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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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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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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뭉치면 산다

강인수

편집자주 – 지난 7월 하순에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강상호 지사의 아드님인 강인수 선생(대구 거주)이 북미교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못마땅해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우국시를 보내왔다.


 

대통령이
6. 25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유럽으로 아세아로 아메리카로
온 세계로 동분서주
평화를 애걸복걸 절규하고 다니는데
왜 대통령을
좌파독재자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울까
우리 동포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자 하는 것이
어찌 좌파독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한지
벌써 일 갑자년(甲子年)이 쑥 넘어섰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다시 군국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나라가 망하라고
경제보복으로 재침을 시작하였으니
아!
힘을 합하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이 국론통일로 단결하여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우리 대통령이 아무 일도 못하게
무능한 대통령이니…….
온갖 막말을 주저 없이 내뱉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반대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좌파독재자라면
대통령이 우리의 국적(國敵)이란 말인가
분하게도
일본 정치인이 무례(無禮)하게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을 하고
일부 우리 언론인마저 대(對)일본 기사에서
한국인이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대할 것인가라며 맞장구를 치고
어느 야 정당(政黨)도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된 것처럼
아베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용서를 빌라 하니
아! 이 일을

일제강점은 한국을 개화한 통치가 되고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로 전락되며
강제징용은 한국 실업자를 구제한
대일본제국의 선행(善行)이 되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친일정서(親日情緖)에 어울리게
손발이 착착 잘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권력다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정적(政敵)으로 망하기만을 원한
다면

동학란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것처럼
또 망할 것이다.
좌파독재니 빨갱이니 하는 이 지긋지긋한
욕설(辱說)은 듣기만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두려움이다
우리의 참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고
내부의 우리 동포간의 분열이기 때문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하였다.

금, 2019/09/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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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가을역사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진행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가을역사강좌가 9월 5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2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일 시         강 사   주 제
9.5 .  (목) 서민교 진중일지에 기록된 의병학살
9.10  (화) 권보드래 매일신보로 본 3•1의 밤
9.17.  (화) 예지숙 회고록으로 본 친일여성들의 기억과 망각
9.19.  (목) 이태훈 시사평론을 통해 본 친일의 논리
9.24.  (화) 이임하 전쟁미망인 구술로 본 한국전쟁
9.26.  (목) 이형식 일기와 서한으로 읽는 식민지 조선의 침략자들
10.1.  (화) 이순우 항공사진으로 본 식민지 경성의 공간
10.8.  (화) 최우석 한일관계사료집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10.10.(목) 김민철 일기로 본 일제말기 전시수탈과 강제동원
10.15.(화) 송병권 GHQ문서에 담긴 해방 전후 한반도와 패전 일본
10.17.(목) 전명혁 일제강점기 형사사건과 형사기록물(치안유지법사건)
10.22.(화) 김승은 한일시민의 투쟁으로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

 

사료를읽다,근대역사와만나다’를 주제로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화, 목요일 7~9시에 진행하는 강좌임에도, 매회 3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하게 참석하여 역사학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근현대사의 전개와 그 속에서 부단하게 움직인 한국인의 삶을 포착하고자 하는 강좌여서 내용이 쉽진 않다. 일기·서한집·사진 등 개인의 기록, 진중일지와 명부·신문(訊問)자료·외교문서 등 전시기 기록과 통치사료, 선언문·사료집 등 독립운동 관련 기록, 그 외에 신문·잡지 등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료를 관련 전문연구자들의 해석을 통해 생생한 역사상을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번 가을역사강좌를 통해 회원을 비롯한 일반시민들이 공식 역사 서술로부터 소외되었던 구술, 일기 등 생생한 원자료를 접함으로써 근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식민지 근대’의 모습을 추체험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근현대 한국의 역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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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백산무역과 경주최부자의 독립운동-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기획전시와 연계하여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였다. 최부자를 비롯한 한국 전통 명문가와 자산가의 청부(淸富) 정신과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조명함으로써 지도층의 사회적 도덕적 책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강좌는 9월 21일에서 10월 6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매 강좌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특별강좌와 기획전시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 주었다.
첫 번째 강좌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상임이사가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의 독립운동〉이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기획전시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이외에도 경주 최부자 고택에서 발견 된 많은 유물의 사진 자료들을 확인하고 최부자 댁의 ‘청부 정신’과 최준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백산 안희제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서 국민대학교 김성민 교수가 강의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산 안희제선생의 민족교육운동과 백산상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3강 경주 최부자 주손이신 최염 선생의 회고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고령의 연세임에도 할아버지 최준 선생에 대한 기억과 최부자 댁의 많은 일화를 들려주었고,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듯 한 추억과 함께 최준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
간이었다.
그 외에도 4강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 5강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석주 이상룡〉은 채영국 인천개항장연구소 수석연구원, 6강 〈이회영 형제들의 망명과 항일 역정(歷程)〉은 김명섭 단국대학교 연구교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고, 5회 이상 출석률이 좋았던 13명의 참여자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이 전달되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역사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 시민들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양질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기대해 본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화, 2019/10/2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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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 열려

10월 4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의 취지는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2·8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과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자료 〈대정8년 보안법사건〉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부와 2부 주제 발표 및 3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개회식에서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1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2·8과 3·1 사이-3·1운동 준비과정을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2·8독립선언이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말하고 재일조선인유학생 송계백 고국 방문 시점의 분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청원에서 독립선언으로 변화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였다. 이어서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취조기록을 통해 본 2·8독립 선언으로의 도정’을 발제했다. 여기서의 취조기록은 2012년 일본에서 발굴된 「東京辯護會·第二東京辯護士會合同圖書館所藏刑事訴訟記錄」 속에 포함된 「출판법위반」 부책(簿冊)이다.
미야모토 연구원은 2·8 독립선언 서명자(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서춘)를 일본 경찰과 검찰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취조한 내용과 이들의 공판기록 등을 통해 2·8 독립선언 과정을 재구성했다. 신문기록상에는 최팔용이 2·8독립선언의 중심인물이며 선언서 작성에 이광수뿐 아니라 다른 서명자들이 참여했음을 새로이 밝혀냈다.
2부의 주제는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이다. 첫 번째로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은 ‘3·1운동 참여자 처벌과 법 적용’을 발제했다. 이 발제를 통해 이시카와 검사가 115개 사건에서 총 943명을 조사해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와 상해죄, 훼기, 방화죄, 제령 제7호를 적용해 529명을 기소했고 이중 광범위하게 적용된 혐의는 보안법 제7조 치안방해(81건)였음을 밝혔다. 한편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자들에 대한 2심 판결 검토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적용 법령의 일부를 취소하고, 기소자의 34.5%가 1심보다 감형되는 사례를 확인함으로써 재판부가 3·1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최대한 중형을 내리려 한 총독부의 방침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조한성 연구원의 ‘함남 함흥의 지역 네트워크와 3·1운동’ 발제가 있었다. 조 연구원은 이사카와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함흥군의 지역적 특성과 기독교 학교의 실태를 확인하고 3·1운동 소식을 함흥군에 알렸던 이순영(원산), 강봉우(북간도)의 기독교적 배경과 역할을 살펴보고 함흥군에서 일어난 독립신문·격문 제작 배포운동과 조선인 관리 동맹사직운동의 전개양상을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과 관련해 함흥군의 다양한 지역 네트워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명숙 연구원은 ‘함남 이원 3·1운동의 내외적 전파와 전개’를 발제했다. 이 연구원은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이원군 3·1운동의 진행과정과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 조직과 주체를 이시카와 자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DB를 활용해 면밀히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원군뿐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독립선언서 유입과 전파과정을 정리하고 각 군의 만세시위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밝혀놓았다.
3부 종합토론에서는 한상권 전 덕성여대 교수를 좌장으로 하고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윤소영 독립기념관 연구원, 장신 한국교원대 교수,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허영란 울산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 편집부

화, 2019/10/2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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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편집자 주–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자 기사 「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김광서 장군편」이다. 자유신문사는 해방 직후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워온 망명지사들 가족을 방문하여 망명지사의 근황을 알아보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김광서 장군 편에서는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연고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망명지사들에 대한 관심과 성원이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해외에 망명한 혁명지사 중 로서아로 망명하여 이래 26년 동안 그곳에 있다는 김광서(일명 金擎天) 씨의 가족을 방문코저 더듬더듬 알 만한 길을 통해 처음 얻은 소식은 이러하였다. 사직골 막바지 전 부기동 아래 무덕문 뒤로 찾으면 아직도 전에 그가 살던 구지(舊址)가 있으리라는 대단 명료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단서이었다. 무덕문 옛터라는 곳은 전에 일본인중학이던 경성중학 뒤 그리고 일인 관리들의 사택이 있는 동리이었다. 그러나 이러타 할 구지를 찾을 수 없어 그 동리에서 나아서 자라서 지금 70이 넘었다는 사직골 막바지의 고로(古老)를 찾으니 자기가 잘 아노라 하면서 들려준 이 얘기에서큰 광명을 발견하였다. 고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저기 세집들이 많이 들어앉은 터가 바로 그 김대장댁 터이요. 지금 번지로 사직정 161번지(166번지의 오기-편집자)지요. 기미년 만세를 불렀던 바로 전 해(1918년) 가을에 김대장이 일본서 우리 동리에 나와 사시게 되었지요. 그때는 집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로 큰사랑, 작은 사랑이 이었는데 날마다같이 굉장히 손님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그때 식구는 김대장 내외분하고 나이 든 누이 한 분과 애기 둘 이렇게 단출합디다. 김대장은 아침저녁 용산군대에 나갈 적에 말을 타고 나가고 들어가는 □□ 우리와는 가까웁게 지내지 않았지만 드나드는 이 말로 보면 대단히 후한 이라고 합디다. 저 세집들이 □□ 수년 전까지도 돌기둥에 ‘김광서’라는 백자기 타원형 문패가 역력히 남아있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없어졌군요.
벌써 그 양반이 아라사로 가신 지도 스물여섯 해나 되니까 짧은 세월도 아니기는 하지요.

하며 노인은 1919년 3월 1일 만세소동이 있은 지 그 후 얼마 후에 과연 김대장의 자취가 사라지고 졸지에 헌병대와 경찰과 형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서 이 동리 사람들까지 자유로 드나들지 못하였던 당시의 삼엄한 경계상황을 말하여 바깥과의 일체 연락이 끊긴 후 김대장의 가족들이 얼마나 갖은 위협과 곤란 중에 지내왔는가를 지금도 □□□□□□하는 태도로 한숨지었었다. 이같이 노인의 말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김경천 씨가 만세 후 로서아에 망명하였을 당시에 한 동리 사람으로 듣고 본 사실담에 한 토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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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다행히도 또 새로운 광명을 잡게 되었으니 위에서 들은 사직골 노인의 이야기가 김경천 씨에 대한 서화(序話)이라면 이것은 그 본실이며 후일담이다. 이 얘기를 들려준 분은 최근 소련으로부터 입국한 홍복린(洪福麟) 씨이다.

내가 김경천 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지금부터 25년 전 소련 연해주 따뷔이라는 조그만 어촌이었습니다. 20 당년의 나는 혈기에 날뛰는 한 젊은이였습니다. 말로는 큰 뜻을 품고 고국산천을 떠나 이곳에 나왔으나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사실 쓰라린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건져주시며 나를 용기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김경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은 내가 연해주에 들어가던 바로 전 해 가을에 그곳에 오셨던 것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현역 기병대위로 혁명에 뜻을 품고 3.1운동 당시에 국내운동에 참가하다가 일본 관헌의 마수에서 벗어나 연해주로 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로서아에 입국하신 후 처음에는 그가 일본 군인이었던 관계로 조사 밀정이라는 혐의로 로서아 관헌의 박해를 당하여 적지 않은 고생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조선의 혁명가임을 확실히 알게 되자 그네들은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어 당시 10여 만이나 넘는 연해주의 조선인 통솔자로 임명하고 따뷔 어항의 어업조합장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래 선생은 재주 조선인의 사도며 지도자로 활동하시는 한편 그분이 □□□ 뜻하였던 장차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또 조국이 완전 해방된 후 조국을 지킬 국군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생이 이미 59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모발이 흴 때는 아닙니다마는 이역 고투 20여 년에 선생의 모발은 은발같이 하얗게 되시었습니다. 선생의 위업 조국 국군의 선봉이 될 중견군은 지금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현역 예비역 후비역을 통합하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조국 군인은 10만이나 됩니다. 이번 독소전쟁에 하리보우 싸움에서 위훈을 세워 조선 군인의 성가를 세계에 떨친 것도 선생 휘하의 조선 군인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네들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입니다.
로서아와는 지금까지 너무 □□하고 너무 비밀을 엄수해온 □□이었던 관계로 그간에 정보를 알 길이 없고 따라서 김선생의 소식도 망명 혁명지사 중에서 알려졌던 사실이지요.

홍복린 씨의 얼굴은 흥분으로 홍조를 띄우고 그의 말은 열화를 품은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경천 씨와 다만 한 분의 육친인 손아래 누이 한 분이 현재 서울에 거주한다고 한다. 기자는 그분을 소개하기를 원하였더니 ‘너무 만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만 두셔도 좋지요’ 하였다. 기자는 김선생의 한 분 누님이 가까운 장래에 그리우시던 오빠를 만나시고 길이 행복하시라고 혁명지사 유가족에 대한 경의와 축복을 표하기로 하였다.

수, 2019/10/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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