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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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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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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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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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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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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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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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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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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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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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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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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11월 9일 임종국 선생 30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회원들과 시민, 충남지역 학생들이 모여 임종국 선생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천안 신부공원 답사를 시작으로 천안공원묘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요산재에서 안내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를 거행했으며 저녁 6시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의 밤’ 행사를 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이번 추모행사는 민족문제연구소·임종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 충남교육청과 충남역사교사모임이 후원하였다. 본부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교육위원, 박광종, 이순우, 권시용, 조한성 선임연
구원, 손기순, 신다희, 국세현, 류감석, 김무성이 참여했고, 지부에서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박해룡 대전지부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을 비롯한 회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천안공원묘원에서의 추모식에서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전 회원이 참배하며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임종국 선생 유족 대표로 선생의 여동생 임경화 여사와 사위인 조원희 님이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모의 밤 행사에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홍성표 아산시의원이 참석했다. 또 충남역사답사에 참여한 충남지역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석해 임종국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 행사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가 중심이 된 밴드가 판소리 심청가와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새야새야파랑새야’
,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을 불러 추모의 뜻을 더했다.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금, 2019/11/2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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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최우현 서울북부지부 회원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9년여 시간을 천안에서 보냈다. 건강문제도 있었거니와 친일파연구와 집필에 전념할 공간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안이라는 고장과 선생의 인연이 깊은 이유다. 2016년에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흉상)도 천안 신부공원 광장에 들어섰다. 참고로 천안 신부공원에는 임종국 선생의 조형물과 더불어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6월 민주항쟁 30주년 표석’이 함께 자리해 있다. 민족, 민주, 평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80여 명에 이르는 시민, 자원봉사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선생의 영면지인 천안공원묘역(무학지구 철쭉 4-1)에 운집했다.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를 비롯해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외아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 등 각계, 지역의 인사들도 자리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현장에서는 임종국 선생의 육성이 담겨있는 인터뷰 녹음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녹음본은 1988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임종국 선생과 임헌영 소장(당시 문학평론가)의 대담을 담은 것이다. 해당 녹음본 속의 임종국 선생은 당시 폐기종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친일 청산이 왜 필요한 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이란 것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파고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놓은 이런 상태가 돼있거든요. ”
– CBS 라디오, 임종국 선생 인터뷰(1988년)

 

그런 한편,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는 재야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선생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실제로도 선생은 연구비가 없어 여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다음 일정은 요산재로 이어졌다. 요산재는 선생이 천안에서 기거한 동안 집필실이자 일터(밤농사), 잠자리이자 부엌으로 역할을 한 삶의 현장이다. 이러한 고로 요산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고상한 연구실이나 향기로운 서재와는 다른,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매일신보〉 10년 필사분 등을 연구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던 선생의 학열과 연구과정을 상상해보면 이곳 요산재의 공간적 의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임종국 선생 연보에 따르면, 선생이 요산재에 머무른 1980년~1989년 사이 발간된 선생의 연구 저작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한국문학의 민중사〉 등 9권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요산재는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당시의 대략적인 집 형태만 남아있으며, 현 거주민 또한 임종국 선생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이다. 즉, 사유지이므로 접근이나 답사는 어렵다.
다만 이날은 30주년 관계로 주최 측(민족문제연구소)과 거주자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밝힌다.
이어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추모식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김지철 충남 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등 공직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 표명이 있었지만 논점은 모두 비슷했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떠난 지 30년, 그 이후 우리 주변의 친일 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어찌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자신의 저서 〈친일문학론〉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선생은 우민화, 민족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교육이 자신을 역사와 민족에 무지한 ‘천치’로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몰입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

 

‘친일파’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던 당시(1965년)의 풍토는 선생의 연구를 외면했고 선생은 가난했다. 하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붓끝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건 없건, 관료이건 문필, 예술가이건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육친(아버지 임문호)과 스승(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가리지 않고 고발했다. 선생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겠지만 그것이 친일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의 공정이고 입장이었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육십 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라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임종국 어록에서) 그 말대로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우리 후대 사람은 선생에게 모종의 빚을 지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지 않다.

금, 2019/11/2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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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노관우 특별상 수상자 노동은 교수의 아들

먼저 이런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아들인 저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아버지의 제자 분들의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임종국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발자취와 아버지께서 평생 근현대음악을 연구하시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알려 오시고자 했던 걸음걸음이 그 모양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셨다고 직감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셨음을 느낍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작금의 국민적 분노 속에서 그동안은 없었던 특별상을 받게 되니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임종국상을 수상하신
다고 하니 많은 분들에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특별한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쌀쌀했던 날들을 촛불집회로 뜨겁게 녹여대던 3년 전 1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뉴스를 보시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시면서 제게 ‘촛불집회에는 가봤느냐’며 당신도 몸만 괜찮으면 가보고 싶다고 아쉬워하시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뜻깊은 상을 직접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음악현단계> <민족음악론> 등을 저술하시는 한편으로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민족음악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노동은의 음악상자> 시리즈, <한국근대음악사> <한국음악론> 등을 통해 애국가문제, 친일음악, 뽕짝 등 우리 근대음악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알리시는데 늘 앞장서셨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오랜 기간 작업하셨던 <항일음악 330곡집>의 마지막 교정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셨고 재작년에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발간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각계각층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그 삶과 연구의 흔적들이 나침반이 되어 여전히 많은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계십니다.
끝으로 아버지의 소감을 대신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가늠해볼만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제가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1996년에 아버지께서 단재학술상을 받으셨습니다. 시상식 날 온 가족들을 데리고 가느라 저도 어린 나이에 멋지게 옷을 입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그 이후에도 여러 상을 타셨지만 늘 가족들에게 단재학술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평생 학자로서 그 상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시며 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임종국상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 어떤 상보다도 기쁘고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재학술상이 아버지의 평생 연구에 영감을 주었다면 임종국상이 아버지의 평생의 연구를 인정받고 보상받는 기분이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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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KBS 밀정 제작팀 언론상 수상자

면구스러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밀정> 2부작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잇달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5분짜리 영상조차도 ‘길어서’ 시청하기 힘들다는 초고속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열정을 쏟아 만든 진지한 다큐멘
터리는 그 분량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재확인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임종국상>은 여타 평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묵직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계속 되뇌게 됩니다.
‘과공비례’가 되지 않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을 받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상은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보여준 성취에 대한 축하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도 함께 포함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에 꽂힌 <친일문학론>을 다시 꺼내보다가 임종국 선생님이 (지난해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과 각별한 교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장은, 다른 거장을 알아보는 안목을 청년시절부터 갖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업적을 어떻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냐마는, 어쩌면 이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탐구하는 것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밀정 추적도 100주년이라는 축제기간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을 가감 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엄정함이란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어둠을 자꾸 이야기해야만 밝은 부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조언 말씀이 저희들 마음속 출발점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댓글을 읽어보면 시청자들도 이미 그렇게 총체적으로 방송의 의미를 확장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KBS는,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파고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급변해버린 언론환경이 그것입니다. 그날의 뉴스가 그날 다 소비되지 못한 채 휘발되고, 장기간 공들여 기획 취재한 보도물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며, 유명인이나 연예인의 ‘몰락의 서사’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탐사보도 역시 새로운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번 <밀정> 2부작은, 그런 환경에 놓인 저희들에게 어떤 기본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저널리즘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문제의식과 끈질긴 탐구를 배제한 채로는 그 어떤 탐사보도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 기본 요소 하나하나를 벽돌 쌓듯 충실히 이행할 때 시청자들은 많든 적든 분명한 호응을 보여준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밀정>
2부작은 장기간의 취재와 투입된 예산·인력의 스케일 측면에서 볼 때, 공영방송 KBS만이 수행할 수 있는 탐사보도였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KBS는 이런 걸 잘해야 하고, 이런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난립 속에 KBS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게 저희들 생각입니다.
내년 2020년이 되면, 아마도 100주년인 올해만큼 역사 돌아보기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단지 역사적 소재를 많이 다루고 안 다루고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동체가 응당 공유해야 할 건강한 역사의식을 현재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임종국상>이 저희들에게 주문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 강조점이 찍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책무와 주문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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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정영환 학술상 수상자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
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은 이런 절실함을 갖는 재일동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쓸 것이 제 바
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염원입니다. 제가 그려낸 역사를 ‘동포’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글, 즉 일본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사나 ‘재일조선인문제’의 역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고뇌의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남한에 입국한 적도 없었고 제가 염두에 둔 ‘동포’는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운동에 투신하여 각지에서 ‘일꾼’으로 사업하던 ‘동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바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제가 상상하는 ‘동포’ 개념은 일본 열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제 책은 임경화 선생님의 노고 덕분에 번역이 되어 한국의 ‘동포’를 독자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연구와 우리 민족사의 정립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수여받을 영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적(朝鮮籍)’이라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혹은 ‘간첩활동을 할 개연성이 높다’ 등
의 이유로 입국이 불허되는 처치에 있었던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한다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항상 싸우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런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가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겨우 소장 연구자의 입구에 선 저의 저작에 주목해주시고 더 많은 ‘동포’와 만날 기회를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선생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 후기’에도 썼듯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두 명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에 큰 감격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서경식 선생님의 <분단을 산다>(1997년)입니다.
‘<쟈이니치>를 넘어서’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쟈이니치’론,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내의 민족적 소수자로만 보는 탈민족적인 담
론을 비판하면서도 구태의연하고 본질주의적인 민족관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민족관’을 위한 검토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이란 존재를 협애한 일본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낳은 제3세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시각에 매혹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책과의 만남 없이는 이번 책의 ‘조선근현대사로서의 재일조선인사’란 기본시각도 식민주의와 분단이 낳은 폭력과 이산(離散)이란 주제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권은 박경식 선생님의 <해방후 재일조선인운동사>(1989년)입니다. 법학부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었던 제가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묘사한 재일조선인들의 운동사에 흥미가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에 일본 지바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족교육은 저에게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
었고 동포사회의 ‘일군’으로 사업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류는 일본의 치안당국이 묘사하는 ‘운동’상과 전혀 다른 재일조선인운동의 역동성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단 민족교육을 통해 배운 재일조선인사는 한편에서는 교과서적인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경식 선생님의 책에는 새조선 건설노선이나 참정권을 포함한 일본에서의 권리 획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이런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 아닌 고민과 논쟁, 갈등의 역사는 신선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고 애써온 분투가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재야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서 자료를 찾아내시어 조선인강제연행이나 간토대학살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굴하였습니다.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이 한일협정체결을 앞둔 1965년에 간행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연구는 그저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조선관을 시정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고 또한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할 길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한 분투의 기록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에 수록한 제 연구 또한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연구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가혹한 분단과 민족차별이 횡행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민족사 정립’을 위해 외롭게 발언과 연구를 이어오신 연구자들에게 감사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원저는 2013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일본어판 출판과 한국어판의 간행은 서문과 후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던 것도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 책을 우리말로 옮겨주시고 많은 ‘동포’들과 만날 기회를 주신 임경화 선생님과 제 책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해방5년사’를 이어 조선전쟁(한국전쟁)기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성과로 이번 시상을 통해 저에게 주신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법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의 길을 선택한 무모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제 수상소감을 맺겠습니다.

금, 2019/11/2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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