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던 노동자들의 외침으로 시작된 세계 노동절이 올해로 130년을 맞이했다. 1923년, 한국에서는 실업금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을 요구로 내걸며 처음으로 노동절이 진행되었다.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의 외침, 한국의 첫 노동절의 요구. 시간이 지났지만 그다지 변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요구는, 여전히 우리 노동의 현실이 130년 전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갑작스레 다가온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의 위기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던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문제, 공공의료의 공백, 자영업자, 소규모 영세사업장, 특수고용, 불안정 노동자의 문제 등 한국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의 체감 역시,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서 먼저 시작되고, 현실의 무게도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특히,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 가속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해고 위협, 실업, 권리의 후퇴 등 노동자 생존권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기 위한 원칙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위기에 따른 어려움이 노동자에게 전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해고에 위협당하지 않고, 건강권, 파업권 등 노동자의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노동자에게 고통 분담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 권력이 편중되는 불균형한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위기상황은 불안정한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 여성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등 위기 상황에서 더욱 위태로운 노동자들을 먼저 살피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갑작스레 닥친 위기 상황에서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의 지원대책에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기업이 아니라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권리확보여야 한다.
130년 전 노동자들의 요구는 여전히 오늘의 요구이고, 1923년 한국 첫 노동절의 요구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변화하고, 기업들의 부는 거대해졌지만, 노동자들의 삶과 요구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모두가 입을 모은다. 코로나 19 이후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고. 앞으로 감염병의 위기와 각종 재난의 비상상황이 일상적으로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 예상 되고 있다. 언제 다가올 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이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가. 현재 드러난 구조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내일을 준비한다면 또 다른 재난을 만드는 시작일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30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이하여,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영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yce: 1838~1922) 자작(子爵)은 1887년에 쓴 <미연방(The American Commonwealth)>에서, 캘리포니아는 “많은 측면에서 전체 연맹 중에서 가장 월등하고, 그 어떤 주 보다 세계에서 홀로 우둑 설 수 있는 위대한 나라의 성격을 지녔기에 내가 기꺼이 거주하고픈 주”라고 썼다.
그런 존재감과 자신감에 발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코로나 19 이후 캘리포니아가 미심쩍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주지사인 뉴섬(Gavin Newsom)의 입에서 미합중국주의자라면 귀에 거슬릴만한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캘리포니아를 ‘주’(state)가 아닌 ‘국’(nation)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다. 그의 표현으로는 ‘캘리포니아국’(California nation-state)이다. 원래부터 트럼프와 각을 세우고 있는 뉴섬 주지사가 코로나 이후 무능하고 무책임한 트럼프의 코로나 대처에 열불이 나서 트럼프에게 더 날을 세우려 그러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주지사가 저런 말을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에 많은 매체가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뉴섬 지사는 4월 13일 자신의 발언은 세계 5위의 경제와 미국의 20여개 주를 합한 수 보다 많은 인구를 지닌 캘리포니아의 “규모와 범위”를 감안해 한 발언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며 한 발 물러섰다.(“Is California a Nation-State?,” New York Times, April 14, 2020).
그러나 바로 그 규모와 범위에 있어 존재감을 갖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가 한 발언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만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것을 필두로 해서 불길한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는 미국이기에 그렇다. 그 불길한 조짐이란 바로 분열이다.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의 분열된 모습이 현재의 미국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미국을 ‘미분열국’(The Un-united States of America)로 부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이참에 갈라서자
2001년부터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지난 4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제목의 칼럼을 썼다. “코로나로 한 가지 분명해 진 사실: 이참에 갈라서자”(“Column: The coronavirus pandemic has made one thing perfectly clear: It’s time to split the country,” Los Angeles Times, April 22, 2020). 글의 요지는 간단하다. 코로나사태가 터지고 미국이 민낯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아직 정신 못 차리는 지도자(트럼프를 가리킴)와 미국인들이 즐비하다. 그걸 계속해서 보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더는 못 버티겠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젠 때가 된 것 같다. 연방을 해체하고 각자 갈라서자. 50개 주를 성향에 따라 3개 또는 2개로 나누자. 3개의 국가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이 이름 지으면 될 것 같단다. ‘미국우선공화국’(The Republic of America First: 트럼프의 외교정책 노선 “미국우선주의”를 빗댄 것), ‘신과 총의 연방’(The Commonwealth of God and Guns: 보수주의자들을 지칭한 것), 나머지 하나는 ‘오합지졸연합피난처’(The Federated Sanctuary of Huddled Masses: 구심점 없는 진보주의자들을 일컬음)로 맨 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수도가 위치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어쩌면 저렇게 이름을 그럴 듯하게 지었을까. 그러면서 당장 3개로 나누는 것이 어려우면 이른바 ‘레드스테이트’(공화당지지우세 주)와 ‘블루스테이트’(민주당지지우세 주)로라도 나뉘었으면 좋겠다며 이참에 확실히 이혼장에 도장을 찍자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변죽을 울리고 슬쩍 빠졌던 그 “캘리포니아국”를 아예 공식화하자며 칼럼을 맺는다. 미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서 따로 살자는 것이다.
전례 없이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진영으로 나뉜 미국. 그래서 이 진영에 속한 주들끼리 따로 분리하자는 정서가 팽배해 있는 작금의 미국이다. <애틀랜틱>
유력 매체의 사설이 저렇게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미국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이 패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에 대해서는 신물이 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쿨’하게 갈라서자는 말이 나올 터.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마스크가 가른 미국 정치 지형
1768년, 필라델피아의 변호사이자 정치가였던 존 디킨슨(John Dickinson, 1732~1808)이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by uniting we stand, by dividing we fall)이다. 그 뒤 독립운동의 웅변가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와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그 말을 인용해 유명한 연설을 한 뒤, 경구가 되다시피 한 저 문구는 250여년이 지난 지금 거꾸로 사용될 정도로 색이 바래버렸다. 왜냐하면 이제는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Divided we stand, united we fall)라는 말이 더 많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갈라지자.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라고 제목을 단 <뉴욕메거진> 기사
그 정도로 지금 미국은 절망적으로 분열되었다. 물론 미국은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소위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이니만큼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정치색이 달라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고 싸우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디킨슨이 남긴 저 말처럼 통합해서 위기의 고비를 넘기곤 하였다. 그러나 앞서 내가 여러 번 지적했다시피 이번엔 양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대선을 끼고 크게 3번의 거대한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1860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은 노예제의 장래를 두고 싸웠다. 그것은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1932년 대선에서는 대공황의 대처방안을 놓고 진영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980년 대선에서는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두고 진영간의 심한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2020년 대선이다. 이번엔 무엇을 놓고 진영간 대립이 벌어지고 있을까? 힌트는 코로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대번에 답을 댈 수 있었을 것이다. 답은 마스크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앞서, 어떤 이들은 코로나 사태와 조지 플로이드로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오는 걸 보면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진영 간의 극심한 대립)가 깨진 것 아니냐는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다. 미국의 정치매체 <더힐>이 그런 분석을 냈다. 전통적인 트럼프 지지층인 백인 가톨릭교도들의 지지가 지난 3월엔 60%였는데 코로나를 거치면서 37%로 떨어진 것을 두고 코로나가 혹시나 정치적 양극화라는 거대한 빙산에 금을 가게 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Is the glacier of political polarization finally cracking?” The Hill, June 8, 2020). 그러나 내가 볼 때 이런 진단은 섣부른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렇다. 정치 진영 간의 골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깊이 패어있었다. 즉 하루 이틀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과거에도 “확실히 갈라서자.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란 말이 계속해서 나왔던 게 저간의 미국의 사정이다.(“Divided We Stand: The country is hopelessly split. So why not make it official and break up?” New York Magazine, Nov. 14, 2018). 양쪽 진영끼리의 증오와 반목도 소외와 허탈을 느낄 정도로 극해 달해 있었다.(“Estranged in America: Both Sides Feel Lost and Left Out,” New York Times, Oct. 4, 2018).
물론 코로나로 트럼프 선호도가 약간 떨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트럼프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45%로 정권 초기의 44%에 비하면 변함이 없다. 오히려 코로나가 더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보여주는 조사도 존재한다. 이번에 양쪽을 가르는 것은 마스크에 대한 것이다. 카이저재단(Kaiser Family Foundation)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5월 현재 민주당지지자 89%가 집밖에서 마스크를 착용했고 공화당지지는 58%만 착용했다.(“Trump’s mockery of wearing masks divides Republicans,” Washington Post, May 27, 2020; “Face masks now define a divided America and its politics,” The Global and Mail, May 28, 2020; “How face masks are dividing America,” The Telegraph, June 12, 2020; “Is the glacier of political polarization finally cracking?” The Hill, June 8, 2020).
‘어떻게 마스크가 미국을 갈랐는가?’란 제목의 <텔레그래프>기사
어쨌든, 코로나 이전이든 이후든 분열된 정치적 지형은 더욱 공고화되고 있다. 내가 볼 때 이러한 갈등의 골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면 됐지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격화되고 있다.(“An Unprecedented Divide Between Red and Blue America,” The Atlantic, April 16, 2020). 이를 두고 여론조사기관 시빅사이언스(CivicScience)의 존 딕(John Dick)은 “정치적 종족주의”(political tribalism)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치적 종족주의야말로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거의 다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라고 분석한다(“Face masks now define a divided America and its politics,” The Global and Mail, May 28, 2020). 한 마디로 ‘정치적 종족주의’는 미국이 갈기갈기 찢어져 분열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압축하는 용어인 것이다. 그러니 트럼프가 끝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등장을 하고, 성공회 교회 앞에서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성경을 들고 사진 찍고 오는 장면을 대중에게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히 종족화 된 정치지형에서 자기 진영의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략적 행위의 일환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남북전쟁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항의 시위가 남부연합을 역사에서 지우는 역사 전쟁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고수하려 했던 남부연합의 대통령과 장군들의 동상이 철거되거나 훼손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Third Confederate statue toppled by protesters in Richmond in recent weeks,” Washington Post, June 17, 2020; “Confederate statues: In 2020, a renewed battle in America’s enduring Civil War,” Washington Post, June 12, 2020).
남부연합군의 깃발인 연합기도 퇴출될 운명에 놓여있다.(“Will the Black Lives Matter movement finally put an end to Confederate flags and statues?” USA Today, June 12, 2020). 미 해병대는 부대 내에서 연합기의 게양을 금지했다.(“U.S. Marine Corps Issues Ban on Confederate Battle Flags,” New York Times, June 6, 2020). 미 육군도 모든 부대 내에서 금지하는 명령을 발동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 에스퍼 국방부 장관은 남북연합의 지도자 이름을 딴 미군기지 10 군데의 명칭을 변경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했다.(“Army reverses course, will consider renaming bases named for Confederate leaders,” Politico, June 8, 2020).
이런 일이 지금도 벌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도 남북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저렇게 남부 연합기가 사라지고, 남부연합군의 지도자와 병사들의 동상과 상징물들이 철거되고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환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람들도(이런 이들에게 요샛말로 ‘샤이’ 자를 붙여야하나? 물론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KKK단 같은 극력백인우월주의자들도 있지만 말이다.) 적지 않게 있다. 그러니 연합기가 퇴출되고 동상들이 쓰러트려진다고 해서 미국인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동화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이것은 그런 이들의 대표자인 트럼프가 에스퍼 국방부 장관이 미군 기지의 명칭 변경의사를 표명하기 무섭게 단박에 제동을 건 것을 보면 확실해 진다.(“Trump won’t rename Army posts that honor Confederates. Here’s why they’re named after traitors.” Washington Post, June 11, 2020; “Trump Might Go Down In History As The Last President of the Confederacy,” Washington Post, June 12, 2020).
경찰을 몰아낸 시애틀의 자치구(CHAZ) <출처: 복스>
심지어 현대 미국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시위대가 자치구(autonomous zone: 카즈‘CHAZ’라고 불림)를 선포한 곳도 있다. 워싱턴주 시애틀이다. 이들은 경찰을 몰아내고 경찰서를 점거한 뒤 현판을 “시애틀경찰서”(Seattle Police Dept.)에서 “시애틀민중서”(Seattle People Dept.)로 바꿨다. 사실상 무정부상태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그 내부는 그렇게 무질서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약간의 긴장감은 돌고 있지만 대체로 축제 분위기란다.(“Community, Not Anarchy, Inside Seattle’s Protest Zone,” Bloomberg, June 17, 2020; “Seattle’s newly police-free neighborhood, explained,” Vox, June 16, 2020). 분열의 끝에 이런 일종의 해방구까지 등장했고 해당지역의 주지사와 시장은 이들의 역성을 들고 있으니 실로 난세는 난세다.(“Trump claims ‘radical left’ has ‘taken over’ Seattle as he spends birthday at golf club,” The Guardian, June 14, 2020; “Capitol Hill Autonomous Zone becomes political flashpoint, as Durkan rebukes Trump’s message to ‘take back’ city,” Seattle Times, June 11, 2020).
분열 중인 미국
이런 분열은 단지 정치적, 인종적으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역적으로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분열과 갈등은 코로나 이전부터 점증되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을 크게 공간적으로 나누어 볼 때, 레드스테이트와 블루스테이트로 분할해 볼 수 있다.(“An Unprecedented Divide Between Red and Blue America,” The Atlantic, April 16, 2020). 그런데 이런 지형적 분류는 솔직히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이다. 현재의 미국의 지역적 갈등 양상과 지형은 보다 더 복잡하다. 그리고 복잡성은 최근 수십여 년에 걸쳐 더욱 현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지리적인 분열과 갈등의 양상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파편화의 편재성이다. 분열과 갈등은 미국 전 지역에 고루 편재해 있다. 심지어 동일 지역 내에서조차 그러하다. 같은 주내에서도 농촌과 도시 지역간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Rural and Urban Americans, Equally Convinced the Rest of the Country Dislikes Them,” New York Times, May 22, 2018). 도시 외곽인 농촌지역 내에서도 지역 간에 양극화 현상이 보인다. 반목과 시기의 정서가 팽배하다.(“One County Thrives. The Next One Over Struggles. Economists Take Note,” New York Times, June 29, 2018). 또한 도시들 간에도 양극화가 진행 중에 있고(“In Superstar Cities, the Rich Get Richer, and They Get Amazon,” New York Times, Nov. 7, 2018), 같은 도시 내에서조차도 분열과 갈등은 고조되고 있다.(“As Bloomberg’s New York Prospered, Inequality Flourished Too,” New York Times, Nov. 9, 2019). 가히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란 유령이 미국을 집어 삼킨 것처럼 보일만큼, 그렇게 미국은 현재 분열 중이다.
둘째 특징은, 대체로 그런 분열이 정치색과 맞물리는 경향이 더욱 더 짙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농간의 분열을 보자. 도농간의 분열은 사실 과거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그 강도가 더 세며, 정치적으로도 훨씬 더 강한 동조화 현상을 보인다. <도표>를 보면, 농촌지역과 도시지역이 갈수록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지지로 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농촌지역은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가 서로 엇비슷하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2008년 이후 공화당지지로 완전히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Rural and Urban Americans, Equally Convinced the Rest of the Country Dislikes Them,” New York Times, May 22, 2018).
더욱 뚜렷해지는 도농 간 정치색. 도시 지역은 갈수록 공화당 지지가, 농촌 지역은 민주당 지지가 강해지고 있다. <출처: 뉴욕타임스>
분열 뒤에 숨은 으스스한 그림자, 불평등
그렇다면 왜 미국에서 분열이 이렇게 극대화되고 극력해지는가? 나는 그 기저에 불평등의 심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은 앞서 언급했듯 여러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사는 ‘도가니’다. 그만큼 이질적 사회다. 그런데 그런 이질적 요소를 통합시키는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 서로 공존할 수 있다. 사회학자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는 이것을 “가치의 일반화”(value generalization)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이한 여러 가치들을 뭉뚱그리고 한데 아우르는 상위의 가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인종과 성별 보다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더 우위에 두는 가치를 말한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한국계, 일본계, 독일계 등의 다양한 민족적 배경의 범주가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는 뉴욕커(뉴욕시민), 보스터니언(보스턴시민)이 더 상위의 범주와 개념이다. 그리고 이들을 다 아우르는 일반화된 가치를 지닌 포괄적 개념과 범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시민이다. 미국인들은 이 포괄적이고 일반화된 개념으로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자기의 민족적 배경은 희생하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각자의 민족적 뿌리를 고집하지 않고 희생하면서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아메리칸드림’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희생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미국인들에게 팽배하다. 그 명확한 증거가 바로 극심한 불평등이다. 그러니 통합과는 거리가 먼 분열된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상위 1%(제국)에게만 가능한 아메리칸드림. 나머지는 아메리칸드림이 뭔지 모르는 비참한 상태에 놓인 것이 바로 분열의 주된 동력이다. 그러니 그 애지중지 간직하고 자랑스러워하던 미국시민임을 내팽개쳐버려도 상관없다는 듯 미국을 해체하고 각자 갈라서자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로 격세지감이다.
2007년(금융위기) 이후 인플레이션 감안한 재산의 변동 추이. 하위 90%는 2007년 보다 더 가난하다. 상승곡선을 탄 것은 상위 10%로 그들의 승승장구는 곧 불평등의 심화를 의미한다. <출처: 워싱턴포스트>
향후 관전 포인트
여기서 주의할 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상식과는 달리 어떤 사람이 처한 위치와 정치적 선호의 대칭이 안 맞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잘 사는 이가 보수, 못 사는 이가 진보, 이런 식이 아니라 거꾸로 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마치 우리나라의 강남좌파가 있고 오히려 저소득층에서 보수성향인 사람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단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의 양상, 반목과 갈등의 고조, 불만과 좌절의 급증은 불평등의 심화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원인이 모두 상대편 진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에 그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그릇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
둘째, 분열 뒤에 따를 전쟁 발발 가능성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집단 내에서 갈등이 고조될 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전쟁이다. 내부 또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다. 미국은 과거 남북전쟁이라는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치룬 전력이 있다. 이번에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극심한 분열의 최후 승리자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분열의 당사자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처절한 피해자가 될 뿐이다. 그럼 일반 대중(국민)들이 서로 분열하면서 반목하고 증오하며 갈등하는 사이 그 뒤에서 웃을 이들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그들이 극심한 불평등을 유발한 자들이며, 이러한 분열(단순한 시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을 뒤에서 교묘히 기획, 조정, 부추기는 자들이라고 추정한다. 그들은 겉으론 이런 모든 일에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화살을 저런 분열을 통해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리곤 자신들의 탐욕을 마음껏 충족한다. 나는 그들을 제국이라 부른다. 그들의 철칙이 있다. 이름하여,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그런 제국엔 월가가 우두머리로 군림한다. 그런 월가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6월 8일자 사설의 제목은 “적들은 미국을 약하고 분열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작금의 시위는 미국이 지속하는 강점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였다.(“Enemies See a Weak and Divided U.S.: But they’re wrong. The protests showed some of America’s enduring strengths.” Wall Street Journal, June 8, 2020). 미국의 시위를 그저 고질적인 인종차별의 문제로만 축소 왜곡하며 동시에 장점으로 추겨 세우고, 적에 대한 경고도 날리는 애국으로 살짝 분칠을 한 이 사설. 나는 여기서 제국들이 현재 미국의 분열을 관망하는 태도를 본다. 이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유체이탈화법의 태도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주범과 그 하수인들이 자신들은 아무 상관없는 양 유체이탈화법을 쓰고 있는데서 나는 그들의 간악무도함을 본다. 그 말할 수 없는 가증스러움을….
인간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면 시간과 노력,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힘을 얻고 지배력을 갖추면서 굳어진다. 기득권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복잡한 시스템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는다. 현 상태를 더 길게, 더 강하게 유지할수록 시스템은 더 심하게 뒤틀리다가 결국에는 부서지고 변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기존의 ‘무제약-고삐풀린’ 자본주의’가 바로 이러한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수년간 손이 닿는 모든 것을 움켜쥐었다.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우리의 시간, 노력, 심지어는 희망과 꿈까지 앗아갔다. 자본주의는 이것들을 마치 극소수 기득권의 체계적 시스템 속 자신들만의 소유물처럼 여겼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생각은 맹목적일 정도로 단순하다. 이익 극대화, 이 한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그러한 이익 추구가 다수의 이익이라는 거짓말 하나만 받아들이면 된다.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비판도 없이 따르다 보면 나의 이익이 곧 선의인 것처럼 믿게 되는 속임수가 하나 숨어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기꺼이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은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유명한 농담 한 구절에 잘 드러난다.
“고용주가 자신의 이익을 이해하지 못하면, 종업원들에게 월급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도 어렵다.”
이러한 생각들이 터무니없는 재물숭배(cargo cult)를 낳았다.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질 것이리라 말하면서도 가진 자들은 늘 더 많은 것을 가져가려 한다. 환경파괴의 시대에도 여전히 성장이 정답이라 한다. 그러나 성장은 현재 목격하듯이 코로나 대유행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불안정한 시스템이다. 우리의 식량 시스템이 대표적인 예다.
팬데믹 초기부터 도축공장의 상태가 강력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문제는 일어나고 있었다. 2020년 4월 말에는 노동자 5,000명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고 도축장 십여 곳이 문을 닫았다. 가축 수백만 마리는 식용이 아닌 목적으로 도살 당했다. 재무적 손실을 경감하기 위해서였다. 가난의 배고픔이 만연하고 있을 때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은 재무적 수치 외의 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팬데믹 이전, 미국의 식량부족에 처한 인구는 어린이 1천1백만명을 포함, 총 3천7백만명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건강한 음식을 살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의 푸드뱅크들을 아우르는 피딩 어메리카(Feeding America)의 2020년 6월 추정에 따르면 추가로 1천7백만명이 식량부족의 그룹에 편입될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 4월 12세 이하 아동을 키우는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음식이 떨어져 간다고 응답한 비율 및 음식을 살 돈이 부족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약 40%에 달했다. 기존에도 15-20%로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훨씬 가파른 증가세를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수백만 마리의 동물는 헛되이 죽어 가고, 수백만 명의 사람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다. ‘훌륭한(수익성있는) 기업 결정’의 결과였다.
가계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2019년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무언가를 팔거나 대출을 받지 않으면 500 달러도 벌지 못하는 미국인이 전체 인구의 40%에 육박했다. 다른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9%가 월급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갈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실업수당 청구가 4천6백만 건을 넘어서기 전의 수치다. 그 사이 미국 부유층의 총 자산 가치는 6천억 달러 이상 상승했다. 같은 기간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240억 달러를 벌었다.
이를 인종으로 분류해보면 상황이 더욱 골치 아프다. 흑인 가정과 히스패닉 가정의 저축 규모는 백인 가정에 비해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주거형태에서도 이들은 주택구입자가 누리는 법적 보호장치에서 소외된 세입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공동체에는 징역형 선고 만큼이나 퇴거명령의 바람도 유독 가혹하다. 그 와중에도 월세 날짜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2020년 4월에는 3분의 1에 가까운 세입자가 제때 임대료를 납부하지 못했다. 2019년 대비 상당한 증가세다. 대량 실업의 여파로 각 주 정부는 퇴거 유예 조치를 도입했으나, 이러한 보호장치의 유효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로벌 팬데믹과 함께 수백만명이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미국의 현재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선택된 재앙이자 피할 수 없는 실패이다.
답은 간단하다. 현재와 다른 상황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전제인 이익 추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익, 그 한가지 재주 밖에 부릴 줄 모르는 광대이다.
오랫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돈을 못 버는 것은 개인의 탓이라고 말하는 경제 시스템의 늪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이제는 그것이 거짓임을 안다.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선택된 재앙이자 피할 수 없는 실패이다.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다.
기존의 시스템은 죽어가고 있다. 다만 조용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계속 이곳 저곳 들쑤시며 더욱 어두운 사회를 만들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싸울수도 있다. 정의와 평등을 향한 움직임이 지역사회에서 시작되고 있다. 현실은 심각하지만 그 안에도 새로움의 기회는 있다.
케네스 볼딩(Kenneth Boulding)은 “유한한 환경에서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는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라 주장한 바 있다. 암스테르담은 생태계의 법칙 안에 살면서 모든 이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준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의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y)”을 수용하여 그런 미친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다.
인간이 지구의 한계 내에서 살 수 없다면 인류라는 프로젝트는 실패다.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면 인류는 의미가 없다. 이 둘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레이워스의 생태위기적 생각은 필자의 새 책 “팬데믹 자본주의(Pandemic Capitalism)”과 검토해 볼만한 대안을 근본적으로 관통한다.
봉쇄조치의 맥락에서도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대다수가 집에서 일해야 할 때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기존의 자본주의가 오랫동안 이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에 대해 보상할 것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 바이오 제약회사 길리어드(Gilead) 사의 코로나 19 치료제, 렘데시비르(Remdesivir)를 생각해보자. 렘데시비르는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로 날로 그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연구 결과, 해당 약품을 투여한 후 입원 기간이 약 4일 단축되었으며 입원환자의 사망률과 심각한 부작용 역시 약 5-6% 감소했다.
그런데 길리어드가 일반적 투여량에 대한 가격을 $2,340으로 책정하자 소비자는 격분했다. 이에 길리어드 사의 회장은 공개 편지를 통해 해당가격의 결정이 공익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약으로 미국 환자들은 대략 12,000달러의 병원비를 아낄 수 있게 되었고, 평소라면 “약이 제공하는 가치에 맞게 가격을 매겼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업튼 싱클레어와 같은 작가의 눈으로 보았다면 끔찍한 발상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길리어스 사의 방침을 조나스 소크(Jonas Salk)와 앨버트 세이빈(Albert Sabin)에 비교해보자. 이들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여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혜택이 돌아가게 했고 그 결과는 소아마비의 근절로 이어졌다.
소크와 세이빈은 개인의 부를 마다했다. 반면 길리어드 사는 신약 개발을 위해 세금 7천만 달러를 지원받아놓고, 납세자가 그 약을 쓸 때에는 수천 달러를 청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설정된 가격은 현재의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한 ‘할인가격’이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이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일반적인’ 그러나 이상한 결과물이다. 필수 서비스와 연구 분야를 기업의 통제에서 분리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와 별개로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s)은 모두가 확실한 수익흐름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한다. 위와 같은 대안을 기초로 경제 시스템을 구동할 수 있다면 이익 경쟁의 감소가 더 많은 소크와 세이빈의 육성을 도울 것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팬데믹을 계기로 경제 시스템의 폭압은 더욱 날카로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인간의 존엄과 독립성을 되찾을 것인가?
출처: CommonDreams.Org on 2020-07-07.
크리스 오스테라이치(Chris Oestereich)
탐마삿대학교(Thammasat University)에서 사회혁신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인류의 가장 큰 문제들에 주목하는 언론인 단체인 Wicked Problems Collaborative를 설립했으며 co-founded the 시스템 디자인 실험실 Circular Design Lab을 공동 설립했다. 최근 저서로는팬데믹 자본주의(Pandemic Capitalism)가 있다
미국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쓰다 보니, 다음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과 트럼프 중 누가 될 거 같으냐고 묻는 이들이 주위에 많다. 현직에 있는 트럼프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내보내서 그런지 트럼프 보다는 바이든이 더 낫지 않겠느냐며 바이든이 될 가능성을 내게서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요새 부쩍 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누가 되든 아무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누가 되든 현재로서는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뭘까?
조 바이든(Joe Biden) 이야기로 시작을 해 보자. 바이든은 스스로 자신을 “중산층 조”(Middle class Joe)라고 부를 정도로 재산이 별로 없었다. 상원의원일 당시 의원들 중 재산신고를 하면 늘 꼴찌 언저리였다.(“Joe Biden Is Demanding Financial Transparency While Concealing His Own Wealth,” The Intercept, Sept. 12, 2019; “Once the poorest senator, ‘Middle Class Joe’ Biden has reaped millions in income since leaving the vice presidency,” Washington Post, June, 25, 2019). 그랬던 그가 2017년 1월 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난 뒤 2년 만에 상류층으로 올라설 만큼 엄청나게 재산이 늘었다. 2년 동안 1,560만 달러(약 188억 원)를 벌어들였다. 2016년 재산신고 때는 자산보다 부채가 더 많아서 그야말로 깡통이었는데 퇴임 후 2년 뒤에 빚은 온데간데없고 재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모두 고액강연 및 저서 출간으로 인한 인세 수입이었다. 그런데 바이든은 저런 고액의 수입을 올렸으면서도 그가 속한 델라웨어 주엔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Joe Biden Is Demanding Financial Transparency While Concealing His Own Wealth,” The Intercept, Sept. 12, 2019; “Joe Biden Earned $15.6 Million in Two Years After Leaving Office,” The Wall Street Journal, July 10, 2019; “Joe Biden earned $15.6 million in the two years after leaving the vice presidency,” Washington Post, July 10, 2019). 물론 합법적으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파나마는 잊어라. 델라웨어가 있으니!
파나마는 케이만군도와 함께 조세천국으로 유명하다. 바이든의 본거지인 미국의 델라웨어 주도 그 반열에 들어선 지 오래됐다. 조세천국이 된 델라웨어 주의 환경을 십분 활용해 바이든이 세금을 안 내고 부를 쌓았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바이든의 구체적인 절세방식은 조금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화시켜 이야기하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다. 바이든이 실제적으로 면세를 받기 위해 작동시킨 것이 바로 쉘 컴퍼니(shell company), 즉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페이퍼 컴퍼니 설립이다. 그것을 통해 돈이 들어갔다 나오면 세금을 안 내도 된다. 페이퍼 컴퍼니는 껍데기만 회사 형식을 띄었을 뿐 실제로 회사가 아닌 유령회사다. 그런 유령회사를 바이든은 두 개를 만들었다. 이름은 셀틱 카프리(CelticCapri)와 지아코파(Giacoppa)로 일명 “S-법인”으로 불린다.(“Joe Biden Is Demanding Financial Transparency While Concealing His Own Wealth,” The Intercept, Sept. 12, 2019).
바이든과 부인은 이 페이퍼 컴퍼니를 뚝딱 만들어서 강연료와 인세를 그곳에 집어넣고, 거기서 배당(급료)을 받는 방식으로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와 메디케어세(Medicare Tax)를 한 푼도 안냈다(둘 다 합쳐 15.3%의 세금). 그런 유령회사를 세워서 거기에 돈을 넣었다가 돈을 빼(받)는 방식을 취하면 세금을 안 내는 것이 허용이 되는 게 델라웨어 주법이니 어찌하겠는가? 말하자면 그런 걸 모르고 그렇게 못하는 놈만 등신인 게다. 덧붙여 그런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면 수입원도 추적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페이퍼 컴퍼니의 실소유주 이름을 등록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회사(실제로는 돈)의 실소유주, 업계 용어로는 수익소유주(beneficial ownership)를 밝히게 않게 되어있다.
자신의 부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은밀히 숨기면서 금융 투명성을 역설하는 조 바이든 <출처: 인터셉>
델라웨어 주는 이런 소유주가 익명인 유령회사를 1시간 안에 뚝딱 만들 수 있으며, 아무런 증명서류를 낼 필요가 없다. 운전면허증과 도서관증 만드는 것보다 더 쉽다. 이것을 허가해주는 법원은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 그래서 ‘파나마를 잊어라!’ 하며 새로운 조세회피천국(tax haven)으로 델라웨어 주가 등극한 것이다.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 Network)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자산 은닉을 원하며 동시에 세금을 피하고 싶은 이들의 최고 피난처 순위는 스위스, 홍콩에 이어 미국이 3위를 차지했다.(“Forget Panama: it’s easier to hide your money in the US than almost anywhere,” The Guardian, April 6, 2016).
델라웨어 구멍
델라웨어 주 인구는 2019년 현재 약 97만 명이다. 그러나 델라웨어 주에는 인구 보다 더 많은 회사가 들어서 있다. 2018년 말 현재 140만 회사가 등기를 해 놓고 있다. 해당연도에만 216,005 회사가 등기를 새로 했다. 전년대비 8.8%가 증가했다. 미국 주요기업 500개 중 67.2%가 델라웨어 주에 등기를 했다.(DelawareInc.com, “Delaware Adds Over 200,000 New Companies in 2018,” Aug. 5, 2019). 미국의 공개 기업의 50%이상이 델라웨어가 법적 고향이다.(“Forget Panama: it’s easier to hide your money in the US than almost anywhere,” The Guardian, April 6, 2016). 이런 수치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애플, 월마트 등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앞 다투어 델라웨어에 회사를 설립하려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델라웨어 주에 붙은 별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별명은 다름 아닌 “델라웨어 구멍”(Delaware Loophole)이다. 룹홀(loophole)은 구멍, 허점, 맹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구멍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돈 많은 이들과 뒤가 구린 이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구멍을 말한다. 떳떳한 이들은 눈도 돌리지 않을 곳이란 이야기이다. 그럼 델라웨어 구멍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첫 번째는 조세회피다. 이것은 앞서 바이든이 취한 절(탈)세방식에서 그것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봤다. 명목상 델라웨어 주 법인세율은 8.7%이다.(https://revenue.delaware.gov/business-tax-forms/filing-corporate-income-tax/). 그러나 회사가 주내에서 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법인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또 무형자산(intangible assets: 특허권, 상표권, 상호권, 실용디자인권 같은 산업재산권, 광업권, 저작권 등의 자산)에도 과세를 하지 않는다.(“Loose Tax Laws Aren’t Delaware’s Fault,” The Atlantic, Oct. 5, 2016). 그래서 구멍이라는 것이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개인과 회사들이 절(탈)세를 위해 너도나도 델라웨어에 회사(본사 혹은 자회사)를 설립하고자 쇄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델라웨어 주에서 법인세를 한 푼도 안 내는 회사들은 다른 주에서도 세금을 덜 낸다. 델라웨어 주에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이중으로 절세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회사가 델라웨어에 자회사를 차린다. 그리고 거기에 무형자산을 이전한다. 예를 들면 상표 같은 것이다. 이 회사는 델라웨어 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해당상표를 사용하기 위해 델라웨어의 자회사에 로열티 비용을 지불한다. 무형자산은 델라웨어 주에서는 과세대상이 아니니 세금 한 푼 안낸다. 그리고 다른 지역(주)의 회사에서는 로열티 비용을 공제 받고 절세를 하는 식이다. 이래서 듀크 대학(Duke Univ.) 경영대학의 스코트 디렝(Scott Dyreng)교수는 “델라웨어는 역내 세금 피난처”라고 단언한다.
돈세탁
두 번째로 델라웨어 구멍에선 온갖 부정한 돈(illicit money)들의 세탁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전 세계의 검은 돈이 모인다. 전 세계의 더러운 돈들의 저수지인 셈이다. 그리곤 세탁이 되어서 나간다. 미재무부에 따르면 매해 미국서 약 3천억 달러(약 361조 원)가 세탁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어림짐작일 뿐 실제는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How money laundering is poisoning American democracy,” Financial Times, Nov. 28, 2019). 돈세탁은 대개가 이런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돈들이 실제로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부정한 돈들이 속속 저수지로 흘러들 수밖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런데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지 델라웨어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델라웨어 주뿐만 아니라 미국 법 자체가 수익소유자의 공개를 요구하지 않는다. 델라웨어 주는 거기에 매우 충실할 뿐만 아니라 페이퍼 컴퍼니 설립을 아무런 조건 없이 수수료 조금 받고 뚝딱 해주고 거기다 면세까지 해주니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돈세탁용 불법 자금들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은행의 비밀유지는 곁다리로 제공된다.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아는가? 미국 은행은 모든 의심스런 돈의 흐름이 포착될 경우 즉각 사법당국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단, 예외가 있다. 로펌(법률회사), 부동산회사, 미술상, 주식회사, 비은행금융기관의 돈의 흐름은 보고를 안 한다. 그러니 더러운 돈의 천국이 된 것이다. 이런 쪽에 관심 있는 자들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은밀하게 돈세탁을 할 수 있으며 게다가 면세까지 받는 곳을 어느 누가 마다할 것인가. 일반 국민들의 푼 돈은 단 1푼이라도 그 흐름을 소상히 꿰뚫고 추적하고 있으면서, 돈 많은 부자들의 돈의 흐름에는 눈도 꿈쩍 안 하는 저 치밀한 부당함!
래니 브로우어(Lanny A. Breuer) 법무부 범죄담당 검사는 “페이퍼 컴퍼니는 불법자금 세탁과 범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이것은 범죄 정의에 있어 심히 중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범죄자가 백주 대낮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은행 시스템을 쉽사리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중지시켜야만 한다.”라고 <뉴욕타임스>에 코멘트를 했다.(“How Delaware Thrives as a Corporate Tax Haven,” New York Times, June 30, 2012).
이렇게 델라웨어엔 불법 자금들이 흘러들어 돈 세탁이 되어 새로운 투자처나 뇌물, 정치 자금, 로비 자금, 그리고 해외 등으로 다시 흘러 나가거나 잠시 멈추어 있다. 그러니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독재자들과 부정축재자들의 돈이 이리로 흘러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천지에 이곳 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을까. 가히 그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Forget Panama: it’s easier to hide your money in the US than almost anywhere,” The Guardian, April 6, 2016).
물론 범법자들 외에 쓰레기 정치인들도(물론 그들도 합법의 탈을 쓴 범법자들이긴 마찬가지다) ‘델라웨어 구멍’으로 엄청난 부당 이익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슈퍼팩(한도가 없는 정치기부금)의 돈도 유령회사를 내세워 정치인에게 주면 누가 기부한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마구 악용되고 있다. 그것은 명색만 정치기부금일 뿐, 눈먼 돈, 즉 뇌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페이퍼 컴퍼니의 소유주가 드러나지 않기에 들통이 나기도 어렵다.(“Why are there so many anonymous companies in Delaware?,” SunLight Foundation, April 6, 2016). 또 그것을 받는 정치인은 또 나름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자기 재산을 불리고(바이든처럼 세금 한 푼 안 내고) 자신의 부정 축재한 재산을 노출시키지 않게 된다. 델라웨어에 소유주가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유령회사가 그렇게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뒤가 구린 자들에겐(정치인 포함)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바로 ‘델라웨어 구멍’이다. 세상에 이런 것을 미국 동부에 합법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이러니 온라인 잡지 <글로벌리스트>는 바이든의 고향 델라웨어가 여태껏 범법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해 비난을 받았던 스위스 은행조차도 아주 깨끗해 보일 정도로 온갖 범죄자들과 독재자들을 위한 최적의 온상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Biden’s Delaware: Making Swiss Banking Look Hyper-Clean,” The Globalist, Sep. 7, 2010).
왜 물먹은 다른 주는 가만히 있는가?
이런 식으로 기업을 유치하고 불법자금을 끌어들여서 얻은 델라웨어의 수익은 2011년 현재 8억6천만 달러(약 1조373억 원)로 주 전체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페이퍼 컴퍼니를 다른 주보다 얼렁뚱땅 쉽게 설립하게 해주고 각종 수수료와 약간의 세금으로 얻는 수익이다. ‘델라웨어 구멍’으로 기업이 본사를 옮기거나 자회사를 차려서 절세를 하는 통에 다른 주가 피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그 피해액은 2012년 현재 기준으로 과거 10년 동안 95억 달러(약 11조5천억 원)에 달했다. ‘델라웨어 구멍’ 때문에 다른 주에서 그 만큼 걷을 수 있는 세수가 증발한 것이다.(“How Delaware Thrives as a Corporate Tax Haven,” New York Times, June 30, 2012). 그 뒤 나온 자료를 백방으로 찾아본 바, 2019년 6월말 현재 ‘델라웨어 구멍’으로 올린 세수는 13억 달러(약 1조5,672억 원)로 껑충 뛰었다. 델라웨어의 부당한 장사수완이 가히 물이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DelawareInc.com, “Delaware Adds Over 200,000 New Companies in 2018,” Aug. 5, 2019).
기업들이 델라웨어로 갈 경우 세금 부담이 15~24%가 덜어지는 데 가지 않을 기업이 어디 있는가?(Scott Dyreng, Bradley Lindsey, and Jacob Thornock, “Exploring The Role Delaware Plays As a Domestic Tax Haven,”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Vol. 108, Issue 3, (2013), pp.751-772; “Loose Tax Laws Aren’t Delaware’s Fault,” The Atlantic, Oct. 5, 2016). 이렇게 되니 다른 주의 피해가 막심한 것이다. 예를 들어 펜실베이니아 주의 경우, 1972년 주 세수의 28%를 법인세로 충당했으나 2016년 현재 18%로 감소했고, 2020년에는 14.9%로 더 하강할 것으로 추정된다.(Pennsylvania Budget and Policy Center, “Understanding the Numbers in a Budget Crisis,” Jan. 28, 2016). 말인즉슨, 원래 각 주에서 마땅히 걷어드릴 세수가 델라웨어 때문에 새버린 것이다. 따라서 각 주는 그만큼 재정악화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델라웨어 때문에 물을 먹고 있는 다른 주들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의 시정을 요구 하지 않고 국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 첫 번째 답은, 자칫 저항의 액션(법인세 상승을 포함해서)을 취하다가 자기 주에 있는 기업마저 다 빠져나갈까봐 걱정 돼서다. 그러면 그나마 있는 세수입원 조차 잃게 되고,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일자리 상실이 뻔해서다. 두 번째는, 씽크탱크 <예산 및 정책 우선순위 센터>(Center on Budget and Policy)의 마제로프(Michael Mazerov) 선임연구원이 지적하듯이, 해당 주의 정치인들이 원래부터 죄다 기업친화적(business-friendly)이어서 그렇다. 그러니 기업들이 ‘델라웨어 구멍’은 구멍대로 이용하고 다른 지역에선 세금감면 받고 이중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른바 다국적 기업의 무지막지한 로비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울 수 있는 제도 시행을 로비를 통해서 이루었는데 그것의 시정을 가만히 보고 있을 기업들이 아니다. 이들은 ‘델라웨어 구멍’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철저히 압살한다. 그러니 이런 기업들과 돈세탁을 원하는 무도한 세력들은 현상유지를 절대적으로 원하면서 동시에 이를 위해 로비스트를 고용해 지금도 열일 중이다.(“Loose Tax Laws Aren’t Delaware’s Fault,” The Atlantic, Oct. 5, 2016). 사정이 이러하니 델라웨어 때문에 피를 보는 다른 주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면 정치인들의 농간에 그리 되든지….
조세천국이 불러온 불평등의 심화
198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기업의 법인세 명목 세율인 35%를 변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들어 21%로 내려갔다. 기업친화정책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도 기업들이 낸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그것도 안 낸다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조세회피처의 회사 세우는 등의 꼼수로 실제로 기업이 내는 법인세는 그 반으로 떨어진다. 기업이 납부해야할 세금과 실제 징수액 간의 차이를 ‘택스갭’(tax gap)이라 한다. <공정 세 마크>(Fair Tax Mark) 보고서에 따르면, 2010~2019년 10년 동안 세계 굴지의 IT기업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6개 사의 택스갭은 총 1천2억 달러(약 120조8천억 원)다. 그 중 최악은 아마존이다. 아마존의 경우 실질 세율은 12.7% 밖에 안 된다.(“Silicon Valley giants accused of avoiding over $100 billion in taxes over the last decade,” CNBC, Dec. 3, 2019).
이렇게 대기업이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불평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선, 기업이 내지 않는 세금을 누군가는 벌충해 줘야 한다. 그 당사자는 소위 유리지갑으로 알려진 중산층들이다. 이들이 소득세, 판매세, 재산세 등의 명목으로 더 내게 돼 있다. 중산층만의 증세는 불평등의 심화와 직결된다. 만일 더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주재정이 악화되어서 공공영역, 이를테면 공립학교의 교육 등이 열악해 질 수밖에 없다. 공립학교에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의 자녀가 다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도 불평등의 심화와 맥이 닿아 있다.
둘째로 법인세는 자본에 과세하는 것이다. UC버클리 경제학과 교수 주크먼(Gabriel Zucman)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자본 과세에서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재산세 및 자본 이득에 대한 개인 과세다. 이런 상황에서 법인세를 회피하게 되면 결국 자본을 가진 소유주들만 좋은 셈이 된다. 자본과세의 감소는 자본 소유자의 수익률 증대를 의미하고, 그것은 곧 부의 불평등의 심화와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주크먼은 “불평등이 우리 시대 가장 큰 문제인 상황에서, 왜 우리는 그렇게 탐욕스럽고 공정치 못한 조세천국을 용인하는가?”라며 울분을 토한다.(Gabriel Zucman, “Inequality is the great concern of our age. So why do we tolerate rapacious, unjust tax havens?” The Guardian, Oct. 2015).
UC버클리 경제학과 교수 가브리엘 주크먼이 <가디언>지에 쓴 조세천국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하는 칼럼
델라웨어 주, 윌밍턴 시, 북 오렌지가 1209번지
1209, North Orange Street, Wilmington, Delaware. 이 주소엔 사진에 보듯 조그만 2층짜리 건물이 있다. 놀라지 마시라. 이 주소에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다 소재해 있으니까. 아메리칸항공, 애플, 뱅크 오브 아메리카, 버크셔해서웨이, 카길, 코카콜라, 포드, 제너럴 일레트릭, 구글, JP모건 체이스, 월마트, 이베이, 버라이존 등 무려 30만 개 회사가 같은 주소를 공유하고 있다. 대행사 CT코퍼레이션(CT Corporation)을 통해서다. 2012년 <뉴욕타임스>에는 그 주소에 등기를 한 회사가 28만5천 개였으나(“How Delaware Thrives as a Corporate Tax Haven,” New York Times, June 30, 2012), 2018년 현재 30만 개로 늘었다.(“This tiny building in Wilmington, Delaware is home to 300,000 businesses,” Business Insider, Dec. 28, 2018).
델라웨어 주, 윌밍턴 시, 북 오렌지가 1209번지, 이 건물에 애플, 구글 등 미국의 30만개의 회사가 등기를 해 두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도 이 주소를 공유하고 있다. 조 바이든의 주소는 이 건물 바로 옆 1201번지이다. <출처: 뉴욕타임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주소엔 서류상 같이 사는 이들이 더 있다. 누군지 아는가? 힐러리 클린턴(물론 남편인 전 대통령 빌 클린턴 포함)과 도널드 트럼프이다. 2016년 대선에서 속된 말로 머리 터지도록 싸우던 그들이 동거인이었다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물론 나는 당시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이든과 마찬가지로 힐러리는 국무장관직을 그만 둔 뒤 8일 만에 저 주소에 등기한 페이퍼 컴퍼니 ZFS홀딩스를 통해 2014년 한 해에만 1,600만 달러(약 193억 원)의 강연료와 인세 등을 처리해 세금 한 푼 안 내고 부자대열에 합류한다. 물론 남편 빌 클린턴의 페이퍼컴퍼니 WJC도 이미 2008년 같은 주소에 등기를 했다. 이런 걸 보고 부창부수라 하던가?
백인의 희망이요 자랑인 트럼프는 어떤가? 자신의 회사 515 개 가운데 378 개가 페이퍼 컴퍼니로 바로 저 주소지에 등기가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트럼프국제경영회사(Trump Interantional Management Corp.)와 허드슨 워터프론트(Hudson Waterfront Associates) 같은 회사가 힐러리와 같은 주소지를 공유한다. 2016년 델라웨어 주 선거 유세장에서 페이퍼 컴퍼니 이야기 나온 끝에 트럼프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나는 378개 회사를 델라웨어에 법인 등기했다. 그 말은 내가 당신들 주에 세금을 엄청 많이 낸다는 뜻이다. 내가 뭘 잘 못했나? 난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Trump and Clinton share Delaware tax ‘loophole’ address with 285,000 firms,” The Guardian, April 25, 2016). 참으로 뻔뻔하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이들이 미국엔 정말로 많다는 것이다.
노 호프(no hope)! 미국 정치
그럼 바이든의 페이퍼 컴퍼니는 어디 있을까? 트럼프와 힐러리와 같은 주소는 아니지만 같은 블록 내에 있는 바로 옆 건물이다. 주소는 번지수만 다른 1201번지.(“5 Questions The Media Won’t Ask Biden In The Debate,” The American Conservative, Sept. 12, 1209). 힐러리와 트럼프가 서로 죽일 것처럼 악다구니를 썼지만 자신들이 주소를 같이 공유한다는 것만큼은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바이든과 트럼프는 자신들의 치명적 치부를 결코 서로 들추어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바이든이 델라웨어에 세계 어느 지역의 조세천국 보다 더 좋은(?) 파라다이스를 만들지 않았다면 트럼프는 절(탈)세도 할 수 없는 것은 둘째 치고, 트럼프의 재산도 많이 불리지를 못했을 테니까. 예를 들어 플로리다의 트럼프 타워 분양자 80%가 델라웨어에 둥지를 튼, 익명의 소유주가 소유한 페이퍼 컴퍼니이기 때문이다.(“How money laundering is poisoning American democracy,” Financial Times, Nov. 28, 2019). 이러니 나한테 바이든과 트럼프 둘 중에 누가 될지 묻지 말라는 것이다. 초록이 동색. 이렇게 썩은 이들에게 생명의 색 초록을 비유하는 게 영 못마땅하지만 말이다.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델라웨어의 같은 주소를 공유한고 폭로한 가디언 기사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저렇게 썩을 대로 썩어 빠졌는데 무엇을 더 기대한단 말인가. 민주당과 공화당, 진보 대 보수? 웃기지 마시라. 누가 되든 다 똑 같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와 배만 불릴 궁리뿐인데. 그들이 하는 것은 오직 쇼, 쇼, 쇼! 바이든과 같은 민주당인 힐러리가 저랬다면, 오바마는 어땠는가? 파나마와 기타 조세천국 지역에 대해 맹공을 펼치면서 바이든과 함께 델라웨어를 합법적인 조세천국으로 만들어 전 세계 검은 돈들이 델라웨어로 흘러들게 하는데 일조한 게 바로 오바마다. 겉과 속이 다른 전형적인 제국(극소수 부자들)의 앞잡이! 그를 민주주의, 그것도 흑인을 대변하는 민주주의의 사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Obama faces criticism as US state tops secrecy table,” The Guardian, Nov. 2009; “US overtakes Caymans and Singapore as haven for assets of super-rich,” The Guardian, April 6, 2016).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조차도 이것에 대해 이전엔 비판하는 듯 했으나 이번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와선 끽소리도 하지 않았다. 계속 밀어붙였다가는 정치가들과 기업으로부터 왕따를 당할 테니 꼼수를 쓴 것일 게다.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 갖고 있던 내가 이번에 그녀에게서 돌아선 이유다. 진정 양심이 있는 자라면, 진정 미국을 바로 세우고 싶은 자라면, 더러운 돈에 레드카펫을 깔아주고 있는 이런 미국의 조세천국 시스템 자체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고 실현해야하는데 그런 이를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이 허망함.
결국 이렇게 부패한 정치권에 의해 피를 보는 것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게다가 전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패한 나라로 낙인찍히는 오명까지 덤터기를 쓰는 것은 덤. 그런데 미국은 우스꽝스럽게도 전 세계의 독재자를 꾸짖고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행세를 한다. 정녕 그러고 싶거든 델라웨어를 비롯한 미국 내의 조세천국, 철통보안의 비밀유지(“Obama faces criticism as US state tops secrecy table,” The Guardian, Nov. 2009; “Delaware – a black hole in the heart of America,” The Guardian, Nov. 1, 2009)로 그들에게 각광을 받는 은행 방침부터 없애라. 그것을 통해 독재자들의 실명과 정체를 밝히고, 검은 돈의 흐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게 그들을 향해 엄포를 놓는 것 보다 더 큰 효력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사설처럼 “신형 항공모함 5척을 갖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것 보다 그게 더 약발이 먹힐 테니” 미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돈세탁의 천국, 조세회피의 천국인 델라웨어 구멍부터 파헤쳐 그 구멍을 메우라.(“How money laundering is poisoning American democracy,” Financial Times, Nov. 28, 2019). 그러나 미국의 정치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러면 자신들의 뱃속을 채울 수 없기에 국민이야 죽어나가든 말든 신경 안 쓸 것이 뻔하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온갖 뇌물과 정치기부를 해주는 제국들의 반열에 자신들도 들어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나에게 다시는 묻지 마시길. 바이든과 트럼프 중 누가 될 것 같으냐고. 나의 대답은 시종일관 같다. ‘어느 놈이 되던 똑 같다. 그래서 난 신경 안 쓴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나도 정말 궁금하다. 우리나라의 어떤 놈들이 델라웨어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웠는지 말이다. 단 한 가지 분명히 짚이는 것은 추정컨대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을 터.
버스비조차 없는 이들이 겪는 기후위기 지난 7월 녹색연합은 경향신문과 함께 “기후변화의 증인들”이라는 시리즈를 함께 기획한 바 있다. 일상에서 기후위기에 맞닥뜨린 해녀, 농민, 배달노동자, 산지기 등의 목소리를 담은 기획기사였다. 기자는 서울 돈의동 쪽방촌 주민에게 날씨가 더워지면 제일 힘든게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돌아온 것은 다소 뜬금없이 “병원 가서 매일 주사 맞고 오는게 무척 힘들다”는 대답이었다. 다른 주민의 […]
코로나19 대유행은 한국에서도 ‘재난 자본주의’의 위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98년의 IMF 외환위기와 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심화된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작금의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미필적으로나 필연적으로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활동이 위축되면서 시장에서 발생하는 경제활동의 변화는 취약계층에게 가장 먼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있다. 방역을 책임진 정부는 이들 피해계층에게 ‘자발적 인내’를 강요하고, 피해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K방역의 성공’은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K방역’으로 개념화된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은 적어도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나 비율은 물론 경제성장률의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성공적’이다. 방역 성공은 문재인 정부를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하지만 이 성공에는 코로나19의 희생자를 최소화하려는 의료진, 특히 간호사들의 헌신과 함께 모든 국민의 ‘참여방역’이라는 수치화되지 않는 대가가 따르고 있다. 2020년 성장률 OECD 1위를 달성한 배후에는 제대로 된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실직과 휴폐업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다.
성공적인 방역모델로 ‘수출상품’이 될 뻔했던 ‘K방역’은 초기에는 ‘사람 중심’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확진자의 행적을 추적하여 추가적인 확산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동안에는 감염을 최소화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방역과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산 진단키트는 ‘K방역’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여 개국 정상의 축하 전화를 받았다. ‘K방역’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일부 서구 학자나 언론인의 비난에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를 위한 자유”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IT 기기와 기술의 보급이 크게 부족한 후진국은 물론 개인정보(사생활) 보호를 생명으로 하는 서구사회도 ‘K방역’의 핵심요소인 확진자 추적은 모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K방역’은 ‘K방역’으로 머물렀다.
감염원이 불확실한 무증상 환자의 비율이 20%를 넘어서면서는 확진자의 전후방 접촉자를 추적하여 추가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정부 방역지침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집중되었고, 이를 위반하는 국민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총리는 연말연시 분위기에 제주도 숙박시설을 메운 청년을 향해 “개탄스럽다”고 비난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세분화되었고 임시선별검사소가 설치되었으며 방역단계별로 ‘집합금지명령’이 내려졌다. 인천 학원강사 같은 N차 감염자의 성공적인 추적을 중계하던 방역당국은 이제는 가족모임마저 자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이제 국민은 방역의 ‘보호대상’에서 방역의 ‘위험요인’으로 반전되었다.
코로나19 감염대책이 세분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에 집중되면서 방역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편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K방역’ 성공의 보수는 수출기업들과 비대면거래를 담당하는 일부 산업과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반면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확보하기 위한 집합금지명령이 불공정한 측면을 보이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자 정부가 양보하면서 더욱 위신만 떨어졌다. 또한 집합금지 명령에 따른 손실을 보전해주는데 인색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3차례에 걸쳐 지급한 재난지원금의 결정 과정에서 피해자 국민을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고 국가채무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함으로써 정부는 ‘주고도 욕먹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고용불안상태에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이나 유사 자영업자의 생계 불안은 가계부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기재부가 코로나 국면에서 보이고 있는 행태는 정부지출 증대보다 감세를 선호한다는 점, 수요(소비자)보다 공급(기업)을 지원한다는 점, 서민보다 부자(임대인)를 우선한다는 점, 사람보다 기업(사업자)을 중심에 둔다는 점 등에서 골수 신자유주의적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채무’를 빌미로 기재부가 ‘재난지원금’에 보이고 있는 적대적인 자세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2025년까지 기존 임금근로자에 이어 예술인, 특수고용노동자·플랫폼종사자, 자영업자를 아우르는 전 국민 고용보험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과 기재부의 저항을 뚫고 재난지원금의 형태로 기본소득제가 실험을 마친 것은 코로나19 국면에서 이룩한 정책적 진전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코로나19 국면에서는 적어도 3가지 요인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재편되는 시장거래질서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있다는 사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혜자와 피해자가 갈리고 있다는 점, 선별적인 정부 지원으로 혜택이 편중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K방역’은 1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적이지만 모범적이지 않은 ‘모델’이 되고 있다. 1998년의 ‘금 모으기 운동’처럼 세계를 놀라게는 하지만, 어느 나라도 본받을 수 없는 위기 극복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클루그만 교수가 지난 1월 16일자 뉴욕타임즈 기고문 “변화의 바람”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정부의 권한(power)을 의심하지 말 것. 둘째, 부채에 강박관념을 갖지 말 것. 셋째, 인플레이션 걱정하지 말 것. 넷째, 국정운영에 공화당이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 것. 구구절절이 한국 정부에도 해당되는 조언임에도 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경제대통령’이 보이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대한민국이 코로나19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선도국가”가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평등을 해소해서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사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달려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한국의 여론조사 등에서 사회갈등의 축으로 확인된 것은 주로 이념, 세대, 성, 연령, 계층 등이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이념 갈등은 오랫동안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었고, 소위 ‘광화문 집회’ 등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한층 더 두드러졌다. 세대 간 문화적 및 사회경제적 격차는 정치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심화 속에서 ‘세대론’의 프레임을 통해 계속 지적되었다. 특히 노인 빈곤의 확대와 청년층의 전망 부재가 새로운 불평등의 의제로 주목받았다. 또 청년층 내부의 기회 격차가 ‘부모 찬스’나 ‘흙수저-금수저’ 등 이념 차이보다도 우선 작용하는 광범위한 계층 대물림의 현상으로 인식되면서, ‘공정성’이라는 말이 청년층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남성성 변화를 압박하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히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루저’ 자의식 또는 ‘성공한 사람’과 단순 동일시하려는 주관적 현실 인식이 크게 확산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중심으로 청년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면서, 이처럼 복잡한 사회불평등은 ‘젠더 정치’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하는 중이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에서 거론한 이념, 세대, 소득, 재산 불평등과 빈곤 위험이 한층 악화하며 소위 ‘K형 양극화’가 우려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다른 불평등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특히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그 의미가 주변화되었던 ‘돌봄’ 관련 불평등, 그리고 되풀이되어 발생해도 해결되지 않는 ‘폭력’의 문제가 새로운 불평등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사회불평등이 한층 더 악화할 뿐만 아니라 더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나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는 그 이전의 ‘정상성’으로 단순히 회귀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또는 그 와중에서, 지금까지 비교적 서서히 진행되던 사회변화, 예컨대 디지털 경제의 확대 등 산업구조 변화와 기후변화나 쓰레기 문제와 같은 생태변화의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돌봄 관련 불평등
돌봄과 관련하여, 한편으로 코로나19는 정신병원 등 특수 돌봄 수용시설, 노인 요양원, 병원 등 돌봄 취약자 수용기관들에서 집단발병하였다. 그리하여 ‘돌봄 취약자’ 및 ‘돌봄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했다. 집단 수준에서 다소 다른 양상으로 돌봄과 관련되며 감염에 취약함이 드러난 집단은 교회이다. 1, 2차 유행을 가져온 신천지 교회와 사랑제일교회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가 주요 감염발생지로 주목받았는데, 이 종교기관들 역시 영혼을 돌보는 기관들이다. 즉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기관들이 코로나19 집단발병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돌봄이라는 의존관계에 있는 사람들, 특히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거나 돌봄노동을 직접 수행하는 피고용자들이 감염에 가장 취약한 집단임을 의미한다. 이들의 이러한 불평등은 그동안 사회불평등에 대한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 개인 수준의 돌봄과 관련해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아동학대 사례들이 기사화하면서, 아동이라는 돌봄 의존적 존재가 ‘개별화한 사회적 취약자’ 집단으로 등장했다. 여기서는 돌봄을 직접 수행하는 지위의 어머니들이 가해자로 지목되어, 순리를 위반한 ‘악독한 모성’의 문제로 보도되고 있다. 물론 한때 ‘잔혹 동시’ 형태로 모성의 지배에 대한 자녀의 문제 제기가 보도된 바 있고 또 현재 청소년들 사이에서 ‘어머니’ 관련된 욕들이 난무한다고 하니, 모성 관계나 모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코로나19로 가정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한 데 비해 한국에서는 아동학대가 두드러짐을 고려할 때, 한국 가정의 돌봄 부담이 갖는 특수성이나 부부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코로나19 감염병은 집단돌봄이나 가정 돌봄 모두가 사회에서 얼마나 취약한 관계를 만들어왔는지를 훤히 드러내는 사회학적 임무를 수행했다. 산업사회의 근대적 주체는 ‘노동하는 사람’이고 노동은 곧 직업 활동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간 돌봄 영역은 사회에서 의미론적으로나 실제로 주변화되어왔다. 그런데 그런 실상이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회학적 관찰은 코로나19 감염병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산업사회의 프레임으로 사회를 보는 인식론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돌봄 관계의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의미론에 구애받지 않는 감염병은 오히려 자유롭게 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주도한 이러한 인식론적 변화가 앞으로 사회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포괄되어, 다시 돌봄 관계의 취약성이 무시되거나 주변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인식론적 정상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폭력의 문제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집중적으로 폭로된 또 다른 사회불평등의 양상은 ‘폭력’의 문제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동학대와 같은 개인 간 폭력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과 조직 등 제도적 폭력의 문제로서 드러났다. 아동학대와 같은 개별적 폭력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공감’이 놀라운 수준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부모가 스스로 학대당한 아동의 부모로서 동일시하며, 생면부지 아동의 인권을 호소하며 앞장섰다. 과거 세월호 재난과 여러 청년 노동자의 사고사 등에 부모들이 나서서 자신의 죽은 자녀뿐만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미래의 잠재적 피해자를 위해 싸웠던 것처럼, 그렇게 부모로서의 동일시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재난과 사고를 통해 국가기관과 기업이라는 거대 권력체의 폭력 앞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통감해온 우리 사회의 역사와 유관하다. 아동학대는 개인에 의한 폭력이지만, 성인 부모와 어린 아동의 지극히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기관과 개인 간의 권력 비대칭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비대칭적 취약자 지위에 있는 개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은 그야말로 ‘개인에 대한 공감’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재난과 무수한 재난들을 겪으면서 한국 시민은 익명적 관계 속에서의 시민적 동일시를 통해서 ‘촛불혁명’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온 바 있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와 달리, 사유재산에 기초한 기업이나 사용자의 고용관계에서 나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는 ‘시민’ 지위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기존의 무수한 ‘갑질’ 고용 관행으로 피고용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들 역시 증가시켰다. 배달 노동자들이 죽어갔고, 경비 노동자가 폭행을 당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으며,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사고사가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여성들이 일하는 콜센터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작업장이 감염 취약지로 되풀이되며 등장했다.
이처럼 ‘기관 대 개인’의, 특히 고용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개인적인 안타까움과 공감으로 대응하고 있다. 배달 노동자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택배가 늦어도 참고 기다리며 이해하는 식이다. ‘피고용자’로서,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는 ‘비정규직’으로서, 취약성이 배가되는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으로서 공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많은 학자는 ‘신자유주의 시대 연대가 사라진 개인화한 사회’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연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화’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개인화한 공감’으로서 연대를 표현한다. 따라서 연대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연대가 왜 개인화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직전에 가장 두드러졌던 사회정치적 연대의 형태는 청년층의 페미니즘이었다. 다양한 사회불평등이 서로 작용하여 갈등에 대해서 복잡한 인식이 나타나는 와중에도, 공론장을 형성하며 정치적 주체화한 세력은 청년 여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디지털 성폭력 이슈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새롭게 조직화하는 성폭력에 저항했다. 성매매 사이트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텔레그램 n번방 등을 직접 나서서 조사하고 폭로하며, 정치적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 새로운 사업체로 떠오르던 온-오프라인 네트워크에 정면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같은 네트워크 기반의 신생 사업체라고 해도 배달이나 택배 플랫폼 기업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연대가 작용하지 않았다. 그들을 연대로 이끌 ‘공통성’이 부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들어서면서, 고용관계와 관련된 집합행동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다. 사회적 연대가 아닌, 자기 집단 연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정부의 정규직화 방침에 반대하는 인천국제공항 사태와 의사 파업이 대표적이다. 기득권자에 속하는 정규직 피고용자들 또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공공성’ 확대에 대한 정부 방침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여기서도 ‘연대’가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연대는 청년층 페미니즘처럼 ‘네트워크화’하거나,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이나 의사들처럼 성공한 상위 고학력자 층에서 ‘폐쇄화’하고 있다. 뒤의 연대 형태를 과거 막스 베버는 ‘사회적 폐쇄’라고 불렀다. 베버는 ‘계급’ 개념을 ‘사회계급’ 개념으로 바꾼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핵심은 계급이 더 이상 단순히 소유관계에서의 차이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 위계가 다시 신분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계급별로 상이한 문화와 의례를 보이고, 상이한 소비와 생활양식을 보인다. 즉 계급은 이익으로만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결속한다.
‘사회적 폐쇄’는 그러한 ‘계급의 신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태도와 정서, 문화로 은밀하게, 다른 한편에서는 집단적 위력을 통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대물림하는 것이다. 베버가 살았던 독일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사무직이나 전문직을 중심으로 ‘신분화’나 ‘사회적 폐쇄’가 진행됨을 그는 관찰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다고 할 수 없다. 몇몇 소수정당과 가입률이 미미한 노조들을 제외하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베버 시절 독일에는 사회민주당이 노동자 계급 정당이었고, 노조는 공산주의부터 가톨릭 계열까지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그런 독일도 현재는 디지털화로 인해서 노동자 조직이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공성’ 옹호와 관련되는 사회적 연대는 인권 감수성 강화 방식으로 ‘개인화’하거나, 청년 페미니즘 방식으로 ‘네트워크화’하고 있다. 과거 서구의 계급정당이나 계급조직 또는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 단체처럼 조직화한 형태의 연대는 점점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고용관계에서 조직화한 힘의 대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윗과 골리앗’의 형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갑질’이라는 형태의 폭력 수반이 가능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아동학대와 비교될 수 있듯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경제적 ‘계약관계’가 아닌, 비대칭적 권력 속의 돌봄 관계인 양 인지된다. 그리하여 권력이 쉽게 폭력으로 표현되고, 신분적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정상’으로 인지된다. 성공한 고학력자 층의 신분적 위세 과시 역시 그런 맥락에서 공공연하게 가능해진 것이다.
계약관계와 돌봄 관계의 구분 및 그에 따른 이중적 정의 개념의 필요성
이처럼 코로나19 아래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불평등의 의제는 1) 돌봄 취약성과, 2) 고용관계에서의 유사 신분적 권력관계를 포괄해야 한다. 또 3) 이 두 문제가 한국의 사회불평등 연구 및 인식에서 명확히 가시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와 구별되는 양상이 나타남에도 유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문제들을 가시화했으나, 감염병의 사회학적 기여분은 거기까지이다. 그 이후의 작업은 인간과 사회가 이어가야 한다.
이런 복잡하고 새로운 사회불평등의 인식을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돌봄 관계를 사회불평등의 의제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관계의 정의(justice)와 돌봄 관계의 정의(justice)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산업사회의 정의론은 계약관계의 정의만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의 인식론적 기여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돌봄 관계의 취약성 역시 정의론의 의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목격한다. 그러나 돌봄 관계는 개인 능력의 불가피한 격차에 기초한 비대칭적인 관계이고, 거기서 권력관계의 속성은 자율적 개인들 간의 계약관계에서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정의론은 이중적 형태로 설명되어야 한다. 계약관계에서의 정의와 돌봄 관계에서의 정의를 동시에, 그러나 각각 구분하여 다루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돌봄 관계가 더 원초적이라는 주장이 크다. 물론 돌봄 관계 없이는 개인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그런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 계약관계를 돌봄 관계로 대치하는 방식으로 사고 전환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앞서 보았듯이, 고용관계의 ‘갑질’과 ‘폭력’은 한국에서 계약관계가 ‘노동력 상품화’의 계약이 아니라 ‘인신 판매’의 계약으로 인지됨을 폭로한다. 돌봄과 같은 의존관계는 비대칭 권력관계를 정당화하기 쉽다. 따라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돌봄 관계 자체에서의 장치가 필요함과 동시에, 돌봄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 관계와의 구별 또한 필요하다. 돌봄 관계는 의존이 ‘불가피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적 자유노동자의 고용자에 대한 의존성은 사회적 힘의 결과이다. 거기에는 어떤 자연적, 물리적 우연성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흑인을 중심으로 인종차별에 따른 불평등의 해소발안으로 학자금부채를 탕감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사회에서도 가난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한국장학재단의 기금을 대폭 확충하여 신용 6-7등급 이하의 가계출신 대학생들에게 학자금 대출상환의 기간을 무이자로 10-20년간 유예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반드시.
대선 승리연설 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흑인사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지지하였기에 이제 저는 여러분을 도우려 합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그의 선언은 특히 시민활동가들이 반-흑인인종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흑인미국인들이 코로나-19 팬데믹과 그로 인한 일자리 상실 등으로 인해 불균형적으로 고통을 받는 현재의 시기에 적극적인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즉각적인 실천의 조치로 상기의 선언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흑인미국인에 대한 약속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행정명령의 조치를 통해 모든 연방관련 학자금부채를 탕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학자금부채가 제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습니다. 그와 새로운 행정부는 연방관련 학자금의 대출이자 및 지불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일시적 중지조치를 신속히 연장했으며, 보다 실질적인 지원구제에 대한 선거 당시의 약속처럼 ”학자금 상환금액에서 1인당 최소 $ 10,000를 공제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탕감만이 학자금부채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채무자에게 도움이 될 것 입니다. 또한 오랜 차별정책의 역사가 유색인종의 채무자, 특히 흑인미국인들에게 굴레를 씌운 부채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백인중산층을 집중적으로 형성하고 지원한 20세기 미국정부의 프로그램은 이제 명시적으로는 배제되었지만, 결과로 현재시점에서 백인 중위층이 흑인 중위층 자산의 8 배를 소유하는 빈부격차를 만드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 재산이 적다는 것은 흑인학생들, 특히 흑인여성이 대학교에 가려고 할 때 백인들에 비하여 더욱 많은 빚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문제는 학창시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졸업 이후 고용과 임금차별로 인해 더욱 악화됩니다. 흑인가정은 교육수준이 같은 백인가정의 80 % 수준의 임금을 받고, 흑인여성의 경우에는 같은 학위를 가진 백인남성에게 지불하는 1달러당 63센트만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흑인은 백인과 동일한 소득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자격을 취득해야 하며, 추가교육은 해당흑인의 대다수가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추가부채와 이자를 발생시키면서, 일상에서 더욱 많은 금융비용을 지출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43백만 명이 넘는채무자와 관련가족 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연방의회는 교육부에 연방학자금 대출을 행정적으로 탕김시킬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도, 벳시 데보스 교육부 장관은 이러한 권한을 세 차례에 걸쳐서 사용하였는데 부채상환과 대출이자지급의 보류, 연방의 공공서비스 대출금에 대한 10개월간 상환유예조치 등을 취하였습니다.
척 슈머 상원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은 바이든이 원래 제시한 10,000 달러 공제의 제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바이든에게 행정명령의 조치를 통해 연방학자금 부채에 대하여 최소 50,000 달러를 공제하도록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금융서비스위원회 위원장인 Maxine Waters을 포함한 하원의 흑인여성 지도자들도 이를 위하여 병합결의안(acompanion resolution).을 제출하였습니다.
50,000 달러라는 금액은 여전히 완벽한 수치는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런 금액의 수준이면 학자금 부채가 있는 최저소득 흑인가구의 약 93 %가 학자금부채의 부담에서 해방됩니다. 10,000 달러 수준 공제는 이들 가구의 대다수가 여전히 빚더미 속에 남게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탕감만이 모든 것의 최선의 결과를 제공할 것이며, 상대적으로 저학력 백인의 소득수준이라도 얻기 위해 필요한 추가자격의 증명서를 추구한 것에 대한 흑인들의 노력에 대하여, 금융부채라는 처벌을 대신하여 이를 탕감하는 것으로 교육의 기회를 사회적 지위의 상승수단으로 활용하려던 젊은 흑인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흑인 졸업생은 백인의 동급생보다 빚이 많기 때문에, 흑인 졸업생을 학자금부채라는 함정에 빠뜨리는 대신 이를 완전히 탕감하면 미국사회라는 경기장을 공정으로 고르게 합니다.
인종차별적 학자금부채는 대부분 연방정부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학자금부채의 80% 정도는 즉시 취소하는 것이 행정적으로 가능하며 법에 의해 명시적으로 허용됩니다. 이것으로 인종적 부의 격차가 모두 좁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인종차별적인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야심찬 진보적인 정책의 출발을 보여줄 것입니다. 온전한 탕감만이 대통령이 인종적 격차가 더 이상 벌어지는 것을 막고 이의 격차를 줄이는 일을 격려하는 가장 빠른 조치 중 하나입니다.
금융기관에서 더욱 유리한 조건의 대출혜택을 누리는 백인가정과 동일한 소득과 신용점수를 가진 흑인가정에게 서브-프라임의 대출을 제공했기 때문에, 흑인미국인들은 지난 경제위기(2008년 금융위기)에 제일 먼저 희생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흑인가정의 재산에 추가적인 위축이 발생하였으며 자신의 재산 중 53%를 잃었습니다 (백인가족은 16 %에 불과했습니다). 흑인가구의 평균 학자금부채는 2008년 불황을 겪은 이후, 12년 동안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많은 흑인가구가 인종에 따른 불평등에서 오는 손해를 피하기 위해 더욱 높은 교육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팬데믹 상황으로 이제 졸업하려는 흑인들은 항구적인 취업의 어려움과 불공정한 임금조건에 직면할 것이고, 2008년 금융위기 시절에 졸업한 흑인들의 불운을 다시금 겪게 될 전망입니다.
바이든 신임대통령은 흑인사회에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과거 한때 흑인을 고등교육뿐만 아니라 기본교육에서 조차 배제한 광범위한 차별과 모든 형태의 배제 및 수탈은 인종간 부의 격차를 심화 시켰고, 이는 다시 학자금부채의 격차로 이어졌습니다. 행정명령의 조치를 통해 학자금부채를 탕감하는 것은 상기의 불평등을 보상하기 위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대통령의 수단입니다. 주어진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를 지지한 수백만 명의 흑인미국인들에게 지원을 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출처 : 뉴욕타임즈(NYT) on 2021-02-01.
Naomi Zewde and Darrick Hamilton
Ms. Zewde와 Mr. Hamilton은 미국에서 경제학과 인종의 관련 주제를 연구하는 교수입니다. 양인 모두 학자금부채와 그것이 채무자 및 미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파리 기후 협약 탈퇴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파리 기후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될 전망이다. 이 소식에 대해 쿠미 나이두(Kumi Naidoo)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이 계속해서 파리 협약에서 탈퇴하려 시도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무모하며 끔찍한 행동이다.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가장 파괴적인 조치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석 연료 사용을 고수하는 것으로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생명의 대가가 따른다. 그는 세계인의 요구보다 자신 개인의 입장을 더 우선하며 인류를 구하려는 전 세계적 노력을 계획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우리 세대가 직면한 심각한 인권 위협 중 하나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세계 곳곳이 기근과 빈곤, 무주택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급격히 줄이지 않는 한 인권 재앙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세계 탄소 배출량 2위인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 기후 협약 탈퇴는 기후위기로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수천만 명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배경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 기후협약 공식 탈퇴를 위한 1년간의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탈퇴 절차는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최종 완료될 예정이다.
파리 기후변화 협약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후변화 협약으로, 125개국이 비준했으며 2016년 11월부터 발효되었다. 파리 기후협약에 따라 미국은 2025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6~28% 감축해 2005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강력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2030년부터 2050년 사이 말라리아, 영양실조, 설사, 열 스트레스로 매년 25만 명이 숨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2 °C 상승하면 10억 명 이상이 심각한 물 자원 부족을 겪게 된다. 또한 기후변화로 인해 2080년까지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은 6억 명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며, 홍수로 발생하는 이재민은 적어도 3억 3천만 명 이상이 될 전망이다.
또한 수십억 명이 생명권과 건강권, 식량과 물, 주거를 얻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빈곤층, 특히 여성, 선주민 및 차별로 인한 소외계층에게 더 부당하고 심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국일고시원 화재참사 1년을 맞은 즈음인 2019년 11월 11일, 국토교통부는 「다중생활시설 건축기준」 개정안을 행정예고했습니다. 이에 2019 홈리스주거팀은 고시원 등 다중생활시설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중앙정부 차원의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2019년 11월 30일 제출했습니다.
고시원을 비롯한 다중생활시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개정안의 내용은 지방자치단체별로 다중생활시설의 최소 실면적, 창 설치 등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고시원과 같은 다중생활시설이 규제되지 않는 민간임대시장에서 내몰린 주거취약계층이 거주하는 주거공간이라는 점,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앙정부 차원에서 다중생활시설에 대한 주거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국토교통부의 이번 개정안을 통해 중앙정부는 그 최소한의 책임조차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국토교통부가 행정예고한 개정안은 서울특별시가 제안했던 최소한의 조치인, 고시원 등의 방 실면적을 7㎡(화장실 포함시 10㎡) 이상으로 하고 창문 설치를 의무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서울형 고시원 주거기준’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국토교통부는 다중생활시설의 공급축소, 임대료 상승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다중생활시설의 건축 기준 규제를 일괄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지자체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다중생활시설의 ▲각 실별 최소면적 기준을 설정하고 ▲일조권 보장 및 화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외기에 접해 개폐 가능한 창 설치 의무규정을 신설하고 ▲냉·난방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고 ▲내화구조 적용 조항 신설 ▲ 각 실별 책상 의무 설치 규정을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고시원은 다중주택에 설치되지 않은 이상 주거기본법상의 최주주거기준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에, 비공식 주거지(informal settlements)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의 주거권이 심각히 침해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고시원 등을 주거취약계층이 거주하는 주거지로서의 최소한의 요건들을 갖출 수 있도록 현실화해야 합니다.
<2019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은 2001년부터 매해 동짓날을 즈음해 열리는 ‘홈리스추모제’를 함께 준비하고 있는 41개 단체들의 연대체입니다. 기획단은 올해 12월 22일(동짓날) 오후 2시 사전마당을 시작으로, 오후 6시 40분 서울역 광장에서 ‘2019 홈리스 추모문화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10월 2일, 서울시는 도시계획위원회를 개최하여 6개동 250여 개실의 쪽방이 포함된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을 수정가결하였습니다. 그에 따른 후속절차로 11월 13일, 서울 중구는 정비계획 변경결정(안)에 대한 재공람 공고를 시행, 12월 13일까지 토지등소유자 및 이해관계인을 대상으로 의견을 접수받고 있습니다.
양동 정비계획 중 쪽방이 포함된 11지구는 애초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이번 변경계획(안)은 "현황여건을 고려(쪽방 입지)"하여 정비지구로 지정하는 것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즉, 쪽방이 있다는 이유로 공원이 아닌 건축물을 짓도록 계획이 변경된 것입니다. 그러나 변경계획(안) 속에는 쪽방주민들이 재정착 할 수 있는 어떤 계획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뿐 아니라, 정보접근성이 취약한 쪽방주민들은 공람공고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추모제기획단은 12월 4일부터 나흘 간 재개발지구 쪽방주민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정비계획(안)을 설명하였고, 총 63명의 쪽방 주민이 각자의 의견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에 기획단은 12월 11일(수) 오전 11시, 서울 중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쪽방주민들의 요구를 밝히고, 중구에 의견서를 전달했습니다. 쪽방 주민들의 주거권을 짓밟는 개발이 아닌, 양호해진 주거환경으로 재정착할 수 있는 정비사업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기자회견 개요
일시: 2019년 12월 11일(수) 오전 11시
장소: 서울 중구청 정문 앞
사회: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
발언: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계획의 문제점 /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
쪽방 주민의 입장에서 본 쪽방 재개발의 문제와 요구 / 김호태 동자동사랑방 대표
양동 재개발에 대한 주민의 요구 / 양동 11지구 쪽방 주민
도시빈민의 주거생존권 박탈하는 개발사업 규탄 / 전국철거민연합
기자회견문 낭독: 홈리스행동
[기자회견문]
재개발보다 중요한 것은 쪽방 주민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양동지역 정비계획에 쪽방주민 주거대책 마련하라!
지난 11월 13일 소문만 무성하던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에 대한 재공람 공고가 실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1년 전 건설부고시로 지정된 양동 재개발사업이 계획을 일부 변경하여 지난 10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를 거쳐 드디어 본격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해당 지역에 포함된 6개동 250여 개의 쪽방에 살고있는 주민들이 이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쪽방 주민들은 평균 10년을 해당 지역에 거주했으면서도 개발에 대한 정보와 개발 이후 대책 모두에서 소외당했다.
양동 정비계획이 변경된 주요한 이유는 애초에 공원을 조성하려 한 11지구에 쪽방이 다수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현황 여건을 고려하여 공원이 아닌 건축물을 짓도록 계획을 변경하였으나, 변경된 계획 속에는 쪽방 주민들이 개발 이후 해당 지역에 재정착하기 위한 그 어떠한 구상도 담겨있지 않았다. 정비계획 변경안은 쪽방이 위치하던 곳에 1·2종 근린생활시설, 문화 및 집회시설, 노유자시설, 게스트하우스 등 숙박시설 등을 지정 및 권장용도로 정하고 있다. 이는 쪽방 때문에 건축물을 짓도록 계획을 변경해놓고 기존 쪽방 주민들은 절대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매우 모순적인 계획이다.
더욱이 주민들은 이러한 계획들이 변경되고, 입안되고, 공고되는 동안 그 어떤 곳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2019홈리스추모제 기획단이 해당지역 쪽방 주민들을 직접 만나본 결과 주민들은 12월 13일까지 진행하는 공람공고에 대해서도, 공람공고 내용에 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보접근이 취약한 계층이 모여 있는 지역에 대해 개발을 진행하면서, 이들이 접근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 계획을 알리지 않는 것은 명백한 행정 폭력이다.
오늘 우리는 개발지역에 속한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를 중구청에 제출하기 위해 모였다. 개발지역 쪽방 주민들은 개발로 인해 살고 있던 쪽방에서 쫓겨나거나, 다른 지역으로 원치 않는 이주를 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개발이 진행되더라도 해당 지역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총 64명의 쪽방 주민들이 직접 전하는 이 목소리를 중구청은 똑바로, 성심껏 검토하여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쪼개고 나누어 좁디좁은 쪽방에 산다고 해서 주거에 대한 권리마저 쪼개져도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구청은 개발지역 쪽방 주민들의 주거대책을 마련하라!
<2019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이하, 추모제기획단)>은 2001년부터 매해 동짓날을 즈음해 열리는 ‘홈리스추모제’를 함께 준비하고 있는 41개 단체들의 연대체입니다. 올해는 12월 22일(동짓날) 오후 2시 사전마당을 시작으로, 오후 7시 서울역 광장에서 ‘2019 홈리스 추모문화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서울 중구청은 지난주인 12월 13일까지 남대문지역 쪽방촌이 포함된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정비계획(안)’에 대한 의견 수렴절차를 마쳤습니다. 이에 기획단은 해당 쪽방 주민 63명에게서 의견서를 받아 중구청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의견서에 따르면, 대다수의 주민들은 무권리 상태로 내몰리지 않게 대책을 강구할 것과 개발 이후 재정착할 수 있도록 주거대책을 마련할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향후 개발계획은 서울시의 고시를 통해 확정 될 것으로, 쪽방 주민의 주거권은 이제 서울시의 결정에 달려있다 할 수 있습니다.
기획단은 이달 초, 주민 의견수렴을 진행함과 동시에, “2019 양동도시환경정비사업 11지구 주민 설문”이라는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의견서로는 다 담기 힘든 주민들의 상황과 재정착에 대한 요구와 의견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획단은 12월 18일(수) 11시,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실태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서울시에 정비지구 쪽방 주민 주거대책을 요구했습니다.
▲ 양동 재개발지구 쪽방 주민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 중인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위)와 기자회견 참석자들 <사진 = 참여연대>
▶ 기자회견 개요
일시: 2019.12.18(수) 오전 11시
장소: 서울특별시청 정문 앞
사회: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
발언:
- 권성용 천주교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활동가
-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
- 양동 11지구 쪽방 주민
-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활동가
기자회견문 낭독: 전효래 나눔과미래 활동가
▶ 기자회견문
살고 있는 자가 주인 되는 정비사업 시행하라
1978년 건설부 고시에 의해 ‘재개발사업 구역’으로 지정된 남대문 쪽방촌의 개발이 본격화 될 예정이다. 40년 동안 꿈쩍하지 않던 개발이라고, 이번에도 풍문일 것이라 안위해보기도 하지만, 주민들의 불안과 염려는 나날이 깊어가고 있다. 충분히 위태로운 이들에게, 더 이상 내려갈데 없는 바닥에 선 이들에게 개발은 그 한 평 기반마저 내놓으라 하고 있다. 250여 명의 쪽방 주민들이 살던 남대문로5가 579번지 일대는 이제 ‘소단위정비지구’라는 생소한 이름을 달고 빠르게 달라질 것이다. 서울 중구청이 지난 13일까지 개발계획에 대한 의견 수렴절차를 마쳤고, 마지막 단계로 서울시의 고시만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척박한 환경을 감내하며 살아왔던 쪽방 주민들 편에 설 지, 개발이익을 위해 달려드는 부동산 부호들의 탐욕을 위해 봉사할 지, 선택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살 수 있는 주거를 공급하라
개발지역 쪽방 주민들은 쪽방에만 평균 10년간 거주했고, 정비지구 내 쪽방만해도 약 6년 가량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모두에게 서글픈 현실이나, 쪽방주민들이 대한민국의 여타 세입자들보다 평균 두 배 가량 오래 한 곳에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오랫동안 주거를 일구며 주민으로 살아왔던 이들에게 개발 이후 다시 정착할 조건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는 현행 법률과 제도, 서울시 방침에 의해 당장 선택 가능한 대안이다. 만약, 부동산 소유자들이 반대한다면 서울시와 중구청이 직접 시행자가 되는 공영개발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주거권 보장에 적극 나서야 한다.
쪽방 주민 맞춤형 재정착 대책 수립하라
서울시가 매해 진행하는 쪽방주민 실태조사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쪽방주민들은 가난이 남긴 깊은 상흔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 중 양동 소단위 정비지구 쪽방주민들은 기초생활수급, 일당직 건설노동, 경제적 도산과 금융채무 연체, 거리노숙 경험, 중졸 이하의 학력 등에 해당하는 비율이 6, 70 퍼센트에 이를 만큼 높다. 고령인데다 장애인의 비율도 30%를 넘는다. 따라서 이러한 주민들이 재정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거시설을 건축하는 것은 물론, 개발기간 동안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순환용 주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주민 대다수가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인터넷 공람공고와 같이, 주민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정비사업이 정한 최소한의 규범만을 따른다면 정비지구 쪽방주민들의 재정착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그동안의 쪽방 개발사는 잔혹한 축출의 역사였다. 가난한 이들의 삶터는 흔적없이 매장 당했고, 그 위에 가진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첨탑을 쌓았다. 서울시 역시 이와 같은 부정한 축제에 동참할 것인가? 서울시 2025 기본계획에 의해 움직이게 된 개발이다. 쪽방이 입지했다는 이유로 공원이 아닌 정비지구로 변경된 개발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모든 주민들이 다시 들어가 살아갈 수 있는 개발, 외지 지주가 아닌 주민이 주인되는 개발을 위해 서울시는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국토부는 주거취약계층 지원 확대를 위한 ‘주거 사다리 지원사업’을 조속히 발표하고, 당사자 참여를 최대한 보장해야
지난 1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비적정 주거(inadequate housing)’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 건강권, 생명권, 사생활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요소라고 보고, 비적정 주거 거주민의 인권증진을 위하여 △ 주거지원 공급물량을 확대하기 위한 연도별 목표치와 실행 계획 수립, △ 최저주거기준의 면적기준과 시설기준을 개정, △ 고시원의 최소면적 및 시설 기준 등을 마련 등을 국토교통부장관에게 권고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본부장 : 조형수 변호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비적정 주거 거주민의 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검토하여 권고한 점에 대해 환영한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을 조속히 이행하여 주거취약계층의 주거권이 보다 증진되기를 기대한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LH가 2013~2016년간 공급한 매입·전세임대주택(총 149,713호) 중 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에 해당하는 공급물량은 2.2%에 불과했다. 또한 2017년 집행된 예산을 살펴보더라도, 국토교통부의 다가구매입임대주택의 결산금액 대비 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으로 집행된 매입임대주택 예산은 3.7%에 불과했다. 국토교통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대로 비적정 주거(2018년 조사결과 전체 5.7%, 111만 가구) 문제를 해결을 위하여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업무처리지침(제17조 제3항)’에 따라 임대주택 공급물량을 확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도별 목표치와 실행 계획 수립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국토부는 현행 최저주거기준의 면적기준이 낮게 책정되어 있고, 주택의 구조·성능·환경기준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법적 강제성이나 정책적 집행력이 부족하여 최저주거기준이 주거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최저주거기준의 문제점 또한 서둘러 개선해야 한다. 국토교통부는 무엇보다 고시원에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대책 외에 열악한 시설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적을 간과하지 말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빈곤·주거 시민사회단체들은 2018년 국토교통부에 <고시원 등 비주택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 보호할 매입·전세임대주택 확충해야>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국토교통부는 국가인권위회가 권고안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거취약계층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계획을 뒷전으로 미루어왔다. “국가는 적정하지 않은 주거에 거처하는 취약계층의 문제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고, 최대한 가용자원을 활용하여, 전략적 접근을 통해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여연대는 국토교통부가 비주택 거주자, 주거급여 수급자 등 주거 수요가 가장 절실한 주거취약계층 지원을 확대를 위한 주거사다리 지원사업을 시급히 발표하고, 그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당사자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끝.
세입자, 청년, 노동, 주거, 시민사회 등 100여개 단체로 구성된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연대는 설 명절을 앞두고 1월 22(수) 오전 10시 30분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 절반에 달하는 주거세입자 보호를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 폐기되지 않고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지지와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 집걱정, 전월세 걱정을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닌 모두를 위한 주거권을 이야기하는 명절 밥상이 되기를 바라며, ‘설차례상 올리기’ 퍼포먼스를 진행하였습니다. 올해 전월세인상률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이 도입되어서 지난 30년 동안 전월세 인상으로 2년마다 이사해야하는 세입자들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 촉구 축문(祝文)
유세차,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
집 걱정에 허리 휘고, 전월세 인상에 눈물 흘리며, 봄이 오면 이사 걱정에 시름해야하는 세입자들이 모였으니,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광장에 모였던 위대한 시민들께 고하나이다.
부디 이제부터라도 집 없는 사람들, 전월세에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탐욕의 투기세력들을 싹 몰아내는 희망의 세상이 열릴 수 있도록 두루 살피어주시옵소서.
지금 이 나라는 온갖 사악한 잡귀들이 득세하여 선량한 서민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잡귀 중에 으뜸은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며 굽실거려 금배지 달고서는, 투기요괴들이 날뛰도록 만든 권력요괴들인 바, 권력요괴들의 민생외면 세입자 외면으로, 세입자들은 2년마다 쫓겨나는 헬조선을 살고 있습니다.
새해 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지만, 자식을 보려고 역귀성하는 부모님들은 2년마다 바뀌는 자녀들의 집을 찾기도 힘든 현실이 옵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집 걱정하는 이들과 세입자들이, 2년 마다 이사다니는 신세를 바꾸기 위한 무기들을 들고 왔으니, 바로 세입자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옵니다.
이 무기에는 어떤 신공이 있는가 하니, 도탄에 빠진 세입자들을 구할 신공, 마음대로 날뛰는 전월세 요괴를 잡을 신공, 바로 주거세입자를 위한 ‘계약갱신청구권(계속거주권)’과 ‘전월세인상률상한제’입니다.
선진국들과 주요 해외 도시들이 이러한 세입자 보호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바, 특히 최근 독일 베를린은 향후 5년간 ‘임대료 동결’이라는 강력한 신공까지 발표했으니, 우리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나이다.
정부가 투기요괴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투기요괴를 잡고 집값이 안정된다 해도,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이들은 집을 소유하기 어렵고, 빌려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임대인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전월세가 집값을 떠받치고 있는 상태에서, 민간 전월세주택에 대한 사회적 통제 없이 집값요괴를 잡으려는 정책은 반감될 우려가 큽니다.
지난 1월 국회는 역사의 민폐인‘좀비악귀당’을 빼고도, 주요 법안들을 통과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설 명절이 지나고 시작될 2월 임시국회는, 민생국회의 강력한 신공을 발휘해서,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 새봄, 세입자들의 이사철이 오기 전에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2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을 촉구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시민들이여!
부디 집 걱정, 전월세 걱정, 이사 걱정 없는, 달라진 2020년 새해를 열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소서.
이번 설 명절, ‘부동산/재테크’이야기가 아닌, ‘주거권과 세입자 권리’를 이야기하는 복된 명절이 되길 비옵나이다.
이천이십년 일월 이십이일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연대
상향
주최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연대
주거권네트워크, 한국도시연구소, 나눔과미래, 민달팽이유니온,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전국세입자협회, 서울세입자협회, 서울주거복지센터협회, 강남주거복지센터, 강북주거복지센터, 강서주거복지센터, 관악주거복지센터, 광진주거복지센터, 구로주거복지센터, 금천주거복지센터, 노원주거복지센터, 동작주거복지센터, 마포주거복지센터, 서대문주거복지센터, 성북주거복지센터, 송파주거복지센터, 영등포주거복지센터, 은평주거복지센터, 종로주거복지센터,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참여연대, (사)주거연합, 집걱정없는세상, 임대주택국민연합, 천주교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전국주거복지센터협의회, 대구주거복지센터, 원주주거복지센터, (사)전북주거복지센터, 제주주거복지센터, 시흥주거복지센터, 천안주거복지센터, 청주주거복지센터,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한국사회주택협회,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서울복지연대,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홈리스행동, 전국빈민연합 (빈민해방철거민연합,전국노점상연합), 부산반빈곤센터, 동자동사랑방, 대구반빈곤네트워크, 빈민해방실천연대(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철거민연합), 민생경제연구소, 경의선공유지 문제해결과 철도부지 공유화를 위한 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노년유니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한국주민운동교육원,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생명안전 시민넷,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토지+자유연구소, 토지정의연대,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다산인권센터, 인권운동공간 활,리슨투더시티,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연구자의집, 사회실천연구소, 진보평론, 주거도시포럼, 조계종사회노동위원회, 향린교회, 옥바라지선교센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정의평화위원회, 대한성공회 나눔의집 협의회, 성공회 노원 나눔의집, 성공회 수원 나눔의집, 성공회 인천 나눔의집, 성공회 포천 나눔의집, 성공회 성북 나눔의집,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집, 성공회 춘천 나눔의집, 성공회 동두천 나눔의집, 성공회 용산 나눔의집,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민주노총, 위례시민연대,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전국가맹점주협의회, 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 모임,천주교 남자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위원회,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104개 단체)
총선주거권연대는 오늘(4/6) 기자회견을 열어 6개 정당의 주거 공약을 평가한 결과를 발표하고, 유권자들에게 이번 총선에서 ‘주거 불평등을 심판하고 주거권에 투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총선주거권연대는 이번 총선에서 각 정당별로 어떠한 주거 공약을 발표했는지 유권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각 정당에는 주거 문제와 관련한 사회적 요구를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정당별로 주거 공약 평가를 진행했습니다. 평가대상 정당은 이번 총선에서 주거공약을 발표한 주요 정당(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 민생당, 정의당)과 총선주거권연대의 정책요구안을 요청한 소수정당(민중당, 녹색당)으로 하였고, 비례후보만 공천한 위성 정당은 제외했습니다.
2020. 4. 6. 21대 총선 정당별 주거공약 기자회견에서 사용한 피켓 <사진=참여연대>
총선주거권연대가 평가한 21대 총선 정당별 주거공약
‘무책임’ 더불어민주당, 주거 복지와 자산 불평등 해소 대책 제외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총선거 전부터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어 온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불평등 해소, 공시가격 정상화 및 보유세 강화 등을 통한 불로소득 환수, 투기 억제 대책 등의 민감한 주제들은 공약에서 제외하고 청년, 신혼부부, 노인과 장애인 등 특정 계층에 한정하여 일부 주거공약만 발표했습니다. 공공임대주택 정책 및 주 거 급여 등 굵직한 주거 복지 대책도 공약발표에서 다 제외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주거정책의 종합적 청사진을 공약으로 내놓지 않고 이번 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르려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집권 여당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21대 총선의 더불어민주당 주거공약은 4년전 20대 총선 공약보다 주거공약의 양과 질 측면에서 개혁성이 상당히 후퇴하였습니다. 총선주거권 연대가 요구한 4대 요구안 상당수 항목에 대해 ‘기타’로 답변하는 등 수용 의사가 불충분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4대 요구안 관련 공약 제시도 일부에 그쳤습니다. 주택임대차 계약갱신요구권, 전월세 인상률 상한제 도입 등을 다시 공약으로 제시하였는데, 주거세입자를 위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편협’ 미래통합당, ‘뉴타운, 빚내서 집사라’ 과거 정책 베껴
미래통합당의 21대 총선 주거 공약은 전반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실패한 부동산 정책인 ‘뉴타운, 빚내서 집사라’에서 한 발걸음도 나가지 못한 ‘복사해서 붙여넣기’공약입니다. 서울 도심, 용산구, 1기 신도시(일산, 분당 등)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지역구 공약으로 보일 만큼 특정 지역,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주택 공급의 확대가 필요하다’면서도 수도권에 대규모로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거의 유일한 방법인 3기 신도시 재검토 공약은 이유도 불분명하고 대안 제시도 없다는 점에서 지역구 출마자 이해를 대변하는 공약입니다. 미래통합당 공약은 주택을 취득하려고 하는 계층이나 이미 주택을 소유한 계층을 위한 각종 규제 완화(재개발, 재건축 등 포함), 세제 혜택, 대출 규제 완화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미래통합당은 보유세를 비롯한 불로소득 환수 확대, 공시가격 현실화, 분양가 상한제 확대를 반대하는 공약을 제시하는 등 투기적 수요 억제 정책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반면 집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세입자의 주거문제는 물론 스스로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주거 정책의 최우선 대상이어야 하는 저소득층 및 주거취약계층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거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공공임대주택 정책에 대해서 ‘사회주의식 공공임대 주택에서 영원히 살라고 등 떠밀고 있음’이라고 표현하는 등 색깔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래통합당은 총선주거권연대의 정책 요구안에 회신도 없었고 정반대 방향의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부실’ 민생당, 저소득층, 무주택 세입자 관심 부족
민생당은 선거 직전인 2020년 2월 24일 바른미래당과 대안신당, 민주평화당 3당 합당에 의해 출범한 정당으로 2020년 3월 말까지 주거 공약을 일부만 발표하다가 2020년 4월 3일 종합적인 주거 공약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간 공약 발표 수준이나 2020 총선주거권 연대의 정책 요구안에 대해 회신을 못한 것은 총선 직전 민생당의 합당, 민생당의 정책 준비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합당 전 민주평화당이 1호 공약으로 내세운 토지임대부 건물분양 주택(이른바 ‘반값아파트’) 공약은 총선주거권연대가 주장해온 4대 요구안에 포함되는 주택 투기억제나 실수요자 중심 주택 매매시장 개혁 요구와 일맥 상통하지만 공약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만큼 좀 더 세밀한 정책 검토가 필요합니다.
2020총선주거권연대가 요구해온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와 관련해서는 1주택 가구에 종부세 면제, 다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강화라는 서로 상반된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다주자에 대한 종부세 강화는 수긍할 수 있으나 지방주택 여러채 보다 비싼 고가 1주택 보유자가 있는데 종부세를 면제한다는 것은 조세형평에도 어긋나며 주택 시장 안정에도 반합니다. 2020총선주거권연대가 요구해 온 그 외 주택 투기 규제 강화(분양가상한제 확대 등) 관련 공약은 부족한 반면, 노후주택 재건축·재개발 적극 추진, LTV·DTI 폐지, 양도소득세 중과 일시 유예 등 부동산 투기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 공약을 제시하고 있어 정책 공약 내용이 전체적으로 상호 모순적입니다. 고령 주거 빈곤층에 대한 주거급여 및 광열비 확대 공약, 공공임대주택 지역별 할당제 및 공급성과에 따른 보조금 인센티브 공약 등의 공약을 공식 선거운동 기간 시작과 함께 제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그 외 주거세입자 보호 및 주택을 매매로 취득할 수 없는 무주택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복지 공약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민생당 주거정책이 1주택 소유자, 주택을 취득하려는 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일반적인 저소득층 무주택 세입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참신’ 정의당, 주거 안심 사회 기조로 내세워
정의당은 진보정당답게 불로소득 차단, 부동산 투기 근절, 전월세값·이사 걱정 없는 주거안심사회를 정책 기조로 내세우고 있고, 2020총선주거권연대의 4대 요구안(세부 25개 요구안)에 대해 100% 수용한다고 회신했습니다. 부동산 불평등의 완화, 주택 매매시장의 정상화와 투기 억제, 주택임대차 시장의 안정을 위한 임대차 갱신 및 임대료 인상률 상한 제도화의 필요성, 주거복지 강화 등에 있어 정의당은 상당한 내용을 공약화하였습니다.
정의당은 종부세 세율 인상 및 다주택 중과세, 기업 별도합산토지 과세 강화, 재벌 비업무용 토지 상세 정보 공개, 사모펀드 보유 특혜 폐지 등 선제적 투기 근절 대책 강력 실시, 전월세상한제·계약갱신청구권 도입, 세입자 9년 안심 거주 보장, 1인·청년·대학생 가구 맞춤형 지원 강화, 반의 반값 아파트로 매년 10만호 공공임대주택 공급, 모든 선분양제 아파트에 분양가 상한제 도입, 20만원 주거급여 지급대상 확대 등을 공약으로 제시하였습니다. 1인 청년가구 월세지원, 저소득 청년 전세반환보증보험 가입 국가 지원 등은 주거취약계층 청년 관련 복지 제도로서 적극적으로 고려할 만합니다. 고위 공직자 1가구 2주택 이상 보유금지(국회의원, 장차관, 광역자치단체장, 시도교육감, 1급 이상고위공직자 대상) 공약, 반의 반 값 아파트 공급 공약 등은 향후 실현 방안과 관련 좀 더 구체적인 정책 마련이 필요하고 공공임대주택 공급 외 주거복지정책의 구체성이 부족한 만큼 정책 개발이 좀 더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서민 중심’ 민중당, 무주택 서민과 주거취약계층에 촛점
민중당은 진보적 정책을 표방한 정당답게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충 및 주거급여 확대 등 주택을 임차하여 거주해야 하는 무주택 서민과 주거취약계층에 공약의 중심을 맞추었습니다. 2020총선주거권연대의 4대 요구안(세부 25개 요구안)에 대해 100% 수용한다고 회신했고 이중 상당 부분을 공약화하였습니다. 민중당은 공정임대료,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등을 주거공약 중 첫 번째로 내세웠습니다. 민중당이 이번 총선에서 제안한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제 공약은 일부 내용을 개선한다면 향후 21대 국회에서 심도깊게 검토되어야 할 공약입니다.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를 공약한 점은 바람직하나 구체적 목표와 이를 실현할 정책제시가 필요합니다. 공공임대주택 임대료 체계나 유형 통합, 사회주택 등과 관련한 구체적 검토 및 공약 발표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아쉽습니다. 중위소득 45% 이하 월세 전액 지원, 소득 60% 이하 저소득층과 청년 대상 월세 부담 상한제, 소득 30% 초과 월세 차액 지원 등의 주거 지원 공약은 21대 국회에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의미있는 공약입니다. 다듬어지지 않거나 과도한 규제 수단이 포함된 공약 등 일부 개선이 필요한 공약들이 있지만, 정책 취지는 수긍이 되는 내용들인 만큼 향후 충분한 논의를 거쳐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환경’ 녹색당, ‘주거 민주주의’와 ‘세입자 주거환경권’ 주목
녹색당은 ‘분배와 관리 중심의 주거 민주주의’와 ‘빌려쓰는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집’이라는 2가지 모토를 중심으로 환경을 중시하는 진보적 주거공약을 제시하였습니다. 총선주거권연대의 4대 요구안(세부 25개 요구안)에 대해 녹색당은 100% 수용한다고 회신했고 이중 상당 부분을 공약에 반영했다. 녹색당은 실질적인 3주택 이상 보유 금지, 보유세 강화, 공공임대주택 공급, 세입자 권리 보호를 위한 주택임대보호법 개정,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비적정 주거문제 해결 등 주거권 강화를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정책을 공약화하였고 부동산에 의한 불로소득 규제, 공공임대주택 확대 공급, 세입자 권리 보호, 저소득층 주거복지에 대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다른 정당에서 거의 주목하지 않는 주택공급과 관리에서의 에너지 효율성과 관련된 공약들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환경을 중시하는 녹색당 공약의 특징입니다. 주택의 철거 및 신축보다 리모델링을 강조하는 공약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거약자, 주거취약계층의 요구와 주거문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공약이나 제도 개선 방향 등은 약간 부족했습니다.
21대 총선이 선거법 개정 이후 치뤄지는 첫 선거로 각 정당들의 정책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소수 정당들의 다양한 정책 공약이 사회적 이슈로 쏟아져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위성정당과 비례정당이 난무하면서 정책 논쟁이 사라진 현재의 상황을 우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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