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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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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admin | 수, 2020/04/22- 02:29

[후원회원마당]

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김해규 후원회원(전 평택한광여중 교사・현 평택인문연구소장)

 

3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올해 2월 퇴직한 김해규 후원회원은 2004년 4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후 평택지역 후원회원 모임 조직, 평택지역 내 일제잔재 조사 자문, 신흥무관학교 국외 답사 등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제자는 물론 동료선생님들과도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교단을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달래며 퇴임의 글을 보내왔다. 퇴임에 즈음하여 김해규 후원회원은 2월 6일 평택지역 인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게 될 평택인문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는 <평택역사산책> <근현대 평택을 걷다> <평택사람들의 길> 등이 있다.- 엮은이

 

역사학이 너무 좋아 역사책이라면 무엇이든 읽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역사박사’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과목 잘해봤자 선생밖에 더 돼’ 친구들은 비아냥거렸지만 소년은 ‘역사교사’의 꿈을 꿨습니다. 역사교사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겨우 입학한 처지에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눈치만 살폈습니다. 큰 맘 먹고 ‘아부지 저 고등학교 가요?’라고 물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한 번 가봐라’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눈치만 살폈습니다. 소년은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실업계고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윗동네 종삼이 봐라, 인문계 졸업하고 놀잖니. 우리 형편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어야지’라며 실업계 진학을 종용했습니다.
소년은 공업고등학교,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소년은 기계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징그럽게 싫어하던 공학과목이 널려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소년에게 고등학교 3년은 지옥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큰 병까지 얻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졸업반 때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진학 예비고사
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겨울방학 무렵 다른 친구들처럼 서울의 작은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설날 고향을 다녀간 뒤로는 평택의 선진기업이라는 책걸상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일당으로 2,500원, 한 달 월급이라야 5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것에 무척 만족해 하셨습니다. 먹는 입 하나 덜었고 학비걱정도 덜었다는 생각에 기뻤을 것입니다.
1981년 5월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제 소식을 듣고는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친구는 치의대 진학을 목표로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국풍81’에 갔습니다. 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풍경에 특별한 감정 없이 무대를 응시하고 있
는데 친구가 그랬습니다.
‘부럽지. 너도 대학생이 되면 저들과 함께 놀 수 있어.’
머릿속에서 경주박물관 마당의 에밀레종이 떵~하고 울렸습니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평택으로 내려와 보따리를 쌌습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모님께 허락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고향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생각하냐.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여’ 아버지 말씀이 백번 지당했지만 퇴직한 마당에 돌아갈 회사도 없었습니다. 건넌방을 걸어 잠그고 무조건 굶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우
는 척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버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해줄까?’ 재수기간 6개월 동안 한 달에 10만 원씩 지원하고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니기로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재수 5개월 20일 동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독서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쓰레기보다도 못한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출신이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받기란 무리였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역사교육과’를 기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사범대학은 인
기가 없어서 내심 합격을 기대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던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저는 역사공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전도사님은 총신대학에 역사교육과가 신설되었으니 학부는 역사교육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당동의 총신대학은 3, 4만 평의 작은 캠퍼스에 두세 개 건물밖에 없는 미니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경건함이 넘쳤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시골에서는 남다른 신앙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교양과목인 구약개요, 신약개요를 가르치
던 교수님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신학이론 때문에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빙빙 돌다가 학교 내 아웃사이더 선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제 눈은 제법 삐딱해졌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목회자는 내가스스로 정한 진로가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내게 주위에서 지워준 멍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거리를 헤매고,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한다며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갈 때도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제가 갈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직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4학년 2학기 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일찍 취직한 것을 축하했지만 앞으로 계속 출판 일만 할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에 고등학교 강사자리가 있는데 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재수를 결심할 때처럼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안성이라고 했던 학교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재직했던 한광중・고등학교입니다. 1989년 3월, 꿈에 그리던 한광고등학교 강단에 섰습니다. 얼마 뒤에는 정규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도 이름보다 ‘김선생’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동네 분들도 ‘김선생 댁’이라고 불러야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한광고등학교에서 2, 3년 근무한 뒤 1991년부터 한광여고로 옮겼습니다. 14년을 근무한 뒤에는 한광중학교로 전근했고, 지난해 한광여중에서 1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지난 31년 동안의 교직생활은 꿈만 같습니다.
역사교사로 보낸 31년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 꿈이 실현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설릣고 교단에서 바라본 맑은 아이들 눈동자가 늘 새로웠습니다. 아내는 저를 보고 ‘당신은 좋겠어, 취미생활하며 월급 받아서’라며 놀렸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당신 같은 선생님만 만났다면 내 인생 달라졌을 거야’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줬습니다. 대학 때 제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좌충우돌도 많이 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전교조 비합법화 시절 후원
금을 냈던 것이 탄로 나서 오랫동안 감시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전교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학교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가 20여 년 동안 각종 차별과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퇴직할 때도 조금은 당당하게 교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 한광여고로 전근하서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 곳곳을 휘저으며 지역답사도 하고 역사기행도 했습니다.
역사교사가 되면 ‘지역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평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료는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아이들과 시골마을에 들어가서 구술조사도 했습니다. 참교육 열풍으로 ‘학급운영’ 관련, ‘수업관련’, ‘상담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었습니다. 대학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채우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각종 강연과 글쓰기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나눴습니다.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시기, ‘참’이라는 가치에 경도되었던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얼굴 화끈해지는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미숙해서 잘못한 것, 알면서도 비겁했던 것,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 미숙함을 무기로 무모하게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 이제 퇴직합니다. 교직 30년 계획에 교감, 교장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습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교육이 이제 시효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전통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 미래 세계의 가치를 구현할수 없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려면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사도 변화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화’와 ‘자기혁신’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산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동료교사, 후배교사들에게 맡기고 저는 떠납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텃밭을 일구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과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났을 때 잠시라도 쉬어갈수 있는 넉넉한 가슴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20년 2월 29일)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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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지난 5월 15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역사 전문 팟캐스트 채널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역사적폐청산)이 회를 거듭할수록 회원들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1부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역사적폐의 주범이 누구이고 이들의 역사쿠데타 배경과 논리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쳐서 재미있는 입담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면, 2부의 ‘이게 실화냐’
에서는 매회 다양한 전문가를 초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역사문제를 짚어주어 관심을 받고 있다.

13이제 ‘시즌 1 역적’은12화(8월 7일) 마지막 본방송과 8월 여름특집, 그리고 9월 에필로그를 끝으로 마
감하고 ‘시즌 2’를 준비할 예정이다. 앞으로 남은 시즌 1 여름 특집 방송에도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팟캐스트 ‘역적’은 팟캐스트 전문채널 팟빵과 유투브, 아이튠즈에서 ‘역적’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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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은희 교육팀장

월, 2017/08/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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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10월 20일(금)부터 21(토)까지 1박 2일 청소년 역사캠프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는 근현대사기념관 상설전시를 역동적인 체험을 통해 새롭게 접근하고, 강북구의 애국선열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를 만나며 선열의 생애와 활동을 되새겨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데 도움을 주고자 마련했다. 캠프는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고, 사전에 홈페이지와 전화로 선착순 모집한 13~16세 청소년 33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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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근현대사기념관에 모인 청소년들은 식사 후 특별히 야간 개장한 기념관에서 첫번째로 독립운동가가 남긴 명언과 제헌헌법의 내용과 관련해 빈 칸에 들어갈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퀴즈를 풀
고 전시물을 본 후 사발통문에서 사라진 격문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두 번째로 비밀리에 독립운동가, 민중, 일본 순사로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코너별로 태극기 타투, 의병 책갈피 만들기, 독립민주기념비에서 기념사진 촬영 등의 체험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 런닝맨을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 당시 상황을 재연한 그림자 연극을 함께 만들었다.
이튿날, 청소년들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을 답사하며 시대별 태극기를 그려보았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중국으로 떠난 이시영 선생의 가족사를 스톱모션으로 표현하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자신만의 어록을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캠프에 참가한 한 청소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해서 좋았고, 학업 스트레스를 잠깐 내려놓고 놀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에 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밝혔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캠프를 계기로 청소년 프로그램 다양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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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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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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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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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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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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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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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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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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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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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목, 2018/09/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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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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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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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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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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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민족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지 10여 년 만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민족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 제1·2차 정상회담의 합의가 무위로 되고 개성공단이 폐쇄된 중요 원인을 말해보면 ‘북핵’ 문제를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이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북녘에서 ‘선대 유훈’이란 말이 나왔다. 남쪽 구성원들 중에 이 말이 왜 나왔는지 또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말한다.
한반도 또는 조선반도로 불리는 우리 땅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성립된 두 개의 나라가 서로 대립하거나 다투지 않고 평화적으로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그만큼 강대해지는 것을 주변 나라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인데, 남북 어느 쪽이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주변 나라들의 통일 반대와 방해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어느 쪽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훈’이고, 북녘도 이 ‘유훈’을 지켰었다.
그러다가 세계정세가 바뀌어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북녘 정권의 정치·경제적 배후 세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북녘의 어느 인사가 말한 것 같이 종래는 미국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던 것이 하루아침에 달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남녘 정권은 러시아 및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져서 적대관계가 해소되었는데도 조·미 수교와 조·일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적대관계가 계속된 데다가 6·15남북공동선언 후 어렵게 개통된 남북 철도는 녹슬고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한편, 김일성 주석의 ‘유훈’과는 달리 ‘북핵’이 개발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은 불행하게도 21세기에 들어서서까지도 ‘극동의 화약고’요, 세계에서 전쟁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역사 진행이 정직해서 남녘 사회에 ‘촛불혁명’이 일어나,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성립시킨 김대중 정부 및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노무현 정부와 노선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문재인 정부가 성립되었다. 그 결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북핵’ 폐기가 논의되고 우리 땅의 평화체제를 수립해 가겠다는 쌍방의 약속이 일단 성립되었다. 북녘의 처지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손자 정권에 의해 그 ‘유훈’이 되살아나고 남녘의 경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후계라 할 수 있을 문재인 정부에 의해 ‘핵 없는 통일론’이 받아들여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 땅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성립된 두 개의 나라가 서로 대립하거나 다투지 않고 평화적으로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그만큼 강대해지는 것을 주변 나라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인데, 남북 어느 쪽이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주변 나라들의 통일 반대와 방해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어느 쪽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훈’이고, 북녘도 이 ‘유훈’을 지켰었다.


 

 

그런데 이 땅의 남북 정권 사이에 평화통일론이 처음 합의된 것은 반세기 가까이 전인 7·4남북공동선언부터이며, 그 후 평화통일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다시피 ‘1국가 2정부 2체제안’으로서 북녘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당분간 ‘2국가 2정부 2체제’로 두고 2국가 위에 협의체 같은 것을 두자는 남녘의 연합제 통일방안 등이 제시된 지도 오래되었다. 북녘에서 바로 하나로 하자는 국가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시기상조이니 군사권은 당분간 둘인 채로 두되 쌍방이 모두 군사의 이동과 훈련을 상대방에 알림으로써 군사행위가 침략 목적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외교권은 당장 하나로 할 수는 없다 해도 국제외교 마당에서 종래처럼 대립하지 말고 협조하자는 안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6·15남북공동선언 때 합의되었다.
돌이켜 보면, 불행하고도 불행한 분단 과정은 1945년에 38선 획정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1948년에 두 개의 정부 수립으로 국가가 분단되고 1950년에 6·25전쟁 발발로 동족이 서로 적이 되어 민족이 분단되었는데,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먼저 민족이 통일되기 시작하더니,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남북 철도가 연결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됨으로써 국토가 통일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통일도 군사권과 외교권 대립 해소에 합의함으로써 당장은 아니라 해도 통일의 길이 일단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조·미 수교, 그리고 조·일 수교까지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이 회담은 6·25전쟁의 후유증을 없애고 우리 땅의 남북평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는 역사적 장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 세계사의 큰 방향으로서 지역 평화공동체 형성에 동조해서 동북아시아 공동체 및 그 확대기구로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월, 2018/05/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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