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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사이버 명예훼손 제도 개선’ 토론회 –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제도 개선 방향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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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사이버 명예훼손 제도 개선’ 토론회 –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제도 개선 방향 (2018.12.11.)

익명 (미확인) | 화, 2018/12/18- 17:33

* 토론문(PDF):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제도 개선 방향_오픈넷 손지원

2018년 12월 11일, 국회의원회관 제6간담회장에서 ‘사이버 명예훼손 제도 개선’을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 국회 이철희 의원실, 한국법제연구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공동개최한 이 토론회에서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그 중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개정, 폐지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픈넷 손지원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 부조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각종 내부고발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임을 지적하고 개선안을 제시했습니다.

진실한 사실을 말한 경우에도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는 현재 법제 하에서는 폭로자를 보호할 수 없으며, 사회적 고발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손지원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문제점을 여러 판례를 들어 설명하고, 특히 성폭력 고발인 미투운동과 관련하여 성폭력 가해자가 폭로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2차 가해를 더욱 손쉽게 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꼬집었습니다.

현재 정보통신망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조항에서 형법 조항과 같이 ‘공익성’을 요건으로 하는 위법성 조각사유를 추가하는 개정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개정이며, 근본적으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전면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과거 성이력과 같은 타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비방의 목적만 있는 악의적인 사생활 유포 행위를 막는 방안으로서 ‘오로지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공연히 개인의 내밀한 사적 정보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한 자’로 구성요건을 축소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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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노동자가 경험하는 성폭력, 구조적 원인과 개선방향1 

 

김양지영 |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

 

 

사회서비스 확대에 따른 돌봄노동자 확대

한국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속에서는 일하면서 겪는 직장내 성희롱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직장내 성희롱은 1998년 남녀고용평등법에 성차별로 법제화된 이후 몇 번의 개정을 통해 그 범주를 확대하고 사용자 책임 등을 강화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객에 의한 성희롱일 것이다. 2008년 여성들의 서비스 산업 진출이 확대되면서 고객에 의한 성희롱 문제가 가시화되면서 직장내 성희롱의 범주에 고객에 의한 성희롱 문제도 포함하여 개정하였다. 그리고 그 고객에 의한 성희롱 문제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여성 일자리인 사회서비스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재 한국은 핵가족화, 여성 고용 증가 등의 요인으로 가족 내 돌봄 공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돌봄의 사회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사회적 돌봄 수요증가에 따른 돌봄 서비스의 공급과 전달체계 확립이 중요한 정책의제가 되고 있고, 보육정책의 추진, 장애인 활동보조인제도의 실시(2007년 5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시행(2008년 7월) 등을 통해 돌봄의 사회화가 진행되고 있다. 향후 돌봄 영역은 가장 많은 고용창출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고 대표적인 여성 일자리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 돌봄 노동자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돌봄 영역의 여성 집중, 성별불균형 문제는 현재 돌봄 영역의 노동조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재 돌봄 노동자의 낮은 처우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지위 개선·인력 양성 및 관리 체제 개선으로 전문성 강화, 임금수준 제고, 근로조건 개선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되고 있다(최영미·김양지영·윤자영, 2011). 그러나 돌봄 노동자의 낮은 처우는 낮은 임금, 낮은 전문성 등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겪는 각종 어려움을 비가시화 시키는 역할도 한다.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은 지금까지 비가시화 되어 있는 영역이었다. 돌봄 서비스의 확대에 따라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돌봄 노동자 성희롱 피해 경험 34.8%

2009년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중앙가사간병교육센터가 공동으로 전국지역자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재가 서비스 여성 돌봄 노동자 중 남성 고객을 돌본 경험이 있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이들 가운데 성희롱 피해경험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심층면접조사 결과는 돌봄 노동자들이 겪는 성희롱 문제를 잘 보여준다.

 

돌봄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현황을 살펴보면 연령은 40~50대, 종사기간은 평균 1년~3년 미만, 한 달 평균 고객 수는 4~5인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성희롱 피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 34.8%가 성희롱 피해가 있다고 답했다. 성희롱 유형으로는 언어적 성희롱이 64%로 높게 나타났다. 돌봄 노동자 1인이 한 달 평균 돌보는 이용자가 4~5인에 이르다보니 성희롱 행위자도 2명 이상이 41%로 나타나고, 성희롱 횟수도 2회 이상인 경우가 73.9%였다. 

 

재가 돌봄 서비스에 내재된 성희롱2)  

그렇다면 이러한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재가 돌봄 서비스의 3가지 특성에 기인한다. 첫째, 취약한 이를 돌본다는 특성. 둘째, 친밀함의 발생. 셋째, 일하는 곳의 폐쇄성.

 

취약한 남성을 돌보기에 성희롱을 통제할 수 있다

여성 돌봄 노동자들은 고객의 집에 가서 일하는 것을 큰 어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건강한 성인 남성은 성폭력을 야기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인데 반해 자신들이 돌보는 노인, 환자, 장애인은 신체적으로 취약해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성희롱으로부터 위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돌봄노동자들은 실제 성희롱이 발생하면 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취약한 남성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해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만난다. 성폭력은 신체 건강한 남성에 의해 완력으로만 발생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그것이다.

 

돌봄 노동자와 취약한 남성은 대등한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서비스 이용자(고객)’의 관계로 만나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들은 이 위계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성희롱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서비스 이용자에게 정확하게 성희롱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없다. 고객은 자신의 서비스를 평가해 서비스를 끊을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희롱 행위자가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서비스 이용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보다 우위에 있다. 실제 서비스 이용자인 남성은 자신들이 돌봄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우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성희롱에 문제제기하는 돌봄 노동자의 서비스 횟수를 줄이거나 서비스를 끊음으로써 자신의 불쾌함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서비스 이용자의 서비스 횟수 줄이기 및 중단은 돌봄 노동자에게는 곧 소득이 줄어드는 문제로, 생활에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친밀감의 발생으로 성희롱을 문제제기하기 어렵다

집은 타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사적인 장소이다. 서비스 이용자에게 이곳은 편안한 친밀함의 장소이만 서비스 제공자인 돌봄 노동자에게 이곳은 작업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사생활의 편한 공간인 집, 누군가에게는 작업공간인 집에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돌봄 노동자와 서비스 이용자는 공·사를 넘나드는 복잡한 관계를 가진다. 집에 방문해 집안일도 해주고, 불편한 몸을 돌봐주고, 2~3일에 한번 혹은 매일 방문하는, 돌봄 노동자와 이용자, 이 둘의 관계는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라는 위계와 함께 사적인 친밀감까지 어우러져 있다. 실제로 돌봄 노동자들은 이 관계를 어떻게 조율해야할지 난감해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친밀함을 토대로 성희롱이 발생하고 있다. 

 

한 돌봄 노동자는 3년 동안 한 고객을 돌보면서 겪은 성희롱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부부 잠자리 얘기와 애인을 구해달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친밀함은 서비스 이용자가 돌봄 노동자를 ‘연애 대상’으로 파악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서비스 이용자가 돌봄 노동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선물을 하거나 사적인 업무 외 시간에도 전화해 사귀자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돌봄 노동자는 성희롱 대상, 연애대상에서 ‘여자 소개 중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돌봄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서비스 해오면서 맺어온 친밀감이 있다 보니 성희롱에 대해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어렵고 밝혀도 수용되지 않는데다가 이 문제를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 또한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한다. 친밀함이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고용주-피고용인’의 관계가 고용계약 관계가 아닌 유사 가족적 관계의 성격을 띨 때, 친밀성은 노동 착취, 괴롭힘을 조장하고 은폐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Ehrenreich et al, 2004). 결국 이 친밀감은 성희롱이 쉬이 발생하게 하고, 돌봄 노동자가 성희롱에 대한 거부 의사를 드러내기 어렵게 하고, 성희롱 거부의사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서비스 이용자에게 수용이 안 되고, 성희롱 문제를 외부적으로 가시화시키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집의 폐쇄성으로 성희롱이 내재된 작업공간으로 탈바꿈

집이라고 하는 사적공간은 친밀함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폐쇄성을 가진 공간이다. 사적 공간이 주는 폐쇄성은 서비스 이용자가 돌봄 노동자에게 성희롱을 해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과감하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다. 돌봄 서비스 이용자는 자신의 사적 공간인 집의 폐쇄성이라는 공간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돌보러 오는 돌봄 노동자를 직업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대상인 ‘여자’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남성 돌봄 서비스 이용자들은 돌봄 노동자에게 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서비스 이용자에게 성과 관련한 이야기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돌봄 노동자에게 드러내는 일련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성과 관련한 언어적 성희롱은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단순히 성적인 이야기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성희롱으로 나아간다. 서비스 이용자가 돌봄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성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해오기도 한다. 

 

성희롱 사례 가운데 서비스 이용자가 돈을 주고 모텔에 가자고 요구한 경우도 있다. 사적 공간인 집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 그 곳에 자신을 돌보러 오는 돌봄 노동자. 서비스 이용자에게 돌봄 노동자는 ‘직업인’이 아니라 ‘여자’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돌봄 노동자를 ‘여자’로 인식하는 것은 서비스 이용자만이 아니다. 서비스 이용자인 여성 노인을 돌보러 갔지만 같이 사는 남편으로부터 성희롱을 겪은 사례도 있다. 그리고 가족 외에도 서비스 이용자의 주변인에 의해 성희롱을 겪는 사례도 있다. 한 사례는 주변에서 자신을 ‘안방마님’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처럼 집이라는 사적 공간이 갖는 특성은 여성 노동자를 온전한 노동자가 아닌 성적인 대상인 여자로 인식하게 할 뿐 아니라 서비스 이용자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하고 있다. ‘집’ 이라는 공간의 폐쇄성은 돌봄 노동자에게는 성희롱이 내재된 작업 장소일 수밖에 없다. 

 

성희롱 비가시화의 중층적 구조: 돌봄노동자-기관담당자-기관-기초자치단체

성희롱이 문제로 인식되고 해결되기까지는 ‘돌봄 노동자-기관 담당자-기관-기초자치단체’라는 중층의 4단계를 거친다. 첫째, 돌봄 노동자가 성희롱이라고 인식하고 문제제기하는 단계. 둘째, 기관의 담당자가 성희롱으로 인식하는 단계. 셋째, 기관이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대응하는 단계. 넷째, 해당 기초자치단체(국민건강보험공단)가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조치를 용인하는 단계. 이처럼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 문제가 가시화되어 해결되기까지는 최소한 4단계를 걸친다. 

 

많은 돌봄 노동자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성희롱을 성희롱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돌봄 일을 하다보면 겪을 수밖에 없는 직업적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성희롱이 발생하지 않도록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즉 원인제공을 하지 않아야 하고 작은 것은 적당히 넘길 줄 알아야 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돌봄 노동자가 성희롱을 겪지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여기며 문제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은 성희롱 문제를 가시화시켜내지 못하고 있다.

 

돌봄 노동자가 성희롱이 심각하다고 생각해서 기관에 알리면 기관은 해당 관리자와 기관의 태도에 따라서 성희롱이라고 인식하고 대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돌봄 노동자는 성희롱 문제제기를 했다가 수용되지 않는 경우 기관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러한 경험은 돌봄 노동자들 사이에 소문으로 돌고 돌아 아무도 쉽사리 성희롱 문제를 얘기하지 않게 된다. 결국 그 기관은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 문제를 포착해내지 못하고 비가시화 시키는데 일조 하게 된다.

 

기관이 성희롱 문제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더라도 상위기관에서 성희롱을 인정하고 조치를 수용해야만 한다. 성희롱 문제가 발생하면 돌봄 노동자가 기관 담당자에게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담당자는 성희롱 사건을 조사한 후 기초자치단체에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경고조치하거나 서비스 종료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 바로 기초자치단체가 성희롱 사건에 대한 최종 조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기관이 성희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데는 기관의 대응이 상위기관(지자체 등)에서 수용되지 않기도 할 뿐 아니라 해당 건과 관련한 서류제출로 인한 업무 부담과 민원제기로 인한 어려움에 처하기 때문이다. 성희롱과 관련해 기관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경고, 서비스 중지뿐으로 성희롱 행위자의 성희롱 행위를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성희롱 행위자가 다른 기관으로 서비스를 옮겨버리면 성희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제 2, 제 3의 피해자를 양산한다. 따라서 기관 뿐 아니라 돌봄 사업을 총 기획하고 관리하는 지자체(국민건강보험공단) 및 보건복지부에서 이에 대해 인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해야 한다. 

 

개선방안

많은 돌봄 노동자들은 자신의 성희롱 피해를 적당히 참고 넘길 줄 아는 노하우로 이해하고 성희롱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참고 견뎌가면서 일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돌봄 노동자의 성희롱 피해 최소화를 위한 정책과 함께 법·제도적인 부문에서의 돌봄 노동자의 특수성이 고려된 성희롱 문제 해결책이다. 

 

첫째, 돌봄 서비스 대상자의 특성을 고려한 고객에 의한 성희롱 방지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상의 고객에 의한 성희롱은 일반 서비스업의 고객의 불특정성, 고객의 이동성, 사업의 특성(고객=소비자)을 고려해 고객에 대한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돌봄 영역의 고객은 그 대상이 명확하고, 일정 고객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한다는 특성상 고객에 대한 규제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희롱 행위자인 고객을 규제할 수 있는 법적 규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예방차원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이 실효성 있게 이뤄져야 한다. 현재 고객에 의한 성희롱 방지를 위한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 고객은 그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돌봄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고객인 서비스 이용자들이 사적 공간인 각각의 집에 분산되어 있는데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많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 놓고 교육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돌봄 서비스 이용자의 특성을 고려한 서비스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교육에 대한 방안 모색이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돌봄 서비스 사업주체들이 성희롱 피해를 예방하고 성희롱 피해발생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참고

 

중앙정부 및 지자체(국민건강보험공단) 성희롱 대응 방안

 

1. 지침에 명시

중앙정부의 지침은 하부 사업수행기관인 지자체나 요양기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들 기관은 지침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봄 서비스 노동자의 성희롱 방지를 지침화해 모든 지자체와 요양기관이 성희롱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아래 2, 3, 4, 5의 내용을 지침에 명시한다. 

2. 서비스 제공자인 돌봄 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및 예방교육 강화-요양보호사 교육과정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포함

3.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4. 각 기관이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성희롱 발생 시 처리절차와 조치 기준, 피해 근로자의 고충상담 및 구제 절차’를 체계화시키도록 명시

5. 성희롱 문제 발생 시 문제해결 전까지 타 기관에서 서비스할 수 없도록 명시

 

돌봄 서비스 기관의 성희롱 대응 방안

 

1. 서비스 제공자인 돌봄 노동자, 담당자를 비롯한 기관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및 예방교육을 강화한다. 

2. 각 기관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성희롱 발생 시 처리절차와 조치 기준, 피해 근로자의 고충상담 및 구제 절차’를 체계화 한다. 

3. 이용자와 서비스 계약 시 성희롱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4. 기관은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즉각 대응하여 행위자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한다. 

 

 


1) 본 글에서 주요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돌봄 노동자는 재가 서비스 요양보호사로 이들은 각 가정에 파견되어 서비스 이용자들에게 간병, 가사업무, 신체수발, 정서적 지원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2) 돌봄 노동자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글을 구성하였습니다. 

 
일, 2018/04/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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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 ‘미투 운동’의 사회적 의미1

 

 

이나영 |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새로운 페미니즘은 사회적 평등을 위한 진지한 정치운동의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계급-카스트 제도를 뒤집어 업는 것”을 목적으로 한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두 번째 물결”(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72,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미투(#MeToo)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파도를 타고 있다.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1월 29일 JTBC 뉴스룸 시간에 나와 검찰 내 성폭력 피해를 밝힌 이후, 여성들의 피해 사실 폭로는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정치계 등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당시 인터뷰 자리에서 서 검사는 왜 이런 폭로를 하게 됐는지 이유를 밝히면서, 성폭력 관련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가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근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무엇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 사회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 고위직 검사마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고, 이에 문제제기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한국사회 전반을 아래로부터 흔들었다. 그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돌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돌고 있는 것인지” 몰라 “꾹꾹 삼키고 또 삼켜냈던” 경험들이 오랫동안 억눌렸던 여성들의 기억을 세상으로 끄집어내는데 기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음모론과 진영논리에 빠져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평소의 행실을 따져 물으며 피해자의 자격을 운운한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그간 저지른 수많은 가해 행위들을 성찰하기는커녕 성폭력을 ‘성도착증’으로 병리화하거나 특정 개인을 악마화하며, ‘터치는 있었으되 성폭력은 없었다’며,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희희낙락 정쟁에 활용하기 바쁘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며 사안의 본질인 성별 권력관계와 성차별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을 ‘페미나치(페미니스트 나치의 줄임말)’로 몰아 낙인화하기도 한다. ‘여자들이 문제’니 분리하고 배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문제는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운동을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필자가 가장 많이 받았던 몇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운동의 ‘잠정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단순히 ‘개별적 감정의 분출’ 정도로 ‘오해,’ 또는 축소하고 역사적 흐름을 역행하려는 시도가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성평등 결핍된’ 민주주의와 ‘미투 혁명’

“의원실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여성을 일종의 ‘소모품’이나 ‘꽃’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ㄱ씨는 “어떤 의원실에 예쁜 비서가 들어왔다고 하면 금세 소문이 나고 몇 달 있으면 ‘내가 OO랑 잤는데 말이야…’ 식의 ‘무용담(?)이 돈다”면서 “정작 그 여성 앞에서는 정중한 척, 예의바른 척 행동하면서 온갖 성희롱·성추문이 일어난다”고 했다. 현재 국회를 떠나 사기업에서 근무 중인 ㄴ씨는 “의원님이 수행비서도 아닌 여비서를 자꾸 업무에 대동하는 일이 있었다”면서 “몇 달 뒤 그 비서가 그만뒀는데 의원실 사람들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그 의원님은 요즘 밤잠을 못 주무셨을 것”이라고 했다“(국회 대나무 숲, 경향신문, 2018년 3월 10일).2) 

 

우선, 현재의 ‘미투 운동’이 ‘남녀관계,’ 혹은 개인 간 발생하는 성희롱과 무관한 ‘권력형,’ 혹은 ‘갑질’ 성폭력의 문제일까? 그저 ‘나쁜 손버릇’, ‘자제하지 못한 성욕’, 개인의 ‘비도덕적 행위’, ‘성추문’, 혹은 특정 조직의 ‘특수문제’일까? 남성지배사회에서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성별(gender)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장하고 있다. 단순히 동등하되 이분법적으로 나뉜 남성성과 여성성, ‘적절히’ 배분된 역할이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생성하는 원인이다. 남성(성)만 인간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성)은 열등한 것, 부차적인 것, 성적인 것, 심지어 ‘낮은 사회적 지위’ 자체를 의미한다. 중학교 남학생이 여성 교사를, 남성 환자가 여성 의사를 성희롱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그 남성과 여성은 성별 질서뿐 아니라,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한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다.3) 그러므로 성폭력은 기본적으로 성별권력 관계에서 파생하지만, 다른 차별구조와 교차해 더 심화되거나 약화되기도 한다. ‘성폭력은 구조적 성차별의 문제’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조직 및 집단 간 차이와 특수성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둘째, 한국의 ‘미투 운동’이 헐리우드 발 #MeToo 운동의 후속, 아류, 혹은 변종일까? 그렇지 않다. 길게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부터 진행된 동등권운동, 반식민지독립운동,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본격화된 진보여성운동 단체들의 형성과 반성폭력운동, 여성인권운동, 2000년을 전후로 진보운동권 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100인 위원회’, 더 최근에는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2015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성폭력 필리버스터,’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여성운동의 오랜 역사를 먼저 봐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운동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던 차별구조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 이번 ‘미투 운동’을 맥락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성시민들은 오랫동안 기득권, 반민주, 독재, 부패 세력, 식민지 ‘백성 마인드’를 갇힌 ‘보수 세력’에 저항해 왔으며, 계급부정의 이외에 다른 영역에 무감한 ‘진보 세력’들과도 쟁투해 왔다. 진영을 넘나들며 형성한 남성연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전진해 왔다. 서구의 여성운동에서 ‘물결’(WAVE)이라는 용어가 파장, 파동, 물결, 파도의 다중적 의미를 지니듯, 한국의 경우도 잠복과 돌출, 후퇴와 전진, 흩어짐과 뭉침, 진지전과 전면전 등을 통해 파장을 일으키고 커다란 파도를 만들며 세상을 변화시켜 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여성들에 의해 주도 되었으되 세계를 흔든 ‘미투 운동’의 원조로 일본군 성노예제로 고통당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을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했던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던 끔찍한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 다투어 세상에 나왔다.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하던 할머니들의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의식은 또 얼마나 많이 성장했던가. 미국의 #MeToo 운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이번 ‘미투 운동’의 도화선 혹은 변곡점은 될 수는 있으되 원인이 아닌 이유이다. 

 

셋째, ‘진보진영’ 내에서 유독 사건화가 많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수진영이 더 ‘도덕적’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서구 여성운동 ‘제2의 물결’을 상기하면 답이 나옵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진보적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영역에 있던 여성들은 남성혁명가들이 지향하던 민주, 평등, 해방이라는 가치가 여성들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달라고 호소하는 바로 그 순간 부인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일상 속에서 개인이 겪는 사적인 문제가 거대한 구조에 기인한다는 신좌파의 구호가 여성들에게만 유독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진보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했던 ‘성혁명’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취약한 상황으로 내모는 상황에 분노했다.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쓰레기통’, 혹은 언제든 받아주는 ‘용기’로 취급하면서, 공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보조적인 존재로 비하하고 배제하는 남성들의 태도에 격분한 것이다. 여성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식고양 모임을 구성하고 여성만의 조직을 만들며 ‘여성문제’라 치부되던 사안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그래서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개별적 문제가 결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 때문이 아니며, 여성들의 고통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과이기 때문에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해방의 주체와 대상 모두에 여성이 빠져 있다는 인식, 민주주의, 평등, 인권이라는 가치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다는 인식이 여성들을 페미니스트로 각성시킨 것이다. 이들은 동등참여,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물론,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데이트 성폭력, 음란물, 성상품화 등을 공론화하고 이론화하며 변혁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단순히 기계적 ‘양성평등’이나 형식적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를 해체하고자 전 방위적 혁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보 운동권 내 성차별과 성폭력 문화가 결국 서구 역사상, 아니 전 세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대한 페미니스트 운동의 물결을 결과한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고발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 자명하다. 그들은 진보적 가치 자체를 체화하고 실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차별에 무감함은 물론, 성평등 감수성를 장착한 여성들이 애초에 진입하기 어려운 토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미투 운동’은 그래서 감히 ‘미투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주로 진보진영의 여성들, 페미니스트로 각성한 여성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은 아마도 한 세기 이상 진행된 한국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해일이 될 것이다. 지난 대선 시기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구호인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를 상기하면 2018년 ‘미투 운동’은 성평등이 결핍된 ‘민주주의’를 완성하고자 하기에 ‘제2의 민주화 운동’이며, 구체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래로부터 분연히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넷째, 여성들의 ‘폭로’는 왜 지속될까? 왜 개별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을까? 물론 처벌은커녕 지속적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지금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 심지어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며 사회적 타살을 감행한 남성들에 대해 쌓였던 개별적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피해자의 말에 귀기울기는커녕 가해자를 두둔하고 2차 가해를 일삼던 우리 모두에 대해, 구멍 난 법과 제도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일제히 공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믿을 구석이라곤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지밖에 없기에,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상호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너무 어려서”, “뭔지 몰라서”,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소문이 두려워” 잊고자 했던, 그 봉인된 기억과 마주하고 재해석하고, “치유된 줄[만] 알았던” 상처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치유하는 중이기도 하다. 서지현 검사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다독이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다른 이들의 상처도 다시 돌아보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의 생존자들처럼 말이다. “사랑합니다”, “응원합니다”, “지지합니다”, “힘내세요” 등 피해자들 옆에, 뒤에 함께 서서 그저 응원하고 손잡겠다는 메시지는, “나도 같은 여자다” 라는 선언과 연결되며, “가슴이 터질” 듯, 그래서 “한잠도 자지 못하고,” “눈물이 흐르는” 감정으로 공유된다. 

 

‘근근이’ 살아남은 자들 간 형성된 이 공감대는 희생되고 사라져 간 자들의 ‘이유’를 묻는 행위로 연결된다. 이 심문의 과정은 “너무 어려서” “그게 뭔지 몰라서” “내 잘못인 줄 알아서”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소문이 두려워” 묻어 두었던 개인의 경험과 필연적으로 만난다. 잊고자 했던 그 “봉인된” 기억 속으로 자맥질하다 보면, “치유된 줄[만] 알았던” 상처 내면에 깊이 잠복해 있던 두려움에 대한 예기치 못한 돌출을 경험하게 된다. 끔찍한 피해를 당해도 그 피해 사실을 누가 알까 두렵고, 뒷담화의 먹잇감이 될까 두렵고, ‘잘못 찍혀 조직을 떠날까,’ 사회적 경력을 포기할까 두렵고, 세월이 지나 ‘그 세계를 떠난 후’에도 가해자를 다시 만날까 무섭고, (또) 찾아올지 몰라 두렵고, 보복할지 몰라 밤길을 되돌아보고, 발신인 없는 전화에 심장이 덜컹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던 수많은 날들을 떠올리면, 그 공포는 기실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 늦은 밤길을 지날 때,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탈 때, 새로 사귄 애인과 함께 있을 때, 술자리에서, 혹은 남성지배적 조직에서 ‘여전히’ 느끼는 일상의 불안 또한 과거의 그 감각과 ‘몸서리치게’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오는 이 감정들은 기억의 퇴적층에 켜켜이 쌓여 있던 여성 공통의 억압된 경험들의 집단 아우성이다. 더 나아가, 그때 말하지 못한 나, 중단시키지 못한 나, 사과를 요구하지 못한 나, 다른 이들이 고통을 당할 때 선 듯 손 내밀지 못한 나, 외면한 나, 듣지 않은 나. 우리 모두는 사건을 묵인하고 방조하고 동조한 자이자, 가해자이며, 시스템에 순응한 자이자, 종내는 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한 책임을 진 자라는 죄책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공식/비공식적으로 피해자를 응원하고 자신의 피해의 경험을 들여다보며 쓰다듬는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반성문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민기씨 등의 자살로 반동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지 않나? 지금 사태의 책임은 모두 남성들에게 있다. 한 도지사의 성폭력이 왜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는지 잘 생각해 보자. 그가 평소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을 뿐 아니라, 통상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일성인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아래로부터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환자’ 혹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자로 키워진 모든 사람들이 가해행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우리 모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남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불같이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수직적 위계문화 속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제압하고 군림해야만 남자답다고 여기는 사고, 폭력적 남성성을 획득하고 실행하던 수많은 남성들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성폭력은 여성문제가 아니다. 성차별적 구조를 만들고 누리고 공기처럼 혜택을 마시고 재생산해 온 남성들의 문제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시민의식이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에 사로잡혀 여성을 동등한 시민, 동지, 동료로 보지 않았던, 그래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스러움과 성적 매력을 풍겨야 하고 남성들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여기며, 배제하고 비하하고 희롱하고 무시하고 때리고 성폭력을 행사했던 남성들의 문제다. 

 

그러므로 폭력의 제3자이자 동조자, 묵인자, 방관자인 우리는, 이번 기회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가해 경험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일생을 통해 축적된 가해자성을 성찰하는 일은 구조적 부정의의 (재)생산 회로를 끊기 위한 실질적 노력과 연결되어야 한다. 의료, 보건, 안전, 교육, 과학 체계 등 모든 지식에서 인간의 모델일 남성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이 남성에 의해 장악되어 왔고, 남성들의 이익에 영합해 왔으며, 이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도구였음을 인지하고 계속 드러내야 한다. ‘여성문제’가 아니라 ‘남성문제’라는 새로운 명명작업을 통해 프레임을 전환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 음란물, 디지털 성폭력 등 전방위적으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그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은 24시간 남성을 지배하는 의식과 무의식이 전면적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변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지닌 이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성별 간 극심한 인식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 ‘미투 운동’을 사회변화를 위한 계기로 승화시키기 위해, 스스로가 일상에서 자행한 일들을 차분히 성찰해야 한다. 법과 제도의 변화는 전제 조건일 뿐이다. 미세한 세포조직처럼 곳곳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성차별적 의식과 구조-우리 사회의 가장 오랜 적폐-를 개혁하는데 나부터 적극 동참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촛불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여성들은 그간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거나, 무지함으로 ‘면피’하려 하거나, 심지어 ‘물타기’ 등 진영논리로 끌고 가려했던 모든 이들의 갖은 시도를 돌파하면서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나서고 있다. 피해자의 자격을 묻던 이들에게 가해자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아픔을 헤집고 직시하며 생을 걸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면화함으로써 기존의 선/악,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을 넘어, 민주주의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직시하자고 주문하고 있다. 여성은 아직도 인간이 아니며, 대한민국은 ‘아직도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고 절규하고 있다. 촛불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녀이거나 여왕이거나 유명한 남성의 적극적 내조자이거나 총애 받는 애첩이거나 기생이거나, 사회면을 장식할 만큼 유명한 범죄극의 주인공이 아니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시절, 미친 여자, 괴물, 마녀, 더러운 **, ‘개혁망상증에 걸린 정신착란’, ‘신경증 환자’, ‘혁명 히스테리 환자’, ‘정신 나간 주정뱅이’ 등 각종 조롱과 모욕과 손가락질과 공격에도 ‘여성도 인간’이라고 외쳤던 몇몇 여성들의 이야기와 사후 반동의 역사를 잠깐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올랭프 드 구즈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 말해 보라. 내 성(性)을 억압할 권한을 누가 그대에게 주었는가? 그대의 힘인가? 그대의 재능인가? …

모든 여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여성의 권리 선언』 중 (1791)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나는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 한다…여성이 인간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 소원…

『여권의 옹호』 중 (1792)

 

나혜석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 (1934)

 

여자들의 가장 큰 영예는 조용히 겸손의 베일을 쓰고 은거지의 그늘에서 그들 성별의 덕성을 가꾸는 데 있다. 남자들에게 길을 가리키는 건 여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자코뱅 당원들의 반발, 브누아트 그루, 2014: 71).4)

 

저 남자 같은 여자, 여자 남자, 살림은 버려두고 정치를 하려 했고 범죄를 저지를 무분별한 올랭프 드 구즈를 떠올려 보시오. 자기 성별의 미덕을 망각한 것이 그녀를 처형대로 이끌었습니다(쇼메트 검사, 브누아트 그루, 2014: 87-88). 

 

‘남성’들의 시대는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여자가 열등하고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몸뚱이’에 불과한 도구적 존재로 비하하고 조롱하고 공격하고 권리를 박탈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대여성집단사기사건’은 끝장을 보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보다 정의롭게 바꾸기 위해 일어서고 연대할 것이다. 과거를 식민화하고 현재를 착취하며 미래마저 약탈하고 있는 오랜 남성 연대의 해체를 위해, 그래서 다음 세대의 ‘우리’들이 조금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이제 당신이 응답할 차례이다. 봉건적 사고로 케케묵은 남성성의 옷을 벗지 못해 우리 사회전반을 다시 퇴행시킬 장본인이 될 것인가, 보다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인가. 

 


1) 이 글의 내용은 필자의 칼럼들과 최근 있었던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글의 일부와 겹침을 밝힌다. 참고: “#MeToo 운동 긴급 토론회”(한국여성단체연합, 2018년 2월 26일); “이제 남성이 변해야 한다”(정동칼럼, 경향신문, 2018년 2월 5일); “‘미투 운동,’ 거대한 사회변혁의 파도”(정동칼럼, 경향신문, 2018년 3월 5일); “미투는 제2의 민주화 운동”(시론, 중앙일보, 2018년 3월 10일); “미투운동의 사회적 의미와 과제”(미투운동의 사회적 의미와 과제, 국회 토론회, 2018년 3월 14일).

2) “‘의원님은 딸 앞에서도 바지내리시나요’, 정치권으로 간 미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01113001…

3) 가령, 수직적이고 폐쇄적이며 남성이 지배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에서 비정규직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손쉽게 일어나고, 성폭력 문화가 더 심각할 수 있다. 백인 이성애 남성 중심의 조직일수록 성소수자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하고, 이들에 대한 성폭력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4) 브누아트 그루 저, 2014.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서울: 마음산책. 
 
일, 2018/04/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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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김형용 | 월간 복지동향 편집위원장 /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미투(#MeToo)운동이 불편하다. 작년 이후 민주주의의 해방적 잠재력에 취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우리사회의 근원적 폭력성을 너무 가벼이 인식하고 있었다. 위드유(#WithYou)로 피해자들에게 성원과 지지를 보낸다는 행위는 더욱 불편하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우리는 모두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이거나 가해자 또는 묵인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당사자가 아닌 듯이 지지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편집인으로서 이번 호에 실린 이나영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사실상 내가 속해 있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일생을 통해 축적된 가해자성’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공식적인 모임에 이르기까지 성차별의 구조는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었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남성우월적 지위가 녹여있지 않았다고 확언하기 힘들다. 나만의 사적 공간에서라도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옆의 여성은 그동안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의 구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나 정도면 괜찮은 남편 아냐?’라는 말은 오히려 성별 권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미투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다. 남성이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구조에서 여성은 항상 주체보다 객체의 위치에 있었고, 그 위치란 부차적인, 중요치 않은, 또는 미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미투도 위드유가 아니다. 남성지배사회가 전복되기 위해서는 미시적 생활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는 부정의와 특권이 남성들의 성찰과 고백-아이디드(#IDid)-으로 병행되어야 하고, 체계 내의 제도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 지속되지 않도록 전반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번 복지동향은 미투운동의 사회적 의미를 검토한 이나영 교수, 돌봄서비스 여성노동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를 제시한 김양지영 연구위원, 사회복지계의 여성의 유리천장과 남성지배적 문화를 비판한 곽효정 부장, 미투조차 어려운 시설거주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실태조사라도 어서 빨리 실시하자는 양혜정 사회복지사의 글을 함께 담았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자. 그리고 야만에서 빠져나오자.

일, 2018/04/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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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참여연대는 4월 7일 토요일에 홍대앞에서 열린 성차별성희록끝장집회에 참가했습니다.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 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집회, 그 세상을 만들러 함께했습니다. 이번 집회 후기는 성평등분과에서 활동하는 김연 님이 써주셨습니다:)

 

YC20180407_미투집회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다. 봄이 찾아오나 싶었더니 꽃샘추위가 강타한 서울은 집회를 하기에는 너무 시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발걸음을 옮긴 홍대입구 역도 추운 날씨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쉴 걸 그랬나, 집회는 앞으로도 또 있을 텐데, 여러 핑계들이 내 발목을 붙잡아 왔다. 여섯 시가 조금 안되어 도착한 집회 현장은 내가 여태까지 가 본 곳들 중 가장 협소했다. 사람들도 적고, 준비도 어설퍼 보였다.

 

이런저런 불만들이 쌓여 가던 중, 자유발언대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발언이겠거니 싶었다.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앰프 소리도 너무 컸다. 설렁설렁 들어야지, 하던 내게 발언자의 목소리가 꽂혀 들어온 건 순간이었다. 그 짧은 찰나 나는 그의 목소리가 눈에 보인다고 느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때조차 수없이 많은 것들을 참아내야만 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나는 그가 되어 있었다. 감히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싶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 순간 완전히 그였다. 우리 모두는 그 순간 그였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모두가 당했던 폭력이었다. 내가,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또 어떨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참아왔던 폭력들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알렸다. 이것이 폭력이라고. 아프다고. 하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치고 말 것이라고.

 

YC20180407_미투집회

 

행진 때는 사람 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자유발언에서 느낀 감정들을 어떻게든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팔이 아파도 계속 플래카드를 높이 들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우리를 보고, 가리키고, 또 촬영했다. 그들이 어떤 의미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건, 그들 속의 단 한 명이라도 우리를 보고 연대의 희망을 얻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최근 일부러 뉴스를 피하고,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혼자만의 ‘힐링’을 해왔다. 어쩌면 나는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힘들게, 너무나도 어렵게 목소리를 내 준 이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모른 체 하면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미투라는 거대한 물살이 밀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금세 피로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집회에 나가 있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과거의 내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그런 외면은 결국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싶다. 다시는 외면하지 않겠다. 끝까지 손을 꽉 잡고, 연대하겠다. 우리는 우리를 낫게 할 것이다.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YC20180407_미투집회

 

화, 2018/04/1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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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평화복지연대는 22일 "인천시는 여직원 성추행 은폐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명하라"고 촉구했다. 단체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인천시 4급 공무원이 해외출장에 동행한 여직원을 성추행하고, 재임용을 내세워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며 이와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 관련 뉴스 >

 

# 뉴스1 : '인천시 성추행 은폐사건'…시민단체, 공식 해명 요구 http://news1.kr/articles/?3296939

 

# 인천in : 인천시 간부공무원 성추행 뒤늦게 알려져 파장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43257&m_no=1&sec=4

 

# 미디어인천신문 : 인천평화복지연대 '인천시 간부공무원 성추행 사건 은폐' 대책마련 촉구

http://www.mediai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02

 

# 연학뉴스 : "인천시, 간부공무원 성추행 은폐"…시민단체 해명 촉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22/0200000000AKR20180422045100065.HTML?input=1179m

 

# 경향신문 : 인천시 간부공무원 재임용 앞둔 여직원 해외출장서 성추행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21714011&code=940202

 

# OBS뉴스 : "인천시, 간부공무원 성추행 은폐"…해명 촉구 http://www.ob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2965

 

# 기호일보 : 인천평복 "여직원 성추행 논란 입막음 시 간부공무원 직무 유기 책임 물을 것"

http://www.kihoilbo.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747638

 

월, 2018/04/2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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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지난 여성운동의 맥락, 방식, 지향과 미투운동은 어떻게 닿아있을까요?

 

미투에 대한 편견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성폭력 없는 사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2018 청년참여연대 상반기 회원배움터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오매님을 모시고 '미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성운동의 흐름 속에서 미투운동 바라보기'를 주제로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유뷰브에서 영상보기 : https://youtu.be/lF_r-VtpIws

* 참여연대 유튜브 채널 : https://goo.gl/L52MGb

 

사진을 클릭하면 유뷰트 영상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여성운동의 역사 그리고 미투운동. 청년참여연대 회원배움터 '미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금, 2018/05/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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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영웅 너마저 ‘미투’를 외치고 있다. 그녀가 올림픽 스타이기 때문에 더 놀라는 것이 싫지만 스타마저도 당한다면 나머지는 오죽하랴라는 생각을 끌어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용기가 더 값지게 다가온다. 그녀가 스타의 신화와 눈부심으로 가려진 장막을 젖히고 민낯을 보여준 용기에 더 부끄럽다. 무대 전면만 보고 환호해 온 어른으로서 하루 이틀도 아닌 장기간의 ‘폭력’을 방치해 왔다는 공범 같은 느낌이 든다.

‘미투’와 ‘갑질’의 사례가 봇물 터지듯이 등장한다. ‘미투’를 외치는 비명은 ‘갑질’을 폭로하는 저항의 용기와 일맥상통한다. 한 끗발만 더 유리한 고지에 있어도 상대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은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행했다는 근대사회의 논리가 허구인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왜 ‘미투’와 ‘갑질’을 함께 다루는 지 의아할지 모른다. ‘미투’의 문제를 성 대결의 특수성으로 잘 못 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갑질’과 함께 다룬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지체가 응어리지고 곪아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건이 오랜 동안 잠복되어 왔던 사건들이다. 수면아래 잠자던 또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 봉인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어 준 작은 영웅들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내 아이를 위한 보호막을 일류학교 졸업장과 ‘갑질’할 수 있는 지위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 왔다. 모든 사회문제에 눈을 감고 질주하라고 부추겨 온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이 도처에서 마주치는 ‘갑질’의 폭력을 눈을 감고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갑을’관계는 모든 거래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설사 특정 상황에서는 갑이라고 해도 언제든 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갑질은 누군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사회문제’이다. ‘미투’와 ‘갑질’의 문제가 소송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연대’와 사회적 합의 그리고 공론의 구성이 필요하다. 법정에서의 사실의 다툼은 가치 판단을 해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더 많은 폭로와 ‘함께’를 외치는 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단 확인 시켜주는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사막을 혼자 걷는 것과 누구라도 함께 걷는 것을 비교해 보면 ‘함께’가 주는 위안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예견된 일이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유보해도 좋다는 사회적 묵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권위주의 정권을 용인해야 한다는 담론이 오랫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담론이 공론은 아니다. 냉전 속에 ‘열전’을 치르면서 ‘사회’ 또는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금기로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성장 중심의 담론은 정치발전의 과제를 미루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민주정권 통치 기간에도 정치 발전의 성패는 경제발전에 의해 재단되는 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다. 정치발전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정치발전의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발전은 이익집단의 무한 경쟁, 정치적 대표성의 이름으로 다당제에 대한 예찬 등으로 이해되는 중이다. 민주화가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 시장의 자유로 해석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정책 결정의 공공성 구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당 이름이 변화무쌍 하여 정당의 정체성과 당명을 일치 시키는 것도 어렵다. 당원자격이 주어지는 방식, 당원과 선출직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정당 투표를 강화하려는 주장이 정치적 올바름인 양 제시되고 있다.

정치발전이 장기적인 집합적 저항을 통해 틀을 갖추어가는 반면 사회 발전의 과제는 ‘ 전통의 미화라는 가면으로 위장 되어 수면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법인의 성격을 띠는 회사가 주인 노예의 관계의 관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학교에서는 근대적 가치를 가르치고 헌법에서도 기본인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관계는 봉건제 이전의 노예제적 성격을 지닌다. 이 불균형 속에 발랄한 21세기의 미래 세대가 갇혀 있다. 그들의 단말마적인 외침을 외면한다면 미래는 없다. 사회발전을 기초로 정치 발전과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서구 근대사와는 반대로 선 경제 발전 정치발전 그리고 장기간 유보된 사회발전이라는 기형적 구조 속에서 터진 아우성이 바로 ‘미투’와 ‘갑질’의 폭로로 드러나고 있다.

이 폭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가운데 이 외침은 지속적이었고 그 울림은 새로운 규범을 지구촌 차원에서 만들어 낸지 오래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수요 집회가 이제 26년을 넘겼다. 한주도 거르지 않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어진 전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사죄요구는 국경을 넘었고 지구촌의 규범을 만들어 내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가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반인권적 전쟁 범죄로 규정된 것이 2000년이다. 2000년 10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325를 채택하였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이 평화프로세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지구촌은 21세기를 맞아하였다. 성폭력피해자가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지구촌의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은 ‘살아남은’ 할머니 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할머니들은 소녀가 되어 갔다. 할머니가 ‘소녀상’으로 바뀌면서 성폭력 피해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은 입장에서는 소녀상을 치울 수 있는 물건으로 보았고 소녀상을 세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역사였다. 어느 해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온 날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천막을 치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시대의 과제를 그 때 그 때 해결하지 못하고 미뤄온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 생생한 기억 속에 떨리는 듯한 미투의 외침이 겹쳐 들려온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 100년의 반성의 끝자락에서 폭로된 ‘미투’와 갑질은 100년 동안 미뤄온 사회발전의 지체된 과제를 이행하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외면하고 4차 산업의 화려한 어휘로 도피한다면 정말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는 없다.

화, 2019/02/0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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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1 style="text-align:justify;">우리는 여전히 "빵과 장미"가 필요하다</h1> <h2 style="text-align:justify;">세계여성의 날,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는 이유</h2>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이재정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해마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미국 뉴욕에서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여성에게 빵과 장미를"을 외쳤다. 여성에게도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절절한 외침은 전 세계의 연대로 이어졌고, 현재 세계 각 국에서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한국에서도 1920년대부터 엄혹한 현실과 가부장제라는 이중 억압 속에 고통 받는 여성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쳐 잠시 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1985년부터 진보적 여성인권단체들이 연대하여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87년부터 한국여성대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올해에도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를 슬로건으로 제35회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한다. </p> <a data-flickr-embed="true" href="https://www.flickr.com/photos/lipstickproject/32453893965/in/photolist-…; title="Women's March in Calgary"><img src="https://farm1.staticflickr.com/480/32453893965_49458c60a4_c.jpg&quot; width="800" height="534" alt="Women's March in Calgary"></a>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1908년 미국에서도, 1920년대 한국에서도 여성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거리에 나섰다. 남성 중심 사회는 '말하는' 여성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나와 내 주변의 여성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용감히 싸워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금 더 진보한 오늘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이 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2018년 수많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받는 여성의 현실을 고발했고, 직접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미투 운동은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드러냈고,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낙태죄'에 대한 폐지 청원을 20만 명 이상 모아냈으며, 관련 집회도 이어졌다. 여성의 일상을 파괴하는 디지털 성폭력과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올리는 웹하드 카르텔의 문제를 드러냈으며,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기 위해 30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은행권 채용 비리 사건처럼 고용 단계에서부터 성별임금격차까지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여성의 노동권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으며, 누구나 차별 받지 않고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여성들은 언제나 각자의 현실에 직면한 최전선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고뇌하여,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왔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여성들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국민주권분과 국민주권 2소분과에서 작성한 '20대 남성지지율 하락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은 각 영역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여실히 보여줬다. 해당 보고서에는 20대 여성을 "민주화 이후 개인주의, 페미니즘 등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집단 이기주의' 감성의 진보집단"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성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집단적 이기주의'로 왜곡하고 폄하하는 이들은 과연 광장에서의 뜨거운 절규를 듣기는 한 것인지 의심케 한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미투 집회에서의 외침 중에는 "우리는 여기 있다. 너를 위해 여기 있다"라는 구호가 있다. 너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공감하고, 더 이상 같은 문제가 반복되어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나의 일상을 바꾸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자 한 것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행동이었다. 이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바로 '연대'이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3월 8일, 우리는 또 다른 연대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미투 운동 이후 성평등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힘을 모아내는 '한국여성대회' 뿐만 아니라 일터의 성차별 문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전국노동자대회(오후 2시, 서울 파이낸스 빌딩 앞)'와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탑(오후 3시, 광화문광장)'도 개최된다. 또한 지난 해 총여학생회 폐지와 대학 내 여성혐오에 맞서 싸웠던 대학 페미니스트들의 '마녀 행진(오후 4시, 보신각)', '버닝썬 사건' 이후 드러나고 있는 클럽 내 성폭력/강간약물 실태를 규탄하는 '3.8페미 퍼레이드 "Burning, Warning"(오후 8시, 신사역 2번 출구)'도 진행될 예정이다. 경남,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전북,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3월 8일은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서로의 연대를 확인하는 날이 될 것이다. 여성들의 연대를 왜곡하고 폄하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뜨거운 연대로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요구한다. 우리의 목소리를 폄하하기 전에,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 이제는, 들으라고. 그리고 '변화'로 응답하라고. </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우리는 여전히 "빵과 장미"가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a href="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661&quot; rel="nofollow">클릭</a>)</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p> </blockquote></div>
금, 2019/03/0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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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여성들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다

국제앰네스티, 세계여성의 날 맞아 한국의 서지현 등

6개 국가의 여성인권옹호자 조명

국제앰네스티는 세계 여성의 날인 오늘 <분노한 여성이 만드는 강력한 변화> 라는 캠페인을 시작하며 여성인권옹호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널리 알리고 전 세계 사람들과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그 첫 시작으로 한국 검찰 내 성폭력 문제를 처음으로 폭로한 서지현 검사의 이야기를 전 세계와 공유한다. 서지현은 현실의 부조리를 참지 않은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과 행동이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국 내 미투(Metoo)운동이 확산되는데 기여 했으며, 수많은 여성에 영감을 주었고,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용기가 되었다. 서지현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공유됨으로써 그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는 인권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서지현은 국제앰네스티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열게 되었다. 진실까지 가는 길이 정말 멀고 험하다. 이제는 피해자에게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보호해줄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지 답해줄 때다.”

국제앰네스티는 한국의 서지현과 함께 총 6개국 여성인권옹호자의 사례를 집중 조명한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루자인 알 하스룰(Loujain al-Hathloul) : 여성의 운전금지법 폐지를 이끌었고, 여성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며 여성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여러 활동을 이끌었으나 현재 명확한 기소내용도 없이 구금 중이다.
  • 멕시코의 낸시 아리아스 아르테아가(Nancy Arias Arteaga)와 에스페란사 루시오토(Esperanza Lucciotto): 데이트 폭력으로 딸을 잃은 낸시와, 성추행 상사를 고발했다 직장에서 딸을 잃은 에스페란자 모두, 정의회복과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지만 오히려 위협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나이지리아 여성단체 <니파르 여성들(Knifar Women)>: 지역 주둔 군인들의 폭력과 괴롭힘, 성폭력의 생존자들이 연대한 단체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에 맞서며 새로운 인권서사를 만들고 있다.
  • 통가의 조이 졸린 마텔레(Joey Joleen Mataele): 통가에서 LGBT를 향한 편견과 맞서 싸우며 인권옹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폴란드의 용감한 여성 14인: 백인우월주의 주장과 혐오발언에 평화시위로 맞섰던 14명의 폴란드 여성인권옹호자는 시위 당시 혐오세력으로부터 물리적 폭력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나, 재판에서 오히려 집회방해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 등 위기에 처해있다.

전 세계 인권옹호자들은 국가의 탄압과 점점 좁아지는 시민사회활동이라는 두 가지 위협에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가 집중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여성인권옹호자는 여기에 더해 견고한 성고정관념과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사회적 차별과도 맞서 싸워야 해 한층 더 어려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경은 한국지부 사무처장은 “지난해는 전 세계 여성인권옹호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인권을 위해 분투했던 한 해” 라며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 혐오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인권 운동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올해는 여성인권옹호자와 함께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더욱 증폭시켜 모든 인권을 인정받기 위해 맞서 행동할 시기다”라고 밝혔다.

끝.

화, 2019/03/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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