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경제충격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국연방의회는 기존의 2.9조 달러에 추가하여 지난 5월 15일 3조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재차 승인하였다. 연방준비제도 역시 미국의 200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규모와 빠른 속도로 자금을 경제권에 쏟아 붓고 있다.
밀턴 프리드만이 1963년에 행한 언명 “인플레는 단지 통화현상이다”는 여전히 적용이 가능하지만, 이를 심하게 비판하자면 “재화가 부족한 반면에 돈이 너무 넘쳐나는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했거나, 통화가 팽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물가는 목표치의 인플레 밑으로 유지되면서 이러한 경제적 통합운용이 광범하게 인정을 받아 왔다.
동시에 트럼프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수십 년 사이에 중국이 미국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였는데, 미국대통령이 지난 5월 14일 FOX TV와 인터뷰를 통해서 중국과 통상을 단절(decoupling)할 것이라는 협박을 공식화하였다.
트럼프가 실제로 미중 간의 단절을 추구한다면, 이는 미국경제가 하강국면에 들어서는 가운데 인플레를 자극하는 것이고, 미국의 경제와 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인플레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데, 공급사슬의 차단, 팬데믹 와중의 경제재개, 원유가격의 반등 등이 주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COVID-19이 가져오는 의료적 경제적 충격에 대응하여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구제지원법’에 의거하여 상기에 언급하였듯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조직에 6조 달러에 달하는 급진적이고 단호한 지원정책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2007-9년간에 있었던 금융위기의 지원 액수를 훨씬 능가는 수준이다.
지원정책에 대한 시행을 책임지는 연방준비제도에 의해 풀려나는 엄청난 부채는 분명히 추후에 상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다한 지원책이 코로나-19에 대한 지나친 반응이었을까? 혹시나 인플레를 자극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플레 발생의 여부는 정부의 결정에 의존한다. 긴축재정과 증세를 시행하면, 인플레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연방준비제도가 시행하는 ‘헬리콥터 모니’방식처럼 경제에 직접 돈을 푸는 방식은 인플레를 피하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화폐정책은 은행차입과 통화공급량을 증가시키면서 복합적인 수요를 촉발하고 인플레를 자극하게 된다. 부채가 증가하게 되면 재정적 압박이 발생하여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금리를 인하하도록 압박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예금자와 채권보유자를 불리하게 하면서 높은 인플레의 위험성을 가져온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과다한 정부의 부채는 국제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가용자본에 대한 초과수요를 만들면서 인플레를 유도하는 신호가 된다. 세계 1,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정부의 과다한 차입은 결국 미국에 하이퍼-인플레를 상당기간 불러 왔다.
이에 추가하여, 인플레에 대한 전망은 공급사슬의 차단과 경제활동의 재개 그리고 원유가격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봉쇄와 거리두기로 인하여 공급사슬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일부 국가들의 자국주의적 통상정책으로 안착되었던 국제적 수준의 공급사슬의 흐름에 장애가 발생하였다. 세계적 규모로 경제활동이 급속히 재개되면, 그동안 억제되었던 개인과 기업들의 소비활동이 되살아 나면서 인플레 압력이 형성될 것이다. 미 연방저축공사 FDIC의 조상에 의하면, 지난 1분기에만 1조 달러의 자금이 기업과 소비자에게서 은행의 예금으로 흘러 들어 왔다.
봉쇄가 해제되고 산유국과 동맹들이 산유량을 줄이기로 합의하면서, 석유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6월과 7월분의 미국원유 선물거래지수는 지난 몇 주간의 가격추락을 회복하고 있다.
더구나 세계화의 흐름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 인플레를 완화시켜 왔다.
높은 인플레는 경제를 망치는 기구로 이해되면서 미국대통령들에게는 이를 재난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인플레를 비유하여 “노상에서 만난 강도처럼 폭력적이며, 무장한 괴한이 사람을 내려치는 것과 같이 치명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수십 년간은 다행히 ‘인플레 안정기의 시대’로 불리며, IMF가 작년에 언급하였듯이 선진경제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발국가들도 인플레를 목표치 이내에서 관리했거나 혹은 적정하게 진정시켜 왔다.
그동안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져 왔던 “필립스-곡선”【1】 즉 인플레와 실업률의 반비례라는 공식을 벗어나, 낮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라는 산뜻한 관계가 붕괴되어 왔다. 솔직히 말하면 상기의 공식이 충분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골드만 삭스의 주장인 ‘실업률 1.0%의 저하는 인플레의 01 -0.2 %의 인상으로 연계된다’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필립스-곡선’의 공식과 달리 예외적으로 수평을 유지해 왔다. 2019년의 낮은 실업률이라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를 야기하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아져도, 인플레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미세조정(fine-tune)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인플레의 동력이 정말 무엇인지 당황해 하면서, 이를 야기하는 것이 시민들의 인플레 기대심리인지 노동시장의 변동 또는 공급측면에 의한 것이지 기술발전 때문인지 아니면 국경을 넘어선 공급사슬이 국제적 충격을 굴곡시키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 거래가 가격을 인하하고 사람들의 일상적 거래에 필요한 많은 서비스와 방식들이 무상으로 제공되면서 기술진보가 인플레를 억제할 수도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거시정책입안자들은 수십 년간 국제적으로 전개된 세계화가 (인플레 억제의) 보다 중요한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 세계화는 인플레를 낮추는 역할을 해왔는데 생산시설이 임금과 토지비용이 싼 곳을 찾아 입지하는 동시에 물류와 자본과 기술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공급이 원활해진 것이 배경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중 간의 경제 협력이 단절을 택하는 것보다 미국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
지난 4-5 월의 실업률을 보면 20.5백만 명이 실직을 당하면서 14.7%로 치솟았으며, 이제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듯 하다. 현대사를 살펴보면, 높은 인플레의 시대에는 급격한 정책적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브레튼우드 체제의 포기’와 ‘세계화에서 탈세계화로 전환’ 등이 그러한 실례가 된다.
트럼프가 미중 간의 결별을 시도한다면 양자의 경제협력이 망가지고 세계화 흐름이 역류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양국간 대립과 결렬이 진행되면 물가가 뛰어오르고, 각종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경제의 침체기 동안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트럼프 행정부는 결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1】 필립스곡선-편집자 주) 일반적으로 실업률과 화폐임금상승율(인플레)와는 반비례 곡선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특성을 활용하여 재정금융정책을 통하여 실업률과 물가안정 간의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립스 곡선의 특성이 작동되지 않는 딜레마 영역이 존재하며, 이러한 딜레마 영역의 탈출은 재정금융정책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과 강력한 독점금지조치 및 소득정책을 통해야 가능하다.
출처 : CGTN on 2020-05-21.
Huang Yongfu
캠브리지 대학의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다년간 유엔에서 근무했고 미중의 통상과 기술 및 금융 관련 전문가로 활약 중
2기의 시작을 알리는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출간된 것은 1998년이다. 앞서 말했듯 이 제목은 역설적이다. 분단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면서 분단체제 개념은 장기화되고 분단체제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2006년에는 “지금 돌이켜 보면” 분단체제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었다”고 하였다. 1987년 6월은 양국체제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분단체제의 양국체제로의 전환’의 가능성이 이때부터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의 강조점은 다르다. 이렇듯 일찍부터 분단체제가 동요하고 흔들리고, 더 나아가 허물어지고, 해체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럴수록 분단체제는 묘하게 더욱 장기화하고 그에 따라 분단체제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하는 이론적 메커니즘이 분단체제론 2기의 특징이다.
이 메커니즘의 숨은 비밀은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매우 높은 평가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두 사건은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나 역시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높게 평가하는 대목이 크게 다르다. 아무튼 ‘분단체제론적 고평가’는 1997년 발표한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에서부터 표명되기 시작하는데, 이 글은 1991~1994년 사이에 발표된 글들에서 보인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경계와 유보, 그리고 이를 전제로 한 소극적 인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입론의 첫 단계(1991~1994년)에서 분단체제론은 아직 분단체제극복운동과 현실과의 접맥점을 잘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접맥점이란 그렇듯 높은 목표를 갖는 분단체제극복의 경로와 주체를 구체화하는 것이 될 터인데, 첫 입론 단계에서는 아직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거나, “범한반도적 민중운동 …… 남북한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원론적 수준에서 언급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과 ‘남북한 민중연대’ 주장이 “남북한의 현실을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 (현실적 근거가 없는) 당위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이상론이 아닌가”라는 비판에 대해, “문제의식은 정당한데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구체적인 성과가 미미한 것과 문제의식 자체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당위론 내지 관념론·이상론이라는 것은 마땅히 구별해야 할 터”라고 소극적으로 변명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론적 시각에서 볼 때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남북한 민중연대에 기초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의 기준에서 한참 못 미침은 자명했을 것이고, 그래서 백 선생은 1991년 “유엔 가입을 포함한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의 성과”가 “반민주적 분단체제의 부분적 개량에 불과함이 명백하다”고 썼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량이요 개선이지 개악은 아니며,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과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덧붙였다. 소극적인 인정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긍정되는 묘한 표현과, 그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고 하는,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가 처음으로 명료하게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우선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했다’는 말은 명백하게 틀렸다. 사태를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들은 분단체제를 분명히 균열내고 흔들었다. 그 균열과 동요를 틀어막았던 것, 즉 진정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했던 쪽은, 그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의 효과가 북미・북일 수교로, ‘남북 양국(평화공존)체제’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내외의 냉전대결 세력들이었다. 어쨌거나 이 말에서 드러난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를 정리해본다면,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의거하여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가기 위한 이론’이 될 것이다. 이 독특한 함수관계는 몇 년의 숙고를 거친 후인 1997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을 얻게 된다.
통일을 향한 획기적인 한 걸음을 뜻하면서도 분단체제의 급격한 붕괴를 피하는 국가체제라면 비교적 느슨한 형태의 복합국가인 국가연합(confederation)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 북의 ‘연방공화국’ 제안이 영어로는 ‘confederal republic’(즉 국가연합 공화국)으로 표현되었고 1991년 남한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안에 국가연합 단계가 포함되었다는 사실들을 떠나서라도, 남북 간에는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이야말로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라는 면에서 그 어느 공동선언보다 실질적인 조치였으며, 이렇게 상호 인정을 나눈 두 국가 당국은 1991년 12월에 조인되어 92년 2월에 발표한 ‘남북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이미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다.
“통일을 위한 획기적인 한 걸음”으로서 남북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음을 언급하는 대목은 마치 분단체제론이 아니라 양국체제론의 논거를 펼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피상적으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중요한 점에서 인식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글을 쓴 1997년은 어떤 시간인가. 유엔 동시가입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반면, 북(DPRK)은 결국 미국, 일본과 수교하지 못한 채 매우 위축된 상황에서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이러한 상태를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매우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양국체제론의 시각과 분명히 다르다. 양국체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남북 양국 모두에서 내적 외적으로 안정된 인정구조가 우선 성립되어야 한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은 외부 세계가 남북 두 국가를 각각 정상적이고 온전한 국가로 인정하는 ‘양국체제의 외적 인정구조 성립’을 위해 중요한 일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고 불균등했다. 한국은 소련, 중국 및 동구권 모든 국가와 수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은 그러지 못했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위기에 처한 북을 압박을 통해 붕괴시키려만 했지 인정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많은 국가가 북과 수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과 북은 국제적으로 매우 불균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런 상태는 남북 간의 긴장의 소지를 오히려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 속의 남과 북 두 나라의 관계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미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안정된 평화적 동반 관계가 이미 달성된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분명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인식이었다.
양국체제론의 현실 인식과의 차이는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국체제론은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이제는 유명해진 구절인 “(남북 쌍방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표현을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본다. 나는 다른 글에서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란 앞서 분석한 ‘반쪽국가의식’에 정확히 상응하는 표현이다. 흔히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 체결된 <동서독기본조약>을 준용한 것이라 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상호 인정의 수준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크게 못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동서독기본조약>은 서문, 10개조, 그리고 2개조의 추가조항 전체에서 조약 쌍방을 정식국호인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라 분명히 칭하고, 두 국가가 주권과 영토를 상호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은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독일의 동방정책과 관련해서 이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표현을 조사해본 바로는, 1969년 10월 28일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연방정부 성명 중에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더라도 그 국가는 상호 외국이 아니며, 그 상호관계는 특수한 종류인 것”이라 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 성명의 핵심은 독일에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 두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닌 특수관계라는 뜻이었다. 먼저 국가로서 인정하면서, 그다음에 그 두 국가 간의 관계는 특수하다 한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one nation, two states) 간의 관계이니 특수하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동서독은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일반 수교국 대사보다 격이 높은 장관급 대표를 상호 파견했다.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 국가로서 인정하지도 않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고 거듭 확인까지 하고 있다.(이 책 1부 1장, 52~53쪽)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문제의 그 구절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남북 양 당국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외교적 언어로 봉합하거나 절충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비록 냉전이 종식이 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북을 인정할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양측만으로 종전(終戰)을 이루기 어려웠다. 아직 전쟁도 공식적으로 끝마치지 못한 상대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기도 하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미국과 별개로 독자적으로 북과 종전처리를 하고 상호 국가 인정까지 밀고 나갈 만큼의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북 역시 ‘남조선’을 곧바로 국가로서 인정할 만한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당시의 상황을 우선 모면하는 데 급급했지 장기적인 비전을 차분히 재정립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듯 남북 모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제약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수준의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비해 상호 인정의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불완전한 합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그것을 극복해갈 방향도 정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이 마치 오히려 더욱 높은 수준의 심오한 합의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표현은 그러한 혼란을 유발할 여지가 없지 않다.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라는 높은 민족적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한 결과,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려는 속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표현되었던 것처럼 과잉 해석될 수도 있다.(이 책, 53~54쪽)
앞서 인용했던 1997년도의 백 선생의 글이 바로 그런 과잉 해석의 두드러진 일례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바로 그 문제의 구절을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라거나, “연방제 통일로의 길도 열어놓았”고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일종의 연합관계를 추인”하는 것이라고 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고평가는 이후 글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한쪽(DPRK)은 ‘고난의 행군’에다 ‘핵사찰’의 압박 속에서 생사존망의 위기에 빠져 있고, 휴전선의 삼엄한 대치와 긴장은 여전한데, 그러한 상황에서 ‘연방제 통일의 길’이 이미 열려 있고 남북 간 ‘연합관계’가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실제 1991년은 그러한 ‘양국 평화공존 체제’의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열렸던 순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이 분열되고, 내외 냉전대결 세력의 힘이 압도하면서 금방 닫히고 말았다.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1997년에 돌아보면서 쓰는 글이라면, 그 가능성이 어떻게 열릴 수 있었으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빨리 닫히고 말았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지적하는 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훨씬 더 시의적절했을 것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1997년 쓴 백 선생의 이 글이 왜 그렇게까지 낙관적인 글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분단체제론을 초기 입론한 1994년의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의 한반도 정세와 분단체제론」에는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1992년의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에는 지나가는 말로 “남북 양쪽에서 제기된 국가연합을 전제한 민족공동체라든가 연방제, 연합성 연방제 등”이라고 딱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두 사건이 분단체제론의 입론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에는 이 두 사건에 대한 매우 높은 사후 평가가 분단체제론의 새로운 입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게 변화한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시기상 남북 화해와 통일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김대중 씨의 집권 가능성이 생겼다는 상황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든 짐작일 뿐이다. 그렇지만 순전히 이론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입론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미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 직후에 이 속에서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 그와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분단체제론 2기에는 ‘국가연합(또는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론의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 점이 1기와의 큰 차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연합이든, 구 소련연방 국가들의 ‘국가연합(CIS)’이나 유럽연합(EU) 등 어떤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의 연합이라 하면 먼저 국가 간 국가로서의 완전한 상호 인정과 정식 수교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국가연합을 이룬 나라들은 국가연합 이전에 당연히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한다. 우리와 같이 한 민족이 두 나라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이 두 나라(ROK와 DPRK)의 수교관계란 마땅히 일반 외국 사이의 수교관계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동서독도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양국에 대표부를 설치했고, 일반 대사보다 급이 높은 장관급의 대표를 교환했다. 그것이 양국체제고, 그것이 전제되어 있지 못한 국가연합, 즉 ‘국가 간 정식 수교관계 없는 국가연합’이란 도대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국가연합을 하자면 먼저 국가 간 수교가 당연히 선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먼저 밥을 지어놓아야 그것으로 비빔밥이든 볶음밥이든 만들 것 아닌가. 밥도 해놓지 않고 비빔밥 나와라 볶음밥 나와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당초 불충분하고 불완전했던 것이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였다. 이것이 양국체제론의 시각이다. 그러나 백 선생은 그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의 취지조차 그 후 북핵문제와 전쟁소동으로 빛이 바래버린 1997년에 이르러, 1991년에 남북은 이미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뤄졌고, 더 나아가 기본합의서를 통해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조건이 무르익은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이제 일로매진만 하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현실과의 실천의 접면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일로매진할 때, 앞서 1991년의 글에서 예고하였듯, ‘분단체제극복운동에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새로운 공간이란 ‘분단체제 장기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분단체제론은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이곳, 국가연합(남북연합)의 터가 바로 분단체제론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a! 동시에 바로 이곳이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출발점이다. 이곳에 출발선을 그은 이상, 이제 여기서부터의 한 발짝은 모두 지평선을 향한 한 발짝이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만큼 우리는 지평선에 가까워진다. 분명하지 않은가!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실체성, 실천성은 이로써 명확해진다.
백 선생이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기본합의서 서문의 구절을 1997년에 이르러 그토록 높게 평가했던 이유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분단체제는 하나의 체제다’라는 분단체제론의 명제에서의 강조점이, 이론 1기에는 ‘체제’ 쪽에 있었다면, 2기에는 ‘하나의’로 쪽으로 이동했다. 분단체제란 결코 둘일 수 없는, 둘이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체제다. 그렇다면 남북관계를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했던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표현은, 이렇듯 (나라 대 나라 사이의) 둘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관계”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성격을 지극히 절묘하게 표현해준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를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와 등치하게 된다.
앞서 최원식 교수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했던 표현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남북연합(국가연합)은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고 전제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고 ‘두 개의 나라’를 전제하는 양국체제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이런 사고법에서는 양국체제가 안정되어야 비로소 정책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통일로 가는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는 생각은 자리 잡을 데가 없어진다. 분단체제론이 국가연합과 함께 강조해온 남북 민중연대(또는 시민연대)도 양국 수교를 통한 안정된 민간 교류 속에서 훨씬 대대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가로막혀 있다. 다만 양국체제는 ‘국가연합과 연방제를 통해 통일로 직행하는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될 뿐이다.
분단체제론 1기에서 분단체제 개념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의 장기화와 분단체제극복 과제의 초역사적 보편화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2기에서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가 국가연합(남북연합)의 전제조건으로 상정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로써 분단체제 자체가 국가연합이라는 적극적인 실천목표와 어느덧 엉켜버린다. 국가연합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존속이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국가연합(남북연합)은 분단체체론의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초점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존속을 상정해야만 하게 되었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곤경(딜레마)’이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분단체제론의 출발에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었던 분단체제가 이제 ‘남북연합’이라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의 목표와 뒤엉키면서, 어느덧 분단체제 자체가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처음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환골탈태하고 만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역설(패러독스)’이라 했다. 이 분단체제의 곤경과 역설은 이론 2기에 이르러 이제 그 전모를 완연히 드러내게 되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올해는 여러 측면에서 지난 수십 년을 통해 인류가 처한 가장 최악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우리는 팬데믹 진행의 과정에 있으며 이미 삼십만 명이 희생당하고 수백만 인구가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상황이 종결되기 전에 추가로 수백만 명이 괴로움을 당할 것 같다. 세계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실업률은 극적으로 상승하고, 통상과 생산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는 등 단기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에 들어 메뚜기 떼의 창궐이 아프리카에 두 번째 나타나고 있고, 미국에서는 치명적인 독을 지닌 말벌들이 일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무지한) 미국 대통령은 치사를 가져올 약품을 만병통치라고 떠벌리면서 과학적인 조언들을 묵살하고 있다. 설령 상기에 언급한 일들이 마법처럼 내일 사라진다 해도 – 사라질 턱이 없지만 – 우리는 여전히 기후위기라는 장기적인 위협을 직면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이 나빠질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한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 전쟁.
따라서 우리는 팬데믹과 경제불황이 겹쳐지면서 과연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하며, 역사와 이론이 우리에게 어떤 답변을 줄 것인지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우선적으로 질병과 불황이 발생하면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1차 대전은 세계를 황폐화시킨 독감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18-19연간에 막을 내렸지만, 팬데믹은 러시아의 시민전쟁 (혁명)도, 러시아와 폴란드 간의 전쟁도, 여러 국가 간의 물리적 충돌을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1931년에 있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저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파시즘의 등장을 부추기면서 결국 세계2차 대전을 일으켰다. 따라서 단지 COVID-19와 동반하는 세계적 불황 때문에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판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MIT의 Barry Posen교수는 이미 현재 팬데믹의 충격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검토하였으며 그는 COVID-19가 전쟁 대신 평화를 증진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의 팬데믹은 주요 세력들에게 심각하게 타격을 주어 취약하고 붕괴되기 쉬운 상대 국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도발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반면에 모든 국가들의 정부는 중단기적으로 매우 비관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침략국가들이 과신 속에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맥락에서 팬데믹이 가져오는 비관주의는 오히려 평화를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은 본질적으로 훈련소와 군사기지, 집결장소, 바다 위의 전함 등에 사람들 다수가 집결해야 하는데, 팬데믹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러한 집결을 좋아할 시민들은 없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로 어려움에 처한 정부들은 자신들이 최소한 당분간은 최선을 다해 질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상기의 사항들이 매우 충동적이며 전쟁광인 사우디 황세자 모하메드조차 예멘에서 혈투를 벌리고 있는 실패한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Posen 교수는 CVID-19으로 인해 중단기적으로 국제통상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 추가적인 설명을 한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방지하는 중요한 장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통상이 줄어드는 상황에 대해서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놀라겠지만, 그는 최근 미국과 중국 간 마찰의 주요 원인이 통상이라는 주제였음을 강조하면서, 양국 간에 형성되는 통상 단절의 수준에 따라 긴장이 줄어들고, 전쟁의 가능성을 퇴조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보면, 팬데믹이 평화를 유도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가능성과 경제적 조건 간의 넓은 관계성은 어떻게 작용할까? 일부 독자들은 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이익을 증진시키거나 또는 집권자의 정치적 기회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깊고 장기간 지속되는 경제적 불경기가 심각한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이론 중에 익숙한 논쟁의 하나가 소위 관심돌리기 (희생양) 이야기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치지도자가 국민적 지지를 잃을까 염려가 되면 자신의 실패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외국과 위기를 조장하고, 심한 경우에는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가오는 대선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란 또는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미국시민들은 염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 이론 자체가 지닌 논리와 경험의 결함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다. 전쟁은 하나의 게임이며, 조그만 잘못되면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트럼프의 기울어가는 운명의 관짝(coffin)에 마지막 못질을 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할 만한 나라가 실재하지 않으며,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조차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수천 수만 명이 (팬데믹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이란 또는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더구나 전쟁행위가 성공을 거둔다 해도, 미국시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며 농력있는 국가들의 백신개발을 지원하고 촉진할 수 있는 시험과 추척의 레짐(testing & tracing regime) 분위기를 형성시켜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동맹이 될만한 다른 지도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전쟁에 관해 비슷한 류의 다른 이론은 “군사적 케인즈론”이다. 전쟁은 경제적 수요를 촉발시켜 불황에 빠진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내어 번영과 완전고용으로 이끈다는 논리이다. 세계2차 대전의 경우가 그러했고, 미국을 대공항의 모래수렁에서 구해냈다. 거대한 권력들이 전쟁을 일으켜 대규모 기업체(군수산업)을 지원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런 류의 논리에 동조하면서, 정부가 황량한 경제전망을 갖게 되면 군사적 모험을 통하여 경제를 재가동시킬 것으로 염려한다.
나는 대규모 전쟁이 과연 유의미하게 경제를 촉진시키는지 의심을 가지고 있다. 부채가 과중하게 증가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모든 위험을 감당하면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쟁을 하지 않고도 경제를 촉진시킬 수단이 많이 있으며, 예건데 간접 인프라의 투자, 실업보험 확충, 헬리콥터-모니(비정상적 화폐발행) 등, 전쟁은 선택할 수 있는 수단 중에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통상 전쟁의 위협은 투자자들을 위축시키는데, 이는 주식시장 부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경제적 불경기가 전쟁을 부추는 것은 매우 특별한 환경 속에서 일어난다. 특히 매우 즉각적이고 중대한 가치를 지켜내야 하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경우에 전쟁이 가능하다.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당시 이라크는 아란과 오랜 전쟁 끝에 경제가 엉망인 상태에서, 치솟는 실업률이 사담 후세인의 국내정치적 위상을 위태롭게 하였고, 쿠웨이트의 풍부한 유전이 이를 보상할 대상이었으며, 경무장한 상대국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용이한 상태이었다.
또한 이라크는 쿠웨이트에게 큰 부채를 지고 있었기에, 바그다그의 적대적 권력이 쿠웨이트를 장악하면 모든 빚을 하루아침에 청산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이라크가 처한 일촉즉발의 경제적 조건이 전쟁을 발발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지구상에 어느 나라도 이라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당장 러시아가 원한다 해도 우크라이나 전체를 장악한다거나,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매우 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나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을 갑자기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을 가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긴 시각에서 본다면, 경제적 불황이 지속되면 파시즘이 형성되고 민족혐오 운동을 야기하면서 자국 보호주의와 초국가주의를 부추기면서 국가들 간에 상호 수용할만한 협상이 점차 어려워 지면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경제적 공황이 국제정치를 파국으로 몰아간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1930년대의 역사가 그러한 추이를 형성해 왔다.
현재시점에도 국가주의, 민족혐오 그리고 전체주의적 지배가 COVID-19가 발발하기 전에 이미 부활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이 전세계적 규모로 경제적 비참함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추이가 강해지고 있어, 바이러스의 공포가 사라지면 전쟁을 일으킬 조건으로 우리를 몰아갈 수도 있다.
균형적으로 검토해 보더라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례가 없는 경제적 조건이 전쟁을 추동할 만큼 충격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선 불황이 전쟁의 원인이라면, 우리의 역사에서 훨씬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어야 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미국은 건국이래 40여 차례 이상의 불황을 겪어왔지만, 그동안 주정부 단위의 소규모 전투가 20여 차례가 있었을 뿐이고, 이들 대부분도 경제와는 무관한 전쟁들이었다.
경제학자인 Paul Samuelson의 주식시장과 관련한 유명한 빈정댐을 인용해 본다 ‘만약 불황이 전쟁의 강력한 원인이었다면, 이들 전쟁의 다섯(혹은 더 적은)경우에서 최소한 아홉 번은 미리 예측했을 것이다.’
두 번째, 국가들은 빠르고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없으면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다.
John Mearsheimer가 지신의 저서 ‘고전적 전쟁억지(conventional deterrence)’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쟁이 길어지고 피비린내 나고 희생의 부담이 큰 반면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면,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회피한다. 전쟁을 선택하려면, 쉽고 빠르고 적은 희생으로 확실한 승리 또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1914년 유럽이 전쟁에 돌입한 것은 쌍방이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며, 나치의 독일은 적국을 속이면서 손쉽고 적은 희생으로 이길 수 있는 blitzkrieg((전격) 전략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가 1980년에 이란을 공략한 것은 사담이 이슬람 공화국이 내부분열로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오판한 탓이었고, 조지 W. 부시가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면 신속한 승리가 확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정치 지도자들이 결정적으로 오판했다는 사실이 핵심이 아니다. 요점은 경제상황과 무관하게 재빨리 손쉽고 적은 희생으로 성공할 합리적인 가능성이 없다면, 지도자들은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동기는 안전보장에 관한 것이지 결코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배경으로 장기적인 힘의 균형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지난한 상황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이를 수용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 공격하면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켜 안전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에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역사학자인 A.J.P Taylor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하였고 이는 대부분 전쟁에서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1848에서 1918년 간에 있었던 강대국들 간의 모든 전쟁은 예방적 성격을 지녔으며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결론이다. 경제적 환경 즉 불황은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는 광범한 정치적 환경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이는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이며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COVID-19 팬데믹이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길고 크며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럴 공산이 매우 크지만, 특별히 단기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으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근 몇 달 간에 우리가 지켜보는 (트럼프의) 어리석음이 전쟁을 야기할 강력한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배제할 수는 없다. 못난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피를 부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의 특별한 순간(트럼프의 재직기간)에는 햇살을 즐기는 것이 어렵다는 전제하에, 본 주제에 대한 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희망한다.
COVID-19는 지구적 주제인데 반하여,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 개별국가들은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초기 발생과정에 혼란과 문제가 있었지만, 중국은 광범하게 대응하여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과 인접한 싱가포르, 대만 그리고 한국 등도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여 전염병의 초기단계에서 대응시스템을 갖추는 유리한 고지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선두로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이란 등은 느리게 대처하였으며, 미국은 더욱 굼뜨게 움직이면서 감염과 희생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반면에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WHO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대처하였고, 주로 유럽에서 유입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많은 확진가가 나오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조만 간에 감염이 불가피하게 확산될 것이고 매우 부실한 의료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다. 생활 속에 ‘거리두기’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거주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3월 23일 남아공 대통령은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21일간(후에 추가연장)의 전국단위 봉쇄를 선언하였고 자국 내의 공식적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취업자 그리고 산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가용자원의 동원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연설 내용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고 단호하였지만, 그 이상의 비상조처를 취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남미와 남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한 사정이다. 이제껏 미국을 중심으로 소위 신자유주의의 긴축정책을 통하여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위축되어 왔다.
The Trigger, Not The Cause
코로나 사태는 촉발된 것이지 원인은 아니다
개별국가 단위와 국제적 규모 모두에 있어, 팬데믹은 이미 충격적인 경제위축을 가져왔으며 이는 자본시장과 더불어 실물경제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염병은 문제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이를 촉발시킨 것’이라고 진보경제학자인 미카엘 로버츠는 블로그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COVID-19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자본의 수익성은 매우 저조했으며 국제적으로 수익은 정체되어 있었다. 국제적 무역과 투자 모두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고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민간과 정부의 기구들은 모든 분야에 걸쳐 더욱 거친 도전에 직면하고 있고,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제대로 대응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개별적 단위에서는 신속히 사회적(social) 거리두기, 실제적으로는 물리적(physical)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의료분야와 공공의 영역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러한 창의적인 사례로 뉴욕시의 비정규직 gig(한시직업)운전자들이 취약한 노인 계층들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들 수 있다.
국가단위에서는 현존의 기구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으며, 대응능력에 대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정책의 논쟁 와중에도, 위기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비난하고 불평등을 가속시키려는 집단과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수동적인 정부의 역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그룹간에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내에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을 방해하는 흐름이 완연하다. 엘리자벳스 워렌 상원의원이 제시한 기업구제에 대한 선제조건 또는 덴마크의 야심적인 경제촉진에 대한 제안 등에 반하여, 부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취약한 시민들을 소홀히 하려는 정치적 압력이 넓게 펴져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상호간에 정보교환과 학습 그리고 연대라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점에서도 미국은 한참 뒤떨어져 있다.
Global Learning
국제적 학습
중국과 미국 그리고 선진국가들의 전문적인 과학자 집단들 간에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성과를 공유하고자 지속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emdRxiv’와 같은 사이트에서 매일같이 연구 성과에 대한 예고편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들은 전문 동료들 간에 공식적으로 검증되고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과학적인 피드백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들이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반대로 신속한 학습과 대응을 가로막는 구태의연한 조직들과 문화적 편향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미국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는 현존하는 미국의 예외주의에 대한 오판과 과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주류적인 비판언론들, 예컨데 포린폴리시의 Dennis Ross와 같은 노장들은 미국이 국제적인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한탄을 금치 못한다. 이렇지만 이러한 논조는 다른 나라들이 시행하는 경험에서 학습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기보다는 미국이 국제적인 지도력을 중국에게 내주고 있는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기업농업의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인데, 분석가들에 의하면 기업농업이 자연의 서식지를 파괴하면서 전염병의 생물간 전이가 발생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생물다양성 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HIV/AIDS, Ebola, West Nile, SARS, Lyme 질병 등 수백 가지가 넘는 대부분의 전염병들은 실제로 자연환경의 변화와 생태시스템의 교란에서 시작된다. 이런 생물간 전이성 전염병은 야생동물과 가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질병들은, 생태시스템의 건강성이 파괴되고 산림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없어지며 생태에 필요한 기본적이며 자연적인 보호장벽이 파괴되면서, 확산된다.”
이러한 견해는 ‘Big Farms Make Big Flu’의 저자인 Wallace와 포린폴리시(in Focus)의 Bello 간에 있었던 최근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서구와 중국의 자본주의 모델이 상기의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Global Solidarity
국제적인 연대
자국 내에서 코로나바이러스와 사투를 벌리는 동안에는 미국이 국제적으로 연대할 능력이 제한될 것이다. 이미 예측한바 대로 지구적 규모의 팬데믹과 경제충격이 아프리카와 같이 취약한 지역을 강타하게 되면, 이들은 지역 밖의 도움이 절실하다. 만약 미국이 효과적으로 도움을 제공하길 원한다면, 이는 다자적 국제기구인 WHO, UNICEF등을 통하여 즉각 이루어질 수 있다 (미국은 WHO에 연례지원을 거부했다). 별도로 유엔특별기금을 출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3월 19일 매우 감동적으로 국제적 연대를 호소하였다:
“우리는 UN 창설 이후 75년 역사 속에서 전례가 없는 국제적인 건강위기에 봉착하고 있으며, 이는 인류에게 고통을 전파하는 동시에, 국제경제를 어렵게 하고 인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기록적인 수준이 될 지구적 불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인도의 요청에 의해 주요 경제국가들의 모임인 G-20 의장국의 사우디는 지난 3월 말에 화상회의를 진행하였다. 공동적인 행동에 대한 합의가 이루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미국은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진행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자국 내에서 바이러스를 진정시킨 것뿐만 아니라, 의료 자재와 전문인력을 타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도적 역할은 중국정부와 민간단위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마윈’이라는 억만장자는 50만 개의 테스트키트와 백만 장의 마스크를 미국에 공급했다. 그는 또한 1,1백만 개의 테스트키트와 6백만 장의 마스크를 이디오피아로 선적하여 전 아프리카지역으로 공급하도록 지원하였다.
쿠바는 G-20 국가는 아니지만, 의료지원에 대한 연대에는 수십 년간의 관행을 지니고 있으며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영국국적 크루즈 선박이 미국과 카리브해 연안국가들에 의해 정박을 거부당할 때에도, 쿠바는 50명의 코로나 환자를 포함하여 1000여명 승객의 입국을 수용했으며, 이들이 전용항공편으로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하였다. 더구나 50명의 의사를 이탈리아로 보내 코로나와 싸우는 이탈리아 의료진을 지원하였다. 이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장면을 폐북 동영상을 통해 단하루 만에 4백만 명이 지켜보았다.
기후위기와 경제불평등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COVID-19라는 전염병은 외교정책과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확산일로에 있는 팬데믹은 국제적인 전망 속에 지체없는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진보적인 그룹들이 앞장서서, 코로나바이러스를 계기로 삼아 국내적인 현안과 국제적인 현실이 함께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의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자기이해와 도덕이라는 가치 모두의 관점에서 이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찰스 디킨슨은 『두 도시 이야기』에서 산업혁명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빛의 계절이면서도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도 기왕에 진행 중인 4차산업혁명과 더불어 죽음과 삶, 파괴와 부활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 팬데믹은 부뤼겔이 묘사한 것처럼 “죽음이 승리”(triumph of death) 한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T.S Eliot이 [황무지]에서 노래한 것처럼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는” 부활의 봄이기도 하다.
금권민주주의 Plutocracy를 묘사하는 그림
흑사병 팬데믹은 1347년에서 1351년을 정점으로 해서 수십년간 유럽을 유린하여 유럽인구의 1/3을 넘는 7500만명에서 2억의 생명을 앗아갔다. 포스트 흑사병 팬데믹 시대의 유럽에서는 인구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으로 봉건제적 생산양식은 종말을 고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일어났다. 코로나 팬데믹은 중세의 흑사병 팬데믹 보다 훨씬 적은 인명피해를 내고 수그러들 것이기 때문에 인구감소로 인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방역과 의약기술이 발전한 21세기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전쟁으로 죽은 전사자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 이후의 자본주의는 코로나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포스트 자본주의(post capitalism)로 이행할 것으로 보인다.
(1) 포스트 자본주의로의 이행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고립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온라인 경제, 원격경제, 가상현실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온라인 경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불이 붙었다. 거리두기로 집콕하고 있는 사람들은 텔레메디슨으로 원격진료와 치료를 받고, 회사에 나가지 않고 텔레컨퍼런싱을 통해 자가 업무를 보며, 텔레뱅킹으로 금융업무를 본다. 아이들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온라인 강의를 시청하고 교수와 교사들은 온라인 강의를 시연한다. 온라인 배달앱을 통해 시장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이동은 우버택시를 이용한다. 긱 노동자(gig, 프리렌서 노동자)가 적기배달, 가사일, 가드닝(gardening)을 담당한다. 이러한 온라인 배달 서비스를 담당하는 긱(gig) 경제는 4차 산업혁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4차 산업혁명으로 전통적인 산업자본주의는 포스트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산업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시장경쟁을 두 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포스트 자본주의는 공유경제와 시장경쟁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 플랫폼 경제, 공유(sharing) 경제 하에서 기업은 오픈소스 코드, 빅 데이터와 온라인 플랫폼과 같은 생산수단을 공유하여 무한 이윤을 추구한다. 공유경제는 공동소유와 공동분배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커먼즈(commons)와는 달리, 공동사용하는 ‘공유’ (sharing)는 있으나 공동소유나 분배가 없다.
포스트 자본주의 하에서 플랫폼 기업은 타인의 생산수단과 노동수단을 자신의 자산으로 삼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여 노동수단 소유자들이 벌어들인 이윤을 같이 나누는 기업이다. 플랫폼 기업인 우버는 프리랜서, 파트타임, 일용직, 비정규직, 비공식 ‘플랫폼 근로자’인 프리카리아트 (precariat)와 고객들을 연결해주고 플랫폼 사용료를 받는다. 이러한 임시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직장과 직업이 없이’ (gigged) 자유롭게 일하는 경제를 ‘긱 경제’ (gig economy)라고 부른다. 긱 경제는 독립노동자들이 일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페이를 나누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이다. 긱 경제화가 진행되면 노동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프리랜서로 하향 평등화된다. 긱 노동자들은 직업정체성이 없고, 고정된 작업장이 없고, 표준근로시간이 없으며, 비임금(non-wage) 형태로 보상을 받는다. 그들은 산업화시대의 노동계급이 받았던 국가복지를 받을 수 없고,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임시직, 계약직, 독립노동자가 주류가 된 프리카리아트 노동시장에서 프리카리아트들은 집단적으로 조직하기 힘들고, 집단행동을 할 수 없다.
온라인 플랫폼 경제에서 임시노동, 대행노동, 과제노동을 하는 긱(gig) 노동자들은 유연한 스케쥴에 따라 대기 (on-call), 적기주문형(on-demand), 제로시간계약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가 높고, 노동시간의 불확실성으로 소득불안정성이 높고 임신과 질병과 같은 긴급 위험에 대한 대응력이 낮다. 결국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플랫폼경제, 공유경제, 긱(gig) 경제는 산업화시대의 정규직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해체시키고 불안하고 위험한 계급 (dangerous class)인 프리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 proletariat)를 양산한다.
4차 산업혁명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함으로써 정규직 노동자들을 프리카리아트로 전락시키고 긱(gig)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다. 구매력이 약한 긱 노동자들의 과소소비로 인해 포스트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코로나 팬더믹이 확산되면서 긱 노동자들의 수요가 폭발하였고, 이는 긱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높여주었다. 긱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온라인 배달 서비스가 포스트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높아지자 정치인들은 긱 노동자들에게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제공되는 건강과 안전에 관한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입법을 추진하여 긱 노동자들에게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부여하려하고 있다. (2) 시장의 후퇴와 국가의 귀환
코로나 팬데믹으로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총아인 시장이 후퇴하고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섰다. 폴라니에 의하면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100년간의 평화’ (1815-1914) 끝에 파산을 하였고,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뒤 출현한 자본주의는 시장에 대해 국가가 비대칭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였다. 그런데 ‘케인지안 황금기’로 불리는 국가주도 자본주의는 1970년대에 위기를 맞게 되었고 시장이 갈채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를 열었는데, 세계화와 4차 산업혁명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될 수 없었고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브렉시트와 트럼피즘으로 취약성이 노출되었다.
이러한 포스트 세계화 시대가 전개되는 와중에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자유방임적 시장의 무능이 드러난 반면, 국가는 코로나 방역과 치료 과정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비교우위를 보여주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글로벌 질병위기 해결을 위해 다시 국가가 소환된 것이다. 국가는 신자유주의적인 ‘거대정부의 비효율성’ 담론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대규모의 구제금융 팩키지를 단행하고, 고통에 처한 시민들을 보살피는 ‘돌봄국가’ (caring state)가 되어주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벌어졌던 의료, 보건과 같은 공공재와 의료시스템 하부구조 구축에서 시장이 적절한 투자에 실패했다는 반성 위에 국가가 직접 나서서 시민사회와 의료사회와의 공감, 협력하여 치료약과 백신의 개발, 연구, 제조를 담당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대응은 시장이 아닌 국가가 주도하여야하고, 국가의 대응은 제레미 리프킨이 이야기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적 감수성의 함양, 동식물과의 교감, 우리 삶의 절대적 조건인 동물과 식물의 생물권을 인정하는 “공감 문명”(empathic civilization, J. Rifkin)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생태계와의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 재앙으로 시장에 복수하고 있는 자연과 동물과 화해를 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J. Rifkin, The Empathic Civilization, 2010)
(3) 세계화의 쇠퇴와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도래
코로나 팬데믹은 경제적 세계화의 심각한 후퇴를 가져올 것이다. 세계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으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본주의의 심장인 월스트리트에서부터 전 세계로 확산되자, 세계화는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2016년의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의 대통령당선으로 ‘국경이 없는 세계’(borderless world)는 사라지고 인구, 문화, 물자, 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장벽이 일국단위로 국경에 세워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방역을 위해 국가가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지난 50년간 꾸준히 증가해온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이동의 흐름을 역류시키고, 세계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국경이 없는 세계화의 시대에서 국경의 장벽이 다시 세워지는 영토적 민족국가시대로의 흐름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폴라니가 지적하였듯이 국제주의적 시장의 운동에 대항하여 정부는 일국경제를 바깥세계와 절연시키고 경제적 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를 동원하여 자급자족(autarky) 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기업들로 하여금 불확실성이 높아진 원거리 공급체인 (remote supply chains)에의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공급체인을 강화하여 내향적인 자기고립(self-isolation) 경제를 지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보호주의와 고립주의가 세계화를 대체하면, 글로벌 공급체인이 약화되고 세계경제 전체가 위축될 것이다. 그 결과 1930년대의 대공황같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일어날 위험이 있다. 보호주의와 고립주의 경향은 미중간의 비동조화 (decoupling)를 강화할 것이다. 자유무역 시대에 미중은 전략적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상호이익을 취하는 공진(co-evolution) 또는 동조화(coupling)을 추구했으나, 트럼프가 미국제일주의, 자국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중국을 적대적 경쟁자로 간주하자 미중간의 패권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고, 미중간의 비동조화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 4월 내내, 김정은이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많은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과연 제자리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의구심에 대한 견해가 여기저기서 돌출하는 가운데, 북한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난 3년 동안 한국과 중국이 북한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비핵화에 투자한 가치가 무시되고 있었다.
김정은이 공석에서 오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등장하기 전에, 동아시아와 남북 간의 장기적 관점에서 큰 변화를 일으킬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15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단원제도인 국회의원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여당이 180석을 차지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이제부터 야당의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입법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정부의 북한정책에 대해 향후 2년간, 그리고 2022년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아마도 7년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다. 이제 6개월 남은 미국 대선과 더불어 문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이라는 지원의 여부가 2021년에 자리잡게 될 워싱턴의 미국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한국 정치에 있어서도 총선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세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째로 유엔과 미국의 제재와 별도로, 한국정부는 북한을 더욱 포용하려는 노력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서부와 동부의 해안에 철도연결을 재건하는 일이 착수되었고, 평양과 공동으로 COVID-19 팬데믹 방역에 대한 협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대통령의 남은 2년 임기 동안 상기의 노력들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 번째, 문정부의 강화된 정치적 집행력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한 한국의 주도성과 룰-셋팅(rule-setting)의 역할을 장기간 예고하고 있다.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는 COVID-19가 가져온 위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문정부가 팬데믹 대응에 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지 못했다면, 여당의 총선 결과는 매우 심각했을 것이다.
동시에 총선결과는 소위 수구야당의 붕괴라는 결과와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야당의 텅빈 정책과 권위주의에 대한 맹신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단세포적 대응이 당내 주요 지도자들의 패배를 가져왔고 현재까지 당을 허우적거리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당의 강화된 입지와 야당의 축소라는 지형은 중도적 입장을 지닌 민주당의 의원 대부분들에게 2027년까지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여진다.
세 번째, 이번 총선의 결과로 국제적 정치 지형에서 한국이 지닌 미들-파워라는 정치적 위상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이러한 입지는 국제적으로 중심역할을 해야 할 중국과 미국의 위치가 극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시점과 겹치면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영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향후 몇 년간은 이들의 힘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서고 있고,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조정능력을 갖춘 사회정책이 점차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최근의 COVID-19에 대한 신속한 대응역량은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신감과 독자적 위치를 확인하는 괄목할만한 여러 성취 중의 하나이다.
5월에는 피로 얼룩졌던 광주의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40주년 행사가 있었다. 더욱이 지난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신속한 회복을 이룬 점과 부패한 전직 대통령들을 감옥에 가두는 시민주도의 제도적 분출은 현대한국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한다. 현재도 사회 전체가 협심하여 COVID-19와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성과들은 시민사회의 조직능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는 지도력과 결합하여 비폭력적 방식으로 얻어낸 것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정치권력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지방정부 책임자들에게 시민사회라는 공간이 요구하는 기대치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한국이 지닌 미들-파워의 잠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의사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내부에서 북한과의 평화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액션을 취해야 하는지 논란이 진행 중이고, 미국과 동맹관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의 주제이다.
그러한 논쟁들은 지역 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동아시아의 안전과 발전에 대한 지역 내 행위자들과 기구들 사이에 활력과 자신에 넘치는 한국정부의 세심하고 스마트한 움직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와 한반도와 지역에 미치는 제재의 역할은 남북간 외교에 관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에게 매우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역내의 발전과 안전에 관련된 주요한 전진은 제재의 향방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주도적으로 제재를 풀어가지 못하면 오히려 종속적 위치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미국과의 건설적 역할이라는 주제 역시 서울과 워싱턴 간에 조용한 그러나 여전히 주요한 형안이다.
이러한 병행적 논쟁들이 수십 년 만의 중대함을 더하는 미국대선을 앞둔 상황에 전개되고 있다. 누가 백악관을 차지하던, 한국이 한반도 현안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증대될 것이다. 또한 한국 역시 2022년 5월 대선을 앞에 두고 정치권이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2년 간은 COVID-19가 야기한 위기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대응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ICBM 미사일 시험을 재개하여 현재 유지되고 있는 힘의 균형에 변화를 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한국은 보다 폭넓은 포용정책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난 20여 년간 그러했듯이 공히 남북한에 대한 오판을 지속할 것이며, 추가적인 포용정책과 비핵화의 진전을 방해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병렬적 조합의 상황은 지속될 것이지만, 미국의 합법적 위치가 조락하고 한국정부의 부상하는 새로운 역할(위임, empowered)에 대한 기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은 자신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모든 당사자들의 이익을 진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확대된 힘을 사용할 것인가?
출처 : East Asia Forum, 20202-05-20.
Stephen Costello
조지워싱턴 대학교 내 한국연구센터의 객원연구자이며, ‘아틀랜드 회의’와 ‘김대중 평화재단’의 전직 이사출신
도날드 트럼프는 지난 1월부터 버티며 수 주간을 부인하더니, 결국은 3월 중순에 COVID-19가 심각한 전염병임을 인정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행에 들어갔다.
심각한 현실의 인정을 지연시킨 배경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증시를 추락시키는 위협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뒤따랐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상황에 대한 부인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늦게나마 인정한 일은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행정부는 당분간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여러 대책들을 강구하면서 동시에 봉쇄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제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와 공화당 측근들은 상황에 대처하는 일반적 전략을 포기했다. 물론 이들은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조처에 대해 다양한 거짓말로 포장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다우 지수의 유지를 위해 수만의 미국인들이 죽어야 한다.’
트럼프가 포기한 전략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시행해서 성과를 보인 전략과 같은 것이라고 답변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봉쇄조치를 취하여 확진자의 증가추세를 멈추고, 점차로 낮은 수준으로 낮추어 가는 작업이다. 그런 후에 확진자들을 가려내어 이들이 전염병을 확산시키지 못하도록 격리시킨 후, 광범한 테스트 역량을 갖추면서 점차로 격리조치를 완화해가는 일이다.
연장이 거듭되고 있는 경제의 봉쇄조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수입과 비즈니스 활동에 타격을 주는 일이며, 실제로 3월초부터 일자리를 잃어 수입이 끊긴 성인 가구수가 절반에 달한다. 따라서 봉쇄조치로 인한 타격을 견디어낼 만큼 실업보험과 중소기업중심의 도움을 제공하는 재난지원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연구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재난지원은 매우 효과적이다.
우선, 실업보험을 취급하는 사무소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신청자들로 넘쳐났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동은 곧바로 해결되면서 실직한 미국시민들은 당분간 통상임금의 상당부분에 해당하는 지원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임금지불에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중소기업들에게 제공된 대출방식의 지원금들도 초기에는 혼란을 겪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지원금을 수령하여 실제로 임금을 지급하는데 사용하였다.
요약하면, COVID-19로 급조된 사회안전망은 허점투성이지만 나름대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도움을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이만한 수준의 사회안전망조차도 연방의회와 백악관이 이를 지속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수개월내에 멈추게 된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금이 지원금으로 전용되는 것은 향후 8주 동안 유효할 뿐이어서, 많은 기업들은 해당기간 안에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기 시작할 것이며, 연장되어 시행되고 있는 실업보험 역시 7월 31일이면 종료된다.
주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워싱턴(중앙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면, 담당지역 내의 학교교사들과 소방대원 그리고 경찰 공무원 등 수많은 공직자들이 실직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은 실업보험 기간의 연장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대신에 경제활동을 조속히 재개하는 일에 온갖 희망을 걸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의료 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제2차 감염이 도래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속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왜 무리를 하면서 급하게 경제활동을 재개하려 하는가? 많은 공화당 의원들은 국가부채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회안전망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를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마디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정적자가 급증한 것은 세금인하를 시행한 탓일 뿐이다.
미국의 일반 노동자들이 일자리로 돌아오도록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다른 핑계는 이러한 요구가 풀뿌리 대중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활동을 재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경제봉쇄 조치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을 준비도 없이 쉽게 재개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료전문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하려는 것은 위로(트럼프)부터 오는 요구이다. 트럼프와 측근들은 자신들에 대한 지지는 대중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에 대한 지도력에서 오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와 측근들은 왜 사망자가 늘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경제를 재개하려고 하는 것일까? 답변은 자명하다, 이들은 상황을 팬데믹 초기상황 이전으로 둘리려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트럼프와 우측 인사들은 주식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팬데믹의 경고를 무시했다. 이들은 경제봉쇄를 조속히 해지하면 주식가격이 다시 오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라는 인물은 세상이 자신의 시계에 맞추어 잘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황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재선은 주식의 시세가 보장해 준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트럼프와 공화당 측근들은 미국시민이 얼마나 죽을지 상관없이 가능한 신속하게 경제활동을 재개하고자 희망한다. 이들의 가식적인 입장은 나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미국시민들은 다우 지수를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Rick Bright 박사는 미국 보사부산하의 국장으로 재직하며 트럼프행정부의 COVID-19 대응조처에 반대하다가 최근 직위해제를 당했으며, 조만간 연방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이 추구했던 과학적 접근에 대해 증언하면서 팬데믹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준비하고 있다.
Rick Bright 전前국장(BARDA, 보사부산하 의약첨단연구개발국)은 이미 2018년 6월 연방의회에서 팬데믹에 대한 준비상황을 증언한 바 있다.
그가 사전에 작성한 증언문건에 따르면, 연방의회 주택에너지분과에 소속된 건강관련 산하위원회에 출석하여 ‘다가오는 가을철에 닥칠 두 번째의 치명적인 코로나의 대유행을 막기 위한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다’고 증언할 계획이다.
“우리는 미국시민들에게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다…… 진실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해야 하며, 정치적 이유로 조작되어서는 안된다” – Dr. Rick Bright, 전직 BARDA(첨단의약연구개발국) 국장.
과학에 기초한 협력적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팬데믹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장기화되면서 전례없는 질병과 사망을 야기할 것을 염려한다고 그는 문서로 증언한다. “나와 전문가 동료그룹이 제안한 단호한 기획과 추가적인 조처가 채택되지 않으면, 올 겨울은 현대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 4월까지 해당부서의 국장직을 수행하였던 Bright 박사는 자신이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COVID-19의 치료방식으로 소독제를 추천한 것에 반대한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고 내부고발장을 접수하였다. 대통령은 말라리아 치료제를 과다하게 복용할 것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Bright 박사는, 이번 사태의 대응에 책임을 지고 있는 Robert Kadlec 차관을 포함한 보사부의 주요 간부들이 N95 마스크를 매달 7백만 장 생산하자는 자신의 지난 1월 제안을 묵살하면서, 이들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그의 제안은 COVID-19가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미국 내에서 첫 사망자가 나온 시점에 제시되었다. 그는 내부고소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상기 제안과 경고들이 귀먹어리들에게 보고되었다.”
그는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할 작정이다 “나는 당시에도 이야기 했고, 오늘 자리에서도 증언합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싸우는 길은 정치나 냉소적 비난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예정된 증언과정에서 Bright는 올 하반기에 예상되는 두 번째의 팬데믹 대유행을 피하기 위해서다음 4가지 조처를 연방정부가 시행해야 한다고 설명할 예정이다.
의료자재 생산을 급속히 확대할 것.
모든 주정부에게 신속하고 동등하게 의료자재들을 배분할 것.
국가단위로 테스트 전략을 수립하여, 정확하고 빠르고 사용이 용이하며 저비용으로 필요한 모든 시민에게 테스트를 확실하게 실시할 것.
COVId-19의 예방을 위한 공공교육을 강화할 것.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미국시민들에게 진실할 의무가 있다…… 진실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해야 하며, 정치적 이유로 조작되어서는 안된다.”
대통령이 마스크를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부통령이 현장 방문시 이미지 관리를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지 말 것 등에 대한 백악관의 새로운 규칙에 대해 언급하면서, 코로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질병예방센터 책임자인 Anthon Fauci 박사가 연방의회에 경고하며 정부가 경제활동을 너무 빨리 재개하면 미국은 불필요하게 추가적인 고통과 죽음을 겪을 것이라고 언급한 이후, Bright박사의 다음 증언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위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무엇을 했으며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미국인들의 건강과 안전과 번영을 위해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지난 3월3일 미국 국무부장관인 Mike Pompeo는 국내방송사인 ABC와 인터뷰에서 미국 내에 진행되고 있는 COVID-19 상황에 대해 중국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미국 외교의 최고책임자인 그는 평소에 하는 의례적인 비난의 범주를 넘어서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국은 비공식적인 (생화학무기)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셰계를 감염시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의 연구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세계가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이 이번 사태가 처음은 아니다.”
상기의 언급은 단순히 사실을 완벽히 왜곡시킨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부서(미국무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를 안겨준 것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의 외교를 대표하는 책임자가 민간TV 프로그램에 나와 상대국가에 대하여 조작된 거짓말을 퍼트리고 해당국가가 여러 번에 걸쳐 세균전을 시도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명백히 그는 미행정부와 국무부를 대신하는 위치에서 자격미달이며 무책임하고 명백히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수준의 협잡꾼 언급이 미치는 영향은 겉잡을 수 없는 것으로, 과연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고 침묵을 지킬 것을 기대하려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부부의 장관은 미국외교를 책임지는 개인으로, 대통령에 의해 지명되어 미국과 전세계 국가들 간의 관계를 관리하는 자리이다. 미국의 외교관계를 이끌고 지원하면서 전세계에 산재되어 있는 대사관과 외교관들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직책이다.
통상, 외교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의가 바르고 합리적이며 냉정한 행동의 소유자를 떠올린다. 상대국의 감정을 고려하면서 자국의 이해와 위상을 고려하여 균형을 갖추며 처신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미국의 현직 국무장관인 Pompeo는 이런 상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인물이다. 세계 속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명예롭고 전문적이며 성실하게 외교업무를 수행하기는커녕, 그는 자신의 사무실과 산하조직을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가득찬 쓰레기장으로 변질시키면서, 미국이 현재 겪고 있는 역경에 대해 거짓 정보를 퍼트리고 사실을 감추며, 상대국가들을 중상하고 비난하는데 모든 노력을 쏟고 있다. 특히 우한연구소가 COVID-19의 진원지라는 그의 주장은 수치스러움의 막장을 보여준다.
그가 언급한 음모설은 전세계 과학분야 전문가들과 기구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부정당했으며, 단 한 줄의 진실조차 담고 있지 않다.
Pompeo는 정보기관이 자신의 이야기를 증명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안의 뒷줄에 앉아 있는 미국 관계자들은 실제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있고, 그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있다. 한편 백악관은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국무부는 15쪽의 문건을 통해 음모설을 옹호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관련보도의 엉터리 기사들이 돌고 있는 가운데, 평소 미국의 편을 들어주던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해당 관계자들조차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Pompeo는 즉흥적으로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만들어서 외교관직이 주는 특권과 지위를 악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중대한 거짓으로 고발을 진행한 것이다.
이런 언급은 못 본척 지나칠 수도 없고, 카페트를 청소하듯이 지울 수도 없다. 미국의 주류매체들은 과장된 근거를 바탕으로 중국의 외교를 반복적으로 비난하기 즐겨 하면서, 북경정부가 어떤 수준에서도 확인하지도 시행하지도 않은 사실들을 팩트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떠벌리고 있다.
제3세계 국가군들만이 조작된 정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믿는 것은, 안이한 이중적인 태도이며 Pompeo가 국제적 규모로 진행하고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사기극과 선전캠페인을 검증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중국당국이 이런 거짓조작을 묵인할 것인가? 그의 언급은 그가 소속된 나라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의 지위가 부여하는 공식적인 성명이다. 폼페이오의 거짓말은 미국의 신뢰도에 타격을 가하고 전세계가 이를 인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제부터 중국이 미국에 대하여 중대한 반격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결론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Pompeo라는 존재는 그간 미국이 지닌 좋은 의미의 외교에 대한 블명예이자. 자신의 직책에 대한 수치이며 모든 세계인에 대한 모독이다. 이제는 중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거짓정보를 만들어 내는 미국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 할 때이다. 지금이 (미국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할 출발의 시점이다.
출처: CGTN, 2020-05-05.
Tom Fowdy
Durham과 Oxford 대학에서 정치와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언론인. 주로 중국과 북한 영국과 미국에 관한 기사 제공
<보충기사>
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파이낸셜타임지의 전임 정치경제평론가인 Mr. E.Luce가 쓴 폼페이오 평가서이다. 번역없이 원문 그대로 게재한다.
Mike Pompeo and America’s end of times diplomacy
Regardless of character, regimes have tended to show their wilier face to the world. Mao Zedong had Zhou Enlai, Ronald Reagan had George Shultz, Margaret Thatcher had Lord Peter Carrington. That is diplomacy — using persuasion to achieve what would be far costlier by war.
Mike Pompeo is an exception. Donald Trump’s secretary of state does not finesse his boss’s instincts. He talks through megaphones at Americans. The world is not there to be persuaded. It is a backdrop to Mr Pompeo’s domestic messaging. Foreigners, as a result, have stopped taking him seriously. That is a pity because Mr Pompeo fulfils one crucial qualification to be an effective diplomat: the trust of his leader.
Mr Pompeo could be the great Trumpian explainer, the approachable face of America First. Instead he has picked the role of Baghdad Bob, Saddam Hussein’s spokesman, who exaggerated his leader’s instincts. Such mimicry extends to Mr Pompeo’s management.
Last week Mr Trump fired the state department’s inspector-general — its supposedly independent watchdog — at Mr Pompeo’s behest. Mr Trump conceded he had never heard Steve Linick’s name. He did not question Mr Pompeo’s motive. Mr Linick’s investigations posed a threat to Mr Pompeo. In addition to his use of staff for trivial errands, such as picking up dry cleaning, Mr Pompeo had allegedly faked an emergency order to circumvent a block on US arms sales to Saudi Arabia.
If Trump says one thing before breakfast and the opposite afterwards, Pompeo keeps step. Few others have proven so adept
Instead of facing the music, Mr Pompeo asked Mr Trump to shut it down. That is how Mr Trump operates. Mr Linick is the fifth inspector-general to be sacked in the past two months. “Someone was walking my dog to sell arms to my dry cleaner,” was how Mr Pompeo mocked the uproar. That is the language of impunity.
On top of loyalty, Mr Pompeo is driven by two compulsions. The first is a burning ambition to succeed Mr Trump. That means never being on the wrong side of the president. If Mr Trump says one thing before breakfast and the opposite afterwards, Mr Pompeo keeps step. Few others have proven so adept. As a result, Mr Pompeo has amassed unusual power. He dominates Robert O’Brien,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and Mark Esper, the US defence secretary. Not since Henry Kissinger has America’s chief diplomat wielded such influence.
Unlike Nixon’s consigliere, who was an inexhaustible originator of ideas, Mr Pompeo is his master’s voice. Trying to keep up with Mr Trump may explain Mr Pompeo’s short fuse. When his actions are questioned, Mr Pompeo lashes out.
His second motive is loftier: to serve God. Many US politicians pay lip service to Christianity. Mr Pompeo is sincere. He served as a deacon and lay preacher in the 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Among its tenets are a belief in “end times”, that the world will conclude in the rapture of Christ’s second coming once prophecies have been fulfilled. Among these are the return of all Jews to the original Holy Land.
Since Mr Trump needs a high evangelical turnout in November to win a second term, Mr Pompeo’s beliefs align with his president’s goals. Unlike Mr Trump, Mr Pompeo’s theology is not for show. “Pompeo talks about God a lot,” says a former senior national security staffer. “Sometimes he does so in a self-deprecating way. But God is never far from his mind.”
The only trip Mr Pompeo has taken since the start of the US coronavirus lockdown was to Israel last week for a photo-op. Mr Pompeo had already abandoned decades of policy by shifting the US embassy to Jerusalem and giving the green light to Israel’s annexation of the West Bank. “I am confident the Lord is at work here,” Mr Pompeo said on an earlier visit. He meant it.
Mr Pompeo also means what he says about China, which he calls “Communist China”. This now includes openly stoking Taiwanese independence. That may be good politics but it is not diplomacy.Mr Trump puts all the blame on China for America’s pandemic toll and depicts Joe Biden, the Democrats’ presidential candidate, as its lackey. “A vote for Joe Biden is a vote for China”, said one pro-Trump advertisement.
China’s official media calls Mr Pompeo a “superspreader” of the “political virus”. Such bluster should be easy for the world’s leading diplomat to dismiss. But Mr Pompeo has robbed himself of standing. America and China now daily hurl conspiracy theories at each other. The rest of us inch uncomfortably close to the rapture.
백낙청 선생은 1997년 쓴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를 통해, ‘국가연합(남북연합)’을 자신이 1990년대 초반 이래 제기해온 ‘분단체제론’의 새로운 맥점으로 제시했다. 이 제시는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민주정부 10년’이 시작되었다. 통일문제에 경륜이 깊은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 민주당 클린턴 정부와의 궁합이 맞아떨어져 1999년에는 ‘페리 프로세스’에 남북미가 합의할 수 있게 되었고(1994년의 제네바 합의는 북미 간의 합의였다), 2000년에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져 6·15 공동선언을 내놓을 수 있었다. 더욱이 공동선언의 제2조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하여 분단체제론이 1997년 이래 새롭게 강조했던 (국가 또는 남북) ‘연합’ 통일 방안에 대해 드디어 남북이 모두 합의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6·15 선언 직후 백 선생은 이 조항의 합의가 “획기적”이라 썼고, 더 후일인 2012년에 쓴 「포용정책 2.0을 향하여」에서는 이 조항이 “6·15 공동선언의 가장 빛나는 성취에 해당”한다고 극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서는 우선 2005년 백 선생 자신이 “남·북·해외가 함께 만든 ‘6·15 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의 남측대표라는 중책”을 맡아 “3월과 6월 및 8월에 금강산과 평양, 서울에서 각기 공동행사를 치르는 등 ‘6·15 시대’가 크게 활력을 되찾는 현실을 체험”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7년의 10·4 정상선언으로 “남북연합의 건설은 …… 이미 시작되었”다고 후일 회고한다. 당시 고위급회담에 총리가 나가고, 그 총리 회담의 정례화가 언급되고, 정상회담도 수시로 열자는 언급이 오갔던 것 등이 바로 “(남북)연합기구에 해당하는 조치들이 많이 마련된” 것이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상 백낙청 선생의 여러 회고를 종합해보면, ‘남북연합’은 1989년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 처음 등장하여, 6·15 선언에서 버전 1.0을 완성하고, 2007년 10·4 선언에서 1.5가 이뤄지며 (2012년 대선 때 백 선생이 제안한 ‘2013년 만들기’에서의 버전 2.0 기획은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으로 무산되었지만) 이제 촛불 이후에 2012년 대선 실패로 유실되었던 그 버전 2.0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의 축을 따른 직선적, 선형적 성장도면이 그려진다. 간단히 도식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위 <그림 3>은 내가 겪어왔고, 생각해왔던 ‘87년 이후 지난 30년’, 1987년 6월에서 2016년 촛불 직전까지의 상(像)과 크게 다르다. 내 실감 속에서 그 30년은 ‘분단체제의 마의 순환고리’가 87년의 거대했던 민주 동력을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삼켜버린 시간이었다. 그 느낌을 실감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촛불혁명 이전인 지난 2015년 12월 17일, 필자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했던 강연을 강연문 그대로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15년이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87년 이후 29년째다. 87년 태어난 아기가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된다. 한 세대가 지났다. 벌써 그런가. 87년의 벅찼던 희망과 기대가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그렇다. 그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는 지금이 1972년의 유신 전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누구는 더 거슬러가 1894년 청일전쟁 전야의 상황과 비슷하다고까지 말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이제 대한민국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민주주의의 다리를 건넜다고 확신했다. 4·19 때처럼 역사가, 민주주의가 거꾸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60 – 70 – 80년대 30년 동안, 4·1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이 자라났고, 그랬기에 그 철벽같았던 전두환 군사독재를 밀어뜨릴 수 있었다고. 이제 한국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 정상국가가 되었다고. 어둠의 임계점을 넘어 광명의 땅으로 들어섰다고. 세계도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고. 역사발전의 곧고 탄탄한 정상궤도로 확실히 진입했다고. 다소의 저항이 있겠지만 시대의 대세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데 시간이 꼬여버린 듯하다. 다 지나왔다고 생각해왔던 시간 안으로 거꾸로 다시 떠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니 말이다.
지난(2016년) 10월 ‘백년포럼’에서 이부영 전 의원은 87 민주화운동 성취 이후, 주도 세력에게 ‘그림’, ‘로드맵’이 없었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이 분명했다. 그 그림은 4·19 이후 30년의 민주화운동이 산출한 것이다. 이 그림은 직선 몇 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그림 4>)
문제는 이 그림에 있었다. 87년의 주도 세력은 이 그림처럼 앞에 열린 길이 탄탄한 평지 위의 직선 길이라고 생각했다. 87년을 통해 획득한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열심히 하면, ‘경제사회적·실질적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따라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돌을 하나 첨벙 던지면 차츰차츰 퍼져가는 가는 동심원처럼.
그런데 그 후 30년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87년 10주년에는 ‘IMF 사태’를 당했다. 20주년에는 ‘6월 항쟁을 통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경제·사회 면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실하거나 심지어 후퇴했다’는 식의 진단들이 나왔다. 이제 30년이 코앞인데, 이제는 그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달성’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지경이다.
나는 87 주도 세력이 개인 욕심에 빠져 민주화의 대업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식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진단은 흔히 동기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너무 단순하여 그렇듯 의심스러운 동기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권으로 들어간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중요한 점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들 했는데 엉뚱한 곳에 와 있는 원인이 뭐냐다. 직선을 따라 30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둘러보니 왠지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느낌, 기분 좋지 않은 데자뷔, 기시감이다.
이 강연 당시(2015년 12월)는 박근혜 정부의 전성기였다. 그때의 사회 분위기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모든 게 막힌 듯 얼마나 암담했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87년의 에너지는 완전히 실종된 것으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철저히 재갈 물리고 총체적 블랙리스트가 정치, 사회, 학술, 문화 전방위를 지배했다. 남북관계는 뿌리까지 얼어붙어서 오히려 87년 이전인 전두환 정부 시기보다 대화가 더 막혀 있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이제는 수십 년이 갈 ‘제2의 10월 유신’이 목전에 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다 이 강연 4개월 후, 4·13 총선이라는 최초의 반전이 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박근혜 정부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촛불혁명이 왔다. 87년 역시 그러했다. 당시 누구도 87년 6월과 같은 거대한 ‘판 갈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4·19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회고하여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새벽은 결국 온다’거나 ‘민주주의는 역시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낭만적으로 칭송하는 데 그친다면, 좋게 말해 순진하다. 엄격히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에는 어떤 마(魔)가 씌워 있기에 세계를 놀라게 한 그토록 대단한 민주혁명이 연이어 벌어졌음에도 그것이 모두 번번이 독재로 회귀하고 말았는가? 촛불혁명이 또다시 같은 운명을 겪지 않게 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2018년 촛불 이후 백 선생의 지난 시간의 회고를 보면 그런 긴박감, 절박감, 위기의식, 그 30년의 진행 상황에 대한 회오나 반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남북연합 잘 해왔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잠시 정체가 있었지만, 이제 다시 해온 대로 남은 길 그대로 마저 밀고 나가면 된다는 식이다. <그림 3>의 남북연합 완성의 직선도와 <그림 4>의 민주화 완성의 직선도는 그래서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역사적 이정표를 세웠고, 2005년 9·19 합의와 2007년 2·13 합의는 북핵문제 해결의 경로를 예시했으며, 같은 해 <10·4 남북정상선언>은 종전과 평화체제문제를 화두에 올렸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왜 6·15 선언 이후 채 몇 개월이 안 되어서부터 강한 ‘퍼주기’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고, 6자회담의 중요한 합의들은 왜 금방 휴지 조각이 되어야 했으며, 10·4 선언의 성과는 오히려 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총체적 종북몰이의 단골 먹거리 메뉴로 역용당해왔던 것일까. 과연 그 성과들은 ‘포용정책 버전 1.0, 1.5, 2.0’에 이르는, 그리고 이르게 되고야 말, 순탄한 직선적 상승 코스였던 것일까. 오히려 이 과정은 그 상승만큼의, 아니, 그 상승 폭을 오히려 능가했던 후폭풍과 역풍을 수반하여 그 직선의 방향을 하향으로 짓누르고 구부려 뜨려 결국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원주(圓周)를 따라가 역방향으로 돌아갔던 것 아닌가? 즉 분단체제가 다시금 강화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 가공할 ‘마의 순환고리’가 굉음을 일으키며 다시금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그림 5>처럼 말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많은 이들이 ‘분단체제의 역풍’이 다시 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을 때, 백 선생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결론적으로는 “결코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여전한 신념이다 …… 회복 불능은 아니다. 심지어 정지 상태도 아니다. 한반도식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궁극적으로는 시민참여 통일과정으로 될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라고 썼다. 이미 시작된 남북연합이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기 때문에 분단체제는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이러한 분단체제론의 사고법에는 분단체제가 시대를 역진하여 민주혁명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반복적 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마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절적 단절’이 필요하다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양적 변화의 사고법만 존재한다. 이는 <그림 3>의 남북연합의 직선도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남북연합의 증가만큼 분단체제는 감소한다. 역시 직선적 관계다. 백 선생이 신념을 가지고 말하듯 남북연합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항상 작동한다. 간혹 정부 간의 길이 막히더라도 백 선생이 제기했던 ‘시민참여 통일과정’의 길로 더욱 열심히 나가면 된다. 그렇게 하여 남북연합의 힘이 커지는 만큼 분단체제의 힘은 계속 약화된다.(<그림 6>)
분단체제는 어차피 ‘흔들리고, 무너지고, 해체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런 분단체제가 다시 강고해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어느덧 분단체제는 더 이상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이미 별다른 힘을 쓸 수 없는, 사멸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그 ‘사멸의 끝’은 어디일까? 과연 <그림 4>에서 굵은 직선은 분단체제가 0이 되는 지점에 언제나 도달할까? 과연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영원한 점근선 아닐까? ‘지평선 도달하기’와 같은 것 말이다. 그 사멸의 끝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 있다. 자, 그러니 분단체제의 완전한 사멸에 이르기까지 흔들리지 말고 계속 나가자. 그러나 지평선이란 다가가는 만큼, 정확히 그만큼, 더욱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저 지평선에 도달할 그 시점(즉 분단체제가 종식될 그 시점)이 남북연합이 완성된 ‘1단계 통일’ 때일지, 아니면 그 이후 더욱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질 ‘2단계 통일’ 때일지 전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느덧 이 과정에서 ‘분단체제’가 이제는 별로 유해하지 않은, 잘 길들여진, 순치(馴致)된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남북연합’과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분단체제를 상정’한다고 하니, 이제 분단체제는 1단계, 2단계 통일의 전제, 바탕이 된다.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문제의 해결을 지향하는 원대한 분단체제론의 장도(長途)를 동반하는 충직한 종자(從子)가 되어버린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진정 고민되는 것은 그렇듯 한가한 ‘먼 미래문제’가 아니다. 과연 민주혁명의 동력을 (4·19와 87년 6월) 그토록 완벽하게 말아먹고 말았던 ‘분단체제의 마의 순환고리’를 지금 여기서 (촛불혁명 이후) 어떻게 완전히 끊어야 하느냐라는 절박한 현실의 문제다. 지금껏 해온 대로 ‘남북연합’ 열심히 하고, 혹시 정부가 시원치 않으면 ‘시민참여 통일과정’을 마찬가지로 열심히 하면, 결국 문제없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의 해법이었다. 그러는 어느 사이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는 이제 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 듯하다. 오래 전부터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해체되어’ 왔다고 하였으니, 어느 사이 이제는 무해(無害)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이런 방식의 사고법으로는 분단체제를 결코 빠져나올 수 없고(빠져나올 생각이 별로 없다), ‘마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도 결코 없다(그런 게 반복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분단체제론의 사고법은 양적 점증(漸增), 점변(漸變)론이다. 백 선생이 제시해온 ‘남북연합’과 ‘시민참여 통일과정’을 열심히 하면(점증), 분단체제는 서서히 사라지고 통일은 서서히 온다(점변). 결국 현상유지론이다. 반면 양국체제론은 ‘질적 단절’을 주장한다. 분단체제는 마의 순환고리를 통해 대략 30년을 주기로 완강하고 반복적으로 작동해온 강력한 실체다. 확실한 ‘질적 단절’을 통해서만 끊어낼 수 있다. 분단체제를 끊어내야, 현상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통일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에는 이러한 ‘분단체제 현상타파’의 사고법이 없다. 어느덧 ‘분단체제 현상유지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 통일로 가는 길은 “두루뭉수리 …… 어물어물 진행되는 통일” 과정이라고 할 뿐, 그 실체가 묘연하다.
‘분단체제의 마의 순환고리’는 이미 4·19 이후 30년 동안에도 한 차례 작동했던 바 있다. 박정희 – 전두환 정권은 일체의 비판과 저항을 용공·좌경·친북으로 몰아치면서 ‘비상국가체제’의 철옹성을 높이 세웠다. 이 과정에서 4·19 주도 세력은 처절하게 무력화되고 말았다. 과연 그때 통일론이 없고, 통일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없고, 분단체제극복운동이 없어서, 4·19는 그렇듯 실패해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이어 87년의 거대한 민주적 에너지가 이윽고 그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힘조차 동구권 붕괴 이후 ‘북한붕괴론, 흡수통일론, 북핵위기론’이라는 새로운 교의로 무장한 신(新) ‘비상국가체제’ 세력에 의해 다시금 ‘종북’, ‘퍼주기 세력’으로 몰려 다시금 ‘귀 빼고 뭣 뺀 당나귀’처럼 무력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순치되었던 것은 분단체제가 아니라, 그 분단체제를 끝장내보겠다 했던 저항 세력, 87년의 민주 동력이었다. 그 시간 역시 30년이었다. 87년 6월은 과연 승리한 것인가? 아니다. 4·19가 그랬던 것처럼 실패했다.
암울했던 2015년 겨울의 강연에서 나는 그것을 쓰라리게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라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내 자신 80년대의 대변동에 미미한 일부였을지라도 풍찬노숙해가며 온몸을 던졌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몽땅 말아먹은 이유를, 아프지만, 아파도 견디면서, 꼼꼼하게 추적해보았다. 그 결과 악몽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 핵심에 ‘남북의 극단적 적대’를 동력으로 작동하는 ‘분단체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마의 순환고리’ ‘분단체제의 반복강박’이라 불렀다.
절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절망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원인을 모르는 게 문제다. 원인을 확실히 알면 해법이 반드시 있다. 그 12월의 강연에서는 평화체제, 공존체제를 이야기했다. ‘분단체제’가 문제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분단체제에서 공존체제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뭔가 아직 석연치 않았다. 평화체제, 공존체제는 좋다. 누구나 좋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평화체제, 공존체제를 이룰 수 있는가? ‘분단체제’를 종식시킬 열쇠, 핵심이 뭔가? 여기에 답하지 못하면 ‘그냥 좋은 말’ ‘공자님 말씀’하고 끝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질적 단절’의 그 고리가 무엇인가?
강연 이후 오래 생각했다. 답은 가까운 데 있었다. 양국체제였다. 그것을 2016년 5~6월의 4회 대중강연에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2017년부터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칼럼 형식으로 가능한 널리 알려 나갔다. 양국체제가 현실화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2018년 4·27 판문점 회담 결과를 예견하는 글을 마지막으로 칼럼 활동은 일단 접었다. 이제는 큰 흐름이 잡혀가는 것으로 보였고, 그 상황에서 그런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일단 다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책 출판을 준비했다. 그것이 학자로서 해야 할 남은 숙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양국체제의 발상을 압축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의 순환고리’는 ‘분단체제’를 통해 작동한다. 어떤 시스템도 동력이 끊어지면 정지하듯이 어떤 역사적 체제도 그 선행조건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진다. ‘분단체제’는 미소 냉전과 남북 적대라는 두 개의 동력(선행조건)으로 작동되어왔다. 90년대 초 미소 냉전이 이윽고 종식되었음에도 분단체제가 존속해온 이유는 남은 동력인 남북 적대가 존속했기 때문이다. 이 적대를 해소해야 분단체제가 씌워놓은 마(魔)와 주술(呪術)에서 풀린다. 우선 남과 북이 서로 상대가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돼야 한다. 남과 북처럼 참혹한 전쟁을 한 사이에서 그 믿음이 완전해지기는 어렵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장 분명한 것은 서로를 국가 대 국가로 완전히 인정하는 공식적·제도적인 조치들이다.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한다고 서로 그리고 세계만방에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국체제다. 서로 정식 수교하여 대표부를 교환하고 이를 시발로 교류의 폭을 점차 늘려가는 것이다. 한국(ROK)과 조선(DPRK) 두 나라의 수교는 ‘한조(韓朝) 수교’다. 한조 수교는 코리아 양국체제가 공식화되는 첫 단추가 된다.
국가 간 수교가 적대관계 해소에 미치는 영향은 한중 수교에서 볼 수 있다. 서로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 수교 이전과 이제 서로 100만명씩 서로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수교 이후의 차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남북 수교가 한중 수교만큼 당장 빠른 효과를 내기는 어렵겠지만, 수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교류와 협력이 이뤄질 것은 분명하다. 분단체제론이 강조해온 남북 민중연대, 시민연대도 이때 비로소 본격화될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빠뜨려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양국체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북미 적대 역시 풀어야 한다. 미소 냉전이 종식되었음에도 한반도에서 냉전의 여파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은 그 파생물이었던 남북 적대와 함께 북미 적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북미 역시 전쟁을 한 사이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을 했던 중국, 베트남과 이미 수교했다. 북미 적대 해소의 가장 현실적인 방법 역시 북미 수교에 있다. 따라서 양국체제는 남북 수교와 북미 수교를 통해 현실화된다. 남북 수교와 북미 수교가 이뤄지면 ‘분단체제’는 동력을 잃고 해소된다. ‘마의 순환고리’ 역시 따라서 끊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경기가 추락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이해관계에 친화적인 기업들은 무엇을 느낄까? 기업여론조사에 따르면, 기업경영자들이 다음 회기의 주주총회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종업원, 소비자, 거래처 그리고 지구환경에 대해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급상승하고 있다.
장기간 주식시장이 호황을 유지하는 동안, 주주중심의 오랜 관행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고, 기록적인 수익을 시현하면서 경영책임자들이 혹시나 사업목표를 달성 못하면 자신을 쫓아낼 주주들 보다 제3의 사항들에 대해 보다 많은 배려를 하는 것이 용이해 졌다.
코로나의 발발은 상기의 양호한 조건이 지속될 수 없는 황량한 상황을 불러오고 있다. 주식가격이 요동치고 글로벌한 공급체계가 교란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최근의 경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중앙은행들은 전염병 발발로 인한 충격을 완화시키는 조처를 신속히 시행하였고, 기업경영자들은 수익이 다시 반등하기를 여전히 기대한다. 그러나 앞으로 겪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재검토를 해야 하는 난처한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기업경영에 대한 새로운 방식에 대한 시장의 지원(ESG투자기금을 칭하는 듯)이 두껍게 진행되면서, 종업원들과 고객들 간에 지난 위기에 시행하였던 허리졸라맺기 식의 대처는 기업의 이미지에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높아지고 있다. 조업중단이 지속되면서 과거식의 반전(신속한 회복)역시 어려운 선택으로 남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에 처해 지면서 경영자들은 항상 그러했듯이 불요불급한 비용을 줄이기 시작한다: 61%의 경영자들은 기업목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용을 신중하게 줄이려고 한다며 FCLTGlobal 기업조사기관이 밝혔는데 이 기관은 기업을 장기적 관점에서 경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 조직이다.
장기적으로 환경위기에 대처하는 것과 당장의 공급체계에서 발생하는 혼란 가운데, 많은 기업들은 눈앞에 압력이 적은 이슈에 대해서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shelve them). 그러나 이를 소홀히 다루면, 국제적으로 압박이 되고 있는 ESG(environmental, social & governance)의 기준을 수용해온 경영자들이 ESG기금에 의해 감시를 당하게 된다. 이해관계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기준으로 줄곧 기업을 평가해온 JustCaptial의 책임경영자인 Martin Whittaker는 “불경기를 맞이하면서 ESG기준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자주 질의를 받게 된다. 위기가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은 장기적인 사고를 포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위축된다”고 경고한다.
‘함께(we)’라는 활력를 주장하고 이에 헌신해야 할 WeWork(공유사무실를 운영하는 세계조직)이 자사소속의 근무자 천 명을 줄이고 청소업무를 외주로 돌리면서 자신의 가치에 변죽만 울렸다. 지난 몇 주간 발생한 급격한 변화로 일상적인 사업을 유지한다는 것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정상적인 시기에는 주문공급 물량이 부족할 때는 가격이 오는 것이 정상이지만, 위기 시에 가격을 올리는 것은 사기행위처럼 여겨진다. 아마존은 이번 주에 공정한 가격 규정을 어긴 수천 개의 기업을 거래명단에서 삭제하였고, 뉴욕 주의 상원의원들은 마스크 가격을 올려 받은 소매점들에게 벌금을 매기도록 제안하기도 하였다. 유사하게 기업들이 종업원의 지위와 직종에 따라 차별된 혜택을 시행한다면, 이는 회사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하면서 컴퓨터로 업무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과는 별도로, 월마트나 맥도날드처럼 최저임금 수준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이나 우버같이 gig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염병에 대한 염려가 비대면 노동을 활성화시킨다. “뉴욕시민들은 자신들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음식을 배달받으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아마존 소속 소포와 음식의 배달인들이 병가를 내면 시스템은 무너진다”고 뉴욕대학의 윤리시스템 센터의 주임을 맡고 있는 Alison Taylor는 이야기한다. 윤리적인 기업가들은 사회보험의 혜택을 반드시 계약에 넣어야 하며 gig(임시직)노동자에게도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지옥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요? 천만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 입장을 취하는 기업들은 위기의 과정에서 더욱 강해진다. 딜로이트(세계4대 회계법인의 하나)는 2025년까지는 적극적 투자기금의 절반이상이 ESG를 의무규정으로 요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고, 성장을 연구하는 조직은 긴 호흡으로 경영하는 기업들이 경제의 순화과정과 상관없이 양호한 성적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충격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자.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나타난 최근의 수치를 면밀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어느 정도로 감염되었는지? 얼마나 위험하고 어떤 경로로 감염되고 있는지? 이는 주요 언론들의 자료를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수치들은 시장의 불황이 길게 지속될 것이며 장기적인 방식으로 대응해야 기업을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FCLTGolbal(장기행태연구소)책임자인 Sarah Williamson은 주장한다. PayPal(해외결제 신용회사)같은 기업은 자신의 조직표에서 맨아래에 위치한 직원의 근무혜택을 우선적으로 개선하면서 투자자들의 선호와 지지를 받았다.
이제 기업들이 위기 속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다:
기업들은 선택의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결정해야 한다. ESG기금으로부터 장기적 관점이 지지를 받는다 해도 경영자들은 단기적 수익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압력에 시달린다. 그러나 직원을 해고하고, 거래관계를 쉽게 바꾸고, 환경적 의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불가피한 조처가 아니라 해당 기업이 갖는 위선으로 간주되면서, 시민들의 신뢰를 급격히 추락시킨다.
1963년에 이미 Stanford 리서치 연구소는 ‘이해관계자’라는 용어를 이것이 없으면 조직이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 즉 주주들보다 이해관계자라는 사항들이 기업의 존속에 매우 긴요하다는 것을 기업경영자들이 깨닫는 데 (팬데믹 덕분으로) 수십 년이 걸린 셈이다.
뉴욕 주 와쇼(Warsaw, NY)의 가족 식당 주인은 25명 종업원 고용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식당 내에서 손님 받을 수 없어 매상이 확 줄은 사장은 드라이브 스루로 음식만 사가게 하고 간간히 빵과 치즈 등도 함께 파는 궁여지책을 동원해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이에 사장은 소상공인 재난지원금 대출인 급여보호프로그램을 이용하려 30년간 거래한 지역 은행에 12만5천 달러(약 1억 5천만 원) 대출을 신청했다. 그러나 은행에서 돌아온 답은 돈이 다 떨어져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14 years in 14 days: Inside the chaotic rollout of the SBA’s PPP loan plan to save America’s small businesses,” Fortune, April 30, 2020).
소상공인을 위한 구제금융이 시작된 지 14일도 안 돼 다 소진 됐다는 <포춘>지 기사
코로나19에 직접 타격 받은 소상공인과 서민
미국 정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국 경제가 1920년대 대공황급 이상으로 악화될 것을 우려해 선제적 방어에 나섰다. 엄청난 돈을 풀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막대한 이 긴급재난지원금을 갚을 이들은 정작 누구인가? 돈이 곳간에서 흘러 넘쳐서 준 것이 아니라 빈 곳간에서 돈을 찍어서 풀어낸 것이니 향후에 납세자들이 이 돈을 갚아야 한다. 그리고 향후란 그리 먼 미래도 아니다. 현재 50세 미만의 직장인들이 갚아야 할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Who Will Pay For the Coronavirus Bailout? If you’re under 50 and Working, You Will,” Fortune, April 21, 2020).
돈을 찍어 푸는 것이 사망 직전의 미국 경제를 살릴 유일한 방법임을 일단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좋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쓰여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이것을 갚아 나가야 할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국민들이고 서민들이다. 당장 실탄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야 한다. 한시가 급한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서민들이 일하는 곳은 대부분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사업체다. <뉴욕타임스>가 만든 아래 표를 보면 큰 그림이 보인다. 미국에선 고용근로자 500명을 기준으로 그 아래를 중소기업으로 그 이상을 대기업으로 분류하는데,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민간부문 근로자의 거의 절반이 고용되어 있다. 그리고 100명 미만의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체에서 대부분의 서민들이 일을 한다. 2016년 현재 6천만 명에 이르는 근로자가 3,100만 개의 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Where the Small-Business Relief Loans Have Gone,” New York Times, May 7, 2020). 그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들에게 인공호흡기를 달아 그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일단 막는 것이 매우 시급한 일이다. 그것이 곧 일반 서민을 보호하는 지름길이기에 그렇다.
미국 민간부문 근로자의 업체(고용자수)별 고용 현황
소상공인 자영업체에 미국의 민간부문 근로자의 거의 절반이 고용되어 있다 <출처: 뉴욕타임스>
정부가 소상공인들을 돕겠다며 내놓은 돈은 이제까지 6,600억 달러(약 809조 원: 1차 3,490억 달러(약 429조 원); 2차 3,100억 달러(약 380조 원))이다. 이름은 급여보호프로그램(Paycheck Protection Program:이하, PPP), 그걸로 직원의 급료를 주고 해고하지 말라는 취지로 붙인 이름이다.(João Granja 외, 2020). 그런데 그 돈은 제대로 쓰였을까? 그렇지 않아서 문제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혜택을 본 이들은 매우 적고 대부분 PPP 구경도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돈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였을까?
대기업이 낚아채간 소상공인 재난지원금(PPP)
영세자영업자 같은 소상공인에게 주라고 국가가 푼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위 사례의 식당 사장의 말을 들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돈이 어떻게 다 떨어졌는지 곧 알게 되었다. <루스 크리스 스테이크 하우스>(Ruth’s Chris Steak House)같은 큰 체인점이 정부가 돈 풀자마자 바로 신청해서 수백만 달러를 가져갔다. 그런 큰 회사는 일 년에 수백만 달러를 번다. 정말 화가 났다. 그런 대형 식당 체인이 소기업인가. PPP라는 게 원래 소상공인 도우라고 조성한 돈 아닌가? 근데 왜? 도대체 왜 그 돈이 그들에게 갔는가?”(Fortune, April 21, 2020).
이런 상황은 와쇼의 식당 사장만 겪는 게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뉴욕시에서 6개의 식당을 경영하며 310명을 고용한 제법 큰 소상공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도 PPP를 신청했지만 단박에 거절됐다. 그의 입에서도 “범털(큰 회사)들은 구제금융 받고, 나 같은 개털들은 못 받고 이게 말이 되나?”하는 분통이 터져 나왔다.(“‘The Big Guys Get Bailed Out’: Restaurants Vie for Relief Funds,” New York Times, April 20, 2020).
그럼 큰 식당 체인들은 도대체 얼마나 타 갔을까? 100개 이상의 점포에 5천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루스 크리스 스테이크 하우스>가 2천만 달러(악 245억 원)을 받았다. 전국에 189개 점포를 갖고 8천 명의 직원을 갖고 있는 햄버거 체인점 <쉐이크 쉑>(Shake Shack)은 1천만 달러(약 123억 원), 샌드위치 체인점 <포트벨리>(Potbelly)는 전국에 약 500개 점포가 있고 직원 수는 6천 명에 이르는데 이 회사도 소상공인 구제금융 1천만 달러를 받았다.(New York Times, April 20, 2020). 또 다른 대형 체인 <제이 알렉산더스>(J. Alexander’s)도 1,510만 달러(약 185억 원)의 PPP를 따냈다.(“Firms With Trump Links or Worth $100 Million Got Small Business Loans,” NBCNews, April 25, 2020). 요새 말로 ‘득템’(좋은 것을 획득했다는 신조어)했다.(그것이 득템인 이유는 조금 뒤에 밝히겠다).
이것을 두고 식당, 술집, 호텔 등 사업체의 사교단체인 <뉴욕시접객업소연맹>(NYC Hospitality Alliance)은 “정말 분노와 짜증이 난다. 정부의 지원은 소상공인 영세 자영업 식당에게 가야 마땅하다”는 성명을 냈다. <미국식당협회>(National Restaurant Association)에 따르면 3월 이후 4월 중순 현재까지 미국에서 약 8백만 명의 식당 종사자 또는 노동력의 3분의 2가 해고당했다. 식당업계는 3백억 달러(약 36조7천억 원)의 손실을 입었고, 4월말까지 추가로 5백억 달러(약 61조 원)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추정했다.(New York Times, April 20, 2020). 대기업체인 보다 영세 식당들의 타격이 컸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코로나사태가 단기간 내에 끝나지 않아 셧 다운(정상영업중지)이 연장되더라도 버틸 여력들이 있어 잘 넘길 것이지만, 영세자영업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약 3분의 2가량이 사라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세업자를 살리라고 제공한 구제 금융을 덩치 큰 대기업이 톡 채가 버렸다. 대기업의 가로채기는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소상공인 구제 금융에 숟갈 얹은 호텔 등 대기업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거의 300개에 이르는 상장기업들이 소상공인 구제금융 중 10억 달러(약 1조 2천억 원)을 가져갔다. 예를 들면, 텍사스 주 달라스시 에 기반 한 호텔회사 애쉬포드 주식회사(Ashford Inc.)는 리츠 칼튼 등의 특급호텔을 소유한 호텔업계 제왕이다. 이런 회사가 7,600만 달러(약 934억 원)의 PPP 구제 금융을 받았다. 애초에 신청은 간 크게도 총 1억2천6백만 달러 (약 1,544억 원)을 했다. 그 절반가량을 따낸 것이다.(“Public Companies Received $1 billion in Stimulus Funds Meant for Small Businesses,” Washington Post, May 2, 2020; “Luxury Hotel Company Is Biggest Beneficiary of Small-Business Funds,”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소상공인 구제금융 받아간 대기업 중 호텔업계의 제왕인 애쉬포드 소속 리츠 칼튼 아틀랜타 호텔의 전경. 이 호텔은 PPP로 2천9백만 달러를 받아냈다 <출처: 뉴욕타임스>
도대체 어떤 대기업이 이런 짓을 했느냐는 비난이 비등했지만, 소관부처인 중소기업청(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이하 SBA)은 양심불량 기업들의 명단을 공개하길 꺼렸다.(뭐가 구리긴 구린 모양새다). 그러나 매체는 그동안 과거에 공개됐던 대출 프로그램 정보를 종합해 몇몇 회사 이름을 밝혀냈다.(우리나라 대부분의 맹탕 기자들과는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그때 단서가 됐던 것은 바로 회사 대표(CEO)의 연봉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인공지능회사 <베리톤>(Veritone)은 2018년도 대표의 연봉이 1,870만 달러(약 230억 원), 동생이 1,390만 달러(약170억 원)를 받는 대기업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이번에 650만 달러(약 80억 원)의 PPP를 받았다.(Washington Post, May 2, 2020).
뉴저지 주의 제약회사 <애퀴스티브 테라슈이틱스>(Aquestive Therapeutics)의 대표 연봉은 작년에 260만 달러(약 31억 원), 올해 이 회사는 소상공인 구제금융 480만 달러(약 59억 원)를 받았다. 복제약회사인 <웨이브 라이프 사이언스>(Wave Life Sciences)는 720만 달러(약 88억 원)의 PPP를 챙겼는데 회사 대표의 2018년 연봉은 580만 달러(약 71억 원)였다.(Washington Post, May 2, 2020). 회사 대표가 그렇게 엄청난 연봉을 챙기는 큰 회사이면서도 소상공인을 위한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마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채간 것이다. 이들이 왜 부자가 되었는지 알만하다. 챙길 건 확실히 챙기자가 이들의 모토!
14일 내에 14년 치 지원금(1차 PPP) 소진: 그 많던 소상공인 재난지원금은 다 어디로 갔나?
그렇게 영세자영업자 구제를 위한 정부재난 지원금은 정작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 소진되었다. 특히 4월 3일 발효된 PPP는 14일이 되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재무부 산하 중소기업청(SBA)이 보통 소상공인을 위해 대출프로그램으로 잡은 액수가 일 년에 300억 달러(약30조7천억 원)가 안 된다. 그런데 SBA의 14년 치 소상공인용 대출금액 보다 더 많은 코로나19 대응 PPP가 14일이 되기도 전에 동나 버린 것이다.(Fortune, April 30, 2020). 대부분 상장사인 대기업의 호주머니 속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전국의 소상공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2차 PPP가 또 발주되었다. 1차 때 보다 대기업이 몸을 조금 사린 것 같지만 여전히 대기업이 채간 돈이 훨씬 많다. 다음 <뉴욕타임스>의 도표를 보라.
1백만 달러(약 12억 원) 이상의 거액대출이 초기 재정지원에 큰 부분 차지한다. 첫 번째 PPP의 경우, 소수 5% 기업에게 대출금 전체의 거의 절반이 갔다. 대기업이 채갔다. 15만 달러(약 1억 8천만 원) 미만의 소액을 빌린 소상공인은 전체 대출자의 70%를 차지하지만 빌려간 액수는 PPP의 15%에 불과하다. 2차 PPP는 조금 눈치가 보였는지 소액대출이 늘었다(1차 대출액 평균 20만6천 달러; 2차 평균 7만9천 달러). 15만 달러 미만의 소액대출은 PPP의 37%를 차지했다. 그러나 1백만 달러 이상 대출을 챙긴 대기업은 대출자의 1%에 불과하지만 받은 액수는 PPP의 4분의 1이 넘는다.(“Where the Small-Business Relief Loans Have Gone,” New York Times, May 7, 2020).
1,2차 소상공인대출(PPP) 대출액별 현황
소상공인대출(PPP) 중 1백만 달러가 넘는 대출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출처: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분석에 따르면 소상공인의 25%만이 정부지원을 받았다.(“Failing to Help Those Who Need It Most,” New York Times, April 24, 2020). 공간적으로 보면, 코로나로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은 3월 4월 현재까지 뉴욕과 뉴저지 주이다. 그러나 시카고대학과 MIT대학의 학자들이 분석해 본 결과 이런 지역의 소상공인들은 PPP지원을 적게 받았고, 오히려 코로나의 직접적인 타격이 덜한 지역에서 지원을 더 많이 받는 불균형 현상이 벌어졌다.(João Granja 외, 2020; New York Times, May 7, 2020; Washington Post, May 2, 2020). 한 마디로 코로나 대응 PPP가 코로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애먼 데로 가버린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관련 인물들이 따간 PPP
그렇다면 어떤 대기업들이 소상공인을 살리라고 준 돈들을 날름 삼켜버린 것일까? 어떤 루트로? 다음의 예를 보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
<홀라도르 탄광>(Hallador Coal)이란 회사가 있다. 이 회사가 PPP로 타간 돈은 1천만 달러(약 123억 원)이다. 그런데 이 회사가 로비스트로 고용한 이는 다름 아닌 트럼프 행정부에서 ‘스캔들 메이커’로 악명이 높았던 스콧 프루이트(Scott Pruitt)이다. 그는 환경청장(EPA)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에너지업계 로비스트가 제공한 10만 달러(1억2천만 원)를 받고 모로코 여행을 하는 등의 온갖 지저분한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 한 마디로 청렴과는 거리가 먼 쓰레기 탐관오리다. 그러나 그를 감싸고 도는 트럼프에 의해 청장직을 유지하다 결국엔 사임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간 곳이 바로 홀라도르다. 그는 지금 홀라도르를 위해 대정부 로비스트로 맹활약 중이다. 동시에 현재 그는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14건의 죄목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Fossil Fuel Firms Linked to Trump Get Millions In Cornavirus Small Business Aid,” The Guardian, May 1, 2020; “Firms With Trump Links or Worth $100 Million Got Small Business Loans,” NBCNews, April 25, 2020; “E.P.A. Chief Scott Pruitt Resigns Under a Cloud of Ethics Scandals,” New York Times, July 5, 2018).
뇌물 등 온갖 비리 추문에 휩싸였으나 트럼프의 비호 아래 버티던 스콧 프루이트가 사임을 두고 <아틀랜틱>은 그의 사임으로 엄청난 추문이 과연 덮어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사임 후 <홀라도르 탄광>의 로비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그 회사는 소상공인 구제금융 1천만 달러를 따냈다.
<리노 리소시스>(Rhino Resources)란 탄광회사도 1천만 달러의 PPP를 받았다. 그런데 그 회사의 전임 사장이 누구였나 하면, 현재 트럼프의 <미국광산안전보건청>(mine saftey and health administration)의 수장인 데이비드 자테잘로(David Zatezalo)다. 이게 끝이 아니다. <라마코 리소시스)(Ramaco Resources)라는 탄광회사는 무려 840만 달러(약 103억 원)을 따냈다. 어떻게? 현재 회장 랜디 애킨스(Randall Atkins)가 <미국에너지국>(Dept. of Energy)의 석탄위원회위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더 댈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귀가 더러워질까봐 멈춘다.
이렇게 현재 트럼프 행정부와 연줄을 가진 전 현직 관료들이 물심양면으로 애쓰는 통에 소상공인을 살리기 위해 만든 정부재원에 대기업들이 침을 발라 꿀꺽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물론 그들은 그런 연줄이 전혀 돈을 타내는데 작동하지 않았다고 극구부인하고 있다. 비리 저지르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사람 보기 드물다. 이런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진가 보다. 하긴 잘못을 시인할 인간이면 아예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공산이 클 터. 어쨌든, 이렇게 해서 사양산업인 화석연료 생산 대기업이 소상공인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따간 돈이 무려 5천만 달러(약 613억 원), 그 중 트럼프 행정부와 연계된 회사가 가져간 PPP는 <가디언>추산 2,800만 달러(약 343억 원), <엔비시뉴스>추산 1,830만 달러(약 224억 원)이다.(“Fossil Fuel Firms Linked to Trump Get Millions In Cornavirus Small Business Aid,” The Guardian, May 1, 2020; NBCNews, April 25, 2020; “Coal Snags $31 Million in U.S. Stimulus Loans for Small Business,” Washington Post, May 5, 2020).
소상공인 대출 낚아채간 석탄회사란 제목의 <워싱턴 포스트> 기사
트럼프 행정부와 관련된 인사로 인해 PPP를 받은 회사는 화석연료 회사 이외에도 많다. <크로포드 유나이티드>(Crawford United)와 <플로테크 인더스트리>(Flotek Industries)가 그 예로 각각 370만 달러(약 45억 원), 460만 달러(약 56억 원)를 받았고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작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에서 해외대사 등의 요직과 특혜를 받은 회사의 이사 등의 중역을 돌아가며 맡고 있다. 소위 회전문 인사의 당사자들이 정부 돈을 타내는 데 거간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NBCNews, April 25, 2020).
은행과 단골고객의 상부상조
앞에서 언급했듯 소상공인의 몫을 채가는 이런 비열한 짓의 선두주자는 단연코 트럼프 행정부와 연줄이 닿는 대기업이다. 그 다음은 어떤 방식이 동원되었을까? 소상공인옹호 시민단체인 <중심가연맹>(the Main Street Alliance)대표 아만다 볼란틴(Amanda Ballantyne)은 “은행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온 기업”이 PPP를 따갔다고 말한다.(NBCNews, April 25, 2020). 은행과 짬짜미 한 기업들이 타갔다는 뜻이다.
대형은행들은 PPP신청을 받을 때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대출신청을 받았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전 회에서 필자가 말했던, 선착순 규칙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두 개의 줄을 만들었다. 하나는 진짜 소상공인을 위한 줄, 다음은 속성 줄(왜 이렇게 요사이 패스트트랙이 유행하는 줄 모르겠다)인 기존의 단골 대기업을 위한 줄. 예를 들면 제이피모건(JPMorgan)이 그렇게 두 개의 줄을 세웠다. 그런데 대기업은 솔직히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전화 한 통이면 끝나는 줄이니까. 아니면 먼저 은행 측에서 고객에게 전화를 했을 수가 있다. 이렇게 좋은 대출조건이 있는 상품이 나왔으니 신청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타진을 했을 수가 있다. 이것저것 다 논외로 치더라도 영세자영업자들은 대출 받는데 제출해야 하는 서류작업에 서툴다. 그러나 대형회사들은 능숙하며 완벽하게 서류를 꾸며낼 준비가 언제나 돼있다. 이미 게임이 안 되는 것이다.(New York Times, April 24, 2020).
소상공인 대출을 대행하는 대형은행이 선착순 규칙을 어겨 소상공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
또 대출 대행 은행은 자기들과 관련 있는 인사가 있는 기업에게 우선적으로 대출을 해 주었다. 스마트폰 보호 장구를 만드는 기업인 <재그주식회사>(Zagg Inc.)는 무려 940만 달러(약 115억 원)의 지원을 키뱅크(KeyBank)를 통해 받았다. 그런데 현재 회사 대표가 키뱅크의 과거 고위 임원이었다. 웃긴다. 서로서로 챙겨주기 그런 건가? 이 때문에 볼란틴은 정책입안자들이 소상공인지원프로그램을 연줄과 은행단골고객이 아닌 실질적인 소상공인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도록 규정을 정비해야한다고 일갈하고 있는 것이다.(NBCNews, April 25, 2020).
그렇다면 정부의 구제금융 분배를 대신한 대행사인 은행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수수료다. 그들이 고작 한 일이라곤 신청 받아 정부 돈을 자신들 입맛대로 나눠준 것뿐인데 엄청난 수수료까지 챙겼다. 미국공영라디오방송(NPR)에 따르면 대출대행 은행이 수수료로 거둔 금액은 무려 100억 달러(약 12조 원)가 넘는다.(“Here’s How The Small Business Loan Program Went Wrong In Just 4 Weeks,” NPR, May 4, 2020).
그들이 대기업에게 우선적으로 거액의 돈을 선뜻 대출해 준 데에는 또다른 야비한 이유가 있다. 대출 규모가 클수록 수수료가 더 높기 때문이다. 물론 대출 서류 작성 등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정력이 다수에게 소액대출을 해줄 때 보다 덜 들어가는 것은 덤이다. 결국 종합하면, 소상공인에게 가야할 구제 금융을 이들 은행들도 챙겼다는 뜻이다. 단골고객인 대기업과 짝짜꿍하면서. 이런 걸 보고 우린 말한다. 벼룩의 간을 내먹는다고. 그러면 일이라도 제대로 할 것이지, 이게 뭐람. 하긴 아무런 정부의 제제가 없는 곳에서 이들처럼 안 하는 것이 바보취급 받을 테니 저들의 행보는 저들로서는 무척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을 감싸고도는 판에 누구 탓을 하랴.(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말하겠다).
대형회사의 PPP가 득템인 이유
그러면 이쯤에서 다음의 질문이 나와야 한다. 상장기업인 대기업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소상공인 대출에 슬쩍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기업이 굳이 죽어라 PPP 돈을 빌리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500명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한 대기업이 소상공인을 위한 PPP를 받을 수 있었는가?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대기업이 노린 것은 바로 탕감이다. 탕감을 노리고 PPP를 받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PPP는 다른 대출과 달리 탕감가능성이 있는 대출이다. 대기업은 탕감 받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그토록 PPP를 타내려고 애썼던 것이다.(New York Times, May 7, 2020). 탕감 받는 조건은 6월 30일까지 직원을 해고 하지 않는 것이다.(New York Times, April 20, 2020). 이 조건은 소상공인보다 덩치가 큰 대기업이 지키는 것이 더 쉽다. 왜냐하면 덩치가 크면 그만큼 그 시한까지 고용 유지가 쉬우니까.
이에 비해 소상공인들은 규모가 워낙 작고 영세하다 보니 그게 어렵다. 미국에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소상공인들은 이미 직원들을 많이 내보냈다. 일단은 실업보험을 타게 하고 사태가 나아지면 다시 고용할 요양으로 나름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일단은 소나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코로나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이 경제 재개를 다 허용한 것도 아니다. 즉 열고 싶어도 못 열 수 있다. 또 열었다한들 파리만 날리고 있고, 십중팔구 앞으로도 그렇게 될 공산이 매우 크다. 사업이 팬데믹 이전처럼은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말은 곧 고용을 그 이전으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소상공인에겐 대출금 탕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과 같고, 그것이 현실화되면 대출은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게 된다는 의미다.(“Small Businesses Counting on Loan Forgiveness Could Be Stuck With Debt,” New York Times, May 6, 2020).
소상공인 구제금융은 탕감 가능하지만 그 요건을 만족 시킬 수 있는 것은 대기업이지 소상공인들은 아니다. 그래서 탕감을 염두에 두고 대출을 받은 소상공인들은 자칫하면 이자와 함께 원금도 갚아야 해서 빚더미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게다가 문제가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소상공인이 PPP를 받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십 번 신청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노’ 밖에 없다.(“Denied, Deferred and Ignored: 13 Applications, and No Relief,” New York Times, April 24, 2020). 설사 PPP를 받는다 한들 탕감은커녕 빚더미에 앉을 공산이 큰 데다, 또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서 받아 놓고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손도 못 댄 소상공인들이 많다. 반드시 급여로만 대출금의 75%를 써야 한다는 단서 조항 때문이다.(“Some Small Businesses That Got Aid Fear the Rules Too Much to Spend It,” New York Times, May 2, 2020). 이미 직원들을 내보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이런 걸 두고 엎친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소상공인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는 와중 대형회사는 6월말까지의 고용은 식은 죽 먹기니 일단 타고 보자하고 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6월말의 시한만 지나면 탕감 받고 직원들을 가차 없이 자를 것이 뻔하다. 누구에겐 PPP가 생명줄이자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는 먹고 입 싹 씻을 수 있는 그저 눈먼 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득템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어쨌든 대기업이 PPP를 거의 다 채가자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 이에 재무부장관 므누신이 2백만 달러(약 24억5천만 원)이상 대출자(대기업만 가능)에 대한 조사가 들어갈 것이고 법적책임도 물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완전 뒷북이다. 이에 몇몇 회사들이 받은 돈을 토해내겠다고 발표했다. 호텔체인점 <에쉬포드>, <쉐이크 쉑> 햄버거, <루스 크리스 스테이크 하우스> 등이 슬그머니 발을 뺀 것이다.(“Hotel Group Will Return Tens of Millions in Small Business Loans,” New York Times, May 2, 2020).
짜고치는 고스톱: 탕감받기 위해 로비해 법령 바꾼 대기업
이제 다음 질문에 답할 차례다. 어떻게 500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대기업이 500명 미만의 소상공인 구제 금융을 받았는가?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재무부장관 므누신이 1차 PPP가 소진되고 나서 대기업을 향해 뒷북을 친 것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면 저 질문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답을 확보할 수 있다.
왜 재무부와 SBA는 초장부터 PPP 시행 계획을 세밀하게 하지 않았는가? 이번 경우(코로나19)가 전례가 없는 것이라 경황이 없어서?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용인 500명을 기준으로 벌어진 PPP 자격 요건을 보면 처음부터 너무나 꼼꼼히 대기업을 위해 정책과 법안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니까 그렇다. PPP 법안은 5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대기업이라도 회사 전체로 보지 않고 회사에 속한 물리적 장소 1개 당 직원이 500명 이하면 PPP를 받을 수 있게 허용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다. 수백(십) 개의 체인점과 수천 명의 직원을 고용한 식당체인과 호텔체인이라고 하더라도 체인점 단 한 곳의 직원이 500명만 넘지 않는다면 전체 회사에 소상공인이 탈 수 있는 자격요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완전 꼼수다. 물론 이런 꼼수도 이들 업계의 집요한 대정부 및 대의회 로비를 통해 이루어진 혁혁한 성과다.(New York Times, April 20, 2020).
이렇게 정치권은 철저히 대기업 편이다. 대기업에게 뭔가를 주지 못해 안달을 한다. 물론 그래야 자신들이 주워 먹을 콩고물이 떨어지니까. 그러니 실로 일로매진할 수밖에. 소상공인과 서민들을 위해 일해 봤자 그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다. 도의적 책임과 사명? 바랄 걸 바라자. 그들의 안중엔 그런 것은 없다. 소상공인과 거기서 일해 생계를 유지하는 서민들 생각일랑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러니 저런 짓을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기준 선 500명과 관련한 특혜가 한 가지 더 있다. 이것은 다음 회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다윗과 나단
이렇게 소상공인을 위한 PPP는 구멍이 숭숭 난 채 내가 말하는 제국들(탐욕과 부정 및 반칙에 찌든 극소수 부자들, 엘리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작 생명줄이 필요한 이들에겐 지푸라기 하나 던져주지 않고 모터보트를 타고 있는 이들에게 기름을 더 넣어준 격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제국 중 어떤 것들은 슬그머니 PPP를 돌려주기로 했단다. 그러면 다인가? 생각해 보라. 그것이 도둑질 하고 들키니까 제자리에 갖다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반환하면 범죄 아닌가? 자격도 없는 것들이 정경유착과 로비로 규정을 수정해 자격 있는 것으로 둔갑하고 또한 갖은 연줄 동원해 없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을 가로챘다. 그건 명백한 범죄다. 한도 끝도 없는 욕심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제국들이 그렇게 PPP를 가로챈 사이 생명줄 놓친 자영업자들은 줄도산 하고 노동자들은 실업자로 전락했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일자리는 그들에겐 유일하게 남은 호구지책이었다. 번듯한 직장도 아니고 그저 허드레 일자리였다. 그것마저 낚아 채갔으면서, 그래서 남의 가정을 파괴했으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가? 돈을 반환하기로 했으니 끝이란 말인가? 하긴 누가 뭐래도 PPP를 꿍치고 앉아 뱃속을 채울 요량인 대기업도 있긴 하니 더 이상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니 뭐 잘못 한 게 있느냐고 적반하장으로 안 나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인지. 남의 나라 일이지만 참 답답하기만 하다.
이 대목에서 구약성서의 나오는 다윗 왕과 나단 선지자의 삽화가 떠오른다. 나의 지도교수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가끔 언급하던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전장에 나가 싸우는 우리아의 아내에 꽂혀서 간통을 저지른다. 그것이 발각 날까봐 충신 우리아를 일부러 최전선에 보내 죽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왕의 이 비열한 범죄는 유야무야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이 다윗 앞에 선다. 그리고 이런 이야길 꺼낸다. 여기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 부자는 양과 소가 많고 가난한 자는 가진 것이라곤 오직 새끼 양 한 마리뿐이다.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고 부자는 자기 양과 소를 잡아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새끼 양을 빼앗아 그걸 잡아 대접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그 자를 잡아 오라고 사형에 처하겠다면서. 그 때 나단이 다윗을 보며 말 했다. 왕이여 그게 바로 당신이다. 그 순간 다윗은 고꾸라져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이런 다윗 같은 제국을 기대하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꿈일 터…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보다 질병과 전염병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Clausewitz의 표현에 의하면, 인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해당사회가 치루어야 할 전투를 전략적 개념을 통해 수행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전쟁을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연결망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다차원 속에서 타격을 가해오는 상대(질병)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난 3월11일 WHO가 COVID-19를 팬데믹으로 공식 선언하였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전문가들은 전염병이 수시로 발생할 것이며, 세계화와 인구 증가,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게 될 것을 여러 차례 경고하여 왔다.
특히 세계화로 이루어진 전례가 없는 연결성 즉 대도시권의 대중교통수단, 빈번하게 이루어진 항공여행, 대규모의 크루즈 관광 등이 대양과 대륙을 정기적으로 연결하면서, 많은 국제 행사들이 이루어지고 산업계의 공급사슬구조가 형성되면서 팬데믹의 조건을 악화시켜 왔다. 그 결과로 각국 정부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제공해야 할 기본적 사회정책이 위축되었다.
COVID-19가 발발하자 각국 정부들은 지역봉쇄와 여행제한 그리고 국경차단을 통해, 연결고리를 통제하면서 대응해 왔다. 그러나 연결고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는 해답이 아니다. 반대로 국제적인 지도자들간의 협력과 합동적인 과학적 연구가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데 핵심이다. 요점은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연결고리의 시스템이 주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COVID-19의 사태가 우리에게 시스템에 대한 조언을 주고 있는데, 이미 주지하듯이 세계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금융센터처럼, 연결고리의 시스템이 파괴될 경우에 입는 피해가 연결성이 주는 혜택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는 점을 팬데믹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현재 위협이 던지는 근본적 도전은 연결성과 회복력 간의 거래인데, 후자 즉 회복력이란 사회가 시스템의 충격에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의미한다.
복잡계의 이론가들은 잘 짜여진 연결고리가 시스템적인 회복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 단, 기존의 관계라는 요소가 변화된 이후에 가능하다. 이는 특히 수많은 상호연결 고리들이 사회시스템 전체를 매우 빠르게 뒤흔들고 의도하지 않았고 예측도 할 수 없는 재구성의 결과를 만들어 낼 때에 유효하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대체로 세계경제에 유익하다. 그러나 중국이 2003년 이래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로 성장한 이후 발생한 이번 COVID-19는, 지난 SARS와 견주어 볼 때, 중국과 세계를 묶는 연결고리의 기능과 승수적으로 결합하여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결성과 회복력이 균형적으로 제자리를 잡게 하는 전략적 방침은 회복력을 극대화하는 영역에 국가적으로 시스템을 준비하고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선, 이는 전략수립의 결정과정에 큰 변화를 요구한다. 국가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초연결화된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특히 작고 단순한 사건이 복잡한 사슬 속에 사방으로 파장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국제적 연계의 복잡성에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이러한 결정을 통하여, COVID-19와 같은 전염병의 전파성과 싸우는 국가단위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과 싸우는 최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부자국가들과 국제적인 보건기구들이 지역단위로 팬데믹을 통제하는 국제적인 시스템을 공동으로 갖추어야 한다.
팬데믹은 각국의 질병센터만 고립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이러한 약한 고리가 붕괴되면 사방으로 확산되며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초기에 대응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약한 고리에는 이주민 수용캠프, 빈민촌, 공공보건이 취약한 빈곤한 나라들이 해당된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22억의 인구가 물부족을 겪고 있으며 42억 인구에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한 실정에 있다.
팬데믹은 경제사정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대응은 해당 국가가 회복력을 유지할 시스템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G20 국가 지도자들은 이번 전염병과 싸우는데 가능한 모든 국제적 금융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보호무역으로 국제간 협력을 방해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생한 시스템적 충격에 대응하는 다자간 무역기능을 신속히 복원시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경쟁력의 회복을 지원하는 환율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COVID-19의 전략적 정책으로 국가마다 사정에 따른 회복력을 승인해야 한다. 식량과 의료 그리고 기타 전략적 물품의 공급을 다양화하여, 공급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충격을 이겨낼 확실한 공급의 인프라가 요구된다.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진료에서 종합 병원에 이르기까지 의료시스템을 갖추어야 하며,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호주의 경우, 자체적으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식량 공급체계에 혼란이 발생하면 필요한 대륙에 즉시 식량수송이 가능할 만큼 비축량을 운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국가들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가운데 공공보건의 위협을 관리할 수 있는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정치제도와 사회적 공헌을 개선해 나아가야 한다.
이번 팬데믹은 상황에 대응하는 각국의 역량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동시에 연결성과 회복력 간의 보다 견고한 균형을 찾도록 세계화를 재조정해야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전략적인 방침을 바꾸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겪고 있는 경제불황은 국가와 세계단위의 활동을 어쩔 수 없이 위축시키고 있지만, 이후 회복될 경제활동은 반드시 팬데믹 이전의 수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지난 여름 호주가 격은 기후의 재난(산불)은 이미 현재 지구의 탄소화가 지닌 위험이 어떤 것이지 잘 보여주었다. 연결성과 관련하여 재난으로부터 회복력을 갖추기 위하여 우리 삶의 방식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이제 분별하고 성찰을 해야 할 시점이다.
신코로나 폐렴역병이 왜 세계를 개변시키는가? 이는 현실문제일 뿐 아니라 더욱더 이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 국제관계 이론과 역사 서술 중에서, 바이러스 전염병의 각도에서, 역병이 도대체 인류의 기본 사회생활, 국가사이의 권력경쟁 및 이익분배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총결산하는(总结) 글은 거의 없다(少有).
그렇지만, 이번 신코로나 역병은 민족, 국적, 성별, 피부색, 연령 등을 구분하지 않고, 이미 세계 200여 국가와 지역에 확산되었다. 이로써 인류의 위기와 재난의 서술을 새롭게 다시 쓰게 되었고, 우리의 세계정치이론 인식과 역사경험을 변화 및 개선시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코로나 역병은 다음의 4가지 방면에서(从以下四方面) “전대미문”적으로 세계를 개변시키고 있다.
첫째, 신코로나 폐렴역병이 인류의 경제질서와 경제활동에 가져온 충격은 전례가 없을 정도이다(前所未有的). 이 전염병 때문에, 세계 절대 다수 국가가 자가격리를(居家隔离) 경험하고, 또 사회적 거리두기를(社交距离) 유지하고, 심지어는 도시봉쇄까지(封城) 해서, 경제활동 중의 소비수요는 압축을 받아(被压缩到了) 생활필수품 공급에 그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산업과 제조업은 모두 정상적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자본도 역시 명확한 투자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있다. 이는 경제활동의 모든 요소가 정지상태(停摆)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신코로나 역병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전 지구적 경제쇠퇴를 가져올지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앞으로 1929-1933년 대공황(大萧条)이후 최대의 세계 경제위기가 될 것이고, 심지어 어떤 이는 대공황시기에 비해 더 엄중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둘째, 신코로나 폐렴역병은 대국간 전략경쟁을 모든 요소의 대결시대로 진입하도록 만들고 있고, 현재의 중·미관계 악화는 이의 전형적인 보기이다. 우리들이 과거에 인식한 중·미관계의 경험적 사실은 “좋긴 하지만 좋아 보았자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또 나쁘긴 하지만 나빠 보았자 얼마나 나빠지겠는가?”였다(“好也好不到哪里,坏也坏不到哪里”). 그렇지만 오늘날의 중·미관계에는 이미 거대한 “범주적(파라다임의, paradigm) 변화(范式变化)”가 발생해버렸다. 정말로 총체적 대결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경제나 군사뿐 아니라 과학기술협력, 인문교류, 각자 국내시장과 경제관리체계 등의 방면에까지 포괄하여, 모두 충돌과 대결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중·미관계가 오늘날 악화되는 과정 중에 가장 위험한 요인은 감정화와 정치화이다(情绪化和政治化). 특히 미국정부는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기(甩锅)”위해 끊임없이 중국의 거동에 대해 “낙인찍기(污名化)”를 해왔다. 중·미관계는 “최악은 아니지만, 단지 더욱 악화될(没有最坏,只有更坏)” 가능성이 높다.
셋째, 신코로나 폐렴역병이 냉전종식 근 30년래 전대미문의 정치와 사회 사조에 새로운 격동과 기복을(激荡起伏) 가져왔다. 냉전종식은 자유주의 가치관과 그 실천의 세계화를 가져오도록 했고, 구체적으로 시장에 그 요소를 배치하고, 가치 및 산업의 연계구조의 배치를 통해 세계화를 구현했다. 더 나아가 각국 정치, 사회의 협치 프레임과 중대한 초국가적 의제설정과 협치(관리, 거버넌스 governance) 기제의 세계화도 가져왔다.
신코로나 역병이 폭발하면서,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 협치(거버넌스) 기제가 엄중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뿐 아니라 더욱더 “미국우선주의”의 협애한 대중영합주의(狭隘民粹主义, 포퓰리즘) 때문에 국제제도의 규칙을 기초로 하는 전 세계적 협치(글로벌 거버넌스, global governance) 역시 심각하게 쇠약해지고 있다. 역병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사회 및 개인의 관계는 중대한 역사적 조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정부의 개입과 자원배치 능력을 강화시키는 “신국가주의”가 전 세계 각지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넷째, 신코로나 폐렴역병이 전세계의 여론방향을 재(再)설정하고(다시 빗고, 重塑) 있다. 전대미문의 여론 “히스테리화”를 조성하고, 민족주의, 인종주의, 배외주의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자유 및 상호개방과 국가와 지역을 넘어선 사회적 교류왕래는, 신코로나 사태 이후, 엄중한 타격과 제한에 직면해 있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의 중요 경제체 사이에 상호 방어 장벽을 유발하고, 전략경쟁은 경제, 사회 및 여론 등 영역에까지 전면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래서 각국이 가치와 관념에서 상호 경계와 장벽을 치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는 서방 매체의 영향을 받아 “중국차별론”으로 대응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서방매체는 더 나아가서 도발의 기회를 잡고 중국에게 아프리카 국가의 채무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일부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정체를 강요당하고 있기도 하다.
신코로나 폐렴역병은 전 세계적으로 4단계의 “충격효과”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은 “공공위생위기” “경제와 민생위기” “사회위기” 그리고 일부 국가에 나타나는 “정치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충격은 제1, 제2 단계에 처해 있었고, 지금은 제3단계로 향해 건너가고 있는 이행기다. 제4단계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신코로나 역병은 어떻게 세계를 개변시킬까? 필자는 다음 3개 방면의 개변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본다.
하나의 방면은 세계가 “신 전국시대”로 진입해서, 국가 간 경쟁, 방어, 경계 등의 전선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장기화(持续拉宽和拉长)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 우리는 언제나 “단극” 또는 “다극”을 이야기 해왔지만, 신코로나 폐렴역병은 앞으로 “극”의 개념을 전례가 없을 정도로 공허하게(空前虚化) 만들 것이다.
국제구도는(国际格局) 더 이상 간단하게 “극”이란 개념을 주체의 권력분배 구조로 삼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이해관계의 경계, 방어, 충돌 등이 더욱 세밀해 지고, 전면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 결과 국제구도는 앞으로 국제질서의 주도적 영도 역량이(리더십, leadership) 부족해지고, 국가 간 다(多)영역, 다(多)전선, 다(多)차원의 “옥신각신 다투는(明争暗斗)” 신시대가 열릴 것이다.
우리가 본래 적극적으로 만들었던 브릭스(BRICS)국가협력기제, 상하이협력조직기제, 신흥경제체협력기제 등 모두가 앞으로 매우 많은 새로운 도전과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국제역량에서 “동승서강东升西降—동양은 상승하고 서양은 하강하는” 구도(格局) 또한 중대 시련을 겪을 것이다. 브릭스국가와 신흥경제체제는 역병발생으로 비교적 큰 충격을 받았고, 남아프리카, 브라질, 인도의 화폐는 지난 2개월 동안 대폭 평가절하 되어 사람들이 우려하게 되었다.
미래의 세계 권력과 이익구조는 다시 재조직될 것인가? 우리는 이 “신(新)전국(戰國)시대”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이러한 도전은 전대미문이다.
또 하나의 방면은 대국의 전략경쟁이 더욱더 엄준한 신단계로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미 중국과 미국은 “신냉전” 진입을 시작한 바와 다름없는 것 같다.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추세를 두고 볼 때, 중·미관계는 “신냉전”으로부터 아마 한 걸음 떨어진 정도로 다가 와 있는 것 같다(只有一步之遥). 만약 미국 트럼프정부가 역병 방역의 실패를 덮고 또 선거에서 경쟁하기 위해, 중국 “낙인찍기”를 계속한다면, 중·미는 역병 이후 시대에도 아마 “신냉전”이라는 악마의 그림자에서(魅影) 벗어나기는 힘들(难以摆脱) 것이다.
“신(新) 냉전”과 구(舊) 냉전의 최대 차이는 국제체계가 다시는 간단하게 새로운 진영 편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과 미국은 경제와 상업에서 여전히 서로 뒤얽혀(交集, 교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적대는 아마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在所难免). “신냉전”은 중국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고, 더욱이나 중국굴기의 전략이익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트럼프정부가 만약 “신냉전”을 한사코(硬要) 중국에 강압하면(强加于中国), 우리로서도 물러날 길이 없게 된다(无路可退)!
또 다른 하나의 방면은 세계 경제 질서가 대규모로 새로 짜질 수 있고(重组), 세계화 진행의 조정 또한 피할 수 없는 추세(势在必行)라는 점이다. 1990년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 빈곤인구 수는 끊임없이 내려가고 있다. 그렇지만 신코로나 폐렴역병은 세계적으로 4-6억 빈곤인구를 새로이 증가시킬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숫자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게다가(再加上) 새로운 세계적 가뭄과 신코로나 폐렴역병의 반복 출현 가능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근 40개 국가에 엄중한 경제후퇴가 나타날 것이다. 신코로나 역병은 전 세계 발전의 현존 구도를(现有格局) 개변시킬 것이다.
신코로나 폐렴역병에 의한 세계의 개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에 우리들은 사상, 심리, 지식 등에서 충분한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에 대한 논의들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생각을 공유한 바 있다. 그 결과 2016-17년의 ‘촛불혁명’이라는 정치변화가 가능했고, 그 기반 위에서 코로나19의 성공적 방역 역시 가능했다. 말하자면 매우 한국적인 특성을 가진 세월호 재난은 한국 정치에 어떤 임계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닥친 코로나19가 제2차 세계대전만큼 또는 그보다 더 참담한 세계적 재난으로 작용하면서, 그것은 이제 세계 차원의 어떤 임계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이다.
대체로 코로나 19 이후의 ‘뉴노멀’은 ‘디지털화’나 ‘그린뉴딜’로 상상된다. 그러나 ‘새로운 정상성 또는 규범’을 의미하는 그 표현은 단순한 기술변화, 즉 ‘디지털 방향으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저탄소 뱡향인가?’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다. ‘정상성’이나 ‘규범’은 사회학의 핵심 개념이다. 따라서 ‘뉴노멀’은 사회의 변화, 즉 다차원적 사회적 관계들의 형태 및 성격에서 변화가 불가피함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절하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새로운 문제들은 각 사회 내외에서 경제적 충격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층에서 사회적 관계들 역시 변화시킬 것이다.
예컨대 여행 제한이나 국경봉쇄로 인한 이동성의 급작스러운 정지는 자동차 산업과 항공산업에 대한 국고지원이나 실업률 급증의 문제―물론 실업은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로만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의 사회가 대유행 전염병(팬데믹)과 공존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면, 자율주행차,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 저탄소 배출형 항공기로의 생산 전환이라는 디지털화, 저탄소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물리적 이동량 자체 및 그 구성에서 계속 변동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대유행 전염병 상황에서 언제든 소환될 수 있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이동성은 밀접히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사회적 거리 두기’는 ‘물리적 거리 두기’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사회학에서는 물리적 이동성과 사회적 이동성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논의해왔다. 또 이동성 제한으로 외국인 계절노동자 등의 사용에 문제가 생기면,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불일치(미스매칭)에 대한 해결책도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지털화가 불가능한 영역에서 노동시장의 미스매칭이 계속 사회경제적 문제로 등장할 터인데, 그중 돌봄 영역과 관련하여 서구에서는 이미 문제가 드러났다. 예컨대 미국과 독일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한 간호사들의 집회가 있었다. 미국의 간호사 집회는 마스크 등 보호장비 부족 때문이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코로나19를 계기로 간호사의 임금상승이 이루어졌으나 인력 부족으로 인해 그들이 여전히 과도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다. 한국의 경우에는 돌봄 문제가 노동시장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피해자 집중 발생 부문―정신병동과 노인요양시설 등―의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역에 자원하고 헌신하는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노동조건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헌신적 태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서구에서 코로나19 확산이 의료체계 붕괴에 대한 공포로 연결된 데에는, 공공의료 체계의 약화나 붕괴 못지않게 돌봄 노동시장의 문제 역시 작용했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4차 산업혁명의 시나리오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돌봄과 저숙련 서비스직에서 일자리가 계속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일자리로서 돌봄 일자리가 꼽힌다. 산업화한 사회들의 고령화 추세로 인해서 돌봄 일자리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대유행 전염병이 일상화한다면 돌봄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또 확대되는 디지털화 속에서 콜센터와 같은 서비스직은 확대될 수밖에 없다.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이들이 코로나19의 취약집단으로 등장한 바 있다. 또 최근에는 저숙련 서비스업에서의 불안정 고용 관행으로 인해 ‘n잡을 뛰는’ 경우가 늘면서, 서비스업 종사자의 감염 위험성이 부각되기도 했다.
증가하는 돌봄 일자리와 저숙련 서비스직 일자리와의 공통점을 찾자면, 다음의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이런 일자리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 나쁜 노동환경의 속성을 갖는 여성 일자리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로 제시된 디지털화나 그린뉴딜의 정책 속에서 이런 일자리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현재 논의되는 ‘뉴노멀’에서 고려되는 현실은 절반의 현실에 불과하고, 그 절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다른 절반이 완전히 배제된다. 이것은 기존의 ‘노동’ 개념이 남성의 노동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여성 노동은 돌봄이나 감정노동과 같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 즉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노동을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분리하는 이런 경향은, 페미니스트 정의론자들이 ‘분배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1】 방향으로 발전한 사회계약론의 전통 속에서 확립되었다. 사회계약론은 자유주의 정치이론의 기초로서 근대 헌법과 현대 사회정책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과거 한국에서 헌법은 단지 수입된 서양의 근대적 제도에 불과했다. 80년대 후반의 ‘민주화 개헌’으로 헌법이 국민에게 한층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나, 그것이 일반 국민의 정치 감정 속에서 뜨겁게 소환된 것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였다. 이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는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임계점이 된 것이다.
한국적 위험이었던 세월호 재난이 한국에서 자유주의 정치원리를 ‘정상적인 규범’으로서 대중화―일종의 근대화 따라잡기로서―했다면, 코로나19 이후 기대되는 세계적 ‘뉴노멀’은 돌봄과 서비스 노동의 증가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주의 정치원리에 체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성격의 것이다. 말하자면 코로나19를 계기로 더욱 두드러진 돌봄과 서비스 노동의 불가피성으로 인해서,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은 단순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계약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개념, 그리고 그것의 기초가 되는 ‘개인’과 ‘자유’의 개념까지, ‘뉴노멀’의 새로운 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지적되어야 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노동’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이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생물체’ 또는 ‘물질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 두 문제는 기존 사회계약론의 전제들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 왜냐면 기존 사회계약론은 어쩌면 버섯처럼 땅에서 불쑥 솟아났을 법한 ‘독립적이고 분리된’ 개인들의 ‘이성적 사고’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먼저 돌봄노동이나 감정노동과 같은 페미니즘의 노동 개념은 ‘분리된 개인’이라는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인간 역시 ‘생명체’라고 보는 물질적 관점은 ‘이성적 사고의 주체로서 개인’이라는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사회형태는 가족이나 친족과 같이 혈연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친부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아들들이 가부장적 친족 관계로부터 개인화한 상태를 근대 정치의 원초적 상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주체는 아버지와 동등한 남성이다. 그런데 근대화 당시 남성들은 아내의 법적 권리를 자신의 권리 속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사회계약의 주체인 남성들은 가족이라는 사생활영역의 주인인 ‘가장 남성’을 의미하게 된다.【2】 페미니스트들은 이로부터 공적 영역(정치)과 사적 영역(가족)이 법적으로 분리되고, 가족 및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들은 공적 논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고전적 사회계약론의 이러한 기본 구도가 복지 자유주의로 발전한 롤즈의 ‘정의론’까지 이어지면서, 그것은 결국 현대 ‘분배 패러다임’의 골격을 형성했다. 가정폭력이나 돌봄,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등이 ‘정의’의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를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인 이러한 ‘남성적,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찾는다.【3】
여성뿐 아니라 서구의 ‘가장 남성’ 상에서 벗어나는 모든 범주, 즉 장애인 등 의존적인 사람이나 흑인 노예 등이 모두 사회계약의 주체인 ‘개인’ 개념에서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이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합리적’ 선택의 주체로 정의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개인’의 모습이 남성의 삶 중 일정 시기 동안에만 가능한 존재 형태일 뿐이라고 비판해왔다. 남성들도 돌봄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노동능력을 상실하면 다시 돌봄 관계 속으로 돌아간다. 또 근대화가 진전하면서 여성에게도 법적 시민권이 인정되고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남성 중심적 ‘개인’ 개념은 ‘시민’ 개념과 점점 더 괴리를 넓혀왔다.
뿐만 아니라 대유행 전염병 코로나19를 전후로 돌봄이 점점 더 생활과 노동의 영역에서 중요성을 얻고 있다. 또 현대로 올수록 혼인과 남성의 지배로부터 여성들이 점점 더 풀려나기를 추구하거나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새로운 정상성 또는 규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주체인 ‘개인’ 개념이 이제 더 이상 ‘가족의 구성원 및 재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남성 가장’ 개념과 일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돌봄 관계 속에 위치한 개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개인’까지 포함하도록 ‘개인’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새롭게 정의된 ‘개인’ 개념에 기초하여 사회계약과 분배의 프레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인간 역시 바이러스에 취약한 생명체이자 물질이라는 또 다른 문제 역시, 사회계약론에 근본적 수정을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개인을 단순히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존재’로 규정한 사회계약론의 기본 구도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계를 롤즈처럼 다음 세대와 공정하게 나눠야 할 자원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는 인간과 생태계 간의 ‘위험 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 롤즈는 사회계약이 ‘협동적 사회구성원’ 간의 정의로운 계약이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제 사회계약은 ‘협동적 지구구성원’ 간의 정의로운 계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울리히 벡은 공론정치의 의제 변화―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정치―의 문제로 보았고, 라투르는 ‘사물의 의회’라는 지구정치(cosmopolitics)의 관점에서 본 바 있다.【4】
그런데 여기서 어떤 관점을 취하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돌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돌봄 관계’와 ‘위험 관계’는 새로운 사회계약론을 구상하는 데서 반드시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1】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역, 모티브북, 2017;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역, 돌베개, 2017.
【2】캐롤 페이트먼,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유영근 역, 이후, 2001.
【3】캐롤 페이트먼, 위의 책; Susan M. Okin, Justice, Gender, and the Family, New York: Basic Books, 1989; 낸시 프레이저, 위의 책; 마사 누스바움, 『역량의 창조』, 한상연 역, 돌베개; 에바 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역, 박영사, 2016.
【4】울리히 벡, 『글로벌 위험사회』, 박미애·이진우 역, 길, 2010;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역, 갈무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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