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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9] 바이러스 격리 이후 세계는 개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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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9] 바이러스 격리 이후 세계는 개선될 수 있다

admin | 금, 2020/05/08- 22:15

엘리자베스 여왕은 최근 1939년에 유행했던 노래를 회상시키며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We will meet again”라고 말했다. 우리를 고무시키는 발언이며 정말 필요한 언급이었다. 그런데 팬데믹 이후 우리가 기대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위기를 함께 대처해온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세상은 온갖 종류의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불평등은 국가 간뿐만 아니라 개별국가 안에서도 만연했다.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 내에서 수천 만 명이 의료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불필요한 질병에 시달렸다. 잘못된 긴축정책으로 유럽연합 내 취약한 시민들이 공적 지원과정에서 소외 당했다.

브라질과 볼리비아부터 폴란드와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반-민주적 정치가 성행하고 있다. 팬데믹 과정에서 공유한 경험들이 상기에 언급한 문제들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여왕이 위에 인용한 노래가 나온 지 오래지 않아, 유엔과 통화기금 그리고 세계은행 등이 1944-5년 사이에 탄생하면서 ‘다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나라마다 발전을 이루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몇 년간 식량부족을 겪었던 영국의 경우, 심각한 영양실조라는 사태에 직면했다. 필요한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영국은 합리적인 사회적 지원책을 통하여 부족하나마 식량을 골고루 나누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영양실조에 있던 계층은 어느 때보다 상태가 개선되었다. 비슷한 일이 의료분야에서 전개되어 함께 나누는 건강관리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을 겪은 1940년대를 지나면서 영국과 웨일즈 지역의 신생아 평균수명이, 이전 십 년간에 1.2년이 늘어난 반면에 6.5년이 늘어났으며, 여성의 경우에는 1.5년에서 7년이 연장되었다.

복지국가라고 알려진 새로운 시스템이 출현하면서 평등이 추구되고 빈민계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이후에도 보다 개선된 평등을 주장해온 Aneurin Bevan은 1948년 맨체스터에 있는 the Park Hospital에서 처음으로 국가의료서비스(NHS)를 시작하였다.

현재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상기에 언급한 것과 같은 긍정적인 무엇이 전개될 수 없을까?

과거에서의 교훈은 위기를 어떻게 대처했으며, 무엇을 핵심적으로 다루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지점에서 정치가와 일반 시민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이라는 공화국이 전쟁과정에 식량부족과 의료관리를 잘 해결하고 개선시킨 반면에, 같은 시기인 1943년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인도의 벵갈지역에 지독한 기근이 발생하여 3백만 명이 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의 통치자였던 Raj 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현재 진행중인 팬데믹에 대응하는 정치과정에 평등이라는 주제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내 사망자를 보면 백인보다 흑인이 비교할 수 없는 비율로 죽어가고 있다. 시카고의 예를 보자면 주민 구성의 1/3도 안되는 흑인들이 사망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빈민계층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브라질과 헝가리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실정이다.

인도는 특히 심각하여 불평등한 상황이 광범하게 존재한다. 인도가 독립하여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한 이후에는 기근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억압 받는자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위험에 처한 이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인, 공공적 토론을 다양한 직간접적인 수단을 통하여 여론의 자유를 억제하고 정부기관이 여러 제약을 강화하고 있다.

부유층에는 현대적 의료가 진행되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의료조치도 이루어 지지 않는 대비(contrast)와 현대화된 카스트 제도의 불평등에 가져오는 치명적인 비대칭 상황에 대하여, 이번 계기를 구실로 삼아 팬데믹의 대처를 평등하게 전개할 수 있는 모범의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에 관한 관심은 보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기차와 버스 등 공공교통수단을 포함하여 갑작스런 봉쇄조치를 극적으로 취하면서, 고향에서 수백 마일 떨어져 일하고 있는 타지역 이주 노동자들, 가난 중에 가장 가난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상황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

물론 ‘거리두기’가 바이러스의 전염을 억제한다는 것은 확실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러나 이는 봉쇄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상응한 조치인 수입, 식량, 의료제공과 접근성 등이 함께 결합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도에는 NHS같은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거대한 불평등을 방치한 채, 팬데믹에 대처한다면 얻을 교훈은 없다. 현재대로라면, 슬프게도 우리가 다시 만나는 장소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불평등한 세상보다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평등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은 많은 나라에서 고통을 줄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 평등해진 세상을 설계하는 일에 많은 아이디어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제 반도 진행되지 않은 듯한 위기의 과정 속에 감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꿈꿀 수는 없을까?

 

아마티야 센(Amartya Sen)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DI)를 주도하였고 현재 하버드의 Nobel Thomas W Lamont 과정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참고자료

<보충자료. 한겨레 신문사와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인터뷰기사> 협동조합 가치, 위기 때 더 빛나 “코로나 해법도 연대·협력에서 찾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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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제는 대의적 제도정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보적 경쟁과 견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

이래경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12일 제1기 시민기자학교 첫 강좌를 열어주셨는데요

예비 시민기자 수강생들이 품격있는 강의를 들었다고 아주

반응이 좋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다시 인터뷰어로 모시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 문1 :

먼저 선생님께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관심 가지게 되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신지요?

▷ 답 : 우선 제게 ‘직접민주주의뉴스’ 발상이 매우 참신하게 다가옵니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청와대와 여의도에만 몰려서 모든 뉴스 미디어들이 제도권 정치에 쏠려 있었는데, 이제 20여 년 세월이 지나서면서 시민들이 주체가 되고 시민이 뉴스를 만든다고 하니, 방향성과 의미가 크게 느껴집니다.

직접민주주의가 새롭게 거론되는 이유는 국민들 대수가 대한민국 정치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하는 문제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고,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여의도 정치로 과연 한국사회가 비전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실망감에 있습니다.

때마침 ‘직접민주주의’ 전도사로 알려진 브루노 카우프만(스위스 정부가 임명한 민간 외교관)의 방한이 있었고 이를 후원하는 Democracy International 이라는 독일 퀼른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의 책임자가 저와는 사적인 인연이 있어, 한국에 가면 이래경을 만나 보라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Democracy International의 이사로 계신 이정옥교수를 통해서 연락이 이루어졌습니다.

브루노 카우프만의 방한기간 동안 이루어진 의원회관 강연에서 제가 사회를 보게 되었고 내용을 기사로 담아 프레시안에 기고했는데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이후에 9월말에 열리는 로마 포럼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와서 이정옥교수와 민주화기념사업회 신형식 교수 등 같이 참석했는데 정말 대학 신입생 같은 기분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포럼참여 경험담이 다시 프레시안과 녹색평론에 게재되면서 덕분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모임 자리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외국의 직접민주주의 사례를 실감나게 접하면서 정당에만 위임되던 대의적 법치 시대에서 시민 직접참여의 민치 시대로 접어들고 있구나 하는 직감이 다가 왔습니다.

 

▷문2 :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대의정치는 극장식 민주주의다시민들은 관객으로 참여해 박수치고 분노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2016년 광화문에 모인 촛불시민들은 피흘리지 않고 현직 대통령 탄핵도 이끌어 내고 정권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426일간이나 고공탑에서 농성하다 겨우 지상에 내려온 홍기탁 전 금속노조 파인텍 지회장이라든지 민주정권에서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노동계나 교육계의 지난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를 진단하신다면?

▷답 : 문재인 정부에 대해 자주 비판하게 되는데 너무 비판하지 말라 하는 시민사회 내 요청 겸 경고가 있어서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지만 부담없이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대의정치가 극장식’이라는 말을 뛰어 넘어서 과연 대한민국에 정당다운 정당정치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어요. 실현하고자 하는 강령과 정책이 분명해야만 비로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정당들을 정당적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게는 어느 당이든 확실하게 뭔가를 추진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현재의 한국 정당정치 구조는 선거용, 일회용으로 위임된 정치이지 국민의 뜻을 받드는 대의적 정당 정치라 하기에는 명분과 근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정당 정치가 필요한 까닭으로 제대로 된 전문성 전업성 현안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운동성, 항시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자기 명예를 위해, 득표를 위해, 표에 따라 수시로 정책 발언의 내용이 변하고 얼굴 표정도 바뀌니까 극장식 민주주의라는 욕을 먹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그나마 대한민국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점차로 실현해 온 측면도 있고, 일단 절차적 부분에서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반면에 경희대 김상준 교수는 “대한민국 정치사는 30년 마다 악순환의 고리가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근현대사를 보면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났고 국권을 잃어버렸는데 동학혁명에서 기미년 3.1 만세까지 30년 이다 해방 맞이하고 전쟁 일어났고 4.19 혁명 80년 민주혁명 30년 만에 촛불 혁명 거의 30년 마다 매듭이 지어지듯이 역사가 직선으로 간 것이 아니고 굴곡되고 뒤틀어진 표면을 따라 되돌아 온 듯한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지요?)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성과가 이루어지면서 한걸음씩 양가(兩價)적으로 성취된 내용이 한국 근대사 110년의 민주주의 역사에 존재한다고 평가합니다.

 

▷문3. 선생님께서는 저서 <다른 백년을 꿈꾸자>에서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시민사회의 지도력을 다양한 경로와 채널을 통해 배양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상적 실천의 과정 속에서 모두의 참여가 가능한 열린 구조에 대해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직접민주주의와 접목시킨다면? 어떤 형태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답 :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경험을 보면 일방적인 이데올로기는 매우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게 되죠. 극우적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집단들과 볼셰비즘처럼 편향된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경계하고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변혁의 과정에서는 시민들에 의해 폭발하는 자연 발생성과 이를 극복하고 지도하는 예비된 전문가적인 지도력 조직력의 쌍방 간의 상합적인 주제에 성찰이 필요합니다. 논란은 있지만 그릇과 내용물, 형식과 내용처럼 끝없이 변증적으로 상호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철학적 주제이긴 하지만 복잡계 이론이나 진보적 게임이론 등이 중요한 암시를 줍니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오래된 시스템에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유입되어야 합니다. 자연계를 예로 들자면, 태양이 끊임없이 햇살을 비추면서 지구의 생태적 환경이 조성되는데, 사회 이론으로 치환하자면 태양 에너지를 대신하여 생활의 양극화 내지는 빈곤의 어려움 등 잘못된 현실과 모순이 끊임없이 변화의 동력을 공급해주는 셈이죠. 말하자면 ‘이게 나라냐’ 하는 자각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부여하면서 외부적 에너지를 불어 넣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구체계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계기적) 상황요소, 매개요소 (사회경제적 조건) 임금 차별화, 지역 문제, 세대간, 남녀간 등 변수의 존재와 더불어 행위자로서 주체 요소가 결합이 되어 정(正)의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면서 기존 체제를 뛰어 넘으면 개혁이 일어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추동력이 약하여 기존 체제를 뛰어 넘지 못하면 네가티브(음陰) 루프로 발생하다가 스스로 해체가 되어 사라집니다. 요약하면 기존의 시스템을 뛰어 넘으면 창발 현상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복잡계 이론에서 이르는 변혁입니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폭발성 즉흥성 부분들은 수시로 끓어오르는 반면에 기존 체제를 뛰어 넘어 양의 루프를 형성하는 주체적 역량 즉 새로운 변혁을 일으키는 리더십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리더십의 역량은 항시 준비되고 상황을 예측하고 분석하고 조직하고 예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숫자는 인구 대비해서 세계적으로 매우 많은 편이라고 합니다. 아쉬운 것은 NGO 단체들의 자기 방향성이 함께 더불어 정확히 동기화 되고 같은 방향성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고 우후죽순처럼 되어 벡터적 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죠. 이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NGO 등에서 자각되고 직업적으로 훈련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새로운 변혁의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실질적 동력의 리더십으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습니다. 정확한 방향성을 지니고 조직해 내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문4 : ‘()시민과미래주권자전국회의가 함께 직접민주주의뉴스를 만들었습니다만 시민단체 들간의 협업 컨소시엄 ? 지역에서 민관 협치가 시행 되고도 있는데 제도 정치와 시민정치가 손잡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답 : 무엇보다 제도정치가 우선 일차적이고 따라서 현존의 제도정치를 어떻게 개혁하고 활성화 시켜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도적으로 정치개혁 운동하는 분들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연동형비례제’는 국민들 요구와 실상을 거울처럼 비추어, 이에 기초하여 다원적인 의견을 이끌어내어 종합하는 예술로서 정치를 실현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정치현장의 부조리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 중에 하나가 소선거구제인데, 이런 기득권을 혁파하는 돌파구가 바로 ‘연동형비례제’이죠.

연동형비례제를 통해서 국민들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든 다음 단계로는, 현재의 허세로 개인이 금뱃지를 달고 다니는 구락부적 정치에서 정책실현을 위한 정당 정치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독일 사민당이 비판받고 있지만 독일을 세계적인 모범국가로 키운 데는 정당정책에 한결같이 성실하게 복무해 온 것이 큰 힘이었고, 독일의 현대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온 것은 160년 역사의 사민당이었습니다.

또 하나 정강을 중심으로 한 정책 정당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와 더불어 책임성을 강화시키고 젊은 세력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도로 정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발안제’는 제도정치를 없애자는 의도가 결코 아니고 상보적 경쟁과 견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민발안제가 도입되면 기존 대의 정치가 자극을 받아 활성화 되고 훨씬 책임을 지고 헌신적으로 변하게 된다고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상호 경쟁적이고 상호 보완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문5. 현재 국회는 어떻습니까? ‘연동형비례제를 얘기하니 국회의원 정원을 두고 숫자에 의견이 분분한데요

▷답 : 한국은 타국에 비해(연방국가인 미국만 제외) 국회의원들이 예외적으로 많은 수의 보좌진을 갖고 권력형으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유럽 의회는 정책과 의제 사안을 중앙당 중심으로 운용되면서 의원은 이를 실천하는 개별 멤버로서 역할하면서 소수의 비서진을 필요합니다만, 중앙당 중심의 정책기능이 상실된 한국정치의 현실에서 국회의원은 개인당 보좌진이 7-9명이나 됩니다. 유럽국가 의원의 경우에는 별도의 운전사도 없고 전철 등 공공교통수단을 타고 다닌다면서 보좌진도 정책 코디네이터 정도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국회가 정책집단으로 탈바꿈하려면 의원 개인별 보좌진 대다수를 중앙당의 정책전문 연구요원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리되면 국회의원 정원이 300명이 아니라 500명이 되어도 괜찮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국회의원 임금도 시민들 평균임금 수준으로 낮추자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정치가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를 비하하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국회의원을 호민관으로서 정당하게 예우를 해주고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되 현재 같은 보좌진과 정당 시스템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6 : 대학 시절 학교를 두 번이나 제적당하고 군복무 후 산업 현장에서 일하다 해외 생활도 오래하신 걸로 압니다. 외국 생활하시면서 한국과 많이 비교가 되셨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불황일수록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고 평소 주장하시고, ‘사회적 상속운동을 말씀하시는데요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답 : 학생운동권으로 70년대에 대학을 두 번이나 쫓겨나고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원에 들어가서 용접을 배우려 했지만 노동자 생활은 맞지 않는다는 걸 절감하고 나서 이후 30년간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하계 올림픽이 있던 88년도에 독일 기업과 합자법인을 설립해서 2015년도까지 27년간 최장기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제조업 분야만 2만 명 아웃소싱까지 4만 명 정도의 종업원을 거느린 다국적 기업과 함께 하면서 철도, 상용차, 조선, 철강, 시멘트 등 주로 기계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분야에서 전문적인 식견과 경험을 갖게 된 것이 제게는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느 강연에서 중앙대 김누리 교수가 독일을 어마어마한 일등 나라로 표현하고 한국을 형편없는 삼류로 표현했지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반부패지수CPI가 선진적인 유럽국가들에 근접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명박 시절에 아프리카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정권의 성격과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은 진폭이 매우 큰 사회입니다. 매우 큰 가능성과 동시에 좌절과 절망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일류국가인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게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 중에서는 모범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야 될 일은 많고 손을 보아야 할 부분도 태산 같지만 미래를 향한 잠재력으로 따지면 독일이나 북유럽 보다 한국 사회가 더 크다고 믿습니다.

80년 초 처음으로 독일을 방문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잘 조직되고 관리가 될 수 있었을까 감탄할 정도로 멋진 건축물과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사회제도 등 인프라가 매우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이나 선진국들도 빈 구석이 보이고, 우리나라의 역사적 유물들이 6,25 등 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지고 볼품이 없어졌지만 점차 좋은 점도 발견하게 되고 나름대로 강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영주 부석사를 오르면서 풍광의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거다 이건 유럽 사람들은 도무지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의 어마어마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와 관련해서 저는 한국을 여전히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가능성의 나라라고 믿습니다.

 

▷문7: ▷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만 보아도 외국인들은 감탄을 하고 우리의 자산이 무궁무진 한데요 한국인들은 서구를 추종하고 우리 것을 도외시 해왔고 전통 문화를 잘 살려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답 :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묻는다면 결국은 ‘제도이며 정치의 문제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국내에서 유명해진 캠브리지 대학 교수인 장하준류의 신제도학파 입장이랄까요? “제도가 그 나라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결정한다.”라는 맥락의 저술도 많이 있고 저도 정치가 한 나라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 ‘정치의 우선성’이라고 말할 수 있죠.

여기에 보태어 서구에 비해 동양 사회가 가지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하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서양이 발달한 것은 제도와 절차와 과정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형식은 잘 되어 있는 반면에 유럽의 사회 철학 근본은 주 흐름이 개인적 자유주의와 사적 재산권입니다. 진보적이라는 사민주의 역시 존엄, 정의, 연대를 얘기하는 배경에는 자유주의와 사유재산에 대한 무조건적 존중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항상 갈등과 대립이 상존하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동양의 역사는 그것을 뛰어 넘습니다. 서양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사고는 소위 ‘천부인권적’ 개념인데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과 인격을 부여했다는 피동적 존재로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동양적 유교 사상에서는 ‘천지인 합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합일 상생해서 움직인다는 사상이다. 다른백년 이사이기도 한 이병한 교수는 “천인天人합작이다.”을 말하기도 합니다만 동학으로 돌아오면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는 것. 시천주侍天主, 즉 인간은 신적인 품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신을 향해서 나갈 때 인간과 역사는 발전한다고 파악합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를 ‘양천주養天主론’으로 설파하면서 사인여천使人如天의 큰 가르침을 주셨죠.

이런 맥락에서 서양의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해석에 비해 동양적 사고와 한민족의 역사관이 갖는 잠재력이 훨씬 크고 담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를 해석하고 발굴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인문 학자들의 과제라고 봅니다.

 

▷문8 : 마지막으로 ‘직접민주주의뉴스’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개헌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답: 모두들 직접민주제의 원형은 그리스라고 믿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리스의 시절에는 무작위적인 추첨을 통해서 시민을 대표하는 자를 뽑았기 때문에 추첨 방식이 직접민주주의의 원형이다 하고 생각하는데 이는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현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군중mob과 대중mass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서비스를 노예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그리스 시민들은 일상적으로 철학 문학 정치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이고 모두가 정치에 일가견을 지녔던 프로들이었습니다. 누구나 정치를 맡기면 훌륭히 처리해낼 역량과 식견을 갖춘 시민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현대의 대의적 정치, 선거제적 정치는 대체로 일반시민을 우민화로 만들어 왔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직업정치인들은 ‘정치를 일반 대중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핑계를 댑니다. 소위 엘리트이라는 집단들은 일반 대중은 어리석어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트들이 이야기하는 군중과 대중들이 계기를 통해서 자기 판단력과 결정권을 가지고 성찰력을 지닌 시민으로 변한다면 직접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숙의라는 절차를 만들어서 즉흥성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어떤 정치보다도 직접민주주의, 민치의 시대로 가는 것이 최상의 해결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직접 민주주의의 과제는 바로 지배집단들이 구실로 내세우는 우민성의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계기로써 참여와 과정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제도와 절차적 과정의 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고 ‘직접민주주의뉴스’가 이를 알리고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직접민주제의 핵심인 시민발안제를 전국적인 정치의 제도로 지금 당장 채택하기는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시민사회 내에서도 숙의와 토론 절차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에 기초 단체나 광역 단체에서 하루빨리 먼저 받아들여 시행해 보면서 이를 경험하고 기초하여 국가 단위로 점차 확산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5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김태희: 오늘 긴 시간 동안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좋은 말씀들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래경 : 네~ 수고많으셨어요. 고맙습니다

목, 2019/03/2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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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 공공산후조리원 건립을 지원하고 산후 건강관리 체계를 구축합니다.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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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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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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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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