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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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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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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김제·군산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답사 프로그램 ‘식민지 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 김제·군산지역 역사기행’이 10월 5일(토) 전북지역에서 55명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답사 해설은 허수열 충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주었다. 서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40여 명과 전
북지역에서 합류한 후원회원 10명, 그리고 진행스텝으로 임무성, 김혜영, 김무성 상근자가 참여하였다.
3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달려 신태인에 도착한 답사단은 점심을 같이 먹고 낙양취수장을 찾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구마모토 농장, 벽골제, 만석보터, 죽산보유허, 해창관문 등을 탐방하며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수열 교수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근대 한국이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역사문화적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강의를 통한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역사인식을 제고하였고 아울러 근대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관심과 열린 시야를 갖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허수열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이 좋아졌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고, 근대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을 제시하여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번 답사에는 현지의 전북지부 회원들이 함께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김재호 지부장은 참가자 전원에게 새로 도정한 햅쌀을 한 부대씩 선물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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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11월 9일 임종국 선생 30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회원들과 시민, 충남지역 학생들이 모여 임종국 선생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천안 신부공원 답사를 시작으로 천안공원묘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요산재에서 안내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를 거행했으며 저녁 6시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의 밤’ 행사를 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이번 추모행사는 민족문제연구소·임종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 충남교육청과 충남역사교사모임이 후원하였다. 본부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교육위원, 박광종, 이순우, 권시용, 조한성 선임연
구원, 손기순, 신다희, 국세현, 류감석, 김무성이 참여했고, 지부에서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박해룡 대전지부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을 비롯한 회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천안공원묘원에서의 추모식에서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전 회원이 참배하며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임종국 선생 유족 대표로 선생의 여동생 임경화 여사와 사위인 조원희 님이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모의 밤 행사에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홍성표 아산시의원이 참석했다. 또 충남역사답사에 참여한 충남지역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석해 임종국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 행사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가 중심이 된 밴드가 판소리 심청가와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새야새야파랑새야’
,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을 불러 추모의 뜻을 더했다.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금, 2019/11/2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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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최우현 서울북부지부 회원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9년여 시간을 천안에서 보냈다. 건강문제도 있었거니와 친일파연구와 집필에 전념할 공간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안이라는 고장과 선생의 인연이 깊은 이유다. 2016년에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흉상)도 천안 신부공원 광장에 들어섰다. 참고로 천안 신부공원에는 임종국 선생의 조형물과 더불어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6월 민주항쟁 30주년 표석’이 함께 자리해 있다. 민족, 민주, 평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80여 명에 이르는 시민, 자원봉사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선생의 영면지인 천안공원묘역(무학지구 철쭉 4-1)에 운집했다.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를 비롯해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외아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 등 각계, 지역의 인사들도 자리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현장에서는 임종국 선생의 육성이 담겨있는 인터뷰 녹음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녹음본은 1988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임종국 선생과 임헌영 소장(당시 문학평론가)의 대담을 담은 것이다. 해당 녹음본 속의 임종국 선생은 당시 폐기종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친일 청산이 왜 필요한 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이란 것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파고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놓은 이런 상태가 돼있거든요. ”
– CBS 라디오, 임종국 선생 인터뷰(1988년)

 

그런 한편,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는 재야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선생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실제로도 선생은 연구비가 없어 여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다음 일정은 요산재로 이어졌다. 요산재는 선생이 천안에서 기거한 동안 집필실이자 일터(밤농사), 잠자리이자 부엌으로 역할을 한 삶의 현장이다. 이러한 고로 요산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고상한 연구실이나 향기로운 서재와는 다른,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매일신보〉 10년 필사분 등을 연구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던 선생의 학열과 연구과정을 상상해보면 이곳 요산재의 공간적 의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임종국 선생 연보에 따르면, 선생이 요산재에 머무른 1980년~1989년 사이 발간된 선생의 연구 저작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한국문학의 민중사〉 등 9권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요산재는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당시의 대략적인 집 형태만 남아있으며, 현 거주민 또한 임종국 선생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이다. 즉, 사유지이므로 접근이나 답사는 어렵다.
다만 이날은 30주년 관계로 주최 측(민족문제연구소)과 거주자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밝힌다.
이어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추모식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김지철 충남 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등 공직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 표명이 있었지만 논점은 모두 비슷했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떠난 지 30년, 그 이후 우리 주변의 친일 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어찌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자신의 저서 〈친일문학론〉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선생은 우민화, 민족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교육이 자신을 역사와 민족에 무지한 ‘천치’로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몰입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

 

‘친일파’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던 당시(1965년)의 풍토는 선생의 연구를 외면했고 선생은 가난했다. 하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붓끝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건 없건, 관료이건 문필, 예술가이건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육친(아버지 임문호)과 스승(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가리지 않고 고발했다. 선생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겠지만 그것이 친일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의 공정이고 입장이었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육십 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라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임종국 어록에서) 그 말대로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우리 후대 사람은 선생에게 모종의 빚을 지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지 않다.

금, 2019/11/2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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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노관우 특별상 수상자 노동은 교수의 아들

먼저 이런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아들인 저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아버지의 제자 분들의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임종국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발자취와 아버지께서 평생 근현대음악을 연구하시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알려 오시고자 했던 걸음걸음이 그 모양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셨다고 직감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셨음을 느낍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작금의 국민적 분노 속에서 그동안은 없었던 특별상을 받게 되니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임종국상을 수상하신
다고 하니 많은 분들에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특별한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쌀쌀했던 날들을 촛불집회로 뜨겁게 녹여대던 3년 전 1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뉴스를 보시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시면서 제게 ‘촛불집회에는 가봤느냐’며 당신도 몸만 괜찮으면 가보고 싶다고 아쉬워하시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뜻깊은 상을 직접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음악현단계> <민족음악론> 등을 저술하시는 한편으로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민족음악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노동은의 음악상자> 시리즈, <한국근대음악사> <한국음악론> 등을 통해 애국가문제, 친일음악, 뽕짝 등 우리 근대음악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알리시는데 늘 앞장서셨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오랜 기간 작업하셨던 <항일음악 330곡집>의 마지막 교정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셨고 재작년에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발간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각계각층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그 삶과 연구의 흔적들이 나침반이 되어 여전히 많은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계십니다.
끝으로 아버지의 소감을 대신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가늠해볼만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제가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1996년에 아버지께서 단재학술상을 받으셨습니다. 시상식 날 온 가족들을 데리고 가느라 저도 어린 나이에 멋지게 옷을 입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그 이후에도 여러 상을 타셨지만 늘 가족들에게 단재학술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평생 학자로서 그 상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시며 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임종국상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 어떤 상보다도 기쁘고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재학술상이 아버지의 평생 연구에 영감을 주었다면 임종국상이 아버지의 평생의 연구를 인정받고 보상받는 기분이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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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KBS 밀정 제작팀 언론상 수상자

면구스러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밀정> 2부작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잇달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5분짜리 영상조차도 ‘길어서’ 시청하기 힘들다는 초고속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열정을 쏟아 만든 진지한 다큐멘
터리는 그 분량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재확인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임종국상>은 여타 평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묵직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계속 되뇌게 됩니다.
‘과공비례’가 되지 않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을 받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상은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보여준 성취에 대한 축하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도 함께 포함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에 꽂힌 <친일문학론>을 다시 꺼내보다가 임종국 선생님이 (지난해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과 각별한 교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장은, 다른 거장을 알아보는 안목을 청년시절부터 갖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업적을 어떻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냐마는, 어쩌면 이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탐구하는 것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밀정 추적도 100주년이라는 축제기간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을 가감 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엄정함이란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어둠을 자꾸 이야기해야만 밝은 부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조언 말씀이 저희들 마음속 출발점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댓글을 읽어보면 시청자들도 이미 그렇게 총체적으로 방송의 의미를 확장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KBS는,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파고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급변해버린 언론환경이 그것입니다. 그날의 뉴스가 그날 다 소비되지 못한 채 휘발되고, 장기간 공들여 기획 취재한 보도물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며, 유명인이나 연예인의 ‘몰락의 서사’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탐사보도 역시 새로운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번 <밀정> 2부작은, 그런 환경에 놓인 저희들에게 어떤 기본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저널리즘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문제의식과 끈질긴 탐구를 배제한 채로는 그 어떤 탐사보도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 기본 요소 하나하나를 벽돌 쌓듯 충실히 이행할 때 시청자들은 많든 적든 분명한 호응을 보여준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밀정>
2부작은 장기간의 취재와 투입된 예산·인력의 스케일 측면에서 볼 때, 공영방송 KBS만이 수행할 수 있는 탐사보도였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KBS는 이런 걸 잘해야 하고, 이런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난립 속에 KBS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게 저희들 생각입니다.
내년 2020년이 되면, 아마도 100주년인 올해만큼 역사 돌아보기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단지 역사적 소재를 많이 다루고 안 다루고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동체가 응당 공유해야 할 건강한 역사의식을 현재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임종국상>이 저희들에게 주문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 강조점이 찍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책무와 주문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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