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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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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admin | 수, 2020/02/12- 01:02

 

 

대전충청지부장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인터뷰어: 심재섭 변호사 (출판소통팀 팀장)

 

대전 법원 맞은 편 건물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찾아뵈었다. 서울의 여느 변호사 사무실과는 다른 널찍한 방에서, 청바지 차림의 변호사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셨다.

 

안녕하세요. 대전충청지부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지부장님이셔서 아무래도 회원 숫자가 신경이 쓰이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우리 지부는 사실 신규 회원이 많이 들어오는 지부는 아니에요. 그냥 꾸준히 몇 명씩은 가입하는 지부이지요. 민변으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던 분들이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을 겪으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변호사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가입하신 분들이 몇 분 계세요. 대학 때 잠깐 운동 경력이 있으신 분도 있고, 또 변호사로서 어떤 활동을 목표로 하셨던 분들도 아니셨는데요. 그렇게 나이와 경력이 좀 되시는 회원들이 가입을 했고요.

젊은 신입 회원 분들도 꾸준히 가입하고 계세요. 많이는 아니고 꾸준히요. 작년에 후배님들 몇 명과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 되는 대로 점심을 하자고 했는데, 평균 적으로 5, 6분 정도, 많으면 7, 8분 정도가 모였어요. 회무를 이야기하는 모임이 아니라, 밥 같이 먹으면서 수다 떨자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렇게 어울리고 친해지면서, 나중에 일도 같이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매주 모이는 숫자가 그 정도 모임라면,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 아닌지요. 대전 충청 지부가 관할하는 지역이 원체 넓기도 하지 않습니까.

광주지부, 대구지부 같이 숫자도 많고 결속력이 강해 보이는 지부들을 생각하면, 우리 지부도 뭔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여러 지역에 있는 회원님께서 우리 지부에서 이렇게 열심히 활동해 주시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 정도 유지하는 것도 훌륭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이전에 우리 지부 사무처장을 하신 선배님이 83학번이세요. 선배님들 연배가 젊다고 하긴 좀 어려운 거죠. 우리 후배들이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요청을 드리면 흔쾌히 참석하고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먼저 선배님께 기대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늘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도로, 어서 우리 후배 그룹들이 일머리를 키우고 활동력을 늘려서 이 모임을 끌고 가야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역할은 그 징검다리가 충실히 되는 거지요.

 

지부에서 후배 회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특별히 있을까요.

지금 우리 지부에서 떠오르는 분이 두어 분 정도 계세요. 시민사회단체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분이요. 저희가 무언가를 알려 주었다기 보다는, 모임을 통해서 얻게 된 약간의 기회를 잘 활용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로스쿨에 있을 때 우리 사무실에서 연수를 하신 분이세요. 로스쿨에 재학 중이셨을 때부터 우리 민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내 일상을 같이 해 보면서, 민변 변호사가 어떤 것인지 날 것 그대로 느껴보자고요. 법정에도 같이 들어가고, 퇴근 후 시민사회단체 회의에 갈 때도, 활동가분들과 술 한잔 하는 자리에도 함께 했지요. 그렇게 모든 일과를 함께 했습니다. 이후 우리 모임에 가입을 했고, 그간 소식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하다가, 최근에 소식을 들었더니, 우리 모임과 지역 시민사회 단체의 주축으로서 열심히 역할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활동가들과 밥 한 번씩 같이 먹고, 회의에도 참석했던 그 경험을 꾸준히 스스로 확장시켜 나가신 거에요. 물론 워낙 훌륭하신 분이어서 그 기회가 없었더라도 스스로 잘 찾아서 나가셨을 것 같긴 합니다.

 

일과를 공유한다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저희 사무실에 누가 연수를 오셔서, 아니 친구 하나라도 제 하루를 다 본다면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 같아요.

에이, 누구라도, 저 역시 제 일과를 다 공유한다는 것은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죠. 그런데 우리 모임에 관심이 있는 후배에게, 그런 마음이라면 꾸밈없는 그대로 지역 민변 변호사를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지역 활동가들과 술을 먹든 밥을 먹든 돈은 우리가 다 내는 거고, 어느 달은 수임이 잘 될 수도 있고, 답답할 정도로 안 될 때도 있고요. 소송구조나 민변 공익 사건을 하기도 하는데 좋은 사건도 있고, 수임하기 싫은 사건도 있고 그렇지요. 민변 변호사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으니,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시라, 민변 지부의 변호사로서 살 수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라는 거였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부에서의 활동은 본부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본부라면 열심히 하면 기사화되기도 하고, 명성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민변의 활동이 그렇게 자신의 커리어가 될 수가 있을 텐데, 여기에 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지만 활동하다 보면 나름대로 민변의 역할이 있지요.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로스쿨 재학 중일 때 미리 알게 되는 것은 장래 변호사가 되는 데에 있어서, 그리고 민변 활동을 결심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씀 중에 소송구조를 하신다는 점이 특히 귀에 들어옵니다. 변호사님 이런 저런 글을 보면 국선변호에 대한 말씀도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변호사님께서 지금 15년 이상 변호사 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여전히 소송구조나 국선을 하고 계시는지요.

예,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왜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할 말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변호사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소송구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오죽하면 법원에서 변호사를 붙이라고 명령을 할까요. 법원이 보기에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쉽고 별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하면 소송구조를 내주지 않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소송 진행하는 것도 거칠고, 법원이 소송지휘하기가 힘들 때 주로 소송구조를 붙여주지요. 소송 자체가 보람이 있거나 하는 경우는 솔직히 거의 없어요. 국선도 마찬가지죠. 대부분의 경우에 소위 뻔한 상황들에서 부인하는 경우, 아니면 구속을 마음먹은 경우에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선을 붙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부분이 소송구조, 국선 변호에 대해 가지는 한 가지 생각인 것은 맞아요.

그래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기고 말고를 떠나서 변호사가 꼭 옆에 있어줘야 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별론인데, 보수도 나쁘지 않아요. 사선에 비해서 보수가 좀 넉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보수를 잘 확인하지 않고 일을 하잖아요. 그래서 체크를 안 하고 있다가 몇 달이 지나서 한꺼번에 보수가 입금되면, 또 희한한게 그런 보수는 형편이 어려울 때 들어고고 하니까,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변호사에 대한 존중에 관한 거예요, 사회 각계 여러 부문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예전에 비해서 권위라는 것이 해체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저 초임 때만 해도 변호사 그 자체가 가지는 권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소송구조 의뢰인이라든가 국선 피고인이 변호사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때 이제 내가 그만 둬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변호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겁니다. 말씀드리다보니 생각이 나네요. 2년 차에 국선을 해드렸던 분이 계신데, 공소사실 2개 중 1개를 무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선 사선변호사를 선임하신 걸 보면 돈이 없으신 분이 아니었는데도 저를 참 힘들게 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뒤로 1년에 2번, 추석하고 설날 명절마다 꾸준히, 지금까지 15년이 넘게 과일을 선물로 가지고 오시면서 인사를 하세요. 10년 정도 되었을 때 제가 이제 그만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여전히 계속 인사를 와주십니다. 제가 그분에게 친절하게 했다거나, 저 스스로 보람이 있었다고 평가할 것까진 아니었어요. 너무 힘들게 하셨거든요. 그래도 정말 열심히는 했습니다. 변호사가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해준다는 사실 자체로, 그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힘이 되는 경험이라고 느꼈습니다. 100명 중 99명이 나를 힘들게 하고 국선, 소송구조 변호사를 무시한다고 해도 그 한 분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후배 변호사님들에게도 소송구조와 국선변호를 권하시나요.

저는 후배들에게 소송구조와 국선변호를 하라고 권하죠. 특히 형사사건은 무작정 한다고 변호사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다투는 사건을 다뤄봐야 실력이 느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도와준다고 하는 생각 이전에,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하시라고 하지요. 실력이 확실히 늡니다. 저도 초기에는 기록을 보는데 어느 정도 절대적인 시간을 들여야 했고,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맘이 답답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익숙해지는 기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안 되면 정말 힘을 발휘해서 성과를 내야 할 사건에서 위축되고 힘들어지고 하는 거니까요.

 

변호사님 SNS 보면, 개업변호사로서 생계를 열심히 꾸려나간다는 의미의 겸손한 소개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대전에서 개업변호사로서 활동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연수원 생활 대부분을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으로 보냈습니다. 2년을 열심히 생활하다가 연수원을 수료할 무렵이 되자,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당시 고민이 있었죠. 당시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계셨던 다른 활동가 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런 시민단체 내지 활동가 단체에서도 상근으로 변호사를 채용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상근변호사를 채용할 여력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었습니다. 제가 연수원에서 변호사 전문 연수를 공감에서 했어요. 정말 좋은 곳이라 지원을 해볼까 했는데, 우리 동기였던 황필규 변호사님, 필규 형이 저한테 이야기를 했죠. 야, 거기 지원하면 안 돼, 나도 지원할거야 하고 말이지요. 어차피 1명 뽑는데 둘이 같이 경쟁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또 변호사 역할을 하면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법무법인 덕수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변호사 시보를 덕수에서 하기도 했고요. 시보생활을 할 때 제 방이 거기 있었습니다. 물론 창문은 없었지요. 그때 점심식사를 최병모 변호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배님들과 같이 하곤 했죠.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식사할 때에 선배 변호사님들 질문에 답을 잘 하면 입사가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저의 수입도 그렇고 월급 주는 회사도 그렇고 돈이었습니다. 어차피 급여를 받으며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맘 편하게 내가 벌어서 내 시간 쓰고 후원도 하면서 참여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개업을 결심하게 되었고, 개업을 할 거라면 제가 초중고를 보낸,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대전에서 개업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개업 직후부터 민변에 가입하신 걸로 압니다. 당시 민변을 통해서 수임한 사건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요.

사실 개업하고 1, 2년 동안에는 민변을 통해서 수임하게 된 사건도 별로 없었어요. 참여정부 때라서 그런지, 국보법 사건도 별로 없었습니다. 민변을 통해서 처음 접한 사건은 가입하고 3년 정도 되었을 때로 기억합니다. 충남도청에 불이 난 사건, 그러니까 FTA반대 시위 중에 방화로 번진 사건의 형사 대응을 민변 지부 회원들이 나눠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민변 활동이라고 하면… 선배님들, 우리 간사님들하고 술을 많이 먹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변호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민변 변호사로서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하나 하는 주제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작게는 수임료를 제대로 신고하고 있느냐 하는 주제도 있었어요. 이거 누락을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선배님께서 민변 변호사가 당연히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정리를 해 주셔서 그렇게 마음을 다집기도 했고요. 변호사로서 여려 기본적인 것부터 생활을 잡아 나갔지요.

 

개업 후에 수임은 잘되셨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2005년에 개업을 했는데 3년차까지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힘들 때, 사건도 없고 일도 없는데 방에 있지 말로 밖에 나가라, 하는 말을 누가 했어요. 어느 날은 괴로워서 구두 신고 차 몰고 속리산을 갔어요. 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혼자서 주변 산책하면서 지금은 담배를 끊었지만, 저쪽에 아름드리나무가 큰 게 있었는데, 그 아래서 담배도 한 대 피우고, 그렇게 3년 고생했어요.

수임 자체가 안 되는 고민도 있었지만, 취업을 할 걸 뭐 이런 저런 선택에 대한 후회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죠, 어쩌겠어요. 버텨야지…

 

그때도 어려웠다면, 지금 신규 개업하는 후배들이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리 지부 후배님들과 유사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누구나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을 덜 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잘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매번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면 부러운 존재들이 있어요. 첫째가 전관 변호사, 둘째가 영업력이 참 좋아서 개별적인 수임이 별도로 없이도 기관, 회사들로부터 지속적인 사건 제공이 되는 변호사들이지요. 가만 생각을 해보니, 제가 전관 변호사는 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영업력을 키우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모임이나 골프나 이런 방법들로 영업을 하겠다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고요.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부러워하고 비교를 하느냐, 하는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우리가 부러워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될 수 있으면 부러워하자, 그런데 이미 그 길을 걷지 않기로 어떤 의미에서 결단을 했으면 더 이상 그런 쪽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결론이요..

저 중학교 졸업할 때 즈음 1년 선배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권해줬어요. 당시는 안 읽고 나중에 읽었겠지요. 우리는 소유냐 존재냐 하는 이 갈림길에서 늘 고민하는 것 같아요. 소유쪽의 유혹이 굉장히 강렬하죠. 돈도 벌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고, 거기에 더해서 권력도 좀 가지면 더 좋고… 이렇게 소유쪽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데, 그래도 학창시절에는 당연히 소유보다 존재에 손을 들었어요.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지내오다가 변호사 개업하고 3년 동안 힘들다고 잠시 그 생각을 잊게 된 거에요. 애도 크고 돈은 벌어야 되고 그러면서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변호사로서, 특히 민변 변호사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새겨보면, 다시 그때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소유라는 쪽에 방점을 찍고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게 오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욕심을 부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절대 그렇지는 않지요. 전 신이 계시다고 하면, 사람들마다 똑같은 양의 복을 주었다고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에게는 돈 복을 더 많이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 복을 주고, 처복을 주고, 동료 복을 주고, 이렇게요. 이 사람에게는 인간관계의 복을 주었으니 돈 복은 좀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가진 것을 좀 더 소중히 하면 복이 새끼를 치고 불어나는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자꾸 욕심내면 내가 가진 복도 달아난다고 느껴요. 결국 굳이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좇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늘 유혹적이니까, 소유라는 것이 너무 달콤한 유혹이니까 쉽지가 않죠.

 

대전 충청지부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시민단체와 연을 이어나간다는 것이 변호사 업무를 하는 데에 지장이 될 정도로 시간 할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입할 때부터 이미 선배님들을 통해서 우리 지부와 관계를 맺은 단체들이 있고, 또 이슈가 생길 때마다 알음알음으로 연을 맺고 사업을 같이 하면서 저변을 확장해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힘들고 바쁘고 한 것 확실해요.

제가 대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까지 했다가 좀 쉬었습니다. 올해 공동의장 선거 진행 중이고 제가 출마는 했는데,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경험상, 시민단체 활동을 열심히 할 때, 그러니까 쉬기 전까지는 정말 바빴어요. 쉴 필요가 있더라고요. 일부러 쉬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네요.

시민단체 이야기를 해 보자면, 대전 참여연대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움직이는데, 전체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어요. 일을 하다보면 중앙에서의 이슈를 가지고 지역에서도 동조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개별 지역에서 다시 논의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중앙이 일방적으로 하달되고 지역은 단지 실행에 그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때 참 속상했어요. 예를 들면 소녀상 건립에 관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설치를 하더라도 각 단위 별로 다양한 의견을 내어 논의를 하고 진행했으면 하는데, 이건 하기로 한 거야, 너희 단위에서 참여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라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일이 처리되는 면이 있어서 회의를 느낀 적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지방 분권을 이야기 하는데, 조금 늦더라도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해 볼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21에 어느 전문가가 기고를 하기도 했어요. 전국적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이 정말 적절한 방식이냐 하는 이야기였지요. 시민단체일수록 다른 생각이 필요한데, 중앙의 이슈를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으로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 외에 여러 사정이 있어서 쉬었어요. 5년 정도 쉰 것 같네요.

좀 쉬면서 밖에서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나의 문제는 뭔지, 우리 단체의 문제는 뭔지, 이걸 어떻게 풀어갈지, 정말 풀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

 

6년의 사무처장직을 수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땠나요.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여러 생각이 있었습니다. 원래 대전충청 원래 사무처장 임기는 3년이었는데, 3년은 너무 길다는 의견이 있어서 2년으로 단축을 하자, 그리고 필요하면 2년을 연임하도록 하자라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사실상 2년을 하고 나서는 당연히 2년을 더 하는 것으로 운용되었어요. 예전 같으면 3년이니 1년만 더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제가 2년으로 감축되고 사무처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임까지 4년을 마치고 나니, 20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되어 있더라고요. 마땅히 그 준비를 맡아 줄 분을 구하지 못해서 2년을 더 하게 되었다.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나이든 연배든 제 상황이라면 후배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가교 역할을 해 줘야 되잖아요. 바로 후배들한테 직무를 이관하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더 하게 되었어요.

저는 6년 생활이 나름대로 즐거웠어요. 사무차장으로서 많은 집회에서 발언을 요청하는 일들이 많았고, 다 수용할 수는 없었겠지만 법률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모임에는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전에도 여쭙고 싶었는데 책장에 의학서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개업하고 초창기에 의료 소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 책들이 기본서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구입을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열심히 했고 승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의료소송이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공부를 해야 서면을 쓰니까, 재밌게 했습니다. 신장의학, 내과학, 당뇨병 관련 서적들을 다 사서 봤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이야기했어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래도 어떻게든 공부를 하면 달아나진 않으니까요.

 

말씀을 듣다 보니, 변호사님께서는 정말 직접 송무를 계속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좀 지치긴 하는데…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요즘엔 판사님들이 조심하는 면이 있지만, 법관평가도 없는 옛날에는 정말 속상하게 하는 판사들이 많았어요.

떠오르는 형사사건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진실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사사건은 누구도 진실을 모르는 거잖아요. 증인이 정말 많아서 하나하나 신문을 했습니다. 검찰 증인인데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언이 나올 때마다 재판장이 개입해서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겁니다. 주심판사가 다시 물어봐서 또 우리에게 유리한 답이 나오면 다시 재판장이 개입해서 뒤집고. 이게 반복되는 거예요. 너무 속이 상해서 최후 변론을 좀 강하게 준비했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아내에게 보여줬어요. 나 이렇게 읽을 거라고. 아내가 변호가 그만 하려고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최후진술 준비해 간 원고를 법정에서 30분 동안 읽었어요. 방청석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선고일도 아니었는데 재판장이 바로 우리 피고인을 법정구속 시키더라고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정말 그 정도로 이상한 재판 진행도 많았죠. 어떤 사건은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 우리가 끝까지 무죄를 다투었는데, 법관이 검찰에 입증 촉구를 1달에 1번씩 1년 동안 하더니, 하고 결국 유죄 내리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많았는데도요, 열심히 해서 무죄가 나온다거나 하면 이게 또 마약같아요. 그 기분에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고, 글을 쓰시고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느껴집니다.

책을 보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사실 소설책을 좋아합니다. 머리 식히는 데에는 소설책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작년에는 술 끊고 신앙 서적을 주로 보았습니다.

기고도, 여러 인연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습니다. 강연하면서, 혹은 소송을 진행하면서 어떤 주제에 관여하고 있으면, 신기하게 관련 기고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좋다고 평을 받는 글들은 연구하고 공부하고 쓴 글이 아니라, 그냥 제 삶을 돌이켜 보면서 제 시각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들이었습니다. 최근에 술 끊었다는 내용으로 쓴 글을 우리 논설 실장님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문현웅의 공정사회라고 타이틀이 붙어있으니까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문현웅 변호사님이 서울신문에 기고하신 글 몇 가지. 더 많은 글은 서울신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현웅의 공정사회] 바리사이의 기도

[문현웅의 공정사회] 사라진 젠더

[문현웅의 공정사회] 법정 패션


 

책을 보는 절대적인 시간은 어떻게 확보를 하시는지요.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결혼하고 샀다가 몇 년 안 되어서 없앴어요. 그러니까 집에 가면 할 게 없습니다. 당연히 책을 읽게 되죠. 쉬면서.

사실 저 때문에 텔레비전을 없앴어요. 퇴근하면 지치고 힘드니까 누워서 리모콘 들고 텔리비전만 보는 거예요. 아내,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상황이 정말 싫더라고요. 텔레비전을 없애니까 일단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아이들과 몸으로도 놀아주게 되고, 산책도 하고. 애들 어릴 때는 뱀주사위 놀이판이 엄청 큰 게 있어서 그걸 장만하고 같이 게임을 했어요. 최근에는 가족들과 윷놀이를 많이 해요. 심변도 고민 중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는 쪽으로 결단하는 걸 추천합니다.

변호사님의 청바지 패션에 대해서도 궁금합니.

아유, 청바지 원래 안 입었었죠. 또 저 대학교 때는 청바지 입는 것이 미 제국주의와 연결되어서 일부러 기피하던 세대였지요. 그런데 옷이 많지 않은 사람은 청바지가 코디하기 참 좋아요. 사실 머리 기르고 청바지 입기 시작한 때는 박근혜 당선 즈음이에요. 전 2012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정말, 심각하게 괴롭고 우울했어요. 2012년도 대선 기간을 나름 열심히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민주당 정치인의 행태를 직간접적으로 느끼건대, 이 선거에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당과 후보가 따로 놀았다는 표현이 맞았어요. 그렇게 지고 나니까 분노와 화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술만 먹으면 다른 사람들 욕하고 그랬어요. 그때 술을 끊었고, 스스로 새로운 기분을 얻고 싶었습니다. 마침 한석규 배우 머리 기른 것이 보기 좋아서 나도 길러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당시 일도 하기 싫어서 사건 수임도 좀 줄였더니 정장 입을 일이 많이 없어서 청바지 차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것이 있어요. 그때 제가 청바지를 입고 다닐 때 선배 변호사님들 몇 분이 변호사가 복장이 왜이래 하면서 핀잔을 주셨는데, 지금은 다들 저처럼 편하게 입고 다니세요.

 

저도 개업하면서 복장, 권위 등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단계적으로 거치는 과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어제 참여자치시민연대 회의에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당위적인 강박에서 좀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난 변호사니까 이래야 돼, 민변이니까 이래야 돼 하는 당위를 좀 탈피하고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옷도 편하게 입고요.

민변 선배님들 중에서는 나이는 지긋하신데도, 불필요한 당위나 강박이 전혀 없으신 분들도 많이 있는데, 정말 존경스럽죠.

‘뒤로 넘긴 장발’은 문현웅 변호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민변이 변호사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는 후배든 누구에게든 민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민변이 가지는 의미를 자문하곤 합니다. 오늘 인터뷰를 오신다고 하는 생각에, 아침에 샤워하면서 민변을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나에게 민변이 뭔가 생각하는데 영화라는 답이 떠오르더라고요.

우리 어릴 적 굉장히 감동하고 나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잖아요. 저에게 민변은 그런 영화입니다. 민변의 도도한 역사와 활동을 보면서, 민변 회원들 개개인의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내 모습을 점검하고, 그런 계기가 됩니다.

아까 나온 이야기지만,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모든 인생을 걸쳐 떨칠 수 없는 고민인 것 같아요. 저 스스로 소유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고민을 가지면서 한편의 영화 같은 민변을 보면, 내가 존재 쪽에 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초는 됩니다. 10번 정도 소유와 존재가 싸운다고 하면 최소한 한 번, 두 번 정도는 존재 쪽에 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내가 되고 싶다고 희망하는데, 그런 결정을 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민변입니다.

오늘 아침 샤워하다 생각이 났어요.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계시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은 편안한 매력의 문변호사님을 뵙고 오는 기차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가까이에 본받을 수 있는 선배이자 동료로서 문변호사님의 인터뷰가 잘 전달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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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이주희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과거 학생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현재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하는 이주희 변호사가 2019년 첫 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변호사 경력을 시작하게 된 이주희 변호사를 많이 응원해주세요.

 

자원활동가(이하 자활):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주희: 안녕하세요, 저는 1978년생이고, 변호사시험 7회에 합격했습니다. 민변은 2018년에 가입했습니다. 현재는 법무법인 다산에서 소속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신입이 이런 귀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괜찮을지 저어되었지만 미래의 민변회원님들과 즐겁게 담소 나눈다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왔어요.

 

자활: 민변 가입 시 관심 분야를 체크하는 란에 전 영역을 표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모든 분야에 걸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이주희: 16개 다 가입이 되어있는 것은 맞습니다. 4월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민변 가입서에 있는 위원회들을 쭉 보는데 정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 없더라고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많고, 개선되어야 할 영역들이 아주 많다는 방증이겠죠? 이러한 문제점이나 개선점들에 대해서 분야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신입으로서 각 위원회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데 섣불리 선택하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자는 생각으로 다 체크를 하고 간사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일을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답이 없으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민변 내부에서 회의하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지금은 전부 다 가입하기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월례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안에 맞는 이슈들이 제기될 때 또는 관심 있는 주제로 세미나나 강연들이 열릴 때 참석하고 있는데요, 각 위원회가 정말 다 특색이 있고 회원 분들이 다들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변 위원회들의 활동과 살림살이를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외 특정사안에 대한 TF들에도 참여중입니다. 신입이라 아직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합니다.

 

자활: 어떤 위원회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이주희: 모든 위원회가 다 기억에 남아요. <노동위원회>가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분들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활동하면 할수록, 손오공의 분신술로 모든 위원회와 계속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9년에는 아마 조금 더 주력할 위원회를 선택해서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2018년 7월 3일 대한문 앞 분향소에 대한 범죄행위 관련 고소ㆍ고발 및 경찰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이주희 변호사

 

자활: 학생운동을 언급해주셨는데요, 변호사님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이주희: 저의 20대 이후의 삶을 나눈다면, 학생 신분으로 사회 참여 운동을 했던 시기, 정당 활동을 했던 시기,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졸업 등 준비를 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까지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회 참여 운동과 정당 활동을 하면서 정부나 타정당 관계자들, 국회의원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면서 제 시각도 약간 균형점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립하는 쌍방 모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나름의 선의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방식과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요. 이전까지 저는 일방의 편에 있었던 사람이었잖아요? 중요한 것은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우리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있을 때 과연 이 갈등을 어떻게 타협하고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이때의 중재는 과연 누가 어떻게 담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새롭게 들었고요. 법과 제도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들을 조정하고 이왕이면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하는 데 법을 다루는 법률가가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기마다 계기가 있었고, 부족함은 있었을지언정 제 선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처음 사회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 순간에 가졌던 마음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어요.

 

자활: 사회 참여 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주희: 제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청소년기의 치기였을 수도 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인생의 허무함이랄까,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에 사는 찰나 같은 존재라는 자각이 오랜 시간 저를 지배했어요. 세속적인 부나 명예 이런 것은 일찌감치 저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 철학 등 공부를 많이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든 후에 히말라야에 수행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제가 몰랐던 사회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어요. 산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내가 가야 할 진리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기본적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삶을 다 걸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 외에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참여적 삶이 제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길이었습니다.

 

2018년 9월 4일 사법농단 영장기각 규탄 릴레이 1인시위 4일차에 참가중인 이주희 변호사

 

자활: 사회 참여 운동을 하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 현장은 어디였나요?

이주희: 제가 진짜 데모 열심히 했거든요.(웃음) 모든 경험이 하나같이 소중했는데, 그중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건 99년도 대우 자동차 총파업이었습니다. 96,97년에 노동악법들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이후에 노동계에서 노동자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정말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투쟁을 벌였던 시기가 있었고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이 그 투쟁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저도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적극적으로 결합을 했던 것 같아요. 특히 99년 대우차 총파업 당시에 부평에서 한 일주일 이상 살다시피 했었어요. 그때 투쟁하시는 조합원들의 가족 분들과 간담회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조합원의 부인분이 “우리는 그냥 성실하게 나라의 의무를 다하면서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똑똑한 대학생들이 그 답 좀 알려 달라.”라고 하면서, 제 손을 잡고 펑펑 우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거든요. 내가, 우리가, 이 사회가, 도대체 그분들에게 어떤 답을 드릴 수 있을지… 참 많이 고민이 됐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자활: 그러면, 이번엔 정당 활동에 대해 여쭈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웃음)

이주희: 네 그럼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자활: 저희가 리서치를 해보니, 2004년 총선에서 한국 사회 최초로 대학생 청년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셨었습니다. 혹시 그때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변호사님께 남겼을까요?

이주희: 우선 청년 비례대표가 제가 출마한 이후에 한국정치에 활성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보수정당에서도 형식적이나마 청년을 정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청년후보들을 내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죠. 우리가 처음으로 청년 이슈를 새롭게 제기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측면에서는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와 당 정책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처음으로 “등록금 상한제”를 정책적으로 주장을 했었거든요. 당시 전국 대학을 많이 다녔는데 다른 학교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서 고액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이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어요. 특히 사립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높잖아요. 또 예술대학 학생들은 살인적인 등록금으로 인해 계속 아르바이트로, 휴학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고요. 그런 대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어느 정치인도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았고,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해서 한국 사회 최초로 “반값 등록금, 등록금 상한제” 이슈를 던졌고요. 처음 등록금 이슈를 제기했을 때는 정말 택도 없는 소리,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어요. 지금은 심지어는 보수정당에서도 선거 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그런 대중적 의제로 자리매김한 거죠.

 

자활: 그렇군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그 당시 당선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낙선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이주희: 맞아요. 다음날 조간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이 “아깝다, 이주희!”였어요.(웃음) 제가 비례대표 9번이었는데 0.7% 정도 부족해 8번이었던 故 노회찬 의원까지 당선되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대학생후보의 선거운동은 우리가 꿈꾸는 정치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진보정치를 알리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았기 때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어요.

개표 날, 이라크파병 반대집회에 갔다가 당사에 돌아와서 결과를 쭉 지켜보고 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민주노동당이 무려 13퍼센트 이상을 획득해서 비례 8석, 지역구 2석 총10석으로 진보정당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게 된, 굉장히 한국 사회에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그 기쁨이 제 낙선보다 훨씬 컸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돌아봤을 때 그때 당선이 안 되었던 것이 그 이후에 더 많은 배움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더 나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자활: 그렇군요, 이주희 변호사님은 정말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혹시 변호사가 되시고 나셔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일단 제가 다른 선배 변호사님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나도 경험이 일천하여 변호사가 무엇이라고 가치평가를 내리기에는 정말 부족하다는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다만 얼마 전 제가 맡았던 사건 하나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시장정비사업추진계획승인처분무효확인소송이었는데, 전통시장을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시장상인을 내쫓고 최대한의 개발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는 조합과 구청에 맞서 싸우시는 시장상인 분들을 대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이기고 싶었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합과 지자체, 법원, 심지어는 상대편 대리인들에게도 이 사안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본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낡고 허름한 재래시장이지만, 그분들에게 그 시장은 떡과 야채, 순댓국을 팔아 자식들 교육하고 대학까지 보내게 해준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동안 도시의 많은 재개발사업이 실제로는 원주민의 삶과 지역적 관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개발이익만을 획득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들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죠. 서울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도시재생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는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장재개발도 시장 분들과 지역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이 사건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현재 서울시가 수립하고 있는 도시발전 방향에 명백히 역행하는 사업이었던 것이죠. 많이 울고 분노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생생한 목소리를 법정 안에서 법리로써 전달할 수 있을지, 법률가로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승소했습니다. (웃음)

 

자활: 소중한 경험이었겠네요.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가볼까 합니다. 위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싶어 민변에 가입하셨다고 했는데요, 혹시 꼭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아시다시피 개정되어야 할 법들은 정말 많습니다. 가령 미비한 노동관계법으로 인해 고 김용균님 사건처럼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고공철탑농성 같은 목숨을 건 행동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그 목소리들을 반영하는 법안개정에 무심하거나 통과도 더딘 상황입니다. 노동관련 법령들이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네요.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되었으니 올해(인터뷰당시) 제정 70년이 된 의미 있는 해입니다. 제가 대중적으로 처음 삭발을 한 것이 국가보안법 투쟁이었는데, 70년이 지난 올해를 맞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는 남북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면서 평화통일의 분기점이 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한데, 여전히 이적표현물 소지, 찬양 고무 등의 이유로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탄압받고 있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미 박물관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법이다고 말씀했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노무현 정부의 정신을 일정 계승하고 한반도의 평화협력을 통해 통일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조차 이러한 평화적 시대 흐름 속에서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겁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되거나 기소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오늘 인터뷰에서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그것을 무기삼아 지배 권력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해온 국정원, 국정원법이 개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활: 빨리 개정되어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 소속해 계시는데, 다산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다산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이주희: 일단 다산은 전 변호사님들이 민변 회원이시고, 창립된 지 30년이 된 법무법인입니다. 다산인권센터라고 우리 사회 인권 신장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센터를 만든 곳이 다산입니다. 원래는 두 조직이 분화되지 않고 다산 안에 함께 존재하였는데, 이제는 독립되었습니다. 다산은 뿌리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진보, 인권의 신장을 위해 탄생한 곳이었습니다.

 

자활: 다산콜센터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웃음)

이주희: (웃음) 그것은 아닙니다. 다산콜센터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산의 김칠준 대표님은 올해부터 민변 공익변론센터의 대표를 맡고 계시고 경찰청인권위원회 위원장이시기도 합니다. 민변 디지털정보위원회 위원장이신 조지훈 변호사님께서도 다산에 계십니다. 민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인권운동과 뗄 수 없는 곳이 다산입니다. 그런 다산의 일원이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민변 회의 때에도 다산 변호사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고요, 회사에서 민변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십니다. 직원 분들도 더없이 뛰어나시구요. 개별 변호사님들도 인격적으로도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세요. 선하고 열정이 가득하시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그런 분들이셔서 제가 우리 사무실에 있는 유일한 어쏘(고용변호사)이지만 평등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좋은 일들을 수행하고 계신 것 같아 정말 부럽습니다. 지금까지는 ‘변호사’ 이주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엔 ‘인간’ 이주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이주희: 그럼요. (웃음)

 

자활: 제가 간사님께 들은 바로는 요가 자격증이 있으시다고?

이주희: 부끄럽지만, 네 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11월에 민변에서 강사 분을 초빙하여 명상 강좌도 열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변호사님들, 동료변호사님들, 그리고 외부 참가자분들까지 함께하셨고, 아주 뜻깊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삶의 가치관 자체가 명상과 요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요가는 아사나, 호흡,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합일을 찾는 과정이거든요. 저는 사회변화는 결국 인간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변화와 인간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나 할까요. 제도의 변화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도를 바꾸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 자체가 성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계속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의 내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마음자리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 또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삶이 어떤지, 이런 것들이 관심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인 실천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일찍 아프십니다. 사회운동이 힘들고 어떻게 보면 메아리 없는 외침을 평생 계속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삶을 던져서 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지 못해서 쓰러지고 아프신 것을 참 많이 봤어요. 민변 회원 분들도 마찬가지죠. 더욱이 이런 활동하시는 분들께는 명상이든 요가든 그 무엇이라도 쉼과 휴식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활: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회원분들의 건강도 책임지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습니다. (엄지 척) 평소에 드라마, 영화도 즐겨보신다고 들었는데, 회원 분들에게 추천해주시고 싶은 영화가 있으신가요?

이주희: 최근 영화 중에서는 ‘컨택트’요. 예전에 개봉한 것 말고 2017년에 새로 개봉한 영화인데, 어떤 이는 인터스텔라가 우주에 대한 이과적 해석이라면, 컨택트는 문과적 표현, 즉 인문학적 해석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법률가는 늘 사실관계와 현실에만 천착하게 되는데요, 이 영화는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상상력을 제공해줍니다.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우주인과의 조화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조금은 현실에서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의 원작인 테드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도요.

그리고 ‘사일런스’, 일본에서 순교한 서양신부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양심의 자유의 숭고함을 읽었습니다. 혼자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자활: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웃음). 벌써 시간이 2시간이나 지나갔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긴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이주희: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아름답게, 정의롭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2019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여기 계신 자활 세 분도 그 길에서 곧 반가운 동료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활: 정말 감사드립니다.

The post [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금, 2019/01/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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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2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통일위원회에서 ‘2013년 국가보안법 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그 다음 발간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어 오다가 이번에 4개년 치를 한꺼번에 담은 ‘2014년~2017년 국가보안법보고서’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 보고서’를 발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요 국가보안법 사건의 수사 및 재판의 과정과 그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가보안법이 실제로 어떻게 해석·적용되어지고 있는지를 밝혀 위 법의 위헌 여부와 존폐에 관한 논의에 사실적·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발간에서는 위와 같은 첫 번째 목적에 보다 더 충실하고자 각 사건의 서두에 변호인뿐만 아니라 검사와 판사의 각 실명도 게재하였고, 내용 중 수사관 등 공무원이나 이에 준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그의 실명도 그대로 싣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 목적을 위하여는 사건 당사자의 개인적인 내용을 최대한 덜어 내면서도 사실관계와 법원의 판시 내용 등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충실하고 풍부하게 싣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에 이미 보도된 바 있는 회사명 등 고유명사는 그대로 실었습니다.

    집필된 사건 원고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은 본인들의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보고서에 실린 사건의 당사자 분들 중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분들께 일일이 부탁을 드려서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느꼈던 소회, 현재의 근황 등을 담은 글을 작성 받아 당해 사건의 바로 뒤에 이어서 실었습니다. 사실 당사자 본인으로서는 뒤돌아보기에도 너무나 힘든 시기이었을 터입니다만, 실제로 부탁을 드렸을 때에는 어느 한 분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글을 적어 보내주셨습니다.

 

    총론에서 실은 “박근혜 정부와 국가보안법”에서는 소위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사건과 함께 취임하였다가 촛불 시민혁명으로 물러 난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보안법 사건이 발생하였던 양상과 그 실태 등을 조망해 보고, 대표적인 불법 수사의 종합세트라 할 수 있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에서 국가정보원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조작하고 증거를 만들어 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이 보고서가 대상으로 하는 2014년부터 2017년 동안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서는 각하 결정 외에 2건의 합헌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2건의 합헌 결정, 즉 2015. 4. 30. 선고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조항(제2조 제1항), 이적행위 조항(제7조 제1항), 이적단체 가입 조항(제7조 제3항) 및 이적표현물 조항(제7조 제5항)의 위헌소원 심판청구에대한 합헌 결정[2013헌가26 외 10개 사건 병합]과 2014. 9. 25. 선고한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조항(제8조 제1항) 및 목적수행에 대한 편의제공조항(제9조 제2항 중 제4조 부분)의 위헌소원 심판청구에 대한 합헌 결정[2011헌바358]을 대상으로 한 평석을 실었습니다.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금수산기념궁전 참배사건”은 이인모 노인이 북송되기 전까지 간병인을 자처하여 이 노인을 보살폈고, 이 노인이 북송된 이후 생전에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받게 되자 북한에 들어가 이 노인을 만나고 돌아 왔던 고 조영삼 선생의 사건으로서, 김일성·김정일의 각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한 행위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견 단순한 내용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제1심 유죄, 항소심 무죄,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파기 후 항소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었던, 실제로는 단순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고 조영삼 선생은 미국이 휴전선 이남에 고고도미사일방어(TAHAAD, 사드) 체계를 배치하겠다 하여 많은 국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서던 때에 사드배치 반대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며 분신하시어 2017. 9. 20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남겼던 마지막 글을 사건에 관한 글에 이어서 실었습니다.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 조작사건”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에 이어 무죄판결이 선고되면서 국가정보원의 탈북자 간첩조작 행위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제1심에서 간첩 등 국가보안법위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국가정보원이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고자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이라며 대외에 공개함으로써 민변의 변호사들이 알게 되어 변호 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민변의 통일위원회 뿐만 아니라 여성인권위원회, 국제연대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등도 함께 변호인단에 참여하여 헌신하였고, 지금은 재심사건 변호사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도 당시 함께 변호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주인공인 홍강철씨가 보내 준 글을 뒤에 이어서 실었습니다. 워낙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라 아픈 시기를 회상하며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있습니다. 전체적이고 더 자세한 내용은 곧 발간될 예정인 그의 책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겠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감상문과 학문의 자유”는 울산에 소재한 대학의 이◯◯ 교수가 수강생들에게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했다며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사건입니다. 피고인은 국문학과 교수로서 남북을 망라한 민족문학 수업시간에 <세기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벙어리새>, <태백산맥>,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을 제시하며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과제를 냈었는데, 세간에는 마치 피고인이 <세기와 더불어>만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던 것으로 오인되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서울에 있는 경찰 보안수사대의 출석요구에 따라 새벽에 기차를 타고 올라 와 조사받아야 했던 일, 보안수사대에서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았으나 그 다음날 오전에 다시 나오라고 하기에 근처에서 잠시 눈 붙일 곳을 찾다가 모친의 부음을 듣게 된 일, 집행유예 선고로 교수직 뿐 아니라 연금과 자식의 등록금 수혜권까지도 잃게 된 일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사건의 글에 이어진 교수 본인의 수기에 절절히 담겨 있습니다.

    “코리아랜드 대북사업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부가 기소할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혐의사실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발표하고 압수한 증거들까지도 대대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언론들이 앞 다투어 보도하였던 사건입니다. 피고인은 작은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요직을 지내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을 배경으로 삼아 일찍이 1990년 초부터 대북사업을 해 왔습니다. 진보적 통일운동 등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망해가는 대북사업의 끄트머리에서 어떻게든 한 건 제대로 성공시켜 반전의 기회를 갖고자 했던 사업가이었을 뿐입니다. 항소심에서 공소사실의 거의 절반이 무죄로 판단되었지만, 유죄로 인정된 부분도 쉽사리 납득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여러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리호남’이라는 이름이 이 사건에서도피고인의 대북사업 파트너로 나옵니다.

    “새시대 교육운동 사건”은 공안기관이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만든 「변혁의 새시대를 열어가는 교육운동 전국준비위원회」에 대해 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하고, 위 단체 소속 교사들에 대한 이적동조죄와 이적표현물 소지죄를 더하면서 전교조에게 소위 ‘종북’의 굴레를 씌워 탄압하려는 의도라 하여 전교조 교사들의 규탄시위를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제1심 법원은 이적단체 구성과 이적동조에 대해 각 무죄를 선고하였고, 일부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하여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제1심의 무죄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죄로 인정되었던 이적표현물의 일부에 대하여도 추가로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통일 토크콘서트 사건”은 신은미씨와 황선씨가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자신들의 방북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가 TV조선과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북콘서트’로 매도당하고 사제폭탄 테러까지 당하는 등으로 조작된 여론과 종북몰이의 한 복판에 섰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재미교포인 신은미씨는 강제 출국을 당하고, 황선씨는 토크콘서트 개최에 의한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선전 외에 그동안 수사기관이 묵혀 두고 있었던 이적표현물 제작·반포·소지, 이적동조 혐의까지 더하여져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황선씨에 대해 2010년 1월에 있었던 실천연대에서의 활동 1건만을 이적동조 유죄로 판단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로 판단하였습니다. 북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비난이 없으면 ‘종북’으로 매도당하는 현실과 또 그러한 ‘종북몰이’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사건”은 1994년에 창립되어 한미연합 전쟁연습 반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등을 기치로 그동안 한미간의 불평등한 SOFA 개정,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 방위비분담금과 미군기지 이전비용 전용 등의 문제 등을 줄기차게 제기해왔던 평통사의 활동가들이 국가보안법의 굴레에 씌워져 법정에 서야 했던 8건의 사건에 대한 보고입니다. 7건은 제1심부터 각 무죄가, 나머지 1건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공안기관에 대한 평통사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지만,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한 공안기관이 언제 또 싸움을 걸어 올런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이번 보고서를 읽으면서는 평통사 활동가 분들께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평화행동목자단 김성윤목사 사건”은 공안기관이 기독교 평화행동목자단에서 활동하는 김성윤 목사 등을 수 년동안 미행하고 도·감청을 해 오다가 박근혜 정부 시기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되었던 대회입니다)를 하루 앞둔 2015. 11. 13. 서울 종로구 소재 기독교회관을 압수·수색하고 김성윤목사를 체포하면서 민중총궐기 대회 물타기용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법률적으로는 외국에 서버가 있는 외국계 이메일에 대해 수사기관이 국내 영장으로써 피고인의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서버에 접속하여 압수·수색할 수 있는지 여부가 눈여겨 볼 만합니다. 항소심 법원은 ‘우리나라 사법관할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영역에 대하여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한 방식과 효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장 집행으로서 위법하다’고 판시하였고, 대법원은 이와 반대로 ‘형사소송법 해석상 허용될 수 있는 압수·수색’이라며 적법한 영장 집행으로 보았습니다.

    “간첩 아닌 ‘PC방 간첩사건’”은 2016. 5.경 뉴스채널 YTN에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어느 PC방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성에게 달려들어 체포하는 장면을 CCTV 영상으로 방송하여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입니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피고인을 만 4년여 동안 미행하고 촬영하며 대화를 녹음해 왔는데, 피고인이 자주 이용하는 PC방에서는 수사관이 특정 PC에 데이터 초기화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자신들이 갖고 온 하드디스크를 설치해 놓았다가 피고인이 와서 그 PC를 사용하고 나가면 수사관이 다시 와서 그 하드디스크를 수거하고 다른 하드디스크로 교체하는 식으로 증거를 수집해 왔습니다. 공판과정에서 법원은 공안기관에 피고인에 대한 통신감청 영장을 만 3년여 동안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부해주었던 사실이 확인되면서 헌법재판소가 통신제한조치 기간 연장과 관련 하여 기간과 횟수의 제한을 두지 아니한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취지를 몰각시키는 행위라며 피고인 측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의 결과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였고, 때문에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장기간 동안에 걸친 국가정보원의 미행과 촬영과 감청 등을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국가보안법 사건의 법정에서 검사 측 증인으로 단골 출연하는 ‘곽인수’가 이 사건에서도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증인의 역할은 대개 ‘피고인이 만난 사람은 북한공작원이다’라고 증언하는 것이고, 이러한 증언 한마디로 법원은 그 사람을 북한공작원으로 인정해 버립니다. 모르는 북한공작원이 없어 보이는 대단한 곽인수입니다. 곽인수가 지금까지 법정에서 자신이 북한공작원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는 있는지 의문입니다.

    “폐타이어 대북 수출사건”은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 군부대에서 반출되는 폐타이어를 북한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해 오다가 5·24조치로 대북 수출이 막히자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들여보내려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린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마치 내란선동 사건에서 국가정보원의 프락치로 등장하였던 이성윤을 보는 듯한 뉴질랜드 국적의 교포 ‘사이먼 김’이 등장합니다. ‘사이먼 김’의 활약으로 경찰 보안수사대는 초기부터 피고인들의 행동
을 자기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고, 폐타이어 수입을 금지하는 중국 당국에 적발되어 폐타이어가 부산항으로 되돌아 오고 피고인들이 이를 폐기물로 처분한 이후에서야 체포하고 일사천리로 공식적인 수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판결문에 나타나 있는 변호인들의 항변은 설득력이 있는반면, 유죄의 판시 부분은 상당히 작위적으로 읽혀집니다.

 

    이어서 4건의 이적표현물에 관한 사건을 실었습니다.

    “북한영화 전문가의 이적표현물 사건”은 대학원에서 통일학을 전공하였고 북한영화에 관한 책도 쓰고 강연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유영호 선생에 대해 보관 문서나 동영상 파일 등을 이적표현물 소지죄로 기소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기소의 배경에는 유 선생이 소위 ‘왕재산 사건’의 피고인 중 1인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소위 ‘왕재산 사건’에서 가장 주목되었던 부분이 반국가단체 구성죄이었는데, 당시 국가정보원은 구속된 그 사건 피고인들의 지인 등 40여명을 반국가단체의 단원으로 대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1심부터 법원이 조직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며 반국가단체 구성의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그러자 국가정보원은 조사해 놓은 것이 아까웠던지 그 중 몇명을 이적표현물 소지 등의 죄로 기소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소회 등을 담은 유 선생의 글이 바로 뒤에 이어집니다.

    “이적표현물 소지죄와 이적행위 목적” 사건은 제대를 2개월여 앞둔 말년 병장 때 기소가 되어 제1심에서 7년여 동안 집시법 위반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이적표현물 소지·반포 혐의로 재판이 진행되었다가 결국 모두 무죄가 선고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제1심 법원이 이적표현물 소지죄에서 ‘이적행위의 목적’과 관련하여 판시한 부분입니다. 제1심 법원은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에 대해 이적단체로 판단하였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적행위의 목적’에 관해 반대의견을 냈던 김영란 대법관의 논설에 따라 ‘이적표현물 소지죄에 있어서는 피고인이 이를 소지함으로써 의욕하는 목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즉 이적행위를 할 계획이나 의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거나 입증되어야 한다’며 피고인에게는 그러한 계획이나 의사가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 존재하는 현실에서 법원 내에서라도 위와 같은 전향적인 해석과 판단에 대해 널리 공감대가 형성되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편, 당사자 본인께서 보내 주신 글에서는 7년여 동안의 1심 재판이 끝났으나 검사의 항소로 다시 재판을준비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글 중에 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기무부대의 압수수색 이후, 저는 소소한 일상 하나도 사회적 관계망으로 알려질까 봐 인증샷이나 제 얼굴이 나오는 단체 촬영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기도 쓰지 않고 업무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메모도 꺼립니다….” 친구들 중 학생운동에 매진하였던 이들로부터 학창시절의 사진이나 일기 등이 없어 추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자기에게 일이 닥쳤을 때 사진에 나온 인물이나 일기, 노트에 적혀 있는 이름들이 수사기관에 불려가 고초를 받는 일이 없도록 일찍이 모두 태워버리는 등으로 없앤 것입니다. 수 십년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살아 있고,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이렇게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의 이적표현물 사건”은 오랜 동안 노조 간부로 활동해온 피고인에 대해 제1심 법원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북한 ‘로동신문’ 기사나 실천연대 발행 간행물 소지 등과 관련하여서는 “이적표현물은 맞으나 피고인에게 이적목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외 소지하고 있는 자료들은 “이적표현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모두 무죄를 선고한 사건입니다. 결론만 놓고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로동신문’의 기사나 법원이 이적단체로 판단한 단체의 간행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연히 이적표현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실제 그 내용에 이적성이 있는지 여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등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산청년한의사회 사건”은 한의사라는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였던 대학시절의 열정을 이어나가고자 동문들로 구성된 모임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학습자료를 만들었다가 이적표현물 제작 및 소지죄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공안기관은 이들이 만든 모임에 대해 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하려고 애쓰다가 안되었는지 실질적으로 수사를 마치고도 3년 8개월여 동안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결국 이적표현물 제작과 소지죄로만 기소하였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 사건은 북한에 거주하였다가 남한에 들어 왔으나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서, 사실 각 사건 자체와 이에 적용된 국가보안법의 해석·적용 등에 의미가 있거나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처한 상황과 요구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의도로 함께 실었습니다. 유태준씨는 재입북한 탈북자 1호로 알려져 있는데, 1998년경 탈북하여 남한에 들어 와 정착하였다가 2000년경 부인을 데리고 오겠다며 재입북하였고, 다시 남한에 들어 온 이후 2004년경 아들을 데리고 광화문 등에서 ‘나와 아들을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하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평양주민 김련희’는 중국에서 브로커에게 북한 여권을 빼앗겨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탈북자들과 함께 남한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였고, ‘법적 근거가 없어 북송할 수 없다’는 정부 당국에 맞서 처절하고도 끊임없이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권철남씨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잇다가 남한 사회의 탈북자에 대한 멸시, 힘들게 노동해도 먹고살기 힘든 현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이 쌓이면서 재입북 할 것을 결심하고 주변에 그러한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가 국가보안법상 탈출예비죄로 처벌받고, 이후에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북송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통일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들의 북송 요구를 거부하고 있지만, 과거 이인모 노인에게는 방북 승인을 해 주어 북으로 보내고, 조업 중 기관 고장 등으로 예기치 않게 월경한 어부나 홍수 때 임진강 등지로 표류하여 떠내려 온 군인 등을 본인 의사에 따라 북으로 돌려보낸 적도 많았습니다. 정부 당국의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응답과 조치가 요구되어집니다.

 

    부록으로는 첫째, 1991년 개정된 이후 8번째 위헌법률심판을 받게 된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및 제5항에 대한 “위헌심판제청 결정문”의 전문을 실었습니다. 위 법 조항은 간단히 말해 이적표현물의 제작이나 소지, 반포 등에 적용되는 규정입니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1단독 김도요 판사가 2017. 8. 4. 위 법 조항이 적용되어 기소된 사건의 피고인들이 신청한위헌심판제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였고,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2017헌가27호로 심리 중에 있습니다. 결정문에는 UN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가 그동안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해 표명해 왔던 견해들, 양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제19조의 국내 규범적 효력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위 법 조항이 왜 죄형법정주의, 명확성의 원칙 및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어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자세히 논증하고 있습니다.

    둘째,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집단입국 사건에 관한 중간보고서”를 실었습니다. 2016. 4.경 지배인 허강일과 함께 들어 왔던 북한의 식당종업원 12명에 관한 내용으로서, 국가보안법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분단체제로 인해 발생하게 된 기본적 인권의 침해 여부가 문제되는 현재진행형의 중요한 현안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보고서에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이 글이 북한 식당종업원들의 집단입국에 대해 어떠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는지, 또 그러한 의문들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 줄 것으로 보이고, 한편으로 이 사안을 위해 민변 내에 특별히 구성된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대응TF’가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일들,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정보원, 경찰청, 통일부, 법원과 검찰의 소극적이거나 감추려고만 하는 행태들을 확인하는 것으로써 이 사안의 진실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록 편으로 2014년부터 2017년까지의 “국가보안법 일지”를 실었습니다. 통일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장연희 전 민변 사무차장께서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떠나시기 전까지 2014년과 2015년의 각 일지를 작성해놓으셨고, 조현삼 변호사께서 기꺼이 2016년과 2017년의 각 일지를 맡아서 작성해 주셨습니다. 국가보안법 일지를 읽어 보시면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했던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이 무색하게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오늘 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왕성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보고서에는 주로 민변 통일위원회나 미군문제연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변호사들께서 변호하신 사건들 중의 일부만이 실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획하고 집필자도 정하였지만 원고 완성이 늦어져 싣지 못한 사건도 있고, 꼭 싣고 싶었지만 자료 입수나 기타 여러 사정 등으로 싣지 못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군부독재 시대에 비열하고 잔인한 고문 등으로 만들어 냈던 여러 간첩조작 사건들이 이 보고서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간 동안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이 역시 자료 입수 등과 시간적 한계 등으로 이번 보고서에 담아내지를 못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다음 발간 기회에는 이러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가보안법 사건은 수사와 재판을 받는 당사자 본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를 변호하는 변호사에게도 많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무척이나 힘이 드는 사건입니다. 압수·수색영장 집행 단계부터 모든 것을 싹쓸어 담아 가려는 수사관들과 부딪히게 되고, 기소가 되면 며칠 밤을 새워야 다 읽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수사기록과 마주하게 됩니다. 공판이 시작되면 ‘이적행위의 목적’을 입증하겠다는 등으로 뜬구름 잡는 듯한 검사의 주장·증거신청과 다투어야 하고, 북한에 소재하고 있을 증거자료를 탈북자의 증언으로 메꾸려는 검사와 재판부의 의도에도 맞서야만 합니다. 증인신문, 검증, 감정 등 증거조사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변호인의 변호사 사무실에는 변호사 없는 날들이 한정없이 이어집니다. 국가보안법 사건은 우리들이 아니면 어느 변호사가 변호하려
할 것이고 변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소명의식이 없이는 맡아서 하기 어려운 사건인 것입니다. 때문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변호하시는 변호사님들은 격려받고 칭찬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민변 통일위원회 내 ‘국가보안법 연구모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 오시며 국가보안법 보고서 발간을 이끌어 오셨던 이광철 변호사께서 문재인정부의 요청을 받아 청와대로 떠나시고, 오랫동안 통일위원회 간사를 맡아 오시면서 빈틈없는 업무 처리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셨던 장연희 전사무차장마저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스카웃 되어 떠나시면서 두 분의 부재가 상당히 큰 공백으로 남겨졌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현재 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는 저의 부족한 역량과 게으름 등으로 이전과 같은 매년의 정기적인 국가보안법 보고서 발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4개년 치를 묶어 내기로 하면서 편집을 마치고 인쇄소에 넘기기 직전까지도 그 내용의 질과 양에 있어서 이전의 국가보안법 보고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와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번 발간하는 보고서가 이전의 보고서 수준에 미친다면 이는 이광철 변호사와 장연희 전 사무차장께서 각자 떠나시기 전까지 작업해 놓으셨던 것,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고 수면과 휴일을 희생하면서 원고를 집필해 주신 변호사님들의 노고 덕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전의 보고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통일위원장인 저의 여러 부족함 때문일 것이지요.

    이번 보고서의 원고를 집필하셨던 양승봉 통일위원회 부위원장님, 조현삼 변호사님, 권오훈 변호사님, 신윤경 변호사님, 남성욱 변호사님, 김정인 변호사님, 김종귀 변호사님, 사건 당사자로서 아픈 기억을 되돌아 보며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홍강철 선생, 이◯◯ 교수님, 백창욱 목사님, 유영호 선생, 서◯◯ 선생, 원고 집필에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챙겨주신법무법인 상록의 장태성 실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후배들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시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통일위원회의 심재환 변호사님, 권정호 변호사님, 이석범 변호사님, 천낙붕 변호사님, 이오영 변호사님께서 이 보고서의 발간에서도 역시 큰 힘들이 되어주셨습니다. 항상 통일위원회를 응원해 주시는 우리 모임의 정연순 회장님과 강문대 사무총장님, 온갖 세세하고 궂은 일들을 도맡아 하시면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 모임의 사무처 간사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번 국가보안법 보고서를 같이 읽어 보면서 하루빨리 이 땅에 온전한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가 누리어 지기를 함께 기원합시다.

    감사합니다.

 

* 위 글은  발간된 보고서에 실린 ‘안내의 글’입니다.

책자를 받아 보시고자 하는 회원께서는 사무처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4년~2017년 국가보안법 보고서> 목차

목차

수, 2018/03/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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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김창호(메인)

 

 

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

– 일본 제1호 외국인변호사 故김경득 변호사의 장남 김창호 변호사를 만나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이야기 하나 : 재일한국인 청년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GO”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 한 대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린다. 이름이 스기하라인지 이정호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은 지겹게 그를 쫓아다닌다. 어느 날 일본인 여자 친구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다던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어제와 같은 그대로의 나일뿐인데 말이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야기 둘 : 사기사와 메구무의 소설 “진짜 여름”의 주인공 청년은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경찰만 보일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한국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일본인 애인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두 개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름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나만의 향기는 그대로일진데,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한국인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김경득. 안타깝게도 김경득 변호사님은 10여년전 돌아가셨지만 그의 아들 김창호 변호사가 민변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김창호2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 소개 먼저 부탁 드릴께요.

김창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 김창호입니다. 아버지로 하면 3세인데, 어머니는 한국분이시니까 정확히는 2.5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 변호사 일을 몇 년 하다가 유학을 다녀왔고,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어떤지, 예를 들면 ‘공감’에서 4년 전 인턴으로 1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게 돼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기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 2월에 한국에 왔어요.

이혜정 : 민변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창호 : 민변 가입은 작년 4월인가 5월에 한 것 같아요. 민변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을 2006년에 했거든요. 2007년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를 받고, 변호사 활동은 2008년부터 했으니 10년 정도 됐는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서 황필규 변호사님, 정미화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초대해 주신 분이 바로 정미화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리고 정미화 변호사님 부인이 저희 어머니와 대학 동창이었어요. 그런 관계로 민변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민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은 몰라서 작년 2월에 왔을 때 황필규 변호사님이 국제연대위원회에 초대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변에 여러 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정 : 민변 어느 위원회를 가봤나요. 민변 활동이 궁금하네요.

김창호 : 주로 나갔던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에요. 저는 일본 변호사라 그래도 국제적인 일은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참여했어요. 국제통상위도 그렇고요. 그런데 민변이 좋은 것은 민변에 있으면 한국의 모든 이슈를 조금씩 다 알게 되잖아요(웃음). 교육위나 언론위는 한번 정도 참여했어요. 민변에서 진행하는 기획이 재밌는게 많아서 여행도 여러 번 갔다 왔어요. 여러 외국 변호사 모시고 진행하는 것도 재밌고, 한국의 공익변호사를 알게 된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나 ‘동천’ 같은 공익전담 변호사가 일본에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과 대화해 보면, ‘사실 나도 민변회원이다. 그래서 민변활동 같이 하고 있다’ 하시는 분들 되게 많지 않나요? 민변 변호사들이 옛날부터 자기 일을 하면서 공익활동 하시는 분과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민변 노동위가 오사카와, 미군위는 오키나와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혜정 : 숱하게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아버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인 김경득 변호사님은 1949년 일본 와카야마에서 태어나 일본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일본 이름을 썼고, 한국 핏줄이란 게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한글 공부를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했다면서, 어린 시절에는 일본으로부터 냉대받고 경멸받는 한국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당시를 ‘민족에서 도망쳤던 때’였다고 고백하시면서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자를 꿈꾸셨다가 좌절돼 사법시험에 도전하셨다고요.

김창호 : 맞아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일반 상장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학교 취업 상담실을 찾아갔더니 직원이 노트를 가져와서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관리 장부였어요. 대학생 때까지 일본 이름을 썼었는데…그런 차별을 경험하고 나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밝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 옆에 있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초에 대만 사람이 대만 국적으로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국적을 바꿔야 해서 그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지금도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인종 차별 관련한 변호 활동을 하고 계세요. 70살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그분의 기사를 보고 사법시험을 시작하셨어요.

이혜정 :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일본은 사법시험에 붙어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와세다 대학 청소를 하면서 어렵게 사법시험에 붙었는데, 사법연수원 입소가 거부되자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청원서를 수차례 보내고 아사히신문에 기고문도 보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낸 청원서를 소개할께요.

 

“저는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법연수생에 채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관·검찰관과는 달리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진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성격을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현 변호사법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한 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사법연수생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길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법연수생 채용선발 결격 사유 제1호는 적어도 변호사가 되려는 외국인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이 저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일본국에 귀화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는 65만 동포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해결(귀화)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일본의 민주화에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존엄이 최대한도로 존중받는 사회체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은 다양하며, 개개인은 이질적이므로 소수자의 권리존중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인의 민족적 특성, 소수자로의 권리가 반드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해를 거듭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처럼 가장하는 것은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주위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하여 낭비한 노력의 바보스러움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지,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차별에 대처할 재일한인의 살아갈 방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통일을 빨리 실현해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의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존재를 통하여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한국인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최고재판소로부터 국적변경을 강요받고 있는 시점에서 경솔하게 귀화신청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제가 변호사로서 설 자리 그 자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제가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 차별해소에 관련할 수 있고, 귀화를 한 제가 어떻게 재일동포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원망스러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동포 자녀에 대하여, “한국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라”고 말해 봐도 이 말이 귀화한 인간의 말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요.

일본 사회의 한국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의 귀화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것입니다. 저처럼 자기 민족에게 등을 돌려온 인간이라도 지금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일본국으로의 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사법연수생 임용청원서”, 재일변호사 김경득 추모집 중에서)

 

– 김경득 변호사는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맞서 긴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일본 내 한국 국적 변호사 1호가 되었다. 1976. 12. 14.자 아사히 신문에 ‘변호사로 인정해 달라’고 투고한 글을 보자.

나 김경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연수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귀화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안의 한국을 거부했다. 조선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내가 한국 핏줄임을 알까 두려웠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희망하던 언론계 취직이 99.9%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렸다. 한국인임을 써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김창호 : 당시 주위에서 아버지를 말리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어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리고 변호사까지 됐는데 부모님 생활을 도와 주는게 맞지 않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신 것이고, 아버지뿐 아니라 대학 교수, 변호사 후배들이 외국국적자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성명도 내주었어요. 언론에서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1976년 합격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견서를 계속 내셨는데 다음 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 방침을 바뀌게 하셨던 거죠.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버님이 그렇게 힘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창호 변호사님처럼 그 길을 따르는 분들도 많이 계셨겠네요.

김창호 : 지금은 재일교포 변호사가 120명 정도 있어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가 그것이고요. 70-90년대만 해도 외국 국적자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따로 면접이 있어서 최고재판소 담당자와 따로 이야기해서 뭔가 하사하는 식이 되어서… 면접을 하긴 하지만 못 들어 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후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 할 수 있어요. 2000년도부터 일본도 로스쿨을 시작하면서 국적조항 자체를 삭제했어요. 지금은 주로 외국 국적 갖고 일본변호사 되신 분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변호사가 됐다는 분 몇몇 계시고요.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갖고 변호사 되신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좋은 쪽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어머님을 한국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김창호 변호사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창호 : 저는 와카야마에서 태어났어요. 제 여동생이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에서 태어나셨고, 저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한 의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고도 했는데.. 어머니쪽 부모님이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셨대요. 인터뷰 내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웃음)..,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해서 연애결혼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이 장남이고, 형제가 2남 2녀라고 들었는데, 모두 법조인인가요.

김창호 : 여동생 한명은 변호사 자격은 있는데 등록은 안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구요. 여동생 한명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아버지 추모집 낼 때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병으로 일찍 사망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법대, 로스쿨까지 갔는데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남동생은 그냥 일반 회사원으로 있습니다.

이혜정 : 몰랐어요..가족분들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3명이나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어요.

김창호 : 저희들이 문과 쪽이라서..어머니도 법대 출신이에요. 사실 이공계 갈 수 있는 머리가 있으면 아마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 시대와 달리 취직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 안에서 일본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문과로서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 중 변호사가 하나의 좋은 직업인 것 같아 사법시험을 봤어요. 대학교 때는 학자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에 합격해서 제가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혜정 :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불을 꺼도 또 키고 공부하고, 쟤가 저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요. 한국도 사법시험이 어렵지만 일본도 무지 어렵지 않나요.

김창호 : 저는 되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정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당시에는 매우 젊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취직 활동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국도 그렇지만 옛날 사시라고 하는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도 합격률이 2% 정도니까 운이 안 좋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만 써야 하고, 어머님이 일본말 쓰면 엄청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김창호 변호사님이 6살 때까지 일본어를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볼 책을 직접 빌려 오셨다고 하던데, 가정에서 아버님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창호 : 아버지는 한국어를 많이 강요하셨어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일본어도 필요한데, 당시에 유치원이나 학교 다닐 때 집이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서 조선학교가 주변에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 학교나 일본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계속 집에서 한국어를 쓰라고 하셔서 어릴 때는 그게 좀 싫기도 했어요. 집에서 아버지가 이야기 할 때는 한국어로 하는데, 저희가 대답할 때는 거의 일본어로 했어요. 그리고 빌려오신 책은 다 일본 책이었어요(웃음). 아마 한국어 책이 주변에 별로 없었고, 읽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앞선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듯이 재일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여름’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는 재일교포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직 한국의 풍습이나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깝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을 찾았고, 짧은 한국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그녀만의 소설가적 감성으로 표현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 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

김창호 변호사에게 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고민과 어떤 정체성을 느끼고 살아왔을까.

 

김창호 : 저의 아버지 경우에는 재일교포 2세로 전형적으로 일본 이름을 쓰다가 정체성을 의식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한국식 이름을 써왔고 어머니도 한국인이에요. 보통 재일교포 3세 정도가 되면 일본식 이름을 쓰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런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때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김’씨라는 성을 부를 때 아직도 약간 긴장하는 것은 있어요.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도 ‘김상’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요. 일본에 많이 없는 성이라서 꼭 차별적인 시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라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데, 일본 사회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노력과 능력이 있어도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많이 노력했어요. ‘창호’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발음하기 어려워요. 차무호. 김치양호. 이런 발음이 되니까.. 이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일본에서 ‘기미가요’를 불러야 해요. ‘기미가요’라는 노래 자체가 일본군의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라서 절대로 부르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기립해서 노래 부를 때 저만 혼자 앉아있었어요. 그 때 제가 일본의 소수파라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졸업장에도 일본에서 천황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쓰는데, ‘쇼와’나 지금은 ‘평성’을 쓰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교육위원장이랑 협상을 해서 제 졸업장만 매직으로 찍찍 그어서 양력으로 표기했어요. 그 당시 저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별로 안 좋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었어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일하시느라 무지 바쁘셨을텐데.. 교장이랑 협상도 다니셨네요.

김창호 : 바쁘셔서 운동회나 졸업식에도 거의 못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졸업장은 다 바꾸셨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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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정말 의미 있는 소송을 많이 하셨잖아요. 국민연금 청구소송,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 지문날인 거부소송, 일본 군속 장애연금지급 청구소송, 공무원관리직 수험자격 소송 등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재일한국인 인권옹호활동에 앞장섰잖아요. 일본은 외국인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나 봐요.

김창호 : 맞아요. 일본은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사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게 그 동안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장기간 있게 돼서 만들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지문찍기가 너무 싫어서 사진도 찍어 놓았어요. 일본에서 지문 날인은 재일교포가 싸웠던 하나의 이유로, 90년대 이후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이상호씨 재판에서 졌는데, 이후 없어졌어요. 재일교포들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니 재일교포들만 제외하고 다른 외국인들은 지문날인을 시행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 영주권인데, 어머니가 일본 들어올 때는 한번씩 지문날인을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재일교포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여러 소송을 하시긴 했어요.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이끌긴 했지만 소송 결과로 보면 많이 졌던 것 같아요. 지문날인 하나만 잘 된 것 같고, 국민연금은 졌어요. 1970년 말에 외국인도 연금에 가입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연금을 받으려면 25년 정도가 필요했어요.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면 45살 넘은 분들은 자동적으로 못 받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됐어요. 헌법 위반으로 제소했는데, 최고재판소에서 그것은 국가의 재량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위안부 소송도 하셨고, 옛날 재일교포 일본군의 군인이었던 분의 재판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졌어요. 주위에서 계속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계속 지는 소송만 하셨어요.

이혜정 : 한국에 1년 정도 머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창호 : 여러 가지 있어요. 작년에 계속 있었는데, 2016년 말부터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저는 2017년 2월에 와서 거의 막바지였어요. 탄핵 직전까지 매우 재밌었어요. 역사의 순간에 한국에 있었던거에요. 탄핵의 순간도 TV로 볼 수 있었고요. 시민단체 운동의 힘, 변화의 시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처음 대선투표는 4-5년전 미국 유학가 있을 때, 현지에서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판결이 났고, 이번에는 한국에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찍은 후보가 그 당시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 똑같이 찍어서 결국 당선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공익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들 만난 것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하나 고르기가 어려워요.

이혜정 : 곧 일본에 돌아가신다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김창호 : 이번 2월에 활동을 마치면 1년 정도 대만에서 NGO활동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도 그랬지만 한중일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에요. 인권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은 어느 정도 아는 분이 계시고 중국은 다른 관계를 갖거나 중국어를 배워보고 싶어요. 그게 끝나면 ‘공감’과 같은 공익법인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아는 변호사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익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공익로펌 모델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면, 아버지는 국내소송을 주로 해왔고, 많이 졌어요. 저는 국내소송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휴먼라이트와 함께 하는 것도 그렇고, 인권 NGO로서 민변 국제연대위도 그렇지만 제네바와 같은 곳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거죠. 제가 그런 활동을 유학기간 합쳐서 3-4년 정도 계속 해왔고, 민변에서 UPR을 진행하고 있듯이 일본도 UPR이 있어서 운동해왔어요. 국제적인 일을 하나의 업무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문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같은 차별이나 혐오 관련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제도 마쓰이 의원이 한국·조선 국적, 일본 귀화자 등 의원 이름 열거하면서 “몇 번이고 죽일 가치 있다”고 독설한바 있어요. 요즘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혐한’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일본 사회 내에서 혐한 분위기가 지난 몇 년 간 계속 강해지고 있어요. 언론을 통해 보수 세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유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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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민변 변호사들과 계속 교류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민변 상근변호사나 간사님들과 공익 분야에 대한 교류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재일교포 분야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이 해외에서 일으키는 인권 또는 노동문제도 다루고 싶어요. 예를 들면 유니클로라는 기업이 인기가 많은데, 중국이나 미얀마 공장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일보다는 국제 쪽 문제를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특히 인권활동하시는 분들이 국제적인 활동에 좀 약하고 시간 배분이 어려워요.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만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필요한 비판을 받게 돼요. 특히 역사문제로 가게 되면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일본사람과 같이 해야 사회적으로 진동하는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간단치 않아요. 오늘 민변에서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수, 2018/01/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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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건위] 건강하고 안전한 세상,
강물이 흐르고 핵발전소가 멈추는 그날을 꿈꿉니다

지난 정부의 각종 규제완화는 자본의 효율성만을 중시한 탐욕스런 영리활동을 용이하게 하고 국민의 건강과 자연환경을 위험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환경보건위의 활동은 이러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자연환경 침해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을 흐르게 하라 – 낙동강 수문개방 및 손해배상소송maxresdefaultⓒ안동MBC

녹조라떼로 불리우는 4대강 수질악화의 문제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문제제기가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낙동강 원수에 포함된 마이크로시스틴이 농수산물에서 검출되는 등 남조류의 독성물질로 인한 건강피해가 우려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고도정수처리시설을 통해 마이크로시스틴을 차단할 수 있다고 하고 있으나. 100% 차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나아가 마이크로시스틴과 남조류를 제거하고 소독을 위해 투여되는 염소 등이 취수원수 속 유기물질과 반응하여 총트리할로메탄이라는 발암물질을 생성한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낙동강에 건설된 보로 인하여 담수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지하수 수위 상승으로 주변 농작물이 습해 피해를 입고 있으며, 보로 단절된 어류 생태계와 수질오염으로 어족자원의 고갈이 발생되어 어민들의 피해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위원회는 현재 낙동강 수질악화의 원인은 보를 제거하기 전 단계로서 정체수역을 발생시켜 하천을 흐르지 모샇게 하는 보의 수문을 개방하라는 것과 수돗물을 공급받는 시민, 농업과 어업의 피해를 받은 농어민들을 대리하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소송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메르스! 끝나지 않은 피해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던 메르스 사태가 종결되었지만, 여전히 메르스 사건은 계속중에 있습니다.

환경보건위원회는 메르스 80번 환자 사건을 대리하여 국가,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메르스에 감연된 80번 환자는 혈액암치료가 진행되어 증상이 매우 호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르스 감염으로 인하여 적기에 혈액암치료를 받지 못하였고, 서울대병원으로 전원된 상태에서는 가족들과 면회도 제한되었으며, 전염력이 없다는 확인이 되었음에도 격리병동에서 격리되었기에 혈액암에 대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국가는 80번 환자가 사망한 후 바로 화장하여 유족들은 80번 환자가 격리된 이후 사망에 이를때까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위급 상황에서 국가의 책무는 국민에 대한 기본권을 최대한 보호해야하는 것이며, 특히 생명과 건강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였어야 하나, 무책임한 격리조치의 연장으로 인해 80번 환자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을 소송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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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산업사회는 각종 화학물질을 이용한 상품의 제조행위가 필연적입니다. 문제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화학물질이 관리체계의 부실로 인하여 국민들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침묵의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살균제 달걀, 유독성 생리대

기업은 생산비용 절감을 통해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려 하고, 그 동안 정부는 기업의 생산비용 절감과 생산활동의 용이성을 위해 규제완화를 줄기차게 추진하여 왔습니다. 그 결과는 국민들이 먹고 마시며, 직접 피부에 닿는 상품들로 인한 국민의 건강침해였습니다.

환경보건위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민사소송과 형사고소를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가 가능하게 하였던 법제도의 개선을 위한 입법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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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2017년 봄을 기억하시나요? 유난히 뿌연 그 하늘과 답답한공기!

환경보건위원회는 미세먼지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미세먼지 대응 TF를 가동하고 있습니다. 미세먼지 원인에 대한 스터디, 현행 법제도에 대한 분석, 미세먼지 주범으로 불리우는 화력발전소가 미세먼지 이외에도 주변 토양과 대기오염을 야기하여 인근 주민의 건강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에 대해 소송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푸른 하늘을 위한 Blue SKY 소송! 함께 하지 않으실래요? ^^

탈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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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Ulchin NPP from.wikipedia

 

기저발전을 담당하고 있는 핵발전소는 운영 과정에서 방사선 노출 위험이 상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후 핵연료의 영구처리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더구나, 발전을 통해 확보한 전력의 송전을 위한 송전탑 문제는 밀양 사태에서 확인하였듯이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앙집중적 에너지 발전시스템의 문제는 이제 우리에게 대대적인 에너지생산소비체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위원회는 갑상선암 소송과 울진1호기 수명연장취소소송, 신고리5,6호기 중단을 위한 법률 대응 등 우리 사회의 에너지시스템 변화를 위한 법률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금, 2017/09/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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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백지화와 탈핵시대를 여는 울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 참가

지난 9월 24일 울산에서는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 주최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와 탈핵시대를 여는 울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시민사회, 노동단체, 정당, 마을모임 등 210개 참가단체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행사였습니다. 민변 울산지부는 [신고리 5,6호기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가 출범한 지난 7월 19일부터 참가단체로 함께 하면서 지부장 김병수 변호사가 공동대표를, 사무국장 장석대 변호사가 집행위원을 맡아 활동하였고, 당일 토론에는 정기호, 장석대, 신지현변호사등이 가족과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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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인 토론]은 당시 진행되던 정부의 공론화절차 관련 “신고리 5,6호기를 둘러싼 핵심쟁점에 대한 입장을 토의하고,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위한 울산시민들의 결의의 장”이라는 취지로 개최되었으며, 성인 870여명, 청년 30여명, 청소년 30여명,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어린이 100여명등이 참여하여 각 조당 10명 내외로 총 100개 조가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토론회에 앞서 울산지역 곳곳에서 각계가 참여하는 탈핵릴레이토론이 115회 개최되었고, [1000인 토론]은 각 릴레이토론의 성과를 종합하여 탈핵결의를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40분간 진행된 선택토론에서는 “핵발전소 주변 서생면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이주, 건강, 생존권, 보상문제 등)에 대해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주제로, 이후 40분간 이어진 공통 토론에서는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날까지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이 무엇인지”등에 대한 토론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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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 신고리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로 결론을 내려 아쉽기는 하지만, 울산지역에서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가하는 형태로 ‘핵발전소의 문제점과 탈핵의 당위성에 대해 토론하고, 이후 실질적인 탈핵활동’까지 이어지는 등 나름대로 탈핵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월, 2017/11/0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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