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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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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admin | 화, 2020/05/26- 21:48

[인터뷰]

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여러 가지 이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답 : 저는 체육대학에서 운동재활과 트레이닝을 전공했어요. TV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라
고 나오잖아요. 그런 스포츠 관련학과입니다. 저는 운동재활 쪽에 집중했는데 그러다보니 트레이닝도
당연히 하게 되었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처음에 풍납동에 아산병원, 그때 당시에는 중앙병원이었는데 그곳 건강증진센터 내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그러다 학교 내의 생리학 실험실연구소에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됐죠. 병원 근무 후 모교에서 자리가 생겨서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모교 연구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다 집안에 어른들이 아프시고 동생도 아프게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매장 투자방식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초창기 한 15개 정도 매장이 있을 때 같이 시작했죠

문 : 투자만 하신건가요?

답 : 돈이 조금밖에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매장 투자를 결심했죠. 조금 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당시 저를 좋게 봐준 실장님이 계신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우신 분이죠. 그러다 나중에는 회사에 정상적인 출근을 했어요.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기 전에 조교 임기를 마치고 당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천대학교에 강사로 들어갔어요. 인천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님이 제가 진행하는 운동생리학 실험을 좋게 봤는지 마침 그때 강의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인천대에 외부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지금도 그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처음에는 매장 마케팅 업무를 했어요. 매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로컬 마케팅을 제 지인과 주변 인맥에 도움을 받아 진행했죠. 그러면서 규모가 조금씩 늘어났죠. 마케팅이라는 게 들어간 비용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케팅전문가들은 이번 홍보는 얼마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분석하는데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글로벌 IT 기업에 근무하던, 옛날 소대원이었던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면서 그 회사의 마케팅 방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실전마케팅이란 말을 써가면서 어떤 제품을 팔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제품과 브랜드의 가치를 함께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그 중에서 가수 에픽하이와 함께 콜라보한 제품을 출시해 보았죠. 이후 회사 차원의 자체 컴필레이션 음반도 3장이나 진행했어요. 그 외 홈쇼핑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했었죠. 그 당시 일과 강의를 병행하다가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강의는 조금씩 줄여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말마다 실험이 있으면 실험에는 꼭 참가하고 그랬었죠. 제가 또 실험실 출신이어서 실험에 대한 재미는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요. 마우스 테스트나 행동테스트 이런 것들을 선배 교수님이랑 종종 진행했었어요.

문 : 커피 티백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답 : 삼각뿔 모양의 커피 원두 티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먹을 필요가 있냐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했죠. 삼각뿔 모양이니까 안에 들어가는 양도 늘려야 했어요. 우려내는 정도를 고려해서 부직포가 아니라 실크타입의 비싼 재료를 썼어요. 그래서 투과율도 좋고 부직포 티백에서 나오는 잔맛을 최소화했어요. 부직포 티백에서는 차맛을 왜곡시키는 잔 맛이 나거든요. 커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 CJ 홈쇼핑에 런칭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완판이란 걸 해봤어요. 이렇게 하면 브랜드가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저를 믿고 함께 해준 홈쇼핑 담당자님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의 조언이 지금도 제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문 :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저는 1991년도, 대학교 2~3학년 때 연구소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 내력상 알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초대회장이셨어요. 4·19 당시 3학년으로 법대를 다니셨어요. 4월 19일에 아버지는 교내 학생들과 교문을 뚫고 나가다가 선두에서 바로 경찰한테 잡혀서 끌려가셨는데 이승만이 하야한 날 지프차에 실려 있다가 집 앞에 버려졌대요. 답십리 해병대사령부에 잡혀있으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다가 이승만이 하야한 것도 몰랐대요. 그러다 갑자기 지프차 타라고 했대요. 집에 와보니까 아버지 본인의 영정이 있더래요. 행방불명이니까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때 빨리 잡히신 게 그 나마 다행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 동지였던 노희두 씨는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지금 4.19묘지에 계세요. 아버지는 법대 졸업 후 4.19 이후 상황에 회의가 들었는지 군대에 바로 갔고 제대 후에 교직원을 하시다가 교수를 하셨죠. 현재는 돌아가셔서 4.19 묘지에 여러 동지분들과 함께 계세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문 : 어머님도 연구소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답 : 제 어머니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친손녀에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찬’자 ‘기’자 이신데 일제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중 일찍 돌아가셔서 해방되고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분들이 오실 때 유골로 같이 오셨어요.

 

김창숙선생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주로 지내셨다고 하셨구요. 어머님은 김구 선생님(어머니는 김구 선생님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라구요)도 직접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일화로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곰보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
려고 할 때 김창숙 선생님이 혼자 시위했는데 외증조부의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따라다녔대요. 그리고 제가 여기 효창동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과 유년기 시절에는 말썽을 부리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러면 안 된다고 일본놈들과 독재자들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냐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라서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초창기부터 알았던 거죠.

문 : 가입은 2015년에 하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는 저한테 친숙한 단체예요. 이질감이 없는 곳이죠. 제가 결혼할 때 김시업 선생님이 주례를 해주셨는데 그분이 심산 김창숙 연구소 회장을 하시면서 심산상을 만드셨고 1992년에 고 임종국 선생이 수상자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신 받았죠. 저한테는 그렇게 친숙한 단체라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저는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 있으면서 탈북자 학교를 가끔 후원했어요. 아버지도 실향민이고 하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후원 요청을 하니까 좀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 회사가 내 회사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2015년도에 회사를 나오게 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연구소 후원을 시작했죠.

문 : 효창독립커피 이야기를 해볼까요. 처음에 제안하신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답 : 제가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한 게 2005년에서 2015년까지, 투자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네요. 그러다 보니 커피업계를 두루두루 알아요. 지금 현직에 계신 분도 알고 있고요.
효창독립커피도 그런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죠. 방실장님을 만나서 최초로 그 말씀을 드렸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굉장히 좋은 취지, 정신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주변에서 연구소의 취지나 사업내용을 잘 모르더라고요. 더군다나 젊은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그래서 연구소를 더 많이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효창독립커피 사업을 떠올려 그 제안서를 만들어서 연구소에 왔던 거죠. 젊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커피라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그리고 제안의 취지, 사업 목표와 방안에 대해 방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문 : 효창독립커피를 위해 꾸려진 팀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답 : 제가 우선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방실장님에게 커피를 통한 수익사업을 제안하니까 방실장님이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셨죠. 이후 제가 브랜드 취지를 이해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들과 논의하기 위해 카페리즈의 강인규 대표를 만났어요. 그분은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고, 정말로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에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분, 그분이 효창독립커피의 원두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유통은 성빈인터내셔널의 전혁준 대표가 맡아주기로 했어요. 이렇게 두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효창독립커피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죠. 지금 효창몰이라는 쇼핑몰을 구축중이고 그곳을 플랫폼으로 효창독립커피와 또 다른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이고요. 여기에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차리석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그 후손인 차영조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가 그림을 그려주셨고 켈리그래프 예술가도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업과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예술가가 한데 모여 뜻깊은 효창독립커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 사업의 제안자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답 : 막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또 여유자금이 생긴다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에 쓰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엄청나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좋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자부심은 본인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빛나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숨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업의 수익을 통해 그런 세상보다는 우리의 선대가 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그분들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요. 그 후손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해방 후 남한에서 수립된 정권에 의한 전도된 가치관의 범람, 불의와 정의의 뒤바뀜으로 인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 보편적인 정의를 붕괴시키는 것, 허세와 위선, 기만과 권모술수로 인간관계를 파멸시키고 나아가서 남북 분단 상황을 조장, 이용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 하나라도 바치거나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민주주의와 모두의 정의를 위한 희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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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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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수, 2020/12/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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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새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위해 애쓰시는 회원 여러분과 임직원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코로나19로 고생하시는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든 분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깊은 인내심을 상징합니다. 특히 하얀 소는 신성하여 상서로운 일
이 많이 생기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연구소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거듭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은 우리 연구소가 창립 30주년을 맞습니다. 선생께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보면서 ‘세계만방이 한집이다. ’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우려하며 <친일문학론>을 펴내셨고 이후 친일파의 실체를 밝히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후학들이 선생의 뜻과 정신을 이어가기를 다짐하고 ‘반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3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왔던 해방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는 역설을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선생께서 일제침탈의 잔혹상을 다시 생각하셨던 1965년 당시 한국사회는 ‘친일파’가 득세 했던 시기였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 핵심이 친일세력이었으며 그 군부는 미군정 이후 국가의 행정, 사법 권력을 장악했던 친일파를 거침없이 호위 세력으로 이용한 때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친일의 핵심적인 문제가 ‘정신’ 곧 ‘가치관’, ‘역사관’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가치관, 역사관에 동화된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백성을 수탈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교화와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이며 독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새해는 해방 76주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변화를 이루었는지, 그 변혁을 위해 우리 연구소 구성원 모두 선생의 뜻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이 논의의 중심이 되어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남북 8천만 겨레의 미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 격렬하게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검찰, 사법, 행정 개혁의 시작이 선생께서 이루려 했던 친일 잔재 청산, 친일파의 역사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검찰, 사법, 행정 체계와 제도가 일제의 통치방식을 수용했으며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검찰 권력의 약화라는 취지만으로 접근하는 개혁 방식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검찰 권력을 포함한 행정, 사법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고 미래 우리 사회공동체를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핵심적 가치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사실을 사회공동체가 함께 확인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연구소 구성원들이 더 큰 열정과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 권력자, 재산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 시대 지식인, 권력자, 부자들의 회심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새해 남북 8천만 겨레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상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 함세웅

월, 2021/01/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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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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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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