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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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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admin | 화, 2020/06/23- 21:41

[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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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5 ]

일제패망기에 매달 8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까닭

이른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은 전시체제를 다잡는 날

 

이순운 책임연구원

보라, 성전(聖戰) 이에 3년, 다시 겨울은
복수의 날, 해방의 아침, 잊을 수 없는 8일을 맞이하네.
그대 아는가, 아시아의 수호신은 무쇠가 아니라
아시아의 수호신은 일억(一億)의 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
피는 쇠보다 강하며 아시아는 하나의 피
무엇인가 능히 깨뜨릴 수 있는 불괴(不壞)의 결속임을.
그렇다면 이날 우리들은 붓을 던져 검을 들고
내일은 또 그대와 저 넓은 하늘에 서로 마주하리라.
마음은 오로지 달려가네, 마유하(マユ河, 버마 인도 접경지)의 선혈에

혈관은 힘차게 뛰는 산호도(珊瑚島)의 총탄빗발.
용서하라 벗이여, 눈물을, 우리들의 두 뺨에
쏟아지게 잠시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라.
보아라 그대, 아시아의 수호신이야말로 참으로
무쇠가 아니라, 탄약더미가 아니라
실로, 그것은 오직 십억(十億)의 분노에 찬 눈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와 뒤섞인 뜨거운 눈물인 것을.

 

뭐가 이런 정신 나간 글이 있나 싶지만, 이것은 <경성일보> 1943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12월 8일의 맹서」라는 시(詩)의 전문이다. 여기에 그려진 삽화는 에구치 케이시로(江口敬四郞)의 것이고, 글은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가 썼다. 이 이름은 다름 아닌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일제패망기의 12월 8일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시작이 바로 이날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와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에 대한 기습공격과 영국령 말레이반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신호탄으로 하여 대미대영 선전포고(對美對英 宣戰布告)의 조서(詔書)가 내려진 것이 이날이고,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자에 수록된 ‘대미대영 선전포고 조서’의 내용과 관련보도이다.

 

천우(天佑)를 보유(保有)하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조(天祚)를 천(踐)하는 대일본제국천황(大日本帝國天皇)은 소(昭)히 충성용무(忠誠勇武)한 여유중(汝有衆)에 시(示)하노라. 짐(朕) 자(玆)에 미국 급 영국(米國 及 英國)에 대(對)하야 전(戰)을 선(宣)하노니 짐(朕)의 육해장병(陸海將兵)은 전력(全力)을 분(奮)하야 교전(交戰)에 종사(從事)하고 짐(朕)의 백료유사(百僚有司)는 여정직무(勵精職務)를 봉행(奉行)하고 짐(朕)의 중서(衆庶)는 각각(各各) 기본분(其本分)을 진(盡)하야 억조일심(億兆一心) 국가(國家)의 총력(總力)을 거(擧)하야 정전(征戰)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에 유감(遺算) 없기를 기(期)하라. (하략)

 

이로써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중일전쟁)’을 거쳐 그 끝을 모르게 이어지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전쟁물자와 병력을 끌어내기 위한 총력동원(總力動員)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그만큼 전시체제의 일상화는 그 강도가 훨씬 더해졌다. 여기에 덧붙여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란 것이 설정되어 매달 8일 마다 국운(國運)을 건 전쟁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로 다잡도록 강요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월 3일자에 수록된 ‘대조봉대일’ 설정 관련 내각고유의 내용과 관련보도이다. 이로써 일제 패망에 이르기까지 매달 8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로 자리매김되었다.

 

<경성일보> 1942년 12월 8일자에는 ‘대미대영 선전포고 조서’의 1주년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제작된 ‘대동아전쟁황군전과약도(大東亞戰爭皇軍戰果略圖)’가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1월 3일자에는 각의결정(閣議決定)에 따라 ‘대조봉대일’이 새로 제정된 내용에 관한 ‘내각고유(內閣告諭)’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소화(昭和) 16년(1941년) 12월 8일 황공(惶恐)하옵게도 대조(大詔)를 환발(渙發)하옵시어 미국(米國)과 영국(英國)에 대(對)하사 전(戰)을 선(宣)하야 황국(皇國)의 태도(態度)와 국민(國民)의 향(嚮)할 바를 소시(昭示)하옵시니 오직 공구감격(恐懼感激)에 불감(不堪)한다.
황국(皇國)의 융체(隆替)와 동아(東亞)의 흥폐(興廢)는 정(正)히 이 전쟁(戰爭)에 달려 있는바 전국(全國)의 민초(民草)는 감격(感激) 오직 감격(感激)하야 받들고 추(醜)의 어순(御楯)으로서 분기(奮起)하여 극진극감(克盡克堪)하야 웅혼심원(雄渾深遠)한 황모(皇謨)의 익찬(翼贊)에 유감(遺憾)이 없기를 맹서(盟誓)치 않음이 없다.
실(實)로 8일(八日)이야말로 황국(皇國)에 생(生)을 향(享)할 자(者)는 다 같이 영원(永遠)히 망각(忘却)할 수 없는 날이다. 신질서건설(新秩序建設)의 대사명(大使命)을 부하(負荷)한 기념(記念)할 날이다. 따라서 이에 소화(昭和) 17년(1942년) 1월(月) 이강(以降)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의 완수(完遂)에 이르기까지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정(定)한다. 즉(卽) 전국민(全國民)은 이날을 상시실천(常時實踐)의 원천(源泉)으로 앙(仰)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 오로지 대어심(大御心)을 봉대(奉戴)하야 각각(各々) 그 본분(本分)에 정려봉행(精勵奉行)하고 더욱 국가총력(國家總力)을 확충발휘(擴充發揮)하야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종국(終局)의 목적완수(目的完遂)에 정신(挺身)하야써 성지(
聖旨)에 봉응(奉應)하기를 기(期)하라.
그런데 이에 반(伴)하야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은 이를 폐지(廢止)하고 그 취지(趣旨)로 한 바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발전귀일(發展歸一)케 하기로 되었다.
소화(昭和) 17년(1942년) 1월 2일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이에 따라 1942년 1월 8일이 제1회 대조봉대일이 되었고, 그 이후 매달 8일이 되면 각 신문의 제호(題號) 위에는 원색으로 인쇄된 일장기(日章旗)를 덧붙이는 한편 1면 상단에는 ‘선전포고조서’의 전문이 그대로 재수록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또한 각 학교, 마을, 직장, 관청 등 에서는 집회를 열고 결의(決意)를 새로 다지는 관련 행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8일의 제44회 대조봉대일에 이르기까지 거듭 반복되었다.
이른바 ‘대조봉대일’에 이뤄지는 행사에 대해서는 국민총력 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제정한 「대조봉대일 운영에 관한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상회(常會)’의 진행 방식을 소개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매월 8일 조(朝) 반드시 정동리부락연맹(町洞里部落聯盟)에서 ‘대조봉대일 상회’를 개최할 것. 개최시각은 상회에 대한 방송시각에 합치되도록 할 것. (4월~10월 오전 6시 30분, 11월~3월 오전 7시 30분) 각종연맹(各種聯盟)은 전항과 다른 시각에 같은 상회를 가질 것. [당일 휴일일 때는 익일(翌日)에 조하(繰下)할 수 있음]
(나) 상회 개최 시간은 대개 30분을 한도로 할 것.
(다) 정동리부락연맹의 상회에는 반드시 일가(一家)의 주인(主人)이 출석하고 주인이 사고(事故)가 있을 시는 주부(主婦)가 이를 대신할 것.
(라) 참회자(參會者)의 정렬, 정돈, 동작 등은 정연(整然) 규율(規律) 있게 하고 또한 지각 및 조퇴자가 없도록 할 것.
(마) 참회의 각 애국반(愛國班)은 반드시 반기(班旗)를 휴대할 것.
(바) 상회 회장(會場)에는 가급적 라디오 수신기(受信機)를 설비하고 라디오의 방송에 의하야 행사를 진행하고 또 방송강화(放送講話)를 청취하게 할 것.
(사) 상회행사의 순서는 좌(左)에 의할 것.
1. 국민총력(國民總力)의 노래 또는 애국반(愛國班)의 노래 (방송)
2. 개회, 국기게양[호령방송(號令放送)]
3. 국가합창(國歌合唱) [반주방송(伴奏放送)]
4. 궁성요배(宮城遙拜, 호령방송)
5. 묵도(默禱, 호령방송)
6. 강화(講和, 방송)
7. 신합사항(申合事項)
8. 전월(前月)의 보고
9.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제송(齊頌)
10. 만세봉창(萬歲奉唱)
11. 국기강하(國旗降下)
12. 해산
(아) 관공아(官公衙), 학교, 회사, 은행, 공장 및 이에 준할 단체의 각종 연맹 상회에 있어서는 조서(詔書)를 봉독(奉讀)할 것.
(자) 관공서, 학교, 회사, 공장 등에 근무하는 자도 정동리부락연맹 상회에 출석할 것.

 

그런데 대조봉대일의 제정에 관한 ‘내각고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말미에 기존의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은 폐지하고 그 취지는 대조봉대일에 합쳐지도록 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대조봉대일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특정일을 정하여 결전(決戰)의 의지를 고취하는 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행사일의 연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았더니, 1937년 7월 7월에 발생한 이른바 ‘북지사변(北支事變, 노구교사건)’ 직후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제정한 ‘학교애국일(學校愛國日)’에서 이러한 흔적의 초기 형태가 포착된다.

<매일신보> 1937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학교애국일’ 제정 관련 보도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나사변’의 확대를 앞두고 학생아동을 통하여 총동원의 효과를 각 가정에 미치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9월 6일을 애국일(愛國日)로, 전 조선 대소학생층(大小學生層)에 시국인식의 강화기도, 이들을 통하여 각 가정에도 철저시킬터」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국가 초비상시에 직면하여 국민은 애국의 적성을 발로하고 있는데 총독부에서는 이 기회에 시국을 인식시키어 참말 내선일체를 강화 철저시키려고 전조선 각종단체를 총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에 학생 아동으로부터 가정에 및게 하고자 종래 관보부록으로 발행하고 있던 것을 전조선 120만의 학생아동을 통하여 각 가정에 배포시키게 되었다. 다시 오는 9월 6일에는 전조선 각 학교로 하여금 시국을 강조시키기 위하여 이날을 애국일(愛國日)로 정하고 국기의 게양(揭揚), 국가(國歌) 고창, 황거요배(皇居遙拜)를 하여 국민정신의 작흥조서(詔書)를 봉독하며 교장 혹은 군인관계자 등이 강연을 하여 시국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철저시키며 신사에 참배시키어 국위선양(國威宣揚)을 기원케 하여 당일은 전조선을 애국의 적성을 가지고 휩쓸게 할 터로 방금 학무국에서 구체안을 작성하여 근일중에 각 도지사와 관계방면에 통첩을 발하게 되었다.

 

원래는 이러한 학교애국일이란 것이 1회성으로 계획된 것이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내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매달 6일에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이는 그해 9월 2일에 각의의 결정으로 ‘북지사변’의 명칭이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변경될 만큼 중국 지역에서 전선이 계속 확대되는 상황이 급격히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11월 16일에는 정무총감의 통첩(通牒)으로 각 지방의 사정에 따라 매월 1일 또는 15일에 ‘애국일(愛國日)’을 정하여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학교애국일’도 역시 통상 매월 1일에 실시하는 ‘(일반) 애국일’과 통합하여 시행되도록 하였으나 이 둘은 실시주체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여 12월 11일에는 정무총감의 통첩으로 다시 ‘학교애국일’을 분리하여 매달 6일에 실시하는 것으로 환원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7일자에 소개된 카네무라 류사이(金村龍濟, 김용제의 창씨명)의 「애국일(愛國日)」이란 친일시(親日詩)를 보면, 이 당시에 매달 초하루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행사의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지상(地上)의 오늘을 싸울 신호(信號) ─ / 생명(生命)의 아침 부르는 이른 싸이렌 / 우렁찬 소리에 맑은 바람이 나서 / 별들이 꿈 자취 같이 남기고 간 / 흰 안개 선뜻 높이 개었다 / 상쾌(爽快)한 가슴 속까지 하늘 푸르다.
티끌 잦은 넓은 교정(校庭)에 / 그득 모인 수천(數千)의 애국반원(愛國班員)들 / 젊은 대밭 같이 들어선 반기(班旗)의 깃발 / 가을 짙은 단풍(丹楓)가지와 함구 / 황금색(黃金色) 가마귀 날개 살아 춤춘다.
동쪽 산(山) 위에 솟는 새로운 햇발에 / 게양탑(揭揚塔) 오르는 붉은 일장(日章)을 주목(注目)하면 / 희망(希望)의 상징(象徵) / 손속에 땀으로 되어 / 애국(愛國)하는 피 마음 전신(全身)에 타오른다.
지난 한 달의 발굽을 돌아보고 / 양심(良心)에 가시 없는 반원(班員)은 용사(勇士) / 이달 한 달을 다 같이 바라보고 / 새 계획(計畫)을 굳게 맹서(盟誓)하는 대열(隊列) 위에 / 초(初) 하루날 반기(班旗)가 일제(一齊)히 나부낀다.

 

(왼쪽) 일본제국의 각의(閣議) 결정에 따라 매월 1일이 ‘흥아봉공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8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서는 매월 1일에 ‘애국일’이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기존의 방식이 그대로 통용 되었다.
(오른쪽) 제3회 흥아봉공일(애국일)에 맞춰 처음으로 애국반 상회(愛國班 常會)가 함께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11월 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애국일을 맞이하여 주먹밥으로 식사를 하는 미나미 조선총독의 모습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일본 내각의 결정에 따라 제국 전체가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로 정하여 이를 실시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흥아봉공일은 이미 식민지 조선에서는 애국일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않았으므로 애국일로 통일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애국일을 더욱 철저히 실시하는 방침이 강조되면서 총독부 애국반의 경우, 다음과 같은 실천항목을 설정하여 이를 준수하도록 했다. 이를테면, 1. 조기여행(早起勵行) 2. 신사참배(神社參拜) 3. 궁성요배(宮城遙拜) 4. 도보운동(徒步運動)과 통학(通學) 5. 간이주식(簡易晝食, 주먹밥과 한가지 반찬) 6. 금주절연(禁酒節煙) 7. 연회폐지(宴會廢止) 8. 오락자제(娛樂自制) 9. 근로배가(勤勞倍加) 10. 출정군인(出征軍人)과 유가족 위문위자(遺家族 慰問慰藉) 등이 그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정신총동원 경기도연맹과 같은 곳에서는 사회풍조를 경장(更張)하는 방안으로 각 극장과 영화관은 물론이고 백화점과 요리점, 카페, 음식점도 애국일에 일제히 휴업을 하고 또 전발(電髮, 파마넌트)을 폐지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하여 1939년 11월 1일에는 제3회 흥아봉공일(애국일)에 맞춰 경성부 전역에서 처음으로 애국반 상회(愛國班 常會)가 함께 거행 되었으며, 이때 미나미 총독(南總督)도 자신이 속한 경복정회(景福町會)의 행사장인 청운소 학교 교정에 몸소 참석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흥아봉공일은 다시 1942년 1월 8일 이후 대조봉대일로 변신을 거듭하여 전시체제의 결속과 결의를 다시 옥죄는 날로 자리매김되었으니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의 구석구석에서 그야말로 고단했던 나날들은 그렇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수, 2020/12/3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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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새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위해 애쓰시는 회원 여러분과 임직원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코로나19로 고생하시는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든 분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깊은 인내심을 상징합니다. 특히 하얀 소는 신성하여 상서로운 일
이 많이 생기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연구소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거듭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은 우리 연구소가 창립 30주년을 맞습니다. 선생께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보면서 ‘세계만방이 한집이다. ’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우려하며 <친일문학론>을 펴내셨고 이후 친일파의 실체를 밝히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후학들이 선생의 뜻과 정신을 이어가기를 다짐하고 ‘반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3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왔던 해방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는 역설을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선생께서 일제침탈의 잔혹상을 다시 생각하셨던 1965년 당시 한국사회는 ‘친일파’가 득세 했던 시기였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 핵심이 친일세력이었으며 그 군부는 미군정 이후 국가의 행정, 사법 권력을 장악했던 친일파를 거침없이 호위 세력으로 이용한 때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친일의 핵심적인 문제가 ‘정신’ 곧 ‘가치관’, ‘역사관’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가치관, 역사관에 동화된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백성을 수탈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교화와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이며 독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새해는 해방 76주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변화를 이루었는지, 그 변혁을 위해 우리 연구소 구성원 모두 선생의 뜻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이 논의의 중심이 되어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남북 8천만 겨레의 미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 격렬하게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검찰, 사법, 행정 개혁의 시작이 선생께서 이루려 했던 친일 잔재 청산, 친일파의 역사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검찰, 사법, 행정 체계와 제도가 일제의 통치방식을 수용했으며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검찰 권력의 약화라는 취지만으로 접근하는 개혁 방식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검찰 권력을 포함한 행정, 사법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고 미래 우리 사회공동체를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핵심적 가치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사실을 사회공동체가 함께 확인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연구소 구성원들이 더 큰 열정과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 권력자, 재산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 시대 지식인, 권력자, 부자들의 회심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새해 남북 8천만 겨레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상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 함세웅

월, 2021/01/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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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 10주기 맞아 추모비 세워

범하(凡下) 이돈명 선생(1922~2011)은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더불어 인권변호사 4인방으로 불리며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 관련 시국사건들을 도맡아 온 인권변호사들의 대부역할을 했다.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재건위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1970년대 이후 주요 시국사건에서 빠지지 않고 활약했으며 3·1민주구국선언, 동일방직·원풍모방 시위사건, 와이에이치(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등을 변호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전신인 정법회 고문, 조선대학교 총장, 상지대학교 이사장을 맡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애썼으며,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창립이사
장을 역임하며 천주교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돈명 선생은 1995년 6월부터 1999년 9월까지 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서 새로 출범할 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함세웅 이사장의 제안으로 연구소를 비롯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거시기 산우회, 천주교인권위원회가 함께 남양주시 별내읍 천주교영복산묘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 내용과 글씨는 각각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김정남, 오병철 선생이 썼고, 비석은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했다. 추모비를 제작하기까지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이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실무적으로는 정소진 후원회원의 노고가 컸다. 이돈명 선생의 기일인 1월 11일에는 선생의 자녀와 몇몇 지인들이 참석했다. 연구소는 코로나19가 다소 진정되면 별도의 추모비 제막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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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
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총칼을 내려놓은 독립군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여 독립군의 역사를
남긴 일기, 수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교우단의 기
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 북로군정서의 훈련교본,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제3호, 봉오동전투상보와 더불어 의병 출신 독립군 김정규 일기, 한국광복군 김문택 수기, 지청천 친필 일기 <자유일기>, 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우석 수기, 한국광복군 지복영 수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를 통해 일제에 맞선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의 간절한 바람과 희생을 되돌아보고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이끌어온 한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특별전은 VR전시로도 제작하였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어 현장 관람에는 제약이 있지만, 2020년 11월에 개막한 상설전시, 특별기획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전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월, 2021/01/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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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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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선생이 12월 17일 임청각 방음벽 철거행사에 앞서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내며 고유문을 낭독하고 있다.

 

오늘은 근 80년 동안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옮겨지는 날입니다. 임청각은 한 가문의 종가인 동시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만들어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등의 중임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주 이상룡, 동구 이준형, 소파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代) 종손과 형제 숙질 등 11명이 서훈되었고, 임청각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임청각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과거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고, 국토는 분단되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는 남북(南北)과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석주의 정신이 오늘날 갈등을 잠재우고 미래를 가리키는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 드디어 오늘 국가와 국민의 노력으로 철로가 옮겨지고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휘어지며 앞을 막았던 철도가 곧게 펴지며 제자리를 찾음은 철도 본연의 역할인 ‘소통과 이동의 자유 회복’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철길이 이어져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결하고, 대륙을 횡단해 유럽으로 뻗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그 길 위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이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2020. 12. 17.
석주 선생 주손 창수 삼가 고하나이다.

월, 2021/01/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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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2)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에 재미난 구절이 많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혹 한두 개 정도 소개해주세요.
●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시각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어느 분교에서 17년 동안 졸업생 7명을 배출했대요. 선생님이 있고, 교장 선생님도 있는 그런 학교죠. 어떤사람은 ‘대단하다. 진짜 사람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네’라고 평할 것이고. 다른 시각의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런 학교를 없애지 않고 왜 그냥 놔두지?’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죠.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서 내 의견을 담아 책에 실었어요,. 그런 건 가능한 거잖아요? 그것이 작가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적은 구절이 있어요. 북에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 부터 시작해서 왜 기독교는 북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라고 적은 구절이 있는데요. 우리는 그것이 북의 종교탄압의 증거라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북에서 종교탄압의 흔적은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잖아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에 어마어마하게 폭탄을 투하해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구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폭탄에 의해 희생을 당했어요. 그런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사회에서 미국을, 또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종교를 믿어보라 권유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겠어요?
그는 이렇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교육과 종교라는 두 가지 사례로만 살펴봐도 북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소위 합리성과 효율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남과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북은 애시당초 비교대상이 아니라 연구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시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하고 교류하며 물 흐르듯 천천히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은 북의 사회제도에 대한 측면과 우리 사회와 너무나도 이질적이 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만한 북의 문화에 대해 적은 책이다. 말하자면 북을 좀 더 내밀하게, 쉽게 이해하기 위해 펴낸 교양서라 할 만하다. 아무튼 출간된 지 이제 1년하고 3개월 정도 지난 책이지만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 <민족사랑>을 탐독하시는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솔직히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탈북민들에 대한 이야기, 또 종편에 대한 이야기를 더 길고 다양하게 나누었다. 대표적으로 TV조선에 출연하고 있는 자칭 북한 전문가라 칭하는 탈북민의 말을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부터 학자입네 하며 온갖 교양을 떨어가며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 중앙정보부 시절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이제는 박물관에 보관하기에도 부끄러운 북의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까지 곁들여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 전체를 지면에 싣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이지상 씨가 출간한 책들이다. 소위 대박을 친 베스트셀러는 아니어도 잔잔하게 삶의 이야기,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찾아 읽어보시길 권한다.

 

그는 벌써 세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다.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그리고 지금껏 이야기 나누었던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동안 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혔는지 궁금했다.

● 지금까지 책을 총 세 권을 출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세 권의 책 중 가장 많이 판매되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 첫 번째 책하고 두 번째 책은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한데, 두 권 모두 3쇄씩 찍었어요. 그러니까 최소 4천 권 이상은 팔렸다고 봐야죠. 그리고 새로 나온 책은 2천 권 정도 판 매된 듯해요.
● 인문학 서적이 거의 판매가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래도 많이 나간 편이네요?
● 그런 셈이죠. 그런데 그게 참 희한해요. 오래 전 음반시장이 호황이라고 할 적에도 제 음반은 한 3천 장 정도밖에 안 나갔어요. 서태지가 200만장을 팔았네 하던 시절에도 제 음반은 안 나갔어요. (웃음) 전 무얼 해도 3~4천정도? 그 정도로 지금껏 먹고 살고 생활을 꾸려왔죠. 그냥 알음알음 그렇게 판매되었고, 그 3~4천이란 숫자가 나를 도와주고 지금의 내 생활을 책임져 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혹시 <스파시바, 시베리아>는 읽어 보셨나요?
● 예.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 중 하나인 대륙철도 타고 시베리아 거쳐 유럽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서울역에서 기차표 끊어서 기차 타고 프랑스 파리, 런던까지 가는 꿈도 꾸었고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나요?
● 내가 그 책에 적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내 당위일 수 있어요. 내용이 독특한 상상이라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열거한 거라서요. 죽은 사람 추모하고 우는 사람 위로하고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엮어서 책으로 만든 거니까 제 입장에선 당연한 거죠. 우리나라 같은 현실에서는 독립군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실리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그런데 TV나 라디오 같은 데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잖아요. 그게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나라도 기록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에 실은 거죠.
● 그럼 시베리아엔 몇 차례나 다녀오셨나요?
● 한 열두 차례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 직접 가서 보시니까 기분이 어떠셨어요?
● 시베리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뭐랄까… 우리가 이렇게 쪼잔하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죠. 거긴 말 그대로 광야예요.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우리나라에서 그런 데를 보려면 그나마 호남평야 정도나 되야 가능하려나?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면 (호남평야의 땅은) 다 누군가의 소유잖아요? 소유관계에 따라서 개발되고 경작되고 하는 거잖아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이익 구조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착취 구조인 거죠. 시베리아에는 그런 게 없어요. 그 넓은 대지와 강에 콘크리트가 없어요. 콘크리트를 쓴다는 건 경계를 쌓는다는 거예요. 콘크리트로 경계를 나눈다는 건데, 거긴 그냥 강과 산으로 경계를 확인할 수 있지 인위적인 것들이 없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곳은 자연에 묻혀서 어우러져 사는 곳이지 자연을 개발한다는 개념이 없는 거죠. 그곳에 가면 소위 반성이란 것들이 자연스러워지죠. 생명이니 평화… 이런 개념들이 시베리아에 가면 말 그대로 자연스러워지니까요.

 

이지상 씨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 오랜만에 나온 신보이고, 요즘 음원 사이트에 넘쳐나는 이해 못할 가사로 가득한 노래가 아닌 노랫말을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곰탕 같은 앨범이다.

 

이후에도 자연을 재산 삼아 살아가는 시베리아 사람들의 이야기, 땅 한 평 가지기 위해 매일을 사람과 투쟁하는 우리와 매일이 대자연과의 투쟁인 그들의 이야기, 1년의 2/3가 겨울인 그곳에서의 생존방법 등등 대한민국에서 사는 보통의 존재들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시베리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자세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지상 씨는 시베리아에서 보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스파시바, 시베리아>를 쓰게 된 계기이자 그것이 책의 내용이라고 말해 주었다. 끝으로 최근에 발매한 그의 6집 앨범에 대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 최근에 앨범을 새롭게 발매하셨는데, 제목이 특이한 것들이 몇 곡이 있네요. “윤치호에게 쫓겨난 소녀”도 그렇고,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도 그렇고요.
● 채광석이란 시인이 작년에 시집을 새로 출간했고, 출판기념회에 저를 초대했어요. 그 시인과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죠. 초대를 받아 가는 자리인데, 그냥 가기는 모양새가 좀 그래서 시집을 먼저 읽어보니 채광석 시인이 연해주에 다녀와서 쓴 이야기들을 시로 써 놓은 것들이 있더군요. 읽어보니 역사적 관점이 저랑 비슷해서 그의 시 두 개를 곡으로 썼죠. 그게 바로 질문했던 곡들이에요. 오래 전부터 한번 곡으로 만들어야지 했던 것들을 게으름 피우느라 못 쓰고 있었던 걸 이때다 싶어 일사천리로 곡을 만들었죠.
● 그럼 혹시 6집 앨범 만들면서 특별히 곡을 만들 때 고심하며 만드신 곡, 공을 들여서 만든 곡이 있으실까요?
● 노래를 만들 때 고심하고 공을 들이지 않은 곡이 따로 있을까요? (웃음) 다만 6집 앨범중에 가장 고심하며 곡을 만든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타이틀곡인 “나의 늙은 애인아”가 아닐까 하네요. 그 노래의 가사는 최광림 시인의 시인데, 시가 아주 길어요. 그 긴 것을 가지치기 하고 정리해서 엑기스만 모아서 가사를 만들었죠.

● 원래 있던 시를 토대로 곡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혹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쓰신 건가요?
●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동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권고와 같은 노래죠. 우리 나이쯤 되면 누군가는 성공했다고 우쭐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찌질하게 움츠러든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지향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비슷하거든요. 하지만 물리적으로 나이 먹고 늙어가는 것을 인정한다면 도드라지진 않더라도 느긋하게, 하지만 뜨끈함을 잃지 말고 살아가자는 그런 노래죠. 그러니까 애인이라는 대상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고 봐야겠죠. 힘겹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의 방도를 찾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곡들은 많지만 이제 노년으로 향하는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니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라니 다시 한번 이야기를 새기며 들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이 언제부터였는지, 또 내년이 연구소 창립 30주년임을 주지시켜 드리고 기나긴 대화를 마쳤다. 인터뷰 원고에는 제대로 반영이 안 되었지만 대화는 즐겁고 유쾌했다. 역시 오랜 세월 한 우물 파며 사람과 시대를 노래한 가객의 풍모가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기회가 아니더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더 많은 이야기를 청해 듣고 싶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이지상 씨에게 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월, 2021/01/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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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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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실천적 지식인 김태준

박광종 선임연구원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여름,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 강사인 김태준은 경북 안동 출신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집에 조상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훈민정음 원본(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용준과 함께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世居)하던 후촌 이한걸 댁을 방문했다. 훈민정음 원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종대왕이 집필한 예의편(例義篇)과 왕명에 의해 정인지·신숙주 등 집현전 8학사가 쓴 해례편(解例篇), 정인지 서문 등 세 부분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없었다.
이한걸 선생이 훈민정음 소장 내력과 두 장의 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은 본관이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종파이며, 일찍이 선조 이정(李禎)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상으로 받아 늘 궤짝에 감추어 세전가보로 간직해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 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비장(秘藏)해왔다는 것이다.1김태준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 9월 29일 기사에 훈민정음 예의편이 있음을 알고 이용준과 함께 결락된 두 장을 보수하기로 했다. 이용준은 이한걸 선생의 셋째아들로 12세때부터 서예에 뜻을 두고 안진경체를 익혀 16세 되던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서예계의 신동’으로 대서특필되었다.


1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 소장처에 대해서 이용준의 본가설과 처가설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본가설을 따랐다. 이 견해는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이 1954년 국어국문학회가 펴낸<국어국문학> 제9권(1954.4)에 발표한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에 근거한다.
이에 반해 이용준의 처가설은 곧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던 광산김씨 종가, 긍구당 종손인 김응수 씨의 소장본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박영진 동래여중 교사가 한글학회 회보인 <한글새소식> 제395호(2005.7)에 기고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에 의해 제기되었다. 1991년 10월 18일 긍구당 종손 김대중 선생의 답장 “이한걸 댁은 우리 셋째 고모의 시댁일세. 이한걸 씨의 삼남 이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조부(김응수)께서 [사위를]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네. 정음원본의 앞에 두 장 없는 것은 우리 집의 책에는 앞 첫 장에 꼭 장서인을 찍어놓네. 말짱한 책에 앞장이 없는 것은 증인을 소멸하고자 함이 분명하고(하략).


 

 이용준은 <조선왕조실록>의 훈민정음 예의편 앞부분을 안평대군 필체로 모사하여 결락된 두 장을 복원하였다. 복원과정에서 세종대왕 서문 말미에 “편어일용이”(便於日用耳)를 “편어일용의”(便於日用矣)로 잘못 필사하였다.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1) <조선일보> 1940.7.30.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에게 훈민정음이 국어학 연구자료로 매우 귀중한 것임을 알리고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기를 청해 허락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김태준은 훈민정음 원본을 당대의 국어학자인 방종현과 홍기문(홍명희의 아들)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 결과물이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란 제목으로실렸다. 여기서는 훈민정음을 입수한 경위를 서술하고 해례편 전문을 초역해 놓았으며 “그 원문의 번역을 싣고 뒤를 이어 거기에 대한 주석 내지 우리 두 사람의 연구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그해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폐간되었고2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1943년 조선어 사용 금지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활용한 연구가 불가능해져 해방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한글 창제 원리를 명확히 기술한 훈민정음 ‘해례편’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 원본 발견에 대해서 대부분의 식자들이 크게 환영하였는데 특히 외솔 최현배는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라며 감격하였다.(<한글갈>, 1942)

왼쪽부터 조선왕조실록 113권 훈민정음 기사,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어제 훈민정음’

 

훈민정음에는 언해본(한글본)과 해례본(한문본)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것은 언해본이다. 세종대왕이 지은 서문과 한글자모 28글자를 간략히 설명한 예의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인석보>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소략하여 학자들 간에 한글 창제 원리와 구체적인 사용법에 관한 견해가 분분했다. 이에 비해1940년에 발견된 해례본에서 처음 등장한 해례편은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例)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천지인(天地人)을 응용한 모음 제자 원리와 발음기관을 본 딴 자음 제자 원리를 밝혀놓아 한글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의 요청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매자를 수소문하여 장안의 대부호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을 연결시켜 주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중히 보관해오다가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1946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어학회에 위탁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인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한글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사후인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2 조선일보의 폐간 경위는 <민족사랑> 2020년 7월호에 실린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의 민낯」(최우현 연구원)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국 고전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다

 

명륜학원 강사 시절의 김태준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던 김태준은 1905년 평북 운산에서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15세 때 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후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 3학년 때 공립이리농림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동 대학 법문학부 중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신라 향가와 이두를 연구한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경성제대 교수 밑에서 국문학의 유산을 발굴·정리하는 데 힘썼으며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또한 재학 중이던 1930년에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총독부가 운영하는 유교 교육 기관인 경학원 직원(直員) 겸명륜학원 강사에 임명되어 한문학(漢文學)를 가르쳤다. 그해 조윤제·이희승·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문학보>와 ‘총서’를 펴내는데 참가했으며 우리나라 한문학과 소설의 역사를 다룬 <조선한문학사>(1931)와 <조선소설사>(1933)를 잇따라 펴냈다. 1934년5월 한국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는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역대 고전가요를 취사하여 편집한 <조선가요집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라향가편, 백제고가편, 고려가사편, 이조가사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우리나라 시가(詩歌) 연구의 기초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1938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뛰어난 연구성과로 손진태, 김두헌과 더불어 학술연구보조생으로 선발되어 학사원(學士院)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보조금을 받았다. 1939년 명륜학원 강사 겸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에 취임했다. 그해 정년퇴직하는 다카하시도루(高橋亭)의 후임으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경성제대에서 교편을 잡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이해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학예사의 ‘조선문고’ 시리즈로 <증보 조선소설사>를 펴냈고 <원본 춘향전> <고려가사> <청구영언> 등을 교열하여 출판했다. 김태준은 1930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 고전문학사의 기념비적 저작인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각종 신문 잡지 학술지에 「별곡(別曲)의 연구」 「조선가요개설」 「시조기원에 대한 재고」 「조선민요의 개념」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조선소설발달사」 「홍길동전 연구」 「구운몽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무수히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현재까지도 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특히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는 비록 제한된 자료와 실증적 방법상의 한계가 있으나, 각 분야에서는 최초의 통사적 기술로서 국문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왼쪽부터 조선소설사,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경성콤그룹 활동과 연안행

1939년 4월 일제 당국의 검거를 피한 이재유 일파의 이관술과 김삼룡 등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지도부를 형성하고 이후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태준은 경성제대 강사로 재직하던 중 비밀리에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 이현상·정태식과 함께 인민전선부에 소속돼 과거 활동가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조직원을 포섭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0년 8월에는 박헌영이 지도하고 있는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편집하였다. 1940년말 경성콤그룹의 지하조직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김태준은 1941년 1월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함께 검거되었고 온갖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김태준이 옥중에 있는 동안 생활고로 인해 그의 노모와 아내, 젖먹이 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을 겪는다. 김태준은 비극적인 가족사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마주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더욱 단단히 벼린다.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延安行)>3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실천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3 <연안행>은 서울에서 중국 연안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발행한 기관지 <문학> 1호, 2호, 3호에 나누어 연재한 글이다.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 조음(燥音: 애태우는 소리)이 이타(耳朶: 귓불)를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출옥 후 경성콤그룹 잔존 조직원들과 소규모 비밀활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1월, 경성콤그룹 핵심투사로서 옥중생활을 마치고 나온 박진홍과 비밀혼인을 하였다. 1944년 서중석을 중심으로 꾸려진 서울 지역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군사문제토론회의 결의를 통해 김태준에게 중국 연안에 가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국내 진공에 대한 군사대책을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연안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점으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태준·박진홍 부부가 1944년 11월 서울을 떠나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며 신의주, 안동, 봉천, 산해관, 천진, 북경을 거쳐 1945년 4월 홍군 해방구 연안에 다다랐다.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총부는 김태준·박진홍 부부를 크게 환영하고 후대하였다. 김태준은 조선 내 정세와 반일투쟁 양상을 설명하고 조선의용군의 국내 진공책을 논의했다. 이후 조선혁명가를 양성하는 조선혁명군정 학교에서 ‘조선국내반일투쟁정세’ 등에 대해 특별강의를 했다. 일제의 항복 후 9월초에서 10월말까지 화북에서 심양에 이르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행군 도중 이들 부부는 관동군 패잔병들과의 잦은 전투를 겪으며 온갖 역경을 헤쳐나갔다. 이들 부부는 심양에서 조선독립동맹과 헤어져 1945년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참담한 분단 현실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다

김태준이 서울에 도착해 마주한 조국의 현실은 그가 꿈꾸던 자주독립국가가 아니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가 분단되었으며 미군정청이 통치하는 남한은 친일파와 모리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모교인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에서 몸담으며 지난날 못다한 한국 고전문학을 연구하고자 한 희망을 접고 다시금 민족해방투쟁의 전사로서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8·15 이후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이 남조선은 친일 팟쇼분자 모리배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적에 비상한 불쾌를 느낄 뿐 아니라 친일파 팟쇼분자 모리배의 도량(跳梁: 함부로 날뜀)으로 인해서 혼란을 결과한 남조선의 대비극에 대하여 해방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나는 해외에서 유랑하다가 들어온 전재민(戰災民)의 한 사람이다. 경성에는 많은 적산 사찰 유곽 요정 등 빈집이 있건만 나에게 집 한 칸도 없다. 오직 일제시대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다는 죄 때문에 테러단이 따라다니고 쌀은 하루 1홉의 배급도 타본 일 없고 밀가루와 강냉이도 없어서 곤궁과 낙망에 신음하며 물가는 천정을 모르고 올라가니 도대체 이와 같은 곤궁은 나뿐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 전체의 동일한 처지에 있는 것이요 이 때문
에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정치적 혼란과 경제 파탄으로 민생은 도탄에 전락!」, <독립신보> 1947.1.8)

김태준의 <연안행>(왼쪽)과 1946년 2월 김태준이 보고 강연을 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회의 장면
(오른쪽) Ⓒ김용준

 

김태준은 1945년 12월 경성대학에 복직되었고 이 무렵 교수, 학생, 졸업생 등 60명으로 구성된 전학대의원회에서 세 명의 총장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청의 반대로 서울대 총장에 오르지는 못했다. 미군정청은 경성대학의 좌경화를 우려하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친미적인 대학을 만들기 위해 1947년 6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표했다. 이에 대해 전국에 있는 대학의 진보적 교수와 학생들이 맹렬히 반대했으나 미군정청의 강력한 탄압으로 그해 9월 경성대학은 서울대학교로 개편되고 김태준을 비롯한 수백 명의 진보적 교수와 2천여 명의 학생이 해직, 퇴학당했다. 한편 김태준은 귀국하자마자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차장을 지냈다. 아울러 그해 2월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고전문학에 관한 보고를 했으며 3월에 이조실록간행회가 조직되었을 때 홍기문과 함께 편집위원에 이 름을 올렸다. 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평론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그해 12월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태준 등 9명에 총살언도. <경향신문> 1949.10.2. 위에서 두번째가 김태준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가 대사령에 의해 1948년 9월 석방된 후 지하로 잠적했다. 이무렵 남로당의 핵심간부 대부분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아내 박진홍도 김태준과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때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에 남아있던김태준은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지리산에 파견되어 오장환, 이용악, 유진오 등 예술인과 함께 유격대 지원사업을 벌였다.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부장으로 문화공작대 지원사업과 기밀탐지사업을 하던 김태준이 서울시경 사찰과에 의해 종로에서 체포된 것은 1949년 7월 26일이었다. 이적행위 및 간첩죄로 기소되어 9월 27일부터 육군준장 원용덕이 재판장을 맡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최종선고일인 9월 30일, 김태준은 최후 진술에서 “지금 조선에는 고전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
”고 피력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49.10.1.) 최후 진술을 마친 후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았고, 11월 어느 날 서울 수색 육군사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참고문헌]

알브레히트 후베, <날개를 편 한글>, 박이정출판사, 2019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기환, 「반갑도다! 훈민정음의 나타남이여! 1940년 <간송본>의 출현에 외솔이 외쳤다」, <경향신문> 2019.11.5

김인현, 「국문학자 삶 떨치고 공산주의 활동 김태준」, <한겨레신문> 1991.9.13.

최영성, 「김태준의 학술연구와 국고(國故)정리작업」, <한민족어문학> 제46집(2005)

김성동, 「김태준 : 아름다운 문화조선을 꿈꾸던 ‘문화공작대장’」,<현대사 아리랑>, 녹색평론사, 2010

월, 2021/01/2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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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6 ]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매일신보> 1915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신구연극 대흥행 광고 문안에는 ‘동구내단성사’라는 표기가 또렷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淸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키고, 후자(後者)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으로부터 동남 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또 남촌생원(南村生員, 남촌의 하급관리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북부에 권세자의 거주자가 많고, 남부에는 이에 반하는 선비가 거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아랫대 지역은 각종의 군속(軍屬, 장교와 집사 등)이 주로 몰려 살던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 탓인지 이곳과 가까운 도성밖 왕십리나 이태원 등지에도 하급 군졸과 병사들이 많이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병(亂兵)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청국군(淸國軍)에 의해 이들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아랫대의 범주는 자료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이나 이 가운데 ‘훈련원’이라는 공간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원은 원래 조선의 개국 초기에 ‘훈련관(訓鍊觀)’이라 하다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곳은 무과시험과
아울러 활쏘기와 습진(習陣)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과 열병(閱兵)을 실시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얘기의 현장이 곧 이곳 훈련원이었던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었다고 전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훈련원의 연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되어 과시(科試)와 무재습독(武才習讀)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이곳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으며 석초(石礎)가 매우 높다. 무과(武科)를 볼 때마다 이곳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원관(院官)이 이 누에 올라 화살을 배부하면 거자(擧子, 응시자)는 누 아래에 둘러서서 이를 받는다.
살피건대 태종(太宗) 17년에 훈련관(訓鍊觀)의 모든 밭을 이곳에 속하게 하고, 이로써 무사(武士)를 양성하였다. 나중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고쳤으며, 이 곁에는 옥전(沃田)이 있어서 숭채(菘菜, 배추)를 심는데 그 맛이 좋아서 이를 일컬어 ‘훈련원배추(訓鍊院菘)’라 한다. 이 옆에 우물이 있어 ‘통정(桶井, 통우물)’이라 하는데 물맛이 제일이라 칭한다. 훈련원 사청(射廳)에는 성간(成侃)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훈련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오서(漢城府 五署)의 방계동명(坊契洞名) 정리자료에 ‘훈련원’이 ‘남서 명철방 남소동계(南署 明哲坊 南小洞契)’에 속해 있었다고 채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제정)」을 살펴보니, 이 당시에 종래의 훈련원은 ‘황금정 6정목(黃金町 六丁目, 지금의 을지로 6가)’ 구역에 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정리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사)>에는 “황금정 6정목 18번지, 잡종지(雜種地), 35,029평, 국유지”로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 훈련원 자리이다. 이곳은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와 그 후면으로 청계천변에 접하는 광활한 지역 전체를 두루 포괄하는 지번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지역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을지로 5가 40번지 일대)이 별도로 남아 있으므로 이로 인해 훈련원 구역의 공간적 범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있었던 구역이며, 동쪽 일부가 ‘황금정 6정목’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황금정 5정목’과 ‘방산정(芳山町)’에 들어 있으므로 딱히 훈련원 구역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 펴낸 <경성사범학교총람(京城師範學校總覽)>(1929)에 수록된 ‘학교연혁’ 항목을 보면 “[1921년 9월 30일] 경성중학교 가교사(假校舍)에서 황금정 5정목 훈련원 신축교사(기숙사 3동)로 이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이곳 역시 대개 훈련원 권역에 포함하여 인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에는 훈련원 옛터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훈련원 청사는 1917년 6월에 동대문 소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간호부양성소 교실로 사용된다. 왼쪽 저 멀리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근대 시기 이후 훈련원에 관한 흔적을 살펴보니, 1906년 8월에 군부(軍部)에서 친밀기관(親密機關)의 하나로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이곳에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띄긴 한데, 이런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지역의 각종 단체와 학교들의 운동회가 벌어진다거나 서양에서 도입한 각종 스포츠 종목들의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된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들이 단연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YMCA야구단의 야구시합이라든가 엄복동(嚴福童,1892~1952)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대회 등도 이곳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프랑스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9월 7일자에는 군대해산과정에서 숨진 시위대병사들의 시신을 늘어놓은 광희문(光熙門) 밖의 광경과 이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리고 이곳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요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치가 이뤄질 때 해산식이 거행된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31일 장차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할 요량으로 일시(一時) 해대(解隊)케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졌는데, 이에 앞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韓國統監 伊藤博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대해산순서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대해산순서(軍隊解散順序)]
제일(第一). 군대해산이유(軍隊解散理由)의 조칙(詔勅)을 발(發)할 사(事).
제이(第二). 조칙(詔勅)과 동시(同時)에 정부(政府)는 해산후(解散後)의 군인처분(軍人處分)에 관계(關係)한 포고(布告)를 발(發)하며 차(此) 포고중(布告中)에는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시명(示明)할 사(事).
일(一). 시위 보병 일대대(侍衛 步兵 一大隊)를 치(置)함.
이(二). 시종무관(侍從武官) 기명(幾名)을 치(置)함.
삼(三). 무관학교(武官學校) 급(及) 유년학교(幼年學校)를 치(置)함.
사(四). 해산(解散)할 시(時)에 장교 이하(將校 以下)에 일시은급금(一時恩給金)을 급여(給與)하고 기 금액(其 金額)은 장교(將校)는 봉급 대개 일개년반(俸給 大槪 一個年半)에 상당(相當)한 금액(金額), 하사 이하(下士 以下)는 대개 일개년에 상당(相當)한 금액이라. 단(但), 일개년 이상 병역(兵役)에 복종(服從)한 자(者)이라.
오(五).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軍事學)의 소양(素養)이 유(有)하야 체격강건(體格强健)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者)는 일(一), 이(二), 삼호(三號, 전항)에 직원(職員) 우(又)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속(附屬)케 할 사(事). 단(但), 하사(下士)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附)치 아니할 사(事).
육(六).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 소양(軍事學 素養)이 무(無)한 자(者)로 보통학식(普通學識)이 유(有)하야 문관기능(文官技能)이 유(有)한 자(者)는 문관(文官)에 채용(採用)할 사(事).
칠(七). 병기탄약(兵器彈藥), 군복(軍服)은 환납(還納)할 사(事).

 

이 당시 서소문 안쪽 시위대 병영에 자리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은 박승환 참령(朴昇煥 參領, 1869~1907)의 자결 소식에 호응하여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분연히 저항에 나섰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훈련원에서 거행한 해산식에 일괄 소집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다음의 기사들에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작일(昨日) 상호 10시부터 각대 병정(兵丁)을 훈련원(訓鍊院)에 소집(召集)하고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견여철통(堅如鐵筒)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該心)하여 대대장(大隊長)이 효유(曉諭) 후 장졸(將卒)이 호상작별경례(互相作別敬禮)를 시(施)하고 장교(將校)는 고위대명(姑爲待命)이고, 하사(下士)는 80원씩(圜式), 병졸(兵卒)은 1년 이상 근무자는 50원씩, 1년 이하 자는 25원씩 반사(頒賜)하였더라.
[한병휘루(韓兵揮淚)] 작일(昨日)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한 한병(韓兵)들이 은사(恩賜)를 수(受)하고 출래(出來)하야 분기(憤氣)를 불승(不勝)하여 혹자(或者)는 지전열쇄(紙錢裂碎)하고 혹자(或者)는 의관제구(衣冠諸俱)를 매(買)하며 낙루자(落淚者) 다(多)하더라.

 

그런데 ????경성부사???? 제2권(1936), 29쪽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 그야말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11시에 이르러 약 2천의 병사가 몸에 촌철(寸鐵, 기병대의 패검)을 차지 않고 세우(細雨)가 소소(蕭蕭)한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에 개연(慨然)히 정렬했다. 이 시각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의 양대(兩隊)는 남대문 내에서 모반(謀叛)하여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식장참집부대(式場參集部隊)만 해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해산의 취지(趣旨)를 선언하고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여 현장에서 수의해산(隨意解散)하는 것을 허가했다. 병사들은 일이 의외인 것에 놀라 처음에는 호읍(號泣)하는 자도 있었으나 당시의 병사로서는 과분한 금원(金員)을 얻게 되자 읍성(泣聲)은 홀연히 소성(笑聲)과 환성(歡聲)으로 변하였고 오후 3시 식(式)의 종료를 기다려 은사금을 지니고 광희정(光熙町)과 부근의 전체 주막(酒幕), 입주가(立酒家, 선술집), 내외주가(內外酒家)에 설퇴(雪頹, 우르르 몰려가는 것)하여 우음(牛飮)했다. 술집은 이 때문에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는 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東大門公立尋常小學校, 1917년 4월 개교)를 위시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1919년 5월 신축이전), 경성사 범학교(京城師範學校, 1921년 9월 신축이전),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京城女子公立實業學校, 1928년 12월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이밖에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에 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에 옮겨와서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가 해방 이후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또한 1934년에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 요구에 직면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돈으로 지은 ‘경
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이 들어선 자리가 곧 훈련원 구역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이 신축되고, 경성전기회사의 본점이 서울로 옮겨진 것도 모두 이 당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경성전기의 1차년도 기부금 50만 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3월에 낙성식을 보았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1941년 3월에는 이곳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명칭의 시설이 추가된 바 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에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는 1958년에 신설된 ‘국립의료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보다 앞서 훈련원 자리는 1919년(고종황제 인산)과 1926년(순종황제 인산) 두 번에 걸친 국장(國葬)이 벌어질 때마다 봉결식장(奉訣式場)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32년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이에 따른 ‘만주국(滿洲國)’ 수립의 선포를 계기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서울프레스사가 공동주최한 ‘신흥만몽박람회(新興滿蒙博覽會, 1932.7.21~9.18)’라는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옛 훈련원 지역의 공간해체내력을 훑어가다보면 그 말미에 존재감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 1940년 4월 11일에 다시 ‘경성부 훈련원 회장’으로 개칭)이다. 이것은 원래 1937년 2월에 일본인 광산업자인 코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1894~1979)의 기부금으로 확보한 1만 4천 원의 금액으로 훈련원에 자리한 약학전문학교 후편 공터에다 새로운 장재장(葬齋場))을 건설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해 홍제내리(弘濟內里)의 장재장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한편 그곳 화장터에 가마 두 기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1926년 7월호에 수록된 순종 국장 당시 장의식장으로 사용된 훈련원 터 일대의 전경이다. 이에 앞서 1919년3월 고종 국장 당시에도 이곳 훈련원 터가 장제장(葬祭場)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 가을에 옛 훈련원 터에서 벌어진 신흥만몽박람회의 모습을 담은 항공촬영사진이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박람회장이고 그 뒤로 청계천 일대와 경성약학전문학교, 동대문소학교,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 등이 두루 포진한 광경이 함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경성운동장이, 왼쪽으로는 경성사범학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1935)에 수록된 경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 1934년 3월 낙성)의 전경이다. 이른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의 당면과제에 놓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이를 지었으며,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1935년 12월 준공)’ 역시 이 건물과 건립유래는 동일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러나 도중에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재장’만 건설하기보다는 마치 일본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과 같은 공간처럼 야외음악회와 영화회 등을 곁들여 운영할 수 있는 시설로 꾸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를 ‘경성부민회장’으로 그 용도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성부민회장(부지면적 5,566평, 건물평수 26평 3합)의 개장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휘보(京城彙報)> 1938년 1․2․3월호(합본), 76~77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부민 대망(待望)의 부민회장(府民會場)도 부내 모 독지자(某 篤志者)의 기부금(寄附金)으로 드디어 그 실현을 보기에 이르러, 객년(客年) 8월 황금정 6정목 18번지 구 훈련원(舊訓練院)의 광장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1만 2천여 원을 들인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조(近世式 鐵筋 コンクリート造)의 건물도 최근에 준공(竣工)을 고하여 3월 5일부터 개장(開場), 일반(一般)에 대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용시간(使用時間)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이며, 사용요금(使用料金) 20원을 전납(前納)하고 부윤(府尹)의 사용승인(使用承認)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민회장사용조례(府民會場使用條例) 5조(條)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용불승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제5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략)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와 관련하여 이들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 광경이 수록된 <동아일보> 1938년 10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비단 이 행사만이 아니라 이곳 훈련원 터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령제와 추도회가 쉴새없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윤덕영 자작의 부고광고이다. 그의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이며, 영결식장은 ‘경성부민재장(京城府民齋場, 옛 훈련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곧잘 스모(相撲, 일본씨름) 대회나 중량거(重量擧, 역도) 경기대회가 벌어졌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집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의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1938년 9월), 야스쿠니신사 합사 전몰장병 위령제(1938년 10월), 경성부 출신 장병 영령 추도회(1939년 7월), 지나사변 군마(軍馬) 위령제(1939년 10월), 지나사변 전몰자들에 대한 추도회(1940년 7월), 지나사변 5주년 전몰장병 추도제(1942년 7월) 등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경학원 대제학, 귀족원 의원, 종2위 훈1등 자작 ……. 이것도 벼슬이랍시고 이러한 긴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이는 대표적인 친일귀족이자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덕영이 죽었을 때 그의 영결식이 벌어진 자리가 바로 이곳 경성부민회장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미 조중응 자작(1919), 민원식 국민협회 회장(1921), 조동윤 남작(1923), 민영기 남작(1927), 유맹 중추원 참의(1930) 등 적지 않은 친일파 군상이 이곳을 이승과 작별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흔적이 포착되고 있다. 이래저래 훈련원 옛터는 일제의 폐해와 친일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월, 2021/01/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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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전지부 후원회원을 비롯해 광복회 대전지부(지부장 윤석경) 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헌화, 묵념, 약력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
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당초 작년 7월 장군2묘역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묘와 바로 맞은편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 묘를 둘러보며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백선엽 묘를 찾기 쉽도록 안내하는 개별 안내문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데다 현충원 직원 수십 명이 백선엽 묘지를 호위하듯 지켜서 있는 모습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현충원 측은 하루 만에 백선엽 묘지 안내문을 철거했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 언론은 여러 차례 연구소를 비난하는 기사를 냈고 대한민국상이군경회·전몰군경유족회·전몰군 경미망인회 등은 2월 9일 ‘호국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 훼손 행위를 엄단하라’는 공동 입장문을 냈다.

 

토, 2021/02/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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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역사 1도 모르던 피디, 역사에 푸욱 빠지다

– 이은지 YTN라디오 뉴스제작팀장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를 소개해달라
● YTN라디오가 연구소 자문, 경기도와 경기아트센터 제작 지원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장기 프로젝트다.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독립운동가(歌)를,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육성으로 직접 녹음하고 복원해 프로그램으로 제작한다. 음악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한 한 곡의 독립운동가에는 노래와 함께 그들의 선조 이야기도 담겨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익적 목적의 방송물임과 동시에 역사 기록물로도 가치가 깊어, 청취자들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독립 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 YTN라디오, 이은지PD와 연구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2018년 YTN라디오 <이동형의 뉴스정면승부> 프로그램 광복절 특집 기획 자문을 얻기 위해 홍기희 작가와 함께 연구소에 직접 방문했었다. 당시 제작했던 광복절 특집 5부작 ‘그들이 꿈꾸는 나라’는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사회문화발전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이듬해 같은 프로그램에서 3·1운동 100주년 연속기획으로 반민특위 등 근현대사 관련 특집 방송을 했다. 그해 여름에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에 참가해, YTN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어느 무명씨의 꿈>을 제작, 연출했 다. 겨울에는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 취 재하면서 언론인으로서 가져야할 역사 의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취재 기록들 은 <연해주 연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2020년 YTN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역사라는 것은 기억되고 회자될 때 비로소 진짜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기록들이 YTN라디오 를 통해 대중 속에서 회자되고 있다.

●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많은 기록물 형태 중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광복절 특집 <그들이 꿈꾸던 나라> 5부작을 연출했을 때 제 5부 프로그램이 친일음악과 항일음 악에 대한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故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피날레 곡이었던 ‘희망의 나라로’ 는 대표적인 친일음악인인 현제명이 작곡한 곡이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곡 중에서도 비슷 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던가……! 청취자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아마도 대담과 서술이라는 형태보다 노래라는 콘텐츠가 주는 충격파가 더욱 컸던 것 같다. 언젠가는 더 깊게, 노래로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연해주 연가> 다큐멘터리 2부는 당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노래’에 관한 내용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며 불렀을, 매서운 연해주 칼바람 속에서 해방 조국을 꿈꾸며 불렀을 그 시대 그 분들의 그 수많은 노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구술로는 전해져왔으나 기록되어 보관되지 못했던, 악보는 있으나 음원은 없는, 그래서 점차 소실되어 우리 삶에 살아나지 못한 독립운동 가들의 독립운동가(歌). 이 노래들을 기록으로 남겨보자, 이번 독립운동가 복원 프로젝트 <100 년의 소리> 기획의 시작이었다. 라디오 PD 시각으로 얘기해보자면, 음악은 라디오 매체가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콘텐츠 다. 청취자들에게 지식과 정보, 감성을 동시에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에 최 적화된 오디오 콘텐츠. 소리에 집중할 수록 청취자들에게 깊이 각인될 수 있는 노래, 이 아이 템 딱이네 딱.

●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가 그렇게 시작된 거였나?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사실 활자로 된 노래를 입체적으로 복원해서 청취자들의 귀까지 전달되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필수적으로 제작비가 적지 않게 소 요된다. 이 일에 흔쾌히 동참하여 뜻을 모아준 곳이 있었다. 경기도와 경기아트센터다. 두 곳의 제작지원이 확정되면서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돈 안되고 흥행 안되는 역사 콘텐츠(그것도 근현대사, 게다가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니)에 YTN 라디오는 하루 다섯 번 방송이라는 횟수를 배정하고, 메인 프로그램 시간인 소위 ‘잘 나가는 방송’시간(방송 광고로 치자면 무려 ‘프라임 타임대’)에 배치했다.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편을 시작으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현재까지 13편이 제작됐다. FM 94.5MHz YTN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 기획 단계에서부터 복원할 독립운동가(歌)를 선정한다. 제작진의 기준은 두 가지다.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시의적절한가. 그 후에 노래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찾고,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맥락을 검증해나간다. 이 노래를 육성으로 복원할 독립운동가 후손을 물색하고 섭외한다. 제작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스토리텔링’과 ‘연관성’이다. 이 노래는 왜 꼭 이 분의 후손이 불러야하는가. 노래에 담길 ‘이야기’는 왜 반드시 이 독립운동가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고민이 끝나고 답이 나오면 살아계신 독립운동가 혹은 그 후손을 만나러 간다.
취재는 긴 시간 이뤄진다. 후손들이 가슴 깊이 안고 살아온 긴 역사를 회상하기까지의 시간도 필요하거니와 ‘반드시 남겨야할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야하기 때문이다. 2분을 만들기 위해 인터뷰하는 시간은 평균 2-3시간. 취재의 하이라이트는 ‘노래’다. 제작진이 만난 거의 대부분의 후손들, 독립지사들은 노래를 꺼려했다. 그런 분들에게 취지를 무한 설명하고 설득하여 무반주 육성 라이브를 받아내기까지, 이
과정을 무사히 끝내면 후작업에 들어간다. 작가는 취재 속기를 바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긴긴 이야기들의 날실과 씨실을 엮어내어 2분이라는 액기스를 만들어낸다. 현재 YTN 음악실 전설의 마이더스의 손 장석문 감독이 현대판 독립운동하듯이 음악 작업 중이다.

● 해외에 계시는 후손 분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한 계획은 없나?
● 해외까지 나갈 제작비가 없다(웃음).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노래를 복원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해외를 나갈 수도 없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해외에 계시는 분들의 노래도 복원하고 싶다. 음질 문제만 해소된다면 유선 인터뷰나 랜선 인터뷰 등도 시도해볼 생각이다.

●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을 찾아서 발굴하는 건 어려운가? 독립운동가 부모님들이 부르시던 노래를 본인들만 알고 계시는 경우도 꽤 있을 것 같다.
● 취재 중에 만난 한 후손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라며 알려주었다. 가사는 알고 있었으나 곡조는 모르는 듯 했고, 그마저도 미미한 조각의 파편같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노래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할아버지는 “이런 노래를 부르면 잡혀 간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나는 방송인이지 역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 노래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노래를 기준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제작진이 만난 한 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선조들은 노래조차도 잘 안 불렀다고 하시더라. 생각해보시라.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본인의 이름조차, 사진 한 장조차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그런 엄중한 상황 속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그러니 구전으로만 전해질 수 밖에). 해방 이후에도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독립운동했다는 기록을 다 지우고 살았던 분들이 많았으니 말 다했다. 제작진이 만난 후손 분들 중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부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업적을 직접 들은 분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해방된 나라에서조차 성(姓)씨를 바꿔서 사셨
던 분들도 있었으니까. 이 프로그램은, 그 분들이 못 다 부른 노래를 후손들이 다시 불러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 시간과 공을 꽤 많이 들이는 것 같은데, 방송 한 번으로 끝내기는 아쉬울 것 같다.
● 사실이다. 그래서 YTN라디오에서는 방송에 내보내지 못했던 취재 이야기들을 재가공해서 3·1절 등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 프로그램을 유튜브나 방송국 홈페이지에 업로드 하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기록물로 배포할 수 있는 방법 등 대중화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배포하려는 이유? 당연하지않나. 이 노래들은 우리 모두의 역사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더 나아가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면 좋겠다. 여옥사 8호실의 노래 ‘대한이 살았다’를 박정현이 부르고 김연아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이유도 대중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노래가 힘을 가지려면 여러 사람들에게 불려야 한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여러 대중들이 한 소절씩 기억하면서 부를 수 있다면, 선조들의 독립 정신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국치추념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국치추념가’ 노래를 듣다보니 가사에 날짜가 나오더라. 아마 앞으로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 날짜는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다보면 자연스럽게 노래 속에 담긴 뜻과 의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한다. YTN라디오가 우리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길 기대한다. 
이런 이유로, 복원을 할 때 고민하는 지점이 ‘대중화’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대화해서 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뜻과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되, 형식은 세련되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이 복원된 노래들로 콘서트를 개최하고 실황 음반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 노래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는 많이 다르다.
● 들어보면 타령 같고 시조 같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노래가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97세가 되신 김영관 지사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정작 목놓아 독립군가를 부른 기억은 없다고 하더라. 그때 노래를 부른 다는 건 신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타령 같은 이유가 여기있지 않을까 한다. 혼자 흥얼거리며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그때 당시에 지금 군가처럼 씩씩하고 우렁차게 부를 수 있었겠나.

● 악보가 있어도 타령처럼 불렀던 건가?
●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라고 하면 지금 군대의 군가를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의 노래들로만 구성된 건 아니다. 고향에 두고온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불렀던 망향가도 당시 독립군들에게는 군가였다. 사기를 돋우는 웅장한 멜로디도 있지만, 토닥토닥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곡조도 있다. 또, 똑같은 노래인데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른 노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음도 다르고 박자도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기록을 남길 수가 없기 때문에 구전으로만 전달하면서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

● 후손 분들을 인터뷰하고, 만들기 쉽지 않았을 콘텐츠가 제작되고 나면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 빚진 마음이 크다. 역사에 빚지고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빚지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이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YTN라디오가 현재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가 이 시대의 독립운동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제작에 임한다.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다. YTN라디오가 하나의 작은 역사적 허브가 되어, 고마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언론이 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나?
● 지금은 너무 큰 꿈으로 보이지만 꼭 제작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 올해 임시정부기념관이 개관한다. 11월 23일로 예정돼있다고 알고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된 조국에 발 딛었던 날짜에 맞춘 것이라고. 그 앞에서, 그 분들이 불렀던, 만주와 중국에서 불려진 독립운동가 노래들로 임정 콘서트를 열고 싶다. 과학이 발달해서 AI가 하늘로 돌아간 사람들의 음성과 모습도 복원하는 시대다. 남의 땅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복원해서 꿈에 그렸을, 해방된 조국의 임시정부 앞에 세워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남의 땅에서 목놓아 통곡처럼 불렀을 애국가와 당시의 독립운동가(歌)들을 후손들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꼭 보고싶다. 임시정부 비서장이셨던 차리석 선생님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시지
못했다. AI로 되살아난 차리석 선생님과 후손이 함께 복원된 임시정부에서 독립군가를 부르는 모…… 아, 꿈만 꿔도 너무 좋고 행복하다. 빚진 마음이 조금은 해소될 것도 같고. YTN라디오가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 동참할 누군가도 생길 거라 믿는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FM 94.5MHz YTN라디오를 통해 <독립운동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많이 들어주시고, 노래는 따라 불러주시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달라. 역사는 회자되고 노래는 불리워져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박제화되어 있던, 잃어버렸던 노래들이 역사로 살아나는 풍경을 보고싶다.

토, 2021/02/27-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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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67]

일본 황태자의 결혼기념으로 세워진 경성운동장
하도감(下都監) 자리에 있던 정무사(靖武祠)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스포츠중계를 할 때면 으레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로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성동원두(城東原頭)는 성동 벌판의 들머리라는 뜻이며, 서울운동장은 옛 경성운동장이자 한때 동대문운동장으로 통용되었던 곳을 가리킨다. 이것 말고도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일컬어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라고 했던 사례들도 곧잘 눈에 띈다.
88서울올림픽으로 잠실경기장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운동장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하다시피 했던 한국 스포츠 역사의 산실이었다.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어지간한 경기대회는 빠짐없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막판 탈락을 아쉬워했던 올림픽 축구나 월드컵 아시아예선전이 벌어졌던 곳도 여기였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동아일보 주최 제5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 관련 안내기사에는 경성운동장과 훈련원 일대의 전경을 일목요연하게 포착한 항공사진이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운동장이 스포츠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때로 정치의 공간이자 근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가까이는 체제수호 명분의 무수한 궐기대회와 규탄대회가 자주 열렸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해방 직후에 찬탁이다, 반탁이다 하여 좌우익이 충돌하던 때의 정치집회공간이었는가 하면 여러 애국지사들의 영결식(永訣式)이 거행되는 곳으로도 사용된 적이 많았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에는 전시동원체제에 편승한 각종 행사가 자주 개최되던 그러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운동장 시설이 처음 들어선 것은 언제이며 또한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진 것일까? 서울도성이 지나고 하도감(下都監)이 자리한 지역에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 경성그라운드)이라는 이름으로 개장이 이뤄진 것은 1925년 10월 15일이었고, 정식 준공일은 이듬해인 1926년 3월 31일이었다.
그런데 경성운동장 앞에 꼭 함께 따라 붙는 것이 “동궁전하어성혼기념(東宮殿下御成婚記念)”이라는 수식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궁 전하’는 장차 소화천황(昭和天皇)이 되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당시 섭정궁(攝政宮)의 노릇을 했던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식은 1924년 1월 26일에 있었다. 당초 결혼식은 1923년 가을로 예정되었으나, 그해 9월 느닷없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의 발생으로 한 차례 연기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까 경성운동장의 건립은 이때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에 관한 결정과정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24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어성혼기념(御成婚記念)의 운동장(運動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원안가결(原案可決), 2만 평(坪)의 관유지(官有地)를 팔아 재원(財源)으로, 완성(完成)은 14년도(年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있다.

 

경성부협의회 다화회(京城府協議會 茶話會)는 16일 오후 3시부터 학교조합회의실(學校組合會議室)에서 개회되었는데 출석의원 21명으로 부청측(府廳側)에서는 타니 부윤(谷府尹), 3 이사관(理事官), 토목과장(土木課長), 내무계(內務係), 회계계(會計係) 등이 출석했고 타니 부윤으로부터 어성혼기념사업(御成婚記念事業)으로서 그라운드 건설에 관한 계획의 보고를 하고 현재의 훈련원(訓鍊院) 동부그라운드(東部グラウンド)를 중심으로 한 부근 민유지(民有地) 약 2만 평을 양도 받아 최상단(最上段)에 테니스 코트(テニスコート), 중단(中段)에 다이야몬드(ダイヤモンド; 야구장), 하단(下段)에 트랙(トラツク)을 건설하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재원(財源)은 특별염출법(特別捻出法)을 강구하여 부비(府費)에 관계없이 하도록 관유지(官有地)의 양여(讓與)를 받아 이를 매각하여 경비에 충당하려는 것인데 그 면적(面積) 2만 4, 5천 평이지만 유효매각지(有效賣却地)는 약 2만 평으로 예상한다는 부윤의 설명을 마치자 고죠 의원(古城議員)은 “실로 훌륭한 계획이지만 어성혼(御成婚)의 기념사업이라고 하면 가장 신중히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운동(運動)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운동 이외에 무언가 사회적(社會的)
생산적(生産的) 시설은 없는 것일까” 라고 언급한 바 타케우치 의원(竹內議員)도 이에 찬의(贊意)를 표시하고 “그라운드로서는 위치(位置)가 치우쳐진 경향이 있다”고 하며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다른 의원에게 “아전인수론(我田引水論)이다” 하는 야유(揶揄)를 받았고, 이어서 이진호 의원(李軫鎬議員)이 일어나 “섭정궁 전하(攝政宮殿下)는 비상(非常)히 운동(運動)을 좋아하고 계시며 또한 목하(目下)의 부민(府民)에게는 운동을 장려하는 필요가 있어서 선반(先般) 어하사(御下賜)된 조칙(詔勅)의 어정신(御精神)으로 보더라도 국민(國民)의 원기(元氣)를 함양하는데다 경사스러운 기념사업으로서는 가장 좋은 착상이다”라고 찬성하여 결국 만장일치(滿場一致)로써 부청(府廳)의 발안(發案)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비공식(非公式)이었지만 개선후(改善後) 제1회(第一回) 회합으로 각의원(各議員) 모두 비상한 긴장미(緊張味)를 보였고, 이리하여 7시 폐회(閉會)했는데 머지않아 본회의(本會議)를 개최한 다음 어성혼(御成婚) 이전에 공표할 것이지만 확실히 기공(起工)하는 것은 13년도(즉, 1924년도)이며, 14년도(즉, 1925년도) 중에는 완성하리라 예상한다고.

 

여기에 나오는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일찍이 경상북도장관(1910.10~1916.3), 전라북도
장관(1916.3~1921.8)을 거쳤고 다시 총독부 학무국장(1924.12~1929.1), 중추원 참의1931.1~19
40.4), 중추원 부의장(1941.5), 중추원 고문(1943.6),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1943.10)을 지낸 친일관료의 거물이었다. 그가 경성부협의회원이 된 것은 1923년 11월의 일이며, 그는 한때 휴
직 신분으로 있던 도지사 직에서 막 퇴직(1923.8)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경성부에서 기념사업의 하나로 경성운동장의 건설을 추진하려는 뜻은 이진호의 말마따나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 전하(東宮殿下)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경성운동장의 건립부지는 몇 차례 후보지 검토 끝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황금정 6정목 및 7정목; 1925.10.14일 폐지) 일대로 최종 선정되었다.

 

서울도성이 지나는 언덕지형의 흔적이 그럭저럭 남아 있는 경성운동장의 개설 초기의 광경이다. 오른쪽 차일(遮日) 위에 걸린 깃발이 ‘경찰기장(警察旗章)’과 ‘약일장(略日章)’인 것을 보면 경찰관련단체의 행사인 듯하다. 저 너머로 언덕 위에 보이는 육각정자는 ‘청운각(靑雲閣, 1925년 12월에 명명)’이다. (개인소장자료)

 

<동아일보> 1926년 12월 4일자에는 경성운동장 야구장 스탠드에 막 설치된 일산(日傘, 그물망 포함)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기부하여 설치된 이 시설물은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전쟁물자조달을 위한 금속물 공출의 대상이 되어 1943년 2월에 철거되었다.

 

그러나 서울도성 안쪽만이 아니라 그 바깥 지역도 포괄하여 경성운동장을 배치하는 설계가 이뤄져 있었으므로 조선산업물산주식회사(朝鮮産業物産株式會社,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220번지 부근) 소유 토지 5천여 평을 마저 사들인 이후에야 이곳에서 건립공사가 진행되었다. 경성운동장 건립지에는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에 따라 500미터 트랙을 갖춘 육상경기장(축구장)과 아울러 야구장과 정구장 시설이 우선 갖춰졌고, 경비조달의 문제로 수영장과 기타 시설은 추후에 보완 건립되었다.

 

이 지역은 어차피 성벽이 지나는 자리였으므로 싼값으로 공간을 확보하자는 의도와 함께 이러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관중석으로 만들어내는 식으로 공사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 일대를 가로지르는 성벽의 흔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운동장의 바 닥에 묻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언덕 지형을 깎아내려 무지막지하게 평탄화(平坦化) 작업을 진행하였으므로 이로써 성벽이 지나는 구간은 옛 모습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이 열린 1925년 10월 15일은 이 행사만이 아니라 새로 지은 경성역사(京城驛舍)의 준공과 아울러 남산 중턱에 지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의 진좌제(鎭座祭)가 동시에 벌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은 3일간의 일정으로 벌어지는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의 입장식(入場式)과 고스란히 겹쳐졌다.
이날 식장에 직접 참석한 사이토 총독은 그가 남긴 축사(祝辭)를 통해 이러한 조선신궁 경기대회의 남다른 의미를 이렇게 설파하였다.

 

조선신궁이 새롭게 완성되어 본일(本日)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하는 가절(佳節)에 즈음하여 선내 각
지(鮮內 各地)에서 운동선수를 불러 신전(神前)에서 이런 경기를 하려는 것은 더없이 회심(會心)의
마음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전(神前)에서 기(技)를 겨루는 것을 널리 행함으로써 사기(士氣)의 발양(發揚)이
도모되어 지는데 이번에 제자(諸子)는 이에 진좌제를 맞이하여 고래(古來)의 관례(慣例)에 따라 경
기하는 일에 종사하며 제자(諸子)는 적절히 평소 연마한 바를 십분 발휘(十分 發揮)하여 경기의 진정
신(眞精神)을 명심함으로써 그 장쾌한 의기(意氣)를 나타내기를 바란다. 이에 개회를 맞아 일언희망(一言希望)을 술회하며 축사(祝辭)로 삼는다.
대정 14년(1925년) 10월 15일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朝鮮總督 齋藤蘇實).

 

일본공사관원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의 유고사진집인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 1892)에 드물게 남아 있는 하도감의 전경사진이다. 이 책에는 이곳을 화도감(華都監)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성운동장의 내력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또 한 가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도감(下都監)의 존재이다. 훈련원 벌판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던 이곳은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속한 분영(分營)의 하나이며,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당시 야구장 일대를 품고 있는 지역이었다.

 

경성운동장의 동남 모서리(옛 하도감 터)에 오래도록 터를 잡고 있다가 1979년 4월 30일에 연희동 소재 한성화교중학으로 옮겨진 오무장공사의 모습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무사(靖武祠)’라 하였으나 1909년에 관리권이 주한 청국총영사관으로 이관되면서‘오무장공사’로 개칭되었다.

특히 이곳 하도감에는 일찍이 ‘교련병대(敎鍊兵隊, 통칭 별기군)’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이곳에 있던 일본인 교관이던 육군공병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1848~1882)가 조선인 병사들에게 끌려나와 ‘하야시쵸(林町, 지금의 산림동)’ 부근에서 숨진 일도 있었다. 또한 이때 난병(亂兵) 진압을 핑계로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던 광동수사제독오장경(廣東水師提督 吳長慶, 1833~1884)과 그 휘하의 마건충(馬建忠), 원세개(袁世凱) 등이 진을 쳤던 장소가 바로 이곳 하도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는 원세개의 진지로 변한 이곳에 조선 국왕이 3일간이나 보호라는 명분으로 피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6월에 느닷없이 오장경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高宗)은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를 제사지낼 곳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하도감 자리에 들어선 ‘정무사(靖武祠)’였다. 정교(鄭喬)가 찬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는 이 사당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85년 여름 4월, 정무사를 세우다]
이때에 이르러 정무사(靖武祠)를 세워 청국 흠차제독 오장경(淸國 欽差提督 吳長慶)을 제사지낼 것
을 명하였다. 조(詔)하여 가로되,
“정무사가 지금 이미 준공되었으니 오흠차의 영령을 안치할 곳이 생
겼도다. 그가 동래(東來)한 위공(偉功)을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지난 일을 추념(�念)하니 나의 감
회가 더욱 깊어지노라. 예조참판을 보내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였다.

 

이곳에는 오장경의 위판 외에도 청나라 전몰병사(戰歿兵士)의 위판이 함께 설치되었고, 1893년에 이르러 통령 오조유(統領 吳兆有)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정무사는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한참 가속화하던 통감부 시기에 접어들어 훼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08년 7월 23일의 칙령 제50호「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件)」에 따라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등 일체의 사당 제사는 철폐되고 그 터는 국유로 이속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성신문> 1908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청순금지(淸巡禁止)」 제하의 기사는 정무사를 철거하려는 시도와 이것이 무산되는 과정에 대한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무사(靖武祠)를 훼철하고 오장경 씨 위패(位牌)를 매안(埋安)할 차로 재작일(裁昨日)에 장례원 전
사보 윤승구(掌禮院 典祀補 尹昇求) 씨가 고유제(告由祭)를 설행하였는데 청국 총순(淸國 總巡) 및
권임(權任) 각 1인씩과 순사(巡査) 3명이 내도(來到)하여 금지(禁止)하매 윤승구 씨가 언(言)하기를
“칙령(勅令)을 봉승(奉承)한 처지에 여시(如是) 금지하느냐” 한즉 해(該) 경리(警吏)가 답하여 왈(曰)
“탐지(探知)할 도(道)가 유(有)한즉 기시간(幾時間)을 고의(姑依)하라” 하고 통감부(統監府)와 각국
총영사관(各國總領事館)에 교섭 탐지한 후에 갱래(更來) 발언하기를 “차등(此等) 사건을 행하려면
통감부 각국총영사에게 교섭하는 것인데 금내졸행(今乃卒行)하니 차(此)는 위조(僞造)라” 하고 일장
힐난(一場詰難)하였다는데 필경(畢竟)은 매안(埋安)도 못하고 해(該) 제관(祭官)은 달야곤경(達夜
困境)을 경(經)하였다더라.

 

국정홍보처에서 간행한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7권>에 수록된 옛 서울운동장 일대의 항공사진(1967.2.4일 촬영)이다. 야구장 지역의 오른쪽으로 테니스장과 거의 붙어 있는 곳에 ‘오무장공사(옛 정무사)’의 건물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정홍보처)

 

2003년 이후 청계천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을 위해 한때 풍물시장으로 변신한 시절에 담아낸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주차장포함) 일대의 전경사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곳에 대한 관리권은 청국 총영사관으로 이양되었고, 이때 주한총영사관으로 있던 마정량(馬廷亮)에 의해 중건되면서 그 명칭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당은 경성운동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79년 4월 30일에 한성화교중학(漢城華僑中學, 연희동 89-1번지) 구내로 옮겨진 상태에 있다.
해방 직후에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바뀌고, 다시 1984년에 잠실경기장의 완공과 더불어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나마 이러한 시기도 잠시 이곳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거논의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지난 2003년에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행되면서 인근 노점상을 위한 대체공간으로 용도폐기된 동대문구장을 활용하면서 느닷없이 이곳은 ‘풍물벼룩시장’과 ‘주차장’ 시설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이후 옛 동대문운동장의 관련 시설 일체는 야간조명탑(나이터) 하나를 남기고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유구전시장, 이간수문 포함; 2009.10.27. 개장)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2014.3.21. 개장)가 들어선 상태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다시 드러나 원형을 되찾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리고 서울성벽이 지나던 곳도 간신히 그 흔적을 표시하는 정도로만 복원이 시도된 바 있다.
하지만 일제가 그들의 황태자가 결혼하는 것을 기념하고 동시에 조선신궁의 완공을 영구히 기리는 체육시설로서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때에 언덕 하나를 완전히 들어내 버렸기 때문에 옛 서울도 성의 웅장한 모습을 재건하는 것은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 2021/03/0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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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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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
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
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

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같은해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

이제는 친일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현장의 친일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
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
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
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 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 2021.2

화, 2021/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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