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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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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admin | 화, 2020/06/23- 21:41

[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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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개발자들

인터뷰 김수빈 회원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의 개발자인 고용진(왼쪽)과 안겨레(오른쪽)

 

100년 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표도 가족을 지켜 내겠다는 책임감도 제국주의와 반민족행위자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봉건적 속박에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겠다는 처절함도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저마다 ‘가슴 뜨거워지는 한 순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가슴엔 과연 어떤 ‘한순간’이자리 잡고 있을까? 그 뜨거움의 원천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한순간을 만났고, 이에 두려움도 무릅쓰고 한 발짝 내디딘 청년들이 있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을 개발한 고용성 개발자와 안겨레 개발자가 바로 그들이다. 10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난세의 영웅’ 개발자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문: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겨레 : 안녕하세요, 한림대 법학과 재학 중인 안겨레입니다. 한림대학교 내 창업교육센터에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용성 : 안녕하세요, 한림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용성입니다. ‘난세의 영웅’ 개발과 저희 회사 경영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은 어떤 게임인가요?
안겨레 : ‘난세의 영웅’은 선사시대부터 건국 이후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사 RPG입니다. 주인공은 3명이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저희 게임의 주요 콘텐츠 중에 하나가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NPC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데요, NPC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게임 진행에 관한 정보를 고루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에 담긴 한국사 정보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입니다. 수능은 물론, 한국사능력검정 1급, 국가직 공무원, 지방직 공무원 등의 시험 출제율 최상위에 뽑힌 것만을 골라서 게임에 넣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철학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명분이 왜 필요한가? 등등의 요소가 단순히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철학적 접근이 어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접근성이 높은 게임매체를 통해 조금 더 생생하게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문 : 원래부터 게임 개발에 흥미가 많았나요?
고용성 : 저희는 중학교 동창인데요, 그때 같이 재밌게 만들던 게임 제작 프로그램이 군대제대 후 최신화로 업데이트된 걸 알고 다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때 당시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단 게임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겨레 : 저도 처음에 게임 개발보다 게임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수학을 포기하고 문과에 진학한 상태라 그 생각을 접고 공부에만 매진했죠.

문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한국사 게임을 만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저는 중국의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 흥미가 생겨 <삼국지>를 읽었고, 나중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사를 삼국지보다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제대 후에 노량진에서 검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고, 제일 자신 있는 전략과목이 되었습니다. 공부가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 예전에 즐겁게 했던 삼국지 게임이 떠올라 ‘한국사 게임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 매우 의아했어요. ‘삼국지 게임도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게임은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삼국지 게임에 빠져 삼국지를 섭렵하게 됐듯이, 한국사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한국사에 빠지는 세상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검찰직 시험을 포기하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죠. 

문 : 대전환이 일어났네요. 진로를 변경했을 때, 고민이 많이 되지 않았나요?
안겨레 : 저는 법학과, 용성이는 경영학과다 보니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 못했어요. 옛날 중학교 때 장난스레 가지고 놀던 게임 툴만으로는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진로를 변경해도 괜찮을까’란 고민과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문과생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시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고, 제 마음은 마른 낙엽에 옮겨 붙은 불씨처럼 계속 커져만 갔어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 속 영웅들, 역사 속 위인들은 도전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건 배우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겨 노량진에서 나왔습니다.

문 : 고용성 님은 어떤 계기로 안겨레 님과 함께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나요?
고용성 : 겨레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저는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그 음식점 대표여서 제대 후에 음식을 배우고, 그쪽 계열로 창업하려 했는데 겨레가 함께 게임을 개발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걸 접고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음식점을 하면서 2년간 번 돈을 ‘난세의 영웅’ 초기 창업 자금에 보탰습니다.

문 : 창업 자금이 꽤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과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요?
고용성 : 원래 개발 자금으로 1년 반 정도는 지출하리라 예상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점도 많고, 처음이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대 학교 창업지원센터에서 심사를 거쳐 창업 지원금을 받아 충당해 나갔습니다.

문 : 게임은 두 분이서 만드신 건가요?
안겨레 : 처음 출시했을 때는 저희 둘이서만 만들었고, 후에 리메이크할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한테 외주를 맡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래머도 저희 게임팬이었는데,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돕겠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외주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엔진이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서 자체적인 개발이 가능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문 : 한국사가 워낙 방대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텐데요.
안겨레 : 네, 사실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써봤는데 다행히 옛날에 책을 읽은 경험이 많아서 초반에는 잘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창작의 고통이 심하게 와서 글이 안 써지면 개발업무를 하고, 그러다가 스토리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글을 쓰는 패턴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료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었나요?
안겨레 : 한국사 내용은 주로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것들로만 구성했습니다. 게임 안에서도 캐릭터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붉은 자막은 한국사 시험 관련, 푸른 자막은 게임 진행 관련정보로 구분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기 싫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반대로 한국사가 좋아서 왔는데 시험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국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등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 게임 스토리는 어느 시대까지 진행되나요?
안겨레 : 현재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미 나온 상태고, 올해 12월에 조선 후기편이 나옵니다. 앞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편까지 더 나올 예정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2021년까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한국사 시험 범위 내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한국사 시험에 높은 출제 빈도수 위주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 팬카페의 팬들이 빨리 다음 장을 달라고 하셔서 (웃음) ‘7장’인 조선 후기까지를 후딱 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1기’, 개화기부터는 ‘2기’로 나누어 약간의 기간을 두고 출시하려 합니다. 일단 전체를 다 만들고, 구글 스토어 말고도 다른 플랫폼에 출시해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 : 난세의 영웅 팬카페의 연령 분포는 어떤가요?
안겨레 : 10대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10대 순입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난세의 영웅’ 팬들이 함께 답사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대가 가장 많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게임 홍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안겨레 : 사실 저희가 조선 후기편 개발로 인해 지금은 홍보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편이 완성된 후에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하는 ‘인디크래프트’에 저희가 선정되어서 그쪽에서 저희 홍보를 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구글피처드’에서도 홍보가 이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한림대에서도 홍보 지원을 해주기로 하였고요.

문 : 게임 타이틀을 왜 ‘난세의 영웅’으로 정하게 됐나요?
안겨레 : 제 개인적인 역사인식인데요, 평범한 사람도 난세를 만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숨지 않고 뛰쳐나온 경험이 많죠. 그런 위기 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영웅’이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영웅이 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난세’란 개념은 더 포괄적이죠. 그래서 더 다양한 방면에서영웅이 등장할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타이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 게임이 다 완성되고 나면, 본인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계획들이 있나요?
안겨레 : 다 완성되고 나면, 일단 게임을 깔끔하게 한 번 더 다듬고 홍보 쪽으로 매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엔 계속 게임업계에 종사하게 될지, 아니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애플리케이션 등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고용성 : 저는 ‘난세의 영웅’이 완성되고 나면 외전 버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습니다.

문 : 처음에 두 분께서 한국사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우리 역사콘텐츠의 부재를 절감해서 두 팔 걷어붙였지만, 일이 진행되어갈수록 부담감과 무게감이 가중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난관들을 어떻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사실 한국사 게임이 없습니다. 국내 내수시장이 작아 돈이 안됩니다. 중견기업 정도 되면 이런 게임은 안 한다고 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요, 또 두 명만으로 만들기엔 엄청 버거운 내용이라서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도 이런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 예상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독점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죠.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은 ‘미래형 교과서다’라고 할 만큼 저희 게임이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어서 학원가에서도 원장님들이 저희 게임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정말 많이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건 유일하게 저희가 누릴 수 있는 ‘빈집’이고, 그 생각으로 계속해 오다 보니 지금은 조금 숨통이 트인 상황입니다. 큰 난관들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보란 듯이 멋진 한국사 게임을 출시해 주신 고용성 님, 안겨레 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회영 선생’이라 말씀하신 안겨레 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회영 형제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안겨레 님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데 ‘그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에게 이 두 분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더불어 한국사 게임 콘텐츠의 부재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하며 정면 돌파한 두 분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난세 속에 온 국민이 잠재적 위인’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게임 ‘난세의 영웅’을 통해 우리역사를 기억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0/11/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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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4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올해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5·16쿠데타로 인한 좌절, 4월혁명이 한국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등 4월혁명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원래 4월 19일에 개막하려 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9월 25일에야 겨우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구성은 제1부 우상의 시대 : ‘국부’가 된 독재자,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 제3부 사월 그날 이후,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개의 패널과 이승만 관련 〈대한뉴스〉 영상, 신동엽 시인, 여중생이 죽기 전 남긴 편지 등 4개 영상, 그리고 4월혁명 관련 서적과 당시 격문, 음반, 영화포스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자료가 다수이나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아이엠피터
tv, 연세대학교박물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한상언영화연구소로부터 귀중한 자료의 전시 협찬을 받았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전시회 지상중계에서는 각 주제별 전시회 현장 사진과 주요 실물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며> 자유당, 1956.4. 근현대사기념관 소장
대통령후보 이승만박사 선거사무장 이재학, 부통령후보 이기붕선생 선거사무장 박영출, 자유당중앙위원 일동 명의의 자유당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추대 홍보물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5일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5·15 정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다.

① <4·19> 학생운동기 – 아혼록 1960.2.28.~4.2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4월혁명에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② <피어린 4월의 증언> 1960. 부산 거주 대학생의 일기로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4월혁명 양상을 전해준다.

③ <영한대역-4월의 영웅들>, 일신사, 1960. ‘세계의 눈에 비친-한국 자유혁명의 산 기록’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영미권 유수 언론이 이승만의 독재와 4월혁명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다룬 사설 칼럼 보도 등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④ <혁명재판 공판기> 1960.8. 혁명재판 법정 녹음을 녹취한 공판기록. 부정선거관리·모의·지령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자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 전성천선거법위반사건 순으로 편제되어 있다.

<격! 참의원 의원의 망동을 규탄한다> 사단법인 사월혁명단, 1961.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격! 삼천만은 사월 혁명 영령의 명복을 빌자> 월요회, 1961.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① 〈오발탄〉 1961년 4월 13일 개봉 이범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이다. 전후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두운 화면과 우울한 정조를 통해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이다. 사월혁명이 가져온 대표적 영화로 5·16쿠데타 이후 한때 상영 중지되었다.

② 〈삼등과장〉 1961년 5월 4일 개봉 삼등과장의 아들인 영구는 사월혁명을 주도한 대학생 계층으로 자부심이 있으나 놀고먹기를 좋아하며 여자친구에게 푸념만 하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사월혁명이 ‘실패’로 자인되고 있던 1961년 초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③ 〈잘돼갑니다〉 1968년 작, 1989년 9월 9일 개봉 경무대 이발사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말로를 묘사한 영화이다. 한운사 작 동명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1968년 영화로 만들었다.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 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가서야 해금되었다.

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유성기음반, 도미도레코드, 1960.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소장(이하 동일)
② 〈사월의 깃발〉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③ 〈아 4·19〉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④ 〈너를 찾아 서울 왔다〉 수록 <송운선 작곡집>, 세광출판사, 1961. 송운선은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 말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혁명 관련 대중가요로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못 잊을 4·19〉, 〈광명의 4·19〉 등을 만들었다. 〈너를 찾아 서울 왔다〉는 혁명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광명의 4·19〉 수록 노래책, 세광출판사, 1961.
⑥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유성기음반, 아세아레코드, 1960.

 

① <항쟁의 불길>,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정론, 시, 소설, 희곡을 실은 북한의 작품집
② <조선> 1960년 제5호, 조선화보사. 4월혁명 소식을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보도한 북한의 대외선전용 화보

③ <남조선 학생운동>,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4월혁명을 비롯해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각종 학생운동을 소개한 북한 도서

④ 〈항쟁의 서곡〉 영화 스틸사진, 조선예술영화제작소 출품, 창춘(長春)영화제작소 더빙, 중국영화배급사 배급, 1960. 4월혁명 직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항쟁의 서곡〉 스틸 사진. 강홍식이 연출을 맡았으며 심영, 김연실 등 유명 월북영화인들이 출연했다.

수, 2020/11/1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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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개최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독립전쟁 선
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이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독립전쟁선포 100주년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전쟁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본격화한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에서 기조발제와 주제 발표 및 토론, Ⅱ부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독립전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제1주제 ‘1910년대 유교계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 만주에 정착한 유림들과 신흥무관학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교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에 대해 다루었다. 토론자로 나선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유교계가 어느 정도로 관계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현황 분석과 독립운동’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구축한 신흥무관학교 인명 DB를 토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활동과 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숭실대학교 황민호교수는 신흥
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436명의 인물들을 직접관련 단체 9개와 간접관련 단체 5개로 구분하고 중요 인물들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동시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졸업 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다음으로 한성민 대전대학교 교수가 제3주제인 ‘일본의 간도출병 배경 검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한 ‘간도 출병’의 배경을 당시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교수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전체적인 배경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연구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주제는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청산리 전역과 절반의 작전’으로 발표하였다.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과 일본군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지도를 활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토론자 동덕여자대학교 이승희 교수는 <吉長日報>라고 하는 중국신문을 검토대상으로 삼고 청산리 전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활동의 양상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규명한 점과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투쟁과 일제 침략정책의 상관관계를 도출해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Ⅱ부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관계자와 예약 참석자 50명만 제한적으로 참석하여 진행되었지만 학술회의의 모든 진행 과정을 촬영하여 편집영상을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2/0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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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코로나 시대, 한일 시민들이 함께 외친
“야스쿠니 NO!”―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려

10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을 폭로하고,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현황을 점검하며, 국제사회에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려왔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올해는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으로 마련되었다.

 


올해는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맞이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함께 해온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 원고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변호인단, 연구자, 활동가, 지원단, 시민 등이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가졌다. 특히 올해 국제회의를 준비하며 온라인 화상회의의 특징을 살려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일반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김영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 이희자공동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록 직접 만
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강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모든 이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모임’ 사무국장은 스가 정권의 출범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망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아사노 후미오(浅野史生),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코로나로 지연되고 있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소송전략에 대해 원고 유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시간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제안자이기도 한 서승 공동대표(우석대 석좌교수)는 15년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캠페인,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연구주체의 양성, 유럽에서의 국제회의 개최 등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했다. 한편, 평생 동안 모아온 야스쿠니 관련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기도 한 즈시 미노루(辻子実)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야스쿠니반대를 위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얻은 성과를 소개하고 국제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 패널토론은 야스쿠니반대운동에 참여한 청년세대를 대표하여 권다정(청년시대여행) 활동가와 도쿄촛불행동의 사무국으로 활약해 온 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씨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한 감상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 사무국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영채, 김영환 사무국장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의 성과와 한계, 과제와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국제회의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최낙훈, 이명구, 박진부, 박남순, 동정남, 박매자, 이병순, 신명옥 어르신들께서 함께 하여 일본의 변호단, 지원단 여러분들과 화상으로나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를 함께 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응원의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회의장 벽면에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원고로 참여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원고들(김희종, 임복순, 고인형, 임서운, 윤옥중, 남영주, 최두용, 유충현, 백귀례, 남영주)의 사진으로 채워진 현수막이 걸려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NO!”를 힘차게 외쳤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12/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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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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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교사 직무연수 운영,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무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를 주관했다. 이번 연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 자료들 중에서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됐다.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5차에 걸쳐 ‘니시키
에’, ‘일출신문조선쌍육’, ‘애국반회보’ 등 일제의 선전 자료와 친일,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10월 27일(화) 진행된 이번 연수의 첫 프로그램, 「니시키에로 본 청일전쟁과 지워진 역사」에서는 강효숙 원광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니시키에(錦絵)는 근세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모태로 탄생한 회화 장르로,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유행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취시키고 선전 미술로 활용되는 등 어두운 양면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강효숙 교수는 니시키에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격하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한 ‘청일전쟁’이 니시키에를 통해 다시금 조망됐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들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방문, 「조선안성도격전지도朝鮮安城渡激戰之圖」 등 청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관람했다. 아울러 박물관은 강연장 내에도 10여점의 니시키에를 별도 전시하여 수강생들의 학습과 체험을 도왔다. 이러한 실물 사료 체험에 대해 수강생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때로는 설명을 청하기도 하며 높은 열의를 보였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어질 연수에서도 사료를 실제로 감상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편성할 예정이다.
올해 직무연수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2주차 「일출신문 조선쌍육으로 본 일제의 강제병합과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는 놀이, 삽화 속에 담긴 일제의 침략 의도를 분석해본다. 3주차 「친일 관련 사료와 디지털아카이브 활용방법」에서는 방대한 일제강점기 사료군에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다룰 예정이다. 제4강과 5강에서는 애국반 회보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사진을 통해 분석해보며 일제 지배 정책의 기만성과 식민지 폭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 자료와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활용하여 수강생들의 학습 성취를 돕는다. 한편, 이번 직무연수와 관련된 내용은 연수 종료 이후 유튜브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목, 2020/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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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과학도의 꿈을 접고 평화통일과 인권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임재근 후원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이번 달에 인터뷰하는 대전지부의 임재근 후원회원은 통일뉴스와 오마이뉴스 기자로서 대전지역의 여러 현안에 대해 적극 발언해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6년 김창룡 묘 이장 추진 시민연대를 구성할 때 민족문제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2016년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지부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으며 2019년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등 우리 주변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들을 다니면서 평화기행을 안내하고 있다. 2019년 여름 산내 골령골에서 해설을 하는 장면.

 

임재근 회원은 2016~17년 촛불항쟁 시 61차례 131일간의 대전촛불시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며 기록사진을 찍어 <대전대전(大田大戰) 봄으로 간 촛불>(대장간, 2017)을 펴냈다. 2019년 8월에는 한국전쟁이 대전지역에 남긴 상처들을 증거하는 사진 27점을 전시한 임재근 사진특별전 〈콘크리트 기억〉을 개최했고, 같은해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는 제18회 민주언론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북한대학원대학교, 2020)라는 논문으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8월에 한국전쟁·대전전투 70년 기록전 〈전쟁기억,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열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문제를 사회 이슈로 부각시켰다. 서면으로 진행된 임재근 후원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보았다.

 

문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에 있는 비영리민간단체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전지역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의 평화통일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소중함과 통일의 필요성을 실내 강연으로 진행하기도 하구요.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등 우리 주변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들을 다니면서 평화기행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영상과 사진을 통해서도 평화통일과 인권,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의 꿈은 과학도였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카이스트에 진학했는데, 지금은 그 꿈을 잠시 뒤로 미루고 통일교육을 통해 통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시대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대학 시절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면 항일운동에 나서는 것이 시대적 요구였다면, 분단시대에는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며 과학도의 꿈은 통일된 나라에서 이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문 : 민간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답 : 민간인 학살 사건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과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예요. 2015년 2월 말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민간 차원의 유해발굴이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해 진주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한 후 두 번째로 선정된 지역이 제가 활동하고 있던 대전의 산내 골령골이었습니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를 비롯한 대전의 여러 단체들도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유해발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유해발굴 지원팀에 결합해 유해발굴에 동참했습니다. 때마침 그때가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써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유해발굴에 동참하면서 논문의 주제를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로 잡고, 논문을 쓰게 되면서 더 본격적으로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한 활동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화기행 해설을 다니면서 틈틈이 찍은 사진을 모아 <콘크리트 기억>이란 제목으로 노근리평화기념관과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사진전을 진행했다. 2019년 테미오래 6호 관사에서 진행한 사진전 전시장의 한 장면.

 

문 : 옛 대전형무소 사진전을 개최하셨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주요 사업 중 하나가 ‘평화기행’이에요. DMZ 평화기행이나 제주 평화기행도 다니지만, 저희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나 인근 지역으로 더 자주 평화기행을 다녔습니다. 대전에서는 주로 대전형무소 터와 산내 골령골을 찾았구요. 대전 인근의 충북 영동 노근리로도 평화기행을 자주 다녀왔습니다. 평화기행을 다녀오고, 준비하면서 그 현장에서 많은 사진들을 찍곤 했었는데요. 2019년에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서 사진전을 열자고 제의해 사진전을 진행했습니다. ‘콘크리트 기억’이란 제목을 단 사진전의 주요 키워드는 ‘전쟁’, ‘학살’, ‘감옥’이었구요. 구체적인 장소는 ‘노근리 쌍굴다리’,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그리고 ‘옛 대전형무소 터’였습니다. 27점의 사진을 모아 7월 2일부터 2달 간 노근리평화기념관 전시실에서 전시를 진행했고, 9월부터는 한 달여 간 대전으로 가져와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전시를 이어갔습니다.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시작한 사진전을 대전을 찍고, 올해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서울의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도 하고 싶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아쉽게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문 : 산내 학살에 대해 독자 분들에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해 보도연맹원 등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가량이 무참히 학살당해 암매장된 사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전 국토가 무덤이라 할 만하지만, 그 중에서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은 피해 규모와 성격에 있어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입니다.
희생자들은 대전 지역에만 국한된 것에 아니라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관련자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암매장된 구덩이는 길이가 작게는 20~30m에서, 50m, 100m, 최장 200여 m에 이르기까지 무척 깁니다. 이 구덩이들을 모두 이으면 1km에 달할 것으로 보여 대전 산내 골령골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최근 산내 골령골에서는 사건 발생 70년 만에 대규모 유해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9월 21일부터 대략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 작업을 통해 약 80평 공간에서 유해 200여구가 발굴되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향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인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조성될 예정입니다.

 

지난 2019년 봄에 찍은 산내 골령골의 모습. “흩날리는 벚꽃 잎이 산내 골령골 마당 위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분홍 꽃잎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수천여 명의 넋이라도 되는 듯 참으로 슬픈 봄날이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과 향후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답 : 제 기억으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6년 대전지역에서 대전지부가 주축이 되어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행위자 김창룡 묘 이장 추진 시민연대’를 구성할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김창룡 등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민족반역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매년 현충일에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함께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후과(後果)들이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시급합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해방된 조국은 분단된 조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통일을 이루었을 때에야만 온전한 해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전지부에서 항상 건배사로 ‘친일청산, 민족통일’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요, 이 구호를 완수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올해 한국전쟁·대전전투 70년을 맞아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기록전 ‘전쟁기억,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전시했다. 지난 10월 8일에 전시회 오프닝 강연을 옛 충남도지사공관 야외정원에서 진행했다.

 

문 : 그 밖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답 :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를 뜻깊게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미루고 있던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라는 제목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논문을 통해 대전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본 한국전쟁 기억재현의 시선들이 군인들에게 맞추어 있었고, 호전적이고, 적대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전쟁은 우리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쟁은 승패를 떠나 양측 모두에게 심대한 인명피해를 주었습니다. 전투에 나선 군인들보다 자신을 보호할 방어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민간인들은 피아(彼我)의 학살 속에, 폭
격 속에, 그리고 피란과 굶주림 속에 죽어가면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다짐하는 호전적 전쟁기억을 통해서는 전쟁을 미리 방지할 수 없고, 오랫동안 호전적, 적대적 입장에서 전쟁기억에 노출된 사회에서는 전쟁에 친화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전쟁기억 재현은 오랫동안 배제됐던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기반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전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국가를 위한 죽음’과 ‘국가에 의한 죽음’이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대전의 서북쪽 유성구 갑동에는 국립대전현충원이 위치해 있고, 그 반대 남동쪽인 동구 낭월동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골령골이 있습니다. 현충원은 ‘국가를 위한 죽음’의 상징이고, 골령골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상징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전쟁기억은 ‘국가를 위한 죽음’에 너무 치우쳐 있고, ‘국가에 의한 죽음’은 외면당하고, 배제되어 왔습니다. ‘국가에 의한 죽음’에 대해 철저히 성찰하고, 교훈을 찾을 때에만 비극을 재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국가에 의한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전쟁기억을 평화를 위한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목, 2020/12/0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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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4 ]

용산 보병 제78연대, 조선의 수부 경성을 수비하는 주력부대
이 부대를 거쳐간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들은 누구누구였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 사람으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은 도합 40명이나 되지 못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장기형(張璣衡, 26) 씨는 지금 보병소위로 금택(金澤, 카나자와) 제9사단 제35연대 제1중대부(附)로 현금 용산주차군 안에 있더라. 씨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처음에 경성무관학교를 다니었으며 그 후에 일본 동경에 들어가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를 졸업하고 인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금택 제9사단에 입대하였으며 동시에 주차군의 장교로 작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35연대에 장 소위 한 사람밖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없으나 제27기에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7명과 전기에 졸업한 17명의 졸업생은 다 각 연대에 배치되어 입대케 하였더라. (하략)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 졸업생으로 제9사단 보병 제35연대(카나자와 주둔)에 근무했던 장기형(張璣衡) 보병 중위의 인물사진이다. 그가 소속된 보병 제35연대가 조선주차군 교대병력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그 역시 뜻하지 않게 초급장교 시절을 용산 보병영에서 보내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것은 <매일신보> 191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연대(龍山聯隊)의 장소위(張少尉), 그의 당당한 풍채, 그의 유쾌한 생활」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기형 보병소위는 원래 일본 카나자와에 근거를 둔 제9사단 제35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가 때마침 ‘조선수비(朝鮮守備, 1914.4~1916.4)’를 위해 조선주차군의 교대병력으로 파견된 상태였으므로 그 역시 덩달아 1915년 6월 이후 1년가량 용산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용산 지역 일본군 병영지의 보병연대(步兵聯隊) 주둔 연혁

장기형 소위가 근무처로 삼았던 보병 제35연대가 있던 자리는 1916년 4월에 조선주둔 2개 상주사단의 하나로 제19사단이 먼저 창설되면서 이때 예하부대로 함께 만들어진 보병 제78연대의 주둔지로 전환된다. 이곳은 1906년 이후 본격적으로 건설된 용산지역의 일본군 병영지 안에서 나중에 보병 제79연대가 추가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단 하나의 보병영(步兵營)으로 존재했던 구역이기도 하다.
한국주차군경리부(韓國駐箚軍經理部)에서 펴낸 <조선주차군영구병영, 관아급숙사건축경과개요(朝鮮駐箚軍永久兵營, 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1914)에 정리된 내역에 따르면, 이곳에는 1908년 준공 당시 보병연대(대대)본부 청사 1개동과 병사(兵舍) 및 부속가(附屬家) 6개동의 병영시설이 자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동(別棟) 부속건물(위병소, 영창, 하사집회소, 장교집회소 등) 22개동이 있었으며, 이 주변에 보병연대 장교합동숙사(將校合同宿舍) 4개동과 준사관하사합동숙사(準士官下士合同宿舍) 1개동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었다.

1908년 보병영 완공 당시의 병사 및 부속건물 구성 내역

1908년에 완공된 용산보병영(龍山步兵營) 일대의 전경을 남쪽 방향으로 담아낸 사진엽서이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것이 부대 정문(正門)이고, 오른쪽 아래에 길게 보이는 건물이 ‘보병연대본부 및 대대본부’ 청사이다. 그 뒤쪽에 연병장 일대와 6개동에 달하는 병사(兵舍)가 2열로 배치된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개인소장자료)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에 걸쳐 다리를 놓은 지점에 북면(北面)하여 설치한 용산보병영의 정문(正門)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대문 기둥에 ‘보병 제31연대’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제8사
단이 조선주차군으로 파견되어 있을 당시(1912.4~1914.2)에 촬영된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소장자료)

 

부대의 정문(正門)은 용산병영지의 중간을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는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 임진왜란 때의 왜군장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하천 이름)’를 남쪽으로 건너는 지점 앞에 북향(北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들어서면 먼저 연병장(練兵場)이 나타나고 그 뒤에 남쪽으로 병사(兵舍)가 2열 배치의 형태로 자리하였다.

 

3·1만세 시위 당시인 1919년 5월에 작성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에 표시된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경성 및 인천포함 경기북부지역)이다. 특히 이 지도의 여백에는 “경성 및 용산은 3대대로써 수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대목에서 상주사단 편제에 있어서 보병 제78연대의 존재가치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京城)을 수비하는 주력부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 제작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 1919년 5월 20일 현재)>(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라는 군사지도를 보면, 보병 제39여단(평양 소재)의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衛戍地域)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일대에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병 제78연대는 조선을 수비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일제가 벌이는 잇따른 침략전쟁마다 이른바 ‘출정부대(出征部隊)’로 거듭 동원된 내력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모리 모토 토미조(森本富藏)가 편찬한 <황군연대기사진첩(皇軍聯隊旗寫眞帖)>(1932)이란 자료를
보면, ‘보병 제78연대’의 항목에 군기약력(軍旗略歷)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위수지(衛戍地) : 조선 용산(朝鮮 竜山)
소속(所屬) : 용산 제20사단(竜山 第二十師團)
一. 군기친수(軍旗親授) : 대정(大正) 5년(1916년) 4월 18일
一. 압록강안지방(鴨綠江岸地方)에 출동(出動) : 자(自) 소화(昭和) 3년(1928년) 5월 27일 지(至) 동년(同年) 7월 18일
一.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참가(參加) : 자(自) 소화(昭和) 6년(1931년) 9월 19일 지(至)목하(目下) 〇〇중(中)
보병 제78연대 잔류대(殘留隊) 부관(副官) 오쿠와 시게오(大桑茂男) 씨 보고

이 시기 만주사변에 참가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용산 보병 제78연대 구내에 잔존했던 ‘충혼비(忠魂碑, 1935.11.18 제막)’였다. 이 비석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 돈을 걷어 출정중에 죽은 자신들의 전우를 위해 장교집회소(將校集會所) 앞에 세운 것이며, 당초 만주사변 4주년(1935년 9월 18일)을 앞두고 이 날짜에 맞춰 제막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두 달이 지연되어 완공된 것으로 드러난다.

 

<조선신문>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 보병 제78연대의 ‘만주사변 충혼비’ 제막식 장면이다. 엉뚱하게 이 기념물은 해방 이후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재활용되다가 2017년 5월에 평택미군기지로 이전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기념물이 제막된 날의 풍경에 대해서는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호국(護國)의 영령(英靈)을 달래려는 전우(戰友)의 미거(美擧) 결실을 맺으며, 제78연대에 충혼비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에 재용산(在龍山) 보병 제78연대의 장병으로서 출정했던 관계자가 그 전우 중에 이 사변에서 순직(殉職)했던 키누가사 소좌(衣笠 少佐) 외 45용사(勇士)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며 위령(慰靈)하고자 건립했던 보병 제78연대 관계 장사(將士)의 위령비 제막식은 동(同) 사건의 돌발일(突發日)에 맞춰 18일 오전 11시 반부터 동 연대 영정(同聯隊 營庭)에서 거행되었다. 식장(式場)은 영문(營門) 안쪽에 남면(南面)하여 설치되어 수불(修祓), 강신(降神), 헌찬(獻饌) 등 관례대로 엄숙리에 진행되었으며, 제주(祭主)의 축사(祝詞) 후에 햐쿠타케 연대장(百武 聯隊長)의 제문낭독(祭文朗讀), 이마무라 제40여단장(今村 第四十旅團長)의 조문낭독(弔文朗讀)이 있었고, 유족(遺族)인 고(故) 키시하
라 상등병(岸原 上等兵)의 엄부(嚴父)와 고(故) 코마츠 군조(小松 軍曹) 모당(母堂)의 손에 의해 제막되는 동시에 방구(放鳩), 마지막으로 재주(齋主), 제주(祭主) 옥관(玉串)을 바치고 폐식(閉式)했다. 이날 유족은 고(故) 히라타 중위(平田 中尉) 유족과 기타 20여 명이며, 별도로 조선군(朝鮮軍) 대표, 사단(師團) 대표, 기타 관민(官民)과 아울러 군부관계자(軍部關係者) 100여 명이 참렬(參列)하였고, 동 연대(同聯隊) 전병몰자(戰病歿者)는 다음과 같다. (이하 개별 명단 부분은 인용 생략)

 

그런데 그 이후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때에도 출동부대의 명단에서 보병 제78연대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의 거듭된 출정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친일군인’으로 맹활약(?)한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반도인(半島人)에 최초(最初) 수훈갑(殊勳甲), 가네야마(金山) 부대장의 영예, 청사(靑史)에 찬연(燦然)한 북지전야(北支戰野)의 무훈(武勳)」 제하의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대동아전쟁하 전첩에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2일 제24회 지나사변 생존자 논공행상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는 지나사변 직후 대륙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의 부대장 금산석원 중좌(金山錫源 中佐, 구명 김석원)가 반도인으로서는 처음인 수훈갑 공삼급 중수장(殊勳甲 功三級 中綬章)의 은명을 배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떨치었다. 김석원 중좌는 소화 12년(1937년) 7월 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천안병단 남운부대(川岸兵團南雲部隊) 대장으로 용약 북지(北支)에 출정하여 유명한 남원낭방(南苑廊坊)의 전투를 비롯하여 태원(太原), 운성(運城)의 공략전에 이르는 전후 1년 반 동안 포연탄우를 무릅쓰며 북지의 각 전선에서 과감히 싸워 혁혁한 무훈을 세웠고 남원의 격전에서는 명예의 부상까지 입었으나 여기에 굴치 않고 다시 제일선에 나아가 적군을 철저히 섬멸하였다. 더욱이 산서성 영석(山西省 靈石) 부근의 격전에서는 과병으로 잘 적군의 대부대를 격멸한 위훈을 세워 감장(感狀)까지 받고 김석원 부대의 용맹을 떨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중좌는 부내 재동(齋洞) 출생으로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
교(陸軍士官學校, 제27기)를 거쳐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를 졸업한 후에는 중위(中尉) 시대부터 중좌가 되기까지 15년 동안 조선 제2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동안 만주사변 당시에는 만주에 출정하여 공사(功四)의 영예를 받자왔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 북지에서 개선하였다가 소화 16년(1941년) 3월 다시 북지〇〇방면에 출동하여 방금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정신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김 중좌는 근엄한 무인이고 가정은 순내지식인 가정으로서 유명한데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반도민중의 황국신민화와 풍속의 개선, 문화향상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한편 성남(城南) 중학을 설립하고 반도청년의 연성에 노력하였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조선 제22부대’라는 것은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를 가리키는 통칭호(通稱號)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 ‘15년’ 동안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하였다고 적어놓은 대목은 사실관계가 약간 다른 듯하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김석원 부대장에 대한 ‘수훈갑’ 논공행상 관련기사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김석원 중좌’의 모습이고, 왼쪽 아래가 ‘처 서달순, 장남 김영철, 3남 김영국’의 모습이다. 아들들의 이름에 ‘영(泳)’이 들어간 것은 박영효(朴泳孝)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산 보병 제78연대에서 발행한 <만주사변출동기념사진첩> (1932)에 수록된 김석원 대위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의 직책이 ‘제1보병 포대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39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매일신보사 주최 ‘김석원 소좌 강연회(경성부민관)’ 안내광고이다. 중일전쟁 당시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무공을 세우고 귀환한 그는 이 행사를 계기로 전국의 군청 소재지를 거의 빠짐없이 돌면서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신생활운동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한동안 지속하였다.

 

김석원은 앞에서 소개한 장기형 소위와 일본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함께 졸업하였으며, 이때 그의 첫 부임지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에 주둔한 보병 제61연대였다. 그러다가 중위의 신분으로 용산에 주둔한 보병 제78연대로 전속되어 온 것이 1919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원이 남긴 <노병(老兵)의 한(恨)>(육법사, 1977)이라는 자서전에는 용산으로 전출(轉出)을 오게 된 과정이 두어 쪽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와카야마 보병 제61연대에 근무할 당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최고지휘관인 제4사단장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중장과 안면이 생겼고, 때마침 그가 제9대 조선군사령관(재직 1918.7.24~1920.8.16)으로 옮겨가게 되자 휴가차 귀향(歸鄕)할 때를 틈타 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선으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김석원 중위는 1940년 1월에 후쿠야마(福山)에 주둔한 보병 제42연대로 전속(轉屬)될 때까지 무려 20년이 넘은 긴 세월을 오롯이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라고 해서 자신의 근무지가 반드시 조선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 상황에서, 더구나 이토록 장기간 동일한 부대에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사례에 속했다. 그러니까 김석원이라는 존재는 용산의 주력부대인 ‘보병 제78연대’에서 글자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터줏대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위(1925년 8월)를 거쳐 소좌(1934년 3월)에서 중좌(1938년 9월)로 거듭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 출정하여 거듭 자신의 무공(武功)을 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친일군인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자서전을 훑어보는 와중에 그가 느지막이 이러한 책을 남기는 뜻을 밝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어온 생애가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무슨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남이 본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80여 년 간의 뒤를 돌아다보면 아무래도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훨씬 많은 것 같고 남에게 환영받을 일보다는 오히려 남에게 환영받지 못할 일이 더 많이 한 것 같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시대에 오래도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일본군인의 노릇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큰 불명예로 여긴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이만한 정도의 언급이라도 남긴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를 일컬어 친일행적을 참회한 인물로 받아들여야 할는지는 여전히 판단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목, 2020/12/03-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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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이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강좌는 11월 28일에서 12월 13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1강과 2강 진행 이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3강에서 6강은 온라인 수강만으로 변경되었다. 강의는 촬영 후 편집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대전대학교 한성민 교수의 <3개의 총탄이 만든 역사, 안중근>이란 주제로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나?’라는 물음과 함께 당시 이토의 ‘만주시찰 목적’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은 <끝나지 않은 3·1운동의 전율, 강우규> 주제로 춘천교육대학의 김정인 교수가 강의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강우규의사의 의거와 함께 3·1운동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줌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였다. 첫 주 강의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강사와 현장참여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상황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3강에서 6강은 수강생 없이 온라인 수강을 위한 강의 촬영으로 진행되었다. 3강 <위대한희생 빛나는 투쟁, 의열단>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의하였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 특히 1923년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황옥경부폭탄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시현과 밀정 황옥을 통해 의열단의 활동과 조선총독부의 밀정 운용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또한 4강 <윤봉길, 한국과 중국을 잇는 폭탄을 던지다>는 남기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5강 <여성, 광복군에 들어가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승훈 교수가 강의하였다.
6강 <재일조선인의 삶과 저항, 이봉창>은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김광열 교수가 진행하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실태, 민족차별과 임금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정리하고 일본거주 조선인 노동자였던 이봉창이 민족차별에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요약하여 이해도를 높여준 강의였다.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은 1강에서 6강 모두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와 민족문제연구소, 서울시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12월 말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현장과 온라인 수강으로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역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수, 2020/12/30-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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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발행을 시작으로 항일음악회 개최(2011년, 2017년, 2018년) 등 독립군가 복원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가운데 YTN 라디오가 경기도 후원으로 진행 중인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자문하고 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방송할 예정으로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선친을 회상하여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이은지 YTN PD가 담당하고 있다. 노래는 연구소 누리집에서 들을 수 있으며 현재까지 제작된 노래는 아래와 같다.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2편 : 안중근 옥중가(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3편 : 신흥무관학교 교가(이항증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4편 : 압록강 행진곡(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5편 : 격검가(차영조 동암 차리석 선생 아들), 6편 : 새야새야 파랑새야(정남기 동학농민군 정백현 선생 손자), 7편 : 광복군 아리랑(장병화 광복군 장이호 선생 아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12/3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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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원희복 <민족화해> 편집인(전 경향신문 부국장)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
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 운동 혹은 군집(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그 거주지에서의 퇴거를 명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장소에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더 악독한 것은 처벌조항이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타인을 선동 또는 교사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태형 50대 이상, 또는 10개월 이하의 금고,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강제한 법에 태형이라는 전 근대적 처벌조항을 둔 것은 조선을 야만시한 행위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조선인의 말과 사상을 틀어막는 두 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병탄을 위해서였고, 일제는 이 법을 통해 매우 효율적으로 항일언론과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다. 이 보안법으로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민족단체들이 해산되고, 많은 의병과 만세운동 가담자들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조선병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바탕인 일왕제에 대한 도전, 즉 국체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다. 1917년 황제 차르가 무너지는 소련을 봤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일본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물론 무고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활용됐다. 흔히 현재 국가보안법 기원을 이 법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이념이 짙게 개입된 이 법을 기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가. 그보다 훨씬 앞서고 부담없이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데 말이다.
일제는 한편으로 기성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월 ‘조선 동아 100년’을 기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이 1937년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쓴 서약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을 발굴 공개했다. 좀 길더라도 서약서 전문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1. 황실기사는 정중히 지면 상단 중요한 장소에 오탈자 없이 할 것.
2. 황실 및 국가, 군기, 신사 등을 존중하고 국체명징, 국위선양, 연중행사 의식은 정중히 취급하고 크게 보도할 것. 가급적 그 사진을 실을 것.
3. 황실 및 국가적 경사에 대해 회사도 자발적 축하의 뜻을 보낼 것.
4. 외국 전보 등으로 제국의 불리를 보도하지 말 것.
5.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6. 총독의 유고, 관청의 발표사항 및 지사회의, 중추원회의 등 중요한 관청 회의는 빠짐없이 보도할 것.
7. 당국의 시정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하여 국가적 관점에서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8.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 불령운동 기사를 과대하게 취급하거나 호의적 명칭을 쓰거나 상휼적 문자를 쓰지 말 것.
9.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호의적으로 등재하지 말 것.

10. 주의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을 배격할 것.
1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격려 고무하도록 노력할 것.
12. 천재사변 때는 관청의 구제 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혹란하여 민중의기를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3. 함부로 조선민족의 궁핍을 곡설하고 민중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지 말 것.
14. 노동 소작 기타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연구하여 공평한 보도를 하고 격화시키지 말 것.
15.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분 등에 관한 기사나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배일사상을 고조할 우려가 있는 것은 게재하지 말 것.
16. 내선인 간 충돌 기사는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할 것.
17. 존황정신을 취지로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
18.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언론보도를 하지 말 것.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능가할 정도로 꼼꼼하고, 조항 하나하나가 굴욕적 통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양할 그 어떤 작은 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다. 일제는 조선인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애당초 용납하지 않고, 독립운동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이간시키는 작업에 언론을 활용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흉행’이라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런 흉행을 하게 한 것”이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8일자)
윤봉길 의거는 민족주의 임정세력(백범)에 의해 이뤄진 것은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임정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러시아, 즉 사회주의 세력의 지시를 받았다고 쓴 것은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이간질시키는 보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빨갱이’ 논란으로 상징된다. 흔히 빨갱이의 기원을 비정규 무장세력인 파르티잔(partisan)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 해방, 즉 분단 이후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보안법의 기원과, 조선총독부의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에서 보듯이 일제는 사상과 이념통제를 조선병탄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적색은 깃발과 노래 등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상징색이 됐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붉은 색의 아카(赤)로 불렀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
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일왕제를 수호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었고, 조선독립 세력을 이간질하는 수단으로 빨갱이를 사용했다.
우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붉은 색 종이에 소련의 <코뮤니스트>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1932년 김단야를 비롯해 김형선, 김명시, 김찬 등은 5월 1일 ‘붉은 5·1절’(노동절)을 기해 붉은 색(혹은 푸른 색) 종이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의 절대적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등의 삐라 수천 장을 만들어 뿌렸다. 그 붉은 색 삐라 그 말미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물론이다.(원희복,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2015) 따라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비어를 만들었고, 이는 앞서 언문
신문 지면쇄신 요항에서 그대로 명시돼 있는 것이다. 1942년 이승만의 편지에는 “호놀룰루에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에 따르면 그(한길수)의 조직은 50명이 못되는 한국 ‘빨갱이’ 이상은 아니라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전에도 보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빨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일제잔재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이 역시 일제 잔재다운 보도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 당연히 폐기됐어야 할 이 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법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은 법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이 법령 제11호는 일제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등 7개 법안만 폐지하는 것으로 보안법과 불온 문서 취체령 등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 잔재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였던 것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법령집> 1956)이 보안법은 해방 후 진보, 혹은 좌파 언론과 단체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한 것은 물
론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남북 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보안법도 국가보안법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다시 제정됐다. 흔히 국가보안법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기화로 제정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이 법의 역사적 실제적 의미를 간과하고 ‘법전적’ 의미만 판 단한 것이다.
이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6일 제97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1945년 10월 이후로 친일파에 대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인줄 압니다. 군정에서 그들(친일파)을 몰아내고, 경찰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열렬히 요구하는 사람이 그 사람(공산당)입니다”라고 주장했다.(국회사무처, 1948 제97호, 802)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과거 많이 회자됐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는 무서운 발상이 바로 친일청산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발상은 2013년 3월 13일 박근혜 청와대가 뉴라이트 인사와 오찬 모임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이날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장(후에 KBS이사장에 임명됐음)은 “이런 역사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발상은 종북몰이를 통해 눈엣가시를 제거하겠다는 과거 이승만의 발상과 일치한다. 이모임 이후 종편 등을 동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비난은 현실화됐다. TV조선은 “<백년전쟁>은 김일성 대남 문화공작과 흡사하다”고 매도했다. 정확히 일제 잔재의 반복이고, 이승만적 발상이었다.
또 하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국회법사위원장이 바로 백관수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그는 1937년 앞서 언급한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이라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쓴 당사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정적(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정받으려(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용(인혁당 사건 등), 조직과 개인의 승진용 등으로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이미 많은 과거사 사건 재심을 통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원은 분단이나 이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일제 잔재일 뿐이다. 이를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으로 변질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시키려 만든 보안법이 지금 분단상황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증오하게 만드는 반통일의 핵심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청산은 이념이나 분단의 문제가 아닌, 친일청산 작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 2020/12/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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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줏대있는 중립이 우리의 몫이다

조회환 한국외대 명예교수(4월혁명회 회원)

 

 

이 땅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우리민족은 당연히 한반도의 토박이고 주인이다. 우리의 무사안일과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나 분단이라는 쓰디쓴 역사도 있지만, 오늘의 북한 땅이나 남한 땅 모두 한 덩어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갖은 곡절 끝에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태도는 타파해야 하며 그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주권을 찾아야 한다.
첫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이 선결조건이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本立道生)는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가 피동적으로 남에게 끌려가거나 의탁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는 것은 우리의 당당한 고유권한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10위 이내 강국 내지 중견국의 지위에 있다. 자생 자립 자위에 필요할 정도의 물질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정신적으로 다시금 ‘3.1 독립혁명정신’이나 ‘사월혁명정신’을 발휘하면 확실히 ‘자기확립’이 되는 것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타자의 간섭이나 강요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함을 비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국들이 우리를 서로 ‘자기 편’ 또는 ‘자기와 유대관계 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임으로, 우리의 지혜 있는 대처가 ‘중요도’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고 말고는 우리와 상관없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설에 의하면 기존 강대국과 새로 부상하는 강대국은 전쟁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많다’는 설인데, ‘꼭 싸운다’는 말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긴장이 된다. 그 이유는 ①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중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동맹관계를 파기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미국과 함께 총을 들어야 하고, ② 내 땅에 주둔한 미군과 미군기지는 유사시 중국 측의 일차적인 타격 표적이 되어 미군도 다수 희생되겠지만, 우리의 인명과 땅 그리고 재산의 손실은 가공할 수준일 것이므로 우리도 마땅히 반격하게 되어 중국과는 중첩적으로 적이 되는 것이다. 이웃사촌과의 불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강대국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하여, 서로 상대방의 본토 공격은 두려워서 전면전은 피하겠지만 주변지역, 특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지전의 위험은 있다. 왜 남들이 자기 땅은 놓
아두고 내 땅에서 싸우는가? 우리는 당연히 ‘반대’ 또는 ‘동조거부’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러면 외세는 다른 편법을 찾거나 평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국제평화를 위해 우리가 중심을 잡자. 더러는 한미동맹만 굳건하면 미국의 위세 때문에 ‘무사태평’할 것으로 착각하고 말끝마다 ‘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라는 말만 앞세운다. 외세의존이 생리화된 심상의 노출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가 영원히 의탁하기엔 ‘남이라는 한계’가 있고, 또 미국도 이미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3대 군사강대국중 하나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력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비교의 기준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대칭적으로 비교하면, 핵무기의 경우 미국이 6천개 중국이 4백 개 정도라니 15대 1이다. 그러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의 무섭기는 똑같아서 비교가 무의미하다. 또 비대칭적으로 보면 여섯 배나 많은 미국의 항공모함 수는 중국의 뚱펑-21, 26 등 ‘항공모함 킬러’ 앞에서는 이미 한물 간 무기라고 중국은 주장한다. 어떻든 전쟁은 서로 무서울 수밖에 없다. 설령 미국이 다소 비교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전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 격언에 “아무리 강한 용이라도
현지 토박이 왕뱀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원거리 원정이라는 공간적 불리함 때문이다. 월남전 등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약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가 중심국이 되어 전쟁은 말리자는 것이다. 사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화를 당연시해왔고 현지 민간인 대량학살이나 노예화는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 이제 우리나라는 중견국이 되었고 또 국민의 결기도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일어서는 한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는 위치이다. 우리의 자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경계적 관심’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중심만 잘 잡고 중지를 모으면 더욱 확실하게 ‘세계의 중심국’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턴 세계의 스포트라이트(the Spotlight)를 받아가며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행위를 막고 평화공존의 길로 가도록 견인할 책무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넷째, 이제 강대국들에게 ‘잘못된 과거사’의 해결을 촉구하자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의 제안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동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원래 분할한다면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을 분할 점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땅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였으니 미소 양국이 애당초 잘못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개탄하지만, 분단되지 않았다면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일찍 철군했지만 그 대신 인접한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고, 미군은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인해 한국주둔을 계속하고 있다. ‘안보’라는 이유로 ‘어떤 조건’ 동안 ‘장기 주둔’을 이해할 수 있으나 ‘너무 장기주둔’을
‘허용’하거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폐단은 ‘통째 점령’ 보다 결코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일제 때는 맨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민부터 맨 남쪽의 전라 경상 제주도민까지 알게 모르게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서로 사랑하면서 국내외에서의 의병전투나 독립투쟁 등 대일항전을 하던 국민일체감이 살아있었다. 지금은 남북 동포간의 적대관계라는 ‘민족 내부의 불행’과 ‘외세에 대한 부담’이라는 2중의 장애에 직면해있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그것은 제법 식자연할 용어이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간악한 이간질’이며, 이간시킨 자는 손쉽게 ‘이간당한 자들’을 조종하니 우리의 비극은, ‘외세의존’에 타성(惰性)화된 자기망실 상태에 있으며 이대로 가면 거의 ‘영구적’으로 지배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묶은 자라야 (묶인 자를) 풀 수 있다’(結者解之)는 말은 지당한 얘기이다. 묶은 자가 풀어 주지 않는다면, 풀어줄 만한 제3자라도 있어야 하는데, 있기도 쉽지 않고, 있다 해도 ‘묶인 자’의 요청과 ‘묶은 자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묶은 자들을 향해서 풀어달라는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악담이 난무하지만 ‘정의’가 꼭 없는 것도 아니고, 만약 없다면 있게 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주도의 평화체제(Pax Americana)가 오래이다 보니 결함도 많았다. 그러나 이 체제의 핵심도 원래는 ‘평화’가 먼저이고 ‘주도권’ (hegemony)은 그 다음이다. 그 점도 미국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상생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심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동시에 “단계적인 평화통일”이건 “연방제 평화통일”이건
남북은 자주적으로 허심탄회 얘기하여 통일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통일의욕을 상실하고 분단생활에 안주하여 나몰라하면 점점 더 잘게 분열하고 콩가루가 되어 결국은 남의 손쉬운 먹이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더욱 확실하게 줏대있는 중심국이 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제평화도 주도해야 될 것이다.

수, 2020/12/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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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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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수, 2020/12/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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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 이호철의 한국문단 종횡기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연줄로 미군 JACK부대 경비원이 되었는데, 마침 종군작가로 해군중령이었던 염상섭의 조카와 그 딸이 같이 근무하는 걸 알고 그 소개로 자기 소설을 염상섭에게 전하게 되어 싹수가 있다는 촌평을 들었다. 1953년(22살), 미군 기관 경비원으로 상경한 그는 황순원과 연이 닿아 문예살롱으로 찾아가 소설 습작을 본격화했다.
1954년, 한국은 예술원을 설립했는데, 초대 회원으로 염상섭 박종화(이상 서울 출신), 김동리 조연현 유치진(이상 경상도 출신), 서정주(호남) 윤백남(공주 출신)으로 월남 문학인은 전무했다. 제2대에야 황순원(평남) 이헌구(함북 명천) 모윤숙(함남)이 김말봉(부산) 곽종원(경북 고령)과 함께 추가되었고, 1960년에는 신석초(충남 서천) 박영준(평남 강서)이 추가됐다. 그러나 주요한 오상순 유치환 김광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광섭 김동명 신석정 이은상 노천명 김현승 김용호 등 시인, 주요섭 안수길 계용묵 박계주 정비석 오영수 등 작가, 김팔봉 백철 등 평론가들은 초기에 소외되어 있었다. 이 명단을 참고하면 예술원의 편파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게 한국문단을 파벌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황순원과 인연을 맺은 이호철이 보기에 한국문단은 조연현과 <현대문학>의 독무대였다. 예술원이 발족하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창립(1955.4)되었는데, 위원장 김광섭, 부위원장 이무영, 백철 모윤숙 김팔봉 서항석 이헌구 등이 주도했다. 문단 비주류 파인 한국자유문학자협회는 기관지로 <자유문학>(1956.6)을 창간했으나 1963년 8월호 통권 71호로 종간됐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자유문학>은 <현대문학>과는 달리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작가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유현종 등과 시인 권용태 황명걸 이세방 등을 등단시켰다.
역시 비주류파가 주동이 되어 나온 <문학예술>은 1954년 4월에 창간했는데, 주간 오영진 편집 박남수 부주간 원응서 등이었다. 사무실은 <사상계>가 있던 한청빌딩 3층으로 장준하의 호의로 10평 정도의 공간을 사용했는데, 2호까지는 <문학과 예술>, 3호부터 ‘과’가 빠졌다. 조연현의 <현대문학>과는 달리 외국문학에 지면을 대폭 할애한 게 특징이었다.
<문학예술> 등단자로는 평론가 유종호 이어령 이환 이교창, 소설가 이호철 최상규 조백우 선우휘 송병수 김성원 송원희, 시인 박희진 박성룡 인태성 성찬경 신경림 민재식 이희철 조영서 신기선 이일 임종국 허만하 등을 배출했다. 1957년 12월 33호로 종료됐는데, 이 계열의 문인들은 나중 <사상계>로 합류했다.
<사상계>에서는 조연현을 사갈시했다고 이호철은 증언하는데, 그러나 조연현은 “다부진 배짱이며 날카로운 평론으로서는 당대 1급”이며 명강의로 유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상계>가 문학인뿐만 아니라 함석헌 신상초 지명관 안병욱(다 북한출신) 등 문사철 지식인들에다 김팔봉 백철 안수길 손우성 여석기 나영균 김진만 김붕구 등 외국문학자들, 그리고 <문학예술> 출신 문인들의 대거 활약으로 한국 지성사의 풍토가 변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이승만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초기 동인문학상 수상자는 거의 북한 출신으로 채워졌다. 1회(1956) 김성한 「바비도」, 2회(1957) 선우휘 「불꽃」, 3회(1958) 오상원 「모반」, 4회(1959) 손창섭 「잉여인간」, 5회(1960) 이범선 「오발탄」과 서기원 「이 성숙한 밤의 포옹」 공동수상, 6회(1961) 남정현 「너는 뭐냐」, 7회(1962) 전광용 「꺼삐딴리」, 7회 이호철 「닳아지는 날들」로 이 중 남한 출신은 서기원과 남정현 둘뿐이었다.

문단 비주류에 뿌리 내리기
1955년(24살), <문학예술> 7월호에 「탈향」으로 문단의 첫 관문을 통과한 이호철의 앞길은 창창했다. 그러나 고향 선배 S에게 미군부대를 그만 두고 교사로 취직시켜준다는 사기에 걸려들기 직전까지 갔던 이호철은 황순원의 소개로 출판사 광문사에 취직. 이후 홍릉, 삼선동, 청운동 등지로 옮겨가며 하숙생활을 했다.
1958년(27살), 이호철은 단편 「여분의 인간들」을 <사상계>에 게재하면서 장준하와 교분을 텄고 함석헌과도 알게 되었다. <사상계>에는 작가 한남철이 근무하며, <현대문학>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자유당 치하의 살벌했던 시절에 이호철은 조봉암의 진보당 비밀 청년회원이었고, 이로 인해 조봉암 사건(1958년 1월 구속, 1959년 7.31. 처형) 이후 그 천하태평의 이호철도 약간은 전전긍긍했다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자유문고, 2018)에서 털어놓았다. 아마 가입 후 별 활동은 없었던 듯하나, 그 계열의 인사들과의 교류는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문단 질서가 4·19와 5·16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는데, 이호철은 5·16 직후 서정주가 국문학자 조윤제와 연루되어 잠시 검거됐던 사실을 놓치지 않고 증언해 주기도 할만큼 오지랖이 넓었다.
1960년(29살), 판문점을 방문한 이호철은 북한 기자에게 이종사촌 형(소련 유학 간 형) 이름을 대니 경제학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놀랐다. 이듬해에 다시 판문점에 가니 이대 출신 여기자가 팔꿈치로 그를 건드리며 “뭘 그런걸(소설 「판문점」, <사상계>, 1961.3 게재) 써설라므니 그 동무를 이젠 이쪽에는 못 나오게 해요”라는 말을 들었다. 바로 소설 「판문점」의 후일담인데, 이호철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소설처럼 남남북녀가 애정 표현을 짙게 하진 않았고 다만 몇 마디 대화만 오가면서 눈길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소설에 나타난 바로는 마치 북녀(북측 여기자)가 남남(남측 남자 기자)에게 말려들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어 그 여기자가 판문점 출입을 봉쇄당했다는 후일담이다. 예기치 못한 남북 간의 첫 필화가 발생한 셈이다.
이 무렵 이호철은 청운동 꼭대기에서 하숙하며 한남철과 의기투합, 그를 통해 나중 기업인이자 문화운동가이며 교육자인 채현국과 평론가 백낙청 등 많은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1961년(31살), 첫 창작집 <나상>(사상계사)으로 제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6·17포고령 제6호로 모든 분야의 사회단체가 해산당하고 단일화조치로 한국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문인협회는 조연현이 주도해 전영택(1963년까지), 박종화 (1969년까지) 이사장 체제로 온존되었다. 1964년(33살),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던 불평등한 한일협정 체결 반대를 위한 6·3항쟁사태 무렵 작가는 명보극장 앞 초동 골목에서 하숙하며 <소시민>을 연재(<세대>)했다.
이듬해 1월 9일 밤, 명동에서 전혜린, 전채린 자매, 작가 김승옥 등등과 술을 마시다가 김승옥을 데리고 초동 하숙방으로 갔는데, 이때 김승옥은 스케치 <1965년 1월의 이호철>을 그렸고, 그 이튿날 아침 전혜린은 작고하여 충격을 주었다.
한국 문단사와 지성사에 일대 전환기를 이룩한 시기를 이호철은 1966년으로 잡는데, 이때 그는 원효로로 하숙(1966년 봄)을 옮겼고, <서울은 만원이다>(<동아일보>)를 연재했는데, 이 해에 <창작과 비평>(1966.1.겨울호)이 창간됐다. 문우출판사(文友出版社, 7호까지), 일조각(一潮閣, 14호까지)을 거쳐 1969년 가을·겨울 합병호인 제15호부터 창작과비평사 발행으로 정착됐다. 1967년(36살) 1월, 조민자와 결혼한 이호철은 문단의 호남 총각으로 한때는 최정희가 사윗감으로 탐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해 10월, 세계문화자유회의(1950년 베를린에서 창립, 한국지부는 1961년 시이덴스티커 등이 내한하면서 개설) 주관으로 워커힐에서 ‘작가와 사회’ 세미나가 열렸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미 CIA가 배후라고 <뉴욕타임즈>가 이미 1966.4에 시리즈로 폭로했기에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던 행사였다. 이후 한국문단과 지식인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적인 틈새를 보여주는 순수-참여논쟁이 끈질기게 전개되었다. 물론 이 세미나는 참여문학을 봉쇄하기 위한 기획이었으나 논쟁은 참여문학의 불가피성으로 여론이 변해갔다.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 1921~2007)는 콜로라도 출신으로 일문학을 전공,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번역하여 노벨상(1968년 수상)을 받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설국(雪國, Snow Country)>의 첫 구절 “國境の長ぃ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ぁった”)을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boder tunnel into the snow country”(열차는 국경의 긴 터널을 나와 설국으로 들어섰다)로 의역하여 원문보다 더 빛나는 문장을 창작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터널은 시미즈(淸水)이며, 국경(國境)은 ‘콧쿄’가 아닌 ‘쿠니 자카이’(지방 행정 경계)이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미‧일의 숭배열이 극에 달했던 터라 사이덴스티커의 명성은 대단해서 한국 펜클럽엘 자주 들락거리며 거드름을 피워 나같은 신진 평론가는 그를 존경의 염으로 바라봤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롯이 억울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참석하여 창립한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위풍당당했다. 워커힐에서의 이 세미나에서 불문학자 김봉구가 ‘작가와 사회’란 주제로 발제를 하면서 참여문학과 사르트르를 맹공했다. 이 발제는 치열한 공방전을 야기, 남정현 임중빈 등이 정면으로 반박한 데 이어 전 문단이 참여문학 논쟁으로 토론장화했다. 이호철은 「작가의 현장과 세속의 현장」(<동아일보>, 1967.10.21.)에서 “그 시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나 사회적인 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제때제때에 경고를 발하는 것은 작가다”라고 주장했다. 이호철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든 신호탄이었고, 이 논쟁은 1968년까지 지속됐다. 바로 참여문학을 압살하기 위한 일환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그뒤의 일이다. 이 논쟁의 끝자락에서 김수영(1968년 작고), 신동엽(1969년 작고) 두 시인이 타계한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이호철에게 한국의 기성 비평문학은 임화와 백철, 조연현의 삼각구도로 비춰졌다. 최일수를 비롯한 몇몇을 임화 계열로 본 그는 중도론자인 백철에 대해 그리 신뢰감을 주지 않은 대신 문단적으로는 맹비난하면서도 조연현과 작가 김동리를 높이 평가했는데, 이건 필시 중년기를 지난 만년의 작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1980년대까지의 이호철은 조연현(1981 작고)의 문단 주도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감과 비판이 지속됐다. 중년기의 이호철은 <현대문학>과 조연현 지배체제의 문단 위계론에 매우 날카롭고 싸늘하게 대했는데, 만년에 너그러워진 관점이 반영된 것이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이다. 필시 이런 관점은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떠난 이후 그의 문단 친밀도와 문학관에 변화가 생긴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한가운데서 김질락을 비롯한 통일혁명당(1968년 구속 사태 일어남)의 일부 활동가들과 그 월간지 <청맥> 인사들과의 교우도 특기할 만하다. 이 정도로도 이호철의 활약상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었음을 알 만하다. 당시 <청맥> 편집실에서는 한국문단 작가로는 김승옥, 시인으로는 주성윤, 평론가로는 조동일을 높이 평가했다.
불광동으로 이사(1968)한 이호철 작가는 무남독녀 이윤정을 얻었고, 장편 <공복사회>(홍익출판사), 작품집 <자유만복>(서음출판사) 등을 내며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모윤숙은 화양동 자택에서 ‘라운드 클럽’이라는 비공개 친목단체를 만들어 그 클럽회원들의 사교와 자유로운 토론을 월 1회씩 개최했다. 김광섭 박종화 이헌구 전숙희 이호철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이철범 김후란 등 20여 명의 문단 비정통파들이 참여했으며, 그 밀착도는 아주 높았다.
이호철은 회고록에서 펜클럽 주최 대구 마산 부산 등지의 강연 때 곽복록(펜클럽 전무이사, 당시 서강대 독문과 교수)의 요청으로 모윤숙에게 보고 사항이 있는데 상대가 할머니지만 여성이라 혼자 가기엔 찜찜하대서 함께 들어갔는데 그냥 누운 채였던 그녀는 스스럼없이 양해하라고 했다. 넉살 좋은 이호철은 안마나 해드릴까요 하니 모윤숙은 “고향 젊은이에게 안마 한번 받아 보자꾸나”라고 선뜻 응낙하여 “파자마 입으신 엉덩이를 타고 앉아 그렇게 등을 두드리고 주무르면서 능청 섞어” 한 말이 “모 여사님 등허리를 이렇게 타고 앉기는, 하나, 둘, 셋, 그러니까 내가 네 번째 정도나 될까요?”했다. 춘원, 안호상, 인도의 메논을 빗댄 이 멘트에 통큰 모윤숙도 참지 못하고 “비켜라, 이눔 자식”하며 와락 등을 흔들어 이호철을 떼어냈다. 물론 그런 일로 꽁할 모윤숙은 아니다.

문학인 민주화 운동 1세대
1970년(39살)은 한국문인협회에 일대 파란이 일어난 해였다. 문단에 감투 바람이 일어난 것은 이 해에 김동리가 박종화에 도전하면서였다. 형식적인 선거로 월탄을 묻지 마 추대해오던 문단에서 김동리가 이사장 출마로 도전하자 월탄을 지지하던 조연현이 대립각을 세웠다.
우정도 감투 앞에서는 쪼개지고 마는가. 김동리 지지파에는 강용준 하근찬 박경수 이문희 송병수 정인영 이문구 등 작가에다 정창범 김상일 구인환 등 평론가가 뛰어들어 김동리의 승리(1973년까지 이사장)를 견인했다. 김동리 체제의 한국문인협회에 이문구가 근무하면서 참여문학 쪽 문인들과 문학과지성 쪽 문인들의 출입이 잦아졌는데, 이호철도 그중의 한 분이었다.
이후 문인협회는 조연현(1973~1976), 서정주(~1978), 조연현(~1982), 김동리(~1988), 조병화(~1991)로 이어졌다.
1971년(40살), 명동 대성빌딩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발족(4‧19)했다.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3인 대표에 함석헌 지학순 장일순 법정 이호철 등 운영위원, 사무국장 전덕용이었다. 이호철은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한남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은 4‧27대통령선거(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에 이어 5‧25총선이 겹쳤던 해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선거감시를 주요 투쟁목표로 삼아 범국민적인 참관인단을 모집, 전국적으로 파견했다. 문학인으로는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권일송 구중서 박태순 한남철 신상웅 임헌영 등이 참여, “총칼에 의하여 짓밟힌 민주주의가 나약한 종이와 인주에 의해서 도로 찾아지기를 실로 열망”하였으나, “사탄이 성서를 인용하듯이 이번 선거야말로 다시 한번 정상배가 선
거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자기 합리화의 구실”로 삼은 “총성 없는 또 하나의 조용한 쿠데타”라고 논평하였다.
문인협회의 감투싸움 태풍이 1971년 펜클럽에도 닥쳤다. 1954년에 설립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변영로(1~2대 대표) 정인섭(3대) 주요섭(4~5대) 모윤숙(6대) 주요섭(7~9대)에 이어 백철이 10~19대(1963~1978)에 걸쳐 장기집권할 정도로 무풍지대였다. 1966년부터 계속 부회장을 맡았던 모윤숙이 1971년에 회장에 도전했는데, 문제는 문단의 중견들이 거의 그녀를 지지한 것이었다. 위로는 안수길부터 전광용, 조병화 등에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등이 모윤숙 시인 추대(라운드 클럽 회원들)에 적극성을 띄어 가히 전투적이라 할 정도였다. 펜 선거에 낙방한 모윤숙은 몇 달 뒤 총선 때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972) 유신독재로 금배지를 떼야 했다. 신출내기 평론가로 펜클럽 최연소 이사였던 나로서는 백철, 조병화(둘 다 東京高師 출신) 두 거물 스승 사이에 끼인 새우 꼴이었지만 굳이 촌수를 따진다면 은사였던 백철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때가 내 문단생활 중 가장 난처한 시기였을 것이다. 더구나 백철의 당선으로 막을 내리자 모윤숙 지지자들은 그 앙금을 꽤나 오랫동안 간직한 채 씹어댔다. 심지어 조병화는 한동안 나에게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곤 했다. 모윤숙이 다시 펜 대표가 된 것은 1979~1982년이었다.
1972년(41살), 7‧4남북공동성명이 있는 등 서광이 비칠 듯했던 한반도는 불과 석 달 뒤에 암흑의 유신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호철은 펜클럽 일본문학 심포지엄에 참여, 15일간 여행 중 원산중학 동기로 작가가 된 고토 메이세이도 만나 옛 정을 나눴다. 작품집 <큰산>(정음사), 이회성의 <다듬이질 하는 여인>(정음사) 번역으로 이호철은 인기 절정이었다. 조총련에서 전향한 이회성은 이호철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당시 이회성의 소설은 한국의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유신독재 치하의 한국을 본격적으로 다룬 <금단의 땅>(미래사, 1988)은 이호철, 김석희 공역으로 논쟁의 폭풍을 자아냈다. 5‧16쿠데타 세력에 의한 유신독재를 이 소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3년(42살) 1월, 육군본부 주선으로 베트남 파병 국군방문 작가단에 김광림 고은 최인훈 등과 함께 참여, 사이공 퀴논 나트랑 등을 두루 다녀왔다. 이 해 10월에는 육영수의 나주 나환자촌 방문에 동행 요청을 받고 한하운과 함께 갔다. 이호철은 초청 전화를 받고 자신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걸 모르고 있나 망설이다가 참여하면서도 끝내 육영수와 함께하는 사진은 교묘히 피했다는 걸 자랑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1973)에서 기존 김동리에 조연현이 도전했다. 이문구가 김동리를 결사적으로 옹위했기 때문에 이호철도 반 조연현 편이었다. 총 회원 971명 중 조연현 334표, 김동리 284표였다. 이에 이문구는 삭발로 그 분노를 삭였다. 패배 원인이 문학지의 부재로 본 김동리는 <한국문학>을 창간, 이문구가 편집을 맡았다. 1976년 경영난으로 이근배에게 넘어간 이 잡지는 이내 조정래가 인수했다가 이후에는 홍상화가 맡았다.
1974년(43살), 1월 7일 문학인들이 유신헌법을 반대하여 시국성명을 내자마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긴급조치를 선포(1.8)했다. 시국성명에 서명한 문인들을 중앙정보부가 일일이 탐방하여 반성문을 작성하던 중 문인간첩단사건(1.14, 보안사 연행)이 터졌다. 바로 이 글 맨 앞 장면에서 묘사한 것이 이때의 이호철의 보안사 연행이다. 작가 이호철과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그리고 임헌영으로 엮어진 문학인 간첩단 사건은 간첩 조작 사건의 사례로 국제적인 비판여론을 일으켜서 엠네스티에서는 <남한의 5명의 솔제니친>이란 팜플렛을 제작하여 뿌렸다. 이 옥중 체험기를 이호철은 연작으로 묶어 장편소설 <문>이란 제목으로 냈는데, 실록이라
할 만큼 사실에 충실했다, 다만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지명이나 학교명 등을 바꿔버려 독자들에게 혼란을 자아내기에 여기서 그 인물들의 실명을 밝혀둔다.
1970년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국제펜대회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기념 촬영한 화보에 등장하는 문인들은 박철(백철, 괄호 안은 실명), 고인숙(모윤숙), 한모모(이호철) 등이다.(문학세계 판 <문>, 32쪽, 이하 쪽수만 표시함)
서대문구치소에 갇힌 이호철에게 사과 서른 개를 영치물로 넣어준 것은 천상수(천승세, 39쪽)이며, 구치소 부소장실로 취조차 나온 건 이 검사(이창우, 47쪽), 북쪽 고향의 출신학교는 원강고급중학교(원산고급중학, 59쪽)이며, 장정후(장준하, 74쪽), 재일 동포 잡지는 <한성>(<한양>, 95쪽)이다. 5명의 문인간첩단 사건 연루자는 조알봉(정을병), 안한웅(임헌영), 장북일(장백일), 곽어중(김우종)이다.(145쪽) 공변호사(강신옥, 151쪽), 현 변호사(한승헌, 154쪽), 김종려(김정례, 164쪽) 등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김정례는 여성유권자연맹을 이끌던 투사로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김한길의 아버지)와 항상 함께 검사실을 방문, 다섯 문학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추가해둔다.
한웅(함석헌, 166쪽), 차검사(최상엽, 168쪽), 정광우(전병용, 213쪽)도 자주 등장한다. 전병용은 교도관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많은 정치범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해준 이후 1987년 박종철 사건 폭로에 일조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 체험을 <감방별곡>(공동체, 1990)이란 저서로 묶어냈고, 영화(<1987>)에도 등장했다.
“곽이중(김우종)을 맡은 늙은 변호사”(219쪽)는 권순영 변호사다. 그는 1955년 희대의 플레이보이 박인수 사건 제1심을 맡았던 판사로서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취지로 혼인빙자 간음죄에 무죄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다. 백고안(227쪽)은 백기완이다.
문학인간첩단 사건을 주관했던 기관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였고, 당시 처장은 김교련, 사건담당관은 우리들 앞에서 ‘강 전무’로 호칭했는데, 전두환 독재 때 언론 통폐합을 맡았고 민정당 조직국장과 사무차장을 지낸 공주 출신 이상재 의원이었다.
1975년(44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이호철이 출마, 조연현과 맞대결했다. 출마 첫 제의는 한남철이 했고, 고은이 선거총책을 맡고 이문구 박태순 이시영 송기원 손춘익 등이 적극 뛰었으나 총회원 1,180명 중 조연현 528표, 이호철 266표였다. 이미 결과를 예측했으면서도 기존 문단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 이호철의 속내였다.
1978년(47살), 김지하 석방 기도회 참석 후 ‘노래’ 사건으로 원주에서 구류를 살았고, 이듬해에는 박정희 피살 직후 계엄 치하에서 YWCA강당에서 항의집회를 위한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다.
1979년 10월에 나는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투옥(1983년 출옥)되어 이호철 작가의 활동 주변에서 멀어져 버렸기에 기록에 따라 그 뒤 경력을 정리한다.

광주시민항쟁 이후
1980년 5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이호철은 남산 지하실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은 뒤 육군본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서대문구치소 9사 상 37방에 갇혔던 그는 징역 3년6개월 선고를 받았으나 11월 4일 석방됐다. 워낙 산을 좋아했던 이호철은 1950년대 중반부터 등산을 즐겼는데, 언젠가부터 이돈명 백낙청 변형윤 박현채 송건호 리영희 박중기 조태일 등과 매주 일요일 북한산으로 오르게 되면서 거시기산악회가 형성됐다.
작품집 <월남한 사람들>(심설당, 1981)을 낼 무렵부터 중앙일보 문화센터에 출강, 창작강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는데, 중견작가 박충훈을 비롯한 30여 명의 작가들이 문향회를조직, 동인지 <서울 소나무>를 10집까지 출간했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은 이호철은 역사상황소설 <까레이 우라>(한겨레, 1986), 작품집<탈사육자회의>(정음문화, 1986), 등단 30주년 기념 작품집 <천상천하>(산하, 1986), 수필집 <명사십리 해당화>(한길사, 1986) 등을 냈다. 1987년, 전두환의 호언선언인 4‧13조치 반대 투쟁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6‧29선언을 맞은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사임했지만 변혁을 위한 투쟁의 정신은 그대로여서, 번역본 <푸시킨과 12월혁명>(실천문학), 정경모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창비)를 냈다. 청계연구소(대표 손세일)에서 <이호철 전집> 기획(1991년까지 7권 출간했다), <퇴역선임하사>(고려원, 1989), <네겹 두른 족속들>(미래사, 1989), 산문집 <凹凸과 지그재그론>(푸른숲, 1990) 등을 출간했다.
1991년(61살) 10월, 약 50일간 소련 폴란드 헝가리 독일 이태리 프랑스 등 취재여행을 다녔는데, 이 기행 때 소련에서 김레호를 만났다. 함흥사범 출신으로 소련에 유학한 그는 이호철 작가의 육촌 형도 함께 유학해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귀국 않고 소련에 체재한 김레호는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교수였는데, 그를 보며 작가는 자신이 북에서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면 저랬을까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 기행을 <세기말의 사상기행>(세계일보, 1992)으로 연재,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1993년 출간했다.
이 무렵, 연변작가들이 자주 모국을 방문했는데, 연변작가의 집 건립을 위한 캠페인에 이호철은 앞장서서 적극 도와주었고, 이를 계기로 이호철은 김학철, 이근전 등과 교유를 맺었다. 예술원 회원(1992)이 된 작가는 장편 <개화와 척사>(민족과 문학사, 1992), <한살림 통일론>(정우사, 1999)을 냈다.
<한살림 통일론>은 통일론 중 특이한 견해를 담아내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호철의 문단활동은 변곡점을 그린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서울 은평구청 주관 이호철 통일로문학상이 2017년 제정되어, ①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 ② 앞의 글을 수정 보완하여 <동리목월문학>, 2017, 겨울 게재, ③ 「해설」 이호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 전2권, 자유문고, 2018, 위 3가지를 보완)

수, 2020/12/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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