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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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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admin | 화, 2020/05/26- 21:48

[인터뷰]

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여러 가지 이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답 : 저는 체육대학에서 운동재활과 트레이닝을 전공했어요. TV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라
고 나오잖아요. 그런 스포츠 관련학과입니다. 저는 운동재활 쪽에 집중했는데 그러다보니 트레이닝도
당연히 하게 되었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처음에 풍납동에 아산병원, 그때 당시에는 중앙병원이었는데 그곳 건강증진센터 내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그러다 학교 내의 생리학 실험실연구소에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됐죠. 병원 근무 후 모교에서 자리가 생겨서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모교 연구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다 집안에 어른들이 아프시고 동생도 아프게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매장 투자방식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초창기 한 15개 정도 매장이 있을 때 같이 시작했죠

문 : 투자만 하신건가요?

답 : 돈이 조금밖에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매장 투자를 결심했죠. 조금 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당시 저를 좋게 봐준 실장님이 계신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우신 분이죠. 그러다 나중에는 회사에 정상적인 출근을 했어요.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기 전에 조교 임기를 마치고 당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천대학교에 강사로 들어갔어요. 인천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님이 제가 진행하는 운동생리학 실험을 좋게 봤는지 마침 그때 강의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인천대에 외부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지금도 그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처음에는 매장 마케팅 업무를 했어요. 매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로컬 마케팅을 제 지인과 주변 인맥에 도움을 받아 진행했죠. 그러면서 규모가 조금씩 늘어났죠. 마케팅이라는 게 들어간 비용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케팅전문가들은 이번 홍보는 얼마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분석하는데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글로벌 IT 기업에 근무하던, 옛날 소대원이었던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면서 그 회사의 마케팅 방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실전마케팅이란 말을 써가면서 어떤 제품을 팔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제품과 브랜드의 가치를 함께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그 중에서 가수 에픽하이와 함께 콜라보한 제품을 출시해 보았죠. 이후 회사 차원의 자체 컴필레이션 음반도 3장이나 진행했어요. 그 외 홈쇼핑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했었죠. 그 당시 일과 강의를 병행하다가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강의는 조금씩 줄여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말마다 실험이 있으면 실험에는 꼭 참가하고 그랬었죠. 제가 또 실험실 출신이어서 실험에 대한 재미는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요. 마우스 테스트나 행동테스트 이런 것들을 선배 교수님이랑 종종 진행했었어요.

문 : 커피 티백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답 : 삼각뿔 모양의 커피 원두 티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먹을 필요가 있냐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했죠. 삼각뿔 모양이니까 안에 들어가는 양도 늘려야 했어요. 우려내는 정도를 고려해서 부직포가 아니라 실크타입의 비싼 재료를 썼어요. 그래서 투과율도 좋고 부직포 티백에서 나오는 잔맛을 최소화했어요. 부직포 티백에서는 차맛을 왜곡시키는 잔 맛이 나거든요. 커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 CJ 홈쇼핑에 런칭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완판이란 걸 해봤어요. 이렇게 하면 브랜드가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저를 믿고 함께 해준 홈쇼핑 담당자님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의 조언이 지금도 제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문 :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저는 1991년도, 대학교 2~3학년 때 연구소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 내력상 알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초대회장이셨어요. 4·19 당시 3학년으로 법대를 다니셨어요. 4월 19일에 아버지는 교내 학생들과 교문을 뚫고 나가다가 선두에서 바로 경찰한테 잡혀서 끌려가셨는데 이승만이 하야한 날 지프차에 실려 있다가 집 앞에 버려졌대요. 답십리 해병대사령부에 잡혀있으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다가 이승만이 하야한 것도 몰랐대요. 그러다 갑자기 지프차 타라고 했대요. 집에 와보니까 아버지 본인의 영정이 있더래요. 행방불명이니까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때 빨리 잡히신 게 그 나마 다행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 동지였던 노희두 씨는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지금 4.19묘지에 계세요. 아버지는 법대 졸업 후 4.19 이후 상황에 회의가 들었는지 군대에 바로 갔고 제대 후에 교직원을 하시다가 교수를 하셨죠. 현재는 돌아가셔서 4.19 묘지에 여러 동지분들과 함께 계세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문 : 어머님도 연구소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답 : 제 어머니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친손녀에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찬’자 ‘기’자 이신데 일제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중 일찍 돌아가셔서 해방되고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분들이 오실 때 유골로 같이 오셨어요.

 

김창숙선생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주로 지내셨다고 하셨구요. 어머님은 김구 선생님(어머니는 김구 선생님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라구요)도 직접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일화로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곰보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
려고 할 때 김창숙 선생님이 혼자 시위했는데 외증조부의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따라다녔대요. 그리고 제가 여기 효창동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과 유년기 시절에는 말썽을 부리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러면 안 된다고 일본놈들과 독재자들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냐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라서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초창기부터 알았던 거죠.

문 : 가입은 2015년에 하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는 저한테 친숙한 단체예요. 이질감이 없는 곳이죠. 제가 결혼할 때 김시업 선생님이 주례를 해주셨는데 그분이 심산 김창숙 연구소 회장을 하시면서 심산상을 만드셨고 1992년에 고 임종국 선생이 수상자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신 받았죠. 저한테는 그렇게 친숙한 단체라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저는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 있으면서 탈북자 학교를 가끔 후원했어요. 아버지도 실향민이고 하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후원 요청을 하니까 좀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 회사가 내 회사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2015년도에 회사를 나오게 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연구소 후원을 시작했죠.

문 : 효창독립커피 이야기를 해볼까요. 처음에 제안하신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답 : 제가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한 게 2005년에서 2015년까지, 투자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네요. 그러다 보니 커피업계를 두루두루 알아요. 지금 현직에 계신 분도 알고 있고요.
효창독립커피도 그런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죠. 방실장님을 만나서 최초로 그 말씀을 드렸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굉장히 좋은 취지, 정신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주변에서 연구소의 취지나 사업내용을 잘 모르더라고요. 더군다나 젊은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그래서 연구소를 더 많이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효창독립커피 사업을 떠올려 그 제안서를 만들어서 연구소에 왔던 거죠. 젊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커피라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그리고 제안의 취지, 사업 목표와 방안에 대해 방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문 : 효창독립커피를 위해 꾸려진 팀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답 : 제가 우선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방실장님에게 커피를 통한 수익사업을 제안하니까 방실장님이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셨죠. 이후 제가 브랜드 취지를 이해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들과 논의하기 위해 카페리즈의 강인규 대표를 만났어요. 그분은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고, 정말로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에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분, 그분이 효창독립커피의 원두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유통은 성빈인터내셔널의 전혁준 대표가 맡아주기로 했어요. 이렇게 두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효창독립커피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죠. 지금 효창몰이라는 쇼핑몰을 구축중이고 그곳을 플랫폼으로 효창독립커피와 또 다른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이고요. 여기에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차리석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그 후손인 차영조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가 그림을 그려주셨고 켈리그래프 예술가도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업과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예술가가 한데 모여 뜻깊은 효창독립커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 사업의 제안자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답 : 막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또 여유자금이 생긴다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에 쓰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엄청나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좋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자부심은 본인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빛나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숨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업의 수익을 통해 그런 세상보다는 우리의 선대가 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그분들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요. 그 후손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해방 후 남한에서 수립된 정권에 의한 전도된 가치관의 범람, 불의와 정의의 뒤바뀜으로 인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 보편적인 정의를 붕괴시키는 것, 허세와 위선, 기만과 권모술수로 인간관계를 파멸시키고 나아가서 남북 분단 상황을 조장, 이용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 하나라도 바치거나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민주주의와 모두의 정의를 위한 희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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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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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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