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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을 극복하는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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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을 극복하는 한국사회

익명 (미확인) | 화, 2019/02/26- 15:12

5.18 망언을 계속 주장하는 지만원을 국회까지 초대해서 강연을 듣고 자한당 국회의원들이 그의 주장을 옹호하는 인사말 하면서 또다시 수면에 오른 5.18 망언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이번 5.18망언사태를 각별히 주목하고 비상하게 대처해야 하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5.18을 국가차원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을 부정하고 있고, 둘째, 한국사회의 오랜 패악인 이념프레임- 빨갱이, 종북, 종북좌빨 등으로 국민을 선동으로 갈라 치고 억압하며 정권을 유지해온 통치수단을 아직도 이용하는 집단이 제1야당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셋째, 한국사회가 이런 극우정파를 용인하며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5.18 광주민주항쟁 역사풍속화> 한지에 붓그림, 2017년 5월에 그림, 김봉준 작

첫째 문제는 민주주의를 해치는 발언은 법적으로 처벌하는 법적 엄정성이 필요하고. 둘째 문제는 국회에서 발생한 망언에 책임을 지고 국회의원들을 제명 조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사회가 극우적 정치발언을 용인하고 보호하고 확대 재생산하려는 일부 시민과 언론인이 있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5.18 망언뿐만 아니라 세월호 거짓보도 옹호, 청와대 주사파 점령설, 문재인대통령의 김정은과 내통 밀약설(비서), 북미대화와 북미평화협정으로 한국 붕괘설, 촛불혁명은 좌파가 선동해서 만든 가짜 민주화운동설, JTBC뉴스가 폭로한 태블리피씨 가짜설 등 무수한 가짜를 양산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5.18 망언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극우적 선동선전을 계속하는 사회세력이 아직도 유권자의 10~20%를 점유하면서 한국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하다. 5.18진상을 재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헬기 기총사격이 있는지 조사하자니까 북한특수군 광주침입설도 조사하고 유공자 명단도 다 공개하라는 것이다. 정보 공개에는 형평성이 있어야 한다. 왜 하필  5.18 민주유공자만 공개해야 하나? 다른 유공자들을 공개한 전례도 없고 다 공개할 시 발생할 국가보훈체계가 형평성 논란을 야기하며 사생활 침해까지 주는 부담을 갖게 되며, 불필요한 국론분열을 야기할 것이다. 이걸 노려 정치적으로 끝없이 선전에 악용하려는 의도이다.  북한 특수군 개입설은 너무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 반론조차 필 가치도 없지만 한마디만하면 1980년 5월은 신군부의 계엄치하이고 미군의 정보망이 시퍼렇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북한 김일성의 특수부대가 그렇게 신출규몰한가. 특수군 600명이 들키지 않고 광주에 잠입하고 임무수행하고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니 귀신도 곡할 노릇이다. 지만원은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면서 600명을 사진대조를 해서 다 밝혔다고 사진증거까지 제출한다. 물론 이것은 법원에서 가짜로 판결까지 받아 유죄를 선고 받았음에도 아직도 그 소리를 계속하고 있다. 18일 어제도 태극기부대에서도 또 그런 주장을 하며 이게 사실이 아니면 왜 나를 잡아 가두지 않느냐고 말한다. 전진 이상이 있는 사람 같다.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여기서 집고 싶은 것은 국론분열로 국가권력 집권 전략을 삼는 세력들이 제1야당 세력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법 극우 정파가 국민의 세금을 받아 챙기면 나라를 어지럽힌다. 이들은 두 국민국가로 여론을 갈라 놓고 극우가 우파를 견인하며 제1야당을 극우중심정당으로 바꾸려는 전략이다. 최근에 자한당의 여론지지율 상승도 태극기부대의 당 가입과 그들의 여론전 덕택인 걸 보면 극우 중심 정당으로 기울어 가는 것이 기우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우파와 극우는 전혀 다른 종자다. 감기와 독감이 전혀 다른 병이듯이 극우는 폭력을 불사해서라도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무리다. 한국에서 아직도 폭력선동이 판치는 건 우파와 극우파쇼가 밀회 동거를 오랫동안 같이 해온 역사 때문이다. 이 식민지 유산이 권력으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온다.

나부터 밝히련다. 나도 5.18민주유공자다. 나는 그 때 광주에 없었다. 그러나 5.18 과 연루된 사건에 있었기에 인정받았다. 5.18을 알리려고 서울에서 ‘5.18 사태’를 알리는 유인물 배포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계엄포고령 위반자가 되었다. 첫 직장도 잃고 1년을 수배 당하고 계엄포고령이 해제 되고서야 한달 조사받고 겨우 풀려났다. 광주에 없었지만 5.18 민주 유공자가 된 경우다. 이런 경우도 많다. 이해찬 민주당대표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류되어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1999년경 5.18유공자 대상신청자 마지막 접수를 받는다는 신문공고를 접하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암투병을 하던 병실에서 병원비 마련에 고심하다가 생각한 것이다. 힘든 생활고를 벗기 위해서도 이를 신청한 것이다. 이것으로 혜택을 받았다. 직장을 잃어서 받은 생계비 피해를 계산해 주니 나로선 큰돈이 되어 기뻤다. 그러나 병원비 생계비 급한 것 쓰고 돈 관리를 하려고 백화점 점포 입점에 투자 했다가 분양사기에 걸렸다. 남의 말 듣고 결정한 것이다. 회사측과 입점자 사이 재판분쟁에 아직도 휘말려 이름뿐인 점주고 은행 빛만 갚아가는 신세가 되버렸다. 괜히 신청했다가 아직도 코가 낀 신세가 되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아직도 빚같으며 밥벌이에 허덕거리며 산다.

<3.1백주년맞이 만북울림 포스타> 디자인, 판화 김봉준 작

“5.18은 국가예산 축내는 괴물들이다”

“5.18은 북한군 600명이 침투해서 벌린 난동이다.”

이게 국회의원 입에서, 그들의 국회행사에 초대된 패널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유공자명단 공개를 마지노선처럼 내민다. 다른 건 사과하지만 투명한지 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다.  꼬리로 얼굴을 덮어 버린다는 식이다. 조금이라도 문제를 잡아내서 5.18 전체의 명예와 가치를 훼손 시키겠다는 것이다. 여론에도 밀리니까 그거로라도 명분을 잡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5.18망언을 계속 방치하면 나라의 역사를 뒤집어버릴 것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박정희 정신 계승정권이 되고, 남북대화와 남북평화를 가로막고 전쟁불사를 선동하며 냉전시대로 되돌릴 것이다. 그뿐인가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며 위안부문제, 강제노역자 배상문제, 독도문제 등에서 친일협력으로 갈 것이며 한미일군사동맹을 추진하며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일 것이다. 이번 5.18 망언으로 꼬리가 잡힌 것이니 지금 꼬리를 놓아버리면 다시 꼬리를 감추고 합법적 의회 정당활동이라며 이슈를 이유로 덮으며 대여공세를 늦추지 않은 것이다.

이제 3.1 대혁명이 발생한지 어느덧 100주년이 되는 3.1절이다. 범정부 차원이며 범시민적 차원에서 100주년을 자축하는 국민축제를 기획하고 준비 중입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응 펼쳐 ‘한겨레 큰줄당기기’와 ‘민족예술열두마당’을 26일부터 펼치고 3월1일 당일에는 ‘만북울림’ 전국 풍물패들이 나라굿을 친다면서 몰려들어 문화패만 1만명 이상 참가할 것이다. 광장에 10만 국민이 모이기는 촛불 이후 처음일 것이다. 100년의 민족 수난을 딛고 이제 버젓한 정상적 민주시민사회로 가는 길을 여는 거대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범국민대회에서 모든 시민사회단체와 종교단체도 참여한다.

이때도 어김없이 소위 태극기부대도 참가할 것이고 극우적 발언과 몸짓으로 과격한 선동과 폭력적 언행을 불사하며 행사를 방해할 지도 모릅니다. 자기들끼리 하면 소외 되어서 인지 광화문 한 복판에서 대형 스피커 켜고 연설하고 심지어는 단식연좌농성도 한다 더이다. 이번에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불가피하게 접할 것입니다. 2년전 촛불집회에서도 그들의 세력은 거대한 시민대회에 밀려서 세력이 크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두고 볼 일입니다. 이번 3.1 100주년기념 축제는 태극기로 태극기를 덮을 것이며, 극우 폭력을 평화의 힘으로 압도할 것입니다. 이번이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 거듭나서 새로운 평화번영의 시대로 가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포스타> 디자인과 그림, 김봉준 미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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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공식 출범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300여 명의 하객들이 행사가 열린 서울글로벌센터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새로 출범하는 다른백년의 미래를 축하했습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다른백년 5인 이사들의 토크쇼. 김미경 PD의 사회로 열린 토크쇼에서 5인 이사들은 서로의 인연, 다른백년이라는 조직을 만든 이유, 향후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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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 독수리 오형제, 5인 이사들의 토크쇼가 김미경PD의 사회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동춘 다른백년연구원 원장은 “내가 젊었을 때는 사병, 하사관의 입장에서 장교급 선생님들을 간판으로 모시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내가 장교의 나이가 되고 보니, 사병과 하사관을 찾을 수 없다”며 “장교의 입장이 된 뒤에도 사병을 모으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김 원장은 ”앞으로 다른백년에 젊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더욱 많이 모여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활동이 분출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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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창립대회에는 300여 명이 하객이 참석해 다른백년의 출범을 축하했다. 하객들이 5인 이사들의 토크쇼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은 “30년 넘게 신문기자로 일해오면서 항상 중립적인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며 “그런 직업적 태도를 통해 세상을 비판해왔지만, 그런 비판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움직임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팝페라 가수 율리아 신 교수의 노래와 프롬코리아팀의 북 공연은 행사장의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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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신 교수의 노래(왼쪽)와 프롬코리아 팀의 북 공연으로 출범식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날 행사는 오후 7시30분에 시작해 9시쯤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프레시안에서도 이날 행사를 상세히 다뤘네요. (“그 많던 민주화 운동가들은 어디로 갔나”)

또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도 다른백년 출범식을 말하고 있네요. (‘시민’과 ‘주민’, 대화가 필요하다)

월, 2016/06/2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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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아가씨> 두 작품의 관람 가능 연령은 몇 세일까? <아가씨>는 여배우 김민희의 파격적 정사장면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19금이라 여길 듯 싶다.

그렇다면 <곡성>은 어떨까? 몹시 훼손된 신체가 등장하고, 일가족 살인과 같은 끔찍하고도 잔혹한 일도 벌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몇 세 관람이 적당할까? 정답은 15세 관람가이다.

15세 관람가, 만 15세 이상 관람을 권하는 영상물. 선정적, 폭력적 장면이 나올 수 있으나 청소년들도 충분히 관람할 수 있을 수준의 영상물을 가리켜 15세 관람가라고 부른다. <곡성>의 최종 관람 등급은 15세 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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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스틸컷.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곡성>이 개봉한 이후 과연 <곡성>이 15세 관람가가 맞는가에 대한 격론이 오갔다. 공포, 스릴러, 미스테리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곡성>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긴장과 공포일 것이다. 긴장과 공포는 관객에게는 충격으로 흡수된다. 물론 <곡성>에는 존속살해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출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살해 도구가 직접 등장하거나 살해 장면이 영화적으로 연출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연출된다는 점에서 찾자면 <곡성>에 연출된 가장 잔인한 장면은 아마도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받는 장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을 보고 난 많은 관객들은 15세 관람가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는 영화가 무척이나 잔혹하고 공포스러웠다는 고백과도 같다. 비록 회칼이나 도끼로 신체를 훼손하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끝내 마음을 졸인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무섭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공포란 단순히 도구의 노출이나 장면의 재연이라는 물리적 현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의 등급은 이렇듯 아리송한 경우가 많다. 얼핏 보면 <곡성>보다 더 잔혹할 것도 없어 보이는 영화 <신세계>는 청소년관람불가이다. 아마도, 범죄조직이 벌이는 범죄라는 점에서 좀 더 엄격하게 폭력성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세계>에 등장했던 정청(황정민)이 했던 대사, “들어와, 들어와”는 전 연령이 보는 T.V개그 프로그램 및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대사로 차용된다. 이병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 중 하나인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가 전국민적인 유행어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패로디가 굉장한 인기를 끌어 모은 셈인데, 패로디의 원관념이 애당초 19세금이다. 영화의 장면이나 내용이 주말이면 방영되는 짜깁기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패로디는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라 대중적 소비가 축적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원관념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문화-놀이다. 19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패로디된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영화가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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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가 19금이 되고, 또 어떤 영화는 청소년의 관람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문제적인 것은 대개의 한국 영화의 등급이 폭력에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선정성에는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를 댄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선정성에는 단순히 성적인 호기심 유발이 아니라 사회경제 및 정치적 면까지 포함되어 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청소년 관람 불가, 즉 19금을 받을뻔한 맥락도 여기에 닿아 있다. 남북한 병사들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묘사가 남북한 관계에 대한 오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주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천만관객이상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모두 11편이다. 이 중에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가장 많은 관람가는 15세 관람가였고, <국제시장>이나 <괴물>과 같은 작품은 12세 관람가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15세였는데, 왜 <국제시장>은 12세 관람가였는지 그리고 한편 동성애가 암시되는 <왕의 남자>가 지금 같았으면 과연 15세 관람가가 가능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청소년 관람불가야 그래도 동의할 만 하지만 도대체 12세와 15세의 구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등급위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을 영화소비자들 역시 공유하는 사회적 합의여야 한다. 관객수를 몇 백 만 명씩 가늠하는 관람 등급이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나뉘고 구분되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검열은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진 단어라고 하지만 체감상 영화 등급제도가 검열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는 비단, 영화표를 사는 데 나이가 걸려 민감한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테다. <다이빙벨>과 같은 작품의 상영에 단지 프로그래머들만의 결정이 전부가 될 수 없는 상황도 여기서 멀지 않다.

무릇 추상적인 기준에는 그림자가 많다. 좀 더 투명한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면 말 그대로 창작자의 견해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한다. 등급을 나누는 일이 권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화, 2016/06/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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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마지막 주에 두 명의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한국계 미국인 전순태,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베츠 헌틀리는 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우리를 잇는 끈이었고, 우리는 한국의 평화와 정의를 함께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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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태

나는 1980년부터 1982년 사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면서 처음 전순태를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가방 가게를 운영했는데, 광주항쟁 이후 현지 한인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각성의 일환으로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로 결심했고, 북한의 고향땅을 찾은 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 씨는 한때 방문이 금지됐던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많은 한국인들을 도왔다. 이후 그는 한국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디앤 보르셰이 림과 램지 림의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전쟁의 기억에 출연하면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화 웹사이트 중 전 씨에 대한 소개페이지 참조). 영화제작자 림 씨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전 씨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전순태는 우리 영화의 핵심 출연자로서,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실상과 끔찍하게 지속되는 한국의 분단,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염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국의 해방과 평화 통일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였다.

전 씨의 고향 개성은 38선 이남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영화에서 전 씨는 1950년 6월 개성의 한 저수지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했던 수영 시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날 저수지에 총탄이 떨어지고 기관총과 박격포 쏘는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휴전 회담으로 개성이 봉쇄 되는 바람에 전 씨는 개성 밖에, 전 씨의 아버지는 개성 안에 발이 묶였고, 그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전 씨는 남자형제 둘과 여자형제 하나와도 생이별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의 20년 후, 그가 첫 북한 방문을 한 뒤에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가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시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이자 국가의 분단상황을 타개하려는 열망이 큰 시기였다.

그는 “나는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게 행운이었죠. 그러나 4.19 이후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이건 낮이건 모든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당시 통일에 관한 메시지가 남북 학생들 사이에 오갔으며, 판문점에서 양측 회담을 열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면서 돌연 중단됐다. 전 씨는 “박정희가 역사의 흐름을 막았다”고 슬프게 말했다. 1980년, 전두환이 유사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떠올리게 했고, 전순태 씨는 다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자주 방문했던 시기 외에 그는 남은 일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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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6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숨을 거둔 베츠 헌틀리 목사는 아내 마사와 함께 광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여러 해 일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사 겸 원목실장으로 일하던 당시 그는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자행한 학살과 그 이후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를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항쟁을 목격했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많은 외국인들과 달리, 헌틀리 목사와 그의 아내는 광주를 떠나 피신하라는 미국 정부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계엄군의 공격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피신시켜 주었다. 지난 7월 7일, 광주 MBC는 헌틀리 목사의 공헌을 기리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헌틀리 목사 부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광주 항쟁의 직접적인 목격자들이었다. 1981년 2월, 나는 2달 간의 방한 일정 말미에 광주를 방문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부모님의 선교사 친구들을 통해 헌틀리 부부 이야기를 들었다. 헌틀리 부부는 나를 자신들의 집에 따뜻하게 맞이했다. 당시 헌틀리 목사의 집에서 나는 며칠을 지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과, 광주 시민들이 총알, 곤봉, 군화, 총검에 당한 끔찍한 부상을 직접 들었다.

헌틀리 부부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전두환의 광주 항쟁 진압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탐사를 시작했다. 헌틀리 부부를 방문한 지 15년 후, 나는 마침내 광주항쟁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더미(‘체로키 파일’을 말함-역주)을 입수했다.

내가 입수한 문서 중 하나는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외교전문이었다.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폭동’이라는 거짓 단어를 쓴 것이었다. 해당 문서에 나오는 내부자는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것이 헌틀리 목사의 증언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문서는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인간적인 시선을 담고 있었다.

헌틀리 목사는 이런 인상적인 구절을 남겼다.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집회를 지나치게 탄압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년 영국 본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 이는 이후 미국독립혁명의 발단이 됐다 -역주)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그는 또 “5.18은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나 침투, 또는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항쟁이 시민들의 정의와 민주주의 요구에 기반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광주항쟁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는 헌틀리 목사의 증언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헌틀리 목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광주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전순태 씨와 베츠 헌틀리 목사 모두 특별한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부디 두 분 다 영면하시길.

※ 기사 원문(영어) 보기 | See original version(EN)


취재: 팀 셔록
번역: 임보영

화, 2017/08/0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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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출범을 앞두고 김동춘 다른백년연구원 원장이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한겨레신문(6월 9일)에 실린 김 원장의 인터뷰를 전재한다)

“지난 100년의 뒤틀린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백년을 모색해야 한다.”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각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계에 봉착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진단하고 실천적 대안 담론을 기획하고 제시하려는 사단법인 ‘다른 백년’이 오는 16일 창립 보고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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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다른 백년’의 세 축인 연구와 논평, 포럼에서 연구분야 조직인 ‘다른백년연구원’의 원장(비상근)을 맡은 김동춘(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지난 60여년간의 근대화와 재벌주도 경제성장의 결과, 한국 사회가 양극화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고, 남북 기득권 세력 권력 강화에 정치적으로 이용돼온 70년 분단체제가 더는 지탱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다른 백년을 시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에게 지난 100년은 강요된 식민지적 근대화, 서구 따라잡기, 국가주의, 물질만능과 인간 존엄성 경시의 시대였다. 우리는 반쪽국가의 반쪽 주권, 남북 대결, 개발독재형 신자유주의를 재검토·청산하고 새로운 사회, 새로운 정치와 국가건설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른 백년이라는 이름에는 김 교수가 “반쯤은 성공이고 반쯤은 실패”라고 보는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실패’를 앞으로 백년간 또다시 되풀이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결의와 미래 비전이 담겨 있다. “지난 백년 우리의 근대는 처참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진 않는다. 성장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김 교수 등이 생각하는 ‘백년’의 기점은 한반도 근대의 출발점이자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펼쳐보였던 1894년 동학혁명이다. 그가 말한 “강요된 식민지적 근대화, 서구 따라잡기(추종), 국가주의, 물질만능과 인간 존엄성 경시”의 “뒤틀린” 지난 100년은 동학혁명이 일제 등 외세 개입과 내부 역량 부족으로 실패하지 않았다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근대화와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는, 그와는 전혀 다른 100년이 될 수 있었다.

“이 모임이 시작된 2014년이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갑오년이 60년마다 돌아오는 갑오세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해, 곧 120년이 되는 해였다.”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출범하는 다른 백년은, 동학혁명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인권과 평등의 다른 100년을 세우자는 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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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기록화

다른 백년은 진보적 가치와 담론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민간 싱크탱크인 ‘다른백년연구원’, 연구원에서 생산된 담론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매월 여는 토론회 중심의 ‘백년포럼’, 사회 현안들을 진단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논평 활동을 벌일 포럼 ‘백년을 위한 합의’를 축으로 민주주의 시민교육을 위한 부정기 프로그램 ‘백년학당’ 등으로 짜여 있다. 사무실은 서울 마포 도화동(독막로)에 “상근자 몇명을 두고 회의 등 간단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정도의 공간”으로 마련했다.

김 교수는 다른 백년의 집행기관이요 중심인 위원회 형식의 ‘5인 이사회’와 10인 확대운영이사회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원장을 맡고 있는 연구원은 “40~50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주주의·사회적 경제·자영업연구·평화통일 등 4개 분과팀이 있고, 이와는 별도 조직으로 설문조사 등을 벌이고 분석하는 리서치팀과 30~40대의 박사급 소장 연구자팀(일부 중복)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구미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의 하나인 민간 싱크탱크의 부재가 한국 사회의 중대한 취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이익을 대변하거나 실천담론이 부재한 아카데믹 위주의 대학 연구소, 선거용 단기 분석과 계파 나눠먹기 위주의 정당 연구소 등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엔지오(NGO)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시민단체인 일촌공동체를 만들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참여해온 이래경 이사장을 중심으로 김 교수,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 최상명 우석대 교수,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이 이사회에 참석한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그 줄기찬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국제사회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이자 가장 역동적인 나라로 칭송받던 한국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8년을 거치는 동안 일거에 후진국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며 “그만큼 우리 사회 민주화의 토대가 취약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백년은 바로 그 취약한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시 탄탄히 쌓는 작업에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 지지나 반대 등의 현실정치 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 정당이 아닌 정치를 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 건설이다. 30년 민주화 운동의 에너지가 고갈된 만큼 미래의 정치가, 사회운동가들을 키울 것이다. 책임있고 행동하는 지식인을 키우고 실천적 지식 생산과 유통의 거점이 되는 대학 바깥의 대학이 되겠다. 대중과 소통하는 대안 언론의 구실도 하려 한다.”

그는 “국가, 시장, 사회의 실패와 지난 100년의 뒤틀린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시민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며 이를 위한 전략으로 수출주도 성장주의 발전전략과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발전경로를 수정해 생태와 사회의 조화를 고려한 성장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지식정보기술 중심의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사회력’(사회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사회력이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 보통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강자에게 맞설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의 대표를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사회력이 고갈되면 경제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는 16일 저녁 7시30분부터 종각역 앞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창립보고대회에서는 김 교수의 기조강연과 5인 이사 토크쇼, 팝페라 가수 율리아 신의 노래, 프롬코리아(FK)의 드럼 연주 등이 펼쳐진다.

한승동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목, 2016/06/0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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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방해가 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이슨 본>이 9년 만에 돌아왔다. 2007년 <본 얼티네이텀>이후 9년만에 제이슨 본이 돌아 온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본 시리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12년 호크 아이 제레미 레너가 주연을 맡고 토니 길로이 감독이 연출을 맡아 <본 레거시>가 개봉했지만, 본은 여전히 우리에겐 맷 데이먼이었다.

맷 데이먼은 단순히 배우나 캐릭터가 아니라 제이슨 본 그 자체로 여겨졌던 셈이다. 그런 맷 데이먼이 다시 제이슨 본으로 돌아왔고, 제이슨을 제이슨 답게 연출했던 폴 그린그래스가 다시 연출을 맡았다. 원래 콤비가 되돌아온 것이다. 기대감은 여기서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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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본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원조 제이슨 본인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았다. 이 시리즈의 지지자들의 기대감이 크다. 이 시리즈가 선보인 자연주의 액션은 어느덧 액션영화의 문법이 돼버렸다. 위 왼쪽부터 개봉연도 순으로 2002, 2004, 2007, 2012년..그리고 이번 ‘제이슨 본’

본 시리즈는 액션영화의 패러다임이다. 즉, 과거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교체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래서 본 만의 시그니처 액션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가령, 생활주변용품을 활용한 일상 액션이랄지, 카메라가 배우의 액션 동선 뒤를 따라가는 촬영기법같은 것들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고안해내 어느새 21세기 액션 영화의 기본적 동선이 된 것이기도 하다.

영화가 개봉하자,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액션 체위가 등장할까 기대와 궁금증이 높아졌다. 개봉 이후 3일 정도가 지나자 들려오는 세간의 평은 이렇게 요약된다. 재미있다.

하지만 예전만 하지 못하다. 예전만하지 못하다를 좀 더 풀어보자. 제이슨 본이 나이를 먹었더라라는 소회가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본 슈프리머시>나 <본 얼티네이텀>같은 새로운 액션 체위의 제안은 없더라, 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반응은 좀 더 나아가면 실망이라는 단어와 가까워진다. 본 시리즈라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역시 세월이 지나 4번째이야기까지 되다보니 새로울 것 없더라, 프랜차이즈 영화들의 울궈먹기와 별 다를 바 없더라, 라는 실망 섞인 평가 말이다. 그런데, 난 여기서 좀 더 적극적인 옹호를 하고 싶어진다.

<제이슨 본>에서 그 실망은 현격히 줄어든 일인살상무술의 향연에서 비롯된다. 이런 식이다.

<본 슈프리머시>나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의외의 순간 다른 ‘요원’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엄청난 개인기와 살상 무술을 통해 ‘박살’을 내 주고 자리를 떴다. 어딘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가는데, 그 동선이 CIA의 정보망에 발각이 되고 요원이 투입되자 탈출하기 위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제이슨 본>에서는 추격이 시작 되고 최정예 요원들과 마주치기 바로 직전에 제이슨이 탈출하거나 혹은 한 명 정도 가볍게 밀치는 정도로 사건 현장에서 피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미리 문자나 도청으로 정보를 입수해 싸움을 피하는 장면도 여러 번이다. 만일 시시했다면 이런 장면들일 것이다.

액션 영화의 서사적 관습상, 이제 곧 피터지고 살이 찢어지는 싸움이 벌어지겠군 습관적으로 서사 근육이 위축하려던 순간 그냥, 긴장을 풀고 화면 밖으로 유유히 사라지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제이슨은 지난 9년간 나이를 9살 더 먹었고, -물론 서사적 시간이야 좀 다르지만- 그만큼 삶에 대한 태도와 식견이 달라졌다.

9살 더 먹으면 신체는 약해지지만 적어도 정보 분석의 능력과 눈치 그리고 노하우는 는다. 말하자면, 제이슨 본에게 가장 강한 것이 이젠 몸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의 상황을 들여다보는 조감적 시선과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윤리 감각이 훨씬 더 높아지고 균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가 드는 것이며 아름다운 나이듦이기도 하다.

20대, 30대의 훈련된 살인병기, 제이슨이 몸을 쓰고 기술로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적 경지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매력은 인공미를 최대한 줄이고 인간의 몸을 최대한 살린 것으로 압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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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리즈의 자연주의는 배우들의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세월과 함께 배우는 늙었고, 액션은 생기를 잃었다. 불혹을 넘긴 액션배우는 낼 모레면 칠순인 영국의 왕자 찰스만큼이나 어색하다. 그러나 세월은 젊음과 생기를 앗아간 대신 다른 것을 채웠다.

이 자연미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데서도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제이슨 본>의 주요인물들은 모두 불혹을 넘겼다. 맷 데이먼은 70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따지자면 47살이고, 뱅상 카셀은 66년생 쉰을 넘었다. 우리의 악역 토미 리 존스님은 일흔살이 넘은 토미 옹이다.

2002년 <본 아이덴티티>부터 계속 출연해왔던 줄리아 스타일스도 어느 새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겼다. 이제 그들이 2002년 <본 아이덴티티>때처럼 폴짝폴짝 뛰고, 정강이뼈가 부서져라 상대를 가격할 수는 없다. 이제, 그게 그들의 가장 주요한 매력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가장 매력없고, 어쩌면 기회주의적인 인물은 가장 젊은 배역 CIA의 새로운 얼굴 헤더 리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도덕성마저도 욕망의 일부이자 윤리적 포장이었음을 자백하고 만다. 토미 리 존스가 악역이긴 하지만 표리부동했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나이에 맞게 액션도 변할 수 있다. 아니 변해야 한다. 자기 만의 방식으로 액션 자연주의를 갱신하는 작품,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의 <제이슨 본>이다.

(※ 편집자 주: 본 시리즈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아래의 동영상 참조)

수, 2016/08/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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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영국 중부의 보스턴 시. 인구 3만 5천 여 명의 중소도시인 이곳에 거주하는 40대 중반의 제인 아주머니.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23일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 탈퇴에 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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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 EU탈퇴를 묻는 영국민들의 국민투표 결과는 지역적으로 뚜렷이 대조됐다. 북서부는 잔류를, 남동부는 탈퇴를 선택했다. (이미지 출처: BBC)

10여 년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 신규 EU회원국 시민들이 시 전체 인구의 10%를 넘어섰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보스턴 시는 75.6%가 탈퇴에 표를 던져 이번 국민투표에서 최고의 탈퇴 지지율을 기록).

#장면 2: 런던안의 런던이라 불리는 ‘더 시티’. 금융산업 중심지인 이곳에서 일하는 35세의 폴. 하루에도 수차례 프랑크푸르트나 파리에 있는 동료들과 업무상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보낸다. 폴과 함께 일하는 거의 모든 동료들이 EU 잔류에 표를 던졌다(더 시티는 잔류지지율이 75.3%로 최고를 기록).

BBC 방송이 현장 르포로 보도한 위의 두 사례는 양극화된 영국사회가 왜 EU 탈퇴를 선택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는 BBC보도 참조).

바보야! 문제는 분배야

5월 초까지만 해도 EU잔류 지지가 거의 20% 앞섰다. 그런데 불과 6주 만에 무슨 마법이 일어난 걸까?

EU 탈퇴파가 이민문제를 과장하여 속인 전략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런던 같은 대도시는 사용되는 언어만도 200개가 넘는 개방적인 글로벌 도시다. 반면에 보스턴시 거주인의 2/3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다른 EU회원국의 시민들이 영국사람 보다 취업률이 높아 복지혜택 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2010년 경제위기 후, 살림살이가 팍팍해지자 중소도시 시민들은 이를 이민자 탓으로 돌렸다. 탈퇴파가 주장한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복지를 도둑질한다는 선전이 먹혀든 것이다.

이번에 60%이상의 탈퇴 지지가 나온 잉글랜드의 북동부, 중부지역은 경제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도시들이 밀집해있다. 과거 산업도시로 번창하다가 쇠퇴한곳이 많다.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경제위기까지 겹치고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세계화(유럽통합)로 번창한 곳은 EU의 단일시장을 당연한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일자리를 잃었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일자리를 앗아갔다고 여긴 EU를 비난한다. 얼굴없는 ‘브뤼셀의 관료’로 표현되는 EU가 희생양이 되었다. 정부가 소득 재분배에 더 신경을 쓰고 조세 정책도 개편해야 했는데. EU 잔류/탈퇴뿐만 아니라 세계화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영국 시민들이 정부에 대한 모든 불만을 국민투표에 쏟아 부었다.

EU에서 나가는 영국: 장밋빛에서 먹빛으로

EU 탈퇴파는 유럽연합에서 나와 이민을 통제하고 EU의 온갖 규제에서 벗어나 경제가 번창할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다. 탈퇴파 운동을 이끈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우리는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다. 이민을 통제하고 EU의 규제에서 벗어나 경제가 더 호전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탈퇴가 결정된 24일 금요일 세계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커졌다.

EU는 상품과 서비스, 자본과 사람이 자유롭게 장벽없이 이동하는 단일시장이다. 인구 5억 여 명(영국 포함)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은 EU의 핵심 브랜드의 하나다. 그런데 영국이 교역의 45%를 보내는 EU 단일시장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민을 통제하려고 할까?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나 필립 해먼드 외무장관은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단일시장을 유지하면서 다른 EU 회원국 이민이 사회 복지 체제에 부담을 줄 정도로 몰려들면 이들의 복지혜택을 최대 7년까지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양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탈퇴 투표로 이번 재협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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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탈퇴파를 이끌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오는 10월 국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캐머론 총리가 물러나면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 뒤에 보이는 캐머론 총리는 영국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지난 100년 동안 최악의 총리로 기록될 전망이다.

과연 차기 총리로 유력한 보리스 존슨은 J.K 롤링의 책 해리 포터처럼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 주권을 되찾아 국경을 통제하고 이민을 줄이겠다는 그의 발언은 단일시장과 이민자 수 제한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곡했다.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캐머런의 절친인 그가 기본적인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골드만삭스나 JP모건, HSBC 같은 다국적 금융기관은 벌써부터 런던 소재 일부 인력을 프랑크푸르트나 파리, 더블린 등으로 이전하려 한다. 더시티에 본부를 두면 나머지 EU 27개 회원국 시장에 바로 접근할 수 있는데 EU 탈퇴로 이런 이점이 사라질 수 있다.

안타깝다. 브렉시트로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질 사람은 바로 서민이다. 탈퇴파를 이끈 보리스 존슨이나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은 부자이기에 경기 침체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리적인 영국 시민들이 정부 정책 수정을 다른 방식으로 요구해야지 자해와 같은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불확실성의 시대…우리의 운명은?

브렉시트는 EU에 아주 좋지 않은 시기에 터졌다.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은 터키에게 30억 유로(우리 돈으로 약 3조 9천억 여원)를 안겨주어 잠시 소강상태다. 그리스 경제위기는 물밑으로 들어갔을 뿐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이런데 영국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브렉시트라는 폭탄을 EU에 던져 버렸다.

미국과 함께 서구를 형성해 2차대전 후 국제질서를 함께 이끌어온 ‘유럽’이 브렉시트로 분열의 단초가 드러났다. 브렉시트를 가장 기뻐할 사람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위대한 러시아의 국제무대 복귀를 목표로 세우고 서구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런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기에 계속하여 협력을 강화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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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직후인 지난 25일 베이징에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는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지지를 얻고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판 ‘트럼프 현상’으로 불린다.

영국서 도화선이 된 신고립주의와 민족주의 바람이 미국으로도 불어가 더 강한 바람이 될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자들과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사회경제적 위치가 매우 유사하다.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었지만 기존 정치권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EU 잔류를 위해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결국 그의 불장난에 집(영국)이 타고 있다. 누가 이 불길을 크게 번지기 전에 제대로 끌 수 있을까?

한 정치인의 잘못된 판단이 해당 국가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혼돈을 주었다. 세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큰 흐름이라고 치자. 소득 재분배는 정부가 얼마든지 신경을 써서 세계화의 낙오자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 영국의 국민투표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다.

수, 2016/06/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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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영화제’는 없는데 ‘여성영화제’는 있는 이유에 대해 굳이 말해야 할까. 여성은 남성과 대비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남성이 대변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는 건 아니지만(지금 한국의 대통령을 보라), 많은 여성은 새로운 가치를 구현한다.

최근 부쩍 잦아진 여성혐오 논쟁에서 드러나듯,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험난한 상황을 견뎌내 왔다는 뜻이다.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어떤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았을 수 있으나, 수천년간 여성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려온 남성들이 ‘역차별’ 운운하는 건 넌센스다.

영화는 오랜 시간 남성의 영역이었다. 여배우를 ‘영화의 꽃’ 운운하며 받드는 척 하지만, 제작자, 연출, 기술 스태프 등의 대다수가 남성이었다.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혹 제작자 심재명, 오정완, 이유진, 감독 임순례, 변영주 등 ‘유리 천장’을 뚫은 이들이 있었으나 다수는 아니었다. 심지어 카메라 같은 기계에 대해선 여성의 접근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오랜 시간 남아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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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수잔 서랜든(왼쪽)은 남자의 턱시도를 영상시키는 의상을 입었고, 줄리아 로버치는 맨발로 레드카펫을 밟았다. 여성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드레스코드에 대한 상징적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화현장에서도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5월 열린 제 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상징적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영화제인 칸영화제는 지난해 구설을 겪었다. 칸영화제의 프리미어 상영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 유명한데, 지난해 상영 당시 몇몇 여성 관객들이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가 입장을 제지당한 것이다. 칸영화제 측은 “신발 높이에 대한 규정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올해 몇몇 여배우들은 지난해의 소동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배우 수전 서랜든은 남성 정장을 연상케하는 의상에 단화를 신었고, 줄리아 로버츠는 아예 맨발로 레드 카펫을 걸었다.

경쟁 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들의 영화도 예년에 비해 늘었다. 21편의 경쟁작 중 3편이 여성 감독의 영화였는데, 특히 독일 감독 마렌 아데의 <토니 에르트만>과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널드의 <아메리칸 허니>가 호평받았다. 영화제에 참석한 여성 감독, 배우들은 작심한 듯 영화계의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말했다.

<머니 몬스터>를 연출한 배우 조디 포스터는 “대형 영화에 많은 돈이 흘러들면서 스튜디오 수뇌부는 위험 요소가 있는 인물을 고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게 여성은 위험 요소다”라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이끄는 새로운 움직임이 목격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이 반가운 이유는 두 명의 남성 주인공이 쫓고 쫓기는 스릴러 영화들이 최근 한국영화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특정 분위기의 영화가 관객의 이목을 끈다 싶으면 너도 나도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는 것이 영화계의 속성이고, 영화의 장르가 그렇게 탄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의 한국영화는 그 정도가 심했다. 30~40대 남우 2명이 나와 얽히고 설키는 영화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 많은 재능있는 여배우들을 만날 일도 드물었따. 이는 한국영화가 여배우만이 체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정서, 가치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래서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영화의 활력을 스스로 놓아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는 다양한 여성 감독들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조짐은 독립영화계에서 먼저 보였다. 독립영화계 최대 축제인 서울독립영화제에는 지난해 51편의 본선경쟁작이 선정됐는데, 그중 26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여성 감독의 수가 남성 감독을 넘어선 건 처음이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 늘어나면서 영화의 소재와 주제도 이전에 비해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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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상단 왼쪽),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상단 오른쪽)는 여성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관점을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굿바이 싱글'(하단)은 여성감독의 영화는 아니지만, 여성들 간의 연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류 영화에서도 주목할만한 여성 감독들이 나오고 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초등 4학년 소녀들의 우주를 그려낸 수작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녀 선과 갓 전학와서 친구가 없는 소녀 지아는 금세 서로 친해진다. 학급에서 인기 많고 성적도 좋은 보라가 지아를 끌어들이면서 선과 지아의 관계엔 금이 간다. 중산층 이하로 보이는 선과 영국에서 살다온 상류층인 지아의 계급은 한눈에도 비교가 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장점은 둘의 갈등을 쉬운 계급갈등으로 치환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계급 갈등, 파국적 사건이 없이도 맺어지고 또 깨질 수 있는 관계와 감정의 미묘함을 그린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현실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극적인 사건 없이는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에 대안적인 서사의 빛을 던진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는 다수의 비판, 소수의 호평을 들으며 상영된 영화였다. 연홍은 정치 신인의 아내이자 중학생 딸의 엄마다. 남편의 국회의원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첫날, 딸이 실종된다. 남편과 그의 캠프 사람들은 선거전에 악영향을 줄까봐 실종 사건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연홍은 홀로 딸의 행방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딸의 비밀이 차츰 드러난다.

전형적인 스릴러물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비밀은 없다>는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기대되는 전형들을 모조리 거부한다. 편집은 혼란스러우며, 음악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귀를 괴롭게 하는 아방가르드 펑크 음악이다. 마치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한 이같은 태도는 <비밀은 없다>가 폭로하는 기성 체제의 음험함에 이빨을 드러낸다.

더 많은 여성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성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의 삶과 감정을 다루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

세상의 이목, 판단에 신경쓰지 않는 ‘이상한’ 여배우가 등장하는 <굿바이 싱글>은 그 사례다. 극중 톱스타인 고주연은 자신과 전혀 다른 처지에 있던 여중생 단지와 여성의 연대를 맺는다. 얼핏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굿바이 싱글>은 대중영화의 틀에서 이 연대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는다.

관객이 남성들만의 영화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영화인들은 한 발 먼저 감지했다.

월, 2016/07/0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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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에 제가 여기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캠페인을 이끌고 싶다고 했을 때 여러분 모두는 저를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웃음이 안 나오시죠?”

유럽의회 의원이기도 한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는 의회에서 조롱 섞인 연설을 내뱉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EU 탈퇴로 결론이 난 후였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운 괴짜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정도로 치부됐던 영국독립당과 파라지는 브렉시트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정치세력 중 하나다.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파라지를 유럽의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위로 선정하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그의 가장 큰 성공, 혹은 실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성공’의 문턱에 다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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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은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1000파운드를 건다고 했고, 그의 도박은 성공을 거뒀다. (사진 출처: http://www.express.co.uk/news/politics/649750/Nigel-Farage-bet-1-000-Br…)

대학 포기하고 금융분야에서 사회 첫 발

파라지는 지난 20여 년 전부터 ‘EU 탈퇴’를 주장해 왔다. 그리스와 독일처럼 구조적으로 ‘다른’ 경제체제를 지닌 나라들에 획일적인 금리가 적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 보수당에서 활동했던 그는 1992년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EU 출범의 기틀을 마련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하자 당에서 뛰쳐나와 영국독립당 창당 멤버로 합류했다. 예전에는 EU 확대를 부르짖다가 일종의 ‘정치적 승부수’로 브렉시트를 택한 몇몇 정치인들과는 결이 다르다. 적어도 진짜 그게 옳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정말로 활짝 웃으며 ‘환호작약’했다.

물론 일관성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파라지의 언행에선 일관성을 넘어선 아집과 독선이 내비친다. 자신의 연설에 대해 동료 의원들의 야유가 이어지자 그는 맞받아친다. “여기에 계신 누구도 평생 동안 일을 제대로 끝내거나 비즈니스를 해보거나 무역을 해보거나 일자리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을 그냥 들으세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내가 해 봤는데’ 스타일이다.

파라지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런던금속거래소에서 상품중개인으로 일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런던의 금융가인 ‘더 시티’로 바로 들어갔다. 그는 이런 진로를 선택하는데 크리켓 선수 출신의 교사 존 드웨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내가 꽤 대담하고, 연단에 서는데 능숙하며,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끌벅적하며, 뭘 팔아먹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파라지가 ‘정치’를 비전을 갖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설득해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잘 먹힐 만한 ‘물건들’을 제시해 인기를 끌고 당선되는 잔기술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드웨스 선생님이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듯, 잘 팔릴만한 물건들은 잘 안다.

런던과 일부 대도시에는 돈과 기회가 넘치지만 그 외 지역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실업은 만연해 있고, 공공서비스는 줄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척 복잡한 문제지만 쉬운 표적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이 최근 어디서든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이민자’ 때문이고, 결국 EU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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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 표지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의 상황을 ‘걸레가 된 유니온잭’으로 묘사했다. (사진출처: 이코노미스트)

파라지는 이런 정서에 편승해 “지하철을 탔더니 영어를 들을 수 없었다”며 사람들을 자극한다. 대놓고 이민자들과 살기 싫다고도 말한다. 그에게 무슬림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제5열’(간첩)일뿐이다. 브렉시트 홍보를 위해 그가 들고 나온 것도 난민들이 떼 지어 유럽으로 들어오는 포스터였다. 난민이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경제적 이민이며 일부는 이슬람국가(IS)의 지원군이 될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국민족 강조하지만 다문화가정 출신

‘영국 사람’임을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라지’라는 성은 먼 위그노 교도(16~17세기 프랑스 칼뱅파 신교도) 조상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19세기에 런던으로 이주한 독일계 출신이다. 이민자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온 그이지만, 뿌리에는 프랑스와 독일계의 피가 스며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파라지는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독일 국적 여성과 재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그가 라디오 인터뷰 중 옆집에 루마니아 사람들이 이사 와서 신경 쓰인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 그때 사회자는 파라지의 가족에 빗대 “독일 아내와 아이들이 옆집에 있는 것과 차이는 뭔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는 “당신은 그 차이를 알지 않느냐”고 눙쳤다.

이런 태도에서 짐작가지만, 파라지는 종종 인종주의자라고 비판받는다. 독립당 소속 유일한 여성 유럽의회 의원이 파라지를 “반여성적인 스탈린주의자 독재자”라고 비판하며 보수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1차 대전 참전용사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1차 대전의 격전지를 돌아보는데 큰 열정을 쏟는 그의 모습에서 ‘그레이트’ 브리튼을 열망하는 국가주의적 냄새가 나기도 한다. 물론 술을 엄청 마셔대기 위한 핑계거리라는 얘기도 있다.

한때 EU회의론자로서 그와 가까운 동지였다가 결별한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리처드 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만약 인종주의자라면, 그는 유능한 배우다. 그걸 잘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인종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그저 구시대적인 대외강경론을 펼치는 애국주의자라고 본다.”

그러나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은 그가 바란 대로 ‘그레이트 브리튼’이 되기보다 ‘브리튼 소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벌써 스코틀랜드가 다시 독립을 꾀하고 있고 나라는 계층별, 지역별, 연령별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유럽의회 의원으로 정계 입문….영국 선거에서는 7전 전패

파라지는 전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잇따른 망언과 구설로 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꺾이지 않고 있다. BBC 기자는 ‘(비판이) 들러붙지 않는 나이젤’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유명인사’에 가깝게 자리매김한 것에는 그의 독특한 인생역정도 한몫 했다.

파라지는 1964년 영국 켄트주 판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더 시티’에서 일하는 주식중개인이었는데, 5살 때 이혼한 알콜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20대 초반이던 1985년 그는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 머리와 왼쪽 다리를 다쳤는데 거의 절단해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회복에는 1년 가까이 걸렸다. 그때 자신을 간호해주던 간호사가 첫 번째 부인이 됐다.

이듬해에는 고환암에 걸려 왼쪽 고환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0년 총선 때는 지지 호소 현수막을 단 경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다 추락하기도 했다. 사고 직후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회복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동료의 장례식장에 나타났다는 후문이 있다.

파라지는 1999년 남동잉글랜드 지역구에서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으로서 본격적 첫발을 내딛는다. 그렇게도 혐오하던 EU에 의원으로 입성한 이유를 묻자 그는 “밖에 있기보다 안에 들어가서 그곳을 바꾸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것이지, 유럽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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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왼쪽 두번째)가 2014년 5월 26일, 영국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독립당(UKIP)이 108년 만에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체제를 무너뜨리고 1위로 도약하자 당원들과 환호하고 있다.

그는 2014년까지 연거푸 4선을 이뤄냈다. 특히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영국 양대 정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양대 정당 체제가 무너진 것은 108년 만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2013년 그를 100대 영향력 있는 우익 인사 중 캐머런 총리에 이어 2위로 선정했고, 2014년 <더 타임스>는 그를 올해의 영국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는 강경파 유럽통합회의론자들이 모여 있는 유럽의회 내 ‘자유와 직접민주주의’ 그룹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이 그룹에는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극우정당도 함께 속해 있다. 그는 의회 내에서 논쟁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EU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2004년 그는 프랑스 출신의 자크 바로 교통 담당 EU 집행위원의 비리 은폐 시비를 폭로했고, 이듬해에는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그의 현란한 ‘개인플레이’에 비해 영국독립당 자체는 아직 기대에 못 비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아직 영국 의회 내에서는 단 한 석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파라지 본인도 총선에 모두 7번이나 출마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파라지는 현재 최다 득표자 당선 방식인 영국의 소선거제도가 영국독립당에게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2011년 선거제도를 ‘선호투표제’로 전환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이를 지지하기도 했다.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그러나 ‘전략적 머리’ 없어

파라지를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재미있고, 달변에다, 사리판단이 빠르고 똑똑하다고 말한다. 파라지는 성공회교도이자 크리켓의 광팬이며, 켄트 해안에서 혼자 평온히 낚시하는 걸 즐긴다.

상품중개인 시절 파라지의 고객이었던 친구 스티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특이하고, 행복하고, 쾌활하고,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를 만나러 가면 늘 주변에는 죽이 잘 맞는 중개인들이 뭉쳐 있었는데,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4피트나 치솟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처드 노스는 이렇게 혹평하기도 한다. “골초인데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다. 라이프스타일은 형편없다. 그는 매우 친근하고, 과장되게 개방적인 사람처럼 다가오지만 그 이면은 매우 불안정하다. 그는 사람들과 디테일하게 오랜 기간 동안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소비해버린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모여들고 그에게서 힘을 얻지만, 파라지의 내면을 보곤 환멸을 느끼게 된다. 나 같은 사람이 아마 수백은 될 거다.”

각종 ‘독설’과 ‘망언’에서 파라지의 그 불안한 면모가 읽힌다. 그는 2010년 헤르만 반롬푀이 EU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저급한 은행원 외모에 젖은 걸레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막말을 했다.

지난 3월에는 “국제사회의 현존 지도자 중 푸틴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 대선에 대해서도 “트럼프의 인물됨이나 시각에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나라면 그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해가지 못할 행동들도 보인다. 1999년 파라지는 BBC가 자신의 유럽의회 선거 캠페인을 넉 달 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불법복제 해 판매했다가 공정거래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타고 있던 자동차 바퀴의 너트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아니었냐는 것이다.

그는 석탄발전소 폐쇄를 비판하면서 풍력발전에 반대한다. 영국이 못생기고 역겨운 풍차로 뒤덮일 거라는 것이다. 기후변화도 거짓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2008년 찰스 왕세자가 유럽의회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데 EU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연설해서 기립박수를 받을 때 파라지는 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왕세자의 발언이 “최고로 순진하고 어리석다”고 했다가 왕실모독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파라지는 또 비만이 흡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해서 감자튀김(칩)과 도넛 가게를 없애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총기소유와 범죄는 상관이 없다”며 총기소유도 합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리처드 노스의 이런 걱정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담배를 피우고 그게 파라지가 가진 매력이다. 그걸로 지지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당신이 진지하고 전략적 두뇌를 지닌, 당을 이끌고 발전시키고 확장해나갈 수 있는 정치가를 찾는다면, 그는 그 같은 인물은 아니다. 영국독립당의 비극은 아마도 이렇게 대단히 효과적인 얼굴을 지녔지만 그 인물이 전략적 두뇌가 없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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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는 지난 7월 4일, “할 일을 다했다”며 돌연 영국독립당 당수직을 사임했다. (사진 출처: http://www.itv.com/news/story/2016-07-04/live-updates-nigel-farage-resi…)

파라지는 4일(현지시각) 결국 영국독립당 당수직을 던지는 ‘극적인’ 결말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유는 “내 삶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것. 본래 직업적 정치인을 할 생각도 없었고, 자신의 정치적 목표인 EU 탈퇴가 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의회 의원직은 유지하고 브렉시트 협상 과정에서 ‘무언가’는 할 수 있겠지만 다시는 총선 출마도 하지 않고 당수직에 복귀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가디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심각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심각한 정당”

화, 2016/07/0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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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을 읽다 보면 없던 두통이 느껴진다. 지난 세월도 늘 그러했지만 박근혜정권의 말기적 현상이 심해지면서 아픈 정도가 점점 더 강해진다. 때마침 평소 존경하는 채현국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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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채현국을 가리켜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고 평했다.

채현국 선생님의 전화

채 선배님은 젊은 시절 광산업을 중심으로 20여개의 계열사로 구성된 대기업 수준의 그룹을 소유하시고 직접 경영하셨던 분이다. 그러던 중 동학을 알게 되면서 유무상자(有無相資)정신을 몸소 실천하시고자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대부분을 종업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남는 재산으로 효암재단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남은 여생을 봉사와 육영사업에 전념하고 계신 분이다.

동학의 참뜻을 알리는 자리에는 팔십을 넘긴 노구에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돈과 출세에 오염된 시대를 꾸짖으시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우며 살아 가신다. 참으로 귀한 우리시대의 의인이시고 스승이신 분이다.

그런 분이 뒤늦게 전해들은 아래의 이야기에 그만 화가 나셔서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시면서 불호령을 내리시는 모양이다.

내용인즉 국무총리 산하연구기관인 환경정책평가연구원 책임자가 공식적인 모임자리에서 ‘나는 친일파다’라고 커밍아웃하면서 “천황만세“를 세 번이나 외쳤다는데 이런 자를 처벌하지는 않고 없던 일로 무마해버리는 박근혜 정권에 대해 왜 항의하지 않느냐고 다짜고짜 저에게 마구 호통치신다 ([Why뉴스] ‘천황폐하 만세’ 외친 이정호 왜 징계조차 안하나? 참조) 

이 글은 채 선배님의 호통에 답하는 글이다.

아직도 ‘일왕의 나라’에 사는 듯한 착각

우선 퍼뜻 떠오르는 장면이 박정희가 대통령시절에도 일본의 지인들을 만나면 일본군가를 즐겨 불렀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였다.

일제시절 만주군관학교의 모범생으로 일왕이 내린 표창까지 받았으니, 그 시절 부르던 일본군가야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됐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해방되고 독립된 국가의 현직 원수가 치욕의 역사였던 식민지제국 점령당사자인 일본국 군가를, 비록 일본 지인들과의 사석에서 불렀다면, 이는 반국가행위에 해당되는 되지 않을까 ?

행여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가 부르는 일본노래를 듣고 자라면서 일본제국에 향수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 사실이 아니라면 공시적인 자리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이나 외친 자를 정부산하 연구기관에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위안부라는 사건을 알리고 교육하는 주제는 단순히 한일 정부간의 외교적 현안을 떠나서 아우츠비츠 수용소내 대량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서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류적 패륜범죄에 대한 고발이자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어야 마땅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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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일본·네덜란드 등 8개 나라의 14개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결성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지난 6월 1일, 서울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 위안부 관련 자료 2744건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본부에 등재 신청했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01/0200000000AKR2016060103…)

그런데 최근 일간지 기사를 보면, 미국과 유럽 등에서 뜻있는 해외 동포들이 스스로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후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를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면서 간섭과 방해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위안부 당사자 할머니들을 거추장스러워하며 해외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교포들의 한국 입국을 불허한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말, 일본 정부의 립서비스 수준의 사과와 재단 설립을 위한 소액기부를 받아들임으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이제 위안부 문제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조차 포기한 듯하다.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 영원히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반인류적 사건을 단지 10억엔으로 불가역적으로 청산했다고 선언한 한일 정부의 황당무계한 역사적 코메디를 직접 외무장관과 대통령이 나서 국민들에게 알렸던 배경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박근혜 정권은 무엇을 위한, 누구의 정권인가 ?

조폭만도 못한 ‘오야붕의 나라’

최근 숨겨졌던 또 하나의 사건이 시민사회에 알려졌다. 누구나가 부러워할 서울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잘나가는 서울남부지청에 근무하던 김홍경이라는 젊은 검사가 자살한 사건이다. 

시시비비를 더 밝혀야 하겠지만, 김 검사의 자살원인으로는 직속 상관인 부장검사가 행한 참을 수 없는 패악과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 과중 등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가 내 아들을 죽였다”고 김 검사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가운데 사법연수 동기생들을 포함하여 700여 법조인 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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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경 검사의 사법연수원 동기들이 지난 6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내가 이 사건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검찰, 군대 그리고 공무원 내부에 만연한 잘못된 조직문화이다. 소위 일본말로 ‘오야붕’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패거리 조직문화는 그 뿌리를 일본제국주의의 역사, 그중에도 ‘천황 폐하’주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폭 문화라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한, 한국 조폭의 양아치 문화에는 나름대로 축적된 의리와 폼생폼사라는 얄랑한 규칙이 존재한다. 양아치 규율을 분명히 하되 서로를 감싸주고 재물과 이권이 생기면 함께 나누고 서로를 살필 줄 아는 문화이다.

그런데 김홍경 검사가 겪은 한국 검찰의 조직문화는 한국식 조폭의 양아치 문화만도 못한 일본식 오야봉 문화였던 것이다.

오야봉 조직문화의 특징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까라면 까야하는’ 식으로 무조건 상사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뿌리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류로, 더욱 저급하고 악랄해야만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탄생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제의 근성이 아직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문화는 해당 조직이 존재해야 하는 역할과 근거와 당위에 기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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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위계와 철저한 상명하복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오야붕 문화는 야쿠자는 물론, 일본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오야붕 문화는 국가 단위의 오야붕인 일왕을 전후에 존속케 하는 문화적 토양이 됐다. (사진 출처: http://hambara.tistory.com/80)

지난 30여 년간을 기업활동에 종사해온 필자는 여러 번 일본 중공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과 거래한 적이 있었다. 꽤나 큰 거래여서 일본측에서 십 여명씩 내한해 계약이 끝난 뒤 회식자리를 갖곤 했다. 내가 대표이사로 있던 한국기업의 분위기는 술이 몇잔 들어가면 ‘야자타임’으로 넘어간다. 이쯤되면 상사와 부하 관계를 넘어서 형, 동생으로 변하고 평소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뱉어낸다. 보는 관점에 따라 틀리겠지만, 이는 한국에서의 매우 중요한 소통방식이고, 활력 요소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기업문화는 전혀 달랐다. 모두의 시선이 오야봉에게 쏠렸다.  오야봉이 술잔을 들어야 잔을 들고, 젖가락을 사용해야 식사를 시작하는 식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겪은 군대문화 그대로였다.  

대동아 전쟁의 전범이었던 일왕이 전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진 오야붕 문화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오야붕 문화가 한국의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공식모임에서 ‘이정호’라는 몹쓸 인간에 의해 재현되고, 친박 인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몹시 쓸쓸하다. 

 

다시 한번 박근혜 정부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은 누구의 정부인가”

행여나 일본 제국주의와 유신의 추억 속에서 엉뚱한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 이 땅위에서 또다시 ‘덴노 만자이’가 나오지 않기를 !

목, 2016/07/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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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티븐 J. 맥나미 (Stephen J. McNamee) 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Robert K. Miller Jr.)의 『능력주의 신화 Tne Meritocracy Myth(3rd.)』(2013)를 완역한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윌밍턴 캠퍼스의 사회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로서, 미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탐구해 왔다. 이 저서 이전에도 두 사람은 『미국의 상속과 부Inheritance and Wealth in America』를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8993178615_1

공교육과 학교에 대한 논의와 비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미 이반 일리히(Ivan Illich)의 『학교 없는 사회(한국어판), Deschooling Society』(1970), 마이클 애플(Michael Apple)의 『교육과 이데올로기(한국어판) Ideology and Curriculum』(1979),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재생산 (La) Reproduction』 (1970) 등에서는 학교와 자본주의 체제 간의 구조적 근친성, 학교의 계급 재생산 기능, 학교내 지배적 문화자본 등이 논의되어 왔다.

최근에는 『대학의 몰락』(서보명, 2011), 『최후의 교수들』(Frank Donoghue, 2008) 등에서 학력 인플레이션과 대학 졸업장의 유명무실화, 대학교육의 직업교육화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

이 책은 이러한 공교육과 학교 및 고등교육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로서, 학교의 근본적 신화이자 가정인 능력주의를 질문한다. 근대사회의 신자유의주의적 개편 및 이에 따른 일자리 감소로 인해 졸업장은 더 이상 사회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질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는 바야흐로 능력주의 자체를 회의하는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공교육의 몰락을 감지케 하는 바, 도대체 그간 학교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능력주의(meritocracy)는 허구다!

능력주의는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풍자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 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이다. 이 소설에서 미래 사회는 지능지수와 시험 결과 등 개인의 능력을 토대로 이른 바 인재를 선발하는 바, 그 결과는 엘리티즘(elitism)이 지배하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distopia)이다. 즉 능력이 많다고 간주되는 자들이 능력이 없다고 낙인 찍히니 자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낯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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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는 용어는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풍자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 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 처음 등장했다.

전통적으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보상 사이에 비례적 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즉 능력이 많을수록 혹은 높을수록 그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수를 확보할 수 있으며 또 그래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능력주의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며, 학교는 이러한 소질이나 재능의 차이가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발현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능력주의의 가정과 이에 기초한 학교 및 사회의 기능과 작동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개인의 성공과 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순히 능력적 요인만이 아니라 비능력적 요인도 있으며,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결정적이고 장기적이며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다른 출발선을 제공하거니와, 출발선에서 벌어진 차이로 인해 가난한 집 아이들은 결코 부잣집 아이들을 따라잡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아이나 여성, 소수자들은 항상적으로 사회적 차별에 노출되며,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끊임없이 성취동기를 억압하고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형성하는 사회적 차별 앞에서 능력만큼의 사회적 성취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직업을 얻거나 괜찮은 경력을 쌓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거시적인 경제 상황이나 사회구조적 변화, 출생률, 출생시기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호황기에 태어나지 못했거나 운이 나쁘면 타고난 능력치의 발휘는 지난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전사회에 만연된 능력주의적 환상은 여전히 사회적 성취에서 개인의 능력적 요인을 과대평가한다. 동시에 대표적인 비능력적 요인들, 즉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사회자본과 문화자본, 사회적 차별, 태어난 시기와 개인적 운, 경제상황과 거주지역 등은 본래의 능력적 요인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다. 마치 능력적 요인만이 개인의 성공의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학교는 이러한 오해를 조장하는 주된 기관이거니와, 학교에서는 중산층 학생들의 선행학습이나 사회문화적 자본, 이들에 대한 부모의 지원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모두를 이들의 능력으로 합법화, 정당화한다.

또한 학교는 계급이나 젠더, 종족, 장애, 거시경제 변수와 거주지역 등 소수자들이 처한 사회구조적 조건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들을 수업태도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수업준비를 해 오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비젼이나 꿈이 없는 열등생으로 낙인찍는다. 이처럼 학교는 능력주의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는 바, 그 결과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비능력적 요인들을 은폐하고 간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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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근대 능력주의를 상징하고,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능력주의라는 근대의 믿음은 가정환경, 계급, 사회적 환경 등의 영향력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근대의 신념이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http://allwork.me/86)

사회학 전공자들답게 저자들의 결론은 좀 더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지점을 향한다. 즉 지금이라도 능력주의의 환상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지고, 기회와 분배가 좀 더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평등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능력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혀, 불평등에 면죄부를 주고 또 그것을 영속화할 것인가, 능력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이는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능력주의, 그 필패의 운명

사실 이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일찍이 알뛰세를 비롯하여, 부르디외, 애플 등 많은 논자들이 학교가 어떻게 계급을 재생산하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가를 논해 왔던 터이다. 즉 학교는 자본주의 체제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바, 작동하며 그 결과 계급 재생산 기능을 충실히 대리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학교는 모든 인민에게 평등한 교육이라는 근대 부르주아지들의 이상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가 프랑스에서 최초로 공교육을 실험하고자 했을 때, 인민과 그의 권리는 평등하며 따라서 인민에게 교육에 다가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 바 ‘기회의 평등’으로서, 취학 연령에 다다른 모든 시민은 공교육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이로써 빈부와 성별, 장애,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교육의 이상이 인류 최초로 공교육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화주의자들이 공교육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학교를 통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이었다. 즉 신분이 아닌 능력에 의해 개인의 사회적 참여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했으며, 학교는 능력주의적 가정을 적극 수용하였으며, 개인의 능력을 판가름하고 측정하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지표가 될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전 시기 신분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화가 분배되는 것에 반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갈망한 상 퀼로트(sans-culotte, 상 퀼로트는 귀족들이 입었는 퀼로트를 입지 않은, 프랑스의 급진 공화주의자들을 말한다)들의 염원이 있었거니와, 이들에게 학교는 능력에 따른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사회적 평등의 기제였다. 아울러 그렇게 될 때 도래할 사회는 능력에 따른 역할과 기능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자리잡힌 사회로서, 근대 국가 곧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을 실현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학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자유롭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오오, 꿈은 얼마나 야무졌던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대 공교육은 능력주의를 차용함으로써 그 태동에서 이미 근본적인 모순을 배태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대로, 능력주의를 채택하게 되면 이는 소질과 재능의 위계라는 또 다른 불평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바, 능력의 차이는 단순한 차이에 그치지 않고 필연적으로 위계가 되고 서열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능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타고난 능력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으며,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주되게는 부모의 재산, 직업 등 사회경제적 지위(Social Economic Status, S.E.S.)가 개입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이른 바 금수저로 태어난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사들의 관심을 받고 학업적 성취를 이루기에 유리할 것이며, 소질이나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이들에게 한정된 개념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흙수저로 태어난 학생들은 소질이나 재능을 발견할 기회도 갖기 어려울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애초에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즉 학교교육만으로 모든 학생을 ‘결과적 평등’에 이르게 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바, 즉 잘 사는 집 아이는 잘 살기 때문에 학교에 와서 공부 잘 하는 우등생과 모범생이 되고 못 사는 집 아이는 못 살기 때문에 부진아와 부적응아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학교는 기껏해야 입학이라는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을 뿐, ‘결과적 평등’은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

이에 대해 낙관적인 학교 개혁가들이 소수자들이나 그들이 속한 ‘게토 학교’에 헤드스타트 프로그램(Head-Start Proogram, 1960년대 중반 미국 정부가 사회경제적 소수자 집단의 유아를 대상으로 교육, 보건, 복지 등에서 시도했던 일련의 ‘보상 교육(compensatory education)’)이나 양질의 교육환경과 교수자 등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불리한 조건들을 상쇄하거나 만회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이것이 이른 바 ‘보상적 평등’이나 ‘과정적 평등’의 개념이다), 이 또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음을 지난 역사들이 예증한다.

결국 학교는 학생이 속한 사회경제적 유리함을 성적이나 소질,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여 합법성을 부여하였을 뿐으로, 사회경제적 보상의 차등화된 분배의 기준을 귀족이라는 신분적 변수에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백 여 년만에 위대한 사회적 평등의 기제가 되고자 했던 학교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이클 영의 소설에서 그려진 미래 사회가 능력에 기초한 또 다른 위계적, 서열적 사회로 귀결된 것은 다만 우연이 아니거니와, 능력주의에 기초한 근대 사회란 필연적으로 신분에 기초한 중세사회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

비근하게 영화 가타카(Gattaca)는 바로 이러한 우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바, 능력이라는 변수가 유전인자로 바뀐 미래 사회에서 새로운 신분사회, 계급 사회가 도래한다. 근대의 장밋빛 출발선에서 오래된 미래는 앞서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

어쩌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상상한 모든 아름다운 이상은 필연적으로 타락한다는 비관론을 수긍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순정했던 이상이 제도로 실체화하면서 거기에는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유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개입한다. 그 결과 애초의 드물고 귀했던 이상은 부패하고 타락하여 원래의 고왔던 얼굴빛을 잃는다.

이미 우리는 사회주의의 실험에서 이를 목도하였으며, 능력주의의 기치를 걸고 야심차게 내달렸던 공교육의 실험 역시 그 수명이 다하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한 오늘날 근대 공교육이 처한 보편적인 우울한 자화상이라는 것을.

사회적 연대의 정신, 아무도 굶어죽지 않을 권리를 위해

그러나 경솔하게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인류를, 사회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패한 능력주의 앞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무엇을 질문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철 지난 능력주의를 붙들고 불가능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삽질”할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회의하고 능력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평등과 분배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능력주의는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사회구성원 상당수가 중산층으로 상향적 계층 이동이 가능한 산업자본주의 초기에나 적합한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이른 바 개천 용이 가능했던 사회로서, 학교는, 결혼과 로또를 제외하는, 그러한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매개가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는 이러한 능력주의에 기초한 분배와 계층 상승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괜찮은 사회경제적 보상이 극도로 축소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전처럼 대졸자의 상당수가 무난히 중산층으로 편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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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하나. 그렇지는 않다. 능력을 절대화하는 환상에서 깨어나 사회적 연대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꾸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http://www.earthtimes.org/politics/international-human-solidarity-day-2…)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능력주의에 기초한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아니라, 과연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는가, 혹은 능력이 없으면 분배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능력이 없어도 굶어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근대 초 상 퀼로트들의 고민과 궁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것이 평등과 인권의 의제는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폐기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라진 시대상에 따라 다만 그 고민의 방식과 전략의 수정이 있을 뿐,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공화주의자들은 공교육을 통해 사회적 평등을 도모했으나 오늘날 우리는 공교육을 우회하지 않고 곧장 사회적 평등으로 가는 직선의 길을 상상해야 한다. 소비자본주의의 후기 근대에서도 근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으며 또 진행형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권과 평등, 그리고 사회적 연대의 이름으로.

따라서 향후 한국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일은 계층상승을 하지 않아도 개인의 생존과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단 한 번도 제도적으로 실현한 적이 없었던 공동체를 이 땅에서 만들어나가는 일이 될 것이며, 계급과 젠더, 장애와 다문화, 연령과 지역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살게 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급박하고 실천적인 아젠다들, 곧 기본소득과 의료보험, 의무교육 강화 및 공공보육 확대, 최저 임금과 최저 생계비, 남녀고용 평등, 차별 금지법 등을 끊임 없이 문제제기하고 논의해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학력과 학벌을 통한 지위경쟁은 현저히 완화될 수 있을 것이며, 죽은 능력주의를 붙들고 불가능한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사회적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계층 상승의 합법적 통로를 열어두는 것은 여전히 중요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 한정해서라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역자 김현정은 삼성경제연구소(SERI)에서 경제·경영 전문 번역가로 일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이 강연에 기초하여 대중 일반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문장 역시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덕분에 번역 역시 술술 읽힌다. 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이라도 책장을 넘기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목, 2016/07/0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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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글의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정치가들이 개헌론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민주정치 발전에 유익하기보다는 유해하다.

‘론’으로 끝나지 않고 진짜로 개헌을 하면 어떨까? 지극히 재난적일 것이다. 지금 정당들의 능력이랄까 혹은 조직적 실력으로는 개헌처럼 지극히 위험한 과업을 감당할 수 없다.

반면 현행 헌법을 가지고도 정치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유익한 일은 수천, 수만 가지다. 정치가들은 바로 그 부분에서 최선의 노력과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민주정치는 헌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새 헌법을 만들면 정치가 좋아질까?

필자가 기억하는 한, 민주화 이후 지난 29년 동안 어느 한 해도 개헌론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개헌을 하고자 했던, 이른바 ‘개헌의 정치’가 있었던 적은 단 한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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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 이후 개헌이 현실적으로 성사될 수 있었던 때는 1990년 내각제 개헌을 명분으로 3당 합당이 이뤄졌을 때였다. 이때를 제외하면 모두 ‘말’ 뿐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5112200…)

1990년, 내각제 개헌을 합의 사항으로 당시 세 정당이 득표율 합 73.4%에 의석수 217석의 거대 정당을 만들었을 때였다. 방법이 비민주적이었지만, 개헌을 위해 구체적인 정치 행동을 했던 것은 이 삼당합당 때가 유일했다. 그 나머지는 일종의 여론정치로서 ‘개헌론의 정치’가 있었을 뿐이다.

올해 주인공은 정세균 신임 국회의장이었다. 김무성과 문재인 등 여야 대표급 정치인들이 그 뒤를 이어받아 각자의 개헌론을 반복했다. 이재오 같은 단골 내각제 개헌론자는 물론이고, 여당 내 중심 세력이라 할 친박, 친이계 인사들도 가세했다.

남경필, 박원순, 안희정 등 광역자치단체장들 역시 분권화를 위한 개헌론을 말하며 ‘수도 이전’을 주장했다. 야당 내 대표적인 개헌론자로 알려진 우윤근 신임 국회 사무총장은 내년 4월 재보선 시기에 국민투표를 하자며 아예 시기까지 못 박고 나섰다.

1987년 헌법이 제정된 지 30주년이 되는 내년이 적기란다. 글쎄, 그들이 말하는 대로 새 헌법을 만들면 정치가 좋아질까? 그나저나 서로가 말하는 개헌안이 다 다른데, 대체 ‘어떤 헌법’이란 걸까? 무조건 새 헌법이면 되는가?

개헌에 대한 당론부터 정하라

개헌은 너무 위험한 사안이다. 그렇기에 헌법 문제를 갖고 함부로 실험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헌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먼저 당론으로 개헌안을 정하는 노력부터 해야 할 것이다.

민주정치에서 중대 사안의 출발점은 바로 거기에서부터이다. 하지만 어느 개헌론자도 자신의 정당이 헌법과 헌법 개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을 이끌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론 혹은 언론에 대고 개헌을 이야기하지, 돌아서서 자신의 정당 안에서부터 논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개별 의원들 하나하나가 헌법 기관이나 다름없기에 당론과는 무관하게 국회에서, 오로지 국가의 장래만을 생각하며 논의를 이끌어 결정해 가자.”고 말하는데,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귀족정적인 의회주의’의 원리일 뿐, 민주정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정은 그를 대표로 뽑아주고 권력을 갖게 한 시민에게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선거에서 자신이 속한 정당과 그 공약에 책임성을 가져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런데 국회에서 결정하면 된다는 식은, 정당의 후보로서 선거에서 당선되고 국회의장이 되고 사무총장이 되었으면서도 이제 그런 책임은 끝났고 법제정 권력은 온전히 자신들의 소관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당이 책임정치의 기반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의회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치의 무능을 헌법 탓으로 돌려서야

개헌안이 당론으로 확정된 다음에는 정당의 선거 공약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정당의 공약 제시는 주권자인 시민에게 판단을 요청하는 단계의 시작을 가리킨다. ‘정치적 의제의 형성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공적 논쟁’의 과정이 없다면, ‘시민이 최종적 결정권자로서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는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이를 곧바로 국민투표로 결정하자? 개헌론자들의 그런 발상은 사실상 ‘중우정치’를 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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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것은 난센스다. 개헌에 대한 높은 지지 여론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돼야 한다. 정치의 잘못을 헌법의 잘못으로, 대표자의 심의 책임을 여론의 판단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93358)

국민투표는 여론동원정치를 대표하는 결정방식이지 결코 민주적 결정 방식이 아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경험에서 보았듯, 그들이 즐겨 향유한 것은 국민투표였고 야당을 협박할 때도 늘 “그럼 국민투표로 하자!”였다. 극우 선동 정치에 휘둘리고 만 영국의 ‘브렉시트’ 역시 국민투표의 부정적 효과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개헌론자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개헌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다고 말한다.

글쎄, 필자가 보기에 일반 여론조사에서 개헌에 찬성한다는 대답은, 지금과 같은 정치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시민들이 개헌을 열망한다? 개헌을 둘러싼 당론도 없고 제대로 된 공적 논쟁도 없는 조건에서, 개헌 찬성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가 신뢰성을 가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서 정치가란 누구인가? 선출된 시민의 대표들이다. 시민은 모든 일을 직접 할 수도 없고 또 직접 하고자 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기에, 선출된 정치가들에게 민주적 과업을 일정 기간 맡기는 것, 그게 민주주의다.

그런데 그들이 책임 있게 정치를 하지 않아서 화가 난 시민들에게 개헌론자들은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헌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제헌의회 선거를 한 것도 아닐뿐더러, 개헌안 공약도 없이 당선된 그들이 헌법 개정 권력을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는 전혀 인정할 수가 없다.

대통령답지 못하고 여당답지 못하고 야당답지 못하다는 것이 시민 다수의 합당한 불만인데, 그에 대한 정치가의 무책임한 대답이 “그럼 개헌을 논해 봅시다!” 라는 식이라면 솔직히 사양하고 싶다.

그들이야말로 정치의 기능과 역할을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헌법’은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좋은 정치’

필자가 만나서 대화를 해본 국회 개헌론자 가운데, 헌법에 대한 자각적 이해나 판단을 가진 의원은 없었다. 지금과 같은 대통령제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정도의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얼마나 ‘헌법 때문’이고 ‘헌법 이외의 문제’는 또 어떤가에 대한 판단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각제는 문제가 없을까 혹은 이원집정제를 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에 대한 이해도 없다. 이런 조건에서 개헌이 본격화한다면 어찌될까?

누군가는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답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이원집정부제 하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내각제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등, 제각각일 것이다. 거기서 끝날까?

누군가는 통일헌법 만들자 하고 재벌들은 헌법 119조의 경제민주화 조항 폐지하자고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연방제 개헌하자고 하자거나 지방분권화 개헌하자고 할 것이다.

우리사회의 주요 세력과 영향력이 모두 동원되어 자신들을 위한 권력구조를 만들고자 할 것이며, 학계와 언론 역시 편을 나눠 맹목적 주장을 반복할 텐데, 아무리 봐도 지금의 정당들과 개헌론자들에게 그런 무한정의 갈등 확산을 통제할 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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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마르헌법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헌법으로 평가받았지만,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나치의 집권을 초래하고 말았다. 문제는 헌법이 아니었고, 정치였다. 좋은 헌법이란 없다. 좋은 정치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http://slideplayer.org/slide/2826705/)

좋은 헌법은 없다.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헌법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프랑스처럼 민주주의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독일식 내각제를 한다고 한국정치가 독일정치처럼 된다? 미국처럼 대통령 중임제가 되면 한국정치의 문제가 해결된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중앙집권은 무조건 나쁘고 지방분권은 다 좋은가? 전혀 아니다. 중앙집권이냐 지방분권이냐가 다가 아니라, 책임성의 원리가 어떤 방법으로 실천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독일과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강력한 지방분권 체제라 하더라도 책임 정치의 기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결과를 낳는다. 지방분권도 얼마든지 나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장단점을 나눠 갖는다. 그것의 좋은 효과는 제도의 법-형식적 측면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외적인 조건’, 즉 정치가 그것을 뒷받침할 만큼 사회 속에 잘 뿌리내리고 있는지, 경제를 움직이는 주요 생산자 집단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공동체적인지 등에 의해 영향 받는 바가 더 크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헌법의 사례가 말해주듯, 최상의 헌법도 헌법 외적인 조건으로부터 뒷받침을 받을 수 없으면 최악의 헌법이 된다.

전후 독일 민주주의의 발전을 ‘본(Bonn) 헌법’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기민당과 사민당이 중심이 된 정당 정치 혹은 공동 결정과 직장 평의회에서 보듯 좋은 노사관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까?

좋은 헌법을 갖고 싶다는 정치가의 바람이 진짜라면, 그는 무엇보다도 좋은 경제와 좋은 노동시장, 좋은 교육-문화적 조건을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좋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과를 낳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에게 맞는 헌법의 문제는 – 누가 작위적으로 개헌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 가장 빠르게 제 길을 찾아가게 될 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법치가 아니나 정치를 잘하는 데 그 매력이 있고, 좋은 헌법은 그것의 덤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금, 2016/07/0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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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 대부분은 헌법유린과 파괴의 역사와 같습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계엄령과 군사정변, 유신 등
잘못된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헌법을 악용했고
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만든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입니다.

해방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것인지에 대한 무수한 논쟁
그리고 4.19, 군부독재 타도, 유신반대, 5.18, 6월항쟁까지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외침과 희생, 죽음으로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근현대사 아카데미 8월과 9월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역사 변화의 주역이지만,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광장을 열고,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켜온 "그 사람들"
역사 앞에 지워지고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러 갑니다.
8월, 9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에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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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7/2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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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광주’로 간 뉴스포차. 미국이 광주 학살을 묵인 혹은 승인했다는 문서를 최초로 공개했던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을 만났다. 1996년, 5.18 관련 미국정부 기밀 문건인 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셔록은 현재 광주에 머물며 5.18 연구자들과 함께 이 문건을 다시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있다. 오는 24일, 분석 결과를 발표한다.

팀 셔록은 전두환 군부의 광주 군사작전을 사실상 승인했고, 쿠데타를 묵인했거나 방조했던 미국의 이중성을 고발한 ‘미국 기자’이다. 셔록과 만나 광주와 미국 사이에 숨겨진 진실을 들어보자.

백악관은 80년 광주에 대해 분 단위로 보고를 받았다.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한다.

전두환은 새빨간 거짓말쟁이

전두환 그룹이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은 베트남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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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셔록은 앞으로 변해갈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에 관심이 크다. 지난 7일, 당시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한-미 관계와 5.18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생각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수, 2017/05/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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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경향신문(2016. 6. 21)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박정희가 미국의 한국 안보 공약을 신뢰하지 못해 자주국방을 선언했듯이 중국·소련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던 김일성도 ‘국방에서의 자주’를 추구했다. 게다가 김일성은 미국의 핵위협을 받았다. 작은 나라가 외부 도움 없이 강대국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자 할 때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 핵무기다. 박정희가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간혹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김일성의 비핵 논리, 김정일의 핵 모호성, 김정은의 핵무장 강화라는, 지도자 개성의 차이에 따른 비연속선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60년은 핵을 위한 행진의 시기였다. 핵능력이 없을 때는 비핵을, 핵개발 초기에는 모호함을 내세울 때가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60년 3대에 걸친 간난신고 끝에 온갖 대가를 지불하고 확보한 핵무기다.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하란다고 포기할 리 없다. 그것도 과거 핵정책 실패로 ‘핵 강국’ 북한의 등장에 책임있는 당사국의 말을 들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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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면 상응하는 댓가를 주겠다는 남한의 제안은 실현가능성이 낮다. 그동안 김씨 3대가 자위권 확보를 위해 핵에 집착해온 역사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을 향해 선 핵포기를 주장하는 것은 그저 국내용 여론조성용이거나, 이데올로기적 구호에 불과하다. 이런 시늉으로는 현실에 아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북한에 불가역적인 핵포기를 요구하려면 먼저 남한이 불가역적인 평화체제를 보장해주는 조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북핵을 국내 정치에 이용해온 보수세력들이 그럴 수 있겠는가?

비핵화가 우선이라는 한국의 입장은 도덕적 정당성이 있을지언정,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왕이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도 북한을 설득하기 어려운데 ‘선(先) 비핵화’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핵실험 이전의 9·19 공동성명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한·미·중·일의 희망사항도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 북한이 왜 4차례의 핵실험을 없던 일로 하겠는가.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현실을 인정, 잠정적 핵동결을 당면 과제로 받아 들여야 한다. 완전한 해결을 삼가야 한다. 완전한 해결은 대결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고 대결은 북한에 핵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의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북한도 완전한 해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협정 문제를 보자. 북한은 한·미의 선 비핵화에 맞서 선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지만 평화가 진정 북한이 원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평화협정을 포함한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건 대외관계 정상화로 외부 위협이 사라지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내부의 전체주의적 통치를 완화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건 김정은 정권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뜻이다.

비핵·개방·3000, 그랜드바겐, 드레스덴 구상이 거절당한 주요 이유도 북한 체제를 급격히 바꾸는 위험한 대북 제안이기 때문이다. 핵 강국을 자처하는 지금 북한에 평화협정의 가치도 상당히 떨어졌다.

그렇다면, 원칙과 명분으로부터 눈을 돌려 한·미 연합훈련을 잠정 중단하면 핵실험도 잠정 중단하겠다는 북한의 제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 문제가 정말 위험한 때는 핵 위협은 높아지는데도 관계가 단절된 채 적대하고 대결하는 상황이다. 북한의 태도가 나아져서가 아니라 북한이 더 위험해졌기 때문에 간여하고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게 시민의 생명을 책임진 정부의 책무이다.

미국은 그럴 필요가 없다. 대북 제재에만 집중하는 미국은 태평양 건너에 있다. 미국 흉내를 낼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득권세력, 보수층은 한·미 연합훈련에 민감하다. 협상으로 내줘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주한미군 철수 및 감축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한·미동맹의 신성성을 훼손한다고 믿는다.

사실 이들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적의 지위를 상실하면 북한 주적론에 기반한 정치·사회 구조가 무너진다. 종북 담론이 사라지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거나 감축되고, 한·미동맹의 성격이 변한다. 군비 축소로 천문학적인 국방비가 복지비로 전환되면 우리 내부의 냉전구조와 보수 헤게모니가 붕괴된다. 분단 이래 보수 기득권의 물적·정신적 토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북한에 불가역적 비핵화를 원하면 남한은 불가역적인 평화를 제공해야 한다. 그게 공정한 거래일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방법이기도 하다. 한·미 훈련 중단은 북한에 그런 협상을 하겠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남북이 하나하나 주고받으며 풀어가면 평화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남한 내부는 북한을 적으로 상정한 법제도, 정책, 각종 상징으로 얽혀 있다. 핵과 평화가 교환가능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보수세력이 내줄 게 별로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부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않는 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감추고자 한다면 방법이 있기는 하다. 비핵화의 당위성, 통일의 필요성과 같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가능한 의제로 시선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비핵화, 통일만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비핵화와 통일은 그렇게 당면한 위험의 해결책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 혹은 도그마가 되었다.

월, 2016/07/1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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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7. 12)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이사장의 독단 아래 교사와 교수가 학내의 비교육적인 일에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자라는 학생들이 자존감과 권리의식을 가진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까? 사학을 이사장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복종을 미덕으로 아는 ‘개돼지’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국민 99%가 개돼지”라고 말했던 교육부 관리 나향욱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나와 “죽을죄를 졌다”고 말했다. 취중 진담이라고나 할까. 그의 진짜 죄는 고위 관료, 대법원 등 우리 사회 최상부의 평소 생각과 행동, 즉 ‘공공연한 비밀’을 들추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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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는 사학비리의 아이콘이자 학교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우리사회 1%, 족벌사학의 삐뚤어진 의식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상지대왕’으로 불리는 김문기 상지대 전 이사장 모습.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94f8389c72394b2eb7d8b18162949efe)

여기 증거가 있다. 상지대 사태다. 지난 6월23일 서울고등법원은 2010년의 김문기 일가를 상지대 정이사로 복귀시킨 과거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결정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지난 7년 동안 대학을 반교육의 현장으로 몰아넣었던 상지대 사태는 새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환영할 만한 결정이나, 그동안의 상처가 너무 크다.

김문기의 상지대는 한국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다. 그가 관선이사로 내려와 상지대 재단을 소유물로 만든 뒤 1978년부터 93년까지 단 한 차례의 이사회도 열리지 않는 등, 우리 상상력 범위 내의 거의 모든 비리가 이 기간에 일어났다.

결국 93년 김문기가 구속되고 임시이사 체제가 유지되면서 상지대는 대학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데 사학비리 전과자를 ‘종전 이사’라는 비법률적인 용어로 포장해서 복귀의 길을 터준 2007년 대법원 판결로 악몽은 다시 찾아왔다. 김문기가 ‘소유권’을 되찾자 ‘비소유자’들에게는 ‘노예화’의 길이 열렸다.

2008년 이후 상지대 외의 많은 과거 비리 대학이 교육부와 사분위의 ‘구재단’ 복귀 결정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두 정권하의 교육부와 법원은 그것을 ‘좌파’에게 ‘빼앗긴 재산’을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일로 생각했다.

그 이후 비리 사학은 여야 일부 정치권 인사들에게 정치자금원이, 일부 교육부 관료들에게는 ‘미래의 직장’이, 일부 사분위 위원 변호사들에게는 자기 로펌의 고객이 되었다. 그것은 사학의 자율·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나,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는 ‘전제왕정’의 복귀였다.

미국, 유럽은 물론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사학재단의 전횡과 비리가 오직 한국에서만 지난 반세기 이상 반복된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역대 독재정권이 붕괴되면 그 정권과 유착되었던 사학비리가 언제나 전면에 부상했는데, 그것은 사학비리가 단순히 재단 이사장의 권위주의, 이사장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사립학교법상의 문제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1%의 족벌 세습집단의 이익’과 그것을 지켜주는 여러 권력 집단의 이해가 굳건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개방이사제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학법 개정안을 반대하며 6개월 전설적인 장외 투쟁을 했던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 모든 사건의 분기점이 된 대법원과 교육부의 ‘재산 돌려주기’ 결정은 그 근거도 없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사립학교법상으로도 사학재단은 출연자의 개인 재산도 아니고,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자주성은 이사장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헌법상의 가치 아래 있다. 상지대도 그렇지만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대표적인 사학재단은 거의 민간인들의 뜻있는 기부로 세운 민립대학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만들어진 민립대학을 족벌집단의 소유물로 만들어 주었다. 영남대, 조선대, 인하대, 덕성여대 등 유명 사립대학은 모두 민립대학으로 시작했으나, 정권 자신 혹은 정권과 밀착한 한두명의 이사가 그것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사학은 ‘교육’의 가치와는 멀어졌다.

여전히 대다수 국민들은 이것이 소수 비리 대학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은 대학의 85%, 고등학교의 45%가 사립인 전형적인 사립 중심의 교육체제다. 이사장의 독단 아래 교사와 교수가 학내의 비교육적인 일을 보고서도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자라는 학생들이 자존감과 권리의식을 가진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까?

사학을 이사장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복종을 미덕으로 아는 개돼지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학의 민주화·공영화가 우리 대학 교육은 물론 사회의 정상화의 절대적인 관문임을 또다시 확인한다. 기부자가 건학의 철학과 이념을 정착시킨 다음 아름답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우리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월, 2016/07/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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