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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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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admin | 금, 2020/06/26- 01:55

[한국전쟁 70주년 기획]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2006년 진실화해위, 전국 168곳 집단매장추정
실제 발굴은 13곳 불과…유해는 1617구 수습
2014∼2020 민간단체가 8곳 380구 추가발굴
대부분 사유지·도로·택지 등으로 접근에 난항
현재 정부 대신 지자체 나서 유해 발굴 지원
올해말 재가동 예정인 2기 과거사위에 기대
정권따라 활동 제약…발굴상설기구 설립해야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 발굴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는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다. 학살 추정지만 170곳에 이른다.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10년까지 유해발굴을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은 전국 13곳밖에 안 된다. 진실화해위 해산 이후 유해발굴은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유해발굴 현황과 과제를 짚어봤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숨진 가족의 유골만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를 70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

‘골로 간다.’

이 말의 유래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있다. 학살터가 대부분 골(계곡)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골로 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됐다.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조사단)은 그 죽음의 시원을 찾아 ‘골로 가는’ 이들이다.

지난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는 유해발굴이 한창이었다. 지난달 26일부터 유해발굴이 시작된 여우굴은 한국전쟁 초기 주민들이 임시피난처로 판 굴이었다. 지금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단원 10여명은 30℃가 넘는 더위 속에서 차양막과 얼음물에 의지한 채 길이 50m, 너비 5~10m인 발굴터 바닥을 호미로 1㎝씩 조심스레 긁어내고 있었다. 여우굴 희생자들은 가매장이 됐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50㎝ 아래까지 확인해야 했다. 단원들은 가끔 특이한 물체가 나오면 물로 세척해 유해 여부를 가렸다.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판명되면 다시 호미를 들었다.

발굴은 원래 땅인 생토층이 나올 때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표토층을 걷어낸 뒤 10여개 구획으로 나눠 진행된다. 이날 위령제를 끝으로 종료된 이번 조사에서 모두 8구의 유해(허벅지뼈 기준)가 발견됐다.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육군방첩대(CIC), 경찰 등이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예비검속자 1200~1500명을 학살한 이른바 청원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중 일부로 추정됐다. 함께 출토된 엠(M)1 소총 탄피 1점, 카빈 소총 탄피 1점은 가해 무기와 주체를, 여름옷용 흰색 단추 1점은 매장 시기를 가늠하게 했다. 조사단은 정밀감식을 거쳐 유해와 유품 등을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장할 계획이다.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를 찾기 위해 호미로 땅바닥을 긁어내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여우굴 희생자들은 하마터면 영원히 잊혔을 수도 있었다. 여우굴은 2007~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 336구를 발굴한 분터골에서 500여m 떨어져 있다. 유족들은 당시 진실화해위에 “여우굴에도 20여명이 묻혀 있다”고 증언했지만 진실화해위 활동이 2010년 종료되며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후 고은리 일대에 전원주택 건설 열풍이 불며 경사진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여우굴은 조사단이 올해 3월 진행한 시굴조사에서 유골 64점을 발견했지만 정식 조사를 준비하는 사이 토지 소유주가 브이(V)자 형태 골짜기를 높이 5m 이상 흙으로 메워 주택공사를 시작했다. 문화재와 달리 유해는 공사 중단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조사단은 ‘공사기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조사 종료 뒤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토지 소유주의 동의를 얻은 끝에 발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발굴 조사를 총괄 진행하는 안경호(54)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70년이 지나며 대부분 지형이 바뀌고 사유지이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 여우굴은 다행히 주택공사를 시작하기 전 조사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학살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경작지로 쓰이거나 택지가 들어선 곳이 많다. 어쩌면 우리 발밑에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2015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출토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2006년 진실화해위가 접수한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신청 건수는 집단희생 사건 7922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1687건 등 9609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는 신청기간이 1년으로 한정됐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청을 꺼려 포기한 경우도 있어 실제 희생 건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봤다. 학계나 민간단체들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부역 혐의 희생자 등을 모두 더하면 최소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목격자·유족 증언과 경찰기록 등 문헌, 지표조사 등을 통해 모두 168곳을 집단희생사건 관련 유해매장 추정 장소로 파악했다. △경남 41곳 △전남 35곳 △경북 28곳 △수도권 25곳 △충북 22곳 △충남 9곳 △전북 4곳 △강원 2곳 △제주 2곳이다. 대부분 산이나 골짜기, 바닷가지만 광산, 굴, 공동묘지 등 외진 장소와 심지어 양곡창고, 우물도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59곳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파악하고 시급성, 현장 특정 여부 등을 고려해 39곳을 우선 발굴 대상지로 선정해, 2009년까지 13곳(중복 포함)을 발굴했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수습 유해 370구), 충남 공주시 상왕동(317구), 충북 청원 분터골(336구), 경남 산청 원리와 외공리(257구), 대전 동구 낭월동(34구), 전남 구례 봉성산(14구), 진도 갈매기섬(19구), 전남 순천 매곡동(유해 미발견) 등에서 총 1617구,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1950년 7월 촬영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진실화해위는 2010년 4월 활동기간이 종료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에서는 활동기간을 2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보수정권의 압박으로 두달 연장에 그쳤다. 진실화해위는 훗날을 기약하며 전국 10개 시·도, 32개 시·군·구 64곳에 한국전쟁 희생자 매장 추정지임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또 조사보고서를 통해 유해발굴을 이어갈 수 있는 정부기구 설립 등을 권고했으나,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해발굴 재개 가능성이 작아지자 민간단체가 나섰다. 2014년 2월18일 한국전쟁유족회의 요청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조사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진실화해위 조사를 주도했던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팀장을 지낸 안경호 사무국장이 조사단을 이끌었다.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이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 터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조사단 제공

조사단은 같은 달 24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718명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에 들어가 유해 39구를 수습했다. 이듬해 2월에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추정 희생자 1800~7000명)에서 유해 20구를, 2016년 2월에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36명)에서 유해 21구를 찾았다. 2017년 2월에는 진주 용산고개 1차 발굴지에서 100m 떨어진 곳을 조사해 유해 38구를 수습했고 2018년 2월에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150~300명)에서 208구를 찾았다. 지난해 3월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150명)에서는 40구를, 같은 해 5~9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수십명)에서는 6구를 수습하는 등 조사단은 이달 청주 여우굴까지 8차례에 걸친 조사를 진행해 희생자 380명의 넋을 달랬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북 경산시 폐코발트광산에서 수습한 유해에 조화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3500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한달 1억원가량이 드는 발굴조사를 8차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기초자치단체들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조사단이 활동에 들어가자 2013년부터 최근까지 제주를 제외한 16개 광역시·도와 60개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를 제정하며 유골발굴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2017년 4차까지는 후원금으로 발굴비용을 충당했지만 2018년부터는 아산시와 충북도 등에서 지방보조금사업으로 비용을 지원받았다. 중앙정부가 해야 될 일을 안 하니까 지방정부가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유족들과 전문가들은 지난달 20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올해 말 재가동 예정인 2기 진실화해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기는 1기보다 활동기간(최대 4년)이 짧고 위원 규모(9명)도 적지만 정부 유해발굴 전문기구 설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박선주 교수는 “발굴된 유해와 유족의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한번 하는 데 100만원 상당이 든다. 전체 규모로 봤을 때 한국전쟁 유해발굴은 자치단체나 한시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 상설기구를 만들고 유해 전문가를 양성해 연구자료를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분열된 한국 사회를 통합하려면 지난 70년간 빨갱이로 몰려 땅속에 잠자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야 한다”고 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민간인 매장 추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설치한 안내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2020-06-25> 한겨레 

☞기사원문: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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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도를 쥐고 있는 박정희 사진을 “박원순이 만든 빨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작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으로 선동질을 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보수단체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자경 씨가 법정 구속됐다.

10월 12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성호)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하고 방 씨를 법정 구속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일본의 누리꾼이 조작한 것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단체가 아닐뿐더러 “사진이 합성된 가짜”라고 감정한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이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민족문제연구소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의 원심 확정으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데 이어 형사소송 1심에서 방 씨의 유죄를 인정받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2016년 서울북부지검이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2017년 서울고검이 항고를 기각했는데 서울고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재판이 진행됐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건전한 비판과 학술적 토론은 언제든 수용하겠지만 무분별한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서석구 변호사가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방 씨의 변호를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단독] 일본 누리꾼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사진’ 법정까지 간 사연 (2017.1.13)

☞경향신문: [단독]검찰 불기소 처분한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법원 “공소 제기하라” (2017.5.24)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소송, 2심 승소와 스프레이 테러 형사조정
(2018.1.25)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4.20)

금, 2018/10/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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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 자료집]

 

이준 열사 순국일에 집터 표석 제막식 거행

 

▲ (좌) 이준 집터’ 표석 (시안), (우) 이준 열사의 집터이자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안국동 152번지 구역의 현재 모습

헤이그특사사건 110주년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될 당시에 거주했던 곳에 그를 기리는 집터 표석이 설치된다. 그간 이준 열사가 생전에 안국동에 살았던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주소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가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해 최초로 지번(안국동 152번지)을 확인한 결과,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될 당시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임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표석 설치를 신청하였고,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이번에 집터 표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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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도면 위에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를 표시한 자료이다. (『경성부일필매 지형명세도』,1929)

표석 문안에는 이곳이 1907년 당시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점 이외에 1905년 이준의 부인 이일정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사실도 함께 명기하였다.

표석 제막식은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가 되는 7월 14일 오후 1시부터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덕성학원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리며, 제막행사는 1시 40분에 해영회관 1층(하나은행 안국동지점) 전면에서 거행된다. 이번 제막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준 열사 유족대표로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명예회장이 내빈으로 참석한다.

이에 앞서 낮 12시 30분부터 식전행사로 이준 열사의 생애와 이준 집터에 관한 사료 소개와 전시해설이 있을 예정이다.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사장 이양재)에서 제공하는 전시유물에는 이준 열사의 유묵(遺墨) 2점과 관련 자료 4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목, 2017/07/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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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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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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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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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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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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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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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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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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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1005-15

▲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1005-16

▲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1005-17

▲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목, 2017/10/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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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판사가 역사에 무식..즉각 항소할 것”

 

정미홍 전 아나운서. 2017.3.8/뉴스1 © News1 문요한 기자

(서울=뉴스1) 이유지 기자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血書)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58)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김종복 판사는 31일 한국 근현대사 비영리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아나운서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는 “트위터로 글을 단순히 리트윗한 것이라 해도 타인의 글이 명예훼손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단체를 표방하는 바, 증거도 없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을 내세우기 전 과거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삼았지만 만주일보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기에 박정희 혈서설은 조작됐다는 취지”라고 밝히고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선고 중 판사를 향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설)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며 “위증죄로 증인을 고소한 건이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어갔고 판사에게도 증거로 제출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는 선고 후 기자와 만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자 만주신문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라’라는 혈서를 썼다고 2009년 밝혔다.

정 전 아나운서는 2013년 2월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글은 ‘지난 5년간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일보는 1908년 폐간된 신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7월 강용석 변호사와 정 전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각각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 변호사가 500만원, 정 전 아나운서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원심을 확정했다.

 

<2017-08-31> 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 1심서 벌금 30만원

※관련기사

☞ 연합뉴스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원

☞ SBS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 원

☞ 머니투데이 :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씨, 1심서 벌금 30만원

목, 2017/08/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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