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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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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admin | 화, 2020/06/23- 21:41

[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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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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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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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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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20 행사,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화상회의로 동시 진행

 

 

8월 8일 도쿄의 재일본한국 YMCA에서는 ‘2020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열렸다. 이 행사는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이 2006년부터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를 외치며 평화의 촛불을 들어 온 이래 올해 15주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아 야스쿠니합사철폐 소송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화상회의 형식으로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서승 공동대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대표를 비롯한 유족들과 심포지엄의 발표를 맡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등 한국 참가자 20여 명은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코로나, 올림픽과 야스쿠니’를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기조발제를 맡은 다카하시 테쓰야(高橋哲哉) 도쿄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후쿠시마(무토 루이코 武藤類子), 오키나와(고메스 기요사네 米須清真)를 주제로 한 발표가 있었고, 우롱유엔(呉栄元) 타이완 노동당 주석은 ‘백색테러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주제로, 김동춘 교수가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재일조선인 가수 이정미 씨의 콘서트, 서승 공동대표의 폐회사에 이어 화상으로 진행된 촛불시위 순서에서는 한국 유족들을 비롯한 일본, 타이완 참가자들이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NO 야스쿠니! NO 아베!’의 결의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록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의 연대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08/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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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에 만난
청계노조 출신 신광용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신광용 후원회원

2020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특별히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코로나19 때문인데, 인류 역사상 이처럼 하나의 주제로 인류가 실시간으로 동시에 같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던가. 생각을 확장해 가다 보니 1, 2차 세계대전은 어쩌면 1, 2차 지역전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전쟁은 말 그대로 인류 멸망과 동의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인류 멸망을 대비해 화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지만 그 속도의 차이로 볼 때, 마치 개미가 호수를 건너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여하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은 2020년에 의미 있게 맞이했을 여러 기념일마저 비대면, 온라인이라는 말에 묻히고 있다. 그러한 아쉬움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올해는 10년 단위의 계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다. 경술국치 11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이번 달 인터뷰는 이러한 숨가쁜 역사적 사건 중에서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와 관련된 회원을 만나보려 한다. 문익환 목사가 교회를 벗어나 사회에 나오게 된 이유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양대 노총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일에 맞춰 매년 노동자 대회를 열어 자신들이 전태일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도 청계천에 잘 마련되어 있으니 관련 이야기는 가급적 생략하고 청계피복노조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신광용 회원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중국 광저우에서다. 신광용 회원은 작년에 결성된 연구소 광동지부 회원으로서 현재 부인인 김선주 님과 함께 광동에서 의류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도 있는 중견 업체이다. 신광용, 김선주는 청계노조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와 이어진 청계피복노조를 통한 노동운동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치열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광용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1977년 8월 이소선 여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노동교실’ 강제폐쇄에 항거한 투쟁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에 맞서 아프리 점거 농성 중 부상을 입었다. 아프리(AAFLI)는 아시아 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로서 미국의 노총에서 후진국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여야 우리의 투쟁이 많은 국민들한테 알려질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아프리 사무소를 농성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청계노동자들의 아프리 농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건물 벽을 부수고 농성장에 난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무려 11명을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광용, 전태삼(전태일 열사의동생) 등 2명이 투신하여 신광용 회원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경향신문』 1981년 1월 31일자 기사. 청계피복노조원 신광용 씨가 아프리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진압에 맞서다 3층 아래로 뛰어내려 다리를 크게 다쳤다.

 

문: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시어 활동하시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답: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이 만든 광저우 산악회에서 김유 님과 박호균 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두 분은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지부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계시지요. 이분들을 만나게 되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맞고, 마음도 잘 통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저없이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호균 사무국장님과는 올해 1월에 진행한 김산의 아리랑 로드 답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함께하면서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답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김산, 김원봉 선생 등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하나하나 찾아보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인 독립투사 13인의 명단도 찾아볼 수 있어서 아주 보람이 있었습니다.

문:신광용 회원님도 생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아리랑 로드 답사에 크나큰 수고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지난 번 민족사랑(2020년 1월호)에 김유 지부장님과 박호균 사무국장님의 인터뷰도 소개했지만 추가로 해주실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답:제가 17살 무렵에 백기완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백 선생님께서 “박정희는 독립군을 잡는 일본군 장교였고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발각되자 동지들을 팔아먹고 자기만 살아남은 나쁜 놈”이라고 일갈하셨어요. 당시는 대통령에 대해 조금만 불만을 이야기해도 바로 잡혀가던 유신시절인데 그렇게 당당히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 심장이 크게 뛰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김산이 거쳐 갔던 해방구 하이펑 등을 답사하며, 17살 때 느꼈던 그 벅찬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벅찬 감정이었습니다.

문: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평화시장의 현장 노동자로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우연히 청계피복노조를 알게 되어 그저 각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역사의 기록으로까지 남았네요. 그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5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 뭔지 모를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 싶습니다. 또한 청계피복노조 투쟁 과정 이외에 이한열 열사 사건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동대 버스 안에다 가둬두고 최루탄을 터트려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혀서 눈도 뜰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런지경인데 죽을 정도로 맞고,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맞고 또 맞고 기절하고 또 맞고 또 맞고 했던 기억들입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노동이 존중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광용 회원의 인터뷰는 여느 회원의 인터뷰보다 어려웠다. 코로나19로 원격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번 만나본 경험으로 술 좋아하고 등산 좋아하고 뜻 맞는 지인들과 어울리고 나서서 일하기를 좋아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이 지면에 그의 진면목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나의 능력 부족에 더해 그의 묵직함 때문일 것이다.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같은 작업장에서 열악한 노동자였던 그는 현재 외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있는 회사의 관리자가 되었다. 혹자는 개천에서 용났다거나 자수성가했다면서 추켜세웠을 것이고 나 같은 사람처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가 되었다고 어딘가 그의 약점을 찾아 찔러 보는 장난기 섞인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광용 회원은 체 게바라의 시 한편으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한다.


 

먼 저편
–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체 게바라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수, 2020/08/26-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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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그린벨트 훼손 불법 호화 묘지’ 규탄 집회

 

 

연구소 경기북부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8월 8일 의정부종합운동장 엄복동 동상 앞에서 ‘친일파 조선일보 방씨 일가 불법행위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불법 호화묘지에 대한 행정절차에 즉각 돌입할 것을 의정부시에 요구했다.
앞서 고발뉴스는 지난해 1월부터 방씨 일가가 700여 평에 이르는 그린벨트 임야를 훼손해 호화 분묘를 불법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의정부시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을 연속 보도했다. 고발뉴스의 보도를 접한 기념사업회는 이날 집회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해방 후에는 친독재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의정부시 가능동에 불법 조성한 가족묘지에 대해 관계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와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의정부 관내 불법 조성된 조선일보 방응모 일가의 가족묘에 대하여 법률에 따라 엄격한 처벌과 원상복구를 위하여 청원드립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놓았다.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엄복동 동상부터 가족묘가 시작되는 입구까지 행진했다.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올 가
을에 정식 창립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산림법, 장묘법, 개발제한구역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08/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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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61]

벽제관 후면 언덕에 솟아오른 ‘전적기념비’의 정체는?
침략전쟁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만의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 도시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곧잘 마주치는 용어의 하나가 ‘하이킹(hiking)’이다. 누군가는 이를 ‘산책여행(散策旅行)’이라고 옮겨놓은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배낭을 꾸려 반나절이나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교외지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이킹은 193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크게 성행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전시체제기가 본격화한 이후에도 “걷는 것은 훌륭한 국민운동”이라고 하여 이러한 활동 자체가 크게 장려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성 근교(京城 近郊)의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 특집 연재기사들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등장하였고, 여러 단체에서 주선하여 벌어지는 하이킹 행사도 신청자 모집에 어렵잖게 큰 호응을 이끌어 내곤 했다.
이 당시에 무수하게 쏟아졌던 하이킹 관련 안내서적을 통틀어 그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경전하이킹코스(京電ハイキングコース)’ 시리즈였다. 1937년 10월 15일에 제1집 <북한산(北漢山)>이 처음 선을 보인 이후로 같은 달에 <비봉(碑峰)>(제2집),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제3집), <당인리(唐人里)>(제4집), <양천(陽川)>(제5집) 등이 한꺼번에 배포되었고, 해를 바꿔 1938년 5월에는 <벽제관(碧蹄館)>(제6집)과 <남한산(南漢山)>(제7집)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제1집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를 보면 앞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체 30개에 달하는 하이킹코스의 목록이 장황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의 방대한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총7편을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들 자료는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의 전무였던 무샤 렌조(武者鍊三)의 지시에 따라 3년 정도의 기획기간에 걸쳐 편찬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기의 산악부원과 감리실원이 주축이 되어 실지조사를 겸하고 카토 칸카쿠(加藤灌覺), 오카다 코(岡田貢), 이마무라 토모(今村鞆) 등과 같은 준관변학자(準官邊學者)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전문적인 사진촬영자가 배치되어 다양한 화보 성격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다. 여기에는 도보여행지로 이동하는 교통편에 관한 정보라든가 각 지점 간의 행로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고, 각 코스에서 풍치가 빼어난 곳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주변 행로에 흩어진 고적(古蹟)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풍부하게 곁들여졌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경전하이킹코스’의 제6집 <벽제관(碧蹄館)> (1938년 5월 1일 발행)의 표지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의 현장이 묘사된 지도자료이다. 흔히 벽제관전투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전장은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더구나 벽제관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게 ‘빈정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벽제관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1938)에 수록된 문록교(文祿橋, 분로쿠바시) 쪽에서 바라본 벽제관 일대의 원경사진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하얀 돌기둥이 곧 ‘벽제관전적기념비’이다.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의 정상에 설치된 벽제관 고전장 표석의 모습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잔존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혹여 이러한 행로 도중에 일본인과 관련한 사적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촘촘하고 상세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가운데 1938년 5월 1일에 발간된 <벽제관(碧蹄館)>(제6집)은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대표적인 하이킹 안내서였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기네 선조들의 전승지(戰勝地)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세밀한 사료조사와 현지탐방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담은 것이니만큼 비록 소책자일망정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흔적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역력히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벽제관>의 75~76쪽에는 벽제관 주변의 탐방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 현재 그 관리는 당지(當地)의 우편소장(郵便所長)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벽제관전적보존회(碧蹄館戰蹟保存會)에 맡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씨(同氏)의 안내로 전적견학(戰蹟見學)의 편의를 얻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벽제관의 역(役)이 있던 이래로 춘풍추우 340년 소화 8년(1933년) 9월에 이르러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일대기념비(一大記念碑)의 건립이 실현되었다. 비(碑)의 모양은 애급(埃及, 이집트) 나일 하반(河畔)의 광야에 흘립한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뜬 것으로, 경성으로부터 벽제관에 오는 손님들이 명군(明軍)의 진지였던 월천리(越川里)에 이어지는 작은언덕을 지나자마자 곧장 북방 밀수(密樹)의 언덕 위에 그 높고 하얀 자태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비는 양질의 화강암(花崗岩)으로 제작되어 전기(電氣) 연마를 하여 광택이 아름답고 새로 식수한 수십 주의 앵수(櫻樹, 벚나무) 가운데에 서있다. 비의 표면에는 고 중추원촉탁 김돈희(故中樞院囑託 金敦熙) 씨의 글씨로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으며, 이면(裏面) 비의 대석(臺石)에는 당시 경기도지사 마츠모토 마코토(京畿道知事 松本誠)씨의 이름으로 다음의 명(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은 이왕직 촉탁에하라 젠즈치(江原善槌)가 지은 것이다.
비가 있는 언덕 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벽제관의 건물이 있다. (비명 부분은 인용생략)

 

이 내용에 따르면, 벽제관으로 가는 작은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모든 도보여행객들은 누구나 저 벌판 너머로 온통 사쿠라의 동산으로 변신한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구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중추원촉탁 김돈희(1871~1937)는 일제 때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선암사 강선루, 낙산사 의상대 등의 편액 글씨를 남겼으며, 특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題號)도 바로 그의 글씨라고 알려진다.
일찍이 이곳 벽제관 지역에는 191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목상 고양군수(高陽郡守)가 회장을 맡고 기타 지역유지가 여기에 참가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보존회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15년 4월에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 때의 유적인 벽제관, 괘갑수(掛甲樹) 등의 보존 관리 및 이를 널리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벽제관고적보존회(碧蹄館古蹟保存會)가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碧蹄館戰蹟紀念碑建設會)라는 것이 꾸려져 기념탑의 건립까지 시도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이십여 성상(二十餘 星霜)을 농촌계발(農村啓發)에 전심(專心), 벽제일대(碧蹄一帶)에서는 신(神) 같이 앙모(仰慕),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의 공적(功績)」이라는 제목의 인물탐방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 당지(當地)에 군청(郡廳)이 있을 시(時)에는 300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즐비하던 것이 군청이 20여 년 전에 경성(京城)으로 이전한 후로는 폐가파옥(廢家破屋)이 연년(年年)히 증가하여 지방이 쇠퇴하여짐을 우려하고 발전책(發展策)을 연구하였으나 장래 산간촌락(山間村落)으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당한 대책이 없어 고심하였다.
당지의 벽제관은 역사가 깊은 고적이오 또한 문록역 고전쟁지(古戰爭地)이므로 이를 보존에 주력하여 각 지방에 선전(宣傳)하여 10여 성상(星霜)을 두고 당국에 교섭한 결과 재작춘(再昨春)에 기부인가(寄附認可)를 받는 동시에 당국 원조와 동지의 찬조를 얻어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조직하고 내선만(內鮮滿) 각지를 통하여 기부금모집에 노력한 결과 9천여 원(圓, 엔)의 거액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불행히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이어서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속출(續出)되어 국내는 전시상태를 이루었으니 계획하였던 사업도 지연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以來) 국제관계가 점차로 진압(鎭壓)됨을 따라 금춘(今春)에 공사가 착수하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근만원(近萬圓)의 공비(工費)로 건설된 기념비는 웅장하게도 벽제관 후산상(碧蹄館 後山上)에 돌립(突立)하여 벽제의 면목을 일신케 되었으며 벽제관공원(碧蹄館公園)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일본인 사에키 토루는 1911년 이후 고양우편소장을 거쳐 벽제우편소장으로 장기 재직하면서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이곳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다시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꾸려 1931년 이래 모금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9천 원의 기부금에다 당국의 보조금 1천 원을 더하여 1933년 봄에 이르러 마침내 기념비의 제작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벽제관전적기념비의 건립 제원(諸元)에 대해서는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제12집 제9호(1933년 9월)에 수록된 「벽제관전적기념비 설계개요(設計槪要)」라는 자료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에서 제작 발행한 ‘벽제관전적기념비’의 모습이다. 벽제관 후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기념비의 전면에 보이는 글씨는 중추원촉탁 김돈희(中樞院囑託 金敦熙)가 썼으며, 그 아래쪽에 ‘조혼(弔魂)’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벽제관 건물과 벽제관전적기념비를 도안(圖案)에 담은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의 모습이다. 1934년 1월 20일부터 벽제우편소를 통해 사용하는 우편물에 적용되는 일종의 기념스탬프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조선체신사업연혁사>, 1938)

 

[총고(總高)] 38척(尺) 2촌(寸), 비(碑)의 높이 33척 3촌, 하부(下部) 크기 5척 2촌각(寸角), 상부(上部) 크기 2척 7촌각
[기단(基壇)]은 원형(圓形)으로 높이 2척 9촌, 외경(外徑) 40척, 내경(內徑) 36척, 삼방(三方, 세 방향)에 폭(幅) 8척의 계단(階段)을 두고, 계단 좌우에 길이 7척 폭 4척의 장원형(長圓形)의 수석(袖石, 소맷돌)을 붙임.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은 둘 다 전부 화강석으로 만듬.
[탑신(塔身)] 앞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 아래에 조혼(弔魂)이라 새기고, 뒤에는 건설유래기(建設由來記)를 새김.
[기단(基壇)] 상(床)은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중앙 원형을 따라서 배수구(排水溝)를 두며, 사방(四方)으로 방사선상(放射線狀)의 토관(土管)으로 배수시키도록 사리(砂利, 자갈)를 까는 것으로 함.
[기공(起工)] 소화 8년(1933년) 4월 5일
[준공(竣工)] 소화 8년(1933년) 7월 5일
[제막식(除幕式)] 소화 8년 9월 9일
[공비(工費)] 4,165원(圓)
[양식(樣式)] 근대식(近代式)
[설계(設計)] 조선총독관방 회계과(朝鮮總督官房 會計課)
[시공사(施工者)] 경성미술품제작소(京城美術品製作所)

 

이에 따라 1933년 9월 9일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으며,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몸소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남겼다.

 

…… 방금(方今) 내외(內外)의 정세(情勢)는 더욱 난국(難局)에 향(嚮)하여 동아(東亞)는 드디어 다사(多事)코자 하여 국민(國民)의 왕성(旺盛)한 사기(士氣)와 열렬(熱烈)한 건투갱진(健鬪更進)하여 아세아민족(亞細亞民族)의 각성(覺醒)을 요(要)함이 익공(益功)한 추(秋)에 당(當)하여 여사(如斯)히 왕사(往事)를 추회(追懷)하여 미래(未來)에 선처(善處)한 도표(道標)가 될 만한 의의(意義) 있는 시설(施設)의 실현(實現)은 정신(精神)의 작흥(作興), 극동민족(極東民族)의 융합(融合)에 선보(禪補)됨이 자못 대(大)할 줄로 신(信)한다.

 

요약하자면 바야흐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가 진행되는 이때에 옛 벽제관 전투를 기리는 시설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라는 언급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다시 극동민족의 융합을 이끌어내는 승전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벽제관 일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여긴 탓인지 일본군대의 사기를 앙양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공간으로 종종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3년 10월에는 때를 맞춘 듯이 용산주둔 일본군 보병 제78연대가 벽제관 일대에서 추계대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었고,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1938년 12월에는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 생도 200명이 벽제관 마을에서 견학차 하룻밤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리고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943년 10월에는 벽제관전투 350년이 되는 해라고하여 당시 전몰자에 대한 추조제(追弔祭)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벽제관전적기념비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아일보> 1950년 1월 22일자에 게재된 김진구(金振九)의 연재기고문 「국치비존폐(國恥碑存廢)의 시비(是非) 하(下)」를 보면, “…… 구랍 29일 회견할 때에 구 경기도지사(具 京畿道知事)는 희망적으로 표명하였다. 일인 소행인 벽제관(碧蹄館)의 전적비(戰蹟碑)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장난인 인왕산맥(仁旺山脈)의 암석각자(岩石刻字)만은 제거하고 싶다고 ……”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면 1950년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벽제관 전적기념비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사방공사 관련 ‘치산치수비’의 제막식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분명 벽제관 앞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대개 벽제관이라고 하면 이 전적기념비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별스러운 기념물이 하나 더 있었다. 1940년 6월 24일에 제막된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6년 계속사업으로 고양리(高陽里) 주변 3개리에 걸쳐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한 결과 산림녹화를 이룩한 것을 기리고자 일제가 이에 대한 기념물로 조성한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분명히 벽제관 앞에다 이것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여 이 근처에 매몰 처리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홀연히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서 이것의 정체가 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달갑지 않게 일제강점기의 해묵은 기록을 다시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수, 2020/08/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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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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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의 주제로 서울시자유시민대학 강좌 개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서울시자유시민대학의 민간연계시민대학 캠퍼스로 선정되어 9월 8일(화)부
터 시민대학 강좌를 개최했다. 무장독립전쟁 100주년이 되는 2020년을 기념하여 연구소·식민지역사박
물관 후원회원과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의 주제로 진행한다.
10월 15일까지 매주 화·목 오후 7시, 5주간에 걸쳐 항일의병, 독립전쟁, 1920~30년대의 대중운동·문화운동·학생운동·민족운동과 의열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투쟁 등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전반을 두루 살펴보는 강좌에 근현대사기념관의 심철기 학예실장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연구소의 전문연구자들이 강사로 나선다. 강의 장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육장이다. 강의 종료 후 10월 17일(토)에 독립기념관 답사가 예정되어 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진행이 불투명하다.
원래의 계획은 현장에서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강좌였지만, 코로나19 방역단계가 격상되면서 모든 일정이 비대면 온라인강좌(줌)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오히려 지방에 계시는 후원회원들도 참여할 수 있어 참석인원이 60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번 강좌는 불굴의 의지로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이들의 삶을 추적하고, 그들이 지난한 투쟁과정 속에서 궁극의 목표로 설정했던 참된 삶이 무엇인지, 민족공동체 속에서의 자기희생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목, 2020/09/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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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진과 수필로 바라보는 민병래의 시선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아들과 함께 찍은 민병래 회원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 중에는 ‘틈새시장’, ‘틈새라면’, ‘틈새를 엿보다’ 등이 있다.
‘틈새’라는 말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의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확장하고 있는 우주의 너무나도 작은 일부인 지구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인간에게는 틈새라는 말도
과분해 보인다. 하지만 동학 교주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즉, 인간이나 인간이 먹는 음식조차도 모두 한울 즉 본질적 존재라고 하였으니 틈새는 그저 고래 싸움에 낀 새우나 겨우 들어갈 좁은 공간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나는 틈새시장, 틈새라면이 아닌 ‘틈새 역사’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이와 같이 말머리를 꺼내 보았다.
‘틈새 역사’. 이번 달에는 우리 시대의 틈과 틈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사건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담
고 싶어하는 민병래 회원을 만나 보았다.

<오마이뉴스> 2020년 9월 12일자에 게재된 ‘사수만보’ 제37화 캡쳐 사진

 

현재 민병래 회원은 오마이뉴스에 ‘민병래의 사수만보’를 연재하고 있다. 사수만보 1화 ‘결혼과 육아로 경력단절… 배우 주인영, 다시 무대에 서다’로 시작해 사수만보에 등장하는 이는 소수 정당대표, 대장장이, 초짜 무당, 독거노인, 여자 격투기 선수, 자수성가한 호텔리어, 병역 거부자, 장돌뱅이,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 유가족, 교회 개혁운동가, 미투 고발인, 친환경 먹거리 운동가, 노숙인 지원가 등 그야말로 다양한 우리들의 틈새들이다.

“오마이뉴스에 2019년 봄부터 격주로 ‘사수만보’ 연재를 시작해 현재 37회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수만보(寫隨萬譜)’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 풍경화를 그리듯이 써나가고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 빛나는 사람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성실하게 자기 인생 이야기를 그려가는 사람들이 저의 주인공들입니다.
제가 이 집필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2016년 촛불광장에서였습니다. 촛불혁명은 이름없는 민초들이 이룬 것 아닐까요? 그 거대한 물결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저도 우리 사회에 뭔가 조금이라고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만인보 즉 만 명의 이야기를 써가야 하니 제가 몇 살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병래 회원 자신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민초요 틈새인데 특히 이번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저는 현수막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99년에 창업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약 20년이 넘었네요. (https://blog.naver.com/hwangso3775) 회사 이름은 ‘황소와 나비’입니다. 처음 상호를 들으면 고깃집이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작명한 까닭은 ‘황소’처럼 우직하게 ‘나비’처럼 자유롭게 가자는 뜻이었습니다. 코로나가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도 예외는 아닙니다.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여러 가지로 매출에 영향이 많은 상태입니다. 작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들 힘든 상황이니 꿋꿋하게 버텨갈 뿐입니다.”
‘황소와 나비’. 조선시대 민화의 주요 소재인 호랑이와 까치 그림인 호작도(虎鵲圖)가 연상되는 동시에 어딘가 도가적 여유가 느껴진다. 걷는 곳마다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황소와 날아다닌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 나비. 어쩌면 인간의 삶과 죽음도 황소의 나비의 그것과 닮았다.
여하튼 민병래 회원은 황소처럼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나비의 이상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이상은 언제부터 꿈꾸었을까.
“저는 성균관대 80학번입니다. 1980년에 대학에 들어가 그 시대 많은 청춘들처럼 혁명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성대 학생운동은 고양기였고 저도 그 흐름에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성대 민주동문회 회원인데 현재 민주동문회는 장학사업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동문들에 대한 지원, 그리고 현재 성대 재학생들 중에서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후배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대민주동문회의 자랑스런 사업입니다.”
“민족성대 자랑찬 심산의 아들딸이여…”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이 등장하는 〈민족성대 진군가〉는 많은 대학생들이 부러워했다. 게다가 도포 자락 휘날리는 형상의 김창숙 선생 동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재 성균관대에는 심산관이라는 건물 이름이 호암관으로 바뀐 지 오래다. 독립투사의 자리를 재벌 총수에게 내준 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대민주동문회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바가 크다.
민병래 회원의 우직함은 현재의 직업에 20년 넘게 종사해오고 있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사)푸른사람들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94년 창립된 (사)푸른사람들은 ‘푸른시민연대’로 널리 알려진 동대문 지역의 대표적인 풀뿌리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인 푸른사람들은 서울 동대문구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한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는 사업을 25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주민이나 외국인 연수생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역시 한글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이사로서 창립 무렵부터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나(인터뷰어)의 어머니도 6.25 전쟁통에 미처 못다 배운 한글을 푸른시민연대를 다니시며 완전히 익히셨으니 민병래 회원에게 따로 감사할 일이 생겼다.

 

2018년 6월 문화공간 갤러리에서 열린 ‘사진, 마포를 품다’에서 작품 해설중인 민병래 회원

 

민병래 회원은 푸른사람들 외에도 사진모임 ‘포피엔스’의 회원이다. 이 모임은 이재갑 사진작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추구하는 단체로 2017년 ‘마포, 한강을 품다’ 전시회에 민병래 회원도 참여했다. 본래 계획은 서울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서울의 25개 모든 구를 돌면서 각 구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작업할 계획이었지만 마포구 다음 작업에서 멈춘 상태라고 한다. 이재갑 작가는 군함도 등 일제강제동원 문제뿐 아니라 베트남전쟁,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묵직한 주제에 천착하는 훌륭한 작가이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난 셈이다.
2010년 연구소 후원회원이 되면서 인연을 맺은 민병래 회원은 2012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에도 참가했다.

 

2012년 연구소 주최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때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는 당시 중1이었던 아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답사하면서 끝도 없는 옥수수밭에서 표지석 하나 제대로 없는 터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조국을 떠나 머나먼 천리만리 길, 말도 통하지 않고 지도도 없던 길을 용감히 나서 독립군 기지를 찾아갔던 그 기개와 열정에 머리 숙여지는 답사였습니다.

끝으로 연구소 후원회원님들에게 드리는 당부 말씀을 부탁했다.
“올해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지소미아에 대한 정부 태도나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검찰의 수사,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힌 일 등.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여전히 떠맡아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 없기에 우리 회원들이 해야 할 일을 의연하게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코로나19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야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반드시 ‘사수만보’를 읽어보시라. 어쩌면 그 안에 우리들 아니 나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따뜻한 시선을 통한 만 명의 이야기가 꼭 완성되어 우리들의 가슴 한켠을 뜨겁게 달구길 기대해 본다.

목, 2020/09/2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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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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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1

1. 들어가며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작곡인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직접 지휘하였다.

 

안익태 애국가2의 표절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에 의해서이다.
그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불가리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UCLA 교수 보리스 크레만리에프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보내오면서 표절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중앙대 이유선 교수는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새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애국가〉의 표절에 관한 시비는 <코리아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와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공석준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뒤에도 전 중앙대학교 교수 노동은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유사성에 대해 선율형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표절 사실을 확인할 것이며, 〈애국가〉 작곡 이후 안익태가 전개한 자기표절의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이하 <애국가>로 약칭함.

 

 

 

안익태의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 자필악보. 1949년 4월 18일 사보(寫譜)

 

2. 안익태의 표절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이며, 같은 해 12월 28일 초연되었다. 즉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일 것이나, 공석준 스스로가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을 위해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을 모아 기초자료로 삼았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두곡의 선율을 상세히 비교하여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래 악보의 윗단은 〈애국가〉이고, 아랫단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이다. 굵은 선은 선율의 흐름이고, 위아래를 연결한 가는 선 중 초록색은 일치하는 음, 노란색 선과 원은 변주된 음이다.

 

 

셋째 단 이외의 부분에서 선율의 흐름이 유사하다는 점이 한눈에 드러난다.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58%)이며,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모두 41개(72%)이다. 즉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하면 두 곡의 유사도는 58~72%이다. 이처럼 높은 유사도를 표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가〉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또한 표절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예컨대 아래 악보 첫마디 ‘동해물과’에서 ‘해’가 악구의 정점에 있으며, 음가도 가장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음절에 악센트가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동’과 ‘해’는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해물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노랫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제2마디의 ‘백두산이’는 더 심각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의 형상이 아래로 거꾸러진, 계곡과 같은 선율형으로 되어있다.

곡풍(曲風)에 있어서도 대체로 처량하여 기백을 느끼기 어렵고,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부족하며, 애국적 감격이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왔다. 이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에 기존에 있던 〈애국가〉의 노랫말을 붙이면서 초래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원래 약박인 선율을 강박으로 시작함으로써 ‘동/해물과’가 되었고, 원 선율을 변주하면서 백두산이 거꾸러진 형상이 되었으며, 원래 활기찬 행진곡 풍의 곡을 보통 빠르기보다 느리게 바꾸면서 활기와 기백이 감소된 것이다. 서양의 노래가 원곡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결국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차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3. 안익태의 자기표절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한 일시와 장소를 정리한 것3


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37-38쪽의 표 참조.

 

 

안익태의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 TAI AHN)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7월, 헝가리의 외트뵈쉬(Eötvös) 기숙학원 서류이다. 그는 이를 한국식 이름과 혼용했으며, 해방 이후인 1952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일본식 이름을 썼음이 확인된다.
〈에텐라쿠〉는 에키타이 안이 1938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연주한 레퍼토리로, 일본의 아악 〈에텐라쿠(越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활용한 곡이다. 이 곡은 1940년에는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이름으로, 1960년 6월 15일에는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다. 1962년 1월 한국 초연시 언론에는 세종대왕이 지은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40년에 작곡했다고 보도된다. 〈에텐라쿠〉의 원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1941년 헝가리 월드 뉴스에 등장하는 1분 정도의 편집 영상을 KBS 음원의 6분 01초 이후와 비교하면 동일곡이라는 점이 이해영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즉 〈에텐라쿠〉는 〈강천성악〉으로 자기표절되었다.
1938년에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는 1940년 10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교쿠토(極東)〉가 연주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교쿠토〉에는 〈애국가〉가 포함된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생략되고, 몽고여행의 기억을 담은 ‘음악이야기’로 대체된다. 그것은 불가리아 노래를 반 이상 닮은 〈애국가> 선율을 듣는다면 불가리아 청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1943년 1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된 〈토아〉(Toa) 역시 〈교쿠토〉의 다른 이름으로, 일본어이며 ‘동아’(東亞)를 뜻한다. 이는 다시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며, 마지막 악장에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합창이 들어간다.
바로 이 4악장 합창 부분 대본을 에하라 고이치가 썼는데, 그는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고,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한 1938년부터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며, 주독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다.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기거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에 선전 활동 용역을 제공하였다.
〈만주국〉은 1944년판 〈한국 환상곡〉으로 다시 재구성되어서, 1946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 리세오 극장에서 연주된다. 이때 마지막 악장에는 다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즉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교쿠토〉, 〈토아〉, 〈만주국〉은 대동소이한 곡이며, 최초에 합창으로 표현된 ‘애국’의 자리는 ‘몽고’로, 또 ‘만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 3국의 동맹을 다짐하던 그 선율로 다시 ‘애국’을 노래한 것이다. 결국 안익태의 대표작들은 모두 자기표절의 결과로 생성된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다.

 

4. 나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애국가로 부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작곡한 〈애국가〉가 어찌하여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노래를 차용한 ‘표절’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독자적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선율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애국가〉가 과연 ‘애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에키타이 안에게 있어 표절과 자기표절은 일신의 영달을 위한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표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 철학, 역사, 자부심, 비전 등이 담기고,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정서적 공감대 형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와 평등까지 고취시킬 수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기상이 있는 선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전통장단과 악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주제, 또는 자신이 특정 작품에서 썼던 주제를 다시 활용하여 창작하는 것은 여러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창작기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주제로 활용한다든가, 전반적으로 동일한 곡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과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며,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 표절임을 확인한 이상 공식적 행사에서 이를 부르기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우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정통성과 품격을 갖춘, 대한민국의 법정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목, 2020/09/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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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2]

도로원표는 왜 칭경기념비전 앞에 놓여 있을까?
일제강점기에 모든 길은 ‘황토현광장’으로 통했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라진 옛 문화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서울시가 처음 10개의 표석(標石)을 설치한 것이 지난 1985년 10월 30일의 일이었다. 이 숫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히 증가하여 지금은 시내 곳곳에 대략 300여 개가 넘는 표석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근대시기 신문사 터와 관련한 것도 다섯 개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사 터’ 표석은 최초에 설치된 10개의 표석군에 포함되어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자리하였고, 그 후에 황성신문(2005년), 조선일보(2005년), 동아일보(2006년), 대한 매일신보(2007년)의 표석도 차례대로 추가되었다. 다만, 독립신문사의 경우 2014년에 이르러 원위치 재고증 문제가 불거지면서 옛 독일영사관 자리에 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앞뜰에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어 설치된 상태이다.

 

근대 시기 신문사 창간사옥 터 관련 표지석 설치 현황

그런데 이들 신문사는 사옥의 위치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닌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 가운데 어느 장소에 표석을 설치하는지가 간혹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논란을 피하고자 대개는 창간사옥(創刊社屋)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며, 실제로 표석 표면에는 ‘무슨무슨 신문 창간사옥 터’라는 표제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황성신문의 경우는 예외였다.
현재 ‘황성신문(皇城新聞) 터’ 표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의 계단 바로 옆 도로를 등진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이 신문사의 사옥이 있었다고 하는 ‘종로 백목전 후곡전 면주전도가(鍾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都家)’ 터와 인접한 지점이다. 서울시에서 이 표석을 세운 때가 2005년 12월이라 하였으니, 필시 ‘을사조약 100년’을 되새기는 뜻에서 만들어진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간사옥도 아닌 장소에 구태여 표석이 설치된 까닭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신문사 사옥 자체의 이동 연혁을 살펴보면, 황성신문사는 창간 이후 무려 4차례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더구나 현재 표석이 설치된 자리는 4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자 ‘창간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신문사가 처음 자리한 곳은 ‘중서 징청방 황토현 제27통 7호 전 우순청(中署 澄淸坊 黃土峴 第二十七統 七戶 前 右巡廳)’이었다.
‘황토현(황토마루)’은 지금의 광화문네거리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며, ‘우순청’은 한성부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구역의 순라(巡邏)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황성신문사는 옛 우순청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3년이 지나 이곳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 게재된 ‘사고(社告)’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왼쪽)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는 조야송축소에서 추진하는 칭경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성신문사 자리(옛 우순청터)가 선정되어 다른 곳으로 신문사 사무소를 옮긴다는 내용의 사고가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 황성신문사가 창간사옥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던 옛 우순청 건물을 헐어내고 1903년 9월 2일에 완성된 칭경기념비와 기념비전의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돌문이 ‘만세문’이다.

 

본사(本社)를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서 기념비(紀念碑)를 수립차(竪立次) 훼철(毁撤)하기로 본사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를 송교 동대로 남일가(松橋 東大路 南一家)로 이정(移定)하고 본 신문은 내(來) 11일부터 부득이 정간(停刊)하였다가 본사를 하처(何處)든지 확정한 후에 계속 발간하겠사오니 제군자(諸君子)는 조량(照亮).

 

여기에 나오는 ‘기념비’는 1902년에 해당하는 고종황제의 등극 40년과 보령(寶齡)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리는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하여 중흥송덕(中興頌德)의 내용을 담아 1903년 9월 2일에 완공된 비석이다. 이때 현직 고위관리가 중심이 된 관주도 성격의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 의해 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토현에 있는 기로소(耆老所, 세종로 149번지)의 남쪽 옛 우순청(右巡廳, 세종로 142번지) 자리가 선택되었으므로 당시 이 건물을 빌려 사용하던 황성신문사는 이곳에서 퇴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전자(篆字)는 황태자(순종)의 글씨이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원수부 회계국총장 민병석(閔丙奭)이 썼다. 비각의 전면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 글씨 역시 예필(睿筆)이라고 하여 황태자가 1902년 9월에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쪽 전면에 조성된 돌문에는 영왕(英王, 영친왕)이 6세에 썼다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고, 이곳과 이어진 벽돌담장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글자문양이 만들어져 있었다.

(왼쪽)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실린 시가지원표 위치 및 1, 2등 도로표 가운데 ‘경성부’ 관련 내용이다. 여길 보면 최초 시가지원표의 위치가 ‘광화문통 황토현광장’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리는 종로와 광화문통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오른쪽)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이정원표’를 제작 설치할 것을 알리는 ‘관통첩’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원표는 3미터 정도의 소나무 사각기둥에 페인트를 칠하여 거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작양식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화문네거리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칭경기념비전(稱慶紀念碑殿)의 건립내력이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이 비석 말고도 일제강점기에 추가된 또 다른 공간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시가지원표(市街地元標)’ 또는 ‘도로원표(道路元標)’의 설치장소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135호’를 통해 전국 각지 10개 도시에 대해 시가지원표의 위치와 일등 및 이등도로의 구간이 처음으로 지정되었는데, 이때 경성지역에는 “광화문통 황토현광장(光化門通 黃土峴廣場)”이 원표 위치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목포, 인천, 의주, 원산, 양양 등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는 이곳 시발점인 ‘황토현광장’으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독부 고시 제135호(1914.4.11)에 의한 주요 도시 시가지원표 위치지정내역

 

이와 아울러 해를 바꿔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관통첩(官通牒) 제18호’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시가지 원표로 지정된 자리에다 ‘이정원표(里程元標)’를 세울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 원표에는 경성, 관할도청 소재지 및 부근의 주요한 시읍(市邑) 또는 항진(港津)에 이르는 이정(里程)을 기재할 것.
2. 이정(里程)은 원표간의 거리에 따를 것. 단, 원표의 건설이 없는 시읍과의 거리는 그 시읍의 중앙부분에 있어서 적당한 지점을 선정하여 그 지점과의 거리에 따를 것.
3. 표주(標柱)는 지방청(地方廳), 잡급급잡비(雜給及雜費) 중에 ‘잡비’로써 건설할 것.
4. 표주(標柱)의 촌법(寸法)은 1척각(尺角, 사방 1자), 지상(地上) 약 10척(尺, 3.03미터)으로 십분 건조(十分 乾燥)한 송재(松材)를 사용하고 뼁키칠(ペンキ塗)을 할 것. 단, 현재 원표 위치에 건설된 표주로서 이에 맞지 않는 것은 건체(建替)할 때에 개정(改正)할 것.
5. 원표서식(元標書式)은 좌(左)의 예(例)에 따를 것.

 

이 내용에 따르면 최초로 설치된 ‘이정원표’는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소나무 기둥으로 만들어 여기에 페인트칠을 하여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설치된 ‘이정원표’의 실물이 궁금하여 여러 사진자료를 뒤져보았으나 당최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더니, 어찌어찌 간신히 하나 찾아낸 것이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일대의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주변의 거리풍경이 담긴 사진엽서이며, 이것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이정원표’의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로 평가된다. 이 엽서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을 확대해 보면 경계부분에 간신히 ‘이정원표’의 실물이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수록된 겨울 풍경 스케치 사진에 우연하게도 그때 막 제작 설치한 ‘도로원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에 도로원표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자료이다. (오른쪽) 현재 칭경기념비전 앞쪽에 남아 있는 석재 도로원표의 모습이다.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후면의 글씨는 깎여 나갔으나, 다행히도 이것과 똑같은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소화 10년(1935년) 5월 건설”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엽서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표주’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지점 바로 안쪽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하얀색 나무기둥에 ‘이정원표(里程元標)’라는 글씨를 또렷이 새겨놓은 형태가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그려놓은 서식과 그대로 닮아 있다. 어쨌거나 이 엽서에 담긴 광경은 이정원표의 설치지점이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토현광장의 중앙이 아니라 기념비전의 옆쪽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념비전 앞쪽에 남아있는 돌로 만든 시가지원표는 언제 처음 등장한 것일까?
우선 현존하는 실물을 살펴보면 2단 높이로 쌓아 올린 표석의 전면에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새긴 글자가 또렷하고, 양 측면에는 각각 북부지역 9개 도시 및 남부지역 9개 도시와의 거리가 천(粁, 킬로미터) 단위로 적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뒷면에는 원래 설치시기를 새겨놓은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해당 구절이 완전히 깎여나간 상태이므로 아쉽게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전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것도 눈에 띈다.
元標眞位置 自本標中心 距離五五米 方向南六九 度一三分西 (원표의 진짜 위치는 이 표석의 중심으로부터 55미터의 거리이며, 방향은 남서쪽 69도 13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치는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황토현광장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관보에 고시된 원표의 지정위치는 교차로의 한 가운데이지만 교통의 편의상 도로원표는 옆으로 비껴난 기념비전의 앞에 따로 설치해둔 것이라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도로원표의 뒷면이 깎여나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한하게도 이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로 똑같은 모양과 내용의 도로원표가 둘씩이나 존재하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어디에서 수습되어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이곳에 남아 있는 쌍둥이 도로원표를 통해 이 원표 자체는 “소화10년(1935년) 5월 건설(建設)”된 사실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때인가 옛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겨울 풍경을 스케치한 보도 사진에서 기념비전 앞에 만들어놓은 도로원표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채록된 유일한 도로원표의 사진자료가 아닌가 하는데, 이를 통해 나무기둥 이정원표를 대체하여 돌로 만든 도로원표가 새로 등장한 때가 최소한 1935년 이전이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일제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의 하나는 바로 국도(國道)였다. 1938년 4월 4일에 제정된 ‘제령(制令) 제15호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에 따르면, 도로는 국도,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 등의 4종류로 나뉘고 이 가운데 국도는 다음 각호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총독이 이를 인정하는 노선으로 정해졌다.

1. 경성부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요항부(要港部) 소재지 또는 개항(開港)에 이르는 노선.
2. 도청소재지, 개항 또는 추요지(樞要地), 비행장 혹은 철도정거장 상호를 연락하는 노선.
3. 군사상 중요한 노선.
4. 경제상 중요한 노선.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국도라는 개념의 설정은 다분히 긴급한 군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8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일등도로(一等道路)는 국도(國道)로, 등외선(等外線)도 개수 승격, 비상시하(非常時下) 경기(京畿)의 각등도로망(各等道路網) 대경성중심(大京城中心)으로 확충」 제하의 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얼마 전 총독부로부터 공포된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은 그 실시를 5월 1일부터 하기로 하였던 것을 연기하여 전조선적(全朝鮮的)으로 도로망의 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는데 경기도에서도 이 도로령 실시를 앞두고 도내 전반에 긍(亘)한 도로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다. …… 더욱이 국제도시 대경성을 중심으로 각군부(各郡府)에 방사선식(放射線式)으로 관통되어 있는 도로망을 차제에 더욱 한번 확충 강화하여 비상시하의 통운(通運)을 원활(圓滑)케 할 터이며 특히 비상시하의 자원개발(資源開發)에 도로가 가진 바 사명을 다하게 하도록 도로정책에 대한 적극책을 취하리라고 한다. (하략)

이러한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956호’를 통해 전국 각지에 거미줄처럼 얽힌 95개에 달하는 국도노선이 처음으로 인정 공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경성(京城, 도로원표)을 기점으로 하는 노선만을 간추려보면, 부산선(1호), 신의주선(2호), 목포선(3호), 웅기선(4호), 청주선(5호), 춘천선(6호), 해주선(7호), 진해선(8호), 인천선(9호), 군산선(10호), 여수선(11호), 송정리선(36호), 경성비행장선(37호), 강릉선(62호)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길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국도 1호선이라든가 국도 4호선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노선이 완전히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해방 이후 1963년 2월 5일에 이르러 ‘각령 제1191호 1급국도와 2급국도의 노선지정의 건’이란 것이 있었고, 다시 1971년 8월 31일에 이르러 ‘대통령령 제5771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이 공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실린 최초의 국도 노선 지정 내역이다. 이러한 국도노선 지정은 표면상으로 조선도로령의 제정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시체제기라는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한 도로망 구축이 진짜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목포에서 신의주를 종주하여 연결하는 ‘국도 제1호선’은 바로 이때 처음 나타난 개념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국도 노선은 ‘경성’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것이 기본이라면, 1971년 이후에 설정된 국도 노선은 국토의 끝과 끝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따라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가 지녀왔던 국도의 기점(起點)이라는 위상은 바로 이 시점부터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997년 12월에는 광화문네거리의 남서쪽 방향에 새로운 도로원표와 상징물이 만들어지면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사적 제171호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1969년 7월 18일 지정)인 국가문화재 구역 안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저 도로원표가 한낱 ‘일제잔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조차도 품어야할 근대시기의 역사유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지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목, 2020/09/2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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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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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제13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개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주관하는 제13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
고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지수걸 공주대 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축사, 박윤재 경희대 교수의 격려사, 수령자 조수룡 박사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심사대상은 2018년 8월과 2019년 2월에 수여된 21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
논문으로 3월 14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23일 심사위원회에서 조수룡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이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 교수를 비롯하여 이태훈 연세대 교수, 정용욱 서울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김윤희 전주대 교수,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용서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학예실장, 조형열 동아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위원회는, 조수룡 박사의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이 정치사, 경제사, 국제관계사를 넘나들며 1950년대 북한의 전후복구 및 사회주의 이행 전략이
‘자력갱생’ 경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밝혀내어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그 선정이유를 밝혔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북소관계 자료를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북한사회의 내적 발전과정을 객관화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설명한 대목은 이 논문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준 지점이라고 평가했다.

• 김혜영 선임연구원

수, 2020/11/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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