정책수단의 규모가 너무 커서, 예컨데 일본중앙은행의 경우에는 보유하고 있는 국채가 일본국가 수입의 100%를 넘어 서고 있어서,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국채를 시장에 내놓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양적완화와 통화재정 간의 차이점은 대개 단 한가지의 예이다: ‘금융자산의 구매행위가 잠정적인가 아니면 지속적인가?’ 이 점이 중앙은행의 신용도와 메시지의 전달에 중요한 측면이다. 영국은행장인 Andrew Bailey는 언론에 기고하였듯이, 국제적인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파운드로 보관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제공했던 통화정책을 거부했다.

파이낸설 타임즈의 입장은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려면 화폐금융정책에 자유재량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의 내용과 같다.

인플레를 잡으려는 흐름이 거꾸로 간다면, 중앙은행들은 물가의 인상과 싸우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던가 양적완화를 줄여야 한다. 현재의 위기상황은 디플레를 야기할 수 있으며, 각국 중앙은행들은, 유럽중앙은행를 예외로 하고, 함께 균형을 맞추며 정해진 목표를, 이상 또는 이하 양방향에서 벗어난 인플레와 싸울 것을 약정해야 한다.

현재 침체 국면의 심각한 규모를 감안하면, ‘헬리콥터 머니’가 되었든, ‘일반 시민에게 현금으로 지불하는 방식’이든, 가장 직접적인 화폐재정의 방식으로 재량껏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정책의 집행과정은 공공재정을 책임지도록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직자들의 협조를 요구한다.

논쟁의 핵심은 화폐재정 정책을 추진해야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양적완화는 이루어지고 있듯이,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책임있는 통제 하에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이낸스 타임즈 편집부 (FT editorial board)

월, 2020/04/1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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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비극적인 산불 사태를 겪고 있다.

지난 몇 주 간의 호주의 모습은 악몽과도 같았다. 화염이 벽으로 형성되고, 하늘이 핏빛처럼 물들었으며 거주민들은 화재를 피하기 위해 해변에 급히 모여들었다. 호주 산불은 매우 강력해서 대형 트럭을 전복시킬 정도로 엄청난 ‘화재 토네이도’를 만들어냈다

여름에 발생한 호주 화재는 지난 1년간 발생한 일련의 재앙적인 기상 이변 중에 가장 최근에 발생한 사건일 뿐이라는 사실이 문제이다. 전례 없는 중서부 홍수, 123도(F)까지 육박한 인도 폭염, 유럽 전반에 걸친 전무후무한 기온을 보인 폭염 등이 잇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재앙은 기후 변화와 관련되었다.

필자가 위 사건들이 기후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보다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이들이 혼란스러워 한 구분이다. 각 기상 현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에 뉴스 보도에서는 자연 재해 발생에 기후 변화가 미쳤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기후학자들은 확률에 초점을 맞춘 ‘극단적인 원인 규명(extreme event attribution)’에 몰두하여 이러한 혼란을 타파하고자 노력해 왔다. 기후 변화가 특정 폭염을 일으켰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폭염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확률이 많이 달라졌다고 답할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우리가 보아온 많은 유형의 극단적인 기후 현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그리고 기상 결과에는 임의성이 많지만, 사실 임의성은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하는 것보다 초기 단계에서 기후 변화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현재까지 연구의 경험에서 추정해 보면 플로리다 전체는 결국 바다에 의해 잠식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훨씬 전에 해수면을 끌어 올리는 치명적인 태풍이 흔하게 밀려들 것이다. 마침내 인도 대부분의 지역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시점이 도달하기 전에 이미 폭염과 가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기후 변화가 야기할 전면적인 결과가 나오려면 수 세대가 지나야겠지만 기후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재난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대재앙이 일상적으로 평범한 사건이 될 것이며 우리 눈 바로 앞에서 항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기후 관련 재난의 확산이 이를 억제하는 대응조치를 무력화시킬지 여부가 중요한 문제이다.

희망적인 신호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뉴스 매체가 재해 현상에 있어서 기후 변화의 역할에 대해 보도하는 빈도수가 많아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염, 홍수, 가뭄 등 재해에 대해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 필자는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마침내 불통의 침묵을 깼다고 느낀다. 지난 몇 년간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커지면서 대중들도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쁜 소식은 주로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 진영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라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와 원인 규명에 대해 과학계의 논쟁이 심각해지면서, 보수파 정치인들의 반환경적 극단주의가 오히려 격렬해졌다. 공화당과 특히 트럼프 정부는 전반적으로 과학의 보고서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사실상 공화당의 딥스테이트(막후 기득권,)의 일원이 아니던가?

더욱이 이것은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 호주 정부는 대륙 전체가 불에 타고 있는데도 석탄 산업에 대한 지원을 재차 확인하고, 이런 류의 환경파괴 사업을 보이콧하려는 행위를 범죄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결단력 있는 조치가 시행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시점에 반환경주의가 점점 더 극단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재 상황의 병적인 아이러니이다.

이제 기후변화의 위험성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다. 비록 눈 앞에 전개된 재해가 앞으로 닥칠 거대한 참상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히 피해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적어도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오늘날 온실 가스 배출의 급격한 감소를 상당히 쉽게 성취할 것처럼 보인다. 특히 대체 에너지 관련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탓에 트럼프 행정부는 태양에너지 및 풍력 에너지와의 경쟁에 대항하는 석탄에너지 산업을 필사적으로 지원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2020년 대선 캠페인에 환경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인가? 민주당원 대부분은 환경정책이 주요 사안으로 확대되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보이며, 필자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 환경 정책에 대한 우파들의 협박은 추상적이고, 먼 미래같이 느끼며, 공화당이 오바마 케어를 해체하려는 시도의 예처럼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와 관련된 재앙의 파장이 정치적 산술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선거 전문가가 아니지만, 최근에 발생한 화재와 홍수를 선거홍보의 내용으로 활용하면서, 도널드 트펌프(Donald Trump)와 측근들이 그러한 재앙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광고를 통해 선거 캠페인이 어느 정도 시민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트럼프의 환경정책은 미국과 세계에게 매우 유해하며, 유권자들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NYT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자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교수

목, 2020/02/0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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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다른백년에 자유롭게 수시로 기고하시는 김광수 박사의 글로 다른백년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만절필동(萬折必東)과 그림책 <사자와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대의는 지켜지고, 정도(政道)를 넘어서는 감동이 이번 선거에서 꼭 연출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도 예외 없이 그런 대의존중과 감동은 없을 것이다. 선거라는 것이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정치교본에 따른 선거의미보다는, 정파의 입장과 각 정당들의 이해득실에 따른 현실의 문제로 더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비례위성정당문제이다. 애초 선거법 개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등가성의 원칙과 소수정당에 대한 배려의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다수당이 되기 위한 이전투구만 남아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는 선거를 정치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이기고지는 게임의 문제’, ‘이익의 문제’, ‘프레임의 개념’으로 이해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게 되고, 이익이 걸려있다 보니 진영논리가 만들어져 네편·내편으로 나눠져 피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고, 더해서 우월적 프레임으로 도그마(dogma)하여 승자·패자를 분명히 하려하다보니 승패만 남게 되어서 그렇다. 그렇게 상대방을 죽여야만 내가 사는 것이다.

선거가 이렇게 잔인하다.

연동되어져 진보와 보수를 떠나 과장된 언술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의도와 속임수는 다반사이고, 주의주장은 포퓰리즘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정도와 비(非)정도는 구분되지 않아 넘지 말아야할 선도 없다. 오직 있다면 유권자와 후보자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직립보행 진화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선거는 현실적인 문제이고, 권력을 향한 무한질주이다.

이를 위해 모든 정치세력들은 프레임 전쟁을 펼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선거는 세 개의 프레임이 작동한다.

정권심판 VS. 야당심판 VS. 적폐세력 부활저지다.

전자는 미00이, 중간 것은 민00이, 그리고 제일 마지막 것은 시민사회진영의 프레임이다.

과연 어느 프레임이 더 많은 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게 되고, 승리하게 될까?

당연히 긴 시간과 역사적 관점, 운동적 대의측면에서는 적폐세력 부활저지가 보다 많은 유권자들의 동의를 얻어내어야만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일치하지도 않는다.

다만, 최선을 다 할뿐이고, 그 중심에 우리가(시민사회진영과 진보적 대중정당이) 왜 이번 선거를 전략적 사고로 접근해야하는지, 그 결과 얻어진 결론이 야당심판세력과 적폐세력 부활저지세력 간의 연대여야 한다.

이유는 지금의 현 정부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촛불시민항쟁으로 만들어진 정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번 선거는 당연히 적폐세력을 축출한 촛불시민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 선거는 적폐세력들 간의 부활노림이 최고치로 도달하고 있어 이들 세력의 부활을 막는 것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절체절명의 과제로 되고 있다.

해서 이번 선거는 누가 뭐래도 촛불시민항쟁 버전-2(version-2)이다. 그러니 각 정당들이 제아무리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야당심판이니, 여당심판이니, 대통령 국정전반에 대한 평가이니 하면서 떠들어 댄다하더라도 이번 선거의 의미와 본질이 변할 수는 없고, 적폐세력의 부활저지라는 목표가 부정될 수는 없다.

똑 같은 적용으로 제 아무리 진보적 대중정당의 독자적 후보전술의미가 커다하더라도 적폐세력 부활저지라는 목표를 넘어설 수는 없고, 연동하여 진보적 대중정당 후보당선도 적폐세력의 부활저지라는 목표를 넘어설 수는 없다.(당선시키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오역하지 않았으면 한다.) 철저하게 적폐세력 부활저지에 복무하는 독자후보전술이어야 하고, 당선전략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기준점과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폐세력의 범주문제이다. 여러 기준점을 상정할 수는 있겠지만, 함의되고 합의되는 지점은 ①친일세력 ②분단세력 ③보수수구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둘째, 민주당에 대한 입장정리문제이다. 여러 주장들이 난무할 수는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정당의 성격이 보수정당이라는 사실,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정당이 보수수구세력은 아니라는 점, 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을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대해야 되는지가 분명해졌다.

다름아닌, 이번 선거가 적폐세력의 부활저지에 있다면 이 당과는 연대의 관점에서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이다.

설명은 이렇다. 촛불시민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이 독자적 힘으로 적폐세력의 부활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위 ‘둘째’와 같은 그런 전략적 고려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현실은 진보적 대중정당이 촛불민의를 100% 반영해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정부와 집권여당 민00에 의해 촛불민의가 일부 반영된 개혁입법이 그것조차도 적폐세력의 저항으로 좌절되고 있는 것도 한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민00과도 연대해 반드시 이번 선거에서 과반이상의 의석수를 차지해야만 하는 당위가 충분히 발생한다.

그렇게 개혁입법을 완성시켜 낼 수 있는 동력이 이번 선거에서 마련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이번 선거는 반드시 민00을 포함한 비(非)적폐세력들이 과반이상의 의원확보를 해내어야만 한다.

셋째, ‘첫째’와 ‘둘째’를 함의하는 선거전술의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적폐세력 후보를 제외한 모든 당선 가능한 후보에 표를 집중해주고, 정당투표는 반드시 진보적 대중정당에게 투표하는 전략적 선택이 그 정답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다음과 같다.

각 정당들의 셈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민00은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서 자당 중심으로 과반이상을 목표로 하고, 반대로 진보적 대중정당은 이번 선거가 적폐세력의 부활저지에는 동의하나 자당후보의 당선도 포기할 수는 없기에 나름 전략지구를 중심으로 후보를 내려할 것이다. 후보가 그렇게 대립한다.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위에서 확인한대로 적폐세력의 부활저지라는 이번 선거목표에 충실하면서도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토대강화라는 조직적 강화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지역구에 진보적 대중정당 후보가 없을 때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민00 후보를 찍으면 되겠지만, 문제는 진보적 대중정당 후보가 있을 때이다.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셈법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적폐세력 부활저지에 더 무게중심을 둘 것이냐, 아니면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토대강화 구축이라는 명분, 혹은 당원으로서 자당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의 의무를 다할 것이냐에 따라 그 선택지가 분명 달라질 것이다.

했을 때 단일화가 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최종 투표선택을 해야 한다.

▪기준1: 여러 차례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이번 선거의 최고 당면목표는 누가 뭐래도 적폐세력의 부활저지이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투표행위가 이뤄져야만 하는 것은 당위이다. 제아무리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토대강화와 독자후보전술의 의의가 커다하더라도 이 선거의 의미를 뛰어넘어 설 수는 없다.

해서 감정적으로야 어느 교수의 심정대로 ‘민주당만 빼고’로 투표하고 싶지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집권당인 민00이 백번이고 비판받고, 또 역사적으로도 심판받아야 하겠지만, 위 ‘첫째, 적폐세력의 범주문제’에서 확인받듯이 민00이 적폐세력이 아님은 분명하고, 또 현실적인 측면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이 민00만큼 촛불민심을 제대로 수용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상황은 이 당을 포함한 당선 가능한 모든 비(非)적폐세력의 후보들에게 전략적 투표행위를 해 적폐세력의 부활저지라는 선거당면목표에 반드시 부합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적폐세력의 부활을 저지해야 한다.

▪기준2: 위 ‘기준1’과 같은 기준으로 투표했다하더라도 투표할 기회는 한 더 번 남아있다. 다름 아닌, 정당투표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제대로 된 진보의 미래와 평화, 통일을 위한 여정은 계속하기 위해서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토대마련이 결코 포기되어져서는 안 된다. 해서 비례에 있어서만큼은 연동형비례대표제의 도입취지에도 맞고, 또 민00으로는 한국사회의 근본개혁과 통일지향이 불가능함으로 반드시 진보적 대중정당들에 대한 전략적 투표행위가 이뤄져야만 한다.(여기서 ‘진보적 대중정당들’이라고 복수화한 것은 유권자 각자는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지지정당 선호도 등에 따라 진보적 대중정당을 달리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를 반영한다.)

이렇게 이번 4.15 총선은 철저하게 촛불시민항쟁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봐야 하고, 그러려면 비록 차선(혹은, 차차선)이라도 민00과 함께 적폐세력들의 발호를 막아내어야만 한다. 이것이 민00이 갖는 한계는 명백하지만, 민00을 버리고 갈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그뿐만 아니다. 굳이 이번 선거가 아니더라도 민00과는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정말 온전한 주권국가이고, 분단이 되어있지 않다면 시민사회진영은 위와 같은 그런 전략적 고민들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민00과 후보·정책연대 등을 그 핵심으로 하는 선거연대·정책연대 등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유럽등과 같이 진보적 대중정당을 직접 창당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진보적 대중정당 후보를 지지하여 일반 민주주의 정치를 구현해나가면 된다.

하지만, 분단국가의 숙명은 위와 같은 일반론적인 의미에서의 시민사회진영의 정치개입 방식과는 좀 다른 필연을 낳을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국가보안법 등이 존재하여 온전한 정치적 활동을 보장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법·제도의 측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단극복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운동방식이 정당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전선적 조직운동이라는 그 측면 때문이다.

바로 위 2가지가 민00이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보수수구이자 적폐세력의 본산인 미00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들이 진보적 대중정당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헌법적 책무라 할 수 있는 분단극복(=평화통일) 실현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

더군다나 국가보안법 등 악법들이 존재하는 엄연한 상황하에서는 분단을 넘어서려는 그 어떤 정상적인 제도권 정치활동마저도 쉽지 않고, 그렇게 쉽지 않은 만큼 민00을 정치파트너 우군으로 함께 해야 할 전선적 원리가 발생한다.

해서 대한민국 정치는 광의적 개념으로 전선운동으로서의 정당운동도 함의하고, 좁은 의미로서의 제도권 정당운동으로서의 정치운동도 공존하는 그런 개념이 된다.

대한민국 정치의 숙명이 그렇게 규정되어진다. 진보적 대중정당의 독자적 강화를 주선으로 틀어쥐면서도 비(非)적폐세력인 민00과는 전략적 연대를 끊임없이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운동적 요구가 그렇게 발생한다.

그래서 이번 4. 15선거는 현 정국하에서 민00과 함께 과반이상의 국회의원 획득과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토대강화라는 원래의 조직적 목적이 충족되는 그런 수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향후에는 진보적 대중정당들이 분단극복을 위한 일상적 정치활동이 가능하게 되고, 촛불민의를 보다 일상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확장된 정치 공간과 이후 선거에서는 보다 유리한 환경 속에서 진보적 대중정당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후보전술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분명 이번 선거는 그런 선거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대단히 우려스러운 것은 코르나19와 적폐세력들의 의도된 ‘낮은 투표참여전략’으로 조직선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져 있다는 사실이다.

넘어설 묘책이 필요하다.

▪우선은 이 글 전반에 걸쳐 관통하고 있는 맥락,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을 떠나 크게 대의적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나 자신부터 투표허무주의나 무용론에서 빠져나와 차선(혹은, 차차선)이라하더라도 투표하고, 선거투쟁을 통해 유권자들을 반드시 투표장으로 안내하자.

구호는 다음과 같다.

‘4.15투표를 통해 적폐세력 청산하자!!!’,

‘촛불시민항쟁은 4.15투표를 통해 완성된다!!!’,

‘4.15선거투표 없는 적폐청산 없다. 투표로 적폐세력 심판하자!!!’

참여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통해 그렇게 촛불시민항쟁을 계속 이어나가자.

 

민플러스, 2020년 3월 13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토, 2020/03/2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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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태문명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가치도 그 비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삶의 중심에 있는 가치이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핵심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관계적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했으며 이런 관계들이 “아름다움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미적 사건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움의 생산”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아름다움이라는 원리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재구조화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대 서구 문명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 단지 의견에 그치는 판단이라고 믿게 됐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피상적이고 사소한 특성으로, “오직 피부 두께”로 거론한다. 이런 가르침은 아름다움을 공공생활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예술세계에서는 아름다움이 줄곧 논쟁적인 주제였지만 대개는 화장품, 패션, 성 상품화, 소비자 마케팅의 영역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공공정책, 지방정부, 경제발전, 교육, 공공보건, 환경보호에서도 고려할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제안하는 일은 당황과 조롱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무미건조한 감정을 끌어낸다.

자연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성의 편견이 그대로 유지된다. 토지이용계획을 세울 때 산책로를 만드는 것과 건물을 짓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미적 결정을 내린다. 구역설정, 쓰레기처리, 대기질과 수질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물론 우리의 도덕적 코드와 문화적 관계에는 미적 차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움의 사소함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에서 아름다움을 여러 요소 중 하나로 경시한다. 그 결과는 우리 도시와 집들이 싸고 투박하게 지어짐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경험을 퇴화시키는 비타협적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생태적 패러다임의 본질이다

사실 아름다움은 생태적 패러다임의 본질이다. 아름다움은 현대 산업기술 자본주의 세계관의 핵심에 도전해 생명을 부정하는 원리와 가정을 소환하는 가치체계이다. 아름다움은 생명체에 내재하는 생동감과 관련이 있으며 존재들간의 관계에서 강화된다. 생명을 긍정하는 관계는 가치를 가지며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아름다움은 생명, 그리고 생명의 경험들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가치이며 그래서 다른 존재들의 활기와 연결된 우리 자신의 활기를 북돋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실재를 좀더 정확히 설명하는 포스트 기계론의 패러다임을 구상할 때 아름다움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기계론의 반생명성에 대항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느낌의 형이상학을 제안했고 관계의 느낌을 실재의 가장 기본으로 설정했다. 느낌을 다시 도입하는 것은 기계론의 가정들과 현대사상의 경로에 대항하는 생각들을 순차적으로 끌어낸다. 느낌은 주체성을 요청하고 주체성은 자유, 새로움, 목적, 가치를 요청한다. 생명이 다시 세계로 돌아오는데 이는 생존을 위한 혼란스런 돌진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회귀이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 도덕적이고 미적인 그것은 존재의 목적이다”(Cited in The Philosophy of Alfred North Whitehead, Paul Arthur Schilpp, editor (La Salle: Open Court, 1941 and 1951), p. 8)라고 썼다.

 

조직의 원리이자 목적으로서의 아름다움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예술에 국한돼온 아름다움이 확장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현대 세계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아름다움에 기울이는 작은 관심이 오로지 예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공공예술 지원은 공공조각, 벽화, 간판 같은 형식적 활동에 그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존재의 목적”으로 이해된다면 세계의 구조와 과정이 생명을 긍정하고 의도적으로 “생명의 생생함”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이런 저런 물질적 형태가 아닌, 문화적 커먼즈를 창조하는 조직 원리로서 우리의 공공영역에 다시 들어와야 하며 전반적인 삶의 실천이 돼야 한다.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새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재의 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들조차 지속가능성과 아름다움이 어떤 관계인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환경에 대한 글과 함께 제시된 이미지가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이 아름다운 세계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라고 외치도록 만들더라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아름다움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토론을 위한 시각적 자료 이상으로 활용되지 않으며 기계론과 유물론의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일의 중요성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이 실재가 아니거나 우리가 아름다움의 부재에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다움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도록 훈련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조직의 원리로서 다시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태적 패러다임을 향해 움직이려는 노력을 기울여도 여전히 현대적 패러다임에 속박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에 접근하는 지배적 방식도 현대성에 명백하게 붙들려 있다. 지속가능성이 공공의 논의에서 견인력을 가질수록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거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기술적 혁신으로 환원된다. 탄소저감기술이 우리의 제1세계 생활양식을 유지해주면서 기후붕괴를 피하는 놀라운 가능성을 갖는 지속가능성의 성배가 되어왔다.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한 자원기술이 기후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내재한 활력과 모든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보다 넓고 깊은 토대가 필요하다.

 

지속가능성, 생명에 대한 긍정, 아름다움

“지속가능성”이란 단어는 인내를 최선의 목표로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의도가 있다. 바로 번성에 대한 관심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지구에서 끝없이 견디는가” 혹은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는가”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거나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한 자원의 문제로 축소되면 안 된다.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의 핵심에는 가치, 그리고 무엇이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공리적 질문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재생능력이 해답의 필수적 부분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지속을 넘어선 문제이다. 훨씬 위대한 미적-윤리적 비전이 아름다움과 선함이 융합되는 지속가능성의 실천적 작업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살수 있는가”이며 이것은 “우리는 아름다움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그래서 지속가능성은 아름다움과 함께 번성하는 세계에 도달하는 실천적 지침이 된다.

아름다움을 생태문명의 점근선적 목적으로 만들 때 우리는 기계론을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는 일을 완성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다시 도입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신을 만족시키고 고양시키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재형성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실천하기

“실천(practice)”이란 단어는 영어에서 두 가지 품사-명사와 동사-로 쓰이지만 단수이며 의도적인 반복이란 특징이 있고 삶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천은 바람이나 생각을 실용적, 기술적 활용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실천”이란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동사 “성취하다(accomplish)”에서 왔으며 “행동에 적합한(fit for action)“, “효과적인(effective)”, “활기 있는(vigorous)” 같은 단어들과 관련이 있다.

아름다움을 단순한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의 일부”로서 세계에 돌려주는 일은 아름다움의 실천을 우리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헌신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음악에서 스즈키 메소드의 창시자인 스즈키 신이치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밥을 먹는 날에만 (바이올린을) 연습하라.” 스즈키의 목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사회를 아름다움과 도덕성으로 정의되는 국가로 만들어 재건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관을 재형성하려면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엄청난 연습이 요구된다는 걸 알았다. 낡은 습관을 깨고 새로운 습관을 개발하려면, 새로운 자세를 유지하는 새로운 근육을 만들려면, 인식을 정화하려면, 새로운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능력을 얻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출발점으로 4가지를 제안한다.

1. 아름다움으로 이끌라

현대성은 형식과 기능의 관점을 부과했는데 오로지 이런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기능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는 효율성(시간과 비용 모두에서)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형식이 기능에 종속될 때는 보다 큰 관계의 패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물질적 생산이란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 계획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어떻게 기여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면 기능과 형식은 삶의 위대한 경제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이 경제는 관계의 전체성과 모든 행위가 전체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칙에 기초를 둔다. 미적 문제를 우선으로 한다는 것(관계 없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의 활기와 그 활기가 어떻게 전체의 활기에 기여하는지,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성이 핵심이다: 어두운 하늘의 별빛처럼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빛나게 한다. 화이트헤드가 든 사례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9개 문을 그린 조각작품이다: “이 조각들은 각각 아름다움을 지니면서 전체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내어준다.”(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The Free Press, 1933), p. 264)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것-삶을 긍정하는 관계로서 이해되는 아름다움-은 즉각 효율성과 금전적 이익을 넘어 생명체계의 활기로 관심을 확장시킨다.

서울의 1호 공공건축가인 승효상은 도시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이 “재개발”보다는 “재생”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경제발전에서 재생으로 초점을 옮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그의 구분은 1960년대 이후 서울에서 지배적이었던 서구 산업화 모델을 생태적이고 문화적으로 조율된 모델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승효상의 비전에 따르면 건축가들은 서울이란 장소의 독자성과 생기를 얻기 위해 서울을 둘러싼 8개의 산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과 바람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라고 하면서 “존재하기보다 생성”하는 전체를 디자인하는 최우선 원리로서 전통 문화와 자연-기술과 건축가 개인의 육감이 아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http://www.urbanista.org/issues/local-eyes/news/close-encounters-of-the-...) 세계에 존재하는 살아있음에 대한 그의 옹호(그리고 우리를 삶으로 데려가기 위한 도시 디자인에 대한 그의 헌신)는 생태문명을 형성하고 아름다움을 우리 삶의 조직 원리로 만드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2. 느낌을 앎의 기초로 만들라

미학(aesthetics)이란 단어는 “느낀다”는 뜻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인데 인식하거나 감각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반대말인 반미학(anesthetic)은 “무감각하다”는 뜻으로 감각을 무디게 만듦으로써 고통의 공포를 없애는 의학적 발전과 연관돼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친근한 단어이다.(번역자주: anesthetic은 마취제라는 뜻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느끼고 느낌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 삶을 유지하는 일들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세계관은 실재의 구조에서 근본적인 것인 느낌의 부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느낌, 주체성, 가치는 서로 통한다. 이것은 모두 기계론의 가정에 대한 평형추이며 삶의 형이상학을 향한 주춧돌이다. 살아있는 주체들의 세계에서 세계의 전체성과 세부를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은 철저한 느낌을 통해서이다. 상호적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느낌이고 상호적응이 가져오는 생명을 긍정하는 결과-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철저한 느낌을 통해서이다. “무엇이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느낌의 형이상학에 달려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실천은 느낌을 근본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실천이자 느낌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성에 대한 수용성을 배우는 실천,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의 삶-정신을 느끼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는 실천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보다 정교해지고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우리의 눈이 볼 수 있고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다.

3. 아름다움의 이름을 말하라

서구의 지배적 문화는 아름다움이 단지 주관적 의견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개인적 스타일의 문제로 생각하도록 배우고 그것을 사적인 삶에 국한시켰다. 그리고 오직 합법적인 가치체계는 돈과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아름다움을 공공생활의 한 요소로 여길 때도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여행객들이 쓰는 돈이나 생태적 서비스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데 당황할까 봐 걱정된 나머지 우리는 아름다움을 공공적 고려가 필요한 가치로서 언명하는 것을 자제해왔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새로 들어서는 고층호텔이나 대규모 학생기숙사 프로젝트, 대형 조립식건물의 상점을 추하다는 측면에서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런 개발을 반대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아름다움은 세계에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단순히 우리의 사적 감각에 의해 구성된 것은 아닌 경험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검열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심각한 장애를 만들었다. 공공 영역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부정하는 형이상학 체계에 굴복했다. 우리는 경제주의에 도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고 만족스러운 비경제적 가치의 형식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았다. 가장 중요하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침묵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파괴하는 일의 공모자가 됐다.

우리는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적 가치를 강화하는 언어의 힘을 안다. 아름다움의 실천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든 구조물, 시스템,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과정에 대한 공공의 대화에 미적 판단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4. 아름다움을 가르치라

우리에게는 삶의 구조를 가치로 가득 찬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STEM 교과목-과학, 기술, 공학, 수학-에 대한 현재 교육의 선호는 우리가 세계를 그토록 심각하게 파괴하도록 이끌어온 바로 그 사고방식을 계속 껴안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커리큘럼에 예술을 더한 STEAM 역시 이런 패러다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모든 측면에 드러난 생명”(Alfred North Whitehead, The Aims of Education and Other Essay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repr. 1959), p. 10)을 주제로 삼고 삶의 전체성은 미적 과정, 즉 “생명의 생생함”에 기여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명과 생명의 상호적응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름다움 중심의 교육은 예술, 예술감상 혹은 철학적 미학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철학과 느낌에 기반한 인식론에 기초를 둔 교육이다.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시킬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가정하는) 환원주의적 방법론에 근거한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논리 중심의 교육과는 대조적으로, 아름다움 중심의 교육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고 간주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세계의 활기찬 존재함”을 가정한다. 아름다움의 학습이 우리 대학에서 탐구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산업적 패러다임에서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업이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경시와 지구의 생명을 지탱하는 서식처의 변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현대성의 특징인 미적, 도덕적 무관심은 자연세계의 남용과 전반적인 생명에 대한 저평가에 기여한다. 우리의 형이상학, 언어, 교육시스템, 삶의 실천에 아름다움을 다시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생태문명을 창조하는데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샌드라 B. 루바스키

노던아리조나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월, 2020/02/17-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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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데 요구되는 자질은 능력과 공정성으로 통치하는데 필요한 자질과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장 프랑수아 레벨(Jean-François Revel) (1924-2006), 프랑스 철학가 (마르크와 예수, 1970, p. 68)

“첫 번째 진실은 국민이 민간 권력의 성장을 용인하여 민주주의 국가 자체보다 강력해진다면 민주주의의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파시즘이며 개인에 의해, 단체에 의해 또는 민간 권력에 의해 정부에 귀속됩니다.”–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32대 미국 대통령 (1933-1945) (의회 연설, 1938/04/29).

“권력의 아가리는 항상 삼켜버릴 수 있도록 열려 있고, 권력의 갈래는 제멋대로 널려 있어서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자유를 파괴합니다.”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 2대 미국대통령, 1797-1801 (‘교회법과 봉건법에 대한 논문’, 1765).

“정의를 위한 인간의 능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지만, 부당함을 향한 인간의 성향은 민주주의를 요구합니다.”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미국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1944)

“박사님, 우리는 어떤 국가를 만들었나요? 공화국인가요 아니면 군주국인가요? — 공화국입니다.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한에서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미국 건국의 아버지 (1787년 헌법 제정 회의 말미에 여성의 질문에 대한 프랭클린의 답변)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에서 표현했듯이 민주주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사상, 양심, 연설, 종교, 집회, 청원, 언론 등)를 보장하는 정치 제도로서 법 앞에서 정당한 법적 절차와 평등을 약속한다. 그것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책임지도록 하며 정부가 독단적으로 개인을교도소에 수감시키고 노예화하거나 감옥, 노예, 결박하는 행위 등을 금지한다. 개인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정치적 선호를 표현해도 안전함을 보장받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12세기 영국에서 유래한 인신 보호령(Habeas Corpus)의 법적 원칙은 민주국가에서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아갔던 위대한 단계였다. 해당 법령이 적법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 체포, 구류 또는 투옥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는 사회 내의 정치적인 권력이 개념적인 신과 지구상의 가까운 통역자(왕, 황제 등)에서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주권으로부터 나온다는 근본원리에 기초한 체제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국민의 동의를 얻어 통치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유 정부에서 통치자는 하인이요, 국민은 그들의 상관이자이자 주권자”라고 쓰면서 민주주의 개념을 확고히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는 완벽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타락하고 와해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1947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된 정부 형태를 제외하고 가장 나쁜 정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대의민주주의는 취약한 정부 형태이고,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가 실존하고 지속하려면 특별한 조건과 지속적인 경계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것이 독재자의 영향이나 다른 유형의 과두제 집권층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 민주주의는 기본 원리 세 가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1. 정치적 소수자를 고려하여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선거 또는 국민 투표에서 당선된 국민이 최종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2. 법 아래에 국민은 평등해야 합니다 그리고

3. 첫 두 원칙이 지켜지도록 보장하기 위한 헌법 규칙과 정치 및 법률기구가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결코 자연스러운 정부 체제가 아니다. 특히 전체주의적 독재정권 같은 독재정권은 폭력, 압살과 개별 군주 또는 과두정치 정부에 의존하여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규제를 가한다. 사실 이에 의해 역사를 통틀어 왕, 황제, 선동가, 폭군, 독재자, 과두 정부가 절대권력을 강탈하고 국민을 지배하며 야당 및 기타 정당을 없애게 되었다.

사실 어떤 민주주의도 권위주의적 압박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에 의해, 편견이 없는 언론에 의해, 지식인 및사상가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헌법과 부패하지 않은 사법 제도에 의해 변호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Is Democracy Consistent with Islam?

민주주의는 이슬람 제도와 함께할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에 민주주의 제도를 따르는 국가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20세기 전반은 두 차례 세계 대전과 심각한 경제 침체로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서 비롯되어 다수 국가에서 고질적으로 발생한 경제적 사안과 빈곤은 그때 당시 독재자 및 전제 군주들을 위한 왕성한 토대를 만들었다. 그 기간 동안 민주주의 국가의 비율은 31 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세계에 전제 군주국이 총 137개국이 존재한 반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12개국에 불과했다 (즉, 민주주의 헌법과 민중 자유를 위한 보호, 자유 선거, 독립된 사법부를 지닌 국가).

20세기 후반에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발전이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향후 전쟁을 방지하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1945년에 유엔이 창설되었다. 비록 회원국 50국 모두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수호하지 않았지만 일부 50개국은 유엔의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 인권 선언은 민주주의 기본 개념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면서 선포되었다. “국민의 의사가 정부 권력의 기반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 동안, 중요한 지정학적 발전이 두 가지 일어났다.

– 먼저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한 압력 아래에서 발생한 공격적인 독립운동을 통해 이전 식민지 정치체제로부터 식민지 국가를 해방시켰다. 이러한 탈식민지화 과정은 아프리카와 특히 오늘날 가장 인구가 많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로 대표되는 아시아에서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는데, 그 중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 두 번째로, 1991년 12월 소련 붕괴와 이어진 해체는 동유럽 내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숫자를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No less than 14 of the former Soviet republics became independent states, besides Russia. 러시아를 제외한 구소련 공화국 14개국은 독립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공화국 중 오직 소수만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공정한 선거를 치룬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중 일부는 사실상 독재 정권(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하에 있으며 상징적인 선거를 치를 뿐이다. 구소련 공화국 중 기타 5개국 중 몇몇은 더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민주주의 및 권위주의가 혼재한다.

문제는 2006년 이후로 세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감소해왔다는 것이다.

최근 스탠포드 대학연구진은 미국의 도덕적인 리더십이 없다면 모든 민주주의는 추락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경보를 울렸다.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정치학자는 «역경: 러시아의 분노, 중국의 야망, 미국의 자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하기»라는 새로운 저서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 및 해외에서 독재주의의 증가 추세에 의해 자유가 어떻게 침해되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어떻게 약화하거나 실패했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예를 들어, 그는 최근 2006년까지만 해도 모든 국가의 62%가 민주주의를 따르는 국가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나 2017년에다다르자 그 수가 51%로 감소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언젠가 21세기가 ‘전제 군주의 부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감지했다.

이는 왜 그러한가? 그 중 주된 요인은 국내 경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민주 정부의 역량을 약화시킨 경제 및 금융의 세계화로 추정된다. 또한 세계화는 중요한 경제적 구조 변화를 야기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기술 및 산업의 성장을 촉진해왔지만, 특히 오래된 산업 내 일부 노동자 집단이 뒤쳐지면서 탈산업화 과정과 고임금을 받는 직업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또 다른 원인은 세계화가 과도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점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발 때문일 수 있다. 많은 국가는 점점 허술한 국경지대를 형성하면서 외국에서 온 이민자와 난민의 유입이 증가했고 몇 사람은 “민주주의는 그들에게 잘 적용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들의 이익을 증진하지 않는다”는 말에 설득 당했다.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후퇴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목격되어 왔다. 일부국가는 과거 관습처럼 공공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기 보다 기술 관료 또는 판사에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회 및 정치적 사안을 해결할 권리를 위임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사실 특히 유럽 연합 내 일부 국가에서 중요한 정치 권력이 국가 정부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로 이동함에 따라 민주주의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의지를 좌절시키고, 소외시키며 국가 내 정치인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은 국경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싶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EU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다른 국가 중 캐나다를 예로 들면 1982년 이후 다수정치 세력은 소위 판사들의 정부로 이동했다. 판사들로 구성된 정부는 일반적으로 선출된 정부 관료들의 책무를 사법부가 결정할 수 있도록 맡겼다.

위에 언급된 두 가지 원인과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은 일부 국가 내 소득 및 부의 불균등 증대와 국내 정치에서 거부를 위한 역할과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부유층을 위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가 국가간의 세계적인 불평등을 감소시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 내의 불평등을 증가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 내세계화로 성공한 사람들은 세계화로 패배한 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부과해야 하는 세금을 낮추기 위해 넘치는 부를 활용하여 미국 정부에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불균등 증가에 대한 정치 및 경제적 요인에 추가할 수 있다. 미국 및 기타 국가에서 나타나는 증가하고 불안정한 정치 양극화는 사회적 양심이 결여된 일부 자본가들의 무한한 욕심에 대한 대중적인 반응으로 보여질 수 있다.

 

결론

금세기에 나타나는 민주주의 쇠퇴는 경제적 및 정치적 요인 서로 얽힌 사안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로부터의 후퇴를 멈추고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정치적 해결책을 모두 찾아야 할 것이다. 자만과 현실 부정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Rodrigue Tremblay (로드리그 트렘블레이 교수)

«세계 윤리 강령, 10 휴머니스트 원리», «신생 미국 제국»의 저자

 

2020/01/02 글로벌 리서치

금, 2020/01/2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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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미네아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당하자, 시민운동가들과 시위참석자들은 ‘경찰의 예산을 삭감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미네아폴리스 시의회는 이에 부응하여 삭감의 의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작 구태의연한 민주당 무리들과 선출된 공직자들은 이러한 요구에 식상하여 있다.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 내정자인 조 바이든은 경찰예산의 삭감에 반대의사를 밝혔고 경선 과정의 경합자였던 버니 샌더스도 이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미국역사에서 해로운(harmful) 공적 조직에 대해 예산을 줄이려는 생각은 좌파와 민주당원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경찰예산의 삭감을 요구하는 가운데 국방비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이들 좌파 그룹과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국방예산의 삭감이라는 매우 중요한 정치전략이, 사실 그 동안 민주당의 주류와 반전운동가들 사이에 포기되어 있던 상태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경찰예산의 삭감이라는 요구가 돌출되면서, 세계경찰력이라는 야심을 배경으로, 과다하게 팽창된 국방예산에 대한 삭감요구가 다시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미 1960년대와 70년대에, 뿌리가 깊은 반전운동의 조직으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여성국제연대는 이미 유명해진 다음의 문구를 스티커에 새기었다 “폭격기에 장착할 폭탄의 구매를 중단하고 교육에 필요한 모든 예산을 확보하는 위대한 날을 위하여.”

경찰예산삭감의 요구가 그러하듯이, 국방예산의 절감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정치철학이자 투쟁이다. 반전조직들은 국방과 전쟁에 예산의 우선순위를 배정하는 것은 교육과 같이 평화를 위한 재원을 무시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그리고 미국시민의 권리 American civil rights의 구호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노동조합은 경찰예산을 삭감하여 이를 시민들의 심리치료를 위한 서비스와 흑인 거주지역의 사회투자 예를 들어 학교에 투자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동안 경찰 간부들은 자신들의 조직은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예기치 않은 예산삭감에 대처하여 왔다. 이런 배경으로 2017년을 기준으로 시카고 예산의 38%가 그리고 미네아폴리스는 예산의 35%가 경찰력 유지에 투입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타격을 받은 뉴욕시 조차 2021년의 예산계획을 보면, 교육과 주거 그리고 보건 등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20억 달러를 삭감하는 반면에, 경찰예산은 고작 0.3%을 삭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12년 당시 시키고 시장은 시가 운영하던 심리치료 클리닉을 폐쇄시켰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심리치료를 받으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투입된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공포라는 심리적 위협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체 인구의 3%에 해당하지만, 심리적 고통을 겪는 시민들의 25-50%가 법적 강제집행이라는 사건을 악몽처럼 경험하였다.

민주당의 역사에서 보면 국방비를 억제하여 이를 사회서비스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한때 주류적 흐름이었다. 1950년대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시절) 과다한 규모의 국방비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존슨 대통령의 집권시절이었던 1960년대에 극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존슨 대통령은 국방비를 증액하고 이를 우선시하는 위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선언하였다 ”지구의 한편에서 진행되는 미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여인(위대한 사회)과 헤어져야 한다면 우리는 나라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사회라는) 나의 프로그램은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집이 없는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꿈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존슨은 궁극적으로 전쟁을 종결시켰고, 자신의 희망을 사회적으로 전환시키고 정치적 전망으로 밝히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월남전에 깊이 관여하면서 국방비가 엄청나게 팽창하자) 이러한 재앙 상황에 대하여 부분적인 저항이 70년대와 80년대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전개되면서 국방비를 삭감하고 군의 예산을 동결하려는 요구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인 알렌 크랜스톤은 “꼭 필요한 수준으로 국방비를 억제해야 한다’고 경고를 날렸고, 1990년에는 조지아 상원의원인 샘 넌이 향후 5년 간 2,550억불의 국방비를 삭감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콜로라도 하원의원인 팻 쉬뢰더는 레이건이 우선적으로 추진하던 MX 이동식 무기시스템과 B-1 전략폭격기의 예산을 철회시키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민주당 의원들은 결코 과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샘 넌의원은 국방예산을 너무 급하게 삭감하길 원하지 않았고, 팬타곤의 비난에 대하여 팻 쉬뢰더는 방위산업체들을 ‘안전의 여왕 welfare queen’ 에 비유하며 레이건 시절의 빈곤층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주의를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요지는 샘 넌과 팻 쉬뢰더가 결코 지나친 좌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조직의 예산을 줄이고 이를 비폭력적인 해결책에 투입하려는 것은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것입니다. 바이든과 같은 민주당 주요 지도자들이 1982년에서 2007년의 15년 간에 445%가 증가한 경찰 예산에 3억불의 추가지원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위에 언급한 전례의 선배들 주장에 합류하여야 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찰예산의 삭감 요구를,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어렵게 형성되고 있는, 반전운동의 프로그램에 활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은 방위비 예산을 통제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한 듯 합니다. 반전운동을 하는 좌파그룹은 샌더스에게 반전-플랫홈을 마련하도록 요구해 왔습니다만, 그가 경선에 패한 지금, 차후의 대통령 후보감이 될만한 새로운 정치인을 발굴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표의 핵심은 반드시 ‘국방비 삭감’이어야 합니다. 시민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1997년에 제정된 국방수권법 제1033조를 비난하여 왔습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군대의 전술적 장비를 경찰조직에 전용할 수 있으며, 경찰은 이에 따라 철갑차량과 SWAT(대테러 특수기동) 대원들을 동원하여 시위하는 시민들과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하와이 상원의원인 브라이언 샤츠는 1033조의 즉각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시위대 앞에 왜 군대가 무리한 장비들로 과잉 무장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할 시점입니다. 화염을 내뿜는 탱크들과 전쟁무기들이 미국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가장 빠른 길은 군대에 과다한 재정이 투입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저지하는 것입니다. 군의 예산이 축소되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군대를 경제적이며 또한 도덕적이고 명예롭게 운용하는 것에 대해 보다 신중하고 명료하게 숙고하게 될 것입니다.

군대조직은 또한 국내의 사회 저투자(disvestment)와 가난을 직접적으로 악용하고 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군대인원의 보충부서는 가난한 계층과 빈곤 가정에 각별히 공을 드립니다. 2004년의 경우, 미국 군인들의 2/3가 중위 이하의 가정에서 충원되었습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반건강보험의 혜택을 받고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종입니다. 반면에 정부는 가난한 계층과 소수인종의 집단에게 교육과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정부는 함께 사는 이웃흑인들을 수시로 불러 세우고 괴롭히는 경찰조직에 마구 돈줄을 제공합니다 동시에 예산이 넘쳐나는 군대조직은 가난한 계층에게서 필요한 인원을 보충하면서 미국이라는 끝나지 않는 전쟁터에서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서로에게 총질을 하도록 역할을 합니다.

미국은 한 해에, 중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국방비를 넘어서는 1,150억불의 예산을 경찰조직에 쏟아 붓습니다. 이에 더하여 차기 순위의 10 개국의 모든 국방비를 합한 것보다 많은 7,320억불을 국방예산으로 지출합니다.

경제적 선택은 동시에 도덕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경찰예산 삭감을 요구하는 활동가들과 시민들은 세금으로 사람을 무기와 탱크로 무장시키는 미국의 모습이 불가피한 필연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 국방비의 과다지출을 비난했던 과거의 주류 정치인들은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다시 불러 세워야 합니다.

“경찰예산을 삭감하라, 국방비를 삭감하라 – 평화와 평등과 희망에 투자하라.”


참조자료

World BEYOND War의 대표, 데이비드 스완손 제공.

AOC를 포함한 몇 명의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3,500억불 규모의 국방예산 삭감 법안을 6월 초에 제출하였다. 이는 미연방의회 사상 최대의 삭감제안이다. 아래는 제안서의 마지막 문장이다.

연방의회는 전쟁을 우선시하고 있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전쟁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 경제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위에 상세히 제시한 바처럼 현재의 국방예산에서 3,500억불의 상당액을 삭감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해당 재정기금을 외교적 역량을 증대하고 국내적 필요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에 사용하여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제안된 삭감의 상세항목들 (영어 원문 그대로 게재합니다) :

(1) eliminating the Overseas Contingency Operations account and saving $68,800,000,000;

(2) closing 60 percent of foreign bases and saving $90,000,000,000;

(3) ending wars and war funding and saving $66,000,000,000;

(4) cutting unnecessary weapons that are obsolete and saving $57,900,000,000;

(5) cutting military overhead by 15 percent and saving $38,000,000,000;

(6) cutting private service contracting by 15 percent and saving $26,000,000,000;

(7) eliminating the proposal for the Space Force and saving $2,600,000,000;

(8) ending use-it-or-lose-it contract spending and saving $18,000,000,000;

(9) freezing operations and maintenance budget levels and saving $6,000,000,000; and

(10) reducing United States presence in Afghanistan by half and saving $23,150,000,000.

 

출처 : Foreign Policy on 2020-06-15.

Noah Berlatsky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기고가

화, 2020/06/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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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최근 미행정부와 주한 미국대사 및 미군사령관 등의 발언과 행보는 대한민국이 군사적, 외교적으로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따라서 이제는 주한미군 주둔분담금의 인상을 논할 것이 아니라, 주한 미군의 대폭적인 축소와 궁극적으로 철수를 검토하고 요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서 눈부신 활동을 진행하는 ‘전쟁없는세상-WbW’의 미군 해외군사기지 철수운동에 대한 입장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은, 외세의 3만 병력을 현지에 주둔시키면서 군대 주둔 비용 대부분을 대한민국이 부담하도록 강요당하고 있고 현지 주둔사령관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유엔에 거부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이들의 행위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 또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반면에, 대외세력(주한미군)이 동의하지 않으면 북한과 화해조차 할 수 없다.

해당 외세(미제국)는 지구상 거의 모든 국가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지구상 국가의 약 절반에 중요한 기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전세계를 단순히 통제 또는 지배를 위한 관할 구역으로 나눈다. 외세는 군사적인 목적을 지니고 우주까지 지배하려 하고,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지역에서도 부를 창출(수탈)하기 위해 국제 금융기관으로 군림하기도 한다. 외세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기지를 건설하고 원하는 여러 국가들에 핵무기를 포함한 무기를 불법으로 설치한다. 그 점에 있어서 해당 외세는 언제, 어디서든, 법을 위반한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와 같은 중립국조차 미군에게 자국 공항 이용을 허가하고 미국 경찰들이 더블린(Dublin) 공항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미국으로 향하기 전에 수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아일랜드 내의 기업화된 언론들이 자국 내 수많은 사안을 문제로 삼고 비난할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아일랜드 내의 미군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섀넌 공항(Shannon Airport) 근처 광고판을 관리하는 몇 관련 기업들은 실제로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은 과거 ‘식민지’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이전 역사적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영국인 중심 초기 정착민들은 미국으로 ‘정착’하기 이전에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영국인들은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의 머리가죽에 대한 보상처럼 아일랜드인들의 머리 및 신체 부위에 대해 금전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이후 미국은 수십 년 간 자국에 ‘정착’할 수 있는 유럽의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다. 북아메리카 내 대량학살은 1890년대까지 미국 문화의 일환이었다. 한때 북아메리카를 선점한 프랑스가 영국을 격퇴시킨 전쟁을 아주 미화하여 기술하기도 하였으나, 식민(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식민침탈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를 기화로 그들은 서부지역을 침탈할 핑계를 얻었다.

미국은 북쪽으로는 캐나다, 남쪽으로는 스페인, 서부 개척을 위한 지역정부들, 그리고 끝으로는 멕시코를 침략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토지의 고갈은 미국의 식민지화 방식을 변화시켰지만 좀처럼 속도가 늦춰지지 않았다. 식민지화는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하와이, 알래스카, 필리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훨씬 더 먼 지역으로 옮겨갔다.

오늘날 미군 표현인 ‘인디언 거주지 Indian Country’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이름으로 명명된 수십 종의 무기로 공격당하는 원격지의 땅을 의미한다.

군사적 정복금지 조항이 생기면서 미국의 식민지화 방식을 또 한번 변화시켰지만 실제로는 식민지화를 지연시키기보다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으로 상대국의 영토 침략 행위에 대한 합법화를 종식시켰다. 즉, 식민 피지배국가는 해방될 수 있고, 다른 침략자에 의해 정복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후 설립된 초기 유엔총회 건물은 기존 국가를 위한 51석 외에 추가로 20석이 포함되도록 설계되었다. 건물이 건설될 때 75개 국이 참여했고, 1960년에는 107개 국이 참여했다. 그 이후로 200개 국으로 참여 국가가 빠르게 증가하여 일반인들의 참관을 위해 남겨둔 좌석까지 채우게 되었다.

비록 많은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독립국가가 되였으나 실제적인 식민지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영토정복이 여전히 허용되었고, 특히 주권적 독립국가들 내 주둔하는 미군기지에 대해서도 예외가 적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해군은 하와이의 작은 섬인 코호알라웨(Koho’alawe)를 신종무기 시험장소로 점거하고 거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이후 코호알라웨 섬은 황폐해졌다. 1942년, 미국 해군은 알류샨 열도인들을 추방했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과 다수 국가들이 저지른 것처럼 1928년 또는 1945년까지도 비슷하게 이어졌다. 1946년,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비키니 환초(Bikini Atoll) 내 170명의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섬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1946년 2월과 3월에 걸쳐서 트루먼 대통령은 원주민들을 쫓아냈고, 원주민들은 지원 수단이나 사회 구조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다른 섬으로 쫓겨나 난민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에네웨타크 환초(Enewetak Atoll) 내 147명의 원주민과 리브 섬(Lib Island) 내 모든 원주민들을 퇴거시킨다. 미국의 원자력 및 수소 폭탄 실험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주하던 섬과 사람들이 쫓겨난 섬 모두를 살기에 부적합 한 지역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모두 추방시키는 핑계를 제공했다. 미군은 1960년대까지 콰잘레인 환초(Kwajalein Atoll)에서 원주민 수백 명을 추방했다. 이에 에베예(Ebeye)에는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1941년부터 1947년 사이, 미 해군은 푸에르토리코 앞바다에 있는 비에키스(Vieques)에서 거주민 수천 명을 추방하고, 1961년에는 남아있던 8,000명을 퇴거시킬 계획을 선포했으나 2003년에 섬 폭격을 중단하게 되면서 해당 계획을 철회했다. 미 해군은 인근 쿨레브라(Culebra)에서 1948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 천명을 쫓아내면서 1970년대까지 남은 거주민들을 추방하고자 했다. 해군은 현재 화산 폭발로 인해 인구가 이미 감소한 비에키스 섬을 파간(Pagan) 섬으로 대체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반환해야 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50년대까지 계속해서 오키나와 인구의 절반인 25만 명을 그들의 영토에서 추방하여 강제로 난민 수용소로 보내면서 땅과 재산을 약속했으나 지급하지 않은 채 오히려 수천 명을 볼리비아로 일방적으로 실어 보냈다.

1953년 미국은 그린란드 툴레(Thule)에서 이누구이트인 150명을 추방하기로 덴마크와 합의했고, 이누구이트인에게 떠날 시간을 4일 주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도저와 맞서야 할 것이라며 협박했다. 이누구이트인들은 돌아올 권리를 현재까지 거부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작년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그린란드 매입을 제안할 때 당연히 분노를 느끼지만, 미국 시민 대부분은 미군이 그린란드에 어떻게 주둔하고,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모르고 있다.

미국과 영국 즉 그레이트 브리튼은 1968년에서 1973년 사이에 디에고가르시아 거주민 1500명에서 2000명 모두를 추방했다. 거주민들은 한데 모아져 배에 태워졌고, 그들의 반려견은 가스실에서 살해되었고, 디에고가르시아 섬 전체는 미군의 사용을 위해 점거되었다.

2006년, 미국 본토 내 군사 기지 확장을 위해 미 해군은 대한민국 정부에 부지를 요청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요구에 따라 해당 지역(평택)의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퇴거시켰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에 또 다른 대규모 군사기지를 제공하기 위해 제주도 내 마을(강정), 해안가 및 농지 130 에이커를 황폐화시켰다.

이탈리아, 니제르 또는 그 외 여러 지역의 모든 새로운 군사 기지는 해당국가 내에 주둔함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을 추방한다. 그리고 모든 군사 기지에서는 해당국가의 주권, 독립, 법규를 무시한다. 걸프 지역국가(통치자)들은 미군 기지의 도움으로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그러한 과정에서 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의 지위에 자국의 법규보다 우선권을 부여한다. 이렇듯 미군기지가 일정 지역에 주둔하게 되면, 주둔 자체로 해당 지역민들에게 미국과 지방 정부를 향한 적대감을 선동한다.

미군기지는 영구적인 주둔의 목적을 지니고 있고, 그들이 개입하고 있는 전쟁 중 일부 또한 명백히 영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미국 언론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끝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 처럼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트럼프가 실제로 전쟁을 종결할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걸프 지역 내 아직 미국의 영향력 밖에 놓인 일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난 3년간 미국 정부가 지속해온 ‘영구적인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와의 전쟁상태에 직면해 있다.

미국만 유일한 식민제국의 국가는 아니지만, 미국은 전 세계 외국 군사기지 중 약 95%를 보유한다. 그리고 미군기지는 자신의 절대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운영된다. 시민 단체 ‘전쟁없는세상-WbW’은 미국정부가 국제적으로 법치주의를 존중하고 더 이상의 전쟁을 중단하도록 하는 방안이 해외군사기지의 폐쇄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에 새로운 군사기지 창설을 반대하고 기존 기지의 폐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고, 이미 많은 기지들이 중단되거나 폐쇄되었다.

본 시민단체는 군사기지와 식민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공공교육과 비폭력적 실력행사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군사기지가 야기하는 환경 피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미군기지는 수많은 국가의 지하수를 ‘지속되는 화학 물질’로 오염시켰으나 해당 국가 및 관련 당국은 지역 내 보상 또는 통제에 대한 모든 권리를 거부당했다.

또한 본 시민단체는 미식민주의자들의 선전을 역으로 뒤엎을 수 있는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지역에 미군기지를 두게 되면 어떻게든 미국이 더 안전해진다는 식의 설명이 행하여지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본 단체가 지지한 법안이 최근 미 연방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을 통과하지 못해 폐기되었지만, 해당 법안은 미 국방부에게 해외 군사기지가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안보에 아무런 효과가 없기보다 어떻게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보고서의 제출을 요구한 것이다. 해외의 군사기지는 군사기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보다 식민지 본국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이러한 보고서 연구과정을 통해 폭로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이라크가 요구한대로 즉각적으로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폐쇄해야 할 기회가 생겼다. 전세계 및 미국 시민들은 해당 요구가 실현되도록 이라크 국민들과 함께 해야 한다.

 

데이비드 스완슨(David Swanson)

‘전쟁없는세상World BEYOND War)’ 설립자 겸 상임대표

토, 2020/02/0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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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10년(decade)의 시작에 들어 왔다. ‘2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20년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매 10년은 더 포괄적인 역사적 서술로 엮인 저명한 상징, 사건 및 주제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주어진 사건 또는 발견의 이면에 있는 요소들이 더 오래 지속되거나 깊이 뿌리 박혀 있을지라도 말이다. 예건데, 세계는 1940년대를 전쟁 및 파멸의 시기로, 1960년대를 반체제 문화 및 반항의 시기로, 1990년대를 새로운 ‘현대성’의 시기 등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2010년대를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 필연적으로 역사는 항상 나중에서야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현재의 대답은 불가피하게도 미완성이다. 우리는 세계가 아직 이루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미래 역사가들이 회고할 수수께끼에 오늘날의 사건들이 어떻게 ‘들어맞을지’ 확실히 예상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2010년대의 10년사가 1991년에 구축된 ‘자유주의적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로 개념화되어 역사의 예비 전환점(preliminary turning point in history)으로 회고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통합 및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흐지부지 사라졌다.

온라인 대중 매체가 부상하면서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도록 촉진되었고, 성난 반체제 정치 및 정체성 갈등이 뒤끓던 서구에 새로운 형태의 불만을 매개했다. 세계화는 역행했고, 10년이란 시간은 한 때 역사에 국한된 것으로만 여겨졌던 거대한 패권 경쟁이 재현됨에 따라 결국 퇴색되었다.

2010년대는 ‘소셜 미디어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정식으로 출시된 시기는 그보다 10년 전이지만,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및 기타 미디어는 스마트폰이 등장함에 따라 세계 문화로 확고히 통합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최근 몇 년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로 이 장치 곧 스마트폰은 수십억의 인생을 영구적으로 바꾸었고 기존에 시간 할당제로 편리함을 주었던 인터넷을 일상 활동 자체의 본질적 요소로 이에 맞게 편리해질 수 있도록 탈바꿈시켰다. 소셜 미디어는 그 자체가 없는 상황을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사회에 융합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중 소셜 미디어의 부상에는 심오한 정치적 영향이 있었다. 기존 언론매체를 벗어나,이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견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과 방식이 생겼다. 그 동안 자주 소식을 접할 수 없던 사람들도 오늘날에는 수백만 명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신문,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매체를 넘어 사람들의 정보원 및 연락망이 다양해졌다.

자연스레 이러한 매체가 없었다면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되었을 이들이 새로이 불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2008년 서양 국가들에서 벌어진 금융위기라는 사건과 뒤따른 긴축 재정에 대해 사람들이 소식과 견해를 공유하면서 분노하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정치가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정치가 양극화되고, 좌파 및 우파의 새로운 움직임이 대중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1991년 이후의 소위 ‘자유주의적 합의’가 산산조각이 났다. 새로이 부상한 포플리즘 운동은 현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엘리트 계층과 권력 계층을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선거 결과를 야기했다. 이제 ‘중도 정치’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2010년대는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등으로 기억되는 시대가 되었다. 확실하게 인지된 세계화의 불확실성 속에서 급속히 형성되는 대중의 불평을 무기 삼아 나타난 현상들이다.

미국 내 변화는 지정학적 파급력을 지닌다. 이른바 1991년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서구의 승리가 더 이상의 영향력을 상실하자, 변화하는 세계를 중심으로 엄청난 불안과 불확실성이 자리잡았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문제, 불평등 및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새로운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부상하는 포플리즘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조직적으로 자리잡도록 악용하였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트럼프 대통령의 부상이 러시아의 잘못이며 모스크바가 소셜 미디어의 거대 기업을 활용하여 편집증을 유발시켰다고 비난했다. 이런 대외 의혹 풍토 속에서 정작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중국에 대한 공포와 미국의 ‘강대국 패권 경쟁’의 부활을 조성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라는 문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2010년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은 2010년대가 불확실성과 불안정의시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고 시사한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으로 소셜 미디어 문화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성난 포플리즘적 민족주의로 변모한 서양사회에 새로운 불안정을 초래했다.

미국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점점 더 편집증적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공격적으로 두려움을 유발하고 지정학적 투쟁을 추구하며 오랫동안 유지된 팍스-아메리카나를 여전히 갈망함으로써 실패로부터 벗어나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톰 포우디(Tom Fowdy)

중국 국영방송 CGTN 칼럼니스트

옥스포드 대학교의 중국학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더럼 대학교에서 정치학 전공

목, 2020/01/1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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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하였고, 9월 9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이 한 달 동안 한국 언론은 조국 법무부장관후보에 대한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검증보도를 하면서 이번 사건의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검찰도 국회인사 청문회가 끝나던 그 시각에 조국 신임장관의 부인을 기소함으로써 또 다른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정치권과 언론, 검찰이 플레이어가 되어서 만든 조국 이벤트는 광화문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주최 측 추산 2백만 혹은 3백만의 시민을 끌어내는 마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을 광장으로 호출한 블록버스터급 흥행성공에도 이벤트의 주역인 언론과 검찰이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검찰은 연일 검찰의 잘못된 수사관행, 수사와 기소독점, 불공정한 검찰권 집행 등의 이슈로 궁지에 몰리고 있고, 언론 역시 부실한 사실검증과 편향된 보도, 의혹 부풀리기 등의 잘못된 보도관행으로 시민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조국장관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언론 검증 보도량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네이버에서 후보자 신분이던 한 달 동안 관련기사를 검색한 결과 적게는 13만 건, 많게는 80만 건이 검색되었다고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장관임명 직후인 9월 10~24일의 15일 동안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된 단독기사는 7개 종합일간지 99건, 7개 주요방송국 67건으로 총 166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단독보도 중 검찰 및 법조계를 출처로 하는 보도가 81건에 달하고 있다.

전례가 없는 이렇게 많은 기사와 단독보도들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조국장관을 둘러싼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정치권과 언론, 검찰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구체회되고 있다. 시민들은 지난 10년간 진행된 서울대 입시의 실태도 알게 됐고, SCI논문의 저자 적격성 기준도 알게 됐다. 동양대에서 조국장관의 딸이 어떤 봉사를 했고, 장관의 부인이 해명 과정에서 손을 떨었다는 사실도 안다. 심지어 장관 딸의 중2 때 일기장의 압수수색 과정과 압수수색에서 검찰이 먹은 식사메뉴까지 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의미와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추측한다. 이건 시민들뿐만 아니라 정작 보도를 하는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사는 ‘추측 된다’ ‘알려졌다’ ‘의혹이 있다’로 도배되어 있다.

언론 보도는 경우에 따라 ‘사실(fact)’이 ‘진실(truth)’을 감추는 경우가 생긴다. 격투기선수 출신인 K씨와 평범한 일반인 L씨의 싸움을 상상해보자. K씨와 L씨는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주먹다짐으로 벌였다. 당연히 격투기 선수 출신인 K씨가 L씨를 늘씬하게 두들겼는데, 이 과정에서 L씨도 저항하면서 K씨를 몇 대 때렸다. 다음날 기사에 L씨가 격투기 선수출신 K씨를 폭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면 어떨까? L씨가 K씨를 때린 건 팩트다. 그렇지만 사건의 실체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실보도가 아니며, 이런 뉴스가 바로 가짜뉴스다.

바람직한 보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있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성, 완전성, 균형성, 투명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에 기초해야 하며, 사건을 분절화 파편화해서 퍼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최대한 모두 그려야 한다. 또한 진실보도는 이해당사자 모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담아야 하고, 취재원이나 정보 소스에 대해서 가능한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기자들은 조국장관에 대한 보도가 과연 이런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 하고, 독자들 역시 이런 기준을 갖고서 보도를 접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조국장관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보도에 남발되고 있는 ‘의혹이 있다’, ‘전해졌다’, ‘짐작된다’, ‘예상된다’, ‘추정된다’ 등의 추상적 서술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보도가 가진 사실성은 끊임없는 사실확인, 팩트검증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다. 80만 건에 이르는 보도가 얼마나 사실확인, 팩트검증을 거쳐 작성되었는지 알 도리는 없으나, 보도된 내용 자체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보도가 얼마나 보도의 완전성을 추구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조국장관 일가에 대한 수십만 건에 가까운 보도들을 통해 조국장관 부인의 손에 떨렸는지, 압수수색이 몇 시간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검찰이 짜장면을 먹었는지 한식을 먹었는지를 아는 것이 사건의 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고, 이런 것이 단독이나 특종이라고 올리는 언론사들이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파편화되고, 분절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들이 혹시 본 사건의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치 백대 때린 가해자를 폭행당한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부리려는 의도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현재 조국장관 관련 보도에서 불편한 점은 균형성에도 있다. 우리는 검찰이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검찰의 행위를 공적인 행위 내지 중립적인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검찰이 기소를 하면 당연히 죄가 있으니까 국가가 나섰겠지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검찰은 소송의 당사자이다. 검찰이 사건 심판의 주체라면 굳이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검찰이 다 판결을 내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언론 보도는 당연히 검찰의 주장과 동등하게 피의자에게 반론권을 제공하는 것이 정당하다. 사실 이런 검찰의존의 관행을 깨고 법원내지 공판 중심의 보도관행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계 내에서도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검찰의존적인 취재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몰고온 논두렁 시계보도의 참극을 겪고도 여전히 언론은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도는 최대한 투명해야 한다. 보도의 내용은 언제나 검증을 통한 사실확인의 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검증과 재확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취재원이 투명해야 한다. ‘관계자에 의하면’이 남발되는 기사는 좋은 기사가 아니다. 최소한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고, 취재과정에서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검증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룰을 가진 세상을 살고 있다. 아무리 확실하고 논리적인 지식 내지 정보라도 타인의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지식이나 정보로서 인정되어서 안 된다.

기자가 진실보도를 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무한한 팩트 검증도 불가능하고, 사건 전체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보도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계적 중립은 가능할지 모르나 균형의 추는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취재원을 밝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취재원이 공개에 동의를 해야 하고, 취재원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자에게 진실보도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같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국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80만 건의 보도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80만 건의 보도가 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더 나아가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보루로서 언론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많은 시민들이 왜 기성언론을 불신하고 언론개혁을 이야기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휘두른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게 되었듯이, 이제 검찰을 개혁하고 나면 그 다음 우리사회의 특권과 반칙을 뿌리 뽑기 위해 개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언론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정완규

정책연구소 이음 선임연구원

화, 2019/10/1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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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화석연료 중심의 성장과 소비 경제모델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증가에 대한 반응은 미디어의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보도 차단과 교육과 정책토론에서의 심각성 경시풍조로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사회는 물론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헌신적인 기후 운동가들, 심지어 구속되거나 신체 부상을 입을 각오가 되어 있는 기후환경운동가들조차도 여전히 석탄이나 천연가스로 가열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디젤 동력 화물선과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트럭으로 배달되어 석유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야채를 먹습니다.

시위를 조직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사용되는 컴퓨터와 전화기같은 부품들도 석탄 및 다른 유독물질을 사용하는 인도, 중국, 태국의 공장에서 제작됩니다. 함께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연결시켜주는 인터넷을 작동시키는 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퇴직기금은 화석연료 수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회사의 주식에 묶여 있습니다. (관련성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음)

화석연료산업을 비난하는 시위표지를 작성하기 위해 석탄으로 가동되는 말레이시아 공장의 펜 부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과 석유연료를 사용하는 트럭과 비행기로 운송된 일회용 펠트펜을 사용한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환경시위는 숨겨진 진실에 대해 주목하지만 행진이 끝나면 우리는 화석연료를 피할 수 없는 악몽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육식을 선택 또는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와 성장의 파산 개념과 일치하는 산업경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화석연료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요건이 주어진다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시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화석연료와 전혀 연관되지 않은, 또는 관련한 산업으로 발생한 돈과 관련 없는 경제 체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것부터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것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도덕적 시민들의 시위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추출적이고 약탈적인 경제 질서의 중간에 있는 약간의 환경보호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대안 경제의 문을 열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시위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는 세계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화석연료를 100% 사용하지 않는(FFF) 지역사회 형성이어야만 합니다. 초기단계에서 100명 또는 500명만 지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성단위를 만든다면 대중에게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는 화석연료 사용금지에 기여하고자 하는 투철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언행을 일치 시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단지 슈퍼마켓의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플라스틱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써 말입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단계는 즉시 실행 가능합니다. 냉소적인 정치가들이 20년 30년 걸려 실행할 탄소중립 경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FFF 커뮤니티 창조

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은 초반에 상당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며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제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임계질량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FFF 커뮤니티가 음식, 에너지, 협동조합의 재정, 또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은행들에 대해 100% 독립적일수는 없기에, FFF 커뮤니티는 오늘날의 단체들이 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껏내며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설립 초기 단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는 전 세계의 다른 지역사회에 모델이 될 것이며, 화석연료와 관련된 자금 의존으로 인하여 실행단계에 옮길 수 없었던 저널리즘과 교육시스템을 생산할 것입니다.

소규모 FFF 커뮤니티가 다국적 투자은행 및 석유회사를 인수 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및 정치 플레이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수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화석연료 문제에 맞서는 데 있어 모호하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은 대안이 아닌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화석연료 사용 종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자료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에 제시된 2050년 탄소 중립 경제 창출은 터무니없이 늦은 시기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홍수와 폭풍, 해수면 상승, 사막 확산, 기아, 견딜 수 없는 폭염, 지구에 남아있는 부족한 자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인해 수십억의 인간(및 다른 종)이 죽는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몇 년 또는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주류 미디어는 기후 비상사태에 대한 시위와 정부의 선언문을 다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지붕 위에 태양 전지판이 설치되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식품을 현지에서 유기농으로 생산하고 태양열 및 풍력을 이용하여 모든 건물을 완벽하게 단열시키며, 100 %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중교통의 동력을 공급하게 하는 법률은 (시행은 고사하고)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와 서로를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FFF 제품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약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100% FFF 수송체계가 설립될 때까지). 만약 체포될 위험까지 감수하는 열렬한 환경운동가들이 있다면, 그 중 FFF 공동체에 기꺼이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멤버와 공동체간의 협약은 진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 구성원들과 커뮤니티 간에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효한 계약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FFF 공동체는 애초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피상적인 소비문화, 분열, 단편적 사고와 같은 문화에 일치하여 운영될 수 없습니다.

신규회원은 평생동안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공동체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FFF 커뮤니티에 자산을 위탁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형태의 깊은 사회적, 윤리적 약속 또한 가능합니다.

 

자본주의와 글로벌 농업: 포드(Ford)부터 몬산토(Monsanto)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화석연료해방 공동체(FFF)는 초반에는 작은 범위로 시작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지속 가능한 접근법을 채택했을때 어떠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해당 모델이 거의 없고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FFF 커뮤니티 경제의 핵심은 100% 유기농 식품을 생산해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수송하는 유기농 농장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지역사회의 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다양성이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화석연료 자유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음식들은 집, 옥상, 인근 빈 공간에서 재배되거나 지역 농장에서 들여올 것입니다.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서부터 해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웃과 함께 협력하는 행위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권력가나 재력가들을 로비하거나 환경 NGO 단체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화석연료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플라스틱,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생산된 제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운송 된 제품이 없는 상태)은 FFF관련자들에게 결정적인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래가 아닌) 농부와 시민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공동 시장에서 식품을 판매(또는 물물 교환을 통해 교환)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장은 화석연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교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기 농업 공동체는 전혀 급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기후를 파괴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계나 인공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공동체를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지만, 그들을 제외한 미국의 지역들이 세계무역과 연관된 산업화된 비정상적인 농업 생산 시스템을 수용하는동안 이 공동체들은 지속적인 경제를 추구해오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유기농업 방식은 농업과 유통에서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일자리를 제공 할 것입니다. 지구의 파괴에 기여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아 그 노력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행동입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음식 및 기타 물품에 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FFF) 운송수단의 창출입니다. 초기에 제공된 FFF 운송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심하게 제한적이더라도 시민들은 그것을 불쾌한 불편으로 간주하지 않고 도덕적인 용기의 서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정치인들은 천연가스, 전기 및 심지어 원자력이 당연히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FF커뮤니티의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제조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제조업에 관하여 완전히 다시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삶에 필요한 물품의 생산 및 사용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어떻게 물품들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하여 반드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박스럽고 사치품과 같은 제품들의 마케팅과 소비를 완전하게 종료해야 합니다.

FFF공동체의 제조업은 100% 현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지역 및 세계적으로 공동체를 연결 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100% 쓰지 않는 운송체계를 갖추기 전까지).

화석연료를 제거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물품을 사용을 줄여야 하며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있는 품목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0-50년 이상 지속될 책상과 의자, 책장과 도마, 셔츠와 스웨터, 컵과 냄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경제의 이러한 변화는 상업적인 소비 중심 문화의 종식과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제작된 제품에 중점을 두며, 이미지가 아니라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FFF 커뮤니티에서 이케아(IKEA)나 갭(GAP)과 같은 관련 상품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00% 화석연료 비사용 제품의 생산과 유통은 우리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에게 장기적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제조는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내구성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우리 환경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쟁, 자유 무역 및 산업화의 위험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장에 관한 잘못된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개념, 태도의 변화

FFF 지역사회는 화석연료에 관한 선전과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충실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기업의 사상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기술과 거버넌스의 진보적 혁신이 아니라 태도의 혁명에서 시작됩니다. FFF 공동체는 자동차를 홍보하고 분별없는 음식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가 없는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은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있어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위협임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짚 깔기, 유리 재활용, 금속 해체, 비료사용을 위한 인분 수집, 카트를 통한 식품 수송, 또는 (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자전거를 통한 전기 생산 활동이 엄연히 도덕적인 것이며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인식이 잡혀있는 문화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상업 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만족감과 즉각적 만족에 대한 숭배는 도덕적 철학, 절제, 겸손 및 정직한 선행으로써의 사회적 참여에 기초한 문화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하게 “진보적인”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겸허, 절제, 지적 및 영적 참여의 중요성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와 결부됩니다. 이러한 커뮤니티가 커질수록 전 세계를 지배하는 상업 문화에 대한 대안이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전기, 소비, 재산의 막대한 증가, 도시화 및 개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에 의해 인간의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현대의 관념에서 비롯된 잘못된 추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 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시스템 생성에 도전하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친환경화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에 입각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생산과 유통에 뿌리를 둔 경제의 겉치레적인 변화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화와(그리고 영화 전후에 나오는 광고들) 뉴스 보도에서 강조하는 현대화의 신화 뒤에 감추어진 체계를 반드시 가시화해야 합니다. 사회의 전반에 깔려있는 생각은 아이폰을 사용하고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비싼 자동차나 전용 비행기로 전 세계의 수도에서 수도를 누비는 사람들,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나르고, 공공장소를 청소하고, 우리의 식량을 재배하며 요리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무래도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되는 자원낭비, 화석연료로 인한 환경오염,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된 부는 상업적 미디어에서 마치 선량한 도덕적 행동처럼 보여집니다.

FFF 공동체는 부동산, 개인 재산, 소유권에 관한 오해 소지가 많은 개념에 대해 완전히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언론에 의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계약법과 기업 법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돕거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커뮤니티 회원 간 구속력 있는 계약이 없습니다. FFF 커뮤니티는 이러한 계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FFF 공동체에 가입하여 화석연료의 사용을 끊고자 하는 충성 서약이 회원자격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동산과 소수의 사람에 자본이 집중되기 전에 유럽, 아시아, 미주 지역의 농업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마을 계약과 동등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을 계약은 상징적이라기보다는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각 개인이 식품, 도구, 가구, 운송 및 거버넌스의 생산에 기여해야하는 책임과 구성원들에게 평생동안 커뮤니티를 갖추어준다는 공동체의 책무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거버넌스 중심 환경과 인간 정착의 관계를 형상하는 이로쿼이 부족 (Iroquois Nation)의 헌법 부활은 금융, 재산권 및 부동산에 중점을 둔 법적 왜곡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됨.

현재 혁신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항의에 참여하는 동시에 화석 연료와 관련된 수익을 올리는 회사에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없애고 모든 투자가 지역사회 활동과 관련이 있고 FFF 경제 창출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해야합니다.

FFF공동체 회원가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어야 하며 자산, 교육 수준, 문화 감수성 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Teslas를 구입하거나 태양 전지판 패널을 구입할 수 있는 상류・중산층 사람들에게 포커스된 녹색 경제가 인류를 구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과 주변 매체를 통하여 기후위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빈곤층과 노동 계급에게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응답에 참여한 대가로 양질의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 디너, 억만장자의 기부 및 기타 활동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연설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만의 FFF 화폐를 만드는 것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화폐는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나타내며 지역 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및 기타 제조 제품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사용에 극히 제한적일 지라도 이 통화가치는 화석연료와 연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즉, FFF 화폐는 지역경제 전반에 걸쳐 사용이 확대되고 결국 세계경제로 확장됨에 따라 화석연료와 연결되지 않고 유사한 독립적 인 금융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세계무역과 기후변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침묵입니다. 투자은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구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탄소배출과 공장지대 설립을 위한 산림 및 정글파괴, 자연을 희생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공장의 설립으로 인해 엄청난 환경의 파괴를 가져다줍니다. 세계 무역에서 추진되는 식량(특히 육류)의 비생산적인 대량 생산은 토양, 산림 및 강과 바다에 장기적인 피해를 줍니다. 또한 식품 및 제품의 생산 및 유통에 대한 산업적 접근 방식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전례 없는 부의 집중을 조장하였습니다. FFF공동체는 시민들에게 이 파괴적인 악몽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최초로 제공합니다.

 

결론

우리는 미디어와 토론회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관행을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배출량은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탄소 발자국이 적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쟁을 목격하곤 합니다.

개인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데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경제의 깊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매일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특정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세계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문화는 즉, 최선의 길은 두 가지 전략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선택을 지역 사회의 선택으로 만들고 그 지역사회를 대체 경제의 기초가 될 경제 단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화, 2020/03/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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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경쟁상대로서 중국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자는 아래의 칼럼 내용이 대부분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행간에는 여전히 중국에 대한 공포와 일방적 혐오가 짙게 깔려 있다. 수천년 전래의 역사라는 바탕과 반식민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인민의 절대적 지지에서 탄생한 현대중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레닌주의 또는 스탈린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서구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의 한계이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회자되면서 불안한 미국을 추월하기 직전이라는 의견이 여기저기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중국은 세계 경제성장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자 제1의 무역대국이며 외국인 투자자가 선호하는 대상국가입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무역 및 투자거래를 체결했으며 21세기 최대규모의 개발 프로젝트인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를 활용하여 세계 곳곳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각국에 감시장치를 수출하고, 5G 통신네트워크의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이버 기능을 사용하여 민감한 정보를 확보하면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관민융합을 통해 최첨단의 역량을 개발하고 미국의 동맹이웃들을 괴롭히는 등, 경제와 정치적 저울추를 이제 군사력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호주, 인도 및 대만과 같은 동맹국과 파트너 그리고 국내에서는 홍콩에서 신장에 이르기까지 강압적으로 단속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미국과 민주정부국가들의 비판에 거의 무관심합니다.

중국성공의 스토리 라인을 가장 열렬하게 공급하는 기구와 조직에는 중국정부 산하 언론매체가 있습니다. 신념적 확신을 내세우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과 미국의 기능부전 장애의 많은 사례들을 대조하며 홍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연방의사당을 습격하는 반란군의 이미지를 “서구 민주주의”의 붕괴의 증거로 제시하며, 텍사스의 정전기간 동안 식수를 위해 줄을 서있는 미국 시민들의 이미지를 과장합니다. COVID-19를 “퇴치”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한 중국의 성공을 자랑스레 평가하는 반면,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들은 여전히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음을 부각합니다.

시진핑 중국주석은 지난 가을 공산당 제5차 총회에서 연설에서 “시간과 역사의 흐름은 우리 편이다라고 선언하였으며, 올 1월에는 중앙정법위 비서장인 Chen Yixin은 중국공산당의 연구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동양의 굴기와 서양의 몰락은 시대적 대세이다.”

권위주의 시스템은 자신들의 강점을 드러내고 약점을 숨기는 데 탁월합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중국이 제시(과장)하는 이미지와 실제의 현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강력한 국가이며, 제2차 대전 이후 직면한 가장 강력한 미국의 경쟁자입니다.

반면에 미국은 눈에 띄는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미-중 관계에서 더욱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직면한 여러 장애물보다 중국이 해결해야 할 장애물들이 훨씬 많습니다.

냉전기간 동안 제임스 슐레진저 전직 국방장관은 “10피트의 거인 증후군”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당시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소련이라는 경쟁자들을 엄청난 힘과 압도적인 지성을 지닌 우뚝 솟은 거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유사한 증후군이 오늘날 중국을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시각은 분석적인 실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고 강점에만 집중하면 불안이 생깁니다. 불안은 공포감을 낳습니다. 공포감은 과잉 반응으로 이어지고 과잉 반응은 미국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나쁜 결정을 유도합니다. 중국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 중국에 대한 대응정책을 올바르게 만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중국체재에 대한 성급한 판단

중국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을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왔습니다만, 냉전 이후 상대국가로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미국의 지도력에 대해 심각하게 경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군사력과 경제적 비중, 국제사회에 대한 야망의 조합 등으로 중국은 냉전기간 동안 상대하였던 소련과는 매우 다르며 복잡하고 어려운 도전의 상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중국은 수정주의적 야망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요건데 국제시스템의 권력분배, 아시아의 안보질서, 국제기구의 역할과 분담, 국경을 넘는 무수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기존 국제질서의 자유주의적 특성에 대한 수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레닌주의적 정치모델과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이 받아들여지고 존중되기를 원합니다. 국가주권의 존중을 기반으로 영토경계의 개념이나 내정관리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서 전기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많은 첨단기술에서 세계적 리더가 되겠다는 국가목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직선 방향의 길로 전진할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 중국이 미국의 이익에 제기하는 도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중국의 강점과 취약점을 함께 평가해야 합니다. 시진핑 주석과 동료들은 전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로부터 냉담한 거부감이라는 반응에 직면해 있습니다.

 

미국은 미중 관계에서 여전히 우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의 앞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고 성장을 저해하는 경제의 펀더멘털이 악화되는 회색사회(인구노령화)가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노동가능인구는 이미 줄어들고 있습니다. 2050년의 중국은 현재 퇴직자 1인당 근로자 8명에서 퇴직자 1인당 2명으로 축소될 것입니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화되고 기술을 채택하여 제조업의 효율성을 재고할 수 있는 장점에 기반한 생산성향상을 이미 대부분 성취했습니다.

중국은 인프라에 투자할 추가(효과)적인 자원이 부족하고 부채수준이 높아지면서 성장경로가 더욱 복잡해질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중국의 부채는 2008년 GDP의 141 %에서 2019년 300 %로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한편, 권력이 시주석 주변으로만 집중됨에 따라 정치체제는 점점 경화되고 있습니다. 한때 관료주의적 능력으로 유명했던 중국공산당은 레닌주의적 경직성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많은 결정이 베이징에 집중됨에 따라 지역정책의 실험을 위한 재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스템의 하향식 특성으로 인해 공무원이 과거의 결정을 재검토하거나 정상의 책임자에게 나쁜 소식을 보고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역동성의 저하가 우한에서 코로나-19 발생에 대한 조기대응을 지연시키는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앙지도부는 극심한 빈곤을 완화하는데 확연한 성과를 얻었지만, 권위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을 단속하는데 점점 불안을 느끼면서 타협을 거부할 것입니다. 지방의 자치성 에 중앙의 의지를 강요하는 베이징의 엄격한 요구가, 신장을 포함하여, 예상치 못한 미래의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중국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에 엄청난 장애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국의 국내적 탄압, 일부 국가들에 대한 강압, 코로나 전염병을 둘러싼 초기의 세부사항을 숨기려던 노력 등으로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견해를 불러왔습니다.

2020년 10월 Pew(미국의회의 초당적 기구)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은 국가에서 사상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중국은 또한 경제불황과 고령화 사회의 수요 증가로 인하여 향후 몇 년 동안 대규모 해외공사 이니셔티브(일대일로)에 대한 예산에 제약이 가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의 군사력은 상당기간 중국 주변지역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제약을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지구적 규모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과 더불어 군사력은 초강대국가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항목입니다.

중국은 독특하고 도전적인 지역조건에 직면해 있습니다. 14개 국가와 국경을 접해 있으며 그 중 4개 국가는 핵무장을 하고 있으며, 5개 국가는 중국과 영토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역시 고령화되었지만 부강한 일본, 발전도상의 민족주의적 인도, 혁명적인 러시아, 첨단기술이 강력한 한국, 역동적이고 단호한 베트남이 포함됩니다. 이런 주변 국가들은 중국의 이익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강한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식량과 에너지 안보에 있어서도 취약합니다. 인구전체에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기에는 경작지가 부족하고, 에너지도 중동에서 석유수요의 절반 정도 수입합니다.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의 해군능력이 아직은 필수보급품의 단절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이징 당국은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 쉬운 해결책은 없습니다.

 

미국의 자신감을 위한 사례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에 대한 미국의 초당적 강경대응은 무엇보다도 베이징 당국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중국지도자들은 야망을 추구하는데 참을성 없는 공격성을 보였으며, 특히 민족주의에 의지하면서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성과가 사회적 결속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 측은 오히려 중국의 강점에 대한 공포감이 커지면서 미국 내에 불안정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습니다.

그런 공포감은 미국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중국이 강해진다는 위기감 때문에 미국은 자기자신을 강하게 키워야 하다는 가장 본질적인 일을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중국이라는 위협을 이용하여 국내개혁을 촉진하거나 국내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이익보다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내에서 중국이라는 위협을 부풀리는 것은 문제를 정치적으로 무기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도록 유도할 것이며, 야심찬 정치인들이 상대방 반대자들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중국이라는 현안을 악용하려 할 것입니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접근방식은 동맹국 및 파트너와의 분열을 확대할 것이며, 이들 대부분 중국이 실존적 위협이라는 미국의 견해를 공유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 해를 끼치려는 정책의 노력은, 미중 간에 협력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들(예로서 기후위기)을 방해하면서, 오히려 미국자신에게 더욱 불리하게 될 공산이 있습니다.

 

중국이 직선적으로 손쉽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는 예측은 성급한 것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정책은 이러한 역학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중국수입품에 대한 관세는 불공정 거래관행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반영하여 중국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에게 원하는 경제변화를 강요하는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고, 무역적자의 증가, 미국농민에 대한 손실로 인한 280억 달러의 구제금융 및 약 245,000개의 일자리 퇴출 등 오히려 미국에게 많은 손해를 끼친 중국의 보복을 촉발했습니다.

미국은 중국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가질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경제의 규모는 여전히 중국보다 7조 달러(팬데믹 이후 5조 달러 이하로 축소된 것으로 추정) 앞서 있습니다. 미국은 에너지와 식량안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인구통계학적 구조, 세계최고의 고등 교육 시스템, 세계기축통화라는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인접국가와 평화로운 국경과 매우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누립니다.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경제를 자랑하며 전통적으로 세계최고의 학문적 풍토 그리고 최상의 아이디어에 대한 후견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명하고 예측이 가능한 법률시스템과 잘못된 경우 이의 수정을 촉구하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이러한 기능들이 없습니다.

미국인의 자신감으로 중국의 부상에 대하여 꾸준하고 인내하며 현명한 대응을 촉발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은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접근방식의 여러 항목들은 중국과 더불어 글로벌 질병감시의 네트워크 구축 및 글로벌 경제의 탈탄소화와 같은 초국가적 과제 해결에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추진하면서도, 미국의 이익과 가치에 도전하는 중국의 행동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커트 캠벨(아시아 정책의 짜르)과 제이크 설리반(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장했듯이, 공존이란 경쟁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조건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냉전초기에 George Kennan이 말했듯이 “자신의 최고 전통(강점)을 측정하고 위대한 국가로서 유지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미국이 21세기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준비가 잘된 국가라는 자신감을 회복할수록, 중국의 발전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자신의 중요한 부분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국력의 강화. 중국과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워싱턴은 미국의 역동성, 국제적 명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로벌 동맹 및 파트너십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파워의 진정한 열쇠이며 중국이 결코 이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출처 : Foreign Affairs(포린어페어) on 2021-03-03.

Ryan Hass

Brookings Institution의 외교정책 연구책임자이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한 이후, 2013 년부터 2017 년까지 국가안보위원회의 중국담당 이사를 역임했음. Stronger: Adapting America ‘s China Strategy in a Age of Competitive Interdependence (Yale University Press, 2021)의 저자.

수, 2021/06/0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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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 기사는 전 CIA 테러 대응 전문가이자 터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서 19년간 근무한 군사 정보 장교인 필립 지랄디 (Philip Giraldi)가 작성했다. 지랄디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CIA 지국장이었고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 중 하나였다. 그는 워싱턴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의 가치와 이해 관계와 상응하는 중동 관련 외교 정책을 장려하고 홍보하는 옹호 그룹인 국가 이익 위원회(the Council for the National Interest)의 기조 실장이다.


미국은 명백히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란과 실제적 전쟁에 돌입했고, 양국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이란 중 어느 국가도 전쟁을 선포를 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리퍼 드론으로 바그다드를 공습하여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과 알 무한디스 친이란 민병대의 창설자를 암살함으로써 양국간 갈등이 오래도록 고조될 전망이다.

이란은 미국과 군사적으로 직접 맞설 수는 없지만 고위 군 간부의 죽음에 대응하지 않고 묵인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란의 보복은 일어날 것이며 그동안 테헤란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제한적 공격과 대리전으로 의심되어 왔던 행위는 이제부터 이란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더 심화된 행동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란이 상당한 현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만 전역이 위태로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동시에 테러리즘 카드도 꺼낼 수 있다. 이란은 중동에 걸친 대규모 디아스포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수 년간 미국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암흑기 속에서 전쟁 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란지역 내 미국 외교관, 군인, 심지어 관광객 그 누구도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공백기간’이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바그다드 대사관에 부분적인 철수를 지시했고, 체류 중인 모든 미국인들이 즉시 대피하도록 권고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중동 내 무익한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공약으로 2006년 대선에 승리했으나 이번사태로 자신은 거짓말쟁이임을 아주 분명하게 입증했다. 트럼프는 데탕트를 추구하는 대신에, 우선적으로 JCPOA(이란핵 합의)를 파기하고 이란에 대한 제재를 다시 도입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란은 처음부터 트럼프의 새로운 전쟁 금지 서약에서 예외가 되어 왔다. 이는 직접적으로 트럼프가 미국 유대인 공동체와 근친간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거나,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벤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가 제안한 요청을 수용한 탓일 수도 있다.

트럼프는 앞으로 벌어질 사안에 대해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 네오콘(neo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과 이스라엘인은 예상대로 결과에 환호하고 있으며, 친이스라엘 민주제도 수호재단 소속의 마코 더보위치(Mark Dubowitz)는 “빈 라덴 사건보다 더 중요하며 (이란) 정권에 엄청난 타격”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란 전문가’로서 더보위치의 자격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경우에는 어느 정도 옳은 주장을 펼친다. 솔레이마니는 이란 내에서 확실히 카리스마가 있고 저명한 인물이다. 그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내 대리전과 동맹국 사이의 주요 연락망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전 지역에서 이란의 가장 강력한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두보위츠는 군대 계급 내 어떤 누구도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솔레이마니의 보좌진들과 정보부의 고위 관료들은 확실히 그의 역할을 이어받아 수행할 수 있으며 정책을 이어갈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지난주 미국이 야기한 일련의 어리석은 공격은 해당 지역에서 미군의 철수를 앞당기는 것뿐이다. 미국 국방부와 백악관은 이라크 민병대 헤즈볼라의 소행으로 알려진 미국의 시설 공격 배후에 이란이 있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로 인해 시리아와 이라크 내 민병대 표적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촉발되었다고 밝혔다. 미군은 이라크 정부의 손님으로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델압둘-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아니다” 라고 부인한 이후에도 공격을 지속해서 강행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미국의 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란은 전 세계와 교전 중입니다”라고 전했는데, 이를 통해 백악관 관료들이 실제로 얼마나 무지한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최근 사건에 이란이나 이라크 민병대가 관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격을 통해 이라크 병사 26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바그다드 주재 대사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불가피해졌다. 해당 시위에 참여한 거리의 시위자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라크인 들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는 이란이 배후에서 일으킨 시위로 뒤집어 씌었다.

미국도 이라크 정부의 승인 없이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솔레이마니와 무한디스를 살해했으므로 이제 이라크 총리가 미군에게 철수하도록 요구하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이로 인해 결국 주변 국가인 시리아에 남아 있는 미군의 상황을 더 이상 옹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시작한 어리석은 전쟁은 누구의 이해관계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의 법칙에 의해 이 지역의 다른 아랍 국가들이 미국 군인, 선원, 해병대, 공군의 주둔을 재고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았고 미국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향후 몇 주간 발생할 미국인, 이란인, 이라크인들의 사망과 희생은 명백하게 도널드 트럼프의 책임이며, 그것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에게 대재앙이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몰락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부디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Philip M. Giraldi

전 CIA 테러 대응 전문가

 

본 기사는 아메리칸-헤럴드-트리뷴에 게재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화, 2020/01/0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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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정의되는 방침에 따라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모두 중국과의 재통합 이후 특별행정구역(SARs)으로서 50년간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두 도시는 중국령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된 행정, 입법, 사법 자치권을 통해 독자적인 국정을 관할한다.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정부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치권 보장이 끝나는 2047년에 과도 시한이 끝나고 나면 홍콩 도시의 미래는 중국에 귀속된다.

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중국 인민일보의 1면 논평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사무는 중국 내정에 속한다. 홍콩 문제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불허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브라질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는 변함없이 홍콩 문제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개입도 반대할 결의를 지녔다고 전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지난 11월, 홍콩에서 구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범민주당이 “전체 452의석 중 347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고 보도하며 18개 구 중 17곳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콩 구의회(DC)는 홍콩 입법회와는 다르다. 홍콩 구의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교통, 환경, 거주 환경과 같이 생계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수개월 간의 ‘반체제 반향’으로 인해 2015년 선거때 47%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71%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고, 투표 결과 또한 상당히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범민주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득의만만하자 유권자들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불만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2015년 이후 이번 선거전까지는 건제파가 지방의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친중 정당인 민주건항 협진연맹(민건령, DAB)은 기존 119석에서 줄어든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 또는 미국의 색깔 혁명 시도?

이제 민주파는 홍콩행정장관을 선출을 담당하는 선거위원회에서 중요한 대표성을 띄게 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식 폭력, 공공 기물 파손(반달리즘)과 혼돈 대신에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에 중국을 와해하려는 워싱턴의 양당 강경파들의 분노를 감안했는지 여부는 향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도시 거주민 대부분은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적인 상황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홍콩을 와해 및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또는 외부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면서 홍콩 도시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주에 미국을 “세계 불안정의 가장 큰 근원”이라 일컬으며 “미국 정치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세계적으로 중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대적으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관여하면서 다자주의와 다자 무역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이어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 간의 협력과 공영만이 올바른 길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패권주의적 목적을 위해 다른 국가에 대한 우세를 추구하고 상호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미국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지방 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현재는 철회되었으나 도시의 불안을 촉발시켰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이후로 홍콩특별행정자치구에서 처음 시행된 여론의 결과입니다.”

“지난 5개월 이상 동안 폭도들은 외부(미국)세력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화하여 사회 및 정치적 대립, 사회적 정서 내 균열을 일으키고 경제와 민생에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사회적인 동요는 선거 과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일부 폭도는 선거 당일에도 애국적인 후보를 교란했습니다.”

“오늘날 홍콩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폭력 및 혼란의 종식과 질서의 회복입니다.”.

신화통신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민일보 역시 투표율이 높았고, 개표 작업을 완료했으며, 의원 사무실 100곳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을 약간 더 언급했을 뿐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영자신문 차이나데일리는 야당이 승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뻔뻔스럽게 무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도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CIA에 의한 폭력, 공공 기물 파손, 혼돈 속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현재의 상대적 평온함이 회복되고 지속된다면 미국이 새로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기 이전의 휴지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보여준 무법천지의 배경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사회악이다. 그들의 어두운 세력은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변화를 꺼리는 마음에 의해 홍콩 시민들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Stephen Lendman(스티븐 렌드먼)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 연구자로서 글로벌리서치의 정기기고자이다.

월, 2019/12/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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