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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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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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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정영환 학술상 수상자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
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은 이런 절실함을 갖는 재일동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쓸 것이 제 바
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염원입니다. 제가 그려낸 역사를 ‘동포’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글, 즉 일본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사나 ‘재일조선인문제’의 역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고뇌의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남한에 입국한 적도 없었고 제가 염두에 둔 ‘동포’는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운동에 투신하여 각지에서 ‘일꾼’으로 사업하던 ‘동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바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제가 상상하는 ‘동포’ 개념은 일본 열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제 책은 임경화 선생님의 노고 덕분에 번역이 되어 한국의 ‘동포’를 독자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연구와 우리 민족사의 정립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수여받을 영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적(朝鮮籍)’이라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혹은 ‘간첩활동을 할 개연성이 높다’ 등
의 이유로 입국이 불허되는 처치에 있었던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한다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항상 싸우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런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가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겨우 소장 연구자의 입구에 선 저의 저작에 주목해주시고 더 많은 ‘동포’와 만날 기회를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선생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 후기’에도 썼듯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두 명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에 큰 감격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서경식 선생님의 <분단을 산다>(1997년)입니다.
‘<쟈이니치>를 넘어서’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쟈이니치’론,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내의 민족적 소수자로만 보는 탈민족적인 담
론을 비판하면서도 구태의연하고 본질주의적인 민족관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민족관’을 위한 검토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이란 존재를 협애한 일본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낳은 제3세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시각에 매혹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책과의 만남 없이는 이번 책의 ‘조선근현대사로서의 재일조선인사’란 기본시각도 식민주의와 분단이 낳은 폭력과 이산(離散)이란 주제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권은 박경식 선생님의 <해방후 재일조선인운동사>(1989년)입니다. 법학부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었던 제가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묘사한 재일조선인들의 운동사에 흥미가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에 일본 지바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족교육은 저에게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
었고 동포사회의 ‘일군’으로 사업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류는 일본의 치안당국이 묘사하는 ‘운동’상과 전혀 다른 재일조선인운동의 역동성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단 민족교육을 통해 배운 재일조선인사는 한편에서는 교과서적인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경식 선생님의 책에는 새조선 건설노선이나 참정권을 포함한 일본에서의 권리 획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이런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 아닌 고민과 논쟁, 갈등의 역사는 신선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고 애써온 분투가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재야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서 자료를 찾아내시어 조선인강제연행이나 간토대학살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굴하였습니다.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이 한일협정체결을 앞둔 1965년에 간행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연구는 그저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조선관을 시정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고 또한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할 길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한 분투의 기록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에 수록한 제 연구 또한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연구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가혹한 분단과 민족차별이 횡행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민족사 정립’을 위해 외롭게 발언과 연구를 이어오신 연구자들에게 감사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원저는 2013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일본어판 출판과 한국어판의 간행은 서문과 후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던 것도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 책을 우리말로 옮겨주시고 많은 ‘동포’들과 만날 기회를 주신 임경화 선생님과 제 책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해방5년사’를 이어 조선전쟁(한국전쟁)기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성과로 이번 시상을 통해 저에게 주신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법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의 길을 선택한 무모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제 수상소감을 맺겠습니다.

금, 2019/11/2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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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김영희 서울 광진 회원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금, 2019/11/2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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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토, 2019/12/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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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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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점차 독점화하고 상업화해 가는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퍼블릭액세스 채널이 가진 지향점,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린 판단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명확한 자료에 근거해 제작했으며, 전체 다큐영화의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민방송의 <백년전쟁> 방송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이승만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나온 ‘무죄’ 결정과 같은 결과였다.
대법원이 ‘파기환송’ 했으므로 다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여 상식에 부합한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금, 2019/12/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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