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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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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admin | 화, 2020/06/23- 21:41

[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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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화, 2021/03/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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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김유 광동지부장

 

이 책은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의 열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독서의 목적이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글 쓰는 작자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에라, 늘그막에 객기 한번쯤 부려 보고자 추려 본 것들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객기”가 아니다, “정론집”이다. 책은 정치를 질타하는 장용학의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손석춘 씨 등 새로운 작가의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와의 개인적 친분도 에세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좀 더 살아서 6·25 때 납북되었
던 이광수와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아마도(?) 같은 차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
남정현 작가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의 정의와 함께 그의 대표작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을 빼놓지 않는다. 남정현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잡고 흔들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기생하여 맘껏 달리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을 같이 풍자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민족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념이 우선인가… 그러면서도 선생의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보면서 웃다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실록적 요소가 강한 이병주의 소설 <그해 5월>은 소설을 쓴 작가의 변으로 “허상이 정립되지 않도록 후세의 사가들을 위해 구체적인 기록을 정리해 볼 작정”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하급장교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 안중근의 나라, 김구의 나라를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
리고 7·4공동성명을 맞이하여서는 남북이 같이하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쇼라고 단정을 한다. 거
기에는 북한도 같은 쇼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 즉, <그해 5월>을 임헌영 씨는 평론가적인 안목으로 풀어 쓰는데 “독재란 한 나라에 애국자는 한 사람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포 분위기에 다름아니다”라는 금언으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씨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평생지고 살아오면서 이 소설을 분석함에 있어 70년대 문학인 사건이나 1979년 시국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기억이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바로 그 역사와 민족,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고설
키며 내려왔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한말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50년의 민족사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독립군의 역사와 친일파 형성의 유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불란서 비시정권의 치하에서 어떻게 대독협력의 민족반역자들이 생겼는지 열광, 인종(忍從) 및 사욕의 세 가지를 든다. 이 세 가지 유형으로 친일파의 발생을 추적한다. 역사와 운명의 변증법,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기록된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에게 소설은 그에 걸맞는 삶의 궤적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만주의 독립투사 양세봉 장군을 읽고 있는데 책에서 말하는 그의 삶이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 하나로만 귀결되는 결말에서는 소설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운 성격들임에 한층 외로움을 느낀다. 앞으로 나올 문학작품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선생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바로 한국에 연락하여 조정래의 아리랑 한 질(12권)을 다 주문하도록 하였다.
문학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의 내면적 질서를 잡아주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했다. 마르지 않는 문학의 역사 그것은 독자들에게 규범을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희망의 원리를 보여준다. 곧 문학이 이루는 변혁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락한 시대에 타락한 방법이 아닌 올바른 삶을 바탕으로 고상한 싸움을 하는 것임을 이 책 곧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 2021/03/0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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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중국에서 온 편지

김춘련 중국 거주, 후원회원, 양세봉 장군 동생 양시봉의 외손녀

 

지난 1월 9일 방학진 기획실장이 “효창독립커피에 양세봉 장군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문자와 함께 사이트를 보내왔다. 사이트를 열어보니 아이디가 참신하여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며칠 후 “양세봉 장군의 직계 후손은 없지요?” 또 문자가 와서 양세봉 친손주 양철수가 이북에서 살고, 2014년 8월, 2018년 겨울 두 번 중국에 왔을 때 내가 만났던 적이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열흘이 지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 민족문제연구소) 표지와 “시집살이” 내용 넉 장을 위쳇으로 보내왔다. 방실장은 아무 말을 안 했지만 보내준 문장이 뜻이 있을 거 같아 꼼꼼히
봤다. 순간 열흘 전에 물어봤던 문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허은 여사님 글에 “왕청문에서 일본놈들이 끌어다 때려서 죽였단다. 죽이고 나서도 ‘저놈은 죽여도 그래도 죄가 남는다’면서 죽은 사람의 목을 또 잘랐단다. 그리고 그(양세봉)의 세살 된 어린애까지 데려다 죽이고…후손이 없어서 아직 유해는 못 찾은 거 같았다.”
양세봉은 1934년 8월 19일에 변절한 아동양의 총에 맞아 이튿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당시일주일간 장례식을 지니고 25일 흑구산 기슭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튿날 일본 통화영사관분관에서 양세봉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용차에 일본군경을 가득 싣고 향수하자촌에 들이닥쳐 양세봉의 시신을 파내라고 위협했다. 흑구산 기슭에서 양세봉 시체를 파온 일경은 또 김도선에게 양세봉 목을 작두로 자르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김도선은 “우리 독립군 사령관의 목을 절대로 자를 수 없다”라고 완강히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그리고 양세봉 머리를 작두로 잘라 조선의복에 싸서 통화사령관으로 가져가 통화, 산성진 등지에서 전시하였다. (조문기·정무, <양세봉> 278쪽)
허은 여사님이 “늦게까지 만주에 있다가 나온 분한테 들은 거”라고 했는데 잘못된 풍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죽은 사람은 세 살된 어린애 양의준이 아니고 김도선이었다. 양의준은 1932년 5월, 청원현 소산성자에서 태어났다. 글에 나오는 시동생은 양세봉의 둘째 동생 양시봉이다. 양시봉과 양세봉 부인 윤재순이 수백리 길을 걸어 양세봉 부대를 찾아가 아들을 보여주었다. 양세봉은 그때 본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후에 그 아들은 이북에서 1957년 3월 15일 임무수행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희생되었다. 당시 나이는 26살이었고 직무는 정치부대대장이었다. (양철수,<계승> 11쪽) 양세봉 친손자 양철수는 1956년 2월 10일 조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라는 말도 떼기 전에 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돌아갔고 한돌이 지나원인 모를 고열을 심하게 앓더니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영영 불구의 몸이 되었다. 양철수는 현재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국가 1급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으로 아동문학창작집 <희망의
날개>, <계승>(2007.6)이 있다.
양세봉에게는 생전에 딸 둘, 아들 하나 있었다. 맏딸은 1920년 신빈현 금구자에서 태어났다.
“1931년, 양세봉 가족을 멸족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김씨성으로 고쳐 신빈현에서 청원현 소산성자에 이사 온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단오날 양세봉의 맏딸 귀녀의 성화에 김화순이 두 살 난 자기 아이는 업고 12살 난 귀녀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갔다가 일본놈의 폭격에 귀녀는 즉사했고 그녀도 피못에 쓰러졌다. 왼쪽 발목이 골절되었고 다리에 수많은 파편이 박혔다. 수개월동안 병상에 누워 생사박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때 입은 상처가 흐린 날이면 아픈데 파편이 박혀 있는 곳은 더욱 쏜다고 하였다.”(<요녕조선문보> 1998.5.28) 김화순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파편이 다리에 있었다.
둘째딸은 1928년 5월 중국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양의숙이다. 1917년에 중국 신빈현에 이사온 뒤부터 1946년까지 장장 28년간 양시봉, 김화순 부부가 양세봉 가족까지 12식구를 거느리고 수없이 이사 다니며 파란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었다. 양세봉의 둘째딸 양의 숙 부부가 중국 신빈현 왕청문 향수하자향에 묻혀있던 양세봉의 머리 없는 유해를 1961년 평양 근교에 안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가 1986년에 평양 열사릉원에 이장했다. 
허은 여사님이 쓴 책과 특히 김동삼 손부 이해동님이 쓴 <만주생활77년>을 읽으면서 그분들이 겪은 고난의 생활이 어쩌면 나의 외할머니 김화순이 겪은 일과 너무나 비슷하여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외할머니 생전에 나한테 들려줬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한 유감이 컸다. 비록 고인이 되신 조문기, 유연산, 강룡권 등 분들이 외할머니 생전에 취재하고 글을 남기었지만 워낙 양세봉의 공이 크다
보니 양세봉 할아버지 사적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고생한 이야기도 많이 했을텐데 묵혀버린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다더니…

2021.2.1. 기록

화, 2021/03/0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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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화, 2021/03/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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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학예실 김슬기 연구원

1991년 2월 27일 문을 연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코로나로 회원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대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동시 접속자 300여 명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일 2천여 명이 행사영상을 감상하였다.
먼저 회원들과 각계 인사들의 30주년 축하인사를 담은 영상을 감상한 후 광주지부 회원이자 작가인 주홍 씨가 샌드아트로 그린 연구소 30년사 영상으로 기념식의 문을 열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듯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과 뿌리가 되어주신 분들은 후원회원 분들”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어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의 사회로 지난 30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를 진행했다. 마지막 순위를 발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회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식 5가지
를 소개하는 ‘당신이 몰랐던 민족문제연구소’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1위로 선정되고 당시 영상이 재생되자 모두에게 그때의 감격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음악 교사이자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한 고 노동은 선생의 자제인 노관우 회원의 밴드는 축하공연으로 항일음악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 등을 선보였다. 특히 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편곡·헌정한 ‘장타령’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가사 ‘삼십년을 한결같이, 삼백년도 끄떡없게, 삼천리에 퍼져가세’가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이들의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뒤이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30년 동안 함께 손잡아 주었던 후원회원들의 일상을 둘러볼 수 있는 ‘회원극장’을 상영하였다. 올해로 28년째 꾸준히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유동성 회원, 백년전쟁을 통해 가입 후 명실상부 연구소 간식보급에 힘써온 김진주 회원, 참치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연구소와 연구소의 활동을 알리는 박점구 회원의 일상이 직접 만날 수 없는 이 시기에 더욱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끝으로 박수현 사무처장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소 3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하였고, 임헌영 소장 및 상근자 전원의 감사인사로 행사를 마쳤다. 임헌영 소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평화의 주춧돌이 되어 영구히 남아 불행했던 한세기를 증언하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많은 시민들이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30주년 기 념식 영상은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과 유튜브 채널에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목, 2021/03/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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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박광종 선임연구원

KBS는 지난 3·1절 저녁 9시 뉴스에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KBS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가 1921년 6월에 작성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 철에서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하고, 1920년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들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만행에 적극 가담
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KBS가 입수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는 <응원경찰관 공적조서>(재간도일본영사관), <간도사건 공적명세서> (두도구분관과 용정촌총영사관), <간도사건 공적조사서>(국자가분관) 등 4종류, 600여 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서’가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문서들은 간도참변을 지휘한 일본군 부대장들이 ‘토벌’에 참여했던 일제 경찰(한국인·일본인)들에 대한 공적서를 작성하고, 간도총영사관이 이 공적서를 취합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것이다. 연구소는 각종 사료(자료)를 조사해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 소속 순사로 간도로 파견된 ‘응원 경찰’ 9명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48명 중 간도참변 당시 간도총영사관경찰서에 근무하던 일본 외무성 경부 2명(현시달·김
영규)은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이외 종군기장을 받은 ‘응원경찰’ 9명을 포함해 46명이 독립운동(가)을 탄압한 사실이 자료를 통해 확인된 만큼 추가 행적 조사가 필요하다. 예컨대 연구소가 소장한 다른 자료에서 간도참변 당시 일본 외무성 경부보(간도총영사관경찰서)였던 최태욱이 1926년 1월 당시 경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태욱은 간도참변에 앞장 서 공적서에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연구소는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48명에 대한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이들 중 친 일·반민족행위가 명백하고 선정기준에 부합한 경우 향후 발간할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수록할 예정이다. 한편 연구소는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보고>에서 한국인 경찰들이 체포에 앞장 선 독립운동가 중에 이미 서훈이 추서된 독립유공자를 일부 확인하였다. 또한 이들 외에 확인된 다수의 한국인 사상자(死傷者)와 피체자(被逮者)와 관련한 독립운동 행적을 추가 조사해 KBS와 공동으로 서훈을 요청할 계획이다.

목, 2021/03/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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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68]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마포 공덕리) 앞에 모여든 인파의 모습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 출옥하는 16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23일자에 수록된 최린, 권동진, 한용운, 오세창, 이종일, 김창준, 함태영 등 7인의 가출옥 관련기사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 관련 48인에 포함되어 최초에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다가 확정판결 이후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된 상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4일에 출옥되는 날이었는데 오전 9시 반이 되매 출옥하는 분들의 가족은 의복일습을 가지고 들어와서 감옥에 드리매 제1회로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이필주(李弼柱), 김원벽(金元壁) 4인을 감방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의복을 바꾸어 입히는 모양이더니 …… 그 뒤으로 제2회에는 신석구(申錫九), 나용환(羅龍煥),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4인이 나왔고, 제3회로 김완규(金完圭), 최성모(崔聖模), 박준승(朴準承), 홍병기(洪秉箕) 4인이 감방으로부터 함께 나아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문 밖을 나아갔고 제4회로 권병덕(權秉悳),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신홍식(申洪植) 4인이 나왔는데 시원하게 옥문을 벗어져 나오면서도 아직 1년이나 고생살이할 다른 분들을 애처롭게 여기면서 2년 전에 들어갔던 옥문을 다시 아주 나와 버리기는 11시 20분경이었더라.…… 그리고 별항에 보도한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던 20명 중에 16명은 경성감옥으로부터 출옥되고 유여대(劉如大), 강기덕(康基德), 홍기조(洪基兆) 3인은 수속의 관계로 5일까지가 만기로 되었고 그 외 이종훈(李鍾勳)은 지우금(至于今)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있었던바 역시 2년이었으므로 작 4일 오전 10시에 만기 출옥되었더라.

 

이들에 이어서 그해 연말에는 권동진(權東鎭), 김창준(金昌俊), 오세창(吳世昌), 이종일(李鍾一), 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 함태영(咸台永) 등 7인이 가출옥(假出獄)의 형태로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22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화영(吳華英)과 이갑성(李甲成), 그리고 이승훈(李昇薰)이 차례대로 만기출옥을 하면서 ‘독립선언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된 인사들은 모두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다. 삼일만세운동이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퍼뜩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1923년 5월에 서대문형무소로 개칭)’의 존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정리된 자료에서도 나타나듯이 독립선언사건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핵심인사들이 막판에 옥고를 치렀던 곳은 바로 경성감옥(京城監獄, 공덕리 105번지; 지금의 서울서부지방법원 구역 일대)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맨 처음 투옥되었던 서대문감옥에서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移監)된 것은 결국 최종심이 되고 말았던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 선고(1920년 10월 30일)가 이루어지면서 기결수(旣決囚)로 신분이 바뀐 이후의 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경성감옥의 편제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조선총독부 감옥 및 감옥분감의 명칭, 위치(1912년 9월 3일 개정)」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으며, 감옥의 소재지는 마포 공덕리였다. 이때 종전에 경성감옥이라고 했던 곳은 이 이름을 물려주고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화산(金華山) 아래 금계동(金鷄洞)에 신축 감옥이 들어선 것은 1908년 10월 19일의 일이었으니, 불과 4년 사이에 2개의 감옥이 잇달아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직선거리로 놓고 보더라도 3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한 구역 안에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 이렇게 둘씩이나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그 연유를 풀어놓은 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죽 훑어보았더니 독립문 밖의 새 감옥이 준공 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이곳이 협착(狹窄)하여 죄수를 수용하기 곤란하므로 다시 증축(增築)하기를 의논중이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27일자(국문판)에서는 남부 둔지미(南部 屯芝味)가 새로 짓는 감옥서의 후보지로 거론된 바 있고, 그 직후에 다시 용산 청파 4계(靑坡四契)와 청파 피병원(避病院) 부근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효창원(孝昌園)의 일부에다 공역비 3만 원을 들여 1천 명을 수용할 큰 감옥을 건설한다는 기사가 잇달아 게재된 사실이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 (1935)에 수록된 재감인원(在監人員) 추이에 관한 도표자료이다. 경술국치 이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특히,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이 수치가 15,000명 수준으로 크게 치솟아 오른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거듭된 끝에 1911년 4월에 이르러 신축감옥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마포공덕리에 자리한 탁지부 양조소(度支部 釀造所, 아현리 451번지)의 건너편 지역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애오개 너머 마포나루로 가는 길목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가 부여한 지번상으로는 ‘경성부 용산면 공덕리 105번지(총면적 16,817평)’에 해당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1년 9월 2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 제하의 기사는 신축감옥에 대한 착공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덕리(孔德里)에 신설(新設)하는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는 작일(昨日) 총독부 영선과(總督府 營繕課)에서 지명입찰(指名入札)을 행(行)한 결과(結果) 약(約) 20만 원(圓)의 가격(價格)으로 마츠모토구미(松本組)에 낙찰(落札)이 되었는데 부지(敷地)는 전부(全部) 1만 6천여 평(評)이라. 선(先)히 지균(地均)을 행(行)하고 갱(更)히 감방(監房), 기타 부속가옥(附屬家屋)을 건축할 터인데 본(本) 감옥신축에 관하여는 내지(內地)의 신식감옥(新式監獄)의 건조물(建造物)을 시찰(視察)하고 각종(各種)으로 연구중(硏究中)인즉 조선감옥(朝鮮監獄)의 모범(模範)으로 건축할 터이오, 공사(工事)는 직(直)히 착수한다는데 46년(즉, 1913년) 상반기(上半期)에 준공(竣工)할 예정이라더라.

 

그 이후에 일부 설계변경이 있었고 이에 따라 당초의 예정보다는 공사일정이 크게 앞당겨질 것으로 보였으나,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12년 12월 16일에 느닷없이 발생한 화재로 옥사(獄舍) 1동(棟)이 소실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서대문감옥 쪽에서 죄수들이 옮겨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사인부 2백여 명만이 긴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불 탄 건물은 그 이듬해에 재건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당시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을 통틀어 어떠한 수형자를 어느 곳에 수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그나마 대략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총독부 사법부 장관의 통첩(通牒)으로 고시되는 「감옥수용구분(監獄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件)」 정도이다. 여기에는 우선 “경성지방법원과 관할 지청(인천, 춘천, 원주는 별도)의 판결을 받은 수형자는 ‘서대문감옥’에 수용되고, 이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외국인(중국인은 제외) 남자는 ‘경성감옥 영등포분감(永登浦分監)’에 수용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경성감옥 자체에 대해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명단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관련 규정이 적시된 것이 없다.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1929)에 나타난 경성형무소(공덕리 105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은 애오개와 만리재 쪽에서 각각 넘어온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가까우며, 마포가도의 길 건너편에는 총독부 양조시험소(釀造試驗所, 지금의 마포경찰서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으로 효창원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초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경성감옥의 전경 사진이다. 이곳의 편제는 1912년 9월에 설정되었지만, 실제 감옥 시설이 완성된 것은 1913년으로 넘어간 시점이었다. 이 사진은 건립 초기에 촬영된 탓인지 외곽에 둘러진 담장의 모습이 벽돌 재질이 아닌 목책(木柵)인 것이 눈에 띈다.

경성감옥의 존재는 경성형무소로 개칭된 이후의 시점에 와서야 관련 규정상으로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데, 1923년 12월 8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감옥수용구분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24년 1월 1일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경성형무소의 관할 판결청으로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이 명기되었고, 특히 별표(別標)의 말미에 따로 “본 수용구분중 무기(無期) 및 형기(刑期) 10년을 넘는 남자 수형자에 대해서는 내지인(內地人)인 때는 영등포형무소에, 기타의 것이 되는 때는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경성형무소에, 대구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대전형무소에 각 이를 집금(集禁)한다” 는 구절이 첨부되었다.
이 규정으로 본다면 경성형무소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관내에서 무기 및 형기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장기수(長期囚), 그것도 조선인 남자 수형자만을 전담하여 가두는 공간으로 정의되는 셈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구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40년 2월 19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형무소수용구분(刑務所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40년 3월 1일 시행)」에 수록된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종래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 및 지소’의 장기수형자(長期受刑者)는 집금형무소인 ‘경성형무소’에 수용한다는 구절을 바꿔 그 대상지역을 훨씬 더 확대하도록 결정한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테면 이 시기 이후로는 ‘조선 전체의 각 형무소와 지소’의 장기수형자를 초범(初犯), 누범(累犯), 사상범(思想犯)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경성형무소,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일괄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2월 19일자에 게재된 법무국장 통첩 「형무소수용구분에 관한 건(개정)」을 보면 종래 경성복심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에 속하는 장기수들을 수용하던 경성형무소의 기능이 폐지되고, 이때부터 그 대상이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어 무기 또는 형기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 가운데 초범(初犯)을 집합 수용하는 집금형무소(集禁刑務所)로 전환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

경성감옥에 대한 얘기를 하노라면, 이곳에 갇힌 수형자들의 노역장으로 사용된 ‘마포연와공장 (麻浦煉瓦工場, 도화동 7번지)’의 존재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곳은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활발하게 건립이 추진되던 각종 관아청사(官衙廳舍)와 관사(官舍)의 건립공사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하기 위해 1906년 10월에 영등포의 토관공장과 짝을 이뤄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에 부속되어 만들어진 연와제조소(煉瓦製造所)에 뿌리를 두었다. 이것들은 1907년 4월과 7월에 잇달아 직영(直營)으로 편입되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벽돌은 대한의원 본관, 탁지부 청사, 평리원 청사, 공업전습소 등의 신축공사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에는 총독부의 직할로 전환되었다가 1913년 4월에 이르러 이곳의 업무가 일체 경성감옥의 관장(管掌)으로 넘겨지면서 감옥의 작업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는 진광렬(秦光烈)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桃花洞 煉瓦工場)」 제하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붉은 옷 입은 직공’이라고 하는 것은 기결수 수형자(旣決囚受刑者)가 착용하는 자색(赭色, 검붉은 황토색)의 죄수복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 수록된 연재기고문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 관련 기사이다. 이곳은 1913년 4월 이후 경성형무소의 노역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이 글에 나오는 ‘붉은 옷’이라는 것은 기결수들이 입는 죄수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 서울 안에 양제집이 겅성드뭇한 오늘날 벽돌 만드는 공장이 없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새문 밖 도화동에 연와공장이 생겼습니다.
◇ 도화(桃花)에는 흰 꽃 피는 벽도(碧桃)도 있건마는 보통 도화라 하면 붉은 빛을 생각하고 벽돌에도 여러 가지 빛이 있건마는 보통 벽돌이라 하면 붉은 빛으로 여깁니다. 벽돌 만드는 공장이 도화동에 앉은 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이 도화동 연와공장에서 노동하는 직공(職工)들은 다른 공장 직공과 다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이 붉은 벽돌 만드는 것도 역시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붉은 옷 입은 직공은 두 사람이 한데 쇠사슬로 매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쇠사슬이 풀립니다. 그러나 총 든 사람이 망대 위에 서고 칼 찬 사람이 뒤를 따른답니다. 직공 중에는 따라지신세의 직공들입니다. 이 직공 중에는 붉은 염통의 끓는 피를 눈물 삼아 뿌릴 유지한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기가 차마 어려워 그만 두겠습니다.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는 해방 이후에 서울형무소 지소(1945.11.21 개칭)와 마포형무소(1946.3.28 개칭)를 거쳐 마포교도소(1961.12.23 개칭) 시절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 일대를 에워싸고 진행되는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1963년 가을에 이르러 안양교도소의 신축 준공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감에 따라 최종 폐쇄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포형무소의 내력을 뒤지다 보니 조금은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퍼뜩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노덕술(盧德述) 등도 이송(移送)」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경향신문>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친일부역자 피의자들이 일괄 마포형무소로 이감될 것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반민특위에서는 23일 위원회 결의로서 노덕술(盧德述), 문명기(文明琦), 노기주(魯璣柱), 하판락(河判洛), 이원보(李源甫) 등 5명을 동 특별검찰부로 송청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특위에서는 종래에는 체포된 반민혐의자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하여 왔었던바 여기에는 미결수도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기밀누설의 염려가 있다 하여 위원회 결의로서 25일부터 일체의 반민혐의자를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로 이감하기로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선언사건의 주역들과 무수한 장기수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옥고를 겪어야 했던 바로 그 공간이 어느덧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된 친일파 군상의 집결지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교차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목, 2021/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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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3월 28일 마지막 조선인 BC급 전범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이학래 동진회 회장이 일본에서 한 많은 96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학래는 192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열일곱의 나이에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1942년 봄, 그는 면장으로부터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
는 데 근무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는 말을 듣고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했다.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앞으로 시행될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학래와 같이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한 조선 청년들은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野口)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는데, 반복적으로 주입된 내용은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 이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의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모집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000여 명.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이학래는 타이에서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진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1만 1천 명의 포로들을 대면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 신분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학래는 사형을 선고받아 8개월 동안 사형수로 살았으나 가까스로 감형되어 사형은 면했지만 도쿄의 스가모형무소로 보내져 1956년 석방되었다. 아무런 생활기반도 없는 일본 땅에서 석방되었지만 ‘전범’의 낙인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자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 박탈되어 원호법, 은급법 등 일체의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영과 양월성등 두 명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 을 끊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으로 ‘일본인’으로 죄를 지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진 것이다.

1955년 BC급 전범 70여 명은 ‘동진회’를 결성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억울하게 죽어간 동료들과 자신들의 명예회복,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며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소송투쟁은 물론이고 일본의 총리가 바뀔 때마다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입법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이학래 회장은 다행히 한국 정부로부터는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아 명예회복이 되었지만, 일본 정부와 국회로부터는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다. 

지난 4월 1일 일본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BC급 전범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는 이학래 회장의 추모집회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일본의 여야 국회의원 10여 명은 하나 같이 이학래 회장 생전에 입법을 이루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고인의 죽음 앞에서는 허망하게 들릴 뿐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으며, 2017년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을 출판하였다.

목, 2021/04/29-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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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7. 진달래 활짝 피다
감방에서는 겨울과 여름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 권력이 땡깡을 부려도 시간은 흘러 추위가 풀리고 4월이 되자 온 구치소는 축제를 맞은 분위기로 변했다. 진달래가 활짝 폈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됐던 그 삼엄한 겨울에 피신 중이었던 김지하가 무슨 재주로 영치금을 넣어줘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잡혀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4.3 긴급조치 3호 위반자들과 함께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 교수)이 바로 내 옆방에 들어오더니 이어 강진 출신의 윤한봉(민주화 운동가), 일본인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이 나와 같은 5사 하층으로 들어왔고, 앞 뒷동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꽉 들어차 서대문 구치소는 광복 이후 정치범이 가장 북적대는 때를 맞았다. 5동의 내 방과 거의 마주보고 있던 3동에는 인혁당의 서도원이 들어와, 자주 통방을 하면서 계속 안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의 빨간 딱지와는 달리 노란 걸 달았기에 ‘진달래’로 호칭했다. 온 구치소가 진달래 천지였다.
이때 같은 5사에는 방동규도 있었다. 문단에서는 구라라면 단연 황구라(황석영)판이었는데, 재야의 구라는 방동규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주먹으로 날렸던 미남에 몸집이 튼실한 문제아였는데, 아버지가 백기완에게 아들 버릇 좀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백기완이 그에게 너 쌈 잘하니, 라고 물으니 한꺼번에 너덧 명은 문제없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싸대기를 갈기고는 “이눔아, 기껏 그런 조무래기들을 패대는 게 힘자랑이냐! 너 같은 녀석이 패대기쳐야 할 상대는 따로 있어!”라는 일갈로 대오 각성시켜 정작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었다는 설이 있다.
저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증공(曾鞏)이 천하장사 항우를 일러 “영웅본학만인적(英雄本學萬人敵, 영웅은 본래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운다)”(<虞美人草>) 라는 명 구절을 상기시키는 멋진 장면이다. 이후 방동규는 백기완 사단에서 열심이었으나, 밥벌이 때문에 서독 광부 파견 1기생으로 나갔다. 돈을 모은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동물사회학을 청강한 뒤 조용히 귀국, 명동의 한 골목에다 양장점을 차렸다. 미남에다 건장한 체격, 거기다가 소르본 출신이라니까 뭇 숙녀들이 운집하여 엄청나게 돈을 모우는 재미에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숙녀들의 예방에 묻혀 재미가 쏠쏠했던 그의 은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문학평론가 구중서였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 출신인 그는 고향의 풍광을 자랑하며 작가 신상웅, 등단하기 직전의 김지하, 서울대 철학과의 기인으로 <청맥> 편집으로 통혁당 때 혼쭐이 났던 시인 주성윤, 평론가 백승철, 그리고 나를 초대하여 곤지암 강변에서 천렵으로 한 나절을 즐기고 상경, 헤어진 뒤 몇몇(구중서, 신상웅, 김지하, 나)이 남아 명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중서가 한 미남을 맞닥뜨리더니 “어, 너 언제 왔어?”하고 물었고, 그는 곤혹스러운 듯 어물거리더니 “나, 여기서 가게 해. 쉬었다가!”해서 들어가 보니 멋진 양장점이었고, 의자에는 아름다운 숙녀들이 디자인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 배추(그의 별명)는 고객들에게 나중에 들려달라고 내보내더니 얼른 중국집에다 각종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구중서가 우리 일행을 소개했고, 그는 촌각이 아깝다는 듯이 서독에서의 광부 체험부터 파리 풍경 등등으로 썰을 풀었다. 그의 썰 즉 구라에 우리는 웃기에 바빴는데, 구라라면 뒤지지 않는 김지하는 대뜸 그의 추임새부터 말꼬리를 잡아 자신의 썰을 풀어대며 제법 말상대가 되자 “형님, 형님이 배추니까 나는 동생으로 상추로 합시다.”하며 궁합을 맞춰버렸다.
아마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헤어졌을 것이다. 방 배추는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우리만 알고 자주 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 당부를 지켜 전혀 소문을 안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한량기질이 도져서 스스로 백기완을 비롯한 여럿에게 연락, 거의 매일 양장점이 술판으로 이어지자 숙녀들이 다 발길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빈털터리 처지에서 최전방 산악지대에다 엄청난 면적의 야산 개발권을 얻어 목장을 하게 되었다며 우리를 초청했다. 버스도 드문 그곳엘 찾아 갔더니 산 입구에서 해가 저물어야 밤에 산길을 더듬어 “방 배추”라고 고함을 질러대면서 찾아갔다. 명산대찰이 서기에 적합한 야산 중의 심산이었다. 거기서 우리가 갖고 간 술과 각종 간식을 다 털어먹으며 밤을 샌 후 헤어진 게 나와는 마지막 만남이었다가 서대문 호텔에서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목장 일을 돕는 경상도 총각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오는 삐라를 주워 열심히 읽더라는 것이다. 그걸 소지만 해도 불법이었기에 모아서 다 태워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총각이 설날 귀향해서 벗들에게 그 내용을 자랑삼아 북쪽 이야길 하니까 신고를 당해 연행, 어디서 들었느냐니까 방 배추를 지목하여 졸지에 연행, 구속당한 처지였다. 대질심문을 요청해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 총각에게 물으니 그는 쳐다보기는커녕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그럼 누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다그치니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로 불쑥 방 배추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이내 풀려나긴 했으나 억울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했다.

 

8. 재판, 그리고 석방 후 으악새 모임
문인간첩단 사건은 언론 방송들이 방정을 떨었던 것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빛이 바래져 갔다. 더구나 우리 다섯 보다 더 <한양>지와 관계가 깊었던 문인들이 증인으로 나오면서 재판은 점점 희극처럼 변해갔다. 특히 구상 시인, 조연현 평론가의 증언은 분수령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구상 시인의 증언은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감방 안으로 그가 증인으로 못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우리들은 서운하게 여기며 영감님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 재판 땐가 느닷없이 판사석으로 메모지가 전해졌다. 바빠서 증인으로 오기 어려운데 지금 시간이 나서 왔으니 당장 법정 증인석에 세워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다면 온갖 반작용이 일어날 것 같아 안 나간다고 소문을 내고는 불쑥 후배 문인들을 위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려 깊은 시인은 증인석에서 “여기 앉은 이 사람들보다 내가 <한양>지 사장(김기심 발행인과 그는 동향의 친구)이나 편집장과는 훨씬 더 가깝다”고 잘라 말하며, 무죄를 강변해 주었다. 조연현은 나의 등단 은사로 가까우면서도 문학관에서는 너무나 달랐는데, 매우 단호하게 자신과 <한양>지와의 친근감을 강조하며 이 사건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별로 가깝지 않았던 작가 손소희 역시 단호하게 <한양>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언명해 주었다. 나의 대학 은사 백철은 일제하에서 카프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데다, 한국전쟁 전후해서도 온갖 풍상을 겪었기에 무척 긴장된 표정으로 어물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곤란한 대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여 우리를 긴장시켰으나 결정적인 쟁점에서는 분명히 부인해 주었다. 
1972년부터 안양교도소에 갇혀있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도 증인으로 등장했다. 기결수라 죄수복을 단정하게 입은 당찬 모습으로 그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경호원들이 양쪽에서 부축하자 강하게 뿌리치며 혼자서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다섯 피고들에게 차례로 다 고생한다며 악수를 했다. 증인이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봤다.

 

<월간 다리> 1970년 9월호(창간), 10월호, 11월호

이 책을 들어 이런 저술을 남긴 김상현 의원 같은 분들도 있다며 반론의 자료로 삼았다. 박정희는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로 하여금 이 책 5천 권 값 6백만 원을 지불토록 했고, 김상현은 그 돈을 밑천으로 윤형두(범우사 회장)에게 잡지를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게 월간 <다리>지였다. 창간 때 주간은 평론가 구중서였고, 그가 가톨릭에서 월간 <창조>를 창간하자 그리로 옮겨간 뒤에 내가 후임으로 갔다. 이래서 1970년대 초기의 박 정권 비판 잡지의 트리오였던 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다리>, <창조>가 되었다. 이 잡지들은 끊임없는 필화와 직간접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다리>지의 권두언(김상현 명의)이 <아사히신문>에도 소개되는 등 당시 일본 언론은 무척 진보적이었다. 김상현이 나에게 일본에 가서 푹 쉬고 오라는 선심을 쓴 건 1972년 1월이었다. 나 같은 요시찰 인물이 여권을 내려면 3급 이상 비선출직 공직자의 보증인을 둘 이상 내세워야 했는데, 나를 하루아침에 국회의원 수행비서로 등록시켜 신원조회도 없이 며칠 만에 여권과 비자를 다 얻었다.
김상현과 함께 일본 여행 중 내가 소개해서 <한양>지의 편집장과 호텔에서 만나 축사도 구두로 불러주곤 했었다. 더구나 그는 일본문제의 전문가라 김기심이나 한양이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 소속임을 분명히 했고 충분히 재판부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밖에도 남파 전향 간첩을 비롯해 여러 증인이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한양>지 편집장 김인재의 고향인 남해에서 상경한 모 농민이었다. 검찰 측 증인이라 우리는 무슨 거짓말을 하려나 바짝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김인재가 6.25 때 ‘빨갱이’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지요?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입니더.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않았심더. 그는 아주 얌전하고 착했심더.”라고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당황한 검찰은 “그럼 이 조서에 왜 날인을 했느냐?”니까 “보안대에서 와서 찍어라 캐서 찍은 겁니더.”라고 해서 온 법정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판사는 얼른 그에게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자, “그냥 가면 됩니꺼?”라고 물어 된다고 하니 문을 열고 순순히 나가더니 이내 바로 되돌아 왔다. 판사가 왜 들어왔느냐니까 “차비를 준다고 캤는데 어디서 줍니꺼?”라고 해서 또 한 바탕 마음 푹 놓고 웃었지만 판사도 웃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의 문인간첩단 피고인 석방운동 영문자료집인 <남한의 솔제니친> 표지와 목차

 

이쯤 되니 재판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지에 글을 많이 쓴 순서도 아니고, 그들과 자주 만난 친분관계의 깊이로 따진 것도 아니며, 돈과 선물을 많이 받은 서열도 아닌 그야말로 무작위로 뽑힌 다섯 명이었다.
여론은 단연 우리 편이었다. 문학인 297명의 진정서 제출, 국제앰네스티는 <남한의 솔제니친>이란 책자 발간과 세계적인 석방운동, 일본 문인들의 발빠른 석방운동과 서명 작업 등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사로 변해버린 ‘문인간첩단 사건’은 정작 한국 사회에서도 ‘간첩’이란 게 어마어마한 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작될 수도 있구나 하는 인식의 변모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소책자를 만들어 대량 배포했는데,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교수가 나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며 지원을 호소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인권변호사의 상징이었던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재판 때마다 거의 방청하여 그 정황을 해외에 널리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그릇된 역사교과서 바로잡기부터 재일한국교민의 인권문제와 북한 돕기 등에 관여해 온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감방의 밤은 왁자지껄하다. 그건 느끼기에 따라 시장바닥 같기도 하지만 온갖 벌레와 동물들의 대화로 시끌시끌한 여름 밤 숲속 같기도 하다. 그 소리들은 불협화음이지만 재밌다, “야, 이 도둑놈들아, 욕 좀 하자아아아”하면 바로 “네에미 씹니다.”가 나오고 이어 “네에미 씹이 씹이다.
”에 꼬리를 물고 “네에미 씹이 씹이 씹이다”라며 ‘씹’자가 한자씩 이자를 붙여 나가다가 “X방 000 깨져라” 하면 “*** 뒷문 가서 깨져라” 소리 지른다. 깨져라는 죽으라는 것, 뒷문은 사형장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떤 죄인도 깨지기를 바라진 않는 게 감방의 정서다. 
“야 임마, 3대 째 징역 살아라”, “X방, 원숭이 폭 삶아 보낸다”라고도 했다. 원숭이는 일제 때부터 끔찍하게 재수 없는 상징으로 써온 저주로 그걸 삶기까지 했으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머니—”하고 목 놓아 부르는 소리가 며칠 째 계속 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아, 집에 가고 싶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어이 X방 000, 잘 자. ***(여자 이름) 참 안 됐어. 그 애 십년 후에 애나 낳을 수 있을까?”라는 근심도 터져 나왔다. 어떤 노처녀가 개나리(긴급조치 위반 상징)로 잡혀 온 걸 동정하는 말에, “야, 걱정 마. 그땐 국민소득 1천 5백 달러는 될 테니까 자식 없어도 사회보장제도가 잘 될 테지”라는 처방전도 나왔다. 이어 누군가 “잘 있거라, 나는 내일 목포 간다”라고 소리 지르니 얼른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목포행 완행열차”라는 구성진 <대전 발 0시 50분>(원제목은 <대전 브루스>)을 불러준다. 실제로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서 0시 50분에 대전으로 출발했던 제33열차는 1959년에 생겼다가 이듬해에 시간이 바뀌어 사라졌으나 노래는 그대로 남았다.
8차에 걸친 지루하고 따분한 심리가 끝나고 6월 28일 금요일이 제1심 판결 날이었다. 밖에서는 아예 다 풀려날 줄 알고 리영희 선생은 희대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고서 그 출판기념회를 그날 저녁으로 잡았다. 우리가 풀려나면 다 참석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기대를 저버린 채 정을병 혼자만 무죄였고, 김우종과 나는 집행유예, 이호철과 장백일은 실형이 선고되었다. 풀려나도 개운찮은 건 이호철・장백일의 실형(둘 다 2심에서 석방)과, 결국 그간 지녔던 사회적인 모든 직책과 활동이 깡그리 백지화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복직도 복권도 안 된 채 요시찰인물로 살아야만 했다.
‘관제(官製) 빨갱이‘란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독재권력의 산물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자, 그 피해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야만 되었던가의 본보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1998년이었다.

 

출소 후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 초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두 살 된 아들(민)을 안은 아내 고경숙, 나카다이라 변호사와 동행자, 뒷줄 정을병, 임헌영, 미상

 

바로 그해 여름 즉 1974년 8.15 경축식은 육영수의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이호철은 감방 안에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흥분하며 석방을 고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둘은 예상대로 우리보다 3개월 더 옥살이를 한 뒤에야 2심에서 석방됐다.
그해 연말, 정확히는 12월 9일에 유신반대파였던 정치인 3인방인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이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했다. 갓 출옥한 김상현 환영을 겸한 송년 모임에서 이 풍진 세상을 소일하고자 으악새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승헌, 장을병, 리영희, 이상두, 윤현, 김상현, 윤형두에다 나중 김중배, 한완상이 추가됐고 나는 최연소 회원으로 합세했다. 유신통치 시절의 유일한 여흥이었던이 모임의 <으악새 선언>은 한승헌이 작성했는데 실로 명문이다.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온 ‘체’를 벗어 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없이는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 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발산에 일로매진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주로 김상현이 스폰서를 모셔 오거나 자신이 지불하면서 맘껏 즐겼는데, 한정식, 양식, 일식집 고급부터 싸구려까지 두루 섭렵, 전전했다. 온갖 음담패설과 욕설이 담긴 속요들을 맘대로 불렀으나 춤을 추거나 여성을 들이진 않았다. 리영희가 여성이 동석하자 “낡은 부르주아” 운운하며 비토를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뭇 여성 펜이 많았던 한승헌이 자기 펜들만 초청하여 함께 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발광을 했을까. 익살과 와이당(猥談의 일어)에 일가견을 가졌던 김상현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 장군이 처했던 매독의 비극을 설파했다. 국제매독이라 고칠 수 없는 단계라서 그는 국내 명 의원은 물론이고 이웃나라까지 원정을 갔으나 한결같이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점점 썩어 들어가 죽게 됩니다.”라는 진단이었다. 차마 그걸 잘라내기가 아쉬웠던 장군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을지로 6가 허름한 골목의 중국인 명 한의를 찾아갔다. 늙은 한의는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그 흉물을 쳐다보더니 “다른 병원에도 가 보셨습니까?” 정중히 물었고 “예, 다 다녀봤습니다”고 답하니 “뭐랍디까?”고 물었다. 장군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똑 같이 이걸 잘라내야 한답니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의는 “미친놈들! 자르긴 왜 잘라!” 했다. 이에 용기백배한 장군은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하자 한의는 다시 “미친놈들!”을 서너 번 반복하기에 장군은 아예 희색을 띄우며, “예,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라고 용기 있게 답했다. 지그시 쳐다보던 그 명의는 다시 “미친 놈들! 그냥 둬도 뚝 떨어질 걸!”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걸 1970년대의 유신통치 아래서 최상급 와이당이라고 내가 감히 평하는 것은 바로 그 한의사가 ‘역사적인 필연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냥 둬도 떨어질 건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모든 민주투사들과 학자들은 박정희가 죽어야만 유신헌법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10.26 이후에 다들 망할 걸 알았다고들 하지만 내가 감히 증언한다. 이미 민주화 운동권조차도 그 군부독재 체제가 쉬 붕괴할 것이란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결국 그는 이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저격당함으로써 유신통치의 막은 내렸다. 그냥 둬도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고도 사건 44년 뒤인 2018년 6월에야 나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에 따른 형사적인 배상도 끝났다. 그러나 내 청춘을 빼앗겼던 민사적 배상 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칭 ‘문인간첩단 사건’은 산적한 간첩조작사건의 목록 중 비정치적인 것이라 대중적인 선동력이 강했다. 이승만 치하에서 첫 간첩 조작이었던 ‘국회프락치 사’에 이어 ‘조봉암 조작사건’을 거쳤는데, 박정희 치하에서는 ‘인혁당 사건’이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했고, 유신통치 아래서는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간첩도 만들어 내는 독재’라는 인식을 널리 퍼트리게 작동됐다.

임헌영을 비롯한 문인간첩단 사건 관련자 전원 무죄 기사. <한국경제> 2018년 6월 24일자 기사

 

이런 조작술은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한 수구세력들의 기교가 다양화되어 널리 활용하므로써 각계각층에서 언제라도 필요하면 ‘간첩조작’을 수행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모든 조작사건은 다 정치권력이 날조해낸 결과였다. 민주화와 인권의 첫 걸음은 이런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인데, 정작 그 조작 전문가 집단이 민주화되자 사회의 그늘에서 여전히 ‘간첩’이 아닌 ‘여론’ 조작에 나서는 모양새가 참 우려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조작했던 사건들이 진짜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란 그 날조범들이 다시는 어떤 ‘조작’도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정화하는 노력일 것이다.

목, 2021/04/2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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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목, 2021/04/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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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메시지다.

목, 2021/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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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9]

권총을 지닌 그는 왜 이완용을 칼로 찔렀을까?
이재명 의사의 정확한 의거장소에 대한 재검토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언제부터인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키 높이에 관한 엉뚱한 주장 하나가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살펴봤더니 김구 선생은 알고 보면 굉장한 장신거구(長身巨軀)였다는 것인데, 이를 입증하려는 듯이 창덕궁 인정전 월대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나란히 선 김구의 모습과 같은 것이 그럴싸하게 증거자료로 제시되어 있었다.
1947년 7월 15일에 개최된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기념사진으로 찍은 이 장면만 놓고 보면 확실히 이승만의 신장에 비해 김구 쪽이 월등히 키가 커 보인다. 그래선지 이런 종류의 자료들을 근거로 어떤 이는 김구의 키가 190센티미터는 된다고 하고, 못해도 180센티미터는 넘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다 틀렸다. 김구 선생의 키에 대해서는 이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서대문감옥에서의 수형생활과 관련한 대목에서 본인 스스로 써놓은 구절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명쾌하게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 감옥생활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신체가 큰 사람이다. 내 키가 5척 6촌 중키에 불과하나 잘 때 종종 발가락이 남에 입에 들어가고 추위도 더 받는다.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252쪽.

 

이로써 그의 키는 다섯 자 여섯 치(곧, 169.697센티미터)로, 딱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옛날 사람들의 평균체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키로 볼 수 있겠으나 터무니없이 장신거구라고 추측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신장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김구 선생이 남겨놓은 <백범일지>는 조금만 세심하게 탐독하면 근현대사의 사건, 인물, 현상 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단서들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것으로 개인적으로 많이 기억에 남는 얘기의 하나는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와 얽힌 일화(逸話) 한 토막이다.

바야흐로 1909년의 초겨울로 막 접어들던 어느 날, 김구와 노백린(盧伯麟, 1875~1926) 둘이 함께어울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재령 여물평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필 그날 그 동네 진초학교의 여교사인 오인성(吳仁聖, 1891~?)의 남편이 되는 이가 부인을 위협하고 매국노(賣國奴)를 일일이 총살하겠노라고 소리치며 동네 어귀에서 단총(短銃, 권총)을 쏘아대는 통에 큰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김구와 노백린은 짐짓 이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과 신상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 결과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판단하여 “의지를 더욱 강하고 굳게 수양한 다음에 총과 칼을 찾아가라”고 타일러 그가 소지했던 총과 칼을 넘겨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뿔싸, 이러한 마무리가 전혀 뜻밖의 결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동아일보> 1924년 11월 16일자에 게재된 이재명 의사의 인물사진이다. 이 당시1909년 12월 의거 때의 동지였던 이동수(李東秀)가 궐석재판의 시효만료를 얼마 앞두고 체포되자, 이와 관련하여 이재명사건에 대한 옛 자료와 관련기사들이 잇달아 신문지상에 쏟아져 나오면서 이 사진도 지면에 함께 소개되었다.(왼쪽)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一筆每地形明細圖)>(1929)에 표시한 이재명 의거와 관련한 주요 공간의 배치이다. (1)은 불란서교회당(즉, 명동성당), (2-1)는 특허국 청사(옛 양향청), (2-2)는 특허품진열소(옛 양향청), (3)은 이완용 저동본가(옛 남녕위궁), (4)는 조중응의 집을 나타낸다.(오른쪽)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泥峴)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李完用)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그는 먼저 인력거를 끄는 차부(車夫)를 죽이고 이완용의 생명은 다 빼앗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던 것이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213~214쪽.

 

이재명 의거는 우선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끝내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지만, 원래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모두 응징하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된 거사였다. 일찍이 일제가 강요한 두 차례 협약(協約)의 부당성에 그렇잖아도 분개하던 차에, 때마침 1909년 12월에 이르러 일진회(一進會)가 이른바 ‘일한합방 청원(日韓合邦 請願)’을 위해 「정합방 상소문(政合邦 上疏文)」, 「통감부에 보내는 장서(長書)」, 「전국 동포에 대한 성명서(聲明書)」 등을 제출하는 등 친일매국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시국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이완용이 그동안의 전력에 비춰보아 이번에도 반드시 합방의 협약 체결에 이를 것이라는 점이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이완용과 이용구 두 사람에 대한 응징은 불가피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에 이재명 의사는 이들을 처단하고자 함께 결의한 김정익(金貞益), 김병록(金丙錄), 조창호(趙昌鎬), 이동수(李東秀), 오복원(吳復元), 박태은(朴泰殷), 김태선(金泰善), 김용문(金龍文), 이응삼(李應三), 김병현(金秉鉉), 이학필(李學泌), 김이걸(金履杰) 등 여러 동지들과 협력하여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09년 12월 22일에 경시청(警視廳)에서 작성한 <차압조서(差押調書)>에는 피차압인(被差押人)이 ‘노백린’으로 표시된 “삿쿠(가죽갑)에 든 단총(サック入 短銃)”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혹여 이것이 바로 <백범일지>에 등장했던 그 권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이른바 ‘모살미수 및 고살사건(謀殺未遂 及 故殺事件)’으로 명명된 이재명의거와 관련하여 작성된 「이재명 등 13인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10년 5월 18일)」 자료를 보면, <백범일지>에서 언급된 상황과는 달리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처단하려고 했을 그 시점에 그는 명백히 김태선에게서 건네받은 단총 한 자루를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그 당시의 여러 신문보도에는 ‘5연발 단총’이니 ‘7연발 권총’이니 하여 이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거듭 등장할 뿐더러 1910년 5월 13일에 경성지방재판소 제1호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도 재판장이 “피고는 육혈포(六穴砲, 권총)를 지니고 있었는가?”라고 묻자 이재명 의사가 “그렇다”라고 대답한 내용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질문은 한 가지이다. 왜 그는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몸에 총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완용을 처단할 당시에 그 무기로 단총(短銃)이 아닌 단도(短刀)를 선택한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가 없는 관계로 아쉽게도 그 연유를 자세하게 풀어낼 방도가 없다. 겨울철에 대개 두터운 옷을 착용하므로 칼을 사용하는 것이 불리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래 단총으로 저격하려 했으나 총이 격발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근접한 위치였기 때문에 굳이 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칼만으로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보> 1909년 12월 23자에 수록된 「총상 조난 전말(摠相 遭難 顚末)」 제하의 관련 기사에는 “그가 몸에 권총을 품고 있었어도 총 한 발 쏘지 못했다”라고만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범인소성(犯人素性] 범인(犯人)의 성명(姓名)은 이재명(李在明)이오, 연령(年齡)은 21인데 평양인(平壤人)이라 하며 6년 전에 미국 상항(米國 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유학(留學)하였다가 1개월 전에 귀(歸)한 자(者)인데, 목하(目下) 한성 입정동 백소사 가(漢城 笠井洞 白召史家)에 기류(寄留)하는 자(者)이라. 신문실(訊問室)에 횡와(橫臥)하여 취조(取調)에 응(應)하는데 언어(言語)가 명석(明晣)하고 태도(態度)가 자약(自若)하다 하며 신(身)에 5연발 권총(五連發拳銃)을 회(懷)하였어도 1발(一發)을 방(放)치 못한 자(者)이라 하며 (하략)

 

그리고 1909년 12월 22일에 경시청(警視廳)에서 작성한 「차압조서(差押調書)」를 보면, 피차압인(被差押人)이 ‘노백린(경성 북부 계동 7통 6호)’으로 표시된 “삿쿠(가죽갑)에 든 단총(サック入短銃)”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데, 혹여 이것이 바로 <백범일지>에 등장했던 그 권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재명 의사가 왜 이완용을 처단하는 자리에서 권총을 지니고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앞으로 누군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왕 말이 난 김에 이 대목에서 이재명 의거와 관련한 궁금증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그것은 정확한 의거장소가 어디인지에 관한 부분이다. 현재 명동성당의 출입구 앞쪽에 서울특별시에서 설치한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1999년 11월 설치)이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의당 그 자리가 ‘명동성당 앞’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명동성당 앞쪽 보행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1999년 11월, 서울특별시 설치)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이재명의 생몰연대가 ‘1890~1910’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기록으로 비춰보아 출생연도는 1887년의 잘못인 듯하다.

김명수(金明秀) 편, <일당기사(一堂紀事)>(일당기사출판소, 1927)에 수록된 이른바 ‘종현 카톨릭교당 앞의 조난사건(遭難事件)’ 관련 참고도판이다. 사진 아래에 “교당 앞 동측 판로(坂路, 언덕길)”라고 적은 것은 이곳을 피습지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뒤쪽으로 명동성당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담장에는 ‘계성보통학교(啓星普通學校)’ 간판이 붙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재명 의거에 관한 각종 자료별 서술 내용 비교

하지만 이재명 의거와 관련하여 그 시절에 생성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세부 사항에 들어가서는 제각기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금세 파악이 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는 ‘외율상(煨栗商, 군밤장사)’으로 변장하고 기다렸다고 하였으나 <황성신문>의 보도에는 그런 언급은 없고 ‘배광양복(背廣洋服, 세비로양복)’이라거나 ‘단발양복(斷髮洋服)’이라고 적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국민신보>의 경우에는 이와는 달리 그의 복장이 ‘흑주의(黑周衣, 검은 두루마기)’라고 채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의거현장의 구체적인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간략하게 ‘불란서교회당 앞’이라고만 서술한 자료가 일반적이지만, 천주교당 문앞 약 7, 8칸(間 ; 1칸=1.818미터) 지점이라거나 동측 판로(坂路, 언덕길)라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예 특허국진열소 앞 이라고 적고 있는 사례도 여럿 눈에 띈다. 이렇게 본다면 명동성당 앞쪽에서 이완용의 피습지로언급되는 지점은 자료에 따라 최대 100미터 남짓한 편차를 두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셈이 된다.

<황성신문> 1909년 3월 5일자에 수록된 탁지부 건축소의 ‘건물매각 입찰광고’이다. 이를 통해 옛 양향청 자리(당시 특허국 특허품진 열소가 있던 곳)에 농상공부 신축청사가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농상공부 신청사가 건립될 당시에 제작된 「농상공부 부지지균공사 평면도」이다. 가운데 농상공부 청사가 들어서는 곳은 종래 특허품진열소가 있던 지점이고, 그 왼쪽(북쪽)에 특허국 청사(옛 위수병원 터)가 자리한 것이 보인다. 오른쪽(남쪽)에 있는 산림국 자리도 모두 원래 양향청에 포함된 영역이었다. (ⓒ국가기록원)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조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상품진열관(商品陳列館)의 전경 사진이다. 이 건물은 옛 양향청 구역 안에 있던 특허품 진열소를 헐고 1910년 8월에 신축 이전한 농상공부 청사로 건립된 것이었으므로, 이곳 문앞 일대는 이완용의 피습지이자 인력거꾼 박문원의 절명 장소에 해당하는 공간인 셈이다.

미국인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가 남긴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The Burton Holmes Lectures)> Vol. 10(1901)에는 명동성당 쪽에서 서울 시내 쪽으로 담아낸 파노라마 전경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 기와담장 안쪽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옛 양향청(糧餉廳) 자리이다. 그러니까 불과 8년 후에 이곳의 앞길은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이재명 의거의 현장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특허국진열소’라는 것은 정식명칭으로 ‘통감부 특허국 특허품진열소(統監府 特許局 特許品陳列所, 1909년 11월 18일 설치)’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물품조달과 급료 등 재정을 관리했던 기구였던 양향청(糧餉廳, 영락정 1정목 1번지 및 2번지 포괄)’이 자리했던 구역이었다. 이 일대의 면적은 2,517평에 달할 정도로 꽤나 너른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특허국 청사(特許局 廳舍, 영락정 1정목 1번지에 해당)도 함께 존재하였다.
특허품진열소는 그 이후 1910년 5월 21일에 폐쇄되고, 그 자리에는 농상공부 청사(農商工部 廳舍, 1910년 8월 22일 신축 이전)가 새로 건립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이곳은 한때 조선총독부 취조국이 사용했다가 1912년 11월부터 상품진열관(商品陳列館)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총독부 전매국 청사와 경성세무서 등의 용도로 바뀌어 사용된 바 있다.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135쪽에는 이른바 ‘이완용의 조난’과 관련하여 “인력거꾼 박원문(朴元文)도 현 전매국(專賣局) 앞까지 기어와서 마침내 절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이곳은 특허품진열소 앞이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해둘 만한 사실은 이곳 특허국 청사(특허품진열소 구역 포함)와 북쪽으로 담장이 맞붙어 있는 곳이 바로 총면적 2,244평이나 되는 옛 남녕위궁(南寧尉宮) 터이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저동본저(苧洞本邸, 황금정 2정목 148번지)였다는 점이다. 또한 동쪽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곳에는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의 거처(영락정 2정목 85번지; 면적 499평)가 자리하고 있었다. 친일매국에 관한 일에 있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두 사람이 알고 보니 실제로 ‘이웃사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린 이완용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내막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집 위치가 피습현장과 수십 미터 상간에 불과하였으므로 재빠르게 다친 몸을 집으로 옮길 수 있었고, 그리하여 가까운 곳에 자리한 한성병원(漢城病院)의 일본인 의사들에 이어 급히 달려온 대한의원장 키쿠치 죠사부로(大韓醫院長 菊池常三郞)의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절명(絶命)한 장소로 <대한민보> 1909년 12월 23일자에 ‘특허국 진열소 앞’이 아닌 ‘총상저 문전(總相邸 門前)’이라고 표시된 것도 두 곳이 사실상 동일한 공간의 다른 표현인 탓이기도 하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를 종합하면 이재명 의사의 의거장소를 일컬어 그저 ‘명동성당 앞’이라고만 단순화해서 표현되어도 좋을 만한 것은 전혀 아니라고 판단되며, 여기에는 의당 역동적인 의거현장의 재구성 작업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명동성당 앞쪽 언덕길 초입에서 시작되어 특허품진열소(지금의 남대문세무서 자리) 앞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진행과정을 요약도(要約圖) 형식으로 담아내어 현장 주변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자료이긴 하지만, <삼천리> 제6호(1930년 5월 1일 발행)에 게재된 「야순탐보대(夜巡探報臺)」 코너(24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최후(最后)의 일언(一言)] 명동천주교당(明洞天主敎堂)에 열린 백이의 황제(白耳義 皇帝)의 추도회(追悼會)에 참석(參席)하고 돌아오는 이완용(李完用)을 찌른 이재명(李在明)은 그때 포박(捕縛)을 당(當)하면서 영어(英語)로 I die for my Country! 라고 한 마디 부르짖었다고.

 

각기 다른 기록들을 잘 간추려 최대한 사실관계에 가깝게 의거현장을 재구성하여 바르게 알리는 것도 후대의 사람들이 바로 110여 년 전에 그가 외친 목소리에 호응하는 합당한 방법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목, 2021/04/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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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6 시작

 

한국근현대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내 유일의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가 벌써 시즌 6을 맞이했다. 이번 시즌은 연구소 30주년 특집으로 연구소의 과거-현재-미래를 테마로 제작한다.
과거편은 연구소 30년 활동사를 소개하는 코너로 창립 초기 이야기부터 주요 활동과 잘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흥미롭게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편은 연구소의 현재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 지부 후원회원을 초대해 그들의 활동 이야기를 듣고 더불어 상근활동가를 통해 연구소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달하려
고 한다. 미래편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모색하는 의미로 외부 전문가와 활동가를 초대해 역사, 평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1편에서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들을 초대해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위한 연대의 방송을 하였고 2편에서는 다큐멘터리<김군>의 강상우 감독을 초대해 5.18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향후 30주년을 맞이한 1991년 5월 투쟁, 광주지부 활동이야기, 대중적 역사글쓰기로 유명한 김형민 PD의 새책이야기, 김진향 개성공단 이사장의 개성공단과 종전선언, 정욱식 평화네
트워크 대표의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의 조건, 국가보안법, 강제동원과 유네스코 산업유산 이야기 등이 준비되어 있다. 연구소 30년사이야기는 하반기 백서 발간에 맞춰 방송할 예정이다.
자체 스튜디오를 마련한 만큼 연구소 고유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회원과 시민들의 많은 시청과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6/02-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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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1년 상반기 특수분야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 읽기>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작년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에 이어 5월14일부터 5월 16일까지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읽기>를 진행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과서에 소개된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서도 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자료를 직접 보고 활용법을 토론하며 교과서에 실릴 새로운 사료 발굴 차원의 다양한 사료 소개와 역사부교재 개발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기존40명의 참가인원을 계획하였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됨에 따라 인원을 간소화하여 24명의 교사가 참여하였다.
5월 14일(금) 진행된 첫 강의 「사진엽서에 담긴 식민지 조선과 근대 표상」은 권혁희 강원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많은 사진엽서를 제시하며 당시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의도를 담아 촬영하여 제작·보급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관광 상품화하여 그 홍보 수단으로서 사진엽서를 적극 활용하였던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한 참가자들이 많았다. 이어진 강동민 자료팀장의 실습 시간에는 이러한 근대 사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트를 소개하고 직접 접속해 보여주어 참가자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에 사진을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5월 15일(토)의 첫 번째 강의 「사진자료에 담긴 근대사의 공간과 사건」에서는 이순우 자료실 책임연구원이 근대시기 어떻게 사진 기술이 등장하고 보급되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짚었다. 이후 교과서에 활용된 근대시기 사진의 오류, 잘못 알려진 사진들의 원출처를 발굴해낸 과정 등을 통해 잘못된 출처인용의 교육적 위험성과 출처 확인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당일 두 번째 강의인 「사진과 삽화로 본 식민지 여성의 삶 -신여성과 일본군‘위안부’ 사이-」는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센터의 박정애 연구위원이 강사로 참여했다. 교과서에서는 신여성을 구여성이라는 비교대상을 전제로 하여 개화기의 새로운 문화와 패션을 접한 모습으로만 소개할 뿐 신여성들의 풍성한 작품 활동이나 사회 참여는 다루지 않는 모습을 꼬집었다. 또한 여전히 교과서에서 일본군‘위안부’를 피해자다움이 담긴 전형화된 모습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짚으며 더욱 다면적인 접근과 풍성한 사례 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어진 실습 시간에는 노기 카오리 학예실 선임연구원이 직접 참여했던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 사례를 발표하고 직접 교사들이 지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의 의의를 깨닫고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 날인 5월 16일(일)은 김민철 연구위원의 강의 「일본군경의 사진첩 속 무단통치의 실상」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군경의 사진을 통해 헌병경찰제와 총독의 의미를 짚고, 당시 유생들의 일기를 통해 일본군경을 통한 무단통치는 곧 폭력지배의 일상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강의 「사진에 담긴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농민의 삶」은 이송순 고려대 교
수가 맡았다. 조선 농촌과 농민의 삶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설명하며 토지조사사업과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한 일본 제국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수많은 사진을 통해 당시 농촌과 농민의 삶을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든 강의를 마무리한 후 김승은 학예실장의 인솔 하에 앞선 강의들에서 소개된 박물관 전시 자료들을 관람하고 실물 자료를 통해 강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에 더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에 집중하던 모든 참가자들과 함께 교원연수를 알차게 끝마쳤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올 하반기에도 교과서에 수록된 박물관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특색 있는 교원연수를 기획하고 있다. 관심있는 교사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수, 2021/06/0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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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인터뷰 : 노기환 MC
정리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이번 호의 인터뷰는 최근 팟빵과 유튜브에 업로드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의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를 발췌 정리하였다. 내역사 시즌6의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투쟁’ 2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공동 제작하였다. 인터뷰는 4월 23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내역사 전문 MC 노기환과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민철,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흘라민툰(HlaMIn Tun), 헤이만(Hay Man)이다. 2월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두 분으로부터 미얀마의 상황,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맞서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 동영상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내역사 미얀마청년연대’로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MC노 │김민철 교수께서 오늘의 방송 주제를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철 │두 가지 이유인데요. 하나는 1980년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군부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소식들만 들었거든요.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으니까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광주 참사의 실체를 알고,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거꾸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학살했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제 20대는 광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직접적으로는 19세 젊은이 마째신이, 티셔츠에 ‘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를 쓴 청년이 아침에 아빠한테 시위에 참가하겠다고 인사하고 나가서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사고가 멈췄습니다. 며칠 동안 마째신의 얼굴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MC노 │이 자리에는 김교수와 함께 두 분을 모셨는데,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대표 흘라민툰씨와 헤이만씨입니다. 민툰씨는 대한민국에 언제 오셨습니까?

민툰 │ 저는 2006년도에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
고 취업했습니다.

왼쪽부터 노기환 MC, 김민철 교수, 흘라민툰 대표, 헤이만 대표

MC노 │ 전공은요?

민툰 │ 경영학 박사인데요. 미얀마에 투자하는 한국기업의 성공요인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나중에 미얀
마 가서 관련된 일이나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쿠데타가 터져서 앞날이 너무나 막막합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학생이신가요?

헤이만 │ 저는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아동학 석사과정에 있는 수료생입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언제 오셨습니까?

헤이만 │ 저는 2018년 하반기에 왔습니다. 3년 되어갑니다.

MC노 │ 김민철 교수님, 두 분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김민철 │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경희대에서 교직자들부터 성명을 내야겠다 생각하다, 학교에 미얀마 유학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보니 헤이만 학생이 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업시간에 학생에게 특강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어떤 조직입니까?

헤이만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2월 3일 결성되었고 2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시민단체인
KOCO(해외주민운동연대)와 연대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로서 기자회견, 기도회, 시위, 학교특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MC노 │ 최근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죠?

헤이만 │ 기자회견,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협력해서 기도회 참여, 지난 3월에는 오체투지도 함께 했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하는 조계종 스님들의 미얀마 특별입국 신청, 3월 27일 미얀마 국군의 날에도 미얀마민주주의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미얀마 봄의 행진’을 함께 했습니다.

MC노 │ 지금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몇 분이 함께 하고 있습니까?

헤이만 │ 아직 규모가 작아요. 인원이 20명 정도입니다.

MC노 │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민툰 │ 지난 주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지역이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이 될 때 와이파이가 잡히는 장소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뉴스를 올리면 저희가 한국 쪽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전하고 싶거나 미얀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싱겔, 텔레그램 같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뉴스나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

MC노 │ 두 분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괴로우시죠?

헤이만 │ 저도 집에 연락할 때는 주로 국제통화를 사용하고 있어요. 제 고향은 큰 도시가 아니어서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지역이어요. 그제는 동생이 이모가 계시는 지역으로 잠깐 왔었다고 해요. 동생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기는 CDM이라 많이 부르고 있어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피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좀 안전한 편이어요.

MC노 │ 오늘이 4월 23일인데,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입니까?

민툰 │ 가면 갈수록 사상자도 많이 생기고, 전에는 인터넷이 잘 돼서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알 수 있으면 피해가거나 미리 대비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잘 파악되지 않으니 활동이 많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래도 시민불복종운동도 열심히 하고, 각지역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많이 하지 못하지만요. 양곤에서는 밤에 냄비를 두드리는데 8시에 두드리기로 약속되어 있으면 7시 30분에 군인이 와서 지켜보고 있어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다가 군인이 가면 두드립니다. 군인이 없는 지역에서만 시위를 계속 하니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시위대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바로 쏘기 때문에 나중에 인터넷에 사진이나 동영상이 나올 때만 확인할 수 있어 더 불안한 상태입니다. 전처럼 바로바로 정보를 알 수 없어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 현대사에서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게 언제였습니까?

민툰 │ 최초의 쿠데타는 1962년 3월 1일 네윈 장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MC노 │ 쿠데타 이전의 정부는 어떤 정부였습니까?

민툰 │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영국은 미얀마에 소수민족이 많으니까 부족 간의 이간질을 통해 지배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인 1942년에 미얀마는 일본을 끌어들여 영국하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처음에 도와준다고 들어왔다가 오히려 3년간 미얀마를 지배했습니다. 1945년 8월 전쟁에서 지자 일본이 미얀마 땅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이 다시 미얀마에 들어와서 식민지를 다시 만든 거죠.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버마인 따로 소수민족 따로 독립시켜주겠다 하자 아웅산 장군은 같이 독립해야 한다고 맞섰고 이에 1947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함께 독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6개월 전인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했습니다. 미얀마 독립 당시의 정치상황이 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미얀마에선 ‘우누시대’라 부르는 시기입니다. 우누는 아웅산 장군과 절친한 사이로 함께 독립운동을 했었습니다. 우누가 10년 정도 총리를 하면서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분열이 생겨서 네윈 장군이 1962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네윈의 주장은 미얀마의 군인은 독립군이다. 혼란스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1962년 3월에 첫 번째 쿠데타 이후 1988년에도 한 번, 올해 한 번 더 똑같은 방식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MC노 │ 두 분은 한국에 있을 때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헤이만 │ 제 카톡으로 많은 메시지가 왔어요. 확인해보니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며 한국의 지인이 미얀마 현지직원과 저의 안부를 묻는 걸 통해 알았어요. 오전 쿠데타 발생 때 모든 통신이 마비되었는데, 해외 거주인들은 가족과 연락이 안됐다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국영방송에서 쿠데타 발생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고 한국의 지인은 난민신청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쿠데타를 겪어보고 외국에 있는 상태에서 난민신청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민툰 │ 사실 1월 말부터 쿠데타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는데, 이 시대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에 많은 아픈 기억이 있어요. 미얀마에 민주주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딱 10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2010년 이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신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만, 저희는 정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MC노 │ 미얀마 투쟁 보도에서 보이는 Z세대는 어떤 세대를 의미합니까?

헤이만 │ 1995년 이후 출생자들입니다. 이십대 젊은이들입니다. 그 이후는 알파세대, 그 이전은 Y세대, 1988년 이후는 X세대 이렇게 부릅니다.

MC노 │ 투쟁과정에서 Z세대가 많은 역할을 하는데, 그 세대는 미얀마 사회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헤이만 │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민주주의를 맛본 세대라 할 수 있죠. IT기술이 개발된 시대에서 자라왔고, X, Y세대보다 더 기술적으로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툰 │ 2010년 전까지는 군사정권 시대여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의 Z세대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Z세대가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목표도 없고 늘 게임만 하는 친구들로 보였어요. 우리처럼 군사정권시대를 안 겪어본 신세대가 너무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Z세대는 민주주의를 다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국제사회에 있는 젊은이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어요. 교육도 많이 받고, 인터넷에도 익
숙하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도 두려움이 없는 세대죠. 이번에도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우리 X, Y세대는 겁이 나서 밖에 나와 데모도 못하는데 Z세대는 데모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면 나가서 몰래 데모하다 잡히거나 죽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 거죠. Z세대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용감하게 싸울수 있는 미얀마의 새로운 젊은 세대입니다.

MC노 │ 2월 1일 쿠데타 이후에 시민들의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헤이만 │ 가두시위가 처음 발생한 것은 2월 4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72시간 동안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신고 없이 불법적으로 길거리 시위에 나가면 군부에 진압명분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냄비를 두들기는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밤 8시가 되면요. 첫 번째 가두시위는 2월 4일에 만달레이라는 제2의 도시에서 만달레이 의대생들과 외국어대학생들이 나와서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거리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떼자산이라고 만달레이 의대 출신 의사입니다. 그분의 주도로 계속해서 길거리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위에서는 Z세대의 활약이 매우 큽니다. Z세대는 IT 기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기에 쿠데타에 대해서 전 세계에 소식을 알리는 데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미얀마의 인터넷은 페이스북으로 대표됩니다. Z세대가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해외에 알리려 했을 때 인터넷을 잘 활용했던 거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활용해서 영어라든지 여러 가지 외국어를 잘 구사할 줄 아니까 다국어로 다 알리는 거죠.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고 또 바이컷앱을 개발하여 친군부 기업에 불매운동, 사회적 처벌을 할 수 있게 리스트를 만들어주고, 여러 가지 정보를 한군데에서 볼 수 있게 데이터를 만들어 주었어요.

MC노 │ 말씀 중에 사회적 처벌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민툰 │ 사회적 처벌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어 국민을 통치하잖아요. 군부에 불복종하고 반대하는 방법의 하나로 군부와 관련되는 장군이나 그 가족을 페이스북에 알리고, 군부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군부가 관련된 기업에서 파는 식품이나 제품을 사지 말자는 것이 사회적 처벌입니다. 리스트를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거의 절반이 군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지 말자 하면 국민들이 다 안 삽니다. 얼마 전에 A라는 음료수를 사지 말자 해서 사회적 처벌 바이컷 대상이 되는 음료수가 안 팔리니까 B라는 제품으로 포장해서 50% 할인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B제품을 사서 포장을 풀어보니 A제품을 B제품으로 속여서 판 것이 탄로 난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사회적 처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되도록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는 중국제품을 불매운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얀마쿠데타를 중국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중국제품을 안 사고, 미얀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쓰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같이 시위도 하고, 불매운동도 하면서 다방면으로 군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MC노 │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민툰 │ 예,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 군부 제재를 통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는 거죠.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미얀마의 자원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봅니다.

김민철 │ 국제관계적으로는 미중 대립으로 볼 수 있죠. 중국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동지나해 쪽으로는 타이완과 베트남인데 사이가 좋지 않죠.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주목걸이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데, 중국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미얀마를 통해서죠. 미얀마 군부하고 관계도 좋고, 경제적으로는 송유관이 바로 연결되어 중국의 대외전략으로는 미얀마를 자기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MC노 │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한 것이 언제죠?

헤이만 │ 2월 9일입니다. 네피도에서 뮇떼떼 칸시라는 19세 여성이 머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강경진압이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국제사회에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퍼포먼스 위주로 시위했는데,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부터는 가두시위가 더 강화되고 군부의 강경진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시위 유형도 바뀌었습니다. 무인시위로 사람이 나서지 않고 피켓을 세운다든지 갤러리 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만달레이에서는 연좌농성이 있었고, 4월 4일은 부활절이어서 이스터 스트라이크라고 계란에 그림을 그려 활용한 시위, 플라워 스트라이크라고 ‘봄의 혁명에서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신발 안에 꽃을 꽂아 길가에 놔두는 시위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총, 화살, 화염병, 공기총, 뚜미(옛 화승총) 등 사카이주와 친주에서 이런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자 군부는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싸움이 더욱 심각해지고 사망자와 피난민이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유학생과 근로자 등으로 구성된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MC노 │ 미얀마 내의 무장단체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툰 │ 무장단체들은 1962년 쿠데타 이후 생겼어요. 미얀마 안에는 8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각 소수
민족마다 각각 1~10개 정도의 무장단체가 있습니다. 지금은 20~100개 정도가 있습니다. 20개 정도의 무장단체들은 전부터 군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군사정부 시대인 2000년 이후에는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지역주민이 사망하게 되자 까친주와 까 인주의 무장단체들이 투쟁에 참여해서 정부군과의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헤이만 │ 군부는 전투기까지 투입하고 수류탄까지 사용해가면서 시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MC노 │ 오늘까지 희생자가 어느 정도 되죠?

헤이만 │ 4월 22일 기준으로 사망자 수가 779명, 그 중 총상 사망 건이 741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실제로는 80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MC노 │ 남녀차별과 관련한 미얀마의 독특한 풍습을 이번 싸움에 활용한다고 들었어요.

헤이만 │ 미얀마는 남녀차별이 좀 심한 편입니다. 파고다(절)에 가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여자가 갈 수 있는 곳과 남자가 갈 수 있는 곳이 구분됩니다. 여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요. 예를들어 절에 가서 불상에 금박을 입히거나 할 때는 여자가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한테 부탁해서 금박을 입혀야 해요. 이런 것을 이번 시위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남녀의 하의를 같이 빨래하지 않아요. 그러면 남자의 품위, 자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여자 속옷을 빨래하면 널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곳에 공개적으로 널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는 군경들이 시위대를 잡으러 오니까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치마 거는 빨랫줄을 만들었어요. 높은 빨랫줄 위에 여성 치마를 널면 군인들이 그 아래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자의 하의를 스치거나 만지고 지나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해서 그 아래로 지나가지 못하고 빨랫줄을 치운 다음에야 지나갔어요. 빨랫줄이 바리케이트 역할을 해준 겁니다.
그런데 Z세대와 시위참여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성차별을 없애야 한다며,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인
데 미얀마의 남자들이 머리에 여성 치마를 두르거나 몸에 걸치고, 또 입은 사진들을 SNS에 많이 올렸습니다.

MC노 │ Z세대가 시위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군요. 군부가 저지르는 만행이 국제사회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헤이만 │ 군부가 1988년에 했던 짓을 똑같이 벌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려 하고, 미얀마는 다민족국가인데 인종적으로도 차별하며 버마족과 소수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어요. 시위대를 잡아다 고문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삐퇀시베다운이라는 지역에서 경찰서를 불질렀는데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두 살짜리 아이가 보고 있는 가운데 부부에게 고문을 가했어요. 아이를 인질로 해서 자백하도록 강요한 거죠. 결국 실토하고 잡혀갔는데, 그 아이는 엄마, 아빠 이름을 계속 부르며 울고 있답니다. 시위 사상자 중 10~20대가 40%에 이를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지지난주 양곤에서 시각, 청각장애인이 사는 곳을 군부가 점령해서 반격을 못하게 인질로 삼고 인간 방패로 썼어요. 꺼떤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했고, 잡혀가서는 고문을 당하고, 여성들은 고문 트라우마가 심각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는데, 총을 겨누며 동네 사람들에게 그걸 치우게 합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여성을 폭행하고, 너무 심각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에 나오는걸 보면 체포당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엉망이고, 밤에 잡혀갔는데 아침에 시신 가지러 와라 이런 통보를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잡혀갔는데 생사가 불분명해요. 민간의 재물을 가져가고, 식당에서 먹고는 음식값을 내지 않고 다 파손시키고,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이나 자전거를 부수고 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군인들이 긴 시간 동안 군대에서 고통을 받아와서, 세상에 나와 보니 민간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이유없이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보고 있죠.

MC노 │ 지금 미얀마 국민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요?

헤이만 │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구금된 지도자들이 석방되며,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민통합정부가 성립하는 것이 국민들의 목표입니다. 저희가 1988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성공할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민불복종 운동도 더 강화되고 있고, 시민방위군이 생기면 시민들도 합류해서 저항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민툰 │ 민족연합이 우선입니다. 풀리지 않는 민족 간의 화합이 필요한데, 이번 쿠데타에 대한 저항에 소수민족이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민족통합국가를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소수민족의 입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1947년에 아웅산 장군이 추구한 그런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이만 │ 미얀마는 불교국가여서, 이번 쿠데타에 대한 종교 지도자의 명확한 입장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유혈진압이 심해지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신뢰가 깨지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불교계는 많이 지지하고 연대해주셨는데요.

MC노 │ 아웅산 장군은 어떤 분이십니까?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배운 사람인데도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영웅 중에도 길이 이름을 남긴 분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여서 민족별로 평가가 조금 다르지 않나요?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민족통합을 이뤘기에 모두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
분의 딸인 수치 여사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미신 문제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 미신을 믿는 네윈이 제 시간에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어요. 미신을 많이 믿고 있어서 늘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하지, 제 시간에 가지 않았어요. 네윈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폭탄이 터져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장군들도 미신을 많이 믿고 있습니다. 특히 목요일에 ‘ㅁ’으로 시작하는 도시에서 늘 유혈진압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 이름이 미엉라잉으로 ‘ㅁ’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점쟁이가 시위대의 머리에 총을 쏘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저격수를 배치해서 머리만 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어요.

헤이만 │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님이 점을 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종교인의 이런 행동에 더욱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요?

헤이만 │ 저희는 유학생과 근로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한국에도 여러 단체가 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시민단체로서 작은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 추모회, 기도회 등 종교단체들과의 연대활동을 해왔습니다.

민툰 │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클
럽하우스에서 미국, 영국, 한국 사람들과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빨리 유혈사태와 진압을 멈추고 협상할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하겠습니다. 또한 쿠데타가 수습되고 나면 미얀마의 복원에도 힘쓸 생각입니다.

MC노 │ 한국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연대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헤이만 │ 후원금 모금인데, 해외주민연대 KOCO를 통해서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다음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릴레이 영상을 만들어서 KOCO에 보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영상에 미얀마어 자막을 넣어서 현지 커뮤니티와 공유합니다. 그 외에도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침묵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한국의 지지자들이 함께 와서 연대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엽서와 마스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민툰 │ 한국인들이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가서 미얀마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면 많은 학생들이 지지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줘요. 이걸 미얀마에 전하면 큰 힘이 됩니다.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많은 힘이 됩니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도 좋고, 세손가락 경례 사진을 찍어 올려주고, 응원 메시지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김민철 │ 미얀마는 공무원에게 주택이 보장되어 있는데, 정년 후에도 계속 살 수 있어요. 군부에 반대하면 집에서 쫓겨나게 되니, 주택지원도 필요해서 후원금이 여기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항이 길어지면 난민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태국 근처에 난민 수용소가 세워지게 되면 그 비용도 필요하고요. 후원금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리라 보입니다.

헤이만 │ 처음에는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피난민 지원금, 시위대 보호장비 구입, 의료비 등에 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미얀마의 의료수준이 한국에 비해서는 덜 발달해 있어서 쿠데타가 수습된 이후에는 쿠데타 때 입은 트라우마 치료에 한국의료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MC노 │ 미얀마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철 │ 제가 헤이만씨를 초청해서 특강을 개최했는데, 특강 제목을 ‘미얀마에 귀 기울이다’로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1980년 광주로 돌아가서 봉쇄된 도시에 고립된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 밖에서 그런 소식들을 계속 알려주고 연대의 마음을 전했더라면 조금은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지금 미얀마는 길어질 싸움을 하고 있고 너무나 힘들고 지치기에 낙관적 전망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민들이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며 이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해주었으면 합니다.

MC노 │ 세손가락 경례를 개인 SNS에 올려주어도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바랍니다.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목, 2021/06/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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