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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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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admin | 목, 2020/03/05- 00:00

[김언경 칼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 도쿄 2심 재판 결과에 부쳐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에게도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우에무라 기자의 보도는 한국보다 앞서 보도한 특종이었습니다. 그의 기사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 주요한 외교문제로 만드는데 주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느닷없이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쿄기독교대학의 니시오카 스토무 전 교수가 <주간문춘>에,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사쿠라이 요시코가 <주간신초> 등을 통해 우에무라가 날조기자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의 1991년 보도가 날조라는 주장의 배경은 단순합니다. 우에무라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첫 구절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부분이 나오는 것을 트집 잡으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죠.

하지만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폭로하셨던 1990년대 당시에는 모두들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이 혼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에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전신)도 단체명에 ’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우에무라 기자도 당연히 “당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 모두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밖에도 우익들은 우에무라 기자의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점 등을 빌미로 그가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로 인해서 우에무라 기자는 우익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해당 보도들이 나올 당시, 우에무라는 아사이신문에 사표를 내고, 한 대학 강사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학교에 날조기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가 이어져 그의 임용은 취소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점을 보도했지만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우익들은 ‘일본의 매국노’라며 그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고, 심지어 고등학생인 딸에게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그러나 두 재판소 모두 2심까지 패소

이렇게 일본 우익으로 인한 공격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기자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니시오카 스토무와 <슈칸분춘>(週刊文春)을 대상으로 도쿄 재판소에서, 사쿠라이 요시코와 <슈칸신초>(週刊新潮) 등을 대상으로 삿포로 재판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삿포로재판소 1,2심 모두 우에무라 기자가 패소했고, 도쿄재판소도 1심 패소 이후 오늘(3월 3일) 2심 결과가 나왔는데,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두 재판소 모두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가 떨어진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익들이 ‘우에무라는 날조기자다’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안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상당한 이유’ 그 무엇도 전혀 ‘상당한 근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두 항소심 재판 모두에 대해서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는 명예훼손 재판의 경우 진실 상당성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재판소가 추론으로서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고 판결했다”고 평하면서 이는 판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재판 이후 우에무라 씨와 변호인 측은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기에, 이제 두 사안은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일까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삿포로 재판을 방청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삿포로 재판은 사쿠라이 요시코와 그의 글을 출판해 준 3개의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영화 <주전장>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일본의 우익인사입니다. 그는 45년생이고 여성으로 베트남에서 출생하여 하와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도쿄 지국에서 근무한 후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니혼 TV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오늘의 사건’에서 메인 캐스터로 일했습니다. 일본에서 여성 캐스터의 선구자적 존재이기에 그를 ‘저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번역한 것들이 제법 있던데요. 일본 ‘슈칸다이아몬드’ 2018년 3월 17일호에 실린 사쿠라이 요시코의 칼럼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진행 중, 문대통령과 보수파 간의 대립에 주목>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허위조작정보이며, ‘프로 막말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재인이 구상하는 것은 헌법의 전면적인 개정입니다. 한국을 전혀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전문에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그냥 ‘민주주의적’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하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부호가 맞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의 헌법 개정 내용 중 하나는) ‘국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수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 김일성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재인은 적어도 이념에 있어서는 한국을 북한풍의 국가로 개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방제를 거쳐 통일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척척 진행중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입니다.”

“경계 대상은 북한의 김정은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재인이기도 합니다.”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 회원들이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재판에 참석한 모습

졌지만 이기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재판과정

삿포로 재판소의 2심에서 패소한 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도와주고 지지하는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함께 해주는 이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 그는 “역사적으로는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재판은 일본의 전쟁범죄와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언론인과 그 역사를 부인하고 다시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는 일본의 보수 우익 아베 정권과의 ‘역사적’ 싸움입니다.

그리고 삿포로 재판을 응원하기 위해 두 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는 많은 일본의 시민이 있으며, 한국의 우생모 등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년 민언련은 일본의 무역보복 이후, 일본과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하는 거짓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토크쇼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책임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시민사회의 노력이 매우 진정성 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실감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두 차례 일본 방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변호인단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에무라 기자 말로는 삿포로와 도쿄에 계시는 약 27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삿포로에서 활동하는 900여명의 변호사들 중 107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실제 내가 재판을 방청한 두 번의 재판 모두 상대방 변호인 측은 4명 정도의 변호인이 앉아있는 데 비해서, 우에무라 측 변호인은 그야말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변호인석의 모든 자리가 꽉 차서 간이의자를 가지고 오고, 그 와중에 더 자리를 좁혀서 앉아야 할 정도로 변호인의 수는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과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변호인부터 젊은 여성 변호인까지 정말 다양했고, 재판정에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매우 따뜻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그와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시민을 대상으로 재판결과와 의미,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매우 상세히 알려주는 기자회견을 했고, 다시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보고회를 했습니다. 많은 변호인들이 이런 과정이 끝난 뒤 우에무라 기자와 함께 한국음식을 먹는 회식 자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여서 우에무라 기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변호인단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시민들의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결연했습니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지난 10월 그 자리에 우리가 ‘우에무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인사했을 때, 여러 명의 일본인들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습니다. 감사와 환영과 연대의 표정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홋카이도 주민이면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는 홋카이도 모임>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신다는 나나오 히사코(七尾寿子, ‘우에무라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모임’ 사무국장)라는 일본 여성은 ‘우생모’가 모이는 자리마다 오셔서 시종일관 손을 잡고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올 2월 삿포로 판결 이후 열린 보고회에서는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이경희 공동위원장(‘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대표)의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성금을 걷어주기도 했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우익들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혀있는 상태입니다. 우경화된 일본 사회 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시민들과 정의로운 변호사들은 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비난하며 그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재판은 이런 한일 양국의 깨어있는 시민을 늘려나가고, 그들의 참여로 결국은 역사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싸움의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왜 이렇게 지극히 정상적인 기사 하나로 인해 한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조차 받기 힘든 일본의 현실이 얼마나 엄혹한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2019년 제 7회 리영희상을 수상했다.

한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우에무라 기자

마지막으로 우에무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한일 교류였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슈칸 긴요비>(週刊 金曜日)의 편집장입니다. <슈칸 긴요비>는 일본의 진보적 주간지인데, 경영난에 처한 잡지사가 우에무라 기자를 편집장으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현재 <슈칸 긴요비>는 우리의 〈시사IN〉과 기사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한편 우에무라 씨는 한국가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었지만, 학기 중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힘겨운 재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그는 한일 예비 언론인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비 언론인’은 우리의 ‘언론사 지망 취업준비생’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은 사실상 언론사에 취업이 확정된 상태의 예비 언론인들이 학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한일 교류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는 2017년부터 ‘언론인 한일 학생 포럼’을 만들어서 한일 양국의 문제해결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론인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일감정이 매우 큰 편입니다. 그래서 처음 우에무라 기자의 이런 간곡한 호소를 들었을 때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심 공판 당시 재판 과정을 미디어에 담고 후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을 보면서 저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친일과 반일, 친한 반한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양국 시민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남겨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를 위해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 재판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그를 응원합니다.

*참고자료


공소인성명

오늘,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니시오카 츠토무 씨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니시무라 도쿄소송의 공소심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1심에 이어 우리는 패소했습니다.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오카 씨는 2014년 2월 6일호《주간문춘》의 기사에서 제가 쓴 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기사 A를 “날조”로 규정하는 등, 저에 대한 “날조”공격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격렬한 “우에무라 날조 배싱(bashing)”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내정되어있던 대학의 교수직을 잃었고,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2015년 1월 니시오카 씨 등을 고소했습니다. 저의 명예, 가족의 안전, 근무처 학생들의 안전, 그리고 전 “위안부”인 김 씨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니시오카 씨가 제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하는 세 가지 점 중 두 가지에 대해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믿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니시오카 씨를 면책했습니다. 니시오카 씨는 저에 대한 직접취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니시오카 씨는 제 기사를 날조기사로 단정할 때에도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것이 1심에서 밝혀졌습니다.

이《주간문춘》의 기사를 보십시오. “이 때 자기 이름을 대고 나온 여성은 부모에게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소장에서도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김학순 씨는 그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날조” 비판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니시오카 씨는 저의 기사 B에 대해, 저서『알기 쉬운 위안부문제』에서 김학순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던 것을 적지 않았으므로 “악질적이고도 중대한 날조”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언설을 무너뜨릴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여 고법에 제출했습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김 씨가 처음 변호단의 청취조사에 응한 1991년 11월 25일의 녹음테이프입니다. 여기서 김 씨는 “기생”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테이프에 근거해 기사 B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법판결은 이 새 증거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니시오카 씨의 결정적인 오류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려놓은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에무라 날조 배싱”의 장본인은 니시오카 씨입니다. 그의 언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배싱에 가담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에 협박전화를 한 남성이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제 딸을 트위터로 비방ㆍ중상한 회사원은 그 책임을 추궁 받아 배상금 지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판결에서 그 장본인이 면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에무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은 기자 여러분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부당판결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라면 가짜뉴스가 거리낌 없이 유포되는 심각한 시대가 옵니다. 즉각 상고하고, 최고재판소에서의 역전판결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


공소심 판결에 대한 변호인단 성명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전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에 관한 91년의 신문기사를 둘러싸고 주식회사 문예춘추와 니시오카 츠토무 씨를 고소한 소송의 공소심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오늘, 우에무라 다카시 씨의 공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에무라 씨 등의 논문이나《주간문춘》의 기사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진실성ㆍ진실상당성의 항변을 인정한 도쿄지방재판소 판결을 거의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추인한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다.

니시오카 씨 등은 무에무라 기사에 대해 “기생이었던 김학순 씨의 경력을 쓰지 않았으니 날조다”라는 취지를 주장해왔다. 우에무라 씨는 공소심에서 91년 12월 기사의 근거가 된 김학순 씨의 증언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했다. 증언테이프 안에는 기생에 대한 증언이 없었다. 증언자가 증언하지 않은 내용을 기사로 쓰지 않은 것이 “날조”가 될 리 없다. 그러나 공소심은 해당 증언 테이프가 김학순 씨의 증언 전체를 기록한 것이라 인정하기 힘들다는 둥 믿기 어렵다는 트집을 잡으면서 그 증거력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은 상대방에게도 통하지 않아, 테이프의 성립과정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된 본인 신문도 각하되었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은 변호인단으로부터 반론의 기회를 빼앗은 기습적인 인정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판결은 8월의 우에무라 기사 중에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라는 기사가 “강제연행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우에무라 씨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1심의 인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8월에 기사에는 확실하게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써놓지 않았는가. 우에무라 씨에게 강제연행을 꾸며내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 따위를 썼을 리가 없다. 이 판결의 인정은 상식을 까마득히 벗어나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판결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너무도 조잡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편, 고등재판소 판결은 ① 우에무라 씨가 김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경력을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② 우에무라 씨가 장모의 재판에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사실에 대해 공히 진실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공소심의 큰 성과로써 우에무라 씨의 명예를 일부나마 회복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이번 심리 과정에서 우에무라 씨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전 “위안부”의 존엄회복 운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1심, 2심의 성과를 토대로 최고재판소에서 끝까지 싸워낼 것이다.

이상

2020년 3월 3일

<2020-03-04> 뉴스톱 

☞기사원문: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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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18. 경북 구미 : 누가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구미 박정희 생가 옆에 위치한 새마을공원 박정희 동상 앞에 서자 귀에 익은 새마을 노래가 들려왔다. 갑자기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으스스한 기분에 겁이 덜컥 나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 경찰이 없나 둘러보게 됐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2018년 지방선거가 생각이 났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여파 속에 치러진 선거인만큼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싹쓸이를 했지만, 영남, 특히 보수의 텃밭인 경북은 예외였다. 헌데 경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가 당선된 곳이 있었다. 의외지만, 구미였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 세력이 신봉하는 박정희의 출생지인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미가 박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3년 구미에 공단을 지었고, 전두환이 1983년 제2공단을, 노태우가 제3공단을 지었다. 박정희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른 지역을 제치고 공단을 집중적으로 지으면서, 구미에는 외부 인구들이 대폭 유입됐다. 구미는 경북에서 외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경북의 보수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경북 중 구미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여러 공장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구미는 여전히 대표적인 공단도시다. 그 덕으로 외지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구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의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그가 친필로 쓴 낡은 ‘수출산업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도시 곳곳에서 박정희기념관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박정희로’라는 길도 있다. 박정희 생가와 기념시설들 앞의 큰 길이 박정희로다.

▲ 구미 시내에 우뚝 서 있는 ‘수출산업의 탑’. 하단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글씨가 있다.(좌) 구미 시내의 박정희로. ‘박정희대통령생가’라는 도로판이 사방에 눈에 띈다(우) ⓒ손호철

박정희 생가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큰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단체 참관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5인 이상 집합 금지 이전이었다). 역시 이 지역의 박정희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생가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새마을복을 입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농민들의 조각이다.

생가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고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실물 크기의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전신상이 세워져있어 이들이 살아 우리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두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추모관이 있고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옆에 선 앳된 박근혜의 사진을 보자,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고 능력 밖의 대통령 직을 맡아 결국 감옥을 가야했던 그의 삶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박정희 기념 장소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커다란 박정희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뒤에 박정희 동상, 그 뒤로 박정희의 연보와 새마을 악보 등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생가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손호철
▲ 박정희 부부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 박정희 생가 ⓒ손호철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함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태극기부대 등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진보주의자’ 등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된 민족반역자이며 경제 발전이란 이름 하에 유신 등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독재자’로 혐오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평가인가?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에 달려있다. 첫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인가? 둘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 즉 ‘개발독재’는 올바른 것이었나?

첫 번째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냐는 가치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보수적인 박정희 지지자들은 둘 다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진보적인 비판자들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에는 ‘그렇다’이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라는 입장,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지만 그 공보다 과가 더 크다는 입장도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진행될 사안이다. 1990년대 말 생겨난 박정희 향수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진보적 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한 학자는 “박정희 신화는 정치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지도자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비판했다. 박정희 신화는 극우 정부와 보수 언론 등에 의해 세뇌당한 ‘무지한 대중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박정희 현상은 단순히 대중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보릿고개에서 탈피해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보릿고개를 벗어난 주된 원인이 박정희는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대에 보릿고개를 벗어났으니 박정희 시대와 보릿고개 탈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지만, 박정희 때문에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인과관계)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의 체험을 논리로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가짜뉴스’ 등 자신들이 믿는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하는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위의 두 질문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중 ‘해방 70년과 박정희 신화’ 참조).

주목할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4인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특히 그의 개발 독재 때문이라면, 이들 나라들은 박정희도 없는데, 특히 홍콩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영국 지배 하의 ‘민주체제’였는데,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4인방의 공통점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남미 등과 다르게 산업화를 가로막는 지주 계급이 도시국가(싱가포르, 홍콩)라 원래 없거나, 분단에 따른 체제 경쟁(한국 대 북한, 대만 대 북한)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개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선진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싼 공산품을 수입하기를 원한 지주들은 산업화의 장애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기와 박정희 시기를 비교하면 이승만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다른 제3세계에 비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소련 동구가 망해서요.” IMF 경제 위기 당시인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의 의뢰를 받아 한국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만나 한국에 경제위기가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하게 국내 학계에선 거론도 안 된 ‘탈냉전’을 들고 나왔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내부 요인도 있지만 냉전 때문이에요. 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남미들과 달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허용한 것이지요. 헌데 소련 동구가 망하니 한국 등 아시아를 더 봐줄 필요가 없어 손 본 것이에요.” 다시 말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한 것은 박정희나 장제스, 리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이들 나라들을 미국이 봐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이 ‘한강의 기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를 대전제로 하여, 스탈린의 강압적인 산업화가 소련을 빠른 시간동안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들어줬듯이 노동자 등 민중들을 짓밟은 민중 억압적인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경제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파괴, 노동 탄압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경제적 성과를 이유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스탈린이 이 같은 강압적 산업화의 덕으로 히틀러의 공격을 격파해 세계를 구하고 유럽의 낙후국인 소련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든 ‘공’에 비하면, 박정희의 공은 ‘하찮다’고 하겠다. 특히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 중 주목할 것은 결과 제일주의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 제일주의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불행한 박정희의 유산이다.

결론적으로, 산업화의 장애인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성장이냐는 것인데, 나는 박정희 체제보다 조금 덜 빠르게 성장을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덜 억압적이고 ‘민중친화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정세의 효과에 따라 좌우로 진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죽은 박정희를 살린 것은 운동권에서 극우로 변신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뉴라이트’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흔히들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세력’,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진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지 민주노총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progressive)’는 아니므로 ‘개혁’ 내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 이 같은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희 향수는 박정희에 대한 학술적,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고,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좋은 연구가 없어서도 아니라, ‘개혁 정부’ 하에서 대중이 직접 체험한 ‘객관적 현실’의 결과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입증해준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결했던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친 10년 뒤에 치려진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서민층들은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박정희를 이어받은 냉전적 보수 정당에 압승을 선사했다.

이 같은 박정희 향수에 찬물을 뿌린 것도 진보사학자가 고대한 박정희의 잘못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박근혜의 실정이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자, 박정희 향수도 주춤해진 것이다.

▲ 박정희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 사진.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 있는 박근혜의 앳띤 모습

안타깝게도 박정희 향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조국 사태, 안희정‧박원순‧오거돈의 성추문, LH 사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여권 핵심의 전세값 인상 파동 등 연이은 측근들의 도덕적 실추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정희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평가와 박정희 향수는 ‘정세의 효과’이며 ‘현재의 정치에 대한 성적표’, 특히 ‘개혁 정부’에 대한 성적표이다. 박정희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면, 개혁 정부들이 죽을 쑤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박정희 향수가 조용하다면, 이는 개혁 정부들이 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치다.

박정희 생가를 떠나 이제는 새 청사로 이전을 하고 문을 닫은 구미경찰서로 향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등에 저항해 대구시민들이 일어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퇴각하다가 사살된 곳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조). 구미경찰서 앞에 서자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박정희의 ‘짧은 외도’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박정희의 형이 공격했던 구미경찰서. 그는 이후 도주하다 사살당했다. ⓒ손호철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일본군-인용자)에 채용해주실 수 없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일보>에 보도된 박정희의 혈서다.

박정희는 일제 말 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계에 어려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 육사에 입학해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에 근무했다. 그의 친일은 생계 때문에 불가피했던 ‘생계형 친일’과는 전혀 질이 다른 ‘출세형 친일’, ‘악질 친일’이다.

▲ 박정희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사본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한국군에 입대한 뒤 남로당(남조선로동당)에 가입해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여순 사건 후 있었던 군내 좌익 숙청 작업에 체포됐다(‘손호철의 발자국’ 14. 전남 여수순천,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참고). 하지만 동료들을 다 일러바쳐 목숨을 구했고 한국전쟁 덕으로 군에 복귀해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 후에도 미국이 급진적인 경제개발 계획에 반발하자 이를 주도한 영관급 주모자들을 쫓아내고 자신은 살아남았다(‘손호철의 발자국’ 29. 울산, <한국일보> 2021년 2월22일자 참고).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 밀고자를 거쳐 반공주의자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한 것이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변신도 서슴지 않았던, 동지도 부하도 언제든지 버렸던, ‘생존주의자’, ‘생존지상주의자’였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두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5‧16 쿠데타가 나자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 후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그를 버린 여인’이란 소설에서 여순 사건 때 박정희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를 이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생존주의자’로 민족, 민주주의, 친구, 동지, 국민을 모두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부인을 총격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딸마저도 결국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숭배와 증오의 주인공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다.

▲ 박정희 생가 뒷편 새마을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박정희의 동상 ⓒ손호철

<2021-04-16> 프레시안

☞ 기사원문: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금, 2021/04/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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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 받아

친일조각가가 제작한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물. 정읍시 제공

친일 작가 작품이란 지적을 받아온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한다.

정읍시는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에 따른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허가승인이 완료됐다고 20일 밝혔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10월에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이 동상은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다. 이 동상 및 배경 부조 시설물은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짙은 청동색으로 높이 6.4m, 좌대 3.7m, 형상 3.7m 규모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대표적 친일인물로 나와 그동안 동학관련 단체 등은 철거를 요구해왔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김경승은 1942년 6월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해, 해방 이후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특히 몸체는 격문을 든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머리는 죄수처럼 맨상투로 돼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한 동상 뒤의 부조에도 죽창·농기구를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농민군의 표정 등이 보이지 않아 역사적·예술적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는 시민과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동상 철거를 결정했고, 철거된 동상은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시는 예산 12억원을 확보했다. 다음달 공모를 거쳐 내년 5월 완성을 목표로 추진할 방침이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오는 7월 동상 철거 이후 새롭게 제작할 동상은 각계 전문가 자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사상과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읍 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로, 1981년 12월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다. 정부는 황토현전승일을 기리기 위해 오랜 논란 끝에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2018년에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4-20>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작가가 제작한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한다

화, 2021/04/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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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4/2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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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구슬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모 할머니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 할머니가 지난 2일 오후 10시쯤 별세했다고 3일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모 할머니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사진=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정의연에 따르면 1929년 충청북도에서 태어난 윤 할머니는 13세가 되던 1941년 일본 군인들이 할아버지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가 트럭에 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윤 할머니는 일본 시모노세키 방적 회사에서 3년 정도 일하다가 히로시마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로 온갖 수난을 겪었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한 윤 할머니는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정의연은 “윤모 할머니는 해외 증언, 수요시위 참가 등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셨다”며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할머니와 유족 뜻에 따라 장례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날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윤 할머니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정 장관은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떠나보내게 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생존 피해자 분들께서 건강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15명에서 14명으로 줄었다.

한편 지난 4월21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생 소송(2차 소송)에서 각하 판결로 사실상 패소했다.

이에 정의기억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총 40개의 시민단체는 항소를 추진하고 나섰다.

단체 관계자들은 지난 4월28일 서울시 중구 정동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외면하고 국가면제(주권면제)를 이유로 일본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참담하다”며 2차 소송 각하를 규탄, 항소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2021-05-03> 이데일리

☞기사원문: 위안부 피해 할머니 1명 별세…남은 생존자 1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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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별세…여가부장관 “명예회복 적극 추진”

수, 2021/05/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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