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한겨레]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지역

[한겨레]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admin | 금, 2020/06/26- 01:55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2006년 진실화해위, 전국 168곳 집단매장추정
실제 발굴은 13곳 불과…유해는 1617구 수습
2014∼2020 민간단체가 8곳 380구 추가발굴
대부분 사유지·도로·택지 등으로 접근에 난항
현재 정부 대신 지자체 나서 유해 발굴 지원
올해말 재가동 예정인 2기 과거사위에 기대
정권따라 활동 제약…발굴상설기구 설립해야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 발굴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는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다. 학살 추정지만 170곳에 이른다.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10년까지 유해발굴을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은 전국 13곳밖에 안 된다. 진실화해위 해산 이후 유해발굴은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유해발굴 현황과 과제를 짚어봤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숨진 가족의 유골만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를 70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

‘골로 간다.’

이 말의 유래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있다. 학살터가 대부분 골(계곡)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골로 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됐다.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조사단)은 그 죽음의 시원을 찾아 ‘골로 가는’ 이들이다.

지난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는 유해발굴이 한창이었다. 지난달 26일부터 유해발굴이 시작된 여우굴은 한국전쟁 초기 주민들이 임시피난처로 판 굴이었다. 지금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단원 10여명은 30℃가 넘는 더위 속에서 차양막과 얼음물에 의지한 채 길이 50m, 너비 5~10m인 발굴터 바닥을 호미로 1㎝씩 조심스레 긁어내고 있었다. 여우굴 희생자들은 가매장이 됐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50㎝ 아래까지 확인해야 했다. 단원들은 가끔 특이한 물체가 나오면 물로 세척해 유해 여부를 가렸다.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판명되면 다시 호미를 들었다.

발굴은 원래 땅인 생토층이 나올 때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표토층을 걷어낸 뒤 10여개 구획으로 나눠 진행된다. 이날 위령제를 끝으로 종료된 이번 조사에서 모두 8구의 유해(허벅지뼈 기준)가 발견됐다.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육군방첩대(CIC), 경찰 등이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예비검속자 1200~1500명을 학살한 이른바 청원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중 일부로 추정됐다. 함께 출토된 엠(M)1 소총 탄피 1점, 카빈 소총 탄피 1점은 가해 무기와 주체를, 여름옷용 흰색 단추 1점은 매장 시기를 가늠하게 했다. 조사단은 정밀감식을 거쳐 유해와 유품 등을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장할 계획이다.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를 찾기 위해 호미로 땅바닥을 긁어내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여우굴 희생자들은 하마터면 영원히 잊혔을 수도 있었다. 여우굴은 2007~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 336구를 발굴한 분터골에서 500여m 떨어져 있다. 유족들은 당시 진실화해위에 “여우굴에도 20여명이 묻혀 있다”고 증언했지만 진실화해위 활동이 2010년 종료되며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후 고은리 일대에 전원주택 건설 열풍이 불며 경사진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여우굴은 조사단이 올해 3월 진행한 시굴조사에서 유골 64점을 발견했지만 정식 조사를 준비하는 사이 토지 소유주가 브이(V)자 형태 골짜기를 높이 5m 이상 흙으로 메워 주택공사를 시작했다. 문화재와 달리 유해는 공사 중단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조사단은 ‘공사기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조사 종료 뒤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토지 소유주의 동의를 얻은 끝에 발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발굴 조사를 총괄 진행하는 안경호(54)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70년이 지나며 대부분 지형이 바뀌고 사유지이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 여우굴은 다행히 주택공사를 시작하기 전 조사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학살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경작지로 쓰이거나 택지가 들어선 곳이 많다. 어쩌면 우리 발밑에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2015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출토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2006년 진실화해위가 접수한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신청 건수는 집단희생 사건 7922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1687건 등 9609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는 신청기간이 1년으로 한정됐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청을 꺼려 포기한 경우도 있어 실제 희생 건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봤다. 학계나 민간단체들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부역 혐의 희생자 등을 모두 더하면 최소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목격자·유족 증언과 경찰기록 등 문헌, 지표조사 등을 통해 모두 168곳을 집단희생사건 관련 유해매장 추정 장소로 파악했다. △경남 41곳 △전남 35곳 △경북 28곳 △수도권 25곳 △충북 22곳 △충남 9곳 △전북 4곳 △강원 2곳 △제주 2곳이다. 대부분 산이나 골짜기, 바닷가지만 광산, 굴, 공동묘지 등 외진 장소와 심지어 양곡창고, 우물도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59곳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파악하고 시급성, 현장 특정 여부 등을 고려해 39곳을 우선 발굴 대상지로 선정해, 2009년까지 13곳(중복 포함)을 발굴했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수습 유해 370구), 충남 공주시 상왕동(317구), 충북 청원 분터골(336구), 경남 산청 원리와 외공리(257구), 대전 동구 낭월동(34구), 전남 구례 봉성산(14구), 진도 갈매기섬(19구), 전남 순천 매곡동(유해 미발견) 등에서 총 1617구,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1950년 7월 촬영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진실화해위는 2010년 4월 활동기간이 종료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에서는 활동기간을 2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보수정권의 압박으로 두달 연장에 그쳤다. 진실화해위는 훗날을 기약하며 전국 10개 시·도, 32개 시·군·구 64곳에 한국전쟁 희생자 매장 추정지임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또 조사보고서를 통해 유해발굴을 이어갈 수 있는 정부기구 설립 등을 권고했으나,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해발굴 재개 가능성이 작아지자 민간단체가 나섰다. 2014년 2월18일 한국전쟁유족회의 요청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조사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진실화해위 조사를 주도했던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팀장을 지낸 안경호 사무국장이 조사단을 이끌었다.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이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 터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조사단 제공

조사단은 같은 달 24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718명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에 들어가 유해 39구를 수습했다. 이듬해 2월에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추정 희생자 1800~7000명)에서 유해 20구를, 2016년 2월에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36명)에서 유해 21구를 찾았다. 2017년 2월에는 진주 용산고개 1차 발굴지에서 100m 떨어진 곳을 조사해 유해 38구를 수습했고 2018년 2월에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150~300명)에서 208구를 찾았다. 지난해 3월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150명)에서는 40구를, 같은 해 5~9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수십명)에서는 6구를 수습하는 등 조사단은 이달 청주 여우굴까지 8차례에 걸친 조사를 진행해 희생자 380명의 넋을 달랬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북 경산시 폐코발트광산에서 수습한 유해에 조화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3500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한달 1억원가량이 드는 발굴조사를 8차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기초자치단체들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조사단이 활동에 들어가자 2013년부터 최근까지 제주를 제외한 16개 광역시·도와 60개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를 제정하며 유골발굴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2017년 4차까지는 후원금으로 발굴비용을 충당했지만 2018년부터는 아산시와 충북도 등에서 지방보조금사업으로 비용을 지원받았다. 중앙정부가 해야 될 일을 안 하니까 지방정부가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유족들과 전문가들은 지난달 20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올해 말 재가동 예정인 2기 진실화해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기는 1기보다 활동기간(최대 4년)이 짧고 위원 규모(9명)도 적지만 정부 유해발굴 전문기구 설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박선주 교수는 “발굴된 유해와 유족의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한번 하는 데 100만원 상당이 든다. 전체 규모로 봤을 때 한국전쟁 유해발굴은 자치단체나 한시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 상설기구를 만들고 유해 전문가를 양성해 연구자료를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분열된 한국 사회를 통합하려면 지난 70년간 빨갱이로 몰려 땅속에 잠자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야 한다”고 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민간인 매장 추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설치한 안내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2020-06-25> 한겨레 

☞기사원문: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6/24- 02:12
0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목, 2021/06/24- 05:15
0
0

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0
0

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관련기사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0
0

공동조사단 조사 결과… “충실한 이행 촉구” 결정문 홈페이지에 게재

▲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강제노역이 행해졌던 군함도. ⓒ 위키백과

유네스코가 일본이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후속조치를 이행하고 있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세계유산 등재 당시 후속조치로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노역 등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는 오는 16일부터 온라인으로 열릴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한국 시간으로 12일 오후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점검 결정문을 게재했다.

이 결정문은 지난 6월초 세계유산센터와 세계기념물유적협의회의 추천을 받아 호주, 벨기에, 독일 등의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을 도쿄로 파견, 일본 정부가 만든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를 직접 방문한 뒤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례적 강한 문구… 일본의 약속 불이행 국제사회가 확인”

유네스코는 결정문에서 ▲ 그간 일본의 세계유산위원회 결정 내용과 일본의 약속 미이행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아주 강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 충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결정문을 자세히 보면, 제5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데 대해 강하게 유감 표명(strongly regrets)’이라고 돼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에게 “국제 기구의 결정문 안에 ‘strongly regrets’란 표현이 들어간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라며 “그동안 일본이 충실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국제 사회가 명시적으로 확인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결정문은 또 이어진 제6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이행함에 있어 아래 사항들을 포함하는 공동조사단 보고서의 결론을 충분히 참고할 것을 요청(requests)한다’고 돼있어 일본측이 5개 사안을 충분히 고려해서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개 사안은 ▲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 마련 ▲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 ▲ 희생자 기리기 위한 조치 ▲ 국제 모범사례 고려 ▲ 관련 당사자간 대화 지속 등이 포함돼 있다.

당국자는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가혹한 조건하에 강제노역했다는 사실과 세 번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 표현은 2015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될 당시 일본 대표가 발언한 내용”이라며 “이 내용이 결정문 각주로는 들어간 적이 있어도 본문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정문의 내용 자체가 과거와는 달리 공동조사단의 객관적인 심사 결과를 인용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국제모범 사례에 대해서는 “독일의 탄광, 제철소 등 2차대전 때 강제노역 시설에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기념비 등이 설치돼있다”며 “일본측에서도 유사한 조치를 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년 2월 도쿄의 정보센터가 객관적으로 잘 건립될 수 있도록 개관 전 일본측에 공동조사단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일본측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양국간 대화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세계유산의 본질적인 특수성이 완전히 훼손됐을 경우에 한해 지정이 취소될 수 있으나 유네스코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며 “이번에 강한 결정문이 나온만큼 일본측이 결정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는커녕 사실 부정하는 자료만 전시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015년 7월 군함도 등 일본의 23개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는데, 당시 위원회는 각 시설에 전체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일본 대표는 ▲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동원되고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 ▲ 인포메이션 센터와 같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시키겠다 등 2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당시 약속했던 조치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급기야 일본의 근대산업 유산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해 6월 도쿄에 문을 연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노역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증언 또는 자료들이 전시됐다.

이에 외교부 2차관이 즉각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강력한 유감을 표시하고, 장관 명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발송해서 약속이 이행될 수 있도록 조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김경년(sadragon)

<2021-07-12>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에 “군함도 강제노동 부정 강한 유감”

※관련기사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강제노역 알려야…불이행 강한 유감”(종합)

☞한겨레: 유네스코, 일 군함도 등에 강제동원 기록 미이행 “강하게 유감”

화, 2021/07/13- 02:56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