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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진실을 감추는 조국보도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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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진실을 감추는 조국보도의 허상

admin | 화, 2019/10/15- 21:04

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하였고, 9월 9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이 한 달 동안 한국 언론은 조국 법무부장관후보에 대한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검증보도를 하면서 이번 사건의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검찰도 국회인사 청문회가 끝나던 그 시각에 조국 신임장관의 부인을 기소함으로써 또 다른 핵심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정치권과 언론, 검찰이 플레이어가 되어서 만든 조국 이벤트는 광화문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주최 측 추산 2백만 혹은 3백만의 시민을 끌어내는 마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을 광장으로 호출한 블록버스터급 흥행성공에도 이벤트의 주역인 언론과 검찰이 마냥 웃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검찰은 연일 검찰의 잘못된 수사관행, 수사와 기소독점, 불공정한 검찰권 집행 등의 이슈로 궁지에 몰리고 있고, 언론 역시 부실한 사실검증과 편향된 보도, 의혹 부풀리기 등의 잘못된 보도관행으로 시민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조국장관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언론 검증 보도량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네이버에서 후보자 신분이던 한 달 동안 관련기사를 검색한 결과 적게는 13만 건, 많게는 80만 건이 검색되었다고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장관임명 직후인 9월 10~24일의 15일 동안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된 단독기사는 7개 종합일간지 99건, 7개 주요방송국 67건으로 총 166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단독보도 중 검찰 및 법조계를 출처로 하는 보도가 81건에 달하고 있다.

전례가 없는 이렇게 많은 기사와 단독보도들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조국장관을 둘러싼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정치권과 언론, 검찰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구체회되고 있다. 시민들은 지난 10년간 진행된 서울대 입시의 실태도 알게 됐고, SCI논문의 저자 적격성 기준도 알게 됐다. 동양대에서 조국장관의 딸이 어떤 봉사를 했고, 장관의 부인이 해명 과정에서 손을 떨었다는 사실도 안다. 심지어 장관 딸의 중2 때 일기장의 압수수색 과정과 압수수색에서 검찰이 먹은 식사메뉴까지 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의미와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추측한다. 이건 시민들뿐만 아니라 정작 보도를 하는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사는 ‘추측 된다’ ‘알려졌다’ ‘의혹이 있다’로 도배되어 있다.

언론 보도는 경우에 따라 ‘사실(fact)’이 ‘진실(truth)’을 감추는 경우가 생긴다. 격투기선수 출신인 K씨와 평범한 일반인 L씨의 싸움을 상상해보자. K씨와 L씨는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주먹다짐으로 벌였다. 당연히 격투기 선수 출신인 K씨가 L씨를 늘씬하게 두들겼는데, 이 과정에서 L씨도 저항하면서 K씨를 몇 대 때렸다. 다음날 기사에 L씨가 격투기 선수출신 K씨를 폭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면 어떨까? L씨가 K씨를 때린 건 팩트다. 그렇지만 사건의 실체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실보도가 아니며, 이런 뉴스가 바로 가짜뉴스다.

바람직한 보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있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성, 완전성, 균형성, 투명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진실보도는 사실에 기초해야 하며, 사건을 분절화 파편화해서 퍼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최대한 모두 그려야 한다. 또한 진실보도는 이해당사자 모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담아야 하고, 취재원이나 정보 소스에 대해서 가능한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기자들은 조국장관에 대한 보도가 과연 이런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 하고, 독자들 역시 이런 기준을 갖고서 보도를 접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조국장관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보도에 남발되고 있는 ‘의혹이 있다’, ‘전해졌다’, ‘짐작된다’, ‘예상된다’, ‘추정된다’ 등의 추상적 서술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보도가 가진 사실성은 끊임없는 사실확인, 팩트검증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다. 80만 건에 이르는 보도가 얼마나 사실확인, 팩트검증을 거쳐 작성되었는지 알 도리는 없으나, 보도된 내용 자체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보도가 얼마나 보도의 완전성을 추구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조국장관 일가에 대한 수십만 건에 가까운 보도들을 통해 조국장관 부인의 손에 떨렸는지, 압수수색이 몇 시간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검찰이 짜장면을 먹었는지 한식을 먹었는지를 아는 것이 사건의 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고, 이런 것이 단독이나 특종이라고 올리는 언론사들이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파편화되고, 분절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들이 혹시 본 사건의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마치 백대 때린 가해자를 폭행당한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부리려는 의도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현재 조국장관 관련 보도에서 불편한 점은 균형성에도 있다. 우리는 검찰이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검찰의 행위를 공적인 행위 내지 중립적인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검찰이 기소를 하면 당연히 죄가 있으니까 국가가 나섰겠지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검찰은 소송의 당사자이다. 검찰이 사건 심판의 주체라면 굳이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검찰이 다 판결을 내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언론 보도는 당연히 검찰의 주장과 동등하게 피의자에게 반론권을 제공하는 것이 정당하다. 사실 이런 검찰의존의 관행을 깨고 법원내지 공판 중심의 보도관행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계 내에서도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검찰의존적인 취재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몰고온 논두렁 시계보도의 참극을 겪고도 여전히 언론은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도는 최대한 투명해야 한다. 보도의 내용은 언제나 검증을 통한 사실확인의 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검증과 재확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취재원이 투명해야 한다. ‘관계자에 의하면’이 남발되는 기사는 좋은 기사가 아니다. 최소한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고, 취재과정에서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검증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룰을 가진 세상을 살고 있다. 아무리 확실하고 논리적인 지식 내지 정보라도 타인의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지식이나 정보로서 인정되어서 안 된다.

기자가 진실보도를 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무한한 팩트 검증도 불가능하고, 사건 전체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보도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계적 중립은 가능할지 모르나 균형의 추는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취재원을 밝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취재원이 공개에 동의를 해야 하고, 취재원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자에게 진실보도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같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국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80만 건의 보도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80만 건의 보도가 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더 나아가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보루로서 언론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많은 시민들이 왜 기성언론을 불신하고 언론개혁을 이야기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휘두른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게 되었듯이, 이제 검찰을 개혁하고 나면 그 다음 우리사회의 특권과 반칙을 뿌리 뽑기 위해 개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언론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정완규

정책연구소 이음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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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10월 25일 – 11월 초에 ‘한반도평화국제회의’를 겸하여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인사들이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조야에 대북제제의 완화와 미북 간 정산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들 대표단과 함께 했던 워싱턴의 저명한 팀 서록 기자는 대표단의 활동 과정에 대해 미국의 유력한 정치 전문지인 Foreign Policy와 Nation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칼럼 기사를 제공하였다.


다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사안을 놓고 트럼프 미 대통령과 진행하고 있는 양자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데 진저리가 난 것은 북한 국민뿐만이 아니다. 한국 국민들도 더딘 협상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1월 5일, 대한민국 국회의원 71인은 남∙북∙미∙중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을 발기한 국회의원들은 비무장지대(DMZ)를 가운데 두고 있는 남∙북 국민들에게 필요한 비핵화 회담을 촉구하는 과정이며 “한반도 평화를 불러오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라고 전했다.

그러한 결의는 의미 있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한 주 전인 10월 31일, 김정은은 단거리 미사일 ‘시험 사격’을 진행하면서 워싱턴을 긴장시켰다. 김정은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위한 정권의 핵무기 언쟁을 다루는 새 제안을 연말 기한까지 맞추라’ 며 트럼프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고 한국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관행적으로 미 주요 언론들은 미사일 시험 사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반면에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시작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협상은 점차 경멸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북한이 트럼프와 어려운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북한은 여전히 재무장하고 있었다는 예의 소식은 외교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

워싱턴 포스트지 강경파 필진인 조쉬 로긴(Josh Rogin)은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을 두 차례 더 발사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고 시험 사격에 대한 트위터를 남겼다. 그러나 한국은 확실히 염려하는 입장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의 위협 속에서 70년 간 지내왔고 진정한 평화를 간절하게 원한다.

미사일 시험 사격 한 주 전인 10월 말, 한국의 진보 단체는 남∙북 화해 진전 계획을 이어 나가기 위해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의 정책이 변화함으로써 교착 상태가 타개되도록 촉구했다.

미-북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문재인 대통령이 제재를 유지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묵인하는 것에 참지 못한 대표단 22인은 한국 교회, 노동 조합, 학계, 농업을 대표하여 대서양 연안에서 닷 새 동안 미국이 하락해주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 협상 과정은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적 현안

신필영 6∙15 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대표위원장은 “미국과 북한의 답보 상태가 2020년까지 악화되면 한반도에 극단적인 군사 행동이나 심지어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10월 26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회담 개회사를 통해 전했다 (필자는 독립 기자로 회담에 초청받았다).

언론과 케이블 뉴스에 한국 관련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미국의 대북 회의론자들과는 달리, 한국 내 진보주의자들은 미국 정책 그 자체가 한국 평화 협정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평화 대표단장이자 중심 인물인 이창복씨는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PRK,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 정책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 왔습니다” 라고 북한을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칭하면서 유엔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주장했다. ‘적대 정책’ 이라는 단어 또한 북한이 미국에게 주장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이어서 “미국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의 정신으로 돌아와서 교착된 현 상황과 북한을 억압하는 규정들을 완화해야 합니다.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우리는 결과적으로 안정된 평화 정권을 보장하고 비핵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2018년 6월 12일, 그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미국 간의 오래된 적대 관계 종결을 약속했다”고 선언한 사실을 언급하며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 깊게 침식된 전쟁 메커니즘을 뿌리 뽑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와 함께 한 한국대표단은 지난 10월 5일 스웨덴에서 열린 미국 협상 대표단과의 마지막 실무 회담에서 북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것은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제재를 강행한 트럼프의 강경책이었다고 주장했다. 열흘 후, 김정은은 눈 내린 백두산에서 언론에 백마를 탄 모습으로 나타났다.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북한의 민족주의, 권력과 불패를 상징한다. 한겨레는 ‘김정은은 북한 국민에게 인내심과 주체성이 담긴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표제를 통해 진보 성향의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전문가 대부분은 소셜 미디어에서 크게 놀림감이 되었던 김정은의 모습을 두고 미국이 올해 초에 정한 기한을 지키지 않으면 아마 ‘더 규모가 크고 더 질이 안 좋은’ 미사일 훈련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이어 데일리 비스트(The Daily Beast)지의 도날드 커크(Donald Kirk)는 김정은의 백두산 등반에 대해 “미국과 한국을 겨냥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끝내 자신의 요구 조건에 굴복하도록 극적 추진력을 얻고자 벌인 협박 작전에서 영웅처럼 보이려는 계획” 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한국 대표단은 김정은의 모습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10월 마지막 주, 유엔 외교관과 미 국회의원, 평화 단체와 만난 자리에서, 대표단은 트럼프가 ‘최대 압박’ 정책으로 김 위원장에게 즉시 비핵화를 시행하도록 강요하며 제재 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북한이 최근 미사일 시험 사격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참관인에 따르면 올해 미사일 24회 발사).

더 나가서, 대표단은 지속적인 제재로 인해 남과 북이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이 합의했던 경제 프로젝트를 진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중요한 경제 프로젝트 중 하나인 금강산 관광 재개 안건은 10월 말 김 위원장이 격렬하게 비난한 주제가 되었다. 한국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하자 북한은 한국의 역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대표단은 교착 상태의 원인인 미국의 제재를 비난했다. 신 원장은 “동맹국인 미국에게 간청합니다. 미국이 금강산 프로젝트를 가로막는 규제를 계속 가하고 있습니다” 라고 워싱턴 내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원(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연구자 단체에게 말했다. “이 난관을 함께 극복하고 싶습니다.” 신 위원장은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북한 핵무기에 관한 한미 협정 전망이 밝지 않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미국의 비정한 제재는 절실하게 필요한 인도적인 원조도 진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대표단은 에드워드 마키(Edward Markey) 메사추세츠 상원의원과의 회의에서 의약품이나 정수기와 같은 제재 면제 항목에 대한 가능성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10월 30일,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단체에서 이끄는 코리아 피스 나우(Korea Peace Now!) 캠페인에서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 제제가 미치는 심각한 영향이 강조되어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객관적인 통계치와 함께 월스트리트 저널과 일간지 등의 매체에서 널리 다루어졌다.

보고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나타난 것이 증거로 드러납니다”라고 밝혔다. “제재로 인한 관련 지원의 지연과 유엔의 특정 인도주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치는 자금 부족의 결과로 2018년에 사망자가 3,968명 넘게 (5세 이하 어린이 3193명, 임산부 72명 포함) 있었을지 모른다고 꽤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6∙15 위원회는 금강산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0년에 첫 남북 정상회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2009년 폐쇄). 위원회는 2016년과 2017대규모 촛불 집회를 조직한 많은 단체 중 주요 일원이었고, 해당 촛불 집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 대통령이 당선된 2017년 5월 선거를 이끌어 냈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들은 문 대통령 지지층의 근간이 되어 왔다. 필자가 2017년 광주에서 목격했을 때, 당시 문재인 후보는 정치 및 경제 업무에서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맹세하며 대선 운동을 했다. 햇볕정책은 1990년대 후반 시작되었는데, 2000년 북한에 첫 발걸음을 한 김대중과 노무현 전임 대통령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문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대다수는 그의 평화 계획에 찬성의 의견을 보였다. 최근 몇 달 동안 지지율이 하락했지만, 여론조사 대부분에 따르면 한국 국민 60%가 문 대통령의 대북 원조를 찬성한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한 대북 입장은 한국과 심지어 문 정부까지 큰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왔다. 미국이 관장하는 한국 내 유엔군사령부(UNC, United Nations Command)가 한국 관리들이 북한 철도 시스템 조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고 한국인들이 북한측과 논의하려고 국경을 넘을 때 엄격한 통제를 지속해오는 것을 보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소한 규제도 있었다. 6∙15 위원회 대표단에 따르면 지난 2월 금강산에서 소환된 한 단체는 노트북과 카메라 소지를 금지당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유엔군사령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는 옹호하면서도 사령부 정책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출했다. 10월 21일, 국회 청문회에서 문 정부 측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유엔군사령부(UNC)가 ‘부적절한 법적 근거’를 들어 DMZ 통과를 거부하고 있다며‘ 제도적인 해결책’을 수립하여 사람들이 민간 목적으로 비무장지대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례 없는 질책을 받은 유엔군사령부는 언론 발표를 통해 보도가 ‘부정확’하다고 대응했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 후일본이 무역 논쟁으로 대응한 것을 두고 문 정부가 반응하자 미국은 문 정부를 비난했고, 한국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미국 반응에 충격을받았다. 6∙15 위원회가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데이비드 스틸웰(David Stilwell)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서울에서 문정부에게 일본 수출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파기한 정보공유협정(GSOMIA)복귀를 요청했다.

주로 미국과 일본 무기 수출업자로부터 후원을 받는 군사 싱크탱크인 전략국제연구센터(CSIS)에서 주관한 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의 입장차이는 매우 극명했다. 전략국제연구센터 선임고문이자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정부에서 한국관련 사안을 다뤘던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한국 당국은 자신에게 가장 해가 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문 정부가 일본과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분쟁에서 전략적으로 승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공식적 적개심이 깊어지자, 며칠 전 문 정부의 이수혁 신임 주미대사는 기자들에게 한국의 대북 정책이 미국측으로부터 ‘친평양’이라는 비난을 초래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한국 좌파에게 대북 정책에 대해 칭찬을 받고 있던 트럼프는 한국이 주한 미군에 대한 재정지원을 5배로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비난을 자초했다.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전 미 국방부 장관의 비서관이 집필한 최신 저서에서는 트럼프가 한국이 미국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나라(a major abuser)’이고 한미 동맹관계는 ‘손해 보는 거래(losing deal)’로 이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트럼프는 주한 미군 주둔을 위해 한국이 연간 60억 달러(약 7조원)을 지불한다면 괜찮은 거래” 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한국측은 이러한 진술을 접한 후 이의를 제기했다. 10월 18일, 진보성향 대학생 단체가 사다리를 타고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주한 미국 대사 관저에 침입하여 미군 지원금 500% 인상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대학생 단체는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는 배너를 들고 있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주한 미군 문제에 관해서는 대세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한국인 대부분이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주한 미군의 향후 거취를 모호하게 생각하고, 주한 미군을 위한 지원금 인상을 요구하는 미국과는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한국 여론 조사 기업인 리얼미터(Realmeter)는 60% 한국인이 주한 미군 기지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요구를 반대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한국인 52%는 ‘심지어 미국이 병력을 감축하거나 한반도에서 군사를 철수하더라도’ 트럼프의 요구에 반대한다고 보고되었다.”

트럼프의 최근 발언 역시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코리아 타임즈 오영진 편집자는 “필자는 미국 국민들이 트럼프식 교란(Trumpian diversion)을 극복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논평으로 ‘왜 트럼프는 한국인들을 증오하는가’를 제목으로 일간지에 실었다.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회의에서 미 국방부 임원은 한국군은 중동 같은 지역에서는 미군의 지원 병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비침으로써 트럼프 정부 또한 비난을 받았다. 국방부 대변인은 “전시작전통제권(Opcon) 반환 후에 미국이 위기라고 판단하는 해외 분쟁 지역에 한국군을 보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라고 발표했다.

워싱턴 모임에서 6∙15 위원회 위원들은 제재에 대한 한미 간의 의견 차이를 볼 때, 1954년 공식화된 한미동맹의 의미에 대한 재정립의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주장했다.

평화단 대표인 이창복 씨는 “종속적인 구조가 아니라 더 동등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동맹이 변화할 때까지 남북 간 대화는 제한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한국과 위계적 동맹을 유지하는 이상, (미국 정부와) 북한의 관계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계속해서 해결책은 “한국이 한미 동맹에서 주권을 가지면서 한반도에서 한국의 이해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탄핵 조사로 곤경에 처해 있고, 외교 문제에서 전혀 예측이 가능하지 않는 트럼프에게는 무리한 요구이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은 여전히 종래의 입장을 보였다. 민주당 핵심 의원(낸시 펠로시(Nancy Pelosi) 하원 의장을 포함한)들은 ‘폭군’ (조 바이든(Joe Biden)의 표현 )김정은과 문 대통령의 협상안을 폄하했고 전략국제연구센터(CSIS)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보상 관련 논쟁에서 공공연하게 일본 편을 들어주었다.

내년 미국 대선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트럼프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 정책을 시도하고 여느 때처럼 정책에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김정은과 맞서 비핵화를 성공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예측하지만, 합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급할 것 없다”고도 말했다.

북한 수뇌부도 합의에 대해 같은 의견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위 관료들이 미국의 입장을 맹렬하게 비판한 후에도 김 위원장은 트럼프가 합의를 성사시킬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트럼프와 김위원장은 여전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김계관 고문은 “워싱턴 정계와 미 행정부 내 북한 관련 정책입안자들은 냉전 사고와 이념 편견에 사로잡혀 북한에 이유 없이 적대적이다” 라고 조선 중앙 통신(KCNA, 북한 통신사)에 논평을 기고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미국이 얼마나 현명하게 연말을 보낼지 지켜보고자 한다.”

이후 10월 31일 CNN은 트럼프가 스티븐 비건(Stephen Biegun) 대북특별대사를 국무부 2인자 자리인 부장관으로 임명했고, 이를 통해 ‘북한 포트폴리오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비건은 놀랍게도 북한에 초점을 둔 인도주의 단체와 평화 단체를 도우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예를 들어 지난주, 그는 여성평화걷기 단체의 창립자인 크리스틴 안(Christine Ahn)과 코리아 피스 나우 캠페인 회원들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제네바(Geneva)에서 마주 친 안 대표는 비건과 만난 적이 있고, “그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화요일, 한미 평화 협정 간청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호로서, 알렉스 웡(Alex Wong) 미 국무부 북한 담당 부차관보가 한반도의 전쟁 상태는 “영속돼선 안 되고 영속될 수 없다”고 워싱턴에서 전했다.

한편, 문 정부는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에 다시 참석하길 바란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지난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0월 31일 있었던 북한 미사일 시험 발사를 염려하는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을 향한 위험을 경시했다. 그는 국회에서 “북한이 현재 개발하고 있는 미사일 능력은 한국 안보에 아주 위중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국방비 예산 규모가 북한보다 월등히 많고 한국도 단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다수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랄하게 비난을 받았다). 11월 4일, 서훈 국정원장은 국회의원들에게 미국과 북한 협상가들이 ‘늦어도 12월 초까지는’ 또 다른 양자회담을 열 것으로 예상된다며 낙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한국군과 미국군은 협상 전에 유연성을 보여주는 뜻으로 예정된 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를 중단하기로 동의했다. 2017년 비질런트 에이스에서는 F-22, F-35를 포함한 한미 항공기 270여 대가 투입되어 북한을 향한 한미 합동 능력을 보여주었다 .대신에 그들은 2018년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러한 결정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지속적인 외교를 유지’하려는 양국의 노력이라고 한국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이러한 군사 훈련 중지는 한국 전쟁 종전을 위한 평화 조약일 뿐 아니라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표단의 주된 요구이기도 했다. 제재와 관련하여 미연방 의회와 회의를 마친 후 대표단 중 한 위원은 ‘한 번에 하나씩’ 차분히 해결해 나가자고 말했다.

 

팀 셔록(Tim Shorrock)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기자이자 한국 관련 안건 전문가로 «고용된 첩자들: 기밀 아웃소싱의 비밀스러운 세계 (Spies for Hire: The Secret World of Intelligence Oursourcing)»의 저자이다.

화, 2019/11/2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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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11월 23일에 있었던 홍콩지방의회 선거는 반중파(민주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방 언론은 마치 민주주의의 승리인양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홍콩인들은 이미 어느 국가의 누구보다도 자유와 자치분권을 누리고 있었다. 과연 이번 선거 결과가 홍콩의 잃어버린 영화를 다시 가져다 줄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일국양제 하에 있는 홍콩이 임의로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본토의 지원과 협력이 없는 홍콩의 미래가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잔꾀가 많은 영국정치와 막가파식 미국의 패권에 희생당할 소지가 높아 보인다. 현재 독일의 자유도시에서 법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국 젊은이의 색다른 견해를 아래에 소개한다.


소위 아시아 시위대는 자국인 홍콩 거리에서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약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 모자를 쓰고 성조기를 흔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지닌 미국인들이 이런 기괴한 광경을 보면 한편 즐겁지만 괴로운 메스꺼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시아 시위대는 공론을 통해 ‘민주 투사’ 또는 ‘인권 수호자’로 불려지곤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의미가 약해서 특이한 차림을 한 사람들의 진정한 정신을 잘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왜곡된 언론은 정신 이상의 의미가 잘 담기거나 또는 누군가 마침내 깨닫고 “시위대 옷차림은 딱 극우주의자 같아” 라고 말할 때까지 여러 차례 시위대를 무고한 천사로 그려낸다.

그렇다. 이러한 유사함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계속 심각하게 오래 지속되어 온 홍콩 위기 뒤의 추악한 진실을 밝힌다. 그리고 주류적 이야기인 경제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분명히 홍콩 부동산 재벌을 보면 독과점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세계 경제 침체, 미-중 무역 전쟁과 부인할 수 없는 외세 개입, 식민주의 잔존의 적폐 문제가 존재한다. 홍콩 거주민들이 중국 본토인들보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교육 부족’이 발생했고, 통합을 위한 노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홍콩과 중국 본토 통합에 실패했다는 타당성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홍콩 위기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이지만 평이한 답에만 안주하다 보면 결정적 원인과 관련성을 놓치게 된다.

시위대 구호인 ‘홍콩을 해방하라. 우리 시대의 혁명으로’는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필자는 현재 홍콩이 직면한 위기는 근본적으로 정치 관련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사회 계층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며 이익과 의무가 일괄적으로 표출된 형태로 나타난다. 거리의 홍콩 젊은 층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아이덴티타리언 (identitarian)과 동일하게 ‘잠재적 정체성의 도둑질 potential identity theft’에 분노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2017년 백인 우월주의자 집회가 일어났던 곳)과 홍콩은 공히 세계적으로 우익의 세력이 막강한 지역이다. 홍콩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 유권자 대부분과 동일하게 ‘야심찬 후임자’가 지역 내‘ 교체를 주장하는’ 엘리트주의자와 협력을 통해 급상승하여 지위를 잃을까 봐 깊게 두려워하는 편집증과 음모론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과 마찬가지로, 반전통적인 현재 홍콩 내 소란은 기존 지배집단들이 외부인에게 끊임없이 확실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이다.

‘홍콩인들이 서양과 중국 본토에서 누리는 모든 특권에서 반드시 다른 중국인들을 앞서야 한다’는희망을 담은 홍콩 시위는 서구를 향한 웅얼거림이자 베이징을 향한 외침일 뿐이다.

중국 본토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마치 나치 독일의 유대인, 유럽의 이슬람교도, 미국의 멕시코인처럼 홍콩인들의 우월하다는 정체성 구조 아래 “다른 민족”으로 희생양이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홍콩이 성공적으로 통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홍콩 ‘분리주의자’ 일부 세력이 더 초조해 할 것이다. 또한 베이징이 더 개방적이고 세계화를 향한 입장을 취하면 취할 수록, 홍콩인 일부 중 더 심한 외국인 혐오와 폐쇄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다. 중앙 정부가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수록, 홍콩 시위대는 더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본토 경제가 번영할수록 홍콩인 일부는 더 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폭력적인 홍콩 시위대가 주장하는 경찰의 강경 진압 이야기가 왜 쉽게 빠르게 신뢰성을 잃고 본토인들에게 거의 동정을 받지 못했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시위대 구호 속 중국어 단어 ‘광푸 (guangfu)’는 일부 홍콩인들이 한때 홍콩 황금기였다고 여겨지는 1980년대를 추억하는 깊은 향수를 미묘하게 암시한다. 홍콩 황금기 시절 홍콩인들은 자랑스럽게도 ‘선진적’이고 부유한 서양 스타일과 상업 문명을 대표했고, 홍콩과 본토 사이 경제 격차는 엄청났다. 이런 식으로 홍콩 정체성에는 중독적인 우월함도 내재되었다.

하지만 그 격차는 빠르게 좁혀져 왔다. 중국 본토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세계화와 다극화를 통해 계속해서 세계 권력 균형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홍콩인들은 직접 차이와 변화를 실감하면서 변화한 현실에 대해 더 큰 타격을 받아 왔다. 상실감과 고통을 느낀 시민사회 단체들은 소위 옛 시절의 지위 계층을 재정립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는 급진적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더 끌어올렸다.

자기 비하는 자존감(상실)에서 오는 죄악이다.

“물길이 되어라, 홍콩의 친구들이여.” 육지의 돌사자 동상에서 출발하여 광활하게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연안을 통과하여 전진해 나가는 뱃머리(중국)에 매달려 그저 뱃전에 문구만을 새기려 하지 말고, 더불어 함께 물길이 되어 시대에 확고한 불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킬 자유와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중국어 구절 ‘ke zhou qiu jian’ 刻舟求劍에서).

 

루 양(Lu Yang)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Uni Freiburg)에서 법학 이론과 정치 이론 전공을 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이자 독립연구자이다

수, 2019/11/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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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한다는 구실로 전개된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미국이 선택한 전쟁(war of choice)’이었으며 지난 세기를 통 털어서 최악의 외교 정책이었다. 이러한 참혹한 과정 뒤 숨겨진 모순이 오늘날 비슷하게 잘못 행해진 미국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중국 동부 저장(Zhejiang)구 제품 라인 앞 화웨이(Huawei) 근로자

이라크 침공은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리차드 딕 체니(Richard Dick Cheney)의 비논리적 사고로 결정되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입수할 위험성이 약 1퍼센트로 아주 낮더라도 마치 그런 상황이 분명 일어날 것처럼 단호히 행동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위와 같은 엉터리 추론은 대부분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미국과 몇 동맹국들은 유사 체니 독트린(Cheney Doctrine)을 행사하여 현재에 중국의 기술력을 공격한다. 미국 정부는 중국 기술의 안전성이 확실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의 기술이 매우 위험한 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바른 의사 결정은 해당 확률 추정치를 결과에 따른 대안적 행동과 함께 평가한다. 이전 세대의 미국 정치 입안자들은 1퍼센트 위험성이 있던 테러리스트의 대량살상 무기입수 혐의뿐 아니라,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99퍼센트 때문에 발생할 전쟁 위험도 고려했어야 한다. 그런데 1퍼센트 위험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체니는 (연방의원들과 함께) 이라크 전쟁은 정당성이 부족하고 중동과 세계 정치를 불안정하게 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체니 독트린은 아주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을 감안하지 않고 사소한 위험에만 집중하여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하는 문제점만 가지고 있지 않다. 정치인들은 이면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포를 자극한다.

현 미국 지도자들은 이런 행위를 다시금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사소한 위험을 높이고 과장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기술기업에 대한 공포감을 형성한다. 미국 정부가 무선 광대역 통신(broadband) 업체인 화웨이(Huawei)에 가한 제재가 이에 해당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미국은 미국시장 내 화웨이의 진입을 막고 있고, 전 세계에서 화웨이의 사업을 중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지정학적 재앙을 초래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화웨이의 기술 발전과 개발 도상국에서의 활동들을 줄곧 지켜봤다. 5세대 이동통신(5G)와 기타 디지털 기술은 빈곤 종식과 여타 지속가능발전목표(SDV) 달성을 위한 주요한 원동력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화웨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통신 회사들과도 교류하면서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방책을 강화할 수 있도록 각자의 사업을 장려했다.

필자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이런 주제를 다룬 화웨이의 보고서에 대해 짧은 서문을 작성했을 때, 중국에 악의를 품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연히 필자는 경쟁하는 상대 기업체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화웨이의 불법 행동에 대한 증거를 요청했고, 여러 번의 검증을 통해서 화웨이 경영진 역시 신뢰받는 경쟁 기업체의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화웨이 5G 장비가 세계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관리는 화웨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장착된 ‘백도어(backdoor비밀통로)’를 통해 중국 정부가 전 세계를 감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건대 미국 관리들은 ‘중국 기업들이 국가안보 목적으로 중국정부와 협력을 요구하는’ 중국 법이 있다고 지적한다. .

사실은 이렇다. 화웨이의 5G 장비는 저렴한 비용과 높은 품질 면에서 현재 많은 경쟁사들을 앞질렀고, 이미 시장에 출시되었다. 화웨이의 놀라운 성과는 연구, 개발과 규모 경제에 수년간 엄청나게 투자하고 중국 디지털 시장에서 부딪히며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술 개발이 지니는 중요성을 감안하면, 전세계 저개발 국가들이 저렴한 5G의 조기 출시를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미국은 아직 백도어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화웨이를 배제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주장은 막연하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위원은 “5G를 소유한 국가가 혁신을 장악하고 전 세계의 표준도 제정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그 나라가 미국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고 말했다.

다른 국가들 중 특히 영국은 화웨이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백도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설령 나중에 백도어가 발견이 되더라도 그 시점에는 거의 확실하게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독일에서는 화웨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독일 당국에게 화웨이 5G 기술을 배제하지 않으면 정보 공유를 축소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아마 미국 압박에 영향을 받아, 최근 독일 정보 국장은 체니 독트린에 버금가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통신 인프라(infrastructure)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기업에게 어울리는 분야가 아니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문제점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화웨이에게 시장을 개방하도록 물밑에서 노력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불만 배경은 미국 자신이 벌리고 있는 국내외 감시 활동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 중국 장비 때문에 미국 정부의 비밀 감시가 더욱 어렵도록 방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정부라도 부당한 감시를 해서는 안되며, 부당 행위를 감독하기 위한 독자적인 유엔(United Nations)모니터링이 국제 통신 시스템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즉 기술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반대로 외교 및 제도적 안전 규정을 선택해야 한다.

화웨이의 배제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박은 5G 네트워크의 조기 출시 외에 더 많은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규칙을 기반으로 한 무역 시스템에 미치는 위험성은 엄청나다. 미국이 더 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는 세계 기술 강국이 아니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고문들은 규칙에 기반한 시스템을 통한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억누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그들은 분쟁해결 시스템을 약화시켜 WTO 즉 세계무역기구를 무력화하려고 한다. 이는 국제 규범을 멸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만약 트럼프 정부가 별개의 기술 진영으로 세계를 분할하는데 ‘성공’한다면, 향후 일어날 분쟁의 위험성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개방 무역을 지지한 이유는 세계 효율성 증대 및 미국 기술 시장을 확장함과 더불어 1930년대 대폭락했던 국제 무역의 역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무역의 붕괴는 1930년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Act) 아래 보호 무역주의의 과다한 관세에 상당한 정도 영향 받았다. 스무트-홀리법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확산시켰고 차례로 히틀러(Hitler)의 부상 그리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국제 문제에서는 증거에 입각하지 않고 공포를 조성해서 정책을 실행하면 결국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 합리성, 증거, 규범을 우선적으로 안전한 행동 방침으로 굳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어떤 국가도 감시용 세계 네트워크나 사이버 전투를 통해 협박하는 행위가 사라지도록 독자적인 감시 모니터링을 창설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전세계 이익을 위한 디지털 기술 약진을 활용하여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현안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제프리 D. 색스(Jeffrey D. Sachs)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보건 정책 및 관리학과와 지속가능발전개발학과 교수이며 지속가능발전 콜롬비아(Columbia) 센터와 유엔 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UN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센터장을 역임하고 있다.

금, 2019/11/2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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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현대화의 곤경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총생산(GDP)의 빠른 성장이 보여주듯 중국 현대화의 성과는 탁월했으나 그 대가 역시 매우 혹독했다. 그 대가는 환경문제,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상실 등이다.

중국 현대화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누가 이런 곤경을 책임져야 할까? 이런 곤경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고 쉬운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실제적이고 통합적이며 심오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지혜를 보태줄 수 있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청장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내 주장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반한 구성적 포스트모던 사상이 중국의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적 포스트모던 문화가 중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에 정착되려면 “두 번째 계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의 현대화에서 나타난 문제의 책임이 있는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이 현대성을 넘어 후현대성, 즉 후현대화로 불리는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후현대화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라 후현대화를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현대화가 현대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나는 후현대화가 현대화의 긍정적 성취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화의 부정적 효과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그리핀의 설명을 좋아한다.

그리핀이 볼 때 중국은 서구세계의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현대화의 파괴적 효과를 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이미 후현대화의 과정에 있다.

후현대화란 “경제를 인간과 모든 생물권역을 위해 다시 방향 짓는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후현대화는 경제성장에 대한 변함없이 헌신하기보다 공동선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성장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인식해야 하고, 건강한 성장은 생태적 책임을 다하면서 인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이 후현대화로 전환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주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대화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경제성장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의 선”이라는 현대화의 신화를 믿는다. 경제성장과 과학적 발견은 의심이 여지 없이 진보를 구성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동서양,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막론하고 이런 개념이 우세하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주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보도록 하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첫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이란 이런 뜻이다: 1)17-18세기 유럽에서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역사적인 지식운동, 2)중국에서 민주주의와 과학을 옹호한 1919년 5.4 운동. 중국에서 우리는 이런 계몽을 “미스터 민주주의”와 “미스터 과학”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중국인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까지 해줄 거라고 믿었다. 비록 첫 번째 계몽의 중국 판과 유럽 판 사이에는 시차가 있지만 이 둘은 역사적으로, 나아가 정신적으로 연관이 깊다. 둘 다 과학과 이성에 대해 온전하게 헌신(실제로는 숭배)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둘을 첫 번째 계몽이라고 부른다.

유럽과 중국에서의 첫 번째 계몽이 사람들을 전근대적 폭정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적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몽의 성과 가운데는 자유의 개념, 민주적 참여, 그리고 개인의 위엄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성과들은 높이 평가 받고 보존돼야 한다. 아직도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중국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그러나 서구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이미 사회적, 생태적 비용을 지적한 마당에 우리가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계몽은 현대화를 정당화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근대화에서 경제적 성장의 숭배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개인들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무관심” 현대인에 대한 계몽의 강조를 명백히 드러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첫 번째 계몽의 한계는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에는 다섯 가지 한계가 있는데,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1)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자연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를 취했다. 인간중심주의적 위치에서 자연을 정복, 조작, 지배, 착취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은 자연과 타자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자연은 제국주의적 태도에 따라 노예로 취급됐다. 이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와도 바로 통하는데, 계몽주의 문화에서 자연과 여성은 둘 다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하며 통제하기 어렵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구의 상상력 속에서 두 가지가 상징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여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연 역시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은 이제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

 

2) 전통과 과거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인간이 어떤 성취를 이루려면 전통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전통과 과거에 대해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유럽에서 과거는 “암흑시대”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전통은 완전히 폐기해야 할 쓰레기로 취급됐다. “유교의 폐기”는 현대화 시기의 가장 유명한 슬로건이었다.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은 우리 중국인들이 전통과 맺었던 내재적 관계를 끊어놓음으로써 “하늘과 도의 경외에 대한 존중”, “차이와의 조화”처럼 우리 전통에 존재했던 훌륭한 영적 자원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전통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나아가 전통에 대한 이런 허무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중국에서 믿음과 가치의 상실을 야기한다. 성스러움에 대한 신념과 감각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과학 혹은 금전처럼 세속적인 어떤 것을 쉽게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오늘날 서구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과학주의와 금전에 대한 숭배가 왜 그렇게 횡행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3) 과학 숭배

첫 번째 계몽주의 사상가 대부분이 과학을 숭배했다. 그들에게 과학은 우주를 사유하는데 있어 유일하게 정확하고 타당한 방법으로 보였다. 이런 확신에 기초해 종교적, 예술적, 직관적, 정서적 앎과 같은, 다른 방식의 우주에 대한 사유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억압하고 폐기시켰다. 생명에 대한 이 같은 “과학 유일”의 옹호자들은 쇼비니스트 과학자들이었다. 리유솅(李玉生)에 따르면, 중국의 계몽주의인 5.4운동 기간 동안 중국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중국의 발전은 완전히 자신들에게 달려있다고 믿었다. “나는 과학을 믿는다. 고로, 나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당신보다 우월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반대자들과 논쟁할 때 그들에게 이처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인 첸두슈(陳獨秀)는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정치적, 도덕적, 학술적 사고의 수준을 포함한 모든 암울한 면면”으로 부터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인류의 문명을 증진시키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학을 숭배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숭배가 중국이나 서구에서 모두 과학의 한계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사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숭배해온 서구의 과학은 기계주의와 환원주의라는 특징을 갖는 뉴턴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은 많은 핵심적 측면에서 틀렸으며 새로운 이론이 이어졌다. 기계론적 과학의 시야에서 볼 때 기계인 자연은 “소리도, 냄새도, 색깔도 없는 무딘 물체”로 보인다. 막스 베버의 표현으로는, 세계는 현대과학의 힘으로 마법에서 풀렸다. 그러나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에 따르면, “문명이 이끄는 대규모 불완전의 잠재적 원인”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4) 이성 숭배

과학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이성 숭배다. 첫 번째 계몽은 “이성의 시대”로 간주돼 왔는데, 이는 “이성이 그 시대의 통일적, 중심적 지점으로서 그것이 원하고 추구하고 성취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 특히 “정서, 감각, 사회적 구성물, 비인지적 인식에 물들지 않은 순수 이성”이 발전의 원동력이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수한 혈통의 이성은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소수 종족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에서 드러난다. 이성은 우리를 더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볼 때 이성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문화적, 영적 규범으로부터 추상화된 채 작동될 때 윤리적 차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을 가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비이성적인 어떤 것을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성은 행위자이자 심판이며,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이다.

생명에 대한 “이성 유일”의 옹호의 또 다른 단점은 구획화하려는 경향이다. 이성에는 사회적 이성, 정치적 이성, 경제적 이성, 기술적 이성, 도구적 이성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각각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을 지배한다. 이런 종류의 이성의 지배는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물론 이것이 이성의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상에서 이성은 정서와 가치를 포함하며 사물을 이해하는 보다 통합적인 방식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몽에서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축수되고 폭넓은 시야를 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대적 이성의 세 번째 단점은 개인주의로, “합리적인 자기이익”이 인간 활동의 근본적 동기라고 간주한다. 서구의 신고전주의 경제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합리적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끼친 결과를 고려하는 데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5) 자유에 대한 일면적 이해

“자유”는 계몽주의의 보편적 슬로건으로서, 사람들이 전근대적 폭정의 억압에 맞서 싸우도록 독려하는데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촉진했던 자유의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 계몽 사상가들은 자유를 공동체에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의 소유물로서 여겼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존 로크의 사상에서는) 재산을 소유할 자유로 한정시켰다.

 

두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는 위에 언급한 첫 번째 계몽의 한계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화를 뛰어넘으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두 번째 계몽이 필요하다. 우리는 후현대화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는 릭스 마이어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의 학습/교육, 경제 발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리더십의 새로운 방식, 거버넌스의 새로운 개념, 나아가 더욱 복잡한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첫번째 계몽이 현대적 계몽이라면, 두 번째 계몽은 현대적 계몽을 완전히 배척하는 대신 그것의 많은 위대한 성취를 수용하는 후현대적 계몽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계몽은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까.

 

1)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태적 인식으로

 인간중심주의가 오늘날 생태적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두 번째 계몽은 인간중심주의와 그것이 갖는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이 촉진하는 생태적 인식은 자연을 “주체”로 여긴다. 두 번째 계몽은 우리가 별, 바람, 돌, 흙, 식물, 동물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의 일부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자연은 GNP를 높이기 위해 냉담한 관리자의 입장에서 착취하는 가치중립의 “자원”이 아니다. 아직도 자연을 인간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일반적 환경주의 태도와 달리, 생태적 인식은 자연이 우리를 지킨다고 강조한다. 자연은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우리의 신체를 키울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양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대자연을 사랑하며 경외하며 존중해야 한다.

 

2)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상호보완적 인식으로

 첫 번째 계몽과 현대화가 서구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흔히 현대화는 서구식 현대화와 동일시된다. 서구식 현대화가 유일한 현대화의 발전모델로 보인다. 후쉬(胡適)나 첸슈징(陳序紅) 같은 몇몇 중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서구문화, 특히 과학과 민주주의가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완전히 서구화된 중국”,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완전히 서구방식을 채택한 중국을 주장했다. 오늘날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이 이론의 영향력은 크다.

반면, 두 번째 계몽은 동서양 문명 간의 상호보완적 인식을 촉진한다. 제이 맥다니엘이 지적했듯이 상호 보완적 인식의 핵심은 각각의 전통보다는 그 전통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많은 지혜가 생기며,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상대로부터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서로 완전해지도록 돕기” 때문이다. 생태위기, 도덕적 위기와 같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처하기 위해 두 문명이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화, 인(仁), 생태적 의식 등 중국 전통 속의 가치 있는 개념들은 현대화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재평가되고 부활할 수 있다.

 

3) 동질화에서 다양성으로

동질화란 현대화가 차이보다 같음,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글로벌화에 따른 토착문화의 파괴는 동질화의 사고이며 “타자”에 대한 폭력적 행위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은 다양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 태도를 견지한다.

동질화와 통일성을 선호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종족, 인종, 성, 문화, 종교를 포함한 인간 사회의 차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 다양성을 존중할 뿐 아니라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긴다.

구성적 포스트모던 철학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상향 발전하기 위한 조건은 다양성과 복수성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인간사회의 다양성은 “인간정신의 오딧세이를 위한 준비와 자극, 재료”라고 강조했다.

 

4) 자유에 대한 일차원적 이해에서 다차원적 이해로

첫 번째 계몽이 자유를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드러내며 특히 사회적 차원에서 그렇다.

첫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가 항상 긴장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절대적 자유란 없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약화시킨다. 푸코에게 권력관계는 편재한다. “사회의 급소를 구성하는 것”이 권력이다. 자유조차 권력의 효과이다. 행동의 가능성, 자유가 실행되는 조건을 생산하는 건 권력이다.

둘째, “사상, 언론, 혹은 종교의 자유”만 강조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행동의 자유 혹은 실천의 자유에 주의를 기울인다. 언론, 사상의 자유와 대조적으로 행동의 자유는 원초적인 인간의 요구이다. 화이트 헤드에게 “자유의 본질은 목표의 실천가능성”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언론의 자유를 갖다 주지 않았다. 그는 불을 구해왔으며, 이는 요리와 난방이라는 인간의 목적에 순종했다.”

셋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자유에 책임을 부과하며 자유와 책임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책임이 자유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자유는 항상 내재적으로 책임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책임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가 타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돕는데 헌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찰스 버치와 존 캅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는 서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자유다.”

 

5) 순수 이성에서 미적 지혜로

 우리 시대에 등장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신선한 지혜가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현대적 이성은 내재적 약점, 특히 그것이 갖는 헤게모니, 가치로부터의 분리, 구획화, 좁은 시야, 통합적 전망의 부재 때문에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두 번째 계몽은 미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미적 지혜란 진선미를 조화시키기 위한 유기적 상호연관성의 개념에 근거해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미적 지혜는 과학적 합리성, 인지적 이성뿐 아니라 예술적 직관, 종교적 경험이 함께 발달한 것이다. 미적 지혜에서는 모든 종류의 인간경험이 상호 보완되며 보다 풍성해진다. 미적 지혜는 현대적 이성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현대 이성은 감수성, 느낌, 가치, 아름다움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척하고 억압한다. 반면 “이것 그리고 저것”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미적 지혜는 조화를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정반대처럼 보이는 것을 통합 조화시키는 것이 본질인 도의 지혜이기도 하다.

미적 지혜는 어떤 면에서 서구의 지혜와 동양의 지혜의 결합이다. 사실 현대의 순수이성 혹은 도구 이성이란 이성이 도 혹은 가치에 내재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보는 중국문화에는 낯선 개념이다. 도가 없는 이성은 없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두 번째 계몽에 요구되는 미적 지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생명에는 가치가 내재한다는 생명관을 갖는다.

자연을 생명 없는 물질로 취급함으로써 세계를 탈마법화한 현대적 이성과 달리, 미적 지혜는 세계의 재마법화를 목표로 한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은 자체의 완결성을 갖는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과학도 미적 지혜의 관점에 설 때 보다 개방적이고 인간적이 된다. 과학 역시 재마법화돼야 한다.

후현대의 미적 지혜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계몽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롭지만 책임감 있고, 과학적인 동시에 영성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생태적이다. 중국과 세계가 소비주의의 천박함을 넘어 보다 의미 있는 삶의 방식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비전이다.

 

왕쩌허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대표

월, 2019/12/0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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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의 진보 시민단체들이 미국 국방예산을 2,000 억불 이상 절감하여 이를 사회복지와 간접시설에 투자하도록 요구하는 가운데, 세계적 반전평화운동 단체인 WbW는 해외 미군기지의 철수운동(No Base Campaign)에 전력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WbW의 홈페이지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일한 오마(Ilhan Omar) 하원의원 등이 제의한 ‘국방수권법(NDAA)’ 개정안이 미국하원에서 가결되었다. 개정안을 통해서, 미군은 모든 해외 군사기지나 해외 군사작전에서 발생하는 경비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국가안보이익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공해야 한다. 전쟁없는세상(WbW)는 그동안 연방의회가 상기 NDAA개정에 찬성하도록 많은 시민단체들을 함께 압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제 하원과 상원이 두 개의 경합 법안을 조정하는 단계로 진입하면서, WbW와 함께하는 시민단체들은 개정안의 취지가 유지되길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하원에서 가결된 개정안 문서는 아래와 같다:

10절에 따라오는 X 표제 G 부제 뒤에 삽입된 해당사안. 해외 주둔미군 태세 및 행동에 대한 재정 비용보고서.

2020년 3월 1일 이전까지, 국방장관은 의회 국방위원회에 2019년 회계연도의 재정비용에 대해 국가안보의 이익의 관점에서 아래 항목에 맞추어 각각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1) 영구기지 마스터 목록에 포함된 해외주둔 미군 인프라 설비의 운용, 개선 및 유지. 해당 영구기지의 주둔국이 현물 기부한 정비를 고려. (2) 해외 우발지역 내 전방 전개부대를 위한 기지장소 마스터 목록에 포함된 해외 주둔미군 인프라의 설비운용. 해당 영구기지의 주둔국이 현물 기부한 정비를 고려. (3) 우발작전, 교대배치와 훈련활동 지원을 포함한 모든 해외 군사작전들. 생략 –

미국 의회방송 C-span 영상 5분 21초부터 내용을 살펴보면, 일한 오마 하원의원은 단순히 맹목적으로 무조건적이고 미상의 거대기업을 후원하기보다 해외주둔 군사기지 정당화를 위한 필요성의 입증을 요구한다. 다른 영상에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 하원의원 또한 정당성의 입증을 요청한다. 어떤 동료의원은 반대입장을 내세웠지만, 해당 의원이 주장하는 바에서 정당한 논리를 찾기 어려웠다. 또한 210 라는 반대표 수치가 갖는 설득력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도대체 각 군사기지에 드는 비용과 각 기지시설이 당신을 더 안전하게 지킬지 혹은 실제로 위태롭게 할 지 알아볼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전세계에 군사기지를 널리 세워 얻는 이점이 무엇인가?

해외의 미군기지 폐쇄와 미군인원의 철수는 전쟁배제를 위해 불가결한 사안이다.

미군은 모든 7개 대륙 내 160개국에 기지 800 곳 이상 (1000기지 이상이라고 추정되기도 함)에 해외병력 15만 이상을 배치해왔다.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특징인 군사기지는 군사공격을 통한 강압과 협박의 일환이다. 미국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군대와 무기를 명백하게 전개 배치하기 위해 기지를 이용한다. 그리고 또한 미국 패권주의와 세계지배를 표현하기 위해 거듭되는 명백한 협박으로 기지를 사용한다. 게다가 군사강압의 역사 때문에, 미국기지가 있는 국가들은 공격의 표적이 된다.

 

해외 군사기지 관련된 주요한 문제점으로 아래 두 가지를 둘 수 있다.

1. 모든 군사시설은 전쟁준비에 필수적이며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기도 한다. 군사기지는 무기류를 양산하고 폭력을 증가시키며 국제적 안정성을 위태롭게 한다..

2. 군사기지는 지역수준에서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를 양산한다. 군사기지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위험한 수준으로 외국군인이 저지른 성폭행, 폭력범죄, 토지나 생계상실, 환경오염, 재래식 혹은 비재래식 무기시험으로 인한 건강상 해로움을 겪는다. 다수 국가의 군사기지허가협정서(SOFA)에는 범죄를 저지른 외국군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명시되어있다.

특히 해외주둔 미군기지 폐쇄(모든 해외주둔 군사기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세계적 측면에서 가시적인 효과와 외교관계에서 대규모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각 군사기지를 폐쇄할 때마다 미국은 덜 위협적인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기지가 있던 부동산과 시설들은 마땅히 지역정부로 상환됨으로써 주둔국과 관계가 향상될 전망이다.

미국은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공격적인 국가이므로 해외주둔기지를 폐쇄하면 모든 이들이 가진 긴장을 완화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런 시도를 하면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각자 스스로 필요한 외교 및 군사정책에 착수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아래 지도에 있는 회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들은 특수부대와 임시배치를 제외한 미군부대의 영구기지를 나타낸다.

화, 2019/12/0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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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통해 나의 주관적 경험, 목적, 결정, 감정이 완전히 현실이며, 따라서 인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경험하며, 이는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경험의 어떤 특징들을 더욱 확장하면서 이원론을 피해가도록 도와준다. (역주: 흄, 칸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가 감각기관, 특히 시각에 의해 중재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대상인 객체의 분리를 낳았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전제를 거부한다. 감각은 우리에게 의식적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는 훨씬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존재를 느낀다. 화이트헤드는 전자를 현시적 직접성, 후자를 인과적 효과성이라 부르며, 실제 우리 경험을 분석하면 인과적 효과성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을 받쳐준다고 주장했다.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은 앞선 사건의 어떤 측면을 새로운 생성의 참여자로 만드는데, 이를 파악이라 명명한다. 생성의 모든 순간은 물리적 극점과 정신적 극점을 동시에 지니기에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라는 이원론을 대체한다.) 경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내 경험,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의 경험이 갖는 가치를 매우 명백하게 만든다. 경험은 거기에 가치가 더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실”이 아니다. 경험이란 “가치가 더해진 사실”이다. 경험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 자체가 가치일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경험의 가치를 증가시킬지, 감소시킬지 결정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중요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여기며, 그러므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1969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이전까지 당연시했던 사회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사방에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온 세계의 용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지속 불가능한 길을 가고 있다.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 이런 사실을 알고, 인간사회를 지속 가능한 길로 돌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담했고 지금까지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속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라고 본다. 우리의 목표를 좀 더 매력적이며 의미 있는 방식으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핵심적 강조점은 유기체들의 상호연관성이다. 만약 화이트헤드가 생태철학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중국을 통해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주: 중국은 2007년 제17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건설을 주요 국정지표로 처음 제시한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철학을 매개로 중국 학계와 지방정부의 생태문명 논의에 깊이 관여해 왔다.) 세계의 구조 자체가 매우 생태적이고, 근대성이 그런 생태적 특징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파괴해 왔음을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은 이 이름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유용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생태문명이라는 개념이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생태학이란 개념은 생물학의 하위분야에서 유래했으며, 자연에서 모든 식물이 다른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과 잘 연결됐을 때 잘 자란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됐다. 만약 자연이 건강한 상태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 종의 건강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건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근대 세계는 금전적 잣대를 들고 자연에 접근했다. 그 목적은 단위 면적의 토지에서 가능한 최대의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 인건비가 내려가면 이윤은 올라간다. 따라서 생태계를 단일경작으로 대체하면 노동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태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대중의 주목을 끄는 방식으로 경종을 울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현대문명이 전체적으로 생태적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고 문명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했을 때, 이런 문명은 생태적으로 민감한 문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철학 혹은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없더라도 생태문명을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은 드물고, 만약 생태문명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면 이 운동의 전망은 사실상 매우 암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생태문명과 관련이 없는 것, 심지어 방해물로 만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중립적 교육의 문제

우리 시대에 대학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봄으로써 화이트헤드의 생태철학과 생태문명이 갖는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학에 대해 나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들을 통해 생태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좀 더 최근에는 기후학 교수들을 통해 기후 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대학들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하며, 때때로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런 정보를 대중과 공유한다.

존 캅 교수 <출처: 중앙일보>

그럼에도 이제 비판적으로 접근하겠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여러 학과들의 집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어떤 특수하고 경계가 분명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보탠다는 연구 목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이런 학과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연구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스스로를 가치중립적 연구중심 대학이라고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이 기후를 부정적인 방향, 심지어 재앙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좌절했다. 그들은 지구를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상태로 만드는 기후에 가치를 매긴다. 나는 다른 학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떤 가치들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인정되지 않는다. 학계 분위기는 각 학과들이 건강한 지구에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학계는 중립을 권유한다.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학의 연구 주제들이 연구자금의 수혜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영향력 있는 책의 제목이 『당대의 세계를 구해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이 책은 대학 강의실에 가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설명한다.  교수는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고, 그것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방대한 지식이 부족한 자원의 소모를 가속화하는데 쓰이는 시대에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염려가 자신들이 공부하는 내용과 방법에 영향을 미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이것이 세계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치중립적 고등교육은 모든 가치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가치가 뚜렷했던 인문대학(리버럴 아츠 컬리지)들을 대체했다.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걸 목적으로 삼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도록 가르쳤다. 50년 전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더 보수가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부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에 대한 추구가 사회적 가치가 되면 될수록 다가올 재앙 또한 커질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고등교육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부에 대한 봉사와 부라는 목적의 전파는 우리의 건강한 생존 기회를 감소시키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강의 외의 시간에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일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나의 비판이 교수들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사고, 그 이상을 부추기는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스템이 고등교육을 바꿔놓은 것일까?

 

생태문명을 위한 철학의 역할

이 시스템은 근대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아마도 불가피한 결과물일 것이다. 근대문명은 눈부시게 성공한 자연과학과 함께 성장해 왔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기계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탄생했다. 이것은 자연에 내재한 어떤 가치도 부정해 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근대문명은 이원론적이었다. 자연이 기계라는 사고와 함께, 근대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에서 유래해 중세에 통합된 인본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인문학에는 중세 대학들의 사고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19세기까지 이런 전통은 계속됐다.

그러나 19세기에 찰스 다윈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했다. 이는 자연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인간도 자연이라는 기계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근대의 헌신은 매우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자가 승리를 거둔다. 중세적 인본주의는 근대적 기계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계적 세계는 어떤 목적이나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대학은 가치중립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했을 것이다.

물론 교수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좀비(기계인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좀 더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얻는데 사용하는 “이론적 이성”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데 필요한 가치를 고려하는 “실천적 이성”을 구별함으로써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칸트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스스로를 이론적 이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우리 문화에 지침을 주는 어떤 곳도 없었으며, 이는 아이들에게 가치에 대한 진지한 사고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결과를 낳았다.

교수들이 강의하지 않는 시간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자유롭게 일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정보에만 가치를 두고 판단을 정지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같은 교육의 구조화는 현대세계의 근본적 믿음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파괴를 피하도록 도와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 근본 전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 전제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더 나은 전제로 대체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생태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이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윤리적 관점에서 현재의 나쁜 행동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쁜 행동이 근대적 원리와 믿음을 내면화한 많은 이들에게는 좋은 행동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토대를 이루는 믿음들이 문제다. 그러한 믿음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토론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혹자는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이런 임무에 종사한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몇몇 교수들은 그렇다. 아마 모든 교수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회를 주는 인식을 갖도록 학생들을 북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전제들을 검토하는 철학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근대철학은 이 과제를 스스로 포기했다. 근대철학은 다른 학과들과 나란히 서서 또 하나의 학과가 되고자 했다. 다행히 예외는 있다. 그러나 근대적 사고의 전제들을 비판하는 과제를 근대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짧게나마, 필요한 비판이 제기됐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다윈의 증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왔다고 간주한다. 다윈의 증명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극적 도전이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응답이 가능하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그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기계론적 사고가 근대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자연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공적 논의가 일어났다. 이 선택지는 신자연주의라고 불렸다. 이런 움직임은 기계적 모델이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늘면서 지지를 얻었다. 기계적 설명의 한계는 점점 상식이 되었다. 과학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체로 학회나 대학으로부터 배제 당했지만, 반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바로 이런 신자연주의 철학자들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당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도 그 중 한 명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는 미국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이들보다 영향력이 적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기계론을 넘어 생태론으로

내가 명확히 했듯이, 나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가장 종합적이고 통찰력 깊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는 뛰어난 수리물리학자였다. 나는 우리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이런 신자연주의 사상가들의 후예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발견이 이원론적 사고의 변화를 폭넓게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시기가 온 건 같다.

화이트헤드는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변화이다. 실체는,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 존재했는지에 상관 없이 그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오직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만 그것 자체일 수 있다. 사건이 관계들의 통합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실체에서는 관계들이 배제된다.

우리 경험에서 객관적인 것이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경험 자체의 중요성으로의 변화도 일어났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 감정에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들어있다. 가치중립적인 물체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들의 영향을 받은 목적과 결단의 작용이 모든 경험에 들어있다.

형이상학 강의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생태적 형이상학은 기계적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생태적 형이상학이 교육에 갖는 함의는 혁명적일 것이다. 경제학, 정치학, 농업, 산업에 갖는 함의 역시 혁명적일 것이다. 이 형이상학의 함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의식적 지식이 없이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움직임을 지지할 것이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은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 확신을 주고, 이를 지지한다.

근대적 정신은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근대적 정신은 미국인들의 사고에 만연해 있다. 그들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인들에게 모든 관심사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는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개방성이 있다. 중국인들은 근대 유럽인들의 사고가 자신들의 전통적 사고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들은 사고의 차이가 개인의 삶과 사회 제도에 만들어내는 차이를 목격했다. 그들은 또한 부르주아적 사고와 행동, 그리고 마르크시즘 사이의 깊은 차이 역시 경험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가 현실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중국에서 생태문명이란 개념이 체계적 철학과는 상관없이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의 생태문명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중국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일을 진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생태문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컨퍼런스를 열고, 그것의 현실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보장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생태문명의 바탕에 깔린 전제들이 생태적 철학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인에게 필요한 변화조차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이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식을 구획화하기보다는 지식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봐야 한다. 일상에서도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부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뿌리 깊은 전제는 점점 문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근대성은 더 이상 대중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배하지 못한다. 거기에 새로운 문명, 즉 생태문명을 향한 희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좀 더 좋은 철학이 그런 이상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존 캅(John B. Cobb)

종교철학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월, 2019/12/0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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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극소수 부유층의 금융자산에 대해 부유세를 부과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후폭풍과 위험을 잘 지적해 주는 칼럼이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 시절 부유세를 피하기 위해 수 조억 달러(?)가 해외로 도피한 사례를 경험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투기가 극성을 피우는 가운데 해외로 도피가 불가능한 부동산에는 누진적 보유세가 정답이지만, 이동이 가능한 금융자산에는 부유세 대신 거래세가 현실적임을 알려준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달 조 바이든이 민주당 후보지명 캠페인의 일환으로 금융거래세 (FTT)를 추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류의 세금을 오랫동안 지지해왔던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이 문제에 대해 버니 샌더스는 대학등록금 무료화를 내세운 그의 계획의 일환으로 금융거래세를 포함시키면서 대통령 후보자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몇몇의 다른 후보자들 또한 금융거래세를 지지하고 있으나, 만약 민주당의 유력한 중도성향 후보자가 이런 세금을 옹호한다면 주요 정치적 논쟁의 안에서 새로운 척도의 수용으로 나타날 것이다.

워렌 상원의원은 금융거래세를 지지하는 축에 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울 수도 있다. 분명히 그녀가 부자들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는 부유층과 권력층의 이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다양한 방안들을 제시해왔다.

워렌의 제안에서 가장 야심찬 항목은 부유세이다. 워렌의 세금 관련 공약에 의하면 5천만 달러 이상의 부에 연간 2%의 세율, 그리고 10억 달러 이상의 부에는 연간 3%의 세율을 부과한다 (샌더스는 심지어 더 큰 재산세를 내세우고 있다). 아주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한편, 금융거래세는 확실히 더 나은 경제 정책이며 훨씬 더 나은 정치 전망이 있다.

연방 정부의 과세에 대한 동기를 고려해보면 금융거래세의 경제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통화 이론(MMT) 지지자들이 상기시켜준 것 처럼, 연방 정부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과세대신에 화폐를 인쇄할 수 있다. 연방 정부의 과세 목적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고, 그로 인해 정부지출을 위한 경제적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엄청난 양의 돈을 재정으로 지출하면서 세금을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과다수요의 창출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논점이다.

경제적인 측면이나 정치적 측면에서 모두 금융거래세는 금융자산에 대한 부유세보다 얻는 이점이 많다.

연방정부가 내년에 청정 에너지와 대중교통 보조금 같은 ‘그린 뉴딜 정책’에 1조 달러(현 연방지출 보다 20% 정도 인상한 비용)를 더 지출할 것이라고 예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세금이 인상되지 않는다면, 해당 영역에서 수요의 급증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초래 될 것이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금리 변동을 피하기 위해 단순히 더 많은 돈을 인쇄한다고 가정할 경우).

미국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매년 1조 달러의 혜택을 주었던 공화당 스타일의 세금감면을 시행하면서도, 지출을 감소시키지 않거나 또는 다른 세금을 인상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에, 우리는 확실히 인플레이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제프 베조스, 빌게이츠를 포함한 다수의 억만장자들은 그들이 쓸 수 있는 돈을 이미 다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부 혜택은 그들의 주식자산의 구성을 풍족하게 만들어 줄 것이나 경제 수요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플레이션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 뒤집어서 억만장자들에게 세금혜택을 주는 대신에 우리는 매년 3퍼센트의 비율로 그들의 부에 세금을 매기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베조스, 게이츠, 그리고 여탸 부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자산으로 돈을 벌고 있기에 그들의 재산은 거의 영향 받지 않을 것 이다. 극소수 부유층의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며 이는 우리가 추가적인 정부 지출을 위한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수요에 대한 영향은 다른 방향으로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 대부분의 억만 장자들은 그들의 자산증식을 좋아한다. 부유세 시행은 그들이 회계사, 변호사, 그리고 절세 및 탈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고용할 강한 동기를 부여한다. 간단히 계산를 하자면, 만약 제프 베조스가 20년 동안 10 억 달러를 숨겨놓을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6억 달러(연간 3.0%)를 절약하게 된다 (이자는 제외한 예시이다). 이것은 그가 영리한 회계사와 세무 변호사에게 5억 달러를 지출한다 해도 오히려 돈을 더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회계사와 세무변호사에 대한 베조스의 지출은 비도덕적일지라도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을 위한 지출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유세는 경제수요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키는 편이 될 것 이다.

반대로, 금융거래세를 피하는 방법은 거래를 줄이는 것이다. 금융 분야에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적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추정치를 통해 FTT로 인한 거래 비용을 올리면, 거의 비슷한 비율로 거래량이 감소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FTT가 주식이나 옵션의 거래 비용을 40% 인상한다면 거래량은 대략 40% 감소할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에 의하면, 사람들은 각 거래 마다 40%를 더 지출하게 되지만, 40% 적게 거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래에 지출한 총액은 우리가 세금으로 지불한 것을 포함한 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다른 우선 순위에 지출할 수 있도록 경제에서 자원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금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금융산업은 거래에서 거둬들인 수익이 거의 세금의 크기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세금의 전액만큼 축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부가 다른 우선 순위에 지출할 수 있도록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금으로부터 기대하는 바 이다.

금융산업은 다소간 규모의 축소를 허용 할 수 있는 경제의 한 분야이다. 좁은 의미의 금융 부문 (증권 및 금융상품 거래) 규모는 1970년대에 GDP의 대략 0.5%에서부터 오늘날의 GDP의 2%이상으로 지난 40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금융거래세는 부분적으로 이 상승을 억제시킬 것 이다. 나의 계산에 따르면, 금융거래세는 향후 10년동안 1조6천억 달러에 이르는 GDP의 0.6%에 육박하는 액수로 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 돈은 금융 부문의 축소에 상응하는 수준이다.

이런 류 거래량 감소로만 경제적 비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지난 40년 동안 엄청난 거래량 증가가 있었기 때문에 거래량 감소가 50%에 달하여도 1990년대의 수준으로 돌려놓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확실히 미국은 1990년대에 매우 튼튼한 금융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 부문의 목표는 자본을 최선의 용도에 쓰일 수 있도록 배분하는 것이다. 주택 거품과 잇따른 금융 위기를 겪으며 살았던 미국 국민들에게 금융 거래량의 증가로 금융산업이 수십 년 전 보다 더 나은 자본배분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종류의 세금 인상에 관한 정치란 항상 어렵다. 만약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강요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재정적 권력을 사용하여 그러한 제도를 통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 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 이다. 그러나 부유세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다.

이러한 돈뭉치들은 지극히 일부의 그룹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시민권을 포기함으로써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이것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당신은 아마도 최근 몇 년간 부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지켜보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민주주의 또는 미국에 헌신하는 애국자가 아니다.

그들 중 다수는 세금을 아끼는 것이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민주주의와 법치에 대한 모독을 눈감아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고 투표를 한다. 만약 누구든 부자들이 일반인들의 소득세 부담을 줄이는 것으로 보여지는 부유세를 기꺼이 낼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들은 미국 정치를 정말 모르는 탓이다.

워렌의 부유세 정책은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몰수적 출국세(confiscatory exit tax)를 부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이 법으로 통과되기 전에 억만장자들이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억만장자들을 큰 재산을 모으는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당한 상상이긴 하나, 그들의 대부분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 하다. 만약 그들이 부유세를 지불할 의향이 없다면 그들은 의회가 부유세를 시행하려고 하는 즉시 시민권을 포기할 수 있다. (참고로, 시민권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들이 미국을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의회가 부유세를 통과시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면, 대다수의 부유층이 시민권을 포기할 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협박 자체가 의회에서 재산세 통과 전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가 10조원에 달하는 1천명의 극소수 부유층 사람들이 워렌 대통령의 부유세를 진행한다면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그들의 의견을 의회에 서면으로 전달했다고 가정해보자. 추측하건대, 설사 부유세를 지지하고 있었을 지라도, 의회는 부유세를 통과시키지 않을 변명으로써 이 위협을 아주 기쁘게 이용할 것이다. 만약 의회가 법안 통과를 강행하고 상당수의 억만장자들이 그들의 위협을 실행한다면, 워렌 정부는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금융거래세는 금융산업의 격렬한 반대를 직면할 것이지만, 여기엔 큰 이점이 하나 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주장은 거짓이 될 것이다. 금융 부문은 거래량이 50%로 떨어진다 해도 아주 잘 돌아갈 것이다. 훨씬 더 작은 금융 의 규모로도 지난 과거 별탈 없이 잘 지내왔다. 또한, 소규모 투자자들이 퇴직연금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는 주장도 거짓처럼 보일 수 있다. 거래당 비용이 높을수록 거래량 감소가 상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금융거래를 통해 보통 투자자들이 돈을 벌 수는 없다. 평균적으로, 이기고 지는 것에는 일정한 균형을 유지 하고 있고, 활발한 금융산업의 영역에서 고수익을 내는 수익자는 거래를 통해 (타자의 손해를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금융거래세를 추진하고자 하는 대통령은 이러한 점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야만 한다.

요약하자면, 경제 및 정치적인 측면에서 금융자산에 대한 FTT는 부유세보다도 더 많은 이점(利點)을 제공한다. 지난 40년간 보여진 불평등의 엄청난 증가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잘 설계된 FTT가 정답이다.

 

딘 베이커

공공정책 연구소 (CEPR)의 공동대표이다. 그는 ‘완전 고용으로 돌아가기- 노동자들을 위한 더 나은 협상,’ ‘루저 자유주의의 종말 -시장의 진보화,’ ‘1980년 이후의 미국,’ 등 여러 책을 집필한 작가이며, 한겨레 신문의 기고자이기도 하다.

수, 2019/12/1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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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의 경합과정에서 보이는 중도 구파의 모습에서 현재 한국 제도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읽어볼 수 있다. 촛불혁명 덕분에 출범한 현재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현실에 도전하여 개혁할 의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과 야합하는 무기력한 정치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오바마는 미국에서 트럼프를 등장시킬 빌미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근혜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를 망쳐버린 장본인이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대비하며 공화당만큼 권력의 상실을 두려워할만한 미국의 또 다른 정치계층은 중도성향의 민주당 그룹이다. 버락 오바마 前대통령은 최근 자유주의 성향의 부유층 기부자를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정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하며, 그들의 두려움을 구체화했다. 그것은 “MediCare for All (모든 사람을 위한 의료제도)”, “그린뉴딜”과 같은 기후변화대응을 위한 행동계획 또는 엄청난 재산의 일부를 환원하는 억만장자에 부과되는 “자산세”에 대한 빗발치는 요구를 저격하는 노골적인 언급이었다.

오바마의 발언은 해시태그 “#TooFarLeft (극심한 좌파성향)”를 타고 트위터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 극심한 좌파성향(too far left)으로 비춰진다면 “그것이 사실이다”는 입장을 보였다.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 진보적 후보자들을 훈계한 사건은 지난 몇 주간 두 번이나 발생했다. 그는 10월말에 있었던 한 행사에서 “순수하다고 믿는 신념,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태도,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태도라고 치부하는 태도는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하는 병폐다”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마치 고집스런 보수적 세대의 미국인들이 좌파를 “암적 존재”라고 비난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짐작하건데, 오바마는 자신이 속한 당의 진보적인 목소리뿐만 아니라 좌파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가장 인기있는 두 대통령 후보자인 버몬트주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와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렌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상기 두 대통령 후보자는 여론조사에서 중도성향의 선두주자이자 오바마 정권시절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보다 점차적으로 누적 지지율을 꾸준히 높여오고 있다. 오바마의 발언은 밀레니엄 세대에 대해 꼰대 “OK Boomer”가 신랄한 반박을 하는 것에 해당한다, 젊은 세대들은 불의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는 꼰대들의 잔소리에 지쳐 있다.

중도파들은 바이든과 오바마보다 매우 진보적인 후보, 즉 자신들이 속해있는 당파의 정체성을 위협을 하는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밖에 없을 상황에 우려하고 있다.

흔들림없는 샌더스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비판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최저임금을 생계가능한 수준의 임금으로 올려야 된다고 말한 것은, 미국의 시스템을 망가뜨리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보건의료 분야에 관련하여 “미국만이 세계 주요국 중 유일무이하게 남녀노소의 의료보험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명예를 종식시키자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30년 전에 시작했었어야만 했던 일을 이제 하려는 것뿐 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이러한 발언들은 하루하루 고생하며 살아가는 수 백만의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리지만, 불평등한 체계를 통해 이익을 받고 있는 (기득권)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정치는 지금까지 양당의 야합으로 경제체제를 부유한 엘리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갔으며, 이들 입법자들은 지난 날 미국의 부를 더욱 공평하게 분배한 적절한 제도(뉴딜)를 “폐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백만장자가 아닌 미국 국민들이 “역사상 최초로, 지난 해 미국 백만장자들이 중산층보다 적은 세금을 내게 되었다” 라는 보도 자료를 읽었을 때, 이는 마치 오바마가 우리에게 이런 좋은 제도를 폐지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처럼 매우 모욕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좋은 제도는 백만장자와 오바마를 포함한 백악관과 의회에 있는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붕괴되어 왔다.

샌더스와 워렌의 인기는 미국 내 곳곳에 퍼진 국민들의 분노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당연스레 부유한 엘리트층의 걱정을 자아내고 있다. 그들의 상상할 수도 없는 만큼의 부(1억 달러를 갖던 10억 달러를 갖던 한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에 있어서 실제로 아무런 차이도 못 느끼는)를 지키려는 어설픈 언설로, 그들이 처한 곤경을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과 비교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의 백만장자 레온 쿠퍼맨은 그가 비난을 받은 상황에 대해 불평했다. “백만장자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당신도 사람들이 즐겨 구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한다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걸요” 라며, 그는 아주 쉽게 역겨울 정도로 엄청난 부를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쿠퍼맨은 불공평한 세금정책, 해외조세도피, 납세자 보조금 등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조작하여 일반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시했다. 그는 워렌이 제안하는 자산세에 대해 “나는 누진소득세와 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워렌이 싸질러놓은 빌어먹을 아메리칸 드림이다. “라고 말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워렌과 샌더스 같은 후보를 못된 트럼프 형의 그러나 좌파로 낙인을 찍은 사람들도 있다. “저명한 월스트리트의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워렌의 라이벌을 위해 모금하고 있는 민주당 소속”으로 알려진 어떤 이는 메사추세츠 상원의원에 대해 “트럼프 때 공화당원들이 겪었던 경험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녀를 평가하면서 그녀가 국가를 위해 끔찍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그녀를 더욱 강하게(고집스럽게) 만들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허둥대는 부자들은 한참 늦은 단계에서야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선거운동에 참여시켰다. 최근 경쟁에 합류한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개인의 재산이 너무 많아 선거자금을 모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반트럼프 광고에 1억 달러를 쓸 계획이다. 이에 열광하는 월스트리트의 경영진들은 그를 지지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한편, 경쟁에 뛰어든 또 다른 신인인 메사추세츠 전(前)총재 데발 패트릭은 그 시점에 다른 후보들이 더러운 돈이라며 피하던 수퍼 PAC(전미회의: 기득권자 집회)을 통해 들어온 기부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트릭은 또한 기업과 자본주의를 옹호 하는 것을 출마의 핵심으로 잡았으며, AP통신 인터뷰 도중 “이 나라에 진행되고 있는 사적 이익의 투기가 만들어낸 좋은 예들이 많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AP 통신은 패트릭이 ” 석유 및 가스회사의 자문역으로 일했던 사실과 비우량 대부회사로 2012년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산층에게 약탈적인 회사라고 비난했고 롬니 후보의 목을 조여왔던 사모펀드 베인 캐피털에서 중역으로 봉사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민주당 후보 중 중도파의 상위를 형성하고 있는 바이든과 인디애나의 사우스밴드 시장인 피트 부티지지는 많은 후보들로 넘쳐나는 지역에서 선두가 되기 위해 헛수고를 해왔다. 바이든의 아들 헌터가 우크라이나 석유회사 이사회에서 보여준 부도덕적인(불법이 아니라면) 입장이 계속해서 언론의 헤드라인에 대두되면서 바이든은 하락세를 타고 있다. 前부통령 스스로도 최근 대마초를 “게이트웨이 드럭 (습관형성 약물)”이라고 칭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하는 등 끊임없는 말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부티지지가 일단의 상승세를 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민주당의 중요한 지지층인 흑인유권자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흑인유권자들이 대놓고 동성애자 후보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단순하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주장을 넘어, 그는 사우스밴드 사법제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현재,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흑인유권자 지지를 조작한 것에 대한 조사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몇 달 뒤면 민주당내 중도세력으로부터 트럼프를 이기기 위해 자신들 성향의 단일후보를 집중해서 밀어주자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될 것이다. 그러한 후보는 공화당과 타협하고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이 덜한 노선, 즉 트럼프 이전의 현상유지를 유지할 수 있는 온건한 중도주의자여야만 한다는 이야기 또한 들을 것이다. 중도주의자들은 유권자들이 무식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그들 스스로 샌더스나 워렌 후보 간에 단일후보화 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오바마가 좌파를 비난한 행사에서 그는 “그들이 오차범위의 밖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오바마는 조심성이 없는 대통령 후보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패배한 최근의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신중하지 않다. 불평등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기득권) 사람들이 신중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희망스럽게 전망하려 해도, 그들의 시대가 이미 끝나가고 있다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Sonali Kolhatkar

Truthdig의 주요 기고자이자, “Rising Up With Sonali,” TV & Radio show 설립자 겸 진행자

원본출처: Commondreams.org. 

금, 2019/12/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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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상태를 고려할 때 고등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고등교육은 인간이 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이런 역할에 실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도덕적 헌신을 상실하고, 다른 면에서 잘못되고 파괴적인 사고방식에 헌신하며, 또 다른 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걸 어렵게 만들기조차 한다.

현대 대학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 매우 세속적인 기관이 됐다. 한때는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이제 수백만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다. 이론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동시에 지극히 실용적이어서 문학비평과 이론물리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경영, 디자인과 나란히 존재한다. 대부분 학문분과들이 각자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졌지만, 대학의 전반적 구조는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학들은 경제성장에의 헌신이라는 지배적 문화에 긴밀하게 묶여있는 동시에 이성과 숙고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기관이면서도 이런 전통의 기본적 가정들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계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거나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재 형식의 대학을 심각하게 재고할 이유가 없다. 현대 대학들은 세계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의 길에 서지는 않았다. 현대 대학들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바탕의 가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과 정치의 지도자들, 계획가와 분석가들, 교사와 시민들을 교육하며 우리의 파괴적 관행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발전시키고 합법화한다. 현대 대학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환경위기가 가장 심각하고 사회적 부정의(이는 환경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가 역사상 가장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 해체와 환경 파괴에서 대학이 해온 역할은 크게 주목 받지 않는다. 환경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과잉인구, 과소비, 대규모 산업, 공공정책,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등에 초점을 두었다. 대학은 대규모 산업, 정부, 종교의 이해와는 떨어져 있거나 거기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전반적으로 대학구성원들의 입장은 자연세계의 파괴에 대한 비난이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 붕괴에 있어서도 대학의 책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대학들이 도시화를 촉진하는 이동성과 개인주의를 교육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돼왔다.

 

현대적 믿음에 대한 대학의 헌신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의 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와 모든 서식자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보증해야 한다.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의미가 부족하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무제한의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경고하는데, 이런 경고와 발견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실재가 물질로 환원되고 그런 물질은 내재적 가치, 경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는데 비해 (암묵적으로는 대다수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대학의 다른 학자들은 최소한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고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행동과 믿음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대학의 분과구조는 이런 모순적 관점이 어떻게 두 가지 모두 진리로 통용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실재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대신, 서로 정반대인 추상적 개념을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대학은 현대성의 한 버전인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후현대적 입장을 보태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 그리고 중력 같은 물질적 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대학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세계관, 즉 오래 되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잔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세계관이다. 유물론은 초기의 이원론에 비해 더 큰 장점을 갖는다. 비이원론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한 실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따른 문제를 피해간다.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경험(인간의 경험을 포함), 자유(인간의 자유를 포함), 내재적 가치(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포함), 도덕적 미적 규범 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생명이 없고 의미와 목적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을 향유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 대학은 또한 경제주의에 경도돼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되며 돈은 은총처럼 무한하다.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섯 배나 팽창했는데도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 전반적인 환경이 전지구적 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대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쇠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믿음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의 경제활동이 무한히 팽창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고 건강한 생태권역과 양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경제주의가 보편적 부라는 공공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주의는 잘못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큰 지구의 쇠퇴와 인간의 고통을 가져온다. 단순히 말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 대학들이 직간접적으로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한,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세계와 한편이 될 수 없다. 경제주의는 삶의 의미를 소비와 소득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용한 대학은 자연세계의 파괴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증진시킬 뿐이다.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대학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이 있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생각이 진리로 간주되며, 전 세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증됐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 열세 가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실재는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우주는 목적이 없다.

3. 진리, 정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주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

4. 사회 전반의 건전도는 GDP로 측정될 수 있다.

5.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은 문제가 아니다.

6. 교육은 직업훈련과 출세에 관련된 것이다.

7. 공장식 농축산업은 효율적이고 필요하며 지속가능하다.

8. 모든 중요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9. 개인이 사회보다 더 현실적이다.

10. 가능한 최선의 세계질서는 하나의 슈퍼파워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미국이다.

11.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12. 전쟁과 부정의는 피할 수 없다.

13. 경제성장은 기후안정성이나 생물다양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루려면, 고등교육을 재발명하거나 현재 상태의 고등교육을 다른 종류의 고등교육으로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해주는 형식의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위에 제시한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이 목록에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만든 목록은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미국 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요점은 대학들이 당대의 문화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몇몇 중요한 생각들은 현재 구축된 고등교육의 맥락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형식의 대학이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의 구조와 관련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형태 짓는 광범위한 문화적 가정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대학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오늘날 대학은 학문분과에 따라 조직돼 왔다.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학문분과는 탐구분야, 기본적 가정의 세트,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학문분과에 맞지 않거나 현재 분과의 기본가정과 모순되는 생각은 오늘날 고등교육의 맥락 안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해롭다고 꼽았던 위의 모든 생각들은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분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데 닫혀있다. 이론상 철학 같은 다른 분과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이것이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물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거나 우리는 물리학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초점은 실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학이 구조화된 방식 때문에 이런 생각이 대학에서 타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산업화된 농업은 산출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토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어보겠다. 농경제학이라는 분과는 그것이 바이오기술과 결합돼 있는데다 대규모 농화학제품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에 위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많은 대학에 있는 환경연구, 지속가능발전, 음식연구 관련 학과들이 현대 농업은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만, 이런 학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일반적으로 대학 안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학과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정책과 관행을 만들어내는 농과대학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학들이 위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이 이미 “상식”이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라는 생각과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쌍둥이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은 끝없이 가능하며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 즉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고강도 노동, 탁월한 경제정책과 함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을 배반한다. 그러나 전체 그림은 좀더 복잡하다. 한국의 삶이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며, 10년마다 두 배가 되는 경제성장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것은 경제성장이 끝없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그 뿌리가 있다.

대학은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된 “상아탑”으로 불려왔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진실은 대학이 사회적 구성물이며 문명의 상식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는 경제학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 최소한 미국 대학들이 “경제학은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을 고려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에는 대개 소규모인 사립대학들과 대개 대규모인 공립대학들이 섞여 있다. 미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공립 대학에 다니고 있다. 공립대학 교수들은 각 주에 고용돼 있다. 일부는 종신직위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현재는 70%의 교수들이 종신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수들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지만, 매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런 자유는 다음 학년초에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는 열망에 의해 제한된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강의하는 게 결코 편안하지 않다. 슬프게도 정규직 교수들조차 종종 승진하지 못하거나 학생들의 평가에서 별점을 덜 받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피한다.

한국 대학들이 대개 사립이라고 하더라도, 내 짐작으로는 상식적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압력들이 존재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일반화에는 예외가 있으며 이런 예외를 축하해야 하지만, 이런 예외가 더 큰 진실을 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학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자신들의 상당한 권위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잘못되고 파괴적인 생각에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지식”을 재생산함으로써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간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 제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두 가지 제안은 가능성의 전부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제안이 더해지길 바란다.

큰 대학의 교수들은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대해 탐구하는 독서그룹을 조직할 수 있다.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독서그룹에서 한 학기 동안 한두 권의 책을 공들여 읽도록 한 다음,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신들과 전공이 다른 동료들과 서너 번 만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중간규모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이것과 비슷한 강의를 시도했다.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것의 사회적 함의였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특수한 학문분과 바깥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학의 분과구조였다. 비록 임시적 토대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교수들이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현재의 대학 구조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독서그룹이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어떤 생물학과 조교수가 학생들이 생물학 전공기초 강의에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 부분은 선택강의이며 많은 강사들이 이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생물학과는 전공기초 강의에서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를 필수강의로 지정했다. 이론상 다른 학과의 교수들도 전공기초를 정하면서 비슷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 얻은 또 다른 결과는 약 100명의 교수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정보를 자신들의 강의에 넣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것이다. 이런 서약은 교수들에게 부과된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적 결정이었으나, 그들이 이 서약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대 대학처럼 오래 되고 존경 받는 제도를 금방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독서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이 변화를 위한 맥락을 만들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종류의 분과를 횡단하는 노력들이 현대 대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제안은 대학 바깥에 대규모로 존재하는 성인학습센터와 관련된 것이다. 1920년에 독일 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그는 독일 대학들의 비인격적 교육에 맞서 레흐르하우스(Lehrhaus, 교육의 집)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했다. (역자주: 당시 독일에서 제기된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면서도 유대의 전통에 기초한 성인교육기관으로, 회당(synagogue)을 학교(lehrhaus)로 바꾸되 거꾸로 하지 말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유대역사에서 첫번째 레흐르하우스는 제1차 바빌론 유수때 세워졌으며 혁신적 교육방법으로 신앙의 의무를 지켰다.) 레흐르하우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유대식 삶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에 대응하고 비위계적인 교수법을 도입하는데 있었다.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레흐르하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활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에 레흐르하우스 모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1960년대에는 몇몇 “대안대학”들이 미국에 설립됐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제도권 대학들이 실패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 건강한 공동체, 지속 가능한 경제학 같은 구체적인 문제 혹은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문명을 증진시키는 발상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성인학습센터 혹은 “대학”을 설립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대학” 혹은 성인학습센터는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을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나의 주안점은 현재 형식의 대학들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대학들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생각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무능력하다. 물론 문화 자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고등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학을 내부와 외부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현대 문화의 모든 다른 측면들까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출발점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고등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커스 피터 포드

철학자, 『현대 대학을 넘어: 구성적 후현대 대학을 향해』 저자

월, 2019/12/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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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주요 성과로 평가되는 한-아세안 협력여부는 세계최대 규모의 무역협정으로 평가되는 RCEP의 실현 여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 안보전략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RCEP의 체결을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인 스틸웰의 임무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경제협력이 절실하며, 중국을 경계해야 하는 인도가 일단 RCEP에서 한발을 빼자, 일본 역시 이를 무력화하는데 앞장서는 양상이다.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는 아베 정권은 경제보다 안보를 우선하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히데키 마키하라 일본 경제산업성 부대신(차관)은 지난 11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인도가 참여하지 않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서명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해당 언급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되는 무역 협정의 운명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이번 달 초,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가장 취약한 시민 계층에게 미칠 수 있는 협상의 잠재적 위험성을 언급하며 인도는 협상에 불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도가 협상에서 빠지게 되면, 일본 또한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김으로써 협정 추진을 위해 노력하는 기타국가들이 또 한번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저우융성(周永生) 중국 외교학원 국제관계연구원 교수는 이번 일본의 결정 뒤에는 안보에 대한우려의 우세가 있던 것 같다고 전하며 “일본은 아직도 미국의 무역 관세 압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RCEP를 타결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단독으로는 지역 내에서 중국의 권력과 균형을 잡을 수 없기에 인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덧붙였다.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인도가 RCEP에 참여하도록 설득해 왔다. 일본은 인도가 협정에서 이탈한 이후 인도가 다시 협정에 참여해야만 협상에 서명하겠다고 밝히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본과 인도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의 RCEP 이탈 가능성이 불거졌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일본과 인도의 외교·국방장관(2+2) 회의는 토요일에 시작했고, 양국은 안보 및 국방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조만간에 아베 일본 총리의 인도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중국과 아세안 국가의 관계가 완화하고 일본과 한국(ROK) 관계가 악화하는 현 시점에는, 아시아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간의 협력은 특히 전략적으로 필수적이다. 일본도 RCEP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내비치는 표현은 더욱 여세를 몰아서 인도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저우교수는 일본-인도 협력은 전략적, 지정학적 합의를 통해 소위 ‘중국 위협론’을 억제하기 위해함께 노력하겠다는 점에 항상 중점을 두었다고 가리켰다. 양국은 이미 2011년에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양국간 무역관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대일 인도 수출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대일 인도 무역적자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과장된 위협 담론 아래에서 상호 안보 이익을 이유로 양국이 동맹을 맺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진정으로 이번 협상에서 빠지기로 결정한다면, 경제 전망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일본이 상황을 살피면서 다른 국가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인하기 위한 잠정적인 움직임으로 보인다.

해당 발언은 향후 일본이 RCEP 협상 테이블에 다시 합류하도록 할 수 있는 부대신으로부터 나왔다. 일본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2%를 기록하며 지난 2분기 성장률 1.8%에 견줘도 대폭 하락한 점은 아베 총리의 내각이 경제 촉진 부양책을 대폭 강화할 필요성에 대해 갖는 상당한 중압감을 의미한다.

RCEP 협정문은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맞서 동아시아 무역을 활성화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WTO 개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되면서 RCEP 체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욱 통합된 동아시아를 이룩하기 위해 중요한 첫 관문이다. 이미 중-미 무역 전쟁이 세계 수요에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수출 주도의 일본경제는 RCEP와 같은 협약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일본이 협약에서 빠지는 쪽으로 결정한다면 거짓된 담론을 통해 안보 우려를 경제적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저우 교수는 “심화된 지역경제는 제지할 수 없는 추세이며 단일 국가나 지도자에 의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다른 RCEP 국가는 일부 국가의 계획적인 결정 때문에 핵심 지역의 이해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목, 2019/12/2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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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전체의 소멸은 보기 드문 사건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된다. 그야말로 국가가 소멸하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참패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소멸보다는 새롭게 부상하는 주도 집단이 기존의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명령을 새로운 체제로 이행시키는 경우가 훨씬 보편적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신속하고 격렬하게 일어나거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건설적이거나 또는 파괴적인 과정이 얽혀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지니며 세계 제1의 압도적 군대 강국이자 여전히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위와 같이 전면적인 파멸을 당하는 일은 실제로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현재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관리하는 소수의 특정 이익집단이 완전히 상이한 유형의 주도 집단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주도 집단은 미국인 전체에 최선인 이익을 더 잘 반영하고 전 세계 국가들과 대립하기보다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협력과 지속이 가능하게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진행 중이다.

 

America’s Prevailing Order is Fading

미국 지배 체제가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주도하는 현 상황의 특정 이익집단은 월가와 워싱턴 위주로 활동하고 있고, 전통적인 은행, 에너지, 제조 독점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점 비현실적이고 지속 불가능하며 구태의연한 네트워크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대중 매체, 대규모 로비 활동, 해외 정치적 전복, 국내 정치적 분쟁 등 기존의 특정 이익 집단은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수많은 수단을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전 세계 국가가 점점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효과적인 대응책 개발을 시작함에 따라 이들 수단의 효과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특수 이익집단은 ‘러시아’나 ‘중국’의 ‘선전(propaganda)’에 대항하기 위해 일단 겉보기에 엄청난 시간을 쏟지만, 실제 월가와 워싱턴이 행사한 부당한 영향력을 폭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적국들이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 내부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대안 매체들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있다.

미국 사회의 기존 엘리트 계층과 네트워크가 약해짐에 따라 이를 대체할 대안의 집단과 수단들이 계속해서 강력해지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해외 군사 작전과 동일선상에 결부되어 지속 불가능한 사회경제 및 정치 모델은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와 언론 방식과 더불어서 평범한 관찰자에게도 현재 미국 내 지배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여진다.

 

America’s Elite Face Challenges from Within as Well as From Abroad

미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국내와 해외로부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오랫동안 자리한 미국의 독점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중국 기업에 대한 내용은 세계 언론에서 점차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무의미한 미중(美中) 무역 전쟁을 촉발한 것은 사실 이런 상황의 변화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미국 내 기성 엘리트 계층의 쇠퇴만 부각시킬 뿐 그들이 지닌 본질적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화웨이와 같은 기업은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제재와 노력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화웨이는 견실한 기반을 갖춘 사업과 경제 기초여건을 토대로 갖추고 있었고, 미국 기업들은 경쟁 부재라는 초기 이점을 가졌지만 기초여건 구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기성 엘리트는 중국 기업 외의 여러 도전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파괴적 기술을 보유한 몇 회사는 미국 내에서 성장하면서 대외 경쟁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 기반을 둔 견고한 독점 체계도 도전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제조사 테슬라(Tesla)가 완벽한 예시이다. 테슬라의 놀라운 혁신 속도, 세간의 이목을 끄는 성공,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다른 무엇보다 미국 자동차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또한 한 세기에 걸쳐 미국이 도입하고 전 세계를 장악해온 석유 중심의 에너지 모델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진정한 소비자 가치와 혁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의도된 관행과 구식의 마케팅 술수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자했다. 이들 산업은 단순히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고 매해 이윤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동차제조’는 단지 돈과 구매 영향력을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다.

반면에 수 년간 테슬라는 사업과 사회정치적 영향 측면에서 모두 성장해왔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테슬라의 표면적인 매력을 흉내 내려고 시도했지만, 신설 회사의 성공을 주도한 본질을 이해하거나 복사하는데 실패했다.

미국 엘리트 계층이 해외의 화웨이와 같은 경쟁사를 상대할 때 직접적인 경쟁보다 ‘더러운 술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전략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유사한 발식으로 ‘미국 내의 테슬라와 같이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한 회사에게 ‘더러운 술책’을 사용했다. 가짜 노조가 테슬라의 미국 공장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던 사건이 한 예시이다.

미국의 신생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 X’는 오랜 기간 자리한 미국독점업체에 직접적으로 도전한 (그리고 위협하는) 미국계 경쟁사의 또 다른 예시이다. 이 경우, ‘스페이스 X’는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보잉(Boeing), 노스럽 그루먼(Northrop Grumman)과 같은 우주 독점업체와 맞섰다.

‘스페이스 X’는 놀라운 속도로 우주 항공혁신을 이끌면서, 동시에 우주 여행의 전반적인 비용을 절감시키고 있다. ‘스페이스 X’의 인상적인 비용 절감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로비 네트워크를 형성한 록히드, 보잉, 노스럽과 같은 기존의 항공 독점업체는 ‘스페이스 X’ 고객들의 (미국 정부를 포함) 로켓 여행 탑승 구매를 저지시키지 못했다.

로비와 정치 게임을 통한 이윤 유지에 지나치게 의존 해온 거만한 독점업체는 실제 경쟁이 도래하여 경쟁업체와 직면했을 때 거대한 조직을 재정비할 대책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책을 이끄는 지배적인 체제는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추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경쟁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현존의 지배 체제를 대체하는 세력은 미국 기존의 권력과 영향력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미래로 향하는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갖는다. 또한, 미래로 나아가면서 미국과 미국민 및 미국과 교류하는 세계 국가 모두에게 근본적인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America’s New Order May Seek Genuine Competition and Collaboration

미국의 새로운 질서는 진정한 경쟁과 협력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테슬라와 ‘스페이스 X’는 중요한 예시지만, 미국 내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진행중인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는 결코 아니다. 현재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는 새로운 혁신과 기업들이 등장하고 하여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뿌리 깊은 기업언론을 겨냥한 대안 매체들부터 미국의 대규모 농산물 독점업체들을 위협하는 지역 유기농 농부들의 고조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이미 실질적인 전환 사례가 많이 발생해 왔다.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국제적 수준에서 투자하거나 기여할 수 있다.

새로운 미국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신호로는 테슬라와 같이 기존 체제를 파괴한 기업이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꺼려하지 않고 독점을 위해 세계적 규모의 네트워크 망을 구성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업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한 예로 테슬라의 대규모 기가팩토리는 미국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 공장을 설립한 이유는 미국이 오로지 정치적이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이 미국 국내에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도록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 및 중국과 같은 국가 사이에는 명백하게 적대감이 존재하지만, 미국인들의 일반여론에 따르면 현존 질서의 표적이 된 모든 국가들과도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적대감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국가 혹은 국민으로서의 일반적인 미국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 미국 사이의 협력 및 건설적인 경쟁을 저해하는 특정 이익집단에 의한 것이다.

머지 않은 중간 미래까지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지속되면서 미국의 특정 이익집단이 권력을 손에 넣어 유지하려 하고, 불가피한 쇠퇴 및 변동과 맞서 싸우며, 외부 세계와 미국 내부의 경쟁자와 싸우려고 애쓸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기보다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경쟁하면서 자신을 다극화 세계의 건설적인 일원으로 여기는 희망적인 미래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민족은 미국과 불필요하고 광범위한 적대행위를 삼가고, 대신에 현재 월가와 워싱턴에서 행해지는 활동을 끈기 있게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폭력적인 관행에 근거하여 진행 중인 쇠퇴에 책임이 있는 미국 내 깊게 자리한 이익집단과 진정한 경쟁과 타협을 추구하는 한편, 미국의 미래를 대표하는 미국 새로운 주도집단을 구분하여 후자의 이익집단과 유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편,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심지어 많은 신흥 및 개발도상국의 대외정책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거나 유화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여러 국가들의 중심역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 일어나는 변화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미국 제국의 몰락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미국 기존의 권력 지렛대를 활용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대체 세력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울슨 군나르(Ulson Gunnar)

뉴욕 거주 지정학 분석가이자 온라인 잡지 ‘뉴이스턴아웃룩’ 의 기자

출처 : Global Research, December 10, 2019

목, 2020/01/0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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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월, 2020/01/0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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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파리에서 행해진 기후 변화 협약이 이번에는 12월 1일부터 2주간 마드리드에서 이루어 졌다 (불행하게도 모임은 회기를 연장하면서 강제성 있는 합의를 도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심각성의 문제만 제기한 채, 내년에 있을 영국의 글래스고우 모임으로 강제성이라는 임무를 순연시켰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세계는 비극적인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이 부족하다. 유엔 사무총장은 산업화 이전 평균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보다 낮게 유지하고 이상적으로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2015 파리협약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이 “전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스페인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 협상을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5)에 앞서 지구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점 (환경 복원이 불가능한 시점- tipping point)”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화석 연료 보조금을 지속하고 탄소세 부과를 거부하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아마도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지구 온난화 상태가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기후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태인지 추측하는 연구 결과를 읽었을 것이다. 기후 ‘티핑포인트’ 9 종류의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현재 ‘행성 비상사태’에 처해 있고, 아마도 온실지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으로 빙하 격감과 같은 일부 기후 위험은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5도 상승할 경우 발생한다고 예측되어 왔지만, 이후 모델을 통해 해당 기온의 폭을 1도에서 2도 사이로 낮췄다. 심각하게도, 연구진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티핑 포인트가 상호작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연쇄 피해를 일으킬 조짐을 보인다고 경고한다.

독일 및 덴마크 학자들과 협업한 티모시 렌턴(Timothy Lenton) 영국 엑시터 대학 지구시스템 연구소 소장은 “악영향을 끼치는 급변 연쇄 작용을 막을 수 없다면 이는 문명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연구진은 위기 관리 측면에서 평균 기온 상승폭을 섭씨 1.5도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경제적 행동을 촉구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IPCC)에서는 지구 기후 시스템의 ‘대규모 불연속’을 티핑 포인트로 정의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에는 북극해 빙하와 아마존 열대 우림과 같이 익숙한 상징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는 열대 지방의 따뜻한 한 물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심해의 차가운 물을 남쪽으로 가져오는 대서양 자오선 역전순환류인 ‘컨베이어 벨트’와 북위도를 감싸며 때로는 영구 동토층 위에 자리해 광활한 탄소 저장소 역할을 하는 상록수 숲인 타이가가 있다.

실제로 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로도 되돌릴 수 없는 급격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임계점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세계 기후의 일부 요소는 기타 요소보다 임계점에 더 가까이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린란드 빙하는 임계점에 거의 도달했을지도 모르며 빙하는 티핑 포인트가 지나면 가차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북극해 빙하 감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다. 빙하는 심해보다 빛을 더 많이 반사하므로, 빙하가 녹으면 열 흡수율이 증가함에 따라 온난화가 가속된다.

두 현상 모두 북대서양에 더 많은 담수를 유입시키고 컨베이어 벨트를 늦춤으로써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속도가 늦어진 순환이 서아프리카의 몬순을 흩뜨려서 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가뭄을 촉발할 수 있다. 이후의 도미노 효과로는 남극 대륙의 빙하 손실을 가속화하는 남극해의 기온 상승이 있다. 기후 도미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위험성은 두 배로 증가한다. 지속적인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지구는 이미 지하에 저장된 탄소를 배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구 동토층으로 부터의 배출을 통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100기가톤(1Gt = 10억톤)을 채울 수 있다. 이는 3년 동안의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양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3.1Gt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종말론적 분석을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피어스 포스터(Piers Forster)리즈 대학 기후변화학 교수이자 IPCC 저자는 “1.5C의 온난화에서 그린란드의 빙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녹아내리더라도 수 세기가 걸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핑 포인트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포스터 교수는 탈탄소를 위한 행동의 지연은 “우리 자신을 비극적인 미래로 몰고 나갈 것” 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세계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위험성에 대처하고 온난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절하게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 이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네트 제로(net zero)로 만들기 위해 사회 내 재력과 능력을 활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앙이 닫쳐 오더라도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접근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안자나 야후자(Anjana Ahuja)

 FT 과학 평론가

목, 2020/01/0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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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흔히 맥이 빠지는 기사 헤드라인 너머의 현실에서는 다행히 각국 정부들과 기업들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 기구의 기능 마비와 같은 부정적인 현안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지난 2년간의 발전이 이루어진 실제 분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나서서 주도하는 한, 노력을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게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WTO 회원국 다수는 21세기에 무역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전자 상거래 협상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국가가 전자 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고, 2019년 12월 10일에는 WTO 회원국들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원칙(moratorium)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회원국들은 ‘규율화 된’ 수산업과 농업 보조금과 같이 전통적으로 다루기 힘든 쟁점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합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국내 및 국경을 넘어 투자와 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며 중소기업이 시장에 더 잘 진입하여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력이 변화하고, 기후위기의 난제에 대처해야 하며, 기술 발전이 상업에 지장을 주고, 시민들이 점점 더 포괄적인 형태로 모두를 위할 수 있는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핵심 중 일부가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무역은 사람과 지구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를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현재 무역 분쟁이 ‘법의 지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소 기구의 위기에서 야기한 시급한 과제를 넘어, 현재 정치의 역동성은 무역 시스템을 극적으로 개선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WTO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WTO 조직 구조와 책임 체제를 강화하여 시스템 내 신뢰를 구축하기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및 사업 단체의 참여 증진, WTO 과정 및 협상의 투명성 증대, ‘특별하지만 차등을 두는 방안’을 위한 증거 기반의 기준 확립은 시스템 신뢰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정부는 현 시점에 기존의 WTO 규정들을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990년대 초에 제정된 무역 규범은 갈수록 더 서비스 및 데이터의 흐름으로 특징되며 디지털 기술 및 글로벌 가치사슬로 가능해진 21세기 무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부단위에서 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불평등과 같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을 다룰 권한을 WTO에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독창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WTO가 세계화뿐 아니라 불만의 원인을 다루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큼 WTO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특히 아시아 태평양의 몇 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WTO의 세 기능(감시, 분쟁 해결, 협상)을 개혁하고 현대화하자고 제의했는데, 이는 정확히 국제상공회의소(International of Chamber of Commerce)가 요구해온 바이다. 호주의 복수국간 WTO 전자상거래 협상 촉진은 21세기 무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규범 제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WTO 상소 기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핵심적인 중재 역할은 공로와 공감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0일, WTO의 60 회원국이 규범에 근거한 다자간 무역 시스템에서 WTO의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재차 시인한 점은 고무적이다.

명백하게 정부 단위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초소형 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들은 지난 25년 동안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누려왔다. 세계 무역 시스템의 주요 사용자이자 수혜자인 기업은 WTO의 지지자가 되어 개혁 과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리더십은 무역이 일자리, 환경,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정당하게 불평하는 일이 보호무역주의와 후퇴를 요구하며 역효과를 낳는 방향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대신에 정부, 기업, 시민 사회는 무역 시스템이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 작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WTO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시기가 도래했다.

 

John WH Denton AO

파리에서 국제 상공 회의소 (ICC)의 사무처장

Damien Bruckard

ICC의 (무역 및 투자 분야)부회장

금, 2020/01/1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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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다른백년은 그 동안 워싱턴 프레임이라는 관점에서 홍콩사태를 보도해온 국내 언론의 한계를 벗어나, 독일에서 연구중인 중국본토의 젊은 학자의 시각과 미국 내 진보적인 지식의 견해를 소개한 데 이어서, 마지막으로 제3세계 정치경제 분석의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호주 국립대 (ANU)의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진의 입장을 번역하여 독자분들께 알리고자 한다.


중국과의 범죄인 인도 법안이 제의된 후 홍콩에서 평화적으로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이 넘었다. 이후 전개된 폭력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

그 동안 시위자들과 당국의 격렬한 대응에 의해 홍콩 도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비되었다. 폭력, 죽음, 대규모 체포와 잘못된 정보가 잇달았다. 경기 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해지면서, 호텔의 반 이상이 텅텅 비었고, 대학이 포위되었으며 소매업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고 일상적으로 교통이 마비되면서 경제가 위축하고 있다. 그러나 범민주 진영이 11월 말 지역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시위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부각시켰다.

시위운동에는 지휘하는 중심적 지도자가 없고, 다만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하라는 초기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구속된 시위대의 사면과 보통선거권을 포함한 나머지 네 가지 요구 사항은 행정부와 절충하기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보통선거권 개혁 과정에는 어려운 난관이 있으며, 실은 2014년에 이미 당시 야당 의원들이 변화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EAF 칼럼리스트 케리 브라운(Kerry Brown)은 ‘홍콩의 주민 대부분은 안전에 필요한 비용과 행정부의 대책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상황임에도 시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홍콩의 상황을 요약했다. 시위 및 당국의 대응이 격화하면서 ‘때론 베이징 정치 지도자들조차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중국은 상당한 국제적인 비난과 반발을 야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을 기피해왔다. 중국이 시위대에게 물러설 일은 없겠지만, 시위에 개입하게 되면 홍콩 내 혼란과 국제적으로 엄청난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국경 너머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도 사태를 지켜 보아야만 했다.

취약한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브라운이 설명하듯이, ‘2019년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2020년으로 사안들을 연기했을 뿐이다. 위기가 더 오래 이어질수록 홍콩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홍콩 주민의 복지와 동아시아 번영 및 안보에 있어 홍콩 도시가 지니는 중요성이 위기에 봉착했다. 잘 알려진 제도를 갖추고 있는 홍콩은 서쪽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며 특별하고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게 있어서 홍콩은 주권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서구 사회에 대한) 전방의 위치에서 기능적으로 제도 및 재정 기법을 배우면서 본토 경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경험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중국과 세계 다른 국가가 홍콩을 특별하게 여기는 요소가 줄어든다.

미국 의회가 11월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중국과 미국 간의 진행되는 심각한 패권과 전략적 경쟁이 더욱 복잡해졌다. 2019년 한해 전세계적으로 대규모 시위운동과 대응으로 많은 도시들이 마비되었지만 그 어떤 사건도 홍콩처럼 두 초강대국의 전략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배후에서 홍콩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그렇지만 다른 국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여자 모두가 패배하는 (lose-lose) 위기 상황에 자칫 연루되면 잃을 것이 많다. 지난 10월 팀 서머스(Tim Summers)는 다른 국가들이 워싱턴, 런던, 캔버라 라는 배후 도시의 시각이 아니라 홍콩 사회 전반의 내적 견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홍콩 정부를 지지하고 홍콩과 베이징의 이해 관계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폭력사태는 반드시 멈춰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홍콩 사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시위와 혼란이 멈추기를 바라며 시위대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기를 원한다. 양측이 체면을 세우면서도 홍콩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타협안이 필요할 것이다.

홍콩과 중국은 홍콩 헌법에 명시된 영국과의 50년 합의가 만료되는 2047년까지 ‘한 국가-두 체제’로 운영된다. 2047년 이후에 벌어질 일은 명확하지 않고, 그 동안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 지 22년이 지난 현재, 특히 중국에는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2047년에 다른 국가가 되어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번영 및 고소득의 꿈을 이뤄낼지 성공의 여부는 아마도 경제와 정치 제도 개혁의 가능성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국이 상기 개혁이 성공하면 본토와의 관계에 대한 홍콩 국민들의 사고방식 역시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위원회

호주국립대학교(ANU)

월, 2020/01/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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