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시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위하여

지역

시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위하여

익명 (미확인) | 목, 2019/01/24- 11:39

한겨레 신문에 ‘을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장흥배 님이 1월 10일 ‘시장은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주제로 쓴 글의 일부를 아래로 다시 소개한다..

최저임금제의 의의는 임금 최저선의 결정(이라는 영역)에서 시장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확인한 것이다. (중략) 문재인 정부하에서 최저임금제의 역사적 의미는 시장의 힘을 극복하려는 것이었지, 이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촛불항쟁, 여야 대선주자들의 공약 경쟁, 이를 통해 들어선 정부의 정책 수립을 통해 탄생한 최저임금 1만원이 가리키는 정책 방향은 공룡 재벌에 의해 망가진 공정거래 질서의 복원, 만약의 고용 위기를 상쇄할 과감한 복지와 소득재분배, 부동산 지대경제의 청산 등이었다. 요컨대 시장과 경제를 16.4%의 최저임금 인상이 수용될 수 있는 환경으로 개혁한다는 것이 인상을 결정한 사회적 합의의 요구였던 것이다. 달리 보면 이 모든 과제에서 허탕을 치고 역진하는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하는 온갖 꼼수로 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좌절로 가는 최저임금 1만원 실험에서 남아야 할 교훈이 있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따른 선택을 객관적인 시장의 힘에 의한 제약으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반작용적) 역효과 명제는 이를 통해 대중의 사고를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실상 신비한 시장의 힘으로 포장된 상자를 뜯어보면 재벌, 상가와 아파트 자산가, 상위 10% 고소득자들의 경제적 이권을 유지·확대하려는 (탐욕의) 이해가 대개의 내용물이다”

 

명쾌한 선언이다! 시장은 당연히 시민사회의 필요와 합의에 따라 작동하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촛불의 이름을 앞세워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한국 사회의 모습은 시장논리와 경제성과라는 미명으로 극소수의 기득권층 탐욕이 합리적인 것처럼 포장되고 이들에 의해 전일적으로 지배당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본인과 가족들의 패악행위 등으로 스스로 경영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노출한 조양호 대한항공 그룹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연기금 등 공공투자 지분의 주주권 행사(stewardship)를 유보하면서 오히려 수구언론과 보수진영에서 이를 마치 사유재산권과 경영권의 침해하는 것으로 오도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명백하고 노골적으로 탈법과 불법을 저지른 이재용을 삼성이라는 한국 대표기업의 주주이자 경영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구속을 면책하고 석방하였다. 결국 대한항공과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집단들이 국민적 자산이 아니라 일개 가문의 전횡적 사유물이라는 것을 공인한 셈이다.

시민들에게서 수임한 개혁을 추진하는 대신 애매하게 삼성과 연대하며 황당하게 시장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지난 세월의 참여정부에 이어, 역시나 이익 방어에 노련한 기득권의 간교와 교언영색으로 포장된 예의 시장논리에 포획되고 투항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실현과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역사적 명제에서 말머리를 돌려 뒷걸음친 문재인 정부는 이제 더 이상 촛불과 시민을 정권의 명분과 장식용으로 운운해서는 아니 된다.

1924 pixabay
사진: pixabay

시장은 기본적으로 무죄이다. 문제는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작동하는 기득권과 자본의 탐욕과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이데올로기와 매카니즘,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형성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구조가 문제이다. 이에 한걸음 더 들어가 시장이라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용어를 시장, 시장가격, 시장기구(역할), 시장경제 등으로 다시 세분하여 들여다 보고자 한다.

경제학 사전에 의하면 시장은 일군의 공급자와 수요간에 성립하는 재화 내지는 용역의 교환 또는 매매의 관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상품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교환 내지는 매매 행위가 특정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나, 상품경제가 일반화된 이후에는 구체적 매매 행위에 더하여 개념적 추상으로서 시장이 존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와 범위의 내용이 특정 장소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담 스미스 이래 경제학의 핵심은 가치에 대한 논쟁과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것일 것이다. 개념으로서 가치와 시장 가격 간에 존재하는 괴리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지난 수백 년간 서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제 산업의 내용을 역동적으로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는 다만 기업인으로서 30여 년간 실물 경제를 체험한 바탕으로 경제와 시장에 대해 기존의 논쟁과는 다른 의견을 만용스럽게 개진해 보고자 한다.

육체라는 유기체적 형태를 지닌 인간에게는 의식주의 해결이라는 절대적 필요가 존재하며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이를 충족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비로소 해당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이를 해결하려는 국가단위의 시스템을 현대적 의미에서 복지의 사회안전망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수 차례의 산업적 혁명과정을 통하여 인류의 노동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기본적으로 의식주의 수요를 해결하면서, 이제 추가적으로 진행되는 생산(경제)활동은 역사의 흐름이라는 시간적 요소와 더불어 사회와 정치적 관계구조 속에서 상대적이며 개별적으로 형성되는 수요와 연동하여 다양하게 전개된다.

현장에서 물물교환과 단순한 매매가 이루어지던 시대를 지나 근대에 이르면 위에 언급한 다양한 형태의 시장과 사회적 권력구조 속에서 집단적 공급과 수요의 균형적 만남을 통하여 시장가격이 형성된다. 이때 시장이라는 구체적 또는 추상적 공간에서 현상적으로는 수급상황과 한계효용의 논리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지만, 실현된 가격이라는 현상 뒤에는 생산 및 공급의 수단과 유통망 기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형성된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구조가 실제적인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현대의 대부분 경제학자들은, 알프레드 마샬이 제시하였듯이 일군의 공급과 수요에 의한 균형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시장가격이 형성되고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규정된 인간들에 의해 한계효용적이고 판단논리적인 행위에 의해, 기존에 형성된 가격선이 수학의 법칙처럼 이동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장가격과 변동은 사회평균 생산력에 의한 노동가치에 기반하되 혁신적 기제와 더불어 사회구조와 세력간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에 더하여 체제의 주류집단이 주도하는 미디어 매체의 홍보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개별적 집단적 심리 욕구가 인위적으로 형성되면서 소비자들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은 수요를 촉발하게 만든다.

권력구조에 따라서 전개되는 시장 현실과는 별도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조건하에 수급 균형과 한계적 효용가치 이론이 작동하는 시장경제에서는 매체 또는 공간이라는 장소를 통하여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격을 매개로 실제적인 수요가 보내는 신호를 확인하면서, 일차적인 수요와 공급에 대한 정보와 균형의 기능에 더하여, 경제적 유효 자원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결합시키는 역할과 기능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20세기 전체주의적인 극우 파시즘과 극좌적인 스탈린 시대의 경제체제를 경험하였던 빈 학파의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이론과 입장이 일면 타당하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혹독한 시대적 경험을 겪은 빈 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핵심 사항으로 반드시 개인적 자유주의와 무제한적 사유재산권이 전제되어야 하며 국가의 역할을 상기 요소들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좀더 나가서는 인간의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면서 시장에게 만능의 능력을 부여하여 신과 동등한 위치까지 올려 놓는다. 이제 시장 만능주의는 ‘반드시 시장에 복종해야 하며 다른 대안은 없다(TINA’)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발전해 나간다.

반면에 폴라니와 케인즈 등의 입장에 서면 자본가들의 지나친 탐욕으로 자유시장의 기능이 실패하고 독점의 폐해가 커져가면서 사유적 자본의 자기조정과 이익실현이라는 매카니즘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을 무리하게 강행하여 한편에서는 과잉생산물이 누적되는 반면에 식민지를 포함하여 빈곤과 결핍으로 탈진한 시장의 과소소비 상황이 겹치면서, 이러한 공황적 상황을 정치권력의 강제이던 군사적 물리력이던 국가단위 또는 연합적 지역단위에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으로 파시즘이 태동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한마디로 파시즘은 탐욕 때문에 실패한 시장 기능을 강제적으로 작동시키면서 발생하는 반동적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위임된 정치적 강제력으로 잘못된 시장질서와 왜곡된 산업구조에 개입하고 수정을 시도하는 것은 정당하고 마땅한 일이다.

상기의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대치하는 가운데, 지난 백여 년간 경험을 통하여 되돌아 보면 시장기능과 시장경제의 역할은 결국 역사적 상황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관점과 입장의 문제로 다시 귀결된다. 마치 근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에서 공히 국가의 성립을 사회계약론으로 해석하면서도, 홉즈는 기존 질서의 권력자인 군주의 입장에 서고 로크는 신흥 유산자 계층의 편협한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루소는 모든 공민들의 참여와 합의에 의한 일반의지에 기초하여 근대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 보게 한다. 판단의 기준은 ‘무엇과 누구를 위한 것 인가’ 이다.

이에 더하여 제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생산성 격차에 따른 보몰 효과가 나타나고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절대적 경제력에 의해 달러에 기초하여 형성된 기존의 통화시스템에 미국경제가 위축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비대칭성이 형성되면서 고전적인 경제와 통화의 이론에 괴리와 변종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무형재를 중심으로 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출현과정에서는 기존의 시장경제 이론인 재화 및 서비스의 배타성과 경쟁의 논리 및 수확체감의 법칙 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금융과 산업변천의 경제사를 오랜동안 연구해온 건국대의 최배근 교수는 최근의 저작 ‘위기의 경제학? 공동체의 경제학!’을 통하여 (기존의) 경제학은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지난 시기 공업화에서 벗어나는 탈공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면서 과다하게 금융산업에 의존하게 되었고 위에 언급한 달러 중심의 통화시스템과 금융산업이 미국의 패권과 결합하고 세계화를 통하여 전지구적 불균형과 극심한 소득불평등이 확대를 거듭하면서 양극화의 위기 상황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최교수는 인터넷 망과 ICT 기술의 기반을 전제하는 미래적 사회에서는 탈물질적인 무형재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러한 무형재적 미래의 산업에는 혁신적 창의성과 자율성이 가치창출의 핵심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 경제와 산업의 영역에서 지배적 형태였던 소모적이고 경쟁적이고 배제적인 방식에서 탈피하고 데이터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협력과 공유라는 새로운 방식과 논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혁신 역시 협력과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하고 가치창출방식과 사업모델에도 다다익선의 가치체증의 법칙이 작동하면서 이타자리(利他自利)형 경제 모델과 법칙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 역시 타인과 경쟁적인 지식축적의 암기형에서 협력을 기반으로 더불어 함께 과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며, 금융도 기축통화 중심과 중앙은행의 통제적 개입 방식에서 벗어나 블록체인과 플랫홈 공유를 통한 민주적이며 다원적인 시스템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기술하고 있다.

1924(1)

필자는 최배근 교수가 ‘공동체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던지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도전과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전망에 전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보완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

우선 인간이 유기적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자연재에 노동을 가하여 의식주의 수요를 해결하는 절대적 기초재와 인터넷 기반과 ICT 기술에 기반으로 새로이 형성되는 무형재를 구별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초재 중에서도 의복은 대충 해결된 상태이지만 식량은 여전히 국가단위에서는 안보적 차원의 주제이고 개별적인 시민에게도 일상적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주거의 문제는 특히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에서는 사회 안전망으로서 복지의 핵심적 내용을 차지하면서 공공의 개입과 역할이 반드시 요구되는 영역이다. 양보할 수 없는 의식주의 전반적 영역에서는 고전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배타적 경합성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형재 일반 역시 성격에 따라 섬세한 재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제공의 효율을 드높이고 자유의 가능성을 제고하는 역할이 있는가 하면, 제한된 인생의 시간을 사이버 공간에서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하는 낭비성 또는 중독성의 문제를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경제는 시장에서 표현되는 단순히 수치로만 평가해서는 안되며 인간적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데 주어진 역할을 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최교수도 언급하였듯이 경제학 또는 시장의 개념을 단순히 과거형으로 고전적 해석과 영역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새로이 전개되는 조건과 상황에 응동하고 변화를 추구하고 내용을 확장하여야 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뉴톤의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그리고 또 다시 양자론으로 변신을 시도하듯이, 폴라니가 언급하는 복합사회(정치, 산업, 사회, 문화, 기술 등이 상호작용하는)속에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과거의 이론을 포괄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역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시장논리이고 누구를 향한 경제이론인가 라는 근본적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과학과 기술이라면 이도 역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강제를 통하여 개입하고 전향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여야 한다. 과학과 기술에 중립성은 없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인터넷 환경이라는 공유재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공유경제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며 구글과 폐북 그리고 우버 등에서 경험하였듯이 설령 이들이 인류에게 보편적인 편이와 효율성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기술 특성상 어마어마한 운용의 과정과 성과를 개인과 특정 기업이 독점하는 것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공유기반의 소유와 운용의 과정에 공공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며, 실현된 운용의 성과를 시민사회 또는 인류가 함께 향유할 때만이 명실공히 공유경제라는 용어를 비로소 부여할 수 있다. 지혜와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미래에 전개되는 산업사회에서는 로봇과 AI에 의해 대부분의 반복적인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단순한 정신적인 판단과 관리업무도 대체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물론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 직업과 일자리가 생기겠지만 숫자나 내용에 있어서 소멸되는 기존의 직업군을 모두 보충하고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이 기존에 있었던 산업혁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속도를 조절하여 실업의 충격을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기존의 산업과 체계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적 행위이다.

근본적으로 기존적인 계약방식의 전일적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일자리의 개념을 바꾸어 가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제 이전에 있었던 자기실현적 자영 형태의 농업과 수공업이라는 오래된 과거에서 새로움을 찾고자 한다. 미래 사회에서는 시장과 기업의 요구사항 대부분이 사회적 역사적 노동의 축적된 형태인 과학기술로써 해결될 것이다. 기존의 방식과 다른 ‘새로운 일자리’라는 개념의 도입은 기존 복지체계의 재구성, 기본소득의 도입 그리고 조세체계의 대변화를 요구하는 매우 광범하고 중요한 주제이기에 추후에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결론은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복합적 공간으로서 시민사회가 만능적 시장의 일방적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진화하면서 살아 남았지만, 인간은 언어와 대화라는 방식으로 인위적인 합의와 협력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왔고, 대자적인 질문과 성찰을 통해 누적된 지식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루고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

시장은 신이 만든 만능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들이 일구어낸 매우 소중한 인공적 성과물의 하나이며, 따라서 시장은 시민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효율적 수단과 관계적 방식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시장이라는 이름과 논리로써 오히려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구속하려고 한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폭군을 몰아내었듯이, 시장이라는 포장의 뒤에 숨어 있는 탐욕을 제거하고 기득권 체계를 전복시켜서라도 시장으로 하여금 시민사회에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제공하고 봉사하는 충복으로 역할을 다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시장은 인간사회에 봉사하는 유능하고 유용한 도구이어야 한다. 이것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이요, 제민지산制民之産의 요체이다.  2019-01-21.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빠르게 성장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통해 시민들의 평등한 토지권을 확보해 주고 이런 평등한 토지권이 출발과 기회의 평등으로 이어졌다는 점, 여러 부작용이 없지 않았고 수차 바뀌긴 했지만 교육제도가 비교적 공정한 신분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은 손에 꼽히도록 주요한 원인이다.

칼럼_180830(2)
 
 
부동산과 교육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인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게 완전히 무너졌다. 무려 1경원이 넘는 부동산은 소수의 재벌과 지주들의 손에 있고 매년 GDP의 3할이 넘는 천문학적 불로소득이 이들의 금고로 들어간다. 부동산이 있는 자는 아무 노력과 기여 없이도 부자가 되고, 부동산이 없는 자는 아무리 노력하고 가치의 생산에 기여해도 가난해진다. 그리하여 이제 서울은 아파트 중위가격이 7억원을 넘는 중상층 이상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상전벽해했다.

교육은 또 어떤가? 서울대를 가치분배(좋은 직업과 직장의 획득 및 상징권력에서의 우위를 의미한다)피라미드의 최정점으로 하는 교육시스템은 부모들의 재력이 승부를 좌우하는 머니게임의 장으로 완벽히 재편됐다. 신분이동은 고사하고 신분세습의 합법적 수단으로 전락한 게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이다.

생각해 보자. 지금 대한민국에는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고 그 부를 자식들에게 상속증여함은 물론 교육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신분세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반대편에는 부동산이 없어 주거난민으로 몰린 허다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겐 머니게임으로 전락한 입시전쟁(입시전쟁이란 표현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수 많은 사상자가 입시전장에서 발생한다)에서 사용할 실탄이 턱없이 부족하고 따라서 이들의 자식들은 입시전쟁의 패자가 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이는 이들의 앞날이 어둠 뿐일 것임을 의미한다. 즉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정색하고 묻자. 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고 그 신분의 변동가능성이 없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냐? 그건 고대나 중세의 신분제 사회일 뿐 민주공화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투표권만 평등할 뿐 사회경제적 조건의 출발선이 지극히 불평등하고, 개인의 노력을 통해 이를 교정할 가능성이 극희 희박한 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의 소임을 포기했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완전히 신분제 사회로 회귀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 역사적 책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럼 없이 부동산 개혁과 교육 개혁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유세 개혁의 형해화가 부동산 개혁의 포기를 상징한다면, 성취평가제와 고교학점제의 도입 연기, 늘어난 수능과목으로 인해 오히려 가중된 수능부담 등은 교육 개혁의 파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구성원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양대 요인인 부동산과 교육을 포기한 것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라니! 정말 피를 토할 노릇이다.

본디 분노의 시효는 짧고, 삶은 힘겹고도 긴 법이다. 나와 내 피붙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좌표가 설정되어야 분노의 계기들이 조직화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대부분의 시민들이 열망하는 사회경제적 희망을 구성하는데 별 성과를 내지 못하는 까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노의 계기들(양승태 법비들의 사법농단, 기무사 등 군부의 쿠데타 시도 등)이 정치적으로 응집되지 못하고 형해화된다는 느낌이다.

부동산과 교육 개혁의 전면적 좌초가 대표하듯 사회경제적 개혁의 총체적 파행에서 비롯된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폭락과 그에 기초한 위기를 탈출할 유일한 길은 근본적 사회경제 개혁 뿐이다. 그걸 못할 때 문 정부가 기댈 곳은 이벤트 정치와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획기적 개선뿐이다. 그러나 이벤트 정치는 약발이 다했고,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획기적 개선은 통제 불가의 변수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은 관계로 쉽지가 않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기조를 유지하는 한 머지 않아 치러질 총선 압승도 난망일 것이다. 유권자들이 문 정부와 민주당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를 낳은 정치적 자궁인 자한당에 대한 심판 여론이 총선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건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선택할 길은 하나다. 부동산과 교육을 비롯한 근본적 사회경제적 개혁에 올인하는 것말이다. 그길만이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으며 민주당 정권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언컨대 대한민국 메인 스트림과 타협해 부동산과 교육을 비롯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포기한다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정치적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목, 2018/08/30- 13:18
130
0

그림엽서가 아니었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백두산 천지 앞에 섰다. 그 장면이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중계되었다. 그 뿐인가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렇게 상상을 뛰어 넘는 변화를 가져온 원동력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촛불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24주간동안 광장에 밀집된 민의의 힘은 헌법을 다시 소환했고 국회, 헌법 재판소 등의 국가기관을 깨웠다. 그 질풍노도의 힘이 평화의 물꼬를 열고 있다. 광장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광장의 힘이 정치제도와 기관을 견인하게 된 것이다. 광장과 제도가 결합될 때 놀라운 역량이 발휘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칼럼_180924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공화정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정의 역사가 수천 년인 나라가 공화국을 만든다는 것은 지구촌 전체 국가에서 많지 않은 사례이다. 더욱이 헌법 제 1조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구체화한 경우도 드물다. 물론 이런 급격한 공화정의 설립이 제도의 도입과 가치의 괴리가 가져오는 ‘역문화지체’의 감기 몸살기를 늘 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외침과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는가’라는 냉소가 늘 공존해 왔다. 많은 근대적 가치가 그렇듯 민주주의도 수입된 단어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기본권 개념이 종이 위의 활자에서 외침으로, 그리고 내면화된 가치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몽이 필요한 상태이다. ‘공화국’의 개념이 낯설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데모크라시는 ‘민치’(民治)를 뜻한다.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면서 민주주의는 필수가 아닌 선택, ‘주의’ ‘주장’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제는 산업화도 성공하고 민주화도 성공했다’는 자화자찬의 성취감 속에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기가 조금만 침체의 기미를 보이면 민주화 탓을 하는 주장이 여전히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역주의 정당논리가 산업화의 성과와 민주화의 성과를 분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적어도 동일차원 그리고 여전히 민주화가 하위차원인 것 같은 위치설정이 도전받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면 민주주의는 유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서구 지역의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의 논리로 차용되었다. 민의를 억압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의 동원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는 아직도 지구촌 지도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사회발전, 정치 발전, 경제발전이 나란히 이루어진 서구 국가에서는 순서도 사회발전을 토대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 비서구 국가에서는 다른 것을 희생하여 이중의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강요당해 왔다. ‘갑질’과 ‘미투’는 사회발전의 지체가 폭발된 것이다. 우리는 선 경제성장, 저항을 통한 민주화,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발전과 평화보장을 향한 길 위에 서있다.

민의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 민의는 ‘ 대의’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민의’를 드러내는 것은 정당을 통한 ‘대의원’을 선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오랜 왕정의 전통 때문에 ‘ 대의원’은 대의된 권한을 위임받은 자 이상의 ‘ 권력’을 행사하고 ‘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의’가 결정권의 독점 또는 특권으로 잘못 인식되면서 잘못된 결정에 대한 저항과 청원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ìº´ À§ÇèÀ¸·ÎºÎÅÍ ¾ÈÀüÇÏÁö ¾ÊÀº ¹Ì±¹»ê ¼è°í±â ¼öÀÔ¿¡ ¹Ý´ëÇÏ´Â ½Ã¹ÎµéÀÌ 7ÀÏ Àú³á ¼­¿ï ÅÂÆò·Î ´ö¼ö±Ã ¾Õ¿¡¼­ Àü¸é ÀçÇù»óÀ» Ã˱¸Çϸç ÃкÒÀ» ¹àÈ÷°í ÀÖ´Ù.

‘직접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고대 아테네에나 가능했던 제도라고 이야기 한다. 직접민주제를 제도화하고 있는 스위스를 이야기하면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들의’ 이야기로 밀어 놓는다.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주에서 채택했다고 말해도 ‘아직 우리는’이라고 하면서 민주발전단계론 뒤로 숨는다.

직접민주제는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그리고 유권자의 수도 많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어 파퓰리즘을 말한다. 민치의 전면적인 등장을 강조하는 이태리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의 등장을 ‘파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가두고 있다. ‘경제 성장의 걸림돌’ ‘ 파퓰리즘’ ‘혼란과 질서회복’ 모두 민의의 전면적 등장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박스들이다. 민주주의가 안착하기도 전에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가 앞선다. 직접민주제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대의제의 보완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의제의 모든 특권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직접 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정당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가 선진적인 제도로 소개되곤 했다. 정작 그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는 정당 관료제 과잉의 문제에 대응하는 ‘ 더 많은 ’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있다. 히틀러가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에서는 정당 중심의 대의제가 발달하고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였다. 저항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 온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가 직접민주제의 제도화보다 정당 명부제를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아직도 ‘좋은 제도 수입’으로 좁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당 발전보다 사회운동의 역사가 긴 우리의 민주화의 역사에서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광장의 민심을 직접민주제라는 제도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 많은 민주주의’ 활동가들은 독일이 이제는 직접민주제를 도입할 만큼 민주시민 훈련이 되었고 정당 관료제가 민의를 대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부르크 주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맘포드 박사는 자신이 직접민주제 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사회기반 시설 공사비가 적게 들지만 더 내구성이 있는데 반하여 왜 독일에서는 공사비도 더 많이 들고 공사 내용은 부실한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답으로 스위스에서는 큰 공사비가 드는 사안은 주민 투표로 결정되기 되기 때문에 예산 집행이 투명하고 더 많은 공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맘포드 박사는 모든 정당은 대의제의 특권 방어라는 측면에서 카르텔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 주 의원실의 귀족정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의원휴게실을 보여주었다. 함부르크에서 녹색당 의원들이 오랜 보존 녹지에 항공기 제조사를 건립하는 안에 찬성하는 상황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시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견제가 없이는 의사결정권의 독점권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에서 당초 예산 보다 10배가 넘는 예산을 소요되는 하펜시티 개발의 문제, 올림픽 유치의 문제가 주민들의 공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올림픽 유치의 정당성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한 연후에 주 정부는 요식행위 차원에서 주민투표에 부쳤는데 소요예산을 따져 본 주민들이 올림픽 유치를 부결시켜 주정부 관계자를 놀래게 한 일 도 설명해 주었다. 올림픽 유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언론은 올림픽 유치를 기정사실화 했지만 ‘유치 반대’라는 투표 결과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올 여름 학생들과 도시재생을 주제로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맘포드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직접 민주제적 방식의 의사 결정이 도입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소요 예산의 문제, 환경문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정치인과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큰 대회 유치가 번번이 주민투표에 의해 부결되고 있다고 한다.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로마에서는 세계 직접민주주의 대회가 열린다. 2008년 스위스 아라우를 시작으로 2009년 서울, 샌프란시스코, 몬테비데오, 튀니스, 상 세바스챤을 거쳐 말 그대로 글로벌 포럼의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대 초입에 세계경제 포럼인 다보스 포럼과 세계 사회포럼인 포르토 알레그레 포럼이 같이 출발하였다. 2008년에 세계직접민주주의 포럼이 시작된 지 10년이다. 2018년에서는 오성운동의 결과 당선된 로마시장의 적극적 유치로 500여명이 넘는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가 함께 한다. 광장의 도시 로마에서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광장의 민의를 제도로 수렴하는 방법을 더 많이 고민하고 돌아오고자 한다. 촛불 민의의 역량을 담는 실질적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심정이다. 직접민주제는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가 요청하면 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청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월, 2018/09/24- 15:59
124
0

화실을 정리하다가 지쳤다. 화구보다 책이 많은 스튜디오다. 수십년 쌓인 책은 버리지도 다 읽지도 않은 채 널려있다. 인문서, 도록, 팜플렛, 자료집 들이 대부분이다.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책들 이제는 다 버리고 싶다가도 미련이 남아서 아직도 스튜디오를 차지하니 어지럽다. 열에 아홉은 눈길도 안 주는 종이무더기에 지나지 않게 된 책들에 무슨 미련이 많아서 끌어안고 사나. 나의 회의는 이 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다. 이 책들의 사고 대부분은 내 사고와 실천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부분이 인본주의 틀에서 서술한 이 책들은 산속 숲에서 사는 내 생활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흡사 21세기를 살 소년이 20세기 책으로 19세기 교사에게 배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칼럼_181001

얼마 전 ‘민중미술과 영성’ 미술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다. 민중신학을 개척한 서남동 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함께 벌린 일이다. 신학과 예술의 합류로 민중미술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었다. 민중의 삶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를 중심으로 초대전시 했다. 특히 민중과 신학과 예술의 문제를 서남동 목사처럼 합류정신으로 보았다. 민중, 신학, 예술. 서로 전혀 다른 주제 같지만 삶의 관점으로 보면 서로 연관되는 주제다. 이들은 삶과 죽음의 주제, 행복과 고통의 주제, 존재와 무의 주제를 다 갖는다. 하나뿐인 지구의 생태계에서 인류는 너무 혼자 커져 버렸다. 각종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과 이상 기후 현상까지 만들어 지구 생태계를 망치는 인간의 존재가 무슨 염치로 세계 운영을 계속 주도하려는가,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대다. 이 성찰을 방해하는 사고가 대부분의 책들이고, 바보상자 티비, 엘리트 관료와 신자유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인간 아닌가.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르네상스는 서구의 근대적 인간을 만드는 뿌리가 되었다. 합리적 사고와 휴먼이즘이 나와서 인간이 신의 영역도 대신한다. 생산과 소유를 무한정 인간이 주도할 수 있다는 자기 오만이 생기게 되었다. 신성 중심이냐 인간성 중심이냐를 분리해서 보면서 세계관의 이원론적 오류에 빠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과 인간은 양단 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신성(세계, 자연, 우주)과 인간성은 둘이면서도 하나다. 인류학에서 좋은 개념이 있는데 그게 신인간이다.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성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으로 불이(不二)다. 현실 세계는 여러 가지 사물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두 고정되고 독립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하나라는 것인데 신과 인간의 분립적 사고는 세속의 인간, 피조물 인간을 만들어버렸다. 고대 인류의 사고에는 본래 신성과 인성을 불이로 보았다. 고대 예술과 유물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영성이 깃들어서 사물마다 지닌 신성을 놓지 않고 있다. 모든 만물에는 신성이 있어서 서로 외경스러워하며 경배한다. 동학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

 

신은 인간의 내면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內有神靈이다. 인간은 이 신령스러움을 우주적 질서와 자연현상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보고 느끼고 겪는다. 우주질서를 다 표현하기 어려워서 비유한 것이 신이란 隱喩다. 숨긴 채 드러낸 신은 은유문화다. 지구촌마다 다른 모양의 신이 출현한 것을 보아도 신은 그 지역의 생태지리적 조건 속에서 창조한 은유문화인 것이다. 인류 초기의 신은 그렇게 추상적이지도 않고 인본적이지도 않은 신관을 갖게 되었다. 해 달 별 바람 그리고 동식물에서도 신성을 찾는다. 애니미즘, 토템이즘이라고 서구 인문학에서는 자연과 생물 믿음을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토템, 각 종족마다 특별한 인연을 맺은 동식물에 대한 믿음은 생태계를 신성으로 본 것인데 토템이즘이란 프레임으로 미혹이고 미신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과학을 편의적이 잣대로 이용한다. 자기들이 믿는 신은 진리고 타자의 신은 미신이다. 자연을 환경이나 인간의 들러리로 보는 자연에 대한 오만한 시선을 본다. 자연의 신성에서 종족의 뿌리와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기를 낳고 기른 어머니 모성에서 신성을 찾는 인류문화르 파괴한 것이다. 철기시대부터 남성 권력은 자연의 구체적 신성(토템), 종족의 주체적 신성(모성신성, 조상신성)을 부정해야 권세를 완성하기에 다부족 다신교가 권력에 복속되면서 종교는 권력의 소유가 되었다. 권력은 영성의 힘을 활용하며 ‘신성한 권력’으로 권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신전을 왕궁으로 동일시했다. 철기시대 권력은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과 약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종교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커졌고 동반해서 영적 지배력을 키워왔다. 신은 본래 부족 공동체의 세계에 대한 은유문화였던 것이 국가권력 자체가 되고 그의 배후가 되었다. 신성의 독점, 빅 갓(Big God) 시대로 바뀌며 오늘날의 남성 중심의 4대종교만 살아남는다. 그전의 인류는 스몰 갓 문화였다. 모든 신의 중심은 권력을 갖은 남신이 되면서 신석기시대 모계중심사회의 스몰 갓 여신들, 조상신들은 서서히 소멸한다.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민중은 신을 잃었다.

 

민중은 이데올로기로 사고하지 않는다. 신을 믿고 나를 믿고 혈연적 공동체에 의지하며 사는 것 같다. 지배 엘리트는 민중을 끊임없이 교육 시키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해 교육에서 정보지식을 기술 삼아 이용할 뿐이다. 민중은 학제적 사고를 하지도 않는다. ‘개똥밭에 살아도 이승이 났다’는 말처럼 사는 것 말고 더 중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지만, 신성을 믿어서 초월적이다. 이는 ‘가난의 초월이다’.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면서 동시 초월이다. 신성하면서 세속적이다. 진리는 원래 이중모순이다. 흔히 민중을 개념규정 할 적에 정치적으로 피억압 계급이고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비주류라고 말해왔다.(한완상 민중론) 그러나 민중은 존재적 규정으로 다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민중은 그 때 그 때마다 발생하는 사건이라 말하는 편이 났겠다. 사회학적 규정에는 신성이 빠졌다. 가나만 보지 초월을 보지 못한다. 민중은 초월성을 가져서 역사를 반란(혁명)으로 창조하곤 한다. 인간과 민중에게는 본래 깃든 신성이 있고 신성한 에너지를 믿고 초월한다.

 

민중은 신이 있었다. 고대 인류가 부족사회로 살 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철기문명에 와서 신화는 전설과 민담으로 변질이 되면서 범신이 유일신으로 바뀐다. 민중은 권력이 무서워 자기 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민중의 마음 속에 신성이 다 소멸 된 것은 아니다. 자기 마음 속 신은 저마다 다르게 있지만 내 안에 있다. 작고 구체적이고 어머니와 조상으로, 지역의 자연으로 신들이 있다. 신의 의인화, 자연의 은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내 마음속 신인간이 지워지지 않은 무의식의 원형문화로 자꾸 솟아나는 것이다. 마르지 않은 샘처럼 다시 자기 안에서 신성을 재발견한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미래시대는 영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본다. 신화학에서는 이를 ‘재신화의 시대’라고 말다. 민중이 신성을 자기 안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원천적으로 뒤집히는 것이다. 정치 경제적 혁명만이 아니고 문명의 전환이다. 철기문명과 근대주의와 인본주의가 마감하고 생태문명과 탈근대주의와 범신성주의로 가는 신성문화의 회복이다.

칼럼_181001(3)

동아시아가 한반도로부터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분단체제에서 평화체제로서의 대전환이다. 이 기회를 잘 봐야 한다. 단순히 ‘평화는 경제다’. ‘평화는 적대 국가 간 화해와 수교’ 문제가 아니다. 평화는 국가 간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풀 수 있는 것은 전쟁 상태를 멈추고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는 단계까지의 평화다. 평화는 시민이 성취해야 할 탈국가적 권리다. 평화는 자본권력이 먼저 가져다준 역사가 아니다. 평화는 자연권이고 천부인권이고 ‘가난의 초월’이 만드는 신성문화이다. 평화시대는 누가 가져다가 주는 것이 아니고 세계시민이 자기 내면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길게 보면 문명전환의 기점에서 세상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망가진 지구를 이대로 지속하다가는 아주 망가져 버리니까 다시 지구평화의 로드 맵을 평화시민이 연대하여 유라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를 다시 처음처럼 만들어가는 시대가 왔다. 무슨 의미인가. 어떤 평화를 만들 것인가. 우리는 지금 전쟁문명을 평화문명으로 바꾸는 시작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묻는다.

 

문명전환은 세계관의 전환이고 신관의 전환이다. 신관(무의식과 Meme)의 전환 없이 인간의 의식계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촛불시민혁명은 집단지성을 너머 집단영성을 찾고 있다. 시민은 내면의 힘 연대로 평화문명을 찾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은 시민의 내면에서 민중신, 평화문명의 신성을 그리고 있다.


 

칼럼_181001(1)칼럼_181001(2)

월, 2018/10/01- 09:56
84
0

필자가 ‘직접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이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스위스 국적의 직접민주주의 전도사 Mr. Bruno Kauffmann이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하여 의원회관에서 강연을 하는데 국민주권연구원의 상임이사 자격으로 인사말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계기를 통해서다. 강연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여 새로운 내용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의 느낌을 4월 6일자 프레시안에 “직접민주제 – 시민발안과 국민투표를 중심으로” 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통해서 소상히 밝힌바 있다.

한편 한국사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하여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며 민간정부로 출범하는데 성공하였고 2016/7년간의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탈법적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단죄하고 문재인 정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세계인의 찬사와 부러움을 받았으나, 정작 이후 전개될 미래정치의 로드맵은 실종되었고, 목불인견의 구태의연한 과거식 정치형태가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면서 우리의 정치판이 도로묵으로 회귀하는 형국이다.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이에 대하여 헌법개정과 선거법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 한국 정치판의 구성과 상황, 헌정 제도의 결함과 시정잡배 수준의 정당구성원 자질 등 여러 문제로 난항을 겪으면서, 의회와 정당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적폐청산 중의 최우선이라는 공론이 형성되면서 현하 한국사회의 가장 주요한 개혁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 내 선진적 시민사회의 주도로 비례민주제의 도입을 논의하고 있는 시점에, 정작 정당명부식 비례민주제 시행의 모범국가로 알려진 독일에서는 오히려 대의적 정당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혐오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집권여당인 기민기사연합당은 차치하고라고 160년 역사를 지닌 사민당조차 냉대 속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다고 한다. 로마현지에 만난 독일 활동가들의 독일의 정당중심 정치에 대한 반응은 한마디로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세상’ 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유럽의 주변부라고 칭할 수 있는 그리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그리고 급기야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즉 시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거대한 흐름이 형성되어 급기야 중앙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국내 언론의 보도와 학계 대부분의 평가는 이를 부패하고 무능력한 남유럽의 정치문화에 국한된 일과성 내지는 대안을 찾지 못해 표출하는 포플리즘으로 치부하면서 오로지 책임질 수 있는 대의적 정당정치로의 복귀가 정답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편이다. 정말 그럴까?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미래구상에 대한 갈증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직접참여의 생생한 정치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볼 욕심으로 추석 다음날 일찍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비를 털어서 함께한 이들은 대구가톨릭대 이정옥 교수를 비롯하여 주권자전국회의 문국주 집행위원장 그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형식박사 등 이었다.

이번 제 7차 글로벌포럼이 영원한 도시(Eternal City)로 불리는 로마에서 열렸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상징적이었다. 로마시의 배려로 2,000여 년 전 인류역사에서 매우 소중했던 민회 중심의 공화정이 실행된 장소인 ‘포로로마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청건물(Palazzo Senatorio)에서 진행되어 역사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였고, 유럽의 21세기형 시민혁명이라고 평가받는 오성운동 운동의 출신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시장에 당선된 Ms. Verginia Raggi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별했으며, 60여 개국에서 500여명이 참석할 만큼 이젠 직접민주주의 운동이 국제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열기 속에서 열렸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로 대회 이후 직접민주제의 확산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의 제정 결의로 발전한다.

회의 일정은 25일 저녁 등록과 함께 개회선언과 로마시장의 저녁초대로 시작하여, 26-27일 양일간의 오전의 공동주제 발제와 오후의 각론적 워크샵으로 진행되었고, 28일은 전체회의를 평가하고 2019년 대회 주최 예정국인 대만 타이중(臺中)시의 구상 발표에 이어 마그나 카르다 제정작업의 착수를 선언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매우 인상적인 것은 전세계 7개 주요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사례발표를 한 것으로 로마는 시장이 직접 발표를 하였고 다른 도시들은 모두 부시장들이 참여하여 발제를 하였는데 서울과 마드리드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이었다. 역시 압권은 Raggi 로마시장의 사례발표였다.

그녀는 우선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율이 해마다 떨어지는 것은 기존 정치체계에 대한 불신으로 정치체계와 참여방식의 일대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아고라 광장의 원칙과 개념에 따라 모든 의제는 공개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현대적인 통신기법인 on-line과 기존의 off-line 방식을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을 고민 중이라고 밝힌다.

소셜 미디어와 정보의 수단을 활용하여 시민들로부터 직접 제기된 안건에 대하여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내용을 공개하면서 모든 시민들에게 제공된 정보의 접근권을 보장하며, 회합과 토론을 통한 숙의 그리고 결론에 이르는 일련의 종합적인 과정에 치밀한 시민참여와 시민발의라는 민주적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예시로 로마시는 여론조사와 시민제안을 통하여 핵심 프로젝트로 지속가능한 공간이동권 (sustainable mobility in Rome)으로 선정하고, 이를 시민의 공론과 참여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특히 젊은 세대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영화제작과 다양한 이벤트를 통한 참여의 경로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뒤를 잇는 다양한 발표내용은 상기의 시나리오에 준하여 각자 도시들이 안고 있는 나름대로의 현안과 조건에 상응하는 여러 사례들을 발표하였는데, 추가로 몇 가지 사항을 보태어 설명하자면, 투명성(Transparancy)과 책임성(accounterbility)를 유난히 강조하였고, 발안와 숙의의 과정뿐만 아니라 실제의 집행과장에도 발안을 주도한 시민그룹들이 반드시 참여하여 모니터링하는 경로를 마련하여 땅에 떨어진 정치와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로설계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항으로 적정한 예산배정과 더불어 충분한 시간과 일정의 중요성에 대해 모두가 입을 모았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가능한 모두가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숙의하고 결론을 도출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참여 여부도 강압이나 규정이 아니라 관심과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험을 공유했다. 

칼럼_181010(1)
스위스 글라루스주의 주민 총회 장면이다.

현재 국가단위에서 시민발안제를 포함한 직접민주제도를 채택한 나라에는 스위스와 우루과이 그리고 놀랍게도 이웃나라인 대만이 있다. 대부분의 참여국가들은 지방자치단위 수준에서 참여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거나, 주요 남유럽국가들과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대부분 주정부, 미국의 선진적 주정부(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오리건 등)에서 시민발안제도가 채택되고 시행중인 듯하다. 우루과이라는 나라가 언급되자 농민출신으로 대통령으로 봉직하다가 건강문제로 사직하고 다시 농민으로 돌아간,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호세 무히카의 이야기가 필자에겐 직접민주제도와 함께 연상으로 겹쳐지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대만의 경우에도 국가의 중대한 사안은 아닐지라도 생활의 현안문제를 시민적 발안을 통해서 국민투표를 시행한 수 차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타이중시의 사례발표에는 초등학교부지의 선정과 학교이름을 작명하는 과정을 시민 발의와 투표과정으로 진행한 사례가 재미있게 소개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례발표는 스페인의 경우, 포데모스 운동이 격하게 진행되기 전인 2011 선거과정에서 시민들은 특별한 이슈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real democracy)를 외치면서 기존의 정치제도를 다시 생각하고(rethinking), 다시 정의하고(redefine) 다시 설계(redesign)할 것을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통해서 요구하였으나 기존의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들의 요구에 등을 돌리면서 포데모스 정당운동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 시민들이 직접 책임지고 결정한다( we, people, are to make decision in responsibility’)라는 구호를 들고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아직 전국단위의 직접민주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중앙정부에 직접민주제 책임장관을 임명하여 이를 준비하고 있으며, 대부분 지방정부에는 시민참여부서를 국장급단위로 직접 운용하고 있다. 직업정치 영역과 일반시민간의 간격을 줄여가기 위한 전자시스템의 구축이 활발히 진행 중이며, 시민들은 이미 직접민주제도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반하여 정작 정치인들은 이의 시행에 꼬리를 빼고 있다고 고백한다.

디지털 디바이드, 시민 연령의 고령화 및 25개의 지방정부간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그리고 정부와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투명성 부재가 직접 민주제를 당장 시행하지 못하는 현실적 장애라고 지적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시민간 자질의 간극과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전문가들의 안내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치적 고려와 기술적 사항 그리고 제도적 정착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시민발안 확정 이후 실제로 시행된 국민투표에 시민들의 참여가 매우 저조했던 경험도 지적되었다.

시민발안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직접민주제도가 비경제이라는 지적에 대해, 바젤 대학의 교수출신이 마이크를 잡아채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절대로 반대의 경우라고 외치면서 스위스 경험에 비추면 직접민주제를 통한 결정이 대의민주제의 과정보다 직접 비용이 20% 정도 절감되며 사회갈등으로 발생되는 간접비용까지 감안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직접민주제도가 시민들에게 만족감을 제공하는데 훨씬 경제적이며 효과적이라고 단언한다. 아이슬랜드의 사례로 금융위기로 국가부도상태에서 이를 극복한 것은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해결책을 찾고 모두가 하나되어 실천한 덕분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민주제도를 정치를 중심으로 분류하자면 리바이던의 저자 홉스식으로 권력자에게 모든 것이 위임된 통치(統治)에서 시작하여 루소의 시민적 일반의지에 따른 사회계약론과 칸트의 보편적 법정주의에 따른 법치(法治)가 변형되어 공직사회가 시민을 통제하는 관치(官治)를 거쳐 시민들이 참여하여 진행하는 협치(協治)의 형태로 발전해 온 셈이다. 법치의 다른 형태로 민주적 사회로 들어오면서 합의된 선거의 규칙을 통해 시민의 선택을 받은 정당들이 책임지고 국정을 운용하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이 일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인류사회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촛불혁명을 거친 2018년 한국사회는 이제 강압적up-bottom 통치시대를 끝내고 관치를 넘어서 협치를 지향하는 시점에 있기는 하나, 민본과 민생과는 거리가 먼, 표만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show-up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참여민주제로 포장한 유사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정당이라는 이름은 있으되 정당이 추구해야 할 강령과 정책의 실천의지가 실종된 사이비 정당시대에 한국시민들은 살고 있기도 하다.

이때 직접민주주의를 들고 나선 일군의 유럽 시민들은 기존 정당중심의 정치는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하면서 민주주의는 반드시 bottom-up 방식의 민치(民治)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류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중요한 출발점이며 새로이 마그나카르타를 준비하는 배경과 근거이기도 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동의적으로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한국현대 정치사를 살펴보면 민치가 이루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성숙한 대의적 민주제를 실현하기 위해 비례성을 강화하는 선거제의 개혁 역시 매우 바람직하며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정당다운 정당이 없는 한국정치의 현실에서는 텅빈 메아리가 되기 십상이다. 정당이 정당답게 변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대의적 민주제도의 확립을 위해서도 시민발안제의 도입이 절실하다는 것이 로마에 참여한 지인 참석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자 한국사회에 던지는 조언이기도 하다. 이제 비례적이고 균형적인 대의제도와 시민발안을 중심으로 한 직접민주제의 쌍(双)도입이 2018년 이후 한국정치의 과제상황이 된 셈이다.

대회 이틀째인 로마대회의 직접민주주의 토론은 정치의 영역을 훌쩍 뛰어 넘어간다. 각론으로 넘어간 오후의 워크샵에서는 수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져 필자가 모두 참석할 수는 없었으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서 삶의 구체적 경험과 내용을 담아내는 사회 경제 그리고 철학의 주제로 이루어 졌다. 필자가 선택하여 들어간 두 군데의 워크샵 주제는 ‘민주주의는 예술이자 타자와의 대화이다’ 와 ‘창의적인 공유재와 민주제도 – 혁신’이였다. 불행히도 주제강연과 토론이 독일어와 이태리어로 이루어졌고 어설픈 통역으로 깊고 세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첫째의 주제는 일정에 없던 것으로 저명한 독일 철학교수가 참여하면서 급조되어 이루진 워크샵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제도로 보지 말고 자신의 삶에 채워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음악의 여신인 뮤즈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뮤즈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 자신 내면의 소리를 들으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타자와 대화를 통해서 더욱 성숙된 내용으로 정진하면서 일상적인 실천으로 나가게 된다고 가르치면서, 삶의 주인인 자신과 타자인 우주와 세계 및 사회간의 관계적 연결 매체로서 직접민주제도가 반드시 요청된다는 요지이다. 내용이 어려워 필자가 이해했는지는 불명하여 그가 강의 중에 칠판에 그려낸 한 폭의 예술적 강의기록을 찍은 사진을 아래에 게재하면서 이를 보완하고자 한다.

칼럼_181010

 

두 번째 주제의 발제와 패널은 그야말로 로마시를 대표하는 지성들의 자리였다. 로마시당국의 시민참여국장, 로마시의 유럽대학 학장, 장관(?)연합회 의장, 디지털이태리 대표 등이 참석하여 주로 직접민주제를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다룬 것으로 이해했다. 직접민주제를 실시하는 데는 정보와 데이터가 매우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이를 사기업이 소유하고 있어 비용이 발생하면서 일반시민들의 접근이 제한되는 것을 여하히 극복하는 문제와 기업과 경제활동의 영역에 이해관계자 중심 또는 사회적 공유라는 개념을 직접민주제와 결합시켜 적용하는 주제를 다루면서 어떤 경우라도 모두를 위한 혁신과 창의를 기본으로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것을 분명히 한 자리였다.

결론부이다. 3-4일간의 로마대회를 참여하면서 이제 정치적 제도는 통치와 법치의 영역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민치의 시대(以民治國)로 진입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으면서, 직접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제도의 영역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적 사건 속에서 원칙과 과정과 대화를 통하여 개인 그리고 인류사회를 보다 높은 미래의 영역으로 안내하는 길라잡이 라고 스스로 정리해본다.  2018-10.

추신 :

참여한 대부분 주요 도시에서 시민참여와 교육을 위한 수백만 유로(수십억원)의 예산을 운영하고 있는 반면에 일년에 1,700조 이상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나라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시민민주교육 예산이 3-4억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회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한국 인사들의 발표 내용과 수준도 이에 준했다. 촛불시민혁명의 세계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현대적 민주주의에 관한 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 2018/10/10- 11:34
86
0
<div class="xe_content"><p><img alt="촛불프리즘" src="http://www.peoplepower21.org/files/attach/images/37219/197/619/001/7028…; style="margin:10px;width:800px;height:1143px;" /></p> <h1>[좌담회] 촛불 프리즘: 정치가 마주한 질문들</h1> <p> </p> <p style="text-align:justify;">우리는 촛불광장 2년,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justify;">좀 더 나아질 것이라 ‘확신’했지만, 생각만큼 달라진 것이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치의 복잡성 앞에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에 놓여있는 것도 같습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프리즘은 빛을 굴절시키거나 분산시키는 광학도구입니다.</p> <p style="text-align:justify;">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는 2년 전 촛불이 담고 있던 여러 가치들이 프리즘이라는 광학도구를 투과하여 현실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2년간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당연시되었던 것들이 질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옹호하던 가치들은 굴절되어 왜곡되기도 하고, 역설에 처하거나 양가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justify;">예컨대, 공정이라는 가치 또한, 현실에서는 차별을 옹호하거나 타인의 배제를 용인하는 담론이 되기도 합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촛불과 문재인 정부 2년 동안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다양한 질문을 들춰보고자 합니다.</p> <p> </p> <blockquote> <p>일시</p> <p><strong>2019.4.24.수 오후 2시-4시</strong></p> <p> </p> <p>장소</p> <p><strong>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strong></p> <p> </p> <p>주최</p> <p><strong>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strong></p> <p> </p> <p>좌장</p> <p><strong>김윤철</strong>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p> <p> </p> <p>패널</p> <p><strong>서복경 </strong>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p> <p><strong>손희정 </strong>문화평론가</p> <p><strong>이기중</strong> 정의당 관악구의원</p> <p><strong>이태호</strong>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p> <p><strong>정한울</strong> 한국리서치 전문위원</p> <p> </p> <p>문의</p> <p><strong>[email protected] 02-6712-5248</strong></p> </blockquote> <p> </p></div>
수, 2019/04/17- 11:27
9
0

"외나무다리 위를 뛰는데 아무도 안 말려!" (프레시안)

[조선소 잔혹사] 현대중공업 특별 감독 결과보고 들여다보니…


자본의 속성은 '이윤의 극대화'가 핵심이다. 적은 노력과 재화를 들여 많은 이윤을 창출해내는 게 목적이다. 그리고 그 이윤을 주주에게 나눠준다. 

이러한 자본의 속성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노동자를 옥죈다. 임금체불은 기본이고 일하다 목숨까지 잃게 한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노동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현대중공업에서는 2014년 13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 무리한 공기 축소, 안전시설 미비 등으로 발생한 인재들이었다. 

그런 자본의 속성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후기 자본주의에 등장한 '큰 정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게 정부의, 즉 국가의 존재이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래 주소에서 기사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9172&nbsp;


수, 2015/08/26- 13:52
307
0

북유럽 복지국가를 말하다

 

강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

정리 : 이경민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노르웨이에서 7월은 집단 휴가의 달. 필수기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아니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약 5주의 휴가를 즐긴다고 하는데, 일주일 남짓의 여름휴가도 눈치보고 사용하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노르웨이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르길래 ‘한 달 휴가’가 가능한 것일까? 환상을 품을 수 밖에 없는 북유럽국가,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다음은 7/30일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던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들어가며

 

한국에서 북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과거 개화기 인사들의 눈에 비친 유럽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라의 규모가 작음에도 독립을 지킬만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문명 수준도 높았는데 이와같은 북유럽 국가의 모습이 조선인에게 완벽한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후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동구권에서 실현 가능한 지향 모델을 찾지 못하였고, 북유럽 국가의 등장으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식인들은 북유럽사민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수준으로 한국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앞서 얘기한 휴가뿐만 아니라, 노동시간도 큰 차이가 난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평균 2100시간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3000시간이었고 그 당시 여공들은 주당 80시간 정도 일을 했다. 반면 노르웨이의 노동시간은 연간 135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북유럽 사회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는 기저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북유럽 사회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의료 같은 경우, 한국은 건강보험이 있어도 보장성이 약 55%밖에 되지 않으며 공공병원은 병상기준 90%이고 대부분은 민간병원이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반대로 민간병원이 10%정도이며 대부분 공공병원이다. 또한 약간의 수수료를 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료는 무상이다. 만약 국내에서 치료할 수 없어 외국에서 치료받는 경우에도 국가가 치료비를 지불한다.

 

교육의 경우 대학의 박사과정까지 무상이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월급이 지급되는데 이는 준공무원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노르웨이는 대학입시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대입입시를 위해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르웨이 교육수준이 뒤처지지는 않는다. 교육과정의 난이도는 한국보다 낮을지 모르나 대학진학률은 전문대학까지 포함하면 60% 정도이다. 무엇보다 노르웨이는 대학이 평준화가 되어 있어 명문대학이라는 개념이 없다. 또한 자국민이 외국에 유학 갈 때, 장학금을 주고 장기상황으로 유학비까지 주고 있다.

 

한국은 준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이며 이런나라에서는 초과노동, 과도한 경쟁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북유럽 사회와 같은 복지국가의 모습을 동경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자본주이적 세계에서의 국가 순위가 다르고 복지제도의 기반이 되는 소득의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보다 4배 가량 높다. 결국 북유럽 사회는 부의 재분배가 잘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높은 소득 수준으로 자연스레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와 다른 체계인가?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인가? 그렇다.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자본시장이 있기에 분명한 자본주의 국가로 수정자본주의, 국가 주도자본주의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국가주도자본주의사회는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개발정책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북유럽 사회는 그 주도 방향이 복지국가였던 반면 한국과 같은 주변부 국가는 성장중심 자본주의국가였던 것이다.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경우 국유기업이 많지만 개인이 주식을 소유한 형태의 기업도 있다. 노르웨이에 5대 상장사가 원래 국유기업이었으나 2000년대 부분적으로 사유화 되어가고 있다. 주택, 부동산 시장도 전체 주택의 80% 이상이 사유주택이다. 대부분의 개인들이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고 영구임대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주택가격은 계속 상승 중에 있는데 최근 20여 년 동안 4배가 상승했다. 여기서도 노동은 상품이다.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면 할 수 있다. 다만 한국과 다른 점은 한국에서 해고는 살인일지 모르나 북유럽사회에서는 해고를 특별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해고를 할 시,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해고 이후에도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실업수당 등의 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제도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르웨이가 석유가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세정책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국고는 소득세, 재산제, 부가가치세 등 세금으로 구성되는데, 북유럽사회는 소득세가 한국보다 높다. 반면 법인세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 아니다. 일본 20-30%, 독일 29%, 노르웨이는 25-26%정도이다. 노르웨이 소득세는 최고세율이 60%인데 최근 46%까지 떨어졌고 전문직은 대략 45~55%정도이다. 즉 법인세는 상대적으로 낮고 소득세는 높은 편으로 재분배 시스템이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표준 법인세가 22%정도인데, 실제 삼성이나 LG같은 대기업의 법인세는 6~7%이다. 한국은 법인세나 소득세 모두 낮은 편이다. 다시말해 노르웨이가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세금 덕분이다.

 

북유럽사회에서 자본축적이 어렵지 않다. 이익률이 높지는 않으나 보장성이 높고 내수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실질 소득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구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재분배 비율을 살펴보면 스웨덴, 노르웨이는 45~46% 이고, 한국은 25%로 세금을 통한 재분배 비율에서 2배의 차이가 난다.

 

이처럼 자본주의 현태가 정치적인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높은 수준의 재분배가 가능한 것은 왜인가?

 

바로 조직화된 노조의 힘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노조 조직률은 53%로 9%에 그치는 한국의 노조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노조 조직률은 프랑스 10%, 유럽평균 30%, 스웨덴 및 덴마크 등은 70% 안팎이다. 노조를 조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노르웨이는 중앙노총과 경총 간에 임금인상률, 노동조건, 복지 등에 대한 내용의 합의를 보는 중앙임단협의를 한다. 1935년 중앙임단협의를 시작했고 매년 노총과 경총사이의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내용은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장 높은 조직률을 보이는 조직은 금속노조, 은행, 교사 등으로 공무원의 경우 100%의 조직률을 보인다. 반면 가장 낮은 조직률을 보이는 직종은 서비스업이다. 조직률이 높은 노조가 조직률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조의 임금 협상을 도와줌으로써 보다 높은 임금 체결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중앙노총에 모든 노조가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고지식 노동자(연구자, 군장교, 목사 등)들은 중앙 노총에 가입하지 않고 보다 작은 노총에 가입한다.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은 경찰이나 목사도 노조를 결성한다는 것이다.

 

튼튼한 내수시장, 노조의 높은 조직률, 사민당의 높은 지지율 등 이 외에도 북유럽 사회가 복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세계대공황, 공산주의 체제의 위협 등이 있다. 역사적인 맥락이 같지 않은 한국의 경우 북유럽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핵심은 노동운동이다.

 

진보의 핵심운동은 노동운동이어야 한다. 북유럽 사회가 사민주의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하고 큰 원동력은 대중이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가능케 했고 사회를 진보화 시킬 수 있는 중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대기업 고숙련자들의 재분배 시스템에 대한 지지도 사회 진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직도 북유럽 사회 대기업 고숙련자들은 재분배 시스템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런 조직들의 세력이 자본층을 압박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정치화로 북유럽 사회는 수정자본주의 사회이지만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이뤄지며 내수기반 또한 튼튼하다. 즉 북유럽에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가 가능한 이유는 노동의 높은 조직률과 이러한 노조가 사회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사회의 사민주의, 독립된 사회경제적 형태로 봐야 하는가?

 

사민주의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사민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오래전부터 전문직은 고세율에 대한 부담을 느껴왔다. 또한 자본을 가진 경영자들은 노동자와의 임금격차가 미국은 최대 500배까지 차이 나지만 노르웨이는 고작 3-4배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영국, 미국 등으로 이동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처럼 고세율에 대한 불만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사민주의에 대한 적대심이 있어왔다. 그리고 80-90년대에 들어 발생한 이민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사민주의에 적대적인 진보당이 있다. 진보당은 60년대에 고세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당시 개인소득세금은 80%였다. 현재는 60%정도로 낮아졌지만 말이다. 진보당은 한때 약 10여년정도 지지율이 28%정도까지 올랐던 적도 있었다. 진보당은 높은 세금 때문에 기업이 죽고,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문제 발생으로 인해 국민국가경계가 몰락한다고 생각한다.

 

자본과 노동이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는가?

 

노르웨이는 장기연립우파가 장기 집권 중이며 복지제도는 후퇴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북유럽사회는 자본축적의 국제화가 이뤄지면서 자본축적이 높은 속도로 국외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글로벌화로 스웨덴은 80년대부터 대기업의 국외 이익이 국내보다 커지기 시작했다. 노르웨이는 90년대부터 자본이 글로벌화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저가항공사로 유명한 노르비치아 항공사이다. 동남아시아 인력을 사용하고 있는 이 항공사는 빠르게 성장하여 현재 유럽의 3대 저가항공사가 되었다. 국유 형태를 벗어나 무한경쟁시장에 속한 것이다.

 

이어서 북유럽 자본들은 점차 자기들만의 경쟁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북유럽 자본의 존속되어 있는 곳은 발틱 3국이다. 발틱 3국은 1991년에 소련에 독립해 독립국가형태를 갖췄지만 현재는 북유럽 금융지배를 받고 있다. 북유럽 국가는 발틱 3국의 현지 은행의 주식을 매도하면서 식민화하는 등 현재 금융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북유럽 자본이 해외자본을 착취하면서 국내에서 얻지 못한 이윤을 회복하고 국외자본축적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외자본 축적 과정에서 악용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노르웨이 3대 기업 중 ‘텔레로사’통신회사의 불법고용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방글라데시 하도급 업체를 통해 청소년 노동자를 불법고용하여 저임금으로 노동을 착취했다. 또한 안전대책 없이 노후장비를 사용하여 수많은 사망자를 냈으며, 이제는 미얀마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다. 미얀마와 같은 제3세계 사람들에게 북유럽국가는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 되었다.

 

이민자들의 문제

 

북유럽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급증하면서 이들의 노동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노르웨이 중산층 가정에서 필리핀계 오페어는 일반적이다. 오페어는 노르웨이 가정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40-45만원의 믿기 힘든 적은 임금으로 가사일부터 육아까지 감당하고 있다. 이들은 덴마크에선 노조 가입이 가능하나 노르웨이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몰락한 동구권에서 유입되는 남성노동자의 문제도 심각하다. 노르웨이에는 폴란드계 노동자들은 15만 명으로 상당한 규모이지만 형식상 노조가입이 가능할 뿐, 실제로 상당부분 인력파견회사를 통해 취업하게 되어 있어 노조가입이 쉽지는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인력파견업체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업체를 통해 취업하게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노동착취를 당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저임금 노동의 광범위한 계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사민주의를 이탈하고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민주의가 모든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온건좌파를 이탈하고 국우정당에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저숙련 노동자들은 동구권에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해결하겠다고 나선 극우정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좌파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수정되고 있다. 비정규직 같은 경우, 현재는 개악이 되어 이유를 불문하고 비정규직 채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스웨덴은 의료와 교육부문에 점차 시장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교육은 여전히 무상이나 최근에는 사립학교 창립여건 완화 및 영리형 사립학교 설립을 허가하였다. 또한 6년 전까지는 외국인에게도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했으나 현재는 등록금을 받고 있다. 노르웨이는 아직까지 무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회적 불만을 크게 일으키지 않은 선에서 스웨덴처럼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북유럽 사회의 사민주의는 죽어 가는가?

 

그렇지는 않다. 북유럽사회는 사민주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점차 신자유주의 요소들로 수정을 가하겠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복지제도의 기반 자체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내수기반이 튼튼해야 실질소득의 증가를 보장할 수 있고 복지제도 또한 유지된다는 것을 자본이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사회도 자본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강해지고 있고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겠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아닌 복지를 유지하는 북유럽사회만의 신자유주의가 될 것이다.

목, 2015/09/10- 16:53
491
0

IMG_4255

지상중계]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여성노동포럼 3강 ‘남녀임금격차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가?’

 

김혜진 교수는 ‘오늘 강의 제목의 답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나 남녀임금격차 문제는 평소에도 관심 갖고 고민하는 주제여서 오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소통하는 자리로 삼고 싶다’는 얘기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남녀임금격차 현황을 살펴보았는데 전체 임금구조에서 남녀임금격차 상황을 살펴볼 것을 주문했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2006년 남성의 월 급여는 2백3만원인데 여성은 1백2십4만8천원으로 남성임금 대비 여성 임금은 64.3%를 차지한다. 2014년에는 남성 임금은 2백7십6만1천원이고 여성은 1백7십4만2천원으로 67.7%를 차지한다. 8년 동안 남녀 임금 격차 해소는 불과 3.3%p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해 보면 다르다. 정규직 남녀 임금격차는 2006년 65.4%이고 2014년에는 68.5%이다. 비정규직은 2006년 75.4%이고 2014년 74.8%이다. 즉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남녀임금격차가 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녀임금격차를 줄인다는 것이 비정규직 확대와 임금 하향평준화로 남녀임금격차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비정규직 확대와 임금 하향평준화가 고착화되는 상황 속에서 남녀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김혜진 교수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해왔지만 이제는 그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주장인가를 검토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자본은 국제화되어 금융자본의 형태로 국가 장벽을 쉽게 넘나들며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화고 있는데 노동은 이런 자본의 국제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비정규직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자본주의 발달단계에 따라 노동조합은 ‘노동의 가격, 노동 단가’를 올리는 것으로 자본의 이윤 착취에 대항해 왔는데 자본의 국제화에 노동운동의 대응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의 국제화에 따른 아웃소싱 확대로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조차 별 의미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을 직시하자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여성은 유급 시장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의 이중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저임금구조를 지탱해주는 지지대로써 착취당하고 있다. 가정 내 돌봄 부담은 줄어들지 않아 여성의 비정규직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이 상황을 변화시킬 대안은 무엇인가? 비정규직이 만연한 상황에서 정규직화를 외칠 것인가?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어 정규직, 비정규직 별 차이가 없고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고용안정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화를 외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여성노동운동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김혜진 교수는 여성노동운동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첫째 여성 고용이 저임금 구조를 지탱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당연히 여성이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아도 된다는 인식은 자본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여성노동운동의 목표는 정규직화보다는 저임금 해소를 목표로 해야 하며 남녀임금격차 해소는 최저임금 인상 등을 통해 밑으로부터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현재의 경제주의적 노동조합들보다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여성노동운동의 존재 기반은 훨씬 유리하니 사회적 결정구조에서 여성노동 대표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여성노동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김혜진 교수는 자본이 절대적으로 우위인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가 축소되어 가는데 이제 노동의 대응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라는 방향보다 ‘최저임금 인상’ 등 아래로부터 일자리의 질을 끌어올리는 방향에서 대안을 찾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문이었다. 질의응답을 통해 이런 방향 고민이 일자리 하향평준화를 받아들이거나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4년으로 확대하자는 정부 노동개악안을 수용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했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을 여성노동운동이 주도적으로 해야 함에 대해서는 공감하였다.

남녀임금 격차 누가 이득을 보고 있나? 뻔한 답이지만 자본이며 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국가권력이다.

목, 2015/10/08- 13:08
276
0

대한민국이 세월호, 산재사망 년 2422명 OECD 1위 (미디어오늘)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며 정부는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한 제도를 뒷 받침해주고 안전문화를 운운하며 책임을 희석하고 있다. 안전사회는 규제완화 중단, 책임자 처벌, 위험의 외주화와 비정규직 고용 근절, 노동자 시민의 참여 보장 없이는 요원하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진상규명과 더불어 안전사회를 위한 노동자 시민의 투쟁이 절실한 이유이다.


아래 주소에서 기사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9295

화, 2016/04/12- 09:46
335
0
7hbFqa

 

사건의 정치

La politica dell'evento

재생산을 넘어 발명으로

 

균형(정치경제학)과 통합(뒤르켐), 재생산(부르디외),
대립(맑스주의), 경쟁(다위니즘), 평등(랑시에르)을 넘어

생성변화, 발명, 창조, 특이화의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지은이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  옮긴이  이성혁  |  정가  19,000원  |  쪽수  332쪽
출판일  2017년 10월 31일  |  판형  신국판 (139*208) 무선 |  도서 상태  초판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도서분류  아우또노미아총서 57  |  ISBN  978-89-6195-170-8 93300

 

 

현대의 저항 정치는 ‘시-예술’적인 것과의 삼투작용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더욱 사건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저항 정치는 시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능성의 발명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는 『사건의 정치』는,
현대의 저항 정치가 가지고 있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사건의 정치』 간략한 소개

 

이 책에서 랏자라또는 현대 사상의 급진적 정치성을 되살리면서 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권력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들뢰즈/가타리푸코 등의 급진적인 현대사상을 바탕으로 바흐친빠졸리니, 라이프니츠타르드와 같은 이들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구제’하며 현실화한다.

랏자라또는
타르드의 ‘신모나드론’에서, 미시와 거시의 영역을 횡단하면서 사회의 변화를 사유할 수 있는 개념들과 방법론을 찾아낸다. 이 ‘모나돌로지’는 사회와 개인, 전체와 부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구조주의와는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며,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정동이론’을 심화시킬 돌파구를 마련한다.

랏자라또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는 발명과 창조가 이루어지는 자신의 외부를 포위·감금하고 포획하여 사유화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건의 정치’란, 자본과 권력에 의해 포획된 발명의 사건성과 그 가능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과 함께 차이화를 증폭하여 현대 사회의 통제와 관리를 넘어서면서 ‘구성 권력’의 힘을 증대하는 정치다.

랏자라또는 다수자의 척도로부터 탈주하고 차이를 생성하면서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구성하는
‘소수자-되기’에서 대안적인 정치적 주체화를 찾아낸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랑시에르의 ‘평등의 정치학’은 다수자의 척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있으며 평등의 요구를 넘어서서 전개되는 차이화의 운동을 생각하지 않는다. 랏자라또는 평등의 쟁취와 함께 차이의 생성을 추구하는 정치학을, 즉 ‘평등의 정치학’을 넘어서 ‘소수자의 정치학’ 또는 ‘차이의 정치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사건의 정치』 출간의 의미

 

이 책의 저자인 랏자라또는 정치철학자 안또니오 네그리의 제자로서, 잡지 『뮐띠뛰드』(Multitudes)지의 창간 발기인이자 편집위원이며, 반(反)WTO·반G8 운동과 (이 책에도 등장하는) 엥떼르미땅이나 불안정생활자(프레카리아트) 등의 연대조직 활동에 참가하는 등 실천적인 지식인이기도 하다. 최근 그의 책 『부채인간』과 『기호와 기계』의 한국어판 출간으로, 랏자라또는 한국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현대 사상가이다. 2004년에 원서가 출간된 이 책 『사건의 정치』는 랏자라또의 이론적·철학적 바탕을 다진 책으로 평가받는다.

랏자라또의 책이 가지는 미덕 중 하나는, 그의
이론적 탐구가 항상 사회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성실한 대응 속에서 그 사건을 이해하고, 급진적인 입장에서 대안적인 전망을 찾아나가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도 역시 그러한데, ‘사건의 철학’은 이 책의 서두에서 사건의 예로서 소개되고 있는 1999년의 ‘시애틀 봉기’에서 촉발되어 사유되고 있다. 랏자라또는 시애틀 봉기라는 사건에 대해 사유하면서, 주체의 철학은 더 이상 이러한 사건들이 열어 놓는 정치적 시공간을 사유하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이에 그는 사건의 특이성에 대해 사유해 왔던 라이프니츠와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나드론,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주의의 의의를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을 경유하여 재조명하고 재구성한다.

또한 그의 정치 철학과 실천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포스트포디즘과 신자유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 자본주의에서는, 예전과는 다른 양상의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동에 관한 여러 규제가 없어지면서 비정규고용이 확대되고, 홈리스, 워킹 푸어 등이 문제로 나타났다.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울증에 빠지거나 과로로 인한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분리되어 협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기존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은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사건의 정치』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지적 노동과 다운사이징, 고용의 유동화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현 자본주의에서, 이 시대를 극복할 대항책은 기존의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변화된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이론을 모색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로, 근본적인(radical) 사유가 필요하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철학적 논의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장점으로, 이 책이 노동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책이나 아카데믹한 철학서와는 그 유를 달리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책의 앞부분인 1~2장에서 전개된 철학적 담론은 3장과 4장의 현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그리고 5장에서의 프랑스에서 전개된 ‘엥떼르미땅’의 투쟁이 지닌 현대적 의의의 도출과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논의와 긴밀하게 결합된다. 그의 책은 현대사회에서 나타난 사건들에 대한 이론적 응답이며 그 사건이 열어놓는 지평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작업의 산물이다.

사건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건의 철학에 대하여


랏자라또 사상의 철학적 바탕을 가장 잘 보여준 부분은 1장 「사건과 정치」이다. 1장은 주로 라이프니츠와 타르드의 모나드론,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 ‘사건’과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랏자라또는 사건의 철학을 ‘헤겔-맑스’의 전통이 제시한 ‘주체의 철학’과 선명하게 대조하면서 설명한다. 주체의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이라면 사건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다. 노동을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는 주체의 철학에서 가능성은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사건의 철학에서 가능성은 차이의 생성과 반복으로 인식된다. 주체의 철학은 사건을 ‘객체’로서 인식하여 주체의 동일성으로 회수하고 그 사건의 차이성이 지닌 역능을 박탈한다. 이와는 달리 사건의 철학은 사건이 열어놓는 시공간에서 그 차이성을 더욱 가동하여 새로운 일관성을 구축해나간다.

랏자라또의 사상에서
사건이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 조리에 맞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것,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또한 사건은 균질적이고 정지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서로 혼합된 동적인 공간에서 일어난다. 균질적이고 정지된 공간으로 보여도, 거기에 이질적인 것이 혼입된다면 혼합에 의해 예상 밖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공간 전체가 변모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건은 앞으로 어떠한 꽃을 피울지 아무도 모르는 식물의 종자와 비슷하다. 그 종자는 모두가 이종혼교적(異種混交, hybrid)이고 각자가 고유의 미래의 꽃 ― 바꾸어 말하면 고유한 가능세계 ― 을 자신 안에 숨기고 있다. 사건을 그와 같이 포착할 때, 우리들은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으로서 세계를 포착하는, 예전의 자연철학 계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근세 말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개개의 사건(모나드)이 내포하고 있는 무수한 가능세계신의 은총에 의해 ‘유일한 세계’ 안에서 조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근대가 되면, 이번에는 국가가 그때까지의 신을 대신하여 초월적인 입장에서 개개의 사건(주체)을 총괄하고 무수한 가능세계를 ‘규율훈련’에 의해 균질화하고, 관리하게 된다. ― “여러 규율사회는 라이프니츠의 신처럼 작용한다.” 푸코의 ‘생명권력론’이 보여주듯이, 탄생, 노화, 병, 죽음이라는 인간의 삶에 얽혀 있는 사건(결국 ‘삶’은 사건이다)은 권력에 의해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또 노동은 계획에 의거하여 ‘유일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본질적 수단이 된다.

통제사회의 도래와 인지정치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미디어와 교환수단의 급속한 발달은 그 이전과는 이질적인 노동과 사회의 상태를 부상시켰다. 19세기 말의 사회학자 타르드는 거리를 둔 사람들 사이의 ‘뇌의 협동’으로서의 노동과 미디어를 통해 사고하는 다양한 ‘공중’들의 등장을 밝혔다. 그와 같은 세계는 국가와 당이라는 초월자의 계획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집합화된 뇌’가 산출하는 사건(발명)에 의해 변화되는 세계이며, 무수한 가능세계가 공립(共立)하는 세계이다. ‘유일한 세계’에 입각한 권력은 그와 같은 가능세계의 증식을 막아야만 한다. 그때 미디어는 ‘유일한 세계’와 ‘무수한 가능세계’ 사이의 투쟁의 무대가 된다. 즉 그것은 ‘단일언어주의’와 ‘복수언어주의’ 사이의 투쟁(바흐친)이다. 랏자라또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정치를 ‘인지정치’라고 이름붙이고, 독자적인 분석을 행한다.

그와 같이 새로이 등장한 사회의 잠재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변화하여 공장노동의 모델이 기능하지 않게 되고, 권력의 움직임이 외재적인 작용양식(규율훈련)에서 내재적인 작용양식(통제)으로 이행하면서 뚜렷하게 현재(顯在)화했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본주의는 노동양식을 크게 변화시켰지만(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에로), 이에 대해
노동운동 쪽은 변함없이 공장노동 모델에 의거하면서 예전의 자본주의와의 타협의 산물(복지국가)에 그대로 매달려 있다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이미 사건을 ‘포획’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무력화하는) 것에 비해 노동운동 쪽은 여전히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랏자라또의 진단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은 무엇을 착취하는가?

랏자라또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기업’을 공장과 구별한다. 기업은 미리 가능세계를 생산함으로써 ‘대안은 없’는 세계를 창출하여 이를 통해 착취를 행한다. 다시 말하면, 기업은 자신이 만든 가능세계만이 가능하며 다른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변조하고, 그들이 그 한정된 세계 속에서만 욕망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착취의 우주를 형성한다.(그래서 이에 대항하여 대안세계화 운동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가능성을 한정하여 절취하는 작금의 자본주의는 부채로 운영되는 현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과 직결된다. 이는 이제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현재 시간만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착취함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랏자라또는,
현 자본주의가 마이크로소프트사나 구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뇌의 협동’이 형성한 공통적인 것을 절취하면서 가치를 축적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기업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외부에서 형성되는 집단적 뇌의 공통적인 발명과 창조이다. 기업은 이를 통해 창출된 공통재를 포획하여 사유화하고, 발명되고 있는 가능성을 회수하여 가치 회로 속으로 구깃구깃 집어넣는다. 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가능성의 봉쇄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한 ‘외부의 감금’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기업은, 발명과 창조가 이루어지는 자신의 외부를 포위·감금하고 포획하여 사유화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 사건을 발명하고 구성하는 정치를 생각하는 랏자라또에게
‘사건의 정치’란, 이렇듯 자본과 권력에 의해 포획된 발명의 사건성과 그 가능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 그러니까 저항과 함께 차이화를 증폭하여 현대 사회의 통제와 관리를 넘어서는 동시에 ‘구성 권력’의 힘을 증대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가능성의 발명과 그 사건성을 증폭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실험이 필요하다.

‘사건론적 전회’ ― 바흐친의 대화이론에 대하여

랏자라또에 따르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흐친의 사건론적 전회’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바흐친에게서 모든 발화행위는 사회적 행위이다. 바흐친에 의하면, 언어행위(즉 ‘발화행위’)와 분리된 낱말과 문법형식, 명제는 단순히 잠재적인 의미작용에 봉사하기 위한 ‘기술적 기호’에 불과하다. 이러한 언어의 잠재성은 언어행위에 의해 개체화되고, 특이화되며, 현실화되는(달성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을 또 하나의 존재영역, 즉 ‘대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와 명제를 하나의 완전한 언어행위로, 즉 하나의 ‘전체’로 변용하는 것은 전(前)-개체적인 정동의 힘, 논리-정치적인 힘이다. 그것은 언어의 바깥에 있으면서 언표행위의 안쪽에 있는 힘이다.

모든 언표행위는 그 속에 이해와 ‘능동적 책임’, ‘입장표명’, ‘관점’, ‘적극적 평가’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은 화자가 그때 기대하고 있었던 것과는 무관하게 야기된다. 이와 같은 대화성의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들은 공공(公共) 공간의 변천을 생각할 수 있다. 봉기와 같은 사건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바흐친이 기술한 것처럼 전략적 행위이다. 즉 한편으로 언표는 다른 언표와 서로 대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서로 보완하고 기댄다.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언표는 그 자체가 다른 언표에 대한 응답임을 밝힌다. 그것은 다른 언표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다른 언표를 확인하고, 다른 언표에 의거하면서 공공 공간 안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언표행위를 언어 안에 폐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스트사회주의 정치운동 ― 평등의 정치를 넘어 차이의 정치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인 ‘소수자’는 어떤 신원에 국한되기보다는 다수자의 척도로부터 탈주하면서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존재, 생성 변화하면서 운동해나가는 존재를 지칭한다. 흑인이나 여성 중에도, 어떤 한계에 부딪칠 수는 있겠지만 다수자가 되어버린 이가 있을 수 있다. 그가 어떤 신원이든 사회의 척도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생성 변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소수자’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랏자라또는 현대인들이 다수자에 편입되기를 욕망하면서 다수자의 척도에 자신의 삶을 맞추고 스스로 통제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그가 여성이든지 동성애자든지 흑인이든지간에, 다수자에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 척도로부터 탈주하고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구성하는 ‘소수자-되기’에서 랏자라또는 대안적인 정치적 주체화를 찾는다.

‘평등의 정치’를 주장하는 랑시에르의 논의를 랏자라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불평등의 사회에서 평등의 획득은 중요하지만(라자라또가 평등을 위한 운동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몫이 없는 자가 평등하게 몫을 요구한다’는 랑시에르의 ‘평등의 정치’는 다수자의 척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등과 함께 차이화 하는 운동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랏자라또는 평가한다. 그는 평등의 권리를 넘어 차이화의 생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범적인 예로 다나 해러웨이나 로지 브라이도티의 페미니즘을 들고 있다. 그 페미니즘들은, 남성이라는 다수자의 거울로서의 여성을 남성과 평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서, 다수자의 척도를 형성하는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해체(이는 ‘여성’이라는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기도 하다)하고 차이를 생성하는 주체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랏자라또는 평등의 쟁취와 함께 이러한 차이의 생성을 추구하는 정치학, 즉 ‘평등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소수자의 정치학’ 또는 ‘차이의 정치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랏자라또는
‘사건’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사건들을 어떻게 내재적인 방식으로 결부시킬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비록 힘든 일이라고 해도 복지국가의 재건과는 다른 대안을 탐구해야만 한다. 복지국가 시대가 다양체로서의 소수자를 단일성으로서의 다수자에 복종시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저자가 이론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라이프니츠 이래 ‘사건의 철학’에서 과제로 되고 있는 ‘조정’(調整) 개념, 특히 들뢰즈의 ‘조정’ 개념이다. 그리고 현대의 구체적인 ‘조정’ 시도로서 저자는 프랑스에서의 엥떼르미땅과 불안정생산자들의 ‘연대조직’을 들고 있다.

한국에서 『사건의 정치』 출간의 의의


한국의 촛불 운동이 보여주었듯이 사회의 심대한 변화는 아무도 예측 못한 사건을 통해 벌어진다는 것,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고 실효화하는가가 사회 운동의 미래에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는 것은 노동운동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상황 전개에서도 보았듯이, 사건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의 중요성은 점차 한국사회에서도 커져가고 있으며,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어떠한 표현을 전개하고 어떠한 행동을 물질적으로 조직하느냐가 사회 변화에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의 성격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재단하여 대응한다면, 그것은 그 사건이 지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도리어 협소하게 만들고 특정한 틀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또한 그러한 틀에 박힌 대응은 사건의 장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건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힘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능성을 발명하면서 사건의 시공간으로부터 차이를 생성해나가자고 주장하는 이 『사건의 정치』가 뜻 가진 이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활발하게 토론된다면, 이 책은 앞으로 한국에서 전개될 실천적인 이론 담론과 사회운동에 어떤 ‘가능성’(이 책의 핵심 개념이다)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 『사건의 정치』와 새로운 정치의 발명

 

모든 발명은 (위대하든지 사소하든지간에) 사건이다. 그 사건은 그 자체 안에는 어떠한 가치도 포함하지 않지만, 가능태를 새롭게 창조하기에 모든 가치의 전제조건이 된다. 발명은 여러 믿음과 욕망의 흐름 사이의 협동이고, 연결이며, 그들의 흐름을 새로운 방법으로 재편성하는 것이다.
― 1. 사건과 정치, 50쪽

 

생명정치의 기술은 삶에 표적을 두고 있고, 그것은 인류라는 생물 존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생명정치의 기술은, 병과 실업, 노화와 죽음에 관계하면서 삶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통제 기술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삶 (및 생명체)의 개념이다.
― 2. 통제사회에서 삶과 생명체의 개념, 92~93쪽

 

현대 자본주의가 행하는 일은 뇌의 협동의 파괴다. … 자본주의가 공중과 공중의 집단적인 지각 및 지성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완전히 반-생산적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과 믿음의 방식을 자본가의 가치관이 명하는 주체화 형식에 따르도록 하여 사람들의 주체성을 빈약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3. 기업과 신모나돌로지, 173~174쪽

 

권위에 대한 비판이 사건의 철학과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실천의 전제가 되는 것일까? 권위주의적 발화는 창조를 촉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창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발화(“종교적 발화, 도덕적 발화, 성인의 발화, 교수의 발화 … . 그 발화들은 이른바 ‘아버지들’의 발화이다”)는 우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자유로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 4. 표현과 소통의 대립, 211쪽

 

현대의 전쟁은 다수자/소수자 장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을 명확히 한다. 즉 모든 인간은 잠재적으로는 소수자이며, 다수자의 사실은 개인의 사실이 아니라는 측면이다. 즉 다수자의 모델은 구체적인 개개의 인간에 관여하지 않는 공허한 모델이지만, 생성변화는 세계 전체와 관련된다.
― 5. 포스트사회주의 정치운동에서 저항과 창조, 301쪽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Maurizio Lazzarato, 1955~ )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1980년대 초에 프랑스로 망명, 파리 제8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 정보기술, 비물질노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율주의 잡지 『뮐띠뛰드』(Multitudes)지의 창간 발기인이자 편집위원이다. 비물질노동, 임금노동의 종말, ‘포스트사회주의’ 운동, 인지자본주의와 그 한계, 생명정치·생명경제 개념 등이 연구 주제이다. 저서 『부채인간』(메디치미디어, 2012)은 한국어를 포함하여 11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2013년 서울 일민미술관의 <애니미즘> 전시회에 시각예술가 안젤라 멜리토풀로스와 함께 작업한 영상 작품 <배치>와 <입자들의 삶>이 전시되었고 작품 소개를 위해 방한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비물질노동과 다중』(공저, 갈무리, 2005), 『기호와 기계』(갈무리, 2017), 『사건의 정치』(갈무리, 2017), 『부채통치』(Gouverner par la dette, 갈무리, 근간), 『정치의 실험들』(Expérimentations politiques, 갈무리, 근간), 『발명의 힘』(Puissances de l’invention, 2002), 『불평등의 정부』(Le gouvernement des inégalités, 2008), 『전쟁과 자본』(공저, Guerres et capital, 2016) 등이 있다.

 

옮긴이

이성혁 (Lee Seong Hyuk, 1967~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세명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경악의 얼굴 ― 기형도론」이 당선된 후 현장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불꽃과 트임』(푸른사상, 2005),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리토피아, 2011), 『서정시와 실재』(푸른사상, 2011), 『미래의 시를 향하여』(갈무리, 2013),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새미, 2015)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이마무라 히토시, 『화폐 인문학』(자음과모음, 2010, 공역)이 있다.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기호와 기계』(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들뢰즈와 가따리의 기호론으로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빠올로 비르노,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안또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에까지 걸쳐 있는 언어중심적 정치이론을 비판하면서 물질적 흐름과 기계들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기호들을 분석한다. “자본은 기호로 움직인다.”는 가따리의 주장에 근거하여 “오늘날 비판이론은 언어와 재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고 있는가?”, “오늘날 기호들이 정치, 경제, 주체성의 생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묻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비재현적 주체 이론을 전개한다.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전 세계적 정치상황과 사회운동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진동해온 민주주의 논쟁을 절대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의 발견과 발명을 통해 한 걸음 더 전진시키려는 것으로 이러한 주제의 단행본으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책이다. ‘절대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대선 이후 초미의 관심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사회대개혁’이라는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구체화해 나가야 할지를 사유할 개념적 틀과 근거를 제공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비물질노동과 다중』(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외 지음, 갈무리, 2005)

 

'신자유주의, 정보사회, 탈산업사회, 주목경제, 신경제, 포스트 포드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응답을 한 권에 엮은 책. '물질노동이 헤게모니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로의 노동형태 변화를 주요 현상으로 지적하고, 비물질노동의 두 축인 정동노동과 지성노동을 분석한 후,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에 비물질노동이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 갈무리 도서를 구입하시려면?

인터넷 서점> 알라딘 교보문고 YES24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

전국대형 서점>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북스리브로

서울지역 서점> 고려대구내서점 그날이오면 풀무질 더북소사이어티 레드북스

지방 서점> [광주] 책과생활 [부산] 부산도서 영광도서 책방숲 [부천] 경인문고 [안산] 들락날락

 

▶ 메일링 신청 >> http://bit.ly/17Vi6Wi

 

▶ 웹홍보물 거부 >> https://goo.gl/J7erKD

 

▶ 홍보하면 좋을 사이트를 추천해주세요! >> https://goo.gl/Ce35gV

 

태그 : 사건의 정치, 도서출판 갈무리,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이성혁, 아우또노미아, 재생산, 발명, 정치경제학, 뒤르켐, 부르디외, 맑스주의, 다위니즘, 랑시에르, 생성변화, 창조, 특이화, 시-예술, 저항정치, 시적 상상력, 들뢰즈, 가타리, 푸코, 바흐친, 빠졸리니, 라이프니츠, 자본, 권력, 통제, 소수자되기, 차이의 정치학, 주체화, 안또니오 네그리, 엥떼르미땅, 프레카리아트, 포스트포디즘, 모나드, 타르드, 미디어, 자본주의, 인지정치, 착취, 대안세계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촛불 운동

 

토, 2017/11/11- 19:23
357
0

편집자 주:

시장가치 평가액이 1천억 불이라는 우버는 2018년 현재 아직도 경상이익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 신용과 투명성이 생명인 기존의 화폐시장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가 등장하면서 신뢰는 사라지고 투기광풍이 휩쓸고 지나 갔다. e-Platfrom이 주는 공유재적 편익을 일방적으로 취해 FAANG로 상징되는 26명의 초거대부자들이 인류 절반인 36억 명의 몫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있다. 분명히 잘못되었고, 이대로는 반드시 큰 재앙이 닥쳐온다.

다른백년은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긍정적 전망과 무서운 화근을 명명백백히 따지고 가릴 것을 제안한다. 미래의 ICT기술과 가상의 세계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악마의 손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다 희망찬 자유의 영역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인가 국제적인 합의와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수십만 명의 운전 기사들의 생계를 협박하는 카카오 택시앱은 정당한 것인가? 아래의 글은 수 주전에 파이낸스타임즈(FT)에 실린 칼럼을 번역한 것이다.


우리는 신용 순환의 후기에 있으며, 현재 너무 많은 돈을 실제적으로 너무 적은 가치에 쏟아 붓고 있다.

몇 주전에 있었던 세계 경제 포럼과 현실세계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 가장 주목받은 점은 많은 사람들이 기술적 낙관주의를 표명했단 점이다. 그러나 시장이 기술 분야에서 기대하고 있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연발되고 있는 신규 상장은 특히나 더 불안해 보인다.

우버의 대표이사인 코스로샤히는 다보스 경제포럼의 유명인사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신규 상장 이야기를 띄우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선 다급함의 조짐이 느껴졌다. 우버, 리프트와 더불어 슬랙과 에어비앤비 같은 대규모 비공개 기술기업들은 더 늦기 전에 주식을 공개상장 할 것으로 보인다. 변덕스러운 시장의 생리와 다가오는 경기 침체, 그리고 이 회사들이 민간자금에 의지하여 너무나 비대하게 성장한 까닭이다. 시장이 이들 회사의 거대한 가치액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들은 아직 반응이 좋을 때 빨리 현금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현재의 상황은 21세기의 벽두를 장식했던 닷컴 버블과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당시 필자는 런던의 벤처 자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LVMH 그룹의 지원을 받아 난립한 온라인 소매 업체들은 – 이들은 현재는 연기처럼 사라진 유럽의 펫츠 닷컴 같은 기업들이었다 – 수백만 달러를 그럴듯한 광고에 쓰고 있었고, 사업가 지망생들은 쉽게 투자를 유치해 보려고 퍼스트 투즈데이 같은 스타트업 포럼의 친목 행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행사에 가면 으레 보이던, 옷깃에 모두가 달고 있던 투자자용 빨간 뱃지와 창업가용 초록색 뱃지를 기억하는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우리는 신용 순환의 후기에 들어서 있었다. 당시에도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양의 가치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투자자들은 뜨거운 신규 상장이 빈발하던 시장을 믿고, 이미 누가 봐도 과열된 상태였던 시장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있다, 그 끝에 서있던 북미와 유럽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도 함께.

필자는 그 당시의 기술 벤처 기업들이 만들어 낸 가치가 전무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닷컴 버블의 붕괴 당시 무너진 애완견 사료 소매업자 혹은 고급 티셔츠 공급자 하나 하나에 들어갔던 돈이 다른 곳에 쓰였다면, 예건데 오늘날 구글 같은 기업들이 자본화 하고 있는 브로드밴드 케이블 같은 인프라를 여러 곳에 준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시장은 공유경제와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가상 편익의 서비스가 장악하고 있다.

두 시대 간의 진정한 차이는 자본시장 그 자체에 있다. 2000년 이후 벤처 자본은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했다가, 또 다시 금융위기 이후에 무너졌다가, 2014년 이후 기록적인 수준으로 다시 회복했다. 새로 개업한 스타트업의 숫자는 급증했다. 그렇지만 신규 상장 건수는 떨어졌다. 이는 업계의 모순에 의한 것이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창업비용은 저렴해졌으나 성공적인 경영을 위한 비용은 비싸졌기 때문이다. 이는 시가총액이 10억 달러를 상회하는, 또 다른 “유니콘(설립 10년 이내, 가치가 10억불 이상인 벤쳐)” 스타트업을 창업해내기 위한 마치 군비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모순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학자들인 마틴 캐니와 존 지즈만은 “유니콘, 체셔 고양이, 그리고 기업 금융의 새로운 딜레마” 라는 제목으로 스타트업 펀딩 업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필하면서, “스타트업 기업들은 주체 못할 속도와 적자성장, 그리고 수익성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시피 한 급속 확장을 통해 승자독식의 역학에 불을 지피려 한다”고 썼다.

지난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벤처 자본의 지원을 받은 유니콘들의 숫자는 막대하게 늘어나왔다. 우버, 리프트, 스포티파이, 그리고 드럽박스 같은 회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도 평가가치액은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특징들은 새로운 사업 역학의 일부이다. 낮은 진입장벽은 많은 경쟁자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최대한의 지출로 이어진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순환구조 안에서 떠오른 비공개 기업들은 자연히 비대하게 팽창하게 되고, 벤처 펀드 스스로도 그렇게 비대해지고 있다. 과거엔 10억달러 규모의 벤처 펀드라는 말 자체가 없었지만, 지금 그 정도의 규모를 가진 벤처펀드는 즐비하다.

작년 한 해, 세퀘이아는 80억 달러 규모의 종자돈 펀드를 모금했고, 소프트뱅크는 1조 달러라는 경이로운 규모의 펀드를 모금해냈다. 이렇듯 큰 규모는 결국 더 큰 규모를 낳고 만다. 갈수록 더 많은 우량 벤처 자본들이 스타트업 기업들의 가치를 부풀려 버리면, 나머지는 따를 수밖에 없다. 오르거나 퇴출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공개 상장 시장의 새로운 거품이 끼었을 뿐만 아니라, 건실한 수익성을 확보하려는 수 많은 공개 기업들을 평가절하하는 결과가 돌아왔다. 전형적인 예가 택시 업계에 우버가 만들어 내는 교란, 혹은 숙박 업계에 에어비앤비가 끼치는 영향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니콘” 회사들의 부풀려진 가치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으고 더 많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일부 벤처 자본들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행태가 전체적인 경제적 가치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수익성 없는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부채금융을 동원하는 일은 몇몇 기업가와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줄 수 있겠지만, 이는 자본과 노동시장을 왜곡시키는데다 반(反)경쟁적이기까지 하다.

투자자들이 성장을 가치의 척도로 삼는 한, 이러한 행태는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했듯, “유니콘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다.” 이번 해는 “유니콘”들이 처한 재정적인 현실과 그들이 현재 취하고 있는 자금 조달 모델의 안정성이 매우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과대평가된 회사들이 내놓는 새 성과물들은 결국 체셔 고양이가 되어 버리고, 버블이 붕괴하기 전 시장에서 빠져 나온 몇몇 이들의 웃음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파이낸스타임즈(FT) 칼럼

수, 2019/03/13- 13:09
20
0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개혁’에 대한 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

“노동개혁이 아닌 노동개악 우려” 향후 캠페인 및 대응 계획 밝혀

기자회견 일시·장소 : 10.21일(수) 오전 11시, 환경운동연합 앞마당

 

 

20151021_기자회견_정부여당의 노동개혁에 대한 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

이른바 ‘9․15노사정합의’이후 박근혜 정부는 일방적인 노동개혁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5개 법안을 당론으로 발의하고, 이 개정안을 연내에 처리하겠다고 연일 강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계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 일반 시민들까지 그 절차와 내용에 깊이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고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관련 정책이 개혁인지, 개악인지 진지한 검토와 사회적 점검이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과 NGO들이 최근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개혁’정책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향후 “노동이 존중받는 행복한 세상” 시민 캠페인 계획 및 관련 대응 계획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기자회견 진행
- 각계각층 시민단체 대표단 말씀
- 향후 계획 발표
- 기자회견문 낭독

 

시민사회 향후 주요 대응 계획(안)
- “노동이 존중받는 행복한 세상” 시민 캠페인
- 시민 1천여 명이 참여하는 ‘참다운 노동개혁’ 정책에 대한 원탁 토의 추진
-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국회에 제출한 법안에 대한 시민토론회 진행
- 박근혜 정부가 계속 일방적 노동정책 강행 시 범 시민사회단체 2차 기자회견 준비
- 시민사회 대표단의 청와대 면담 추진

 

기자회견문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고용안정성을 저해하는 노동개정안 강행처리 즉각 중단하라!

 

박근혜 대통령이 8월 6일 국민 앞에 경제재도약을 위한 고통분담을 호소한 이래 핵심개혁과제인 노동개혁이 거침없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의 요구를 사실상 모두 수용한 9.15 노사정 합의문이 발표된데 이어 새누리당은 5대 노동법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이제 정부와 여당은 올해 안에 노동개혁 입법을 완료할 것을 공언한 상태이다.

 

현재 한국경제는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의 확산,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양극화, 내수부진, 신흥국 경기상황 등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회생을 위해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노동개혁안은 노동환경을 저해하고,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높기 때문에 각계각층에서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있다. 정부·여당의 노동법 개정안이 심의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이를 방치할 수 없어 한 목소리로 노동개정안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진정한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노사정합의문은 기업의 이익은 철저히 보호하는 한편 일반해고 도입 및 취업규칙변경요건 완화 등 노동환경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는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형평성을 벗어났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노사 신뢰수준은 낮고 인사평가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은 높으며 사회 안전망 수준은 미비하다. 그럼에도 저성과자 해고와 사용자 임의에 따른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용이해지면 그나마 고용안정성을 보장받던 정규직마저 비정규직 수준으로 격하될 수 있다.

 

게다가 새누리당은 합의문보다도 후퇴한 내용의 법안을 약속한 논의절차도 거치지 않고 밀어붙여 합의의 절차적·내용적 정당성을 모두 훼손시켜 버렸다. 그에 따라 애초부터 사회적 대화가 실재했던 것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부의 방안이 경제회생에 적절한 대안이 아님에도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면서까지 강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과정에서 청년실업의 원인이 일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기성세대들에게 있는 것처럼 발표하여 세대 간 갈등을 부추겼다. 하지만 청년일자리와 장년층 일자리는 서로 대체관계에 있지 않으며, 임금피크제의 단기적인 임금부담 완화효과로는 청년실업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제 정부는 노조가 노동유연성을 저해하는 경제성장의 걸림돌인 것처럼 여론전을 펼쳐 노조 대 비노조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노조의 기득권을 해체한다는 핑계로 노동유연성을 계속해서 확대한다면 그 피해는 90%의 비노조 노동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피해가 확산될수록 사회양극화도 가속화되어 경제에도 악영향이 미칠 것이다. 침체된 경제국면 타개를 위해선 국민적 힘을 모아도 모자란데 정부의 갈등조장이 계속된다면 한국경제는 국론분열로 성장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인 독주로 노동개혁은 더 이상 노사정 이익당사자들에게 맡겨놓을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노동을 수행하는 모든 시민들이 직접 나서야할 문제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노동개혁이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문제가 아닌 시민의 일자리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로 직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동개혁의 실체를 알리고 이를 거부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개정안을 강행처리한다면 많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 ‘노동개혁’ 정책의 내용과 절차 모두를 우려하는 시민단체 일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익인권법재단‘공감’/문화연대/미디어기독연대/민주언론시민연합/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언론연대/참여연대/천주교인권위원회/청년광장/한국여성노동자회/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KYC(한국청년연합회)/함께하는시민행동/환경운동연합

 

수, 2015/10/21- 14:14
221
0

add38e3167f33478f5ce77b09b0e1b4d

12월 5일 범국민대회 개최 보장과 평화적 진행을 위한 시민사회·종교계·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 1202-01.jpg ■ 일시 : 2015122() 오전 930~ 1050(시국회의)

                                                오전1100~ 1140(기자회견)

■ 장소 :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11

[기자회견문]

125일 범국민대회 개최 보장과 평화적 진행을 위한

시민사회·종교계·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

국민들의 목소리는 터져나와야 하고, 정부는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부는 평화적 집회를 막지 마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1114일에 민중총궐기집회에 참여하던 중에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 공격으로 18일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민 백남기 선생이 하루빨리 회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지금에라도 정부 당국이 백남기 선생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들은, 125일에 평화 집회를 열고 행진하겠다는 국민들의 의지를 정부가 꺾지 말 것을 요구하고,우리들 스스로도 당일 집회와 행진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임을 밝히고자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은 지난 1114일에 벌어진 경찰과 집회 참가 시민들 사이의 충돌을 빌미삼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신고한 125일자 집회는 물론이거니와, <백남기 농민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신고한 같은 날 집회도 폭력집회가 명백하다고 단정하고 집회개최 금지를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125일에 집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단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평화적 집회로 개최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종교계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인들도 이 집회에 참여해 평화적 집회가 되게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폭력집회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고 집회와 행진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입니다.

우리들은 정부 당국에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평화적 집회와 행진을 하겠다는 국민들의 의지를 꺾지 말고, 집회와 행진을 즉각 보장하십시오.

아울러 우리들은 125일에 열릴 집회와 행진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임을 국민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국민들이 정부를 향해 국민의 요구를 외칠 수 있는 광장은 어떤 경우에도 확보되어야 하고 이를 정부가 봉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에 이런 광장을 확보하기 위해 어제, <125일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과 민주회복 민생살리기 범국민대회> 개최 신고서를 경찰에 제출하였으며, 평화적으로 개최할 것임을 경찰에 전달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우리 모두도 같은 마음이고, 이는 미처 오지 못한 많은 이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정당한 집회와 행진을 경찰이 봉쇄하고, 여기에 집회참가자들이 맞대응하여 충돌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기를 정말 희망합니다.

우리들은 125일이 평화집회와 평화행진의 날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부 당국이 갈등을 더 조장하고 국민들을 위축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평화적 집회와 행진을 온전히 보장하십시오.

국민 여러분들도 저희들과 함께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과 민주회복 민생살리기 범국민대회에 많이 참여해주시고, 범국민대회가 평화집회와 행진으로 진행되게끔 힘을 모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요구와 다짐

 

첫째, 정부는 민주주의 회복과 민생 살리기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용하십시오.

둘째, 경찰은 차벽을 비롯해 집회 참가자들을 자극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하십시오.

셋째, 집회 참가자들은 신고된 집회 장소와 행진 경로를 준수해주십시오.

넷째, 우리들은 평화집회가 진행되도록 평화의 꽃밭을 비롯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2015122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강희영(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 고미경(한국여성의전화 대표), 권태선(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김금옥(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김전승(흥사단 사무총장), 박봉정숙(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박영락(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 부장), 송아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변호사), 송란희(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신대운(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양길승(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 녹색병원 원장), 염형철(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유지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윤기돈(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시민사회활성화위원장, 녹색연합 전 사무처장), 이상현(녹색미래 사무처장), 이완기(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대표), 이태호(참여연대 사무처장), 이필구(한국YMCA전국연맹 정책기획국장), 이충재(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정현곤(통일맞이 이사), 정현백(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 조영수(민주언론시민연합 협동사무처장), 퇴휴(스님, 실천불교승가회 상임대표), 황인성(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 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이학영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 대외협력위원장), 김제남 국회의원(정의당 반인권적 경찰폭력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수, 2015/12/02- 15:43
332
0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를 통해 정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사회 전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2008년 10월 9일에 설립된 시민단체입니다. 우리 센터는 시민들의 알권리와 관련된 제도 전반을 모니터링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시민들이 꼭 알아야 할 정보를 공개하는 활동 뿐 아니라 언론캠페인, 시민교육 등의 공익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 정보공개센터 소개 영상


■ 모집인원


상근활동가 1명



■ 지원자격


정보공개센터의 설립취지에 공감하고 시민의 알권리 확산을 위한 열정을 가지신 분이라면 학력, 나이, 국적, 성별 제한 없이 지원 가능합니다.


 



■ 업무내용


- 정보공개청구 및 공공정보 분석

- 데이터 디자인 및 시각화

- 정보공개센터 조직관리 실무

- 정보공개 및 알 권리 관련 교육 및 협력사업

*업무내용은 정보공개센터 사업 방향에 따라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 업무조건


- 급여

기본급 : 월 1,500,000원

연호봉 : 5,000원 * (연령-19)

근속수당 : 50,000원 * 근속년수

기타수당: 직책수당, 식비보조금, 교육지원비, 상여금

- 복리후생 : 주4일(월~목) 출근, 주1일(금) 자유업무 / 10:00~18:00 / 4대보험 /             여름․겨울 휴가 / 연가 및 특별휴가

- 기타 : 2개월간 수습 후 인사위원회를 거쳐 채용여부 최종결정

 (수습기간 급여 100% 지급)



■ 전형방법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



■ 제출서류


-  이력서1부 (정보공개센터는 표준이력서 사용을 권장합니다. 사진은 부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자기소개서1부 (센터에서의 활동에 대한 전망 포함)

-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동의서 1부 (아래 첨부된)

* 표준이력서 항목을 포함하시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양식은 자유롭게 하셔도 무방합니다. (인적사항에 전화 / 전자우편주소 포함)



■ 모집일정


- 1차 서류전형: 2015년 12월 7일(월) ~ 2015년 12월 30일(수)

* 서류접수 후 1차 서류전형 합격자에 한해 개별통지

- 2차 면접: 2015년 1월 14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 최종 합격자 발표: 개별통지



■ 접수 및 문의


- 접수처 : [email protected] / 접수시 전자우편 제목과 첨부파일명은 <활동가 지원_홍길동> 형식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 연락처 : 02) 2039-8361~2

- 홈페이지 : www.opengirok.or.kr



* 지원자에게 서류 제출 다음날 접수 확인 메일을 발송합니다. 지원서류는 전자우편으로만 받으며 제출하신 서류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 정보공개센터 채용기준에 해당하는 지원자가 없을 때는 선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동의.hwp



저작자 표시 비영리
월, 2015/12/07- 17:12
75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