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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불황이 세계대전을 불러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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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불황이 세계대전을 불러올 것인가?

admin | 목, 2020/05/21- 20:10

올해는 여러 측면에서 지난 수십 년을 통해 인류가 처한 가장 최악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우리는 팬데믹 진행의 과정에 있으며 이미 삼십만 명이 희생당하고 수백만 인구가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상황이 종결되기 전에 추가로 수백만 명이 괴로움을 당할 것 같다. 세계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실업률은 극적으로 상승하고, 통상과 생산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는 등 단기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에 들어 메뚜기 떼의 창궐이 아프리카에 두 번째 나타나고 있고, 미국에서는 치명적인 독을 지닌 말벌들이 일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무지한) 미국 대통령은 치사를 가져올 약품을 만병통치라고 떠벌리면서 과학적인 조언들을 묵살하고 있다. 설령 상기에 언급한 일들이 마법처럼 내일 사라진다 해도 – 사라질 턱이 없지만 – 우리는 여전히 기후위기라는 장기적인 위협을 직면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이 나빠질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한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 전쟁.

따라서 우리는 팬데믹과 경제불황이 겹쳐지면서 과연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하며, 역사와 이론이 우리에게 어떤 답변을 줄 것인지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우선적으로 질병과 불황이 발생하면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1차 대전은 세계를 황폐화시킨 독감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18-19연간에 막을 내렸지만, 팬데믹은 러시아의 시민전쟁 (혁명)도, 러시아와 폴란드 간의 전쟁도, 여러 국가 간의 물리적 충돌을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1931년에 있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저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파시즘의 등장을 부추기면서 결국 세계2차 대전을 일으켰다. 따라서 단지 COVID-19와 동반하는 세계적 불황 때문에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판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MIT의 Barry Posen교수는 이미 현재 팬데믹의 충격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검토하였으며 그는 COVID-19가 전쟁 대신 평화를 증진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의 팬데믹은 주요 세력들에게 심각하게 타격을 주어 취약하고 붕괴되기 쉬운 상대 국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도발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반면에 모든 국가들의 정부는 중단기적으로 매우 비관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침략국가들이 과신 속에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맥락에서 팬데믹이 가져오는 비관주의는 오히려 평화를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은 본질적으로 훈련소와 군사기지, 집결장소, 바다 위의 전함 등에 사람들 다수가 집결해야 하는데, 팬데믹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러한 집결을 좋아할 시민들은 없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로 어려움에 처한 정부들은 자신들이 최소한 당분간은 최선을 다해 질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상기의 사항들이 매우 충동적이며 전쟁광인 사우디 황세자 모하메드조차 예멘에서 혈투를 벌리고 있는 실패한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Posen 교수는 CVID-19으로 인해 중단기적으로 국제통상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 추가적인 설명을 한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방지하는 중요한 장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통상이 줄어드는 상황에 대해서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놀라겠지만, 그는 최근 미국과 중국 간 마찰의 주요 원인이 통상이라는 주제였음을 강조하면서, 양국 간에 형성되는 통상 단절의 수준에 따라 긴장이 줄어들고, 전쟁의 가능성을 퇴조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보면, 팬데믹이 평화를 유도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가능성과 경제적 조건 간의 넓은 관계성은 어떻게 작용할까? 일부 독자들은 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이익을 증진시키거나 또는 집권자의 정치적 기회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깊고 장기간 지속되는 경제적 불경기가 심각한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이론 중에 익숙한 논쟁의 하나가 소위 관심돌리기 (희생양) 이야기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치지도자가 국민적 지지를 잃을까 염려가 되면 자신의 실패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외국과 위기를 조장하고, 심한 경우에는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가오는 대선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란 또는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미국시민들은 염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 이론 자체가 지닌 논리와 경험의 결함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다. 전쟁은 하나의 게임이며, 조그만 잘못되면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트럼프의 기울어가는 운명의 관짝(coffin)에 마지막 못질을 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할 만한 나라가 실재하지 않으며,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조차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수천 수만 명이 (팬데믹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이란 또는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더구나 전쟁행위가 성공을 거둔다 해도, 미국시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며 농력있는 국가들의 백신개발을 지원하고 촉진할 수 있는 시험과 추척의 레짐(testing & tracing regime) 분위기를 형성시켜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동맹이 될만한 다른 지도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전쟁에 관해 비슷한 류의 다른 이론은 “군사적 케인즈론”이다. 전쟁은 경제적 수요를 촉발시켜 불황에 빠진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내어 번영과 완전고용으로 이끈다는 논리이다. 세계2차 대전의 경우가 그러했고, 미국을 대공항의 모래수렁에서 구해냈다. 거대한 권력들이 전쟁을 일으켜 대규모 기업체(군수산업)을 지원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런 류의 논리에 동조하면서, 정부가 황량한 경제전망을 갖게 되면 군사적 모험을 통하여 경제를 재가동시킬 것으로 염려한다.

나는 대규모 전쟁이 과연 유의미하게 경제를 촉진시키는지 의심을 가지고 있다. 부채가 과중하게 증가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모든 위험을 감당하면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쟁을 하지 않고도 경제를 촉진시킬 수단이 많이 있으며, 예건데 간접 인프라의 투자, 실업보험 확충, 헬리콥터-모니(비정상적 화폐발행) 등, 전쟁은 선택할 수 있는 수단 중에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통상 전쟁의 위협은 투자자들을 위축시키는데, 이는 주식시장 부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경제적 불경기가 전쟁을 부추는 것은 매우 특별한 환경 속에서 일어난다. 특히 매우 즉각적이고 중대한 가치를 지켜내야 하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경우에 전쟁이 가능하다.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당시 이라크는 아란과 오랜 전쟁 끝에 경제가 엉망인 상태에서, 치솟는 실업률이 사담 후세인의 국내정치적 위상을 위태롭게 하였고, 쿠웨이트의 풍부한 유전이 이를 보상할 대상이었으며, 경무장한 상대국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용이한 상태이었다.

또한 이라크는 쿠웨이트에게 큰 부채를 지고 있었기에, 바그다그의 적대적 권력이 쿠웨이트를 장악하면 모든 빚을 하루아침에 청산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이라크가 처한 일촉즉발의 경제적 조건이 전쟁을 발발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지구상에 어느 나라도 이라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당장 러시아가 원한다 해도 우크라이나 전체를 장악한다거나,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매우 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나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을 갑자기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을 가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긴 시각에서 본다면, 경제적 불황이 지속되면 파시즘이 형성되고 민족혐오 운동을 야기하면서 자국 보호주의와 초국가주의를 부추기면서 국가들 간에 상호 수용할만한 협상이 점차 어려워 지면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경제적 공황이 국제정치를 파국으로 몰아간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1930년대의 역사가 그러한 추이를 형성해 왔다.

현재시점에도 국가주의, 민족혐오 그리고 전체주의적 지배가 COVID-19가 발발하기 전에 이미 부활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이 전세계적 규모로 경제적 비참함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추이가 강해지고 있어, 바이러스의 공포가 사라지면 전쟁을 일으킬 조건으로 우리를 몰아갈 수도 있다.

균형적으로 검토해 보더라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례가 없는 경제적 조건이 전쟁을 추동할 만큼 충격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선 불황이 전쟁의 원인이라면, 우리의 역사에서 훨씬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어야 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미국은 건국이래 40여 차례 이상의 불황을 겪어왔지만, 그동안 주정부 단위의 소규모 전투가 20여 차례가 있었을 뿐이고, 이들 대부분도 경제와는 무관한 전쟁들이었다.

경제학자인 Paul Samuelson의 주식시장과 관련한 유명한 빈정댐을 인용해 본다 ‘만약 불황이 전쟁의 강력한 원인이었다면, 이들 전쟁의 다섯(혹은 더 적은)경우에서 최소한 아홉 번은 미리 예측했을 것이다.’

두 번째, 국가들은 빠르고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없으면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다.

John Mearsheimer가 지신의 저서 ‘고전적 전쟁억지(conventional deterrence)’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쟁이 길어지고 피비린내 나고 희생의 부담이 큰 반면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면,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회피한다. 전쟁을 선택하려면, 쉽고 빠르고 적은 희생으로 확실한 승리 또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1914년 유럽이 전쟁에 돌입한 것은 쌍방이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며, 나치의 독일은 적국을 속이면서 손쉽고 적은 희생으로 이길 수 있는 blitzkrieg((전격) 전략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가 1980년에 이란을 공략한 것은 사담이 이슬람 공화국이 내부분열로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오판한 탓이었고, 조지 W. 부시가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면 신속한 승리가 확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정치 지도자들이 결정적으로 오판했다는 사실이 핵심이 아니다. 요점은 경제상황과 무관하게 재빨리 손쉽고 적은 희생으로 성공할 합리적인 가능성이 없다면, 지도자들은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동기는 안전보장에 관한 것이지 결코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배경으로 장기적인 힘의 균형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지난한 상황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이를 수용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 공격하면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켜 안전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에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역사학자인 A.J.P Taylor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하였고 이는 대부분 전쟁에서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1848에서 1918년 간에 있었던 강대국들 간의 모든 전쟁은 예방적 성격을 지녔으며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결론이다.  경제적 환경 즉 불황은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는 광범한 정치적 환경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이는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이며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COVID-19 팬데믹이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길고 크며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럴 공산이 매우 크지만, 특별히 단기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으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근 몇 달 간에 우리가 지켜보는 (트럼프의) 어리석음이 전쟁을 야기할 강력한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배제할 수는 없다. 못난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피를 부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의 특별한 순간(트럼프의 재직기간)에는 햇살을 즐기는 것이 어렵다는 전제하에, 본 주제에 대한 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희망한다.

 

출처 : 포린 폴리시. 2020-05-13.

Stephen M. Walt

하버드 대학의 국제관계학 석좌교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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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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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교3지구에 자족형 산업도시 조성을 추진하여 산업 기능을 강화하고 오산시의 경제 발전을 도모합니다.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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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발맞춰 충주에 주요 공공기관을 유치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합니다.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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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직후 고유가로 어려움을 겪는 군민에게 1인당 100만원의 민생지원금을 추경 예산으로 집행하여 생활 안정을 지원합니다.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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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둔포 지역을 충남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 추진하여 투자 유치 및 경제 발전 촉진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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