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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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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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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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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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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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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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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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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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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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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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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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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문제 인식

박수현 사무처장 정리

 

일반 시민들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구소는 지난해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주요 결과를 <민족사랑> 경자년 새해 1월호 특집기사로 싣는다.
이 조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한국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시대정신에 맞는 공익적・미래지향적인 친일청산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친일청산 문제가 핵심이지만, 이슈가 되는 다른 과거사문제도 설문조사에 포함했다.
설문조사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조사방법은 웹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는 성별・연령별・지역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40여 항목이며,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크게 4가지다. (1)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2)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3)<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4)기타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등이다. 다음은 주제별 주요 설문결과와 분석 내용이다.

 

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시민 10명 중 8명, 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 가장 미흡한 분야는 정치, 경제, 교육 순

시민 대다수는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친일파 처벌은 물론 일제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답했다. 민주화 이후 친일청산운동이 꾸준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조차도 대다수 시민들은 체감하지 못했거나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친일청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친일청산이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한 분야(중복 허용)는 정치 75.8%, 경제 53.9%, 교육 47.4%, 언론 44.7%, 사법 43.7%, 군경찰 43.4% 순이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일파를 과거의 역사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 현실 정치와 연계해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주관식)에 ‘자유한국당・’ ‘아베’ ‘나경원’ 등의 답변이 높은 빈도수를 차지했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주관식)에 대해서도 ‘나경원’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의 정치인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시민 10명 중 7~8명,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 … 더욱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7명(72.2%)이 개인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로 평가했으며, 지금까지 친일파를 옹호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1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시민 10명 중 8명(82.7%)이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을 더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81.3%)이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도층 친일인물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더라도 친일행위를 했다면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6명(65.6%)으로, 서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친일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에 과반이 약간 넘는 사람만이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58.2%)을 보여, 다른 분야의 친일 지도층에 비해 비판의 강도가 낮았다. 이는 문화예술계 인물과 작품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효과와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친일인명사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조 …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지도층 인사의 수록은 적절.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젊은 층일수록 낮아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사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9.7%였지만,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78.8%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인지도는 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사전 평가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사전이 친일문제를 공론화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의견에 62.3%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에 62.1%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의견에 62.7%가 동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지도만으로 사전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전에 대한 사회적 평판,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김활란・이광수・최남선・장면・유치진・홍난파・현제명 등 유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그동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은 이들이 사전에 수록된데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층도 사전 수록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거나 찬반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는 사전 수록에 대한 보수층의 의견이 찬성 32.4%, 반대 50.1%, 모름 17.5%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반대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우상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이 조사 결과는 박정희 평판에 대한 보수층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시민 27.6%가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름만 들어봤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65.5%였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의 이념성향별 분포다. 진보층 40.4%, 보수층 25.5%, 중도층 22.1% 순으로 진보층이 가장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보수층은 중도층보다 연구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일수록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34.4%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33.1%, 40대가 26.6%, 30대가 25.8%, 그리고 19~29세가 13.8%로 가장 적었다. 특히 19~29세의 인지도는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소의 장기적인 활동 방향이나 전망과 관련해 반드시 참고 해야 할 내용이다.
연구소를 알게 된 계기 및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이어 친일인물 훈장 취소, 교과서 왜곡 및 국정화 반대운동, 친일인물 기념사업 반대 등의 순이었다.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과거사문제 해결이 사회통합과 발전에 도움.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아,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해야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도 설문조사를 했다. 우선 과거사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5.8%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상당수 시민들이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52.7%),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해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51%)이 그 다음이었다. 또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 왜곡(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64.1%)이 가장 많았으며, 친일 진상 규명(35.1%), 시민 홍보(29.3%), 역사교육 강화(26.3%)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서는 38.2%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11.1%만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나 뉴라이트의 영향력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시민 10명 중 7명(70%)은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처럼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과거사 왜곡과 폄하에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 2020/01/2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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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 개최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12월 13일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를 개최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두 번째 기념학술회의였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현상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진행하는 자리였다.


서경식 교수(일본 도쿄경제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과 리버럴 세력의 자기붕괴 내지 변질을 비판적으로 역설했고, 조경희 교수(성공회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과 핵심 아젠다를 짚었다. 이진일 교수(성균관대)는 독일의 홀로코스트부정과 같은 역사수정주의의 전개과정을 발표해 일본의 역사부정 현상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강성현 교수(성공회대)는 뉴라이트의 등장과 역사교과서 파행을 거쳐 ‘반일종족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의 역사부정 현상을 정리하고,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과 한국 뉴라이트의 연대를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표에 대해 권혁태 교수(성공회대), 이동기 교수(강릉원주대),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서대교 기자(코리안 폴리틱스)의 토론이 이어졌다.
또 하나의 논점은 역사수정주의, 역사부정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문제였다. 홍성수 교수(숙명여대)는 한국의 ‘역사부정죄’ 논의와 법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마에다 아키라 교수(일본 도쿄조형대)는 ‘헤이트 스피치(차별혐오발언)’에 대한 일본의 법적 제재 움직임을 발표했다. 토론은 이재승 교수(건국대)와 이상희 변호사(민변)가 맡았다. 역사부정죄 제정과 법적인 처벌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논의되는 자리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문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고민하는 발표도 있었다. 연구소 김승은 학예실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분석, 검토해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진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연구소 노기 카오리 연구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른바 ‘메이지산업유산’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지방 정부, 시민사회의 입장과 그 변모 양상을 정리했다. 토론에 나선 히구치 유이치 선생은 일본 내 강제동원피해자의 증언 수집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고, 야노 히데키 선생은 메이지산업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조사 연구하여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평일인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종일 이어진 학술회의임에도 많은 학자와 시민들이 참석했다.
‘반일종족주의’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한일공동심포지엄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에 부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화, 2020/01/2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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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서울시교육청 2019하반기 교원 특수직무연수 실시

연구소는 2020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전국 초·중등 교원을 대상으로 특수직무연수를 실시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과 상설전시관, 효창공원에서 진행한 직무연수에는 서울, 경기, 강원, 울산, 전북 등 전국의 초·중등교사와 교육연구사들이 참여하여 역사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직무연수는 왜 아직도 ‘친일청산’인가라는 주제로 박수현 사무처장 등 연구소 상근연구자와 한철호 동국대 교수 등 외부 전문강사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유형과 활동을 설명하고 최근의 뉴라이트의 공세로 뜨거워진 ‘기억투쟁’ 등을 분석하는 등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책임윤리와 정의에 대한 이해력과 감각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마지막 강의일인 10일에는 참가자와 진행요원, 내부 상근연구자가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친일문제와 역사교육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직무연수중인 교사 세 분이 신규로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주었다. 또한 연수 종료 직후 참가 교원들에게 연수이수증을 수여했는데, 연구소에서 발간한 <내일을 여는 역사> 76호와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도 함께 증정하였다.

이번 교원특수직무연수 진행은, 지난해 봄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자유시민대학> 캠퍼스로 지정되어 시민역사교육의 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데 이어 교원 특수직무연수기관으로 발돋움하여 앞으로 내실 있는 역사실천운동을 벌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1/21-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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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동지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 주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라는 부제의 이번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가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 5일 동안 진행됐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연구소 광동지부(지부장 김유, 사무국장 박호균)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과 조선인 혁명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일반적인 역사 답사의 경우 현지 여행사를 통해 진행하는 데 비해, 이번 답사는 광동지부 소속 회원들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숙박, 식당, 버스 등을 예약했고 가이드 역할까지 전담해 참가비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지부 회원들은 주말과 연차를 이용해 <아리랑>과 <김산평전> 그리고 중국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 서적을 펴들고 직접 김산과 혁명가들의 길을 따라가며 답사 코스를 개척했다.

당초 답사 참가인원을 20명으로 공지했으나 약 60명이 신청하여 최종적으로 34명으로 답사단을 꾸렸다. 답사단원들은 지역, 직업,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해 다양하게 구성했는데 특히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상윤 선생(1897~1927)의 손자인 김기봉 전 광복회 서울강북지회장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의 손녀인 김춘련 현 요녕민족사범고등전문대학 교수 등이 참여해 답사의 의의를 높였다.

그동안 연구소는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로 매년 여름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해왔는데 답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추가 답사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따라서 이번 광동지역 답사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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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보자!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일러스트 작가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작년 12월, 3년 만에 서울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친구이자 가족처럼 지내는 김영환 씨가 활동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 시내에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별로 없어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스마트폰 지도를 보여주며 향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에는 꽤 가파른 비탈길이 있습니다. 상쾌한 날씨여서 다음번엔 지하철로 천천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가고싶은 곳에 있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는 한글과 영어로 박물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Museum of Japanese Colonial History in Korea.
’ 왠지 꾸밈없는 이 이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이 역사에 대해 정부의 방침에 휘둘리듯 에둘러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역사임에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피해왔습니다. 동시에 100여 년 이상 전에 시작된 이 고통의 역사가 내가 살고 있는시대에 이렇게 교류와 배움의 공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현관문을 열자 1층 공간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가 특별전시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2층의 상설전시장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한국 학생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전시를 접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전시 설명은 대부분 한글로 쓰여 있지만, 일본어 가이드북이 있어 참조하면서 순서대로 전시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왜 조선을 침략했는가?”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 표제. 그 아래설명은 구미를 필두로 세계적인 식민지화와 노예제도 등의 움직임 속에서 일제에 의한 침략이라는 문맥으로 짧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침략의 역사를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 사이의만의 문제로 생각하여 그 역사를 접한 우리들 개인까지가 피해와 가해라는 범주로 이분화되어버리는 일이 많은데, 이 설명에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나누지 않고, 책임의 근본에 있는 구조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 자료와 유물은 내용으로도 양적으로도 충실합니다. 특히 조선 전역에 수없이 있었던 경찰서에 관한 사진과 문헌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신사(神社)의 설치도 그렇습니다.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폭주한 아시아 침략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창씨개명과 천황숭배 등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위해 비참하고 비인도적인 방법이 이용되었습니다. 최근에 주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인종차별, 토지약탈, 성차별 등의 폭력을 이용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문헌을 다소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을 떠올려보면, 일제의 지배로 인한 인간의 비극은 단지 우연처럼 ‘일어났다’가 아니라 필요한 폭력으로 자본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고 지배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의 분단을 명확히 확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표현한 사람들은 경찰의 과도한 단속을 받은 것이 자본과 국가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지배의 구조는 지금 사회에도 줄곧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본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자국이 내건 경제대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내셔널리즘적인 사상이 고양되고 외국인과 소수자가 된 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전시 후반에는 식민지시대에 목숨을 걸고 일본에 저항한 사람들과 최근의 다양한 운동에 관한 소책자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저항사(抵抗史)를 접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기억을 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내용을 조금 쓰고 싶습니다. 전시 가운데에 ‘한 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이란 작은 코너가 있습니다. 낡은 목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심문관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어 감옥의 심문실을 재현한 듯합니다. 몇 개의 단추를 누르면 심문내용을 재현하여 녹음한 음성이 흘러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3·1운동 당시 잡혀온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번역문이 비치되어있어 귀중한 체험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역시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에 가장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한국에서 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생과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박물관 자체는 평가하지만 심문 장면의 그 전시는 약간 지나치지(표현의 지나친 극화) 않은가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이해할 수 없어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전시가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사람들의 체험을 제3자가 전하고자 할 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조금 과장해서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심문 장면은 실제로 식민지 시대의 정부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연극의 퍼포먼스와 달리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떤 표현이 가장 좋은것일까요. 역사로부터 배운 것을 오늘의 운동에 살리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이러한 개인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자료와 구조적 폭력을 분석한 자료가 함께 있어 귀중한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에 관계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씨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출신. 1997년 홋카이도 슈마리나이(朱鞠內)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한 한일공동워크샵(현재 동아시아워크샵)에 참가했고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는 뉴욕에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화, 2020/01/21-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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