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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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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admin | 수, 2020/04/22- 02:29

[후원회원마당]

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김해규 후원회원(전 평택한광여중 교사・현 평택인문연구소장)

 

3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올해 2월 퇴직한 김해규 후원회원은 2004년 4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후 평택지역 후원회원 모임 조직, 평택지역 내 일제잔재 조사 자문, 신흥무관학교 국외 답사 등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제자는 물론 동료선생님들과도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교단을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달래며 퇴임의 글을 보내왔다. 퇴임에 즈음하여 김해규 후원회원은 2월 6일 평택지역 인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게 될 평택인문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는 <평택역사산책> <근현대 평택을 걷다> <평택사람들의 길> 등이 있다.- 엮은이

 

역사학이 너무 좋아 역사책이라면 무엇이든 읽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역사박사’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과목 잘해봤자 선생밖에 더 돼’ 친구들은 비아냥거렸지만 소년은 ‘역사교사’의 꿈을 꿨습니다. 역사교사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겨우 입학한 처지에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눈치만 살폈습니다. 큰 맘 먹고 ‘아부지 저 고등학교 가요?’라고 물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한 번 가봐라’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눈치만 살폈습니다. 소년은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실업계고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윗동네 종삼이 봐라, 인문계 졸업하고 놀잖니. 우리 형편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어야지’라며 실업계 진학을 종용했습니다.
소년은 공업고등학교,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소년은 기계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징그럽게 싫어하던 공학과목이 널려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소년에게 고등학교 3년은 지옥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큰 병까지 얻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졸업반 때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진학 예비고사
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겨울방학 무렵 다른 친구들처럼 서울의 작은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설날 고향을 다녀간 뒤로는 평택의 선진기업이라는 책걸상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일당으로 2,500원, 한 달 월급이라야 5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것에 무척 만족해 하셨습니다. 먹는 입 하나 덜었고 학비걱정도 덜었다는 생각에 기뻤을 것입니다.
1981년 5월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제 소식을 듣고는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친구는 치의대 진학을 목표로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국풍81’에 갔습니다. 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풍경에 특별한 감정 없이 무대를 응시하고 있
는데 친구가 그랬습니다.
‘부럽지. 너도 대학생이 되면 저들과 함께 놀 수 있어.’
머릿속에서 경주박물관 마당의 에밀레종이 떵~하고 울렸습니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평택으로 내려와 보따리를 쌌습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모님께 허락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고향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생각하냐.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여’ 아버지 말씀이 백번 지당했지만 퇴직한 마당에 돌아갈 회사도 없었습니다. 건넌방을 걸어 잠그고 무조건 굶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우
는 척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버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해줄까?’ 재수기간 6개월 동안 한 달에 10만 원씩 지원하고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니기로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재수 5개월 20일 동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독서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쓰레기보다도 못한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출신이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받기란 무리였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역사교육과’를 기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사범대학은 인
기가 없어서 내심 합격을 기대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던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저는 역사공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전도사님은 총신대학에 역사교육과가 신설되었으니 학부는 역사교육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당동의 총신대학은 3, 4만 평의 작은 캠퍼스에 두세 개 건물밖에 없는 미니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경건함이 넘쳤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시골에서는 남다른 신앙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교양과목인 구약개요, 신약개요를 가르치
던 교수님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신학이론 때문에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빙빙 돌다가 학교 내 아웃사이더 선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제 눈은 제법 삐딱해졌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목회자는 내가스스로 정한 진로가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내게 주위에서 지워준 멍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거리를 헤매고,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한다며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갈 때도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제가 갈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직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4학년 2학기 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일찍 취직한 것을 축하했지만 앞으로 계속 출판 일만 할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에 고등학교 강사자리가 있는데 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재수를 결심할 때처럼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안성이라고 했던 학교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재직했던 한광중・고등학교입니다. 1989년 3월, 꿈에 그리던 한광고등학교 강단에 섰습니다. 얼마 뒤에는 정규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도 이름보다 ‘김선생’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동네 분들도 ‘김선생 댁’이라고 불러야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한광고등학교에서 2, 3년 근무한 뒤 1991년부터 한광여고로 옮겼습니다. 14년을 근무한 뒤에는 한광중학교로 전근했고, 지난해 한광여중에서 1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지난 31년 동안의 교직생활은 꿈만 같습니다.
역사교사로 보낸 31년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 꿈이 실현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설릣고 교단에서 바라본 맑은 아이들 눈동자가 늘 새로웠습니다. 아내는 저를 보고 ‘당신은 좋겠어, 취미생활하며 월급 받아서’라며 놀렸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당신 같은 선생님만 만났다면 내 인생 달라졌을 거야’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줬습니다. 대학 때 제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좌충우돌도 많이 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전교조 비합법화 시절 후원
금을 냈던 것이 탄로 나서 오랫동안 감시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전교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학교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가 20여 년 동안 각종 차별과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퇴직할 때도 조금은 당당하게 교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 한광여고로 전근하서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 곳곳을 휘저으며 지역답사도 하고 역사기행도 했습니다.
역사교사가 되면 ‘지역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평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료는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아이들과 시골마을에 들어가서 구술조사도 했습니다. 참교육 열풍으로 ‘학급운영’ 관련, ‘수업관련’, ‘상담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었습니다. 대학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채우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각종 강연과 글쓰기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나눴습니다.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시기, ‘참’이라는 가치에 경도되었던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얼굴 화끈해지는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미숙해서 잘못한 것, 알면서도 비겁했던 것,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 미숙함을 무기로 무모하게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 이제 퇴직합니다. 교직 30년 계획에 교감, 교장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습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교육이 이제 시효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전통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 미래 세계의 가치를 구현할수 없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려면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사도 변화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화’와 ‘자기혁신’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산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동료교사, 후배교사들에게 맡기고 저는 떠납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텃밭을 일구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과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났을 때 잠시라도 쉬어갈수 있는 넉넉한 가슴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20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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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서울시와 강북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 후원으로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열었다. 좌석(670석)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부득이 계단까지 좌석을 마련하여 800여 명이 관람했다. 이번 음악회에는 장사익・노브레인 등 출연진 자신의 히트곡 외에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앞으로 행진곡’ ‘목동가’ 등 항일음악 11곡이 연주됐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 ‘아이들은 자라고’ ‘해방의 노래’ 등 국권 피탈부터 독립까지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구성된 항일음악회는 지난 8월 연구소가 기획하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담긴 곡에 대한 해설도 프로그램북에 충실히 담아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장사익과 오단해, 인디밴드 노브레인, 국립전통예술고교 두레소리 합창단, ‘기쁨의 아리랑’ 뮤지컬 공연단, 강북구립여성합창단 등이 출연했으며 특별히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된 여성광복군 오희옥 여사(92)가 무대에 올라 ‘안중근 옥중가’ 가사를 낭독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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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11년 11월 개최한 항일음악회(총감독 노동은)에 이어 연구소가 주최한 두 번째 항일음악회다. 앞으로 연구소는 항일음악을 학교와 군대에 보급해 널리 불릴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다. 이 음악회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큰아들인 노관우 씨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연구소 팟캐스트 ‘역적’ 노기환 MC와 김초롱 MBC 아나운서가 사회를 담당했으며, 송복남・황동욱 회원이 영상 제작, 장이근 회원이 사진 촬영, 손재호 회원이 오희옥 여사의 차량이동을 맡아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8/0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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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고 김상덕 선생(1892~1956)의 유일한 손자인 김진영 회원이 투병 끝에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업보이지만 그래도 진영 군의 죽음은 그의 파란만장한 가족사와 더불어 더욱 주변을 안타깝게 한다.
김상덕 선생의 손자이자 김정육 선생(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의 외아들인 고인은 지난해 말기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으나 만삭의 아내와 딸 김예일리 양(3)을 남기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9월 8일 태어난 아들 김선리 군은 유복자가 되고 말았다.
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잇는다는 설립 취지만큼이나 반민특위의 역사와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98년 반민특위 가상법정 개최, 1999년 반민특위터 표석 설치, 2001년 반민특위 다큐(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 협조, 2005년 정부와 국회에 반민특위 명예회복 진정서 제출, 반민특위 기념우표 제작 요청 등이 대표적 활동이다.
연구소의 이러한 활동이 때로는 미약하고 때로는 부족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늘 연구소 활동이 곧 제2의 반민특위 활동이라면서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은 바로 김정육 선생이다. 연세도 있으시지만 같은 연배의 분들보다 목소리가 유독 작은 이유는 지독한 연좌제 탓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이 자랑스런 독립투사요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신 세월이었다.
그러던 김정육 선생에게 아들 진영 군은 자부심이요 희망이었고 또한 속 깊은 효자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형편 때문에 가족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공군부사관으로 복무했고 특유의 성실함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홀로계신 아버지를 가까이서 봉양하기 위해 공기업을 과감히 그만두고 아버지 집이 있는 의정부시청 공무원으로 뒤늦게 다시 취직한 그런 효자였다. 작년 초에는 의정부시청 안에서 보훈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면서 밝은 표정으로 연구소를 방문해 3·1절 기념 전시회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독립운동과 반민특위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하려는 결의를 보여주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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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첫딸 예일리를 낳고는 아버지께서 길한 꿈을 꾸신 다음 손녀의 이름을 지으셨다면서 이름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고는 “이제 반민특위 4대가 연구소 회원이 되었다”면서 안부 인사를 전해오기도 했던 정 많은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올 여름 조심스럽게 안부 전화를 했다. 항암치료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련만 힘겨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응대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던 우직한 청년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경기북부지부 몇몇 회원들과 건국대병원으로 문병을 갔지만 너무도 마르고 힘겨워하는 모습에 차마 병실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별세 소식을 접했다.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기에는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도 녹록치 않다. 우선 김정육선생도 지난해 심장수술을 받은 환자의 몸이다. 진영 군 빈소에 배재정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다녀가는 등 정부에서도 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쪼록 김정육 선생과 진영 군의 유족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그 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모진 세월을 이제는 우리 사회가 세심히 보살펴야겠다. 연구소 또한 반민특위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더욱 매진하려 한다. 끝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입회원 김진영입니다. 일천한 저를 민문연 가족분들께 소개해주신다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루빨리 사회의 주역이 되어 연구소 상근자 분들과 같이 큰 뜻을 펼치는 분들께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매일매일 희망하고 있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꼭! 그리될 것이니 기다려주십시오. 필승!
– 김진영 군이 2007년 2월 19일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며 남긴 글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10/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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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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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기념사업에 혈안이 되어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구미시가 2016년 4월 8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요청으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신청서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했다.
신청서를 접수한 우정사업본부는 같은해 5월 23일 ‘2016년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박정희대통령 탄신 100주년’ 우표 발행을 결정했다. 총 17명 중 이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9명 전원이 찬성한 것이다. 하지만 백범김구기념관이 신청한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우표’는 찬성 4, 반대 5로 발행이 무산됐다. 이 같은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했으나 촛불집회와 탄핵국면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신경민, 추혜선, 최명길 의원 등이 박정희 우표 발행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미래창조과학부와 우정사업본부 노조에서도 반대하고 나섰다.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역시 우표 발행 중단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우정사업본부에는 우표 발행 문제와 관련해 200건이 넘는 반대 민원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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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단체들의 논리는 명확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발행업무처리세칙 4조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우표 발행을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표발행심의위원 중에는 국정농단의 공범인 김기춘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 포함되어 있음도 확인됐다.
연구소는 우표발행 저지를 위해 신경민 의원실, 우정사업본부 노조 등을 방문해 연대키로 하고 2017년 6월 22일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에서 국가공무원노조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6월 29일에는 연구소 단독으로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열리는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발행 취소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결과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에 대해 재심의 결정을 내렸다 최근 적폐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입장을 선회하고 원점에서 재논의한 결과 총 14명이 참석해 11명이 찬성,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재심의가 결정됐다.
이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7월 12일 재심의 회의를 열고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여부를 다시 논의했다. 그 결과 전체 17명 위원 가운데 12명이 참석해 철회 찬성8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최종적으로 우표발행이 취소된 것이다.
당초 우정사업본부는 재심의할 근거가 없다며 기존 결정대로 발행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데다 근거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우표 발행 재심의에 나서게 된 근거로 내밀고 있는 것은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세칙’ 제17조 2항 2호이다. 세칙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우표발행 및 보급에 관한 사항에 관해 우정사업본부장의 자문에 응한다”는 규정에 근거해 김기덕 본부장이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 재심의 문제에 대한 자문안건을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간 입장을 뒤집는 것이라 허위해명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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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발행이 취소가 예견되자 세종시청사 내 우정사업본부 앞에서 우표 발행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였던 남유진 구미시장은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7월 14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답니다’라는 전면 광고를 내보내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박정희 기념사업 등 친일독재 미화와 역사왜곡 중단을 위해 최선을다할 것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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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9월 12일부터 28일까지 2017년 특별강좌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개최했다. 강북구에서 처음으로 인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 5인의 생애와 활동을 집중 조명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 총 6강에 걸쳐 무료로 진행되었으며 강좌별 30명 내외를 선착순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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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위해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이 강사로 나섰다.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주제로 한 첫 강좌는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가 맡아 명문가의 후손들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세운 과정을 사료와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
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활동을 다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을 이끌어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관 학예연구사는 풍부한 사진과 영상 자료로 여운형 선생의 독립운동과 정치활동을 살펴보았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며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선생을 주제로 홍윤정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학예실장이 강연을 이어갔다. 마지막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 관람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 중 일부인 ‘초대(初代)’길을 걸으며 마무리되었다.
이번 강좌는 평일 오후 2시에 시작되고 무료 강좌의 특성상 출석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1강 25명, 2강 31명, 3강 23명, 4강 37명, 5강 26명으로 모집 정원 30명에 가까운 출석률을 보였다. 강좌마다 설문을 진행한 결과, 강좌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고, 수강생 전원이 향후 기념관의 다른 역사 강좌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개선점으로는 정원 24명의 강의실이 협소한 점과 기념관 주차 시설 확대, 강의 시간을 연장하거나 같은 주제로 2회 이상 진행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 강좌는 평상시 이름만 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시대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전문가가 준비한 풍부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이해하기 쉬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획전 주제에 맞춰 연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0/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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