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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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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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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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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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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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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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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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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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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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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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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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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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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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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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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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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정의와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경자(更子)년 새해 민족문제연구소 모든 회원 가족 그리고 남북 8천만 겨레에게 은총 충만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다른 해보다 더 힘들고 소란했습니다. 십인십색이니 서로 다르고 나아가 갈등도 생겨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글귀로 “시시비비위지지(是是非非謂之知)라 하고 비시시비위지우(非是是非謂之愚)”라. 즉 옳은 것을 옳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틀린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시시비비를 가르는 법률적 판단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 당국이, 일상의 삶에서는 정치가 잘 작동해 대안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고 통합하여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한 해는 법과 정치 모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저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반성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시시비비를 가르고 조정해야 할 법과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에 올해에는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 시시비비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설정해 진실과 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부유하고 오만한 재벌들, 전관으로 수억, 수십억을 받아드는 고위 공직자들, 반공과 거짓 자유를 기초로 역사와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때 서로 편을 가르고 적대했고 우리 겨레는 결국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경자년 새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고 남북 8천만 겨레가 한 어머니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구소 가족들과 연구소를 사랑하는 모든 은인, 동지들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1. 함세웅 이사장

화, 2020/01/2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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